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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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MPLATION•SHARBONG
10
해방술•智慧
20
망향•홍구김
22
환상 속의 그대•윤준협
24
블랙아웃•조수희
30
낯짝•김종소리
32
RE:•mari kim
50
덩실덩실•엄수민
58
음주, 가무•김예슬
60
뭐라도 기억이 나야 말이지•이주연
62
무제•inshalla
64
Realist가 되자•배영란
66
심화•김가혜
76
심야산책•박민우
80
엄마의 자리•위은옥
90
황홀경•김지은
112
아우라•문모운
114
Yes or No•수야
136
화이트아웃•이상준
142
사랑은 딩벳으로 쓰세요•황은정
154
크레딧
158
판매처
술 좀 그만 마십시다. 좀 더 보람찬 삶을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보람 같은 소리 하지 말고, 그냥 삽시다. 어차피 죽으면 끝이니까 순간순간 좋은 것만 하면서 삽시다. 세상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알 바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나 좋은 대로 살면 그만 아닙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일까요? 책임감을 가지고 타인들을 위해 살아가는 게 잘 사는 것일까요? 자신을 위해 책임들을 저버리고, 타인에게 도움 받으며 순간에 충실하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일까요? 잘이고 나발이고, 병나발만 불면 이런 고민들은 쉽게 사라집니다. 그 순간은 이것도 저것도 다 필요없습니다. 술 마시며 삽시다.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삽시다. (노래 못 부르는 사람한테 노래 부르라고, 춤 못추는 사람한테 춤추라고 강요는 하지 마십시다) 왠지 모르게 한숨이 나오네요. 글로는 쉽게 쓰면서도, 정작 삶에서는 주구장창 고민만 하며 살고 있는 것 같네요. 고민이 많으면 머리가 빠집니다. 머리가 빠지면 대머리가 되고요. 대머리가 되면 그렇지 않아도 없는 인기 더 없어집니다. 그러니 이만 자렵니다. 안녕히 주무시지 마시고, 캔맥주 사다 마시며 재밌게 읽어주세요! 전 잘게요! 2013. 4. 15. 월 am00:19 이불 안에 엎드려서, 블루먼데이에 시달리며. 아발 김종소리.
SHAR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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智慧 모쪼록 그리며 살려고 공부중 ji_r@naver.com instagram@merrymunji 술...조앙.
abraxas vol.17
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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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구김 twitter@honggooo 나는 그곳에 있기를
망향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술 마시다 노래하고 춤추고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술 마시고 노래하고 술 마시다 춤추고 술 마시며 노래하며 춤추고 술 마시다 노래하다 춤추다 하고 술 마시고 술 마시고 술 마시고 노래하고 노래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춤추고 춤추고 나는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나는 나와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술 마시면 노래하고 술 마시면 춤추고 술 마시면 술 마시고 노래하면 춤추고 나는 없는 곳에서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나는 없는 술을 마시고 없는 노래를 하고 없는 춤을 추고 술 마시고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나는 없는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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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준협 2wnsguq2@naver.com pieces.perl.sh 편린, 스물한 살
뻔하지만, 이것은 도덕에 관한 이야기이다. 12월 21일이 지났지만 세상은 그대로였고, 1월 21일, 2월 21일이 지나도록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내 머리칼과 수염, 손톱 발톱 뿐이다. 나는 놀랍도록 그대로다. 여전히 허공에서 물고기가 헤엄친다느니, 방에서 눈이 내린다느니, 좀비가 튀어나온다느니 하는 거짓말을 하면서 살고 있다. 이틀에 한 번씩 머리를 감고, 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 쉽게 말하자면 나는 안여돼 같은 것이다. 나 같은 아들을 둔 엄마들한텐 미안하게도,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종말이 오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한 날 – 아침엔 늘 그렇듯 변비와 전쟁을 하고 씻고 옷 입고 하는 일련의 과정 들을 거친 날이었다. 더불어 말하자면, 나는 종말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많이 우울했다. –나는 친구와 술을 마셨다. 에라이, 종말이 다 무어냐. 우리는 ‘소주병 만 두부김치를 먹었던 것 같다. 밑반찬으로 뻔데기도 나왔던 것 같다. 콩나물국도 나왔고. 중요한 것은, 내 젓가락은 짝이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환상 속의 그대
휘날리며’ 라는 변태 같은 이름의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기억은 잘 안 나지
디테일은 중요하다. 혹시 알까, 내가 나중에 위대한 인물이 된다면 평론가들 은 내 글의 디테일을 살피며 ‘상징’ 같은 것을 찾아낼 것이다. 과연 두부김치 와 뻔데기, 콩나물국을 관통하는 시상은 무엇인가! 그리고 짝이 맞지 않는 젓가락은 무얼 의미하는가! 생각해보시라. 뭐 아무튼, 우리는 술을 먹고 늘 그렇듯 노래방에 갔다. 그리고 나는 서태지의 ‘환! 상! 속엔 그! 대 가 있!다!’를 불렀다. 어디 서태지를 부르면서 노래만 했을까. 나는 老軀를 이끌고 춤을 췄다. 난 슬플 때 힙합을 춰. 제기랄, 종말은 왜 안 와서 나를 이렇게 우울하게 하는가. 씨발놈들아, 결코 시간이 멈추어질 순 없다 요! 그대는 새로워야 한다! 하나 둘 셋, 렛츠 고!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어느 술집이었다. 낯선 음악소리가 귀를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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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눈에 익은 듯 하여 한참을 멀뚱멀뚱하고 있다가 무릎을 탁! 쳤다. 여기는 신촌 우드스탁이 아닌가. 마침 앞에 맥주가 놓여있었다. 그래, 나는 무엇이든 소비할 자세가 되어있다. 그러니 어서 맥주와 음악을 대령하거라. 돈은 되는 대로 쓰겠다. 그렇게 나는 계속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셨다. 어쩌면 내 주량을 조금 넘겼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은 새벽 두 시를 향해서 열심히 달려가고 있었다. 왜 술 마시면 시간이 빨리 가는지 모르겠어. 분명히 이건 조작이야. 누군가가 술 마실 때마다 내 옆에 숨어서 시간을 빨아들이는 거야. 두고 봐, 내가 증명하고 말겠어. 하는 생각을 하는데 진짜로 누군가가 내 옆에 턱, 하고 앉았다. 아 깜짝이야. 그런데, 여자다. 게다가 푸른 눈이다. 나는 조금 당황한다. 어어, 하이! 그녀는 말보로 레드를 물고 한 손엔 맥주를 든 채 말을 걸었다. 자기는, 프랑스인이라고 했다! 흐흐, 프랑스인들은 영어를 못 한다는 소리를 어디서 주워들었다. 자신감이 조금 상승했고, abraxas vol.17
나는 꼬부랑 발음으로 그녀와 대화를 나눴다. 한국엔 왜 왔어요? 공부하러 왔어요. 이화여대 다녀요. 아, 정말요? 대화가 여기까지 이어졌을 때 나는 내 영어실력이 한계에 도달했음을 깨달았다. 아니, 도대체 이 여자가 뭔 얘기를 하는겨. 내 유치원에서 둘리 비디오로 영어를 배운 사람인데 영어를 이렇게 못 하는 거였다니! 때마침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음악이 흘러나왔고, 나는 스리슬쩍 주제를 음악으로 바꿨다. 그러면 그나마 말이 통하겠지. 앤써니가 어쩌고저쩌고, 나는 이 곡이 좋고 싫고. 그래도 음악 얘기를 하니 그나마 말이 통했다. 역시 처세술은 중요한 것이다. 물론 영어는 더 중요하고. 아무튼 우리는 계속 이야기를 했고, 말문이 막히면 짠!을 했다. 짠은 참 좋은 것이다. 그러다가 나는 스리슬쩍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종말이 오면 뭘 할 건가요? 그녀는 맥주를 들이키더니 자기는 약을 할 거라고 했다. 그 순간,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자리를 옮길까요? 그 다음부턴 잘 기억나지 않는다. 택시를 타고 그녀의 집으로 온 것 같다. 새벽 네 시 이쪽저쪽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우리가 섹스를 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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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그냥 약을 했을 뿐이다. 사실 그녀가 마리화나를 권했을 때 조금 두려웠지만, 이때가 아니면 언제 마리화나를 할까, 하는 마음에 불을 붙였다. 딱 여기까지 기억이 난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나는 적잖이 놀랐다. 어떻게 내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지. 이런 일은 영화 속에서나 보던 것이 아닌가. 눈을 뜨니 그녀는 싸늘한 시체로 내 옆에 누워있었다. 처음엔 그녀가 죽었다는 것을 몰랐다. 뭔가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져 의아스러웠고, 그녀가 잠든 것이라 생각해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그녀의 머리가 반대편으로 돌아갔고, 뒤통수엔 피가 굳어있었다. 뒤통수를 무언가로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너무 놀라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실은 술기운과 약기운이 남아있어 정신이 없기도 했다. 상황을 이해하고 나서 나는 흉기를 찾았다. 설마 내가 죽인 것인가. 그렇다고 하면 어서 흉기를 찾아 없애고 여길 떠나야 한다. 떠나기 전엔 지문도 없애야 한다. 나는 기억이 없다. 신고를 할까 했지만 나는 지난밤에 그녀와 마리화나를 피웠다. 진퇴양난 첩첩산중. 도대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환상 속의 그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내가 저지른 일이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어서 흉기를 찾고 지문을 지우고 여길 떠야 한다. 걸리면 살인에 마약에 도대체 나는 몇 년을 살아야 하는 거야. 아니, 사형을 당할지도 몰라. 어서, 흉기를 찾자. 그렇지만 눈으로만 찾아야 한다. 이리저리 뒤집고 다니면 온 사방에 내 지문이 남을 것이다. 아, 혹시 소화기가 있나? 예전에 만화에서 봤는데, 소화기를 온 사방에 뿌리면 지문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그래, 소화기를 찾자. 그리고 흉기를 찾는 거야. 소화기는 빨가니까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소화기, 소화기가 어디 있지? 이후의 일은 평범한 다른 이야기들과 똑같다. 나는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터미널 앞에서 담배를 피웠는데, 담배연기가 왼쪽 눈에 들어가 버렸다. 눈이 따끔거리고 눈물이 나왔다. 눈물을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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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지루해졌고,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하나를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영이든 광주든 춘천이든 강릉이든 가야만 할 것 같았다. 왜 있지 않은가, 성장소설 특유의 흔해빠진 서사. 기차를 타면 기차 안에서 누구를 만난다거나, 바다를 보고 있을 때 누구를 만난다거나 그런 것들. ‘누구’ 는 주로 젊은 여성일 것이다. 어쩌면 나는 그런 것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은 홀든 콜필드가 살아있을 때에나 일어나던 일들이다. 2013년은 홀든 콜필드가 죽어버린지 오래된 해. 나는 어디로 떠나도 그 누구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고향으로 간다. 그리고 다시 ‘소주병 휘날리며’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종말이 오지 않아서 우울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두부김치와 뻔데기를 집어 먹을 것이다. 물론 젓가락은 짝이 맞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노래방에 들어가 서태지의 ‘환상속의 그대’ 를 부를 것이다. 그러나 춤은 추지 않기로 abraxas vol.17
한다. 나는 목석같이 서서 랩을 한다. 환상 속엔 그대가 있다. 모든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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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환상 속엔 아직 그대가 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은 진짜가 아니라고 말한다.
조수희 독립잡지에 관심이 매우 많은 휴학중인 유학생. soohee0306@gmail.com cargocollective.com/soohizz 무엇이든 도가 지나치면 독. 음주가무의 피할 수 없는 적 블랙아웃에관하여. 어젯밤, 나의 뇌가 흡수하지 못한 무언가들에 관하여
김종소리 21세기 주정뱅이 담배쟁이 가난뱅이 거짓말쟁이 소년 jongsoriz.tistory.com
‘무슨 낯짝으로 여길 왔을까?’ 상철은 호텔 건물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전 여자친구의 결혼식. 미련이 남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웨딩드레스를 입은 수경의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다. 입구에서 수경의 이름을 찾았다. 수경의 결혼식은 3층에서 진행되는 모양이었다. 상철은 식장으로 올라가기 전에 화장실에 들렸다. 소변을 보고 손을 닦으며 거울 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냥 집에 갈까?’ 오는 내내 몇 번이고 되뇌었던 문장이 다시금 떠올랐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되돌아가면 평생 후회가 남을 것 같았다. 화장실을 나오자, 멀찌감치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수경을 그에게 소개시켜줬던 형준이었다. 상철이 곁으로 다가가자, 형준은 흘낏 상철을 보더니, 잠시 멈칫거리곤 태연하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 형준이 상철에게 손을 내밀었다. 상철은 웃으며 형준의 손을 잡았다. 낯짝
“그러게. 진짜 오랜만이다. 졸업한 이후로 본 적이 있던가?” “네가 올 줄은 몰랐는데…” 형준은 상철이 묻는 말에 대답은 않고, 딴 소리를 하며 말끝을 흐렸다. 상철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랬겠지. 누군들 내가 여기 올 거라는 상상을 하겠냐?” “수경이랑은 인사했어?” “아니. 내가 무슨 낯짝으로 수경이랑 인사를 하냐? 그냥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이나 슬쩍 보고 가려고 왔어.” “축의금은?” “축의금은 무슨… 내가 무슨 낯짝으로…” “야. 축의금이랑 낯짝은 다른 얘기지.” 형준이 웃어 보이며 상철의 어깨를 툭 쳤다. 상철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누그러졌다. “넌 누구랑 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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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그냥 왔지 뭐. 오면 애들 있겠지, 하고.” “다른 애들도 많이 왔어?” “응. 강현이랑 수진이랑 우리 동기들은 거의 온 것 같아. 저쪽에 다들 앉아있어.” 친구가 식장 안쪽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상철은 식장 안을 들여다보았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미안한데 넌 나랑 같이 있어주면 안 되냐? 식만 끝나면 바로 갈 건데.” “그래도 기왕 온 거 애들이랑 인사는 해야지.” “내가 무슨 낯짝으로…” 형준은 상철의 이야기에 웃음을 터트렸다. “자꾸 아까부터 웬 낯짝 타령이야? 그럴 거면 뭐 하러 왔어?” “그러게. 난 여기 뭐 하러 온 걸까? 내가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abraxas vol.17
긴장이 되냐?” 상철은 손에 난 땀을 바지에 닦았다. 형준은 상철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가서 인사나 해. 식 끝나고 오랜만에 다 같이 술이나 한 잔 하자.” 상철은 형준을 따라 식장 안으로 들어섰다. 식장 정면에 프로젝터로 수경과, 곧 있으면 수경의 남편이 될 남자의 사진이 비쳐지고 있었다. 상철은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찍이 서서 수경이 들어가는 모습이나 지켜보고 나올 속셈이었는데 일이 커진 것 같았다. 동기들은 식장 왼쪽 끝 쪽에 위치한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테이블 쪽으로 가자 동기들이 상철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얼굴 위로 당황한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야. 상철이 왔다.” 형준이 말을 건네자 동기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상철을 맞았다.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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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뭐 해?” “기자 한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할 만해?” “여자친구는 있어?” 상철은 웃으며 그들의 물음에 답하고, 그들이 질문한 것들을 그대로 되물었다. 다들 수경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마치 ‘수경’이 금기어라도 되는 것처럼. 상철은 자신의 웃음이 쓰게 느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 오는 건데.’ 물론, 상철이 상상했던 시나리오들 중에 이런 상황이 없었던 것은 아니 었다. 이런 상황이 온다면 대충 넘기고 슬쩍 빠져나가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하지만 상철은 빠져나가는 대신, 자리를 잡고 앉아, 빵을 집어 들고, 맥주를 따서 컵에 따랐다. 떡을 집어먹고, 오렌지를, 청포도를 집어먹었다. 맥주를 들이켜고, 형준의 잔에 맥주를 따랐다. 계속 먹고 마시며 애써 어색한 분위기를 이겨내려 노력했다. 낯짝
상철은 수경과 헤어진 뒤부터 동기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헤어진 이유가 동기들에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상철은 동기들에게도 어느 정도 잘못이 있다고 생각했다. 수경은 그들과 같은 학교가 아니었다. 형준과는 상철과 사귀기 전부터 같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기에 친한 사이였지만 그 외의 동기들과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 상철과 사귀기 시작하면서 휴학생이었던 수경은 상철의 학교로 자주 놀러왔는데, 근처 학교에 다니던 그녀의 자취방 이 상철의 학교와 가까운 탓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동기들과의 술자리에 수경이 동석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후론 자연스레 그런 자리에 수경이 참석했고, 가끔씩은 수경의 자취방에 모여 함께 놀기도 했다. 처음에 상철은 마냥 즐거웠다. 자신의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수경이 보기 좋았다. 하지만 그런 자리가 반복되면서 상철은 점차 상황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동기들이 수경을 상철의 여자친구가 아닌, 친한 동기처럼 대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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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었고, 그런 반응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수경도 싫었다. 상철 없이도 수경은 동기들과 연락을 주고받고, 함께 놀기도 했다. 수경이 매력적인 부분을 가지고 있는 건 분명했고, 동갑내기 친구들끼리 다른 학교든 같은 학교든 친하게 지내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도가 심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는 상철이 형준에게 이런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형준은 상철이 너무 예민한 것이라며 이야기를 넘겼다. 상철은 형준의 말처럼 자신이 너무 예민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수경과 동기들의 관계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수경에게 동기들과 놀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수경이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으니까. 수경과 헤어진 뒤, 상철은 형준을 비롯한 동기들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들 중 어떤 놈이 수경의 마음을 빼앗아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abraxas vol.17
들었기 때문이었다. 상철은 식장 정면에 비쳐지고 있는 수경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수경의 옆에 있는 남자는 전혀 모르는 남자였다. ‘동기 중 다른 녀석이 저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상철은 아마 그 자리에 앉아있지 못했을 것이었다. 상철은 두 병째 맥주를 땄다. “너무 마시는 거 아냐?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형준이 맥주를 뺏어 상철의 잔에 맥주를 따랐다. “알 게 뭐냐.” “그래. 마셔라.” 상철은 테이블에 놓인 메뉴를 보았다. 갓 구운 빵, 계절 과일, 시저 샐러 드, 버섯 크림 스프, 구운 아스파라거스와 토마토가 곁들여진 안심 스테이크, 잔치국수. 호텔 결혼식답게 코스요리가 나오는 모양이었다. 상철은 메뉴 중 잔치국수가 생뚱맞게 느껴졌다. 마치 그 자리에 앉아있는 자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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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국수도 나오나본데?” 상철이 형준에게 물었다. 형준은 메뉴를 들어 훑어보더니 웃었다. “그러게? 호텔 결혼식은 처음인데 스테이크도 나오네?” “스테이크야 당연히 나오는 건데, 잔치국수는 뭐냐? 어르신들도 오셔서 그러나?”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냐?” 상철은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테이블 위에 놓인 맥주를 세 보았다. 6병. 6병이면 식 마칠 때까지 끊임없이 마실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너 지금 맥주 셌지?” 형준이 물었다. “어떻게 알았냐?” “여전히 술 좋아하는구나?” “아니야. 요즘엔 술 자주 안 마셔.” “자주는 안 마셔도 마시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마시는 거 아냐?” 낯짝
상철은 대답 없이 맥주를 마셨다. 형준도 상철을 따라 맥주를 마셨다. 동기들은 어느 순간부터 상철과 형준에게서 관심을 돌리고 그들끼리만 대화를 주고받았다. 식은 여느 결혼식과 다를 바 없이 진행됐다. 양가 부모님이 입장하고, 신랑이 입장했다. 수경이 입장하고, 반지를 나눠 끼우고, 서약문을 낭독하고. 신랑이 직접 기타를 들고 축가를 불렀다. 어찌 그리 예쁜가요 어찌 그리 예쁜가요 어찌 그리 예쁜가요 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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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 같다면 바보라고 날 놀릴 텐가요 그녀는 딴 건 몰라도 내 눈에 마음에 쏙 들어요 작은 사마귀도 난 부끄럽지 않죠 믿어요 코에 손가락을 넣어도 떠나진 않을게요 정말 내가 미쳤나봐요 제 정신이 아니죠 마시멜로우를 먹는 기분이야 이렇게 어찌 그리 예쁜가요 어찌 그리 예쁜가요 abraxas vol.17
어찌 그리 예쁜가요 그녀는 내가 줄 수 없는 것 빼고 모두 다 다 줄게요 어때요 지금 눈에 보이는 무엇이든 다 말 해봐요 달도 좋고 해도 좋고 저기 저 별까지 다 그리 비싼 것 말고는 뭐든 다 사줄게요 정말 내가 미쳤나봐요 제정신이 아니죠 마시멜로우를 먹는 기분이야 이렇게 어찌 그리 예쁜가요 어찌 그리 예쁜가요 어찌 그리 예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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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지랄하네.’ 상철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4병째 맥주를 땄다. 지겨운 주례사가 이어지고, 신랑 신부의 퇴장을 끝으로 식이 마무리됐다. 상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 형준이 물었다. “집에.” “왜? 밥은 먹고 가야지.” “아냐. 마주치고 싶지 않아.” “누구랑? 수경이? “뭘 물어.” 낯짝
“그럼 뭐 하러 왔어? “나도 몰라.” “야. 어차피 수경이도 너 봤을 거야. 인사 정도는 하고 갈 수도 있잖아.” “됐어. 그러다 남편이 눈치라도 채면 곤란해.” “그럼 같이 갈까?” “됐어. 네가 왜?” 상철은 동기들에게 인사를 했다. 동기들은 밝게 웃으며 잘 가라는 인사를 건넸다. ‘잘 가라는 게 아니라 빨리 갔으면 싶었겠지…’ 상철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후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봄날의 햇빛이 따사롭게 내리쬐고 있었다. 어딘가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담배를 꺼내 입에 무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상철을 툭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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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가자.” 형준이었다. “야. 넌 뭐 하러 온 거야? 난 네가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랬겠지.” “무슨 생각으로 온 거냐?” “나도 몰라. 그냥 오고 싶더라고.” “그냥이 어딨어. 생각 많이 했을 거 아냐.” “사실 지난주에 수경이 만났어.” “수경이랑 만났다고? 둘이?” “응.” 둘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서있었다. “너 이상한 생각하는 거 아니냐?” abraxas vol.17
상철이 웃으며 물었다. “그런 거 아니야.” “설마 잤겠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결혼 앞둔 전 여자친구랑 자는 게 말이나 되냐?” “하긴 그럴 린 없겠지?” 형준이 멋쩍게 웃었다. “소주나 한 잔 할래?” 상철이 형준에게 물었다. 형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터덜터덜 강남 한복판을 걸었다. “뭐에 마실까?” 형준이 물었다. “냉면 먹자.” “냉면? 갑자기 웬 냉면?” “그냥 냉면이 먹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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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철은 그냥 냉면이 먹고 싶다고 답했지만, 실은 그냥은 아니었다. 냉면은 수경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냉면 중에서도 물냉면. 코끝이 시릴 정도로 겨자를 듬뿍 친 물냉면. “냉면에 소주? 좋네.” 둘은 대로변에 있는 24시간 설렁탕집에 들어갔다. 형준은 비빔냉면을, 상철은 물냉면을 시켰다. 그리고 소주도 한 병. 먼저 나온 소주를 각자의 잔에 따르고 한 잔 마셨다. “넌 비빔냉면이 좋냐?” “응. 넌 물냉?” “아니. 나도 비냉.” “근데 왜 물냉을 시켰어?” “그냥.” “아까부터 자꾸 그냥 타령이네?” “그냥.” 낯짝
“그냥은 무슨 그냥이야. 수경이 물냉을 좋아했나?” 상철은 대답 없이 웃으며 잔에 소주를 따랐다. “아직도 미련이 남은 거야?” “아니. 헤어진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미련이 남았겠냐?” “근데 뭔가 분위기가 씁쓸해하는 것 같은데?” “왠지 그런 느낌이 들긴 해. 그렇다고 미련이 남은 건 아니야.” “수경이랑 만났다며. 그날은 무슨 얘기했냐?” “그냥 별 얘기 안 했어. 그냥 어떻게 사는지. 결혼할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그런 뻔한 얘기들 있잖아. 생각해보면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그런 상황이었어.” “자연스럽게 그려지진 않는데?” “대충 그려지는 건 있잖아.” 둘은 두 번째 잔을 들어 마셨다. “그럼 오늘은 왜 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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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그냥은 자꾸 무슨 그냥이야.” “그냥. 뭔가 오고 싶었어. 나도 생각은 많았지. 내가 왜 가고 싶은 걸까? 가서 뭘 어쩌겠다고? 가서 동기들 만나면 뻘쭘할 것 같은데, 그냥 가지 말까? 여자친구한테 거짓말하고 오는 것도 싫었고. 그렇지만 뭔가 그냥 안 가면 안 될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웨딩드레스 입은 수경의 모습을 실제로 보고 싶기도 했고. 상상만 하던 모습이니까. 그 모습을 실제로 보고 싶었던 걸까? 모르겠어. 단순히 딱 집어서 뭐라고 할 만한 게 없어.” 세 번째 잔을 따르는데 냉면이 나왔다. 상철은 냉면을 가로로 한 번, 세로 로 한 번, 자르고 가위를 형준에게 넘겼다. 그리고 냉면에 겨자를 짜 넣었다. 한 번. 두 번. 쭈욱. 쭈욱. 쭈우욱. “야. 겨자를 무슨, 그렇게 무식하게 넣어? 먹을 수 있어?” abraxas vol.17
상철은 젓가락으로 냉면을 휘저었다. “응. 먹을 수 있어. 수경이는 만날 이렇게 먹었어.” 둘은 소주를 마시고 냉면을 후루룩 빨아들였다. 상철은 국물을 한 입 마셨다. 코 끝에 겨자향이 훅 풍겨왔다. 눈물이 찔끔 났다. ‘대체 이게 왜 좋은 거야?’ 상철은 웃음이 났다. “수경이는 신혼여행 어디로 간대?” “하와이.” 형준은 냉면 그릇에 얼굴을 박고 계속해서 면발을 빨아들였다. “하와이? 좋겠다. 알로하 하와이? 춤추는 여자들도 있고? 꽃목걸이 만들 어서 주고 하는 그 하와이? 결혼은 호텔에서 하고, 신혼여행은 하와이로 가 고? 좋겠다. 남자가 부자야?” “수경이 만나서 못 들었어? 집에 돈이 좀 있는 모양인가봐. 직장도 좋고.” “직장이 어딘데?” “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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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철은 소주를 마시고 잔에 소주를 따랐다. ‘삼성…’ “기자 나부랭이랑은 레벨이 다르지.” “나 버리고 갈 만하네.” 형준이 젓가락을 입에 댄 채 눈을 치켜뜨고 상철을 바라보았다. “수경이가 널? 네가 헤어지자고 한 거 아니었어?” “내가? 아닌데.” “난 네가 헤어지자고 한 줄 알았는데?” 상철은 수경과의 마지막 날을 떠올렸다. “달라졌어.” 수경이 말했다. “그래. 나도 알아. 그렇지만 너도 달라졌어.” “알고 있어.” 낯짝
“헤어지자는 이야기지?” 수경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상철은 무덤덤한 자신에게 놀랐다. 예상해오던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라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철은 수경과 계속 사귀고 싶었다. “그래.” 상철의 대답에도 수경은 여전히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별의 순간에 취할 법한 태도였다. 상철은 수경의 태도가 싫었다. 상철은 생각했다. ‘이별의 순간엔 어째서 누군가는 가해자가 되고, 누군가는 피해자가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왜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어? 테이블에 뭐 재밌는 거 있어?” “아니.” “그럼 뭐 잘못한 거 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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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 남자라도 생긴 거야? 아니. 딴 남자가 생겼더라도 그게 뭐 네 잘못이야? 사랑이 맘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까 고개 들어.” 상철은 수경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건 둘이 오랜 시간을 거치며 갖게 된 버릇이었다. 일종의 위로법이랄까? 수경은 상철의 손길에도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앉아있었다. “잘잘못 따질 생각 없어.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런 거야. 이유도 묻지 않을 게. 네가 원하는 대로 그렇게 하자. 대신 지금 이렇게 우울하게 있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별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잖아. 안 그래?” 그제야 수경은 고개를 들고 상철을 쳐다보았다. 상철은 수경과 단 둘이 처음 만난 날 수경의 표정이 떠올랐다. 수경은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어?’ 라는 눈빛으로 상철을 쳐다보았다. 상철은 그런 수경을 안았고, 귀에 대고 abraxas vol.17
속삭였다. ‘좋아해. 나랑 결혼해줘.’ 수경은 상철을 밀쳐내는 대신 코웃음을 쳤다. 마치 기가 찬다는 듯이…. “너 미쳤어?” 추억에 잠긴 상철을 깨운 건 수경의 목소리였다. “아니?” “나 다른 남자 생긴 거야. 근데 넌 괜찮다고?” “괜찮다는 게 괜찮다는 게 아니고, 그걸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거잖아. 그래서 그럴 바엔 그걸 억지로 돌릴 생각이 없다는 거야.” “미친놈.” 수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철은 수경의 손을 잡았다. “잠깐만. 헤어지는 건 헤어지는 거고. 대신 오늘만 나랑 있자.” 수경은 상철을 벌레 보듯 내려다보았다. “오늘 하루만. 더 이상은 바라지 않을게.” “뭐 할 건데?” “그건 나도 모르겠어. 그렇지만 마지막인데 이렇게 끝내고 싶진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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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떻게 끝내길 바라는데?” “즐거웠으면 좋겠어.” “너 좀 이상해. 알지?” “넌 늘 그 소리를 입에 달고 살잖아. 근데 너도 이상해. 알아?” “내가 어디가?” “나보고 이상하다고 하루도 빠짐없이 이야기하는 게 이상한 거야.” “내가 언제 하루도 빠짐없이 너한테 이상하다고 했어?”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싸우지 말자. 그리고 일단 앉아. 오늘은 즐겁게 보내자.” 다행히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녀의 손을 놓았다. 마치 그것 이 그녀를 놓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이별이 느껴졌다. “뭐 할 건데?” 상철은 잠시 생각해보았다. ‘뭘 하면 좋을까? 함께 자주 가던 기사식당에 가서 소주를 한 잔 할까? 낯짝
아님 늘 가자고 말만 했던 공원에 갈까? 마트에 가서 시식코너를 돌아도 기분이 좋을 것 같다.’ 사실 뭘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수경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갖 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더 수경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랐 다. “넌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그런 게 있을 리 있겠어? 헤어지려고 마음먹고…… 나온… 음! 나왔는 데.” 수경은 상철과 헤어진다는 생각에 목이 메인 것 같았다. “울어?” “아니?” “우는 것 같은데?”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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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긴 뭐가 아니야. 지금 울먹였잖아.” “아니야.” “나랑 헤어지기 싫으면 안 헤어져도 돼.” “아니? 너랑 헤어지고 싶은데?” “왜? 딴 남자라도 생겼어?” “아까 말했잖아. 응. 딴 남자가 생겼어.”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 아닌데?” “거짓말 맞아.” “그만 하자.” “그래.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됐을까?” “몰라. 생각하기 싫어.” abraxas vol.17
수경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랑 더 있기 싫어.” 상철은 다시 수경의 손을 잡았다. “나는 너랑 더 있고 싶어.” “더 있어봤자 계속 이렇게 싸우기만 할 거야. 즐거울 수 없어.” “아니. 즐거울 수 있어.” “아니. 즐거울 수 없어. 그래서 내가 너랑 헤어지려는 거야.” “거봐. 다른 남자가 생긴 거 뻥이지?” “딴 남자 생긴 것도 맞아.” “거짓말하지 말라니까.” “거짓말 아니라니까.” “그러지 말고 좀만 더 있다가 가. 오늘은 서로 웃으면서 헤어지자. 부탁할게.” “계속 있어봤자, 우린 계속 싸우기만 할 거야. 그리고 웃으면서 헤어지는 게 가능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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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철은 수경의 손을 놓았다. 수경의 말이 맞았다. 더 길어져봐야 둘은 더 심하게 싸울 것이었다. “그래. 가.” 상철은 자리에 앉아 물끄러미 수경의 뒷모습을 보았다. 덤덤했다. 상철의 시야에서 새하얀 카페 공간 안의 물건들이 하나씩 사라져갔다. 테이블이 사라지고, 아르바이트생이 사라지고, 카운터가, 소파가 사라졌다. 자리에서 일어서자 상철이 앉아있던 의자도 사라져버렸다. 수경의 뒤를 따라가 다시 손을 잡았다. 수경이 고개를 돌려 상철을 바라보았다. 상철은 수경의 손을 끌어당겨 수경을 안았다. 그리고 귀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사랑해. 우리 결혼하자.” 수경은 상철을 밀쳐내는 대신 코웃음을 쳤다. 상철은 물냉면 국물을 들이켜고 코를 잡았다. “잘못 알고 있는 거야. 난 마지막 날에 결혼하자고 했어. 헤어지자고 낯짝
한 건 수경이고.” “근데 난 왜 네가 찬 걸로 알고 있지?” 형준이 배를 쓰다듬으며 잔을 내밀었다. 상철은 잔에 소주를 따랐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헤어지고 너희랑 연락도 잘 안 하고 그래서 그런 거 아냐?” “그래. 그건 왜 그런 거야? 네가 헤어지자고 한 것도 아닌데.” “그냥. 너희랑 수경이가 잘 지냈으면 하고 바란 것도 있었고. 그냥 별로 너희랑 놀기가 싫더라고. 자꾸 수경이 생각날 것 같기도 했고. 그런데 나랑 그렇게 되고 나서도 너희 수경이랑 잘 만나고 그랬냐?” “응. 자주는 아니었는데, 가끔 만나고 그랬어.” “내 얘기도 하고 그랬어?” “응. 언제였더라? 헤어지고 얼마 안 됐을 때였을 거야. 나랑 둘이 만나서 술 마신 적이 있었어. 그날 술 취해가지고 수경이가 울면서 너 얘기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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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하면서 뭐라더라? 아무튼 너 많이 욕했어. 그래서 난 네가 찬 건줄 알았나보다.” “지가 차놓고 왜 그런 거지? 하여간 이해할 수가 없어. 저번에 만나서도 그러더라고. 날 보고 싶었다나? 아니. 대체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 지가 날 차놓고서. 나는 그날도 결혼하자고 그랬다니까?”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하냐? 저기요!” 형준은 종업원에게 소주를 한 병 더 주문했다.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걔 속은 도저히 알 수가 없어. 뭐가 어딘가가 꼬인 느낌이야. 차라리 솔직해지면 좋을 텐데, 뭐가 문제인지, 솔직해지질 못하는 것 같아.”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나?” abraxas vol.17
“그래. 실은 계속 수경이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거 아냐?” “미친.” “미친은 무슨 미친이야?” “미친.” “미친놈.”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상철은 화장실에 가서 핸드폰을 꺼내 여자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헤어지자.’ 그리고 핸드폰 전원을 껐다. 설렁탕집에서 둘은 소주 6병을 마시고 일어났다. 상철은 형준에게 한 잔 더 하러 가자고 말했지만 형준은 거절했다. 형준은 적당히 하라며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갔다. 상철은 강남 대로변을 혼자 비틀비틀 걸었다. 조금 더 마시고 싶었다. 조금 더 마셔서 필름을 끊어버리고 싶었다. 뭔가를 때려 부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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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집에 가자.’ 상철은 지하철을 타 자리에 앉아 졸았다. 눈을 떠보니 동인천역이었다. 강남에서 탔는데 어째서 자신이 동인천에 와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와 건너편 플랫폼에 서서 토를 했다. 개찰구를 통해 밖으로 나오자 차이나타운 입구가 보였다. 상철은 길을 건너가 택시를 잡아탔다. ‘이거 기억날까?’ 기억이 나든 나지 않든 별로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철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여자친구에게서 문자가 와있었다. 문자는 확인 하지 않고 전화를 걸었다. 여자친구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헤어져.”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헤어져.” “왜 그래?” 낯짝
“헤어지자고.” “대체 왜 그래! 그날 때문에 그러는 거야?” “다른 남자 만난 거 맞잖아.” “아니라니까! 몇 번 말해! 아니라고! 다짜고짜 그러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헤어져.” 상철은 종료 버튼을 누르고 전원을 껐다. “세상에 여자는 많아.” 상철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딴 남자와 뒹구는 여자친구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리고 수경의 얼굴이, 수경의 옆에 서있던 처음 본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남자도 수경일 의심할까? 내가 수경과 만난 것을 알까?’ 알든 모르든 별로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철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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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 Kim uradrugtome@gmail.com twitter@nowwehere 봄이고 낮술하기 좋은데 궁상떠느라 움직이질 않지.
RE: 어떻게 지내는지 연락도 없니. 전화도 안 받고. 오랜만이야 언니. 이야기를 하자면 좀 길어. 마음이 그랬어. 지영이는 잘 도착했어. 언니가 배웅해주지 못해서 걱정이 된다고 했던 게 일 년 가까이 됐나. 잘 모르겠지만 잘 와서 잘 지내고 있어. 아니 언니, 사실 지영이가 결혼을 했어.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스티브라는 남자를 만났데, 그러고 나서 한참을 못 봤어. 통화만 했거든, 스티브랑 한국 여행을 다닐 거라고, 그렇게 또 훌쩍 떠나더니 엽서 몇 장 보내고 언니. 결혼을 한다는 거야. 나쁜 년. 철웅이한테 얘기를 해야 하나 고민하다 언니한테 연락을 해 볼까 했는데, 그럼 또 잔뜩 걱정할까봐. 이제 다 지나고 나서 얘기한다고 너무 화 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철웅이는 방에 박혀 슬퍼만 하고 있는지 꽤 되었어. 내버려둬 언니. 그냥. 내버려 둬. RE:
그래도 우리 지영이 결혼식에는 안 갔다? 잘했지. 그래도 나는 친구니까 혼자서라도 다녀 오라고 철웅이가 그랬는데. 그냥 나도 안 갔어. 종일 철웅이랑 둘이 앉아 술을 마셨어. 지영이가 간다고 했을 때, 언니가 흔쾌히 오라고 하지 않고 좀 힘들다고 얘기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나도 참 나쁘지. 스티브는 언니가 사는 나라 동쪽 끝에서 자랐데, 그 나라 사람처 럼 안 생겼어. 사실 어느 나라 사람처럼도 안 생겼어. 지영이가 왜 스티브를 선택했는지, 나는 이해가 안 돼 언니. 언니가 훌쩍 그 나라로 갔을 때도 나는, 이해가 안 됐어. 말도 잘 안 통하는 형부를 따라서 왜 그 먼 나라까지 가야하 는지. 그 때처럼 지금도, 철웅이랑 나랑 둘이만 남았어. 언니도 지영이가 미웠으면 좋겠어. 그치만 언니는 지영이 마음이 어떤 건지 조금은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더 분해. 사실 그래서 연락을 안했어. 미웠거든. 언니가. 철웅이 마음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한 지영이년이 그 나쁜년이 살아봐야 얼마나 행복하게 살겠어. 했어. 처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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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가는 길에는 이렇게까지 악담하지 않았으니까 속상해 하지 마. 무튼 그러고 나서 좀 지나 지영이한테 연락이 왔어. 철웅이랑 집에 놀러 오라고. 이게 진짜 미친 게 아닐까 생각하다가 철웅이한테 물어나 보자 싶어서 전화를 했는데 - 어. - 야. 지영이가 집들이 오라는데 갈래? 가서 그냥 깽판치고 올래? - 야 말해. 이 망할 년 진짜 가서 머리를 다 뜯어 놓을까봐 - 아. 누나 - 아 갈거야 말거야 너 안가면 나 혼자 간다? 이러니까 철웅이가 그냥 전화를 끊는 거야. 한 시간 반쯤 지나서 애가 얼굴이 빨개져서는 집에 찾아왔어. 언니. 얘는 아직도 마음이 이렇게 약해. abraxas vol.17
그런데 얘가 속상해하고 있는 꼴을 보면 왜 뭐든 부수고 싶어질까. 화가 나서 몸을 가만 둘 수가 없어. 그냥 애 손을 잡아끌고 지영이네 집으로 가자는 생각이 들어서 전화를 걸면서 막 뛰었어. 야 너네 집 어디야 - 너네 집 어디냐고 얼른 말 안 해? 오랄 때는 언제고 씨발. - 뭐? - 그래 지금 갈 건데? 왜? - 어. - 어. - 뭐? - 어. - 어. 택시타고 지영이네 동네에 도착했는데 철웅이가 집에 가겠다고 가버리는거야. 걔 가는데다 대고 내가 가서 다 뒤집어 놓을 거라고 소리를 막 질렀어. 씩씩거리면서 걸어가고 있는데 길 한 쪽에서 술 취한 아저씨가 “근본도 없는 것들이, 근본도 모르는 것들이. 근본도 없는 년들이, 근본도 모르는 년들이. 개놈들” 하고 중얼거렸어. 그 아저씨를 오래 쳐다보다가, 어쩐지 걸음이 느려져서, 저 뒤에서 쫓아오고 있는 철웅이를 봤어. 언니. 나는. 사실은. 지영이가 보고 싶었어. 철웅이 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내 친구니까. 보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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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집에 찾아 가면서는 지영이도 조금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사실 나는 지영이가 미친년 같은 짓을 많이 하는 게 참 좋았는데. 철웅이한테 미안했어. 그렇게 걸어가다 마음이 진정이 안 돼서 지영이네 집 근처 슈퍼에서 맥주 한 캔을 사서 철웅이랑 나눠 마셨어. 우리는 술도 잘 못하잖아. 언니만 잘 마시지. 그래도 술 마시니까 덜 창피하더라. 덜 창피한데 마음은 더 아픈 것 같아. 언니. 언니는 어떨 때 술을 마셔? 나는 잘 모르겠어. 그 날 내가 왜 술을 마셨는지도 지금 생각해보면 잘 모르겠어. 집 앞에서 철웅이랑 한 참을 고민하는데 지영이한테 전화가 왔어. 어디쯤 왔냐고, 길 모르겠으면 데리러 나가겠다고. 얘는 진짜 미친년 인가봐. 다 왔다고 말하고 계단을 올라갔어. 철웅이가 머뭇머뭇 하길래 너 그냥 가도 괜찮다고, 그랬어. 도리질 하더니 따라 올라오더라. 그 때 되니까 솔직히 철웅이가 무슨 사고라도 칠까봐 걱정 돼서 그것 때문에 마음이 RE:
조마조마 했어. 도착했는데 문이 열려있더라/ 지영이 뛰어 나오고/ 뒤에 스티브는 손 흔들고 있고/ 아주 가관이었어. 나 온다고 먹을 것도 막 꺼내놓고 그랬더라고 그런데 지도 철웅이가 올지는 몰랐나보지 뒤에 삐죽삐죽 서 있는 애를 보고 표정이 좀 굳더라구. 그것도 나만 알았지 뒤돌아서 스티브한테 친구랑 친구 동생이라고, 소개 하더라. 철웅이는 뭐 그냥 계속 뚱해서 서 있었지. 그냥. 가서 보니까. 둘 다 뭔가 알아버린 것 같아. 그냥. 되돌릴 수 없잖아. 지영이가 떠나기 전에, 철웅이가 고백했어도 달라질 게 없었겠지. 스티브가 얼른 들어오라고 손을 막 흔들길래 들어가 앉았어. 집 구경 같은 건 하고 싶지도 않고 어떡하지. 아. 뭘 어떡해야 되는 거야. 생각하고 있는데 철웅이가 대뜸 누나 잘 지냈어요? 하고 지영이한테 말을 붙이는 거야. 그 때부터 얘기하기 시작해서 한참 떠들었어. 우리 말고 지영이가.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까 지영이 얼굴이 많이 상했더라. 잘 웃지도 않고, 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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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지가 않아졌어. 스티브는 지영이 친구들은 처음 본다면서, 결혼식을 작게 해서 사람들이 많이 없었다고. 그랬어. 지 혼자만 재밌게 사니까 친구가 없지. 그래도 와줘서 고맙다면서 그런 얘기 하더라. 철웅이는 그냥 표정도 없이 앉아서 홀짝 홀짝 술이나 마시고 있고, 어색했어. 어색하니까 나도 술이나 마시자 싶어서 마셨지. 계속 마셨어. 무슨 얘긴지 모를 얘기 하고 떠들고 그러다 보니까 웃기기도 하고 그래서 웃기도 하고. 그런데 아무래도 지영이 얼굴이 별로 안 좋아 보여서 잠깐 밖에 나가서 얘기 좀 하자고 했어.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지 덥다고 철웅이한테 둘러대고 지영이도 스티브한테 잠깐 걷고 오겠다고 하고, 그 사이에 스티브한테 철웅이가 무슨 얘기라도 할까 걱정되기도 했는데, 애가 많이 취해서 어차피 자기 혼자 중얼거리기나 하겠지 싶더라구. 서울 오고 나서부터 제대로 얘기를 들은 게 없으니까. 어떻게 된 건지도 abraxas vol.17
좀 알고 싶고. 뭐 있겠어 싶어도 괜히 신경 쓰이는 그런 거 있잖아. 언니가 나 연애 할 때마다 물어봤던 시덥잖은 질문 같은 거 그런 거 나도 물어보고 싶고 그렇더라. 무슨 일이 있었냐. 잘 해주냐. 행복 하냐. 뭐 안 좋고 그런 건 아니지.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걸었어. 아무 일 없다고, 행복하다고 웃고 그러다가 갑자기 미안하다고 하더라. 나한테야 그렇다 쳐도 너는 철웅이한테 는 좀 미안해도 된다고 그랬어. 그랬더니 애가 갑자기 우는 거야. 진짜로 미친년처럼 좀 전까지는 행복하다고 웃던 애가. 왜 울고 지랄이야 이제 행복하게 살 일만 남은 년이. 끝까지 다른 말은 않고 울기만 하길래 달래서 들어갔어. 언니. 봄이라고 꽃은 피는데, 친구는 울고 나는 뭘 해야 할까. 나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 생각했어. 나란히 걸으면서 말이야. 옛날처럼 나란히 걸으면서, 웃고 떠들지는 않았지만 계속 마음이 쓰여서, 침울한 표정 이 살짝 스치는 철웅이도, 얘도, 신경 쓰여 죽겠어. 다시 집에 들어가니까 철웅이는 취해서 실실거리고 있고 스티브는 노래 들으면서 흥얼흥얼 하고 있더라. 스티브가 지영이를 한 참 쳐다봤어. 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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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많이 남았다야. 마시자 마셔. 하고 분위기를 띄웠어. 술을 더 마시고 노래도 불렀어. 지영이는 옆에서 젓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쳐가면서 박자 맞춰 주고 나는 아. 뭐든 잊어보고 싶었어. 그래서 더 크게 노래 불렀어. 그러다 지영이도 흥이 났는지 아님 너무 슬퍼졌는지 노래를 부르더라. 언니. 세상에 내가 사람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참 없어. 모르는 가난한 사람들한테 돈을 보낼 수 있는 세계에 살면서, 가까이 있는 사람을 위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언니. 우리가 술을 마시는 건 왜일까. 노래를 부르는 건 왜일까. 우리가 노래를 막 부르니까 스티브가 신이 좀 났는지 우리 밖에 나가서 놀자고 그랬어. 근처에 클럽도 많고 그런 동네니까. 나가서 놀자고. 지영이가 그럴까 하고 비위를 맞췄어. 철웅이는 가끔 지영이를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 숙이고 다시 빤히 보다가 고개 숙이고 그냥 그러고만 있었어. 그래 집에만 RE:
있기도 좀 그렇다. 하고 같이 클럽에 갔어. 가는 길에 스티브한테 되지도 않는 바디랭귀지를 써가면서 이 얘기 저 얘기 했어. 뒤에 걸어오는 지영이랑 철웅이랑 얘기라도 좀 하라고. 좀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갑자기 철웅이가 언성을 높이는 거야. 아 씨발. 큰 일 났다. 했지. “이런 근본도 없는 년, 근본도 모르는 년.” 저 새끼 사고 치는구나. 달려가서 애를 말렸어. 휘청휘청 하고 걸어가니까 스티브가 부축해준다고 따라붙어 오는 거야. 그런데 지영이 이 미친년이 갑자기 막 웃는 거야. 스티브가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까. -잇츠 조킹. 이러더라.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렇게 클럽에 가서 술을 더 마셨어. 아무도 춤은 안 추고 스티브만 여기저기 다니면서 아는 사람들인지 인사 하고 이야기 하고 슬쩍 춤추고 그러더라. 서로들 신경 안 쓰는 분위기가 돼서 슬쩍 일어나 화장실을 갔어. 핸드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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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만지작거리다가 어쩐지 집에 가고 싶어져서 어떻게 말을 하고 가면 좋을까 고민하고 있었어. 그래도 철웅이랑 지영이랑 둘이만 남겨 놓고 가는 건 좀 아닌 것 같고, 자리 비운지도 이미 꽤 지나서 밖으로 나갔어. 나가서 지영이랑 철웅이 보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바에 있던 스티브가 어디로 스윽 걸어가는 거야. 나는 뭔가 싶어서 몰래 따라갔지. 다른 테이블로 슬금슬금 가더니 옷 주머니를 뒤져서 뭘 꺼내더라고.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내 옆을 지나가는 거야. 나는 붙잡았어. 어디 가냐고 스티브는 씨익 웃더니 그냥 나가버렸어. 언니, 내가 모르는 뭔가가 분명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는 스티브를 따라 나갔어. 클럽 옆 골목에서 지갑을 들고 친구들이랑 돈을 나누는 스티브를 봤어. 그러다 한 명이랑 눈이 마주쳤어. 나는 그냥 뛰었어. 어쩐지 뛰어야 할 것 같아서 무작정 뛰었어. 뛰어가면서 나는 그냥. 췄어. 춤을. 춤추면서 속으로 근본도 abraxas vol.17
없는 새끼. 개새끼 하면서 스티브 욕을 했어. 춤을 추고 있는 건지 뛰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사람들이 나를 미친여자로 볼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냥 뛰었어. 나는 그냥 췄어. 춤을. 뛰고, 췄어. 춤을. 뛰고 춤을 필사적으로. 술을 많이 마셔서 집에 어떻게 왔는지도 잘 모르겠고, 철웅이는 지영이 집에 데려다 주고 자기도 잘 들어갔다고 했어. 그러니까 뒷일도 너무 걱정하진마. 언니. 나는 근본이라는 것은 잘 모르지만 말야. 누군가를 괴롭게 하며 살고 싶진 않아. 그런데 언니도 참 나쁜 년이야. 어쩜 그렇게 훌쩍 떠나버릴 수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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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수민 1985년생 2008. 영산대학교 시각디자인 전공 *개인전 2013, 일상은축제18_한글과 그림전 [부평아트스페이스.부산 *단체전 2006. A4 art공모전 '몸'展 [대안공간 반디.부산] 2012. 겨울, 12월, 크리스마스 공모 전시 [바나나롱갤러리.부산] maracash@naver.com http://blog.naver.com/maracash
디자인을 하면서 타이포그라피에 관심이 있었던 나는 영어, 한자보다 한글에 중점을 두었다. 영어는 컴퓨터에 저장된 폰트가 많았고 필기체라는 것이 있어 아름다웠고 한자는 문자 하나의 뜻이 있었고 한글은 초성, 중성, 종성의 합으로 문자 하나가 완성되기 때문에 하나가 삐걱되면 완성이 되지않아 어려웠다. 그러던 중 캘리그라피(손글씨 멋글)라는 것을 접했다. 사진과 글을 합성도 해보 고, 포스터도 만들어 보고, 글만 써보고, 모필붓, 스펀지, 종이, 스텐실…. 여러 가지를 해보면서 고정되있던 삐걱거림이 점점 풀리기 시작했다. 드로잉을 하면서 그림에 글씨를 써넣으면 어떨까 하고 생각을 했다. 봄바람에 날리는 꽃이 그림 꽃이 아닌 글자 꽃이 날리면 어떨까? 이러면서 작품이 하나하나씩 완성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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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슬 asumos@naver.com
음주, 가무
내가 취하면 너는 움직이고 네가 움직이면 나는 취한다 내가 흥얼거리면 너는 음미하고 네가 마시면 나는 노래 부른다 술에 약 탄 듯 물에 술 탄 듯 사랑은 술을 통해 발생한다 내 옆에 앉지 마라, 널 마시면 춤추고 싶고 만지고 싶어진다 밀폐된 곳에 단둘이 있지 마라, 멈춰버린 공간 속에 내가 넘어간다 취하면 움직이고 움직이면 취한다 흥얼거리면 음미하고 마시면 노래 부른다 만지고 싶고 먹고 싶고 그게 바로 음주, 가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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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bebezzu@naver.com bebezzu.blog.me twitter@Z_Meteor 종종 1년만 일찍, 혹은 늦게 태어나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을 합니다. 엎어진 레고를 세워두지 않은 지 오래 되었어요. 펜통을 열어 냄새를 맡는 게 두려워졌고 거침없이 버리는 방법을 알아냈지만 엄마처럼 모든 걸 버리지는 못해요. 대부분의 것을 놓았고 많은 것을 바꾼 계절, 우박이 내리는 이상한 4월. 5년만에 검은색 맥주를 한 잔 먹었고, 아빠랑 엄마는 내일 상하이에 간대요. “이 모든 것들을 어찌 다 전하나요”
변기의 동공으로 뱉어낸 이빨 소용돌이 치는 틈새를 메우려 나는 손톱을 뽑아내었다 무릎으로 다섯 번을 걸어 도착한 리듬엔 악어의 코털이 지독한 모양으로 나부껴댄다 파편을 주워 담아 코털 대신 박아주니 너는 너무 투명해 아무것도 뵈지 않는 초록이 되누나 빨대로 꽂아 먹은 소주의 잔향 반대로 열라는 우유는 배꼽을 안주 삼아 콸콸 쏟아져 흘렀다 팔십팔 년의 가을처럼 새카맣던 밤이여 까진 발꿈치의 살갗을 잘근잘근 씹어 발기던 새벽녘은 흐릿하게 사위어간다 재도 없이
너의 머리를 잡고 몇 개의 욕설을 내뱉으니 분홍색 정수리는 소용돌이 쳤다 미러볼처럼 틈새를 메우려 나는 텀블러를 열어 얼음 몇 개를 쏟아내었다
뭐라도 기억이 나야 말이지
“뭐라도 기억이 나야 말이지”
팔꿈치로 여섯 번을 기어 도착한 무용엔 개미의 음모가 요염한 자태로 표표히 부유한다 거품을 그러모아 음모 대신 박아주니 너는 너무 따가워 쉴 새 없이 찔러대는 누렁이 되누나 빨대 없이 핥아 먹은 맥주의 건지 똥꼬부터 깨물린 요구르트는 초록의 뚜껑을 벗어던져 나신이 된다 팔십구 년 가을 생이 부르짖는 팔십팔 년의 새카만 밤이여 손가락을 넣어 토해낸 나의 오누이는 위액에 잠겨든다 비명도 없이
제목 ‹뭐라도 기억이 나야 말이지›는 바비빌(bobbyville)의 ‹뭐라도 기억이 나야›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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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halla letgodt@gmail.com
무제
*Video URL http://goo.gl/Yp3z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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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란 예술가가 되고 싶은. Dreamer. 아름다운 몽상가. byratelier@gmail.com 1 모든 선배가 다 이렇지는 않습니다. 2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그리 무겁지 않은 일임에 틀림 없기를 그것에 매달리며 고달파 하지 않기를 그러니 나를 사랑해주기를
술자리를 가졌다. 선배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와 내 동기들은 영 불편 하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즐거운 이야기와 캐릭터에 대한 분석 혹은 극의 이야기만 하면 좋을 텐데. 시간이 흘러 가다보면 모두들 배우가
Realist가 되자
연습이 일찍 끝나는 저녁이면 어김없이 단합 겸 친해지기 위한 명목으로
아닌 철학자가 되어 있었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 텔레스, 플라톤에 이어져 최근 근대 철학의 흐름은 뭐니뭐니 해도 독일이지 하며, 헤겔, 칸트, 니체, 쇼펜하우어 등등등… 기억이 가물가물한 철학자들의 이름을 열거하며 목소리가 커지기 때문이다. 배우는 이래야 한다, 작가는 말이야, 예술가의 기본은… 등등등 도통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있으면 그런 날은 어김없이 숙제가 생긴다. “진주야, 너 소크라테스가 무엇을 주장했는지 알지?” “네.. 너 자신을 알라! 요.” “그래! 바로 그거야 너 자신을 알아야해, 그것을 캐릭터에 잘 사용해봐! 니가 연기하는 그 캐릭터를 넌 잘 알고 있니? 분석은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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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했긴 했는데요, 제가…” “그것 봐! 넌 그럼 그 캐릭터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거야, 캐릭터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연기를 한다고 그러니? 내일까지 캐릭터 초목표랑 성장 배경, 1막이랑 2막에서 추구하는 비즈니스까지 전부다 다시 분석해와!” “네,…..” “니체를 생각해봐! 니체는 말이야 Amor fati~ 운명애를 강조했어! 그러니까 각 캐릭터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분명히 있어, 물론 캐릭터들은 그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지만, 결국 이렇게 된 나의 운명 겸허히 아름답게 나의 운명을 사랑하겠소!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짜라투스트라처럼!!!!” 매번 이런 식이다. 술자리만 생기면 어김없이 모두들 철학자가 되어서 abraxas vol.17
서로가 생각하는 예술과 배우의 가치관 등을 마치 주입식 교육을 하는 대한민국의 교육세계를 대변하기라도 하는 듯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들어 보지도 않고 자기 생각만 이야기 한다. 그러다가 기분이 좋으면 다들 즉석에 서 노래를 한곡조씩 뽑아낸다. 내친 김에 노래방이라도 가서 스트레스를 풀면 좋으련만,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배우들인지라 돈 주고 노래는 못 부르겠다고 한다. 그러고는 소주병에 숟가락을 뒤집어 놓아 뮤지컬곡, 가곡 등등 분위기를 더 다운되게 만드는 곡들만 부르고 있다. 더 이상 못 봐주겠다는 표정으로 앉아 있으면 큰일이다. ‘당신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정도는 아니어도, 마치 멋진 뮤지컬을 보고난 후 박수를 치는 것 마냥 박수칠 준비를 하고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도 새벽 4시가 다되어서야 술자리가 끝났다. “내일 연습시간 콜은 오후1시 입니다~. 오늘 많이들 마신 거 같으니 푹 쉬시고들 오세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은행에 가야 했었는데 매번 오전10시에 모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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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0시까지 연습이 계속되니 도통 시간이 나질 않았던 터였다. 늦잠을 자고 싶지만 엄마의 끈질긴 전화 공세로 미래를 생각하여 주택 청약 통장을 만들기로 하였다. 한 달에 50만원도 벌기 힘든 배우 생활 하고 있지만, 까짓껏 푼돈이라도 모아 넣으면 미래에 안전하게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데 누가 마다할 수 있겠는가. “진주야~” 내 이름을 부른 것은 오늘 술자리에서 말이 많았던 은수선배였다. “네 선배님…” “너 집이 영등포라고 했지? 우리 집은 신도림이거든~ 같은 방향인데 함께 택시타고 갈래? 내가 택시비 낼께~” “아…..네..” ‘설마 택시 안에서 또 설교 하시는 건 아니겠지?.. ’ 그러나 오늘 돈이 부족해서 택시 따윈 탈 수 없어, 첫차 운행하는 5시까지 싶었다. “기사님~ 영등포랑 신도림까지 2만원이요!”
Realist가 되자
편의점에서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따라가는 게 낫겠다
술에 잔뜩 취한 선배의 걸걸한 목소리에 기사님은 짜증이 나셨는지 별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이셨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선배의 설교는 택시에서도 이어졌다. 이번엔 어른들이 가장 조심하라는 정치 이야기다…. 그럴 때마다 택시 기사님은 감사하게도 ‘청년이 옳구료’, ‘아는 것이 많아 똑똑하구만’ 등등의 말도 안 되는 대답을 해주고 계신지라, 이 설교는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0분 즈음 지나서 살던 동네에 다다랐다. 혼자 자취를 하고 있어서 내 거취를 알려주고 싶지 않아, 근처에서 내려서 걸어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거 웬일인가. 선배는 늦은 새벽이니 집 앞까지 가주겠다며 따라 내렸다. 맙소사……. “선배님 저 진짜 괜찮아요. 혼자 갈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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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공주를 지키는 기사가 어찌 혼자 갈 수 있단 말이오!! 내가 집 까지 안전히 모시다 드리지요!” “아.. 저 진짜 괜찮은데….” 술에 취해서는 자기 몸도 못 가눌 것처럼 보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냥 집을 향해 앞서서 걸어갔다. 이윽고 어둠과 가로등의 주황색 빛과 어슴푸레 옅어지고 있는 새벽의 공기들이 공존하고 있는 가운데 낯익은 목소리가 조용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보일 듯 말 듯 가물거리는 안개 속에 쌓인 길 잡힐 듯 말 듯 멀어져가는 무지개와 같은 길 그 어디에서 날 기다리는지 둘러보아도 찾을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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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여 힘이 돼주오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이리로 가나 저리로 갈까 아득하기만 한데 이끌려가듯 떠나는 이는 제 갈 길을 찾았네 손을 흔들며 떠나보낸 뒤 외로움만이 나를 감쌀 때 그대여 힘이 돼주오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새벽 4시 반의 노래는 생각보다 슬프진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선배의 모습은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는 우두커니 노래만 읊조리고 있었다. 마침 그 곳을 비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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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가로등이 무대의 조명처럼 보였다. 밝은 빛 을 받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선배의 모습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설교를(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설교다) 하는 선배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 “선배님….” “으응… 진주야. 그래 나 괜찮아 잠시 옛 생각을 했던 것뿐이야” 노래를 멈추고는 터벅터벅 내게로 걸어온다. “선배님 저 이 골목 끝에 있는 집이에요. 이제 돌아가셔도 돼요.” “그래.. 다 왔구나. 근데 내 노래 들었는데 박수 안쳐주네??” “네..? 앗! 네 죄송해요” 짝짝짝짝. 마이크도 없는데 박수소리는 매우 쩌렁쩌렁한 울림으로 골목길을 울렸다. “아.. 제가 노래를 너무 열심히 듣는 바람에…” “고마워. 매번 내 얘기를 열심히 들어주고, 이상한 내 노래 듣고
Realist가 되자
“하하하하 귀여운 녀석. 고마워”
박수도 쳐줘서 말이야” “아, 당연한 건데요.. 언제나 좋은 얘기 해주시고 단점도 잘 꼬집어 주시잖아요…. 사실 저는 이번 공연이 학교 졸업하고 처음이고, 또 돈을 받고 하는 공연이라고 생각하니 매우 떨리구요. 뭔가 막연한 책임감이 들어서요.. 걱정이 되거든요.” “우리 진주 정말 멋진 아이구나. 난 그런 책임감은 가져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너는 정말 좋은 아이야. 좋은 배우가 될 수 있어” “네…?” “술자리에서 하는 그런 따분하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 말이야. 내가 내 선배들한테 들었던 이야기들이거든. 사실 난 소크라테스가 누군지, 니체가 누군지 잘 몰랐어. 나도 내 선배들이 해주는 얘기 듣고 그 후에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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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보고 공부한 거지. 사실 너무 지겹잖아. 그런 개똥철학 가지고 설교만 잔뜩 늘어놓는 선배들” 순간 마음을 도난당했다, 라고 생각했다. 어쩜 이렇게 내 마음을 잘 읽어 냈지? 얼굴에서 티가 났나? 아니면 내가 너무 핸드폰을 자주 봤었나..? “놀랄 것 없어. 니 나이 때는 당연한 거야. 나도 5년 전엔 그랬으니까. 그때는 너무나 지겹고 도대체 배우가 뭔데? 예술이 뭔데? 내가 이런 시시한 철학 따위의 이야기를 즐거운 술자리에서 해야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됐어. 그렇게 똑똑하고 잘난 선배들이 왜 자꾸 나랑 같이 연극하면서 택시비에 연연하며 첫 차를 기다려야 하는지를…” 이 사람 강력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것은 내가 아까 술자리에서 옆에 앉아 있던 진영이한테 문자로 보낸 이야기들인데…. 설마 내 핸드폰을 보았을 것은 아니었을 텐데… abraxas vol.17
“선배님.. 죄송합니다. … 진짜 죄송해요…” “응? 갑자기 뭐가 죄송해? 넌 죄송한 일 한 것이 없는데?” “사실. 저는 선배님의 이야기가 매우 따분하고, 무슨 말인지도 도통 이해 할 수 없었어요. 그냥 그런 이야기들이 너무 어려워서.. 저는…” “하하하 너 정말 귀엽구나… 그래! 나도 다 알지. 나도 너처럼 생각했고, 똑같이 겪었지.” “정말 죄송해요…” “아니야~ 원래 다 그런 거야. 그러면서 차차 너만의 철학이 생기는 거지. 내가 예술을 하는데 있어서 나의 진짜 철학이 무엇이냐면 말이야, 리얼리스트가 되자!(REALIST가 되자) 이거야~ 어때? 근사하지? 진짜가 되자. 사실이 되자.” “아…네.. 근데 전 역시나 또 이해가….안되네요.. 정말 죄송해요. 제가 부족해서요..” “하하 그래. 쉽게 말하자면, 내가 초등학생으로 사는 연기를 해도 내가 진짜면 그 연기도 진짜 일 것이고, 내가 할아버지를 연기한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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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면 그 연기는 진짜가 될 거야. 그러니까 내가 진짜 김은수라면 내가 하고 있는 모든 무대에서의 역할들은 진짜 김은수가 하고 있으니까 진짜 배역들이 될 거란 말이지. 난 사실인거야. 말 그대로 진짜 인거지. 아까 내가 부른 노래는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와 함께 부르던 노래였어. 내가 노래를 부르고 나면 어머니는 늘 내게 박수를 쳐주셨지. ‘우리 아들 진짜 가수 같구나.’ 하고 말이야. 난 그때부터 늘 노래를 하고 연기를 하며 살기를 꿈꿨던 것 같아. 그 곳이 설령 길 위에 작은 가로등 불빛 아래 에서라도 말이야. 난 진짜니까 이곳은 진짜 무대가 되고 진짜 가수가 되어 나의 목소리를 통하여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 너도 선배들이 설교할 때 곰곰히 생각해보는 거야. 내 삶에 있어, 예술에 있어 너의 철학은 무엇인지~ 그것이 무엇인지 꿈꿔 봐. 조금 더 행복 해질수 있을 거야. 앗.. 이야기가 길어졌다. 너무 늦었다. 얼른 들어가렴. 진주야. 엇? 지금 생각해보니 넌 이름부터 진짜가 될 수 있다.” “오진주.. 오진짜.. 오 진짜. 오 진짜? 오 진짜!!!! 하하하하” “네? 하하하 선배님 너무 웃겨요”
Realist가 되자
“네??”
“고마워~ 내 개그에 웃어줘서~ 그럼 내일보자 오진짜~” 술 취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손을 흔들며 뒤로 걸어가고 있는 선배를 보 니 다량의 복합적인 기분이 들었다. 행여나 넘어지지 않을까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그의 몸짓에서 진짜의 마음들이 느껴졌다. 흔들던 손을 멈추더니, 선배는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까 노래를 부르던 그 가로등 아래에서 알 수 없는 춤을 추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고민이 싹 사라지는 순간이다. 아침에 연습실에 오면서 내가 연기를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엄마와의 다툼에 있어서도, 집 주인 아주머니 와 관리비로 싸운 것도, 연습실 청소당번을 한 번 더하게 된 것도, 모두 필요 이상의 고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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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들어오자마자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Dreamer 꿈꾸는 자 그대의 인생은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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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몽상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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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혜 kimkahye@hanmail.net blog.naver.com/ga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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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우 예전에 친구에게 아브락사스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어, 투고 한 번 해봅니다. 공모전을 끝내고 급하게 써 내려갔습니다. 원래도 퇴고를 잘 안하는 편이기는 합니다만. 소설로 쌓인 스트레스를 소설로 풀고 있다니. 정말 알 수 없는 기분입니다. 이 꽁트를, 뭐랄까요. 레이먼드 카버와 우디 앨런, 그리고 나의 애인에게. 소극적으로 바칩니다.
이맘때쯤 홍대 앞거리는 자정이 넘어서도 사람들로 북적인다. 매년 열리는 무슨 문화 축제 때문인데 길거리 공연을 하거나 플리마켓이 열려 직접 만든 수공예품 등등을 팔기도 한다. 맹점이 있다면 여긴 항상 그렇다는 것일 것이다.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니까. 아마 오늘이나 그전 주말이나 그 전전 주말이나 이 곳 모습은 크게 차이가 없을 것이다. 굳이 차이를 찾자면 규모의 차이정도랄까. 못 보던 무대장치가 있다 던지 공연하고 있는 밴드가 많다던지 노점상의 개수가 좀 더 많다 던지 청재킷을 입은 여자들이 좀 더 많다 던지 하는 그런 것들. 나는 혼자 걷고 있다. 왜 그러느냐는 질문을 한다면 친구가 없어서이기도 하고, 내가 좀 까다롭기도 해서이다. 둘 중에 어떤 대답이 나에게 어울릴까에 대해 항상 고민하고는 한다. 내가 늦은 시간에 이 거리로 온 것은 걷기 위해 서인데, 그러니까 공연을 본다거나 클럽이나 술집에 간다거나 쇼핑을 이다. 내 유일한 취미생활인데, 오늘 같은 날에는 축제를 즐기는 나름의 아주
심야산책
한다거나하는, 다른 길로 빠지는 법 없이 오로지 이 인파 속을 걷기 위해서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일을 누군가와 함께 하기란 상당히 어려 운 일이라는 점만 알아주었으면 한다. 왜냐하면 한 번에 한 가지에만 집중 할 수밖에 없는 저주를 받고 태어난 나는 걸으면서 대화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화를 하려면 대화에만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걸으면서 대화 라니, 생각도 못할 일이다. 스스로도 별난 놈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누군가와 이 복잡하고 시끄러운 인파 속을 몇 시간동안 별다른 말도 없이 돌아다니기만 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바보처럼 느껴질 것이다. 사실 말없이 걷기만 한다면 둘이나 셋이나 또 그 외 떼거지로 여러 명이거나 그건 결국 혼자나 다름없다. 에베레스트 등반도 아니고 걷기 팀플레이라니 우습잖은가. 여하튼, 홍대는 걷기에 좋은 거리 중 하나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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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지만 내가 생각하는 한에서는 말이다. 나는 시끄럽고 사람이 많은 곳이 좋다. 게다가 곳곳에 편의점이 즐비해 있으니 맥주를 사기에도 안성맞춤 이다. 나는 산책할 때 맥주를 마시는 편이다. 그래서 오늘도 편의점에 들어가 병맥주를 하나 샀다. 영국맥주 인 것 같은데 다크 초콜릿 향이 나는 흑맥주였다.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지만 입맛에 맞았다. 술은 취하지 않을 정도로만 마시는 것이 좋다. 물론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지만 나는 내가 여기 걷기위해 왔다는 사실을 잊고 싶지는 않다. 사실 걷지 않을 때는 술을 잘 마시지 않는 편이다. 어떤 이야기가 떠오르기 때문인데 알코올 중독 때문에 마누라와 별거 중이던 한 사내의 이야기다. 결국 그 사내는 필사의 노력 끝에 알코올 중독 완치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 소식을 기쁜 마음으로 부인에게 전했고, 드디어 고대하던 부인을 다시 만나는 날이 왔다. 조금 후면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는 상황에서 abraxas vol.17
가엽게도 그는 너무 긴장을 한 나머지, 긴장을 조금이라도 풀기 위해 술을 아주 조금 입에 댔다가 그만 부인에게 딱 걸려 버리고 만다는 이야기. 내가 아는 술 얘기 중 가장 서글프고 어이없는 얘기가 이거다. 그 사내는 부인을 끔찍이도 사랑했던 게 틀림없다. 나와는 별개로 거리의 사람들은 대부분 술에 취해 있는 것 같다. 술이 아니라 다른 것에 취해 있는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나는 술에 취한 사람들을 보는 것 을 좋아한다. 이게 이 심야산책의 이유 중 하나인데, 사람들이 술에 취하면 감정이나 이야기가 몸짓 언어로 바뀌는 장면들이 좋다. 억눌렸던 것들이 주체하지 못하고 흘러나오는 장면이 좋다. 직선으로 걷지 못하고 휘청휘청 곡선으로 걷는 사람들이 좋다. 물론 개중에는 심하면 싸움을 일으킨다거나 이성에게 심하게 치근덕대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지만, 글쎄 뭐랄까 나는 그 마저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나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에 서라면 유쾌하게 받아들이는 편이다. 아니나 다를까 노래방 앞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있다. 큰 소요사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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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났고, 지금은 소강상태에 들어간 것 같다. 클럽 앞을 지키던 기도가 중재를 시도한다. 두 남자는 자신들의 얼굴이 부어오른, 이 믿고 싶지 않은 상황을 잊기 위해 서로에게 온갖 욕설을 퍼 붓고 있는 중이다. 당사자 중 한 남자 옆에 아주 매력적인 여자가 서있는데, 인류 역사상 돈, 여자, 땅이라는 싸움의 이유가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는 점에서 저건 아주 전통적인 의식이다.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그들을 지나쳐 나온다. 맥주에서는 흑맥주 특유의 씁쓸한 맛이 나다가 곧이어 진한 초콜릿 향이 느껴지면서 마치 달콤한 디저트를 입에 머금는 느낌이다. 나는 맥주병의 곡선을 음미하며, 제대로 잘. 골라왔다는 생각을 한다. 조금 지나 놀이터 근처에서는 밴드가 거리공연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몇 사람은 몸을 가볍게 흔들고, 몇 사람은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다. 무심코 키스를 하는 연인을 보다가 눈이 마주쳐 황급히 시선을 돌린다. 그나저나 마약이나 모두 전통적으로 접신(接神)과 관계가 있지 않나. 풍요롭고 소모적
심야산책
전통적 의식하니까 생각나는 건데, 왜 축제나 음악이나 술이나 춤이나 이었던 신들의 시대는 갔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저마다의 신을 필요로 한다. 나도 신이 필요하다. 오늘 내가 필요한 신은 ‘산책의 신’이다. 내가 아는 (도시) 산책의 신은 무려 세 명이나 되는데 그중 두 명은 프랑스인이고 한명은 일본인이다. 그러니까 죽어버린 두 명의 프랑스인, 샤를 보들레르와 발터 벤야민은 제쳐두고, 오늘은 아직 살아있는 가라타니 고진에 대해서 생각할 참이다. 가라타니 고진(柄谷 行人)의 본명은 가라타니 요시오인데(柄谷 善男), 그러니까 그는 행인(行人)이 되기 위해 선(善)과 남(男)을 버렸다. 별 수 없이 본래 가지고 태어난 것과 후천적으로 가져야만 한다고 믿는 것 그 두 가지 모두를 버린 것이다. 나는 매번 그가 가지고 있는 산책자 본연의 초월성에 놀라곤 한다. 나도 오늘 뭔가 두 개쯤은 버려야 완전한 산책이 이루어 질 것 같지만, 그 두 개가 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다시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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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걷는다. 탐욕적으로 걷다가 느슨하게 걷는다. 맥주를 다 마셔서 다른 편의점에 들러 이번에 삿포로 캔 맥주를 하나 산다. 어째서 편의점에는 삿포로 병맥주가 없는지 의구심이 들지만 여하튼 가라타니를 생각하며 샀다. 물론 그가 삿포로를 마실지 기린을 마실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신기하게도 나는 맥주 오백 밀리리터를 마시면 바로 화장실에 가야되는데, 그 시간이 온 것 같다. 빌딩 안에 공용으로 사용하는 화장실들은 24시간 열려있는데 그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을 보고 나와서 나는 다시 걷기 시작한다. 아아, 물론 손은 닦았다. 나는 사람이 많은 쪽으로 걷기 위해 다시 상가들이 몰려있는 쪽으로 걸어간다. 시간이 늦어서 몇몇 잡화점을 빼놓고는 상당수의 상가의 문이 닫혀있었다. abraxas vol.17
다시 걷는데 집중하면서 걷다가 나는 웬 조심성 없는 여자에게 어깨를 세게 부딪히며 발을 밟히고 만다. “어머, 미안해요!” 여자는 미안한 표정으로 내 팔을 잡았다. 무지하게 아프지만, 나는 괜찮다 는 손짓을 해 보인다. 내가 그런 이유는 빨리 다시 걷기 위해서다. 그녀는 집시 같은 복장이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 집시 말이다. 인도풍 의 에스닉한 무늬로 된 품이 있고 살랑거리는 재질의 롱스커트에 린넨 소재에 물 빠진 황토색의 민소매 상의, 아마도 라틴어로 보이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어깨의 문신, 온갖 종교의 우상들이 조각 된 나무 조각과 끈, 그리고 가짜보석 으로 만들어진 팔찌와 목걸이와 피어싱을 여러 개 달고 있는 모습. 기타 등등. 피부색도 까무잡잡해서 마치 진짜 집시처럼 보일정도인데, 살을 태운건지 원래의 피부색이 그런 건지 알기 어려웠다. 한동안 뚱뚱한 사람들이 머리를 밀고 통 큰바지를 입고 힙합음악을 듣고, 마른 사람들이 머리를 기르고 쫄바지를 입고 록음악을 들었는데 그 전후 관계에 대해서는 알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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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웠다. 그러니까 뚱뚱해서 맞는 옷이 없어서 힙합음악을 들게 된 건지, 힙합음악을 듣다보니 뚱뚱해진건지 말이다. 그건 그녀에게도 통용되는 얘기인 것 같았는데, 그녀가 원래 살이 검어서 집시가 된 건지, 보헤미안의 삶을 살다 보니 살이 검게 변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내 말은 그녀의 차림새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잘 어울렸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그녀는 춤을 추고 있는 중이었다. 비누가게 앞이었는데 문이 닫혔는데도 정확하게 무슨 향인지 알 수 없는 비누향이 계속 나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비누가게에서 나눠주는 홍보지를 깔고 않아 연주하고 있는 네 명의 악단도 있었다. 그들 모두 비슷한 차림, 샌달과 품이 넓은 바지와 민소매 상의를 입고 있었다. 레게머리를 한 남자가 도감에서도 본 적 없는 타악기를 치고 있고, 금발의 외국인 남자가 아코디언을 그리고 그들보다는 나이가 훨씬 들어 보이는 한 남자가 플롯을 연주하고 있고, 머리를 붉은 색 으로 염색한 여자가 첼로를 켜고 있다. 내가 첫 눈에 모든 악기를 알아본 처음 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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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어린 시절 악기도감을 끼고 살았기 때문인데, 그 타악기만은 난생 사람들은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에 맞추어 길 한복판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다들 술이나 혹은 다른 것에 취해있는 것 같았다. 그 안에 있으니 나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아 다시 걸으려고 하는데 그녀가 나를 툭툭 치며 말한다. “뭐해요? 같이 춤춰요.” 나는 영문을 몰라 어깨를 올려 보였다. “같.이. 춤.추.자.구.요.” “저한테 하는 말이에요? 이런, 상대를 잘못 골랐네요. 난 듣지 못하 거든요.” 나는 내 귀를 두 번 가리키며 말한다. “네? 시끄러워서 잘 안 들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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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계속 춤을 추면서 말한다. “나.는. 귀.가. 안.들.린.다.구.요.” 자, 이제 그녀가 무안해 하거나 미안해 할 차례였다. 그래서 그녀의 입모 양을 다시 집중해서 보고 있는데 그녀가 말한다. “괜찮아요.” 도대체 뭐가 괜찮다는 건지! 당황한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그녀는 내말을 단단히 오해한 게 틀림없었다. 그녀는 내가 단지 이 시끄러운지 어떤지 알 수 없는 음악 때문에 내가 귀가 안 들린다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필사의 노력으로 아마 일반인의 발음에 거의 근접했다고 믿고 있던 내 발음에 문제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도 아니라면 그녀는 술이나 다른 무언가에 완전히 취해 지금 제정신이 아닌지도 모른다. 술 냄새가 강하게 나지 abraxas vol.17
않았으니 아마 다른 것에 취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럴 때는 자리를 비켜서는 게 상책이라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려 는데, 그녀가 갑자기 내 팔을 낚아 채 돌리기 시작했다. 힘도 어찌나 센지, 내 몸은 그녀를 따라 돌고 있었다. 난생 처음 겪는 어이없는 상황에 나는 당황스러워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러댔다. 어쩌면 그 비명 중 일부는 입 밖 으로 새어나갔는지도 모른다. 어쨌건 나는 그런 것들을 정확하게 인지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걸 아는지 모르는지. “내가 알려주면 되죠.” 그렇게 말하고서 그녀 이제 내 등 뒤로 돌아가 내 팔을 잡고 휘젓기 시작 했다. 마치 꼭두각시가 된 기분이 들었고, 나는 몹시 불쾌해져서 그녀의 팔을 뿌리치고 휘발하는 이성의 끈을 간신히 붙잡고 말한다. “몹시 무례하군요. 내 몸에 손대지 마세요.” 그녀가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독순술에 오독이 빈번한 것 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책을 읽을 때는 물론이고 다른 세상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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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그러하듯이 말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생각해 보면 오독이라는 것이 결국 보거나 듣는 사람이 잘못 이해한다는 것인데, 그 대부분은 그 사람이 원래 보거나 듣고 싶어 하는 것이거나 혹은 익숙한 것 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강하게 말하자면 자기 스스로도 모르게 오해하려고 마음먹지 않고서는 무언가 ‘잘못 읽기’란 쉽지 않다. 그건 내면에서 오는 소리인 것이다. 그게 오독인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내 눈에 그녀의 입술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힘은 좀 빼라구요. 심야 산책자씨.” 그녀가 가볍게 웃으면서 말한다. 그녀가 내말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내가 그녀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는지 알 길이 없다. 어쩌면 나는 천 밀리리터도 안 되는 맥주를 마시고 정신이 약간 혼미해져 있을 수도 있다. 왜, 주량이란 건 아니라면 내가 만들어낸 심야산책이라는 단어와 나도 모르게 사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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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터무니없이 달라지기도 하니까 말이다. 것도 빠져있던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심야산책이라는 단어를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아는 한에서라면 나밖에 쓰지 않고, 심지어 나는 이 머릿속의 단어를 누군가에게 말해본적도 없었다. 아니다, 나는 정신이 나가지도, 무언가에 취하지도 않았다. 단순히 이것은 우연, 아마도 무엇인가에 취해 접신의 영향으로 영감을 얻은 그녀의 뻔뻔함과 무례함이 만들어 낸 단순한 우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는 마치 불현듯 찾아온 인생의 신비를 맞이한 것처럼 그 우연 이라는 운명에 순식간에 포섭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새로 배우면 되는 거 아니에요? 인생이 다 그런 거죠. 안 그래요?” 그녀가 말한다. 꼭 귀신에 홀린 것 같다. 그녀가 내 머릿속에 있는 말을 엿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녀는 다시 내 말을 잡고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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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따라 해 보라는 제스춰를 해 보인다. 춤이라니, 당연히 한 번도 춰본 적 없다. 물론 귀가 안 들린다고 해서 춤을 출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예전에 농아학교에 다닐 때 춤을 추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정말로 엄청난 박자감각을 타고 나야하고, 여러 번 춤을 관찰하고 연습해야 겨우 해 낼 수 있는 일이었다. 박자라고는 기분에 따라 변하는 심장 박동 밖에 모르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당최 음악 없는 춤이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 그 허무한 몸부림을 허우적이라고 표현해야할지 공기 중에서 헤엄을 치고 있다고 표현해야할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내가 소금기둥처럼 굳어 가만히 있자 그녀는 아예 내 팔과 다리를 움직여 어떤 자세로 만들어 놓았다. 덕분에 나는 이상한 자세로 서있게 되었다. “좋아요. 그래요. 힘을 빼고 그대로 멈춰 있어요.” abraxas vol.17
그녀가 말하고서 다시 내 자세를 바꿔 놓는다. 나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이미 정신줄을 놓쳐버렸으므로, 그녀 좋을 대로 하게 놔두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아주, 좋아요.” 그녀는 아마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내 자세를 바꿔놓았다. 이런 상황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녀는 아주 예쁘게 생겼다. 아무튼 그녀는 어느 정도 간격 후에 다시 내 자세를 바꾸어 놓았다. 미친 짓이었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우스꽝스럽고 느린 춤이 탄생되는 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주변의 사람들이 서서히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인식하고 쳐다보기 시작했다. “죄송하지만 그만 하면 안 될까요?” 내가 말한다. “아니오, 아주 잘하고 있는 걸요. 뭐 어때요? 그럼, 이렇게 하죠. 눈을 감아요.” 나도 모르게 시키는 대로 눈을 감는다. 나는 이미 무언가에 홀려있다. 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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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나의 팔과 다리, 또 이제는 고개와 허리를 잡고 어떤 자세를 취하게 했고, 나는 그 상태로 잠시 멈춰 있다가 다시 그녀가 움직이는 대로 움직인다. 눈을 감았음에도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다. 오해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생각이 든다. 그녀는 그냥 아무렇게 동작을 만들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건 그녀에게 몸을 맡기고 있는 내가 가장 잘 알 수 있다. 아마도 그녀는 춤에 관한한 엄청난 전문가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우연히 그녀를 만나 춤을 추는 나는 아주 운이 좋은 것일 것이다. 여하튼 그녀가 만드는 동작들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고, 나는 서서히 그 움직임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동그라미. 이건 날카로운 모서리. 아 이건, 새. 이건 미소로군요. 아, 이건 별,인가? 사실 나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는 비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모르겠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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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이 우스꽝스럽고 느리고 별난 동작들을 보고 대신 나는 알 수 없는 공간으로 들어섰다. 나는 조금씩 작아졌다가 서서히 커진다. 방금 전과 완전히 다른 세계로 넘어온 것 같기도 하다. 음악이 들리는 것 같다. 음악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 이게 음악인지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음악이 아닌 아주 이상한 것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알 수 없다. “이거 굉장하군요. 마치 대성당 같아요.” 내가 말한 대성당은 그러니까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소설 얘기였다. 당연히 나는 아무런 대답을 들을 수 없다. 눈마저 감고 있으니 볼 수도 없다. 사실 내가 그런 말을 했는지 조차 의문이다. 나에게 말을 한다는 느낌은 언제나 추상적인 거니까. 어쩌면 내가 발음을 배우기 전에 했던 말처럼 ‘아.우.어어’라고 발음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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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은옥 @Osimproduction
소주병이었다. 식당에 들어서는 나를 보자마자 엄마는 식탁에 놓여 있던 소주병과 두 개의 잔을 치웠다. 얼른 치운다고 치웠지만 마음보다 손이 따라주지 않는지 병과 잔을 집는 엄마의 손이 무뎠다. 앉으라는 말도 없이 식당 문간에 나를 세워두고 엄마는 소주병과 잔을 들고 엉거주춤, 식당 안쪽 주방으로 갔다. 엄마가 그곳에 앉아 있었으므로, 손님이 없을 때는 그곳이 엄마의 자리인 것 같았으므로 나는 소주병과 잔이 놓여 있던 식탁으로 갔다. 엄마가 앉아 있던 자리의 맞은편 의자는 서 있는 내 쪽을 향해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의자를 식탁 쪽으로 바짝 당겨 앉았다. 의자 다리를 받치는 고무가 닳았는지 의자를 당길 때 쇳소리가 났다. 엄마는 주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주방과 홀 사이에 얕은 문턱이 있었을 뿐 이렇다 할 경계는 없었는데 엄마가 무엇을 하는지 보이지 않는 구조였다. 소주잔을 씻는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다만 달그락거렸을 뿐 소리는 무뎠다. 무딘 만큼 마음은 바쁜 모양이었다. 엄마의 그 무딘 분주함은 들어선 나를 보고 별안간 놀란 엄마의 얼굴로 연결되었다. 소주병을 보고 나니 엄마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 것도 같았다. 그러나 엄마의 얼굴이 소주를
엄마의 자리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조급함을 일게 했다. 조급함은 식당에
마셔서라기보다는 식당의 노란 조명 때문일 수도, 집에서와는 다르게 화장을 한 모습 때문일 수도, 갑자기 식당을 찾아온 나를 보고 놀라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술을 마신다는 사실을 나에게 감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뒤따랐다. 나라면 몰라도 엄마는 나에게 뭔가를 감춰야 한다는 생각 같은 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잠결에 들었던 엄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오늘 새벽 엄마는 취해 있었다. 식당에 있을 때면 가끔, 소주를 마시기도 한다는 걸 자고 있는 나를 두고 마치 신부 앞에서의 그것처럼 느닷없이 엄마는 고백했다. 한 집에 같이 산 지 반 년이 다 되어가도록 일상적인 대화 조차 나누지 않는 사이였으므로, 엄마의 고백은 비일상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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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식당 일을 마치고 돌아온 시간이었으므로 나는 잠에 취해 있었다. 아빠가 취했다거나 취해서, 평소엔 무뚝뚝한 아빠가 별안간 딸에게 사랑한다 고 고백을 했다거나 고백해서, 그 기회에 귀찮은 듯 애교로 받아넘길 수 있었던 친구들의 일상이 부러웠던 나는, 잠결에 지금이 그런 순간인가 싶으면서도 그 사람이 아빠가 아니라 엄마라는 사실이, 엄마가 내 앞에서 처음 취한 날이라는 사실이 감기는 눈만큼이나 무거웠다. 무거워서 나는 엄마의 난데없는 고백이 귀찮았다. 아무 대꾸도 없는 나를 두고 엄마는, 술을 파는 사람이 술도 마실 줄 알아야지 하고 내 방을 나갔다. 엄마가 술을 마신다는 사실보다 잠이 더 급했으므로 나는 엄마의 고백을 듣고도 모르는 척 잠으로 달아났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 한참을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부엌 쪽에서 멜라닌 소재의 반찬 그릇이 식탁에 내려앉을 때 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abraxas vol.17
내가 일어난 것을 안다는 것인지, 나를 깨우려는 소리인지 몰랐다. 다만 그 소리는 몇 시간 전 엄마의 주정이 꿈이었는지 사실이었는지 헷갈리게 했고, 꿈이라고 하기엔 그 의아함이 오히려 생생한 것이어서 그렇다면 사실이었나 보다고 나는 다만 짐작했다. 부엌 쪽의 작은 움직임을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들으며, 엄마를 피해서 좀 더 자는 척을 해야 하는지 망설였다. 엄마는 아침을 차리고 방으로 들어가 버릴 것이었고, 나는 엄마가 없는 틈에 출근 준비를 하면 될 터였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건드려주기만을 기다렸다가 터져 나오는 욕지거리처럼 불빛은 핸드폰을 떠나 내 눈앞에서 발광했다. 그 발광 속에서 나는 눈을 치켜떴다. 6시 46분이 었다. 14분 뒤에 울리기로 약속된 알람을 끄고 아줌마의 문자를 확인했다. ‘오늘 점심 사무실 방문 요망.’ 문자는 새벽 1시가 넘은 시간에 도착해있었다. 아줌마의 그 호들갑스러운 성격이 남아 있는 밤과 아침을 견디지 못한 것이었다. 보낸 시간에 비해 내용은 허무하리만큼 간단했으나 공과금 미납요금 연체를 알리는 문자처럼 내용이 간단하면 간단할수록 그것을 확인하는 사람은 복잡해지는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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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다. 최소한의 메시지가 담긴 아줌마의 문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문자에 채 담기지 못한 문자 뒤의 문자를 상상해 보았다. 최소한의 정보이긴 했으나 그것이 아줌마로서는 최대한의 정보를 전송한 것이었으 므로 나는 이미 풀려 있는 암호를 다시 푸는 기분으로, 그 암호가 정확한 암호라는 것을 이번에는 내 쪽에서 다시 한 번 확실히 해두기 위해 ‘오늘 점심 사무실 방문 요망’이라고 소리 내어 발음해 보았다. 엄마가 방에 들어갔으리라 생각하고 침대에서 겨우 빠져나갔는데, 내가 움직이는 기척을 느꼈는지 엄마는 밥통 뚜껑을 막 열고 있었다. 뚜껑이 열려도 김은 피어오르지 않았다. 밥은 언제 했는지를 헤아리는 것 보다 언제 버려야 하는지를 헤아리는 게 더 쉬워 보일 만큼 눌러 있었을 것 이었다. 엄마는 주걱을 쥔 당신의 손보다 더 질긴 밥을 애써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밥이 엄마의 손에 맡겨진 게 아니라 엄마의 손이 밥을 애써 감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느 때처럼 올라와 있었다. 아무런 양념도 하지 않은 멸치와 고추장, 간장을 끼얹은 순두부, 마른 김과 참기름을 섞은 간장, 계란찜은 표정이랄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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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에는 엄마의 식당에서 제공되는 것이 분명한 기본 반찬이
없었다. 아니, 매일 무표정으로 식탁에 올랐으므로 무표정도 고유의 표정이 될 수 있는지 몰랐다. 아침밥상을 보면 먹기도 전에 심란해졌다. 심란함은 아침인데도 다시 밤을 지내야 할 것 같은 그 지루한 반복 때문이었다. 반찬은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간밤의 긴 주정 같은 걸 떠올리게 했다. 엄마와 같이 산 뒤로, 엄마가 식당 일을 한 뒤로 성의 없이 그저 되는대로 차려놓은 엄마의 밥상을 볼 때마다 나는 무표정의 반찬을, 그것이 담긴 멜라닌 그릇을 엄마를 향해 집어 던지고 싶었다. 그러나 엄마의 손이 밥을 애써 감당해야 하는 것처럼 반찬도 그릇도 집어 던져버리려는 나의 힘보다 더 질겨 보였고, 그 질김에 오히려 질려버린 내가 아침을 먹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엄마는 아침만을 차리기 위해 이 집에 들어온 사람처럼 하릴없이 식탁을 차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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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도 마찬가지였다. 무표정의 반찬 앞으로 내가 앉는 자리에 한 쌍의 수저가 놓여 있었다. “아침 차리지 마세요.” 엄마에게 한껏 쏘아붙이고 싶은데 그러자면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때에 터질 것 같은 울분을 최대한 억누른 뒤에 나오는 높임말이었다. 아침을 차려준다는 게 엄마 딴에는 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 예의는 내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나 차리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한여름의 장마처럼 엄마를 향해 쏟아내고 싶었다. 내가 쏟아낸 비를 맞고 속옷까지 홀딱 젖은 엄마를 보면 분이 풀릴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반찬 그릇을 식탁 한쪽으로 밀어내고 반찬 그릇에 붙은 식당 이름을 보며 빵을 조금씩 뜯어 먹는 것으로 엄마에 대한 욕을 대신했다. 그때에는 엄마가 방에 들어가고도 남았을 때였으므로, 그런 내 모습을 보는 건 내 자신 abraxas vol.17
이 유일했으므로 아무 의미도 없었다. 의미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되었을 텐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위해 나는 의미를 헤아렸다. 무의미를 의미하는 것이 쓸모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 쓸모없음에 집착했다. 쓸모없다는 것은 그걸 깨닫게 하는 것만으로 영 쓸모가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 같았다. 다만 그럴수록 머릿속은 구질구질해졌다. 구질구질함 의 가운데에는 엄마가 있었다. 식탁에 앉아 나는 엄마의 하루를 상상하곤 했다. 내가 회사에 출근하고 당신이 식당에 출근하기 전까지 방에 들어가서 무엇을 할까. 부족한 잠을 잘 수도 있었지만, 엄마의 얼굴은 잠이 부족한 사람처럼 말라 있었다. “손님이 마시다 남긴 거야.” 엄마의 고백이 있었던 오늘 아침 일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웬일로 엄마 쪽에서 먼저 너스레를 떨어왔다. 식당에는 엄마와 나 뿐이었으므로, 아이의 귀찮은 칭얼거림처럼 들리던 TV도 엄마에 의해 꺼졌으므로, 엄마의 너스레 는 너스레라기보다는 허무한 변명처럼 들렸다. 엄마는 거짓말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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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내가 식당에 들어섰을 때 엄마가 치웠던 소주병과 잔은 엄마와 누군가 마시다 만 것이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엄마가 변명해야 할 것은 누가 누구와 술을 마셨는가 하는 것보다 당신이 내게 하지 않아도 될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였다. 엄마를 보았다. 엄마는 입고 있던 앞치마에 달린 주머니에 무책임하게 두 손을 집어넣었다. 앞치마의 주머니는 다만 이런 헛헛한 시간을 감당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말과 말 사이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달린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엄마의 얼굴을 보았다. 식당의 엄마는 얼굴 대신 눈동자가 말라 있었다. 묻지도 않은 질문에 지레 대답 먼저 하는 엄마를 앞에 두고 나는 대꾸 대신 천천히 식당을 둘러보았다. 엄마가 누군가와 술을 마셨다면 그 누군가 가 식당에 숨어 있지는 않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상상을 나는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식탁은 나와 엄마가 앉은 자리를 포함해 다섯 개가 전부였고, 식탁 한 사람만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다. 식당은, 식당이라기보다는 실내 포장마차 같은 분위기였다. 벽에 붙은
엄마의 자리
주위로 사람이 숨을만한 공간은 없었다. 식당 안 주방 쪽도 짐작하건대
차림표가 그랬다. 메뉴는 가로로 긴 현수막에 자리가 좁다는 듯 빽빽하게 누워 있었다. 모두 술안주였다. 차림표 뿐만 아니었다. 식당 벽 사방에는 흰 종이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는데, 차림표에 차마 들어가지 못한 안주들이 버스를 놓친 승객처럼 조급하게 쓰여 있었다. 순간 글씨는 엄마가 쓴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이회장의 글씨와 닮아 있었다. 그러나 엄마의 글씨를 본 적 없는 내가, 이회장의 글씨라면 회장실의 낮은 탁자와 유리 사이에 끼인 사자성어를 쓴 정도만을 본 내가 할 수 있는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글씨 같은 건 누가 썼든 아무래도 괜찮을 거였다. 다만 테이프가 뜯어져 종이의 몇 귀퉁이가 허공을 향해 구부러져 있는 것이 고개를 숙인 사람처럼 보여서, 그것이 꼭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주눅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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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림표와 종이에, 안주는 없는 게 없는 것처럼 보였다. 없는 게 있다면 각 메뉴에 들어가는 재료 중 하나씩만 빼내서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종이에 써 있는 안주들이 변명처럼 달고 있는‘계절메뉴’라는 문구는 식당에 있는 모든 안주들이 사계절을 아우르는 것처럼 보였으므로 딱히 의미는 없어 보였다. 식당 일은 엄마 혼자 다 하겠노라고 했으므로 음식을 만드는 것도 엄마 몫일 거였다. 엄마가 만든 음식다운 음식을 구경한 적 없는 나는 차림표에 나열된 음식을, 음식의 글자를, 글자의 재료 를, 재료에서 나는 풋내를, 풋내가 들어간 냄비를, 냄비에서 나오는 증기를, 증기에 둘러싸인 풍경을 상상해 보았다. 간단없이 허기가 졌다. 식당을 처음 인수하기로 했을 때 엄마는 거의 결정을 하고 나서 통보 비슷하게 나에게 말해왔다. 나와 같이 살아야겠다고 무작정 나를 찾아왔을 abraxas vol.17
때, 그러고 난 뒤에 바로 식당 일을 해보겠노라고 했을 때, 할 말을 잃은 건 내 쪽이었다. 엄마의 말에는 날이 좋은 칼로 썬 듯한 깔끔함과 무심함이 있었고, 나는 그 말에 잘려나간, 더 나눌 수도 붙일 수도 없는 작은 고깃 덩어리 같았다. 엄마는 당신이 떠나 보낸 말에 양념도 간도 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한 엄마의 상태는 늘 ‘아무것도 없는’ 것이었다. 그런 엄마의 말 에 하는 수 없이 떠들게 되는 건 온전히 내 몫이었다. 나는 그 하는 수 없음에 하는 수 없이 의지했다. 나에게하는 수 없음이란 어쩔 수 없이 하는 수 있는, 일종의 기대감이었는지도 몰랐다. 엄마의 통보에, ‘지금껏하고 싶은대로 살았으니 식당을 개업하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다’고 나는 부러 소리 내어 말했다. 관심이 없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고, 그것이 채 엄마에게 전해지기도 전에 그 말을 가장 먼저 듣게 될 사람은 내 자신이었으므로, 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후회했다. 관심이 없다면 엄마가 내게 그런 것처럼 아무 말도 필요없을 거였다. 관심이 없다고 말하면서, 나는 관심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엄마는, ‘술보다는 밥을 더 많이 팔게 될 거야’라며 당신의 마른 얼굴처럼 건조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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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갔다. 엄마가 식당 일을 정리하는 시간이 새벽 세 시에 가까웠으므로, 애당초 밥을 더 많이 팔게 될 거라는 말은 보기 좋은 핑계에 불과했다. 핑계를 핑계로 알면서 나 또한 그걸 핑계 삼아 넘어갔다.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엄마와 나는 보이지 않는 바톤을 주고 받는 교대 근무자처럼 한 사람이 집에서 나가면 한 사람이 집으로 들어오는 식의 생활을 하게 되었으므로, 한 집에 산다는 것 뿐 생활은 각자가 알아서 하면 되었으므로 각자 일이라도 가지고 있는 게 각자의 짐을 더는 것이었고 그게 곧 서로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차림표에서 눈을 거두자 이번에는 모든 식탁에 한 쌍으로 맞춰 올라가 있는 마른 김과 참기름장이 담긴 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괜히 통을 만지작 거렸다. 그리고 뚜껑을 열어 보았다. 엄마의 얼굴처럼 건조하고 마른 김은 거의 같은 사이즈로 잘려 고요히 누워 있었다. 오늘 아침 식탁에 올랐던 것과 것처럼 맛있게 보였다. 김을 집어 먹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입술이 말랐다. 이번에는 참기름장이 담긴 통을 만져 보았다. 작고 동그란 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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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것이었으나 김은 집에서보다 엄마의 식당에서 몸에 맞는 옷을 입은
왼손으로 통을 쥐고 오른손으로 뚜껑을 열어보려 힘을 주었더니 힘을 준 것 에 비해 힘을 받아낼 뚜껑이 너무 작아 왼손에서 통이 빠져나가면서 뚜껑이 갑작스럽게 열어젖혀졌다. 그 바람에 참기름장은 식탁에 반, 식당 벽에 반 사이좋게 쏟아졌다. 간장은 벽에 피처럼 튀어 있었고, 참기름은 그 냄새로 또 한 번 나의 식욕을 건드렸다. 말을 기다리는 사람은 그 몸이 벌써 부자연스러워지는 모양이었다.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기만 하던 엄마가 앉아 있던 의자에서 번쩍 뛰어오르 더니 주방에서 행주를 가지고 와 나에게 건넸다. 엄마는 필요 이상으로 허둥지둥대고 있었다. 내가 식당에 무슨 일로 온 건지, 왔다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닌지 말이 아닌 행동의 부자연스러움으로 엄마는 나를 채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엄마의 식당에 일부러 찾아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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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집에서라면 엄마는, 나에 대해 궁금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엄마에게 행주를 받아 간장이 묻은 벽을 닦았다. 간장은 행주가 움직이는 대로 저항 없이 잘 닦였다. 간장을 닦는데 벽에 고춧가루 양념이 말라붙어 있는 게 보였다. 양념은 오래 전에 튀었는지 딱지처럼 단단히 굳어 있었다. 나는 손에 힘을 주어 닦았다. 손의 움직임에만 신경을 쓰고 닦고 있는데 그 움직임이 지난 밤 꿈을 불러들였다. 꿈에 나는 화장실이 아닌 내 방에서 소변을 보았다. 마렵지도 않은 소변이 한참이고 나와 소변을 보면서도 의아했다. 그곳이 방이라는 사실을, 끊기지 않는 소변을 의아해하면서도 오히려 상쾌한 기분을 느꼈으나 이윽고 나는 소변으로 흥건한 방 벽을 마주해야 했다. 마른 걸레로 닦기 시작하려는 데에서 꿈은 끝났다. 꿈이 끝나는 데에서 나는 엄마의 식당에서 소변 대신 abraxas vol.17
간장을 닦고 있었다. 비슷한 꿈과 순간 사이에서 꿈이 현실인지 현실이 꿈인지 헷갈렸다. 순간의 현실이 아득히 멀게, 지난 밤 꿈이 살가우리만큼 가깝게 느껴졌다. 나는 엄마에게 간장에 젖은 행주를 건넸다. 내게 행주를 건네 받은 엄마는 주방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곧 수도꼭지를 열어젖혔다. 수도꼭지에서 물은 옷감이 뜯어질 때의 그것처럼 투두둑, 하더니 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렸다는 모양으로 이내 와, 하고 쏟아져 나왔다. 투두둑, 하다 와, 하는 그 소리가 뭔가를 말하려고 입을 투두둑 움직이다 갑자기 와, 하고 습관처럼 회식자리에서 울음을 발산해 버리는 최사장의 그것과 닮아 나는 투두둑, 엄마에게 뭔가를 채 말하기도 전에 와, 하고 우는 대신 술이 마시고 싶어졌다. 최사장의 울음은 3개월간의 인턴을 끝내고 정직원이 되는 나를 축하하는 회식자리에서 처음 보았다. 인턴과 정직원 사이에는 백만 원이 있었다. 백만 원이 조금 안 되는 월급에서 조금 넘는 월급을 받게 되는 것을 축하 하고 축하받을 일인지 의아했다. 그렇게어리둥절한 나에 반해 ㈜에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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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의 직원들은 그날 들떠 있었다. 내가 입사한 후 회식은 처음이었으므로 마지막 회식은 백번 양보해 헤아려 본다고 해도 3개월 전이었을 거였다. 여기에 회식 때만 되면 몸과 함께 법인카드도 들고 사라져 나타나지 않는다 는 이회장이 웬일로 이번에는 법인카드는 두고 고맙게도 몸만 사라져줬다는 것이 직원들이 들뜬 이유라면 이유였을지도 몰랐다. 다만 이 부분에서 직원들은 다소 의아해 하기도 했는데 이회장이 법인카드 챙기는 것을 깜빡 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대로 회식을 해도 되는 거냐는 거였다. 직원들의 물음에 최사장은 이회장이 3차까지는 법인카드로 해결하라는 말을 덧붙였다고 전했다. 그 부분에서 최사장은 조금 우쭐한 것도 같았다. 업무가 종료되자마자, 직원들은 ㈜에스지 건설의 작업용 점퍼를 벗고 가방을 꾸렸다. 누군가는 ‘마시고 죽자’라고 했다. 1차는 거래처 직원의 접대 장소로, 직원들의 점심식사가 주로 이루어지는 사무실 건물 1층의 사실을 직원들도, 최사장도 먼 옛날의 일로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마시고 죽자는 선동구호에 동의하지 못하면서도 사무실에서, 일에서, 회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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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탕 집에서 이루어졌다. 그날 점심을 그 감자탕 집에서 해결했다는
되도록 멀리 떨어져 술을 마시게 될 것으로 기대했던 나는 불다가 터져버린 풍선을 입에 물고 있는 기분으로 그날 회식을 견뎠다. 들뜬 풍경 속에서 그 풍경과 맞지 않은 직원들의 옹졸한 범위에 놀랐고, 들뜨지 않은 사람은 나 혼자여서, 그날 처음 외롭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막 나기 시작한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시원스럽지 못한 성격과 닮아 어떻게 그 자리까지 올랐을까 의문이 드는 최사장의 주도하에 회식은 시작되었다. 소주를 채운 잔을 들고 건배를 하기 전, ‘사장님이 한마디 하시죠’라는 어느 직원의 넉살에 최사장은 ‘내일은 없다’라는 말을 간신히 뱉고는 그만 와, 하고 울어 버렸다. 감자탕을 서빙하기 위해 우리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오던 식당 직원이 최사장의 울음에 당황해 그 자리에 멈춰 버렸을 때, ㈜에스지 건설의 직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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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몇 명은 식당 직원 대신 서빙을, 몇 명은 최사장을 달래고 있었다. 능숙했다. 사무실에서 보지 못한 민첩함과 정확함에 나는 최사장의 울음에도 불구, 터지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울음이라는 것이 본디 달래면 달랠수록 달래지기는커녕 커지는 것이어서 직원들의 위로에 최사장은 아예 건배를 위해 들었던 소주잔을 내려놓고 엉엉 울어 버렸다. 식탁에 처박힌 최사장의 머리 위로 감자탕의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면서 나는 최사장의 월급명세서를 생각했다. 사수가 ‘너를 믿는다’는 의미심장한 표현으로 내게 직원들의 월급명세서를 건넸을 때 맨 먼저 올라와 있던 것이 최사장 것이었다. 최사장은 뭐가 서러운 걸까. 월급은 서러움의 이유가 될 수 없어 보였다. 너무 많았다. 최사장 계좌에 월급을 입금하던 그날 나는 입력한 숫자를 몇 번이고 확인해야 했다. ‘마시고 죽자’는 말도 모자라‘내일은 없다’라고 소리 내어 말하는 최사장을 abraxas vol.17
보며 마시고 죽어 버리면 내일은 당연히 없을 텐데 내일을 가장 먼저 보장 받은 사람이 부러 부정하는 내일이, 최사장 그 자신이 경멸스러우리만큼 뻔뻔하게 느껴졌다. 최사장의 울음은 여유이고, 오만이었다. 나는, 감히 내일을 말할 수가 없었다. 하물며 내일은 없다,고 그것이 거짓이라도 소리 내어 말할 수 없었다. 내일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 의식 속에 내일,이라는 단어와 그 단어가 주는 일정한 안정감을 즐기기에 내일을 부정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 앞에서 나는 말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말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날 혼자 겉돌았다. 내가 채우지 못한 말의 자리를 직원들과 최사장이 채웠다. 그날 최사장의 말은 끊이지 않았다. 사무실에서의 그와는 영 딴판이었다. 얼마나 많은 말을 쏟아내는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한 단어도 듣기 힘들 정도였는데 직원들은 십분 이해한다는 듯 머리를 끄덕여댔다. 이회장 앞에서 최사장이 그랬다. 평소 직원간 소통을 강조하는 이회장은 회장인 자신이 최대한 말을 아끼는 것이 소통의 미덕이라 여기는 듯했는데, 그런 이회장이 말을 꺼낼 땐 최사장에게 호통을 칠 때 뿐이었다. 처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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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최사장의 업무 착오를 타이르는 정도로 시작한 훈계가 한 시간에서 두 시간으로, 두 시간에서 다섯 시간으로 이어졌다. 이회장은 자신의 호통에 힘을 받아 더 큰 호통을 치기 일쑤였다. 직원들은 이회장도 최사장도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직원들에게까지 뻗을 이회장의 호통을 최사장이 자기 선에서 막아준다는 준다는 거였다. 최사장이 자의에 의해 막아준 것인 지, 아니면 이회장의 기력이 직원들에게까지 못 미쳐 그런 것인지는 몰랐다. 다만 나는 최사장의 과분한 월급이 이회장과 직원들의 샌드백이 된 값은 아닌가 하고 짐작해 볼 뿐이었다. 회식자리에서 최사장은 술을 마시고 말을 하고, 말을 하고 술을 마시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날 나는 말을 하고 싶을 때, 술은 마시고 싶은 모양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나는 할 수 있는 말도 하고 싶은 말도 없었으므로 말도 술도 하지 않은 채로 그날 밤을 견뎠다.
나는 외할머니로부터 오백만 원과, 이모의 동창생이 소개시켜준 건설회사의 경리직을 퇴직금처럼 받아 나왔다. 능력 없는 사원을 자르는 기분으로
엄마의 자리
성인이 된 후 외할머니 집을 떠나 나는 도시로 왔다. 도시로 떠나오면서
외할머니와 이모도 나를 떠나 보냈으리라 나는 생각했다. 외할머니로부터 받은 오백만 원으로 건설회사 인근 다세대 주택 지역에 방을 얻었다. 계단을 네 개 올라가는 1층이었다. 보증금이 한참 부족할 줄 알았는데 도심 변두리라 생각보다 비싸지 않았다. 다만 부동산 중개업자의 넋두리를 비싸지 않은 보증금으로 치르는 기분이었다. 중개업자는 내가 엄마에게 그랬듯 물어보지 않으면 도지는 병이라도 있는 양, 그도 아니라면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것을 묻는 신기록에 도전이라도 하는 양, 한 사람에게 물을 수 있는 건 모두 물어보았다. 중개업자의 급한 성미가 밖으로 밀어내는 질문들은 내가 대답을 한다고 해서 도저히 풀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중개업자는 말을 하기 위해 태어나고 말을 하기 위해 그 직업을 택한 것처럼 보였다. 묻지 않고,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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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손치더라도 대답을 하지 않으면 도저히 방을 구해주지 않을 기세 여서, 나는 도시에 올라오게 된 배경이며, 건설회사 경리직을 얻게 된 이유에 대해서 밀린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일러주었다. 일러주었더니 그 호들갑스러운 성격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없는, 생각보다 깔끔한 집을 알아봐주었다. 도시에서 첫 밤을 혼자 보내게 되었을 때 외할머니와 살았을 때에도 다만 혼자에 지나지 않았던 나는 혼자 산다고 해서 달리 차오르는 기쁨 같은 걸 느끼지 못했다. 외할머니 집에서 꾸린 내 짐은 몇 개의 가방과 신발, 옷과 속옷이 전부였고 그것은 과일 상자 두 개로 간단하게 정리되어 택배로 도착했다. 나는 상자 속에 아무렇게나 구겨진, 외할머니 집에서 입었던 내 옷과 속옷을 천천히 꺼내 새 집 장판에 늘여놓았다. 상자에서 옷을 차곡차곡 꺼내면서 구겨진 옷을 펴고 펴면서 장판에 겹쳐지지 않게 나란히 abraxas vol.17
늘여놓으니 뒤늦게 이 도시에 도착한 내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아 느닷없이 서러웠다. 그제야 내가 이제 외할머니에게서, 이모에게서, 엄마에게서 완전히 놓였구나 싶었다. 서러운 것도 잠시, 당장 내일 있을 면접 걱정이 닥쳤다. 일을 이미 하기로 되어 있었고 정식 출근하기 전 얼굴을 보는 형식적인 자리라지만 회사의 사장이 이모의 동창이라는 것이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장판에 늘어놓은 옷들 중에서 검은 청바지와 흰 남방과 감색 니트를 꺼내놓았다. 이모의 동창은 문자로 회사의 주소를 보내왔다. 나는 주소를 핸드폰으로 검색해 길을 찾았다. 도보로 15분이 소요된다고, 핸드폰은 일러주었다. 주소대로 길을 찾아 다 와서는 비슷비슷하게 생긴 건물들과 건물들 안에 들어선 가게 때문에 헤맸다.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길을 통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3, 4층짜리 건물이 마주보고 있었는데, 프렌차이즈 브랜드 이름만 달랐다뿐 김밥집, 감자탕집, 편의점, 피씨방이 똑같이 들어서 있었다. 그 건물 아니면 이 건물이었는데 꼭 하나 다른 것이 당구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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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고 없고의 차이였다. 두 건물의 창문에는 이모의 동창이 말한 건설 회사의 이름조차 붙어 있지 않았다. 나는 당구장이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계단을 따라 올라갔더니 당구장 바로 앞으로 ㈜에스지 건설이라는 나무 명패가 보였다. 사무실로 통하는 문에 비해 나무 명패는 비이상적으로 컸다. 문과 명패의 불균형 에서 얼굴도 모르는 건설회사 사장의 꼬장꼬장한 성격을 마주하는 것 같은 답답함이 일었다. 그 답답함은 입자마자 늘어나 움직이지 않으면 꼭 무릎이 튀어나온 모양이 되어 버리는 내가 입고 있던 검은 청바지까지 다다랐다. 답답한 건 회사 사장이 아니라 변변한 면접용 정장 한 벌 없는 내 자신인 것 같았다. 나는 입고 있던 바지를 한 번 내려다보고 입구로 통하는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일렬종대로 앉아 있는 내빈용 실내화가 눈에 들어왔다. 실내화 발등을 감싸는 부분에 회사 로고와 이름이 금색 실로 박혀 들어가 있었다. 나는 늘어난 바지를 다시 한 번 의식하며, 내빈용 들어갔다. 사무실은 조용했다. 건설회사라고 해서 경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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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화에 발을 집어넣으며, 마치 케이지로 들어가는 동물처럼 사무실로
현장에 나가 있을 줄로 알았는데 직원들은 각자의 자리에, 컴퓨터를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직원들은 실내화에 놓인 것과 같은 스타일의 자수가 박힌 작업용 점퍼를 입고 있었다. 입구의 나무 명패에, 실내화와 작업용 점퍼에 새겨 들어간 회사 이름을 보며 나는 연달아 세 끼를 먹은 것 같은 느닷없는 체기를 느꼈다. 거래처 사람들이 본다면 이 회사와 거래하지 않고 서는 되돌아가지 못할 정도의 무언의 압박을 느끼게 하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회사는 말이 말보다 급하고, 마음이 마음보다 급해 보였다. 말과 마음이 나란히, 제가 더 먼저라는 양 급하게 회사의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 답답한 풍경 속에서 나는,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던 외할머니 집에서의 생활을 떠올렸다. 외할머니 집에서의 나는, 방목이나 다름없었는데 정 반대의 지점에서 떠오른 외할머니 집에서의 기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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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아했다. 나는 그 의아 때문에 더욱 죄어오는 답답함을 느꼈다. 사무실 안쪽을 기웃거렸더니 약속 시간에 맞춰 도착하긴 했던지 이모의 동창이라는 사장이 금방 튀어 나왔다. 사장이라는 직급이 무색하게 주름이 주눅으로 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장의 얼굴 옆으로 이모의 얼굴이 떠올랐다. 또래에 비해 젊어 보이는 이모와, 또래에 비해 늙어 보이는 사장의 얼굴 사이를 가로질러 이번에는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사장의 안내에 따라 사장실로 들어서며 엄마의 얼굴을 지워 버렸다. 앉을 수 있다는 기능만을 가졌을 뿐 편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형식에 불과한 사장실 내빈용 의자에 앉아 이력서를 꺼내려는데 사장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더니 옆방으로 건너가자고 했다. 누군가 또 있는 듯했다. 나는 이력서를 손에 쥔 채 사장을 따라갔다. 누군가는 회장이었다. 회장은 책상에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신문지 abraxas vol.17
무덤 뒤에서 코에 걸친 안경을 살짝 올리며 의자에 일어서 나를 맞았다. 불독처럼 입가의 피부가 늘어져 내려 있었으나 피부에 탄력이 있어 아주 내려앉을 것 같진 않고, 단단하게 턱 끝까지 붙어 있었다. 회장은 쓰고 있던 낡은 야구모자를 한 번 올렸다가 다시 머리에 얹으며 사장실에 있었던 것과 같은 의자에나를 안내했다. 회장을 지켜보는 사장의 얼굴과 몸짓에 초조한 빛이 어렸다. 사장의 그런 초조함이 나로 하여금 오히려 긴장을 풀게 하였다. 사장과 회장이 나란히 앉은 앞으로 도저히 무언가를 놓고 쓰거나 보기 에는 불편한 높이의 탁자가 놓여 있었고, 탁자 건너편에 내가 앉았다. 탁자에는 ‘층간 소음에 살인까지’라는 기사가 스크랩되어 있었다. 기사 옆으로 ‘층간소음 제거 시공과정과 현장’이 사진, 간단한 글과 함께 한눈에 보기 쉽게 정리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관할구 정부 조직도가 정리되어 있었다. 조직도 옆으로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이니, 일편-단심(一片丹心)이 니 하는 사자성어가 풀이와 함께 쓰여 있었다. 나는 그제야 이모가 말한 건 설회사가 층간소음을 제거하는 회사라는 것을 알았고, 건설회사라기 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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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회사라 해야 마땅했을 텐데, 나를 떠나 보내기로는 이모에게는, 건설이나 시공이나 시공이나 건설이나 어느 모로 불려도 상관없을 터였다. 그건 일을 하게 될 나에게도 상관없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하게 될 일은 경리였으나 당분간은 간단한 심부름과 거래처 직원 응대, 문서 작업이 전부일 거였다. 면접은 회장의 질문과 나의 대답으로 짧게 이어졌다. 나는 사장과 회장이 한 부씩 들고 있는, 내가 작성한 이력서를 건너다보며, 이력서에 적힌 글자 속의 나와 진짜 내가 같은 사람인가 의아했다. 이력서와 사람을 놓고 그 사람을 읽어낼 수가 있는지 오히려 사장과 회장에게 내가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글자 속의 나는 간단해 보였으나 현실의 나는 간단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였다. 멀게 하는 데에는 아빠가 있었다. 아빠에 대해 물어온다면 나는 간단히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 나조차도 모른다고 간단히 대답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지만 그러기 전에 이미 내 자신의 머릿속 대해 묻진 않을까 하는 초조함을 이력서를 만든 사람에게 저주를 퍼붓는 것으로 대신했다.
엄마의 자리
이 복잡해지고야 말았다. 나는 사장과 회장이 내가 대답할 수 없는 아빠에
“제 동창의 조카입니다.” 이회장이 이력서의 가족관계를 훑어 볼 때 최사장이 급하게 설명했다. 이회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최사장은 이모와는 어렸을 때 한 동네에서 자랐는데 얼마 전에 우연히 연락이 닿았다는 것, 엄마와도 잘 아는 사이 라는 것을 이야기하며 이회장과 나를 번갈아 쳐다 보았다. 최사장이 이모 다음으로 엄마를 이야기할 때 나는 조금 긴장했다. 나는 그때 엄마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도 몰랐다. 엄마에 대해 물어온다면 뭐라고 대답 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는데 이회장은 이력서를 가로로 한 번 접어 탁자에 내려놓으며 가족관계증명서나 주민등록등본을 떼올 것을 주문하며 급여나 출근 날짜는 최사장과 상의하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더니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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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쳐다 보고는 회장실을 나갔다. 회장이 없는 회장실에서 최사장과 둘만 남았다. 나는 최사장의 말을 기다렸다. 당장이라도 출근하라고 하면 그러겠다고 대답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최사장이 힘겹게 연 말문의 첫 마디 가 엑셀은 어느 정도 하냐는 거였다. 엑셀은 못한다는 나의 대답에 사장은, 당황하면서도 배우면 금방하게 될 거라며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그렇게 믿고 싶은 모양으로 고개를 끄덕이기를 멈추지 않으며 그는 내 이력서 공란에 ‘엑셀 기초’라 적었다. 엄마가 식당을 차린 지 반년이 넘었는데 식당에 간 건 처음이었다. 장사가 잘 되는지 안 되는지 손님이 많은지 적은지 손님은 많은데 의외로 들어오는 돈은 적은지 손님도 많고 돈도 많이 들어오는지 손님도 많고 돈도 많이 들어오는데 나가는 돈이 많은지 월세는 얼마인지 장은 엄마가 직접 보는 abraxas vol.17
것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물어보지도 않았고 엄마도 먼저 말하는 법이 없었다. 식당이 집으로 가는 초입의 동네 시장통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엄마의 식당을 피해 다녔다. 엄마가 앞치마를 입고 허둥대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엄마의 모습이라 그려지지도 않았고, 그런 모습을 창문 너머로 보는 게 처량할 것 같았다. 처량함은 엄마에 대한 나의 해석이 될 것이었으므로 처량함의 대상은 엄마가 아니라 내 자신이 되어야 했다. 식당을 계약하기로 했을 때에도 엄마는 같이 사는 나보다, 네 시간이나 떨어져 사는 이모에게 전화로나마 조언을 구했다. 식당을 차릴 만한 돈이 있었는지, 대출을 받았는지, 이모가 빌려주었는지,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돈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엄마에 관한 것이라면 엄마의 마른 얼굴뿐, 아무것도 몰랐고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내가 무슨 일로 돈을 버는지, 번 돈을 어느 은행의 어느 상품에 모으고 있는 지 돈을 모으는 이유는 뭔지 알지 못했다. 다만 내가 엄마에 대해 알 수 있었던 건 방문을 통해 들려오는 엄마와, 누군가의 통화소리를 통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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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내가 나란히 쉬는 일요일 밤엔 안 들을래야 안 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외할머니나 이모와의 통화가 주를 이루는 것 같았다. 외할머니와 통화할 때 엄마는 외할머니의 딸이 되어 있었다. 외할머니도 엄마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나는 맡겨지기만을 위해 태어난 것 같았다.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도 더 어렸을 때도 나를 이모에게, 외할머니에게, 다시 이모에게, 다시 외할머니에게 맡기기를 반복했다. 내 머릿속 최초의 기억이 자리한 배경이 외할머니 집이었으므로 그리고 그 기억은 내 어린 시절을 장악했으므로 영 틀린 이야기도 아니었다. 나의 아빠는 누구인지, 아빠가있긴 있었는지, 있었다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었는지 지금은 왜 없는지 따위는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엄마가 입에 올린 적 없었으므로 외할머니도, 이모도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외할머니와 이모에게 원망 묻기 시작했을 때는 나에게 엄마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였다. 그리고 나에게 엄마가 있다는 사실이 곧 무언가를 물을 수 있다는 것을
엄마의 자리
대신 질문을 퍼부었다. 눈에 보이기만 하면 묻고 또 물었다. 내가 뭔가를
의미했다. 외할머니나 이모, 그도 아니라면 동네사람들, 내가 누군가를 거치지 않고 물을 대상을 향해 직접 물을 수 있다는 건 큰 성과 같은 거였다. 엄마와 내가 처음 대면했을 때 나는, 외할머니나 이모에게 한 것처럼 물을 수 있는 건 모두 물었다. 그때는 어렸으므로 마음보다 말이 급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말을 내 입 밖으로 떠나 보내면서 후회하는 횟수가 많아졌다. 엄마가 그렇게 만들었다. 내 말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엄마는 말을 거두었다. 엄마가 말을 거두면 거둘수록 나는 더욱 많은 말을 늘어 놓았다. 나는 장난감 대신 말을 치워야 했다. 늘어놓는 것도 치우는 건 오롯이 내 몫이었다. 후회를 하면서도 묻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건 역시 마음보다 말이 급해서였다.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말로 끌어 모아 꺼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내 눈으로 확인한 뒤 답이 있다면 답을 찾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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싶었다. 꺼내 보이지 않으면 도지는 안달을 나는 나 혼자만의 몫으로 감당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말이 급했다. 엄마의 식당에서, 엄마의 자리에 앉아 있는 나를 보며 엄마는 그때의 나처럼 마음보다 말이 급해 보였다. 엄마는 입을 오므렸다 펴고, 폈다가 오므렸다. 엄마의 모든 몸짓, 눈짓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이번에는 내 편에서 그런 엄마를 보면서 집이 아니라 엄마의 식당에까지 찾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마음속으로 다만 가만히 읊조려 보았다. ‘엄마, 이제 나는 말보다 마음이 급해.’ 엄마를 찾아간 건 돈 때문이었다. 오늘 아침 아줌마의 문자를 받고 점심 abraxas vol.17
시간을 이용해 아줌마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내가 들어서자마자 아줌마는 점심으로 짜장면을 시켰다며, 괜찮지라고 물을며, 거기 짜장면이 괜찮다고 스스로 대답하며, 단무지도 많이 달라고 하는 것을 잊었다며, 다시 중국집에 전화를 걸며, 나를 향해 앉으라고 얘기하며, 다시 중국집과 통화하는 것으로 나를 맞았다. 아줌마의 그 애정이 담긴 부산스러움에 나는 웃음이 났다. 그 부산스러움은 정확한 정보만을 전달해야 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아줌마에게 그 업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낮은 목소리로 바뀌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아줌마가 내 옆에 바싹 다가 앉으며 집을 찾은 것 같다고, 작게 얘기해주었다. 아줌마의 사무실엔 나와 아줌마 밖에 없었으므로, 그 작은 배려가 귀여워 나는 다시 웃음이 났다. 아줌마는 내 웃음을 보고 눈에 장난기를 돋으며 내가 다니고 있는 시공회사 사무실에서도,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도 가깝고 물론, 자기 부동산 사무실에서도 가까운데 월세보다는 전세가 나을 것 같아 그 편으로 알아봤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재개발 가능성 때문에 기존 세입자를 내보낸 주인들이 조합원 간의 의견 불일치로 재개발 결정이 보류되자 월세로 조선족을 받고 있다는 것, 일이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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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고 있기 때문에 주인들 입장에서는 전세보다 월세를 선호한다는 것, 역시 전세를 구하기 어려웠다는 것을 맥을 짚듯 나에게 짚어 주었다. 처음 이 도시에 들어와 아줌마를 통해 집을 구했을 때처럼 아줌마는 그 부산스러움으로 일을 하나하나 처리해 나가고 있었다. 그때도 똑같이 했던 말을, 말의 높낮음이나 억양, 강조하는 지점에 변화를 주면서 마치 다른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할 정도였으니 아줌마 는 선수는 선수였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짜장면이 도착하기 전에 다 이야기하자며, 아줌마는 마치 내가 아줌마의 비밀을 캐물어 이야기하게 된 양,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본격적인 일은 역시 돈 문제였다. 주인이 제시한 전세금이 크진 않았는데, 아줌마 쪽에서 칠백만 원이나 더 깎았다는 내용이었다. 집은 작지만 혼자 살기에는 알맞고, 2층이라 빛도 많이 들어오는데다, 수압이며 보일러 상태도 아주 양호하고, 그 전에 들어 살았던 세입자 역시 깔끔한 성격의 아가씨여서 집이 깨끗하기는 아가씨는 좋은 짝을 찾아 결혼하기 때문에 집을 급하게 내놓았다는 것, 무엇보다 주인이 같은 건물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럴 일은 없겠지만
엄마의 자리
두 말할 것도 없고, 그렇다면 이렇게 좋은 조건의 집이 왜 급매물로 나왔냐,
이래저래 민망한 일들에도 주인과 마주칠 일이 없어 만사 오케이라는 것 이었다. 나는 아줌마의 말을 들으며 내가 모은 적금의 액수를 헤아려보기도 전에 지금 엄마와 살고 있는 집의 보증금을 어떻게 빼내야 할지 먼저 생각했다. 그러나 보증금과 적금을 합친다고 하더라도 전세금에는 조금 못 미쳤다. 아줌마는 집 주인이 급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계약이 빠르면 빠를수록 전세금을 조금 더 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엄마가 알아서 하면 될 일이고 그 집에서는 보증금과 몸만 빠져 나오면 되지 않겠냐고 했다. 아줌마의 호들갑 때문인지 마음이 급해졌다. 아줌마의 사무실을 나설 때 두 다리가 떨린 것도 같았다. 인턴에서 정직원이 된 나를 축하하는 그 회식에서 나는 ‘마시고 죽자’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 돈을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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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고 죽자,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회사에서, 집에서 더 먼 곳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딘지 모르는 더 먼 곳을 위해 돈을 벌었다. 월급은 한정적이었으므로 일을 하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돈을 쓰지 않는 것이었다. 더 먼 곳을 위해, 그러나 어디인지 모르는 그 두루뭉술함에서 한 가닥씩 피어오르는 조바심을 견디는 일이 돈을 쓰지 않는 것보다 힘들었다. 그 조바심의 끝에는 역시 어디인지 모르는 시간이 걸려 있었다. 나는 시간 속에 말보다 급한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버텼다. 돈을 쓰지 않고 버틴 2년은 아줌마가 구해준 월세의 계약 기간 이기도 했다. 그 2년의 끝이었는지 시작이었는지 갑자기 엄마가 나타났다. “왜 왔니?” 궁금증을 참지 못한 엄마가 결국 나에게 물었다. 엄마의 말에 긴장이 abraxas vol.17
섞여 있었다. 목을 채 가다듬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도 모르게 밀려나온 말이고, 단도직입적인 말이라 듣는 나보다 말한 그 자신이 당황한 것 같았다. 왜, 라고 발음할 때 엄마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나는 더 끌 것도 없다는 듯 보증금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살고 있는 집에 갑자기 들어온 것은 엄마였다는 것, 그때 나는 엄마를 받아들였다는 것, 월세 계약 기간이 끝나 가기에 집을 알아봤다는 것, 보증금은 외할머니가 엄마가 아닌 내게 남긴 돈이라는 것, 그 때문에 그 돈은 엄마가 아니라 내 것이 분명하다는 것, 그 보증금을 보태 전세로 이사하겠다는 것, 엄마가 돈을 내놓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 월세를 연장하는 것은 이제 엄마 몫이라는 것, 나는 당장 내일이라도 전세집을 계약해야 한다는 것을 쉬지 않고 쏟아 놓았다. “알았다.” 중개업자 아줌마와 이야기를 마치고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최사장을 찾았다. 퇴직금을 미리 정산받고 싶다는 나의 말에 최사장은 더 생각해 볼 것 도 없다는 듯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돈이 언제까지 입금되어야 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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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었다. 나는 지금 당장 필요하다고 했다. 지금 당장일 것까지는 없었으나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지금 당장 받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최사장의 결정 같은 건 의미 없다는 식으로 비쳐 보일 수도 있을 만큼 나는 급했다.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최사장은 사수에게 퇴직금 처리를 부탁했다. 생색이라도 내면 고마워 하는 기색이라도 비출 수 있었으나 최사장은 이회장이 없을 때면 으레 그렇듯 사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딱딱한 의자에 몸을 맡겼다. 사장실 반투명 유리창을 등 뒤에 두고 나는 자리로 돌아와 아줌마에게 내일이라도 계약할 수 있다는 문자를 보냈다. 나는 엄마의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밀어낸 의자에서 다시 한 번 쇳소리가 났다. 나는 엄마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식당을 나섰다. 시장통은 저녁 찬거리를 사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나는 사람들 속을 헤집으며 나아갔다. 나아가는데 시장통 길 끝에서 나를 마주 보고 걸어오는 익숙한 슈퍼로 얼른 들어갔다. 그리고 슈퍼 안쪽 냉장고 앞에 섰다. 이회장이 지나 갔을까. 냉장고 앞으로 술을 마신 듯 홧홧하게 달아오른 내 얼굴이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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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회장이었다. 나는 이회장이 나를 발견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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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일러스트레이터&그래픽디자이너 현재 런던 거주 그림그리기, 여행 그리고 푸른하늘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jejeviva@gmail.com jieun-kim.com facebook.com/thedrawinghand 황홀경에 빠지게 하는 그들의 음악과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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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모운 1987. 04. 20~ 소녀가장 10년차 @andplaydead 가끔 무미건조하다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사람을 보곤 합니다. 겉으로 볼 때는 기계적으로 주어진 일만 해내고, 인간미라는 걸 찾아볼 수가 없지요. 어쩌다 살아가는 낙이 뭔지 물어봐도 그들은 겸연쩍게 웃을 뿐입니다. 나는 이걸 마냥 나쁘게 보지만 않는데, 어르신들 (주로 꼰대라고 하자!)은 사람이 붙임성 없다고 욕부터 하더이다. 그런 사람들의 과거는 무엇일까! 또는, 그게 뭔지는 몰라도 사람들 앞에서 철저하게 감추고 사는 엄청난 비밀이 있을 것이다! 그게 뭘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쓰게 된 글입니다. 주인공은 두부고요, 화자는 찌질입니다. 두부를 통해 세상과 화해를 시도하는 화자의 성장통을 표현한 글이 절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라. 이번 주제는 모범시민인 나에게 몹시 어려운 주제였습니다. 음주 가무라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술은 안주~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일 끝나고 집에 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춤은 엉거주춤~ 그런 겁니다. 재미없는 삶인가요? 그래서 쓰는 소설도 그다지 재미없는 모양입니다. (아니라고 말해주세요. 나는 못 말리는 답정너~) 4월이라서, 봄이라서, 기분이 좋아서 작업 노트가 좀 이상한데 너그러운 양해 바랍니다. 끈적하고 음울한 여름에 또 만나요. 안녕!
기본은 탄듀라고 했다. 두부의 긴 교복 치마에서 짤막한 다리가 뻗어나올 때 뭉툭해진 종아리 근육을 보고 속으로 웃었다. 많아 봤자 서너 살 차이 나는 선배들이 박수를 쳐주었다. 두부는 무표정하게 탄듀라는 동작을 몇 번 하다가 이번에는 쁠리에를 보여주겠다며 뒤돌아섰다. 그리고는 양다리를 옆으로 천천히 구부리다가 멈추더니 이게 드미 쁠리에구요, 완전히 앉더니 이게 그랑 쁠리에에요 라고 말했다. 한 선배가 개구리 같다며 손뼉을 치며 웃었다. 확실히 개구리가 앉은 모양이긴 했지만, 선배의 박장대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장기자랑 시간이라고 1학년 동기 애들 모두가 얼토당토않은 짓거리, 이를테면 두 명이 조를 이루어 태권도복을 입고 우스꽝스러운 차력 쇼를 한다든가 방송댄스라는 걸 홍보용 바람인형이 추듯이 춘다든가 하는 것도 포함해서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중앙에 홀로 서 있는 두부를 쳐다보았다. 두부는 뒤돌아선 채 살짝 떨고 있었다. 기본자세라고는 하지만 뭔가 힘들어 보였다. 자세를 가다듬은 5년 만에 보여 드리는 거에요. 감사합니다.
아우라
두부는 다시 뒤돌아서서 어설픈 미소를 띄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두부가 마지막에 한 것은 턴이었다. 빙그르르 3번 정도 돌았다. 두 발이 바닥에 닿을 때 몸이 옆으로 기울어지는 바람에 여기저기서 풉풉 소리가 터져나왔다. 나는 웃지 않았다. 두부가 ‘쁠리에’ 라는 말을 할 때 왠지 모를 산뜻한 기분이 든 건 왜일까 잠시 궁리하는 중이었다. 이렇다 할 답을 찾지 못한 채 내 차례가 돌아왔다. 나는 정말이지 사람들 앞에서 토하는 걸 보여주고 그 자리를 빠져나오고 싶었다. 나름 자극적인 즐거움이 아닐까. 이제는 천사와 악마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구역질이 나는데 왜 토를 못하는 거니. 악마가 속삭였다. 반면 천사는 가만히 나를 내버려두었다. 그게 고마워서 노래하는 것을 선택하기로 했다. 천사는 아무런 손도 쓰지 않고 악마를 이겼다. 내 오른손에는 빨간 빗이 들려있었다. 반 곱슬머리가 붕붕 떠다니지 않게 가지고 다닌 거였는데, 귀찮아서 학기 중 손에 꼽을 정도로만 썼다. 그중에 한 번이 이런 동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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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자랑 시간이 될 줄 몰랐다. 동아리실 중앙에 서자 동기들은 무표정하게 박수를 쳤고, 선배들은 갓난아기가 스스로 처음 선 모습을 보는 엄마의 미소 뭐 그 비슷한 걸 지었다. 2학년인 부장이 인사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할 수 없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노래를 시작했다. 모두의 눈이 보기 싫어 그랬던 것이지 감정을 잡으려던 게 아니었다. 해 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트로트는 대충 불러도 웃긴다. 빗을 들고 부르면 더 웃기겠지. 내 기분을 적당히 상처 내고 2분을 썼다. 열여덟 딸기 같은 어린 내 순정. 나는 아직 열일곱 살인데. 딸기는 돈이 없어 잘 사 먹지 못하는 고급 과일이지. 쓸데없는 생각으로 머릿속을 채웠다. 노래가 끝나고 눈을 떴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정말 딸기 같이 웃고 있는 여자아이들과 눈시울이 딸기색으로 변한 두부의 모습이었다. 생각해보면 두부가 고생이 많았다. 두부는 만화부 동기 중 가장 만만 abraxas vol.17
하게 생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선배들과 교사들의 지시를 받아 학교에 잘 나오지 않는 나를 학교에 나오게끔 해야 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나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도 없었다. 그렇다고 집에 도시락 싸들고 찾아와 제발 학교에 나와 달라고 울고불고 사정을 했다던가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염려가 가득하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학교에는 나와야지 응? 하면서 타이르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문자를 자주 보냈다. 내용은 늘 똑같았다. [학교에 다니기 싫으면 자퇴를 해.] 아니, 지가 뭔데 나보고 자퇴를 하라 마라야. [너도 귀찮을 텐데 그냥 전화 통화했다고 하고 나한테 문자 보내는 건 그만두는 게 어때?] 내가 보낸 정중한 제안에 두부는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학교에 나오지 않으면 전화 대신 문자로 꾸준히 자퇴를 권유했다. 처음으로 두부와 대화다운 대화를 한 날은 이랬다. 학교에 가지 않은 지 며칠이 되었는데 그 사이 계속 두부에게 문자가 왔다. 스팸으로 돌려 놓을까 몇 번쯤 고민하긴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왠지 지는 기분이 들 것 같아 내버려두었다. 그랬더니 문자가 오는 일이 더 빈번해졌다. 오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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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잠을 자다가 문자 소리 때문에 깨버렸다. 역시 자퇴를 하라는 두부의 문자 였다. 아니, 진짜 작작 좀 하라고! 잔뜩 화가 나서 수업 시간이 끝날 것을 기다렸다가 두부에게 전화를 걸었다. 머리에는 보이지 않는 뿔이 나 있었다. 가장 뾰족한 부분을 건드려만 준다면 당장 만나러 갈 심산이었다. 야. 너 뭔데. 수화기 너머에서는 교정에서 들려오는 소음만이 맴돌고 있었다. 너 뭐냐고. 뭔데 나한테 자퇴를 하라 마라 매일 문자를 보내고 지랄이야. 솔직히 말하면, 두부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문자비 같은 게 땅 파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나 때문에 성가신 걸 생각하면 내가 이 아이에게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 거였다. 이런 건 일곱 살 꼬맹이도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적잖게 잘못되었음을 누구나 지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겨우 몇 바이트 의 문자가 내 덜 익은 전두엽을 자꾸만 깎아내는 느낌이었다. 나는 욕을, 내가 자주 쓰는 욕들 중 비교적 패륜적이지 않으면서 기분은 나쁠 만한 것들 듣기만 했다. 그게 더 화가 나서 두부를 다그쳤다.
아우라
로 골라서 했다. 두부는 전화를 끊을 생각도 않고 내가 욕하는 것을 가만히 너 씨발 지금 나 무시하세요? 왜 대답이 없냐? 꿀이라도 쳐먹었냐? 대답 안 하지? 어? 수화기 저편에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한숨을 쉬어? 니가 왜 한숨을 쉬어? 두부는 말을 하기 위해 숨을 골랐던 모양인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건 내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난 아무것도 귀찮지 않아. 뭐? 네가 귀찮지 않다고. 단호하지만 평화로운 말투였다. 나는 두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몰라 어리둥절했고,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피곤하거나 그런 것도 아니고. 자퇴를 권유한 건 그저 내 진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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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이라는 단어의 울림이 낯설었다. 낯선 기분이 들면 더욱 화를 내던 시기였다. 하, 참 이런 개 같은 경우를 봤나. 너 나 알아? 동기랍시고 선배들이 들들 볶는 모양인데 적당히 대가리 굴려서 넘어가시고 내 앞에서는 입을 좀 닥쳐주세요. 네? 진심은 지랄 개좆같은 소리 하고 있네. 두부는 내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고 내 쪽에서 먼저 전화를 끊을까 봐 걱정했는지 빠른 속도로 말했다. 이번 주 토요일에 대선배들 놀러 온대. 장기자랑 준비하래. 빠지지 말고 나와. 그럼 문자 안 보낼게. 전화가 끊어졌다. 내가 먼저 끊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한 게 분했다. 대선배는 무슨 얼어 죽을 대선배란 말인가. 애꿎은 방 벽을 한 번 걷어차려 는데 눈높이에 걸린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학교에 4일 연속 나가지 않은 것 abraxas vol.17
을 알게 되었다. 아슬아슬하다. 며칠에 한 번씩은 얼굴을 보여야 선생도 어느 정도 안심을 하고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는다. 이대로는 엄마에게 연락이 갈 것 같았다. 덩달아 전화를 끊기 전 두부가 한 말이 생각났다. 기본적으로 두부는 조용한 성격이었다. 적어도 학교에서 보는 그 아이의 모습은 그랬다. 자세히 짚어보면 두부는 꼭 필요한 말만 하고, 사람들 앞에 나서서 이야기하거나 큰 소리로 말하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나의 경우, 학교라는 곳에서만 조용했을 뿐이었고, 어쩌다 입을 열면 필요한 말을 하기보다 누군가를 반드시 상처 입히는 말을 한다는 것이었다. 장기자랑 뒤풀이 때도 그랬다. 이제 대학교에서는 막 신입생이거나 2학년에 갓 올라간 선배들이 성인 이랍시고 술을 사주기로 했다. 부원들은 일제히 사복 차림을 하고 학교 근처에 있는 공원 구석진 자리에서 간소한 술판을 벌였다. 학기가 시작된 지 2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의욕이 충만한 2학년 선배들은 3학년과 졸업한 선배들에게 재롱을 떠느라, 대체로 쭈뼛대는 1학년 아이들을 챙기느라 바빴다. 그리고 술도 제일 많이 마셨다. 부장은 술이 많이 됐는지 입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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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반쪽이 시뻘게져서는 3학년 선배 두 명과 대선배 세 명 앞에서 훌쩍 거리고 있었다.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서 죄송하다며 애처럼 울었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우스워서 안면에 경련을 일으킬 지경이었다. 제대로 준비했으면 뭐 서커스라도 보여줄 생각이었나 싶었다. 웃음을 감추려고 손으로 얼굴을 가까스로 가리고 있는데 다른 2학년 선배가 내게 다가와 술잔을 내밀었다. “너 왜 학교를 빠지고 그래. 다들 걱정이 많아.”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너희 걱정이나 하세요 라고 말하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나에게 술잔을 건넨 선배는 예쁘장한 얼굴이었지만 소위 보이시한 스타일을 유지하고 다녔다. 여학교인데도 불구하고 팬클럽과 유사한 무리들 의 추앙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만화부원답게 코스프레를 취미로 하고 있었는데, 이 선배는 애니메이션이나 만화가 아니라 당시 유명한 아이돌들 의 코스프레를 주로 했다. 알게 모르게 부서에서는 그런 코스프레를 하는 선배를 약간 경계하기도 했다. 이유는 동성애에 관련된 것이었다. (레즈비언), 그러니까 동성애자들이 많다는 소문이 도니까 다들 선배와
아우라
선배의 겉모습도 그렇고, 아이돌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들 중에는 레즈 거리를 두는 분위기였다. 그런 사람이 기수에 한 명씩은 있었던 모양인지, 부서에서는 아이돌 코스프레가 암묵적인 금기 상황이기도 했다. 나는 그 선배가 아이돌 코스프레를 하든, 사내처럼 하고 다니든 전혀 상관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학교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나에게 다가와 그런 식으로 말을 거니 기분이 상했다. 너는 나에게 말을 걸지 말았어야 했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선 선배의 술을 받아 마시고 멋쩍은 척하며 웃어 주었다. 선배는 뭔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분위기가 조금 더 무르익자 멀찍이 훌쩍거리던 부장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게임을 하자고 했다. 술도 있겠다, 학기도 흘러가고 있겠다, 부원들이 조금 더 서로를 알고 돈독해지자는 의미에서 진실 게임을 하겠다 는 것이다. 애새끼들이 뭐 알고 싶은 게 이렇게 많나라는 생각이 들다가, 아까 나에게 말을 걸었던 선배 쪽으로 눈길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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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게임은 1학년과 2학년이 번갈아 답을 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1학년, 2학년, 1학년, 2학년 식으로 자리를 다시 배치해 앉았는데, 나는 잽싸게 보이시 선배 옆자리를 차지했다. 선배는 얘가 왜 이러나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아까 자신이 친절하게 챙겨줘서 내가 마음을 열었다고 생각했는지 별말은 없었다. 질문은 정해져 있었다. 1.연애를 해보았는가. 2.키스를 해보았는가. 3. 키스를 했다면 언제 누구와 했는가. 역시 서로를 잘 알아보자고 하는 진실 게임이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질문들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내가 흥미있게 대답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1학년 아이들은 대부분은 경험이 없어 단답형이 많았고, 2학년 중에는 몇몇만이 성의있게 대답했다. 내 차례가 돌아왔을 때 나는 술을 연거푸 세 번을 마셨다. 애초에 답을 할 생각이 없었다. 비밀로 하고 싶다면 술을 마시면 그만이었다. 대선배들은 술이 세다며 칭찬해주었고, 나머지 부원들 abraxas vol.17
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희미하게 내비쳤다. 내 다음이 대망의 보이시 선배. 선배는 1, 2번 대답에 모두 고개를 끄덕여 열렬한 환호를 얻었다. 꺅꺅 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나도 함께 소리를 지르며 분위기를 띄웠다. 그리고 3번 질문에 선배는 시원하게 술을 털어 넣었다. 대선배들이 “에이~ 그러지 말고 얘기해봐” 권유해도 선배는 미소만 지었다. “다른 질문 해도 되죠?” 나는 때를 놓칠까봐 재빨리 부원들의 동의를 구했다. 대선배들이 그럼 그럼 하며 호들갑을 떨었고, 다른 부원들도 약간의 흥분 상태에서 그래 네가 질문해 봐 라며 부추겼다. “키스요, 남자랑 했어요?” 지금도 정확히 기억난다. 나는 분명히 저렇게 질문했다. 다들 질문 의 의미가 무엇인지 파악하는데 오래 걸리진 않았고, 분위기는 오묘해졌다. 보이시 선배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술을 마셨다. 나는 선배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고는 “아아, 그렇구나.” 라고 말했다. 부장이 나와 선배를 번갈아 보더니 갑자기 “아, 뭐야 나도 대답할래!” 라고 쓸데없이 크게 말하는 바람에 모두 꺄르르 웃었다. 모두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나는 보이시 선배를 아주 곤란하게 만들고 싶었다. 아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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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배가 동성애자였는지 이성애자였는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나는 어떤 확신을 가지고 선배의 심기를 일부러 건드렸다. 동성애자였어도, 이성애자였어도 내 질문이 곤란한 건 똑같았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내가 원하던 모든 것이 이루어졌지만, 나의 상한 기분이 깨끗이 나아지는 일이 일어나진 않았다. 사실 기분이 상했던 이유도 썩 대단한 게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해야 했을까. 부원들은 대선배들에게 단체로 큰 목소리로 인사를 한 뒤 흩어졌다. 마지막에 부장은 나에게 학교에 좀 나와서 같이 부 활동을 하자고 좋은 말로 타일렀다. 부장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빨리 파하고 집에 돌아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보이시 선배의 모습을 찾았다. 선배는 일찌감치 사라지고 없었다. 지금 그 광경을 떠올려 보면 보이시 선배를 어떻게든 찾아서 사과하는 내 모습도 함께 떠올린다. 이제는 그렇게 할 기회가 없다. 영영. 모두 흩어져 집에 돌아가는 길 내 뒤에서 두부가 말했다. 그리고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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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참 못됐네. 지나쳐 빠른 걸음으로 걸어나갔다. 쫓아가서 머리끄덩이라도 쥐어 잡을까 잠시 고민했다. 누군가 나를 비난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죄책감도 조금은 있어서 두부를 쫓아갈 수도 없었다. 그게 누구를 향한 죄책감인지 몰랐다. 악 받친 목소리로 두부 뒤에서 소리쳤다. 이제 문자 보내면 넌 진짜 뒤진다! 두부는 뒤돌아보지 않았고, 점점 멀어졌다. 이 개구리 같은 년아! 마지막으로 소리쳤다. 두부는 더 작아졌다. 이후 얼마 동안은 학교에 잘 나갔다. 사람들의 말에 부응한다기보다 학교를 아예 다니지 않을 작정이 아니었고, 다가오는 중간고사는 봐야겠다 싶었다. 그렇다고 공부를 한 건 또 아니었다. 1교시 시작할 때 잠들었다가 종례 시간 에 일어나 집에 갔다. 출석하는 것만으로 담임은 기뻐하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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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애들은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아니, 그중에 일진이라고 느는 애들이 엎드려 있는 내 앞에 알짱대면서 “학교 왜 나왔냐? 너 나오니까 자리 바꿔야 되잖아. 미친년아.” 이렇게 같잖지도 않은 시비를 걸다가 사라지곤 했다. 선생들 사이에서는 이미 학교에 잘 안 나오는 불량학생으로 찍혀 있었지만, 나는 사실 불량도 뭣도 아니었다. 지금 말로 하면 찌질이 랄까. 그 비슷한 언저리에 있는 딱히 수식할 만한 단어를 가지지 못한 존재였다. 학교에 가지 않을 뿐이었지 딱히 불량한 짓거리를 하고 다닌 것은 아니고, 학교에 가지 않을 때는 주로 집에 있었다. 잠을 아주 많이 잤다. 그리고 집에는 그렇게 자는 나를 깨워주는 사람이 없었다. 두부는 약속대로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일단 내가 학교에 잘 나갔고, 성실히는 아니지만 부 활동도 어느 정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부도 누군가에게 시달리는 일은 없어보였다. 두부와는 반이 달라 만화부에서만 abraxas vol.17
만났는데, 아이들은 어느새 두부와 나를 단짝으로 만들어놓았다. 부 활동의 뭔가를 할 때마다 둘이 짝을 짓게 하는 것이다. 두부는 그런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나는 아이들 앞에서는 별말 안 했지만 옆에 있는 두부 에게 괜히 시비조로 일관했다.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게 더 화가 나서 나는 말끝마다 욕을 했다. 두부는 가끔 그런 욕은 처음 들어본다며 신기해했다. 지금에서야 깨달은 것은 두부가 나를 아주 잘 다뤘다는 것이다. 두말없이 인정한다. 어린 나이에 혼자 산다는 것이 누군가가 보기에는 안쓰럽거나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열 일곱 정도라도 돈만 있으면 잘 지낼 수 있다. 그러니까 그 돈이 떨어지면 위기가 찾아온다. 심각한 위기가. 차비가 없어서 학교에 가지 못했다. 지방에서 일하는 엄마에게는 전혀 연락이 닿지 않았다. 하늘에서 엄마와 나 두 사람만 세상에 뚝 떨궈놓고 그나마도 떨어져 지내거라 하는 느낌으로 살고 있을 때였다. 아빠는 나에게 일종의 맥거핀 같은 존재로, 그가 세상에 명확하게 존재하고 있는지도 가늠할 수 없게 된 지 오래였다. 나는 엄마가 혼자 낳아 혼자 기른 아이였고, 이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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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조차 없이 혼자서 마구잡이로 자라는 중이었다. 가까이에 도와달라고 연락할 사람도 없었다. 먹을거리를 사지 못해 이틀을 굶었다. 에이, 그냥 잠이나 자자 했는데 배가 고파서 잠도 잘 수 없었다. 책상 위에 굴러다니는 잔돈으로 생수를 한 병 사니 그걸로 끝이었다. 물을 조금씩 아껴 마시면서 이를 어찌하나 고민하는 중에 문자가 왔다. 두부였다. [또 시작이니.] 다행히 자퇴하라는 이야기는 없었다. 두부는 나를 도와줄 수 있을까. 그렇게 욕을 많이 했는데 과연 도와줄까. 두부에게 전화를 걸 때도 그 애가 전화를 받을 때까지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도와달라는 말을 꺼낼 때는 입술이 떨려 더듬더듬 말하고 있었다. [곧 도착하니까 집 앞에 나와 있도록] 답장으로 우리 집 위치를 아느냐고 묻자, 부장이 주소를 가르쳐주었다고 했다. 부장은 우리 집 주소 같은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두부에게 그럼 그냥 집으로 와달라고 하자, 자기도 집에 가서 할 일이 있다며 나를 함께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우선 밥만 먹을 데리러 동네까지 와준 것이다.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을 내린 후 조금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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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으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두부네 집은 학교에서 가까웠다. 나를 걸었다. 두부는 나보다 약간 앞서 걸었고, 나는 뒤를 쫓았다. 다리도 짧은 게 걸음이 여간 빠른 게 아니었다. 기력이 없었던 탓에 쫓아가는 것이 힘에 부쳤다. 얼마 후 다세대 주책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골목길에 들어섰다. 두부네 집은 그 주택들 중 하나의 3층 꼭대기였다. 두부는 거실에 나를 앉혀두고 옷을 갈아입겠다고 제 방에 총총 들어갔다. 거실을 죽 둘러보았다. 주방이 딸린 넓은 거실이었다. 소파도 있었고, TV도 큼직했다. 거의 아무 것도 없는 원룸 우리 집과는 달랐다. 나는 살짝 위축되는 기분을 느꼈지만, 오히려 등을 더욱 곧게 펴서 똑바로 앉는 것으로 그 기분을 없애고 싶었다. TV 위에는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두부의 부모님과 오빠처럼 보이는 사람과 두부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찍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너 왜 그렇게 웃기게 앉아 있어? 두부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나는 등을 곧게 펴고 팔을 앞으로 죽 뻗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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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위에 손을 올려둔 채로 앉아 있었다. 나는 원래 의자에 이렇게 앉아. 소파니까 그냥 편하게 앉아. 두부는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뭐 만들어줄 거야? 주방에 있는 두부에게 소리쳤다. 라면. 밥도 있냐? 반찬은? 뭐 재료 있으면 내가 만들까? 배가 고팠던 나는 다급하게 말했다. 그냥 라면 먹는 게 좋을걸. 기대하길 바란다는 말투였다. 주방에서 냄비며 그릇을 꺼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등을 구부리지 않고 몇 분을 앉아 있다가 슬그머니 소파에 몸을 기댔다. 두부의 가족사진을 또 보았다. 두부의 부모님은 두부의 abraxas vol.17
부모님처럼 생겼구나. 별 쓸모없는 생각이 들었다. 두부가 끓인 라면은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이틀이나 굶은 탓도 있었 지만, 지금까지 먹어 본 라면 중에서 가장 맛있었다. 두부는 라면 말고도 짜파게티까지 끓여서 준비했는데 역시 왜 이렇게 맛있는 거지 정신이 없을 정도로 맛있었다. 너 라면 진짜 잘 끓인다. 나도 한 라면 하는데, 네가 끓인 건 뭔가 다른데? 나중에 분식집 해도 되겠어. 면을 입에 욱여넣으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소리 많이 들어. 두부는 어깨를 으쓱댔다. 두부가 잘난 척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그런데 분식집 같은 건 안 할 거야. 이렇게 맛있는데 왜 다른 사람들한테 먹여. 내가 먹어야지. 두부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면발이 코로 넘어갈 뻔했다. 켁켁. 그런데 나한테는 왜 먹이는 거야? 너는 뭐…. 예외라고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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켁켁. 그래? 야, 짜파게티 남은 거 내가 다 먹어도 되냐? 그래. 너 다 먹어. 두부는 짜파게티가 담긴 냄비를 내 앞으로 밀어주었다. 식사가 끝난 뒤 나는 설거지를 했다. 찬장에 다 닦은 접시를 넣으려는데 빼곡히 들어찬 라면과 짜파게티가 보였다. 아, 씨발. 나도 모르게 그만 욕이 나오고 말았다. 두부의 방은 그야말로 마니아의 방이었다. 벽에는 각종 애니메이션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커다란 두 개의 책장에는 만화책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일본어가 쓰여있는 DVD와 CD 같은 것들도 상당수 보였고, 책상 위에는 나도 아는 만화 주인공들의 피규어가 늘어서 있었다. 솔직히 그림은 나보다 못 그렸는데, 물질적으로는 나보다 한 수 위였다. 두부는 침대 위에 앉아서 만화책을 팔랑거리며 훑어보고 있었다. 나는 피규어들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책상 끄트머리에 놓인 다비드의 별이 그려진 작은 나무 상자에 시선이 멈췄다. 신비로운 분위기의 나무 상자는 빨리 상자를 열었다. 거기에는 가지런히 쌓여있는 카드의 모습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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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어보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보였다. 뒤돌아서 두부를 한 번 쳐다봤다가 타로였다. 너 타로도 하냐? 은근히 별걸 다하네? 두부는 내 옆에 다가와 상자를 집어 들었다. 응. 아직 해설서를 보면서 해야 하는 수준이지만. 음. 한 번 봐줄까? 나도 점성술에 흥미가 컸던지라 재미삼아 한 번 보기로 했다. 두부는 상자 밑에 접어놓은 벨벳 재질의 천을 침대 위에 깔았다. 우리는 천을 가운데 두고 침대 위에 마주 앉았다. 두부는 제법 그럴싸하게 카드를 어지럽히고 섞더니 나에게 당부를 했다. 명심할 게 있는데, 타로는 점을 보는 사람과 점을 치는 사람 마음이 잘 맞아야 점괘가 선명하게 잘 나와. 네가 나에게 물어볼 때 마음만큼은 진지하고 간절한 것이어야 해. 알겠니? 사뭇 비장한 말투에 주눅이 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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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히 알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직도 두부에게 무엇을 물어 보았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떠올릴 필요도 없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인상에 명확히 남아있는 것은, 내 질문이 아니라 두부의 비장했던 당부와 카드를 뽑아드는 나를 볼 때의 표정, 해설서를 읽을 때 잠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갔던 그 웃음 나는 광경, 점괘를 말해줄 때는 놀라울 정도로 달변이었다는 것뿐이다. 성인이 된 후에도 몇 번인가 타로점을 본 적이 있지만, 두부처럼 점괘를 말한 사람은 없었다. 두부가 나에게 말을 그렇게나 많이 하고, 그렇게나 잘한 것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너 진짜 말 잘한다. 눈을 커다랗게 뜨고 칭찬을 했다. 이게 거의 말로 먹고 들어가는 거라서. 네 점괘도 재미있는 편이고. 두부는 수줍게 웃었다. abraxas vol.17
아참! 두부는 무언가 번뜩 생각이 났다는 듯이 무릎을 치며 말했다. 복채 줘야지? 저기, 나는 돈이 없는데…. 순간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나왔다. 복채는 꼭 돈이 아니어도 괜찮아. 아까 설거지 해줬잖아. 어떻게든 어영부영 넘겨보려고 했다. 그건 라면과 짜파게티에 대한 값이잖아. 두부가 이렇게 자기주장을 잘 펼치는 아이인 줄 미처 몰랐다. 두부는 나를 보며 음흉하게 웃더니 설마 했던 말을 꺼냈다. 너 장기자랑 때 했던 노래 뭐였지? 그거나 한번 더 불러봐. 악마는, 악마는 어디 갔을까. 라면과 짜파게티를 토해내고 도망치라는 악마의 속삭임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이번에는 악마가 꼭 이길 텐데. 다음에 돈으로 주겠다고 통사정을 해도 두부는 막무가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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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도 제대로 안 나오는데, 널 어떻게 믿어. 지금 한 번 부르고 깔끔 하게 정리하자고. 두부는 사람을 제대로 약 올릴 줄 아는 아이였다. 노래 부르는 게 어려운 건 아니었지만, 역시 부끄러웠다. 그래도 어쩐지 반드시 노래를 해야만 정리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래. 전에 내가 이 애한테 개망나니처럼 군것도 있고, 어쨌든 굶어 죽을 뻔한 걸 살려준 거니까. 나는 두부의 방에 엉거주춤 서서 노래를 불렀다. 이번에는 눈을 감지 않았지만, 두부를 바라 보지도 않았다. 해 저문…. 앉아있는 두부의 등 뒤로 난 창문을 보니 정말 해가 저물었다. 집에 가고 싶었다. 아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정말 애가 탔다. 노래가 끝나자 두부는 손뼉을 크게 치며 기뻐했다. 네 목소리는 욕할 때보다 노래할 때가 훨씬 예뻐. 두부는 나를 좋아하는 걸까? 문득 보이시 선배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내가 괴성을 지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침대에 털썩 앉자 두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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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아아. 웃음을 터뜨렸다. 재밌냐, 재밌냐고. 툴툴거리는 소리에 두부는 한참을 웃었다. 복채 제대로 받았다. 소양강 처녀를 이렇게 잘 부르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야. 나 장기자랑 때 완전 감동 먹었잖아. 두부는 이제 거침없이 말했다. 그래. 쁠리에인가? 그거. 세상에서 네가 제일 잘해. 비교 대상은 없다만. 아직도 벌게진 얼굴로 받아치니 두부는 또 웃었다. 크크. 그거 우리 부모님이 나 키 크라고 발레 시킨 건데 의욕이 없어서 금방 그만뒀어. 그래도 무슨 콩쿠르 나가서 군무 같은 것도 추고 한때는 재미있었는데. 그런데 왜 하고많은 노래 중에 소양강 처녀였어?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라서. 우리 엄마 되게 과묵한데 내가 어렸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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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노래를 자주 부르더라고. 주로 밥할 때. 콧노래든 뭐든. 그래서 나도 좋아해. 가사 안 보고 부를 수 있는 게 그것 뿐이기도 하고. 근데 넌 왜 장기자랑 때 발레 같은 거 했냐? 사람들 타로점이나 봐주지. 오랜만에 해보고 싶더라고. 그런 자리 아니면 누구한테 보여줄 수가 없을 거 같아서. 계속하지 그랬어. 여자는 열여덟 살까지 큰다던데. 계속했어도 못 컸을 거 같아. 그건 그래. 너랑 나랑 20cm는 차이 나겠다. 네가 나 열받게 할 때 너 두들겨 팰 생각도 해봤거든? 근데 내가 몇 대 때리면 네가 죽을 거 같아서…. 너무하다. 야. 뭐…. 생각만 했다고. 하여튼. 그동안 미안했다. 욕한 것도. abraxas vol.17
괜찮아.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어. 그게 더 열받았어. 나는. 내가 원래 그래. 아무튼 요즘에는 너한테 문자로 싫은 소리 안 해도 되고 좋다. 타로는 왜 보기 시작한 거야? 이상하게 전에 없던 궁금함이 계속해서 생겼다. 두부는 턱에 손을 대고 잠시 할 말을 고르는 듯 생각에 잠겼다. 명쾌하게 점괘를 말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지만 실망하진 않았다. 원래 점에 관심이 좀 있었는데 타로는 과거, 현재, 미래를 보고 방향성을 제시해준다고 하더라구. 미래를 볼 때는 먼 미래보다 가까운 미래밖에 못 본다고 하거든. 그게 마음에 들어. 바로바로 대처할 수 있게 한다고 생각 하거든. 타로 보는 사람은 자신에 대한 점도 쳐? 순전히 흥미 위주의 질문이었다. 두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셀프 타로점이라고 있는 거 같던데, 나는 쳐본 적이 없어. 그럴 필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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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거든. 두부의 대답이 조금 이상했다. 왜 필요가 없어? 나는 곧 죽을 거니까.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물었다. 열아홉 살 생일 전에 죽을 거야. 병이 있는 거냐고 물었다. 아니, 나는 아주 건강해. 자살이라도 할 거냐고 물었다. 전혀. 그건 불효 중의 불효인 걸. 나는 우리 부모님 사랑해. 그럼 왜 죽는 거냐고 물었다. 어렸을 때부터 매일 꿈을 꿨어. 예지몽이라고 해야 하나. 예전에는 정확한 나이와 시간을 알 수 없었지만 크면서 점점 구체적으로 변했어. 그 꿈은 내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는지 보여주는 꿈이야. 다행인지 불행 인지 죽는 그 순간 직전에 꿈에서 깨곤 했어. 중학교 입학하고 나서 같은 게 있을 거라고 확신했어. 책 같은 거 보면서 혼자 공부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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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성술에 관심을 많이 뒀어. 만화에도 많이 나오잖아. 나에게 영적 기운 사주명리학도 조금씩 보고. 하지만 점을 치면서 타인의 미래에는 전혀 확신이 없었어. 그런 면에서 나는 지독한 거짓말쟁이지. 공부한 게 사실은 불투명한 점괘를 아주 그럴싸하게 말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됐을 뿐이야. 내가 볼 수 있는 미래는 나의 미래밖에 없었던 거야. 주위에 죽은 사람도 없어서 장례식 한 번 가본 적도 없는데, 내가 꾸는 꿈과 이미지에 영향을 끼쳤을 리도 없잖아. 이제 열일곱 살인데, 다섯, 여섯 살 때부터 그런 꿈을 꾸고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런 이미지를 떠올린다고 생각해봐. 그게 갈수록 더 명징해진다고 생각해봐. 믿지 않겠어? 나는 믿어. 처음에는 두부가 어떤 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그것은 주로 만화나 애니메이션 같은 매체에 빠져든 아이들이 쉽게 걸리는 병으로 허언증이라고 불린다. 애써 좋게 말하자면 상상력이 지나치게 풍부한 것인 데 만화좋아하는 애들은 허세랄지, 허풍 같은 건 놀이처럼 여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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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도 그런 게 아니었을까.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정도였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이든 수긍해줄 수 있었다. 부모님은 아시니? 아니. 왜 말 안 했어. 슬퍼하실 게 뻔하니까. 너는 안 슬퍼? 나는 슬프지. 죽는데 안 슬프겠냐? 그럼 그냥 믿지 마. 오랫동안 개꿈 꾼 걸로 생각해. 어제도 꾸었는 걸. 그럼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는데? 그건 말할 수 없어. abraxas vol.17
역시 두부에게도 약간의 병세가 있는 모양이었다. 뻥이지? 존나 재미없는 뻥. 믿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나는 매일 봐. 할 말이 없었다. 내가 할 말을 고르느라 머리를 굴릴 동안 두부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내가 만난 사람들에게 좋은 아이로 있다가 갈래. 나 겨울에 태어난 애라서 아직 많이 남았어. 뭔 개소리를 하는 거냐고 윽박질렀다. 하지만 두부의 말과 태도는 너무나도 진실해 보였다. 나는 이미 두부의 말을 거의 믿는 상태였고, 그래서 더 화를 내며 말했다. 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다. 나 갈래. 밥 줘서 고맙다. 두부의 방문을 박차고 나가자 현관문이 열리고 있었다. 일을 마친 두부의 부모님이 들어오셨다. 친구 왔니? 웬일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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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의 엄마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어쨌든 인사는 해야겠다는 생각에 두 어른을 향해 꾸벅 머리를 숙였다. 뒤쫓아 나온 두부는 나에게 잠깐만 있어보라고 말한 뒤 주방으로 쏜살같이 뛰어들었다. 요란하게 비닐봉지 부대끼는 소리가 났다. 두부의 부모님도 나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 애가 뭘 하는 건지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얼마 후 양손에 라면과 짜파게티가 든 봉지를 든 두부가 나타났다. 이거 가져가. 두부의 부모님 앞이라 욕을 할 수도 없었고, 필요 없다고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두부에게 봉지를 건네받아 골목길로 나왔다. 화가 누그러들지 않았다. 왜 부모님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를 나에게 했으며, 그게 하필 죽음에 관한 이야기인지 알 수 없었다. 골목길 끝에 선 나는 손에 든 검은 봉지를 치켜들어 집어던지려다가 이내 제자리에 내렸다. 아, 이래서 현재의 나는 이따금 추억에 빠져들 때 두부와 내가 있던 두부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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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좋아하는 인간들은 안돼. 그 시간으로 돌아가곤 한다. 그날 두부가 말한 것 중 아직도 속 시원하게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다. 담담하게 저가 죽을 날을 말하는 친구에게 열일곱 살 먹은 나는 끝까지 화만 내었다. 매일 분노하던 아이였으니까 무리도 아니다. 그 애에게 나는 항상 한 가지 질문만 한다. 두려운 게 뭐였느냐고. 그 애는 항상 오만상을 찌푸리고 대답한다. 그런 건 모르겠다. 하지만 거의 매일 느끼는 것이 있다. 어딘가에 부딪혀 맥없이 튕겨져나가는 기분이다. 왜 그런 상태가 되어야 하는지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래서 화가 난다. 이제는 그게 왜 그랬던 건지 조근조근 말해 줄 수 있는데. 그 애를 도울 방법이 없다. 후회만 할 뿐이다. 두부네 집에서 나온 뒤로 나는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차비가 없기도 했고 자꾸만 잠이 쏟아져서 일어날 수 없기도 했다. 지속적인 결석으로 학교 에서 운영위원회의가 열렸다. 학교 측과 어떻게 연락 닿아 모든 자초지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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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엄마는 학교에서 알아서 해주기를 원한다고 했다. 위원회의 최종 결정 은 퇴학이었다. 정확히는 등교거부로 인한 퇴학 처분이었다. 퇴학 처리가 이루어지고 며칠 후에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전화를 받긴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 …. 제발 집에 와. …. 같이 살자. …. 나도 돈 벌고 공부해서 검정고시 볼게. …. abraxas vol.17
엄마, 제발. 엄마에게 애원했다. 이 정도라면 엄마가 내 말을 들어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학교를 완전히 그만둔 후, 두부에게는 연락을 한 일도 받은 일도 없었다. 어쩌다 길에서 마주치는 일 역시 없었다. 2년 후 나는 열아홉 살이 되었다. 동기들은 3학년이 되어 모두 만화부 최고 선배가 되었다. 부장과 보이시 선배는 졸업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내 추측일 뿐이었다. 부원들과 연락 하며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 사람들 사정을 전혀 알 수 없었다. 딱 한 번 열아홉 살 봄에 두부에게 전화를 한 적이 있었다. 없는 번호라는 멘트가 나왔다. 전화기에 대고 욕을 했다. 듣는 이가 없는 욕은 고스란히 내 몫이 되었다. 열아홉 살 겨울, 나는 약간의 우울 증세를 보였다. 스무 살이 되고 싶지 않았다. 법적 성인이 되면 삶의 모든 일을 책임지며 움직여야 한다는 부담감 이 있었다. 대부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았지만, 앞으로는 그러면 안 된다 는 생각이 들었다. 1월 1일이 되는 즉시 어디선가 막중한 임무가 떨어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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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그렇게 사는 것만으로도 삶의 임무를 착실히 수행하는 거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내가 느끼지 못했을 뿐이지, 언제나 자신 을 책임지고 수많은 선택지와 씨름했던 것이다. 그것들이 스무 살이 된다고 갑자기 눈사태처럼 불어나는 것이 아닌데, 괜한 환상에 젖어 우울증을 앓았다. 그리고 그해 겨울에는 두부 생각이 많이 나는 걸로도 무척 힘들 었다. 정말 죽었을까? 정말로? 진짜? 특히나 자기 전에 어마어마하게 생각났다. 궁금해 미칠 지경일 때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겨울이 다 갔고, 이듬해 나는 전과 다름없이 성질 더러운 엉망진창 스무 살 이 되었다. 달라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염병할. 몇 년 후, 취직이라는 걸 했다. 또래들과는 꽤 다른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했는데 평범한 직장인 타이틀을 획득하자 고만고만한 삶이 시작되었다. 어느 날은 회사에서 퇴근하는 길에 낯익은 얼굴과 마주했다. 학창 시절 잠시 친하게 어울리던 친구였다. 옛날의 나였다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했지만, 내 얼굴을 알아보고는 반갑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우리는 길 가장
아우라
나는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친구도 처음에는 당황 자리에 서서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친구는 두꺼운 문제집 같은 것을 품에 안고 있었는데,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하는 중이라고 했다. 열심히 하라고 응원의 말을 보탰다. 이렇게 남을 응원할 줄도 알게 되었다. 얘기를 나누던 도중 그 친구가 두부와 같은 반이었다는 게 기억났다. 친구에게 두부의 안부를 묻자, 친구는 두부가 누구냐고 물었다. 잘 설명하기는 조금 어려움이 따랐지만, 나와 같은 만화부였고, 키가 작고, 말수가 적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친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왜 고등학교 1학년 때…. 내 말에 친구는 이제야 모든 걸 이해했다는 듯이 웃고는 이렇게 말했다. 너랑 나랑 중학교 동창이잖아. 고등학교는 따로 갔고. 기억은 왜 이리도 제멋대로인가. 나이가 들수록 과거와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다. 타로 카드가 섞이는 것처럼 이리저리 뒤섞이기도 한다. 그게 안타깝다는 기분이 들면 새삼 나이 먹은 걸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성격이 점점 온순해지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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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라는 칼날에서 멀어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에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신호대기 중 두부를 닮은 사람이 건널목에 서 있는 것을 봤다. 두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아니었다. 분위기가 비슷했다. 키가 작고 심한 곱슬머리에 얼굴이 하얗고 안경을 쓴. 내가 마지막으로 본 두부의 모습과 비슷했다. 그 애는 정말 죽었을까. 혹시 죽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고 있을까.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다면 죽지 않은 두부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적어도 두부는 내 아빠처럼 맥거핀은 아니니까. 분명 나와 함께 한 공간에 있었으니까. 후회가 아닌, 다른 걸 할 수 있다면. 이런 나의 소망이 두부의 꿈을 꾼다. 자신이 죽을 거라던 날, 두부는 아무일없이 방에 난 조그만 창문을 통해 해가 지는 것을 보고 잠이 들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 거라던 자신의 예지몽이 빗나간 것이다. 두부의 가슴을 며칠씩이나 쿵쾅쿵쾅 abraxas vol.17
크게 뛰었고, 그것은 자신의 열아홉 살 생일까지 계속되었다. 두부는 그날 저녁 가족들과 함께 생일상을 차려놓고 엉엉 울었다. 두부가 그렇게 우는 것 을 처음 본 부모님은 무슨 일 있는 거냐며 걱정을 했고, 두부의 오빠는 태어난 게 그렇게 좋으냐며 우는 두부를 놀렸다. 두부는 케이크의 촛불을 끄면서도 꺽꺽 울었다. 가까스로 울음을 그친 두부는 그날 밤 집 근처 공터에서 타로를 불태웠다. 사주명리학에 대한 책도 버렸고, 더 이상 점성술 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자신이 죽는 꿈은 여전히 꾸었다. 죽을 거라던 나이도 그대로였다. 왜 그런 꿈을 꾸는 것일까 궁금했던 두부는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꿈에 대한 실마리는 영영 풀어내지 못했다. 대학교 4학년 때 만난 한 살 연하의 남자친구와 몇 년을 사귄 뒤 그대로 결혼했다. 직업은 심리상담사,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언변으로 업계에서 명망을 높였다. 하지만 공인이 되거나 유명인이 되는 것을 꺼려 개인적으로 상담소만 조용히 운영했다. 두부는 여전히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다. 집을 장만했을 때는 만화책과 DVD, CD, 피규어를 따로 두는 방을 만들었다. 두부는 딸 쌍둥이를 낳았다. 아이들을 낳은 후 선명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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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꿈이 점점 희미해졌다. 그것이 내심 아쉽기도 했다. 요리를 할 때는 소양강 처녀를 흥얼거렸다. 아직도 두부가 끓인 라면은 최고다. 남편은 노년에 분식집을 차리자고 말했지만, 두부는 딱 잘라 거절했다. 몸이 찌뿌둥할 때 하는 스트레칭은 여전히 발레의 기본 동작들이다. 남편은 두부가 그랑 쁠리에를 할 때 모습이 섹시하다고 자주 말했다. 그럴 때 두부는 행복했다. 두부는 가끔, 아주 가끔, 나를 떠올렸다.
아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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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야 twitter@emmma_kim 맥주를 쨩쨩 좋아합니다. 22세의 시각탐닉꾼. 해보고 싶은 건 많은데 머릿속에서 상상만하다가 죽을 것 같네요. 수야를 살ㄹ
1. 덜컹거리는 전철 안에서 소스가 듬뿍 올라간 오므라이스를 한 입 베어 무는 상상을 했다. 내 옆에 앉은 사람이 자다가 화들짝 놀래며 잠에서 깼다. 내가 먹는 상상을 너무 크게 해서 그의 꿈에 커다란 오므라이스가 나왔을지 도 모르겠다. 은빛 숟가락으로 밥을 크게 뚝 떠서 입에 넣어보았다. 새콤한 소스 맛이 참 좋구나 생각했더니 입안에도 침이 그득하게 고여온다. 혹시 내 상상 때문에 옆 사람이 침을 흘리는 게 아닐까 궁금해져서 천정의 광고판 을 쳐다보는 척하며 살폈다. 그는 다시 잠에 빠져있었고 침을 흘리지 않았다.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싶어, 나는 소스 묻은 숟가락과 그릇까지 깨끗하게 핥아 먹었다. 접시에서 뽀드득 소리가 들리는 착각이 든다. 2. 이 글은 읽으면서 도대체 얘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어? 아, 갑자기 배고 프다. 너구리 한 마리 몰고 가실래예?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거야. 그냥 생각 에 생각의 꼬리를 아주 길게 빼는 거지 뭐. 너구리 먹고 와요. 기다려줄게 3. 가끔 상상하면서 나도 모르게 몸서리칠 때가 있다. 누군가가 내 속마음
Yes or No
내가. 대신 국물은 좀 남겨놓아 봐요. 나 밥 말아먹고 싶어요.
이라던가, 나의 상상을 읽는 모습을 상상할 때가 상상하는 것 중에서 제일 이상하다. 누가 들으면 4차원이라던가, 괴물같다던가, 어머 변태, 싶은 쓸데없는 생각들을 가끔 하는데 그런 걸 들킨다는 건 틀림없이 끔찍하다. 3-1. 번호가 좀 다르게 붙었다고 기대하지 맙시다. 오늘은 삼일절! 태극기 달으셨어요? 어머 농담이에요 오늘은 만우절이에요. 3-2. 오늘은 주말이라 전철에 사람이 더 많았던 건지 없었던 건지 평일에 잘 타지 않으니 알 수 없지만 뭐 이런저런 음식 먹는 상상은 끝내주게 많이 했다. 그때마다 3.을 생각했고 지금은 좀 울렁거려. 집에 와서 세수를 했더니 기분이 몹시 좋아 랄랄라. 내방은 최고예요. 모두, 아니 대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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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습니까? 4. 내 방 옷장 옆에 세워둔 기타 가방에 먼지가 앉았다. 그것도 매우 몹시 잔뜩. 가방 색이 까매서 회색빛 먼지가 아주 잘 보인다. 덜도 말고 더도 말고 더럽다. 옆에 달린 지퍼를 찌익-하고 열고 기타를 꺼냈다. 한 줄씩 쳐봤는데 음이 모두 풀려있다. 조율이 피료하다. 나는 피로하고 너는 필요하다? 나는 조율기를 찾으러 거실로 갔다. 거실에 있는 티브이 아래 서랍 어딘가에 그게 있을 텐데... 까지 생각하다가 그게 뭔지 까먹었다. 아 생각이 나질 않아, 그거 있잖아요 그 거시기! 5. 거시기 : 이름이 얼른 생각나지 않거나 바로 말하기 곤란한 사람 또는
abraxas vol.17
사물을 가리키는 대명사. 6. 야 이 바보야. 나는 거실에 있는 컴퓨터로 거시기의 뜻을 사전으로 찾아 보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서 도대체 그게 뭔지 생각해보려고 했다. 기타는 꺼내져 있는데 내가 뭘 하려고 했더라? 건망증이 정말 심하다, 아휴. 갑자기 술이 땡긴다. 수울! 다시 거실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열고 맥주 한 캔을 꺼내왔다. 6-3. 그렇다고 집에 늘 맥주가 존재하는 건 아닙니다. 이건 미드나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어제 아파트단지 내 상가에서 사온 겁니다. 7. 두 글자 이름의 연예인이 광고하다가 다른 두 글자 이름의 연예인으로 바뀐 맥주의 캔을 땄다. 기타는 내가 왜 꺼냈는지 통 기억이 나질 않으니 다시 기타 가방에 조심스레 넣어 지퍼를 찍, 올렸다. 안주 겸해서 티브이 영화채널이라도 볼까 싶어 리모컨을 잡고 티브이를 켰다. 틀자마자 나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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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은 개그프로그램이다. 거실에선 엄마랑 동생이 마구 웃어댄다. 아마 같은 채널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남자 개그맨과 여자 개그맨이 콤비로 나오는 코너인데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 아아, 립싱크구나. 정정합니다. 립싱크를 하며 춤을 추고 있다. 저게 그렇게 웃긴 건가? 뭔가 안쓰럽다.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지, 하던 아빠의 한숨 섞인 한마디가 떠올라서일 것이다. 왠지 갑자기 우울해졌다. 반이나 남은 맥주 캔을 다 마셔버렸다. 7-4 .실은 나도 기타 치며 노래하고 싶다. 돈 걱정 같은 거 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기두 하고 말이지. 솔직히, 나 같은 애가 춤까지 추는 건 무리라고 다들 생각하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우선 내가 가진 통기타 부터 어떻게 좀 연습 좀 해야 되는데. 8. 꺼억
Yes or No
8-5. 모두 침묵한다(……) 9. 생각났다 거시기가 뭐였는지. 꺼억 소리가 무슨 주문이 풀리는 마법은 아니었을 텐데 10. 정답: 조율기…. 빙고! 무슨 퀴즈프로그램에서 마지막 문제- 상금은 천만 원?정도- 그런 문제의 정답을 알아낸 것처럼 혼자 기뻐했다. 음, 천만 원은 오버겠지 싶군요. 미안합니다. 다시 기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지퍼를 찍, 열고 기타를 꺼냈다. 어떤 줄은 너무 풀어지고 어떤 줄은 너무 조여져 있고 알 수가 없다. 제멋대로이다 기타가. 오늘따라 조율하는 게 너무 어려워 나는 초보니까, 라는 핑계를 댔다. 십분 넘게 끙끙대며 돌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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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리며 간신히 비슷하게 조율했다. 11. 잠깐, 생각해보니 지금 열한 시가 넘었다. 기타를 쳐도….괜찮을까? 엄마 나 기타 쳐도 괜찮아? 얘는 무슨 지금 시각에 그건 소음공해야 이웃집 이랑 아랫집에서 우리 집 문 앞에 층간소음 때문에 일어난 살인사건 기사를 예쁘게 스크랩해서 붙여놓아도 이상하지 않을 거야, 라고 엄마는 대답했다. 살인 사건이라니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방에 들어와 기타를 정리했다. 결국, 내가 오늘 한 건 맥주를 한 캔 마시고 기타를 조율하고 낮에 탄 전철에선 오므라이스를 상상했고 너구리 국물에 밥을 말아 먹기만 하면 되는 건가 . abraxas vol.17
12. 아 이게 뭐에요. 국물 너무 째금 냄겼어 치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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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준 ssazu.tistory.com clownforrest@gmail.com @_ssazu 술을 마시고 생각을 합니다. 내가 세상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세상이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잠이 깨는 순간은 늘 마법 같다. 어느 순간, 세상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눈을 감고 불완전한 어둠을 맞이한다. 내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짙은 어둠을 뚫고 ‘나’라는 작은 빛이 찾아오며 다시 세상이 돌아온다. 그렇게 잠에서 깨어난다. 오늘의 기상은 순탄치 않다. 눈꺼풀 위로 내려앉은 햇살에 붉게 물든 세상이 머리를 두드린다. 이불에 뒤엉켜 있는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버릇처럼 잠들기 전 기억을 더듬어 본다. 나는 지난 밤 술자리에 있었고 친구들이랑 몇몇의 여자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마-술자리의 기억은 대부분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에 있는 것처럼 모호해서 확신할 수가 없다-여자들 중 한 명이 술게임에 걸려서 나에게 흑기사를 부탁했던 것 같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여 소주를 들이켰다. 그 이후의 기억이 바로 지금이 다. 어제 입었던 회색 청바지와 파란색 셔츠, 검은 니트는 그대로이다. 와인색 코트는 바닥에 던져져 있다. 잃어버리지 않은 게 다행이다. 상쾌한 아침햇살은 추호의 인정도 없이 뻔뻔하게 나를 고문하곤 한다. 그리고 지금의 난 그 고문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다. 팔을 더듬어 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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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 창문에는 커튼이 없다. 덕분에 아무리 힘든 밤을 보냈어도,
속에서 핸드폰을 찾았다. 8시 13분. 부재중 통화는 없고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는 없다. 아침에 일어나서 핸드폰에 와있는 알림 들을 확인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SNS를 버리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몸을 일으키자 세상이 춤을 추는 것 같다. 시끄러운 클럽에서 스피커 바로 앞에 서있으면 어느 순간 음악이 들리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줄 때가 있다. 사람이 가득 찬 클럽이라면, 다른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인해 스테이지가 흔들리는 것이 느껴진다. 스피커의 음량과 사람들의 무게로 가만히 서있어도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허우적거린다. 바로 그 기분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2천배는 더 불쾌하고 3만배는 더 고통스럽다. 침대 밑에, 버려진 시체처럼 널부러진 코트를 들어올린다. 숙취는 일단 소지품 검사에서부터 시작된다. 왼쪽 주머니에 손을 넣자 영수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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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영수증이다. 두 장이 들어있다. 만 5천원 정도 되는 영수증 한 장, 그리고 3천원 가량의 영수증 한 장. 중간에 내려서 밥이라도 먹은 모양이다. 나라면 충분히 그럴만하다. 술을 마신 곳에서 집까지는 만 5천원 정도면 충분히 오는 거리다. 안주머니에 손을 넣자 지갑이 손에 잡힌다. 카드와 돈은 그대로 있다. 코트의 오른쪽 주머니에는 구겨진 담배 갑이 들어있다. 담배를 보자 다시 머리가 지끈거린다. 숨어있던 니코틴들이 동료를 만나서 다시 활개를 치기라도 하는 걸까. 현재까지 정황으로 보아, 잃어버린 것은 기억뿐인 것 같다. 안심하며 침대에 다시 누웠다. 아마 다시 잠들진 못할 것이다. 필름이 끊기는 것은 흔한 일이다. 내겐 꽤 자주 있는 일이다. 덕분에 안타깝게도 그만, 익숙해 지고 말았다. 친구들은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도저히 조심할 수가 없다. 적당히 마셨는지 가늠하지도 못한 순간 필름이 끊겨버리고 말기 abraxas vol.17
때문에 조심이란 건 소용이 없는 얘기다. 결국 그런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같이 술을 마셨던 사람들에게 연락해 지난 일을 물어보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모른 척하고 넘어가면 내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테니까. 일어나서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이것 저것 가득 있지만 뭔가 먹고 싶지는 않다. 목이 너무 말라서 우유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뭔가 느끼해서 오렌지 주스를 다시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고 나니 입 안이 좀 칼칼한 것 같아서 생수를 물컵에 따라서 마셨다. 오늘은 딱히 할 일이 없다. 집에서 쉬는 날도 있어야 한다. 쉬는 날의 존재에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쉬는 날이란 건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전 여자친구와 이런 일 때문에 싸운 적이 있었다. 그녀는 놀고 있었고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내가 하던 아르바이트라는 것이 꽤 바쁘고 육체적으로도 힘든 일이었다. 고작 일주일에 하루만 쉴 수 있었고 그 하루는 정말 ‘쉬고’ 싶었다. 그래서 어느 날 그녀에게, 이번 주 휴무에는 정말 쉬고 싶다고 말했더니 그녀는, 그럼 그냥 만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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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카페라도 들어가 있자고 말했다. 나는 그 때 머릿속에서 뭔가 빠직, 하고 금이 가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그녀와 만나는 것이 연애가 아니라 업무처럼 느껴졌다. 여느 업무들이 그렇듯 나를 질리게 하고 도망가고 싶게 만들었다. 그렇게 연애에게 사표를 제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직원의 사표 수리를 쿨하게 받아주는 고용주가 아니었다. 어쨌든! 휴식이란 말 그대로 휴식이어야 한다. 마치 뇌가 잠을 자는 동안 유일한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지의 상태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의 삶이 하얀 종이와 같다면, 휴식은 지우개로 그것을 지우는 상태가 아니라 다 지우고 난 하얀 바탕의 종이를 가만히 놔두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바로 그 휴식의 날을 가지려고 한다. 뭐, 보통 해가 지고 나면 마음이 쉽게 변하곤 하지만 말이다. 전화기를 들고 텔레비전 앞에 누웠다. 텔레비전을 켜고 보지 못했던 예능들을 본다. 딱히 아무런 감흥이 없더라도 가만히 보고 있다. 예능은 즐거움을 전해준다. 그리고 가끔 영감을 주거나 자극을 주기도 한다. 휴식에는 이 정도 컨텐츠가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다. 한번은 쉰답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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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생각의 단계를 생략하고 감정을 느끼게 해준다. 어떤 분석이나 평가 없이
그 동안 보려고 했는데 보지 못했던 영화를 몰아서 봤던 적이 있다. 홍상수의 영화 몇 편과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 몇 편을 보았는데, 그 날 밤 잠을 자다가 악몽을 꿨다. 아니, 꿀 수 밖에 없었다. 홍상수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는데, 그게 라스 폰 트리에와 만나는 바람에 나를 감정적, 혹은 분석적 사고의 쳇바퀴로 안내했던 것이다. 결국 기진맥진한 나의 뇌는 꿈 속에서 그로기상태가 되어 잠재의식에게 혼쭐이 나고 말았다. 아무래도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본다. 그 이후로는 예능, 더 나아가선 가벼운 미드 정도로만 휴식을 달래고 있다. 물론, 나의 뇌는 그런 패턴에 매우 기뻐하고 있는 것 같다. 술을 진탕 마신 밤을 겪은 몸은, 아침에 아주 최상인 것 같은 컨디션을 자랑한다. 약간 나른하고 약간 취했으며 어딘지 모르게 공중에 떠있는 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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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나는 이럴 때 몹시 부지런해진다. 청소를 하기도 하고 산책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건 남아있는 술기운의 속임수다. 만약 그렇게 오전을 보내고 점심을 먹고 나면 항상 육체적으로 힘들어지곤 했다. 다시 올라오는 술에 취해 고통스러운 오후로 점철된 날들을 몇 차례 겪고 나서는, 절대 그 의욕에 따라 무리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은 이렇게 조용히 누워있는 오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핸드폰의 잠금을 풀었다. 어제의 흔적이 궁금해졌다. 이럴 때 찾아 보는 것은 보통 1. 문자와 메신저 2. 통화목록 3. 사진첩 4. SNS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문자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다. 어디서 만날지 정하기 위해서 주고 받았던 친구와의 문자. 그리고 잘 들어갔니, 라고 쓰여진 어젯밤 같은 자리에 있던 한 여자의 문자 정도. 이 정도면 세이프. 통화목록에는 모르는 착신번호가 3개 있다. 아무래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번호일 것이다. abraxas vol.17
80% 확신한다. 근데 그들의 이름이 아무도 생각이 나질 않으니 패스. 저장하지 못한 나의 탓과 술에 취한 나에게 번호를 건넨 그들의 가벼움에 건배. 사진첩은 아주 가관이다. 나는 노래방에 갔던 모양이다. 누가 불렀는지 는 모르겠지만, 노래가 시작할 때마다 노래의 제목이 나오는 스크린을 사진으로 찍어두었다. 사람 얼굴을 하나도 없다. 원래 술 마실 때 사진을 찍는 편이 아니라서 사진첩에는 별다른 흔적들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이건 좀 독특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은 열 장 정도 있고 노래는 여덟 곡 정도가 찍혀 있다. 찍다가 지쳤던 모양이다. 어쩌면 잠들었을지도 모르고. 대부분 흔히 노래방에서 부르는 가요들이다. 빅뱅노래도 있고 이문세 노래도 있고 이장혁의 노래도 있고 다비치의 노래도 있다. 슬슬 배가 고파진다. 배가 고픈 것이랑 고파지는 것이랑은 조금 다른 것 같다. 막 고파지기 시작할 때가 가장 고통스럽다. 높이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를 탔을 때나 터널에 들어갔을 때, 비행기를 탔을 때 귀가 먹먹해지는 것이랑 비슷하다. 막히는 그 순간이 제일 귀찮다. 그 때 해결해주지 못하면 괜히 찝찝하다. 나에겐 배고픔도 그렇다. 만약 그 순간이 지나가버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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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딱히 해결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뭘 먹을까, 라고 고민하는 순간 머리에 딱 떠오르는 건, 최근에 예능에 나왔던 짜파게티 와 너구리를 같이 끓여먹는 짜파구리였다. 트레이닝 바지와 후드를 뒤집어 쓴 채 야상을 입고 밖을 나섰다. 가까운 동네 슈퍼마켓에 갔다. 주인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쳐서 살짝 목례를 했다. 이곳에는 늘 술 먹고 난 다음 날 라면을 사기 위해서만 들린다. 아주머니가 보기엔 나이 먹고 제대로 씻지도 않고 라면만 먹는 백수처럼 보이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래서 말끔하게 차려 입었을 때 가끔 과자나 음료수를 사려고 들리기도 했다. 라면 코너를 가만히 둘러보았다. 그리고 짜파게티를 두 개 사들고 나왔다. 이게 늘 문제다. 짜파구리를 먹으려고 했는데, 짜파구리를 먹는 사람 처럼 보이기 싫어한다는 점. 내가 짜파게티랑 너구리를 동시에 사면 저 아주머니는 분명히, 아 쟤도 그 방송을 보고 한 번 먹어보려고 사는구나, 내 것을 빼앗기는 것과 비슷한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상업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면 괜히 싫어지는 것과 흡사하다. 나는 그 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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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생각할게 틀림없다. 나는 그렇게 간파 당하는 것이 싫다. 그건 마치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노래를 들으면, 다들 영화에서 들었다거나 드라마 얘기를 꺼내며 동지의식을 공유하려고 할 것 같아서 그렇다. 내가 간직하고 있던 (어쩌면 순수하다고 할 수 있는) 감정과 관심이 더럽혀 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살짝 확대해석 하자면 실제로 내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그렇게 나는 짜파게티 2개를 끓여먹었다. 우웅 우웅 진동 소리가 들려 핸드폰을 보았다. 어제 함께 있던 친구다. 수많은 ㅋ들이 회색 말풍선 안에 가득했다. 나는 답장을 보냈다. -왜 - 잘들어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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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왜 - 너 어제 기억나냐 - 아니 - 하나도? -응 - 병신 이렇게 우리의 생산적인 문자는 막을 내렸다. 뭐 대충 짐작은 가는 얘기 다. 이 정도면 안타는 친 거라고 본다. 보통 내가 무지막지한 일을 하거나 몹시 병신 같은 일을 벌였다면 이 정도로 끝나진 않았을 것이다. 내가 어제 했던 일들을 장황하게 설명해주려고 하거나 여기저기 사방에서 연락이 온다거나 혹은 전화가 왔을 것이다. 그런데 이정도 반응이라면 보통 평소 abraxas vol.17
맨 정신에도 할 만한 일을 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어제의 나를 짐작으로 판단하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 입이 열 개 정도 있어야 고작 조금 할 말이 생길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이 입 대신 손가락으로 그렇게 신나게 자기 얘기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우우웅 우우웅 전화기에 진동이 울렸다. 아까와는 다른 친구다. “여보세요.” 내가 말했다. “야, 너 병신.” 친구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괜찮냐?” “괜찮다.” 필름이 끊긴 사람으로서 나의 사라진 기억을 궁금해 하지 않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태도라고 볼 수 있다. “너 가방 뒤져 봤냐?” 친구가 물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아니, 왜.” 대답하며, 가방을 찾았다. “열어봐.” 친구가 말했다. 가방을 여니 소주가 두 병 들어있었다. 심지어 한 병은 반밖에 들어있지 않았다. 소주를 보자 갑자기 지난 밤에 먹었던 술이 다시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역해진 기분으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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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거 뭐냐.” “네가 어제 옆 테이블에 있는 거 가방에 넣었잖아.” 친구가 웃으며 대답했다. “언제 나올 거야?” “어딜 나가.” “여자애들한테 오늘도 같이 마시자고 했잖아.” “내가?” 내가 되물었다. “그래, 네가.” 친구가 대답했다. “6시에 나갈게.”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은 지난 밤 약속을 뻔뻔하게 지키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 친구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소주병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소주병이 마치 전래동화에 나오는 요술항아리처럼 보인다. 작은 도깨비들이 어젯밤 내 어깨에 앉아 초록색 소주병에 내 기억을 마구 뜯어서 넣어놓고 침대 아래, 책상 밑을 뒤져보지만 역시나 아무도 없다. 당연히 아무도 없다. 기억을 잃는 것은 시놉스가 제대로 화학작용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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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구석 어딘가에서 낄낄거리며 웃고 있는 것 같다. 책장 위, 방 구석,
들은 적이 있다. 아예 기억이 저장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최면요법을 써도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한다. 결국 술에 취해 사라진 기억은 나에겐 전혀 찾을 수 조차 없는,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애초에 가진 적도 없는 기억 일지도 모른다. 내게 없는 나의 기억, 그 속에서 나는 존재하는 걸까. 내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나에게 그 순간이 존재하지 않는 걸까. 우리는 내가 아닌 나의 존재에 대해서 수도 없이 많이 고민하고 생각한다.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거나 가늠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늘 두려워한다. (지킬은 하이드를 두려워했다.) 혹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건 주체의식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우린 아무것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하지만 유일 하게 조금이나마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육체다. 물론, 재채기라던가 심장박동 같은 것은 조절하기 힘들지만 최소한 손가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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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거나 어디로 걸어갈 것인지는, 스스로 주체가 되어 의식하고 조절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유일하게 내 것인 ‘나’라는 존재에서 가늠할 수 없는 ‘나’를 발견하게 되면 이것을 ‘나’로 규정지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혼란에 부딪치게 된다. 그런 생각이 깊어지다 보면, ‘나’는 점점 분리되며 사라지고 그것을 어두운 창고 구석으로 밀어 넣어 버리고 만다. 옛 연인에게 받은 선물처럼 먼지만 쌓인 채 구석 한 켠에서 쓸쓸하게 세월을 보내고 마는 것이다. 왜 여기 있는지 기억은 사라졌을지언정 여전히 눈 앞에 덩그러니 놓인 소주병처럼 말이다. 반 밖에 남지 않은 소주병을 보며, 내 기억은 남아 있는 소주에 있을지 아니면 마신 만큼 비어있는 공간에 있을지 몹시 궁금해졌다. 뜨거운 물이 쏟아지는 샤워기 아래에 한참을 서있었다. 사라진 어제의 기억처럼 깨끗해지고 싶었다. (그리고 실제로 내 몸에서 술 냄새가 나고 abraxas vol.17
있기도 했다.) 스스로 더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제로 더럽지 않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자기최면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블랫아웃은 스트레스 때문에 현실을 부정하려는 내면의식이 작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작금의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걸까. 확신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고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말하면 그렇다고 말하는 현실의 내가 부정되어 이중 부정이 되어버리고,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 현실의 나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 때문에 블랙아웃의 원인을 규명하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갈 필요 없는 갈림길에 서서 선택장애에 걸린 사람처럼 우유부단하게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기분이다. 물론, 그저 술을 많이 마시기 때문에 생기는 주사의 하나일 테지만. 어릴 적 만화 영화를 보면 늘 닌자나 자객 같은 캐릭터를 좋아했다. 로봇만화나 파워레인저, 바이오맨과 같은 시리즈물에서 팀으로 구성된 캐릭터보다는 혼자서 고독하게 활동하는 등장인물이 되고 싶었다. 그런 인물들은 보통 옷이 까맣거나 분위기가 음침하거나, 악역이었다가 어떤 계기로 착한 역할이 되어 앞에 나서지 못하고 뒤에서 주인공을 돕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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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였다. 이런 캐릭터가 주인공이 되는 일은 드물다. 보통 많은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은, 자꾸만 스스로를 밖으로 꺼내야 한다. 주인공이, 스스로 깨닫지 못했던 자기 자신을 찾아 간다는 이야기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수많은 슈퍼히어로, 다큐멘터리, 드라마 모두 자기 자신을 찾으려 애쓰고, 드러내려고만 하지 않는가. 많은 이들이 이야기 속에서 스스로를 터뜨리고 분출하고 표현한다.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이미 자기 자신이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춤을 추고 노래를 하고 손을 흔들고 목을 긁고 소리를 내고 바람을 일으킨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던 그들은 달랐다. 그들은 계속 외부의 관심에게서 자기 자신을 감추려 한다. 회가 거듭할수록 그들의 역할은 점점 희미해져 간다. 이건 배트맨이나 스파이더맨이나 슈퍼맨처럼 자신이 히어로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비밀을 지키는 그런 얘기가 아니다. 그들은 그저 모든 관심에게서 자기 자신을 감출 뿐이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찾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모습 결국 자기 자신과 외부를 구분하는 경계만이 있을 뿐이고, 외부에서부터 점점 물러나 마치 블랙홀처럼 자기 자신마저 삼키며 조용히 꺼져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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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마치 스스로에게조차 스스로를 감추려는 것처럼 조금씩 사라져간다.
불빛처럼 희미해진다. 자기 자신을 분리하는 인물이나, 현실을 부정하고 새로운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이들보다 오히려 그들에게서 스스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느껴진다. 뚜렷한 기준을 가진 존재 자체가 그들의 ‘사라짐’을 ‘선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보여지는 것이 실제로 보여지는 것이 아닌 사실상의 위장. 없어지는 것으로서 존재하는 패러독스. 의식적인 행동이 아닌 무의식. 뒤집어 입는 코트. 양면테이프. 이면지. 뒤로 감는 테이프. 구토. 뜨거운 태양 아래서의 살인. 물구나무 서기. 뫼비우스의 띠? 아니, 아니지, 거기까지는 아닌 것 같다. 시계를 보니 여섯 시가 조금 넘었다. 파란색 바지에 검은색 맨투맨, 청자켓을 입고 그 위에 회색 패딩 베스트를 입었다. 검은색 스니커즈를 신고 나가며 시계를 보니 여섯 시 삼십 분 정도였다. 친구에게 전화를 하니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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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명은 술집에 들어가 있고 몇 명은 오고 있다고 했다. 장소를 확인하고 조용히 걸었다. 아스팔트가 발바닥에 닿는 느낌이 왠지 낯설게 느껴진다. 아직은 조금 차가운 바람이 얼굴에 부딪쳤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자 겨울이 조금 폐로 들어온 것 같아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어제의 흔적이 남아 조금 찌그러진 담배의 맛이 씁쓸했다. 담배의 맛이라, 혼자 생각하면서도 괜히 우스워졌다. 담배의 맛이라…. 택시를 탈까, 버스를 탈까, 지하철을 탈까, 고민 하다가 눈 앞에 지나가는 택시를 잡았다. 뒷자리에 탔다. 목적지를 말했다. 아직은 하늘이 완전히 까맣지는 않다. “왔어?” 친구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나는 빈 자리로 가서 앉았다. 여자들이 웃으며 반긴다. 나는 웃으며 어색하게 인사한다. 나의 어색한 모습이 무척이나 웃긴지 깔깔 거리며 웃는 소리가 우습다. 아직 이른 시간 abraxas vol.17
이라 그런지 큰 술집이 텅 비어있는 것 같다. 약간 불그스름한 조명이 왠지 익숙하다. 여자 중에 한 명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통화목록에 찍힌 세 개의 번호 중에 한 명이 아닐까. 종업원이 소주잔과 앞 접시, 그리고 수저를 가져다 주었다. 고맙다고 인사하며 살짝 인사했다. 그녀가 나에게 술병을 기울였고 나는 한 잔을 받았다. 친구가 마시자며 잔을 들었고 모두 건배했다. “먼저 와있었네?” 늦게 도착한 친구 하나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친하게 말을 건다. 그녀가 활짝 웃었다. 어제 술을 마시며 친해진 거겠지. 분명히 나도 어제는 둘도 없이 친한 사이처럼 놀았을 텐데 도통 기억이 나질 않으니 섣불리 말을 건네기가 쉽지 않다. 앞에 있는 뻥튀기 몇 개를 집어 먹었다. 안주는 소시지 야채볶음, 부대찌개가 나와있다. 부대찌개는 여전히 끓고 있는데, 빨간 국물이 꽤 매워 보인다. 그들이 나누는 어젯밤 얘기를 엿들었다. 내 얘기가 있을 때마다 맞장구를 치며 다같이 떠들었다. 딱히 예상과 다를 건 없었다. 내 이야기를 남 이야기처럼 듣고 있는 것만 빼면 말이다. ‘나’라는 인물을 3인칭으로 바라보는 기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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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술 잔을 몇 잔 더 주고 받았다. 나는 혼자서 몇 잔을 더 마신 것 같다. 왠지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리니 그녀가 다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살짝 웃으며 내 잔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소주잔에 는 반 정도 술이 차있었다. 나는 그걸 전부 마셨다. 그녀가 내게 술병을 기울 였다. 적당하게 차있는 맑은 소주잔을 들어 둘이서 잔을 부딪혔다. 착, 하는 유리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단숨에 소주를 들이켰다. “괜찮아?”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왠지 익숙하게 들린다. 오물거리는 입술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그녀의 입 꼬리에 작은 미소가 걸려있는 것 같다. “아니, 이 정도는 뭐 괜 <블랙 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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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은정 gggd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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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발행: 김종소리 디자인: 황아름(byhar.egloos.com) 발행: 2013. 5 문의: abraxaszine.com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의 저작권은 그것을 만든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무단으로 따라하시거나 사용하시면 큰일 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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