아브락사스 20
아브락사스 인간의 몸에 수탉의 머리를 갖고, 두 개의 다리는 뱀으로 이루어진 그노시스파의 신 20 십의 두 배가 되는 수 인터뷰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개인이나 집단을 만나 정보를 수집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 원 모어 하나 더(의) 타임 과거로부터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는 무한한 것 — 인터뷰 원 모어 타임
아브락사스
물질과 비물질
아브락사스는 매 호, 주제를 정하여 작품을 모집하고,
물질과 비물질은 디자인 스튜디오이자, 출판사입니다.
이를 한 권의 책으로 엮습니다.
우리는 물질세계에서의 삶을 통해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비물질을 생산하고, 이를 물질로 환원합니다.
abraxaszine.com waterain.kr
인터뷰 원 모어 타임
일러두기
이 책의 표지와 작품 표지에는 단어의 뜻과 이미지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단어의 뜻은 네이버 어학사전(dic.naver.com)의 정의를, 이미지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대상을 가공한 것입니다. 둘 모두, 임의로 선정된 것으로,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합니다.
아브락사스 20 인터뷰 원 모어 타임
물질과 비물질
차례 성형수술 — 항아리 — 6 열아홉, 스물 — 황예지 — 14 랑데부, 아폴로, 바이어 — mari kim — 28 당신, 겨울에도 봄입니다 — 이송 — 46 이름 없는 날의 맥주 — 박은지 — 60 밤 — 다하 — 68 Troisième Humanité — 스테레오 유닛 — 76 긴 — 부지운 — 84 태정 — 문모운 — 98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입니다 — 이주연 — 128 사물과 각 — 진달래 & 박우혁 — 138 사랑 받고 싶었다 — Jooen.yona.park — 148 쇼트쇼트소설 - 순이, 보드카 그리고 키스 — 쳬쳬 — 166 관(官) — 장은혜 — 174 김종소리에게 — 김한주 — 182 텔레비전을 보는 방법 — -_xv — 192 오륜행실도체에서 시작한 활자 디자인 — 채희준 — 216 나에게 썼던 편지 — 이재하 — 226 그녀의 결혼과 나의 낱말들 — 김종소리 — 236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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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형수술 상해 기형으로 인한 변형이나, 흉한 신체의 외과적으로 회복시키는
— 항아리
또는 선천적 인체의 미관상 보기 부분을 교정, 수술
공기가 첨예할 때, 오염된 서울의 빗줄기 그 오명을 벗기 위해 영하의 온도를 입고 내린다 이렇게.
민들레 홀씨를 흉내내듯 사뿐히 불투명해진 몸으로 여기를 덧칠한다.
선명해진 수풀과 비린내만으로 존재 증명을 하던 네가 사물을 백색의 세계로 몰아넣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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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가슴 여기가 다 환해지는 겨울 비는 싫은데 눈은 좋다.
눈이 좋다.
눈이 즐겁구나.
성형수술
— 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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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
제 미래 프로필이, ‘대학교 자퇴를 희망 중. 한국 판타지 소설 <구멍>이 100만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화가인 이십 대 남자.’ 였으면 좋겠습니다. gktkdals1004@hanmail.net facebook.com/geomeun.ibs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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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성형수술을 통해 탈바꿈을 하는 것을, 비가 겨울을 만나 아름다운 눈으로 변신하는 것으로 비유했습니다. 혹은 그 반대로. 비는 싫은데 눈이 좋다는 건 못생긴 사람은 싫지만 성형하니 보기 좋다는 말입니다. 어디에서 영감을 받으셨나요? 어제와 오늘 한껏 내린, 지금 이 순간에도 바깥에 쌓여있는 눈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작품을 아브락사스에 보내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과연 나쁘기만 한 일인가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그것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평가가 차별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시나요? 서울에 있는 별볼일 없는 대학에 다니며 별볼일 있는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아주 가끔 이렇게 시도 씁니다. 무엇을 하실 때 즐거우신가요? 별볼일 있는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릴 때 즐겁습니다. (잘 때와 먹을 때는 당연하고요.)
성형수술
— 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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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뇨. ‘질 좋은’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특별합니다. 작품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작품이 저에게 갖는 의미를 물어보시는 거라고 생각할 때) 마약입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해주세요. 나는 사랑이 뭔지 모르겠다.
맛집을 추천해주세요. 혜화에 있는 ‘돌쇠네 아저씨.’ 화덕피자 먹고 싶다. 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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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형수술
— 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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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하나를 더한 수 두 배가 되는
— 황예지
열여덟에 스물 열의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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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스물
— 황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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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스물
— 황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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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예지 94년생 청주대학교 광고홍보학과 1학년 재학 중 프리랜서 디자이너 skzxc330@naver.com skzxc330.blog.me 010-2923-5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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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저는 편집디자인을 하고 있지만 이건 셀프 포트레이트에요. 꼭 해보고 싶었어요. 어디에서 영감을 받으셨나요? 그냥 막연하게 10대가 가기 전에 셀프 포트레이트를 찍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20대가 되어 버렸지만요. 저는 제가 학생이고 어린 게 좋았는데 그 시간이 흐르는 게 아까웠어요. 그래서 제 인생에서 제일 어리고 아름다울 때를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어요. 나중에 늙어서 지금을 추억할 수 있게요. 이건 무조건 10대일 때 촬영해야 저에게 의미가 있는 작품이었어요. 그런데 여건이 되지 않아서 결국 추진되지는 못했어요. 촬영은 했지만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못했거든요. 고3이라 바쁘기도 했고.. 그래서 너무 속상해하고 있었는데 친구가 만으로는 아직 10대가 아니냐고 해줘서 다시 해보기로 했어요. 주제는 열아홉, 스물이에요. 그 사이의 어중간함도 괜찮은 것 같아요. 이것 때문에 1년 동안 속상했는데 1년의 시간이 완성도를 가져다준 것 같아서 만족스러워요.
열아홉, 스물
— 황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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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아브락사스에 보내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포트레이트는 찍었는데 혼자 찍고 끝내기엔 아쉬웠어요. 처음 계획은 개인 화보집을 만들 생각이었는데 그 정도의 분량이 나오지도 못했고요. 일부이긴 하지만 이왕 찍은 거 저 혼자 갖고 있기보다는 여러 명이 봐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보내게 되었어요. 그리고 셀프 포트레이트는 누구나 한 번쯤 찍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방식으로 든지요. 무슨 일을 하시나요? 저는 현재 광고 홍보학을 전공하고 있고 동시에 프리랜서 디자이너 일을 하고 있어요 얼마 전엔 합정에서 열린 할로윈 파티 디자인 디렉팅을 맡았고 평소엔 포스터 작업과 웨딩 스타일링에 쓰이는 라벨디자인 작업을 하기도 해요. 파티플래너인 친구 덕을 많이 보고 있어요. 이 자리를 빌어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연필심 조각도 잠깐 했는데 저는 편집 디자인을 주로 하거든요. 그런데 연필심 조각가로 알려져 있는 건 조금 속상해요. 그 외에는 핸드 크래프트로 개인적인 아트웍 작업하는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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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하실 때 즐거우신가요? 작업에 대한 계획을 짜고 그 계획을 실행하기까지의 모든 과정들이 다 즐거워요. 그 작업을 하는 와중에도 이게 끝나면 또 다른 걸 해야지 하고 계획을 세우는 그 순간이 너무 행복해요. 이러니 잠자는 시간은 정말 아까울 수밖에 없어요. 졸려서 자는 게 아니라 작업하다가 도저히 체력적으로 버틸 수 없을 때 그때 잠을 자요. 식사도 그런 식으로 하고.. 그렇게 누우면 빨리 자고 일어나서 하던 일을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에 설레어서 잠이 안 와요. 창작활동은 그 자체로도 너무 흥분되고 설레는 것 같아요. 그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조차 행복하고 감사해요.
열아홉, 스물
— 황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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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일단 모든 창작 활동을 하는 사람은 다 멋진 것 같아요. 작품을 만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만의 뚜렷한 신념과 목표를 가지고 있잖아요.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고 끊임없이 고뇌하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좋아요. 저는 마음이 나태해지거나 슬럼프가 오면 제가 좋아하는 뮤지션들의 인터뷰를 읽어요. 그들은 제 창작 활동의 엄청난 자극제에요. 전에 긱스의 루이 씨가 인터뷰에서 “절대 게으르면 안 돼요, 저는 정말로 게으르고 싶지 않아요”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이 너무 와 닿아서 한동안 제 핸드폰 바탕화면이기까지 했어요. 매일 보면서 되뇌고 싶어서요. 그리고 윤종신씨의 월간 윤종신 프로젝트는 정말 존경스러워요. 끊임없이 자신의 작업물을 보여주고 증명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웬만한 자신감과 배짱 없이는 할 수 없는 프로젝트 같아요. 이런 공개적인 프로젝트를 진행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진짜 멋지신 것 같아요. 창작을 하고 작품을 만드는 사람은 절대로 게으르면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는 작품 활동을 하는 사람이 특별하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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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끊임없이 만들어 내야 하는 것? 그냥 뭔가 계속해야 할 것 같아요. 쉬지 않고. 멈추면 흐름을 놓쳐버릴까 봐 두려워요. 계속해서 움직이지 않으면 채워지지 못한 시간이 자학으로 돌아오는데 거기서 오는 괴로움이 너무 커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해주세요. 남들은 저보고 열심히 살고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 제가 이룬 건 한 개도 없거든요. 워낙 자기애도 크고 욕심도 많아서 남들보다 빨리 깨고 빨리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계획했던 것들, 그려왔던 것들 아직 하나도 못했어요. 저는 나 자신에게 내 삶이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한 번밖에 못 사는데 진짜 알차게 살다가 가고 싶어요 그렇게 열심히만 살아도 죽는 날엔 너무 아쉬울 것 같아요. 그리고 적어도 제 주변 사람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으면 좋겠어요. 전 항상 이렇게 생각해요. 우리가 자주 듣는 음악, 좋아하는 브랜드, 매일 사용하는 물건들까지도 다 그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결과물이잖아요. 모두가 그런 결과물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열아홉, 스물
— 황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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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집을 추천해주세요. 요즘 핫하게 뜨고 있는 뜨겁개핫도그요! 미국식 수제 핫도그를 판매하는 곳이에요. 가게 인테리어도 멋지고 사장님도 멋진데 핫도그 맛은 두말할 필요도 없어요. 먹어보면 알아요. 잠실여고 후문에 있는 송파점이 본점이고 1년 사이에 분점이 7개나 생긴 진짜 맛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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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스물
— 황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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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데부, 특정한 정해 하는 밀회 신화에 나오는 나라의 물품을 장사, 또는 그런
— mari kim
시각과 장소를 회 아폴로, 로마 신 바이어 다른 사들여 오는 런 상인
(남자의 방) 알파 - 베타 - 감마 - 델타 - 엡실론 - 제타 - 에타 - 세타 - 이오타 카파 - 람다 - 뮤 - 뉴 - 시 - 오미크론 - 파이 - 로 - 시그마 - 타우 웝실론 - 화이 - 카이 - 프시이 - 오메가 남자는 되뇌인다. 한차례의 꿈 끝나고, 눈을 뜬 공간에서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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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항상 ‘남겨졌다’고 쓰는거야?” “남겨진 게 맞으니까.” “그냥 ‘혼자있다’거나 ‘방에있다’, ‘집에 혼자 있다’정도면 충분하잖아.” “아니, 그건 달라. 다른거야.” “내가 죄책감이라도 느껴야해?” “아니. 그런 건 아냐.” 여자는 이런 대화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또한 그가 집에 있을 때면 ‘혼자 남겨졌다’는 표현을 쓰는 것도, 씻지도 않고 자신을 마주하는 얼굴과 머리, 몸도, 멍한 눈빛도
잠들기 전 남자는 바다나 우주 혹은 숲을 떠올린다. 보름째 악몽이 지속되고 있다. 어떤 공간에서 쫓기다 깨어나면 꿈에서 깨어난 자신이 꿈속에 있다. 괴로워 땀을 흘리고, 어떤 날엔 비명을 지르고, 어떤 날엔 눈가에 눈물이 고여 머물거나, 흐른다. 남자는 꿈속의 자신을 들여다 보는 또 다른(같은) 자신을 자각한다. 사실은 꿈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남자는 이럴바에는 우주로 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우주에 남겨지는 쪽이 덜 괴로울 것이다. 그냥 그렇게 생각 해 본다. 온 사방이 번쩍이는 소음의 방에서 가만히 앉아있는 자신이 하염없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꿈도 꾸었다. 끊임없이 침잠하다 심장이 뛰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숨,이,가,쁜,지,경,이,되어 멎으려, “이제 그만 멈추고 싶어!” 소리를 지르면 소음의 잔상이 남은 상태로 깨어난 자신을 꿈속에서 마주한다. 실재하는 그는 어쩌면 보름동안 깨어난적이 없는
랑데부, 아폴로, 바이어
— mari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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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다. 먹지도, 씻지도, 이야기하지도, 누군가를 만나지도 않고 끝나지 않는 꿈을 계속 꾸고 있는 것 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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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길 좀 봐, 아름다워.” “응, 정말 그러네.” “동의한다는 느낌이 전-혀 아닌데?” “잠깐은 그렇다고 생각했어.”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네.” “아니, 솔직하지 않았어.” 여자는 남자의 많은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가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여자는 듣지 못한 것을 알 수는 없다. 그렇지만 여자는 자기자신 외의 대부분을 모르고 있다.
남자는 책꽃이에서 별자리에 관련된 책을 꺼내든다. 남자는 오래 별자리나 우주와 같은 것에 관심을 두었지만, 깊게 혹은 많이 알지는 못한다. 침대위에 누운 남자는 책을 펴고 손을 더듬으며 자신의 별자리를 찾는다. ‘북반구’ ‘봄 철 저녁’ ‘위도 +90 -60 사이’ ‘12궁중 가장 희미한 별들로 구성됨’ ‘동아시아에서는 ‘귀수’라 하여 ‘귀신’을 의미함’ ‘3.5 - 4등급 이하의 별들로 구성’ “감마와 델타사이.” 남자는 되뇌인다. “감마와 델타 사이.” 알파와 베타가 없는 삶을 살고있다. 그의 꿈이나 삶을 어떤
랑데부, 아폴로, 바이어
— mari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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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것들이 지배하고 있는 이유를 별자리와 연관지어 생각해 본다면 너무 억지 일까? 새벽 2시 17분, 남자는 오래 쌓인 휴대전화 메세지들의 숫자를 보며 중압감을 느낀다. ‘이런 기분이라면 오늘도 나쁜 꿈이겠군.’ 남자는 스스로 운명을 악몽쪽에 끌어놓는다. 예견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제는 구해지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휴대전화를 내려놓음과 동시에 여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발신자를 확인한 후 핸드폰을 뒤집어두고 남자는 이불을 뒤집어쓴다. 지금 장면이 꿈과 별 다를것도 없지. 생각한다. 모든것들이 뒤죽박죽이 되었다고 느끼지만 또한 모든 것이 무섭도록 질서정연하다. 꿈을 꾸던 남자는 다시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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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슨 말 좀 해봐.” “...” “지난번엔 그냥 넘어갔어도 이번에는 아니야. 어제는 또 왜 그랬는데?” “미안해.” “자꾸 이런식이면 나도 진짜 힘들어, 같이 가기로 약속 했었잖아.” “응, 그랬지. 미안해. 깜박했어.” “아 됐어.” 여자는 이 모든 반복이 지겹다고 느낀다. 남자에게 마음을 쉽게 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혼자 남겨진 쪽’은 오히려 자신이 아닌가싶어 분한 마음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남자를 여자는 오랜 잠에 빠진 남자를 (남자의 방)
남자가 침대에 놓인 별자리 책을 다시 집어들고 유심히 살핀다. 여자의 별자리에는 알파별이 존재한다. 꿈에서 눈이 아프고 어지러울 정도로 번쩍였던 것이 여자의 알파별일 것이라고 남자는 생각한다. 발을 끌며 움직여 방의 불을 끄고 침대위에 앉은 남자가 팔을 흔들어 본다. 빛의 잔상때문에 팔이 보이지 않는다. 남자는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음’에 겹치고야 만다. 오메가가 된다.
랑데부, 아폴로, 바이어
— mari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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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것이 되어 남자는 꿈 속으로 자신을 찾아 나선다. 꿈이 더이상 괴롭지 않다고 생각하고 싶다. 휴식, 재충전, 회복과 같은 단어를 잠이나 꿈이라는 단어와 연결지을 수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표정으로 다시 꿈을 표류한다. 이불속에 불규칙적으로 번지는 남자의 한숨 소리. 남자는 여자의 웃는 얼굴을 잠깐 떠올린다. 여자의 별자리에는 알파별이 있는 것이 틀림이 없다. 남자는 웃어도 어두웠는데. 여자는 심지어 웃지 않아도 밝다. 차라리 불면일적이 나았다. 꿈을 꾸면서 불면에 대해 생각한다. 어제 꿈에서는 어떤 그림자가 남자의 소중한 것들을 모두 가져가려 했는데, 남자는 옷장속에 숨어 그저 괴로운 마음과 고함을, 울부짖음을 겨우 참아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기척을 알아차린 그림자가 옷장을 들어 밖으로 던졌고 그는 끊임없이 떨어졌다. 떨어짐이 지속되어 차라리 공중에 떠있는 상태라고 말하고 싶어질 만큼의 시간이 지났다. 옷장 문을 열어보려 끙끙거리다 화가난 남자는 옷장을 세게 발로 찼고 그 순간 밖으로 튕겨져 나와 다시 혼자 떨어지기 시작했다. 고함을 지르며 어딘가로 내려가던 남자는 꿈에서 깨어나 여전히 꿈에 있었다. 악몽에서 깨어난 자신을 바라보는 꿈이 영원처럼 지속되고 있었다. 영원은 실재하지 않는다.
남자는 지금 깨어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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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 “...” “...” (둘이 있는 공간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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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여자는 잠든 남자를 지켜보고 있다. 침대맡에 놓인 별자리 책을 집어들어 몇 장 넘겨보고는 놓여있던 자리에 둔다. 남자의 휴대전화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여자, 핸드폰에 쌓인 메세지와 부재중 전화 목록의 숫자들을 보고 놀란듯한 표정을 짓는다. 배경화면에는 과거에 남자가 이야기해준 닐 암스트롱의 사진이 떠 있다. 전원을 꺼 침대위에 두고 여자는 방문을 닫는다. “가지마”하고 남자는 외친다. 여전히 꿈 속이다. 만얀 신이 있다면 그의 별자리는 알파별로만 구성되었을까? 그렇다면 빛의 그림자가 남자를 내보이게 할 것이다. 준비되지 않은 남자를 드러나게 할 것이다. 꿈속에서 처럼 무력한 존재가 아닌, 도망치거나 숨거나 쫓기거나 떨어지거나 부유하거나 낮아지거나 최악의 경우 죽음을 당하는, 그러고도 깨어나는 존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 온전히 깨어난 적이 없지만. 시간을 알 필요는 없지만, 오랜 시간을 남자는 어두운 배경속에 있다. 혼자 길을 걷고, 혼자 달리고, 혼자 울부짓고, 도망치고, 죽기직전에, 혹은 죽어서 혼자 깨어난다. 자꾸 ‘남겨졌다’는 기분이 든다. 누군가 망원경을 들고 자신을 찾아 주었으면 좋겠다. “어쩌면 북반구에는 나홀로 외롭게 떠 있는 것이 아닐까?” 얇은 옷가지를 입고 추운 날씨에, 꿈 속에서 떨며 남자는 생각했다. 예전처럼 바람이 살랑 부는 숲을 기분좋게 거니는 꿈이나,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혹은 여자와 즐거운 사건을 벌이는 그런 꿈들을 꾸고 싶다. “가지마”하고 다시 외치고 다음 꿈의 남자는 우주에 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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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빛으로 빛나고 더이상 도망치거나 달리지 않아도 좋은 꿈에 닿았다. 빛을 위한 무한한 어둠이 거기에 있다. 끊임없는 유영. 남자는 닐 암스트롱을 떠올리고, 그가 실제로 달에 착륙을 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은 다음 꿈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남자는 먼 곳에서 보이는 작은 반짝임들에 다가가려 몸을 열심히 움직여 본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남자의 유영이 멈추고, 남자는 우주에 고정된 자리를 갖는다. 움직이지 않는, 우주의 모든 존재가 한 번도 겪지 못한 상태가 되어, 남자의 얼굴에 다시 공포가 맺힌다. 눈시울이 한껏 뜨거워지며 남자는 점점 투명해진다. 자신의 형체가 사라짐을 느낀다. 눈물방울이 흩날리는 장면을 보며 더 세차게 울어본다. 여기에 있다. 여기에 있다는 생각만이 남았다. 여기에 있다는 생각으로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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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다음 꿈에서 만나.” “다음 꿈으로 가고 싶지도 않고, 어떻게 가는지도 몰라.” “네 곁에 알파로 내가 지날거야. 아직 남아있는 형체의 테두리가 그림자를 만들거고, 너는 거기서 빠져나오기만 하면 돼.” “어떻게 해야 빠져 나갈 수 있는데?” “그건 나도 몰라.” 여자는 자기자신을 제외한 대부분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남자의 꿈에 자신이 나왔다는 것 또한 모르고 있다. 어쩌면 여자또한 꿈 속에 존재하는 인물일지도 모른다.
남자는 빠져 나가기 위해 애를 쓴다. 내겐 왜 형체의 테두리라는 것이 남았을까, 온전히 어둡거나, 투명해지지 못했을까, 처음부터 밝을 수는 없는 것이었나, 꿈은 언제까지 지속 될 예정인가, 다음번엔 정말로 깨어 날 것인가, 여자, 여자는 누구인가. 모든것이 반복되고 있었다. 모습을 바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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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방) 알파 - 베타 - 감마 - 델타 - 엡실론 - 제타 - 에타 - 세타 - 이오타 카파 - 람다 - 뮤 - 뉴 - 시 - 오미크론 - 파이 - 로 - 시그마 - 타우 웝실론 - 화이 - 카이 - 프시이 - 오메가 남자는 되뇌인다. “여길 좀 봐, 아름다워.”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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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 kim uradrugtome@gmail.com twitter @nowwe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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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하필 난해한 것을 써서 저조차 설명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냥 굴레나, 치환, 반복에 대한. 갑갑한 이야기 정도가 되겠네요. 어디에서 영감을 받으셨나요? 몇 달전 궁금해서 찾아 본 별자리 보는법을 메모해 둔 일기장. 작품을 아브락사스에 보내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언제나 누군가 곰곰 읽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보냅니다. 무슨 일을 하시나요? 돈을 버는 일을 하나 하고, 부던히 쓰려 노력하는 일도 합니다. 무엇을 하실 때 즐거우신가요? 타인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작용들로 즐거워 합니다. 즐거운만큼 피곤해지기도 하지만요.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특별한 사람들이 있기도 하지. 정도로 생각합니다. 작품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작가보다 자유로운 클론.
랑데부, 아폴로, 바이어
— mari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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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해주세요. 인터뷰에는 정말이지 소질이 없는 인간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맛집을 추천해주세요. 홍대 상상마당 사거리 인근(닥터마틴 매장에서 상수역 쪽으로 가는 왼쪽 첫 번째 골목) 어머니와 고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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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데부, 아폴로, 바이어
— mari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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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듣는 이를 이인칭 대명사 해의 네 철 봄입니다 한 가운데 첫째 철
— 이송
를 가리키는 겨울에도 한 가운데 넷째 철 해의 네 철 철
늦은 오후부터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막상 걱정들의 속은 비어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내일을 위해 자야했다. 천장을 보고 손을 배꼽 위에 곱게 모은 채 눈을 감았고 한 시간, 두 시간, 시간은 흘렀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광고주, 그 새끼에게 전화를 해야 하고 그 새끼는 당연한 듯 한소리를 할 것이고 나는 그의 못난 얼굴을 상상해야하는데……, 자꾸 푸근한 아저씨가 마음씨 좋게 웃고 있는 형상이 현실과 꿈 사이에서 아른거렸다. 몇 시간동안 누워만 있었으니 허리가 아프다거나 눈을 뜨고 있을 때보다 피곤해질 법도 한데 오히려 간헐적으로 몸이 뜨거워지면서 모든 것이 왕성하게 움직여댔다. 심장이 뛰었다. 심장이 뛰고 있다고 되뇌자 더욱 빨리 뛰었다. 몸속의 피가 되어 온몸 구석구석을 돌았다. 발가락 사이를 기분 좋게 간질였다. 허벅지를 타고 사타구니를 뱅그르르 한 바퀴 돌아 가슴을 쓸었다. 파르스름한 목선을 지나 귓불에 도달했을 즈음 아랫도리가 묵직해졌다. 여전히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어쨌거나 온몸을 땀으로 적시며 길고 긴 오르가즘 같은 밤이 지나갔다. 그것은 설렘과 긴장의 공존이었다. 노폐물이 응축된 땀방울이었고 온갖 걱정의 식은땀이었다. 사실은 걱정이 반 이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때보다 일찍 일어나 30분이 넘는 시간동안 정성껏 면도를 하고 평소에 하지 않던 아침 샤워를 했다. 넥타이를 다섯 번이나 고쳐 매곤 몇 개 되지도 않는 시계를 바꿔가며 차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을 나선 시간은 평소보다 20분이나 일렀다. 어제와 이상하리만치 다를 게 없었다. 심지어 연착된 지하철 덕에 매일 아침 마주치던 사람과 함께 오른 보통의 2호선. 서너 명에게 발을 밟혔고 그 중엔 하이힐도 있었다. 우지끈, 엄지발가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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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얼한데도 얼굴모를 여자가 안쓰러웠다. 하이힐에 출근열차라니. 잔뜩 휘어있을 그녀의 발목에 심심한 위로를. 오늘따라 피부에 닿는 바지안감이 쪽쪽 빨며 자던 배냇담요의 감촉 같았다. 배냇담요가 뭐지? 신조어가 탄생되는 순간! 허무맹랑한 생각에 실없이 피식피식, 그렇게 웃으며 바지를 털어냈다. 지하철 안에서 고인 먼지가 햇빛 속에 흩날렸다. 첫눈 같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따위의 외국식 인사를 건네자 차 대리는 의아한 듯 입을 벌린 채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8시 40분. 꼭 출근 시간 전에 전화해서는 원래 출근이 좀 늦으신가 봐요, 하는 광고주 그 새끼의 전화를 오늘은 따르릉 소리가 반복되기도 전에 받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의 새끼. “오늘은 일찍 출근하셨네요.”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오늘 하루도 잘 부탁한다는 류의 소리였다. 그리고 윗선에서 한 얘기를 전했으나 그조차 별 소린 아니었다. “크리에이티브한 그런 거 있잖아요. 타사에서 하는 그런 진부한 색, 진부한 카피, 그런 거 말고 젊은 감성을 담을 수 있는 크리에이티브한 그런 거. 그런 거를 다들 바라시긴 하죠. 근데 워낙 노인네들이라 이해들을 못하세요. 아무튼 잘 부탁드립니다.” 뭐 어쩌라고. 매일, 아침인사 차원이라는 그 전화는 정신건강에 정말 좋지 않았지만 눈을 감고 어젯밤 어렴풋이 보았던 푸근한 인상의 아저씨를 떠올렸다. 음, 그래, 너란 새끼도 불쌍한 새끼. 오늘은 어떤 감정도 컨트롤할 수 있을 것 같은, 아주 드문 날이었다. 9시. 서류 몇 가지를 챙겨 회의실에 들어갔다. 한숨도 자지 못한 것치곤 내 상태가 제일 괜찮아보였다. 가장 늦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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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고 가장 일찍 출근하는 차 대리는 면도를 제대로 하지 못했는지 코밑이 거뭇거뭇했다. 자아- 하며 말문을 열면서도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는 듯했다. 김 과장은 다리를 꼬고 앉아 얘기를 듣는 둥 마는 둥, 간혹 툭 튀어나온 턱을 두어 번 쓸었다. 어젯밤의 내 수많은 걱정들처럼 속이 텅 비어있는 눈에선 아무 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회식 땐 누구보다 빛나는 사람들이 왜 아침만 되면 파김치가 되어오는지, 안쓰러웠다. 오늘은 나를 제외하곤 누구든, 모두, 안쓰럽다. 생겨라, 생겨라, 생겨라, 한다고 해서 생기는 창의력은 없다. 스티브 잡스도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내가 스티브 잡스보다 나은 사람이었다. 모든 것이 컨트롤되고 있다. 9시 20분. 내 머릿속에는 굉장한 것들이 마구 스쳐갔다. 그 중 하나를 붙잡아 사람들을 설득했다. 기특하다며 김 과장의 칭찬이 이어졌지만 나는 안다. 어차피 모든 건 김 과장의 뜻대로 흘러갈 것이다. “아직 배울 게 많으니 조금만 기다려. 자네는 크게 될 거야.” 김 과장에게 배울 건 로비와 접대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입을 귀에 걸고 네엡- 대답했다. 탕비실에서 녹차라떼 한 잔을 뽑아들었다. 아직도 아침이라는 것을 통탄하며 햇볕을 쬐었다. 세포 하나하나가 광합성을 하며 새로운 산소를 뿜어내고 있었다. 페르몬일까. 유난히 많은 여직원들이 말을 걸어왔다. 유쾌하고 통쾌하게 그 말들을 받아쳐주고 자리로 돌아와 오늘 안에 해야 할 일들을 정리했다. 완벽할 것만 같은 하루이니 미룰 수 있는 모든 일들을 내일로 미루기로 했다. 오늘만큼은 오후 6시가 되면 눈치 보지 말고 먼저 가겠습니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인사를 하고 사라져야지. 가장 싫은 두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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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끝났다. 광고주와의 통화 그리고 회의. 그리고 10시 반. 나는 엑셀 파일을 열고 이벤트에 응모한 사람들의 명단을 정리했다. 단순 노동이었다. 이름과 댓글, 페이스북 주소를 엑셀 파일에 옮겼다. 800명이 넘는 사람들이었다. 점심 전에 끝내겠노라. 11시. 11시 11분, 11시 22분, 11시 40분, 11시 45분. 적당한 업무량 과 적당한 시간 소모.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12시. 이런! 배도 고프 지 않다. 밖으로 나가 아메리카노를 한 잔 사들고 창가에 앉았다. 그리곤 또다시 광합성.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며 지그시 눈을 감았을 때 동창 녀석에게 전화가 왔다. “이야~ 날씨 한 번 좋네. 오늘인데 날씨까지 좋네. 6시 반까지 나와 있어. 데리러 갈게. 이야, 날씨가 아주 죽여. 죽인다, 정말. 밥 맛있게 먹어라.” 한껏 들뜬 목소리였다. 12시 50분. 점심 먹은 후 항상 무거운 몸으로 자리에 앉거나 이를 닦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먹은 게 없으니 몸이 무거울 리도 없었고 졸리지도 않았다. 녀석 말대로 참으로 좋은 날이었다. 여전히 먼지가 눈처럼 날리는 하늘 속에 쭉쭉빵빵한 여자들의 다리처럼 잘 뻗은, 잘생긴 건물들. 모든 것이 섹시하고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지난 몇 개월 동안 나는 사리를 만들 듯 그렇게 살았다. 회사, 집. 그리고 2주에 한 번씩 친구와의 간단한 술자리. “나 술 많이 마시면 안 돼. 술 마시면 아직도 그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매번 얘기했지만 매번 나를 지질한 놈으로 취급하던 친구들. 이 모든 것들이 오늘을 위한 과거, 혹은 추억으로 전락했다. 변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후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당신, 겨울에도 봄입니다
— 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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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주에게 다시 전화 올 일도 없고 나는 정해진 일을 하면 되었다. 오늘만큼은 크리에이티브한 그 어떤 일도 떠올리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내가 신은 양말을 한 번보고 컴퓨터 본체 옆에 가지런히 높은 구두를 힐끔. 힐끔힐끔 나는 내 매무새를 자주 힐끔거리며 확인했다. 와인색 양말에 브라운 계열의 구두라니. 정말이지 완벽한 조화다. 3시. 4시에 있을 회의를 준비했다. 해외 사이트에 올려져있는 몇 개의 사진을 뽑고 생각해놓았던 수많은 카피 중 하나를 선택했다. 당신의 첫사랑, 언제나 봄입니다. 5시. 5시 3분. 5시 6분. 8분. 9분. 13분. 휴. 도무지 시간이 가질 않았다. 하루 종일 백 번도 넘게 본 시계를 다섯 시에 들어서면서부터 또다시 백 번 정도 보았다. 하릴없이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고 향수를 뿌리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양반걸음을 걸어도 고작 5분이 지나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6시.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차 대리, 김 과장 모두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박차고 나와 다시 화장실에 들렀다. 단추를 풀었다가 다시 잠갔다. 소매를 접어 올렸다가 다시 풀었다. 넥타이에 손을 댔다가 아예 풀어버리고 두어 번 고쳐 맸다. 회사 앞으로 나가자 검은색 경차가 나를 기다렸다. 빵빵. 녀석은 방정맞은 경적처럼 시끄러웠다. 나는 몇 마디 말을 받아쳤다. 약속 장소에 가까워올수록 손에서 땀이 났다. “떨고 있냐?” “응, 조금 떨린다.” 녀석은 킥킥 댔다. 사회성이 좋은 녀석은 도착하자마자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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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찌감치 앉아 또 시끄럽게 떠들었다. 메뉴판을 훑었다. 딱히 먹고 싶은 것이 없기도 했지만 누가 시켰는지 알아서 음식들이 나왔다. 야채가 듬뿍 담긴 연어샐러드와 초콜릿 퐁뒤가 뿌려져있는 과일들, 두툼한 소시지까지. 나는 조금씩 눈을 돌렸다. 사실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누구는 퐁뒤를 마셔버릴 기세로 과일에만 집착했고 누구는 안주엔 관심이 없는지 맥주만 연거푸 마셔댔다. 맞은편에 앉은 가물가물한 여자는, 음, 누구였더라. 여자의 입가에 하얀 드레싱이 묻어있었다. 그 옆에는 내게 눈짓을 하는 시끄러운 녀석. 나와 테이블 끝을 번갈아 보며 찡긋찡긋. 징그러운 녀석이다. 그 옆에는 학창시절 교내에서 싸움을 가장 잘하던 누구. 누구? 그의 주먹은 여전히 크고 단단했다. 테이블은 모서리가 둥글었다. 진짜 나무일까. 나뭇결이 듣기 좋은 목소리의 파장대로 자연스럽게 살아있었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온 신경을 테이블 끝으로 쏟았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흔한 상사 욕이었다. 낮은 그 목소리로 웃을 때마다 뒤로 젖히는 허리 덕에 소리가 나뭇결처럼 일렁였다. 테이블 끝에서 10cm쯤 안으로 들어온 곳에 숟가락이 놓여있었다. 검은색 천장에 붙어있는 조명의 노오란 빛에 숟가락 끝이 반짝 빛나던 순간, 내 넓은 시야에 젓가락이 들린 하얀 손이 들어왔다. 정말 놀랐다. 정말 놀라서 누군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드레싱이 묻어있는 입가에 잠시 머물렀다가……, 천천히 다시 테이블 끝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그곳에 여린 손가락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잠시 후 자연스럽게 구부러진 손가락들이 톡톡 테이블을 건드리고 있었다. 호프집 안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정확히 떨어지는 박자. 무방비한 손가락이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당신, 겨울에도 봄입니다
— 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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듯한 그 손가락의 약지엔 후후 불면 사라질 것 같은 가느다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나는 퐁뒤와 손가락, 녀석의 눈과 손가락, 천장과 손가락, 노오란 조명과 손가락, 숟가락과 손가락, 젓가락 끝에 묻은 드레싱과 손가락, 누구와 손가락, 커다란 주먹과 손가락, 그렇게 시선을 옮겨가며 내 가난한 눈으로 손가락을 훔쳤다. 참으로 많이도 쓸어내렸고 구석구석 작은 생채기까지 훔쳐냈다. 정말 무엇이라도 훔친 것처럼 잠깐은 죄책감까지 일었다. 손톱은 보기 좋게 정리되어 있었다. 검붉은 색의 매니큐어. 오른손 검지 손톱과 중지 손톱은 조금 벗겨져 나뭇결처럼 무늬를 이루었다. 아름다웠다. 테이블을 칠 때마다 검지에 연결된 뼈가 손등으로 도드라졌다. 투명한 알몸이라도 훔쳐본 듯 심장이 뛰었다. 두 모금밖에 마시지 않았는데 온몸에 술기운이 돌았다.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그리고 다시 손가락 엇, 손가락이 없어졌다. 노오랗게 반짝이던 반지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아. 봄 냄새. 따뜻한 햇빛 냄새. 향긋하면서도 치명적인 그 내음. 나는 다리를 떨며, 아니, 다리가 떨렸는데, 앞에 있던 음식을 집어 올렸고, 그건 닭가슴살이었고, 그걸 입으로 넣어버렸는데, 고작 다섯 번을 씹자 사라져버린 닭가슴살. 갈 곳을 잃은 혀. 자아, 이제 어쩌지? 사람이 너무 거대한 것을 마주할 때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를 때가 있다. 하마터면 나는 고딕 건축을 처음 마주한 개미처럼 눈물을 쏟을 뻔했다. 2시간 내내 훔쳐만 보던 그 손가락이 내 어깨 위에 놓였다. “잘 지냈어?” 순간 내 왼쪽 가슴에 있던 심장이 그녀의 손가락 밑 쇄골에 있었다. 두근두근 쿵쿵. 발그스름하게 달아오른 나의 쇄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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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신이 아찔하여 고만 그녀의 가슴, 그 내음에 안겨 쓰러질 뻔하였다. 그녀는 거대한 봄이었다.
당신, 겨울에도 봄입니다
— 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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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 85년에 태어나, 88년도 감성으로, 고리타분한 낭만을 꿈꾸는, 보통 여자 사람. astraea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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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첫사랑과 재회(?)하는 남자의 하루 어디에서 영감을 받으셨나요? 알랭 로브그리예의 <질투>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다 쓰고 나니 어떻게 영감을 받았는지 전혀 드러나질 않는다. 작품을 아브락사스에 보내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내가 쓴 글이 책으로 나오는 건 엄청 기분 좋은 일이다. 무슨 일을 하시나요? 공부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실 때 즐거우신가요? 글을 쓰고 구상을 하고 허무맹랑한 생각을 할 때, 혼자 깜깜하고 사람없는 극장에 앉아있을 때. 연애말고 진짜 사랑을 할 때.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전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작품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이야기
당신, 겨울에도 봄입니다
— 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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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해주세요. 새해엔 모두 잘 먹고 잘 삽시다!
맛집을 추천해주세요. 숙대입구 앞, <쌍대포>. 다른 고긴 그냥 그렇고 돼지껍데기는 세계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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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겨울에도 봄입니다
— 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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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다른 것과 위하여 사물, 따위에 붙여서 사람, 동물, 존재하지 않는 지구가 한 번 맥주 알코올성
— 박은지
구별하기 단체, 현상 부르는 말 없는 물체 따위가 상태 날의 자전하는 동안 음료의 하나
맥주를 마시는 동안 비가 내려 세상이 다 젖었다. 대낮인데도 저녁처럼 우중충한 하늘에 비가 지나간 공기까지 모든 것들이 축축했다. 무거운 습기에 절여진 것처럼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 침대에 기대어 누워 있는 채로 맥주 캔을 든 손가락만 몇 분에 한 번씩, 문득 생각난 듯 까딱였다.
고양이는 발치에 앉아 있었다. 나는 이 고양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녀석은 내가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 몸을 비비 꼰 채 기절한 듯 침대에 누워서 잤고, 오늘처럼 내가 꼼짝 않고 누워 있으면 등을 꼿꼿이 세우고 앉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날 내려 보았다. 심사가 뒤틀려 무거운 발가락을 움직여 고양이를 툭 쳤다. 고양이는 놀라지도 않고 흥 하는 듯한 소리를 내더니 살큼 몸을 들어 5cm 정도 떨어진 곳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캔은 비었고 고양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비도 그쳤다. 시간조차 멎은 것 같은 깊고 무거운 침묵이었다. 이런 종류의 침묵은, 가위에 눌린 것처럼 몸과 정신을 모두 좀먹어간다. 나는 약간 초조해져서, 조금이라도 빨리 떨쳐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참동안 생각했다. 기어이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킨 것은 그러고도 삼십 분 정도는 더 지난 후였다.
들고 있던 맥주 캔을 식탁 위에 탁 소리가 나게 올리자 공기와 정적이 가볍게 출렁였다. 햇빛이 커튼처럼 드리워진다면 기분이 조금 나아질 수도 있겠지만, 오후 두 시인데도 하늘은 어두침침했다. 14층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은 제법 넓었지만, 하늘의 채도에 따라 그 날의 일조량이 달라졌고 그건 내 기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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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란히 영향을 미쳤다. 별 수 없지. 나는 기분 전환을 포기하고 맥주만 한 캔 더 꺼냈다. 특징 없는 맥주였다. 아무 이름 없어도 이상하지 않을, 특징 없는 날이듯이.
문득 고양이를 쳐다봤더니 고양이도 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눈이 마주치자 심드렁하게 하늘을 올려다본다. 올려다보는 곳에는 아무 것도 없다. 저 고양이는 늘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집요하게도 바라본다. 두 번째 맥주를 반쯤 비우고 나서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하늘의 채도는 그대로다. 세상은 정말이지, 스스로는 좀처럼 변하려 하지 않는다. 마치 아무 것 아니라는 것처럼.
이름 없는 날의 맥주
— 박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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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지
쓰고 싶은 문장을 가득, 가지고 있는 글 쓰는 이십 대 twitter @haru_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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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20호 주제가 ‘무제’였지요. 특별한 무엇 없는, 어찌 보면 무기력한, 그냥 텅 빈, 그런 장면을 그리고 싶었어요. 어디에서 영감을 받으셨나요? 글에는 자신의 감정 부스러기가 담기는 것 같아요. 작품을 아브락사스에 보내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고마운 페이지, 그리고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열린 장이라고 생각해요. 무슨 일을 하시나요? 프리랜서 에디터 일을 하다가, 지금은 회사 다니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실 때 즐거우신가요? 적절한 표현을 찾아내는 일.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누구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작품을 남기고 있다고 생각해요. 얼마 전에 본 이아립의 인터뷰가 생각나는데, ‘세계평화를 위해 음악을 하는 것처럼 꼴깝을 떠는 건 싫다’고 했거든요. 무언가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혹은 모두가 특별하거나.
이름 없는 날의 맥주
— 박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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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사람들의 파편.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해주세요. 좋아하는 일을, 더 자신 있게 하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2014년에는. 맛집을 추천해주세요. 홍대 우주! 크림생맥주가 맛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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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날의 맥주
— 박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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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해가 져서 때부터 다음 날 밝아지기
— 다하
어두워진 해가 떠서 전까지의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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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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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하
도라에몽의 주머니 같은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아직은 대학생이지만 디자이너로 활동중인 그래픽 디자이너 다하 입니다. leedaha@gmail.com facebook.com/dahal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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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날씨가 좋든 안좋든, 집이 더럽든 깨끗하든 상관없이. 둘이서 만들 수 있는 밤. 이라는 주제로 작업해보았습니다.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겠네요. ‘오늘은 정말이지 아름다운 밤이에요.’ 어디에서 영감을 받으셨나요? 실제 경험. 이라고는 말씀드리기 부끄럽구요. 섹슈얼하지만, 자극적이지 않은 작업을 해보고 싶어서 만들게 되었습니다. 작품을 아브락사스에 보내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작업 조건이 흑백인데, 흑백으로도 느낌을 잘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무슨 일을 하시나요? ‘그래픽 디자이너’라고 쓰고 ‘그렇지만 대학생’이라고 읽는 직업을 갖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실 때 즐거우신가요?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일 (작업, 기획, 제작 등)
밤
— 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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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네, 상상은 누구나 하지만 만들어보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그에 비해 소수이니까요. 작품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생각과 감정의 배설물.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해주세요. 앨범커버 디자인 의뢰해주세요! 올해의 목표니까요!
맛집을 추천해주세요. 저희동네에 위치한 ‘막쭈오’라는 막창집. (네이버 검색하면 딱 하나밖에 안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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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 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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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oisième Humanité
— 스테레오
세 번째의 인류, 인간
유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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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oisième Humanité
— 스테레오 유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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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레오 유닛
임동현과 최유선으로 이루어진 스테레오 유닛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입체적인 시각(Stereoscopic Vision)으로 디자인을 추구한다. 스테레오 유닛이 응시하는 지점을 통하여, 많은 이들이 조금 더 풍부한 스테레오 사운드를 느끼게 되기를 희망한다. stereo- unit.com behance.net/stereo- un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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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제3인류>를 읽고 스테레오 유닛의 시각으로 작업해 본 일러스트레이션입니다. 어디에서 영감을 받으셨나요? 소설을 읽고 작업한 것이기 때문에 작업에 가장 영향을 끼친 것은 아무래도 <제3인류>였습니다. 그리고 스테레오 유닛의 최근의 작품들이 영감이 되었습니다. 최근의 스테레오 유닛의 일러스트레이션들에는 약간의 공식이 있는데, 이번 작업 역시 이러한 공식 속에서 풀어내 보려고 했습니다.
Troisième Humanité
— 스테레오 유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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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아브락사스에 보내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 작업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아브락사스를 통해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사실 이 작업은 지난 11월 17일에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내한하여 강연을 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진행을 결정한 프로젝트였습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내한에 맞춰 그의 소설들 중 인상 깊었던 하나를 일러스트레이션으로 표현하여 직접 전해주자는 게 저희의 계획이었는데, 마침 <제3인류>라는 그의 신간이 나와 있었습니다. 작업하기로 결정을 하고 서둘러 책을 읽기 시작해 작업이 완성되기까지인 2주 동안, 베르나르 베르베르에게 직접 스테레오 유닛의 그림을 전달해 줄 생각에 무척 설레기도 했고, 전해주지 못 할 수도 있다는 불안함 속에 있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완성된 일러스트레이션을 직접 전해주는 데에도 성공했고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친절함 속에서 함께 사진을 찍는 기회도 잡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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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을 하시나요? 현재 임동현, 최유선으로 구성된 ‘스테레오 유닛’이라는 2인 그래픽 디자인 유닛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실 때 즐거우신가요? 스테레오 유닛이 무엇을 잘 하는지를 알아봐주는 누군가와 함께 작업을 해나갈 때 즐겁고 감사한 마음을 느낍니다.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작품을 만드는 것은 물론 특별한 일이고, 그 특별함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작품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표현하는 또 다른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해주세요. 앞으로 스테레오 유닛이 내는 시각적 스테레오 사운드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맛집을 추천해주세요. 송파구 장지동에 있는 등촌 샤브칼국수라는 곳에 즐겨 가는데, 식사 마지막에 나오는 볶음밥을 먹기 위해 가곤 합니다.
Troisième Humanité
— 스테레오 유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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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긴하다’의
— 부지운
어근
실례하겠습니다. 가방을 치워주시겠습니다. 여기가 저의 좌석이라서요. 감사합니다. 후우. 바깥 날씨가 상당히 춥군요. 손이 얼어버린 것만 같습니다. 이렇게 양손을 비비더라도 굳은 것 같은 감각이 그대로군요. 죄송하지만 여기 캔커피를 따주시겠습니까?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손을 녹이려 타기 전 따뜻한 걸로 샀는데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금세 식어버렸네요. 온기는 온데간데없이 미지근해졌습니다. 아이고, 매우 친절하신 분이군요. 이런 부탁을 들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이런 실례를… 한 모금이라도 하시겠습니까? 식어버린 것이긴 하지만 달콤합니다. 괜찮으시다고요? 보답해드릴 것이 없어 죄송합니다. 커피는 이미 식어 버렸지만 목을 축이기에는 안성맞춤이군요. 오늘 날씨가 정말 매섭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겨울이 추운 거야 당연하지만 이번 겨울은 유난히 더 한 것 같습니다. 며칠 간 엄청난 양의 눈이 쏟아지기도 했고요. 지긋지긋한 이 긴 겨울이 어서 떠나기를 바라게 되네요. 이제 곧 따뜻한 봄이 오겠지요? 서울에는 무슨 일로 가시는가요? 그렇군요. 업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시군요. 그럼 사는 곳은 서울이신가요? 저는 여기 역에서도 한 시간 정도 차를 타고 더 들어가야 하는 시골에 살고 있습니다. 서울에 사는 동생을 만나러 가는 길이지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을 하시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지방에서 업무를 마치고 가시는 길이라 하니 궁금해서요. 대답하실 이유는 없습니다만... 기자시라고요? 그렇군요. 그럼 업무라는 것이 취재이었겠군요. 그런 비슷한 거라고요? 설명을 해주셔도 저는 잘 모르겠지만 기자라고 하시니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저란 녀석은 시골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농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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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어 온 촌놈입니다. 학교는 고등학교를 겨우 마쳤을 뿐 많은 공부를 하지 못했죠. 공부 머리가 그다지 좋은 편도 아니고요. 기자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많은 책을 읽어야 하고 공부도 많이 해야 하며, 그리고 대학 이상 나와야 그러한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대단한 분이라는 것이지요. 대단하지 않다고요? 겸손하시네요. 대통령을 만난 적은 있습니까? 하하. 죄송합니다. 호들갑스럽지요. 촌놈이라서 이런저런 궁금한 게 많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시골에서는 농사꾼만 볼 수 있는지라... 그렇군요. 정치부는 아니시군요. 그럼 연예인은 자주 보나요? 예쁜 여자 연예인을 많이 만나시겠군요. 부럽습니다. 제가 하루 밭일을 끝내고 집에 들어가면 대부분의 시간을 텔레비전에 붙어서 지냅니다. 할 일이 없거든요. 노곤하여 금세 잠이 드는 날도 있기는 하지만 늘 텔레비전을 틀어 놓고 있다고 봐도 틀린 말은 아니지요.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연예인이라는 사람들은 제게 있어서 전혀 다른 세상 사람 같습니다. 그들은 먼지 하나 묻히지 않으면서 사는 사람 같습니다. 정말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러한 느낌이지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항상 만나는 거 아닙니까? 매우 유쾌한 일일 것 같습니다.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일일 뿐 특별할 것 없다는 말씀인가요? 으음.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일반인이 모르는 유명 연예인의 비밀도 알고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런 거 궁금합니다. 알려지지 않은 비밀 같은 거 하나 알려주십시오. 놀랄만한 거 없습니까? 하하. 농담이었습니다. 이렇게나 난처해하시다니. 해가 뜨기 전, 새벽녘에 일어나서 밭에 나가 해질 때까지 뜨거운 볕에서 고생하는 일과는 완전하게 다르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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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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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한 일이지요. 몸이 아주 고되기도 하고요. 물론 저의 일을 싫어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하지요. 그리고 땀 흘려 키운 작물이 커 나가는 것을 보면 내 자식 키우는 것 마냥 아주 뿌듯하기도 합니다. 아직 결혼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런 기분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기자님은 결혼하셨는가요? 연배는 저보다 위인 것 같습니다만... 아직이시군요. 업무가 많아 바쁘다 보니 그런가요? 결혼할 나이가 되었습니다만 그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시골에는 젊은 아가씨는커녕 또래의 동성 친구를 보기도 힘듭니다. 시골에서 벗어나 사람 많은 도시로 나가 살고 싶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지요. 훗날 그럴 것이고요.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은 집에 계시는 아버지 곁을 떠날 수 없는 상황이라 말이지요. 아버지가 연로하셔서 곁에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어머니는 제가 어릴 적 돌아가셨고 동생 녀석은 서울에 살고, 아버지랑 저랑 둘이 시골집에서 살고 있는 거지요. 시골의 농사일은 몸이 힘들기는 하지만 겨울이면 바뀝니다. 겨울이면 지나치게 여유가 많아져 지루함의 연속이지요. 봄이 시작할 즈음부터 모종을 준비하여 가을에 걷이를 하고 난 다음에는 정말 별일 없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어떻게 시간을 죽일까 고민을 합니다. 할 일이 아주 없어 누워서 방구석을 굴러다니지요. 어르신들은 회관에 모여 화투를 치거나 낮부터 약주를 드시며 하루를 보냅니다. 저는 마을에 또래의 친구도 없고 하니 이따금 기차를 타고 이렇게 동생에게 놀러 가지요. 원래 제가 말 수가 많은 편은 아닌데, 비슷한 나이의 사람을 만나서 그런지 이야기하는 게 즐겁네요. 귀찮으시겠지만 이해해 주시라 생각합니다. 하하. 기차를 탔다고 동생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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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해야 하는데 전화기가... 어디 갔지? 제가 정신이 없군요. 기차를 기다리며 긴 시간을 추위에 오들오들 떨다가 객차 안으로 들어오니 따뜻한 열기에 몸이 녹아 나른한 기분에 정신이 흐리멍덩해지네요. 전화기를 잠시 빌려주시겠습니까? 전화해 보야겠습니다. 어딘가에서 전화벨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아, 여기에 있었군요. 이런 깊숙한 곳에 있었다니. 고맙습니다. 전화하러 가면서 담배 하나 피우려 하는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금연구역이요? 하하. 객차 사이에서 피우면 괜찮습니다. 객차 내에서 피우는 것도 아닌데. 혹시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지금은 피우실 생각이 없으신가 보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이런, 동생이 전화를 받지 않는군요. 일하는 중인가 봅니다. 아직 퇴근하기엔 이른 시간이지요. 동생은 전화를 잘 받지 않는 편이긴 합니다. 제 멋대로인 구석이 있지요. 어릴 적부터 그랬습니다. 험담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저와는 확연히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첫째와 막내의 차이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동생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하곤 했습니다.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았고요.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동생이 라디오에서 듣고 좋아하던 외국 가수가 있었는데 서울에서 공연한 적이 있었지요. 당시 고등학생이던 녀석이 혼자 그 공연을 보러 갔다 온 것입니다. 상당한 거리임에도 어린 나이에 좋아하는 가수를 보기 위해서 혼자 다녀온 거지요. 아버지가 주시는 용돈을 아껴서 그 돈을 모아 다녀온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합니다. 그럴 수 있지요. 그렇지만 저에게나 특히 아버지에게 있어서는 놀라운 사건 중 하나였습니다. 사는 마을에서 벗어나 외출을 하는 것이라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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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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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날이나 되어 읍내에 갔다 오는 게 고작입니다. 멀리 가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그건 특별한 경우지요. 하지만 동생은 달랐습니다. 그 녀석에게는 세상의 경계선이 저나 아버지보다 더욱 넓었나 봅니다. 그때 말고도 집을 비우는 일이 몇 번 더 있었고요. 그러더니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녀석은 그해 겨울, 작은 가방 하나에 짐을 챙겨 넣고 서울로 떠나버리더군요. 성인이 되기를 기다렸나 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서울로 올라간 녀석은 며칠이 지나도 연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엄청나게 걱정을 하였지요. 성인이 되었다 하더라도 타지에서 홀로 생활하는 동생을 저와 아버지가 걱정을 안 하려 해도 안 할 수가 없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나쁜 짓을 하고 다닐 거라는 걱정은 아니었지만 연락이 되지 않으니... 오늘같이 이렇게 연락이 되지 않는 경우가 몇 달이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연락이 오기를 마냥 기다려야 할 뿐이지요. 그러다 연락이 닿으면 바빴다느니, 어디 다녀왔다느니 그런 변명을 합니다. 오늘 올라갈 거라며 며칠 전 연락을 했습니다. 귀찮은 듯이 대답은 했지만 오랜만에 형을 본다고 기뻐하는 듯한 목소리였습니다. 뭐. 기다리면 나중에라도 다시 전화가 오겠지만... 제 동생은 그런 녀석입니다. 서울 구경도 시켜드릴 겸 아버지를 모시고 함께 동생 집으로 가려 했는데 집에 있겠다고 하시더군요. 너와 나랑 집을 비우면 개밥을 누가 주냐 하시지만 그건 그저 말일 뿐입니다. 개밥 따위, 옆집에 이웃이 없는 것도 아닌데 아버지는 그게 걱정인 게 아니지요. 완고하신 분이라 설득하기 쉽지 않습니다. 억척스럽게 살아온 아버지 세대의 어르신들이야 대개 그런 편이지 않겠습니까? 그 고집... 한두 번 말씀 드리고는 저도 못 이기는 척, 더 설득하려 하지 않고 혼자 다녀오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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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실은, 아버지가 장거리를 여행하실 만큼 건강이 좋은 편은 아닙니다. 오랜 시간 동안 힘든 농사일을 하셨다 보니 지금은 세월을 이겨내지 못하시는 거지요. 젊은 시절 그렇게나 건장하시던 분이 해가 가면 갈수록 쇠약해지는 모습이 눈에 띌 정도이니 제 마음이 아픕니다. 그리고 곁에 어머니가 계셨다면 마음이라도 외롭지 않으셨겠지만... 휴우. 요즘 들어 부쩍 그런 서글픈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가 시골집을 떠나기 힘드시다면 동생 녀석이라도 자주 내려와서 아버지를 뵙고 하면 좋겠습니다. 동생을 보고 싶어 하시니까요. 그런데 이 녀석은 그런 생각이 없는 듯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동생 녀석은 여전히 어른답지 못한 것 같습니다. 가족을 만나는 것도 그렇거니와 나고 자란 고향이 그립기도 할 텐데... 고향이어서 좋은 것도 있지만 우리 동네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기회되면 한번 놀러 오세요. 여름에 계곡이 정말 좋거든요. 만약 내가 도시로 떠났다면 푸르른 산과 공기 맑고 물 좋은, 멱을 감던 계곡과 아버지가 계시는 시골집이 엄청나게 그리울 것 같은데... 도시가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렇지. 얼마 전 뉴스에서 우리 동네가 나왔습니다. 좋은 일로 나온 것은 아니지만... 어떤 50대 남자가 인적이 드문 산속에 차를 주차하고 그 안에 연탄을 피워 자살한 사건이었는데, 네. 맞습니다. 기사를 보셨군요. 그 남자가 죽었다는 산이 바로 우리 동네입니다. 제가 사는 동네가 텔레비전과 신문에 나온 거지요. 유쾌하지 않은 사건이지만 텔레비전 뉴스와 신문에 우리 동네가 나오는 흔치 않은 일이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더군요. 산골짜기 우리 동네가 뉴스에 나왔다며 한동안 동네 전체가 시끌시끌했습니다. 사람이 죽었다는 사건 그 자체도 흔치 않은 일이기도 하고요. 죽은 남자는 우리 동네 사람은 아닙니다. 차를 운전하고 다니며 인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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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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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문 곳을 찾아다녔다더군요. 인적이 없어 조용하고 공기 맑은 곳에서 죽을 생각을 했나 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 동네가 아주 적합하긴 하지요.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입니다만, 이 사건에 대해서 알고 계시는 정보가 있으신가요? 뉴스에서, 그 남자는 변변찮은 직장을 전전하며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던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병이 생겨 더는 그 일마저 할 수 없게 되었다더군요. 이후 기초생활 수급자로 정부에서 나오는 돈으로 생활했지만 어려운 환경에 부인과는 이혼하고 대학생 딸과 함께 살았다 합니다. 그렇지만 학비를 낼 만큼의 형편이 아니다 보니 딸이 학교를 그만둬야 할 상황이고, 앓고 있던 병은 더욱 악화되기만 하니 남자는 그 고통을 견디다 못해 삶을 비관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 하더군요. 정말이지 안타까운 죽음입니다. 그리고 이건, 뉴스나 신문에서 나온 이야기는 아니고 남자가 죽어있던 차를 수습하던 분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남자가 죽어있던 차 안에는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차 안에는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마신 소주병과 함께 먹은 걸로 보이는 과자봉지 그리고 그 부스러기들이 좌석 위와 발판에 떨어져 있었고, 앞좌석을 뒤로 밀어 넓어진 발판에는 죽을 때 피웠던 연탄이 들어 있는 깡통이 놓 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 깡통 아래에는 넓적한 돌이 두 개 받쳐져 있었는데, 이상한 점은 바로 그 돌이 거기 있었다는 것입니다. 산에 널려있는 흔한 돌이었습니다. 돌이 이상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들어보십시오. 차를 수습하던 분의 말로는, 연탄이 연소하면서 생기는 열기는 상당하다고 합니다. 그 열기로 발판 시트에 불이 붙을 수가 있는데 아무래도 죽은 남자가 불이 옮겨붙지 않기를 바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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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다더군요. 돌 두 개로 깡통을 받쳐두면서 말이지요. 그 남자는 불에 타 죽기는 싫었던 걸까요? 그게... 남자가 죽어있던 그 차는 자신의 차가 아니라 죽기 이틀 전쯤인가 렌트 업체에서 빌린 차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차주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 생각에, 깡통 아래에 돌을 받치고 차가 불타지 않게 한 것 같다는 것이지요. 흥미롭지 않습니까? 죽음을 앞둔 사람이 그런 것을 걱정했다는 것이. 죽으면 끝인데 말입니다. 두 개의 돌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자신의 삶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감정이 아주 불안한 상태일 것입니다. 흥분된 감정 상태라는 말이지요. 술을 마셨다면 아마 더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그 남자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반대로 이성적인 상태이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 두 개의 돌 때문이지요. 그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차에 불이 옮겨붙어 차주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되니 깡통 아래에 돌을 받쳐야겠어, 라고 생각했다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흥분된 상태에서의 행동이라 볼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그 남자는 뉴스에서 말한 것과는 다른 상황 속에서 죽음을 선택한 게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네? 그 이유는 저도 모르지요. 아니 알 수 없다고 해야 하나… 제가 아는 것이라고는 뉴스에서 본 내용, 내가 살고 있는 동네를 배경으로 50대 남자가 죽었다, 라는 것과 차를 수습하던 분에게 들은 내용, 연탄을 피웠던 깡통 아래에는 두 개의 돌이 있었다, 라는 것뿐입니다. 동네를 이야기하다가 심각한 이야기로 빠져버렸군요. 그래도 흥미로운 이야기였지 않나요? 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인적 드문 산속 어느 50대 남자의 죽음이 제 머릿속에서 맴돌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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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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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무료하던 시점에 흔치 않은 일이 그것도 우리 동네에서 일어나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혼자 방에 누워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니까요. 생각은 멈추어라 하지 않으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생각이 저를 괴롭히지요. 역시 그럴 때면 텔레비전을 켜야 합니다. 좋은 대안이지 않습니까? 하하. 불필요한 생각을 날려버리는 방법으로 최고입니다. 으음. 그중에서도 역시 코미디만 한 게 없는 것 같군요. 멍하게 보고만 있어도 즐거워진다고 해야 할까? 한바탕 크게 웃고 나면 하루의 피로가 가시는 것 같은 기분도 들지요. 웃음은 역시 기분 좋은 것입니다. 웃음, 좋지요. 그런데 혹시 그런 적 없으신가요? 익숙하던 게 갑자기 낯설 게 느껴지는, 고구마를 먹다가 아! 내가 먹고 있는 게 고구마인가? 하는 물음이 생기는 순간이요. 코미디 프로그램을 배를 잡고 웃으며 보고 있었는데 문득,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 거지, 왜 웃는 거지,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즐겁긴 한데 진짜 즐거운 것 같지 않다고 해야 하나? 네모난 텔레비전 앞에서 혼자 웃고 있는 제가 바보같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러면서 진짜 즐겁게 웃어 본 적이 언제였나 하고 생각을 해보았지요. 아버지와 저, 남자 둘이 사는 집에서는 웃을 일이 없습니다. 아버지랑 무슨 대화를 해야 할지 찾기도 힘들지요. 동생이 떠나기 전에 세 식구가 살았을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 기자님은 어떻습니까? 잠깐 대화를 나누는 동안 보았을 때는 웃음이 그다지 많은 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하하하. 저는 오늘 즐겁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오랜만에 웃으면서 대화를 나눈 것 같아서요. 잠시, 창에 습기 좀 닦겠습니다. 기차가 어느덧 서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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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섰군요. 창밖으로는 이제 대도시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고층 건물들은 언제나 가득하군요. 석양과 어울려 아주 아름답습니다. 저 속에 있으면 복잡함에 마음이 답답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저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렇게 조금 떨어져서 말이지요. 저 많은 건물 안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들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엉뚱하지요. 건물을 툭툭 치면 사람이 톡톡 튀어나올 것만 같아요. 하하. 기차는 정말 빠릅니다. 얼어붙은 추위가 오고 많은 눈이 내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렇게 먼 거리를 단숨에 달립니다. 이제 서울도 금세지요. 열차에서 한숨 자고 일어나도 도착이 멀었던 시절이 있었는데...그렇지 않습니까? 지금은 정말 시간이 얼마 걸리지가 않으니 긴 대화라는 것은 할 수가 없게 되었군요. 곧 도착이니 조금 아쉽습니다. 동생 집에서 1주일 정도 지낼 계획인데 그 전에 만나서 술 한잔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시간 괜찮으시다면 말이지요. 어떻습니까? 업무로 바쁘시겠지만 일정을 확인한 후 연락을 주십시오. 제 전화번호는 이미 전화기에 찍혀있을 테니 저장해 두었다가 괜찮은 시간을 알려주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아, 이제 기차가 서서히 멈추는군요. 내릴 때가 되었습니다.
긴
— 부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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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운 riceboysleeps@liv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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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시작은 두 남자를 같은 공간에 놓아보자 였습니다. 도시의 사는 사람과 시골에 사는 사람이지요. 작품을 아브락사스에 보내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글이 책이 되는 것을 보고 싶어서입니다. 무슨 일을 하시나요? 지속적인 글쟁이 노릇을 하기 위한 모든 일을 합니다. 무엇을 하실 때 즐거우신가요?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을 때가 즐겁습니다.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모두는 특별하다 생각합니다. 작품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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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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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정 이끼가 낀
— 문모운
우물
나에게는 비록 몸이란 게 없으나, 세상에 먼저 태어난 형제들이 있다. 그들과 나의 역사는 어느 작고 허름한 병원 진료실에서 시작되었다. “아이가 하나가 아니네요?” 허허 웃으며 말한 의사의 말을 엄마는 아직도 가끔씩 떠올린다. “아니, 하나가 아니라고요?” 엄마는 숲 속의 공주처럼 누워 있다가 의사의 말에 놀라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간호사가 엄마의 가슴팍을 눌러 다시 눕혔다. “안정하셔야 합니다. 아이가 하나가 아니니까요.” 간호사는 필요 이상으로 단호했다. 엄마는 불안한 얼굴로 의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초음파 모니터를 보며 의사는 조근조근 소견을 덧붙였다. “애 아빠도 다 다르고요…. 지금은 세 명 정도 돼요.” 지금은… 이라니. 엄마는 입술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의사를 쳐다봤다. “축하한다고 해 드릴까요. 아니면 다른 원하는 말이라도.” 의사의 말에 약이 오른 엄마는 왜 이렇게 재수 없게 구느냐고 따지며 난리를 치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가 한 일은 그저 눈을 감고 한숨을 쉬는 것이었다. “그냥 선생님 하고 싶은 말씀 하세요.” “몸 상태가 자연분만을 하기엔 너무 지친 상태입니다. 물론 저는 절개법을 더 잘 구사합니다.” 갑자기 진지해진 의사의 말에 엄마는 눈을 번쩍 떴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이번에도 간호사의 제지를 받았다. “안정하셔야 한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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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초조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금 당장 기후 좋고 한적한 섬에 데려다 놓는다고 해도 제가 안정할 수 있을까요?” 엄마의 말에 간호사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어떤 마음이신지 알아요.” “안다고요?” 엄마는 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썼다. 그래서 속으로 간호사를 향해 나쁜년, 미친년, 개 같은 년, 하며 욕을 퍼부었다. 다행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의사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엄마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사실 지운다고 해도 절개입니다. 아이 하나가 많이 작네요.” 의사의 말에 덜컹 내려앉은 가슴을 부여잡고 엄마는 천천히 진료실 안을 둘러봤다. 작고 허름했지만,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기도 했다. 오히려 그런 청결함이 엄마는 두려웠다.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없어도 될 것이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여기, 저, 그, 실도 바늘도 없는 거 같은데 가른 배는 다시 어떻게 하시려고요?” 엄마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더듬더듬 자신의 생각을 여과 없이 모두 입 밖으로 내뱉었다. 엄마의 말을 가만히 듣던 의사와 간호사는 마주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엄마 앞에 성인 남자의 팔뚝 크기만 한 스테이플러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것은 엄마가 불안해하며 누워있던 진료실 침대 아래에서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아… 아프지 않을까요?” 엄마의 목소리는 심하게 흔들렸다. 의사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시험 삼아 한번 해보죠!” 철컥! 철컥! 철컥!
태정
— 문모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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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무어라 대답도 하기 전에 의사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엄마의 동그랗고 하얀 배 위에 스테이플러를 찍어 내렸다. 애가 셋이라고 세 번 찍은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그보다 이게 웬걸,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무통으로 유명한 병원이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거긴 해도 이 정도일 줄이야. 엄마는 꼼짝없이 누워 자신의 배에 박힌 철심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그리고 의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가르지 않은 멀쩡한 배라서… 이런 거죠?” 의사는 어이없어하면서 간호사에게 손짓을 했다. 간호사 역시 조금 전까지 지었던 미소를 거두고 엄마를 쳐다보았다. “아니, 그게… 이렇게 다니면 너무 흉할 것 같은데요. 뺄 때도 안 아픈가요?” 엄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간호사가 엄마의 배에 손을 댔다. 스테이플러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리무버가 나오겠지, 내심 기대했 으나 간호사는 맨손으로 철심을 뽑아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것 같았다. 철심이 쑥쑥 뽑히는 느낌으로 찍힐 때와 다르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영문을 알 수 없는 지독한 피로가 몰려왔다. 엄마는 소독이 끝날 때까지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모든 조치가 끝나고 병원 문을 나설 때, 의사와 간호사가 금실 좋은 부부처럼 나란히 배웅을 해주었다. 비틀거리며 뒤돌아선 엄마를 향해 의사는 굉장히 뿌듯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언제든 오세요. 자연분만은 할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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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노트와 편지지부터 찾았다. 배 속에 있는 우리의 아빠들에게 편지를 쓰기로 한 것이다. 아이들을 품은 건 자신이고, 그 아이들을 낳든 지우든 아무 말 없이 사는 편이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 알려야 할 것은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었다. 엄마는 먼저 내용을 정리해서 쓰고 편지지에 옮겨 적을 요량으로 노트를 펼쳤다. 그 위에 생물학적으로 확실한 두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 엄마는 이마로 떨어지는 잔머리를 몇 번인가 쓸어 넘기고 노트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아이는 셋이고, 아이 아빠는 다 다르고…. 엄마는 노트 위에 푹 엎드렸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노트에 얼굴을 묻은 채로 울었다. 노트에 적은 두 개의 이름이 점점 낯설게 느껴졌다. 두 사람과 지냈던 일이 정말로 있었던 일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나쁜 꿈을 꾼 것 같다고, 엄마는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가 겪은 건 꿈같은 게 아니었다. 환상도 아니었고, 어처구니가 조금 없긴 해도 실재했으며, 관계된 모두를 한순간 불행하게 했으나, 그 불행도 곧 지나간 후였다. 그렇게 특별할 것 없는 일이었는데도 엄마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낳느냐, 지우느냐,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그랬다.
태정
— 문모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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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형제들은 지금으로부터 7년 전 여름에 태어났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8월의 늦은 여름, 낮과 밤을 가리지 않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때였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엄마가 그 무시무시한 무통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3주 뒤에 자연소멸하였다. 형제들보다 작았던 나는 결국,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엄마는 몸속에서 내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이제는 그냥 쌍둥이가 들어있을 뿐인 배를 만지면서 우울해하기만 했다. 나는 그것만으로 큰 위로를 받았고, 엄마가 하루라도 빨리 우울을 극복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이곳에서 기도했다. 하지만 예정일수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내 형제들의 사정도 썩 좋다고 할 수 없어서 엄마의 우울은 꽤 길게 이어졌다. 첫째는 근육계통의 희소병을 갖고 태어나 날 때부터 절름발이 판정을 받았고, 둘째는 몇 해 뒤 벙어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도 둘째의 청각은 멀쩡해서 엄마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엄마는 둘째를 보고 겉모습이라도 멀쩡한 게 어딘가 싶어서 첫째를 조금 더 신경 썼다. 엄마는 어느 날부터인가 이 사단들이 모두 여름에 아이를 낳은 탓이라고 여겼다. 미친 열기가 아이들의 특정 세포들을 조금씩 녹인 게 아닐까 짐작했지만, 딱히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첫째에게는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간헐적으로 밤마다 발작을 일으키며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영아 산통이 심해서 그런가 보다 했지만 몇 해가 지나도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그럴 때면 둘째가 엄마를 찾아와 부레옥잠 같은 손으로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엄마는 부스스 일어나 첫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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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고 달랜 뒤 다시 재웠다. 그리고 가만히 서있는 둘째에게 화를 내었다. “말을 하란 말이야. 제발 말을 하라고.” 엄마의 말에 둘째는 세차게 고개를 주억였다. 커다란 눈망울에는 물기 젖은 두려움이 그득했다. 엄마는 첫째를 안았던 뜨끈한 손으로 둘째의 눈을 가렸다. 손바닥이 젖을 때쯤 ‘미안해’ 라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건 수없이 반복되어 벌써 예전에 그 효용이 사라진 엄마의 진심이었다. 엄마는 이따금 아이를 낳기로 한 자신의 선택을 떠올렸다. 그리고 아이가 하나가 아니네요, 라고 별 일도 아니라는 듯 말했던 의사의 말을 떠올렸다. 결과적으로 엄마는 의사의 말을 곱씹으며 아이들을 낳았다. 그리고 꽤 오랜 세월 자신의 오기로 아이들을 낳은 것에 대해 부끄러워했다. 내 형제들을 살린 게 바로 그 오기 때문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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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형제들에게는 오랫동안 이름이 없었다. 태어난 순으로 첫째는 첫째라고 불렸고, 둘째는 둘째라고 불렸다. 엄마가 첫째야 하고 부르면 첫째가 절뚝거리며 다가와 엄마 품에 안겼다. 엄마가 둘째야 하고 부르면 둘째가 오도도 하고, 달려와 앞에 서서는 엄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사실 엄마가 구태여 부르거나 찾지 않아도 형제들은 어느 순간 엄마 뒤에 서 있곤 했다. 엄마는 그것이 두렵기도 하고 안심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 형제들의 성장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는 걸 일곱 해나 느끼고 나서야 엄마는 이제 슬슬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언제까지고 자신 곁에 그렇게 붙어 있지는 않을 테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첫째야, 둘째야, 하고 불리면 얼마나 우스울지 상상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엄마는 아이들에게 이왕이면 무척 근사한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흔한 이름은 안 된다. 엄마는 자신의 이름을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너무 흔한 이름이기 때문이었다. 부르기도 좋고, 다른 이름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이는 그런 이름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는 그 후로 서재에 있는 책들을 뒤적였다. 자신이 좋아하는 단어 중 이름으로 쓰기에 부족함이 없는 단어를 찾기 위해서였다. 두 명분의 이름을 지으려니 엄마는 머리가 아팠다. 그날도 엄마는 서재에 틀어박혀 꼼짝없이 이 책, 저 책 펼쳐놓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둘째가 첫째를 둘러업고 헐레벌떡 서재에 뛰어들었다. “무슨 일이니?” “아빠가 현관에 서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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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가 둘째의 등 뒤에서 발갛게 상기된 얼굴을 삐죽 내밀고 말했다. 둘째는 첫째를 둘러업은 채로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엄마가 서재 의자에서 일어나자 둘째가 그 뒤를 낑낑대며 따랐다. 엄마는 둘째에게 첫째를 그만 내려놓아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엄마의 말에 둘째는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다리를 구부려 바닥에 앉았다. 첫째가 느릿느릿 둘째의 등에서 내렸다. “아빠, 기다리겠다. 얼른 가봐.” 첫째가 아빠라는 단어에 유독 힘을 주어 말했다는 것을 엄마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현관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그 옛날 엄마가 이름을 쓰지 않은 세 번째 남자였다. “태정!” 엄마는 빠트린 무언가가 번뜩 생각났다는 듯이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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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혹은, 둘째, 아니면 나의 아빠일지도 모르는 사람. 태정은 엄마가 우리의 임신 사실을 확인하던 시기에 함께 살던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엄마의 남편인 셈이었다. 엄마는 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태정의 전화를 받았다. 태정은 무능력과 눈치 없음을 무기로 사는 사람이라 단 몇 마디로 엄마의 속을 벅벅 긁었다. “병원비는 어떻게 하지?” “당신이 언제 그런 걸 신경 썼다고 그래!” 엄마는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집에 와서는 눈물과 콧물로 범벅된 노트를 정리하는데 태정에게 또 전화가 왔다. “뭐 하고 있어?” 힘없는 목소리였다. 엄마도 같이 힘이 없어져 다행이었다. 더 화를 내지 않아도 될 테니까. “편지 쓰고 있어… 애들한테….”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을 말했다. “애들? 오오? 한 명이 아니야?” 태정은 인체의 신비에 감동한 철부지 소년처럼 말했다. “세 명이래. 지금은.” “우와, 우와.” 태정의 목소리에는 금세 힘이 돌아왔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근데 애 아빠가 모두 달라.” 수화기 너머로 잠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엄마의 심장이 조금 빨리 뛰기 시작했다. 잠시 후 태정은 뜻밖의 말을 했다. “어차피 내 아이도 있을 텐데. 다 내 자식 하면 안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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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당신 아이는 없어….” 엄마는 또 거짓을 말했다. 엄마의 심장은 너무 빨리, 너무 크게 뛰어서 수화기 너머로 그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엄마는 순간적으로 태정을 시험해보려 그렇게 말했지만, 금세 후회했다. “그래? 그래도 그냥 다 내 거 할래.” “뭐야. 그게.” 엄마는 울먹이며 말했다. “엥? 우는 거야? 울지 마. 내가 뭐 잘못했어? 미안해!” “아니야… 아니라구.” 엄마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태정의 말은 햇볕처럼 따사롭고 악의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건만, 엄마의 마음속 죄책감이란 그늘은 좀처럼 거치지 않았다. “사실은 당신 아이도 있어. 그런데 그게 누군지 모르겠어. 그걸 아는 데는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릴 거야.” 엄마는 꺽꺽거리며 고백 아닌 고백을 했다. 그 말에 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겠다는 결의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 내 자식이라고.” 엄마는 더 크게 울었다. 태정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는 자신이 참을 수 없이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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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의 산후우울증은 내가 사라지고 나서 극에 달했다. 태정은 최선을 다해 엄마를 보살폈다. 엄마는 내가 사라진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태정이 자신 앞에서 사라질까 봐 불안했다. 엄마가 바라보는 태정은 몸과 마음 모두 가벼운 사람이라 언제든 어디론가 훌쩍 떠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나는 그것이 엄마의 심각한 오해일 뿐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엄마는 태정에게 매일같이 어차피 떠날 거라면 자신을 영원히 기억해달라고 울면서 부탁했다. 태정은 엄마가 그렇게 애원할 때마다 엄마의 입술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태정이 엄마를 진정시키는 행동 중에 가장 오래되고 확실한 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태정도 엄마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그러니까 울지 마.” 엄마와 태정은 서로에게 부탁을 거듭할수록 지치고 병들어갔다. 엄마는 사실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병들어 있었는데 아무도 그걸 몰랐다. 엄마의 속에는 내 형제들 말고도 커다란 독이 자라고 있었다. 태정은 반드시 내 곁을 떠날 것이다. 하지만 영원히 기억될 방법이 있다. 엄마는 얼마 후 태정에게 그 독을 뱉었다. 그날 태정과 엄마는 햇살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암막 커튼 뒤로 창문을 꼭꼭 숨겨놓고 거실에서 TV를 봤다. 예닐곱 살의 정신을 지닌 지체 장애인 부부가 나오는 사랑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나오고 있었다. 방송 중간 부부가 부엌에서 시시덕거리며 장난을 치는 장면이 나왔다. 함께 장난을 치던 아내가 안방으로 쏙 들어가더니 문을 잠갔다. 또 다른 장난을 준비 중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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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방문을 콩콩 두드리며 문 열어주세요, 문 열어주세요, 라고 말했다. 무척이나 활짝 웃고 있어서 조금만 더 움직이면 침이 뚝 떨어질 것 같았다. 문 밖으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랑한다고 세 번 말해주면 열어줄게요. 남편은 머리를 긁적이며 부끄러워했다. 사람들 많은데… 남편은 카메라 쪽을 힐끔 쳐다봤다. 말 안 해주면 나 여기서 평생 살 거다! 아내는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남편은 문 앞에서 얼마 동안 우물쭈물 하더니 무언가 큰 결심을 한 듯 문 앞에서 한 발짝 물러섰다. 그리고는 양손을 입에 대고 집안이 무너져라 재빠르게 소리쳤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아내가 슬그머니 방문을 열고 나오자 남편은 너무나도 반가워하는 표정으로 아내를 껴안았다. 태정은 그 장면에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엄마는 그 장면이 지나가는 동안 태정의 손목을 손가락 끝으로 간질이고 있었다. TV를 보는 내내 망설이고 있었다. TV 속 부부의 모습을 보고는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려 TV를 그냥 끄고 싶었다. 태정이 소매 끝으로 눈물을 훔치려 자신의 손목을 슬그머니 빼자, 엄마는 그 손목을 신경질적으로 다시 홱 낚아챘다. 태정은 당황스러웠지만, 엄마의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조용히 다시 TV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머쓱한 기분에 몇 마디 덧붙였다. “왜에. TV는 안 보고. 아, 콧물 나오려고 해.” “이거 물면 아프겠지?” 엄마는 태정의 손목을 계속 쓰다듬으며 말했다. “응, 아플 거야.” 태정은 TV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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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나를 떠날 거라는 걸 알아.” 엄마는 힘없는 목소리로 수십 번이고 반복된 이야기의 앞머리를 꺼냈다. 태정은 느릿느릿 자신의 손목에서 엄마의 손가락을 치우고 엄마의 입술을 매만졌다. 눈물을 제대로 닦지 못해 얼굴 피부에 물줄기가 생긴 채로 태정은 웃으며 말했다. “너도 참 지치지 않는구나.” 태정은 농담하듯 말하며 엄마를 웃게 할 생각이었지만 그것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엄마는 지체 없이 그의 손목을 낚아채 힘껏 깨물었다. 태정의 전과 다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라는 생각이 엄마를 지배하는 데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태정은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입 밖으로 가는 신음만 흘렸다. 순간 손목을 무는 힘이 더 세진 것이 느껴졌다. 태정의 손목을 물고 있는 엄마는 애가 탔다. 조금만 더. 이 정도로는 안 돼. 나를 잊어선 안 돼. 엄마는 병들었다. 엄마는 미쳤다. 엄마는 독을 품었다. 엄마는 죄를 짓는 중이었다. 태정은 엄마를 떼어내지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태정은 사실 마음만 먹으면 엄마를 완력으로 떼어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배 속의 아이들이 잘못될까 두려워 엄마 몸의 털끝 하나도 건드릴 수 없었다. 얼마 후 엄마의 입안으로 핏물이 들어차기 시작했고 태정의 몸에서 전해오는 떨림도 더 격렬해졌다. 엄마가 마지막 힘을 주며 고개를 쳐들었을 때 태정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흥건한 피 때문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엄마는 태정의 손목에 단순한 상처를 입힌 것이 아니라 살점이 떨어져 나가기 직전까지 물어뜯어 버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엎드려서 격하게 숨을 뱉던 태정은 입고 있던 검은색 티셔츠를 벗더니 살점이 너덜너덜한 손목에 둘둘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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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천천히 일어서서 입가가 피범벅인 엄마를 쳐다보았다. 애처로워서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이었는데, 엄마에게는 아무런 인상을 주지 못했다. 태정은 얼마 후 눈을 질끈 감더니 뒤돌아서 집을 나갔다. 엄마는 태정이 나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입에 고인 피를 거실 바닥에 퉤 뱉었다. 엄마는 배를 감싸고 엎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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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정이 집을 나간 후 엄마는 살림살이를 최대한 줄이고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이사를 했다. 연락처를 바꿨고, 병원을 바꿨다. 바뀐 병원에서 자연분만으로 내 형제들을 낳았다. 엄마는 아이들의 100일이 지난 후에 거대한 스테이플러를 눈앞에 꺼내놓았던 의사와 간호사를 고소하려다 말았다. 명분이 불명확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끔 울컥울컥 치미는 화를 말끔히 해소하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후에 몇 번인가 더 이사를 하다가 오게 된 곳이 지금의 집이었고, 그 사이 엄마는 남편이나 애인을 두지 않았다. 영원히 그렇게 하기로 다짐했다. 그런데 옛날 남편이자 애인이 갑자기 불쑥 찾아왔다. “지나가다 들렀어. 애들 많이 컸네.” 태정은 헤어지던 날과 같은 얼굴이었다. 차림새도 비슷했다. 마치 그 모습 그대로 집 앞 편의점에 잠시 다녀온 느낌이었다. 엄마는 남자의 이름만 불러놓고 머뭇거렸다. 어느새 엄마의 곁에는 아이들이 다가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들어오세요, 라고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첫째였다. 첫째는 태정에게 꼬박꼬박 아빠라고 불렀다. 엄마는 그것이 혼란스럽고 불편했다. 원래는 셋이었던 아이들의 아빠 중 한 명은 맞지만, 무엇도 확실치 않은 상태에서 첫째가 그런 행동을 취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한편 둘째는 오줌이 마려운 것처럼 곁에서 꼼지락댔다. 저도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이다. 첫째는 엄마의 눈치를 보더니 새침하게 말했다. “둘째는 말을 못하니까 내가 대신해주는 거야.” 내가 만약 둘째였고, 말을 할 줄 알았다면 첫째에게 욕을 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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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나는 둘째가 가여웠다. 엄마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첫째의 당돌한 말에 태정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입가에 미소를 짓고 말했다. “너희 모두 내 아이니까.” 태정은 첫째와 둘째의 머리를 차례대로 쓰다듬어주었다. 내 형제들은 태정의 손짓에 히히, 웃었다. 형제들은 아빠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들떠있었다. 그 자리에 내가 있었으면 나도 그렇게 웃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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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은 밤, 아이들을 재우고 엄마와 태정만이 거실에 남았다. “티셔츠가 어두운색이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흰색이었으면 핏물 빼느라 애 좀 먹었을 거야. 버렸을지도 모르지. 이게 바로 그때 그 티셔츠!” 태정은 셔츠를 활짝 열어 가려진 검은색 티셔츠를 보여주었다. 무언가 몹시 즐겁다는 표정이었다. “혹시 복수하러 온 거야?” 엄마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아, 아니. 그냥 지나가다가 들렀다니까.” 태정이 더듬으며 말하자 엄마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여기가 어딘지 알고… 한 시간이면 다 돌 수 있는 섬이라고. 어떻게 알고 왔는지….” “아니….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그런 건 됐고… 애들도 보고 싶었고….” 태정은 그답지 않게 어물어물 말했다. “그래. 그래. 이제 애들도 자고 있고, 심하게 말해도 돼. 욕도 좀 하고. 대신 때리지는 마. 몸이 예전 같지가 않아….” “사람 말 못 믿는 건 여전하네.” 태정은 허허, 웃었다. 엄마는 따라 웃지 못했다. “아, 손목 볼래?” “글쎄 그냥 욕을 하라니까.” 엄마는 태정에게 조금 역정을 내었다. “한 번 보래도.” 태정은 장난스럽게 말하며 엄마의 코앞에 손목을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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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모든 걸 포기하고 태정의 손목을 들여다봤다. 손목에는 그날의 흉터가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생각보다 뚜렷하지 않은 흉터를 보고 엄마는 속으로 안도했다. “조금만 빗겨나갔으면 동맥이 완전히 찢어져서 위험했을 거래.” 태정은 흉터 부위기를 집게손가락 끝으로 가리키며 친절하게 설명했다. 정말 별것도 아니었다는 말투로 말해서 엄마는 괜히 골이 났다. “그런데 생각보다 흉터가 크진 않네.” 엄마의 말에 태정은 손목을 가지런히 내려놓더니 지그시 엄마의 눈을 바라보았다. 엄마는 조금 겁이 났지만 태정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크든 작든 너의 소망은 보기 좋게 이루어졌어.” 태정의 말은 언제나 그렇듯 진심이었고, 엄마는 아무런 말없이 두 손으로 태정의 눈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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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정은 자신도 아이들의 이름 짓기를 함께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그것도 꼬박 3일 동안을 졸랐다. 엄마는 태정에게 어서 나가라고 성화하면서도 아이들과 놀아주는 모습을 보고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태정의 끈질긴 부탁에 엄마의 마지못한 허락이 떨어지자 그는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도 더 기뻐했다. 그때부터 태정과 엄마는 서재에 틀어박혀 어떤 이름이 좋을지 한참을 의논했다. 엄마는 그 동안 내 형제들의 생각을 평소보다 더 많이 했다. 어떤 버릇이 있는지, 어떤 모습으로 웃는지, 어떤 음식을 잘 먹는지, 어떤 음식을 가리는지, 이렇게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모두 떠올렸다. 그러다 문득 태어나지 않은 내 생각을 하기도 했다. 엄마는 내 생각이 난다고 옛날처럼 울거나 하진 않았지만, 태정과 재회하고 나서 든 생각을 태정에게 이야기하기로 했다. “나는… 셋째가 당신 아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첫째랑 둘째는 당신이랑 닮은 구석이 없는 거 같거든.” “아니거든. 다 나 닮았거든. 둘 다 속 쌍꺼풀인데다가, 손가락 마디 짤막한 것도 나 닮았어. 어쩜 둘 다 그래. 완전 내 새끼들.” 엄마는 태정의 말에 웃었다. 태정이 말한 아이들의 특징들은 자신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가 닮았나? 엄마는 태정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셋째는 태어나지도 않았으니 자식으로 쳐주지 않는 것 같았다. “…있지, 셋째 이름도 지으려고 하는데. 당신 이름으로 하면 어떨까?” “맙소사. 정말? 당연히 써도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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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정은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사람처럼 흥분했다. 엄마는 섭섭했던 마음을 추스르고, 태정이 기뻐하는 모습을 감상했다. 그런데 방방 뛰던 태정이 갑자기 조금 우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저… 난 너무 좋은데… 정말 그렇게 해도 괜찮겠어?” “왜?” “내 이름은 할아버지가 작명소에서 3만원 주고 지어온 이름이거든.” 태정의 한탄 섞인 말에 엄마가 소리 내어 웃었다. 엄마가 그렇게 웃는 것을 나는 처음 보았다. 그리고 형제들 중 가장 먼저 이름을 얻은 것이 한없이 기뻤고, 한없이 서럽기도 했다. 몇 밤이 지났는지 모른다. 태정과 엄마는 마지막으로 두 개의 이름을 선발했다. 엄마는 서랍에서 오래된 편지지를 꺼내 그 위에 두 이름을 정성스럽게 적었다. 엄마는 태정에게 편지지를 넘겨주며 내 이름을 적으라고 했다. 태정은 천천히 ‘태정’이라는 글자를 썼다. 모든 작업이 끝나자 태정은 팔을 위로 뻗어 갑자기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엄마도 기쁨을 감추지 않고 태정과 함께 춤을 추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이 추는 처음이자 마지막 춤이었다. 엄마는 태정이 언젠가 떠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엄마는 태정이 어서 떠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서로 다시 사랑하게 되면 손목을 물어뜯는 것으로 그치지 않을 거라 여겼다. 엄마는 자신의 내면이 태정의 겉모습과 마찬가지로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믿었고, 언제 미칠지 모르는 자신이 여전히 두려웠다. 태정은 이 집에 처음 찾아왔을 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현관 앞에 섰다. “저 애들은 너를 떠나지 않을 거야. 태정이도 언제나 곁에서 널 지켜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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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정은 쑥스러운 듯 코끝을 긁적이며 말했다. 엄마는 태정의 손을 잡고 이렇게 대답했다. “언젠가 제대로 떠나보내려고 이름을 지어주는 거야.” 태정은 엄마의 손 등을 한참이나 쓰다듬다가 뒤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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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정이 떠나고 내 형제들의 상심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첫째는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발작 때보다 훨씬 더 큰 소리로 울어 재꼈고, 둘째는 방에 틀어박혀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창문만 바라보았다. 엄마는 며칠 동안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잠시 어디 다녀오는 것뿐이라고 거짓말로 아이들을 달래거나 그들의 시위 아닌 시위를 그만두라고 혼내는 일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묵묵히 식사를 챙기고, 그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일곱 살 인생 최대의 고비에 맞서 싸우는 내 형제들에게 엄마는 어느 날 불현듯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건 아직 흥정이란 걸 할 줄 모르는 형제들에게 낯설면서도 달콤한 제안이었다. “이제부터 너희에게 이름을 줄 거야.” “내 이름은 ‘첫째’가 아니야?” 첫째가 물었다. “그래, 너는 첫째지만 네 이름이 ‘첫째’는 아니야.” “그럼 둘째도 ‘둘째’가 아니야?” 첫째가 또 물었다. “그래, 둘째도 이름이 ‘둘째’는 아니야.” 둘째는 궁금증 가득한 눈으로 첫째와 엄마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뭔데요, 뭔데요! 빨리 말해줘.” 첫째가 재촉했다. 둘째도 흥분해서 평소보다 더욱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음, 음, 헛기침을 몇 번 하고 들고 있던 편지지에 써진 글자를 읽었다. 내 형제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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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의 이름 소리에 귀를 바짝 기울였다. 이름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하지만 엄마가 마지막으로 내 이름을 말했을 때 손뼉 치는 소리가 그치고 침묵이 찾아왔다. 그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간 그토록 부르짖던 태정의 이름이 갑자기 튀어나오니 혼란스러웠다. 아이들이 서로 바라보며 이게 무슨 일인가 헤아리는 동안 엄마는 편지지 위에 적힌 내 이름을 손가락 끝으로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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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모운 1987 봄 moun8823@gmail.com twitter @m_m0_0m_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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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아픈 여자의 이야기인데요. 엄마가 된다한들 뭐가 얼마나 많이 변할까? 물론 주변 관계는 변하겠죠. (자식이라는 타인이 생깁니다) 하지만 결국 본질은 쉽사리 변하지 않고, 그대로, 약간은 애처로운 형태로 남아버린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어디에서 영감을 받으셨나요? 갑자기 다 큰 자식이 생기거나, 아이를 낳는 꿈, 얼굴도 본 적 없는 남편이 등장하는 꿈을 자주 꿔요. 그 기록들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작품을 아브락사스에 보내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아브락사스니까... 마감하고 싶어서... 이런 글도 있어요, 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무슨 일을 하시나요? 직업이 없어요. 취직하고 싶다. 무엇을 하실 때 즐거우신가요? 남자친구랑 놀 때, 잠 잘 때 (재미있는 꿈을 많이 꿈), 글 쓸 때, 팬질할 때 (ex : 김연수, Spitz, 이승환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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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모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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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이 질문, 왠지 어려워서 꽤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답은 아니오. 아니기 때문에 뭔가 만드는 사람이 더 대단해보인다. 작품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내 자식...미우나 고우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해주세요. 재미있는 질문이 더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김종소리 화이팅~
맛집을 추천해주세요. 회기 ‘스시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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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정
— 문모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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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더할 수 사적인 개인에 그런 것 어떤 사물이나 대하여 일정한 가지고 하는
— 이주연
없이 극진하게 관계된, 또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현상에 줄거리를 말이나 글
아빠는 며칠 뒤부터 파업에 들어간다고 했다. 파업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은 거칠고 괴팍하다. ‘ㅍ[피읖]’의 모양새가 유난히 기묘하고 딱딱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파업은 폭력을 닮았다. 가해 없이 피해만 있는 폭력을 닮았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는 단 한 번의 이사를 했다. 어려서 살던 1층의 아파트는 인천의 비읍역과 바투 붙어있었고, 지금 사는 19층의 아파트는 부천의 시옷역 부근에 있다. [어린이표 한 장이요!]
나는 아빠가 출근을 할 때면 대롱대롱 매달려 뽀뽀를 하는 제법 귀여운 딸이었다. 아빠가 비읍역을 지나가는 시각을 물어 아빠를 만나러 나가는 발랄한 딸이었다. 아빠가 출근할 때 일러준 시각에 맞추어 전철표를 끊고(어느 날의 역무원은 내게 말했다. “아가씨는 굳이 ‘어린이표’라고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비읍역 제일 앞에 서서 들어오는 열차를 바라보는 건 일상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지금에 비해 시력이 무척 좋았던 어린 나는 기관사석에 앉은 아빠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단정하게 각이 잡힌 유니폼과 썩 어울리는 자상한 미소를 띤 아빠가 기관사석에 앉아 한 손을 높이 올린다. ‘딸, 왔구나!’ 하는 제스처인 것이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기관사석에 오른다. 사람들은 열어서는 아니 되는 문을 열고 당당하게 탑승하는 나를 희한하다는 듯 쳐다봤고, 가끔은 내 또래 아이들이 “엄마 나도!” 하면서 징징거리는 모습을 보며 약간의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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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하는 아빠의 손놀림은 자동차에 오른 아빠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계기판은 TV에서 언뜻 본 비행기와 닮은 듯 하면서도, 자동차의 그것과도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전동차를 운전하는 아빠 손이 좋았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오묘함을 좋아했다. 물론 그보다 좋아한 건 유니폼을 입고 인자하게 웃는 우리 아빠였다. 나는 ‘유니폼의 판타지’을 아빠로 하여금 일찍이 알아버린 셈이다. 대여섯 살부터 아빠를 만나러 1호선에 오르고, 전철을 타고 이모 집을 들락거려서인지 내게 가장 친숙한 대중교통은 전철이었다. 전철은 그렇다. 굳이 내가 “저 내려요”하고 어필하지 않아도 자상하게 문을 열어준다. 식당에서 의자를 빼내주는 신사를 닮았다. 성인이 되어서도 패스트푸드점에서 주문 하나 제대로 못하는 내 성격에 “저 내려요”란 어필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승객이 이렇게나 많은데 나 하나 내려주려고 수고를 하는 기사와 나 때문에 바람을 쐬어야만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괜히 미안한 것이다. 쓸데없는 걱정에 남들이 흉을 볼 소심함임을 알면서도 늘상 마음이 불편했다. 하차벨을 누르지 못해 다른 사람이 누를 때까지 이동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전철이 좋았다. 어디서 내려도 상관없고, 몇 명이 탑승해도 관계없는. 2013년 12월 18일, 파업이 시작됐다. 이례 없는 최장기간 파업이었다. 나는 파업 기간 동안 시끄러운 사람이었다. 입을 얼마나 놀렸는지 혓바닥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거친 단어들을 입 속에 머금었고 가시가 돋친 듯 혓바닥이 깔깔했다. 조금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입니다
— 이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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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했지만, 넘치는 파이팅을 들었다. 파이팅을 전한 모두에게 일단은, 미안함을 전한다. 나 사실 ‘파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사회, 정치, 경제에는 조금의 관심도 흥미도 없는 타입이기 때문에 격분할 만큼의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까닭이다. 나의 초점은 파업이 아닌 ‘철도 노조’였다. 철도 노조가 아닌 ‘아빠’였다. 나는 내 추억을 훼손시키는 ‘지금’이 미웠다. 그래서 세상에 반대했다. 쪼르르 달려 내려가 기관사석을 열고 아빠 옆에 서서 돌멩이의 면면을 들여다보는, 교차되는 선로가 몇 개인지 세어보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바깥을 바라보는 내 추억이 송두리째 파괴되는 것 같아 무서웠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오물신이 모든 사물을 먹어치우는 장면처럼 공포스러웠고, 게임 <달려라 왕자님>에서 물건을 붙이고 붙여가며 더 큰 구를 만드는 것처럼 기괴했다. 내 추억은 먹어치움 당하는 사물 쪽이었고, 붙고 붙어지는 물건 쪽이었다. 의사와 상관없이 빼앗기는 추억들이 가엾고 안쓰러웠다. 내 소중한 것들을 잃고 싶지 않아 나는 자꾸만 세상에 반대했다.
단정하게 각진 아빠의 유니폼 어깨 위로 망치 같은 것이 쿵! 하고 떨어져 이미지가 산산조각나는 꿈을 여러 번 꾸었다. 깨고 나면 나를 궁금한 눈길로,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던 사람들에게 턱을 꼿꼿이 들고 보인 우월감이 전부 다 거짓인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아슬아슬 악몽 같던 몇 주가 지나고 2014년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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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의 끝에서 ‘정말 종말?’이란 주제로 <아브락사스>에 기고했던 때의 생각이 난다. 종말은, 조금 더디게 찾아왔다. 종말은 추억을 조금씩 갉아먹었고, 종국엔 피폐한 새해를 맞게 했다. “자, 이제 끝이네.” 하고 온가족이 둘러앉아 초를 불었지만, 머리에 꽃을 꼽고 사진을 찍었지만 뒷짐 진 내 손 안에는 모퉁이가 자그맣게 찢어진 어린이표 한 장이 들려있었다. 이젠 어디 가서 구할 수도, 붙일 수도 없는 어린이표 한 장이 마그네틱 선만 간신히 남겨둔 채 해져있었다. 종말일지도 모르겠다는 아슬아슬한 마음을 품은 채 2014년이 밝았다. 세상이 어떻든 해가 뜨고 달이 진다. 어제의 돌멩이는 오늘도 그 자리에 머무는데, 어제의 선로는 오늘도 작년처럼 구부러지는데 내 마음은 여전히 위험하다. 엄마는 2014년 1월 1일, 날이 밝음과 동시에 샴페인 잔을 부딪치며 이렇게 말했다. “어제 보다 젊은 오늘이길!” 훼손된 지난날의 ‘젊은’ 어린이표에 검정색 리본을 곱게 묶어본다. 좌우대칭으로, 단정하고 알맞은 사이즈로. 꼿꼿하게 각진 아빠의 유니폼처럼,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질 모양으로. 해졌어도 지켜볼 요량이다. 마그네틱 선만 빼두고 가해를 찢어버려도 컹! 하고 개찰구를 열어주던 장난스런 지난날을 떠올리며 꿋꿋하게 뒷짐 진 손아귀에 힘을 주어볼 생각이다. 그렇게, 2014년을 맞는다.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입니다
— 이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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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얼룩진 노랑을 입고 기어가고 있다. bebezzu.blog.me facebook.com/zuyeonxx twitter @Z_Mete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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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입니다. 아빠에 대한 사랑 외엔 아무것도 없는 이야기. 어디에서 영감을 받으셨나요? 영감과 소재의 근저에는 언제나 일상이 있기 마련이지요. 작품을 아브락사스에 보내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아브락사스> 역시 애정하기 때문입니다. 좋아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루트를 통해 전달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게 또 있을까요. 언제나 좋은 게 좋은 거지요. 무슨 일을 하시나요? 공부를 합니다. 무엇을 하실 때 즐거우신가요? 활자를 보고, 읽고, 쓰고, 만지고, 그리고, 보듬는 모든 행위는 나를 즐겁게 해요.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특별합니다. 작품을 만들지 않는 사람들도 특별하고요.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입니다
— 이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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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세상의 모든 것. ‘나’도 하나의 작품입니다. 부모님이 빚어낸 (가끔은) 졸작, 혹은 명작.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해주세요. 내가 벌써 스물여섯이야?
맛집을 추천해주세요. 우리집. 엄마 밥이 얼마나 맛있는 건지는 다들 알잖아요. 무턱대고 놀러오세요. 느닷없이 놀러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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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입니다
— 이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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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과 일과 이르는 말 각 만나 모서리
— 진달래 &
물건을 아울러 면과 면이 이루어지는
박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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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과 각
— 진달래 &박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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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과 각
— 진달래 &박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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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과 각
— 진달래 &박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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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박우혁 그래픽디자이너이며 아티스트.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안과 밖, 시작과 끝 사이의 통로를 설계하고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typepag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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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들리지 않는 소리. 보이지 않는 사물. 움직이는 각. 어디에서 영감을 받으셨나요? 여행 사진을 정리하다가... 작품을 아브락사스에 보내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작년 여름에 데미안을 다시 읽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시나요? 디자인과 작업 무엇을 하실 때 즐거우신가요? 이해관계가 없는 일을 할 때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유별나다는 생각은 합니다. 작품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거울같은 것.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해주세요. 사랑해 뽕.
맛집을 추천해주세요. 중문 보말 칼국수
사물과 각
— 진달래 &박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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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상대의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 사람이 주는 가지다 싶었다 행동을 하고자 갖고 있음을
— Jooen.yona.
매력에 끌려 그리워하거나 받고 다른 물건 따위를 앞말이 뜻하는 하는 욕구를 나타내는 말 park
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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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고 싶었다
— Jooen.yona.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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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얼굴은 내 얼굴에 난 여드름만하니까’
사랑받고 싶었다.
장미꽃잎의 짙은 핏빛만큼이나 진한 사랑을 정수리 한 가운데부터 발바닥 끝까지 두르고 싶었다.
발끝까지 닿기엔 긴 팔 밑에 말려 올라간 내복의 소매만큼이나 길이가 짧고 불편해 나는 정수리가 물들만큼의 사랑을 불안하게 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넘어지지 않으려 발악했고 과장했다. 타인들은 내가 토해낸 갈증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잘못된 가면으로 나를 사랑하려 하고 있었다.
필요 없다고 외치는 대신 커다랗게 머리를 부풀렸다. 남은 잉여마저 떨어트리지 않으려 부풀리고 부풀렸다.
언제였을까. 불안한 무게 중심은 이윽고 턱 아래에서부터 부서지기 시작했고, 이고 있었던 나머지 사랑마저 나는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얗게 탈색된 내 머리위의 것들은 내 얼굴마저 표백시키려 달려들었다. 나는 화가 날 수밖에 없었지만, 붉힌 얼굴을 변색된 껍데기 밑에 감춘 채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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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사랑받고 싶었다
— Jooen.yona.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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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고 싶었다
— Jooen.yona.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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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싸울 필요가 없어’
사랑받고 싶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없는 상처를 숨기려고 보이지 않는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채 악수를 건네고 있었다.
그것을 풀었을 때 없는 상처는 상처가 되어 곪아 없어져버린 지 오래였고, 나는 형태를 유지하려고 다시 표백의 붕대를 동여맬 수밖에 없었다.
내가 들고 있는 한송이의 꽃은 눈부시도록 향기롭기에 사랑받을 자격이 마땅했다.
정작 스스로는 모가지가 없어 슬픈 짐승임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손모가지를 어깨너머에 동여맨 채 하얗게 달아올렸다.
아아 열매를 맺기에는 뿌리만 남아버린 줄기라서 열매 아니, 꽃조차 피우지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남은 한송이마저 떨어지는 순간 내 모가지도 낙화되고 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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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사랑받고 싶었다
— Jooen.yona.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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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oen.yona.park Erotist 성감은 특정한 기억 및 환상과 만날 때, 부분들이 흥분하는 것을 말한다. wn865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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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서 영감을 받으셨나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영화에 나오는 ‘붉은여왕’과 ‘흰여왕’을 모티브로 작업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한 거짓으로 인해서 상처받고 그래서 더 사랑받고자 잘못된 방식으로 사랑에 집착하는 ‘붉은여왕’ 캐릭터, 그리고 반대로 겉보기엔 아름답고 호의적인 성격으로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캐릭터지만 그래서 아름답기만 한 ‘흰여왕’ 캐릭터에 영감을 받고 시리즈로 작품을 시작하게 됐네요. 작품을 아브락사스에 보내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실 제가 산업디자인과인데 그렇다보니 제 생각을 담은 작품보다 주로 타자를 위해서 결과물을 내놓는 전시나 작품을 많이 하게 되더군요. 그래서 상업적인 목적이 없는 개인적인 작업은 쳐박아 둔 채 한 번도 어디에 보인 적이 없었는데, 시들어가는 것 같아서 고민하다가 아는 언니가 추천해줘서 처음으로 광합성시키려고 합니다. 무슨 일을 하시나요? 학생이니까 일단은 공부쟁이, 한번씩 글도 적으니까 글쟁이, 연애도 하려고 (노력)하니까 연애쟁이 등...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받고 싶었다
— Jooen.yona.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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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하실 때 즐거우신가요? 기억이 안 나네요... 즐거운 적이 없나봐...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특별하기 보다는 작품을 ‘제’가 만드니까 저한텐 특별한 작품이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저한테는 특별한 작품을 만든 사람도 특별하네요. 작품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신음’이요. 뭐 신음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 (흥분해서, 관음해서, 앓으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해주세요. 나쁜 기지배.
맛집을 추천해주세요. 음.. 아직은 추천하고 싶을만한 맛집을 가보진 못했네요.. 아!! 홍대에 ‘들꽃이 피던? 있던? 자리’라고 막걸리가 진짜 명품입니다. 안주로 밥전이라고 있는데 꼭 같이 시켜 먹어보세요. 진짜....... 말로 설명할 수가 없네. 여기 막걸리 먹으면 다른 곳 막걸리는 깊이가 없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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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고 싶었다
— Jooen.yona.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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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트쇼트 짧은 허구적으로 나간 산문체의 - 순이, 보드카 대표적인 술 상대의 입에 맞춤
— 쳬쳬
소설 이야기를 꾸며 문학 양식 러시아의 그리고 키스 자기 입을
늦고 늦은 밤, 손바닥 만한 원룸. 나는 순이를 옆에 두고 친구와 길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 괴로워하던 친구를 그냥 보낼 수 없어, 시원한 보드카를 한잔 나누며, 가슴에 불을 지펴주고는 집에 데려다 주고 돌아왔다. 빈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순이가 침대 맡에 머리를 기대고 졸고 있었다. “한 잔 할래?” ‘...응?’ 그냥 잠들기 싫었던 나는 순이 앞에 빈 잔을 내 밀었다. ‘비었잖아?’ 순이는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뭔가에 씌인 것 처럼 빈 잔에 민트 으깨 레몬 소다에 보드카를 조금 넣어 모히토를 만들어 주었다. 순이는 혀를 쏙 내밀어 잔 가장자리를 핥았다. 시럽이 묻어있는 잔이 맘에 들었는지 단숨에 바닥을 비웠다. 처음 술을 마신 순이에게 왠지 나쁜 짓을 한 것 같은 기분에 들었다. 갑자기 너무 미안해서, 순이가 좋아하던 황도 통조림을 열어 내밀었다. 순이는 통조림이 좋은 건지 통조림을 건낸 내 손이 좋은지 허리를 쭉 펴 기지개를 하곤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암전. 난 그대로 침대에 기절한 듯이 뻗었다. 자두맛이 나는 까끌까끌한 게 입안으로 들어와 혀를 감쌌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고양이가 내 혀를 깨문 뒤었다. 나중에 아내가 첫 키스가 누구였냐고 한다면, 난 대체 뭐라 말해야 하는가? 나의 첫 키스는 술취한 고양이의 자두맛 입술이었어? 진실은 때로 고통스러울 수 있다. 순이는 그렇게 혀에 상처를 남기고 내 품에 포옥 안겨 왔다. 난 이 천진 난만한 고양이를 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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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고는 에라모르겠다 하며 다시 잠이 들었다. 이것이 순이와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음주였다. 밥먹다가 혀를 깨물면 첫키스 생각이 나서 혼자서 밥을 뿜고 캑캑댄건 한참이 지난 후에 일어난 일.
쇼트쇼트소설 - 순이, 보드카 그리고 키스
— 쳬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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쳬쳬 12년 지용백일장 일반부 장려 옥천문인협회 정회원 choihoiseo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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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술취한 고양이에게 혀 피어싱 당한 이야기 입니다. 어디에서 영감을 받으셨나요? 제 삶? ㅋㅋㅋ 작품을 아브락사스에 보내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여잉추 ingchu.com 커뮤니티 회원이 오프라인으로 읽어야 겠다고 해서... 무슨 일을 하시나요? 천리마마트에서 문석구 코스프레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실 때 즐거우신가요? 잉여잉여!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자신이 만든 것에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작품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절대 고독 속에 빠져있는 나라도 안아줄 또다른 나
쇼트쇼트소설 - 순이, 보드카 그리고 키스
— 쳬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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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해주세요. 여자 잉여들에게 추천합니다. 신나고 즐거운 이야기들을 만들어 가는 여잉추 ingchu.com에 놀러오세요! 맛집을 추천해주세요. 서울시 송파구 마천 2동 윤진빌딩 앞 4000원 콩나물 국밥집. 콩나물 국밥, 불고기, 쭈꾸미 맛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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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트쇼트소설 - 순이, 보드카 그리고 키스
— 쳬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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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官) 정부나 이르는 말
— 장은혜
관청 따위를
“우리 헤어지자.” 최소 이 년은 이어질 줄 알았던 A의 연애가 열 달 만에 종지부를 찍게 되는 순간이었다. 헤어지고 이틀을 꼬박 매달려 보았지만 A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오직 ‘그만해’라는 말 뿐이었다. 이별을 맞이한 A는 허무했고,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완벽한 연애를 위해 자신을 조종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해, 상대까지 조종하고 제어하려 했지만 결국엔 자신도 상대도 지치기만 할 뿐 완벽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 받은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며칠 후, 소식을 듣고 A의 가장 친한 친구인 B가 내려왔다. B는 A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자신의 어머니가 소개해준 점집에 가보자고 했고, 평소 점이고 미신이고 잘 믿지 않던 A였지만 '제발 한 번만'이라고 말하는 B를 도저히 뿌리칠 수 없어 A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점집을 따라가게 되었다. 처음으로 가본 점집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승려 복을 한 할머니 한 분과 할아버지 한 분, 그리고 절 같기도 한 내부 모습 등 텔레비전에서 봤던 알록달록한 점집과는 다른 분위기의 점집이었다. 다만 내부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굉장히 강해서 조금 압도되는 느낌이 드는 것 같긴 했다. A와 B는 할머니의 안내를 받아 할아버지 앞에 앉게 되었는데 할아버지는 A의 점괘를 보자마자 혀를 끌끌 하고 차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할아버지의 반응에 당황해 하는 A와 B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점괘에 대한 설명까지 이어 말하기 시작했다. “처자의 사주에는 관이 없어. 남자에게 관은 직업과 자식을 말하는데, 여자의 경우엔 조금 달라서 관이 직업과 남편을 뜻해. 그런데 처자의 사주에는 그 관이 없어. 관이 없다는 건 남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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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이 아주 없거나 아주 많다는 걸 의미하는데 이럴 경우 결혼보다는 남자들이 많은 곳에서 일을 하는 편이 더 잘될 가능성이 높아. 예를 들어 군인이나, 경찰 같은 직업이나 현 대통령처럼 남자들이 많은 곳에서 일을 하게 되면 결혼은 하지 못하더라도 성공은 할 수 있게 되지.” “네? 할아버지 지금 얘가 평생 결혼을 하지 못 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신 거예요?” 황당하다는 듯 B가 되묻자, 할아버진 ‘그럴 가능성이 높지’라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A의 사주가 남자의 기운을 흡수할수록 잘 되는 사주라 남자가 많은 곳에서 일을 하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지만 결혼을 하게 될 경우 남자가 A에게 기운을 빼앗겨 그 만남이 지속되기가 어렵다는 것이 할아버지의 말이었다. A의 연애가 순탄해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어했지만 되려 결혼을 못 할 수도 있다는 얘기만 듣게 되어 어안이 벙벙해진 B와 달리 A는 조금 덤덤해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럴 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예전부터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진실한 사랑을 원했고 그것을 위해 온몸과 마음을 바쳐오면서도 어쩌면 자신에겐 그러한 만남이 맞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오고 있던 A였다. A와 달리 B는 묻고 따지고 싶은 것이 산더미 같아 보였지만 점집의 기운 때문에 점점 두통이 심해져 오던 A는 B의 손목을 잡고 황급히 점집에서 빠져 나와버렸다. B는 A가 결혼을 못할지도 모르는 것이 괜히 자신의 탓이라 생각되었는지 종일 A에게 맛있는 걸 사주고 좋은 곳을 데려가주려 했지만 사실 A는 원망도 충격도 느끼지 않고 있었다. 다만 오히려 할아버지의 말 때문에 마음이 편해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듯 했다.
관(官)
— 장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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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혜 만 26세 여자 부산 blog.naver.com/eunejanej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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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연애와 결혼, 사랑에 대해 고뇌하던 A가 결국 점집에서 답을 찾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어디에서 영감을 받으셨나요? 새해가 되니 점집을 찾는 사람들이 많더라구요. 작품을 아브락사스에 보내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아브락사스 20호에 참여하고 싶어서요. 무슨 일을 하시나요? 이것저것하고 있어요. 무엇을 하실 때 즐거우신가요? 즐거워하는 일이 많아서 다 적기 힘들 거 같아요.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글쎄요, 어차피 모든 사람은 다 특별하잖아요. 작품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함부로 뭐라 말을 못하겠네요. 전 소심하거든요. 이런 거 어려워요.
관(官)
— 장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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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해주세요. 늦어서 죄송해요. 하지만 꼭 참여하고 싶었어요.
맛집을 추천해주세요. 부산 망미동 ‘아델라분의 아이디어’, 해운대 ‘카페스왈로우’, 부산대 ‘커피어웨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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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官)
— 장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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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소리에게 울리는 소리
— 김한주
종을 칠 때
김종소리에게 우리가 만난 것도 벌써 19년째가 됐네. 친구가 된 건 16년째이고 어느덧 우리가 살아온 인생의 반을 넘은 시간동안 친구라는 관계가 진행 중이었네. 물론 대부분의 관계가 그러하듯 우리 역시도 매 순간이 평탄친 아니했지만 뭐, 이정도면 그래도 서로 잘 해왔던 거 같아. 내가 이번 아브락사스를 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던 순간 편지형식으로 하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어. 기억나지? 단 한 번도 학생에게 100점을 준 적이 없다던 류현미 선생님께 처음으로 100점을 받은 학생이 나라는 걸. 그 때 했던 글짓기 주제를 편지로 잡고 글을 써서 그런 쾌거를 이루었었다는 것도.(이 부분에서 피식하길 바람.) 그래서 과거의 영광만 가지고 막연히 너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는데 쉽지 않네. 그 이유가 뭘까를 생각해보니 하나의 작품이어야만 한다라는 거야. 꽤 부담스러운 일이지, 예전 글솜씨가 나올까도 의문이고 (이 부분에서도..) 자, 쉽게 가자. 하면 돼. 왜 안 돼? 라는 김종소리 님의 주장대로 그냥 써내려갈게. 아브락사스가 좋은 게 뭐야. 모든 작품을 실어주는 거잖아? 앞서 말한대로 16년이란 긴 시간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아. 만화책을 좋아하고 그리기도 곧잘 하던 너를 따라 나도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너희 집에 가서 I`s를 보거나 플스1으로 위닝 일레븐을 하기도 하며 슈퍼에서 라면을 한 박스씩 들고 튀질 않나, 맥주랑 소주 한 짝씩 네 명이서 들고 도망가기도 하고, 숨어서 담배도 피고.. 심지어 중학생 때였는데 말야. 하루에 100원씩 매일매일 저금도 하고 (지금 생각해도 참 예뻤지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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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첫 데이트를 미행도 하고 풍류를 지껄이며 한강에 앉아있기도 하고, 뭐 하나하나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거야. 아직 중학교 때 이야기가 끝이 안 나는데, 그렇다고 고등학교 때, 20대 때 이야기 하게 되면 페이지수가 늘어나게 될 텐데, 그럼 가뜩이나 돈 없는 발행인이 힘드니 여기까지 할게. 각설하고 어렸을 때부터 넌 좀 특별한 아이였어. 당시엔 좀 조용한, 그렇지만 특이한 무언가를 갖고 있었지. 분명히 누구나가 봐도 되게 약해보이는 사람이거든? 그런데 널 약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 외려 참 강한 녀석이라 생각이 들지. 이유로는 몇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이건 거 같아. ‘언행일치’ 요새 와서 조금 누그러졌지만 예전에 우리 어른들 되게 싫어했었잖아. 그런 어른처럼 되지 말자고도 생각했었고. 근데 그게 되게 어렵다고 생각하거든? 뭐냐면 아무리 싫다 그래도 그런 것에 익숙해진다던지 혹은 지키기가 너무 어려운거라서 적당히 타협한다던지 합리화를 시켜버리곤 하잖아. 근데 가만 보면 넌 이걸 학습했다라고 해야 할까, 아님 의식하고 있다, 라고 해야 할까. 이런 느낌이 아니야. 본능적으로 그렇게 하는 사람, 타고난 사람 같은 거지. 후천적 영향(노력)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되겠지만, 그냥 느낌이 그래. 그래서 그런지 난 네가 그렇게 자랑스럽다. 내가 아는 사람들한테 다 소개시켜주고 싶고 널 아는 사람들과도 친해지고 싶고 그래. 그러니 내가 아무리 성격이 지랄 맞아도 날 너무 숨기지 마렴. 물론 네가 날 굉장히 아껴서라고 생각하고 있단다. 걱정 마. 자 한 호흡 쉬었다 갈게. 지금까지 쓴 글을 쭉 읽어봤더니 기분 좋네. - 제 필력 때문에 이런 얘기하는 건 아니에요 여러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종소리를 많이 좋아하시는 분들, 혹시라도 저와
김종소리에게
— 김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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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실 기회가 있거든 저한테 한 턱 쏘셔야 해요. 20대 중반에 종소리를 제가 먹여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지금의 종소리가 있다고 해도 역시 과언이 아니죠. 꼭 술에 취해서 하는 말 같은데 이런 얘기 술 마시고 못하잖아. 같이 술 마시면 널 챙겨야하는 몸에 밴 아주 빌어먹을 버릇 때문에 난 술을 맘 놓고 마실 수가 없으니. 술 얘기가 나와서 잔소리 한마디 할게. 요샌 많이 고쳤다만(물론 타의로) 술 작작 마시고 건강 잘 챙기길 바라마지 아니하단다. 오랫동안 재밌게 살아야지. 우리가 10대와 20대를 거치는 동안 경제적으론 항상 어려웠고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 나름 예쁘고 건강하게 잘 살아왔던 거 같아. 앞으로 중요한 1년을 앞두고 있는 너와 내가 지금까지 겪어온 좋은 경험을 바탕으로 계획하고 있는 것들 잘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자. 그리고 항상 그랬던 것처럼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친구로 오래오래 함께 가자. 고맙고 사랑한다. 멋있게 끝내고 싶어서 한참을 고민했어. ‘슬램덩크’식의 결말도 좋고 ‘염소의 맛’같은 결말도 좋은데 난 둘 다 안 되네. 뭐 여튼, 아브락사스의 발행인으로 오랫동안 남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글을 쓰다 보니 느낀 건데, 글쓰기 참 어렵다. 네가 이따금 읽어보라고 건넸던 글 들. 꼼꼼히 읽지 않았던 나를 반성하며 이 글을 마칠게. 2014. 1. 18. 김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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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소리에게
— 김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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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주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게 확실해서 날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명확히 갈리는 사람. 한마디로 쫌생이. waterai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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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발행인에게 쓰는 편지입니다. 어디에서 영감을 받으셨나요? 저는 영감을 받는다라는 말에 약간의 적대감을 갖고 있습니다. 굳이 대답을 해야 한다면, 김종소리 당신이겠군요. 작품을 아브락사스에 보내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첫 번째, 20호 기념. 두 번째, 언제가 한 번 하고 싶었던 이야기. 마지막으로 공짜로 아브락사스를 매번 받는 게 미안해서. 무슨 일을 하시나요? 계원예술대학에서 가구디자인을 전공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무엇을 하실 때 즐거우신가요? 사랑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가장 즐겁고 행복합니다.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특별한 작품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작품을 만든 사람이 반드시 특별한가에 대해선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고로,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전제조건은 작품을 만드는 사람으로 한정지었을 때입니다.
김종소리에게
— 김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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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위 질문에 답으로 말한 의미의 작품은 유/무형의 노력을 통해 만들어진 결과물이라 생각하고, 넓은 의미로 보자면 제 눈에 보이는 ‘모든 것’과 제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이라 생각듭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해주세요. 그때그때 꽂히는 단어가 다들 있으실 겁니다. 전 요새 ‘소중함’과 ‘특별함’에 꽂혀 있는데요. 그래서 그런지 조심스럽고 후회스러우며 매 순간 솔직해지되 이기적이지 말자, 라는 생각을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맛집을 추천해주세요. 마포구 연남동에 있는 ‘연남 식당’을 추천합니다. 백반집인데, 입맛이 까탈스러우신 우리 어머니의 마음을 쏙 빼앗아 갈 정도로 음식맛이 훌륭합니다. 위치는 경성고에서 경성고 사거리(국민은행, 현대자동차) 방향으로 약 200m정도 가면 왼편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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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소리에게
— 김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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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을 광학적인 상을 보내어 수신 재현하는 전기 눈으로 대상의 방법 어떤 일을 목적을 이루기 수단이나 방식 — -_xv
사물의 전파에 실어 장치에 통신 방식 보는 형태를 알다 해 나가거나 위하여 취하는
1. 밝은 세상 만들어요. 원숭이였다. 내가 차로 들이받은 것은 원숭이였다. 원숭이는 숲 속에서 튀어나오자마자 내 차에 부딪혔다. 나는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 앞유리가 허옇게 박살났다. 원숭이의 얼굴이 앞유리에 찍혔다. 차가 멈추고, 원숭이도 나가떨어졌다. 뒤늦게 심장이 쿵쾅거렸다. 어깨와 목이 움츠러든 채 풀리지 않았다. 아직 힘을 빼선 안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눈알만 굴려 원숭이를 찾았다. 원숭이는 전조등 불빛이 닿는 끝자락에 걸쳐있었다. 원숭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원숭이라니, 보고도 믿기 어려웠다. 어깻죽지가 뭉쳐왔다. 천천히 힘을 빼 보았다. 뒤로 빠진 허리를 세워봤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차분한 실내악이 잡음처럼 들렸다.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마흔네 번이나 운전대를 꺾어야 빠져나올 수 있는 수원산 고갯길이었다. 평일 새벽이라 그런지, 보이는 것은 전조등에 반사되어 번쩍이는 화살표뿐이었다. 빗방울 맺힌 창문 아래쪽에서부터 옅은 김이 서렸다. 초가을이었지만, 소나기 뒤의 새벽이었다. 눅눅한 인조가죽 냄새가 내 속을 채웠다. 나는 새벽 분위기에 묻히기 싫어 라디오를 켰다. 그것은 이름 모를 현악 사중주로 응답했다. 나는 멋대로 박자를 맞춰가며 손가락으로 운전대를 두드렸다. 그러나 진짜 적막을 깬 건 방금 내가 들이받은 원숭이였다. 손목이 아팠다. 운전대를 잡은 손과 손목이 바깥쪽으로 말려 있었다. 천천히 운전대를 놓았다. 그리고 라디오를 껐다. 심호흡을 한 번 한 다음 문을 여는 찰나, 옆 거울에서 빛이 반짝였다. 자동차 한 대가 오고 있었다. 차는 금세 내 차 뒤에 멈춰 섰다. 차 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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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고 덩치 큰 남자가 내렸다. 나도 차에서 내렸다. 찬 공기가 얇은 셔츠 사이로 파고들었다. 땀에 젖은 겨드랑이가 느껴졌다. 남자가 차 뒷문을 열어 경광등을 꺼내 차 지붕에 붙였다. 그리고 주섬주섬 형광 재킷을 꺼내 걸친 뒤 가만히 서 있는 내 쪽으로 다가왔다. 찬바람에 턱이 떨렸다. “괜찮아요? 차에 문제 있어요?”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로드킬을 했어요. 저기.” 나는 턱으로 원숭이가 나가떨어진 곳을 가리켰다. 남자가 주머니에서 플래쉬를 꺼냈다. 남자는 내 차를 살핀 뒤 원숭이 쪽으로 걸어갔다. “어, 원숭이.” 그가 갑자기 차로 돌아가 운전석 문을 열었다. 차 안에 무전기가 있는지, 거기에 대고 무어라 말을 했다. 원숭이에 대해 말하는 듯했다. 식은땀과 새벽 습기 때문에 셔츠가 내 몸에 딱 달라붙었다. 문득, 차 안에서 음악 소리가 나고 있었다. 나는 차 문을 열었다. 하지만 라디오는 꺼져있었다. 아까 들은 클래식이 자꾸 들렸다. 혹시나 싶어 레버를 돌려봤다. 소리 크기는 바뀌지 않았다. 환청이었다. 나는 머리를 흔들고 보조석에 던져둔 재킷을 꺼내 걸쳤다. 자동차 앞유리를 보았다. 원숭이가 차에 부딪힐 때 못 낸 비명이 이제 나왔다. 촘촘히 금 간 유리 틈에 원숭이 피가 차있었다. 다시 심장이 요동쳤다. 팔과 등을 의자에 붙이고 간신히 숨만 쉬었다. 차 앞에서 남자가 유리를 보며 서 있었다. 그가 무전기에 대고 뭐라 말했고, 곧 반대편에서 응답했다. 나는 다시 차 밖으로 나갔다. “산간지대 안전순찰 중이었어요.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텔레비전을 보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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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원숭이 쪽으로 느릿느릿 움직였다. 나는 너무 거칠게 숨을 쉬어 목구멍까지 말라붙었다. 땀 때문에 축축해진 손을 바지에 닦았다. 움직일 때마다 찬 새벽공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제가, 그......” 나는 남자를 따라잡았다. 원숭이가 보였다. 팔이 뒤로 뒤틀려 있었고 얼굴 한쪽이 심하게 눌려있었다. 입에서 나온 피가 아래위로 퍼져 내리막길로 흘렀다. 계속 보니 눈이 움직이는 것도 같았다. 원숭이는 생각만큼 크지 않았다. 털이 피와 빗물에 젖어 더 앙상해 보였다. “제가, 그, 뭐 어떻게.....해야 하는지.......” 남자는 마음 놓아도 된다며, 얼마 전에 동물원에서 원숭이가 사람을 죽이고 탈출했는데, 이 산으로 도망쳤다고 말했다. 괜히 언론에 퍼지면 혼란스러울까 봐 조용히 찾고 있었고, 포획하면 어차피 죽였을 거라고 원숭이를 보며 말했다. 나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저 남자의 얘기에 아, 예, 하며 듣기만 했다. 그러는 가운데 다른 차 한 대가 왔다. 남자와 같은 옷을 입은 젊은 남자가 내렸다. 젊은 남자는 검은색 자루를 가지고 내렸다. 차 문을 닫으면서 자루가 끼었다. 그가 이쪽을 보며 꾸벅 인사했다. 그리고 다시 차 문을 열어 자루를 빼고, 다시 문을 열어 장갑을 꺼냈다. 덩치 큰 남자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예, 그럼 조심히 가세요. 잘 보이지도 않는데. 아, 혹시 동물원에서 수리보상 해줄지 모르니까 연락처 좀 주세요.” 나는 남자에게 연락처를 불러주고 다시 차에 탔다. 운전할 마음이 전혀 일지 않았다. 금이 가지 않은 부분으로 두 남자를 보았다. 젊은 남자가 자루를 원숭이 사체 위로 거꾸로 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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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갔다. 어깨부분에서 자루가 걸리자, 그는 옷에 피가 묻을까봐 조심히 원숭이를 움직였다. 옆에서 가만히 내려 보던 덩치 큰 남자가 그의 엉덩이를 후려 찼다. 남자는 원숭이 위로 넘어졌다. 남자의 무릎이 원숭이의 얼굴을 찍었다. 그는 허겁지겁 일어나 자루에 원숭이를 담았다. 큰 남자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운전할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지만, 내가 만든 일을 처리하는 두 남자가 거슬렸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시동을 걸었다. 라디오에서는 아까와 같거나 비슷하다고 할 만한 곡이 나왔다. 아니, 라디오는 꺼져 있었고 내 머릿속에서 자꾸 흘러나왔다. 히터 때문인지 유리에서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두 사람을 지나 조심스럽게 차를 몰았다. 거울로 남자들이 보였다. 덩치 큰 남자가 이 쪽을 보며 연기를 내뿜었다. 원숭이의 비명 같은 까마귀 울음소리가 고갯길에 퍼졌다.
텔레비전을 보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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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즐거운 만남, ........ 오랜만에 만나 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니, 부끄러움을 억누를 수가 없군요. 게다가 나쁜 짓에 대해 하는 이야기라서 더욱 부끄럽습니다. 당신이 이 글을 다 읽고 저를 얼마나 끔찍하게 여길지도 두렵습니다. 하지만 저는 벌을 받았고, 말을 하지 않는다고 죄인이었던 제가 떳떳해지지 않고, 또 말한다고 해서 제 죄가 더 커지지는 않으니, 이렇게 된 이상 빠짐없이 말하겠습니다. 정확인 십일 년 전입니다. 가을이었고, 저는 지금과는 다른 일을 했습니다. 아, 뭔지 아시죠. 그 날은 새벽 여섯 시쯤에 퇴근했습니다. 옷은 온통 피투성이였는데, 다행히 갈아입을 옷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옷은 갈아입을 수 있었지만 마음은 갈아입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무척이나 화났고, 복수를 생각했습니다.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언제나 그런 일을 당하면 복수를 꿈꿨지요. 그런데 그날은 더 심했습니다. 저는 능동적인 사람이 못 됩니다. 수동적인 사람이지요. 앙갚음을 해보겠다고 정말 마음먹은 그날, 저는 자유를 느꼈습니다. 드디어 내가 뭘 할 수 있겠구나. 나도 내 목소리를 내보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누군가 시킨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뭔가가 날 부르고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 같았습니다. 수사가 수동이라고 수동적인 것은 아닙니다. 제 속에서 나온 소리라는 게 중요하니까요. 어둠이 걷히고 있었습니다. 동쪽 하늘에서 생기를 잃어가는 초승달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저는 그 초승달을 보며 앞에 말씀드린 생각을 했거든요. 갑자기 머리가 맑아지고 똑똑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집에 가자마자 사표부터 써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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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동네 골목에 차를 세웠을 때는 너무 잠이 오더군요. 그 날 당한 일에 크게 분노했던 탓인지 화를 가라앉히고 모든 결정을 내리자 자연스러운 피곤함이 몸을 휘감았습니다. 저는 차를 세우고 그 안에서 잠들었습니다. 잠에서 깬 뒤 시계를 봤을 땐 오후 네 시가 넘어있었습니다. 자는 사이 전화가 몇 통 와 있었는데, 다 그 선배였습니다. 문자를 보니 온갖 욕과 함께 오늘도 조기출근이라는 말이 있더군요. 저는 답장도 하지 않았습니다. 버릴까 고민하던 피 묻은 옷가지들을 종이가방에 담았습니다. 그런데 종이가방에는 전날 사 둔 단팥빵 두 개가 들어있었습니다. 이따 집에 가서 먹어야겠다 생각하며 더러운 옷 위에 올렸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마당에 웬 꼬마 둘이 있었습니다. 같은 체육복에 같은 모자를 쓰고, 가방까지 같았습니다. 같은 유치원에 다니던 아이들이었지요. 아, 제가 살던 집은 높은 담벼락이 아니라 낮은 나무 울타리가 두르고 있었습니다. 구청에서 담장 없는 집 운동이라며 담을 무너뜨렸거든요. 사실은 골목에 주차할 곳이 없으니까 거기다 주차하라는 말이었습니다만, 전 쓰지 않았습니다. 죽기 전 어머니가 가꾸던 마당 텃밭 절반에 벽돌이 깔리고 남은 땅엔 쓸모없는 관목이 심어졌지요. 그리고 제가 키우던 개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제가 다가가자 개가 일어서서 꼬리를 흔들었습니다. 아이들은 두 발로 일어서는 개를 옆에서 안아보기도 하고 쓰다듬었습니다. 아이들은 개를 만져보기 위해 울타리를 넘고 들어온 듯했습니다. 체육복 앞에 시커먼 먼지가 한 줄 찍혀있었거든요. 제가, “안녕?” 하고 인사하자 아이들은 배꼽인사를 했습니다. 가만 보니 머리핀 색깔만 빼고 생김새까지 똑같았습니다. 쌍둥이였어요.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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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친구들이구나.”, 하며 제가 먹으려고 챙겨온 단팥빵 두 개를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더 놀다 가라는 말에 아이들 얼굴이 밝아졌고, 아이들은 개와 빵을 나눠 먹으며 함께 있었습니다. 몸은 피곤했지만 흐뭇한 마음으로 현관에서 신발을 벗던 제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번개같이 스쳤습니다. 이 동네에 유치원은 딱 하나라는 점. 그 개 같은 선배가 이 동네 사람이라는 점. 그리고 그 사람은 쌍둥이 딸이 있다는 점. 거실 식탁에 앉아 마당을 내다봤습니다. 어쩜 저 아이들이 그 아이들일까. 어떻게 알아낼까, 생각하다가 소름이 끼쳤습니다. 맞으면 어쩌려고, 하는 생각이 문들 들었기 때문이지요. 이제 겨우 유치원생인, 우리 집 개와 키가 비슷한 저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내가 이러나, 머리를 세차게 저었습니다. 종이가방에 든 옷을 꺼내 화장실로 갔습니다. 세탁기에 옷을 집어넣고 물이 받아지는 걸 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오줌을 누고 변기 물을 내렸습니다. 소용돌이치며 깨끗하게 내려가는 물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물이 잘 받아진다는 사실이, 또 물이 잘 내려간다는 사실이, 어떤 가능성을 드러내는 듯 느껴졌습니다. 화장실을 나와 다시 창밖으로 아이들을 봤습니다. 아이들은 휴대폰으로 개와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천진난만해 보였고, 조금씩 빵을 떼어 나누는 손이 정말 예뻤습니다. 먹는 모습을 보니 출출해졌습니다. 돌이켜보니, 아침 점심 다 걸렀었네요. 갑자기 제 속에서, ‘배 안 고파? 같이 라면 먹을래?’, 하는 말이 들렸습니다. 저는 정신이 들었습니다. 집 안으로 불러들여 이것저것 묻다 보면 그 사람의 딸이 맞는지 알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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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이들을 불렀습니다. “배 안 고파? 같이 라면 먹을래?” 아이들은 순순히 제 말을 듣고 집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둘은 현관에 앉아 사진을 들여다보며 재잘댔습니다. 아저씨 인터넷 돼요? 엄마한테 사진 보내고 싶어요, 하고 한 아이가 말했습니다. 쌍둥이라도 더 똑똑해 보이는 쪽이었습니다. 저는 잠시만 하고 방으로 가다가, 우리 집은 인터넷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부엌으로 가서 간식을 찾았습니다. 다행히 정말로 라면이 있었어요. 아이들에게 어느 라면이 좋으냐고 물었습니다. 아이들은 하나를 골랐습니다. 저는 냄비에 물을 받아 가스레인지에 올렸습니다. 냉장고에서 파를 꺼내 썰었습니다. 반쯤 언 파는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기분 좋게 썰렸습니다. 썰리는 소리가 좋았습니다. 파가 썰려 나가는 모습과 소리를 듣다 보니 파 한대를 다 썰었습니다.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칼을 들어 이리저리 날을 살폈습니다. 날의 물결무늬가 제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날카롭지 않았지만, 이 정도면 됐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라면이 다 끓고 냄비와 접시, 젓가락을 식탁에 가지런히 놓았습니다. 아이들은 현관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습니다. 꽤 집중했는지 움직이질 않았어요. 저는 순간 숨을 들이켰습니다. 그리고 곧 차분해졌습니다. 아이들의 가방 이름표에는 이름이 쓰여 있었습니다. 흔하지 않은, 그 사람의 성이었습니다. ‘먹으려면 지금 와서 먹어.’ 또 머릿속에서 말이 들렸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먹으려면 지금 와서 먹어.” 그땐 몰랐습니다. 그땐 복수가 꾀나 주체적이라 생각했어요. 또 그땐 수동적인 제가 너무 싫었습니다. 하나라도 누가 시키지 않고 스스로 하는 일이 없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복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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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마음에서 나왔으니, 저는 제가 바뀌었다 생각했습니다. 그땐 그랬어요. 그땐 복수심이라는 반동이, 수동의 다른 형태가 아닌 바로 능동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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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엄마, 세상은 참 따듯한 거죠? 아직은 어두웠다. 그러나 은혜는 눈을 뜨면서, 오늘만큼은 해가 서쪽에서 떠도 된다고 생각했다. 가습기 물 끓는 소리와 건넛방에서 석호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옆에 있는 시계를 눌러 시간을 봤다. 알람이 울리기 일 분 전이었다. 은혜는 알람을 끄고 이불 안에서 기지개를 켰다. 이불 바깥으로 빠져나온 발이 시렸다. 두 쌍둥이가 나란히 이불 바깥에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은혜는 등까지 올라간 딸의 내복을 내리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코끝이 시렸다. 은혜는 조용히 거실로 나왔다. 해가 뜰 때쯤 일어나 새벽에 퇴근한 석호가 허물처럼 벗어놓은 옷을 세탁기에 넣고, 화장실에서 소변을 본 뒤 물을 마신다. 전날 남은 밥을 밭 솥에서 빼고 새 밥을 안친 뒤 세수를 하고 설거지를 한다. 반찬을 꺼내고 찌개나 국을 끓인다. 밥이 다 되면 식은밥을 넣어 섞는다. 아이들을 깨워 씻기고 아침을 먹여 유치원에 보낸다. 마치 떠오르는 해가 밤새 잠들어 있던 모든 의무를 끌어올리듯, 해가 동쪽에서 떠올랐던 아침마다, 은혜가 해야 했던 일이다. 누가 부탁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은혜는 아무도 한 적 없는 부탁을 모두 들어주었다. 그러나 내일 아침부터는 다르다. 그래서 하루 먼저, 은혜는 해가 서쪽에서 떠주길 바랐다. 하지만 당연히 해는 동쪽에서 떴고, 은혜는 어제 아침에 했던 일을 오늘도 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억지로라도 웃으면서 조금 더 열심히 했다. 아이들을 보내고, 은혜는 석호가 자는 방 방문을 열어보았다. 석호는 드르렁거리며 숨을 들이켰다 갑자기 멈추고, 다시 조용히 내뱉기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세탁을 끝낸 세탁기가 삑삑 소리를 냈다. 시간은 겨우 아침 아홉 시 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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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내 마지막 임무다. 은혜는 세탁기에서 꺼낸 빨래를 건조대에 널며 생각했다. 누구 엄마, 누구의 마누라, 누구의 딸, 누구의 친구로서 자신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데 거리낌은 없었다. 오히려 은혜는 좋았다. 그래도 잃기 싫다 생각한 건, 두 딸이었다. 딸들은 죄가 없었다. 물론 은혜가 고생해서 키워야 했지만, 그건 엄마가 자식한테 마땅히 해 줄 일이지, 특히 이 두 딸이라 버티기 더 힘든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이만큼이나 버틴 까닭이 두 딸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기어이 버텨낸다고 언제까지나 두 딸이 행복하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자신이 불행한데 딸들이 어찌 행복하게 하겠는가. 은혜는 생각했다. 혼자 늦은 아침을 먹고 마지막 설거지를 끝낸 뒤 샤워를 했다. 은혜는 속옷과 티셔츠만 입은 채 화장대에 앉아 손톱을 깨끗이 깎았다. 눈썹 집게로 눈썹을 올리고 귀 청소도 했다. 얼굴에 엷게 크림을 바르고 머리를 말렸다. 항상 쓰던 화장품은 전날 밤 짐가방에 넣어두어서 쓸 화장품이 없었다. 화장대 서랍 속에서 몇 주 전에 써둔 편지를 꺼냈다. 더 쓸 말은 없었다. 외출복을 입고 짐가방을 끌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현관문 앞에서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텔레비전 옆 작은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넷이서 같이 찍은 사진이었다. 은혜는 다가가서 액자를 집었다. “안녕.” 그는 사진을 머릿속에 저장하려는 듯 일 분쯤 뚫어지라 쳐다본 뒤 액자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옆에 자신이 쓴 편지를 두었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는 한 세 시쯤이었다. 먼저 사물함에 짐을 넣었다. 그때 주머니 속 전화기가 울렸다. 지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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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응, 잘 나왔어?” “네. ” “데리러 못 가서 미안해. 차 유리 가는 데는 얼마 안 걸렸는데, 실리콘 굳을 때까지 하루 정도는 몰지 말래.” “괜찮아요. 이따 공항에서 만나.” “응, 일 끝나면 전화할게. 사랑해.” 곧 석호가 깰 시간이었다. 은혜는 전화기를 껐다. 공항 리무진 버스는 자정에 떠난다. 다만 오후에는 석호가 깨고 얼마 안 가 아이들이 돌아온다. 석호가 퇴근한 뒤 나와도 늦지 않겠지만, 아이들 얼굴을 보면 떠나지 못할 것 같았다. 은혜는 정류장 안 분식집에서 냄비우동을 먹었다. 조미료 맛이 강한 우동이었다. 은혜는 인공 조미료를 넣지 않고도 음식 맛을 잘 냈다. 석호는 요리를 잘하지 못한다. 아이들은 조미료 맛에 길들어야 할 것이다. 정류장을 나온 은혜는 근처 카페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커피 한 잔으로 혼자 맞는 오후는 오히려 더디게 갔다. 빨리 지환을 만나고 싶었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편의점에서 맥주 두 캔을 사 동물원으로 갔다. 결혼하기 전 석호가 이곳에서 가까운 동네에 살았을 때 자주 가던 동물원이었다. 동물원 입구는 닫혀 있었다. 닫힌 입구에는 낙후시설 정비를 위해 잠시 폐장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은혜는 동물원 둘레를 따라 왼쪽으로 걸었다. 석호와 만날 때도, 둘은 동물원이 닫힌 시각에 많이 왔었다. 동물원 길을 따라 걷던 어느 날, 둘은 아무도 모르는 작은 문을 찾아냈다. 그 뒤로 둘은 날씨가 좋은 밤이면 몰래 동물원에 들어가 텅 빈 잔디밭에 누워 애무하기도 했다. 시설 정비를 하는 직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은혜는 빈 잔디밭
텔레비전을 보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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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둥치에 기대고 앉아 맥주를 땄다. 첫 모금을 들이키며 올려다 본 하늘에는 달이 뜨고 있었다. 달이 뜬 곳이 서쪽인지 동쪽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동쪽이면 더 좋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때 저 멀리서 어린아이만 한 원숭이가 보였다. 은혜는 가방을 들고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숭이는 조금씩 걸어오다 멈춰 섰다. 그러더니 오랜만에 본 친구처럼 한 손을 위로 들어 흔들었다. 그제야 그녀는 이곳 전주동물원 원숭이에 대한 기사가 떠올랐다. 동물원에서 온순한 원숭이만 골라 훈련한 뒤 철장 밖에서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기사였다. 일본 어디나 동남아 어디처럼, 원숭이를 관광상품화하는 것이 동물원의 목표였다. 은혜가 긴장을 풀고 손을 흔들어주자, 원숭이는 두 발로 걸어왔다. 그리고 은혜의 손을 잡아 악수를 했다. 멀리서 볼 때보다는 큰 원숭이였다. 은혜가 다시 앉자 원숭이도 따라 앉았다. 은혜는 마시던 맥주를 원숭이한테 건넸다. 맥주를 받아든 원숭이는 이게 뭔 줄 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의 깊게 냄새를 맡고 한 모금 마셨다. 얼굴을 찡그리며 캬아 하고 소리를 냈다. 꼭 사람 같았다. 은혜는 사진을 찍기 위해 전화기를 꺼내서 켰다. 기분이 좋아진 원숭이는 갑자기 춤을 추며 은혜가 앉아있는 나무 주위를 돌았다. 전화기가 켜졌다. 일곱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갑자기 진동이 끊이지 않고 울렸다. 부재중 전화가 서른 번이나 있었다. 거의 다 석호의 전화였다. 유치원 교사가 보낸 문자가 한 통 있었다. “사랑이 희망이 어머니~ 기다리다가 전화 안 받으셔서요, 사랑이 희망이가 잘 찾아갈 수 있다고 해서 그냥 집으로 보냅니다~ 칭찬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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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한테서 온 사진첨부 문자도 있었다. 처음 보는 커다란 말 라뮤트와 희망이가 찍은 사진이었다. 사랑이가 찍은 모양이었다. 보낸 때는 네 시 반이었다. 유치원 교사가 문자를 보낸 뒤 한 시간이나 지난 때였다. 부재중 전화는 바로 전까지 와 있었다. 그러니, 아이들은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은혜의 몸이 굳었다.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아이들 전화번호를 눌렀다. 전화기가 꺼져있었다. 다시 걸었다. 마찬가지였다. 원숭이가 점점 빠르게 은혜 둘레를 맴돌았다. 원숭이뿐만 아니라, 세상이 돌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몸의 각 기관이 다 따로 노는 듯했다. 어딘가에서 여자 우는 소리가 들리고, 어딘가에서 전화기 진동도 느껴졌다. 은혜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석호였다. 수화기 너머 석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의 숨소리가 들렸다. 아주 느린 숨소리였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다. 원숭이가 천천히 멈추기 시작했다. 세상도 천천히 멈췄다. 다 멈추기까지는 꽤 오래 걸렸다. 모두가 멈췄을 때, 은혜는 울고 있었다. “여보......” 은혜가 석호를 불렀다. “......너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씹새끼야.” 석호가 말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은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하늘에 완전히 자리 잡은 달이 보였다. 달은 아무리 봐도 서쪽에서 떠오른 달이었다. 은혜는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때 원숭이가 은혜 앞으로 다가왔다. 원숭이가 은혜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은혜가 고개를 떨궜다. 원숭이가 쥔 돌덩어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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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눈에 들어왔다. 원숭이는 캔맥주가 아닌 돌덩어리를 들고 있었다. 은혜가 원숭이와 돌을 번갈아 보았다. 원숭이는 돌을 들어 올려 은혜를 힘껏 내리쳤다. 은혜는 옆으로 쓰러졌다. 원숭이는 옆으로 쓰러지는 은혜를 계속 내리찍었다. 원숭이의 온몸에 은혜의 피가 튀었다. 은혜는 계속해서 울었다. 아니다. 은혜는 죽었다. 그런데 계속 울었다. 그녀는 계속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우는 게 아닌가? 은혜가 생각했다. 나는 죽었다. 그런데 우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고 보니 나는, 죽은 은혜를 내리치는 원숭이가 보인다. 그렇다면 나는 은혜가 아니다. 나는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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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홉 시 날이 어두워졌다. 여자가 골목 어귀에 있는 놀이터에 멈춰 섰다. 운동화는 흙과 눈 때문에 다 젖어있었다. 그는 장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은 뒤 구두코를 툭툭 털고 장갑을 벗었다. 바로 옆에 벤치가 있었다. 여자는 벤치에 앉아 다시 전화를 걸었다. 오는 길에만 벌써 세 번째였다. 신호음이 열여섯 번 울리고 자동응답으로 바뀌었다.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손등으로 콧물을 닦았다. 여자가 대문 앞에 다다랐을 때쯤 눈발은 다시 굵어졌다. 그가 쓴 모자와 어깨에 눈이 쌓였다. 이 층 초인종을 눌렀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아무도 없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전화는 다시 자동응답으로 넘어갔다. 여자가 담을 넘고 창문을 넘어 컴컴한 거실로 들어왔을 때, 닫혀 있는 방문 틈에서는 텔레비전 소리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여자가 거실의 불을 켜도, 현관문을 열고 다시 밖으로 나가 장거리를 들고 들어와도,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여자는 조용히 외투를 벗고 방문을 열었다. “배 안 고파? 같이 라면 먹을래?” 방문을 열고 여자가 말했다. 남자는 텔레비전만 뚫어지라 들여다봤다. 여자가 방바닥을 집어 보았다. 차가웠다. 그녀는 보일러를 틀고 온도를 올렸다. “흐흐.” 남자가 이불 속에서 웃었다. 여자의 말을 못 들은 듯했다. 여자는 방문을 닫고 나왔다. 양은냄비에 물을 올리고 손을 씻었다. 찬장에서 라면을 꺼내는데, 찬장 안에서 남자의 전화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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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왔었는데-’, 하며 울렸다. 여자가 건 부재중 전화가 세 통 있었다. 여자는 전화기를 꺼내 한쪽으로 치웠다. 그리고 장바구니에서 파를 꺼내 씻었다. 봉지 밖에서 눈 맞은 부분이 얼얼하게 얼어있었다. 가위로 언 부분만 잘라 끓는 물에 넣었다. “먹으려면 지금 와서 먹어.” 여자가 식탁에 앉으며 말했다. 그녀는 방 안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남자가 재채기하는 소리와 텔레비전 소리만 들렸다. 라면을 다 먹을 때까지 남자는 나오지 않았다. 여자는, 차라리 남자가 자고 있어서 못 듣는다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곧 채널이 바뀌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혼자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했다. 다시 방문을 열었을 때, 남자는 아까와 같은 모습으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선 여자가 처음 보는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여자가 다시 방바닥에 손을 대 보았다. 바닥은 따뜻했다. 그러나 보일러를 끄는 대신, 여자는 텔레비전 전선을 뽑았다. 남자는 꺼진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여자가 다가가 이불을 걷었다. 남자는 손으로 리모컨을 누르고 있었다. “넌 죽어야 해. 죽어버려. 이 버러지 같은 새끼야.” 여자가 리모컨으로 남자를 때리며 소리쳤다. 서너 번 만에 리모컨이 부서지고 건전지가 튀어 나갔다. 남자는 아프지도 않은 듯 멍하니 여자를 쳐다봤다. 여자는 부서진 리모컨으로 끝까지 남자를 때렸다. 남자의 얼굴에서 피가 났다. 여자는 이미 눈물범벅이었다. “엄마?” 남자가 말했다. 그러자 여자가 남은 울음을 마저 터뜨리며 남자의 머리를 안았다. 남자도 얼떨결에 여자를 앉았다.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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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등을 쓰다듬었다. “어어...! 어어...!” 남자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내며 여자를 밀쳐냈다. “여보!” 남자가 소리쳤다. 여자는 남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더 크게 울었다. 여자의 얼굴에 남자의 피가 묻어 있었다. 남자가 여자를 붙잡고 흔들었다. “우리 아기! 데려와야지!” 남자가 갑자기 일어서서 주위를 두리번댔다. 방 한구석에 바지가 있었다. 그는 입고 있던 내복 위에 바지를 걸쳤다. 남자가 방문을 열자 여자가 벌떡 일어나서 남자를 붙잡았다. “아, 안 돼. 그만해. 미안해. 응? 그냥, 텔레비전 봐. 응?” 여자는 황급히 텔레비전 플러그를 꽂았다. 텔레비전이 다시 켜지고 광고가 나왔다. 남자는 아무 말 하지 않고 현관문을 열었다. 눈발이 집안으로 달려들었다. 현관에는 슬리퍼가 하나 있었다. “여보, 여보!” 여자가 남자를 불렀다. 남자는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남자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대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뛰어 나와 신발장에서 젖은 운동화를 꺼내 다시 신었다. 바람 소리가 거세지고, 남자의 목소리도 재빨리 멀어졌다. 여자가 계단을 내려가 대문 밖으로 나갔을 때, 이미 남자는 골목 끝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텔레비전을 보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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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xv 남학생 metaltoni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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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텔레비전을 보는 방법이 제목입니다. 열심히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보고 즐기는 방법에 대해 쓰고 싶었습니다. 쓴다면 읽게 되는데, 저는 겪게끔 하고 싶었습니다. 어디에서 영감을 받으셨나요? 사람들이 드라마 상속자들의 결말을 이리저리 만들어낸 글을 봤습니다. 배우들이 연기했던 다른 드라마 속 관계를 끌어다가 새로운 결말을 만들어내더라고요. 비슷한 구조를 가진 다른 이야기에서도 개연성을 찾아내고 거기서 재미를 느끼는 모습이 신기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다들 그렇지만, 작품 속 인물이 가진 매력 때문에 실제 그 인물이 아닌 배우를 좋아하는 모습도 여전히 신기하고요. 텔레비전 속과 밖을 구분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같은 이야기로 만들어내고.... 이 두 방법으로 사람들이 제 이야기를 읽게 한다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작품을 아브락사스에 보내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어허이... 무슨 일을 하시나요? 대학생입니다.
텔레비전을 보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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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하실 때 즐거우신가요? 소설 말고 재밌는 책 읽을 때, 운동 끝나고 씻을 때, 쓰던 글 다 쓰고 기지개 켤 때 즐거워요.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요.. 작품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공들인 장난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해주세요. 서울 도심 인도도 더럽고 색도 더럽고 노숙자들 아무도 신경 안 쓰고 정말 후지네요. 가본 도시 중 제일 기분이 나쁘네요.
맛집을 추천해주세요. 청주 성화동에 ‘맷돌포두부’라는 식당이 있어요. 청주 사시는 분들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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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을 보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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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행실도체 후기에, 이병모 따라 펴낸 책 일이나 행동의 이룸 활자 프로세서로 디자인 설계, 의도, 목적, — 채희준
에서 조선 등이 왕명에 시작한 어떤 처음 단계를 활판이나 워드 찍어 낸 글자 계획, 설계도, 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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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행실도체에서 시작한 활자 디자인
— 채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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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눈푸 름추릿 꽃하사 의랑봄 오륜행실도체에서 시작한 활자 디자인
— 채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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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희준
졸업을 앞둔 놈 heejoon1989@naver.com twitter @heejoon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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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저는 옛날 오륜행실도에 쓰여져있던 글자들을 분석하고 그 형태를 뼈대 삼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폰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작업의 특성상 고민해야할 부분이 많아서 천천히 진행중이고 시 한편을 정해서 집중적으로 작업해봤습니다. <눈사람>은 아무도 방문하지 않는 미니홈피에 종종 글을 끄적이는 저희형의 시를 훔쳐 온 것입니다. 문예창작을 전공한 형은 정말 저같이 친동생이 아닌 이상 절대 아무도 방문하지 않는 곳에 글을 쓰는 버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징이 잘 보일만한 12자를 선정해서 무작위로 배치한 글자를 담아봤습니다. 어디에서 영감을 받으셨나요? 오륜행실도에 쓰여진 글자가 명조체의 전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의미있고 뿌리가 되는 글자라고 할 수 있는데 완성형 폰트를 처음 디자인하는 입장에서 그 뼈대를 연구하고 현대적인 미감에 맞게 재탄생시킨다면 상당히 의미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완성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작품을 아브락사스에 보내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곳저곳에 완성할 거라고 기록을 남겨야 정말 완성할 것 같아서요.
오륜행실도체에서 시작한 활자 디자인
— 채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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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을 하시나요? 디자인 회사를 다니고 있고 평일 퇴근 후, 주말에 폰트 작업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실 때 즐거우신가요? 꽤 괜찮은 모습을 갖춘 결과물을 상상하며 작업할 때 즐겁습니다.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작품을 지켜보는 사람이 특별하고 생각합니다. 작품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작품이냐 아니냐는 보는 이가 결정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해주세요. 감기 조심하세요.
맛집을 추천해주세요. 안돼요. 그 집 인기 많아질까봐 무서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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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행실도체에서 시작한 활자 디자인
— 채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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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남이 썼던 붓, 펜, 선을 그을 수 종이 따위에 일정한 글자의 이루어지게 안부, 소식, 적어 보내는 글 — 이재하
아닌 자기 자신 연필과 같이 있는 도구로 획을 그어서 모양이 하다 편지 용무 따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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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썼던 편지
— 이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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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뒤의 나에게 한국의 서울, 그것도 문화의 중심지인 홍대거리를 배회하고 있을 나에게 씁니다. 그땐 지금보다 더 성숙하고 많은 것을 경험하실 거 라 믿기에 존대를 합니다. 아무리 ‘나’라도 어린 녀석에게 반말을 듣는다면 웃길 테니까요.
미래의 당신을 위해서 나는 지금 마지막 전력질주를 하고 있습니 다. 남들은 그냥 공부란 길을 달리기만 하면 되지만 나는 길도 달 리고 미술이란 허들도 넘어야 하기에 남들보다 더 힘든 것이 사실 입니다. 그러나 삶이 주는 교훈은 고통에 비례하여 늘어나기에 지 금 순간이 고통스럽지만은 않습니다. 남들보다 조금 늦어져도 나 는 더 튼튼해지고, 느리게 달린다 하여도 지름길을 찾아 달릴 것이 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신도 더 미래의 ‘나’를 위해 노력하고 있겠 지요.
인간이 살아가는 것이 알면 알수록 보면 볼수록 더 넓고 더 크다 는 걸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이 생각하기에 따라, 그 생각을 어떻게 실천하느냐 에 따라 그 모습은 천양지차 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 는 지금도 노력하고 있고 당신도 더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1년 뒤의 나도 내가 바라는 큰 꿈을 가지진 못할 테지요 또한 지금 보다도 더 힘들 것입니다. 주위에 내가 가지려 하는 걸 가진 사람, 그리고 멋지고 잘난 사람들이 즐비하여 박탈감을 느낄 것이고, 맨 주먹으로 일어서는 것이 생각 이상으로 어렵고 험할 것이기 때문 입니다. 그래도 내가 지금 꾸는 꿈, 당신이 더 다가선 꿈을 생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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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주먹 꽉 지고 일어서서 나아가길 바랍니다. 당신보다 ‘1살’이나 어린 나도 이렇게 열심히 했었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달리다 보면 어느새 단단해진 육체와 더 묵직해진 사상이 당신의 머리에 깃들어 있을 것입니다.
나, 이렇게 말해놓은 것에 부끄럽지 않도록 끝까지 하고, 다가오 는 결과를 담담히 받아들이려 합니다. 결과야 어쨌든 얻는 교훈은 클 것입니다. 당신도 이 글을 읽으며 당당하길 바라며 이만 줄입니 다. 진정으로 나에게 할 말은 이미 머릿속에, 내 육체와 당신의 것 이었던 육체에 속속들이 박혀 있을 것이니........ 진화하고 발전되어 있을, 그리고 많은 경험으로 완숙해졌을 ‘나’여 우리의 미래를 위 해 건배~! 2004.9.21 야간자율학습을 끝내고 돌아온 고3의 ‘나’가
나에게 썼던 편지
— 이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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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하
경상북도 경산 출생 jhl0923@gmail.com behance.net/leejoo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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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10년 전 고 3시절, 20살의 나에게 쓴 편지입니다. 어디에서 영감을 받으셨나요? 수업과제였습니다. 작품을 아브락사스에 보내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내려갈때 보았네 올라갈때 보지못한 그꽃 — 고은, <그 꽃> 무슨 일을 하시나요? 그래픽 디자인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실 때 즐거우신가요? 전혀 새로운 것을 하다가, 익숙한 것을 할 때, 혹은 그 반대의 경우. 요새는 아침에 가는 영어회화학원이 즐겁습니다.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특별하다거나 우월하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작품을 만들지 않는 사람보다는 더 관심이 갑니다.
나에게 썼던 편지
— 이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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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일상적인 감정 이상의 무언가를 본인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해주세요. 왁자지껄한 자리를 파하고 식은 나의 빈 방에 누울 때면, 뒤척일 때면 어김없이 너를 감촉하던 순간이 솟아난다 혹시나 연락할까 번호도 잊었다 이미 너를 쏟아버렸다는 사실이 날카롭다
맛집을 추천해주세요. 홍대에 새로 문을 연 ‘루블랑’ 벨기에 수도원 맥주와 프랑스 요리를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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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썼던 편지
— 이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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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앞에서 여자를 삼인칭 대명사 정식으로 부부 나의 남이 아닌 낱말들 쓸 수 있는 준하는 말 — 김종소리
이미 이야기한 가리키는 결혼과 남녀가 관계를 맺음 자기 자신 자립적으로 말이나 이에
전화가 온다. 6431? 모르는 번호다. 그런데 낯이 익다. 누구였더라?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지만 누구의 뒷번호인지 떠오르지 않는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통화 버튼을 누른다. “여보세요.” “오랜만이네.” 낯익은 여자 목소리. 그제야 뒷번호 6431의 주인이 누구인지 떠오른다. “아, 응.”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얼마만이지? …… 마지막으로 만난 게 3년도 더 된 것 같다. “웬 일이야?” “나 결혼해.” 결혼.
프러포즈. 반지. 웨딩드레스. 아현역. 정장. 축의금 봉투. 부페. 새우. 초밥. 일본. 방사능. “아, 그래? 축하해.”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일주일 남았어.” 핸드폰을 얼굴에서 떼어내, 날짜를 확인한다. 일주일 뒤면 4월 12일. 4월의 신부? 코웃음이 나오는 걸 참으며 다시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댄다. “만날래? 결혼하기 전에 한번 보고 싶은데.” “날?”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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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냥.” 세상에 그냥이 어딨어?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아님 결혼 전에 마지막으로 같이 자자는 건가?
섹스. 입술. 가슴. 다리. 모텔. 침대 시트. 세탁소. 코인 빨래방. 동전. 돼지 저금통. 내 이름은 빨강. “언제?” “아무 때나. 너 편할 때.” “오늘은 어때?” “오늘?” “응.” 손목시계를 본다. 8시 48분. 아직 괜찮은 시간이다. “어디서 볼까?” 서희가 잠시 뜸을 들이다 묻는다.
종로. 연신내. 신천. 건대입구. 압구정. 노원. 수유. 인하대 후문. 영등포. 신촌. 홍대. 클럽. 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아무 데나.” “그럼 당산에서 볼까?” “당산?” “응. 당산.” 왜 당산이지? 홍대면 홍대고, 영등포면 영등포지, 당산에 뭐가 있다고 당산에서 보자는 거지?
그녀의 결혼과 나의 낱말들
— 김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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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럼 10시에 당산에서 보자.” 전화를 끊고 잠시 침대 위에 누워있는다. 서희와의 추억들을 상기시켜본다. 헤어지던 날.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처럼 구름이 잔뜩 끼어있었다. 우리 둘은 이별을 예감하고 있었다. 딱히 누가 바람을 피웠다거나, 하는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니었다. 그저 사랑을 시작한 지 오래되었고, 그 사이 자연스레 사랑은 시들해졌다. 세상에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영원한 것은 끊임없이 폭발하며 확장하고 있는 이 우주 말고는 없다. 무엇이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다. 헤어지자는 말은 서희가 꺼냈다. 하얀 입김 사이로 그 말이 새어나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서희는 장갑을 벗고 내 손을 붙잡았다. “앞으로 볼 일이 있을까?” 내 물음에 서희는 그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난 쓴웃음을 지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마치 지금처럼, 침대 위에 누워 서희와의 지난날들을 떠올렸다.
서희의 집. 집 앞 골목길. 국제갤러리. 통영. 속초. 전주. 군산. 짬뽕. 한 번도 가지 못한 해외여행. 데미안. 호밀밭의 파수꾼. 햄릿. 김승옥. 윤상. 콜드플레이.
서희는 콜드플레이의 공연을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었다. 콜드플레이 보컬 이름이 뭐였더라? 핸드폰을 꺼내 검색한다. 콜드플레이, 검색. 그래, 크리스 마틴이었다. 크리스 마틴 부인이 누구였더라? 다시 크리스 마틴, 검색. 그래, 기네스 팰트로였다. 아들은 모세, 딸은 애플. 애 이름을 애플로 짓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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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의자에 걸쳐둔 셔츠와 정장을 입는다. 그 위에 코트를 입고 집을 나선다. 역을 향해 걸어간다. 춥다. 친구들로부터 결혼을 앞둔 전 여자친구가 연락해왔다는 이야기는 적지 않게 들었다. 그렇지만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날 줄은 몰랐다. 그런 정신 나간 여자랑 사귄 일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만약 그런 일이 내게 벌어진다 하더라도 나는 절대로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 만나? 이미 헤어진 지 오래인 여자를 만나서 뭘 하겠다고? 게다가 결혼을 앞둔 여잔데. 그런데 지금 내가 그 짓을 하러 가고 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누군가 어깨를 치는 게 느껴진다. 뒤돌아보니 수염 난 외국인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헤이.” 외국인이 반갑게 손을 흔든다. 전혀 알지 못하는…… 아니, 아는 사람이다. “하이.” 어안이 벙벙하다. 크리스 마틴? “어디 가?” 어색한 억양의 한국말로 크리스 마틴이 묻는다. “여자 만나러, 요.” 반말을 하려다 존댓말로 바꾼다. “왜 가?” “왜?” “응. 와이?” 글쎄,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와이 낫?” 내가 묻자, 크리스 마틴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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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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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유 사이언티스트?” 사이언티스트? 과학자? “아니. 나는 과학자가 아니야.” 시간을 확인한다. 9시 40분. “미안한데 가봐야 돼.” “그래. 바이.” 크리스 마틴과 헤어지고 다시 역을 향해 걷는다. 역으로 들어가 개찰구를 통과하고 플랫폼 앞에 서서 지하철을 기다린다. 곧이어 지하철이 플랫폼으로 들어오고, 스크린도어가 열리고, 지하철 문이 열린다. 지하철을 탄다. 신촌, 홍대, 합정, 당산. 네 정거장이면 도착한다.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한다. 9시 48분. 늦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왜 서희를 만나러 가고 있는 걸까? 미련은 없다. 보고 싶은 것도 아니다. 솔직히 서희와 함께 자고 싶긴 하다. 하지만 그건 안 될 일이다. 서희는 곧 결혼할 예정이니까. 다시 전화를 걸어서 만나지 말자고 할까? 그런데 이제 와서 굳이 피할 필요가 있을까?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는 괜찮잖아? 그래. 술은 마시지 말자. 차라리 커피를 마시자. 브라질. 콜롬비아. 남아메리카. 아메리카. USA. 황금시대. 흑인 노예. 인신매매. 콩팥. 콩쥐팥쥐. 구멍 난 독에 물 붓기. 신데렐라. 백설공주. 일곱 난장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축구. 농구. 야구. 테니스. 핑퐁.
언젠가 나도 결혼을 하겠지. 그 여자도 나와의 결혼을 앞두고 서희처럼 전 남자친구에게 연락을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남자와 만날지도 모른다. 만나면 뭘 할까? 브라질산 핸드드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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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까? 아니면 함께 모텔에 갈까? 나는 그 여자를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겐 그 여자를 의심할 자격이 없다. 당산역에서 내린 나는 맥도날드에 들어가 커피를 주문한다. 그리고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본다. 서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시간을 확인한다. 10시 5분. 약속시간이 지났다. 핸드폰을 꺼내 만진다. 서희는 왜 날 보고 싶은 걸까? 그때 나와 헤어지지 않고, 그래서 지금 결혼할 사람이 나라면 어떨지 궁금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정말 단순하게 결혼 전에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갖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고. 그것도 아니라면 뭘까? 도대체 왜 나한테 연락해서 만나자고 한 걸까? 창밖 저 멀리 서희인 것 같은 여자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전화가 온다. 6431. “여보세요.” “어디야?” “맥도날드.” “웬 맥도날드?” “그냥 들어왔어.” “알겠어. 그리로 갈게.” 곧, 문을 열고 서희가 들어온다. 나는 서희를 향해 손을 들어 흔든다. 서희가 다가와 앉는다. 비현실적인 느낌이다. “진짜 오랜만이다.” 서희가 앉자마자 말을 건넨다. “뭐 먹을래? 커피?” “근데 웬 맥도날드야? 오랜만에 만나는 여자친구랑 맥도날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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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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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거야?” “맥도날드든 어디든 상관없잖아. 뭐 먹을래?” “커피.” 자리에서 일어나 주문하는 곳으로 간다.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네. 커피 한 잔이요.” “원두커피 말씀이시죠?” “네. 1,000원짜리요.” “네. 카드 긁어주시고요. 왼쪽에서 한 줄로 서서 기다려주세요.” 빅맥. 베이컨 토마토 디럭스. 쿼터 치즈 파운드. 패티. 상하이. 트위스트. 설운도. 스택랩. 감자튀김. 맥너겟. 해피밀. 장난감. 행복의 나라. 한대수. 이승열. 기다림. 콜라. 라지 세트. 500원. 아르바이트. 최저 시급. 빅맥지수. 유전무죄 무전유죄. 벤츠. BMW. “커피 한 잔 주문하신 분이요.” 커피를 받아 자리로 돌아간다. “그런데 왜 보자고 한 거야?” “그냥.” 서희가 손으로 커피를 감싸며 말한다. “그냥이 어딨어.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그냥 보고 싶더라고. 다음주면 나는 결혼할 테고. 결혼하면 널 볼 일이 영영 없을 것 같더라고.” “이미 헤어진 순간부터 볼 일 없는 거 아니었어?”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사람치고 굉장히 반가워하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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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반가운가?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천천히 서희를 바라본다. 여전히 예쁘다. 조금 나이를 먹은 티가 나긴 하지만, 그래도 예쁘다. 그런데 그게 뭐? 어차피 헤어진 지 오래고, 더군다나 다른 남자와 결혼할 여자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뻔한 질문. “그런 얘기는 하지 말자. 재미없어. 그것보다도, 결혼할 남자는 어떤 남자야?” “너야말로 그런 얘기는 하지 마. 재미없잖아.” 맞는 말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는 이야기와 결혼할 남자에 대한 이야기는 둘 다 재미없는 이야기다. “여자친구는 있어?” “3년 전엔 있었지. 너.” “재미없어.” 오랜만에 만난 헤어진 여자친구와의 만남은 재미없을 수밖에 없다. 설렘은 없고, 익숙함이 되살아날 뿐이니까. “그럼 내가 재밌는 얘기해줄게. 여기 오는 길에 크리스 마틴을 만났어.” “뭐라고?” “크리스 마틴을 만났다고.” “어디서?” “집 근처에서.” “정말로?” “응.” 서희가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신기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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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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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하나도 안 신기해.” “안 신기하다고?” “응. 하나도 안 신기해.” 서희가 손으로 이마를 닦는다. “나 갈게.” “벌써?” 자리에서 일어나는 서희의 손을 붙잡는다. “갑자기 왜 그래?” “나 크리스 마틴이랑 결혼해.” “뭐라고?” “크리스 마틴이랑 결혼한다고.” 크리스 마틴은 기네스 펠트로랑 결혼한 거 아니었어? 아들은 모세, 아니 아담인가, 아무튼, 딸은 애플이고. “그 사람 기네스 펠트로랑 결혼한 거 아냐?” “얼마 전에 이혼하고 나랑 결혼하기로 했어. 나 가야겠어.” 서희가 내 손을 뿌리치고 맥도날드 밖으로 나간다. 크리스 마틴이랑 결혼을 한다고? 그게 말이 돼? 내 전 여자친구가 크리스 마틴이랑 결혼한다고? 그럼 모세는? 애플은?
애플. 스티브 잡스. 조너선 아이브. 아이폰. 아이패드. 맥북. 애비로드. 비틀즈.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링고. 사과. 대구백화점. 경상도. 전라도. 화개장터. 조영남. 조영남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시대. 배철수의 음악캠프. 어쩌다 마주친 그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본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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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집에 가서 발 씻고 눕고 싶을 것이다. 나도 얼른 집에 가서 발 씻고 침대 위에 눕고 싶다. 그렇지만 지금 이대로 여기에 앉아 있고 싶기도 하다. 서희가 당산역으로 올라가는 게 보인다. 어쩌면 크리스 마틴은 서희가 나를 만나러 간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내게 온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다 마주친 게 아닌 거지. 그렇지 않고서 야 평생 크리스 마틴을 만날 일은 없다. 이게 꿈이면 모를까. 서희와 함께 모텔에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크리스 마틴이 서희의 남편이 될 사람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커피가 식어서 맛이 없다. 쿼터 치즈 파운드 버거를 하나 먹을까? 아니다. 집에나 가자. 당산역으로 올라가 플랫폼 앞에 선다. 곧이어 지하철이 들어온다. 당산철교를 건너는 동안 한강을 바라본다. 깜깜한 어둠 속에 한강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지하철 문을 열고 철교 위에 걸터앉는다.
서희가 결혼한다는 소식은 페이스북을 통해서 알았다. 서희는 콜드플레이를 좋아했다. 김승옥을 좋아했고, 윤상을 좋아했다. 나는 서희가 좋아하는 것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콜드플레이의 노래 중에선 ‘사이언티스트’를 가장 좋아한다. 김승옥의 소설 중에서는 ‘내가 훔친 여름’을, 윤상의 노래 중에선 ‘넌 쉽게 말했지만’과 ‘영원속에’를 좋아한다. 서희는 딸을 낳으면 이름을 사과로 짓고 싶다고 말했다. 크리스 마틴이 애플이라고 지었으니, 자신은 사과라고 짓겠다고 했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마음에 드는 척했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도. 서희의 결혼도. 크리스 마틴도. 콜드플레이도. 애플도. 스티브 잡스도. 조너선 아이브도. 비틀즈도. 빌어먹을 비틀즈. 당산도. 당산철교도. 무엇 하나 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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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는 것이 없다. 서희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는 번호는 6431이 전부였다. 그것만으론 전화를 걸 수 없었다. 찾아내려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었겠지만 찾지 않았다. 전화를 걸고 싶지만 전화를 걸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결혼할 사람이니까. 어차피 나와는 멀어진 사람이니까. 그런데 왜 보고 싶은 걸까? 왜 이렇게까지 기분이 개판인 걸까?
개판. 개떡. 무지개떡. 송편. 절구통. 달에 사는 토끼.
눈을 뜨면 아마도 아침일 것이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출근을 할 것이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열심히 일하는 척을 할 것이다. 회사는 언제 그만둘까, 생각하겠지. 그렇지만 그만두지 않을 것이고, 그러는 사이에 서희는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아이를 낳고,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내고, 어쩌다 우연히 내 생각을 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곤 죽겠지. 내 알 바 아니다. 지하철에서 내려 집을 향해 걸어간다. 누군가 내 어깨를 건드리면 죽여버릴 생각이다. 누군가 톡, 어깨를 건드린다. 뒤를 돌자 거대한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달린다. 질 싸움을 시작할 필요는 없다. 때론 도망치는 게 가장 좋은 수가 되기도 하니까. 그리고 눈을 뜨면 아침이겠지. 아침. 점심. 저녁. 밤. 새벽. 24시간 편의점. 세븐일레븐. 삼각김밥. 도시락. 샌드위치. 양상추. 햄. 치즈. 계란. 식빵. 파리바게뜨.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파리 5구의 여인. 여인숙. 모텔. 서희. 가슴. 다리. 입술. 콘돔. 열쇠. 결혼. 반지. 웨딩드레스. 부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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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짬뽕. 브라질산 원두로 내린 핸드드립 커피. 스타벅스. 맥도 날드. 영등포가 아닌 당산. 꿈. 나열. 희망. 절망. 끝. 시작. 영원속에. 과학자. 추운 날의 놀이. 6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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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소리 jongsoriz@naver.com waterai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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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제목 그대로입니다. 어디에서 영감을 받으셨나요? 페이스북, 콜드플레이의 <사이언티스트> 뮤직비디오. 작품을 아브락사스에 보내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발행인이니까. 무슨 일을 하시나요? 지금 질문에 답하고 있지 않습니까. 무엇을 하실 때 즐거우신가요? 즐거운 것을 할 때 즐겁지 않겠습니까.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권위’라는 말이 정말 싫습니다! 작품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즐겁지만 괴로운 놀이. 생산자도, 수용자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해주세요. 자문자답.
맛집을 추천해주세요. 군산 수송반점 짬뽕과 탕수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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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락사스 20 인터뷰 원 모어 타임 초판 1쇄 발행 — 2014. 2. 27 기획, 편집 — 김종소리 디자인, 발행 — 물질과 비물질 인쇄, 제책 — 태산인디고 ISBN 979-11-952178-1-6 04810 ISBN 979-11-952178-0-9 (세트) 문의 — hello@waterain.kr 이 책에 실린 작품의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으로 복제하시거나 배포하시면 안 됩니다.
아브락사스
물질과 비물질
아브락사스는 매 호, 주제를 정하여 작품을 모집하고,
물질과 비물질은 디자인 스튜디오이자, 출판사입니다.
이를 한 권의 책으로 엮습니다.
우리는 물질세계에서의 삶을 통해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비물질을 생산하고, 이를 물질로 환원합니다.
abraxaszine.com waterain.kr
아브락사스 20
아브락사스 인간의 몸에 수탉의 머리를 갖고, 두 개의 다리는 뱀으로 이루어진 그노시스파의 신 20 십의 두 배가 되는 수 인터뷰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개인이나 집단을 만나 정보를 수집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 원 모어 하나 더(의) 타임 과거로부터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는 무한한 것 — 인터뷰 원 모어 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