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락사스 vol.7
아브락사스
\번지다/김수경 \\밖가//박미정 \\\무작정///김한주
vol. 7
\\\\나에게 쏟아진 빛은////홍인영 \\\\\자화상/////이상협 \\\\\\물속으로부터의 수기//////김종소리, 정지호
\\\\\\\\\\sans titre//////////이원희 \\\\\\\\\\\
샤르봉이 그린 그림
\\\\\\\\\\너에게, 24+0/////////샤르봉
painted by sharbong
\\\\\\\\N O W H E R E////////조우정, 주영진
샤르봉이 그린 그림
\\\\\\\못 살겠다, 홍경래///////이동언
///////////ROK
fall
\\\\\\\\\\\\복도////////////화정
2010 fall 2010
아브락사스 vol.7
\\\\\\\\\\\\\\Thanks seller//////////////
가가린
낙타
서울 종로구 창성동 122-12
서울 마포구 서교동 333-18 2F
02 736 9005
02 736 9005
샤르봉이 그린 그림 더 북소사이어티
설탕
서울 마포구 상수동 331-8
서울 마포구 동교동 188-27
02 736 9005
02 332 6199
www.mediabus.org
유어마인드
쿠루미
서울 마포구 서교동 326-29 5F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 56-76
02 6405 3189
02 338 9622
painted by sharbong www.your-mind.com
101호 사케집
서울 마포구 서교동 328-15 02 3143 1015
fall 2010
아브락사스 vol.7
\\\\\\\\\\\\\\Thanks seller//////////////
가가린
낙타
서울 종로구 창성동 122-12
서울 마포구 서교동 333-18 2F
02 736 9005
02 736 9005
샤르봉이 그린 그림 더 북소사이어티
설탕
서울 마포구 상수동 331-8
서울 마포구 동교동 188-27
02 736 9005
02 332 6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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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루미
서울 마포구 서교동 326-29 5F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 56-76
02 6405 3189
02 338 9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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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호 사케집
서울 마포구 서교동 328-15 02 3143 1015
fall 2010
이후의 작품들은 이 그림을 주제로 삼아 작업한 결과물들입니다. 아브락사스 vol.7
3
이후의 작품들은 이 그림을 주제로 삼아 작업한 결과물들입니다. 아브락사스 vol.7
3
아브락사스는 2009년 1월 초, 김미선과 김종소리의 술자리에서
\번지다/김수경
7
\\밖가//박미정
17
\\\무작정///김한주
31
\\\\나에게 쏟아진 빛은////홍인영
35
\\\\\자화상/////이상협
45
\\\\\\물속으로부터의 수기//////김종소리 글, 정지호 그림
69
\\\\\\\못 살겠다, 홍경래///////이동언
87
주고받은 이야기를 통해 기획,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첫 취지는 현재 우리나라 문학계의 실정—등단하지 않는 이상 자신의 작품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힘든 상황—에 반기를 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우리나라 문학계 언더그라운드의 시작’인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 번의 이야기를 통해 문학으로 단정 짓지 말고 출판의 형태로 나올 수 있는 모든 예술을 다루자는 의견에 동의, 결국 모든 예술을 다루는 출판물을 만들어보기로 하였습니다. 각 호마다 하나의 주제로 여러 형태의 예술작품을 싣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문학잡지들의 특성을 따라 계간지의 형태—단, 3·6·9·11월이 아닌 4·7·10·1월 발행—로 발행 될 예정입니다. \\\\\\\\N O W H E R E////////조우정 글, 주영진 그림
113
\\\\\\\\\\너에게, 24+0/////////샤르봉
135
\\\\\\\\\\sans titre//////////이원희
147
\\\\\\\\\\\ROK///////////ROK
151
\\\\\\\\\\\\복도////////////화정
163
저희와 함께 작업을 해보고 싶으신 분이나 합작을 하실 분, 혹은 단체는 크레딧에 있는 연락처로 연락을 주십시오. 언제든 환영합니다.
아브락사스.
아브락사스는 2009년 1월 초, 김미선과 김종소리의 술자리에서
\번지다/김수경
7
\\밖가//박미정
17
\\\무작정///김한주
31
\\\\나에게 쏟아진 빛은////홍인영
35
\\\\\자화상/////이상협
45
\\\\\\물속으로부터의 수기//////김종소리 글, 정지호 그림
69
\\\\\\\못 살겠다, 홍경래///////이동언
87
주고받은 이야기를 통해 기획,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첫 취지는 현재 우리나라 문학계의 실정—등단하지 않는 이상 자신의 작품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힘든 상황—에 반기를 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우리나라 문학계 언더그라운드의 시작’인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 번의 이야기를 통해 문학으로 단정 짓지 말고 출판의 형태로 나올 수 있는 모든 예술을 다루자는 의견에 동의, 결국 모든 예술을 다루는 출판물을 만들어보기로 하였습니다. 각 호마다 하나의 주제로 여러 형태의 예술작품을 싣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문학잡지들의 특성을 따라 계간지의 형태—단, 3·6·9·11월이 아닌 4·7·10·1월 발행—로 발행 될 예정입니다. \\\\\\\\N O W H E R E////////조우정 글, 주영진 그림
113
\\\\\\\\\\너에게, 24+0/////////샤르봉
135
\\\\\\\\\\sans titre//////////이원희
147
\\\\\\\\\\\ROK///////////ROK
151
\\\\\\\\\\\\복도////////////화정
163
저희와 함께 작업을 해보고 싶으신 분이나 합작을 하실 분, 혹은 단체는 크레딧에 있는 연락처로 연락을 주십시오. 언제든 환영합니다.
아브락사스.
번지다
김수경
번지다
김수경
금요일 먼지가 잔뜩 쌓인 우편함 속에 꼬깃꼬깃 처박혀 있는 각종 고지서들. ‘최고 독촉장’이라는 빨간 글씨가 유난히 눈에 띈다. 항상 최고 독촉장을 보고서야 겨우 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귀찮다. 이유는 그것 하나뿐. 철컥. 하루 종일 잠겨있었을 조용한 문을 열고 불을 켠다. 작은 원룸 을 꽉 채운 가구들과 잡동사니들은 마치 나름 감싸고 둘러 앉아 있는 것 만 같다. 답답하면서도 왠지 모를 안정감을 준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은 한 번도 내 방에 들어와 본 적이 없다. 그래서일까.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은 작은 동굴 같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 전쟁 같은 게 나더라도 이곳에 숨으면 아무도 찾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 실제로 매일 일 많다. 나는 사실 겁쟁이다. 여느 금요일처럼 평화롭고 우울한 밤. 외로움이라는 건 어쩌면 영원 히 씻어 낼 수 없는 저주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TV를 켜니 오드리 토트 주연의 영화 ‘히 러브스 미(He Loves Me)’가 흘러나온다. 모닝콜을 끄고 누울 수 있는 이 금요일 밤이 참 좋다. ‘아, 최고 독촉장… 내일 오전에 내야겠다.’
아브락사스 vol.7
9
\번지다/
어나는 크고 작은 전쟁을 피해 나는 이곳에 숨을 죽이고 숨어 있을 때가
금요일 먼지가 잔뜩 쌓인 우편함 속에 꼬깃꼬깃 처박혀 있는 각종 고지서들. ‘최고 독촉장’이라는 빨간 글씨가 유난히 눈에 띈다. 항상 최고 독촉장을 보고서야 겨우 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귀찮다. 이유는 그것 하나뿐. 철컥. 하루 종일 잠겨있었을 조용한 문을 열고 불을 켠다. 작은 원룸 을 꽉 채운 가구들과 잡동사니들은 마치 나름 감싸고 둘러 앉아 있는 것 만 같다. 답답하면서도 왠지 모를 안정감을 준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은 한 번도 내 방에 들어와 본 적이 없다. 그래서일까.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은 작은 동굴 같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 전쟁 같은 게 나더라도 이곳에 숨으면 아무도 찾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 실제로 매일 일 많다. 나는 사실 겁쟁이다. 여느 금요일처럼 평화롭고 우울한 밤. 외로움이라는 건 어쩌면 영원 히 씻어 낼 수 없는 저주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TV를 켜니 오드리 토트 주연의 영화 ‘히 러브스 미(He Loves Me)’가 흘러나온다. 모닝콜을 끄고 누울 수 있는 이 금요일 밤이 참 좋다. ‘아, 최고 독촉장… 내일 오전에 내야겠다.’
아브락사스 vol.7
9
\번지다/
어나는 크고 작은 전쟁을 피해 나는 이곳에 숨을 죽이고 숨어 있을 때가
토요일 매주 토요일 아침이면 자전거를 타고 무작정 달린다. 좋아하는 음악
읊조려주는 것만 같다. “감기 걸렸어요?”
이 가득 들어있는 엠피3 플레이어를 귀에 꽂고 한참을 달리고 나면 감동 적인 영화를 한 편 본 것처럼 가슴 한 켠이 뭉클하다. 자전거를 타는 사 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토요일 아침의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다. 한강변 둘레를 감싸고 있는 자전거 도로를 달리다 보면 많은 사람들
붉은 기가 도는 얼굴에 연신 코를 훌쩍거리는 그 사람을 보고 나는 물었다. “응, 그냥 좀”
을 만난다. 언제나처럼 딱 할 말만 뱉고 만다. 더 이상의 덧붙이는 말도, 구구 절 절 설명하는 일도 없다. 불규칙적인 기침 소리만 무심하게 토해내고 마
회 사람들, 2인용 자전거를 빌려 탄 커플들, 자녀들을 뒤에 태우고 힘차
는 그런 사람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두꺼운 책만 내려다보고 있다. 그의
게 달리는 아빠들, 그리고 나처럼 혼자서 자전거를 즐기는 사람들까지…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초라해지고 만다. 어떤 말을 붙여도, 우스운
목적도 방향도 제각각이겠지만 모두가 한마음으로 페달을 밟고 있을 거
농담을 던져도, 크게 웃거나 화를 내도, 늘 흐린 표정으로 일관하는 재미
라고 생각하면 외롭지가 않았다.
없는 사람.
한참을 정신없이 달렸다 . 잠실대교부터 성수대교까지… 얼마만큼
기억도 나지 않는 몇 해 전 초겨울 어느 날, 수업이 1시간도 넘게 남
의 시간이 흘렀는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의 시간이 지났으리라. 우리가
은 빈 강의실에는 무표정한 기침 소리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어리
시계 없이 가늠할 수 있는 시간은 과연 얼마나 정확할까. 만약 시계가 없
석은 내가, 시간이 가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다.
었다면, 시간의 흐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삶은 엉망이 됐을까? 우리의 사랑은 멈추지 않았을까? 우리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을까? 우스
“약…”
운 생각들을 하면서 페달을 밟았다. “무슨?”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캐런앤의 ‘낫 고잉 애니웨어 (Not going anywhere)’가 흘러나온다. 속삭이는 듯 한 그녀의 목소리가 참 듣기 좋
“감기…”
다. 내 삶의 중요한 조각들을 조용히 꺼내놓고 하나씩 하나씩 나지막이
10
아브락사스 vol.7
아브락사스 vol.7
11
\번지다/
샤르봉이 그린 그림
최신 장비부터 의상까지 제대로 갖춰 입고 자전거를 즐기는 동호
토요일 매주 토요일 아침이면 자전거를 타고 무작정 달린다. 좋아하는 음악
읊조려주는 것만 같다. “감기 걸렸어요?”
이 가득 들어있는 엠피3 플레이어를 귀에 꽂고 한참을 달리고 나면 감동 적인 영화를 한 편 본 것처럼 가슴 한 켠이 뭉클하다. 자전거를 타는 사 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토요일 아침의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다. 한강변 둘레를 감싸고 있는 자전거 도로를 달리다 보면 많은 사람들
붉은 기가 도는 얼굴에 연신 코를 훌쩍거리는 그 사람을 보고 나는 물었다. “응, 그냥 좀”
을 만난다. 언제나처럼 딱 할 말만 뱉고 만다. 더 이상의 덧붙이는 말도, 구구 절 절 설명하는 일도 없다. 불규칙적인 기침 소리만 무심하게 토해내고 마
회 사람들, 2인용 자전거를 빌려 탄 커플들, 자녀들을 뒤에 태우고 힘차
는 그런 사람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두꺼운 책만 내려다보고 있다. 그의
게 달리는 아빠들, 그리고 나처럼 혼자서 자전거를 즐기는 사람들까지…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초라해지고 만다. 어떤 말을 붙여도, 우스운
목적도 방향도 제각각이겠지만 모두가 한마음으로 페달을 밟고 있을 거
농담을 던져도, 크게 웃거나 화를 내도, 늘 흐린 표정으로 일관하는 재미
라고 생각하면 외롭지가 않았다.
없는 사람.
한참을 정신없이 달렸다 . 잠실대교부터 성수대교까지… 얼마만큼
기억도 나지 않는 몇 해 전 초겨울 어느 날, 수업이 1시간도 넘게 남
의 시간이 흘렀는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의 시간이 지났으리라. 우리가
은 빈 강의실에는 무표정한 기침 소리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어리
시계 없이 가늠할 수 있는 시간은 과연 얼마나 정확할까. 만약 시계가 없
석은 내가, 시간이 가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다.
었다면, 시간의 흐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삶은 엉망이 됐을까? 우리의 사랑은 멈추지 않았을까? 우리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을까? 우스
“약…”
운 생각들을 하면서 페달을 밟았다. “무슨?”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캐런앤의 ‘낫 고잉 애니웨어 (Not going anywhere)’가 흘러나온다. 속삭이는 듯 한 그녀의 목소리가 참 듣기 좋
“감기…”
다. 내 삶의 중요한 조각들을 조용히 꺼내놓고 하나씩 하나씩 나지막이
10
아브락사스 vol.7
아브락사스 vol.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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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다/
샤르봉이 그린 그림
최신 장비부터 의상까지 제대로 갖춰 입고 자전거를 즐기는 동호
“아… 별로 뭐 이런 거…”
일요일 오전
고맙다는 말은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다. 그런데 ‘별로 뭐 이런 거’라
8시 50분…10시 50분…11시 14분…12시 15분…
니… 역시나 그답다. 약을 내민 내 손이 참을 수 없이 미워졌다. 아무런 고마움도 어떤 의미도 느껴지지 않는 그의 목소리가 차가운 겨울바람과
몇 번이고 잠에서 깨어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다. 비슷한 꿈 2,3개를
섞여 귓가를 스쳤다. 약봉지를 받아 든 그의 손길 역시 너무나 무표정했
반복해서 꾼 것 같다. 현실 속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꿈에서만 낯
다. 감기 따위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익은 그 길을 반복해서 걷는 꿈… 그리운 목소리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았 다. 그루잠은 늘 달콤한 후회를 가져다준다.
감기. 누구나 걸리는 흔한 감기. 며칠 동안은 감기를 핑계로 그의 걱정을
일요일 오후
래 가기를 바랐다.
오후 2시 50분이 되어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배가 고파 냉장고 문 을 열었다. 먹다 남은 참치 캔, 오래 돼서 쭈글쭈글해진 사과 2개, 텅 빈
그러나 그의 감기는 곧 나았고, 그 해 늦겨울 나는 꽤 오랫동안 지독 한 감기를 앓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는 졸업을 했다. 그 해 초겨울의 쓸쓸함이 자전거에 배어났다 . 날씨가 꽤 추워졌다 . 가을도 없이 곧바로 겨울이 와버렸나 보다.
반찬 통 몇 개… 혼자 산 지 8년째가 되는 한심한 여자의 냉장고는 그렇 게 과거의 것들만 품고 있다. 냉장고 한 쪽에는 200ml 우유 한 팩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졸고 있었다. 언제 산 녀석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우유를 집어 유통기한을 보니 벌써 2주나 지나 있다. 지나쳐버린 사람처럼 무심하게, 유통기한이
‘아, 최고독촉장…’
한참이나 지나있는 우유를 보니 왠지 서글퍼졌다. 쓰레기통에 그냥 버 리기 미안했다. 며칠 더 그냥 놔둬야겠다고 생각하고 냉장고 문을 그대
시간이 너무 늦었다. ‘월요일 날엔 꼭 내야지….’
로 닫는다. 내일은 은행에 들렸다 마트엘 좀 가야겠다. 싱싱한 과일과 야채를 한 가득 사야겠다.
12
아브락사스 vol.7
아브락사스 vol.7
13
\번지다/
샤르봉이 그린 그림
마음 놓고 할 수가 있었다. 나쁜 마음이지만, 나는 그의 감기가 되도록 오
“아… 별로 뭐 이런 거…”
일요일 오전
고맙다는 말은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다. 그런데 ‘별로 뭐 이런 거’라
8시 50분…10시 50분…11시 14분…12시 15분…
니… 역시나 그답다. 약을 내민 내 손이 참을 수 없이 미워졌다. 아무런 고마움도 어떤 의미도 느껴지지 않는 그의 목소리가 차가운 겨울바람과
몇 번이고 잠에서 깨어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다. 비슷한 꿈 2,3개를
섞여 귓가를 스쳤다. 약봉지를 받아 든 그의 손길 역시 너무나 무표정했
반복해서 꾼 것 같다. 현실 속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꿈에서만 낯
다. 감기 따위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익은 그 길을 반복해서 걷는 꿈… 그리운 목소리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았 다. 그루잠은 늘 달콤한 후회를 가져다준다.
감기. 누구나 걸리는 흔한 감기. 며칠 동안은 감기를 핑계로 그의 걱정을
일요일 오후
래 가기를 바랐다.
오후 2시 50분이 되어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배가 고파 냉장고 문 을 열었다. 먹다 남은 참치 캔, 오래 돼서 쭈글쭈글해진 사과 2개, 텅 빈
그러나 그의 감기는 곧 나았고, 그 해 늦겨울 나는 꽤 오랫동안 지독 한 감기를 앓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는 졸업을 했다. 그 해 초겨울의 쓸쓸함이 자전거에 배어났다 . 날씨가 꽤 추워졌다 . 가을도 없이 곧바로 겨울이 와버렸나 보다.
반찬 통 몇 개… 혼자 산 지 8년째가 되는 한심한 여자의 냉장고는 그렇 게 과거의 것들만 품고 있다. 냉장고 한 쪽에는 200ml 우유 한 팩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졸고 있었다. 언제 산 녀석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우유를 집어 유통기한을 보니 벌써 2주나 지나 있다. 지나쳐버린 사람처럼 무심하게, 유통기한이
‘아, 최고독촉장…’
한참이나 지나있는 우유를 보니 왠지 서글퍼졌다. 쓰레기통에 그냥 버 리기 미안했다. 며칠 더 그냥 놔둬야겠다고 생각하고 냉장고 문을 그대
시간이 너무 늦었다. ‘월요일 날엔 꼭 내야지….’
로 닫는다. 내일은 은행에 들렸다 마트엘 좀 가야겠다. 싱싱한 과일과 야채를 한 가득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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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락사스 vol.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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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다/
샤르봉이 그린 그림
마음 놓고 할 수가 있었다. 나쁜 마음이지만, 나는 그의 감기가 되도록 오
월요일
한 번도 소리 내서 불러본 적 없는 그 사람의 이름이 선명하게 인쇄 돼 있다.
창백한 월요일 아침, 시끄럽게 울어대는 모닝콜 소리가 일상의 반복 을 재촉한다. 잠은 깼지만 눈을 감은채로 한참을 멍하게 누워 있다가 겨
버스가 유난히 덜컹거린다.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흰 봉투가 바닥에
우 일어나 옷을 챙겨 입는다. 현관문 앞에 던져놓았던 꼬깃꼬깃한 요금
떨어졌다. 물끄러미 바라본다. 보내는 사람의 이름은 여전히 번져 있다.
고지서 뭉치를 가방에 아무렇게 쑤셔 넣고서 집을 나선다. 날씨가 많이
보이지가 않았다.
쌀쌀해졌다. 4212번 버스를 타고 회사 가는 길. 오늘은 꼭 은행엘 들려야 한다. 가
자꾸 시야가 번져갔다.
방 속에 있는 요금 고지서를 꺼냈다. 번져만 갔다.
\번지다/
샤르봉이 그린 그림
‘휴대폰 요금, 전기 요금, 가스 요금, 인터넷 요금….’ 요금 고지서 사이에 먼지가 잔뜩 묻은 흰 봉투가 한 장 섞여 있다. 받 는 사람 이름엔 평범하고 익숙한 세 글자가 또박또박 적혀있다. 내 이름 이 분명하다. 보내는 사람의 이름은 비에 젖었는지 번져있다. 잘 보이지가 않았다. ‘뭐지?’ 봉투에서 꺼낸 두툼한 카드 앞면엔 분홍색 리본과 작은 인공진주가 붙어있다. 축 결혼(…) 부디 참석하셔서 자리를 빛내 주시면(…)신랑·신부 올림
14
아브락사스 vol.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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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월요일
한 번도 소리 내서 불러본 적 없는 그 사람의 이름이 선명하게 인쇄 돼 있다.
창백한 월요일 아침, 시끄럽게 울어대는 모닝콜 소리가 일상의 반복 을 재촉한다. 잠은 깼지만 눈을 감은채로 한참을 멍하게 누워 있다가 겨
버스가 유난히 덜컹거린다.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흰 봉투가 바닥에
우 일어나 옷을 챙겨 입는다. 현관문 앞에 던져놓았던 꼬깃꼬깃한 요금
떨어졌다. 물끄러미 바라본다. 보내는 사람의 이름은 여전히 번져 있다.
고지서 뭉치를 가방에 아무렇게 쑤셔 넣고서 집을 나선다. 날씨가 많이
보이지가 않았다.
쌀쌀해졌다. 4212번 버스를 타고 회사 가는 길. 오늘은 꼭 은행엘 들려야 한다. 가
자꾸 시야가 번져갔다.
방 속에 있는 요금 고지서를 꺼냈다. 번져만 갔다.
\번지다/
샤르봉이 그린 그림
‘휴대폰 요금, 전기 요금, 가스 요금, 인터넷 요금….’ 요금 고지서 사이에 먼지가 잔뜩 묻은 흰 봉투가 한 장 섞여 있다. 받 는 사람 이름엔 평범하고 익숙한 세 글자가 또박또박 적혀있다. 내 이름 이 분명하다. 보내는 사람의 이름은 비에 젖었는지 번져있다. 잘 보이지가 않았다. ‘뭐지?’ 봉투에서 꺼낸 두툼한 카드 앞면엔 분홍색 리본과 작은 인공진주가 붙어있다. 축 결혼(…) 부디 참석하셔서 자리를 빛내 주시면(…)신랑·신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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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락사스 vol.7
아브락사스 vol.7
15
밖가
박미정
밖가
박미정
언젠가부터 사소한 것까지 나를 떨리게 만들었다. 말에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하여 덧붙이는데 이것은 절대로 로맨틱한 느낌의 것이 아니다 . 이유를 알 수 없는 설렘 그래서 더 불안한 재수 좋은 날의 상태랄까? 가 상태였고, 그렇듯 심하게 뛰었다. 심장이 뜀과 동시에 뇌도 가동되고는 했는데, 뭔가 막연한 오늘은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가 대부분을 차지했 다. 인생을 뒤엎을 만한 무엇인가가 나타날 것이라는 망상이 오늘의 운 세를 보지 않아도 머릿속에 심궈져서는 하루 내 자라났다가 운명을 달 리했다. 아침쯤은 거의 맹신에 가깝던 생각이 오후까지도 별일이 없게 되면 살짝 시들해졌다가 밤쯤에는 조바심을 내며 그 첨예함을 보여주고 는 새벽에는 어찌할 도리 없이 빗면을 따라 급속히 하강하였다. 그래도 다음날이면 같은 생각이 머리에 다시 생성되어 마치 처음인 냥 BGM으 로 ‘라이크 어 버진’을 들려주며 지치지도 않고 나를 지배했다. 나의 상태에 대한 인식을 마친 뒤로는 이럴 때, 무언가 해야만 한다 고 강박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했다 . 견고하게 무엇을 세워서는 그것을 내가 다시 깨야만 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브락사스 vol.7
19
\\밖가//
슴은 언제나 빈속에 투샷 기본에 샷 추가를 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마신
언젠가부터 사소한 것까지 나를 떨리게 만들었다. 말에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하여 덧붙이는데 이것은 절대로 로맨틱한 느낌의 것이 아니다 . 이유를 알 수 없는 설렘 그래서 더 불안한 재수 좋은 날의 상태랄까? 가 상태였고, 그렇듯 심하게 뛰었다. 심장이 뜀과 동시에 뇌도 가동되고는 했는데, 뭔가 막연한 오늘은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가 대부분을 차지했 다. 인생을 뒤엎을 만한 무엇인가가 나타날 것이라는 망상이 오늘의 운 세를 보지 않아도 머릿속에 심궈져서는 하루 내 자라났다가 운명을 달 리했다. 아침쯤은 거의 맹신에 가깝던 생각이 오후까지도 별일이 없게 되면 살짝 시들해졌다가 밤쯤에는 조바심을 내며 그 첨예함을 보여주고 는 새벽에는 어찌할 도리 없이 빗면을 따라 급속히 하강하였다. 그래도 다음날이면 같은 생각이 머리에 다시 생성되어 마치 처음인 냥 BGM으 로 ‘라이크 어 버진’을 들려주며 지치지도 않고 나를 지배했다. 나의 상태에 대한 인식을 마친 뒤로는 이럴 때, 무언가 해야만 한다 고 강박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했다 . 견고하게 무엇을 세워서는 그것을 내가 다시 깨야만 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브락사스 vol.7
19
\\밖가//
슴은 언제나 빈속에 투샷 기본에 샷 추가를 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마신
뭔가에 대한 막연한 환멸감과 허무감도 비슷한 시기에 나에게 다가
향을 미치는지는 몰라도 이동수단에 대한 멀미가 심했다. 어린이 대공
왔다. 작은 행복에도 쉽게 자리를 비우고는 했던 그들은 마치 나를 잠시
원으로 정해진 나의 목적지에는 어딘가 새벽에 피는 친구의 담배 냄새
들르는 듯 그렇게 강하지도 않게 와서는 조용히 물러났다가를 반복했
같은 뉘앙스가 있었다. 아주 약간의 수고로움으로도 나는 그 가상의 노
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매우 지쳤고, 그렇게 시들어가는 자신인지 감정인
스텔지어에 맞닿을 수 있었다.
지 삶에 대한 의욕인지를 찌꺼기라서 더, 그나마 강하게 느껴볼 수 있었 그러니까 일단 백곰은 날지는 못하는 동물이었다, 적어도 이 세상에
치원 진학 이전 시절부터도 나에게 든 것이었지만, 이때처럼 이렇게 그
서는. 그래서 머리 위까지를 덮는 구조물은 필요하지 않았다. 옆구리 께
것의 속내를 알 듯 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처음이다. 그렇다손, 나는
를 막는 세로세로들로도 충분했다. 그것을 넘더라도 그 밖은 수로다 그
사실상 로켓의 발진부를 닮은 내 엉덩이를 의자에 깔고 있는 것으로도
래 강으로는 보이지는 않는 조금 넓은 정도의 수로가 있다. 그리고는 꽤
충분히 이곳이 아닌 어딘 가로의 이동이 분명해져 있었다. 곧 우주로 나
높은 인공의 절벽이 있다. 내려다보는 나야 니들 잘하면 나올 수 있겠다
아갈 우주인마냥 나의 가슴은 붕 뜬 채였고, 얼마든지 지금 이곳에의 집
싶어도 그들에게는 이미 완벽하게 닫힌 공간이 되어있을 터였다. 이들
착에서 의연해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미련이 없다기보다는 미련을 떨
을 보면서는 백이 어떻게 누럴 수 있는지를 조금 생각해 보는 정도로만
만큼 영특하지가 못하다고 봐야했다. 그렇기에 그때 즈음 나는 이 세상
나의 뇌를 운동시켰다. 더 중요한 아니 자극적인 자극은 원숭이 우리에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서였다. 우리라는 말이 애석했다.
기분전환이나 하자는 생각으로 찾아간 동물원에서 나는 어떤 실마 리라고 부를 것을 찾아냈다.
원숭이 우리는 내가 얼마든지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동물특성에 따라 매커니즘을 달리하고 있는 똑똑한 공간이 동
계시 같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미 제 아비를 찾아 떠난 맨발 또는
물원이었다. 병아리나 닭과 여러 조류가 모여 있는 우리 앞에는 모이 자
짝발의 사내였으니까. 기분전환이라는 것은 별 것이 없었다. ‘더 의욕적
판기가 있었다. 아주 혹시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혹시라도 ‘바나나 자
으로 삶을 살아가자’라든가 ‘우울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해’라는 자기
판기’가 있을까, 해서 주위를 꽤 서성거렸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다
계발적 인간이 할 수 있는 발상이라기보다는 좀 더 다양한 감정을 느낄
가는 서로의 관찰이 시작되었다. 오락프로에서 그런 심오한 문구를 왜
수 있어야 한다는 작가스러운 내가 권한 작은 여행이었다. 아주 멀리까
그리 자주 사용하는지를 알 순 없어도. 여전히 나도 채택중인 문구가 머
지 돈과 시간을 들여 갈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나는 실제로도 아메리카
리에 새 창으로 떴다. ‘난 누군지, 여긴 어딘지’
노를 주식대신으로 하고 있었고, 가끔 생각나는 비타민 부족의 상태를 위한 오렌지 쥬스 몇 잔이 부식을 맡고 있었다. 실제로도 위와 장은 그리
뇌는 나의 생각만큼은 재빠르지 않아서, 말하자면 적당히 동시대적
좋은 상태가 아니었고 그것들이 어떠한 매커니즘으로 세반고리관에 영
일 뿐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동물원에 다녀 온 이후에 더 많은 것들이 뇌
20
아브락사스 vol.7
아브락사스 vol.7
21
\\밖가//
샤르봉이 그린 그림
다. 삶이 참 버겁다는 생각은 사실 그 질에 있어서의 차이가 있을 뿐 유
뭔가에 대한 막연한 환멸감과 허무감도 비슷한 시기에 나에게 다가
향을 미치는지는 몰라도 이동수단에 대한 멀미가 심했다. 어린이 대공
왔다. 작은 행복에도 쉽게 자리를 비우고는 했던 그들은 마치 나를 잠시
원으로 정해진 나의 목적지에는 어딘가 새벽에 피는 친구의 담배 냄새
들르는 듯 그렇게 강하지도 않게 와서는 조용히 물러났다가를 반복했
같은 뉘앙스가 있었다. 아주 약간의 수고로움으로도 나는 그 가상의 노
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매우 지쳤고, 그렇게 시들어가는 자신인지 감정인
스텔지어에 맞닿을 수 있었다.
지 삶에 대한 의욕인지를 찌꺼기라서 더, 그나마 강하게 느껴볼 수 있었 그러니까 일단 백곰은 날지는 못하는 동물이었다, 적어도 이 세상에
치원 진학 이전 시절부터도 나에게 든 것이었지만, 이때처럼 이렇게 그
서는. 그래서 머리 위까지를 덮는 구조물은 필요하지 않았다. 옆구리 께
것의 속내를 알 듯 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처음이다. 그렇다손, 나는
를 막는 세로세로들로도 충분했다. 그것을 넘더라도 그 밖은 수로다 그
사실상 로켓의 발진부를 닮은 내 엉덩이를 의자에 깔고 있는 것으로도
래 강으로는 보이지는 않는 조금 넓은 정도의 수로가 있다. 그리고는 꽤
충분히 이곳이 아닌 어딘 가로의 이동이 분명해져 있었다. 곧 우주로 나
높은 인공의 절벽이 있다. 내려다보는 나야 니들 잘하면 나올 수 있겠다
아갈 우주인마냥 나의 가슴은 붕 뜬 채였고, 얼마든지 지금 이곳에의 집
싶어도 그들에게는 이미 완벽하게 닫힌 공간이 되어있을 터였다. 이들
착에서 의연해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미련이 없다기보다는 미련을 떨
을 보면서는 백이 어떻게 누럴 수 있는지를 조금 생각해 보는 정도로만
만큼 영특하지가 못하다고 봐야했다. 그렇기에 그때 즈음 나는 이 세상
나의 뇌를 운동시켰다. 더 중요한 아니 자극적인 자극은 원숭이 우리에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서였다. 우리라는 말이 애석했다.
기분전환이나 하자는 생각으로 찾아간 동물원에서 나는 어떤 실마 리라고 부를 것을 찾아냈다.
원숭이 우리는 내가 얼마든지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동물특성에 따라 매커니즘을 달리하고 있는 똑똑한 공간이 동
계시 같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미 제 아비를 찾아 떠난 맨발 또는
물원이었다. 병아리나 닭과 여러 조류가 모여 있는 우리 앞에는 모이 자
짝발의 사내였으니까. 기분전환이라는 것은 별 것이 없었다. ‘더 의욕적
판기가 있었다. 아주 혹시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혹시라도 ‘바나나 자
으로 삶을 살아가자’라든가 ‘우울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해’라는 자기
판기’가 있을까, 해서 주위를 꽤 서성거렸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다
계발적 인간이 할 수 있는 발상이라기보다는 좀 더 다양한 감정을 느낄
가는 서로의 관찰이 시작되었다. 오락프로에서 그런 심오한 문구를 왜
수 있어야 한다는 작가스러운 내가 권한 작은 여행이었다. 아주 멀리까
그리 자주 사용하는지를 알 순 없어도. 여전히 나도 채택중인 문구가 머
지 돈과 시간을 들여 갈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나는 실제로도 아메리카
리에 새 창으로 떴다. ‘난 누군지, 여긴 어딘지’
노를 주식대신으로 하고 있었고, 가끔 생각나는 비타민 부족의 상태를 위한 오렌지 쥬스 몇 잔이 부식을 맡고 있었다. 실제로도 위와 장은 그리
뇌는 나의 생각만큼은 재빠르지 않아서, 말하자면 적당히 동시대적
좋은 상태가 아니었고 그것들이 어떠한 매커니즘으로 세반고리관에 영
일 뿐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동물원에 다녀 온 이후에 더 많은 것들이 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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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봉이 그린 그림
다. 삶이 참 버겁다는 생각은 사실 그 질에 있어서의 차이가 있을 뿐 유
속에 들어찼다. 몇 번이고 나에 대해 설명하려는 무엇에서 제외시킨 부
“그러니까 말이야 걔가 나보고 작년이랑은 다르다는 거야. 역시 30
분이지만 나는 취미보다는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다. 겨우 한 칸뿐
이라는 건 그…게 제 구실을 못하게 되는 나이의 기준이라나 뭐라나. 야,
인 나의 집에 겨우 4귀퉁이 뿐인 방안의 두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나
솔직히 내가 첫 경험부터 이제까지 그게 좀 떨어진다는 생각은 해본 적
무 이젤이며 캔버스며 아크릴 물감이며가 나에게 지금을 재현해 줄 수
이 없거든? 이건 뭐 증명해 보이기도 어렵고. 그 어린 게 어디서 무슨 대
있는 방법으로서 “쉘위?”를 던졌다. 뭐 사실 나의 작품과 대화를 하며 같
물인지 괴물인지랑 뒹굴고 왔는지 , 얼마 전까지만 해도 꽥꽥거리더니
이 창조해낼 만큼의 아티스트는 못되지만 그래도 꽤 그럴싸한 작품이
그 날은 영 얼굴이 뚱하다가는 다 해놓고 그 지랄을 하지 뭐야. 아! 진짜
나왔다. 외모적으로는 별로 닮지 않은 그림 속 인물은 꿈속의 부조리―
열 받지 않냐?”
전혀 내가 아닌 사람이 충분히 나로서 기능한다는 관점에서―처럼 나를 꼭 닮아있었다. 그리고 그는 무언가 분노에 가득 차 보였다. 그 분노의
나는 애써 침착하려 애쓰지 않아도 그냥 이정도의 말로 친구의, 그러 니까 남성의 분노 이유를 정리해 볼 수 있었다.
이유를 찾아주는 것이 내가 저 그림 속 인물이 내 소유임을 주장할 수
• 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의 처절한 ‘현실평가’에 분노한다.
있는 최대의 볼모였다, 고 나는 이제는 생각한다. 따라서, 그 때는 그다
• 평가 관련하여 하나더, 나의 평가와 타인의 평가가 일치하지 않을 때 분노한다. • 나와 관련하여, 상대가 내가 제시한 주제에 대해 아주 크게 반발할
좋다.
수는 없게 빗나가면 분노한다. 분명 그렇고 그런 개똥철학이 될 수 있다고 예상한다. 내가 밖인가 당신이 밖인가 하는 주제 말이다. 뭐 그리 대단할 것 없는 것만이 발견된
• 자신보다 더 나은 존재를 가상하며 분노한다. • 실력을 증명해보일 깜냥이 되지 않을 때 분노한다.
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생각해 보았다고 하는 자체가 중요하지라고 뭉뚱 그려 본다. 나는 그다지 일반적이지 못하다. 그 일반을 일반으로 규정짓
나는 주제를 확연히 드러냈을 때의 위험성에 대해서 인지했다. 그래
는 눈조차 없어서 나 정도면 정규인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왔다고 봐도
서 그저 가만히 관찰해보는 방법을 택해보기로 했다. 이렇게 거창하게
무방하다. 먼저 나라는 존재가 속한 남성이라는 그룹의 일반적인 분노
말하기엔 조금 미안하다. 그저 집안에 담배 냄새를 두기 싫어서 집 밖으
에 대해서 몇 가지 연구를 해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친구를 불러 놓고 차
로 나와 담배를 피우다가 눈에 띄는 한 남성을 미행했다. 한 모금 더 피
까지 대접하며 심층면접에 들어갔다.
우고 싶었지만 놓칠 것 같은 생각에 급히 담배를 비벼 끄고 아주 조심스 럽게 그의 뒤를 따랐다. 구겨진 인상과는 달리 그 남자는 노래를 흥얼거
넌 뭐가 그리 널 분노케 했더냐하니, 녀석은 이미 감정이 시들해진―
리고 있었다. 어떤 락그룹의 노래일 수 있겠지만 10초 이상은 지속되지
시들해진 주체가 녀석인지 상대인지는 알기 어려웠다― ‘그녀(그년)’에
않았기에 자세한 정보를 얻어낼 수는 없었다. 검정색 스키니의 오른쪽
대한 이야기를 해대려고 주제를 자꾸 변질시켰다.
엉덩이 부분은 불룩 솟아 있었고, 자주 머리를 매만지던 오른손이 거기
22
아브락사스 vol.7
아브락사스 vol.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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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가//
샤르봉이 그린 그림
지 중요한 정도의 이유를 붙이지 않고 이끌리는 대로 사고했다고 해도
속에 들어찼다. 몇 번이고 나에 대해 설명하려는 무엇에서 제외시킨 부
“그러니까 말이야 걔가 나보고 작년이랑은 다르다는 거야. 역시 30
분이지만 나는 취미보다는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다. 겨우 한 칸뿐
이라는 건 그…게 제 구실을 못하게 되는 나이의 기준이라나 뭐라나. 야,
인 나의 집에 겨우 4귀퉁이 뿐인 방안의 두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나
솔직히 내가 첫 경험부터 이제까지 그게 좀 떨어진다는 생각은 해본 적
무 이젤이며 캔버스며 아크릴 물감이며가 나에게 지금을 재현해 줄 수
이 없거든? 이건 뭐 증명해 보이기도 어렵고. 그 어린 게 어디서 무슨 대
있는 방법으로서 “쉘위?”를 던졌다. 뭐 사실 나의 작품과 대화를 하며 같
물인지 괴물인지랑 뒹굴고 왔는지 , 얼마 전까지만 해도 꽥꽥거리더니
이 창조해낼 만큼의 아티스트는 못되지만 그래도 꽤 그럴싸한 작품이
그 날은 영 얼굴이 뚱하다가는 다 해놓고 그 지랄을 하지 뭐야. 아! 진짜
나왔다. 외모적으로는 별로 닮지 않은 그림 속 인물은 꿈속의 부조리―
열 받지 않냐?”
전혀 내가 아닌 사람이 충분히 나로서 기능한다는 관점에서―처럼 나를 꼭 닮아있었다. 그리고 그는 무언가 분노에 가득 차 보였다. 그 분노의
나는 애써 침착하려 애쓰지 않아도 그냥 이정도의 말로 친구의, 그러 니까 남성의 분노 이유를 정리해 볼 수 있었다.
이유를 찾아주는 것이 내가 저 그림 속 인물이 내 소유임을 주장할 수
• 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의 처절한 ‘현실평가’에 분노한다.
있는 최대의 볼모였다, 고 나는 이제는 생각한다. 따라서, 그 때는 그다
• 평가 관련하여 하나더, 나의 평가와 타인의 평가가 일치하지 않을 때 분노한다. • 나와 관련하여, 상대가 내가 제시한 주제에 대해 아주 크게 반발할
좋다.
수는 없게 빗나가면 분노한다. 분명 그렇고 그런 개똥철학이 될 수 있다고 예상한다. 내가 밖인가 당신이 밖인가 하는 주제 말이다. 뭐 그리 대단할 것 없는 것만이 발견된
• 자신보다 더 나은 존재를 가상하며 분노한다. • 실력을 증명해보일 깜냥이 되지 않을 때 분노한다.
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생각해 보았다고 하는 자체가 중요하지라고 뭉뚱 그려 본다. 나는 그다지 일반적이지 못하다. 그 일반을 일반으로 규정짓
나는 주제를 확연히 드러냈을 때의 위험성에 대해서 인지했다. 그래
는 눈조차 없어서 나 정도면 정규인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왔다고 봐도
서 그저 가만히 관찰해보는 방법을 택해보기로 했다. 이렇게 거창하게
무방하다. 먼저 나라는 존재가 속한 남성이라는 그룹의 일반적인 분노
말하기엔 조금 미안하다. 그저 집안에 담배 냄새를 두기 싫어서 집 밖으
에 대해서 몇 가지 연구를 해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친구를 불러 놓고 차
로 나와 담배를 피우다가 눈에 띄는 한 남성을 미행했다. 한 모금 더 피
까지 대접하며 심층면접에 들어갔다.
우고 싶었지만 놓칠 것 같은 생각에 급히 담배를 비벼 끄고 아주 조심스 럽게 그의 뒤를 따랐다. 구겨진 인상과는 달리 그 남자는 노래를 흥얼거
넌 뭐가 그리 널 분노케 했더냐하니, 녀석은 이미 감정이 시들해진―
리고 있었다. 어떤 락그룹의 노래일 수 있겠지만 10초 이상은 지속되지
시들해진 주체가 녀석인지 상대인지는 알기 어려웠다― ‘그녀(그년)’에
않았기에 자세한 정보를 얻어낼 수는 없었다. 검정색 스키니의 오른쪽
대한 이야기를 해대려고 주제를 자꾸 변질시켰다.
엉덩이 부분은 불룩 솟아 있었고, 자주 머리를 매만지던 오른손이 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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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봉이 그린 그림
지 중요한 정도의 이유를 붙이지 않고 이끌리는 대로 사고했다고 해도
카메라와 함께하며 자랑스러울 수 있는 순간만을 사진으로 찍어 공개한
은 어둡고 반은 밝은 건물의 앞에서 남자는 멈췄다. 어딘가에 전화를 걸
다. 사진기도 있고 차도 있는 남성은 일단 차를 피사체로 하여 별거 아니
었다. 머리가 좋지 않아서 정확하게 그 말들을 재현해 낼 수 없지만 내가
라는 인상을 주고 경기권 또는 그 보다 더 먼 공간에 여성과 함께 다녀왔
들은 바로는 남자는 후배정도로 보이는 누군가에게 돈을 꾸려고 하고
음을 증명하는 사진을 글과 함께 올린다. 눈팅만 하는 차도 없고 사진기
있었다. 잘 지내냐 연락이 왜 뜸하냐 하다가는 너무 스트레이트다 싶게
도 없는 남성들은 특정인의 안티가 되거나 거의 모든 글에 헐~등을 붙이
본론을 이야기했다. 상대는 거절을 한 모양이고 남자는 그것에 대한 반
는 댓글러가 된다. 어찌 보면 이미 선택되어진 남성을 대상으로 할 수 있
응은 표정정도로만 하고 상대에게 자주 연락할 것을 당부(?)하고는 전
는 표집의 오류를 벗어나기 위해, 나는 꽤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서 상대
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자켓의 안쪽에서 담배를 꺼내어 피웠다. 나도 좀
를 찾았다. 댓글도 달고 글도 올리고 사진기와 차 모두 있어 보이는 사람
쉰다는 기분으로 내 담배를 꺼내서 폈다. 만들어내서 뱉는 듯 한 침을 두
으로. 무슨 마음이었냐고 하면 내가 앞서 분석한 두 남성은 이곳에서 말
어 번 바닥에 분사하고 담배는 필터 가까이까지 피우고는 껌이라도 붙
하는 JJ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상대의 아이디는 포비아였다. 공포증
은 듯 신발 밑창을 건물 입구의 첫 스텝에 비볐다. 어깨를 몇 번 들썩이
을 뜻하는 아이디와 달리 거침없이 사는 듯 한 남성의 일상은 클릭을 통
고는 굳이 그 방향이 아니어도 될 듯 한 길로 나섰다. 더 따라갈까 했지
해 접근할 수 있는 블로그에 대부분 나와 있었다. 물론 보여주고 싶은 것
만 말았다. 이미 분노의 거리를 뽑아냈다기보다 그 남성이 그다지 정규
만을 보여주는 블로그에 대해서는 약간 경계를 가져야 하겠지만 지금까
인으로 보이지 않았기에 흥미가 떨어졌다. 대상설정은 우연을 기반으로
지 진행한 나의 분석은 ‘과잉일반화 리서치’에 가까웠기에 그다지 눈에
해도, 좀 더 신뢰도 있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아무튼 다음의 몇 가지를 생
보이지 않는 것까지를 염려할 이유는 없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자료를
각할 수 있었다.
보았는지를 다 공개할 수는 없다. 이런 저런 것들을 보았고, 그가 남성이
• 긴장을 하면 분노한다. 엄격하게 말해서 긴장이 되지만 드러내지 말아야 할 때 분노한다. • 내 뜻을 더 피력할 수 없을 때 분노한다. • 쓸데없는 일이 되는 데에 분노한다. • 포부 이하의 자원만이 조달될 때 분노한다.
라는 것은 확실하다. • 남성은 운전 중에 자주 분노한다. • 운전할 차가 없는 남성이 차가 있는 자신보다 더 나은 여성과 교제 중일 때―JJ 주제에라며― 분노한다. • 더 나은 사진기로 그 보다 못한 사진기의 결과물을 따라갈 수 없을 때 분노한다.
나는 남성들이 드글드글 모여 있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들어갔다. 자 랑을 해도 좋고, 누군가를 까도 좋고 말만 된다면 뭘 해도 상관없는 탭을 클릭했다. 정규의 남자들의 하루를 재구성해 볼 수 있는 공간이라는 생
이때쯤은 중간 결산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내가 본 남성들의 공통점 이랄지 다른 점을 뽑아보기로 했다.
각이 들었다. 차는 없지만 사진기는 있는 남성은 대부분 자신의 일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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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락사스 vol.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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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봉이 그린 그림
에 닿았다. 그러다가 불쑥 핸드폰을 꺼냈다. 지하에 바가 있고 그래서 반
카메라와 함께하며 자랑스러울 수 있는 순간만을 사진으로 찍어 공개한
은 어둡고 반은 밝은 건물의 앞에서 남자는 멈췄다. 어딘가에 전화를 걸
다. 사진기도 있고 차도 있는 남성은 일단 차를 피사체로 하여 별거 아니
었다. 머리가 좋지 않아서 정확하게 그 말들을 재현해 낼 수 없지만 내가
라는 인상을 주고 경기권 또는 그 보다 더 먼 공간에 여성과 함께 다녀왔
들은 바로는 남자는 후배정도로 보이는 누군가에게 돈을 꾸려고 하고
음을 증명하는 사진을 글과 함께 올린다. 눈팅만 하는 차도 없고 사진기
있었다. 잘 지내냐 연락이 왜 뜸하냐 하다가는 너무 스트레이트다 싶게
도 없는 남성들은 특정인의 안티가 되거나 거의 모든 글에 헐~등을 붙이
본론을 이야기했다. 상대는 거절을 한 모양이고 남자는 그것에 대한 반
는 댓글러가 된다. 어찌 보면 이미 선택되어진 남성을 대상으로 할 수 있
응은 표정정도로만 하고 상대에게 자주 연락할 것을 당부(?)하고는 전
는 표집의 오류를 벗어나기 위해, 나는 꽤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서 상대
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자켓의 안쪽에서 담배를 꺼내어 피웠다. 나도 좀
를 찾았다. 댓글도 달고 글도 올리고 사진기와 차 모두 있어 보이는 사람
쉰다는 기분으로 내 담배를 꺼내서 폈다. 만들어내서 뱉는 듯 한 침을 두
으로. 무슨 마음이었냐고 하면 내가 앞서 분석한 두 남성은 이곳에서 말
어 번 바닥에 분사하고 담배는 필터 가까이까지 피우고는 껌이라도 붙
하는 JJ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상대의 아이디는 포비아였다. 공포증
은 듯 신발 밑창을 건물 입구의 첫 스텝에 비볐다. 어깨를 몇 번 들썩이
을 뜻하는 아이디와 달리 거침없이 사는 듯 한 남성의 일상은 클릭을 통
고는 굳이 그 방향이 아니어도 될 듯 한 길로 나섰다. 더 따라갈까 했지
해 접근할 수 있는 블로그에 대부분 나와 있었다. 물론 보여주고 싶은 것
만 말았다. 이미 분노의 거리를 뽑아냈다기보다 그 남성이 그다지 정규
만을 보여주는 블로그에 대해서는 약간 경계를 가져야 하겠지만 지금까
인으로 보이지 않았기에 흥미가 떨어졌다. 대상설정은 우연을 기반으로
지 진행한 나의 분석은 ‘과잉일반화 리서치’에 가까웠기에 그다지 눈에
해도, 좀 더 신뢰도 있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아무튼 다음의 몇 가지를 생
보이지 않는 것까지를 염려할 이유는 없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자료를
각할 수 있었다.
보았는지를 다 공개할 수는 없다. 이런 저런 것들을 보았고, 그가 남성이
• 긴장을 하면 분노한다. 엄격하게 말해서 긴장이 되지만 드러내지 말아야 할 때 분노한다. • 내 뜻을 더 피력할 수 없을 때 분노한다. • 쓸데없는 일이 되는 데에 분노한다. • 포부 이하의 자원만이 조달될 때 분노한다.
라는 것은 확실하다. • 남성은 운전 중에 자주 분노한다. • 운전할 차가 없는 남성이 차가 있는 자신보다 더 나은 여성과 교제 중일 때―JJ 주제에라며― 분노한다. • 더 나은 사진기로 그 보다 못한 사진기의 결과물을 따라갈 수 없을 때 분노한다.
나는 남성들이 드글드글 모여 있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들어갔다. 자 랑을 해도 좋고, 누군가를 까도 좋고 말만 된다면 뭘 해도 상관없는 탭을 클릭했다. 정규의 남자들의 하루를 재구성해 볼 수 있는 공간이라는 생
이때쯤은 중간 결산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내가 본 남성들의 공통점 이랄지 다른 점을 뽑아보기로 했다.
각이 들었다. 차는 없지만 사진기는 있는 남성은 대부분 자신의 일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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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가//
샤르봉이 그린 그림
에 닿았다. 그러다가 불쑥 핸드폰을 꺼냈다. 지하에 바가 있고 그래서 반
• 남성의 분노는 ‘타인’을 전제로 한다.
앞은 양각이고 뒤는 음각이지만 최고의 남성이라 불리는 남성을 대
• 남성의 분노는 ‘상대평가’를 본질로 한다.
접하는 한 여성이 있었다. 남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상.인이었다. 남성
• 남성의 분노는 대게 남성을 상대로 한다.
만이 뒤를 다 파낸 것 같이 생겨있었는데, 모두가 자신과는 다른 그의 모
• 남성의 분노는 자신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시작한다.
습에 대해 궁금해 하거나 역겨워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의문을 갖는 여 성이 있었는데, 아마도 꿈속에서 그 여성이 나인 모양이었다. 나는 충분
표본부터 저질인 것에서, 뭔가 그럴싸한 결과를 도출해낸다는 것이
히 ‘의문’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남성에게 왜를 물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쉽지 않다. 충분히 피곤하므로 중간결산이 아닌 결론으로 해버리고 싶
가능하다면 어떻게까지를 듣고 싶었다 . 이렇게 궁금함과 동시에 어떤
다. 하지만, 충분한 제언이 필요하겠지.
역함이 느껴졌다. 내 의지가 꿈속의 여성을 움직였다. 어둡고 싸구려 패 브릭 소파가 디귿자로 놓였고, 탁자는 그 디귿 안으로 들어간 구조의 방
• 남성마다 주–로 의식하는 ‘타인’―물건들까지 포함하여―이 다른 것 같다.
에서, 나는 드디어 그 여성의 입을 빌어 남성에게 여러 질문을 던져볼 수 있었다.
해서는 다른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이건 아마도 꿈 속 여성의 의지가 처음에는 우위에 있었던 모양인지,
• 남성에게 남성이지 않은 존재에 대한 인식은 적정선을 넘기도 하
여성은 남성에게 이렇게 묻고 있었다. “당신 눈썹 어디 있어?” 남성의 대
고 넘지 않기도 하지만 우선은 남성이 아니기에 그다지 넘어서야
답은 절대로 말이 안 되었지만, 너무도 논리적이었다고 기억한다. 내용
할 존재로 인식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남성은 이 상태를 넘어서
은 대충 눈썹은 한국식 표기이고, 사실은 눈솝(noon-soap)이 맞는 표현
지 못하는 듯 하다. 아니, 않으려한다.
인데 모두가 알다시피 비누는 거품을 내서 더러움을 닦아내는 것이기에
•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는 남성에 대해서는 오히려 비판을 사 기도 한다. 잘 아는 본인은 정작 분노하지 않는다.
꼭 필요한 것을 씻는데 다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닳아 없어지는 것이라면 다른 사람들의 눈썹은 어째서 그 자리에 언제나 있는 것이냐 는 여성의 추가 질문에도 달변은 이어졌다. 보통의 눈솝은 그 사람이 자
내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며, 언젠가 봤던 독립영화를 떠올리며 하
고 있을 때 눈꺼풀을 닦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눈 안은 너무 예민하기
루 종일 거실에다 ‘우리’를 만들어 보겠다고 몸 꽤나 피곤하게 했던 날
에 눈 밖을 관리해주는 것인데, 자주 접혀있는 눈꺼플은 더럽다고 해도
이었다. 어설프게 쇠망이 둘러쳐졌고, 영화에서 본 대로 커다란 집게로
눈솝을 그다지 많이 상하게 하지 않아서 그렇듯 거기에 있는다는 것이다.
한 군데를 물어 전기만 공급하면 완성될 것이었다. 누굴 가둘지에 대해
마음만 먹고 자세히 관찰하면, 지쳐있는 눈솝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서 좀 더 생각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말이었다. 정상으로 작동하는 뇌를 가진 꿈밖의 나도 어느 새인가 설득
꿈을 꾸었다.
당하고 있었다. 몇 번인가 고개를 끄덕이는 느낌이 몸에 들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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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대평가라고는 하지만 남성마다 어디까지를 상대로 할지에 대
• 남성의 분노는 ‘타인’을 전제로 한다.
앞은 양각이고 뒤는 음각이지만 최고의 남성이라 불리는 남성을 대
• 남성의 분노는 ‘상대평가’를 본질로 한다.
접하는 한 여성이 있었다. 남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상.인이었다. 남성
• 남성의 분노는 대게 남성을 상대로 한다.
만이 뒤를 다 파낸 것 같이 생겨있었는데, 모두가 자신과는 다른 그의 모
• 남성의 분노는 자신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시작한다.
습에 대해 궁금해 하거나 역겨워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의문을 갖는 여 성이 있었는데, 아마도 꿈속에서 그 여성이 나인 모양이었다. 나는 충분
표본부터 저질인 것에서, 뭔가 그럴싸한 결과를 도출해낸다는 것이
히 ‘의문’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남성에게 왜를 물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쉽지 않다. 충분히 피곤하므로 중간결산이 아닌 결론으로 해버리고 싶
가능하다면 어떻게까지를 듣고 싶었다 . 이렇게 궁금함과 동시에 어떤
다. 하지만, 충분한 제언이 필요하겠지.
역함이 느껴졌다. 내 의지가 꿈속의 여성을 움직였다. 어둡고 싸구려 패 브릭 소파가 디귿자로 놓였고, 탁자는 그 디귿 안으로 들어간 구조의 방
• 남성마다 주–로 의식하는 ‘타인’―물건들까지 포함하여―이 다른 것 같다.
에서, 나는 드디어 그 여성의 입을 빌어 남성에게 여러 질문을 던져볼 수 있었다.
해서는 다른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이건 아마도 꿈 속 여성의 의지가 처음에는 우위에 있었던 모양인지,
• 남성에게 남성이지 않은 존재에 대한 인식은 적정선을 넘기도 하
여성은 남성에게 이렇게 묻고 있었다. “당신 눈썹 어디 있어?” 남성의 대
고 넘지 않기도 하지만 우선은 남성이 아니기에 그다지 넘어서야
답은 절대로 말이 안 되었지만, 너무도 논리적이었다고 기억한다. 내용
할 존재로 인식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남성은 이 상태를 넘어서
은 대충 눈썹은 한국식 표기이고, 사실은 눈솝(noon-soap)이 맞는 표현
지 못하는 듯 하다. 아니, 않으려한다.
인데 모두가 알다시피 비누는 거품을 내서 더러움을 닦아내는 것이기에
•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는 남성에 대해서는 오히려 비판을 사 기도 한다. 잘 아는 본인은 정작 분노하지 않는다.
꼭 필요한 것을 씻는데 다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닳아 없어지는 것이라면 다른 사람들의 눈썹은 어째서 그 자리에 언제나 있는 것이냐 는 여성의 추가 질문에도 달변은 이어졌다. 보통의 눈솝은 그 사람이 자
내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며, 언젠가 봤던 독립영화를 떠올리며 하
고 있을 때 눈꺼풀을 닦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눈 안은 너무 예민하기
루 종일 거실에다 ‘우리’를 만들어 보겠다고 몸 꽤나 피곤하게 했던 날
에 눈 밖을 관리해주는 것인데, 자주 접혀있는 눈꺼플은 더럽다고 해도
이었다. 어설프게 쇠망이 둘러쳐졌고, 영화에서 본 대로 커다란 집게로
눈솝을 그다지 많이 상하게 하지 않아서 그렇듯 거기에 있는다는 것이다.
한 군데를 물어 전기만 공급하면 완성될 것이었다. 누굴 가둘지에 대해
마음만 먹고 자세히 관찰하면, 지쳐있는 눈솝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서 좀 더 생각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말이었다. 정상으로 작동하는 뇌를 가진 꿈밖의 나도 어느 새인가 설득
꿈을 꾸었다.
당하고 있었다. 몇 번인가 고개를 끄덕이는 느낌이 몸에 들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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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대평가라고는 하지만 남성마다 어디까지를 상대로 할지에 대
나는 조금 더 집중을 했고, 드디어 남성에게 말할 수 있었다. “당신만
이 가지 않다가 무슨 이유에선지 그 ‘개인용도의’ 컴퓨터에 전원을 켰다.
좀 다른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여성은 경멸하는 듯 한 눈빛으로 이
남성의 분노에 대한 연구가 어쩌구저쩌구 하는 글을 열어 찬찬히 살폈
런 질문을 했다. 여성의 눈빛과 입 주변의 표정, 팔을 꼰 채 거의 눕듯이
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만한 글은 아니었다. 좀 더 숙성시켰다가 열었
소파에 기댄 자세에 내가다 민망함을 느꼈지만 원하는 바는 전달된 터
을 때 작성을 할 본인에게 만이라고 폭소를 터트리게 할 만하지도 않았
였다. 남성이 아까와 같이 달변들을 쏟아냈지만 이상하게도 이번은 음
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지우기로 했다. 하지만, 문득 지우지 말아야겠
소거 처리가 되어, 꿈속의 여성과 나 모두에게 들리지 않았다. 우리의 이
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이유를 하나 만들자면 이미 생김도 가물가물
런 모습을 담고 있는 카메라가 있었는데, 뒷모습만으로 등장한 어떤 인
한 부조에서 떼어 내진 듯 한 그 꿈속의 남성이 지우지 않을 것을 명령했
물은 그 모두를 알아듣는 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꿈을 꾸면서
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이 인물이 현실의 누구일까를 계속해서 매칭하려했다. 분명한 것 은 나는 아닌 모양이었다.
바람은 조금 찼고, 커피를 끊은 지는 조금 되었었다. 빛이 들어오는 상자위에 모래를 뿌리고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여 장면을 바꾸는 공연 을 본지 며칠 지나지 않았었다. 무릎이 이상하게 시렸고, 기분은 우울하
금 놀랐다. 꿈의 양이 많았다기보다 꿈과 현실의 시차에 아직 덜 적응된
지도 슬프지도 않았지만 자주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눈에 이상이 있어
탓이었다. 냉장고에서 날짜가 간당한 우유를 꺼내어 데워서 소금과 설
서라는 것은 조금 뒤에나 알았다.
탕을 모두 타서 마셨다. 아주 짧게 샤워를 마쳤고, 헤어진 뒤로는 친구사 이를 유지하며, 가끔 잠자리를 하기도 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
정신과 의사는 내가 몹시 분노해있는 상태라고 했다. 이런 상태인지
를 묻고 우스갯소리를 조금 하다가는 끊었다. 그러다가 문득 너의 논조
가 너무 오래되었고 따라서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사실 내자면
에는 여성 논객이 빠져있다는 선배의 충고가 떠올랐다. 논조와 논객, 왜
그리 없지도 않은 시간을 내서 자주 그와 만나 비싼 돈을 주고 이야기를
남성을 안고 절벽 아래로 뛰어드는 논개가 생각나는 거지? 그날 새벽 내
했다. 나는 내 분노의 안을 알지 못했다. 사실 그 복잡한 감성을 단지 분
나는 일본 여성이 안 돼 안 돼하다가는 맛있어 맛있어하는 동영상을 몇
노라는 이름으로 단정 짓는다는 것이 싫었다. 내가 궁금했던 분노는 나
개나 보면서 잠들지 않았다. 두루마리 휴지 몇 장을 더럽혔고, 딱히 성욕
를 닮은 그림 속 남성의 분노였지 내 피에 새겨있는 내 분노가 아니었다.
이 가시지 않아서라기보다는 다시 잠들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했다.
남성이고 싶었지만, 굳이 여성이고 싶었다고 볼 수는 없었다. 의사는 백 색소음이야기를 하면서 지금의 내 상태가 그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의
한동안 일에 치여 살았고 , 그래서 일하는 컴퓨터만으로 글을 썼다 .
사는 계속해서 안을 궁금해 했지만, 내가 그에게 들려줄 수 있는 것은 밖
실용적인 글쓰기만은 했다 . 가끔씩 씨부려대던 글말은 다른 컴퓨터에
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의사는 자주 뜻대로 되지 않는 듯 얼굴을 찌푸
전혀 다른 가치로 저장되어 있었다. 언제나 그 자리쯤 놓여 있었지만 손
리며, 그것이 아닌 다른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다. 나는 의외로 쉽게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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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 시계를 봤을 때, 불과 몇 시간 지나지 않았다는 것에 조
나는 조금 더 집중을 했고, 드디어 남성에게 말할 수 있었다. “당신만
이 가지 않다가 무슨 이유에선지 그 ‘개인용도의’ 컴퓨터에 전원을 켰다.
좀 다른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여성은 경멸하는 듯 한 눈빛으로 이
남성의 분노에 대한 연구가 어쩌구저쩌구 하는 글을 열어 찬찬히 살폈
런 질문을 했다. 여성의 눈빛과 입 주변의 표정, 팔을 꼰 채 거의 눕듯이
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만한 글은 아니었다. 좀 더 숙성시켰다가 열었
소파에 기댄 자세에 내가다 민망함을 느꼈지만 원하는 바는 전달된 터
을 때 작성을 할 본인에게 만이라고 폭소를 터트리게 할 만하지도 않았
였다. 남성이 아까와 같이 달변들을 쏟아냈지만 이상하게도 이번은 음
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지우기로 했다. 하지만, 문득 지우지 말아야겠
소거 처리가 되어, 꿈속의 여성과 나 모두에게 들리지 않았다. 우리의 이
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이유를 하나 만들자면 이미 생김도 가물가물
런 모습을 담고 있는 카메라가 있었는데, 뒷모습만으로 등장한 어떤 인
한 부조에서 떼어 내진 듯 한 그 꿈속의 남성이 지우지 않을 것을 명령했
물은 그 모두를 알아듣는 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꿈을 꾸면서
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이 인물이 현실의 누구일까를 계속해서 매칭하려했다. 분명한 것 은 나는 아닌 모양이었다.
바람은 조금 찼고, 커피를 끊은 지는 조금 되었었다. 빛이 들어오는 상자위에 모래를 뿌리고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여 장면을 바꾸는 공연 을 본지 며칠 지나지 않았었다. 무릎이 이상하게 시렸고, 기분은 우울하
금 놀랐다. 꿈의 양이 많았다기보다 꿈과 현실의 시차에 아직 덜 적응된
지도 슬프지도 않았지만 자주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눈에 이상이 있어
탓이었다. 냉장고에서 날짜가 간당한 우유를 꺼내어 데워서 소금과 설
서라는 것은 조금 뒤에나 알았다.
탕을 모두 타서 마셨다. 아주 짧게 샤워를 마쳤고, 헤어진 뒤로는 친구사 이를 유지하며, 가끔 잠자리를 하기도 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
정신과 의사는 내가 몹시 분노해있는 상태라고 했다. 이런 상태인지
를 묻고 우스갯소리를 조금 하다가는 끊었다. 그러다가 문득 너의 논조
가 너무 오래되었고 따라서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사실 내자면
에는 여성 논객이 빠져있다는 선배의 충고가 떠올랐다. 논조와 논객, 왜
그리 없지도 않은 시간을 내서 자주 그와 만나 비싼 돈을 주고 이야기를
남성을 안고 절벽 아래로 뛰어드는 논개가 생각나는 거지? 그날 새벽 내
했다. 나는 내 분노의 안을 알지 못했다. 사실 그 복잡한 감성을 단지 분
나는 일본 여성이 안 돼 안 돼하다가는 맛있어 맛있어하는 동영상을 몇
노라는 이름으로 단정 짓는다는 것이 싫었다. 내가 궁금했던 분노는 나
개나 보면서 잠들지 않았다. 두루마리 휴지 몇 장을 더럽혔고, 딱히 성욕
를 닮은 그림 속 남성의 분노였지 내 피에 새겨있는 내 분노가 아니었다.
이 가시지 않아서라기보다는 다시 잠들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했다.
남성이고 싶었지만, 굳이 여성이고 싶었다고 볼 수는 없었다. 의사는 백 색소음이야기를 하면서 지금의 내 상태가 그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의
한동안 일에 치여 살았고 , 그래서 일하는 컴퓨터만으로 글을 썼다 .
사는 계속해서 안을 궁금해 했지만, 내가 그에게 들려줄 수 있는 것은 밖
실용적인 글쓰기만은 했다 . 가끔씩 씨부려대던 글말은 다른 컴퓨터에
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의사는 자주 뜻대로 되지 않는 듯 얼굴을 찌푸
전혀 다른 가치로 저장되어 있었다. 언제나 그 자리쯤 놓여 있었지만 손
리며, 그것이 아닌 다른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다. 나는 의외로 쉽게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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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봉이 그린 그림
잠에서 깨어 시계를 봤을 때, 불과 몇 시간 지나지 않았다는 것에 조
이야기를 했고, 마르지 않는 샘을 가진 듯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커피를 끊음과 동시에 설렘인지 불안인지 모를 가슴의 상태는 사라졌고, 허무 를 논할 만큼 멍하니 깨어있을 시간도 없기에 그런 쪽에의 관심일랑 꺼 진지 오래였다. 바꾸어 생각해봐도 확실히 나는 정규인이고 정상인이다. 그것을 알 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를 반증한다고 궤변을 늘어 놓아도 좋다. 난 떳떳 하다. 언젠가 박가를 밖가로 오기한 적이 있다. 무언가 마음에 들었고, 싸 인을 할 때 자주 쓰고 있다. 우리 박씨집안이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는 한 나는 계속 밖가일 수 있을 것 같다. 꿈속의 남성대로의 조크를 해보자면, 밖가에는 기역이 3개여서 밤에는 테이블로 사용하고 있다. 세
무작정
샤르봉이 그린 그림
명이 선착순으로 이용할 수 있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셋도 모자라서 두 개는 보관이 쉽게 겹쳐 놓았다. 밖가 이용은 꽤 까다로운 편 으로 인가가 필요하다. 재미있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다. 나를 제외하고.
김한주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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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했고, 마르지 않는 샘을 가진 듯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커피를 끊음과 동시에 설렘인지 불안인지 모를 가슴의 상태는 사라졌고, 허무 를 논할 만큼 멍하니 깨어있을 시간도 없기에 그런 쪽에의 관심일랑 꺼 진지 오래였다. 바꾸어 생각해봐도 확실히 나는 정규인이고 정상인이다. 그것을 알 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를 반증한다고 궤변을 늘어 놓아도 좋다. 난 떳떳 하다. 언젠가 박가를 밖가로 오기한 적이 있다. 무언가 마음에 들었고, 싸 인을 할 때 자주 쓰고 있다. 우리 박씨집안이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는 한 나는 계속 밖가일 수 있을 것 같다. 꿈속의 남성대로의 조크를 해보자면, 밖가에는 기역이 3개여서 밤에는 테이블로 사용하고 있다. 세
무작정
샤르봉이 그린 그림
명이 선착순으로 이용할 수 있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셋도 모자라서 두 개는 보관이 쉽게 겹쳐 놓았다. 밖가 이용은 꽤 까다로운 편 으로 인가가 필요하다. 재미있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다. 나를 제외하고.
김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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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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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쏟아진 빛은
홍인영
나에게 쏟아진 빛은
홍인영
샤르봉이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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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이상협
자화상
이상협
거울을 보지 않고 자신을 그리는 상상화이다
형태는 친숙하지만 내면은 언제나 새롭다
거울을 보지 않고 자신을 그리는 상상화이다
형태는 친숙하지만 내면은 언제나 새롭다
홀린듯이 제 얼굴만 그리는 모습을 보고 자의식과잉이라 했지만 좀 더 복잡한 기분이었다
열등감 마조히스트, 자해의 새디스트
그리고 나르시즘 자살 또는 자위의 오르가즘 같은 것
홀린듯이 제 얼굴만 그리는 모습을 보고 자의식과잉이라 했지만 좀 더 복잡한 기분이었다
열등감 마조히스트, 자해의 새디스트
그리고 나르시즘 자살 또는 자위의 오르가즘 같은 것
동상처럼 굳어지는 표정
공기가 경직되더니 질식사한 시체 위 먼지처럼 하얗게 쌓여 내렸다
동상처럼 굳어지는 표정
공기가 경직되더니 질식사한 시체 위 먼지처럼 하얗게 쌓여 내렸다
널 보자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진다
심장이 밧줄로 동여매진 것 같고 피가 바짝 곤두서면서 목구멍까지 역류해왔다 댐 이 무 너
지 면 서
폭 포 처 럼 내 리 친 다
아마 넌 몰랐을 것이다
널 보자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진다
심장이 밧줄로 동여매진 것 같고 피가 바짝 곤두서면서 목구멍까지 역류해왔다 댐 이 무 너
지 면 서
폭 포 처 럼 내 리 친 다
아마 넌 몰랐을 것이다
뒤 음이 꼬이 고
또
꼬여 서
엉킨
내
담
린 틀 마
장에 석
끼 어서
이
뒤 음이 꼬이 고
또
꼬여 서
엉킨
내
담
린 틀 마
장에 석
끼 어서
이
라기러꾸난장 는나 싶 고이먹탕골 널
라기러꾸난장 는나 싶 고이먹탕골 널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좋아하는 이유라고 한다면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좋아하는 이유라고 한다면
노 려 본 다 고 얼 굴 로 험 악 한
변하 는
건
아무
것도
없더 라고
노 려 본 다 고 얼 굴 로 험 악 한
변하 는
건
아무
것도
없더 라고
말없이 지켜보는 것이 거울 속의 자화상이 아니라면 사천을 떠도는 넋도 있을테지
말없이 지켜보는 것이 거울 속의 자화상이 아니라면 사천을 떠도는 넋도 있을테지
누군가 말했다 거울을 보며 웃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어떤 웃는 방법을 알게 되었는데 왠일인지 슬플때도 피식 터지는 것이
비열한 가면인지 비장한 암호인지
누군가 말했다 거울을 보며 웃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어떤 웃는 방법을 알게 되었는데 왠일인지 슬플때도 피식 터지는 것이
비열한 가면인지 비장한 암호인지
가끔 입구를 틀어막고 참호를 깊게 파곤 한다 자화상에 몰두하기 만큼은 모독되지 않기 위해서
가끔 입구를 틀어막고 참호를 깊게 파곤 한다 자화상에 몰두하기 만큼은 모독되지 않기 위해서
물 속으로부터의 수기 김종소리 글
정지호 그림
물 속으로부터의 수기 김종소리 글
정지호 그림
있다 해도 어쩌겠냐는 심정이었다. 그렇게 발을 들여놓고 보니 무서울 게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앞으 로 걸었다. 어둠만이 가득 찬 길고 긴 터널을 지나 이 세계에 처음으로 발을 딛 었을 때, 나를 맞이한 것은 드넓은 초원. 사람도 없고, 동물도 없고, 오직 풀들만으로 이루어진 초원이었다. 바닥에 끝도 없이 깔려있던 풀들은 누군가의 관리를 받고 있는 듯 , 밟아도 발목을 덮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길이로 잘려있었다. 초원 위에 서 한 발자국씩 움직일 때마다 풀들에 맺힌 이슬이 튀기며 싱그러운 향 이 풍겨오고, 동시에 상쾌한 기분이 온 몸 구석구석으로 퍼졌다. 초원의 지평선과 맞닿아있는 하늘은, 새파란 물감이 출렁이는 바다 위에 하얀 조각배들이 이따금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런 곳을 걷노라니 기분이 좋아졌다. 처음에 겁을 먹고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까 말까, 하고 고민하던 것이 괜한 짓처럼 느껴질 정도였 다.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어디로 갈지,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에 대한
아브락사스 vol.7
71
\\\\\\물속으로부터의 수기//////
겁도 없이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까짓 거 별 거 있겠냐, 별 거
있다 해도 어쩌겠냐는 심정이었다. 그렇게 발을 들여놓고 보니 무서울 게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앞으 로 걸었다. 어둠만이 가득 찬 길고 긴 터널을 지나 이 세계에 처음으로 발을 딛 었을 때, 나를 맞이한 것은 드넓은 초원. 사람도 없고, 동물도 없고, 오직 풀들만으로 이루어진 초원이었다. 바닥에 끝도 없이 깔려있던 풀들은 누군가의 관리를 받고 있는 듯 , 밟아도 발목을 덮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길이로 잘려있었다. 초원 위에 서 한 발자국씩 움직일 때마다 풀들에 맺힌 이슬이 튀기며 싱그러운 향 이 풍겨오고, 동시에 상쾌한 기분이 온 몸 구석구석으로 퍼졌다. 초원의 지평선과 맞닿아있는 하늘은, 새파란 물감이 출렁이는 바다 위에 하얀 조각배들이 이따금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런 곳을 걷노라니 기분이 좋아졌다. 처음에 겁을 먹고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까 말까, 하고 고민하던 것이 괜한 짓처럼 느껴질 정도였 다.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어디로 갈지,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에 대한
아브락사스 vol.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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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으로부터의 수기//////
겁도 없이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까짓 거 별 거 있겠냐, 별 거
걱정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초원을 걷는 일만이 내게 주어진 일이란
에 없었다. ‘트드드’ 하던 자그마한 소리는 귀를 찢을 듯한 굉음으로 변
생각이 들었다.
해있었고, 더 이상 지평선은 없었다. 내 눈 앞에 펼쳐진 또 다른 지역은 절벽이었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절벽 아래로 다른 길이 있을 법
그래서 계속 걸었다.
했지만 내려다볼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귀를 찢을 듯한 굉음이 무서웠 고, 더욱이 지독한 습기와 그로인한 안개가 내 눈 앞을 가리고 있는 걸로
한참을 걸어도 끝없는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자 점점 두려운 마 음이 생기며, 생각이 많아졌다.
보아 절벽 바로 아래에 폭포가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 아래는 보나 마나 거대한 강일 것이었다.
이대로 걷기만 해도 괜찮은 걸까 ? 이 세계는 초원으로만 이루어진 나는 절망했다. 기껏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건만 세계의 끝은커녕,
는데, 어찌된 일일까? 이대로라면 너무 쉽게 이 세계의 끝에 도달해버릴
기껏해야 두 세 시간 남짓의 산책만으로 다시 예전의 세계로 돌아가야
것만 같다. 정말 아무 일도, 아무 것도 없이 이대로 순탄하게 흘러가기만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앞이 캄캄해졌다. 주변 사람들에게 다른 세계
하는 걸까?
로 가서 살겠다며 호언장담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난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생각의 흐름을 돌리기 위해, 걸음을 멈추고 아름다운 초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발을 살짝 들었다 놓으며
어쩌다 보니 벌려진 몇몇 지인들과의 술자리였다. 난 어느 정도 취기
상쾌한 기분을 상기시켰다. 앞으로 이 아름다운 광경이 사라지고, 괴로
가 올라 머리 회전이 둔해져있었다. 그러다 문득 술자리의 화제가 이 세
운 일들이 다가온다 해도, 처음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던 순간을 기억
계에 대한 것으로 자연스레 흘러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머릿속에서
하면 다시 예전의 세계로 돌아갈 일은 없다며 자신을 다독였다.
지금 당장 말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벌떡 일어섰다. 그래서 자리를 박 차고 일어나 말했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디금. 이 자리에셔. 분명히 마랄게. 나 이 쉐계를 떠나 다른 쉐계로 그렇게 마음을 편안히 먹고 걷다보니 뚜렷하던 지평선이 점차 흐릿
갈 거야.”
해지는 것 같았다. 좀 더 가보면 초원이 사라지고 다른 지역이 나타날 것 같았다. 그래서 달려갔다. 조금 달리다 보니 ‘트드드’ 하는 소리가 작게 들리기 시작하더니 점차 커졌다―굳이 문자로 표현하자니 ‘트드드’가
내 선언을 들은 지인들은 저희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난 그 모 습이 못마땅했다.
그나마 비슷한 소리가 나는 것 같다―. 지평선의 흐릿함은 점점 짙어졌 다. 마침내 지평선 끝에 다다랐을 때, 난 입을 벌리고 멍하니 있을 수밖
72
아브락사스 vol.7
“니들기리 뭐라 지껄이는 겨야? 내 앞에셔 똑바루! 똑바루 말해. 왜?
아브락사스 vol.7
73
\\\\\\물속으로부터의 수기//////
샤르봉이 그린 그림
것일까? 전에 있던 세계에서 들은 바대로라면 이 세계는 끔찍한 곳이었
걱정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초원을 걷는 일만이 내게 주어진 일이란
에 없었다. ‘트드드’ 하던 자그마한 소리는 귀를 찢을 듯한 굉음으로 변
생각이 들었다.
해있었고, 더 이상 지평선은 없었다. 내 눈 앞에 펼쳐진 또 다른 지역은 절벽이었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절벽 아래로 다른 길이 있을 법
그래서 계속 걸었다.
했지만 내려다볼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귀를 찢을 듯한 굉음이 무서웠 고, 더욱이 지독한 습기와 그로인한 안개가 내 눈 앞을 가리고 있는 걸로
한참을 걸어도 끝없는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자 점점 두려운 마 음이 생기며, 생각이 많아졌다.
보아 절벽 바로 아래에 폭포가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 아래는 보나 마나 거대한 강일 것이었다.
이대로 걷기만 해도 괜찮은 걸까 ? 이 세계는 초원으로만 이루어진 나는 절망했다. 기껏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건만 세계의 끝은커녕,
는데, 어찌된 일일까? 이대로라면 너무 쉽게 이 세계의 끝에 도달해버릴
기껏해야 두 세 시간 남짓의 산책만으로 다시 예전의 세계로 돌아가야
것만 같다. 정말 아무 일도, 아무 것도 없이 이대로 순탄하게 흘러가기만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앞이 캄캄해졌다. 주변 사람들에게 다른 세계
하는 걸까?
로 가서 살겠다며 호언장담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난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생각의 흐름을 돌리기 위해, 걸음을 멈추고 아름다운 초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발을 살짝 들었다 놓으며
어쩌다 보니 벌려진 몇몇 지인들과의 술자리였다. 난 어느 정도 취기
상쾌한 기분을 상기시켰다. 앞으로 이 아름다운 광경이 사라지고, 괴로
가 올라 머리 회전이 둔해져있었다. 그러다 문득 술자리의 화제가 이 세
운 일들이 다가온다 해도, 처음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던 순간을 기억
계에 대한 것으로 자연스레 흘러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머릿속에서
하면 다시 예전의 세계로 돌아갈 일은 없다며 자신을 다독였다.
지금 당장 말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벌떡 일어섰다. 그래서 자리를 박 차고 일어나 말했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디금. 이 자리에셔. 분명히 마랄게. 나 이 쉐계를 떠나 다른 쉐계로 그렇게 마음을 편안히 먹고 걷다보니 뚜렷하던 지평선이 점차 흐릿
갈 거야.”
해지는 것 같았다. 좀 더 가보면 초원이 사라지고 다른 지역이 나타날 것 같았다. 그래서 달려갔다. 조금 달리다 보니 ‘트드드’ 하는 소리가 작게 들리기 시작하더니 점차 커졌다―굳이 문자로 표현하자니 ‘트드드’가
내 선언을 들은 지인들은 저희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난 그 모 습이 못마땅했다.
그나마 비슷한 소리가 나는 것 같다―. 지평선의 흐릿함은 점점 짙어졌 다. 마침내 지평선 끝에 다다랐을 때, 난 입을 벌리고 멍하니 있을 수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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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락사스 vol.7
“니들기리 뭐라 지껄이는 겨야? 내 앞에셔 똑바루! 똑바루 말해. 왜?
아브락사스 vol.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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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으로부터의 수기//////
샤르봉이 그린 그림
것일까? 전에 있던 세계에서 들은 바대로라면 이 세계는 끔찍한 곳이었
내가 미친놈 같냐? 가셔 쥬글 꺼 같지?” 그러자 평소 친하게 지내던 형이 내 뒤통수를 때렸다. “야! 이 병신아! 닥치고 술이나 마셔! 다른 세계 좋아하네. 너 같은 병 신이 그 세계에 갔다간, 발을 들여놓자마자 죽어, 이 병신아. 소문 듣고도 몰라?” “뭐어 ? 쇼뮨 ? 쇼뮨 같은 소리하고 있네 . 그게 말이나 되냐 ? 그 쉐계 에 갔다 욘 눔들이 다 지여낸 겨야. 씨발. 그딴 겨 다 개쇼리라고! 병쉰들. 있네, 씨발. 난 씨뱌. 안 쥬거. 두교 봐. 씨발. 죽냐 안 쥰냐.” “그럼 병신아. 일단 가기나 하고 그딴 소리 해. 술판 깨지 말고. 혀는 꼬여가지고……. 병신 같은 새끼.” 그때 사람들은, 보나마나 내가 이 세계로 간다손 치더라도 다시 돌아 올 것이 빤하다는 식으로 나의 말을 흘려들었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이 세계는 예전의 세계와는 달리 자신의 마음대 로 살아갈 수 있는 세계라 하였다. 물론 끔찍하고 괴기스러우며, 상상도 하지 못 할 만큼의 괴로움을 겪어야한다고들 말했다. 물론 나 이전에도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들은 많았다. 하지만 그치들은 하나같이 넋 이 나간 채, 괴로움을 토로하며 예전의 세계로 돌아오곤 하였다. 물론 돌 아오지 않은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 무도 없었다. 소문에 의하면 죽었다고도 하였고, 미쳐버렸다고도 하였 으며, 다른 존재와의 접촉이 차단된 채로 살고 있다고도 하였다.
아브락사스 vol.7
75
\\\\\\물속으로부터의 수기//////
뭐? 그 세계가 끔찍하댜는 듕, 정신이 나갸게 된댜는 듕, 개쇼리들 햐교
내가 미친놈 같냐? 가셔 쥬글 꺼 같지?” 그러자 평소 친하게 지내던 형이 내 뒤통수를 때렸다. “야! 이 병신아! 닥치고 술이나 마셔! 다른 세계 좋아하네. 너 같은 병 신이 그 세계에 갔다간, 발을 들여놓자마자 죽어, 이 병신아. 소문 듣고도 몰라?” “뭐어 ? 쇼뮨 ? 쇼뮨 같은 소리하고 있네 . 그게 말이나 되냐 ? 그 쉐계 에 갔다 욘 눔들이 다 지여낸 겨야. 씨발. 그딴 겨 다 개쇼리라고! 병쉰들. 있네, 씨발. 난 씨뱌. 안 쥬거. 두교 봐. 씨발. 죽냐 안 쥰냐.” “그럼 병신아. 일단 가기나 하고 그딴 소리 해. 술판 깨지 말고. 혀는 꼬여가지고……. 병신 같은 새끼.” 그때 사람들은, 보나마나 내가 이 세계로 간다손 치더라도 다시 돌아 올 것이 빤하다는 식으로 나의 말을 흘려들었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이 세계는 예전의 세계와는 달리 자신의 마음대 로 살아갈 수 있는 세계라 하였다. 물론 끔찍하고 괴기스러우며, 상상도 하지 못 할 만큼의 괴로움을 겪어야한다고들 말했다. 물론 나 이전에도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들은 많았다. 하지만 그치들은 하나같이 넋 이 나간 채, 괴로움을 토로하며 예전의 세계로 돌아오곤 하였다. 물론 돌 아오지 않은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 무도 없었다. 소문에 의하면 죽었다고도 하였고, 미쳐버렸다고도 하였 으며, 다른 존재와의 접촉이 차단된 채로 살고 있다고도 하였다.
아브락사스 vol.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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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으로부터의 수기//////
뭐? 그 세계가 끔찍하댜는 듕, 정신이 나갸게 된댜는 듕, 개쇼리들 햐교
이쯤까지 생각하자, 예전의 세계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사람들이 나 를 바라볼 눈빛이 무섭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눈빛보다도 눈앞에 놓인 절벽과 계속해서 들려오는 굉음은 더욱 두려웠다.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순간, 아래쪽에서 아주 작게 벨소리가 들려왔다. 띠리리. 띠리리. 띠리리. 띠리리. 아래를 보니 발 사이에 핸드폰이 하나 놓여있었다. 핸드폰을 주워보 니 나온 지 십여 년은 지난 것으로 보이는 폴더형 핸드폰이었다. 폴더를
샤르봉이 그린 그림
열자, 문자열이 두 줄이나 겨우 들어갈 법한 작은 액정과, 숫자와 글자가 지워진 버튼들이 보였다. 액정에는 ‘전화 왔습니다.’ 라는 문장이 떠 있 었다. 전화를 받을지 말지 잠시 고민하다 통화버튼으로 보이는 것을 눌 렀다. 그리고 귀에 핸드폰을 갖다 대었다. “여보세요?” 수화기에선 작게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끊지 마세요!” 난 핸드폰을 움켜쥔 채, 걸어왔던 방향을 향해 내달렸다. 폭포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까지 돌아가 통화를 할 생각이었다. 한참을 달려 폭포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자 다시 핸드폰을 귀에 대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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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락사스 vol.7
이쯤까지 생각하자, 예전의 세계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사람들이 나 를 바라볼 눈빛이 무섭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눈빛보다도 눈앞에 놓인 절벽과 계속해서 들려오는 굉음은 더욱 두려웠다.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순간, 아래쪽에서 아주 작게 벨소리가 들려왔다. 띠리리. 띠리리. 띠리리. 띠리리. 아래를 보니 발 사이에 핸드폰이 하나 놓여있었다. 핸드폰을 주워보 니 나온 지 십여 년은 지난 것으로 보이는 폴더형 핸드폰이었다. 폴더를
샤르봉이 그린 그림
열자, 문자열이 두 줄이나 겨우 들어갈 법한 작은 액정과, 숫자와 글자가 지워진 버튼들이 보였다. 액정에는 ‘전화 왔습니다.’ 라는 문장이 떠 있 었다. 전화를 받을지 말지 잠시 고민하다 통화버튼으로 보이는 것을 눌 렀다. 그리고 귀에 핸드폰을 갖다 대었다. “여보세요?” 수화기에선 작게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끊지 마세요!” 난 핸드폰을 움켜쥔 채, 걸어왔던 방향을 향해 내달렸다. 폭포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까지 돌아가 통화를 할 생각이었다. 한참을 달려 폭포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자 다시 핸드폰을 귀에 대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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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락사스 vol.7
“여보세요?”
었다. 그리고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눈앞에 하나의 문장이 반복해서 등 장했다.
하지만 수화기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핸드폰을 떼어내고 액정을 보니 액정은 새까만 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시 통화버튼 을 눌러보았지만 여전히 핸드폰은 변화가 없었다. 난 다시 망망대해에
어쩌라는 거야. 어쩌라는 거야. 어쩌라는 거야. 어쩌라는 거야. 어쩌 라는 거……
표류한 조각배와 같은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망연자실해 풀밭에 털 썩 주저앉았다. 드넓은 초원과 푸른 하늘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여전히
문장의 반복이 끝나자 하나의 단어가 등장했다.
아름다웠다. 문득 배가 고팠다. 하지만 그곳에서 먹을 것을 찾을 순 없을 것 같았다. 굶어죽을 정도로 배가 고프지 않는 한에야 풀을 뜯어먹진 않
씨발.
그때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이번에는 짧게 한 번만 울렸다.
갑자기 그대로 누워만 있기엔 너무 배가 고파왔다. 그래서 뭐라도 먹
샤르봉이 그린 그림
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여기에 먹을 게 없다지만, 이 세계에서 띠리리.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분명 어딘가에 먹을 것이 있 을 것이었다. 다시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뜸과 동시에 난 깜
폴더를 열어 액정을 보니 문장이 떠 있었다. 이윽고 문장은 천천히 왼쪽으로 흘러가며 숨겨진 제 몸뚱어리를 드러내보였다.
짝 놀라 옆으로 한 바퀴 굴렀다. 내 코앞에서 어떤 여자가 나를 빤히 내 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세계로 오신 걸 환영합니다만, 당신은 잘못 온 걸지도 모릅니다.
어깨에 닿을 정도의 길이의 머리카락을 뒤로 묶은 헤어스타일. 작고
생각보다 고통스러우실 겁니다. 우선 저희가 있는 곳으로 오시기 위해
동그란, 눈동자가 커다래 흰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 눈. 부드러운 곡선의
선 몇 가지 괴로움을 참고 견디셔야 합니다. 저희가 있는 곳으로 오시게
콧날. 분홍빛을 띠는 얇은 입술. 갸름한 턱선. 유난히 흰 얇은 목. 비둘기
되면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을 것이란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이쪽에서
색 실크 원피스. 핏줄이 보이는 창백한 종아리와 동글동글 귀여운 맨발.
도 결국 괴로움을 참고 견디는 일을 하게 될 겁니다. 대신 함께라는 권력 이 당신에게 주어질 뿐입니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참고로 이 핸드폰 은 버리시지 않는 편이 좋으실 겁니다.
내가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그녀는 내 쪽으로 천천히 기어왔 다. 난 그 자리에 얼어붙어 움직일 수 없었다. 어느새 바로 내 옆까지 다 가온 그녀는 자신의 얇은 입술을 내 입술에 포갰다. 당황스러웠지만 이
문장을 다 읽고 나서 핸드폰 폴더를 닫은 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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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락사스 vol.7
상하게도 자연스럽다고 느꼈다. 처음 본 여자와 키스를 한 건 처음이었
아브락사스 vol.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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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으로부터의 수기//////
을 것이었기에…….
“여보세요?”
었다. 그리고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눈앞에 하나의 문장이 반복해서 등 장했다.
하지만 수화기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핸드폰을 떼어내고 액정을 보니 액정은 새까만 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시 통화버튼 을 눌러보았지만 여전히 핸드폰은 변화가 없었다. 난 다시 망망대해에
어쩌라는 거야. 어쩌라는 거야. 어쩌라는 거야. 어쩌라는 거야. 어쩌 라는 거……
표류한 조각배와 같은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망연자실해 풀밭에 털 썩 주저앉았다. 드넓은 초원과 푸른 하늘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여전히
문장의 반복이 끝나자 하나의 단어가 등장했다.
아름다웠다. 문득 배가 고팠다. 하지만 그곳에서 먹을 것을 찾을 순 없을 것 같았다. 굶어죽을 정도로 배가 고프지 않는 한에야 풀을 뜯어먹진 않
씨발.
그때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이번에는 짧게 한 번만 울렸다.
갑자기 그대로 누워만 있기엔 너무 배가 고파왔다. 그래서 뭐라도 먹
샤르봉이 그린 그림
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여기에 먹을 게 없다지만, 이 세계에서 띠리리.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분명 어딘가에 먹을 것이 있 을 것이었다. 다시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뜸과 동시에 난 깜
폴더를 열어 액정을 보니 문장이 떠 있었다. 이윽고 문장은 천천히 왼쪽으로 흘러가며 숨겨진 제 몸뚱어리를 드러내보였다.
짝 놀라 옆으로 한 바퀴 굴렀다. 내 코앞에서 어떤 여자가 나를 빤히 내 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세계로 오신 걸 환영합니다만, 당신은 잘못 온 걸지도 모릅니다.
어깨에 닿을 정도의 길이의 머리카락을 뒤로 묶은 헤어스타일. 작고
생각보다 고통스러우실 겁니다. 우선 저희가 있는 곳으로 오시기 위해
동그란, 눈동자가 커다래 흰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 눈. 부드러운 곡선의
선 몇 가지 괴로움을 참고 견디셔야 합니다. 저희가 있는 곳으로 오시게
콧날. 분홍빛을 띠는 얇은 입술. 갸름한 턱선. 유난히 흰 얇은 목. 비둘기
되면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을 것이란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이쪽에서
색 실크 원피스. 핏줄이 보이는 창백한 종아리와 동글동글 귀여운 맨발.
도 결국 괴로움을 참고 견디는 일을 하게 될 겁니다. 대신 함께라는 권력 이 당신에게 주어질 뿐입니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참고로 이 핸드폰 은 버리시지 않는 편이 좋으실 겁니다.
내가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그녀는 내 쪽으로 천천히 기어왔 다. 난 그 자리에 얼어붙어 움직일 수 없었다. 어느새 바로 내 옆까지 다 가온 그녀는 자신의 얇은 입술을 내 입술에 포갰다. 당황스러웠지만 이
문장을 다 읽고 나서 핸드폰 폴더를 닫은 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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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락사스 vol.7
상하게도 자연스럽다고 느꼈다. 처음 본 여자와 키스를 한 건 처음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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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것이었기에…….
다. 묘한 기분이었다. 이어서 입술을 떼어내고 나를 빤히 쳐다보며 내 얼
그날 이후로, 난 그녀와 함께 움직였다. 움직인다고 해봐야 초원이었
굴을 만졌다. 볼에서 입술로. 입술에서 코를 지나 이마까지……. 그 만짐
고, 무슨 일을 했냐고 해봐야 그저 걷고 또 걸을 뿐. 이따금 사랑을 나누
은, 화창한 봄날, 따스한 햇살 아래에서 바다를 향해 유유히 흘러가는 강
는 일도 있었지만, 일이 끝나면 다시 걸었다.
의 움직임과 같았다. 그 물결은 내 바지를 벗기는 데까지 흘렀다. 그녀의 움직임에 녹아있던 난 번뜩 정신을 차리며 바지춤을 붙잡았다.
그녀와 함께 있다 보니 이 세계는 이전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라 는 걸 인식할 수 있었다. 우선 그녀는 잠을 자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 역
“잠깐만요! 왜 이러세요?”
시도 잠을 자지 않았다. 아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 세계는 시간이 아 무리 흘러도 해가 지지 않았고, 그렇기에 밤은 오지 못했다. 물론 몸은 피곤하고, 눈은 시뻘겋게 충혈 된 채로―내가 보지 못해 알 순 없지만, 느
였다. 난 여전히 바지춤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그녀가 내 바지를 벗기고
낌상으론 그랬다― 하품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뇌에 산소 공급이 저하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행동이 내겐 당연히 일어
돼 정신이 자꾸 몽롱해졌다. 그럼에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건 밤이 오
나야 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반면, 내가 바지춤을 잡고 여자의 행동을 저
지 않는다는 것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전의 세계에
지하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러운 일. 마치 레스토랑에서 주문한 요리가
서 같은 상태에 빠졌다면, 아마도 낮이든 밤이든 구분치 않고 잠에 빠져
나오자, 요리는 안 먹고 접시를 먹고 있는 것과 같은 일을 하는 듯 했다.
들었을 것이었으므로……. 그러나 잠은 오지 않았고, 드러눕지도 않았
그럼에도 그녀가 하는 행동은 내 생각에 있어서 상식을 위배하는 일이
다. 이상하게도 발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반쯤 정신이 나간 나와는 달리
었고, 그렇기에 억지로 그 흐름을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는 잠을 자지 못하는 것에 이미 만성이 되었는지 아무렇지도 않은
그 흐름이 거꾸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것 같았다. 아니, 아예 수면욕구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한참동안 실랑이를 벌였지만 끝내 그녀는 내 손을 바지에서 떼어냈
또, 그녀는 어떤 것도 먹거나 마시지 않았다. 내 배는 어느새 등에 붙
다. 다시 바지를 입으려했지만, 그때쯤 되자 어떻게 되든 별 상관없겠다
어버렸고, 목은 말라 비틀어져 숨을 쉴 때마다 종이 구길 때 나는 소리가
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녀가 내 바지를
났다. 바스락. 바스락. 그녀는 수면욕구가 사라진 것처럼 식욕 역시 사라
벗기고 무슨 일을 하려는지도 모르거니와, 굳이 그녀의 요구를 피할 필
져버린 것 같았다. 수면욕구든 식욕이든 그래도 그것들은 어느 정도 이
요는 없겠다 싶었다.
해할 수 있었지만 물을 마실 수 없다는 것. 그건 정말 참을 수 없었다. 알
그녀는 이따금 소리를 냈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어쩌면 말을 못하는
코올이 함유되지 않은 물이라도 좋으니 제발 한 모금만 마시고 싶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숨소리에 동요하는 것을 봐선 소
욕구가 발바닥에서부터 차올랐다. 하지만 먹을 것이든 물이든 아무 것
리를 들을 순 있는 것 같았다. 후천적 벙어리 같았다.
도 구할 수가 없었다. 풀이든 흙이든 먹으면 될 게 아니냐고 할 지 모른 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먹을 수가 없었다. 참다못한 내가 풀을 뜯어 입
80
아브락사스 vol.7
아브락사스 vol.7
81
\\\\\\물속으로부터의 수기//////
샤르봉이 그린 그림
그녀는 내 말을 듣더니 미소를 짓고, 이내 다시 내 바지를 벗기려하
다. 묘한 기분이었다. 이어서 입술을 떼어내고 나를 빤히 쳐다보며 내 얼
그날 이후로, 난 그녀와 함께 움직였다. 움직인다고 해봐야 초원이었
굴을 만졌다. 볼에서 입술로. 입술에서 코를 지나 이마까지……. 그 만짐
고, 무슨 일을 했냐고 해봐야 그저 걷고 또 걸을 뿐. 이따금 사랑을 나누
은, 화창한 봄날, 따스한 햇살 아래에서 바다를 향해 유유히 흘러가는 강
는 일도 있었지만, 일이 끝나면 다시 걸었다.
의 움직임과 같았다. 그 물결은 내 바지를 벗기는 데까지 흘렀다. 그녀의 움직임에 녹아있던 난 번뜩 정신을 차리며 바지춤을 붙잡았다.
그녀와 함께 있다 보니 이 세계는 이전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라 는 걸 인식할 수 있었다. 우선 그녀는 잠을 자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 역
“잠깐만요! 왜 이러세요?”
시도 잠을 자지 않았다. 아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 세계는 시간이 아 무리 흘러도 해가 지지 않았고, 그렇기에 밤은 오지 못했다. 물론 몸은 피곤하고, 눈은 시뻘겋게 충혈 된 채로―내가 보지 못해 알 순 없지만, 느
였다. 난 여전히 바지춤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그녀가 내 바지를 벗기고
낌상으론 그랬다― 하품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뇌에 산소 공급이 저하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행동이 내겐 당연히 일어
돼 정신이 자꾸 몽롱해졌다. 그럼에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건 밤이 오
나야 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반면, 내가 바지춤을 잡고 여자의 행동을 저
지 않는다는 것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전의 세계에
지하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러운 일. 마치 레스토랑에서 주문한 요리가
서 같은 상태에 빠졌다면, 아마도 낮이든 밤이든 구분치 않고 잠에 빠져
나오자, 요리는 안 먹고 접시를 먹고 있는 것과 같은 일을 하는 듯 했다.
들었을 것이었으므로……. 그러나 잠은 오지 않았고, 드러눕지도 않았
그럼에도 그녀가 하는 행동은 내 생각에 있어서 상식을 위배하는 일이
다. 이상하게도 발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반쯤 정신이 나간 나와는 달리
었고, 그렇기에 억지로 그 흐름을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는 잠을 자지 못하는 것에 이미 만성이 되었는지 아무렇지도 않은
그 흐름이 거꾸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것 같았다. 아니, 아예 수면욕구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한참동안 실랑이를 벌였지만 끝내 그녀는 내 손을 바지에서 떼어냈
또, 그녀는 어떤 것도 먹거나 마시지 않았다. 내 배는 어느새 등에 붙
다. 다시 바지를 입으려했지만, 그때쯤 되자 어떻게 되든 별 상관없겠다
어버렸고, 목은 말라 비틀어져 숨을 쉴 때마다 종이 구길 때 나는 소리가
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녀가 내 바지를
났다. 바스락. 바스락. 그녀는 수면욕구가 사라진 것처럼 식욕 역시 사라
벗기고 무슨 일을 하려는지도 모르거니와, 굳이 그녀의 요구를 피할 필
져버린 것 같았다. 수면욕구든 식욕이든 그래도 그것들은 어느 정도 이
요는 없겠다 싶었다.
해할 수 있었지만 물을 마실 수 없다는 것. 그건 정말 참을 수 없었다. 알
그녀는 이따금 소리를 냈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어쩌면 말을 못하는
코올이 함유되지 않은 물이라도 좋으니 제발 한 모금만 마시고 싶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숨소리에 동요하는 것을 봐선 소
욕구가 발바닥에서부터 차올랐다. 하지만 먹을 것이든 물이든 아무 것
리를 들을 순 있는 것 같았다. 후천적 벙어리 같았다.
도 구할 수가 없었다. 풀이든 흙이든 먹으면 될 게 아니냐고 할 지 모른 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먹을 수가 없었다. 참다못한 내가 풀을 뜯어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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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락사스 vol.7
아브락사스 vol.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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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으로부터의 수기//////
샤르봉이 그린 그림
그녀는 내 말을 듣더니 미소를 짓고, 이내 다시 내 바지를 벗기려하
안에 넣었으나 그것들은 삼켜지지 않았다.
이었다. 그나마 성적 욕구만큼은 해소할 수 있었던 그때와는 달리 이젠 수면욕, 식욕에 성적 욕구까지도 나를 괴롭혔다. 난 이제 자고 싶고, 먹고
이 세계는 내 마음대로 방향을 설정해 걸을 순 있지만 가장 기본적 인 욕구들은 아무 것도 충족시킬 수 없었다. 이것이 나 이전에 이 세계로
싶고, 마시고 싶고, 섹스까지 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 것도 할 수 없었 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걷는 것. 그것 하나뿐이었다.
넘어왔던 사람들이 이야기했던 고통이었을 것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쯤 되면 죽을 때도 되지 않았냐고 소리 쳐보기도 했다―물론 내 정신은 입에게 그렇게 소리쳐보라고 지시했지
고 할 수 있을 것 같다―정확한 기간은 이 세계에서 알 수는 없지만 대략
만 입을 통해 나온 소리라고는 숨 쉴 때와 같은 소리뿐이었다. 바스락―.
적으로나마 내게 느껴지는 시간의 거리가 그쯤이다―. 그녀는 처음 그
그러자 문득 폭포가 떠올랐다. 그곳에서 떨어진다면, 물은 실컷 마시고
때와 마찬가지로 아주 자연스럽게 내 몸을 삼켰다. 난 눈을 감은 채, 그녀
죽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 땐 더 이상 폭포가 어느 방
가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향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샤르봉이 그린 그림
일을 마치고 눈을 뜨자 , 그녀는 바닥에 누워있는 나를 놔두고 유유
초원 위에 드러누워 싱그러움을 온몸으로 느꼈다. 될 대로 되라는 심
히 저 멀리에서 어느 방향으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 뒤 한 번 돌아보지
정이었지만 될 대로 될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 세계에선 아무도
않았다.
나를 몰아세우지 않았다. 위협이 될 만한 일을 하지도 않았다. 대신 모두 내가 알아서 해야만 했다.
이 세계에 들어와서 유일하게 만났던 사람인 그녀와 헤어지게 되자
주머니에서 뭔가 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주머니 쪽을 보니 핸드폰이
난 패닉상태에 빠졌다. 어디로 가야할 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고, 아직도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난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 핸드폰을 들어 폴더를
난 자고 싶었고 , 먹고 싶었고 , 무엇보다도 물이 마시고 싶었다 . 이전의
열었다. 그러자 희미하게 문자 하나가 액정에 떠올랐다. 미간을 찌푸리
세계로 돌아가자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그 생각은 버렸다. 왠지 그건
며 액정을 눈 가까이로 가져와 유심히 살펴보니 그것은 화살표였다. 자
아니라고 생각했다.
리에서 일어나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역시 아무 것도 없었
그래서 그녀가 간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리 빠른 걸 음으로 걷는다 해도 그녀를 따라잡을 순 없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다. 실망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기에 그 방향으 로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걷다 보면 언젠가는 만나게 될 날도 있을 것이고, 또 그녀가 어떤 목적지도 없이 지금껏 걷기만 한 건 아닐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기에, 그 목적지를 향해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방향으로 이 년을 걸었다―정확한 기간은 이 세계에서 알 수는 없 지만 대략적으로나마 내게 느껴지는 시간의 거리가 그쯤이다―.
하지만 혼자 걷는다는 건 그녀와 함께 걸을 때보다도 훨씬 힘겨운 일
82
아브락사스 vol.7
아브락사스 vol.7
83
\\\\\\물속으로부터의 수기//////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건, 시간으로 따지자면 일주일 정도 전이라
안에 넣었으나 그것들은 삼켜지지 않았다.
이었다. 그나마 성적 욕구만큼은 해소할 수 있었던 그때와는 달리 이젠 수면욕, 식욕에 성적 욕구까지도 나를 괴롭혔다. 난 이제 자고 싶고, 먹고
이 세계는 내 마음대로 방향을 설정해 걸을 순 있지만 가장 기본적 인 욕구들은 아무 것도 충족시킬 수 없었다. 이것이 나 이전에 이 세계로
싶고, 마시고 싶고, 섹스까지 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 것도 할 수 없었 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걷는 것. 그것 하나뿐이었다.
넘어왔던 사람들이 이야기했던 고통이었을 것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쯤 되면 죽을 때도 되지 않았냐고 소리 쳐보기도 했다―물론 내 정신은 입에게 그렇게 소리쳐보라고 지시했지
고 할 수 있을 것 같다―정확한 기간은 이 세계에서 알 수는 없지만 대략
만 입을 통해 나온 소리라고는 숨 쉴 때와 같은 소리뿐이었다. 바스락―.
적으로나마 내게 느껴지는 시간의 거리가 그쯤이다―. 그녀는 처음 그
그러자 문득 폭포가 떠올랐다. 그곳에서 떨어진다면, 물은 실컷 마시고
때와 마찬가지로 아주 자연스럽게 내 몸을 삼켰다. 난 눈을 감은 채, 그녀
죽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 땐 더 이상 폭포가 어느 방
가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향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샤르봉이 그린 그림
일을 마치고 눈을 뜨자 , 그녀는 바닥에 누워있는 나를 놔두고 유유
초원 위에 드러누워 싱그러움을 온몸으로 느꼈다. 될 대로 되라는 심
히 저 멀리에서 어느 방향으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 뒤 한 번 돌아보지
정이었지만 될 대로 될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 세계에선 아무도
않았다.
나를 몰아세우지 않았다. 위협이 될 만한 일을 하지도 않았다. 대신 모두 내가 알아서 해야만 했다.
이 세계에 들어와서 유일하게 만났던 사람인 그녀와 헤어지게 되자
주머니에서 뭔가 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주머니 쪽을 보니 핸드폰이
난 패닉상태에 빠졌다. 어디로 가야할 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고, 아직도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난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 핸드폰을 들어 폴더를
난 자고 싶었고 , 먹고 싶었고 , 무엇보다도 물이 마시고 싶었다 . 이전의
열었다. 그러자 희미하게 문자 하나가 액정에 떠올랐다. 미간을 찌푸리
세계로 돌아가자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그 생각은 버렸다. 왠지 그건
며 액정을 눈 가까이로 가져와 유심히 살펴보니 그것은 화살표였다. 자
아니라고 생각했다.
리에서 일어나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역시 아무 것도 없었
그래서 그녀가 간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리 빠른 걸 음으로 걷는다 해도 그녀를 따라잡을 순 없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다. 실망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기에 그 방향으 로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걷다 보면 언젠가는 만나게 될 날도 있을 것이고, 또 그녀가 어떤 목적지도 없이 지금껏 걷기만 한 건 아닐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기에, 그 목적지를 향해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방향으로 이 년을 걸었다―정확한 기간은 이 세계에서 알 수는 없 지만 대략적으로나마 내게 느껴지는 시간의 거리가 그쯤이다―.
하지만 혼자 걷는다는 건 그녀와 함께 걸을 때보다도 훨씬 힘겨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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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락사스 vol.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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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으로부터의 수기//////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건, 시간으로 따지자면 일주일 정도 전이라
절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폭포 소리는 내 귀를 지배했다.
★
하지만 막상 절벽 앞에 서니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죽고 싶지 않았 다. 뒤를 돌았다.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졌다. 다시 초원으로 돌아가고 싶
이 세계에 들어온 지 약 2년 반―정확한 기간은 이 세계에서 알 수는
지 않았다. 절벽도, 초원도 두려웠다. 그래도 겪어본 두려움보다 겪지 않
없지만 대략적으로나마 내게 느껴지는 시간의 거리가 그쯤이다― . 지금
은 두려움이 덜 무섭게 느껴졌다.
도 난 물속을 걷고 있다. 걷는 것 자체로 매우 고통스럽다. 움직임은 예 전만 못하고, 앞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강물이 똥물이다― . 어쨌든. 당
그래서 폭포 아래로 뛰어내렸다.
신이 눈치 챘는지 못 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세계는 소설이다―응? 이 건 또 뭔 개소리야? 라고 하는 사람들은 바보다― . 소설 속에 존재하는 세계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 세계자체가 소설이란 이야기다. 다시 한 번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수면을 부수며 물속으로 들어갔다. 점점 깊숙
말하자면, 이 세계의 정체가 소설이란 말이다. 이 글이 소설이고, 이 세
하게 강의 바닥을 향해 내려갔다. 그리고 바닥에 닿은 순간, 내 몸은 꼿
계가 소설이고, 난 소설 속에서 살고 있고, 소설을 쓰고 있다.
샤르봉이 그린 그림
꼿하게 섰다. 내 발은 자연스레 다시 움직였다. 마치 걷지 않는 한 나라 는 존재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는 듯이……. 그리고 예상과는 달리 내 목숨은 유지됐다.
내게 문자를 보낸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그리고 그녀를 다시 한 번 만나고 싶다. 아니다. 그녀와 함께 사랑을 나누고 싶다. 배가 고프다.
물속에서 걷는 것은 초원에서보다 훨씬 느렸다. 움직임에 자유로움
혹시 이 세계로 넘어오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방법은 알려줄 수 있
이 줄어들어있었지만 이전의 세계와 비교해보자면 훨씬 자유로웠다. 타
다. 우선 하얀 바탕을 응시하라. 쓰기 시작하라. 펜으로 쓰든 키보드를 두
인을 의식하며 내 마음을 속이는 일은 없었기에…….
드리든 상관없다. 그럼 당신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로 들어올 수 있다.
물속에선 숨을 쉬는 대신 물을 계속 마실 수밖에 없었다. 갈증은 강
연락 기다리겠다.
으로 들어온 이후 사라졌다. 하지만 수면욕과 식욕, 성욕은 여전히 사라 지지 않고 나를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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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락사스 vol.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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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으로부터의 수기//////
폭포 아래는 예상했던 대로 거대한 강이었다. 물에 빠진다 해도 죽지
절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폭포 소리는 내 귀를 지배했다.
★
하지만 막상 절벽 앞에 서니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죽고 싶지 않았 다. 뒤를 돌았다.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졌다. 다시 초원으로 돌아가고 싶
이 세계에 들어온 지 약 2년 반―정확한 기간은 이 세계에서 알 수는
지 않았다. 절벽도, 초원도 두려웠다. 그래도 겪어본 두려움보다 겪지 않
없지만 대략적으로나마 내게 느껴지는 시간의 거리가 그쯤이다― . 지금
은 두려움이 덜 무섭게 느껴졌다.
도 난 물속을 걷고 있다. 걷는 것 자체로 매우 고통스럽다. 움직임은 예 전만 못하고, 앞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강물이 똥물이다― . 어쨌든. 당
그래서 폭포 아래로 뛰어내렸다.
신이 눈치 챘는지 못 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세계는 소설이다―응? 이 건 또 뭔 개소리야? 라고 하는 사람들은 바보다― . 소설 속에 존재하는 세계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 세계자체가 소설이란 이야기다. 다시 한 번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수면을 부수며 물속으로 들어갔다. 점점 깊숙
말하자면, 이 세계의 정체가 소설이란 말이다. 이 글이 소설이고, 이 세
하게 강의 바닥을 향해 내려갔다. 그리고 바닥에 닿은 순간, 내 몸은 꼿
계가 소설이고, 난 소설 속에서 살고 있고, 소설을 쓰고 있다.
샤르봉이 그린 그림
꼿하게 섰다. 내 발은 자연스레 다시 움직였다. 마치 걷지 않는 한 나라 는 존재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는 듯이……. 그리고 예상과는 달리 내 목숨은 유지됐다.
내게 문자를 보낸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그리고 그녀를 다시 한 번 만나고 싶다. 아니다. 그녀와 함께 사랑을 나누고 싶다. 배가 고프다.
물속에서 걷는 것은 초원에서보다 훨씬 느렸다. 움직임에 자유로움
혹시 이 세계로 넘어오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방법은 알려줄 수 있
이 줄어들어있었지만 이전의 세계와 비교해보자면 훨씬 자유로웠다. 타
다. 우선 하얀 바탕을 응시하라. 쓰기 시작하라. 펜으로 쓰든 키보드를 두
인을 의식하며 내 마음을 속이는 일은 없었기에…….
드리든 상관없다. 그럼 당신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로 들어올 수 있다.
물속에선 숨을 쉬는 대신 물을 계속 마실 수밖에 없었다. 갈증은 강
연락 기다리겠다.
으로 들어온 이후 사라졌다. 하지만 수면욕과 식욕, 성욕은 여전히 사라 지지 않고 나를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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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락사스 vol.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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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으로부터의 수기//////
폭포 아래는 예상했던 대로 거대한 강이었다. 물에 빠진다 해도 죽지
못 살겠다, 홍경래
이동언
못 살겠다, 홍경래
이동언
음을 알리는 침묵의 신호탄이었다. 곧 만개할 여느 꽃들과는 상관없이 보도블록 위로 수북이 쌓인 하얀 벚꽃을 덤덤히 밟고 또 밟으며 아무도 모르게 스스로 생을 마감할 결심을 다지는 한 사내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 석 자, 홍, 경, 례였다. 잡다한 전단이 겹겹이 들러붙은 전봇대 위로 날아오르는 비둘기의 처진 뱃살을 흘끔 올려다보면서 그는 생각했다 . 내 이 한 목숨 바람결에 떠나보내리, 저 한량한 벚나무 가지에 맺힌 꽃이 다 지기 전까지. 교문을 박차고 나온 초등학생들의 실내화 가방이 그의 손목언저리 를 몇 차례 치고 지나갔다. 총천연색 가방을 등에 맨 아이들은 온몸을 들 썩이며 줄지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 조그만 손에는 과자나 아이스크림 따위가 쥐어져있다. 오가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한참 아래 있는 아이들 의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입가 혹은 미간에 웃음을 머금는다. 학교 앞에 서 삐약삐약 바람이 새는 피리처럼 울어대는 몇 백 원짜리 병아리와 메 추라기들마저 그의 눈에는 즐거워 보이기만 했다. 그것들이 상자 속에 갇힌 채 입을 쩍쩍 벌려가며 고개를 쳐들고 우는소리가 웃음소리로 들
아브락사스 vol.7
89
\\\\\\\못 살겠다, 홍경래///////
오가는 길목마다 눈에 들어오는 반쯤 벌어진 꽃봉오리들은 겨울이 끝났
음을 알리는 침묵의 신호탄이었다. 곧 만개할 여느 꽃들과는 상관없이 보도블록 위로 수북이 쌓인 하얀 벚꽃을 덤덤히 밟고 또 밟으며 아무도 모르게 스스로 생을 마감할 결심을 다지는 한 사내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 석 자, 홍, 경, 례였다. 잡다한 전단이 겹겹이 들러붙은 전봇대 위로 날아오르는 비둘기의 처진 뱃살을 흘끔 올려다보면서 그는 생각했다 . 내 이 한 목숨 바람결에 떠나보내리, 저 한량한 벚나무 가지에 맺힌 꽃이 다 지기 전까지. 교문을 박차고 나온 초등학생들의 실내화 가방이 그의 손목언저리 를 몇 차례 치고 지나갔다. 총천연색 가방을 등에 맨 아이들은 온몸을 들 썩이며 줄지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 조그만 손에는 과자나 아이스크림 따위가 쥐어져있다. 오가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한참 아래 있는 아이들 의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입가 혹은 미간에 웃음을 머금는다. 학교 앞에 서 삐약삐약 바람이 새는 피리처럼 울어대는 몇 백 원짜리 병아리와 메 추라기들마저 그의 눈에는 즐거워 보이기만 했다. 그것들이 상자 속에 갇힌 채 입을 쩍쩍 벌려가며 고개를 쳐들고 우는소리가 웃음소리로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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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살겠다, 홍경래///////
오가는 길목마다 눈에 들어오는 반쯤 벌어진 꽃봉오리들은 겨울이 끝났
릴 지경이었다. 얍실한 부리 끝이 옆에서 동전을 헤아리는 장사치 입 꼬 리마냥 살짝 올라가 있는 듯도 싶었다. 잠깐 걸음을 멈춘 동안엔 얼결에 모자를 뒤집어 쓴 아이가 자랑스러운 얼굴을 하고 옆의 아이에게 들려 주는 지난밤 꾼 제 꿈 이야기를 엿듣기도 했다. 모자 쓴 아이는 손짓까지 동원해가며 이야기하는데 열심이라 아예 거꾸로 걷다시피 하고 있었다. 꿈에서 솜사탕을 색깔별로 다 먹어보았다는 아이의 말에 몇몇이 부러운 듯 한 눈길을 보냈다. 우연히 그 자리를 지나던 행인들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귀여운 녀석들’ 허공에 보이지 않는 자막이 새겨진다. 그런 와중에도 알 수 없는 고독감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로 부풀어만 갔다. 더 이상 촐랑거리며 뜀박질을 하거나 손에 들린 가방 따 위를 붕붕 돌리며 유치한 걸음걸이로 걸을 수는 없다는 나름의 사회정
샤르봉이 그린 그림
신은 그를 더욱 씁쓸하게 만들었다. 어깨에 걸친 가방을 고쳐 매고 입을 꾹 다물자 단단히 맞물려진 이 에서 뻑뻑한 소리가 났다. 그는 굳은 턱을 수그리고 또 다시 흩어진 꽃잎 을 밟으며 걷기 시작했다. 이렇다 할 인과관계 없이 비롯된 슬픔에 대하 여 의사들이나 학자들은 인류역사의 흐름과 쭉 함께해온 그들만의 방식 을 고수하며 아주 간단히 답을 내려줄 것이다. 우울증입니다, 신경과민 입니다, 마음먹기에 달렸지요. 영화에서든 드라마에서든 병원에서든 그 들은 한결같은 표정으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말해왔다. 그런 처방은 꼬리를 내린 개에게 우울증이랍시고 안정제를 건네는 일과도 별 다를 것이 없다. 그쯤이야 굳이 의사나 학자라는 지위를 꿰차지 않더라 도 내릴 수 있는 진단이다. 해명할 수 없는 괴상한 취미나 비밀을 간직하 고서도 멀쩡한 체하며 실제로 멀쩡해 보이는 인간들은 널려있다. 그들 은 결코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기위해 병원에 들락거리지 않는다. 어쨌든 그는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목숨을 끊고 난 뒤에 그치들이 죽은 몸뚱이를 둘러싸고 어떤 의견을 내비치든 그건 알 바가 아니다.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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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락사스 vol.7
릴 지경이었다. 얍실한 부리 끝이 옆에서 동전을 헤아리는 장사치 입 꼬 리마냥 살짝 올라가 있는 듯도 싶었다. 잠깐 걸음을 멈춘 동안엔 얼결에 모자를 뒤집어 쓴 아이가 자랑스러운 얼굴을 하고 옆의 아이에게 들려 주는 지난밤 꾼 제 꿈 이야기를 엿듣기도 했다. 모자 쓴 아이는 손짓까지 동원해가며 이야기하는데 열심이라 아예 거꾸로 걷다시피 하고 있었다. 꿈에서 솜사탕을 색깔별로 다 먹어보았다는 아이의 말에 몇몇이 부러운 듯 한 눈길을 보냈다. 우연히 그 자리를 지나던 행인들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귀여운 녀석들’ 허공에 보이지 않는 자막이 새겨진다. 그런 와중에도 알 수 없는 고독감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로 부풀어만 갔다. 더 이상 촐랑거리며 뜀박질을 하거나 손에 들린 가방 따 위를 붕붕 돌리며 유치한 걸음걸이로 걸을 수는 없다는 나름의 사회정
샤르봉이 그린 그림
신은 그를 더욱 씁쓸하게 만들었다. 어깨에 걸친 가방을 고쳐 매고 입을 꾹 다물자 단단히 맞물려진 이 에서 뻑뻑한 소리가 났다. 그는 굳은 턱을 수그리고 또 다시 흩어진 꽃잎 을 밟으며 걷기 시작했다. 이렇다 할 인과관계 없이 비롯된 슬픔에 대하 여 의사들이나 학자들은 인류역사의 흐름과 쭉 함께해온 그들만의 방식 을 고수하며 아주 간단히 답을 내려줄 것이다. 우울증입니다, 신경과민 입니다, 마음먹기에 달렸지요. 영화에서든 드라마에서든 병원에서든 그 들은 한결같은 표정으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말해왔다. 그런 처방은 꼬리를 내린 개에게 우울증이랍시고 안정제를 건네는 일과도 별 다를 것이 없다. 그쯤이야 굳이 의사나 학자라는 지위를 꿰차지 않더라 도 내릴 수 있는 진단이다. 해명할 수 없는 괴상한 취미나 비밀을 간직하 고서도 멀쩡한 체하며 실제로 멀쩡해 보이는 인간들은 널려있다. 그들 은 결코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기위해 병원에 들락거리지 않는다. 어쨌든 그는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목숨을 끊고 난 뒤에 그치들이 죽은 몸뚱이를 둘러싸고 어떤 의견을 내비치든 그건 알 바가 아니다.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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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가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꾸준히 죽음에 대한 갈망을 품어온 것이 아
삼키며 시궁창 내나 풍기면서 죽고 싶지는 않았다. 본의 아니게 점점 구
니라 갑작스레 설명하기 어려운 강한 충동에 사로잡힌지라 몇 가지 생
체적으로 진행되는 상상의 나래 속에 더 깊이 빠져들지 않기 위해 물에
각해볼 문제도 있었다. 시간, 장소, 그리고 방법, 기타 등등. 마음은 점점
불어 쪼글쪼글해진 손가락을 애써 무시하고 비누거품을 씻어냈다. 피부
급해졌다.
를 타고 흘러내리는 더운물이 발밑에 얕게 고여 들었다. 막 거품을 헹궈낸 살결에 코를 묻고 킁킁 숨을 들이마시며 묵직한 사
고 천천히 옷을 갈아입었다. 몇 회 기념 어쩌고 하는 글씨가 프린트 된 티
우나실 문을 열자 후끈한 열기가 전신을 덮쳐왔다. 순식간에 붉어지는
셔츠는 몇 년 전인가 동네 조기축구회 가입 기념으로 받은 것이었다. 주
얼굴에 두 손을 얹고 조심스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고개를 뒤로 젖혔
말이면 근처에서 서로 안면이 없는 회원들이 같은 모양의 셔츠를 입고
다. 땀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오래지 않아 온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
서성거리는 모습도 가끔 눈에 띄었다 .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후줄근한
다.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땀이 눈가로 흘러들어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
차림을 하고 지폐 몇 장과 열쇠만 챙겨 집을 나섰다. 입을 꾹 다문 채 경
다. 눈알이 시큰거려 부산스럽게 눈을 껌벅였다. 급히 눈가를 부빈 뒤 빠
직된 걸음으로 조금 멀리 떨어져있는 목욕탕에 다다른 그는 창구에 적
진 속눈썹 몇 올이 들러붙은 손등을 털어내고는 아예 드러누워 버렸다.
힌 액수만큼의 목욕비를 지불하고 휑한 탈의실 복판에 한참 서있었다.
한 장 챙겨온 수건을 머리맡에 깔아두고 전라로 주홍빛 조명 아래 놓인
순간적으로 축구팀 인원이 어떻게 되더라 하는 문제가 의문점으로 떠올
그는 부검을 앞둔 시체처럼 인공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자로 잰 듯
랐고 그에 대한 답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아 옷을 홀딱 벗고 탕 안에 들어
반듯하게 일자로 몸을 누인 것은 단지 의자가 비좁았던 탓이지만 말이
가 앉았다. 발끝부터 서서히 풀어지는 몸을 축 늘어뜨린 채 물기 맺힌 천
다. 땀구멍마다 스며 나온 미끈한 땀에 온몸이 번들거렸다. 의자에 닿은
장을 바라보며 다시금 자살을 결심하는 그였다. 묵은 때는 더운 물 속에
등짝이며 엉덩이 밑이 축축하게 젖어들자 불쾌감에 몸을 발딱 일으켜
서 벗겨내기 좋게 불고 있었다.
앉았다.
자살의 명소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한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강변을 따라 걷는 시민들의 인명 구조정신은 생각보다 투철하며 모터보
기진맥진해져서 미지근한 물로 땀을 씻어내기 무섭게 탈의실로 뛰
트를 탄 구조요원들은 오늘도 구명조끼를 가득 싣고 한강을 누빈다. 뉴
쳐나온 그는 느릿느릿 옷을 챙겨 입었다. 그때까지도 다른 손님은 눈에
스의 일면을 장식할 자살소동이 벌어지거나 용감한 시민이 희생정신을
띄지 않았다. 평일 오후의 애매한 시간이라는 것도 이유랄 수 있겠지만
발휘할 기회는 좀처럼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애초에 강이나 저수지 등
찜질방이란 게 생긴 뒤로 목욕탕을 찾는 사람은 확연히 줄어들었다. 딱
지에서 투신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물에 불어터진 살덩이라니 떠올
한 번 가 본 찜질방은 시끌벅적하고 불편한 곳이었다. 단체로 몰려온 사
려 보기도 전에 구역질이 올라온다. 사진기자로 하여금 셔터를 누르고
람이 너무 많아 불가마의 열기보다는 그들이 뿜어내는 기운에 숨이 막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킬만한 명장면을 연출해낼 맘은 없지만 적어도 코
혔다. 바닥에 누운 사람들의 팔 다리에 걸려 넘어지고, 남이 늘어놓은 먹
로 역류하는 시커먼 물속에 섞여든, 유람선이 흘린 기름덩어리 따위를
거리를 밟아 뭉개는 바람에 헛돈을 쓰고 난 뒤에야 어렵사리 자리를 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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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살겠다, 홍경래///////
샤르봉이 그린 그림
집에 도착해서 침착하게 신발을 벗어둔 그는 옷장 문을 활짝 열어놓
수가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꾸준히 죽음에 대한 갈망을 품어온 것이 아
삼키며 시궁창 내나 풍기면서 죽고 싶지는 않았다. 본의 아니게 점점 구
니라 갑작스레 설명하기 어려운 강한 충동에 사로잡힌지라 몇 가지 생
체적으로 진행되는 상상의 나래 속에 더 깊이 빠져들지 않기 위해 물에
각해볼 문제도 있었다. 시간, 장소, 그리고 방법, 기타 등등. 마음은 점점
불어 쪼글쪼글해진 손가락을 애써 무시하고 비누거품을 씻어냈다. 피부
급해졌다.
를 타고 흘러내리는 더운물이 발밑에 얕게 고여 들었다. 막 거품을 헹궈낸 살결에 코를 묻고 킁킁 숨을 들이마시며 묵직한 사
고 천천히 옷을 갈아입었다. 몇 회 기념 어쩌고 하는 글씨가 프린트 된 티
우나실 문을 열자 후끈한 열기가 전신을 덮쳐왔다. 순식간에 붉어지는
셔츠는 몇 년 전인가 동네 조기축구회 가입 기념으로 받은 것이었다. 주
얼굴에 두 손을 얹고 조심스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고개를 뒤로 젖혔
말이면 근처에서 서로 안면이 없는 회원들이 같은 모양의 셔츠를 입고
다. 땀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오래지 않아 온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
서성거리는 모습도 가끔 눈에 띄었다 .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후줄근한
다.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땀이 눈가로 흘러들어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
차림을 하고 지폐 몇 장과 열쇠만 챙겨 집을 나섰다. 입을 꾹 다문 채 경
다. 눈알이 시큰거려 부산스럽게 눈을 껌벅였다. 급히 눈가를 부빈 뒤 빠
직된 걸음으로 조금 멀리 떨어져있는 목욕탕에 다다른 그는 창구에 적
진 속눈썹 몇 올이 들러붙은 손등을 털어내고는 아예 드러누워 버렸다.
힌 액수만큼의 목욕비를 지불하고 휑한 탈의실 복판에 한참 서있었다.
한 장 챙겨온 수건을 머리맡에 깔아두고 전라로 주홍빛 조명 아래 놓인
순간적으로 축구팀 인원이 어떻게 되더라 하는 문제가 의문점으로 떠올
그는 부검을 앞둔 시체처럼 인공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자로 잰 듯
랐고 그에 대한 답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아 옷을 홀딱 벗고 탕 안에 들어
반듯하게 일자로 몸을 누인 것은 단지 의자가 비좁았던 탓이지만 말이
가 앉았다. 발끝부터 서서히 풀어지는 몸을 축 늘어뜨린 채 물기 맺힌 천
다. 땀구멍마다 스며 나온 미끈한 땀에 온몸이 번들거렸다. 의자에 닿은
장을 바라보며 다시금 자살을 결심하는 그였다. 묵은 때는 더운 물 속에
등짝이며 엉덩이 밑이 축축하게 젖어들자 불쾌감에 몸을 발딱 일으켜
서 벗겨내기 좋게 불고 있었다.
앉았다.
자살의 명소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한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강변을 따라 걷는 시민들의 인명 구조정신은 생각보다 투철하며 모터보
기진맥진해져서 미지근한 물로 땀을 씻어내기 무섭게 탈의실로 뛰
트를 탄 구조요원들은 오늘도 구명조끼를 가득 싣고 한강을 누빈다. 뉴
쳐나온 그는 느릿느릿 옷을 챙겨 입었다. 그때까지도 다른 손님은 눈에
스의 일면을 장식할 자살소동이 벌어지거나 용감한 시민이 희생정신을
띄지 않았다. 평일 오후의 애매한 시간이라는 것도 이유랄 수 있겠지만
발휘할 기회는 좀처럼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애초에 강이나 저수지 등
찜질방이란 게 생긴 뒤로 목욕탕을 찾는 사람은 확연히 줄어들었다. 딱
지에서 투신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물에 불어터진 살덩이라니 떠올
한 번 가 본 찜질방은 시끌벅적하고 불편한 곳이었다. 단체로 몰려온 사
려 보기도 전에 구역질이 올라온다. 사진기자로 하여금 셔터를 누르고
람이 너무 많아 불가마의 열기보다는 그들이 뿜어내는 기운에 숨이 막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킬만한 명장면을 연출해낼 맘은 없지만 적어도 코
혔다. 바닥에 누운 사람들의 팔 다리에 걸려 넘어지고, 남이 늘어놓은 먹
로 역류하는 시커먼 물속에 섞여든, 유람선이 흘린 기름덩어리 따위를
거리를 밟아 뭉개는 바람에 헛돈을 쓰고 난 뒤에야 어렵사리 자리를 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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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봉이 그린 그림
집에 도착해서 침착하게 신발을 벗어둔 그는 옷장 문을 활짝 열어놓
고 누워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다음 날 일어나니 목이 돌아가 있었다. 그 는 뻣뻣하게 굳은 목에 손을 얹은 채 입구에 ‘아주 뜨거운’ 이라고 쓰여 진 불가마 안에서 팔굽혀펴기를 하다 갑자기 쓰러졌다는 남자가 업혀 나오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온몸을 두들겨 맞은 듯 한 기분으로 어기적거리며 돌아오는 길에 노점에서 사먹은 꼬치오뎅은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여유 돈이 없어 더 사먹지 못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지만. 목욕탕을 나온 그는 불꽃마크가 새겨진 간판에 잠시 몸을 기대고 길 게 숨을 내뱉었다. 어둑어둑해진 아스팔트 보도 위로 한발 한발 내딛으 며 나름의 계획을 세우기 이전에 든 생각은 ‘어떻게 죽을 것이냐’ 가 아
없는 그로서는 예측이 불가한 미래였다. 돈이 될 만한 구석도 없는 소지 품들은 어떤 식으로 처분이 되고 장례식에는 누가 어떤 얼굴을 하고 나 타날지 큰 액수는 아니지만 모아둔 돈도 있고 집을 팔아도 어느 정도는 나올 텐데 배분은 어떻게 되는 건지. 가까운 가족에게 돌아간다 치면 그 돈은 어디에 쓰일 런지. 적어도 누군가의 원한을 살 만한 행동을 하고 살 지는 않았으니 잘 죽었다고 박수를 칠 인간은 없겠지만 누가 울어주기 는 할까. 초상집 분위기에 혹해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세월이 흐른 뒤에 도 가끔씩 그를 떠올리며 슬픔에 눈물지을 사람은 딱히 없었다. 살아오 는 내내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서 자리매김할 상대를 만들지 못한 까닭이다. 남아있는 물건들 중에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도록 미리 처리해야 할 것은 없었다. 혼자 사는 남자 집이라면 흔히 있을 법한 포르노 잡지라든 지 밀린 세금 고지서라든지. 돈이 있어도 뭔가 사들이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애초에 물건이랄 만한 것이 몇 안 되는 까닭도 있었다. 남몰래 써 온 일기장 따위가 남아있다면 당장이라도 불에 태워 없애야 했겠지만 그 일은 이미 오래 전에 실행한 바 있다. 이삿짐을 정리하는 와중에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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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라 죽고 난 뒤에 벌어질 상황에 대한 것들이었다. 문상을 가 본 경험이
고 누워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다음 날 일어나니 목이 돌아가 있었다. 그 는 뻣뻣하게 굳은 목에 손을 얹은 채 입구에 ‘아주 뜨거운’ 이라고 쓰여 진 불가마 안에서 팔굽혀펴기를 하다 갑자기 쓰러졌다는 남자가 업혀 나오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온몸을 두들겨 맞은 듯 한 기분으로 어기적거리며 돌아오는 길에 노점에서 사먹은 꼬치오뎅은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여유 돈이 없어 더 사먹지 못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지만. 목욕탕을 나온 그는 불꽃마크가 새겨진 간판에 잠시 몸을 기대고 길 게 숨을 내뱉었다. 어둑어둑해진 아스팔트 보도 위로 한발 한발 내딛으 며 나름의 계획을 세우기 이전에 든 생각은 ‘어떻게 죽을 것이냐’ 가 아
없는 그로서는 예측이 불가한 미래였다. 돈이 될 만한 구석도 없는 소지 품들은 어떤 식으로 처분이 되고 장례식에는 누가 어떤 얼굴을 하고 나 타날지 큰 액수는 아니지만 모아둔 돈도 있고 집을 팔아도 어느 정도는 나올 텐데 배분은 어떻게 되는 건지. 가까운 가족에게 돌아간다 치면 그 돈은 어디에 쓰일 런지. 적어도 누군가의 원한을 살 만한 행동을 하고 살 지는 않았으니 잘 죽었다고 박수를 칠 인간은 없겠지만 누가 울어주기 는 할까. 초상집 분위기에 혹해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세월이 흐른 뒤에 도 가끔씩 그를 떠올리며 슬픔에 눈물지을 사람은 딱히 없었다. 살아오 는 내내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서 자리매김할 상대를 만들지 못한 까닭이다. 남아있는 물건들 중에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도록 미리 처리해야 할 것은 없었다. 혼자 사는 남자 집이라면 흔히 있을 법한 포르노 잡지라든 지 밀린 세금 고지서라든지. 돈이 있어도 뭔가 사들이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애초에 물건이랄 만한 것이 몇 안 되는 까닭도 있었다. 남몰래 써 온 일기장 따위가 남아있다면 당장이라도 불에 태워 없애야 했겠지만 그 일은 이미 오래 전에 실행한 바 있다. 이삿짐을 정리하는 와중에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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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라 죽고 난 뒤에 벌어질 상황에 대한 것들이었다. 문상을 가 본 경험이
그러한 종류의 것 외에 꺼림칙하게 떠오른 것은 멀쩡히 움직이고 있
의 무안함을 주었고 그날로 새벽녘에 근방 놀이터에서 태워버렸다. 담
는 팔이며 다리며 숨이 멎는 순간부터 온 몸이 썩기 시작할 것이라는 자
임선생님에게 보여질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씌여진 가식적인 하
연과학적인 부분이었다. 자칫하면 발견이 늦어져 익사체보다 더 끔찍한
루일과들은 하나같이 착한어린이모드로 끝을 맺었다. ‘산타할아버지께
몰골이 될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가장 먼저 그의 죽음을 목격하게 되는
서 아이들을 차례로 무릎 위에 앉히고 미소를 지으며 빨간 자루에서 선
사람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생판 남일 가능성이 컸다. 어쩐지 미안한 생
물을 꺼내 나눠주셨다. 참, 산타할아버지께 선물을 받았으니 고맙다고
각이 들기도 했다. 어둠이 내리비친 자신의 드러난 살갗을 바라보니 푸
편지해야지.’-라니! 있지도 않은 산타에게 존댓말로 씨부리는 꼴이 가
르스름함에 소름이 돋았다. 미처 겪어보기도 전에 구체화된 죽음의 색
증스럽기 짝이 없다. 분명히 초등학교 2학년의 그는 산타가 현실의 인물
채는 깊은 밤보다 ‘어둠’ 그 자체보다 더 어두웠다. 기분 탓인지 이미 손
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였다. 학교 제출용 일기 외에 몰
발이 따로 노는 듯싶기도 했다. 집에 도착한 그는 베란다에서 맥주를 마
래 끄적인 ‘진짜일기’ 쪽은 더 가관이다. 저주로 시작해서 저주로 끝나는
시다 꾸역꾸역 잠이 들었다.
노트는 항상 같은 이야기에 다른 욕설을 덧붙인 것이었다. 죽여 버릴 테
샤르봉이 그린 그림
다, 죽이고 싶다, 죽을 것 같다, 죽고 싶다. 마지막 줄은 대부분 그런 식으
하루를 사분기로 나눠 아침, 점심, 저녁, 새벽이라 치면 개 중 어느 시
로 끝나있다. 펜을 들었을 당시에 악마에 홀리기라도 것이다. 그렇게 생
간대에 죽는 것이 좋을까. 그는 근무시간 내내 이십사 나누기 사, 를 가
각하는 편이 나았다. 아무도 그의 일기장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은
지고 골머리를 썩어야만 했다. 어찌 보면 사소한 문제였다. 그러나 기반
천만다행이었다.
을 잘 잡아야 된다는 강박관념 탓에 시작부터 무언가를 결정하는 일이
위험하게 뭘 그렇게 태우는 거냐고 물어오는 건너편 아파트 경비에
쉽지가 않았다. 몸에 베어버린 경력 미달의 말단 회사원이 지닌 본능적
겐 한참 머뭇대다 결국 헤어진 여자친구가 남긴 거라고 거짓말을 해버
사무처리 습관 때문일 런지도 몰랐다. 결국, 변비약에 대한 화제를 가지
렸다. 그의 목소리는 실제로 울먹이고 있었다. 경비는 쯧쯧 혀를 차며 경
고 거의 반나절 동안 논쟁을 벌이고 있는 여사원들에게 운명을 맡기기
비실로 돌아갔다. 어렸을 때 쓴 일기장을 태우고 있었습니다. 사실대로
로 결심한 그는 오가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말했다가는 무슨 소리를 들었을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수많은 사람들
\내가 아는 애는 출근 직전에, 그러니까 아침마다 일을 본다는 거야.
이 그러했던 것처럼 유서라도 남길까 해봤지만 할 말이 없다는 것이 문
같이 목욕탕에 갔을 때 보니까 정말 배가 쏙 들어가 있더라고. 난 괜
제였다. 못난 아들 먼저 갑니다, 키워주신 은혜는 이 순간에도 잊지 않고
히 똥배에 힘주고 있었지. 매일 아침이라니 어쩌다 제때 안나와주면
있으나-그따위 문구를 늘어놓을 바에야 유서고 뭐고 없이 의문의 죽음
회사 다니는데 불편할 것 같기도 한데 솔직히 부럽더라고./
으로 남는 쪽이 훨씬 나을 것이다. 유서라는 게 꼭 눈물을 자아낼 정도로
\은근히 스트레스라니까. 변비약도 종류가 좀 많냐고. 약 먹고 좀 나
슬프거나 죽음에 대하여 문학적으로 써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적어도
아졌다는 애가 추천한 걸로 좀 사다먹긴 했는데 식사시간이 들쑥날
개죽음이란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쑥해서 제 때 챙겨먹지도 못한다니까, 점심이야 회사에서 때운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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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자그마치 십년 분의 일기장들은 차마 되짚어 읽어 내리기 힘들만큼
그러한 종류의 것 외에 꺼림칙하게 떠오른 것은 멀쩡히 움직이고 있
의 무안함을 주었고 그날로 새벽녘에 근방 놀이터에서 태워버렸다. 담
는 팔이며 다리며 숨이 멎는 순간부터 온 몸이 썩기 시작할 것이라는 자
임선생님에게 보여질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씌여진 가식적인 하
연과학적인 부분이었다. 자칫하면 발견이 늦어져 익사체보다 더 끔찍한
루일과들은 하나같이 착한어린이모드로 끝을 맺었다. ‘산타할아버지께
몰골이 될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가장 먼저 그의 죽음을 목격하게 되는
서 아이들을 차례로 무릎 위에 앉히고 미소를 지으며 빨간 자루에서 선
사람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생판 남일 가능성이 컸다. 어쩐지 미안한 생
물을 꺼내 나눠주셨다. 참, 산타할아버지께 선물을 받았으니 고맙다고
각이 들기도 했다. 어둠이 내리비친 자신의 드러난 살갗을 바라보니 푸
편지해야지.’-라니! 있지도 않은 산타에게 존댓말로 씨부리는 꼴이 가
르스름함에 소름이 돋았다. 미처 겪어보기도 전에 구체화된 죽음의 색
증스럽기 짝이 없다. 분명히 초등학교 2학년의 그는 산타가 현실의 인물
채는 깊은 밤보다 ‘어둠’ 그 자체보다 더 어두웠다. 기분 탓인지 이미 손
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였다. 학교 제출용 일기 외에 몰
발이 따로 노는 듯싶기도 했다. 집에 도착한 그는 베란다에서 맥주를 마
래 끄적인 ‘진짜일기’ 쪽은 더 가관이다. 저주로 시작해서 저주로 끝나는
시다 꾸역꾸역 잠이 들었다.
노트는 항상 같은 이야기에 다른 욕설을 덧붙인 것이었다. 죽여 버릴 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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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죽이고 싶다, 죽을 것 같다, 죽고 싶다. 마지막 줄은 대부분 그런 식으
하루를 사분기로 나눠 아침, 점심, 저녁, 새벽이라 치면 개 중 어느 시
로 끝나있다. 펜을 들었을 당시에 악마에 홀리기라도 것이다. 그렇게 생
간대에 죽는 것이 좋을까. 그는 근무시간 내내 이십사 나누기 사, 를 가
각하는 편이 나았다. 아무도 그의 일기장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은
지고 골머리를 썩어야만 했다. 어찌 보면 사소한 문제였다. 그러나 기반
천만다행이었다.
을 잘 잡아야 된다는 강박관념 탓에 시작부터 무언가를 결정하는 일이
위험하게 뭘 그렇게 태우는 거냐고 물어오는 건너편 아파트 경비에
쉽지가 않았다. 몸에 베어버린 경력 미달의 말단 회사원이 지닌 본능적
겐 한참 머뭇대다 결국 헤어진 여자친구가 남긴 거라고 거짓말을 해버
사무처리 습관 때문일 런지도 몰랐다. 결국, 변비약에 대한 화제를 가지
렸다. 그의 목소리는 실제로 울먹이고 있었다. 경비는 쯧쯧 혀를 차며 경
고 거의 반나절 동안 논쟁을 벌이고 있는 여사원들에게 운명을 맡기기
비실로 돌아갔다. 어렸을 때 쓴 일기장을 태우고 있었습니다. 사실대로
로 결심한 그는 오가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말했다가는 무슨 소리를 들었을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수많은 사람들
\내가 아는 애는 출근 직전에, 그러니까 아침마다 일을 본다는 거야.
이 그러했던 것처럼 유서라도 남길까 해봤지만 할 말이 없다는 것이 문
같이 목욕탕에 갔을 때 보니까 정말 배가 쏙 들어가 있더라고. 난 괜
제였다. 못난 아들 먼저 갑니다, 키워주신 은혜는 이 순간에도 잊지 않고
히 똥배에 힘주고 있었지. 매일 아침이라니 어쩌다 제때 안나와주면
있으나-그따위 문구를 늘어놓을 바에야 유서고 뭐고 없이 의문의 죽음
회사 다니는데 불편할 것 같기도 한데 솔직히 부럽더라고./
으로 남는 쪽이 훨씬 나을 것이다. 유서라는 게 꼭 눈물을 자아낼 정도로
\은근히 스트레스라니까. 변비약도 종류가 좀 많냐고. 약 먹고 좀 나
슬프거나 죽음에 대하여 문학적으로 써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적어도
아졌다는 애가 추천한 걸로 좀 사다먹긴 했는데 식사시간이 들쑥날
개죽음이란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쑥해서 제 때 챙겨먹지도 못한다니까, 점심이야 회사에서 때운다지
96
아브락사스 vol.7
아브락사스 vol.7
97
\\\\\\\못 살겠다, 홍경래///////
한 자그마치 십년 분의 일기장들은 차마 되짚어 읽어 내리기 힘들만큼
만 저녁엔 약속 잡히면 늦게까지 술도 마시고. 뭐, 그래봤자 주말이
협화음을 이루며 머리통을 조여 왔다. 심지어는 제 발소리며 옷이 스치
제일 엉망이지. /
는 소리마저 거슬렸다. 문득 버럭 소리를 내지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
\맞어, 식이요법이 제일 중요한 거 같애, 아무래도. 그런데 먹는 건
다. 그는 고개를 거칠게 흔들면서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시야 속 사물들
거의 밖에서 해결하니까 야채나 과일 챙겨먹기가 어디 말처럼 쉽냐
이 제 모습을 잃고 일그러지는 광경을 머릿속에 새겨두었다. 이 모든 것
말이야. 아침밥 차려먹고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지 않아? 집 멀면 저
은 죽음의 징조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는 중이다,
녁도 거를 때 있고. 그러다 새벽에 배고파서 일어난 적도 있다니까./
당장이라도 죽을 수 있을 것 같다, 원하던 바가 아니었던가. 그는 물처럼
\새벽에 뭐, 먹을 게 있나? 편의점 같은 데까지 서러 나갔다 오기도
질질 흘러내리는 콧물을 아무렇게나 닦아내고 결의에 찬 얼굴로 다시
귀찮잖아./
걷기 시작했다.
\그 시간에도 배달되는 게 얼마나 많은데. 그런데 일인분 시키기도 소화는 안 되고, 다음날 내내 상태가 안 좋기는 하지만 뭐 어떡해./
날이 밝자마자 수면제나 바퀴 약 따위를 구입할 작정으로 약국을 찾 은 그에게 젊은 약사는 휴지 몇 장을 건네며 말했다.
샤르봉이 그린 그림
\거, 일 좀 하자구. 내 생각엔 그냥 다들 단체로 날 잡아서 내과 한 번
\감기 제대로 걸리셨네요. 안 그래도 환절기라. 감기 때문에 고생하
갔다 오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시는 분들 꽤 많아요./ 약사가 내민 감기약을 받아들고 벙 쪄있던 그는 곧 카운터에 바짝 붙
건너편에 앉은 과장이 내던진 한 마디로 끝을 맺은 그녀들의 대화 속
어 서서 머뭇거리며 물었다.
에서 아침, 점심, 저녁, 새벽 중 가장 많이 들려온 단어는 ‘아침’ 이었다.
\저기, 수면제 사러 온 건데요./
메모지 위에 네 줄로 바를 정자를 그려 넣던 그는 자세를 고쳐 앉고 일에
약사는 흰 가운 가슴팍에 달린 주머니에 펜을 꽃아 넣고 똑 부러지게
집중하는 척 서류더미를 뒤적거렸다. 아침, 좋았어, 아침. 그러고 보니 아
대답했다.
침만큼 적당한 시간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덧붙여 그녀들이 하
\이 약 드시면 잠도 잘 올 겁니다. 감기약이 꽤 독하거든요./
루빨리 변비의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빌었다. 마찬가지로 점심식사를 마
약사는 약국을 나서는 그에게 큰 소리로 한 마디 더 했다.
친 뒤면 항상 화장실에 틀어박혀 말없이 문짝을 쳐대는 과장의 장 속에
\하루 세 번, 식후 삼십 분 후에 드세요! 두 알씩 드셔야 되요!/
도 평화가 찾아오기를.
고작 감기라니. 감기라니. 재수 없으면 죽기도 한다지만 그가 감기 로 죽을 확률은 짐작컨대 0퍼센트에 가까웠다. 죽음의 전조가 느껴지네
돌아오는 길에 수십 번이나 뒤를 돌아보고 발이 엉켜 넘어지다 전봇
어쩌네 하던 지난밤의 고뇌는 순식간에 부끄럽기만 한 독백이 되어버렸
대를 끌어안아버린 그는 갑자기 자신이 들려오는 온갖 소리에 민감해
다. 바퀴 약을 달라고 할 것을. 약국이름이 새겨진 종이봉투를 구겨 쥐고
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별의별 소리들이 귀로 흘러들어와 이상한 불
신경질적으로 콧물을 닦아냈다. 사우나에서 무리하게 땀을 뺀 것이 문
98
아브락사스 vol.7
아브락사스 vol.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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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살겠다, 홍경래///////
그렇고, 그냥 냉장고에 있는 거 갖고 대충 때우는 거지. 잠도 못자고,
만 저녁엔 약속 잡히면 늦게까지 술도 마시고. 뭐, 그래봤자 주말이
협화음을 이루며 머리통을 조여 왔다. 심지어는 제 발소리며 옷이 스치
제일 엉망이지. /
는 소리마저 거슬렸다. 문득 버럭 소리를 내지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
\맞어, 식이요법이 제일 중요한 거 같애, 아무래도. 그런데 먹는 건
다. 그는 고개를 거칠게 흔들면서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시야 속 사물들
거의 밖에서 해결하니까 야채나 과일 챙겨먹기가 어디 말처럼 쉽냐
이 제 모습을 잃고 일그러지는 광경을 머릿속에 새겨두었다. 이 모든 것
말이야. 아침밥 차려먹고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지 않아? 집 멀면 저
은 죽음의 징조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는 중이다,
녁도 거를 때 있고. 그러다 새벽에 배고파서 일어난 적도 있다니까./
당장이라도 죽을 수 있을 것 같다, 원하던 바가 아니었던가. 그는 물처럼
\새벽에 뭐, 먹을 게 있나? 편의점 같은 데까지 서러 나갔다 오기도
질질 흘러내리는 콧물을 아무렇게나 닦아내고 결의에 찬 얼굴로 다시
귀찮잖아./
걷기 시작했다.
\그 시간에도 배달되는 게 얼마나 많은데. 그런데 일인분 시키기도 소화는 안 되고, 다음날 내내 상태가 안 좋기는 하지만 뭐 어떡해./
날이 밝자마자 수면제나 바퀴 약 따위를 구입할 작정으로 약국을 찾 은 그에게 젊은 약사는 휴지 몇 장을 건네며 말했다.
샤르봉이 그린 그림
\거, 일 좀 하자구. 내 생각엔 그냥 다들 단체로 날 잡아서 내과 한 번
\감기 제대로 걸리셨네요. 안 그래도 환절기라. 감기 때문에 고생하
갔다 오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시는 분들 꽤 많아요./ 약사가 내민 감기약을 받아들고 벙 쪄있던 그는 곧 카운터에 바짝 붙
건너편에 앉은 과장이 내던진 한 마디로 끝을 맺은 그녀들의 대화 속
어 서서 머뭇거리며 물었다.
에서 아침, 점심, 저녁, 새벽 중 가장 많이 들려온 단어는 ‘아침’ 이었다.
\저기, 수면제 사러 온 건데요./
메모지 위에 네 줄로 바를 정자를 그려 넣던 그는 자세를 고쳐 앉고 일에
약사는 흰 가운 가슴팍에 달린 주머니에 펜을 꽃아 넣고 똑 부러지게
집중하는 척 서류더미를 뒤적거렸다. 아침, 좋았어, 아침. 그러고 보니 아
대답했다.
침만큼 적당한 시간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덧붙여 그녀들이 하
\이 약 드시면 잠도 잘 올 겁니다. 감기약이 꽤 독하거든요./
루빨리 변비의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빌었다. 마찬가지로 점심식사를 마
약사는 약국을 나서는 그에게 큰 소리로 한 마디 더 했다.
친 뒤면 항상 화장실에 틀어박혀 말없이 문짝을 쳐대는 과장의 장 속에
\하루 세 번, 식후 삼십 분 후에 드세요! 두 알씩 드셔야 되요!/
도 평화가 찾아오기를.
고작 감기라니. 감기라니. 재수 없으면 죽기도 한다지만 그가 감기 로 죽을 확률은 짐작컨대 0퍼센트에 가까웠다. 죽음의 전조가 느껴지네
돌아오는 길에 수십 번이나 뒤를 돌아보고 발이 엉켜 넘어지다 전봇
어쩌네 하던 지난밤의 고뇌는 순식간에 부끄럽기만 한 독백이 되어버렸
대를 끌어안아버린 그는 갑자기 자신이 들려오는 온갖 소리에 민감해
다. 바퀴 약을 달라고 할 것을. 약국이름이 새겨진 종이봉투를 구겨 쥐고
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별의별 소리들이 귀로 흘러들어와 이상한 불
신경질적으로 콧물을 닦아냈다. 사우나에서 무리하게 땀을 뺀 것이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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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살겠다, 홍경래///////
그렇고, 그냥 냉장고에 있는 거 갖고 대충 때우는 거지. 잠도 못자고,
제였다. 점점 무거워지는 몸을 이끌고 쏟아져 나오는 욕지기를 삼키느 라 이마에 핏발이 섰다. 약물을 이용한 일차적 자살시도는 실패로 돌아 갔다. 감기약을 코로 삼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편의점 구석에서 교복 차림의 여자아이들 틈에 끼어 라면을 먹고 기름이 동동 뜬 빨간 라면국 물에 감기약을 삼킨 뒤 더부룩한 배를 쓸어내렸다. 약냄새가 올라와 입 안이 텁텁했다. 딸꾹질에 트림까지 섞여 나오는 것을 참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몇몇이 아니꼬운 시선을 보내왔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루 종일 이불을 뒤집어쓰고 화장지를 품에 안은 채 텔레비전의 오 락프로그램을 보았다. 누가 나와 무엇을 하든 도무지 웃을 수가 없었다. 누구든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 분명한데 빤한 결말을 두고 살
샤르봉이 그린 그림
아 숨 쉬는 이유가 뭘까.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결국 마찬가지로 끝날 인생살이에 진을 빼는 것은 부질없게만 느껴졌다. 돈을 벌고 돈을 쓰고 하는 생활은 먹기 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 먹느냐 하는 앞 뒤 바꿔 말하기 식의 아이러니다. 텔레비전 옆에 놓인 액자 속 학교 이름이 새겨진 뭐라 딱 잘라 말하 기 힘든 색깔의 츄리닝 차림으로 뻣뻣하게 서있는 남자아이. 운동장에 서 앞 사람 뒤통수를 쳐다보며 두 손을 뻗어 줄을 맞춰보다 국기게양대 근처에 달린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반주에 맞춰 애국가를 열창하 던, 아이. 예고 없이 다른 사람의 것처럼 느껴지는 과거와 눈을 마주친 그 는 텔레비전 전원을 끄고 벌떡 일어섰다. 크게 소동피울 일 없이 집안에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 죽자. 옷장 을 열고 가지런히 걸려있는 옷가지 사이로 파고든 그는 어둠 속에서 뜨 나마나한 눈을 껌뻑이며 옷걸이를 찾기 위해 손에 잡히는 대로 천천히 더듬어보았다. 묵은내 나는 옷들이 뒤엉켜 흘러내렸다. 옷장 안은 생각 보다 넓은데다 캄캄하고 아늑했다. 생전에 입던 옷 속에 파묻혀 맞이하
100
아브락사스 vol.7
제였다. 점점 무거워지는 몸을 이끌고 쏟아져 나오는 욕지기를 삼키느 라 이마에 핏발이 섰다. 약물을 이용한 일차적 자살시도는 실패로 돌아 갔다. 감기약을 코로 삼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편의점 구석에서 교복 차림의 여자아이들 틈에 끼어 라면을 먹고 기름이 동동 뜬 빨간 라면국 물에 감기약을 삼킨 뒤 더부룩한 배를 쓸어내렸다. 약냄새가 올라와 입 안이 텁텁했다. 딸꾹질에 트림까지 섞여 나오는 것을 참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몇몇이 아니꼬운 시선을 보내왔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루 종일 이불을 뒤집어쓰고 화장지를 품에 안은 채 텔레비전의 오 락프로그램을 보았다. 누가 나와 무엇을 하든 도무지 웃을 수가 없었다. 누구든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 분명한데 빤한 결말을 두고 살
샤르봉이 그린 그림
아 숨 쉬는 이유가 뭘까.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결국 마찬가지로 끝날 인생살이에 진을 빼는 것은 부질없게만 느껴졌다. 돈을 벌고 돈을 쓰고 하는 생활은 먹기 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 먹느냐 하는 앞 뒤 바꿔 말하기 식의 아이러니다. 텔레비전 옆에 놓인 액자 속 학교 이름이 새겨진 뭐라 딱 잘라 말하 기 힘든 색깔의 츄리닝 차림으로 뻣뻣하게 서있는 남자아이. 운동장에 서 앞 사람 뒤통수를 쳐다보며 두 손을 뻗어 줄을 맞춰보다 국기게양대 근처에 달린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반주에 맞춰 애국가를 열창하 던, 아이. 예고 없이 다른 사람의 것처럼 느껴지는 과거와 눈을 마주친 그 는 텔레비전 전원을 끄고 벌떡 일어섰다. 크게 소동피울 일 없이 집안에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 죽자. 옷장 을 열고 가지런히 걸려있는 옷가지 사이로 파고든 그는 어둠 속에서 뜨 나마나한 눈을 껌뻑이며 옷걸이를 찾기 위해 손에 잡히는 대로 천천히 더듬어보았다. 묵은내 나는 옷들이 뒤엉켜 흘러내렸다. 옷장 안은 생각 보다 넓은데다 캄캄하고 아늑했다. 생전에 입던 옷 속에 파묻혀 맞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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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죽음이라니 짐짓 장렬해 보일법도 했다. 은단정도 크기로 쪼그라들
리는 동안 알 수 없는 긴장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치 장난전화를 걸
어 있을 나프탈렌의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아무 생각 없이 사들인
고 있는 듯 한 기분이었다.
각양각색의 넥타이들이 목에 감겨들었다. 나쁘지 않은 감촉이다. 역시
\예, 만리장성임다. 주문하시겠어요?/
넥타이는 실크지.
\아,예에. 여기가……./
딩동. 적막함 속에 초인종이 울렸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옷더미를 헤치고 나와 맨발로 현관문 앞에 섰다. \누구세요./
주소를 대고 마른침을 삼켰다. 메뉴판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난 생처음 발음해보는 음식의 이름이 그의 입 밖으로 줄줄이 흘러나왔다. 주문을 확인하는 수화기 너머 남자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느껴졌다.
\아, 예. 이번 달 관리비 받으러 왔는데요./
\저기, 카드 되죠?/
\잠시만요./
\예, 됩니다∼/
샤르봉이 그린 그림
익숙해지지 않는 얼굴의 남자가 어색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
수화기를 내려놓고 찬장을 뒤져 써본 일이 없는 유리잔을 꺼내 얼음
왔다. 관리비를 계산하고 서로 간단한 목례를 주고받은 뒤 문을 걸어 잠
으로 가득 채웠다. 사가지고 온 양주 뚜껑을 열자 싸한 알코올 냄새가 코
그는 순간 그는 망연자실해져서 열린 지갑을 들고 한참동안 그 자리에
를 찔렀다. 뭣 모를 향기와 술 따르는 소리에 점점 기분이 좋아졌다. 혼
멈춰서있어야만 했다.
자서 아껴 마셔야지, 하고 마개를 꼭 닫은 양주병을 찬장 구석으로 밀어
/내가, 왜, 나온 거지?\
넣던 그는 아차 하고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것을 다시 꺼냈다. 오늘
얼빠질 노릇이었다. 초인종소리에 평소대로 반응해버린 자신의 어
밤 다 마셔버릴 테다. 천천히 잔을 비우고 두 번째 잔을 채우는 중에 초
리석음에 한탄하다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공복감에 양팔로 배를 감싸 안
인종이 울렸다. 허겁지겁 카드를 꺼내들고 문을 열자 배달 온 사내는 요
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언제나처럼 천 원짜리 김밥 한 줄을 사가지고 오
란한 소리를 내며 철가방을 내려놓고 산더미 같은 음식 접시를 현관에
려던 그는 김밥집 앞을 지나쳐 역 근처에 있는 백화점 지하로 들어갔다.
늘어놓기 시작했다. 딸려온 젓가락 수를 보니 민망해졌다.
주류 코너에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의 양주 한 병
\맛있게 드세요./
을 사들고 카드 명세서에 찍힌 금액을 재차 들여다보면서 곧장 집으로
접시마다 감겨있는 랩을 풀어내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래서야
돌아와 수화기를 들어 중국집 전화번호를 눌렀다. 늘 짜장면 한 그릇을
뭐가 뭔지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잖아. 나무젓가락을 반으로 쪼개며 생
시켜놓고 천 원짜리 지폐를 꼬기작대며 초인종이 울리기만을 기다리던
각하고 또 생각했다. 뭐부터 먹어야 할 것인가.
그였다. 비 오는 날이면 짬뽕을 시키기도 하고 어머니가 들른 날엔 탕수 육까지 시켜봤다. 메뉴판에는 별의별 종류의 음식 이름이 가득 적혀있
아침은 또다시 찾아왔다. 간밤에 지구는 평화로이 자전했고 수많
었지만 소리 내어 말해본 적도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신호음이 울
은 위성과 행성들이 각자 궤도에 머물렀다. 관측이 불가능한 먼 우주에
102
아브락사스 vol.7
아브락사스 vol.7
103
\\\\\\\못 살겠다, 홍경래///////
서류가방을 뒤져 지갑을 꺼내들고 문을 열자 몇 번을 봐도 도무지
는 죽음이라니 짐짓 장렬해 보일법도 했다. 은단정도 크기로 쪼그라들
리는 동안 알 수 없는 긴장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치 장난전화를 걸
어 있을 나프탈렌의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아무 생각 없이 사들인
고 있는 듯 한 기분이었다.
각양각색의 넥타이들이 목에 감겨들었다. 나쁘지 않은 감촉이다. 역시
\예, 만리장성임다. 주문하시겠어요?/
넥타이는 실크지.
\아,예에. 여기가……./
딩동. 적막함 속에 초인종이 울렸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옷더미를 헤치고 나와 맨발로 현관문 앞에 섰다. \누구세요./
주소를 대고 마른침을 삼켰다. 메뉴판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난 생처음 발음해보는 음식의 이름이 그의 입 밖으로 줄줄이 흘러나왔다. 주문을 확인하는 수화기 너머 남자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느껴졌다.
\아, 예. 이번 달 관리비 받으러 왔는데요./
\저기, 카드 되죠?/
\잠시만요./
\예, 됩니다∼/
샤르봉이 그린 그림
익숙해지지 않는 얼굴의 남자가 어색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
수화기를 내려놓고 찬장을 뒤져 써본 일이 없는 유리잔을 꺼내 얼음
왔다. 관리비를 계산하고 서로 간단한 목례를 주고받은 뒤 문을 걸어 잠
으로 가득 채웠다. 사가지고 온 양주 뚜껑을 열자 싸한 알코올 냄새가 코
그는 순간 그는 망연자실해져서 열린 지갑을 들고 한참동안 그 자리에
를 찔렀다. 뭣 모를 향기와 술 따르는 소리에 점점 기분이 좋아졌다. 혼
멈춰서있어야만 했다.
자서 아껴 마셔야지, 하고 마개를 꼭 닫은 양주병을 찬장 구석으로 밀어
/내가, 왜, 나온 거지?\
넣던 그는 아차 하고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것을 다시 꺼냈다. 오늘
얼빠질 노릇이었다. 초인종소리에 평소대로 반응해버린 자신의 어
밤 다 마셔버릴 테다. 천천히 잔을 비우고 두 번째 잔을 채우는 중에 초
리석음에 한탄하다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공복감에 양팔로 배를 감싸 안
인종이 울렸다. 허겁지겁 카드를 꺼내들고 문을 열자 배달 온 사내는 요
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언제나처럼 천 원짜리 김밥 한 줄을 사가지고 오
란한 소리를 내며 철가방을 내려놓고 산더미 같은 음식 접시를 현관에
려던 그는 김밥집 앞을 지나쳐 역 근처에 있는 백화점 지하로 들어갔다.
늘어놓기 시작했다. 딸려온 젓가락 수를 보니 민망해졌다.
주류 코너에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의 양주 한 병
\맛있게 드세요./
을 사들고 카드 명세서에 찍힌 금액을 재차 들여다보면서 곧장 집으로
접시마다 감겨있는 랩을 풀어내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래서야
돌아와 수화기를 들어 중국집 전화번호를 눌렀다. 늘 짜장면 한 그릇을
뭐가 뭔지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잖아. 나무젓가락을 반으로 쪼개며 생
시켜놓고 천 원짜리 지폐를 꼬기작대며 초인종이 울리기만을 기다리던
각하고 또 생각했다. 뭐부터 먹어야 할 것인가.
그였다. 비 오는 날이면 짬뽕을 시키기도 하고 어머니가 들른 날엔 탕수 육까지 시켜봤다. 메뉴판에는 별의별 종류의 음식 이름이 가득 적혀있
아침은 또다시 찾아왔다. 간밤에 지구는 평화로이 자전했고 수많
었지만 소리 내어 말해본 적도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신호음이 울
은 위성과 행성들이 각자 궤도에 머물렀다. 관측이 불가능한 먼 우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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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살겠다, 홍경래///////
서류가방을 뒤져 지갑을 꺼내들고 문을 열자 몇 번을 봐도 도무지
서 행성충돌이 있었다한들 슬퍼할 수도 없는 일이고 일단 지구는 평화 로웠다. 외교상의 이해관계 불일치를 떠나 존속의 문제로서. 그는 환하 게 밝아오는 방 안에서 이불을 끌어내렸다. 세상과 함께 사라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의 세상이 사라지고 세상에서 그가 사라지고 남을 ‘세상’ 은 쭉 별 다를 바 없는 행태로 아침을 맞고 저녁을 맞고 할 것이었다. 이 변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이대로 곧 해가 중천으로 떠올랐다가 그 자리 를 달이 메우고 오늘은 끝난다. 다시없을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다. 이렇 다 저렇다 정의내리고 싶지 않은 기분이다. 어제와 다른 것이 있다면 오 늘의 그는 깐풍기란 음식이 닭으로 만든 요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
냉장고문을 열자 오싹한 냉기가 피부에 닿았다. 야채박스에서 뭉그
샤르봉이 그린 그림
러진 토마토 몇 개를 꺼내 냄새를 맡아보았다. 코를 통해 찬 공기가 흘러 들어왔다. 물로 대충 헹궈 한 귀퉁이를 덥석 베어 물자 토마토 즙이 손가 락 사이사이로 뚝뚝 흘러내렸다.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너를 바라볼 수 있다면. 아파트 복도를 지 나는 남자가 흥얼거렸다. 그 뒤의 가사를 정확히 모르는지 허밍으로 얼 버무리다 이어 부른다.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뭉그러진 토마토를 바 라보는 그의 손은 토마토 즙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노랫말을 속으 로 삼키며 바짝 마른 토마토 꼭지를 입에 문 채 손을 닦아냈다. 노래는 계속 같은 구절만 반복해서 떠올랐지만 머릿속으로 되 뇌이기를 멈출 수 없었다. 어쩐지 바보가 된 기분이라 다른 걸 불러볼까 했지만 막상 생 각나는 노래도 없었다. 이른 아침에, 이른 아침에. 아침에. 태양은 서서히 맨눈으로는 마주보기 힘든 눈부심으로 밝아왔다 . 뒤축이 남는 커다란 슬리퍼를 양 발에 끼워 신고 묵직한 현관문을 열었다. 슬쩍 내려다보니 벌써 차들이 많이 빠져나가서 군데군데 빈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아침 햇살을 가르며 나타난 개나리색 유치원 셔틀버스가 아파트 입구에 멈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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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였다.
서 행성충돌이 있었다한들 슬퍼할 수도 없는 일이고 일단 지구는 평화 로웠다. 외교상의 이해관계 불일치를 떠나 존속의 문제로서. 그는 환하 게 밝아오는 방 안에서 이불을 끌어내렸다. 세상과 함께 사라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의 세상이 사라지고 세상에서 그가 사라지고 남을 ‘세상’ 은 쭉 별 다를 바 없는 행태로 아침을 맞고 저녁을 맞고 할 것이었다. 이 변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이대로 곧 해가 중천으로 떠올랐다가 그 자리 를 달이 메우고 오늘은 끝난다. 다시없을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다. 이렇 다 저렇다 정의내리고 싶지 않은 기분이다. 어제와 다른 것이 있다면 오 늘의 그는 깐풍기란 음식이 닭으로 만든 요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
냉장고문을 열자 오싹한 냉기가 피부에 닿았다. 야채박스에서 뭉그
샤르봉이 그린 그림
러진 토마토 몇 개를 꺼내 냄새를 맡아보았다. 코를 통해 찬 공기가 흘러 들어왔다. 물로 대충 헹궈 한 귀퉁이를 덥석 베어 물자 토마토 즙이 손가 락 사이사이로 뚝뚝 흘러내렸다.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너를 바라볼 수 있다면. 아파트 복도를 지 나는 남자가 흥얼거렸다. 그 뒤의 가사를 정확히 모르는지 허밍으로 얼 버무리다 이어 부른다.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뭉그러진 토마토를 바 라보는 그의 손은 토마토 즙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노랫말을 속으 로 삼키며 바짝 마른 토마토 꼭지를 입에 문 채 손을 닦아냈다. 노래는 계속 같은 구절만 반복해서 떠올랐지만 머릿속으로 되 뇌이기를 멈출 수 없었다. 어쩐지 바보가 된 기분이라 다른 걸 불러볼까 했지만 막상 생 각나는 노래도 없었다. 이른 아침에, 이른 아침에. 아침에. 태양은 서서히 맨눈으로는 마주보기 힘든 눈부심으로 밝아왔다 . 뒤축이 남는 커다란 슬리퍼를 양 발에 끼워 신고 묵직한 현관문을 열었다. 슬쩍 내려다보니 벌써 차들이 많이 빠져나가서 군데군데 빈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아침 햇살을 가르며 나타난 개나리색 유치원 셔틀버스가 아파트 입구에 멈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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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락사스 vol.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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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살겠다, 홍경래///////
정도였다.
섰다. 그림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잠옷 바람으로 복도에 서서 묵묵히 시 간을 흘려보냈다. 전에 없이 상쾌한 기분이었다. 감기기운은 많이 가라 앉아 콧물도 멎었다. 시도 때도 없이 흘러내리는 콧물을 어찌하지 못해 콧구멍에 휴지를 말아 넣고 잠자리에 들었던 일을 떠올리자 기분 탓인 지 갑자기 코끝이 간질간질해졌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꽃가루라도 날 리는 걸까. 봄은 머지않아 갈 것이다. 그 뒤에는 오랜 더위와 눅눅한 장마. 한여 름의 더운 공기는 들이마시기 싫은 텁텁함과 열기로 숨통을 조여들 것 이다. 입을 다물자. 근질근질한 코에 대해서는 잊어버리자. 그는 숨을 참 아보았다. 공기를 들이마시는 일도 내쉬는 일도 멈췄다. 여분의 공기를
샤르봉이 그린 그림
머금고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그대로 시간이 흘렀다. 바람도 불었다. 왜 아무렇지도 않지. ‘이상하다’ 고 여긴 순간 귀가 멍해졌다. 턱은 일그러 지고 이마는 당기고 콧대가 쿡쿡 쑤셨다. -이곳이 물속이라면. 맨 처음 수영장에 간 날 준비운동을 마치자마자 했던 일은 물속에서 숨 참기였 다. 그는 수영장 바닥을 마주보고 손가락으로 코를 비틀어 쥔 채 거품을 뿜어내다 오줌을 지렸다. 그러고 난 뒤에도 수영장에선 특유의 소독약 냄새만 날 뿐이었다. 새파란 물속에 서서 수영복바지를 내려다보며 수 영장이 넓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집에서는 욕조에다 오줌을 누면 죄다 눈치 채고 새물을 받아썼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잔소리를 했다. 안 면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 바람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뱃가죽을 들썩 이던 그는 얼마 안가 막혀있던 숨을 토해냈다. 맥이 탁 풀렸다.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 , 출근시간은 이미 지나있었다 . 느 긋하게 샤워를 마치고 다림질 안 한 양복에 몸을 끼워 넣었다. 집을 나선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서류가방은 집안 어딘가에 처 박혀 있을 것이다. 회사에 나가 짐을 좀 정리해놓고 나올 생각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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섰다. 그림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잠옷 바람으로 복도에 서서 묵묵히 시 간을 흘려보냈다. 전에 없이 상쾌한 기분이었다. 감기기운은 많이 가라 앉아 콧물도 멎었다. 시도 때도 없이 흘러내리는 콧물을 어찌하지 못해 콧구멍에 휴지를 말아 넣고 잠자리에 들었던 일을 떠올리자 기분 탓인 지 갑자기 코끝이 간질간질해졌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꽃가루라도 날 리는 걸까. 봄은 머지않아 갈 것이다. 그 뒤에는 오랜 더위와 눅눅한 장마. 한여 름의 더운 공기는 들이마시기 싫은 텁텁함과 열기로 숨통을 조여들 것 이다. 입을 다물자. 근질근질한 코에 대해서는 잊어버리자. 그는 숨을 참 아보았다. 공기를 들이마시는 일도 내쉬는 일도 멈췄다. 여분의 공기를
샤르봉이 그린 그림
머금고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그대로 시간이 흘렀다. 바람도 불었다. 왜 아무렇지도 않지. ‘이상하다’ 고 여긴 순간 귀가 멍해졌다. 턱은 일그러 지고 이마는 당기고 콧대가 쿡쿡 쑤셨다. -이곳이 물속이라면. 맨 처음 수영장에 간 날 준비운동을 마치자마자 했던 일은 물속에서 숨 참기였 다. 그는 수영장 바닥을 마주보고 손가락으로 코를 비틀어 쥔 채 거품을 뿜어내다 오줌을 지렸다. 그러고 난 뒤에도 수영장에선 특유의 소독약 냄새만 날 뿐이었다. 새파란 물속에 서서 수영복바지를 내려다보며 수 영장이 넓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집에서는 욕조에다 오줌을 누면 죄다 눈치 채고 새물을 받아썼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잔소리를 했다. 안 면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 바람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뱃가죽을 들썩 이던 그는 얼마 안가 막혀있던 숨을 토해냈다. 맥이 탁 풀렸다.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 , 출근시간은 이미 지나있었다 . 느 긋하게 샤워를 마치고 다림질 안 한 양복에 몸을 끼워 넣었다. 집을 나선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서류가방은 집안 어딘가에 처 박혀 있을 것이다. 회사에 나가 짐을 좀 정리해놓고 나올 생각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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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두었다. 책상이나 서랍에 있는 물건은 거의 회사비품이다. 아래로 향 한 화살표 버튼을 눌러놓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주 홍색 숫자는 일정한 간격으로 1씩 불어났다.
뚜웃, 뚜웃. 뚱한 기계음이 운동장의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주 파수를 잘못 맞춘 라디오처럼 거슬리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지금부터 방송 조회를 시작하겠습니다, 학생여러분은 모두 자리 에서 일어나 주십시오./ 환경미화원은 빗자루 끝을 당겨 잡았다. 그는 도로에 발을 들여 놓고
지만 꽃향기는 맡을 수 없었다. 벚꽃은 향기가 짙은 꽃이 아닌 모양이다.
있었다. 마악, 발을 들여놓은 찰나였다. 사거리 모퉁이마다 차들이 몰려
초등학교 앞을 지나면서 안을 힐끔 들여다보았는데 운동장은 텅 비어있
나오고 몰려 들어갔다. 어린이 보호구역, 커다란 노란색 표지판 아래 어
었다. 땡땡이치는 아이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고개를 쑥 빼고 구석구석
린이는 없었다. 어머니는 말하셨지, 애들은 보면 안 돼. 교통사고가 났다
살폈지만 아무도 없었다. 구둣발에 짓눌린 꽃잎을 빗자루로 쓸어 담던
는 부근을 지나칠 때마다 사고현장은 빽빽하게 늘어선 여러 대의 자동
환경미화원의 시원스런 기침소리에 놀라 등을 돌린 그는 순간 골이 띵
차와 사이렌이 켜진 구급차, 경찰차에 가려져 있곤 했다. 사고의 흔적은
해졌다. 꽃이 지고 없었다. 도로 양쪽에 나란히 서있는 벚꽃나무는 죄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음 날이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모든 것이 그 자
가지가 휑하니 비어있었다. 흩날리는 꽃잎 속에서 죽음을 결심했던 순
리에 머물거나 그 자리를 스쳐갔다. 차가 지나가고 차에 탄 사람이 지나
간의 지독한 암담함이 다시금 그를 덮쳐왔다.
가고 비둘기는 아슬아슬하게 차를 피해 날아다닌다. 가로수의 그림자들
나는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등지고 서있다, 내가 스스로 목숨이 끊 어지길 바라마지 않는다는 사실을 저 청소부는 모른다, 버스에 탄 승객
은 나란히 그 위에 눕는다. 당사자는 다쳤을까, 죽었을까. 목격자들만이 품을 수 있는 의문이다.
들 중에 나를 쳐다보는 사람은 없다, 신호가 바뀌고 나면 버스도 떠날 것
신원확인 . 무언가를 시작하기 위한 필수적인 단계다 . 몇 살이에요 .
이다, 차들은 멈추지 않는다, 내 앞에 놓인 횡단보도는 곧 적신호로 바뀔
나이가 어떻게 되요. 나이를 묻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던 것
것이다, 건너려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건너올 사람도 없다, 맞은편에는
은 스무 살 때까지였다. 그 뒤로는 쭉 해가 바뀌어도 나이를 세지 않았다.
사람이 없다, 아무도 없다, 내가 아는 사람은 없다, 아무도 나를 모른다.
마음먹고 행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사람들 혹은 설문조사지 따위가 나
아무도 모른다, 아니, 이렇게 슬플 수가.
이를 물어오는 것이 싫었다. 어째서 본인 나이도 모르고 있냐는 둥 추궁
그는 빨갛게 빛나는 신호등 불빛을 똑바로 바라보며 차가 지나다니
을 당하는 것도 숨겨온 결점을 드러내는 것처럼 나이를 세지 않고 있다
는 횡단보도로 뛰어들었다. 다른 방향에 시선을 두고 있던 환경미화원
는 사실을 ‘들켰다’ 고 표현해야만 할 것 같은 상황도 싫었다. 그가 아는
은 모자를 벗어 챙을 구부려 쥐었다. 꽃이 너무 빨리 져버렸어, 날씨는 좋
모든 사람이 같은 속도로 나이를 먹어 가는데 누군가에 의해 그들의 나
은데 말이야. 날씨는 이렇게 좋은데. 꽃은 왜 이리 빨리 진걸까. 이렇게
이를 환기하게 될 때면 모르는 새 시간이 훌쩍 흘러버린 것 같은 기분이
좋은 날씨에. 이런 날씨에도 시드는 게 있단 말이지. 이상한 일이야. 아주
었다. 그런 식으로 오랜만에 확인한 어머니의 나이는 낯설게만 느껴지
이상한 일이야.
는 숫자였다. 그의 세상은 엄청난 속도로 늙어갔다. 변화의 속도를 놓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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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락사스 vol.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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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살겠다, 홍경래///////
샤르봉이 그린 그림
일단, 걸었다. 꽃물이 베인 보도를 따라 걸었다. 코를 벌름거려보았
관두었다. 책상이나 서랍에 있는 물건은 거의 회사비품이다. 아래로 향 한 화살표 버튼을 눌러놓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주 홍색 숫자는 일정한 간격으로 1씩 불어났다.
뚜웃, 뚜웃. 뚱한 기계음이 운동장의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주 파수를 잘못 맞춘 라디오처럼 거슬리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지금부터 방송 조회를 시작하겠습니다, 학생여러분은 모두 자리 에서 일어나 주십시오./ 환경미화원은 빗자루 끝을 당겨 잡았다. 그는 도로에 발을 들여 놓고
지만 꽃향기는 맡을 수 없었다. 벚꽃은 향기가 짙은 꽃이 아닌 모양이다.
있었다. 마악, 발을 들여놓은 찰나였다. 사거리 모퉁이마다 차들이 몰려
초등학교 앞을 지나면서 안을 힐끔 들여다보았는데 운동장은 텅 비어있
나오고 몰려 들어갔다. 어린이 보호구역, 커다란 노란색 표지판 아래 어
었다. 땡땡이치는 아이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고개를 쑥 빼고 구석구석
린이는 없었다. 어머니는 말하셨지, 애들은 보면 안 돼. 교통사고가 났다
살폈지만 아무도 없었다. 구둣발에 짓눌린 꽃잎을 빗자루로 쓸어 담던
는 부근을 지나칠 때마다 사고현장은 빽빽하게 늘어선 여러 대의 자동
환경미화원의 시원스런 기침소리에 놀라 등을 돌린 그는 순간 골이 띵
차와 사이렌이 켜진 구급차, 경찰차에 가려져 있곤 했다. 사고의 흔적은
해졌다. 꽃이 지고 없었다. 도로 양쪽에 나란히 서있는 벚꽃나무는 죄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음 날이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모든 것이 그 자
가지가 휑하니 비어있었다. 흩날리는 꽃잎 속에서 죽음을 결심했던 순
리에 머물거나 그 자리를 스쳐갔다. 차가 지나가고 차에 탄 사람이 지나
간의 지독한 암담함이 다시금 그를 덮쳐왔다.
가고 비둘기는 아슬아슬하게 차를 피해 날아다닌다. 가로수의 그림자들
나는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등지고 서있다, 내가 스스로 목숨이 끊 어지길 바라마지 않는다는 사실을 저 청소부는 모른다, 버스에 탄 승객
은 나란히 그 위에 눕는다. 당사자는 다쳤을까, 죽었을까. 목격자들만이 품을 수 있는 의문이다.
들 중에 나를 쳐다보는 사람은 없다, 신호가 바뀌고 나면 버스도 떠날 것
신원확인 . 무언가를 시작하기 위한 필수적인 단계다 . 몇 살이에요 .
이다, 차들은 멈추지 않는다, 내 앞에 놓인 횡단보도는 곧 적신호로 바뀔
나이가 어떻게 되요. 나이를 묻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던 것
것이다, 건너려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건너올 사람도 없다, 맞은편에는
은 스무 살 때까지였다. 그 뒤로는 쭉 해가 바뀌어도 나이를 세지 않았다.
사람이 없다, 아무도 없다, 내가 아는 사람은 없다, 아무도 나를 모른다.
마음먹고 행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사람들 혹은 설문조사지 따위가 나
아무도 모른다, 아니, 이렇게 슬플 수가.
이를 물어오는 것이 싫었다. 어째서 본인 나이도 모르고 있냐는 둥 추궁
그는 빨갛게 빛나는 신호등 불빛을 똑바로 바라보며 차가 지나다니
을 당하는 것도 숨겨온 결점을 드러내는 것처럼 나이를 세지 않고 있다
는 횡단보도로 뛰어들었다. 다른 방향에 시선을 두고 있던 환경미화원
는 사실을 ‘들켰다’ 고 표현해야만 할 것 같은 상황도 싫었다. 그가 아는
은 모자를 벗어 챙을 구부려 쥐었다. 꽃이 너무 빨리 져버렸어, 날씨는 좋
모든 사람이 같은 속도로 나이를 먹어 가는데 누군가에 의해 그들의 나
은데 말이야. 날씨는 이렇게 좋은데. 꽃은 왜 이리 빨리 진걸까. 이렇게
이를 환기하게 될 때면 모르는 새 시간이 훌쩍 흘러버린 것 같은 기분이
좋은 날씨에. 이런 날씨에도 시드는 게 있단 말이지. 이상한 일이야. 아주
었다. 그런 식으로 오랜만에 확인한 어머니의 나이는 낯설게만 느껴지
이상한 일이야.
는 숫자였다. 그의 세상은 엄청난 속도로 늙어갔다. 변화의 속도를 놓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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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살겠다, 홍경래///////
샤르봉이 그린 그림
일단, 걸었다. 꽃물이 베인 보도를 따라 걸었다. 코를 벌름거려보았
버린 시점에서부터 시간에 뒤처지기만 했다. 그는 역 근처의 상가 간판 이 바뀔 때마다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사로잡혀 걸음을 멈췄고 자주 가던 식당의 메뉴판이 새것으로 바뀌면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의 시간 동안 오만가지 상상에 빠져들었다. 생전 처음 보는 식재료가 덩어리째 담겨 나오는 냄비라든지 국적을 알 수 없는 주방장이 부엌에서 뛰쳐나 와 알아듣지 못할 말을 건네 온다든지. 불행 중 다행으로 그러한 것들은 죄다 상상에 그쳤지만 그는 늘 뭔가가 바뀐다는 것이 불안했다. 눈앞의 붉은 신호는 바뀌지 않았다. \국기에 대하여 경례!/ 익숙한 사내의 음성이 짧게 메아리쳤다. 국기에 대하여 경례, 경례, 례, 례, 례- 그는 등 뒤에서 들려온 절도 있는 억양에 맞춰 고개를 돌렸다.
샤르봉이 그린 그림
중앙선을 아직 넘지 못하고 멈춰선 그의 반대편 차선으로 승용차 한 대 가 제한속도를 지키며 느릿느릿 지나갔다. 어린이 보호구역 한복판에 선, 사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버린 한 사내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 석 자, 홍, 경, 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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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락사스 vol.7
버린 시점에서부터 시간에 뒤처지기만 했다. 그는 역 근처의 상가 간판 이 바뀔 때마다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사로잡혀 걸음을 멈췄고 자주 가던 식당의 메뉴판이 새것으로 바뀌면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의 시간 동안 오만가지 상상에 빠져들었다. 생전 처음 보는 식재료가 덩어리째 담겨 나오는 냄비라든지 국적을 알 수 없는 주방장이 부엌에서 뛰쳐나 와 알아듣지 못할 말을 건네 온다든지. 불행 중 다행으로 그러한 것들은 죄다 상상에 그쳤지만 그는 늘 뭔가가 바뀐다는 것이 불안했다. 눈앞의 붉은 신호는 바뀌지 않았다. \국기에 대하여 경례!/ 익숙한 사내의 음성이 짧게 메아리쳤다. 국기에 대하여 경례, 경례, 례, 례, 례- 그는 등 뒤에서 들려온 절도 있는 억양에 맞춰 고개를 돌렸다.
샤르봉이 그린 그림
중앙선을 아직 넘지 못하고 멈춰선 그의 반대편 차선으로 승용차 한 대 가 제한속도를 지키며 느릿느릿 지나갔다. 어린이 보호구역 한복판에 선, 사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버린 한 사내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 석 자, 홍, 경, 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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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락사스 vol.7
NOWHERE
조우정 글
주영진 그림
NOWHERE
조우정 글
주영진 그림
하늘에서 달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구름에 가려진 달은 분명 하나일 것이다. 남자가 또 다른 세계로 흘러 든 것이 아니라면. 며칠 전부터 연속적으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이 평화로운 세계 에서 설명하기 꽤나 어려운 비상식적인 것들이었다. 그 일련의 사건들 을 설명하자면, 지금 이 공간이 존재하는 세상이 현실이 정상적인 세계 가 아니거나,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화자의 상식이 정상적인 그 것이 아니어야 했다. 과연 지금 내가 있는 곳이 내가 살아온 그곳이란 말 인가, 하고 남자는 생각했다. 창문 사이로 보이는 거리엔 어느덧 빛이 슬금슬금 기어들고 있었다. 남자가 생각에 열중하고 있는 사이 아침이 밝아왔다 . 아직 사람이 다니지 않는 거리는 조용했으며 가로수들의 푸름도 그러했다. 남자는 양손으로 자신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얼굴부터 엉덩이까지 천천히 만져갔다. 뭔가 달라진 것은 없는 것인가 하고 고민했다. 달라진 것이라 곤 며칠 째 면도를 하지 않아 자라버린 수염 정도였다. 거칠거칠한 그것 1 두 개의 달이라는 개념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에서 빌려왔음을 알려드립 니다.
아브락사스 vol.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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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O W H E R E////////
남자는 달이 두 개가 아닐까1, 하고 생각했다. 구름이 껴있었기 때문에
하늘에서 달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구름에 가려진 달은 분명 하나일 것이다. 남자가 또 다른 세계로 흘러 든 것이 아니라면. 며칠 전부터 연속적으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이 평화로운 세계 에서 설명하기 꽤나 어려운 비상식적인 것들이었다. 그 일련의 사건들 을 설명하자면, 지금 이 공간이 존재하는 세상이 현실이 정상적인 세계 가 아니거나,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화자의 상식이 정상적인 그 것이 아니어야 했다. 과연 지금 내가 있는 곳이 내가 살아온 그곳이란 말 인가, 하고 남자는 생각했다. 창문 사이로 보이는 거리엔 어느덧 빛이 슬금슬금 기어들고 있었다. 남자가 생각에 열중하고 있는 사이 아침이 밝아왔다 . 아직 사람이 다니지 않는 거리는 조용했으며 가로수들의 푸름도 그러했다. 남자는 양손으로 자신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얼굴부터 엉덩이까지 천천히 만져갔다. 뭔가 달라진 것은 없는 것인가 하고 고민했다. 달라진 것이라 곤 며칠 째 면도를 하지 않아 자라버린 수염 정도였다. 거칠거칠한 그것 1 두 개의 달이라는 개념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에서 빌려왔음을 알려드립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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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O W H E R E////////
남자는 달이 두 개가 아닐까1, 하고 생각했다. 구름이 껴있었기 때문에
들의 촉감은 지금 남자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던 도중 향후 출사 계획에 대해 이야기
남자의 방은 어두웠다. 빛이라고는 블라인드 사이로 기어드는 것과
하게 되었고, 남자는 서울 근교에서 출사 장소로 괜찮은 여러 장소에 대
켜져 있는 TV에서 비쳐지는 것 밖에 없었다. 남자는 빛이 두려웠다. 아
해 꺼내놓았다. 그리고 다른 회원들도 남산 시민 아파트로 가면 어떻겠
니 두려워졌다. 남자는 그 장면을 목격한 이후부터 방에 불을 켠 적이 없
냐는 둥, 종마 목장은 어떻겠냐는 둥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종합된 장
다. 목이 탄 남자는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들고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
소들을 인터넷 카페에 올려놓고 투표를 하자는 쪽으로 이야기는 마무
작했다 . 그러나 남자의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 남자는 그 갈증이 헤
리되어 갔다.
어진 연인에 대한 미련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자는 소파에 앉아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으며, 오가는 이야기들도 흠잡을 때가 없었다.
해 전해진다. 어느 도시에선 버스에 누군가 총을 난사했고, 어느 곳에선
그렇게 그날의 모임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문제는 그 후에 있었다.
폭우로 홍수가 났으며, 또 다른 어느 도시에선 폭염으로 사람들이 쓰러
인터넷을 하고 있던 남자는 자주 들어가던 You Tube에 들어갔다. 평
져갔다. 하지만 그가 목격한, 그리고 You Tube를 한동안 달구었던, 그 사
소엔 눈에 띄지 않았던 추천영상이 그날따라 남자의 시선을 붙잡았다.
건에 대해선 나오지 않았다. 세상은 그 사건이 이 세상의 존재하는 지식
그 영상들 가운데서도 폭발적인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는 그 영상의 제
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행위로 생각하거나, 누군가의 퍼포먼스 혹은 컴퓨
목은 ‘Human vaporization’이었다. 인간 증발.
터로 만들어낸 합성 영상으로만 받아들이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이 세상에, 이 현실에 존재하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남자가 아는 한.
처음엔 남자도 누군가 올린 합성 영상인줄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영상을 보고 난 뒤 그는 멍해진 얼굴로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며칠 전 그 모임에서 보았던 A가 영상에 등장했고, 영상의 말미에 그는 존재
얼마 전 남자는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라는 동호회의 오프라인 모
하지 않았다. 그 영상은 A가 있던 거리의 누군가가 핸드폰으로 촬영한
임에 참가했었다. 홍대의 어느 카페에서 모인 사람들은 각자의 커피를
듯 했는데, 끝으로 갈수록 그 핸드폰을 들고 있던 손은 흔들리고 있었다.
시켜 놓고선 카메라 기종과 렌즈 그리고 사진을 찍는 방법 등에 대해서
그 흔들림은 놀라움을 뛰어넘은 두려움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야기를 했다. 캐논에서 새로 나온 기종이 어떻다느니, 니콘에서 나온
어느 공원에서 주변 풍경들을 사진에 담고 있던 A는 조금씩 사라졌
기종은 또 어떻다느니 그 기종에 어울리는 렌즈는 뭐가 좋다며 이야기
다. 가슴 가장자리부터 시작된 증발은 팔과 다리를 마지막으로 멈췄다.
를 꺼냈었다. 남자는 그 동호회에서 꽤나 오래된 회원 중 하나라서 여러
그리고 A가 서 있던 그 자리엔 A가 입고 있던 옷가지들과 바닥에 떨어
사람들이 그에게 카메라나 렌즈에 대해서 이야기를 건넸었다. 남자는
져 부서진 카메라만 남았다. 이것이 그 영상의 전말이었다.
자신이 아는 한 그 질문들에 대해 답변을 해주기도 했으며 그 사람들의
영상에 달린 리플은 동영상이 컴퓨터로 조작되었다는 의견이 거의
생각들도 경청했다. 개중엔 이번 모임에 새롭게 참여한 회원들도 있었
대부분이었다. 인간이 어떻게 증발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TV CF나
는데 그 사람들은 남자를 꽤나 신뢰하는 듯 보였다.
영화의 어느 장면에서 보던 CG를 이용한 장면이라는 것으로 의견은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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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봉이 그린 그림
TV를 본다. 어제와 오늘 세상에서 벌어진 사건과 사고들이 뉴스를 통
들의 촉감은 지금 남자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던 도중 향후 출사 계획에 대해 이야기
남자의 방은 어두웠다. 빛이라고는 블라인드 사이로 기어드는 것과
하게 되었고, 남자는 서울 근교에서 출사 장소로 괜찮은 여러 장소에 대
켜져 있는 TV에서 비쳐지는 것 밖에 없었다. 남자는 빛이 두려웠다. 아
해 꺼내놓았다. 그리고 다른 회원들도 남산 시민 아파트로 가면 어떻겠
니 두려워졌다. 남자는 그 장면을 목격한 이후부터 방에 불을 켠 적이 없
냐는 둥, 종마 목장은 어떻겠냐는 둥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종합된 장
다. 목이 탄 남자는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들고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
소들을 인터넷 카페에 올려놓고 투표를 하자는 쪽으로 이야기는 마무
작했다 . 그러나 남자의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 남자는 그 갈증이 헤
리되어 갔다.
어진 연인에 대한 미련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자는 소파에 앉아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으며, 오가는 이야기들도 흠잡을 때가 없었다.
해 전해진다. 어느 도시에선 버스에 누군가 총을 난사했고, 어느 곳에선
그렇게 그날의 모임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문제는 그 후에 있었다.
폭우로 홍수가 났으며, 또 다른 어느 도시에선 폭염으로 사람들이 쓰러
인터넷을 하고 있던 남자는 자주 들어가던 You Tube에 들어갔다. 평
져갔다. 하지만 그가 목격한, 그리고 You Tube를 한동안 달구었던, 그 사
소엔 눈에 띄지 않았던 추천영상이 그날따라 남자의 시선을 붙잡았다.
건에 대해선 나오지 않았다. 세상은 그 사건이 이 세상의 존재하는 지식
그 영상들 가운데서도 폭발적인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는 그 영상의 제
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행위로 생각하거나, 누군가의 퍼포먼스 혹은 컴퓨
목은 ‘Human vaporization’이었다. 인간 증발.
터로 만들어낸 합성 영상으로만 받아들이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이 세상에, 이 현실에 존재하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남자가 아는 한.
처음엔 남자도 누군가 올린 합성 영상인줄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영상을 보고 난 뒤 그는 멍해진 얼굴로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며칠 전 그 모임에서 보았던 A가 영상에 등장했고, 영상의 말미에 그는 존재
얼마 전 남자는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라는 동호회의 오프라인 모
하지 않았다. 그 영상은 A가 있던 거리의 누군가가 핸드폰으로 촬영한
임에 참가했었다. 홍대의 어느 카페에서 모인 사람들은 각자의 커피를
듯 했는데, 끝으로 갈수록 그 핸드폰을 들고 있던 손은 흔들리고 있었다.
시켜 놓고선 카메라 기종과 렌즈 그리고 사진을 찍는 방법 등에 대해서
그 흔들림은 놀라움을 뛰어넘은 두려움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야기를 했다. 캐논에서 새로 나온 기종이 어떻다느니, 니콘에서 나온
어느 공원에서 주변 풍경들을 사진에 담고 있던 A는 조금씩 사라졌
기종은 또 어떻다느니 그 기종에 어울리는 렌즈는 뭐가 좋다며 이야기
다. 가슴 가장자리부터 시작된 증발은 팔과 다리를 마지막으로 멈췄다.
를 꺼냈었다. 남자는 그 동호회에서 꽤나 오래된 회원 중 하나라서 여러
그리고 A가 서 있던 그 자리엔 A가 입고 있던 옷가지들과 바닥에 떨어
사람들이 그에게 카메라나 렌즈에 대해서 이야기를 건넸었다. 남자는
져 부서진 카메라만 남았다. 이것이 그 영상의 전말이었다.
자신이 아는 한 그 질문들에 대해 답변을 해주기도 했으며 그 사람들의
영상에 달린 리플은 동영상이 컴퓨터로 조작되었다는 의견이 거의
생각들도 경청했다. 개중엔 이번 모임에 새롭게 참여한 회원들도 있었
대부분이었다. 인간이 어떻게 증발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TV CF나
는데 그 사람들은 남자를 꽤나 신뢰하는 듯 보였다.
영화의 어느 장면에서 보던 CG를 이용한 장면이라는 것으로 의견은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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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락사스 vol.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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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봉이 그린 그림
TV를 본다. 어제와 오늘 세상에서 벌어진 사건과 사고들이 뉴스를 통
여졌다. 그리고 그 CG가 굉장히 자연스럽다는 의견으로 마무리되었다. 남자는 새 창을 띄워 즐겨찾기에 저장되어 있는 사진 동호회 주소를 클릭했다. 그리고 카페에 올라온 새 글을 하나 둘 보기 시작했다. 거의 대부분이 A의 이야기였다. A의 일이 사실인 것이냐, 라는 글부터 A가 진짜로 사라졌다는 글까지 게시판이 도배가 되다시피 여러 가지 글들 이 올라와 있었다. 남자는 자신의 볼을 꼬집었다. 꿈이 아니었다. 남자는 어안이 벙벙했다. 왜, 도대체 어떤 이유로 A는 증발했을까. 남자의 머릿 속은 궁금증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없었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뒤 남자는 카페를 찾았다가 놀라운 사실 하나
남자친구와 식사를 하는 도중 증발했다는 것이었다. 식사를 할 때 지난 주말에 있었던 그 동호회 이야기를 하던 도중 계속 ‘존재’가 어쩌고 이 야기를 했었고, 자연스럽게 그 동호회에 단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으로 카페를 찾았다가 A의 사건을 접하게 되었다. D의 남자친구는 믿 기지 않는다는 말만 반복하다가 D의 증발이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문장 으로 글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남자는 점점 이 일들이 ‘장난’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보통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증발이라는 것이 액체가 끓어서 기체가 되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던가. 그런데 인간의 증발이라니. 이런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고 생각하는 남자였다. 남자의 상식은 일반 인의 상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므로 남자의 머리로 인간 증발을 합리 적으로 이해하기는 힘들어보였다 . 어릴 적 보았던 과학백과사전에서 얼핏 보았던 고체가 기체로 바뀌어 공기 중으로 날아가는 현상이 떠오 르긴 했지만, ‘고체’에 ‘인간’을 바꾸어 넣어 본다고 해서 이 어이없는 현 상이 증명될 리 없었다. 인간은 고체, 액체 그 어느 쪽으로 보기에도 무 리가 있는 존재다. 그런데 증발이라니. 이건 너무도 터무니없다. 이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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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더 알게 되었다. 그 오프라인 모임에 참여했던 D라는 여자도 그녀의
여졌다. 그리고 그 CG가 굉장히 자연스럽다는 의견으로 마무리되었다. 남자는 새 창을 띄워 즐겨찾기에 저장되어 있는 사진 동호회 주소를 클릭했다. 그리고 카페에 올라온 새 글을 하나 둘 보기 시작했다. 거의 대부분이 A의 이야기였다. A의 일이 사실인 것이냐, 라는 글부터 A가 진짜로 사라졌다는 글까지 게시판이 도배가 되다시피 여러 가지 글들 이 올라와 있었다. 남자는 자신의 볼을 꼬집었다. 꿈이 아니었다. 남자는 어안이 벙벙했다. 왜, 도대체 어떤 이유로 A는 증발했을까. 남자의 머릿 속은 궁금증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없었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뒤 남자는 카페를 찾았다가 놀라운 사실 하나
남자친구와 식사를 하는 도중 증발했다는 것이었다. 식사를 할 때 지난 주말에 있었던 그 동호회 이야기를 하던 도중 계속 ‘존재’가 어쩌고 이 야기를 했었고, 자연스럽게 그 동호회에 단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으로 카페를 찾았다가 A의 사건을 접하게 되었다. D의 남자친구는 믿 기지 않는다는 말만 반복하다가 D의 증발이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문장 으로 글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남자는 점점 이 일들이 ‘장난’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보통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증발이라는 것이 액체가 끓어서 기체가 되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던가. 그런데 인간의 증발이라니. 이런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고 생각하는 남자였다. 남자의 상식은 일반 인의 상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므로 남자의 머리로 인간 증발을 합리 적으로 이해하기는 힘들어보였다 . 어릴 적 보았던 과학백과사전에서 얼핏 보았던 고체가 기체로 바뀌어 공기 중으로 날아가는 현상이 떠오 르긴 했지만, ‘고체’에 ‘인간’을 바꾸어 넣어 본다고 해서 이 어이없는 현 상이 증명될 리 없었다. 인간은 고체, 액체 그 어느 쪽으로 보기에도 무 리가 있는 존재다. 그런데 증발이라니. 이건 너무도 터무니없다. 이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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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더 알게 되었다. 그 오프라인 모임에 참여했던 D라는 여자도 그녀의
상이 진정 사실이라면 전 세계의 과학자들이 너나할 것 없이 관심을 보
TV에 닿질 않는다. 화면은 더욱 밝아진다. 하지만 남자는 TV에 더 이상
일 문제였다. 남자는 차라리 그런 과학자들이 속 시원히 이 현상에 대해
시선을 두질 않는다. 찻잔 속 에스프레소는 줄어만 가는데 남자의 머릿
규명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이 영상을 본 세계 유수의 천
속의 생각은 더욱 깊어져 갔다.
재―사실 세계 유수의 천재들은 자신이 맡은 연구를 소화하기에도 눈 코 뜰 새 없이 바쁠 테지만―들은 뭘 하고 있는가. 왠지 모르게 분통이
다시 남자는 컴퓨터 앞에 앉는다. 그리고 다시금 인터넷 창을 켜고 A의
터지는 남자다.
동영상을 본다. 어느 영화에서 주인공이 사라질 때 그런 장면과 비슷하 다고 생각한다. 그 장면과 다르다고 한다면 그건 옷가지들이 함께 사라
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들은 죽은 것일까. 남자의 머릿속은 설명되지
지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 아무리 돌려봐도 설명되지 않는다. 어떠한
않는 질문들로만 가득 찼다. 어지러웠다. 당장은 어느 누구도 그 현상들
말로도. 그냥 A는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 시간이
남자는 검색 창에 ‘사라지다’라고 쓴다. 화면에 뜬 ‘사라지다’라는 동사
지난 뒤에도.
의 여러 가지 뜻들을 하나, 둘, 남자는 읊조려 본다.
샤르봉이 그린 그림
/하나, 현상이나 물체의 자취 따위가 없어지다. 둘, 생각이나 감정 에스프레소머신의 추출버튼을 누른 다음 남자는 TV의 채널을 돌린
따위가 없어지다. 셋, 죽다, 를 달리 이르는 말.\
다. 그 사건을 잠시 잊기 위해서 혹은 울렁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 해 남자는 한 잔의 에스프레소와 평소에 즐겨보는 음악프로그램을 선
남자가 읊조리던 세 가지의 뜻들 중 ‘인간증발’을 완벽하게 설명할
택했다. 프로그램이 시작되고 진행자인 유희열이 등장한다. TV로만 보
수 있는 정의는 없다. 이 현상은 분명 세상에 없던 것이니까. 세상에 있
다가 이곳을 찾으니 어떠냐며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여러 가지 말
던 현상들을 말로써 정리해놓은 사전에 이것을 설명할 어떤 단어도 없
들로 관객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늘 유쾌하다. 남자는 유희열
겠지, 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다만 세 가지 뜻들은 ‘인간증발’의 부분, 부
의 말들을 듣다보면 뭔가 모를 즐거움을 느끼곤 했다. 개그프로그램을
분을 설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A와 D의 몸뚱이는 자취도 없이 사라
볼 때의 그런 느낌이 아닌 잔잔하고 편안한 어떤 느낌.
졌으며, 그들의 생각이나 감정도 흔적 없이 없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죽
유희열이 사라진 화면엔 슈프림팀이 등장하고 군대 가버린 다이나
었을지도 모른다―죽지 않고, 차원 다른 어느 세계에 살아있을지도 모
믹 듀오의 노래를 부른다. 남자는 잠시 음악에 몸을 맡긴다. 흥이 난다.
르지만. 모든 설명과 정의들을 제쳐두고서 보더라도 그 현상이 이 세계
힙합이란 건 머리보단 심장, 심장보단 몸이 먼저 반응하는 음악인 것 같
에서 일어날 일이라고는 도대체 생각할 수가 없다. 영화나 소설 따위에
다. 재즈나 알앤비, 발라드와는 다른 어떤 느낌이 귀에 감겨왔다.
서 보던 갑작스런 사라짐은 지금 남자의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온 빛이 TV 모서리에 비친다. 빛 때문에 화면 이 잘 보이질 않는다. 남자는 블라인드를 조절한다. 이제 더 이상 빛이
120
아브락사스 vol.7
남자는 기억을 더듬어 그날 모임으로 돌아간다. A는 다른 회원보다
아브락사스 vol.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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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만약 정말 증발했다면, 그들
상이 진정 사실이라면 전 세계의 과학자들이 너나할 것 없이 관심을 보
TV에 닿질 않는다. 화면은 더욱 밝아진다. 하지만 남자는 TV에 더 이상
일 문제였다. 남자는 차라리 그런 과학자들이 속 시원히 이 현상에 대해
시선을 두질 않는다. 찻잔 속 에스프레소는 줄어만 가는데 남자의 머릿
규명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이 영상을 본 세계 유수의 천
속의 생각은 더욱 깊어져 갔다.
재―사실 세계 유수의 천재들은 자신이 맡은 연구를 소화하기에도 눈 코 뜰 새 없이 바쁠 테지만―들은 뭘 하고 있는가. 왠지 모르게 분통이
다시 남자는 컴퓨터 앞에 앉는다. 그리고 다시금 인터넷 창을 켜고 A의
터지는 남자다.
동영상을 본다. 어느 영화에서 주인공이 사라질 때 그런 장면과 비슷하 다고 생각한다. 그 장면과 다르다고 한다면 그건 옷가지들이 함께 사라
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들은 죽은 것일까. 남자의 머릿속은 설명되지
지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 아무리 돌려봐도 설명되지 않는다. 어떠한
않는 질문들로만 가득 찼다. 어지러웠다. 당장은 어느 누구도 그 현상들
말로도. 그냥 A는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 시간이
남자는 검색 창에 ‘사라지다’라고 쓴다. 화면에 뜬 ‘사라지다’라는 동사
지난 뒤에도.
의 여러 가지 뜻들을 하나, 둘, 남자는 읊조려 본다.
샤르봉이 그린 그림
/하나, 현상이나 물체의 자취 따위가 없어지다. 둘, 생각이나 감정 에스프레소머신의 추출버튼을 누른 다음 남자는 TV의 채널을 돌린
따위가 없어지다. 셋, 죽다, 를 달리 이르는 말.\
다. 그 사건을 잠시 잊기 위해서 혹은 울렁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 해 남자는 한 잔의 에스프레소와 평소에 즐겨보는 음악프로그램을 선
남자가 읊조리던 세 가지의 뜻들 중 ‘인간증발’을 완벽하게 설명할
택했다. 프로그램이 시작되고 진행자인 유희열이 등장한다. TV로만 보
수 있는 정의는 없다. 이 현상은 분명 세상에 없던 것이니까. 세상에 있
다가 이곳을 찾으니 어떠냐며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여러 가지 말
던 현상들을 말로써 정리해놓은 사전에 이것을 설명할 어떤 단어도 없
들로 관객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늘 유쾌하다. 남자는 유희열
겠지, 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다만 세 가지 뜻들은 ‘인간증발’의 부분, 부
의 말들을 듣다보면 뭔가 모를 즐거움을 느끼곤 했다. 개그프로그램을
분을 설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A와 D의 몸뚱이는 자취도 없이 사라
볼 때의 그런 느낌이 아닌 잔잔하고 편안한 어떤 느낌.
졌으며, 그들의 생각이나 감정도 흔적 없이 없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죽
유희열이 사라진 화면엔 슈프림팀이 등장하고 군대 가버린 다이나
었을지도 모른다―죽지 않고, 차원 다른 어느 세계에 살아있을지도 모
믹 듀오의 노래를 부른다. 남자는 잠시 음악에 몸을 맡긴다. 흥이 난다.
르지만. 모든 설명과 정의들을 제쳐두고서 보더라도 그 현상이 이 세계
힙합이란 건 머리보단 심장, 심장보단 몸이 먼저 반응하는 음악인 것 같
에서 일어날 일이라고는 도대체 생각할 수가 없다. 영화나 소설 따위에
다. 재즈나 알앤비, 발라드와는 다른 어떤 느낌이 귀에 감겨왔다.
서 보던 갑작스런 사라짐은 지금 남자의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온 빛이 TV 모서리에 비친다. 빛 때문에 화면 이 잘 보이질 않는다. 남자는 블라인드를 조절한다. 이제 더 이상 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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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기억을 더듬어 그날 모임으로 돌아간다. A는 다른 회원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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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만약 정말 증발했다면, 그들
일찌감치 그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카메라 액정부위를 쳐다보며 있 었고, 남자가 들어서자 일어나 그를 반겼다. 그러고 나서는 그동안 잘 지 냈냐며 말을 건넸었다. 그리고 남자는 그에게 요즘 근황에 대해 답변했 다. 그 후 이 커피숍은 생각보다 분위기가 괜찮다며 이야기 했었다. A는 분위기 뿐 아니라 커피 맛도 생각보다 괜찮을 거라 했다. 그러고 나서 나 머지 회원이 하나 둘 커피숍으로 들어섰고, 또다시 인사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D가 등장했다. 처음 오는 곳이라 커피숍을 찾느라 한참을 헤맸다고 했다. 남자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번화가였고 지하철을 타고 출구로만 나오면 바로 보이는 커피숍이었기 때문이었다 . 남자가 D 를 못한다고 했다. 폐쇄공포증이 조금 심해서 지하로는 잘 내려가지 못한 다고 했다. 그래서 평소에도 버스나 택시만 타고 다닌다고 했던 것이 남 자는 기억이 났다. 그렇다면 폐쇄공포증과 이 증발현상과의 관계는 무 엇인가, 라는 새로운 질문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둘 사이의 관계는 너무 도 멀어보였다. 동호회 사람들이 모두 오고 나서 진행된 질문을 떠올려 본다. \‘HDR리터칭’2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A가 물었다. \매번 하긴 그렇지만 만약 결과물이 워낙 진사의 느낌과 다르다면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단지 노이즈가 심해지긴 하 지만./ 2 High Dynamic Range기법: 일반적인 상황 하에서 찍은 사진은 태양의 강한 광량 에 의해 의도한대로 사진을 담아내기가 어려운데, 이때 보정프로그램으로 사진의 색 감과 계조를 살리는 것을 말한다.
아브락사스 vol.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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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게 된 건 D의 해명을 듣고서였다. 알고 보니 D는 지하철을 타지
일찌감치 그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카메라 액정부위를 쳐다보며 있 었고, 남자가 들어서자 일어나 그를 반겼다. 그러고 나서는 그동안 잘 지 냈냐며 말을 건넸었다. 그리고 남자는 그에게 요즘 근황에 대해 답변했 다. 그 후 이 커피숍은 생각보다 분위기가 괜찮다며 이야기 했었다. A는 분위기 뿐 아니라 커피 맛도 생각보다 괜찮을 거라 했다. 그러고 나서 나 머지 회원이 하나 둘 커피숍으로 들어섰고, 또다시 인사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D가 등장했다. 처음 오는 곳이라 커피숍을 찾느라 한참을 헤맸다고 했다. 남자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번화가였고 지하철을 타고 출구로만 나오면 바로 보이는 커피숍이었기 때문이었다 . 남자가 D 를 못한다고 했다. 폐쇄공포증이 조금 심해서 지하로는 잘 내려가지 못한 다고 했다. 그래서 평소에도 버스나 택시만 타고 다닌다고 했던 것이 남 자는 기억이 났다. 그렇다면 폐쇄공포증과 이 증발현상과의 관계는 무 엇인가, 라는 새로운 질문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둘 사이의 관계는 너무 도 멀어보였다. 동호회 사람들이 모두 오고 나서 진행된 질문을 떠올려 본다. \‘HDR리터칭’2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A가 물었다. \매번 하긴 그렇지만 만약 결과물이 워낙 진사의 느낌과 다르다면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단지 노이즈가 심해지긴 하 지만./ 2 High Dynamic Range기법: 일반적인 상황 하에서 찍은 사진은 태양의 강한 광량 에 의해 의도한대로 사진을 담아내기가 어려운데, 이때 보정프로그램으로 사진의 색 감과 계조를 살리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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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게 된 건 D의 해명을 듣고서였다. 알고 보니 D는 지하철을 타지
\그렇다면 생각하시는 진사의 느낌은 어떤 거죠? 카메라로 현실과
남자는 한참을 존재의 변화에 대해 생각했다. 변화라……. 모든 변
완전히 똑같은 기록을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화의 마지막은 소멸이겠지. 그렇다면 그 소멸이라는 건 죽음을 의미하
\물론, 완전히 같은 모습을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런
는 걸까. 소멸되었을 때의 그 개체는 도대체 어디에 존재하는 거지? 갖
면에선 DSLR보다 필름 카메라가 더 낫다고 생각하기도 하죠. 하지
가지 생각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날 때쯤 D가 남자에게 말을 걸어왔다.
만 모든 사진이 현실의 모습과 무조건 같아야 된다고 생각하진 않아 \카페에서 사진 많이 봤어요. 사진이 너무 좋던데요./
하거든요./
\감사합니다. 잘 봐주신 덕분인걸요./
\항상 똑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구요?/
\어떻게 그렇게 사진을 잘 찍으세요? 구도랑 노출 그런 걸 떠나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당신은 변하고 있어요. 당신을 이루
사진의 분위기가 너무 좋아요. 저는 아무리 찍어도 삭제할 사진 밖
는 세포하나하나가 1초 전 당신과 같지 않다고요. 전 그렇게 생각해
에 남지 않던데……/
요. 그걸 기준으로 생각하면 사진에 담기는 피사체도 사진에 담기기
\꼭 구도랑 그런 것들을 고려해서 사진을 찍는다고 해서 좋은 사진
전이랑 담긴 후의 모습이 같지 않구요. 그렇기 때문에 완전히 똑같
이 나오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좋은 사진이 나오는 건 아마 찍는 사람
은 기록은 없다고 생각해요./
의 감정이 그 사람의 눈동자에 잘 담겨 있을 때 가능한 것 같아요. /
\어렵군요. 전 단지 사진은 기록으로서의 의미가 강하다고 생각하
\좋네요. 감정이 담긴 눈동자라는 것./
거든요. 그래서 최대한 현실의 저와 같은 모습의 기록을 남기고 싶
\제가 그렇다는 건 아니에요, 하하./
다고 생각해요. 전 제가 변하는 게 어쩌면 두려운 걸지도 몰라요./
\카페에 오프 후기를 보고 있으면 굉장히 좋은 말씀 해주시는 분이
\결국 제가 말한 것과 결부되는 것 같네요. 물체는 항상 변하지만
계시다더니 , 어떤 의미인지 오늘 알았네요 . 실례가 아니라면 지금
변한 뒤에 변하기 전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 그런 생각을 하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
게 만드는 것이지 않을까요. 누군가 사진이란 찰나의 미학이라고 말
\그러세요, 그럼./
하기도 하잖아요 . A 님과 제가 생각하는 ‘찰나’라는 개념의 차이가
\말씀대로 감정을 실어 찍어볼게요. 하하. 잘 되진 않겠지만./
조금 있는 것 같네요. 하지만 저도 사진의 매력은 기록이라고 생각 합니다./
남자는 손을 들어 아메리카노 한잔을 더 주문했다. 커피 맛은 좋은
\네, 좋은 말씀 감사해요. 처음 질문과 조금 동떨어지긴 했지만 뭔
곳이지만 리필이 되지 않아 아쉽다고 생각했다. 요즘 남자가 마시는 커
가 많은 걸 얻은 느낌이에요. /
피 량은 나날이 늘어만 갔다. 정확히 따지자면 하루에 열 잔은 족히 마시
\별 말씀을요./
는 것 같았다. 어느 날 부터인가 남자는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뭔가 모르 게 불안하다고 느꼈다. 그렇게 커피를 한두 잔 매일 마시다보니 양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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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봉이 그린 그림
요. 세상의 모든 건 항상 똑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
\그렇다면 생각하시는 진사의 느낌은 어떤 거죠? 카메라로 현실과
남자는 한참을 존재의 변화에 대해 생각했다. 변화라……. 모든 변
완전히 똑같은 기록을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화의 마지막은 소멸이겠지. 그렇다면 그 소멸이라는 건 죽음을 의미하
\물론, 완전히 같은 모습을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런
는 걸까. 소멸되었을 때의 그 개체는 도대체 어디에 존재하는 거지? 갖
면에선 DSLR보다 필름 카메라가 더 낫다고 생각하기도 하죠. 하지
가지 생각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날 때쯤 D가 남자에게 말을 걸어왔다.
만 모든 사진이 현실의 모습과 무조건 같아야 된다고 생각하진 않아 \카페에서 사진 많이 봤어요. 사진이 너무 좋던데요./
하거든요./
\감사합니다. 잘 봐주신 덕분인걸요./
\항상 똑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구요?/
\어떻게 그렇게 사진을 잘 찍으세요? 구도랑 노출 그런 걸 떠나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당신은 변하고 있어요. 당신을 이루
사진의 분위기가 너무 좋아요. 저는 아무리 찍어도 삭제할 사진 밖
는 세포하나하나가 1초 전 당신과 같지 않다고요. 전 그렇게 생각해
에 남지 않던데……/
요. 그걸 기준으로 생각하면 사진에 담기는 피사체도 사진에 담기기
\꼭 구도랑 그런 것들을 고려해서 사진을 찍는다고 해서 좋은 사진
전이랑 담긴 후의 모습이 같지 않구요. 그렇기 때문에 완전히 똑같
이 나오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좋은 사진이 나오는 건 아마 찍는 사람
은 기록은 없다고 생각해요./
의 감정이 그 사람의 눈동자에 잘 담겨 있을 때 가능한 것 같아요. /
\어렵군요. 전 단지 사진은 기록으로서의 의미가 강하다고 생각하
\좋네요. 감정이 담긴 눈동자라는 것./
거든요. 그래서 최대한 현실의 저와 같은 모습의 기록을 남기고 싶
\제가 그렇다는 건 아니에요, 하하./
다고 생각해요. 전 제가 변하는 게 어쩌면 두려운 걸지도 몰라요./
\카페에 오프 후기를 보고 있으면 굉장히 좋은 말씀 해주시는 분이
\결국 제가 말한 것과 결부되는 것 같네요. 물체는 항상 변하지만
계시다더니 , 어떤 의미인지 오늘 알았네요 . 실례가 아니라면 지금
변한 뒤에 변하기 전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 그런 생각을 하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
게 만드는 것이지 않을까요. 누군가 사진이란 찰나의 미학이라고 말
\그러세요, 그럼./
하기도 하잖아요 . A 님과 제가 생각하는 ‘찰나’라는 개념의 차이가
\말씀대로 감정을 실어 찍어볼게요. 하하. 잘 되진 않겠지만./
조금 있는 것 같네요. 하지만 저도 사진의 매력은 기록이라고 생각 합니다./
남자는 손을 들어 아메리카노 한잔을 더 주문했다. 커피 맛은 좋은
\네, 좋은 말씀 감사해요. 처음 질문과 조금 동떨어지긴 했지만 뭔
곳이지만 리필이 되지 않아 아쉽다고 생각했다. 요즘 남자가 마시는 커
가 많은 걸 얻은 느낌이에요. /
피 량은 나날이 늘어만 갔다. 정확히 따지자면 하루에 열 잔은 족히 마시
\별 말씀을요./
는 것 같았다. 어느 날 부터인가 남자는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뭔가 모르 게 불안하다고 느꼈다. 그렇게 커피를 한두 잔 매일 마시다보니 양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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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봉이 그린 그림
요. 세상의 모든 건 항상 똑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
렇게 늘어버렸다. 이젠 하루를 지내며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는 것은 상
생각하지 않으셔도 인간은 늘 존재하는 걸요./
상도 할 수 없는 남자였다. 줄여보려 했지만 손이 떨리는 증상이 생기거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 저는 가끔 저라는 존재가 애초부터 존
나, 불안감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흔히 말하는 카페인 중독이
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도 하거든요. 단지 저를 저라고 생각하는
아닐까 남자는 생각했다. 주문한 커피가 남자 앞에 놓이고서야 D에게
의식만 있을 뿐./
다시금 말을 걸 수 있었다.
\뭐 어찌 보면 단순한 내용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시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그걸 제가 뭐 어찌 할 수 없지만요./ \객체니 오브제니 물자체니 이런 거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어려워
\아니요, 큰 이유는 없어요. 단지, 추억을 남기고 싶어서요./
서 가끔 스스로의 인식 자체가 허물어질 때도 있어요. 뭐, 이런 것 다
\추억이라니요. 일종의 자기 기록 같은 거 말하는 건가요?/
부질 없는 것일 수도 있어요. 지금 저와 님에게는요. 어찌되었든 바
\아뇨, 연애하는 거 말이에요. 소소하게 남기고 싶은 그런 욕구, 그
래버린 폴라로이드 사진도 그 자체로서 추억이 아닐까요. /
런 것 같아요. 사실 전 폴라로이드 사진을 많이 찍었어요. 그런데 폴
샤르봉이 그린 그림
라로이드 사진은 색이 바래더라고요. 조금 오래되고, 보관을 잘못하
남자는 D 에게 너무 터무니없는 말을 한 건 아닌가하고 고민했었
면 아예 사라지기도 하구요. 증발한다고 해야 할까요. 뭐, 폴라로이
다.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의미에 대해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
드 필름이 비싼 것도 있고, 이제 단종된다 그러기도 하고……. 아무
는 것에 대해 괜한 자책감이 들었다. 매번 오프 모임을 할 때마다 이야기
튼 여러 가지 이유로 DSLR에 관심을 두게 되었어요./
를 건네 오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었고 그런 사람들에게 남자는 어딘
\나중에 짐이 되지 않을까요? 차라리 폴라로이드가 좋은 것일 수도
가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재해석하거나 합쳐서 이야기하곤 했었다. 처
있어요. 시기적절하게 사라져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요. 지
음엔 그런 것들에 대해 죄책감이라는 것이 없었지만, 최근 들어 그런 느
금 이 시기에 이런 말 하는 게 웃긴 이야기인 건 잘 알고 있지만, 헤어
낌이 들곤 했다. ‘임기응변’이라는 장치가 남자의 머릿속 깊숙이 설치되
진 후에 남은 사진이란 건 마음의 짐 같이 느껴지던 걸요./
어 있어서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스위치가 작동되는 것만 같았다. 이
\너무 부정적인 생각 같은데요 , 저에겐 . 그 나름대로 추억이라고
런 번지르르한 말들을 남자는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자가 말
생각해요. 결국 ‘마음의 짐’도 내가 이렇게 살았다는 기록이지 않을
했던 폴라로이드 사진의 사라짐이 묘하게 남자의 머릿속에 자리 잡았
까요? 그 기록이 사라진다면 불쾌할 것 같아요, 정말. 그리고 너무 좋
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차라리 A와 이야기
은 것만 기억하려는 것도 이기적인 일 같아요./
한 존재라는 것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하고 싶어졌다. 사진과 존재를 결합
\가끔은 이기적일 필요도 있는 거니까요……. 자신이 올곧게 존재
해서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위가 여러 이야기
하려면, 가끔은 자의에 의한 착각도 필요한 것 같다고 생각해요./
들로 산만해서 그 주제에 대해 집중할 수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남자의
\존재라는 것에 너무 신경 쓰고 계시는 거 아니세요. 굳이 그렇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는 생각은 이들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였다. 가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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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잘 찍고 싶은 이유라도 있으세요?/
렇게 늘어버렸다. 이젠 하루를 지내며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는 것은 상
생각하지 않으셔도 인간은 늘 존재하는 걸요./
상도 할 수 없는 남자였다. 줄여보려 했지만 손이 떨리는 증상이 생기거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 저는 가끔 저라는 존재가 애초부터 존
나, 불안감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흔히 말하는 카페인 중독이
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도 하거든요. 단지 저를 저라고 생각하는
아닐까 남자는 생각했다. 주문한 커피가 남자 앞에 놓이고서야 D에게
의식만 있을 뿐./
다시금 말을 걸 수 있었다.
\뭐 어찌 보면 단순한 내용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시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그걸 제가 뭐 어찌 할 수 없지만요./ \객체니 오브제니 물자체니 이런 거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어려워
\아니요, 큰 이유는 없어요. 단지, 추억을 남기고 싶어서요./
서 가끔 스스로의 인식 자체가 허물어질 때도 있어요. 뭐, 이런 것 다
\추억이라니요. 일종의 자기 기록 같은 거 말하는 건가요?/
부질 없는 것일 수도 있어요. 지금 저와 님에게는요. 어찌되었든 바
\아뇨, 연애하는 거 말이에요. 소소하게 남기고 싶은 그런 욕구, 그
래버린 폴라로이드 사진도 그 자체로서 추억이 아닐까요. /
런 것 같아요. 사실 전 폴라로이드 사진을 많이 찍었어요. 그런데 폴
샤르봉이 그린 그림
라로이드 사진은 색이 바래더라고요. 조금 오래되고, 보관을 잘못하
남자는 D 에게 너무 터무니없는 말을 한 건 아닌가하고 고민했었
면 아예 사라지기도 하구요. 증발한다고 해야 할까요. 뭐, 폴라로이
다.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의미에 대해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
드 필름이 비싼 것도 있고, 이제 단종된다 그러기도 하고……. 아무
는 것에 대해 괜한 자책감이 들었다. 매번 오프 모임을 할 때마다 이야기
튼 여러 가지 이유로 DSLR에 관심을 두게 되었어요./
를 건네 오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었고 그런 사람들에게 남자는 어딘
\나중에 짐이 되지 않을까요? 차라리 폴라로이드가 좋은 것일 수도
가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재해석하거나 합쳐서 이야기하곤 했었다. 처
있어요. 시기적절하게 사라져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요. 지
음엔 그런 것들에 대해 죄책감이라는 것이 없었지만, 최근 들어 그런 느
금 이 시기에 이런 말 하는 게 웃긴 이야기인 건 잘 알고 있지만, 헤어
낌이 들곤 했다. ‘임기응변’이라는 장치가 남자의 머릿속 깊숙이 설치되
진 후에 남은 사진이란 건 마음의 짐 같이 느껴지던 걸요./
어 있어서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스위치가 작동되는 것만 같았다. 이
\너무 부정적인 생각 같은데요 , 저에겐 . 그 나름대로 추억이라고
런 번지르르한 말들을 남자는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자가 말
생각해요. 결국 ‘마음의 짐’도 내가 이렇게 살았다는 기록이지 않을
했던 폴라로이드 사진의 사라짐이 묘하게 남자의 머릿속에 자리 잡았
까요? 그 기록이 사라진다면 불쾌할 것 같아요, 정말. 그리고 너무 좋
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차라리 A와 이야기
은 것만 기억하려는 것도 이기적인 일 같아요./
한 존재라는 것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하고 싶어졌다. 사진과 존재를 결합
\가끔은 이기적일 필요도 있는 거니까요……. 자신이 올곧게 존재
해서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위가 여러 이야기
하려면, 가끔은 자의에 의한 착각도 필요한 것 같다고 생각해요./
들로 산만해서 그 주제에 대해 집중할 수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남자의
\존재라는 것에 너무 신경 쓰고 계시는 거 아니세요. 굳이 그렇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는 생각은 이들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였다. 가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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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잘 찍고 싶은 이유라도 있으세요?/
보는 이들과의 관계. 현실에서의 나와 인터넷상에서의 나. 뭐 이런 중요
소파에서 일어난 남자는 에스프레소 추출버튼을 누른 다음 책장 쪽으
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한없이 쓸모없는 생각들이 그날 남자의 머릿
로 걸어갔다. 여러 가지 책이 꽂혀 있는 책장 아래 카메라 가방이 있었
속에서 맴돌았다.
다. 조금 두툼한 천으로 만들어진 가방 안에는 남자가 아끼는 값비싼 카 메라와 렌즈 몇 개가 있다. 그리고 가방 왼쪽 주머니에는 남자가 얼마 전
켜놓은 TV 속 유희열은 어느새 의자에 앉아 슈프림팀과 이야기하 고 있다.
에 산 이석원의 ‹보통의 존재›라는 책이 꽂혀 있다. 병아리 혹은 개나리 를 연상케 하는 노란색 표지와 오밀조밀한 글씨 쓰여 있는 책 제목이 인
“슈프림팀 두 분 나오셨습니다. 소개 좀 부탁드릴게요.”
상적이었다. 남자는 카메라를 꺼내려다 말고 사라진 그들과 논했던 ‘존
“안녕하세요. 이센스라고 하고요. 슈프림팀에서 랩을 하고 있구요.
재’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샛노란 책을 집어 들고 제목을 한참
랩을 하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슈프림팀의 쌈디라고 합니다.”
샤르봉이 그린 그림
“네, 얼핏 들으면 영어를 되게 잘하실 것 같은데, 자세히 들어보면 억 양이 사투리시네요. 하하”
남자는 한참을 생각했다. 책을 내려놓은 남자는 책장 옆에 걸려놓은 거울을 본다. 거울 속 비 친 자신의 모습을 찬찬히 살핀다. 뒤로 묶어놓은 머리, 주름이 간 이마, 충혈 된 눈동자, 그리고 까슬한 수염이 덥힌 턱. 남자는 부쩍 늙어버린
“저 영어 못해요. 여권도 없고요. 비행기도 타본 적 없어요.”
자신의 얼굴을 보며 자신은 또 어떠한 존재일까, 하고 생각했다. 돌아선
“아, 비행기는 제주도에서 행사 있을 때 한번 타봤어요. 한번”
그는 에스프레소 잔을 들었다 . 그리고 ‹가장 보통의 존재›라는 노래를
“고향이 어디신가요”
떠올렸다. 남자가 얼마 간 들었던 노래들 중 가사가 가슴에 와 닿았다고
“프롬 부쎈∼! 부쎈∼!”
생각한 노래였다. 그 노래의 가사 중엔 이런 구절이 있다.
“하하하.” “힙합하시는 분들은 영어를 꽤 많이 쓰시잖아요, 주로 어떤 게 있을 까요?”
언제였나 너는 영원히 꿈속으로 떠나버렸지 나는 보통의 존재
“부쳐 핸즈 업∼! 부쳐 핸즈 업∼! Say 예∼! Say 예∼! ”
어디에나 흔하지
“그리고 또 어떤 게?”
당신의 기억 속에 남겨질 수 없었지
“유you∼희열Here∼! 유you∼희열Here∼! ”
가장 보통의 존재
“하하하, 절 불러주신 분 중에 가장 거칠게 불러주신 분 같아요.” 슈프림 팀의 짓궂음에 유희열이 답했고, 관객은 호응했다. 남자는 최근 본 방송 중에 가장 유쾌한 장면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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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락사스 vol.7
남자는 사라져버린 A 에 대해 생각한다 . 그리고 D 를 생각한다 . 그 들은 꿈속으로 사라져 버린 걸까. 커피 향처럼 공중으로 흩어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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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소개가 재밌으시네요.”
이나 쳐다봤다. 보통의 존재. 보통의 존재. 도대체 보통의 존재가 뭐지?
보는 이들과의 관계. 현실에서의 나와 인터넷상에서의 나. 뭐 이런 중요
소파에서 일어난 남자는 에스프레소 추출버튼을 누른 다음 책장 쪽으
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한없이 쓸모없는 생각들이 그날 남자의 머릿
로 걸어갔다. 여러 가지 책이 꽂혀 있는 책장 아래 카메라 가방이 있었
속에서 맴돌았다.
다. 조금 두툼한 천으로 만들어진 가방 안에는 남자가 아끼는 값비싼 카 메라와 렌즈 몇 개가 있다. 그리고 가방 왼쪽 주머니에는 남자가 얼마 전
켜놓은 TV 속 유희열은 어느새 의자에 앉아 슈프림팀과 이야기하 고 있다.
에 산 이석원의 ‹보통의 존재›라는 책이 꽂혀 있다. 병아리 혹은 개나리 를 연상케 하는 노란색 표지와 오밀조밀한 글씨 쓰여 있는 책 제목이 인
“슈프림팀 두 분 나오셨습니다. 소개 좀 부탁드릴게요.”
상적이었다. 남자는 카메라를 꺼내려다 말고 사라진 그들과 논했던 ‘존
“안녕하세요. 이센스라고 하고요. 슈프림팀에서 랩을 하고 있구요.
재’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샛노란 책을 집어 들고 제목을 한참
랩을 하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슈프림팀의 쌈디라고 합니다.”
샤르봉이 그린 그림
“네, 얼핏 들으면 영어를 되게 잘하실 것 같은데, 자세히 들어보면 억 양이 사투리시네요. 하하”
남자는 한참을 생각했다. 책을 내려놓은 남자는 책장 옆에 걸려놓은 거울을 본다. 거울 속 비 친 자신의 모습을 찬찬히 살핀다. 뒤로 묶어놓은 머리, 주름이 간 이마, 충혈 된 눈동자, 그리고 까슬한 수염이 덥힌 턱. 남자는 부쩍 늙어버린
“저 영어 못해요. 여권도 없고요. 비행기도 타본 적 없어요.”
자신의 얼굴을 보며 자신은 또 어떠한 존재일까, 하고 생각했다. 돌아선
“아, 비행기는 제주도에서 행사 있을 때 한번 타봤어요. 한번”
그는 에스프레소 잔을 들었다 . 그리고 ‹가장 보통의 존재›라는 노래를
“고향이 어디신가요”
떠올렸다. 남자가 얼마 간 들었던 노래들 중 가사가 가슴에 와 닿았다고
“프롬 부쎈∼! 부쎈∼!”
생각한 노래였다. 그 노래의 가사 중엔 이런 구절이 있다.
“하하하.” “힙합하시는 분들은 영어를 꽤 많이 쓰시잖아요, 주로 어떤 게 있을 까요?”
언제였나 너는 영원히 꿈속으로 떠나버렸지 나는 보통의 존재
“부쳐 핸즈 업∼! 부쳐 핸즈 업∼! Say 예∼! Say 예∼! ”
어디에나 흔하지
“그리고 또 어떤 게?”
당신의 기억 속에 남겨질 수 없었지
“유you∼희열Here∼! 유you∼희열Here∼! ”
가장 보통의 존재
“하하하, 절 불러주신 분 중에 가장 거칠게 불러주신 분 같아요.” 슈프림 팀의 짓궂음에 유희열이 답했고, 관객은 호응했다. 남자는 최근 본 방송 중에 가장 유쾌한 장면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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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사라져버린 A 에 대해 생각한다 . 그리고 D 를 생각한다 . 그 들은 꿈속으로 사라져 버린 걸까. 커피 향처럼 공중으로 흩어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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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소개가 재밌으시네요.”
이나 쳐다봤다. 보통의 존재. 보통의 존재. 도대체 보통의 존재가 뭐지?
그들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사라진 그들은 보통의 존재들인 것일까. 가
엔 초라하게 울고 있는 그와 비에 젖어 번지는 수채화 같은 풍경이 보인
장 보통의 존재인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남자는 답을 알 수 없
다. 남자는 창을 부숴야겠다고 생각한다. 주먹을 쥐고 여러 번 창을 두들
다.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답은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긴다. 그와 풍경이 고여 있던 창문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깨어져 파편이
빈 잔을 탁자 위에 아무렇게 내려놓고 남자는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
된다.
낸다. 그리고 방 전체를 찍을 수 있는 구석에 삼각대를 세우고 카메라를
창밖의 비가 멈추고 구름 사이로 태양이 드러났다. 그리고 볕은 깨
세팅해 놓는다. 길 한가운데서 어이없이 사라진 A와 동영상 따위의 흔
진 유리 사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A와 D를 가져간 것이 이 빛일지도
적을 남겨놓지 않고 사라져버린 D를 생각하며 자신의 마지막은 사진으
모른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그 생각이 든 순간 빛은 성큼 남자에게 다가
로 기록하리라 생각한다. 가장 보통의 존재로서의 기록.
왔다. 그리고 남자는 증발하기 시작했다. 지글지글, 이런 소리도 없이 남
남자는 리모컨을 이용해 카메라를 조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이
에서 맞이했던 어떤 빛보다 강렬하게 다가왔다.
이 그를 덮친다. 자신이 변하는 게 두렵다는 A의 말과 사라지는 자신의
샤르봉이 그린 그림
모습을 남기지 못하고 증발해버린 D 가 떠오른다 . 남자는 지금이라도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지금 이 세상은 어디이며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
자신의 모습을 남기고 싶다. 셔터가 한 번씩 여닫힐 때마다 남자의 모습
까. 이렇게 사라질 만큼 나는 내 인생을 허무하게 살았을까. 답이 없는
은 카메라에 담긴다. 카메라는 감정이 담긴 눈동자 없이도 남자의 모습
질문들이 남자의 뇌 속에 자리 잡았고, 남자의 손에선 붉은 피가 바닥을
을 기록한다. 아무렇지 않게.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켜져 있는 TV는 방 안 공기에 계속 전파를 쏘아
블라인드 너머로 빗소리가 들린다. 갑작스레 내리는 소나기인 듯했
댔으며, 방구석의 카메라는 표정 없이 그의 모습을 담았다. 그리고 어느
다. 남자는 블라인드 너머로 창밖 풍경을 본다. 어느 샌가 몰려온 먹구름
덧 남자는 머리와 목만 남았다. 그의 표정은 왠지 모르게 억울했다. 종착
에서 비가 떨어진다. 한없이. 풍경은 물감으로 그려놓은 수채화 같아서
지를 모르는 소멸은 억울함을 남기는 듯했다. 그가 내뱉은 마지막 소리
금방이라도 지워질 듯 했다. 마치 그곳엔 아무 것도 없었던 것처럼. 여러
는 이러했다.
가닥의 물줄기가 창을 타고 흐른다. 멀리 풍경을 응시하던 남자의 눈동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자는 창에 맺힌 물줄기를 응시한다. 얼마 안 되어 남자의 눈에도 눈물이 고인다. 비릿한 풍경 탓일까. 아니면 사라져 버린 그들 때문일까 혹은 자
TV화면에선 아직도 유희열과 이야기하고 있는 슈프림팀의 능글맞
신이 세상에 너무도 흔한 보통의 존재라는 생각이 만들어낸 불안감 때
은 모습이 방 안으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남자가 입고 있던 옷가지들이
문일까.
바닥에 떨어졌을 때 빛은 방의 어느 바닥을 비추고 있었고 그 빛 사이에
고였던 눈물이 남자의 볼을 타고 흐른다. 흐르는 눈물의 모습이 빗 물과 함께 창에 비친다. 남자는 그 모습에 울컥 화가 치민다. 아직도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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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먼지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남자가 떠나버린 방안에는 TV 속 능 글맞은 사이먼 D의 외침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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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긴 방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남자는 불안하다. 이름 모를 불안감
자의 몸통 가장자리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다. 빛은 남자가 살아온 인생
그들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사라진 그들은 보통의 존재들인 것일까. 가
엔 초라하게 울고 있는 그와 비에 젖어 번지는 수채화 같은 풍경이 보인
장 보통의 존재인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남자는 답을 알 수 없
다. 남자는 창을 부숴야겠다고 생각한다. 주먹을 쥐고 여러 번 창을 두들
다.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답은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긴다. 그와 풍경이 고여 있던 창문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깨어져 파편이
빈 잔을 탁자 위에 아무렇게 내려놓고 남자는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
된다.
낸다. 그리고 방 전체를 찍을 수 있는 구석에 삼각대를 세우고 카메라를
창밖의 비가 멈추고 구름 사이로 태양이 드러났다. 그리고 볕은 깨
세팅해 놓는다. 길 한가운데서 어이없이 사라진 A와 동영상 따위의 흔
진 유리 사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A와 D를 가져간 것이 이 빛일지도
적을 남겨놓지 않고 사라져버린 D를 생각하며 자신의 마지막은 사진으
모른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그 생각이 든 순간 빛은 성큼 남자에게 다가
로 기록하리라 생각한다. 가장 보통의 존재로서의 기록.
왔다. 그리고 남자는 증발하기 시작했다. 지글지글, 이런 소리도 없이 남
남자는 리모컨을 이용해 카메라를 조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이
에서 맞이했던 어떤 빛보다 강렬하게 다가왔다.
이 그를 덮친다. 자신이 변하는 게 두렵다는 A의 말과 사라지는 자신의
샤르봉이 그린 그림
모습을 남기지 못하고 증발해버린 D 가 떠오른다 . 남자는 지금이라도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지금 이 세상은 어디이며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
자신의 모습을 남기고 싶다. 셔터가 한 번씩 여닫힐 때마다 남자의 모습
까. 이렇게 사라질 만큼 나는 내 인생을 허무하게 살았을까. 답이 없는
은 카메라에 담긴다. 카메라는 감정이 담긴 눈동자 없이도 남자의 모습
질문들이 남자의 뇌 속에 자리 잡았고, 남자의 손에선 붉은 피가 바닥을
을 기록한다. 아무렇지 않게.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켜져 있는 TV는 방 안 공기에 계속 전파를 쏘아
블라인드 너머로 빗소리가 들린다. 갑작스레 내리는 소나기인 듯했
댔으며, 방구석의 카메라는 표정 없이 그의 모습을 담았다. 그리고 어느
다. 남자는 블라인드 너머로 창밖 풍경을 본다. 어느 샌가 몰려온 먹구름
덧 남자는 머리와 목만 남았다. 그의 표정은 왠지 모르게 억울했다. 종착
에서 비가 떨어진다. 한없이. 풍경은 물감으로 그려놓은 수채화 같아서
지를 모르는 소멸은 억울함을 남기는 듯했다. 그가 내뱉은 마지막 소리
금방이라도 지워질 듯 했다. 마치 그곳엔 아무 것도 없었던 것처럼. 여러
는 이러했다.
가닥의 물줄기가 창을 타고 흐른다. 멀리 풍경을 응시하던 남자의 눈동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자는 창에 맺힌 물줄기를 응시한다. 얼마 안 되어 남자의 눈에도 눈물이 고인다. 비릿한 풍경 탓일까. 아니면 사라져 버린 그들 때문일까 혹은 자
TV화면에선 아직도 유희열과 이야기하고 있는 슈프림팀의 능글맞
신이 세상에 너무도 흔한 보통의 존재라는 생각이 만들어낸 불안감 때
은 모습이 방 안으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남자가 입고 있던 옷가지들이
문일까.
바닥에 떨어졌을 때 빛은 방의 어느 바닥을 비추고 있었고 그 빛 사이에
고였던 눈물이 남자의 볼을 타고 흐른다. 흐르는 눈물의 모습이 빗 물과 함께 창에 비친다. 남자는 그 모습에 울컥 화가 치민다. 아직도 창
130
아브락사스 vol.7
잔잔한 먼지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남자가 떠나버린 방안에는 TV 속 능 글맞은 사이먼 D의 외침만 남았다.
아브락사스 vol.7
131
\\\\\\\\N O W H E R E////////
담긴 방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남자는 불안하다. 이름 모를 불안감
자의 몸통 가장자리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다. 빛은 남자가 살아온 인생
\You, Here!/
\\\\\\\\N O W H E R E////////
133 아브락사스 vol.7
\You, Here!/
\\\\\\\\N O W H E R E////////
133 아브락사스 vol.7
너에게, 24+0
샤르봉
너에게, 24+0
샤르봉
여길 봐. 나는 아직 살아 있다. 이를 악문다. 시체 냄새 나는 현실 속에서 나는 꽃을 그리진 않을 테다. 차라리 괴물. 그래. 꽃이라 불리 우지만 아름답지 않기에 꺾여 져도 된다는 괴상한 꽃들 속에서 나는 괴물이 될 테다. 때론 꽃, 때론 괴물. 마치 너 같은. 그래서 이 문장들을 너에게 준다. 마치 문신 같은. 스물네 개. 내 삶의 햇수, 역겨운, 딱 그만큼만. 자, 다가와 만지렴.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나로부터.
아브락사스 vol.7
137
\\\\\\\\\너에게, 24+0/////////
너에게
여길 봐. 나는 아직 살아 있다. 이를 악문다. 시체 냄새 나는 현실 속에서 나는 꽃을 그리진 않을 테다. 차라리 괴물. 그래. 꽃이라 불리 우지만 아름답지 않기에 꺾여 져도 된다는 괴상한 꽃들 속에서 나는 괴물이 될 테다. 때론 꽃, 때론 괴물. 마치 너 같은. 그래서 이 문장들을 너에게 준다. 마치 문신 같은. 스물네 개. 내 삶의 햇수, 역겨운, 딱 그만큼만. 자, 다가와 만지렴.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나로부터.
아브락사스 vol.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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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24+0/////////
너에게
24
20
난 존재하느라 으깨어진 것 같아. 그게 내게 그림을 그리겠다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어. bar로 가고 있는 것 같아. 그런데 그게
욕망을 주지. 하나의 그림이 시작되면 난, 모든 걸 새로 시작할 수
뭐지. 교육 받고 싶지 않아.
있어. 난, 도구를, 알고 있어. 그 안에서 난 힘이 아주 세지. 그러니 이봐.
일생동안 그린다는 것. 그것만이 그린다는 것을 가르치지.
내 그림을 해석하려 애쓰지 마. 그 따위 것 개에게나 갖다 줘. 아주 못생기고 못난 버릇없는 개새끼들에게.
19 시를 썼어. 좋아, 난 단어들을 찾아냈지. 그리곤 한강에 흘려보냈어. 내 꿈의 모가지 하나. 푹 삶아낸 휴지 조각처럼 가라앉더군. 물살에
23
헤집어진 죽은 잉어. 그 빌어먹을 것이 내 시를 삼켜버렸어.
나 : 내 손끝에서 그것들이 그려지니까.
샤르봉이 그린 그림
당신 : 그럼 나는 왜 그림을 그리죠? 나 : 그것들이 당신 손끝을 원하고 있으니까.
18 서로를 이해하기엔 우리가 너무 가진 게 많다. 그것들을 소유하기 위해 너무나 열심히 살아온 기억들, 그것들이 무게가 되어 나를 누른다. 어쩌면 가지기 위해 가졌던 것들 속에 정작 내 삶은 제대로 가졌었나.
22 이 하얀 종이 안에 나의 살갗이 있어. 너는 그것들을 찾아내야만 해.
찾아온 의문과 그럼에도 답하지 못하는 이맘과 내 태도에 눈물이
그래, 찾아낼 수 있을 거야.
흐른다. 태어나고 사는 게 잘못도 아닌데 우린 왜 이토록 죄인같이
너가 만져볼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이 그림 속에서 기다리고 있잖아.
살아야 하나. 피지 못할 꽃도 향기를 품고 나비를 기다리는데 우리가
차갑고, 뜨거운 것.
품길 희망하는 내일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나. 빌어먹을 현실.
21
17
너를 사랑해. 너무나 사랑해. 괴물 같은 너를. 우리 사이에 놓인 그
그림은 아무것도 아니야. 문학도 아무것도 아니야. 그것들은 그 무엇도
무엇까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간 결국, 감정은 사라 질 테지.
될 수 없어. 그저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들. 마치 잉여 된 쌀 한 톨과도
씨발.
같이, 버려진 길 고양이의 쓸쓸한 로드킬 같이.
138
아브락사스 vol.7
아브락사스 vol.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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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24+0/////////
당신 : 당신은 왜 그림을 그리죠?
24
20
난 존재하느라 으깨어진 것 같아. 그게 내게 그림을 그리겠다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어. bar로 가고 있는 것 같아. 그런데 그게
욕망을 주지. 하나의 그림이 시작되면 난, 모든 걸 새로 시작할 수
뭐지. 교육 받고 싶지 않아.
있어. 난, 도구를, 알고 있어. 그 안에서 난 힘이 아주 세지. 그러니 이봐.
일생동안 그린다는 것. 그것만이 그린다는 것을 가르치지.
내 그림을 해석하려 애쓰지 마. 그 따위 것 개에게나 갖다 줘. 아주 못생기고 못난 버릇없는 개새끼들에게.
19 시를 썼어. 좋아, 난 단어들을 찾아냈지. 그리곤 한강에 흘려보냈어. 내 꿈의 모가지 하나. 푹 삶아낸 휴지 조각처럼 가라앉더군. 물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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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집어진 죽은 잉어. 그 빌어먹을 것이 내 시를 삼켜버렸어.
나 : 내 손끝에서 그것들이 그려지니까.
샤르봉이 그린 그림
당신 : 그럼 나는 왜 그림을 그리죠? 나 : 그것들이 당신 손끝을 원하고 있으니까.
18 서로를 이해하기엔 우리가 너무 가진 게 많다. 그것들을 소유하기 위해 너무나 열심히 살아온 기억들, 그것들이 무게가 되어 나를 누른다. 어쩌면 가지기 위해 가졌던 것들 속에 정작 내 삶은 제대로 가졌었나.
22 이 하얀 종이 안에 나의 살갗이 있어. 너는 그것들을 찾아내야만 해.
찾아온 의문과 그럼에도 답하지 못하는 이맘과 내 태도에 눈물이
그래, 찾아낼 수 있을 거야.
흐른다. 태어나고 사는 게 잘못도 아닌데 우린 왜 이토록 죄인같이
너가 만져볼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이 그림 속에서 기다리고 있잖아.
살아야 하나. 피지 못할 꽃도 향기를 품고 나비를 기다리는데 우리가
차갑고, 뜨거운 것.
품길 희망하는 내일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나. 빌어먹을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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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사랑해. 너무나 사랑해. 괴물 같은 너를. 우리 사이에 놓인 그
그림은 아무것도 아니야. 문학도 아무것도 아니야. 그것들은 그 무엇도
무엇까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간 결국, 감정은 사라 질 테지.
될 수 없어. 그저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들. 마치 잉여 된 쌀 한 톨과도
씨발.
같이, 버려진 길 고양이의 쓸쓸한 로드킬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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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락사스 vol.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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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24+0/////////
당신 : 당신은 왜 그림을 그리죠?
16
11
나의 진실은 무엇일까? 너의 실체는 무엇일까? 내가 사랑했던 너는.
사랑해. 세상의 모든 하양들이 그을릴 때까지 뜨겁게 너를 사랑해. 더
네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아무래도 먹어버렸겠지. 괴물처럼, 혀끝에
이상 참을 수 없어. 너를 만져야겠어. 가장 은밀한 곳까지.
휩쓸려 사라지는 언어들처럼 그렇게, 너를 죽여 버리겠어. 기억 속에선 무죄란다.
10 이제 다 끝났어. 그림은 끝났어. 무서워 죽겠어. 정말이야. 날 좀 안아줘. 만져줘.
15 천안함 침몰, 4대강 공사, 청년실업, 유인촌. 당신들은 고독을 향해 공사시키고 실업시키고 유인시키는 이 머저리 같은 예술이.
9
샤르봉이 그린 그림
우린 가난을 통해 바짝 조여지게 되고 그래서 항상 긴장하게 된다. 어떤 문제든지 그것이 가난 속에서 발생했다면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으므로 다양하게 접근해야만 한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린 문제를
14 신은 내게 생명을 주셨고 어머니는 내게 육신을 주셨으며 아버지는
해결하는 태도에 대해 고민하게 되므로 좀 더 성숙해질 수 있다.
내게 이름을 주셨어. 그런데 난 왜 이토록 가진 게 없을까. 그저 이 머저리 같은 예술뿐.
8 아이슬랜드 같은 삶. 광활한 불모지 한 가운데에 유일하게 피어난 한 송이 떨거지 같은 들꽃만이 나에게 희망을 주지. 난 아직 죽고 싶지 않아.
13 그저 이 머저리 같은 예술.
7 이 단어 안에 나의 냄새가 있어. 이 문장 안에 나의 시간이 있고 이 글
12 맨정신으론이해할수없는것들천지인게세상이므로
안에 나의 영혼이 있어. 이 언어 속에서만큼은 난 불멸이야. 불멸의 나.
사람들은술을마시고담배를피고방황을하지
자, 맘껏 나를 죽여 보렴.
그리곤맨정신으론이해할수없는짓들을하지
140
아브락사스 vol.7
아브락사스 vol.7
141
\\\\\\\\\너에게, 24+0/////////
직진하지. 난 아니야, 내겐 예술이 있어. 날 끝없이 침몰시키고
16
11
나의 진실은 무엇일까? 너의 실체는 무엇일까? 내가 사랑했던 너는.
사랑해. 세상의 모든 하양들이 그을릴 때까지 뜨겁게 너를 사랑해. 더
네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아무래도 먹어버렸겠지. 괴물처럼, 혀끝에
이상 참을 수 없어. 너를 만져야겠어. 가장 은밀한 곳까지.
휩쓸려 사라지는 언어들처럼 그렇게, 너를 죽여 버리겠어. 기억 속에선 무죄란다.
10 이제 다 끝났어. 그림은 끝났어. 무서워 죽겠어. 정말이야. 날 좀 안아줘. 만져줘.
15 천안함 침몰, 4대강 공사, 청년실업, 유인촌. 당신들은 고독을 향해 공사시키고 실업시키고 유인시키는 이 머저리 같은 예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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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봉이 그린 그림
우린 가난을 통해 바짝 조여지게 되고 그래서 항상 긴장하게 된다. 어떤 문제든지 그것이 가난 속에서 발생했다면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으므로 다양하게 접근해야만 한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린 문제를
14 신은 내게 생명을 주셨고 어머니는 내게 육신을 주셨으며 아버지는
해결하는 태도에 대해 고민하게 되므로 좀 더 성숙해질 수 있다.
내게 이름을 주셨어. 그런데 난 왜 이토록 가진 게 없을까. 그저 이 머저리 같은 예술뿐.
8 아이슬랜드 같은 삶. 광활한 불모지 한 가운데에 유일하게 피어난 한 송이 떨거지 같은 들꽃만이 나에게 희망을 주지. 난 아직 죽고 싶지 않아.
13 그저 이 머저리 같은 예술.
7 이 단어 안에 나의 냄새가 있어. 이 문장 안에 나의 시간이 있고 이 글
12 맨정신으론이해할수없는것들천지인게세상이므로
안에 나의 영혼이 있어. 이 언어 속에서만큼은 난 불멸이야. 불멸의 나.
사람들은술을마시고담배를피고방황을하지
자, 맘껏 나를 죽여 보렴.
그리곤맨정신으론이해할수없는짓들을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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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24+0/////////
직진하지. 난 아니야, 내겐 예술이 있어. 날 끝없이 침몰시키고
6
1
기억이 뇌가 아닌 위에 있었다면 우리들은 매일 밤을 토하면서
이젠 정말 끝났다고 생각해. 더 이상 새로 시작할 그림도 사랑도 없어.
지내야겠지. 숨 쉴 수도 없을 만큼 수 많은 토로 속을 게워내며 그렇게
욕망. 그것만큼은 내게 조금 남아있지만. 내가 어렸을 때 세상은 기회와
더럽고 불편한 기억들을 토해내겠지. 그러다 목에 걸린 건더기 하나.
가능성으로 넘쳐나던 곳이었지. 글쎄. 이젠 아니야.
손으로 끝을 잡고 죽 잡아당기며 겨우내 끄집어내네.
타협. 빌어먹을 타협. 오직 그것 뿐.
5
+0
우린 젊고 젊으니까 그 무엇이 어떻게 되든 사실 그다지 상관은 없어.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어떠한 것을 반드시 유지시켜야 하는 것들, 애쓰는 모든 것들은 언제나 으깨어지고 마는 것 같아. 삶이란 그런
샤르봉이 그린 그림
것이겠지. 우린 모두 본연의 모습대로 자신의 이념대로 살아가길
4 사랑해. 너를 사랑해. 사랑해. 아무 단어도 떠오르지 않아. 너를 사랑해.
기대하지만 결코 그럴 수 없는 곳에 자신이 태어났다는 것을 인정하게
너를 사랑해. 나는 너를 사랑해. 네가 만들어낸 모든 오물들까지도.
되고 그렇게 서서히 타협이 시작되고 나서야 우린 비로소 본연의 자신과 마주하게 되는 것 같아. 현실을 마주했을 때의 그 더러운 두려움, 그 앞에서 이상은 그 무엇도 아니게 되지. 그러던 어느 날 문득
3
화장실에 걸어놓은 싸구려 복제 풍경화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슬픔에
나는 누구의 제자도 아니며 아무의 자식도 아니고 너희의 친구도
휩싸인 채 조용히 흐느끼고야 마는 거야. 한 땐 정말로 찬란하게 빛났던
아니며 당신의 사랑도 아니고 그들의 뭔가의 가슴의 기억도 아니야.
자신의 그 무언가가 이젠 어느새 그 그림 속 곰팡이에 뒤덮인 어설픈
나는 오직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아무것도 아닌 듯이.
태양과 그다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그렇게 조용히 깨닫게 되는 거지.
2
때론 너무나 분명한 것들마저도 전혀 해석할 수 없는 곳에 도달할 때가
네가 살아있다 믿지 말라.
있어. 내가 살아가는 이유. 쫓고 있던 그 무엇. 한 땐 너무나 분명했지만
내가 살아있다 말하지 말라.
이젠 어느새 그게 꿈이었는지 돈이었는지 명예였는지 헷갈리기
나는 아직 단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다.
시작하면서 일종의 공황상태에 빠져버리게 돼. 내가 만일 삶에 대한
너의 삶은 폭우 속에 휩쓸려든 시궁창 그 들쥐와도 같은 것.
분명한 입장을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취할 수 있었다면 결코 어제보다
죽음 안에서 놀아나는 것. 그게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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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락사스 vol.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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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24+0/////////
유형의 육신이든 무형의 정신이든, 무엇이든지간에 존재하기 위해
6
1
기억이 뇌가 아닌 위에 있었다면 우리들은 매일 밤을 토하면서
이젠 정말 끝났다고 생각해. 더 이상 새로 시작할 그림도 사랑도 없어.
지내야겠지. 숨 쉴 수도 없을 만큼 수 많은 토로 속을 게워내며 그렇게
욕망. 그것만큼은 내게 조금 남아있지만. 내가 어렸을 때 세상은 기회와
더럽고 불편한 기억들을 토해내겠지. 그러다 목에 걸린 건더기 하나.
가능성으로 넘쳐나던 곳이었지. 글쎄. 이젠 아니야.
손으로 끝을 잡고 죽 잡아당기며 겨우내 끄집어내네.
타협. 빌어먹을 타협. 오직 그것 뿐.
5
+0
우린 젊고 젊으니까 그 무엇이 어떻게 되든 사실 그다지 상관은 없어.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어떠한 것을 반드시 유지시켜야 하는 것들, 애쓰는 모든 것들은 언제나 으깨어지고 마는 것 같아. 삶이란 그런
샤르봉이 그린 그림
것이겠지. 우린 모두 본연의 모습대로 자신의 이념대로 살아가길
4 사랑해. 너를 사랑해. 사랑해. 아무 단어도 떠오르지 않아. 너를 사랑해.
기대하지만 결코 그럴 수 없는 곳에 자신이 태어났다는 것을 인정하게
너를 사랑해. 나는 너를 사랑해. 네가 만들어낸 모든 오물들까지도.
되고 그렇게 서서히 타협이 시작되고 나서야 우린 비로소 본연의 자신과 마주하게 되는 것 같아. 현실을 마주했을 때의 그 더러운 두려움, 그 앞에서 이상은 그 무엇도 아니게 되지. 그러던 어느 날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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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 걸어놓은 싸구려 복제 풍경화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슬픔에
나는 누구의 제자도 아니며 아무의 자식도 아니고 너희의 친구도
휩싸인 채 조용히 흐느끼고야 마는 거야. 한 땐 정말로 찬란하게 빛났던
아니며 당신의 사랑도 아니고 그들의 뭔가의 가슴의 기억도 아니야.
자신의 그 무언가가 이젠 어느새 그 그림 속 곰팡이에 뒤덮인 어설픈
나는 오직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아무것도 아닌 듯이.
태양과 그다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그렇게 조용히 깨닫게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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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너무나 분명한 것들마저도 전혀 해석할 수 없는 곳에 도달할 때가
네가 살아있다 믿지 말라.
있어. 내가 살아가는 이유. 쫓고 있던 그 무엇. 한 땐 너무나 분명했지만
내가 살아있다 말하지 말라.
이젠 어느새 그게 꿈이었는지 돈이었는지 명예였는지 헷갈리기
나는 아직 단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다.
시작하면서 일종의 공황상태에 빠져버리게 돼. 내가 만일 삶에 대한
너의 삶은 폭우 속에 휩쓸려든 시궁창 그 들쥐와도 같은 것.
분명한 입장을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취할 수 있었다면 결코 어제보다
죽음 안에서 놀아나는 것. 그게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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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24+0/////////
유형의 육신이든 무형의 정신이든, 무엇이든지간에 존재하기 위해
슬프지는 않았을 테지.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고 생각했었을 때. 그게 정말 사랑이었을까?
내가 아는 한 결코 단 한명도 존재하지 않아. 그 어떤 매체로도 절대
사랑은 왜 티타늄처럼 그저 단단하고 매끈매끈 할 수 없을까. 스님이
기록으로 남길 수 없는 것, 계승할 수 없는 것, 또한 겪어보기 이전엔
권하는 차를 마시며 생각했었지. 맛있고 따뜻한 차. 우리의 삶이 그럴
결단코 이해할 수 없는 것, 그래서 평생 의문의 연속 속에서 방황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언제까지나 맛있고 따뜻한 입맞춤을 해
수밖에 없는 것, 삶이란 그런 것이겠지.
줄 수 있는 사람이 우리 곁에 있다면 얼마나 행복에 겨울까. 태어나서 사는 게 내 잘못도 아닌데 언제까지고 이토록 반성과 후회에 지친 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누군가의 글 속에서나마 간접적인
죄인 같이 살아야 하나… 행복에 미처 날뛰고 싶다. 이 삶이 끝나기
경험과 나아가서는 어떠한 삶의 진리 같은 것들을 취하려 애쓰고
전에.
있지만 사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말하고 싶어. 의미는 단어
\\\\\\\\\너에게, 24+0/////////
안에 있지 않아. 단어 너머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해. 진정한 의미로서 단어가 의미를 가질 수 있으려면 시대를 통틀어 모든 생명이 그 단어를
샤르봉이 그린 그림
이해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태초의 인간에게 ‘사랑’ 이란 단어를 백날이고 보여줘 봤자 그는 거기서 그 무엇도 느낄 수 없어. 곰팡이들에게 사람의 사랑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타인의 글장난 속에서 우리가 이런저런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언어의 문법과 단어가 갖는 특정한 의미들에 대해 교육받아졌기 때문에 그 안의 범주 내에서나마 이해할 뿐 사실 진정으로 그 의미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 사랑이 뭘까? 그 의미가 뭘까? 나는 서술 할 수 없어. 그리고 내 판단 안에선 적어도 너 역시 마찬가지야. 너를 사랑해. 제발 나를 사랑해줘. 이 문장 너머의 의미란 뭘까. 진리란 뭘까. 며칠 전 많이 울었어. 내겐 신념이 있었지. 현실 앞에서 그것은 그저 곰팡이 핀 어설픈 태양이었어. 전남에서였어. 조그마한 사찰이었는데 울면서 문득 스님이 되고 싶다 생각했지. 부모들은 질색할만한 생각이겠지만. 거기서 난 한 때 내가 사랑했던 사람을 떠올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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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락사스 vol.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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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지는 않았을 테지.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고 생각했었을 때. 그게 정말 사랑이었을까?
내가 아는 한 결코 단 한명도 존재하지 않아. 그 어떤 매체로도 절대
사랑은 왜 티타늄처럼 그저 단단하고 매끈매끈 할 수 없을까. 스님이
기록으로 남길 수 없는 것, 계승할 수 없는 것, 또한 겪어보기 이전엔
권하는 차를 마시며 생각했었지. 맛있고 따뜻한 차. 우리의 삶이 그럴
결단코 이해할 수 없는 것, 그래서 평생 의문의 연속 속에서 방황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언제까지나 맛있고 따뜻한 입맞춤을 해
수밖에 없는 것, 삶이란 그런 것이겠지.
줄 수 있는 사람이 우리 곁에 있다면 얼마나 행복에 겨울까. 태어나서 사는 게 내 잘못도 아닌데 언제까지고 이토록 반성과 후회에 지친 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누군가의 글 속에서나마 간접적인
죄인 같이 살아야 하나… 행복에 미처 날뛰고 싶다. 이 삶이 끝나기
경험과 나아가서는 어떠한 삶의 진리 같은 것들을 취하려 애쓰고
전에.
있지만 사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말하고 싶어. 의미는 단어
\\\\\\\\\너에게, 24+0/////////
안에 있지 않아. 단어 너머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해. 진정한 의미로서 단어가 의미를 가질 수 있으려면 시대를 통틀어 모든 생명이 그 단어를
샤르봉이 그린 그림
이해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태초의 인간에게 ‘사랑’ 이란 단어를 백날이고 보여줘 봤자 그는 거기서 그 무엇도 느낄 수 없어. 곰팡이들에게 사람의 사랑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타인의 글장난 속에서 우리가 이런저런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언어의 문법과 단어가 갖는 특정한 의미들에 대해 교육받아졌기 때문에 그 안의 범주 내에서나마 이해할 뿐 사실 진정으로 그 의미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 사랑이 뭘까? 그 의미가 뭘까? 나는 서술 할 수 없어. 그리고 내 판단 안에선 적어도 너 역시 마찬가지야. 너를 사랑해. 제발 나를 사랑해줘. 이 문장 너머의 의미란 뭘까. 진리란 뭘까. 며칠 전 많이 울었어. 내겐 신념이 있었지. 현실 앞에서 그것은 그저 곰팡이 핀 어설픈 태양이었어. 전남에서였어. 조그마한 사찰이었는데 울면서 문득 스님이 되고 싶다 생각했지. 부모들은 질색할만한 생각이겠지만. 거기서 난 한 때 내가 사랑했던 사람을 떠올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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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s titre
이원희
sans titre
이원희
나는 언제나 네가 그리웠다. 길을 걷다가 가슴에 차올라 눈물이 흘렀던 적도 있었고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너와 손잡고 싶었고 자고 싶었다. 주체할 수 없는 욕구와 그리움에 매일 밤 뜬 눈으로 보낸 세월이 얼마 더냐. 아직도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란 생각이 들 때면 인생의 실패자라 느 낀다. 이 세상 내 인연이 여기서 끝이라는 생각에 하루가 고통이다. 이제 더 이상 너는 내게 사람이 아니다. 내가 얼마나 꿈꾸었으면 . 갑자기 비가 내린다. 하늘이 어두워진 것이 비가 올 것 같은 느낌은 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내릴 줄은 몰랐다. 빗소리와 함께 예전에 녹음해뒀던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 요즘은 잠자리에 항상 그의 목소리와 함께 하는데 아침에 일어났을 때,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들을 만하다. 지난 새벽에는 선잠에 들었다 잠시 깨었을 때 들렸던 빗소리와 그의 목 소리가 하나 되어 나를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지나치게 늦은 시간이어 이내 잠들었지만 순간만큼은 외로움, 고독이 었다. 얼굴을 감싸 쥐고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싶은 것을 꾸역꾸역 참고 있다. 그렇게 나는 언제나 네가 그리웠다.
아브락사스 vol.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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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s titre//////////
하나의 묵직한 덩어리이고 이룰 수 없는 꿈이다.
나는 언제나 네가 그리웠다. 길을 걷다가 가슴에 차올라 눈물이 흘렀던 적도 있었고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너와 손잡고 싶었고 자고 싶었다. 주체할 수 없는 욕구와 그리움에 매일 밤 뜬 눈으로 보낸 세월이 얼마 더냐. 아직도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란 생각이 들 때면 인생의 실패자라 느 낀다. 이 세상 내 인연이 여기서 끝이라는 생각에 하루가 고통이다. 이제 더 이상 너는 내게 사람이 아니다. 내가 얼마나 꿈꾸었으면 . 갑자기 비가 내린다. 하늘이 어두워진 것이 비가 올 것 같은 느낌은 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내릴 줄은 몰랐다. 빗소리와 함께 예전에 녹음해뒀던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 요즘은 잠자리에 항상 그의 목소리와 함께 하는데 아침에 일어났을 때,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들을 만하다. 지난 새벽에는 선잠에 들었다 잠시 깨었을 때 들렸던 빗소리와 그의 목 소리가 하나 되어 나를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지나치게 늦은 시간이어 이내 잠들었지만 순간만큼은 외로움, 고독이 었다. 얼굴을 감싸 쥐고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싶은 것을 꾸역꾸역 참고 있다. 그렇게 나는 언제나 네가 그리웠다.
아브락사스 vol.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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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묵직한 덩어리이고 이룰 수 없는 꿈이다.
곧 있으면 우리가 처음 만났던 겨울이 찾아온다.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지금보다 자유로운 몸이 되었을 때 그리운 너를 찾아 네가 꿈꾸었다던 외도, 외도에 가야겠다. 한 살 더 먹고 잠이 늘었다.
샤르봉이 그린 그림
R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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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락사스 vol.7
곧 있으면 우리가 처음 만났던 겨울이 찾아온다.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지금보다 자유로운 몸이 되었을 때 그리운 너를 찾아 네가 꿈꾸었다던 외도, 외도에 가야겠다. 한 살 더 먹고 잠이 늘었다.
샤르봉이 그린 그림
R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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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봉이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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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봉이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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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봉이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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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봉이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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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
화정
복도
화정
9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띵–똥하고 열리며, 암 붉은 카펫에서 플라스 틱이 약간 그을린 , 아니 공중에 분사된 킬라가 땅바닥에 내려앉은 , 그 리고 지하철과 연결된 환기구에서 풍겨 나오는 이질적인 냄새가 그런 것 들이 오묘하게 몸을 뒤섞어, 붉은 형태로 복도를 채우고 있었다. 그곳 을 지나갈 때면 항상 이상한 기분으로 이것이 과거의 냄새일 거라 , 생 각했다. 일직선으로 뻗은 붉은 복도에 취해서 아무것도 할 수없이 현실처럼 느 껴지지 않는 그곳을 기억해두려고 한동안 바라보다 천장과 바닥지표면 이 그러니깐 바로 복도 대각선 교점에 시선이 묶여 그 적적한 통로 속으 로
건물
전체가
구부정하게
왜곡되었다.
내 발이 분명히 땅위에 서있는데 머리는 바닥에 처박혀 피가 거꾸로 돌았고 발에서 머리위로 폭포수처럼 쏟아 져 내리면 손가락 끝 그리고 정수리까지 몰려와 전혀 다름이 응고 되어 서 심장이 되었다. 공간을 울리는 진동으로 한순간 아찔하게 도취되어, 그 뜨거운 박동이 온몸 구석구석 빠짐없이 나를 압도 하였다. 이 위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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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
내가 그 건물에 발을 들인지 벌써 6주가 지났다. 6……. 7……. 8……. 9.
9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띵–똥하고 열리며, 암 붉은 카펫에서 플라스 틱이 약간 그을린 , 아니 공중에 분사된 킬라가 땅바닥에 내려앉은 , 그 리고 지하철과 연결된 환기구에서 풍겨 나오는 이질적인 냄새가 그런 것 들이 오묘하게 몸을 뒤섞어, 붉은 형태로 복도를 채우고 있었다. 그곳 을 지나갈 때면 항상 이상한 기분으로 이것이 과거의 냄새일 거라 , 생 각했다. 일직선으로 뻗은 붉은 복도에 취해서 아무것도 할 수없이 현실처럼 느 껴지지 않는 그곳을 기억해두려고 한동안 바라보다 천장과 바닥지표면 이 그러니깐 바로 복도 대각선 교점에 시선이 묶여 그 적적한 통로 속으 로
건물
전체가
구부정하게
왜곡되었다.
내 발이 분명히 땅위에 서있는데 머리는 바닥에 처박혀 피가 거꾸로 돌았고 발에서 머리위로 폭포수처럼 쏟아 져 내리면 손가락 끝 그리고 정수리까지 몰려와 전혀 다름이 응고 되어 서 심장이 되었다. 공간을 울리는 진동으로 한순간 아찔하게 도취되어, 그 뜨거운 박동이 온몸 구석구석 빠짐없이 나를 압도 하였다. 이 위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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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
내가 그 건물에 발을 들인지 벌써 6주가 지났다. 6……. 7……. 8……. 9.
기분에 벌게진 얼굴로 어차피 결국 다시 되돌아오는 시침같이 빙-글빙–글 대는 그 복도가 난 그리도 좋았다.
불면증은 봄부터 시작되었는데 처음에는 낮에 이리저리 채이며 덴 것 들이 요란하게 곪고 끓어서 하루가 다 가고 밤이 되어도 도무지 잊혀
띵– 똥 누군가 엘리베이터에서 올라오는 순간, 아무도 몰래 건물 허
지지않고 스스로를 괴롭히며 보복하는 것에 대하여 상상했다. 흉폭해
리를 구부려버린 것이 혹여나 들킬까봐, 발끝으로 손을 뻗어 능청스럽
져 가던 마음이 자주 그런 상상에 빠져들었고 그것을 즐기기까지 했던
게 스트레칭 하는 척 해야 했다.
것 또한 사실이었다. 정신 차리면 끔찍히 허무한 자위에 괴로워 잠들어야
없는 사람이 되는구나 생각했다. 9층은 크지 않은 사무실들이 모여 있
할 시간을 넘기고 새벽에 도착하면 온통 어지럽고 추하던 모습들이 찬
었는데, 하나같이 이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을 하는 곳 인지 알아차릴 수
물을 끼얹은 듯 냉정하게 나는 아무런 입장도 없는 제 3자가되었다. 그
없게 너무나 평범한 체 하면서 또 너무 아리송한 회사이름 들이 나붙어
후로 나는 새벽이 좋아, 자주 동이 틀 때까지 기다렸다가 잠들었고, 제대
있었고 그 중간에 그 병원이 있었다.
로 잠드는 일이 힘들어졌다. 깊은 밤 사방이 고요해지면 위장에서 소화
그곳도 마찬가지로 전혀 병원 같지 않았다. 벽면이 모두 책장들로 꾸며
되는 소리조차 거슬리고 의식은 오로지 숨 쉬는 것에만 집중되는 덫에
져 있어서 줄곧 그곳에 들어가면 비슷한 생김새의 책들이 이렇게나 많
걸려 달아나지를 못했다. 평소에 몸의 기능이 자동이라면 잠을 청할 때
았을까 싶기도 했고, 아니면 다른 책들을 전부 예쁜 커버로 씌웠을까 생
엔 모든 기능이 수동이 되었다.
각해보았지만 나는 애써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리고 간호사 대신
의식적으로 들이마시고 내쉬고 조작을 멈추면 멎어 버릴 것같이 들이
에 늙은 여자가 있었고, 때때로 눈이 마주치면 먼저 상냥하게 인사해주
마시고 내쉬고 중간에 억지로 멈춘다면, 신경 쓰지 않게 될까 숨을 참아
었다. 내가 그날 예약된 시간은 2시.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는 하던 일
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잠이 턱없이 모자라지자 오랫동
을 중단하고 안경을 벗어 내리며 내게 항상
안 수면제에 의지해야했다. 나는
“오늘 어떠세요?”하고 물어보았는데 그 질문에 나는 “괜찮았어요.”하
더 예민하고 날카로워졌고, 꿈에서 현실을
고 대답했다. 이것은 일종의 약속이나 규칙이 되어서 그 하루가 아주
연장시키게 되었고 둘을 구분하는 것이 헷갈렸다. 일상생활이 뒤틀리
불편할 때면 나는 한숨을 쉬면서 “괜찮았어요.”라고 말하면 됐다. 그 다
면서 현실과 꿈을 구별하는 것이 어려워서는 아니 나는 꿈을 꿈이라 의
음으로는 그 방의 중간에 있는 큰 소파에 앉아 블라인드 사이로 드러난
심하지 못하고 요개부득 할 듯 했다.
밖의 풍경을 바라보면, 그가 배려 깊게도 서로 시선을 다시 맞추기 전까 지 서로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었다. 그는 늙은 여자와 연결되는 수화기에 버튼을 누르면서 “따뜻한 라
“어제는 좀 주무셨어요?” 그가 라떼를 가져다주며 내 앞에 앉았다. “네. 끔찍했어요.” 흠– 그가 안경을 올렸다.
떼 좋아하시죠? 하고 물었다. 숙면에 도움이 되는 음식이 원래부터 좋아
“어제 병원에서 나와 곧바로 집으로 갔거든요. 저는 밀려있는 작업들을
하던 흰 우유라 다행이었다.
하다가 그때 분명9시 인 걸 확인하고, 샤워를 하고 나오니깐 전화가 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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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락사스 vol.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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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
샤르봉이 그린 그림
나는 또 그게 우습고 재밌어서 졸린 눈을 비벼대며 잠을 못자면 정말 실
기분에 벌게진 얼굴로 어차피 결국 다시 되돌아오는 시침같이 빙-글빙–글 대는 그 복도가 난 그리도 좋았다.
불면증은 봄부터 시작되었는데 처음에는 낮에 이리저리 채이며 덴 것 들이 요란하게 곪고 끓어서 하루가 다 가고 밤이 되어도 도무지 잊혀
띵– 똥 누군가 엘리베이터에서 올라오는 순간, 아무도 몰래 건물 허
지지않고 스스로를 괴롭히며 보복하는 것에 대하여 상상했다. 흉폭해
리를 구부려버린 것이 혹여나 들킬까봐, 발끝으로 손을 뻗어 능청스럽
져 가던 마음이 자주 그런 상상에 빠져들었고 그것을 즐기기까지 했던
게 스트레칭 하는 척 해야 했다.
것 또한 사실이었다. 정신 차리면 끔찍히 허무한 자위에 괴로워 잠들어야
없는 사람이 되는구나 생각했다. 9층은 크지 않은 사무실들이 모여 있
할 시간을 넘기고 새벽에 도착하면 온통 어지럽고 추하던 모습들이 찬
었는데, 하나같이 이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을 하는 곳 인지 알아차릴 수
물을 끼얹은 듯 냉정하게 나는 아무런 입장도 없는 제 3자가되었다. 그
없게 너무나 평범한 체 하면서 또 너무 아리송한 회사이름 들이 나붙어
후로 나는 새벽이 좋아, 자주 동이 틀 때까지 기다렸다가 잠들었고, 제대
있었고 그 중간에 그 병원이 있었다.
로 잠드는 일이 힘들어졌다. 깊은 밤 사방이 고요해지면 위장에서 소화
그곳도 마찬가지로 전혀 병원 같지 않았다. 벽면이 모두 책장들로 꾸며
되는 소리조차 거슬리고 의식은 오로지 숨 쉬는 것에만 집중되는 덫에
져 있어서 줄곧 그곳에 들어가면 비슷한 생김새의 책들이 이렇게나 많
걸려 달아나지를 못했다. 평소에 몸의 기능이 자동이라면 잠을 청할 때
았을까 싶기도 했고, 아니면 다른 책들을 전부 예쁜 커버로 씌웠을까 생
엔 모든 기능이 수동이 되었다.
각해보았지만 나는 애써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리고 간호사 대신
의식적으로 들이마시고 내쉬고 조작을 멈추면 멎어 버릴 것같이 들이
에 늙은 여자가 있었고, 때때로 눈이 마주치면 먼저 상냥하게 인사해주
마시고 내쉬고 중간에 억지로 멈춘다면, 신경 쓰지 않게 될까 숨을 참아
었다. 내가 그날 예약된 시간은 2시.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는 하던 일
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잠이 턱없이 모자라지자 오랫동
을 중단하고 안경을 벗어 내리며 내게 항상
안 수면제에 의지해야했다. 나는
“오늘 어떠세요?”하고 물어보았는데 그 질문에 나는 “괜찮았어요.”하
더 예민하고 날카로워졌고, 꿈에서 현실을
고 대답했다. 이것은 일종의 약속이나 규칙이 되어서 그 하루가 아주
연장시키게 되었고 둘을 구분하는 것이 헷갈렸다. 일상생활이 뒤틀리
불편할 때면 나는 한숨을 쉬면서 “괜찮았어요.”라고 말하면 됐다. 그 다
면서 현실과 꿈을 구별하는 것이 어려워서는 아니 나는 꿈을 꿈이라 의
음으로는 그 방의 중간에 있는 큰 소파에 앉아 블라인드 사이로 드러난
심하지 못하고 요개부득 할 듯 했다.
밖의 풍경을 바라보면, 그가 배려 깊게도 서로 시선을 다시 맞추기 전까 지 서로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었다. 그는 늙은 여자와 연결되는 수화기에 버튼을 누르면서 “따뜻한 라
“어제는 좀 주무셨어요?” 그가 라떼를 가져다주며 내 앞에 앉았다. “네. 끔찍했어요.” 흠– 그가 안경을 올렸다.
떼 좋아하시죠? 하고 물었다. 숙면에 도움이 되는 음식이 원래부터 좋아
“어제 병원에서 나와 곧바로 집으로 갔거든요. 저는 밀려있는 작업들을
하던 흰 우유라 다행이었다.
하다가 그때 분명9시 인 걸 확인하고, 샤워를 하고 나오니깐 전화가 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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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봉이 그린 그림
나는 또 그게 우습고 재밌어서 졸린 눈을 비벼대며 잠을 못자면 정말 실
어요. 고등학교 때 동창이었는데, 전화를 끊고 보니깐 다시 9시였어요.
꾸지 않고 주무 실수 있을 거예요. 다음날까지 운동계획표를 짜오세요.”
통화기록도 아무것도 안 찍혀 있었죠.”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와 나는 한참 심리적인 상태와 우울 증세에 대해 한참 대화를 했다.
그의 표정이 굳었다. 내가 충분히 이상할 소지가 있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해 내곤 침착 하게 대응하기위해서
따뜻한 라떼, 따뜻한 샤워, 따뜻한 이불을 떠올렸다. “아, 근데 그 동창에게 전화 온 꿈, 전화내용은 대체 뭐였어요?” “꼭 한번 찾아오라고 하더군요. 저는 요즘 몸이 안 좋아 못 간다고 했죠.”
“세상에, 스스로 알아차렸군요. 그럼 작업을 하시다가 잠든 건가요?” 의 사는 필기하기 하기위해서 펜을 들었다. 나는 건물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가며 몇 십 년째 비슷하게 줄지어
작업을끝내고 9시를 확인 했던 것 이 꿈 이였고, 실제로 샤워를 하고, 잠
서있는 건물들이 호젓하게 느껴졌다. 분식가게 이층 갈색 창문 안에 켜
들어서 전화 받는 꿈을 꾸고, 깨어나서 실제로 9시 인 걸 확인 한 거예요.
켜이 쌓인 잡다한 물건들이 주인의 손길을 받지 못한 채 쓸모없이
샤워 전에 시계를 보고 9시였다고 꿈을 꾼 건 사실상 더 이전의 시간인
창틈사이에 갇혀있었다. 눈, 코, 입 점 세 개가 찍
샤르봉이 그린 그림
것 같아요. 과거로 돌아갈 일은 없을 태니까요”
힌 곰 인형이 나를 쳐다본다. 어디로 간지 모르겠지만 나도 분명 저 비슷
나는 충혈 된 눈을 신경질 적으로 문지르며, 어젯밤 일어난 소름 끼치는
한 인형이 있었는데 ……. 주인이 미쳐 기억해주지 못할 곰 인형과 나는
일을 다시 되짚어보았다.
그때의 추억을 생각해 보았다. 어릴 적에는 내가 잠들면 인형들이 모두
“이제는 저를 못 믿겠어요. 선생님,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조차 의심이
깨어날 거라고 생각해 가장 좋아하는 인형이 분명 있었지만, 그 인형이
들어요.”
제일 좋다고 말할 수 없었다. 좋아하는 인형을 한번 안으면 나머지 인형
충혈 된 눈에서 묽은 눈곱이 시야를 흐렸다. 냉랭한 콧속으로 뻐근하게
들에게 미안해서 전부 하나하나 안아주었고 잠을 잘 때도 친구들이 이
들어오는 탄력 없는 공기들이 피부를 바짝바짝 말렸다.
불속에서 숨이 막힐까봐 일렬횡대로 덮어주고 공간이 모자라면 내 발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뇌 검사를 한 번 더 받아 보셔야 할 것 같습
아래에서 거꾸로 이불을 덮기도 하며 얼굴이 파묻히지 않았는지 확인
니다.”
하면서 나는 그렇게도 애쓰며 불편하게 잤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컨트롤 해줄 수 있는 사람 이예요. 가족에게 연
다음날이면 다들 내발에 치여서 사방으로 어질러져있었지만 말이
락을 해서 같이 지내세요. 그리고 같이 나오시고요. 더 심해지시면 병동
다. 그 친구들이 보고 싶다. 마음이 쓸쓸하다.
에 내원 하시는 게 안전해요.”
버스는 오후의 뜨거움 속에서 노란빛을 따라 노곤한 기분으로 달려갔다.
내 몸 상태와 기분이 백퍼센트 딱 맞아 떨어졌다. “앞으로는 복용하던 수면유도제랑 약은 되도록 사용하지 마시구요 . ” “검사가 나오기 전에 일정한 운동을 하시면 수면에도 더 도움이 되고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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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금방이지 제대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브락사스 vol.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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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
“아니요, 샤워는 한 상태였죠. 그것에 대해서 어젯밤 계속 생각해봤는데
어요. 고등학교 때 동창이었는데, 전화를 끊고 보니깐 다시 9시였어요.
꾸지 않고 주무 실수 있을 거예요. 다음날까지 운동계획표를 짜오세요.”
통화기록도 아무것도 안 찍혀 있었죠.”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와 나는 한참 심리적인 상태와 우울 증세에 대해 한참 대화를 했다.
그의 표정이 굳었다. 내가 충분히 이상할 소지가 있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해 내곤 침착 하게 대응하기위해서
따뜻한 라떼, 따뜻한 샤워, 따뜻한 이불을 떠올렸다. “아, 근데 그 동창에게 전화 온 꿈, 전화내용은 대체 뭐였어요?” “꼭 한번 찾아오라고 하더군요. 저는 요즘 몸이 안 좋아 못 간다고 했죠.”
“세상에, 스스로 알아차렸군요. 그럼 작업을 하시다가 잠든 건가요?” 의 사는 필기하기 하기위해서 펜을 들었다. 나는 건물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가며 몇 십 년째 비슷하게 줄지어
작업을끝내고 9시를 확인 했던 것 이 꿈 이였고, 실제로 샤워를 하고, 잠
서있는 건물들이 호젓하게 느껴졌다. 분식가게 이층 갈색 창문 안에 켜
들어서 전화 받는 꿈을 꾸고, 깨어나서 실제로 9시 인 걸 확인 한 거예요.
켜이 쌓인 잡다한 물건들이 주인의 손길을 받지 못한 채 쓸모없이
샤워 전에 시계를 보고 9시였다고 꿈을 꾼 건 사실상 더 이전의 시간인
창틈사이에 갇혀있었다. 눈, 코, 입 점 세 개가 찍
샤르봉이 그린 그림
것 같아요. 과거로 돌아갈 일은 없을 태니까요”
힌 곰 인형이 나를 쳐다본다. 어디로 간지 모르겠지만 나도 분명 저 비슷
나는 충혈 된 눈을 신경질 적으로 문지르며, 어젯밤 일어난 소름 끼치는
한 인형이 있었는데 ……. 주인이 미쳐 기억해주지 못할 곰 인형과 나는
일을 다시 되짚어보았다.
그때의 추억을 생각해 보았다. 어릴 적에는 내가 잠들면 인형들이 모두
“이제는 저를 못 믿겠어요. 선생님,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조차 의심이
깨어날 거라고 생각해 가장 좋아하는 인형이 분명 있었지만, 그 인형이
들어요.”
제일 좋다고 말할 수 없었다. 좋아하는 인형을 한번 안으면 나머지 인형
충혈 된 눈에서 묽은 눈곱이 시야를 흐렸다. 냉랭한 콧속으로 뻐근하게
들에게 미안해서 전부 하나하나 안아주었고 잠을 잘 때도 친구들이 이
들어오는 탄력 없는 공기들이 피부를 바짝바짝 말렸다.
불속에서 숨이 막힐까봐 일렬횡대로 덮어주고 공간이 모자라면 내 발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뇌 검사를 한 번 더 받아 보셔야 할 것 같습
아래에서 거꾸로 이불을 덮기도 하며 얼굴이 파묻히지 않았는지 확인
니다.”
하면서 나는 그렇게도 애쓰며 불편하게 잤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컨트롤 해줄 수 있는 사람 이예요. 가족에게 연
다음날이면 다들 내발에 치여서 사방으로 어질러져있었지만 말이
락을 해서 같이 지내세요. 그리고 같이 나오시고요. 더 심해지시면 병동
다. 그 친구들이 보고 싶다. 마음이 쓸쓸하다.
에 내원 하시는 게 안전해요.”
버스는 오후의 뜨거움 속에서 노란빛을 따라 노곤한 기분으로 달려갔다.
내 몸 상태와 기분이 백퍼센트 딱 맞아 떨어졌다. “앞으로는 복용하던 수면유도제랑 약은 되도록 사용하지 마시구요 . ” “검사가 나오기 전에 일정한 운동을 하시면 수면에도 더 도움이 되고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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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금방이지 제대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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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샤워는 한 상태였죠. 그것에 대해서 어젯밤 계속 생각해봤는데
이불에 발이 닿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까지 표시해서 개켜놓은 이 불을,
“이봐요, 학생 괜찮아요? 왜 그래요?” 기사 아저씨가 백미러 안에서 내게 물었고, 버스승객모두가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나는 그
이런 게 무슨 대수라고 이제까지 이렇게 살았는지……. 그냥 대강
제야 꾹 참으면서
펴놓고 벌러덩 누웠다. ‘아차 샤워해야 되는데’아니다. 잘 수만 있다면
“괜찮아요. 죄송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승객들은 정확히 내가
씻는 것이 대수랴 생각하면서 곳곳에 숨어있는 덫을 피해 점점 잠의 나
악몽이라도 꾸고 놀랐다고 생각한 듯 일그러진 그대로 고개를 돌렸고,
락에 빠져들었다. 사람은 잠을 통해 하루 동안에 흡수한 방대한 정보를
나는 소름끼친 팔을 문지르며 다음정거장에서 내렸다.
정리하고,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으로 분류하며, 필요한 것에 대해서
전화기를 확인했다. 4시 15분. 방금 전 전화는 발신인이 없는, 오지도 않
고 기억해야하는 것은 대체 무엇이 길래 꿈은 이렇게 나를 괴롭혔던 것
았던 전화였다. 그렇다면 병원에서 나와 집에 갔던 것도 꿈이고 전화소
일까. 고요 속에서 갑자기 공격적인 소나기가
리에 놀라서 깬 것도 착각인가? 하루만큼 깊은 잠을 잤다고 생각했던 것
샤르봉이 그린 그림
귀를 내려쳤다. 요란한 전화벨이 소중한 잠을 깨우는 게 짜증났지
이 버스를 탄지 15분 만에 모두 이루어졌다 믿으라고? 뭔가 정말 잘못
만, 금세 그쳤다. 나는 어렴풋이 깨서 오랜만에 한숨 푹 잠들었던 것이
되었다. 어제 까지 만해도 내겐 어느 것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추측해낼
스스로 대견스럽고 기분이 좋아, 처음으로 아침에 깨어나는 듯 기상을
수 있는 이성적인 척도가 있었다면 지금은 어떤 것이 진실이고 거짓이
즐기고 싶었다. 밝은 빛이 눈꺼풀위에서 아른거리며 천천히 눈을 뜨자.
든지 이런 식으로 사는 것 자체가 억울했다. 점점 정신이상자가 되가는
나는 앉아있었다.
것일까. 내일 병원에서 이 이야기를 하면 내원하라는 처방을 받을 것이 다. 집으로 한참을 걸으면서 혹시 지금이 가짜이지 않을까. 꿈속이지 않
아직도 꿈이라면 깨어나리라 다시 눈을 감았다. 있을 수 도 없는 일
을까. 전화기를 꺾었다. 부셔버리려고 하필이면 그때 도저히 그냥 넘겨버릴 수 없는 전화가 왔다 . 이것이 거짓이더라도
나는 편안히 잠들었던 기분 좋은 순간들이 경악스러워서 순간적으
화가 나서 던져버릴 수 없는 사람으로 내게 전화를 걸었을까. 나는 경계
로 혐오스러운 소리를 내질렀다. 좀 전에 타고 온 버스 안에서 나는 순간
심을 잃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모든 사람들이 일시 정지한 얼굴들로 일그러진 내가 역겨운지 그들의
“어디니?”어머니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간이 쪼그라들며 이상한 눈빛으로 바뀌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무슨 일이예요?”
버스 안에 있었다. 분식가게 이층 갈색 창문에서 곰돌이가 나를 안쓰러
“무슨 일이긴 한번와라 얼굴 좀 보자.” 마음이 무거워져 정신을 못 차리
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고 있는 내가 더 한심스러워졌다.
대체 어떤 것이 꿈일까 나는 점점 더 미쳐 가는 걸까 코에서 뜨거움이 밀 려온다.
170
아브락사스 vol.7
어머니는 내 대답을 듣지 못한 채 “네.” 네. 라고 말했지만 전해지지 못
아브락사스 vol.7
171
\\\\\\\\\\\\복도////////////
는 그 정보를 기억으로서 뇌에 기록한다고 했다. 내가 분류하고 정리하
이불에 발이 닿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까지 표시해서 개켜놓은 이 불을,
“이봐요, 학생 괜찮아요? 왜 그래요?” 기사 아저씨가 백미러 안에서 내게 물었고, 버스승객모두가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나는 그
이런 게 무슨 대수라고 이제까지 이렇게 살았는지……. 그냥 대강
제야 꾹 참으면서
펴놓고 벌러덩 누웠다. ‘아차 샤워해야 되는데’아니다. 잘 수만 있다면
“괜찮아요. 죄송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승객들은 정확히 내가
씻는 것이 대수랴 생각하면서 곳곳에 숨어있는 덫을 피해 점점 잠의 나
악몽이라도 꾸고 놀랐다고 생각한 듯 일그러진 그대로 고개를 돌렸고,
락에 빠져들었다. 사람은 잠을 통해 하루 동안에 흡수한 방대한 정보를
나는 소름끼친 팔을 문지르며 다음정거장에서 내렸다.
정리하고,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으로 분류하며, 필요한 것에 대해서
전화기를 확인했다. 4시 15분. 방금 전 전화는 발신인이 없는, 오지도 않
고 기억해야하는 것은 대체 무엇이 길래 꿈은 이렇게 나를 괴롭혔던 것
았던 전화였다. 그렇다면 병원에서 나와 집에 갔던 것도 꿈이고 전화소
일까. 고요 속에서 갑자기 공격적인 소나기가
리에 놀라서 깬 것도 착각인가? 하루만큼 깊은 잠을 잤다고 생각했던 것
샤르봉이 그린 그림
귀를 내려쳤다. 요란한 전화벨이 소중한 잠을 깨우는 게 짜증났지
이 버스를 탄지 15분 만에 모두 이루어졌다 믿으라고? 뭔가 정말 잘못
만, 금세 그쳤다. 나는 어렴풋이 깨서 오랜만에 한숨 푹 잠들었던 것이
되었다. 어제 까지 만해도 내겐 어느 것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추측해낼
스스로 대견스럽고 기분이 좋아, 처음으로 아침에 깨어나는 듯 기상을
수 있는 이성적인 척도가 있었다면 지금은 어떤 것이 진실이고 거짓이
즐기고 싶었다. 밝은 빛이 눈꺼풀위에서 아른거리며 천천히 눈을 뜨자.
든지 이런 식으로 사는 것 자체가 억울했다. 점점 정신이상자가 되가는
나는 앉아있었다.
것일까. 내일 병원에서 이 이야기를 하면 내원하라는 처방을 받을 것이 다. 집으로 한참을 걸으면서 혹시 지금이 가짜이지 않을까. 꿈속이지 않
아직도 꿈이라면 깨어나리라 다시 눈을 감았다. 있을 수 도 없는 일
을까. 전화기를 꺾었다. 부셔버리려고 하필이면 그때 도저히 그냥 넘겨버릴 수 없는 전화가 왔다 . 이것이 거짓이더라도
나는 편안히 잠들었던 기분 좋은 순간들이 경악스러워서 순간적으
화가 나서 던져버릴 수 없는 사람으로 내게 전화를 걸었을까. 나는 경계
로 혐오스러운 소리를 내질렀다. 좀 전에 타고 온 버스 안에서 나는 순간
심을 잃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모든 사람들이 일시 정지한 얼굴들로 일그러진 내가 역겨운지 그들의
“어디니?”어머니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간이 쪼그라들며 이상한 눈빛으로 바뀌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무슨 일이예요?”
버스 안에 있었다. 분식가게 이층 갈색 창문에서 곰돌이가 나를 안쓰러
“무슨 일이긴 한번와라 얼굴 좀 보자.” 마음이 무거워져 정신을 못 차리
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고 있는 내가 더 한심스러워졌다.
대체 어떤 것이 꿈일까 나는 점점 더 미쳐 가는 걸까 코에서 뜨거움이 밀 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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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락사스 vol.7
어머니는 내 대답을 듣지 못한 채 “네.” 네. 라고 말했지만 전해지지 못
아브락사스 vol.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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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그 정보를 기억으로서 뇌에 기록한다고 했다. 내가 분류하고 정리하
한 상태로 휴대폰이 방전되었다. 모든 것들이. 나는 폰을 부셨다. 어딘가
다. 칠갑된 매력을 드러내놓고 숨기는 일들을 완벽하게 해내고 있었는
현실감 없이 신경을 잘 못쓰고 만든 헛 점이 있을 것 이다. 그렇게 생각
데, 지금의 정신 나간 상태의 지긋한 무게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하나
하며 주위를 낯선 듯 둘러보았다. 한걸음 한걸음이 제정신으로는 감당
도 토출하지 않고 제대로 숨길 수 있을지 겁이 났다.
하기 힘들어서 슈퍼가 보이자 나는 마시지 못하는 술을 한 병 사서 집으 로 도착했다. 뚜껑을 열고 병의 주둥이를 입에 가져 대고 이걸 먹고 나서 더 엉켜버리 면 어쩌지 고민하다. 금방 포기했다. 종이와 펜을 가져와 오늘 일들을 쭉 써내려갔다.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내 모습을 다시 제대로 정리해보자 나는 어디
끼워져 차가 지나갈 때 마다 한숨 쉬듯 유리위로 차에 라이트 빛이 번지
쯤인지 그리고 다시 짐작해보자. 호흡을 가다듬었다. 계속해서 울컥울
며 얕게 떨렸다.
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들이 코로 넘어와 머리를 흔들었지만 나는 다시
나는 지금의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의사에게
또 참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도 내일 2시가 되기 전까지 아무이야기 하지 못한다. 아니 나는 의사에
절대
게 가지 않을 것이다. 곧 보호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 상태에서 더 이상 헷갈리지 않으리라 정신을
대답해 줄 사람은
차리고자 찬물을 연
오로지 혼자여서 나는 내게 묻고 지친마음으로 답하다 모든 것이 진절머리나 끝내 울었다. 숨을 묽게 내쉬면서 입 꼬리를 내리고 입
거푸 끼얹었다. 샤워기 밑에서 찬물을 맞으며 고개를 숙이자 머리카락 을 타고 온몸으로
안에서 볼을 질근질근 씹으면서 다 울어버리려고 애썼다. 사람들은 아
물이 휘감겼다. 덩어리진 마음이 무겁다. 몇 해 전에 덮
무도 이런 나의 모습을 몰랐다. 보이는 모습까지도 오점하나 없이 깔끔
던 무거운 목화이불 속에서 체온이 데워지기도 전에 그 해뜩발긋한 촉
하게 사는 방법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저울의
감과 바깥에 공허하게 들어차 반사되는 건물의 유리, 아마도 그 중간쯤
수평을 맞추는 일 , 해야 할 때는
의 느낌. 어떻게 벗어나야할까 이런 표상자체들의 근원이 어디일까생각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가뿐한척
하자 오랫동안 왜 그것을 찾아볼 생각을 못했나, 깨달았다. 물줄기들을
하면서 해내고 사람들에게 사세하게 긴장을 시키는 일, 정확한 타이밍
내려다보는 시야 속에 순간 누그름하게 눈동자 검은자가 헤집어졌다.
을 찾는 것을. 지내다보면 당연하게도 통증과 치욕이 물론 나를 위협했
뜨거움이 눈을 거쳐 유순하게 맴돌며, 떨어지는 물줄기 속에 갇혀서 정
지만 조금이라도 변체될 때 그 사람과 끊어 버리면 그뿐으로 그만이었
지된 육체 밑으로 낙백하였고 실재하는 것은 나만의 의식뿐이라 모든
172
아브락사스 vol.7
아브락사스 vol.7
173
\\\\\\\\\\\\복도////////////
샤르봉이 그린 그림
홑겹으로 된 기하학적무늬가 새겨진 저 불투명유리가 알루미늄 문에
한 상태로 휴대폰이 방전되었다. 모든 것들이. 나는 폰을 부셨다. 어딘가
다. 칠갑된 매력을 드러내놓고 숨기는 일들을 완벽하게 해내고 있었는
현실감 없이 신경을 잘 못쓰고 만든 헛 점이 있을 것 이다. 그렇게 생각
데, 지금의 정신 나간 상태의 지긋한 무게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하나
하며 주위를 낯선 듯 둘러보았다. 한걸음 한걸음이 제정신으로는 감당
도 토출하지 않고 제대로 숨길 수 있을지 겁이 났다.
하기 힘들어서 슈퍼가 보이자 나는 마시지 못하는 술을 한 병 사서 집으 로 도착했다. 뚜껑을 열고 병의 주둥이를 입에 가져 대고 이걸 먹고 나서 더 엉켜버리 면 어쩌지 고민하다. 금방 포기했다. 종이와 펜을 가져와 오늘 일들을 쭉 써내려갔다.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내 모습을 다시 제대로 정리해보자 나는 어디
끼워져 차가 지나갈 때 마다 한숨 쉬듯 유리위로 차에 라이트 빛이 번지
쯤인지 그리고 다시 짐작해보자. 호흡을 가다듬었다. 계속해서 울컥울
며 얕게 떨렸다.
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들이 코로 넘어와 머리를 흔들었지만 나는 다시
나는 지금의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의사에게
또 참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도 내일 2시가 되기 전까지 아무이야기 하지 못한다. 아니 나는 의사에
절대
게 가지 않을 것이다. 곧 보호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 상태에서 더 이상 헷갈리지 않으리라 정신을
대답해 줄 사람은
차리고자 찬물을 연
오로지 혼자여서 나는 내게 묻고 지친마음으로 답하다 모든 것이 진절머리나 끝내 울었다. 숨을 묽게 내쉬면서 입 꼬리를 내리고 입
거푸 끼얹었다. 샤워기 밑에서 찬물을 맞으며 고개를 숙이자 머리카락 을 타고 온몸으로
안에서 볼을 질근질근 씹으면서 다 울어버리려고 애썼다. 사람들은 아
물이 휘감겼다. 덩어리진 마음이 무겁다. 몇 해 전에 덮
무도 이런 나의 모습을 몰랐다. 보이는 모습까지도 오점하나 없이 깔끔
던 무거운 목화이불 속에서 체온이 데워지기도 전에 그 해뜩발긋한 촉
하게 사는 방법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저울의
감과 바깥에 공허하게 들어차 반사되는 건물의 유리, 아마도 그 중간쯤
수평을 맞추는 일 , 해야 할 때는
의 느낌. 어떻게 벗어나야할까 이런 표상자체들의 근원이 어디일까생각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가뿐한척
하자 오랫동안 왜 그것을 찾아볼 생각을 못했나, 깨달았다. 물줄기들을
하면서 해내고 사람들에게 사세하게 긴장을 시키는 일, 정확한 타이밍
내려다보는 시야 속에 순간 누그름하게 눈동자 검은자가 헤집어졌다.
을 찾는 것을. 지내다보면 당연하게도 통증과 치욕이 물론 나를 위협했
뜨거움이 눈을 거쳐 유순하게 맴돌며, 떨어지는 물줄기 속에 갇혀서 정
지만 조금이라도 변체될 때 그 사람과 끊어 버리면 그뿐으로 그만이었
지된 육체 밑으로 낙백하였고 실재하는 것은 나만의 의식뿐이라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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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락사스 vol.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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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봉이 그린 그림
홑겹으로 된 기하학적무늬가 새겨진 저 불투명유리가 알루미늄 문에
것이 관념이나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다.
멈춰 서서 방들을 열어 보았다.
갓 아물던 상처를 잘근잘근 압박하자 뜻밖에 이곳이 제자리인 듯 무명 유실하게 꼭 맞춰져 환상인지 환상에 속은 현실인지, 두 가지의 감정이 뒤섞여 복도 같은 균형을 잡았다.
온통 행복했던 기억들만 가득한 방은 이제껏 사소하게 웃었던 것들이 한 대 모여 막 농익은 과일처럼 둥둥 떠다녔다. 또 다른 방들은 방대한 오늘까지의 기억들이 말로 당장 형용할 수 없는 표현들로 구분되어 있 었고 그 덩어리들 중심으로 가지치기되는 많은 서랍 속에, ‘장난감’을 보
그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그토록 나는 오랫동안 움직일 수 없었을
면서 어릴 때를 기억 하는 것처럼 연상되는 모든 것들이 섬세하게 정리
까, 옆구리사이가 잘도 위에까지 모르게 욱신욱신 거리고, 척추가 냉랭
되어있었다. 많은 방들이 내 경험과 기억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러다
하게 굳어서 숨겨진 동굴 같이 점점 좁아지는 몸속에서 메아리를 만들
너무나 일찍 그 방의 문을 열었다. 과거에 드러내놓지 않고 뒤로 숨기며 내가 나와 절교시켰던 수많은
위는 칠 흙 같은 어둠으로 둘려 쌓였지만 그 구멍에서 만은 사리를 구별
사람들이 문을 여는 내게 한 방에서, 축하를 쏟으며 나를 얼싸안고 보고
할 수 있을 만큼 밝은 빛이 새어나왔다. 손을 구멍 안으로 깊숙이 넣자
싶었다고 열광했다.
손에 여러 개의 손잡이가 잡혔다.
당황스럽고 불편해서 눈 밑에 경련이 일었다. 더러는 모르는 얼굴도 있었다. 그 혼잡하고 어지러운 상태에서 사람들은 한명씩 나를
어째서 그런 마음을 가진 것 인지 믿기지가 않았지만 이미 나는 구
꼭 껴안고는 먼저 찾아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럴 필요도 없고 나
멍에 머리를 집어넣고 웅크린 채로 몸을 밀어 넣고 있었다. 어깨가 간신
는 그런 환대를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내가 무심하게 끊어 버린 인연들
히 들어가고 구멍이 더욱더 쬐여왔다.
이 또, 기억나지 않을 만큼 내겐 아무 존재도 아닌 사람들에게, 왜 이러
다리를 수직으로 들어 올리고 나는 가장원초적인 모양으로 구멍을 벗어나려 애썼다. 구멍이 더욱더 수축 되면서 몸을 물고 들었지만 나는 꼭 그것들을 확인해야했다. 혼신의 힘
는지 묻지도 못하고 나는 누군가의 품에서 누군가의 가슴으로 옮겨 안 겼다. 아무 판단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리둥절 얼빠진 사람처럼 앞으로
으로 몸을 밀어 넣자 구멍에 힘이 풀리고 쑥 나는 두 번째로 태어났다.
전진 하지 못했다.
눈을 뜨자 사방이 아늑하고 부드러웠고, 이전의 어둠에 익숙해진 탓인
그 중에 참 오래 기다렸던 아니 오래 그리워했던 가슴에서 고개를 들었
지 구멍 밖은 차분한 붉은빛이 더욱 환상적으로 펼쳐졌다. 기대하지도
다. 어머니였다. “아가 ,보러 와줘서 고맙다.”내게 처음으로 그런 말을
못한 새로움에 압도되어서 이것이 나의 실재라니 환희(幻戱)는 아니겠
했다.
지 환희(歡喜)에 차서 제대로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손을 넣었을 때 닿
내 삶에 바빠 명색이나 으스대며 우쭐거릴 줄 알았지 그녀에게 몇
았던 문고리들과 문들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많았고 나는 그 자리에
년 동안 따뜻한 얼굴한번 비추지 못했었는데. 그런데 어머니가 먼저 나
174
아브락사스 vol.7
아브락사스 vol.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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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봉이 그린 그림
며 울려 퍼졌다. 결국엔 손도 들어갈 것 같지 않은 구멍에 도달했다. 주
것이 관념이나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다.
멈춰 서서 방들을 열어 보았다.
갓 아물던 상처를 잘근잘근 압박하자 뜻밖에 이곳이 제자리인 듯 무명 유실하게 꼭 맞춰져 환상인지 환상에 속은 현실인지, 두 가지의 감정이 뒤섞여 복도 같은 균형을 잡았다.
온통 행복했던 기억들만 가득한 방은 이제껏 사소하게 웃었던 것들이 한 대 모여 막 농익은 과일처럼 둥둥 떠다녔다. 또 다른 방들은 방대한 오늘까지의 기억들이 말로 당장 형용할 수 없는 표현들로 구분되어 있 었고 그 덩어리들 중심으로 가지치기되는 많은 서랍 속에, ‘장난감’을 보
그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그토록 나는 오랫동안 움직일 수 없었을
면서 어릴 때를 기억 하는 것처럼 연상되는 모든 것들이 섬세하게 정리
까, 옆구리사이가 잘도 위에까지 모르게 욱신욱신 거리고, 척추가 냉랭
되어있었다. 많은 방들이 내 경험과 기억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러다
하게 굳어서 숨겨진 동굴 같이 점점 좁아지는 몸속에서 메아리를 만들
너무나 일찍 그 방의 문을 열었다. 과거에 드러내놓지 않고 뒤로 숨기며 내가 나와 절교시켰던 수많은
위는 칠 흙 같은 어둠으로 둘려 쌓였지만 그 구멍에서 만은 사리를 구별
사람들이 문을 여는 내게 한 방에서, 축하를 쏟으며 나를 얼싸안고 보고
할 수 있을 만큼 밝은 빛이 새어나왔다. 손을 구멍 안으로 깊숙이 넣자
싶었다고 열광했다.
손에 여러 개의 손잡이가 잡혔다.
당황스럽고 불편해서 눈 밑에 경련이 일었다. 더러는 모르는 얼굴도 있었다. 그 혼잡하고 어지러운 상태에서 사람들은 한명씩 나를
어째서 그런 마음을 가진 것 인지 믿기지가 않았지만 이미 나는 구
꼭 껴안고는 먼저 찾아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럴 필요도 없고 나
멍에 머리를 집어넣고 웅크린 채로 몸을 밀어 넣고 있었다. 어깨가 간신
는 그런 환대를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내가 무심하게 끊어 버린 인연들
히 들어가고 구멍이 더욱더 쬐여왔다.
이 또, 기억나지 않을 만큼 내겐 아무 존재도 아닌 사람들에게, 왜 이러
다리를 수직으로 들어 올리고 나는 가장원초적인 모양으로 구멍을 벗어나려 애썼다. 구멍이 더욱더 수축 되면서 몸을 물고 들었지만 나는 꼭 그것들을 확인해야했다. 혼신의 힘
는지 묻지도 못하고 나는 누군가의 품에서 누군가의 가슴으로 옮겨 안 겼다. 아무 판단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리둥절 얼빠진 사람처럼 앞으로
으로 몸을 밀어 넣자 구멍에 힘이 풀리고 쑥 나는 두 번째로 태어났다.
전진 하지 못했다.
눈을 뜨자 사방이 아늑하고 부드러웠고, 이전의 어둠에 익숙해진 탓인
그 중에 참 오래 기다렸던 아니 오래 그리워했던 가슴에서 고개를 들었
지 구멍 밖은 차분한 붉은빛이 더욱 환상적으로 펼쳐졌다. 기대하지도
다. 어머니였다. “아가 ,보러 와줘서 고맙다.”내게 처음으로 그런 말을
못한 새로움에 압도되어서 이것이 나의 실재라니 환희(幻戱)는 아니겠
했다.
지 환희(歡喜)에 차서 제대로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손을 넣었을 때 닿
내 삶에 바빠 명색이나 으스대며 우쭐거릴 줄 알았지 그녀에게 몇
았던 문고리들과 문들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많았고 나는 그 자리에
년 동안 따뜻한 얼굴한번 비추지 못했었는데. 그런데 어머니가 먼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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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봉이 그린 그림
며 울려 퍼졌다. 결국엔 손도 들어갈 것 같지 않은 구멍에 도달했다. 주
를 안고 다독이며 고맙단다. 끊는 것 만 알았고 고칠 줄은 몰랐다. 나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어서 그녀를 보며 멍하니 “엄마” 했더니 나를 더 꼭
닌 이상” 무리 속에서 옛 여자 친구가 쏘아 붙였다. 그녀 역시도 내겐 소비적인 시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너무 미안해 서 정말이지 그때에는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그 품에서 벗어나 꾀 친했지만 더 이상 나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애정을 가지기 전부터 저울질을 시작했던 나는 모두에게 둘러싸여 비
고등학교 동창 친구 품에 안겼다. 다시금 또, 그는 나를 끌어안으며 자기
난받으면서 동시에 위로 받고 있었다. 하기야 이제까지 이들에게 요구
를 왜 포기 했었냐. 물었다. 나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내일에 바빠
하거나 친하게 지내며 내 생각을 털어놓지 않았던 것이 나를 들어내지
서 신경을 못 쓴 거지” 좀 더 솔직함을 보태서 “귀찮았던 거뿐이야 사는
않았던 것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쉽게 믿지 않았던 것들이 그렇게 잘
게 바쁘니깐”왜 그렇게 까지 말 하냐고 내가물었다.
못이었나. 나는 계속 누구의 품으로 또 그리고 누구의 품으로 옮겨 다녔
“이방은 이제까지 네 철저한 기준 속에 불합격을 받은 사람들이 모여 있
다.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는 방이야.” 그가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
이 마음이 큰 잘못이라면 “왜 이제까지 내게 왜 먼저 와주지 않았어? 왜
나는 얼떨결에 스쳐지나가던, 그러니깐 정말 모든 이에게 잣대를 들
나한테 알려주지 않았어?” 내가 마지막으로 그렇게 변명했다.
샤르봉이 그린 그림
이대고 검열하는 듯 행동했다. 권내를 과시하며 아무도 마음속에 들이
그들은 “보고 싶다고 연락했는데 네가 모든 걸 정리했잖아” 나는 정말
지 않을 것을 대단한 것처럼 여기며, 완벽하게 들어맞을 내 사람만 기다
로 창자 바닥까지 모두 게워졌다. 끝내 사과도 할 수 없는 미안함이 들
리고 있었다. 그렇게 지독히 외로우면서도 그렇지 않은 척 가야 하는 길
었다.
만 따라가면 될 줄 알았으니까 사실상 그것도 어떤 것에 비해서 사사로
쓰면 뱉고 달면 삼키고 아니고 달아서 못 먹고 쓴 걸 참고 삼키는 분명
운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했었다. 계속 그렇게 아무도 끼워주지 않고 아
이율타산의 총구를 들이댄 것들이 또 미안하고 이것 전체가 모두 들어
니 사실은 아무에게도 내 불완전함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드러나
나 버려서 피할 수 없이 얼굴이 뜨거웠다.
지도 않던 그 작은 마음들이 이렇게 까지 어리석지는 않다고 반박하고
나는 한참 그 포옹이 끝나고 그들에게서 벗어나 헛헛하게 걸으면서 속
싶었다.
에 모든 것이 탈수된 듯 사방으로 으스러졌다.
사람들 속에서 이질적이여 본적도 없었고 사소한 싸움이나 말다툼
많은 이들이 나를 기억해준 것 만 해도 다행이다 버려지지 않아서 오히
도 없었다. 내가 먼저 흥미 없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뿐 문제
려 나는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는 기대 지평에 못 미치거나 새로운 것을
라면 마음 맞는 사람이 있어도 그게 사랑이나 애정은 되지 않아서 마음
보여주지 못하는 것 에 대해서 예민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입술을 잘근
한번 주지 않은 것 이걸 잘못이라고 한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잘근 씹다가 다짐했다. 꿈에서 반복되었던 어머니의 전화도 친구의 전
오로지 나의 이상적인 바람에 해당되는, 존경할 수 있을 만한 사람
화도 꿈속에 나타난 것은 뇌에서 분류하고 정리하지 못했던 오류였기
을 기다려 온 것뿐이었다. 방에서 피어난 나의 연민이 그들을 더듬었다.
때문일까. 나의 꼼꼼하고 완벽하려고 노력하는 성격 때문에 그런 것들
“네 마음에 완벽히 들어맞을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네가 둘이 아
을 뇌에서 조차 검토해내고 바꿀 수 있었나 보다. 비어있던 내속에 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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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락사스 vol.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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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았다.
를 안고 다독이며 고맙단다. 끊는 것 만 알았고 고칠 줄은 몰랐다. 나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어서 그녀를 보며 멍하니 “엄마” 했더니 나를 더 꼭
닌 이상” 무리 속에서 옛 여자 친구가 쏘아 붙였다. 그녀 역시도 내겐 소비적인 시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너무 미안해 서 정말이지 그때에는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그 품에서 벗어나 꾀 친했지만 더 이상 나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애정을 가지기 전부터 저울질을 시작했던 나는 모두에게 둘러싸여 비
고등학교 동창 친구 품에 안겼다. 다시금 또, 그는 나를 끌어안으며 자기
난받으면서 동시에 위로 받고 있었다. 하기야 이제까지 이들에게 요구
를 왜 포기 했었냐. 물었다. 나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내일에 바빠
하거나 친하게 지내며 내 생각을 털어놓지 않았던 것이 나를 들어내지
서 신경을 못 쓴 거지” 좀 더 솔직함을 보태서 “귀찮았던 거뿐이야 사는
않았던 것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쉽게 믿지 않았던 것들이 그렇게 잘
게 바쁘니깐”왜 그렇게 까지 말 하냐고 내가물었다.
못이었나. 나는 계속 누구의 품으로 또 그리고 누구의 품으로 옮겨 다녔
“이방은 이제까지 네 철저한 기준 속에 불합격을 받은 사람들이 모여 있
다.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는 방이야.” 그가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
이 마음이 큰 잘못이라면 “왜 이제까지 내게 왜 먼저 와주지 않았어? 왜
나는 얼떨결에 스쳐지나가던, 그러니깐 정말 모든 이에게 잣대를 들
나한테 알려주지 않았어?” 내가 마지막으로 그렇게 변명했다.
샤르봉이 그린 그림
이대고 검열하는 듯 행동했다. 권내를 과시하며 아무도 마음속에 들이
그들은 “보고 싶다고 연락했는데 네가 모든 걸 정리했잖아” 나는 정말
지 않을 것을 대단한 것처럼 여기며, 완벽하게 들어맞을 내 사람만 기다
로 창자 바닥까지 모두 게워졌다. 끝내 사과도 할 수 없는 미안함이 들
리고 있었다. 그렇게 지독히 외로우면서도 그렇지 않은 척 가야 하는 길
었다.
만 따라가면 될 줄 알았으니까 사실상 그것도 어떤 것에 비해서 사사로
쓰면 뱉고 달면 삼키고 아니고 달아서 못 먹고 쓴 걸 참고 삼키는 분명
운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했었다. 계속 그렇게 아무도 끼워주지 않고 아
이율타산의 총구를 들이댄 것들이 또 미안하고 이것 전체가 모두 들어
니 사실은 아무에게도 내 불완전함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드러나
나 버려서 피할 수 없이 얼굴이 뜨거웠다.
지도 않던 그 작은 마음들이 이렇게 까지 어리석지는 않다고 반박하고
나는 한참 그 포옹이 끝나고 그들에게서 벗어나 헛헛하게 걸으면서 속
싶었다.
에 모든 것이 탈수된 듯 사방으로 으스러졌다.
사람들 속에서 이질적이여 본적도 없었고 사소한 싸움이나 말다툼
많은 이들이 나를 기억해준 것 만 해도 다행이다 버려지지 않아서 오히
도 없었다. 내가 먼저 흥미 없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뿐 문제
려 나는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는 기대 지평에 못 미치거나 새로운 것을
라면 마음 맞는 사람이 있어도 그게 사랑이나 애정은 되지 않아서 마음
보여주지 못하는 것 에 대해서 예민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입술을 잘근
한번 주지 않은 것 이걸 잘못이라고 한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잘근 씹다가 다짐했다. 꿈에서 반복되었던 어머니의 전화도 친구의 전
오로지 나의 이상적인 바람에 해당되는, 존경할 수 있을 만한 사람
화도 꿈속에 나타난 것은 뇌에서 분류하고 정리하지 못했던 오류였기
을 기다려 온 것뿐이었다. 방에서 피어난 나의 연민이 그들을 더듬었다.
때문일까. 나의 꼼꼼하고 완벽하려고 노력하는 성격 때문에 그런 것들
“네 마음에 완벽히 들어맞을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네가 둘이 아
을 뇌에서 조차 검토해내고 바꿀 수 있었나 보다. 비어있던 내속에 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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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았다.
운 내가 점점 차올랐다.
래도록 버티는 그의 모습이 내 정확한 눈동자위로 비춰있었고 그것을
한참을 걸었더니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끝에 또 다른 작은 문을
꼭 기억해놓으리라 나는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흰자가 위로 돌아
발견했다.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쓰러지기 일보직전의 내가 사색이 되
가고 발광해대며 손으로 허공을 휘휘 그것은 마지막의 승리의 세레머
어 아니 내가 너무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 문안에는 또 다른 내가
니로 또 나는 동정심에 흔들리던 손아귀(餓鬼)를 더 힘껏 그리고 내가
이죽이죽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아닌 나의 눈알이 한 바퀴를 돌아와 웃음을 지었다 그건 함박이 터지는
가 내게 말했다. 거울을 보는 것처럼 아니 다른 존재가 내 모습을 한 채
폭소, 폭죽 그리고 아름답게 흩뿌려 진체(眞體) 떨어졌다. 그곳에서 마
로 내가 지어 보일 수 없는 그런 자기밖에 모르는 표정에 능청스럽게 손
지막으로 한주먹의 토모를 뽑아내고 다른 나의 시신을 묻었다. 미련 없
내밀고 있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이제까지 이런 모습으로 보였다면
이 돌아서며 나는 그 작은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방문이 쾅 닫치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는 소리에 나는 잠에서 벌떡 깼다. 이제는 안 – 심 안 – 심 내방 버티칼 사
“여기까지 올 줄 몰랐어, 이제는 꿈같은 거엔 안시달릴 거야 모든게 다
이로 차가운 새벽바람이 스며들고 상쾌한 공기가 들어왔다. 가득 퍼지
끝났으니깐 너는 저런 불필요한 것들을 지워 그러면 그전으로 돌아 갈
는 향기가 코 위에 올려진 얼얼한 피곤과 잠의 여운을 끌어다 깊숙한 이
수 있어 괜히 저안에서 소란을 피웠을 뿐이야 너도 참 예민하다 이 밑에
불속으로 코를 묻었다.
까지 오고” 방으로 들어오라고 다른 내가 말했다. 나는 그를 따라 들어 갔다. “사람이 성격이 있고 스타일이 있는 거잖아 깔끔한 성격, 저들이 너에게 요구하는 것 아냐? 불편하고 귀찮을 뿐이야 왜 너에게 애초에 그런 것 들을 바라느냐 말이야 그렇지? 여기까지 온 너는 이제 저런 과거의 사람 들 때문에 시달리지 않아도 돼.” 그 작은 문안에는 내가 상상하고 있었던 세계 딱 그 크기가 들어있었다 나의 완벽함 나의 철저함 오점 없는 나 아무도 손 댈 수 없는 문들 서랍 안에는 모든 이야기가 읽을 수 없게끔 감춰져 있었다. 저쪽의 나는 내게 환영의 포옹을 신청했다. 내가 풍기는 냄새란 이런 것이구나. 항상 어떤지 궁금했었는데 다른 쪽의 나를 따라 나도 이죽이죽 웃으며 순식간에 나는 다른 나의 목을 졸랐다. 양쪽의 튜브가 쉽게도 뚝뚝 끊기 고 벌건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서는 입과 코로 살려주기를 원하는 듯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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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봉이 그린 그림
“여기까지 왔네, 앞으로도 이렇게 만날 일은 없겠지만 반갑다.” 다른 내
운 내가 점점 차올랐다.
래도록 버티는 그의 모습이 내 정확한 눈동자위로 비춰있었고 그것을
한참을 걸었더니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끝에 또 다른 작은 문을
꼭 기억해놓으리라 나는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흰자가 위로 돌아
발견했다.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쓰러지기 일보직전의 내가 사색이 되
가고 발광해대며 손으로 허공을 휘휘 그것은 마지막의 승리의 세레머
어 아니 내가 너무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 문안에는 또 다른 내가
니로 또 나는 동정심에 흔들리던 손아귀(餓鬼)를 더 힘껏 그리고 내가
이죽이죽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아닌 나의 눈알이 한 바퀴를 돌아와 웃음을 지었다 그건 함박이 터지는
가 내게 말했다. 거울을 보는 것처럼 아니 다른 존재가 내 모습을 한 채
폭소, 폭죽 그리고 아름답게 흩뿌려 진체(眞體) 떨어졌다. 그곳에서 마
로 내가 지어 보일 수 없는 그런 자기밖에 모르는 표정에 능청스럽게 손
지막으로 한주먹의 토모를 뽑아내고 다른 나의 시신을 묻었다. 미련 없
내밀고 있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이제까지 이런 모습으로 보였다면
이 돌아서며 나는 그 작은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방문이 쾅 닫치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는 소리에 나는 잠에서 벌떡 깼다. 이제는 안 – 심 안 – 심 내방 버티칼 사
“여기까지 올 줄 몰랐어, 이제는 꿈같은 거엔 안시달릴 거야 모든게 다
이로 차가운 새벽바람이 스며들고 상쾌한 공기가 들어왔다. 가득 퍼지
끝났으니깐 너는 저런 불필요한 것들을 지워 그러면 그전으로 돌아 갈
는 향기가 코 위에 올려진 얼얼한 피곤과 잠의 여운을 끌어다 깊숙한 이
수 있어 괜히 저안에서 소란을 피웠을 뿐이야 너도 참 예민하다 이 밑에
불속으로 코를 묻었다.
까지 오고” 방으로 들어오라고 다른 내가 말했다. 나는 그를 따라 들어 갔다. “사람이 성격이 있고 스타일이 있는 거잖아 깔끔한 성격, 저들이 너에게 요구하는 것 아냐? 불편하고 귀찮을 뿐이야 왜 너에게 애초에 그런 것 들을 바라느냐 말이야 그렇지? 여기까지 온 너는 이제 저런 과거의 사람 들 때문에 시달리지 않아도 돼.” 그 작은 문안에는 내가 상상하고 있었던 세계 딱 그 크기가 들어있었다 나의 완벽함 나의 철저함 오점 없는 나 아무도 손 댈 수 없는 문들 서랍 안에는 모든 이야기가 읽을 수 없게끔 감춰져 있었다. 저쪽의 나는 내게 환영의 포옹을 신청했다. 내가 풍기는 냄새란 이런 것이구나. 항상 어떤지 궁금했었는데 다른 쪽의 나를 따라 나도 이죽이죽 웃으며 순식간에 나는 다른 나의 목을 졸랐다. 양쪽의 튜브가 쉽게도 뚝뚝 끊기 고 벌건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서는 입과 코로 살려주기를 원하는 듯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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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봉이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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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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