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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락사스 열여섯 번째 정말 종말? 2013.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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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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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rbong Contemplation No.7

5

윤준협

종말

39

박은지

여우의 종말, 이 세계의 종말

47

문모운

정말입니다

53

이미 종말

65

정미정

존재의 종말

71

위은옥

철새

79

파편들

101

이주연

종말, 혹은 환생

118

이주연

미료

124

이나현

아스팔트에 관한 짧은 이야기

131

김가혜

박쥐의 밤

153

이종산

versus 보관법

159

손민지

종말을 바라게 된 경위서

185

크레딧

192

이아름나리

김종소리

판매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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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말 기뻐하십쇼, 여러분. 2012년 종말의 해는 지나가고, 2013년 새로운 해가 찾아왔습니다. 죽음을 맞이하지 않고 삶을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래서 아브락사스의 지난 호들을 전부 무료로 배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다들 왜 그런 짓을 하냐고 물어보더군요. 저야말로 왜 모르냐고 되묻고 싶었습니다. 종말이 왔다면 잿더미, 아니 아예 사라져버렸을 것들을 나누는 것인데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아무튼 종말이 오지 않은 덕분에 이번 호는 무사히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삶은 계속됩니다. 끝난 게 아닙니다. 자살의 문턱에 서있는 분들에게 손을 내밀어주십쇼. 어려운 상황에 놓인 분들을 안아주십쇼. 죽음이 당도하기 전까진 아무 것도 끝난 것은 없습니다. 이 책이 당신을 웃게 만든다면, 어떤 감정에 의해서 복받쳐 눈물이 나게 만든다면, 그것이야말로 아브락사스가, 그리고 제가, 바라는 바입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열심히 해나가겠습니다. 아브락사스를 한 번이라도 봐주시고, 한 번이라도 아브락사스에 참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아브락사스는 종말을 맞이하지 않고 올 수 있었습니다.

2013. 1. 18 구로동 유토피아 오피스텔 202동 802호 월간 CA 편집부에서 아발 김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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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rbong Contemplation No.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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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윤준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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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종말에 관한 소설을 쓰기로 한다. 근데 뭘 쓰지? 종말에 관한 소설은 길거리에 걷다가 발에 차이는 낙엽 만큼 많아서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 내일 지구가 종말하는데 사람들이 뭘 하는지에 대해서 써야 하나? 뭐 뻔하지. 나는 방에 처박혀서 맥주를 마실거야. 나는 섹스를 존나 할거 야. 나는 약탈하고 다닐거야. 나는 사재기를 할거야. 사재기? 이 뷰웅신 아 내일 지구가 종말하는데 사재기는 왜 해? 몰라 씨발. 근데 종말은 어 떻게 오지? 지진이 쿠구궁 하고 일어나나? 아님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 지나? 아님 바퀴벌레가 엄청나게 불어나서 사람들을 뜯어먹나? 지구가 펑! 하고 터지나? 생각해보니까 12월 21일인가 언젠가가 지구 종말의 날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2012인가 뭔가 하는 영화 만들어서 사 기처먹었잖아. 있지, 내가 네이버캐스트에서 doomsday preppers라는 사람들을 봤는데, 신기하더라. 너도 한번 봐봐. 내가 적어줄게. 디오오 엠에쓰 디에이와이 피알이피피이알에쓰. 네이버에 치면 나올거야. 근데 종말 진짜 와? 야 너 그거 한번만 더 물어보면 콧구멍을 쑤실거야. 지구 종말이 오냐고 물어보는건 내가 언제 좀비가 되냐고 물어보는 거랑 똑 같다니까? 좀비? 그래, 좀비. 그럼 지금부터 좀비에 관한 소설을 쓰자. 그는 조용히 나를 불렀다.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왜? 무슨 일 있어? 그는 나를 술집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담배를 뻑뻑 피웠다. 뭐야? 얘기 를 해봐. 술부터 마시자. 훌훌훌훌훌훌. 이제 얘기해봐. 뭐때문에 그래? 야 씨발 어떡해. 다 좆됐어. 뭔 소리야? 다 좆됐다니까? 이제 다 끝났다 고. 씨발 작은 하마를 건드린거야! 아주좆 됐다니까! 뭔데 등신아. 말을 해! 어제 밤이었어. 마누라랑 존나 열심히 쎅쓰를 하고 있었지. 알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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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헉. 근데 갑자기 이 미친년이 나를 무는거야. 나 그거 할 때 물거나 때 리거나 하는 거 질색이거든. 그래서 뺐지. 근데 이년이 좀 이상한거야. 막 영화에 나오는 좀비 있잖아, 그거처럼 막 존나 막 등신같이 변하는 거야. 피를 토하더니 눈빛도 이상해지고 암튼 이상해. 그래서 눈치를 깠 지. 아, 이제 씨발 끝났구나. 그래서 일단 그년을 화장실로 집어 던졌어. 그리고 문을 막았지. 못질도 하고 암튼 별짓 다했어. 그리고 여기로 도 망온거야. 내가 가둬놨다니까? 근데 존나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이게 내 마누라만 그런 게 아닐 거 같애. 왜 영화에서 보면 물려서 감염되고 그러잖아. 그럼 마누라도 어디서 물렸다는 건데, 보균자가 있다는 거 아 니야. 아니, 잠깐만, 그럼 이년이 딴 새끼랑 붙어먹은건가? 그 새끼도 쎅 쓰하다가 문거 아니야? 그러니까 이년도 나랑 하다가 문거겠지? 이 씨 발! 개같은 년.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 얘기는 이제 우리 다 좆됐다는거야. 야, 잠깐만. 근데 너도 물렸다고? 그거 물리고 한참 있다 가 좀비되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니 마누라도 어디서 물렸는데 한참 있다가 갑자기 변한거 아냐. 아 씨발 뭐야 이 개새끼야! 꺼져! 나는 그를 남겨두고 서둘러 도망쳐 차에 탔다. 그런데 이런 영화 같은 상황은 뭐란 말인가. 왜 영화같은 데 보면 이런 급한 상황에 시동 안 걸리고 하는거. 그게 지금 나한테 일어났다. 씨불! 그런데 갑자기 텅! 앞 유리에 그가 엎 어졌다. 그리고 부우욱! 하더니 피를 토했다. 아, 이거구나. 그리고 텅 텅 텅! 사방에서 사람들이 내 차로 쓰러졌다.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 소설 이지. 지구종말이 이거로구만. 가만,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그래, 금요 일. 11월 21일. 그래, 그래야지. 한 달 동안 좀비새끼들이 사람들을 뜯어 먹겠지. 아무튼 그새끼 마누라가 문제야. 이게 뭐야, 다 망하고. 그리고 갑자기 끼이익. 차문이 열렸다. 으르릉! 으릉! 좀비새끼들이 내 목을 뜯 어먹는 소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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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괜찮아? 야, 이게 뭐냐! 쏘울이 없잖아, 쏘울이. 내가 늘 말 했지. 소설에는 쏘울이 있어야 한다고. 무슨 어린애 장난도 아니고, 도 대체 이따위 걸 가지고 뭘 어떻게 하겠다고. 코나 풀까? 응? 흥! 하고 풀 어? 다시 써. 쏘울이 담긴 글을 쓰라고. 얘기 한두번 하는 것도 아니고 뭐야 도대체. 그래서 다시 썼다. 그는 조용히 나를 불렀다.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나랑 얘기좀 할래? 무슨 일이야? 너 지금 엄청 창백해. 왜 이렇게 떨어? 무슨 일 있어? 그 는 말을 더듬었다. 수, 술이나 한잔 하자. 나는 그를 태우고 근처 포장 마차로 향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나 담배 피워도 돼? 그래라. 창 문은 열고. 그는 담배를 뻑, 뻑 빨았다. 빗줄기가 굵어진다. 그가 담배를 반 쯤 피웠을 때 포장마차에 도착했다. 이모, 여기 낙지볶음 하나랑 소 주 한 병만 주세요. 말없이 시간이 흘러간다. 낙엽이 걱정이다. 비가 내 리면 낙엽이 온통 떨어지고, 쓸리지도 않는다. 지저분해. 조심스레 그 의 눈치를 살폈다. 초점이 없었다. 야, 괜찮아? 어. 언제 나오냐. 지금 나 온다. 우리는 술잔을 기울였다. “사람이 엄청 힘들면 소주가 달아.” 그 는 한 모금 마시더니 아, 달다. 우리는 조심스레 시뻘건 낙지볶음을 씹 었다. 무슨 일이야? 말해봐. 그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 을 열었다. 어젯밤이었어. 아내랑 그걸 하고 있었지. 그런데 아내가 갑 자기 나 손을 무는거야. 평생 그런 적이 없던 사람이라, 놀라서 아내를 바라봤어. 그런데 조금 이상한거야. 아내가 그 뭐랄까, 그 좀비처럼 변 하는거야. 피를 토하고 창백해지고 입술도 갈라지고. 순간 너무 놀라서 다리가 풀렸어. 그리고 빨리 이 사람을 가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 가 이기적이었지. 내가 아내를 진짜 사랑했다면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 어. 내가 이기적이야. 아내를 일단 화장실에 가뒀어. 그리고 문을 잠그 고 못질을 했지. 서랍장으로 문을 막아뒀어. 정말 큰일났다는 생각이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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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지. 지구 종말 얘기는 진짜였어. 이렇게 찾아올 줄은 몰랐어. 그는 이 야기를 마치고 술잔을 비웠다. 나는 믿을 수 없는 얘기에 말문이 막혔 다. 그러다 문득 그도 손을 물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깐만, 아까 너도 물렸다고 하지 않았어? 어. 손을 물렸지. 보통 영화 같은 데서 좀비한테 물리면 물린 사람도 좀비 되는 거 아니야? 잠깐만, 잠깐만 있어봐. 나 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차되어 있는 차로 달려갔다. 속 으로는 끊임없이 욕을 했다. 씨발, 이게 도대체 뭐야. 그가 거짓말을 하 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좀비라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일단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 는 순간 갑자기 앞유리로 그의 몸뚱이가 떨어졌다. 너무 놀라 담배를 떨 어뜨렸다. 그는 피를 토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사방에서 텅! 하는 소리 가 들렸다. 창문으로 내다보니 사람들이 차를 둘러싸고 있었다. 담배를 주워들 새도 없이 시동부터 걸었다. 그런데 망할, 갑자기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그러나 차는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오늘의 날짜를 확인했다. 11월 21일 금요일. 내가 이렇게 죽는구나. 나 뿐만이 아니겠지. 그의 말대로 지구의 종말. 인류는 이렇게 끝나는구나. 차문이 열렸다. 좀비들은 나를 끌어내 목덜미를 물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좀비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냈다. 크릉, 인가? 눈앞 이 점점 흐려진다. 점 점 점. 안녕. 이건 어때? 이야, 짱짱최고! 졸라 잘 쓰는고만 왜 이런 재능을 썩히고 있었냐. 근데 지금 이 소설 마무리를 어떻게 지을거야? 주제도 없고 이 건 뭐 밑도 끝도 없는 개드립이잖아. 뜬금없이 소설을 쓰는 설정이 나오 질 않나, 종말 얘기 쓰라니까 좀비 얘기 써놓질 않나. 뭐 어때. 그냥 병 맛으로 쓴 소설이니까 병맛으로 끝내면 되지. 그런데 갑자기 텅! 으르릉 으릉! 좀비새끼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으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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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준협 편린, 스무살

2wnsguq2@naver.com pieces.perl.sh 파스타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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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의 종말, 이 세계의 종말

박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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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의 종말, 이 세계의 종말 커다란 돌을 던져 하늘을 깨면, 하늘을 지탱하던 유리가 와장창 부서져 떨어지며 새파랗고 청명한 하늘이 수조관에 갇혀 있던 물처럼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그런 날이었다. 하늘이 깨끗하고 푸르다 못해, 보이지 않는 먼 곳에서는 마치 심해처럼 깊고 어두운 질감이 만져질 것만 같았 다. 그런 빛깔이었다. 심해공포증이 있는 그녀가 지금 하늘을 보고 있다면 틀림없이 겁에 질 려, 몸을 웅크린 채 눈을 꼭 감고 숨을 멈추고, 그리고 몸속으로(마음이 아니라 온 몸을 울리며) 그의 이름을 되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달려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괜찮다고 안 심하라고, 아무 일 없을 거라며 그녀를 품에 안을 필요는 없었다. 세상 의 종말은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날 오리라고 그녀는 믿고 있었고, 그 역 시 그랬다. 아름답다는 말로는 채 담을 수도 없을 만큼 빛나는 날, 모두 가 그 일시적 행복에 젖어 단어를 고르지도 못하는 순간에, 그것이 종말 이라는 최악의 나락을 맞이하기에 가장 어울리는 순간이 아니겠느냐고. - 그 순간에는 사막에 있고 싶어. 지난 어느 맑은 날, 그녀는 두꺼운 전공 책 서너 권을 두 팔에 안고 걷다 가 벤치에 탁 하고 내려놓더니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얇은 가디건을 입 고 있었고, 그는 팩으로 된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하늘을 보고 있던 참 이었다. 꼭 세상이 종말이라도 할 것 같은 날이지, 그녀의 말이 산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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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처럼 부드럽게 스쳤다. 종말이 온다면 그 순간에는 사막에 있고 싶어, 라고 그녀는 덧붙였다. 사막. 그녀의 목소리로 구성되어 형상화된 그 단어는 달콤하게 그의 머 릿속에 새겨졌다. 사막처럼 온전한 곳을 그는 달리 알지 못했다. 사막은 무겁고, 깊고, 모든 걸 포용하는 곳이었다. 어린왕자는 그곳에서 사막여 우를 만났다. 사막여우는 밀도 짙은 사막의 밤을 몇 번이고 홀로 보내 며, 침묵처럼 속삭이고, 사막과 길들여져 가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그 러나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 질 것을 말하는 순간에 사막여우는 그 이후에 생길 일을 조금도 계산하지 않았다. 늘 네 시에 오던 네가 그 날은 다섯 시에 온다면, 혹은 어제는 왔던 네가 내일 은 오지 않는다면, 보리밭만 봐도 너를 떠올리게 되었을 사막여우는 이 제 무엇을 기다리게 될까? 어린왕자는 어쨌든 떠났다. 순수한 것은 때때로 잔혹하다. 아름다운 것이 부서질 때 가장 참담하듯 이. 그는 다시 하늘을 봤다. 그녀를 만나야 할지도 모르겠다. 설사 사막여우 의 작은 세계가 끝장나도 사막은 여전히 있다. 오늘 세상은 종말하지 않 을 테니, 그렇다면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그는 생각을 고쳐 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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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지 겨울, 색색의 목도리, 도수 낮은 와인, 도수 높은 맥주 좋아합니다.

day_m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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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입니다

문모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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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정신을 차리고 언덕배기를 다 내려갑니다. 아래에는 두 갈래 길이

정말입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른쪽으로 갑니다. 평평한 큰길입니다. 길가에 늘 이제 아침 해가 뜨기까지 몇 시간 남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이 깨지 않

어선 작은 가게들은 모두 불이 꺼져있고, 셔터가 내려가 있습니다. 가로

도록 고양이 걸음으로 현관문에 다가섭니다. 그 문을 열면 지상으로 올

등도 전부 꺼져있어 캄캄합니다. 하지만 눈이 깔린 길 위는 달빛을 받아

라가는 계단이 네 개 있습니다. 한 칸 올라설 때, 아버지 미안해요. 또

푸르스름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 길 위에서 나는 얼룩이 되었습니다. 천

한 칸 올라선 뒤, 엄마 미안해요. 그다음 칸은 동생에게. 마지막 칸에서

천히, 부지런히, 발자국을 남기며 움직이고 있는 얼룩입니다. 살아있는

잠시 멈췄습니다. 그 순간 나는 집에 미안합니다. 이 집은 내가 태어나

흔적 그 자체입니다. 묘하게 흐뭇한 기분이 듭니다.

고 자란 집입니다. 온전히 마지막까지 함께 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쉽기 도 합니다.

그 길 끝에는 더 큰 사거리가 나옵니다. 건너편으로 가야했기에 횡단보 도를 찾았습니다. 신호등이 있는 것을 보고 그곳이 횡단보도였다는 걸

동네는 조용합니다. 며칠씩 몰아친 거센 눈보라 속에서 하얗고, 고요한

짐작했습니다. 신호등 역시 길죽하니 까맣기만 한 것이 어느 나라의 깃

마을로 탈바꿈했습니다. 눈은 그쳤지만, 동네 사람 중 누구도 눈을 치우

대처럼 우두커니 서 있을 뿐입니다. 사실 불이 들어오든 말든 신경 쓸

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동네 사람들도 나처럼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차도 없으니까요. 그런데도 나는 횡단보도였

각자 마지막의 할 일을 준비하느라 바쁘겠지요. 낮 동안에도 뛰어나와

던 길 위를 걸어갔습니다. 고가 아래 있는 도로는 눈이 많지 않았습니

노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미래가 없는 풍경이란 오히려 깨끗

다. 마치 시커먼 웅덩이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그 곳에 발을 올립니다.

하고 하얗다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얼어붙은 아스팔트의 냄새가 올라옵니다. 얼굴 주위를 감싸는 공기가 슬퍼집니다. 나는 마저 길을 건넜습니다.

눈을 치우지 않은 달동네는 몹시 위험합니다. 최대한 천천히 눈길을 헤 치며 내려가야 합니다. 집에서 나선지 얼마 안 돼 보이는 언덕배기에는

건너편에는 아까 걸어왔던 동네의 큰길처럼 또 다른 길이 있습니다. 상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있습니다. 두 학교가 함께 쓰는 넓은 운동장은 발

황은 그 길과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쯤에서 나처럼 길 위를 걸어

자국 하나 없이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나는 잠시 그풍경을 넋

가는 ‘얼룩’이 또 하나 나타났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습니다. 도둑고양

놓고 바라보았습니다. 한때 당신과 거닐었던 그 운동장입니다. 겨울 방

이라도 나타나 주기를. 그렇게 소름 끼쳐 하던 비둘기라도. 역시 사람이

학 동안 눈이 내리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가 발도장을 아무렇게

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당신이 나타난다면 그런 기적이 또 있

나 남기며 날뛰던 그곳입니다. 그 모습을 떠올리니 웃음이 납니다. 벌어

을까요. 그러나 내 앞에는 아무것도 출현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색한

진 입술 사이로 입김이 피어오릅니다.

기분이 들었고, 잡념을 환기 시키고 싶어 푸핫 웃었습니다. 입김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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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정신을 차리고 언덕배기를 다 내려갑니다. 아래에는 두 갈래 길이

정말입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른쪽으로 갑니다. 평평한 큰길입니다. 길가에 늘 이제 아침 해가 뜨기까지 몇 시간 남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이 깨지 않

어선 작은 가게들은 모두 불이 꺼져있고, 셔터가 내려가 있습니다. 가로

도록 고양이 걸음으로 현관문에 다가섭니다. 그 문을 열면 지상으로 올

등도 전부 꺼져있어 캄캄합니다. 하지만 눈이 깔린 길 위는 달빛을 받아

라가는 계단이 네 개 있습니다. 한 칸 올라설 때, 아버지 미안해요. 또

푸르스름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 길 위에서 나는 얼룩이 되었습니다. 천

한 칸 올라선 뒤, 엄마 미안해요. 그다음 칸은 동생에게. 마지막 칸에서

천히, 부지런히, 발자국을 남기며 움직이고 있는 얼룩입니다. 살아있는

잠시 멈췄습니다. 그 순간 나는 집에 미안합니다. 이 집은 내가 태어나

흔적 그 자체입니다. 묘하게 흐뭇한 기분이 듭니다.

고 자란 집입니다. 온전히 마지막까지 함께 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쉽기 도 합니다.

그 길 끝에는 더 큰 사거리가 나옵니다. 건너편으로 가야했기에 횡단보 도를 찾았습니다. 신호등이 있는 것을 보고 그곳이 횡단보도였다는 걸

동네는 조용합니다. 며칠씩 몰아친 거센 눈보라 속에서 하얗고, 고요한

짐작했습니다. 신호등 역시 길죽하니 까맣기만 한 것이 어느 나라의 깃

마을로 탈바꿈했습니다. 눈은 그쳤지만, 동네 사람 중 누구도 눈을 치우

대처럼 우두커니 서 있을 뿐입니다. 사실 불이 들어오든 말든 신경 쓸

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동네 사람들도 나처럼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차도 없으니까요. 그런데도 나는 횡단보도였

각자 마지막의 할 일을 준비하느라 바쁘겠지요. 낮 동안에도 뛰어나와

던 길 위를 걸어갔습니다. 고가 아래 있는 도로는 눈이 많지 않았습니

노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미래가 없는 풍경이란 오히려 깨끗

다. 마치 시커먼 웅덩이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그 곳에 발을 올립니다.

하고 하얗다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얼어붙은 아스팔트의 냄새가 올라옵니다. 얼굴 주위를 감싸는 공기가 슬퍼집니다. 나는 마저 길을 건넜습니다.

눈을 치우지 않은 달동네는 몹시 위험합니다. 최대한 천천히 눈길을 헤 치며 내려가야 합니다. 집에서 나선지 얼마 안 돼 보이는 언덕배기에는

건너편에는 아까 걸어왔던 동네의 큰길처럼 또 다른 길이 있습니다. 상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있습니다. 두 학교가 함께 쓰는 넓은 운동장은 발

황은 그 길과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쯤에서 나처럼 길 위를 걸어

자국 하나 없이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나는 잠시 그풍경을 넋

가는 ‘얼룩’이 또 하나 나타났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습니다. 도둑고양

놓고 바라보았습니다. 한때 당신과 거닐었던 그 운동장입니다. 겨울 방

이라도 나타나 주기를. 그렇게 소름 끼쳐 하던 비둘기라도. 역시 사람이

학 동안 눈이 내리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가 발도장을 아무렇게

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당신이 나타난다면 그런 기적이 또 있

나 남기며 날뛰던 그곳입니다. 그 모습을 떠올리니 웃음이 납니다. 벌어

을까요. 그러나 내 앞에는 아무것도 출현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색한

진 입술 사이로 입김이 피어오릅니다.

기분이 들었고, 잡념을 환기 시키고 싶어 푸핫 웃었습니다. 입김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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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져 나왔습니다. 그 입김에 슬픔이 녹아내립니다. 공기가 맑아집니다.

앞에 사람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깜짝 놀라 앗 소리를 질렀습니다. 들고

웃으면 복이 오는 게 사실입니다.

있던 가방까지 떨궜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자세히 보니 그것은 본관 안 에 들어서자마자 있는 큰 거울이었습니다. 머쓱해서 괜히 손전등을 껐

다시 사거리, 왼쪽 코너를 돌면 바로 우리가 다녔던 국민학교가 나옵니

다 켰다 하며 뒷머리를 긁었습니다. 손전등의 방향을 돌려놓고 다시 거

다. 나는 열 살 되던 해 겨울에 이곳으로 전학을 왔습니다. 3학년 마지

울을 들여다 봤습니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흡사 영화나 드라마에

막 학기가 끝나기 일주일 전이었습니다. 모든 게 싫었지요. 두고 온 친

나오는 도둑놈 같았습니다. 까만 모자, 까만 점퍼, 까만 바지, 까만 워커,

구들 생각만 간절했습니다. 빨리 봄 방학을 하고 반이나 바뀌었으면. 그

까만 장갑. 오직 얼굴 부분만이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아 으스스한

럼 조금 나아질까. 어린 나에게는 중대한 고민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봄

느낌도 들었습니다. 사실은 무엇을 훔치러 들어가는 것이 아닌데도, 괜

방학식이 끝나고, 짐을 챙기는 나에게 당신이 다가와 말을 걸었습니다.

히 가슴이 뛰었습니다. 나는 심호흡을 몇 번 하고, 가방을 들어 등 뒤에

미간이 왜 그렇게 항상 좁은 거냐고 타박을 주었지요. 나는 어이가 없어

다시 메고 오른쪽에 있는 계단을 올랐습니다.

서 헛웃음을 뱉었지요. 당신도 배시시, 눈웃음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 교실 위치는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복도에는 각 반의 신발장이 벽에

것이 우리의 시작이었습니다.

붙어 있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발장 한 칸을 열어봤습니다. 작 예상했던 대로 학교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쯤

은 실내화 한 켤레가 다소곳이 놓여 있었습니다. 이 실내화의 주인은 지

이제는 다 자란 내게 아무런 장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손쉽게 담을

금 어디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바깥에 바람이 크게 불었

넘어 학교 안에 들어갔습니다. 학교 운동장은 왜 이렇게 좁아진 걸까 의

는지 복도에 나있는 창문들이 파르르 떠는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소리

문이 들었습니다. 다닐 때는 우리 학교 운동장이 세상에서 가장 클 거라

가 왠지 주인 잃은 학교의 울음소리처럼 들렸습니다. 나는 다시 슬퍼졌

고 굳게 믿었는데 말입니다. 운동장 위를 가로질러 부지런히 흔적을 남

지만, 해야 할 일을 떠올렸습니다. 신발장 문을 천천히 닫은 후, 옆에 있

겨봅니다. 그것을 지켜보는 것은 본관 가운데 서 있는, 그 크기가 몹시

는 교실의 앞문에 손을 뻗었습니다. 달그락 달그락 소리가 날 뿐 문은

도 초라한 이순신 동상뿐입니다. 나는 그 이순신 동상이 있는 본관으로

열리지 않았습니다. 교실 문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습니다. 아직도

향했습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본관에는 짝수 학년의 교실이 있을 겁

자물쇠를 쓰는 게 신기했습니다. 가방에서 장도리를 꺼내 자물쇠를 땄

니다.

습니다. 나는 정말 도둑놈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걸 어디 서 배웠는지, 도대체가 기억나지 않는데 말입니다. 기묘한 죄책감을 느

잠겨있을 줄 알았던 본관 문은 열려 있었습니다. 수고를 덜 수 있게 되

끼며 교실 문을 열었습니다. 교실이라는 공간 속에 오랜 시간 묶여 있던

었습니다. 그때부터 메고 있던 가방을 뒤적였습니다. 손전등을 꺼내 불

냉랭한 공기 사이에서도 그리움은 얼어죽지 않은 모양입니다. 나는 문

을 켰습니다. 그런데 웬걸, 불빛이 어딘가에 반사되어 돌아옵니다. 내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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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져 나왔습니다. 그 입김에 슬픔이 녹아내립니다. 공기가 맑아집니다.

앞에 사람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깜짝 놀라 앗 소리를 질렀습니다. 들고

웃으면 복이 오는 게 사실입니다.

있던 가방까지 떨궜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자세히 보니 그것은 본관 안 에 들어서자마자 있는 큰 거울이었습니다. 머쓱해서 괜히 손전등을 껐

다시 사거리, 왼쪽 코너를 돌면 바로 우리가 다녔던 국민학교가 나옵니

다 켰다 하며 뒷머리를 긁었습니다. 손전등의 방향을 돌려놓고 다시 거

다. 나는 열 살 되던 해 겨울에 이곳으로 전학을 왔습니다. 3학년 마지

울을 들여다 봤습니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흡사 영화나 드라마에

막 학기가 끝나기 일주일 전이었습니다. 모든 게 싫었지요. 두고 온 친

나오는 도둑놈 같았습니다. 까만 모자, 까만 점퍼, 까만 바지, 까만 워커,

구들 생각만 간절했습니다. 빨리 봄 방학을 하고 반이나 바뀌었으면. 그

까만 장갑. 오직 얼굴 부분만이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아 으스스한

럼 조금 나아질까. 어린 나에게는 중대한 고민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봄

느낌도 들었습니다. 사실은 무엇을 훔치러 들어가는 것이 아닌데도, 괜

방학식이 끝나고, 짐을 챙기는 나에게 당신이 다가와 말을 걸었습니다.

히 가슴이 뛰었습니다. 나는 심호흡을 몇 번 하고, 가방을 들어 등 뒤에

미간이 왜 그렇게 항상 좁은 거냐고 타박을 주었지요. 나는 어이가 없어

다시 메고 오른쪽에 있는 계단을 올랐습니다.

서 헛웃음을 뱉었지요. 당신도 배시시, 눈웃음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 교실 위치는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복도에는 각 반의 신발장이 벽에

것이 우리의 시작이었습니다.

붙어 있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발장 한 칸을 열어봤습니다. 작 예상했던 대로 학교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쯤

은 실내화 한 켤레가 다소곳이 놓여 있었습니다. 이 실내화의 주인은 지

이제는 다 자란 내게 아무런 장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손쉽게 담을

금 어디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바깥에 바람이 크게 불었

넘어 학교 안에 들어갔습니다. 학교 운동장은 왜 이렇게 좁아진 걸까 의

는지 복도에 나있는 창문들이 파르르 떠는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소리

문이 들었습니다. 다닐 때는 우리 학교 운동장이 세상에서 가장 클 거라

가 왠지 주인 잃은 학교의 울음소리처럼 들렸습니다. 나는 다시 슬퍼졌

고 굳게 믿었는데 말입니다. 운동장 위를 가로질러 부지런히 흔적을 남

지만, 해야 할 일을 떠올렸습니다. 신발장 문을 천천히 닫은 후, 옆에 있

겨봅니다. 그것을 지켜보는 것은 본관 가운데 서 있는, 그 크기가 몹시

는 교실의 앞문에 손을 뻗었습니다. 달그락 달그락 소리가 날 뿐 문은

도 초라한 이순신 동상뿐입니다. 나는 그 이순신 동상이 있는 본관으로

열리지 않았습니다. 교실 문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습니다. 아직도

향했습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본관에는 짝수 학년의 교실이 있을 겁

자물쇠를 쓰는 게 신기했습니다. 가방에서 장도리를 꺼내 자물쇠를 땄

니다.

습니다. 나는 정말 도둑놈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걸 어디 서 배웠는지, 도대체가 기억나지 않는데 말입니다. 기묘한 죄책감을 느

잠겨있을 줄 알았던 본관 문은 열려 있었습니다. 수고를 덜 수 있게 되

끼며 교실 문을 열었습니다. 교실이라는 공간 속에 오랜 시간 묶여 있던

었습니다. 그때부터 메고 있던 가방을 뒤적였습니다. 손전등을 꺼내 불

냉랭한 공기 사이에서도 그리움은 얼어죽지 않은 모양입니다. 나는 문

을 켰습니다. 그런데 웬걸, 불빛이 어딘가에 반사되어 돌아옵니다. 내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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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에서 당신의 별명은 잠퉁이였습니다. 수업 시간마다 꾸벅꾸벅 조는

이십 대 중반에 들어선 우리는 때때로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당

바람에 생긴 별명이었지요. 선생님이 칠판 앞에서 필기만 하면 고개를

신이 가졌던 별명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낄낄거리면서 그

가누지 못하니, 선생님의 호통도 여러 번. 당신의 어머니가 학교에 불려

런 일도 있었지, 참 웃기는 일이었어 하면서 회상했습니다. 그런데, 가

오는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내가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조느냐고.

끔 그 칠판 위에 분필 긋는 소리가 그립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일부러

집에서 잠을 못 자는 거냐고. 아니면 선생님의 뒷모습이 지루한 거냐고.

들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니냐는 이야기를 당신이 꺼냈습니다. 그때 당신

당신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그게 말이지. 칠판에

은 미소짓고 있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서글픈 기분을 들게 하는 그런 미

분필 지나가는 소리만 들으면 기분이 너무 좋은 거야. 나른해지고 몸에

소였습니다. 나는 그것을 줄곧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

힘이 점점 빠져. 그러면서 막 졸음이 쏟아져. 처음에는 당신의 말이 거

께 지낸 유년 시절의 그 교실 안, 칠판 앞에 섰습니다. 이미 오래전 초등

짓말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당신은 선생님이 칠판에 무엇을

학교라는 이름을 얻었으면서, 아직도 분필 가루 날리는 칠판을 쓰고 있

쓸 때나 그릴 때에만 고개를 주억거렸고, 그 순간이 지나가면 정신을 바

는 것을 보며 여러 가지 의미의 한숨을 쉬어봅니다.

짝 차리고 필기 내용을 공책에 옮겨 적었습니다. 정확히 그 소리의 어떤 점이 기분 좋은 것인지 나로서는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당신이 좋다

한밤중입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손전등의 스위치를 껐습니

하니 그냥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나만은 잠퉁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

다. 교실 유리창으로 달빛이 스며듭니다. 이런 곳에 혼자 있을 줄은 꿈

았죠. 당신은 나에게 그저 귀여운 사람일 뿐이었으니까요.

에도 몰랐습니다. 당신이 나를 이곳에 데려온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당신은 지금 어디 있을까 상상해봅니다. 몇 해 전 집에 딸아이가

당신은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교의 대표 잠꾸러기였습니다. 하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이는 이제 당신에게 아빠라는 말을

지만 중학교나 고등학교는 당신에게 천만다행으로 커다란 화이트 보드

할 수 있을 정도로 자랐겠지요. 그 아이와 당신의 아내, 그리고 당신. 이

를 사용했습니다. 분진 때문에 교사들의 목 건강이 악화되는 것을 계속

렇게 세 가족이 세상의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

두고 볼 수 없었던 학교의 고마운 방침이었죠. 당신은 잠퉁이라는 불명

입니다. 내 가족과 당신의 가족과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마지막입

예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덕분에 좋은 대학도

니다.

들어갈 수 있었죠. 대학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어여쁜 사랑도 해 보고, 때로는 실패도 맛봤습니다. 나는 그 세월동안 당신 곁에서 당신을

그리고 그 마지막에 나는 전파를 쏘아 올리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기어

응원하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했습니다. 함께 많은 밥을 먹었고, 인생의

코 당신에게 말할 수 없었던 진실을 담아 남기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풍경들을 함께 공유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둘

사는 별은 참으로 보기 좋게 소멸하겠지만, 전파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도 없는 좋은 친구였지요. 너무나도 좋은 친구였습니다.

나는 가방에서 분필을 꺼냈습니다. 새 분필입니다. 분필을 손에 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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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에서 당신의 별명은 잠퉁이였습니다. 수업 시간마다 꾸벅꾸벅 조는

이십 대 중반에 들어선 우리는 때때로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당

바람에 생긴 별명이었지요. 선생님이 칠판 앞에서 필기만 하면 고개를

신이 가졌던 별명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낄낄거리면서 그

가누지 못하니, 선생님의 호통도 여러 번. 당신의 어머니가 학교에 불려

런 일도 있었지, 참 웃기는 일이었어 하면서 회상했습니다. 그런데, 가

오는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내가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조느냐고.

끔 그 칠판 위에 분필 긋는 소리가 그립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일부러

집에서 잠을 못 자는 거냐고. 아니면 선생님의 뒷모습이 지루한 거냐고.

들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니냐는 이야기를 당신이 꺼냈습니다. 그때 당신

당신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그게 말이지. 칠판에

은 미소짓고 있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서글픈 기분을 들게 하는 그런 미

분필 지나가는 소리만 들으면 기분이 너무 좋은 거야. 나른해지고 몸에

소였습니다. 나는 그것을 줄곧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

힘이 점점 빠져. 그러면서 막 졸음이 쏟아져. 처음에는 당신의 말이 거

께 지낸 유년 시절의 그 교실 안, 칠판 앞에 섰습니다. 이미 오래전 초등

짓말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당신은 선생님이 칠판에 무엇을

학교라는 이름을 얻었으면서, 아직도 분필 가루 날리는 칠판을 쓰고 있

쓸 때나 그릴 때에만 고개를 주억거렸고, 그 순간이 지나가면 정신을 바

는 것을 보며 여러 가지 의미의 한숨을 쉬어봅니다.

짝 차리고 필기 내용을 공책에 옮겨 적었습니다. 정확히 그 소리의 어떤 점이 기분 좋은 것인지 나로서는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당신이 좋다

한밤중입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손전등의 스위치를 껐습니

하니 그냥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나만은 잠퉁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

다. 교실 유리창으로 달빛이 스며듭니다. 이런 곳에 혼자 있을 줄은 꿈

았죠. 당신은 나에게 그저 귀여운 사람일 뿐이었으니까요.

에도 몰랐습니다. 당신이 나를 이곳에 데려온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당신은 지금 어디 있을까 상상해봅니다. 몇 해 전 집에 딸아이가

당신은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교의 대표 잠꾸러기였습니다. 하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이는 이제 당신에게 아빠라는 말을

지만 중학교나 고등학교는 당신에게 천만다행으로 커다란 화이트 보드

할 수 있을 정도로 자랐겠지요. 그 아이와 당신의 아내, 그리고 당신. 이

를 사용했습니다. 분진 때문에 교사들의 목 건강이 악화되는 것을 계속

렇게 세 가족이 세상의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

두고 볼 수 없었던 학교의 고마운 방침이었죠. 당신은 잠퉁이라는 불명

입니다. 내 가족과 당신의 가족과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마지막입

예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덕분에 좋은 대학도

니다.

들어갈 수 있었죠. 대학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어여쁜 사랑도 해 보고, 때로는 실패도 맛봤습니다. 나는 그 세월동안 당신 곁에서 당신을

그리고 그 마지막에 나는 전파를 쏘아 올리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기어

응원하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했습니다. 함께 많은 밥을 먹었고, 인생의

코 당신에게 말할 수 없었던 진실을 담아 남기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풍경들을 함께 공유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둘

사는 별은 참으로 보기 좋게 소멸하겠지만, 전파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도 없는 좋은 친구였지요. 너무나도 좋은 친구였습니다.

나는 가방에서 분필을 꺼냈습니다. 새 분필입니다. 분필을 손에 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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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색입니다. 분홍색, 하늘색도 챙겨 왔지만, 역시 하얀 색이 좋을 것

열심히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다른 소음이 없어 더 또렷이 들립니다.

같았습니다. 그리고 녹음기를 꺼냈습니다. 녹음 버튼을 누르니 빨간 불

이 소리가 어린 당신의 자장가였다는 걸 떠올립니다. 어떤 기분이었을

이 들어왔습니다. 분필은 부드러웠습니다. 당신의 뺨도 이런 느낌일까

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내가 나른해지려는 건 단순히 잠을 못

요. 만져본 일이 없습니다. 수만 번 상상은 해봤지만요. 기억 속에 남은

잤기 때문이겠지요. 체온이 점점 떨어지고 있어 그런 건지도 모를 테구

당신의 얼굴은 희미하기만 합니다. 나이에 탓을 돌려봅니다. 분필을 만

요. 달도 별도 아직 제자리걸음인데, 해는 떠오르려 준비합니다. 저 먼

지작거리기만 합니다.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분필 가루가 지

곳에서 쾅쾅 굉음이 들려옵니다. 이제 시작과 동시에 끝이 오고 있는 것

문 사이에 묻어나는 게 또렷이 느껴졌습니다. 고민에 빠졌습니다. 시간

입니다. 나는 이렇게 하나의 얼룩으로 세상의 마지막을 받아들입니다.

은 계속 흘러갑니다. 교실 창문이 바람에 파르르 떱니다. 이 소리 역시

이제 녹음기 소리가 끊길 때까지 당신에 대한 어떤 말도 하지 않을 것

고스란히 녹음기에 새겨지겠지요. 분필을 들었습니다. 칠판에 톡 닿는

입니다. 정말입니다.

느낌이 선명하게 손끝에 전해졌습니다. 망설임은 끝났습니다. 칠판에 분필 지나가는 소리가 교실 안을 가득 채웁니다. 본관의 옥상 문은 열려 있었습니다. 아주 활짝 열려 있습니다. 문득 포 기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꼭 그런 모양새입니다. 옥상도 눈으로 깨끗 합니다. 손전등으로 아래를 비춰봅니다. 이렇게 작은 불빛에도 눈에 빛 이 반사되어 주변이 환해집니다. 운동장에 남긴 발자국들이 보였습니 다. 코끝이 아릿합니다. 나는 목을 잔뜩 움츠렸습니다. 점퍼 안에 턱은 가려졌지만, 코 위까지는 어떻게 안되는 모양입니다. 눈물이 발끝에 투 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소매로 대충 얼굴을 훔치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습니다. 달도 별도 작년 이맘때 봤던 그대로인 것 같은데 어째서 내가 있는 이 별은 사라진다는 것일까요. 하지만 모두에 게 주어진 것이라면 기꺼워하기로 다짐한 것이 꽤 오래전 일입니다. 해 야 할 일도 충실히 마쳤고 말입니다. 나는 녹음기를 꺼내 재생 버튼을 누르고, 옥상 난간 위에 눈을 털어낸 뒤 살포시 올려두었습니다. 녹음기에서는 칠판 위로 이렇다 할 규칙 없이 분필 지나가는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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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색입니다. 분홍색, 하늘색도 챙겨 왔지만, 역시 하얀 색이 좋을 것

열심히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다른 소음이 없어 더 또렷이 들립니다.

같았습니다. 그리고 녹음기를 꺼냈습니다. 녹음 버튼을 누르니 빨간 불

이 소리가 어린 당신의 자장가였다는 걸 떠올립니다. 어떤 기분이었을

이 들어왔습니다. 분필은 부드러웠습니다. 당신의 뺨도 이런 느낌일까

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내가 나른해지려는 건 단순히 잠을 못

요. 만져본 일이 없습니다. 수만 번 상상은 해봤지만요. 기억 속에 남은

잤기 때문이겠지요. 체온이 점점 떨어지고 있어 그런 건지도 모를 테구

당신의 얼굴은 희미하기만 합니다. 나이에 탓을 돌려봅니다. 분필을 만

요. 달도 별도 아직 제자리걸음인데, 해는 떠오르려 준비합니다. 저 먼

지작거리기만 합니다.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분필 가루가 지

곳에서 쾅쾅 굉음이 들려옵니다. 이제 시작과 동시에 끝이 오고 있는 것

문 사이에 묻어나는 게 또렷이 느껴졌습니다. 고민에 빠졌습니다. 시간

입니다. 나는 이렇게 하나의 얼룩으로 세상의 마지막을 받아들입니다.

은 계속 흘러갑니다. 교실 창문이 바람에 파르르 떱니다. 이 소리 역시

이제 녹음기 소리가 끊길 때까지 당신에 대한 어떤 말도 하지 않을 것

고스란히 녹음기에 새겨지겠지요. 분필을 들었습니다. 칠판에 톡 닿는

입니다. 정말입니다.

느낌이 선명하게 손끝에 전해졌습니다. 망설임은 끝났습니다. 칠판에 분필 지나가는 소리가 교실 안을 가득 채웁니다. 본관의 옥상 문은 열려 있었습니다. 아주 활짝 열려 있습니다. 문득 포 기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꼭 그런 모양새입니다. 옥상도 눈으로 깨끗 합니다. 손전등으로 아래를 비춰봅니다. 이렇게 작은 불빛에도 눈에 빛 이 반사되어 주변이 환해집니다. 운동장에 남긴 발자국들이 보였습니 다. 코끝이 아릿합니다. 나는 목을 잔뜩 움츠렸습니다. 점퍼 안에 턱은 가려졌지만, 코 위까지는 어떻게 안되는 모양입니다. 눈물이 발끝에 투 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소매로 대충 얼굴을 훔치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습니다. 달도 별도 작년 이맘때 봤던 그대로인 것 같은데 어째서 내가 있는 이 별은 사라진다는 것일까요. 하지만 모두에 게 주어진 것이라면 기꺼워하기로 다짐한 것이 꽤 오래전 일입니다. 해 야 할 일도 충실히 마쳤고 말입니다. 나는 녹음기를 꺼내 재생 버튼을 누르고, 옥상 난간 위에 눈을 털어낸 뒤 살포시 올려두었습니다. 녹음기에서는 칠판 위로 이렇다 할 규칙 없이 분필 지나가는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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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모운

moun8823@gmail.com @andplaydead 1. 20년 가까이 살던 동네가 있다. 그 동네에는 장충 초등학교와 장충 중,고 등학교가 있다. 장충 중,고등학교는 같은 재단이며 학교 부지가 한 곳에 있다. 그리고 남중, 남고다. 장충 초등학교를 나온 많은 남학생들이 장충 중학교에 진학하고, 그대로 다시 장충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후에 그 남 자 아이들의 통칭은 십이지장충이 된다. 불쌍하다. 남중,남고 에스컬레이 터도 보통 서러울 거 같지 않은데 십이지장충이 뭐냐. 십이지장충이. 2. 아무튼 가장 기본적인 질문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지막이 온다면 뭐 할래? (음, 나는 글을 쓰겠어! 정말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이 종말이 오는 데도 직접적 고백을 못하는 좀 불쌍한 사람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 (도덕적, 환경적, 성격적 요소)를 결국 화끈하게 뛰어넘지 못했다. 하지만 그치의 마음은 분명 ‘어딘가’에 남을 거라는 믿음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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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종말

이아름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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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름나리 그래픽디자이너

areumnari@gmail.com areumna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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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종말

정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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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종말 + 창밖으로는 비가 쏟아지고 있다. 빗방울들이 창문에 흘러내려 시야를 가려버렸다. 창밖을 쳐다보고 있으니 눈앞이 아득하다. 이 버스, 제대로 탄 걸까. 버스에 올라타면서 누군가가 나를 붙잡아 주길 바랐는지도 모 른다. 삶이란 원래 슬픔과 슬픔 사이에서 계속 이어져 가는 것이고, 이 슬픔이 끝나도 나에게 또 다른 슬픔이 다가오는 것이니까. 원래 그런 것 임을 알고 있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슬픔을 감당해 낼 수 없었다. 그래 서 결국 이 죽음으로 가는 버스에 나의 빈 몸을 실었다. 누군가가 나를 붙잡아 준다면, 나는 다시 돌이킬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은 덮어두자. 이 미 나는 버스에 올라탔고, 더 이상 돌아볼 것도 없다. 결국, 나를 붙잡아 줄 사람도 없을 테고. 버스 안에는 나처럼 더 이상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창밖을 쳐다보고 있다. 그들은 어떤 이유 로 이 버스에 올라탔을까. 나에게는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었다. 마 지막 나의 존재 이유였던 그에게서 나의 존재가 소멸되어 버리고, 난 더 이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도 마찬가지였을 테고. 그냥 우리는 서로 조금 외로웠던 것 같다. 혼자 사는 삶이 지쳐가기 시작할 때 쯤, 그를 만 났다. 그도 혼자였고, 나도 혼자였으므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졌 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연애를 했고, 함께 살기 시 작했다. 남들처럼 연애하며 행복한 건 아니었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사 실이 좋았고 안도감이 들었다. 잠들기 전에 몇 번이고 문을 쳐다보며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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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해하지 않아도 됐고, 차갑게 식어버린 밥을 혼자 억지로 뜨며 티비로 눈을 돌리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누군가 옆에 있기만 해준다면 그게 꼭 그가 아니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깊고, 또 깊은 꿈을 꾸고 눈을 뜬 어느 아침, 더 이상 그는 내 옆에 없었다. 평소에도 말이 없었던 그는 그 냥 그렇게 말없이 나를 떠났다. 그 흔한 편지 한 통도 남기지 않은 채로.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으므로 괜찮았다. 그가 없어도 나는 괜찮았다. 그가 있을 때처럼 나는 일어나 씻고 식사준비를 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엄마가 나를 버렸을 때도 나는 괜찮았는데, 이번엔 좀 이상했다. 마음이 뜨거워졌고, 입술이, 그리고 눈이 뜨거워졌다. 알 수 없는 일렁임이 목 을 타고 올라왔다. 삶은 원래 혼자 살아가는 것이라도 몇 번이고 되뇌었 다. 입술을 움직여 소리를 밖으로 꺼냈다. “원래 혼자 살아가는 거야.” 라고. 뜨거운 액체가 차가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떠났다.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제 와서 사랑을 했고 안했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사랑했던 것 같다. 그에게서 나는 사라졌다. 이제 더 이상 그의 삶에 나의 존재는 없다. 나 의 삶에서도 그의 존재를 지워낼 수 있을까. + 버스는 이제 어둠속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어둠을 지나면 죽음의 문 턱이 있다. 마지막 선택의 기회가 그곳에 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살아 야 할 이유가 떠오른다면 그곳에서 내리면 그뿐이고, 그때까지 살고 싶 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살아야 할 이유가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 면 그냥 그대로 가서 끝을 맞는다. 마지막 기회를 지나면 버스는 삶의 종점, 그리고 죽음으로 향한다. 나의 죽음은 나에게 세상의 종말을 가져 다주겠지. 내가 없는 세상은 나에겐 세상이 아니니까, 그냥 조용히 이렇 게 조용히 끝나는 거야. 삶의 끝이든 세상의 끝이든 어차피 나에겐 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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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아. + 아주 어렸을 적의 기억이라고는 아버지라는 사람에게 맞으며 살려달라 고 소리를 지르는 어머니에 관한 것뿐이다. 방문을 꼭 걸어 잠그고는 엄 마는 무슨 잘못을 했기에 저렇게 맞는걸까하는 생각과 저렇게 살아야 한다면 그냥 죽는 편이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나라면 그냥 죽여 달라고 소리를 지를 텐데, 엄마에게는 그때까지는 살아야 할 이유가 있 었던 모양이다. 그런 날이면 오빠는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로 눈을 감고 죽은 사람처럼 가만히 누워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엄마가 집을 떠나던 그날도, 오빠는 죽은 사람처럼 가만히 누워있었다. 그때 나는 배웠다. 나의 삶은 내가 채워가는 것이라고, 오직 나 하나로만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라고. 엄마라는 존재의 부재는 오빠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 았다. 오빠는 그저 오빠의 인생을 살았고, 아버지는 아버지의 인생을 살 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집을 떠나오면서 내 삶에서 그들의 존재를 지워냈다. 그들의 삶에서도 나의 존재는 그렇게 지워졌겠지. 그렇게 나 는 완벽한 혼자가 되었다. + 버스는 죽음의 문턱 정류장에 서 있다. 몇몇 사람들이 내린다. 삶의 이 유를 찾은 모양이다. 사랑도, 가족도 나를 떠났고 혹은 내가 그들을 떠 나왔다. 나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살고 싶다는 생각이 진하게 머릿 속을 스쳐갔다. 그렇지만 그게 다였다. 그저 잠시 스쳐갔을 뿐이다. 살 고 싶었지만, 그게 삶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내가 없어진다고 해도 슬퍼할 누군가도, 안타까워하며 울어줄 누군가도 없었다. 혹시 있었다 면 그들의 슬픔이, 그들의 눈물이 내 삶의 이유가 되었을까. 여기를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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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면, 여기만 지나면 이제 더 이상 이런 생각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겠 지. 버스가 죽음의 문턱을 지나자 버스의 안내원이 흰 종이와 검은 펜을 건 넸다. 나는 펜을 들었다. 유서를 쓸 생각을 하니 죽음이 실감났다. 그런 데 이 유서, 누구한테 전해질까. 나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나를 아는 사 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결국 나한테 되돌아오는 걸까. 막상 펜을 들자 쓰려고 했던 말들이, 글들이 머릿속을 떠나 흩어졌다. 나는 다시 펜을 내렸다. 버스는 죽음 정류장에 가까워갔고, 버스안의 몇몇 사람들이 울기 시작 했다. 그들의 눈물에는 후회와 슬픔이 담겨있겠지. 나에겐 남은 것이 아 무것도 없었다, 단 한 방울의 눈물조차도. 검은 동굴로 들어선 후, 어둠 이 계속됐다. 그렇게 버스는 마지막 정류장을,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났 다. 눈을 감았다. 그렇게 세상의 모든 것을 감아버렸다. 이제 나에게 소 멸이 찾아올까. 나는 눈을 떴다. 아주 천천히 아주 느리게 눈을 떴다. 그 리고 펜을 들고, 마지막 순간을 흰 종이에 기록했다. 버스는 어둠을 지 나 흰 빛으로 향했다. 흰 종이가 부신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종말은 끝도, 소멸도 아니다. 종말은 변화이고 새로운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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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정 글 끄적거리기, 글 읽기, 기타, 비, 정신이 이상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jmj881217@naver.com twitter @jmj8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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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새

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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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새 “아! 종이가방 안 가져왔다…….” “종이가방?” “계란 삶고, 귤도 챙겨놨는데…….” “계란? 계란 안 좋아하잖아?” “기분이라도 내보려고 했죠.” “가다가 배고프면 뭐라도 사 먹자.” “아, 아까워. 이십분 동안 삶은 건데.” “몇 개 삶았는데?” ㅇ은 왼손가락을 모두 펼쳐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눈과 코를, 입과 볼 을 아무렇게나 구겼다. 그들이 멋쩍을 때면 주고받는 인사법이었다. 얼 굴이 더 못생겨 보이게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0이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와 같았으면 0의 웃음을 보고 ‘이겼다’고 말했을 ㅇ은 계란을 삶으면서 소비되었을 도시가스비를 셈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웠다. ㅇ은 일을 보고 뒤를 닦는 심정으로, 안 하던 짓은 안 하는 게 좋다는 말을 표정 뒤에 덧붙였다. 0도 ㅇ의 표정에 보답하는 뜻으로 가볍게 얼굴을 찡그렸다. ㅇ과 0은 1호선 신도림역 소요산행 플랫폼에 서 있었다. 열차가 이제 막 신도림역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ㅇ은 아직 움직이는 열차 안을 주시 [일러두기] ㅇ은 ‘이응’으로 0은 ‘영’으로 0-0은 ‘영 다시 영’으로 l은 ‘일’으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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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열차 안에 있던 사람들이 내리기 위해 출입구로 몰리고 있었다. ㅇ은 빈자리를 확인했다. 열차가 멈췄다. 잠깐의 정적과 함께 열차는 속 을 비우고 비운 속을 다시 사람들로 채울 준비를 마쳤다. 열차에서 내 리기를, 열차에 오르길 기다리는 사람들의 입에서 흰 김이 피어올랐다. ㅇ은 열차 안에 있던 사람들이 밖으로 채 내리기도 전에 열차 속을 비 집고 들어갔다. 알 수 없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누군가 냄새의 정체 를 물어본다면 ㅇ은 ‘가난’이 옳은 대답이 될 수 있을지 생각하며 빈자 리에 앉았다. 곧이어 0이 바로 옆에 앉았다. 미처 앉지 못한 학생과 직 장인, 아줌마와 노인은 제가 더 불편하다는 듯 몸과 몸을 아무렇게나 섞 고 있었다. 속을 채운 열차가 다시 움직였다. 두 사람의 무릎 위로 내려 앉은 마른 겨울 햇빛이 따뜻했다. ㅇ과 0은 여유롭게 정면을 응시했다. 검은색 스타킹, 검은 부츠, 검은 패딩 바지를 지나 살짝 반짝이는 은갈치색 정장바지가 보였다. ㅇ은 지 난밤 술에 취한채로 지하철에 몸을 맡겼을 직장인을 생각했다. 몇 번이 나 왔다갔다 했을까. 종점에서 종점으로, 갈 때까지 가고 열차 업무가 종료되었을 때 부르지도 않았는데 때 맞춰 등장한 드라마 속 택시처럼 공익공무원이 나타났을 것이다. 아저씨, 집이 어디세요? 여기서 이러시

면 안 돼요. 그는 낯선 이의 감정 없는 걱정에 그간 참았던 울분을 토악 질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공익공무요원에게 그의 토악질은 사람이 많은 곳이라면 어디서든 들을 수 있는 유행가처럼 그렇고 그런 직장인의 그렇고 그런 이야기로 보였을 것이다. 간밤의 피로가 채 풀리 기도 전에 지하철에 다시 몸을 맡겼을 그를 생각하자 ㅇ은 갑자기 몰려 오는 피로를 느꼈다. 잠을 잘 못 자고 나온 탓에 조금 어지러운 것도 같 았다. ㅇ은 억지로 트림을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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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은 얼마 전 ㅇ과 충무로에서 먹었던 갈치조림 식당을 생각했다. 갈치 조림을 먹기 위해 남대문 시장에서 부러 충무로까지 갔는데, 충무로역 에 도착하자마자 갈치조림은 남대문 시장이 유명하단 사실이 생각난 날이었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ㅇ과 0은 식당을 꼼꼼히 살피 는 것으로 실수를 애써 만회하려고 했다. 식당 한쪽 벽에는 맛집 인증서가 붙어 있었다. 각종 방송에 소개된 장면 을 프린트해 붙인 것이었다. 그 집 갈치조림이 맛있다는 것은 몇 번의 방문으로 익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어느 식당엘 가나 붙어 있는 남발식 보증수표는 ㅇ과 0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어보였다. 다른 한쪽 벽에는 재료 인증서가 붙어 있었다. 갈치 세 마리가 나란히 배열되 어 있고 하단부에는 ‘국내산(제주, 여수)갈치’라는 글귀가 도장처럼 박 힌 포스터였다. 포스터 속 갈치는 죽기 전 짐승이 으레 그렇듯 눈알이 채 발사되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ㅇ과 0은 그 갈치조림 식당이 있는 충무로에서 처음 만났다. ㅇ의 첫 직장이기도, 0의 첫 직장이기도 했던 회사가 충무로에 있었다. ㅇ은 0 을 처음 봤을 때 너무 날카롭다고 생각했고, 0은 ㅇ을 처음 봤을 때 너 무 둥글다고 생각했다. 서로에 대한 첫 평가와 인상은 제법 객관성 있 는 것이었다. ㅇ은 모든 것에 너무 둥글었고, 0은 모든 것에 너무 날카 로웠다. 첫 만남으로부터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ㅇ과 0은 3년 중 꼭 1년여 의 회사생활을 나란히 버텼다. 그리고 2년째 무직생활을 나란히 버티 고 있는 중이었다. 일을 그만 둔 뒤 더 이상 이렇다 할 일을 하기 싫었 던 둘은, 아르바이트를 구했고, 근근이 돈을 벌었다. 아르바이트조차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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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싫을 때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을 때 적금을 깼고 보험을 해약했다. 돈이 있을 땐 돈을 썼고, 돈 이 없을 땐 집에만 있었다. 생활에 한 번 집중하기 시작하니 돈보다 당 장 생활하는 게 더 급하게 느껴졌다. 공과금, 휴대폰 요금은 연체할 수 있었지만 변기가 막혔다, 보일러가 고장 났다, 하수구로 쥐가 드나든다, 물탱크가 샌다는 것을 알고도 모른 척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생활은 연체할 수 없었다. 둘은 자기 생활은 자기가 구한다는 심정으로 2년째 무직생활을 버텼다. 생활에 사활을 거는 동안 ㅇ은 조금 각이 졌고, 0은 조금 뭉툭해졌다. “저 회색 정장 바지 보이죠?” “응.” “생각나는 거 있어요?” “…….” “저걸로 광고 만들어 보는 거 어때요?” “지금 보이는 장면으로?” “응.” “좋아. 생각나면 말하자.” “나부터. 은단 광고. 다른 사람들처럼 저 남자도 원랜 검은색 옷을 입을 입고 있는 건데 착시효과인 거예요. 은단 한 알 먹었을 뿐인데 몸이 막 회색으로 변하는 거죠. 효능이 너무 뛰어나서.” “그걸 어떻게 표현해?” “그게 관건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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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회사에 취직하자.” “취직하긴 아까운 머리죠. 생각나는 거 있어요?” “음……. 나는 표백제? 원랜 검은색 옷을 입고 있는 건데 때가 너무 잘 지워져서.” “그럼 흰 옷이어야죠.” “그건 너무 흔해. 과장이고.” “하긴, 때가 지워진 게 회색이라니 신선하다. 솔직하고……. 근데 잠깐, 생각해 봐요. 검은색에서 어떤 색을 빼야 회색이 돼요?” “회색?” “회색하고 회색을 더하면 검은색이에요? 회색이지.” “밥 아저씨한테 물어보러 가자.” “밥 아저씨 죽었을 걸요.”

어느 날 0은 ‘철새를 보러 가고 싶다’고 했다. 그날 ㅇ은 0의 문자소리 에 잠에서 깼다. 실눈을 뜨고 시계를 보았다. 12시 58분이었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반지하 방에 빛 대신 어둠이 밝은 지 오래였다. 0의 문자 를 보자마자 ㅇ은 철새를 보러 가는 데 얼마가 필요할지 생각했다. 그 리고 통장 잔고를 확인하지는 않고 그저 가늠해보았다. 잔고를 확인하 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귀찮게 느껴졌다. 그렇게 확인 아닌 가늠만으로 한 달을 버텼다. 분명한 사실은 부러 잔고를 확인해 보지 않아도 자동 이체로 구멍 난 통장에 잔고는 바닥을 보인 지 오래였을 것이었다. 잔 고를 생각하자 ㅇ은 자신이 새삼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6개월 전에도, 1 년 전에도 자신을 한심스럽게 여겼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더욱 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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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러웠다. 그리고 점심이 지나도록 차가운 반지하 방에 누워 잠만 잤던 자신을 생각했다. 늦게 일어났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가 남았 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일이 없다는 것. ㅇ은 불안해졌다. 이번 엔 확실한 것만 생각해보기로 했다. 철새를 보고 오면 생활비가 없다는 것, 더 이상 깰 적금도 없다는 것.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자 더 이상 최악 의 상황이 떠오르지 않았다. ㅇ은 안도했다. 돈이 없다는 것 뿐 모든 상 황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ㅇ은 머리끝까지 덮고 있던 이불을 젖히 고 일어났다. 무거운 커튼을 의식적으로 확 걷어냈다. 요란한 소리가 무 색하게도 빛은 들어오지 않았다. 이번엔 창문을 조금 열었다. 그제야 방 안에 갇혀 있던 어둠이 문 틈 사이로 조금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 사이로 얼굴을 박았다. 배에서부터 숨을 끌어 모아 내쉬었다. 그리고 천 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코를 통해 차디찬 겨울 바람이 들어왔다. 바람은 ㅇ에게 다시 확실한 것만 생각하게 했다. 돈이 없다. ㅇ은 이부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 0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럼 가 야죠. 통장 잔고 따위가 대수냐는 투였다. 스스로도 놀랐다. 답장을 보 내고 다시 생각했다. 자신은 최악의 상황에서 최악을 선택한 것뿐이다. 이것으로 최악을 면한다는 논리였다. 그게 다였다. 0에게 왜 철새가 보 고 싶은 건지 따위는 묻지 않았다. 보고 싶다는 게 이유라면 이유일 것 같았고 그게 전부일 것 같았다. 철새를 보러 가는 것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걸레질처럼 느껴졌다. 하고 싶으면 해야 하고, 하기로 한 이상 이 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고 나면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고, 그것으 로 충분히 의미가 있어 보였다. ㅇ은 설거지를, 빨래를, 청소를 하기 시 작했다. ㅇ의 추측은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ㅇ에게 ‘철새를 보러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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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문자를 보내기 전, 0도 옥탑방 바닥에 바짝 엎드려 책을 읽을 참이었 다. 읽어야 할 책과 읽고 있는 책은 족히 열 권이 넘었지만 책장에서 새 로 꺼낸 책이었다. 0은 책에서 표정을 먼저 읽었다. 책장에 꽂혀 있는 수많은 책들은 고유의 표정을 지니고 있었고, 그것은 0에게 날마다 새 롭게 다가왔다. 어제 보이지 않았던 책의 표정이 오늘 보였다. 0은 책 을 읽기 시작했다. 책의 두께와 재질부터 평가하는 게 순서였다. 평가는 만져보고 냄새를 맡아보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그 다음은 내지 차례였 다. 찢겨진 부분이 있는지 잉크가 번지지 않았는지를 꼼꼼히 살폈다. 판 권에 적힌 일련의 숫자와 책과 관련된 사람들의 이름까지 확인한 뒤에 야 비로소 본문을 읽을 수 있었다. 서문을 몇 줄이나 읽었을까. 이번엔 잠이 쏟아졌다. 0은 책을 베고 정자세로 누워 천정을 바라보았다. 이불 밖으로 나온 유일한 신체-얼굴-만이 웃풍과 싸우고 있었다. 0은 옥탑방 안의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커튼이랄 것 없이 무릎 담요와 짜투리 천으로 창을 막아 놓은 모습이었다. 웃풍을 의식하자 잠이 달아났다. 0 은 다시 천정을 바라보았다.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떨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자 몸이 더 떨렸다. 더 떨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자 몸이 더 심 하게 떨렸다. 몸을 떨면서 0은, 옥탑방으로 이사한다고 했을 때 ㅇ이 한 말을 생각했다. 옥탑방은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기 때문에 차라리 반지 하가 낫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0은 옥탑으로의 이사에 스스로 만족 했다. 이유는 ㅇ의 조언과 같았다. 여름이면 가장 여름일 수 있고, 겨울 이면 가장 겨울일 수 있는 곳이 옥탑방에서의 생활이라는 것이었다. 0은 한쪽 벽에 걸어놓은 세계지도를 보았다. 그리고 그 자신이 세상에 서 가장 추운 나라에 있다고 상상했다. 몸은 여전히 떨렸지만 추운 나 라에 있다고 생각하니 응당 떨어야 할 몸처럼 느껴졌다. 아후스트라키

호미우스. 0은 뜻도 없는 단어를 중얼거렸다. 새삼 자신의 목소리가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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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하게 들렸다. 그리고 일부러 소리를 내어 크게 웃어 보았다. 그때 밖 에서 새가 울었다. 꽤 가까이 들린 것으로 보아 새는 옥탑 바로 옆 전봇 대에 앉아 있는 듯했다. 0은 곧 언젠가 옥탑에서 마주친 새를 떠올렸다. 그때도 새는 울고 있었다. 우는 새를 본 건 처음이었다. 새는 우는 일에 온몸을 바치고 있었다. 0은 다시 몸을 떨었고, 세계지도를 보았고, 추운 나라를 생각했고, 철새를 생각했다. 철새를 봐야겠어. 생각이 떠오르자 0은 철새를 보지 않는다면 겨울을 가장 겨울답게 보낼 자신이 없었고, 그게 아니라면 과연 이 겨울에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몰랐다. 생각이 굳 혀지자 ㅇ에게 문자를 보냈다.

신도림을 떠난 열차는 용산을 지나 남영역을 향해 가고 있었다. 열차는 어느 때보다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한 번 정차해서 다시 출발하기 까지 1, 2분씩 지연되기도 했다. 열차가 느리게 가는 만큼 시간도 느리 게 흐르는 것 같았다. 열차 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더욱 을씨년스러워보 였다. 페인트칠이 벗겨져 거의 알몸을 드러낸 것과 다름없어 보이는 건 물 벽에 직업안내, 기사모집, 구인구직, 철거예정 따위의 글씨가 보였 다. 열차가 끝에서 끝으로 움직이는 동안 건물 안과 밖에서 빨래는 말라 가고 아이들은 자라나고 나무는 잎을 피우고 지웠다. 쓰레기처럼 아무 렇게나 쌓여 있는 눈무덤 위로 햇살이 반짝였다. 그 모습만이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ㅇ과 0의 무릎 위를 지켰던 햇살이 이번에는 머리 위 로 움직였다. 졸음이 몰려왔다. ㅇ과 0은 나란히 눈을 감았다. 겨울 햇 살은 두 사람의 속눈썹까지 꼼꼼히 내려앉았다. 열차는 남영역에 도착 했다 곧 출발했다. ㅇ이 집에 두고 온 종이가방에서 삶은 계란을 꺼내 껍질을 막 까려고 할 때, 0이 갈치 조림을 한 숟가락 막 퍼 올릴 때 ㅇ과 0의 핸드폰이 동시에 울렸다. 0-0의 문자였다. ㅇ과 0, 0-0과 l의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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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창에 새 메시지가 떴다. 열차는 다시 서울역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 또 지각했음. 그래도 안 뜀. 망할 1호선 - 어. 우리도 지금 1호선인데 - 우리는 철새 보러 가는 중 - 둘이? - ㅇㅇ - 나도 가고 싶다 - 월차 쓰고 오면 안 돼요? - 마감 기간이야 - 급한 일 생겼다고 하루만 빼요 - 잠깐만 - 그냥 와요 - 그럼 갈래. 어디야? - 서울역. 여기서 기다릴게요. 도착해서 전화해요

지상을 달렸던 열차가 지하에 진입했다. 서울역이었다. ㅇ과 0은 서둘 러 내렸다. 내렸다기보다는 뒤에서 미는 사람들에 의해 내려졌다. ㅇ과 0은 사람들을 따라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었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0-0을 기다릴 참이었다. 0은 l에게 전화했다. 0-0까지 가게 되었으니 l 도 같이 가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ㅇ과 0, 0-0이 문자를 주고받 는 동안 l은 언제나 그렇듯 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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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준비도 안 했는데. 그냥 집에 있을래요.”

0은 순간 준비라는 단어가 낯설게 느껴졌다. 대합실로 향하는 자신과 ㅇ을 서울역 내의 쇼윈도에 비쳐 보았다. 언뜻 보아도 ㅇ과 0보다 새 옷 을 입은 마네킹이 더욱 사람처럼 보였다. 며칠째 감지 않은 머리를 털모 자로 가린 것, 물이 빠진 청바지를 입은 것, 남방이나 니트 따위를 여러 겹 입고 그 위에 검은색 모직 코트를 걸친 것이 평소 모습 그대로였다. ㅇ이 이십 분 동안 삶은 계란을 뺀다면 두 사람은 여느 때 외출처럼 아 무런 준비 없이 집을 나왔다. 하긴 그마저도 잊어버린 ㅇ이었다. 심지어 세수도 하지 않았다. 대신 0의 백팩에는 갑작스러운 외박을 대비한 세 면도구부터 손톱깎이까지 들어 있었다. 외출할 때는 그 가방만 메면 그 만이었다. 이유는 다르지만 ㅇ도 마찬가지였다. ㅇ은 수도세와 가스비 를 아낄 요량으로 외출할 때 세면도구를 챙긴 지 오래였다. “우리도 아무 준비 안 했어. 그냥 나와.”

전화기 속 l은 대답대신 수줍게 웃었다. 못 온다는 뜻이었다. ㅇ과 0은 l 을 설득하는 것을 일찌감치 포기했다. l이 못 온다면 못 오는 것이었다. 둘은 대합실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애당초 세웠던 일정이 조금 흐트러 지긴 했지만 ㅇ과 0은 오히려 기분 좋은 긴장을 느꼈다. 그러나 ㅇ과 0 이 느낀 긴장은 그제야 철새를 보는 데에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 생각해 보게 했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런 준비도 필요치 않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것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생각하려고 하면 생각이 안 난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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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니까. 도저히.” “음……. 망원경?” “글쎄, 필요할지도 모르지.” “하긴, 한 마리만 보러 가는 것도 아닌데 망원경은 필요 없겠다.” “그럼 카메라?” “핸드폰 있잖아요.” “그러네.” “이렇게 해서는 평생을 보내도 못 찾을 걸요.” “그렇지,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찾으려고 하니까 못 찾는 거예요.” “맞아. 가다가 필요한 게 생각나면 그때 준비하지, 뭐.”

ㅇ과 0은 대화를 멈췄다. 각자 입을 닫고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 해도 생각나지 않았다. 얼마 뒤 ㅇ은 겨우, 제 한 몸을 생각했다. 뒤이어 0은 제가 메고 있는 가방을 생각했다. ㅇ과 0은 생각은 났지만 입 밖으 로 꺼내 서로에게 말하지 않았다. 필요한 건 이미 거기 있었기 때문이 었다.

0-0은 철새를 보러 간다고는 했지만 회사로 갈지 ㅇ과 0이 있다는 서 울역으로 갈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금정역에서부터 1호선 열차를 타 고 온 0-0은 일단 신도림에서 내렸다. 회사로 간다면 2호선으로 환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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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가야 했다. 0-0은 입사 이후 열심히 일만 했던 자신이 떠올랐다. 가 도 돼. 짧은 고민 끝에 0-0은 결국 철새를 보러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러나 다음 고민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회사를 못 간다는 말을 문자로 할지 전화로 할지 망설였다. 아니, 그보다 누구에게 말할지가 관 건이었다. 문자를 보내는 것도 전화를 거는 것도 받는 상대가 있어야 가 능한 일이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갑자기 쉬게 되었다고 했을 때 그 이 상 더 묻지 않을 사람이라야 할 것이었다. 나이는 많지만 젊은 척하지 않아 더욱 젊게 느껴지는 김부장이 생각났다. 김부장의 얼굴 뒤로 오늘 까지 마감해야 할 원고가 떠올랐다. 둥둥 떠오른 원고 뒤로 곧 내일 오 후에 있을 회의가 뒤따랐다. 떠오른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0-0은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2호선 환승역 쪽으로 발 길을 옮겼다. ㅇ과 0에게는 원래대로 출근하겠다고 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뭐가 원래의 일이고 뭐가 나중의 일인지 몰랐다. 철새를 보러 가 야 할 이유보다 보지 않아도 될 이유가 더 많아 보였으므로, 회사를 가 는 것이 원래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회사로 돌아가는 게 맞다. 그저 자 신은 정해진 길을 따라 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철새를 보러 가야 할 이유는 단 하나였고, 보지 않아도 될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그렇다면 철새를 보러 가는 게 맞았다. 0-0은 언제나 단 한 가지 이유만을 가진 일에 마음이 끌렸고, 그런 것이라면 그것을 따라야 했다. 첫 번째 내린 선택을 스스로 어길 수는 없었다. 0-0은 소요산행 플랫폼으로 다시 몸을 옮겼다. 그리고 김부장에게 전화했다. 0-0의 예 상대로 김부장은 개인적인 사정이 어떤 성질의 것인지 더 이상 물어보 지 않았다. 그 대신 내일 있을 클라이언트와의 회의를 상기시켰다. 0-0 은 전화를 끊자마자 김부장과의 통화기록을 삭제했다. 마감해야 할 원 고도 클라이언트와의 회의도 더는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1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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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출근 시각이 조금 지난 열차 안은 한산했다. 군데군데 빈자리가 보였다. 열차는 이빨 없는 잇몸을 드러낸 입 속 같았다. 0-0은 입김처럼 따뜻한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어디를 향해 가는지

모른다. 열차에 몸을 맡긴 채 0-0은 자신이 탈선한 열차에 탄 것은 아 닌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고리타분한 상상이었다. 탈 선한 것은 열차가 아니라 자신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 금에 와서 회사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0-0은 걱정은커녕 그 자체를 즐기기로 했다. 정황이나 이유는 다를지 몰라도 돌이킬 수 없다 는 건 ㅇ과 0이라고 다를 게 없다는 걸 0-0은 잘 알고 있었다. 열차가 신도림, 영등포, 신길, 대방, 노량진을 지날 때 0-0은 3년 전 다 녔던 회사로의 출근길을 생각했다. ㅇ과 0, 0-0과 l이 다녔던 회사였다. 0-0은 ㅇ과 0의 첫 직장이었던 출판사의 기획 팀장이었다. 0-0이 가장 먼저 회사에 들어갔고, 그 다음으로 0과 l이 마지막으로 ㅇ이 입사했다. 0-0은 직장인으로, 직장인이 재미없게 느껴질 땐 프리랜서로 오랫동안 기업의 사보를 편집했다. 사람들은 0-0을 두고 감각이 좋다고 했다. 그 러나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매일 먹으면 꼴도 보기 싫어지는 것처 럼 사보를 만드는 일이 이따금씩 지겨워졌고 코스 요리를 먹는 기분으 로 다음 순서에 따라 일을 그만두었다. 0-0이 편집회사를 그만 둘 즈음, ㅇ과 0은 각각 대학과 대학원 졸업을 했고, l은 애니메이션 회사를 그만 두었다. 한 달여를 쉰 후 0-0은 신생 출판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입사한 회사에서 ㅇ과 0, l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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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만나기 전까지 넷은 생판 모르는 남이었고, 교집합이라고는 모두 안경을 쓴다는 것 뿐 이렇다 할 공통점이 없었다. 그것도 0-0을 제 외한 나머지는 렌즈를 끼거나 안경조차 쓰지 않은 날이 많았다. 그러나 넷은 죽이 잘 맞았다. 일하는 방식은 달랐지만 말하는 방식은 같았다. 그 때문에 싸울 일도, 감정이 상할 일도 없었다. 말하는 방식이 같다는 건 곧 노는 방식만은 같다는 것을 의미했던지 넷은 점점 일하는 시간보 다 노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보다 옥상에 올라가는 일이 많아졌다. 어떤 날은 ㅇ이, 또 다른 어떤 날은 0이 주도 했다. 누군가 주도하지 않은 날에도 넷은 자연스럽게 옥상에 모였다. 다 른 팀의 눈치가 보일 땐 모두 옥상으로 올라가고 한 사람만이 사무실에 남아 팀의 자리를 지켰다. 옥상에서 놀만큼 논 사람이 내려오면 이번에 는 자리를 지켰던 사람이 옥상으로 올라갔다. 일명 교대 근무였다. 그런 넷이 못마땅하다는 한 대리의 넋두리가 쌓여 넷이 못마땅하다는 여론 이 생겼고, 못마땅하다는 여론 때문에 결국 회사 분위기는 흐려졌다. 회 사에서는 당연히 점점 넷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회사 이름을 단 출판물은 제때, 혹은 조금 늦게 마땅히 나오고 있었다. 회사에서 압박이 들어오자 0-0은 야근하는 직원들의 눈치를 피해 ㅇ과 0, l을 회사 근처 호프집으로 불러내기도 했다.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놀았고, 눈이 오면 눈이 온다고 놀았다. 계절에 따라 바뀌는 바람이 충무로역 술집 문을 열 어주었고, 그들은 바람의 안내에 따라 움직였다. 충무로의 술집이란 술 집은 꼭 한 번씩은 갔다. 그들은 말할 때만은 진심으로 다음에 또 온다 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두 번 다시 간 곳은 없었다. 그들은 회사에서 밀어낸 만큼 구석으로 몰렸고, 구석으로 몰린 만큼 친 해져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노는 게 진짜 재밌게 노는 것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술을 마시고 춤을 췄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춤을 출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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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꽃을 안주삼아 시를 읊었다. 노래방에선 탬버린을 훔쳤다. 새벽까 지 놀다 회사 근처 모텔에서 쪽잠을 자고 나온 날엔 옷걸이를 훔쳤다. 얼마 뒤 나란히 퇴사를 결정한 넷은 탬버린과 옷걸이를 누가 맡을 것이 냐는 주제를 두고 만남 후 처음 위기를 맞기도 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0-0만이 편집회사로 돌아갔다. 0-0은 그들이 같이 일했던 꼭 1년만큼 편집회사를 다니고, 지금의 새로운 편집회사로 이직했다.

0-0을 태운 열차가 서울역에 도착했다. 0-0은 0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때 0의 핸드폰이 울렸다. l의 전화였다. 0이 l에게 철새를 보러 가자고 전화했을 때, 그리고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다는 대답으로 전화를 끊었을 때 l은 이미 고민하고 있었다. 가지 않겠다는 뜻으로 웃었지만 무언가 찝찝했다. l은 그동안 ㅇ과 0, 0-0과 만나기로 했을 때 자신이 얼마나 많이 빠졌는지 생각했다. 어림잡아 셈 해 봐도 다섯 번은 족히 넘은 것 같았다. 모임이 있을 때면 이상하게 급 한 약속이 생겼고, 그려야 할 그림이 생겼다. 넷 중에서 유일하다시피 조용한 성격의 l이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조용히 빠진다면 빠질 수 있었 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경우가 달랐다. 0의 목소리가 조금 다르 게 느껴진 것도 같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야 했을, 자신을 설득하는 ㅇ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야 하나? l은 0에게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l은 넷 중에서 가장 부 지런했다. 넷 중 가장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부지런할 수밖에 없었다. 걱정 때문에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났다. 돈이 떨어질 때마다 여 러 회사를 다녀 보았지만 한 달을 채 채우지 못했고, 걱정은 끊이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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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다. l의 걱정은 여기에서도 저기에서도 걱정에서 걱정으로 이어졌다. l의 걱정을 들어주던 ㅇ과 0, 0-0은 제발 자기 걱정은 자기가 알아서 하 라고 말할 지경이었다. l 자신도 자신이 걱정하는 것은 무엇인지, 걱정 하는 것을 걱정하는 것은 아닌지 헷갈릴 때도 많았다. l은 매일 아침 일어나 샤워를 하고 화장을 하고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렸다. 잡지나 책에 들어갈 그림을 그리는 일이 들어 올 땐 일을 했고 그렇지 않을 땐 자기의 이름을 단 그림책에 들어갈 그 림을 그렸다. 그러나 그림책 출간은 점점 늦어졌고, 그동안 l의 걱정은 두 배 더 늘어났다. 그러나 이렇다 할 방법이 없었다. 걱정의 끝은 그리 고 그리고 그리는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l은 생각했다. 생각하고 그린

다. l은 책상에 앉아 생각했다. 그림을 그릴 참이었다. 그러나 뭘 그릴지 몰 랐다. 하루쯤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고 해서 큰일이 나진 않을 것이다. 하루 종일 그림 걱정으로 책상에 앉아 있느니 차라리 밖으로 나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새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자신도 다시 움직일 수 있 으리라는 희망이 생겼다. l은 서울역을 향해 가고 있을 0-0에게 전화했 다. 통화를 마친 l은 데생 노트와 색연필을 챙겨 집을 나섰다. 0-0은 대합실에 나란히 떠 있는 ㅇ과 0의 뒤통수를 발견했다. “아이고, 여기서들 다 만나네.” “어머, 진짜. 여기서 다 만나게 되네. 잘 지냈어요?” “그럼요. 역엔 어쩐 일이에요?” “사람을 기다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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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요?” “당신이요.” “그런데, 우리 진짜 어디로 가는 거야?” 0-0이 묻자 ㅇ과 0은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0-0은 이럴 줄 알았다고 예상했으면서도 아차 싶었다. 그때 ㅇ이 입을 열었다. “강원도 철원이요.” “철원? 그럼 기차 타고 가는 거야?” “지하철이 훨씬 더 싸대요.” “지하철만 타고 갈 수 있어?” “의정부역까지 가서 백마고지행 기차로 갈아타면 된대요.” “백마고지? 오늘 안엔 돌아올 수 있는 거지?” “아마도.”

ㅇ이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했을 때, 0이 삶은 계란 생각이 이제야 난다 고 했을 때, 0-0이 넷 중 유일하게 돈을 버는 자신이 사주겠다고 했을 때 l이 도착했다. 화장을 하고 밝은 색 외투를 입었다는 이유로 0은 l을 놀렸다. l은 부끄럽다는 뜻으로 한 손으로는 앞머리를, 다른 한 손으로 는 ㅇ의 팔을 쓰다듬으며 말 대신 웃었다. 부산으로, 여수로 가는 기차 를 안내하는 방송이 대합실에 울려 퍼졌다.

ㅇ은 자신과 0, 0-0과 l에게 정말 필요한 게 무엇인지 떠올랐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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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할지, 한다면 지금 해도 되는지, 지금이 아 니라면 언제 해야 하는지, 언제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면 말을 하지 않 는 게 맞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넷에게 필요한 단 한 가지는 질문이었 다.

0, 그런데 왜 갑자기 철새가 보고 싶었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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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은옥 I am player www.oneafter999.blogspot.kr @Osimproduction 아브락사스 이번 호 주제가 발표될 때 아! 라는 마음으로 아주 아주 오랜만에 소설을 써 보자, 그리고 2년 전 했던 말을 지켜 보자, 하고 쓴 소설이랍니다. 정말 종말 재밌게 써내려갔습니다. 정말 종말을 생각하고 써내려갔는데 정말 종말 종말인지는 알 수가 없어요. 오만을 조금 보태서 저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종말이라고 생각했고 아브락사스의 주제 또한 정말 종말이니 종말에 가까운 작품이라고 위안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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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편들

김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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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편들 1. 춤을 추고 있었다. 평소, 춤이라면 질색하며 사양하는 내가 춤을 추고 있었다.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었 기에 말이 안 되는 상황이, 말이 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눈앞에는 반나 체의 여자가 나를 부둥켜안은 채 엉덩이를 흔들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허리춤을 끌어안아 내 몸 쪽으로 바싹 끌어당겼다. 여자는 아무 저항 없 이 내 손길을 따랐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군.”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여자가 풋, 하고 웃었다. 내 중얼거림을 들 었던 것인지, 아님 다른 우스운 일이 떠오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 여자는 관심 없다는 듯, 그저 계속해서 엉덩이를 앞 뒤로 흔들어댔다. 내가 반나체의 여자-그녀가 입고 있던 건 브래지어와 팬티, 그리고 속 이 훤히 비칠 정도로 얇은 블라우스 한 장뿐이었다-와 내게 있어 터부 시되는 춤이라고 하는 행위를 어떻게 해서 하게 된 것인지 도통 알 수 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어지간히 술을 마셨고, 필름이 끊겼다 가, 간신히 정신을 차린 상태였다.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끊어진 필름의 조각을 찾을 순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자, 계속 춤이나 추자는, 여자가 원하는 동안만큼이라도 계속해서 여자의 허리춤에 손을 얹고 엉덩이나 흔들자는 생각이 들었다. 묘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신디사이저 음이 주를 이루는, 보컬이 없 는 곡이었다. 여자는 눈을 감고 있었다. 누군가의 집의 거실인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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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스피커가 두 개 놓여있었고, 그 사이로 거대한 벽걸이형 텔레비 전이 걸려있었다. 이윽고, 음악이 끝나자, 여자는 눈을 뜨고 나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나 는 눈을 크게 뜨고 여자를 응시했다. 여자는 다시금 풋, 하고 웃더니 나 를 살짝 밀치고 소파로 가서 앉았다. 나는 잠시 가만히 서서, 붙었다가 떨어지는 것, 예컨대 오래 전에 내 방 벽에 테이프로 붙여두었던 비틀즈 포스터의 한쪽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는 장면과 같은 것을 떠올렸다. 붙었다가 떨어진다는 것. 만남과 헤어짐이란 참으로 우스운 것이다. 한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 다. 사라지는 것은 슬프다. 그렇지만 나는 사라짐을 막을 수 없다. 사라 짐은 우주를 움직이는 힘이기에, 그것을 한낱 인간인 내가 막을 순 없 다. 그렇기에 나는 늘 슬픈 것이다. 윤동주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고, 별을 노래하는 마음 으로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도 다 부질 없는 짓이다. 사랑을 노래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순 없고, 그것을 막을 길이 없다면, 괴로움도 슬픔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잠시 동안 서서 생각을 이어가다, 나 역시 여자처럼 반나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팬티만 입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죠?” 내가 여자를 향해 묻자, 여자는

“뭐가?” 라고 되물었다. 뭐, 라니……. 어째서 당신과 내가 붙어 있다가 떨어지게 된 것인지, 어쩌다 나와 당 신이 반나체의 상태로 이 공간에 함께 있는 것인지, 술을 마시고 있었는 데 갑자기 왜 춤을 추고 있는 것인지, 어째서 슬픔은 내 도처에 늘 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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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 있는 것인지, 이 모든 것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인지…… 그녀가 알 리 없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그녀가 앉아있는 소파에 가서 앉았다. 티테이블 위에 술잔 두 개가 놓여있었다. 나는 그 중 하나를 집 어 술을 마셨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시고 싶었다. 이어진 필름 을 다시 끊어버리고 싶었다. 자꾸만 떠오르는 질문들을 주체할 수 없었 다.

2. 우주. 죽음. 이 두 단어를 들을 때면 늘 두려웠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 의 크기와, 가늠할 수 없는 세계. 그 단어들 앞에서 나는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고, 거대한 무기력을 느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 가 지가 맞닿아있는 종말이라는 이야기는 나로선 언제나 피하고 싶은 이 야기였다. 1999년에도 그랬고, 2012년에도 그랬다. 그 이야기를 듣거 나 읽게 될 때면 어디서부턴가 두려움이 스멀스멀 다가와 나를 집어삼 켰다. 그 날,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마신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뜨거운 방바닥 위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는데, 문득 우주에서 떠돌고 있는 어떤 행성이 지구와 부딪힐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종말의 순간에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 것인가? 불바다로 변 해버린 지구의 광경 속에서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인가? 재난 영화 속에서나 보던 장면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우 주에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이 나는 상상. 끔찍했다. 두렵디 두려웠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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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무섭고 또 무서웠다. 나는 곧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는데, 지구와 부딪힐 운명에 처한 행 성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 행성은 지구와 부딪히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끌리는 데로 움직일 뿐이니까. 마치 내가 어떤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 것 처럼,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또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것처럼, 말로는 잘 표현되지 않는 감정적 이끌림에 의해서, 그 행성도 지구로 끌 려오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사랑, 그 이끌림의 종착역은 언제나 파멸 이다. 시작이 있으면 언제나 끝이 있다. 시작과 동시에 끝이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종말. 행성과 지구의 만남. 그 둘 사이의 사랑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 술을 마셔야겠다는, 그것도 혀가 꼬부라지고, 급기 야 필름이 끊겨서 정신줄을 놓게 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술을 마셔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종말을 감 수해야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추측. 그런 추측 때문에 희망이 완 전히 사라져버린 것만 같았다. 착각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착각으로 치부해버리기엔 너무도 강한 확신이 들었다. 사랑이 파멸을 불러오는 것이라면 우리에게 희망은 없다. 무작정 집을 나섰고, 혼자 술을 마셔도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을 만 한 동네의 조그만 바에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첫 잔은 500cc 생맥 주. 마시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을 떠올렸다. 여름 동안 몇 만 cc의 맥주를 마셨다라거나, 바에 앉아 벗긴 땅콩의 껍질이 바 안에 가득 찼다거나하는 그런 이야기들. 과장이겠지만 과장이 아닐 수도 있었다. 과장이든 과장이 아니든, 부장이든, 일개 사원이든 다들 어떻게 이 세상 을 꿋꿋이 살아가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슬픔이 도처에 깔 린 이 세상을 어떻게 버티며 살아가는 것일까? 다들 사랑을 희망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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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잡고 살아가는 것일 테지. 하지만 사랑은 파멸을 가져온다. 두 번째 잔은 모히토를 주문했다. 헤밍웨이가 사랑했다는 칵테일. 노 인과 바다를 집필하며 하루에 8잔씩 마셨다는 그 칵테일……. 헤밍웨이 를 생각하자, 죽음을 잊게 하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끝내주는 여자와 섹스를 해본 적이 있는가? 끝내주는 여자와 섹스를 하면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지. 남자들이 섹스를 갈망하는 이유는 죽음을 잊기 위해서야. 끝내주는 여자란 남자로 하여금 죽음을 잊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여자지. 여자에게 끝내주는 남자란 죽음을 잊 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남자겠지. 인간은 섹스를 하는 순간에만 죽음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 있어. 섹스 후엔 다시금 죽음을 떠올리는데, 그걸 잊기 위해 다시 섹스를 갈망한다고… 정확한 이야기가 떠오른 것은 아니었으나, 어렴풋하게나마 내 기억 속 에 남겨진 흔적들을 멋대로 해석한 이야기였다.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삶은 늘 죽음이라는 그림자를 끌고 다닌다.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 알 수 없는 것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존재의 운명이다. 그것이 곧 슬픔이 늘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괴로워하며 살아가느니 차라 리 죽는 편이 낫다. 사실 내 삶은 그렇게 괴로울 것도 없는 삶이지만, 죽 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란 생각이 날 괴롭힌다. 지금이 하필이면 2012년 의 어느 날이기에, 하필이면 마야 달력의 주기가 2012년을 끝으로 새롭 게 시작하기 때문에, 하필이면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 나를 낳았 기 때문에. 세 번째 잔은 위스키를 선택했다. 독한 술을 마시고 싶었다. 구석 쪽 테이블에 연인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연인으로 보이긴 했으나, 연인 이 아닐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 모로 보나 연인으로 보였다. 둘은 서로 마주보고 앉아 고개를 내밀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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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술을 홀짝이기도 했다. 나는 둘을 떼어놓고 싶었다. 어차피 떼어질 것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떨어지는 것이 좋다. 정이 더 들기 전에, 덜 아 프기 위해서, 세상의 이치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위스키 향이 코 끝에 맴돌았다. 위스키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 뒤, 입 안이 침으로 흥건해졌다. 그 묽은 침을 삼키려다 내키지 않아 재떨이에 뱉었다. 네 잔째와 다섯 잔째, 여섯 잔째는 모두 위스키를 마셨다. 점점 취기가 올라 내 눈동자에 비치는 세상이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몸이 생각 보다 느리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꼬부라진 혀로 맥주 500cc를 주문해 한 입 마셨다. 시원했다. 결국엔 또 술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피처라고 생각하는 것이 고작, 술밖 에 없다. 헤밍웨이는 끝내주는 여자를 찾아다녔겠지만 내게 여자는 사 치다. 여자는 언젠가 내 곁을 떠나갈 존재이다. 어차피 그렇게 될 관계 를 굳이 시작할 필요가 있을까? 여자들이 나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좋아하는 편에 속할 것이다. 적당히 돈도 있고, 적 당한 직함도 가지고 있다. 시간 조정도 자유롭고, 차도 있고, 집도 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시골에서 살고 계시니 자주 볼 일도 없 다. 누나나 형, 동생도 없다. 가깝게 지내는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여자를 만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뭐가 있는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자를 찾아다녔다. 죽음을 잊게 만들어주는 여 자들. 그런 여자들을 찾아다녔다. 다 부질 없는 짓이었다. 한 순간 잊을 순 있었다. 종말의 해인 2012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내가 언젠가 는 죽을 것이란 것을, 잊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잊었던 것들은 되살아 났다. 마치 아무리 이사를 다녀도 끈질기게 쫓아다니는 진돗개 백구처 럼. 정말 진돗개를 버리고 이사를 가면 주인의 집으로 찾아갈까? 거짓 말일 것이다. 아마도 만 마리에 한 마리 꼴로, 기적적으로 찾아갈 순 있 겠지만, 전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거의 모든 진돗개들은 주인이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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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간 그 동네에서, 자신만의 삶을 꾸려나갈 것이다. 세상엔 거짓들이 넘쳐난다. 죄다 죽음을 잊기 위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 자리에서 일어나 마신 술들의 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왔다. 취기가 어느 정도 올랐는데도, 정신이 멀쩡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더 이상 술을 마시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싶었다. 한참 걷다보니 배가 고팠다. 맛있는 걸 먹고 싶었다. 생각해보니 제대 로 된 밥을 먹은 것이 아득하게 먼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자 무척 허기 가 졌다. 뭐라도 좋으니 먹자고 생각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땅히 끌 리는 곳이 없었다. 그러자 언젠가 이야기를 들었던 조그만 이탈리안 레 스토랑이 떠올랐다. 테이블이 고작 세 개뿐이라던 그곳은 매일매일 식 재료를 사오고 그에 맞춰서 요리를 내놓는다고 했었다. 더욱이 맛이 좋 다고 했다. 그곳에 도착하니 다행히 아직 문이 열려있었다.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앉자, 종업원인지 사장인지 모를 여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희 마감이 아홉 시인데 괜찮으신가요?” 시계를 보니 여덟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네.” “혼자신가요?” “네.” 여자가 A4용지 한 장을 내게 건넸다. 거기에 이런저런 메뉴들이 적혀 있었다. 스파게티. 연어스테이크. 리조또. 그 중 나는 버섯 크림 스파게 티를 주문했다. 그리곤 뭔가 빠진 것 같아 한참 동안 빠진 것이 무엇인 지 생각하다, 술이 빠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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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걸었는데, 식사에 술이 빠졌다는 생각 을 하고 있는 내가 우스웠다. 그래도 술을 시키지 않는 건 뭔가 빠진 듯 한 느낌이어서 레드 와인 한 잔을 주문했다. 와인이 먼저 나왔다. 한 입 마시자 입 안이 텁텁해졌다. 마시고 싶지 않았다. 변덕스러운 내 태도를 생각하자 웃음이 났다. 그리곤, 언제나 세상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서글퍼졌다. 또다시 슬픔이 내 주변을 감쌌다. 여자가 테이블 위에 놓은 스파게티에서 모락모락 김이 났다. 김치찌개 가 먹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이미 주문한 음식을 한 입도 먹지 않는 것 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한 입만 먹고 나가서 김치찌개를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포크로 면을 돌돌 말아 올리고, 느타리버섯 하나를 집어 입 안에 넣었다. 맛있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었는데, 맛있는 음식을 먹으니 행복해졌다. 그래서 한 번 더. 그리고 또 한 번 더. 결국 한 그릇 을 깨끗하게 비우고, 남은 와인을 들이켰다. 포만감이 몸을 따뜻하게 데 워주는 것 같았다.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고, 졸음이 왔다.

“저기, 혹시. 와인 한 잔 더 마실 수 있을까요?” 여자가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나도 따라 시계를 보았다. 여덟 시 사십 분. 안 될 것도 없는 시각이었다.

“네. 괜찮아요.” “그럼 한 잔만 더 주세요.” 어느새 가게에 남아있는 손님은 나뿐이었다. 여자가 와인을 건넸다. 와인을 마시자 다시 입 안이 텁텁해졌다. 누군 가와 함께 술을 마시고 싶어졌다. 외로웠다. 슬프게도 누군가와 만난다 는 것이 결국 이별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누군가와 만나 지 않는다면 찾아오는 것은 외로움이다. 그것 역시 슬픈 것이어서, 결국 삶이란 슬픈 것일 수밖에 없다. 괴로운 것일 수밖에 없다. 반복되는 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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픔에 대한 생각을 지우고 싶었다. 그렇지만 지울 수 없었다. 와인을 마시고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야할까?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자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쉽단 생각이 들었다. 대체 무엇이 아쉽다는 말인가? 결국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것인가? 여자를 만나 죽음에 대한 생각 을 잊고 싶다는 말인가?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것인가? 끝 이 없는 질문들 속에서 답답함을 느꼈다. 입 안이 다시 텁텁해지는 것 같았다. 눈앞에 자전거가 한 대 보였다. 버려진 자전거인지, 누군가가 잠시 세워 둔 것인지, 아무튼 자전거엔 자물쇠가 채워져 있지 않았다. 자전거를 타 고 페달을 밟았다. 뺨을 스치는 바람이 시원했다. 그대로 자전거를 타고 끝도 없이 페달을 굴려서 서울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다. 인천 이든, 광주든, 춘천이든, 부산이든, 대구든, 대전이든, 어디라도 좋았다. 서울을 벗어나고 싶었다. 기왕이면 외국으로 가고 싶었다. 미국도 좋고, 일본도, 인도도, 호주도, 어디라도 좋았다. 그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 을 떠나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슬픔 과 두려움과 외로움과 지긋지긋한 염세주의적인 생각들이 지워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디를 간다 해도, 그곳에서 그 어떤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하더라도, 결국엔 지금과 똑같은 생각들에 젖어 살게 될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다시 술을 찾을 것이었다. 멈춰서니 다시 동네의 작은 바 앞에 도착해있었다. 나는 자전거를 세 워두고, 자연스레 바 안으로 들어가 위스키를 한 잔 주문했다. 나는 바에 혼자 앉아서, 버섯 크림 스파게티를 먹었던 이탈리안 레스 토랑의 종업원인지 사장인지 알 수 없는 여자가 일을 마친 후 이 작은 바에 와서 하루 동안의 노동으로 지친 몸을 술 한 잔으로 달래면 좋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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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 나는 그 여자에게 술을 한 잔 사줄 수도 있을 것 이고, 함께 이야기도 나눌 수 있을 것이며, 어쩌면 그 여자가 죽음을 잊 게 만들어주는 여자인지 아닌지 확인해 볼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 다. 그 여자의 손가락이 네 개라면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까? 모른 척 해야 하나? 집에 가서 차를 끌고 올까, 말까? 이런 생각들이 끊임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필름이 끊겼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자, 3이 아니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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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소리 21세기 가난뱅이 담배쟁이 주정뱅이 거짓말쟁이 소년

jongsoriz.tistory.com 종말(終末). 마칠 ‘종’에 끝 ‘말’.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정말이지 ‘끝’이다. 끝과 끝이 맞닿아있는 소설을 써보고자 했다. 처음엔 종말에 관한 내 생각들을 하나로 엮어보려 했지만, 생각하다보니 그냥 파편으로 둥둥 떠다니게 하는 편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완전하지만 완전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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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혹은 환생 미료

이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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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혹은 환생 2012년 12월 8일. 나는 지구 종말의 날 이전에 이 글을 적고 있어요. 당신이 이 글을 읽는다면 종말은 없었을 터, 살아남은 것을 축하드려요. 아, 물론 아브락사스가 저승에서 발간되지 않았다면 말이죠. 나는 오늘, 지구와 당신, 그리고 나처럼 살아남은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 고 싶어요. 물론, 우리가 살아남아 이 글을 읽어야만 성립되는 이야기겠 지요.

1.<음률의 환생>

2007년 12월이었어요. 5집 발매 기념 공연을 했던 게. 하지만 앨범을 손에 쥔 건 계절이 180도 기운 2008년 8월의 여름이었죠. 내가 게을러 서가 아니라 앨범이 연기된 탓이었어요. ‘5집 발매 기념 공연’이란 타이 틀이 무색할 정도로 오랜 시간이 연기되었죠. 8개월이란 기간 동안 마 음 급한 팬들의 원성도 잦았고, 배려 있는 팬들의 기다려보자는 다독임 도 많았어요. 기약 없는 연기에 나는 자꾸만 마음을 졸였고, 그러다가 만난 앨범이었으니 소중하지 않았을 리가요. 설레는 마음을 간신히 부 여잡고 플레이 버튼을 눌러봤어요. 얼마나 좋은 앨범을 내나 두고보자,하는 약간의 앙심도 품고 있었어요. 애교라고 봐도 좋을 정도의 귀여운 것이었지만요. 숨소리만 듣고도 환 호하는 팬 중 하나였으니 졸작이 나왔어도 박수칠 뻔뻔함은 이미 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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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지 오래였죠. 그러한 연유로 내 평가는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이 앨범 을 들은 뒤의 느낌은 완전히 ‘달랐다’고 말할 수 있어요. 트랙1을 시작으 로 2번에 당도했을 때, 기다린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트랙 3을 듣고 나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간신히 뱉었던 말이 세상에, 정도였고, 나는 이것이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막 발매된 앨범이 맞는지 헤아리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었어요. 엄청난 것이 나왔다는 생각에 “ 야! 신보 들었냐?”와 같은 말은 하지도 못한 2008년의 여름이지요. 이토록 좋은 음악은 다신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남들이 유재하나 비틀 즈의 곡을 명곡이라 부를 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근데’하고 말할 때 의 정적이란. ‘근데’에 이어 ‘명곡은 이것이야!’하고 소리치는 쾌감이란. 손이 닿지 않는 애매한 부위를 효도손이 아닌 것으로 보다 시원하게 긁 는 재주를 독점한 기분이었어요. 이후 나는 마치 이전에 그 어떤 음악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앞으로 음악이란 더 이상 생산 되지 않을 것처 럼 열심히 고집하여 들어왔어요. 들었던 구간을 돌려서 듣고, 역방향으 로 듣고, 이어폰으로 듣고, 헤드폰으로 듣고, 컴퓨터로 듣고, CDP로 듣 고, 오디오로 듣고, 차 안에서 듣고, 누워서 듣고, 걸으며 듣고, 자면서 듣고, 심지어는 똥을 누면서도 들었어요. 침대에 누워 헤드폰으로 듣던 날이던가요. 헤드폰에서 쯧!하고 혀를 차 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이어 뚝 끊어진 음률. 3번 트랙에 정신이 팔려있 던 날이었어요. 벼랑 끝에서 스키드 마크를 내며 쯧!하고 서버린 차량마 냥 순식간에, 일순 쯧!하고 정적이 흘렀죠. 나는 “어 뭔데!”하고 소리를 쳤던 것 같아요. 안경을 끼고는 CD를 요모조모 뜯어봤어요. 헤드폰의 전선도 요리조리 건드려봤죠. 하지만 내 이런 발광은 그저 명반이 종말 했음을 확인시킬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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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것을 주문했어요. 새것은 이전의 것과 닮아 있었어요. 나는 닮은 둘을 꼭 같게 만들고자 들었던 구간을 돌려서 듣고, 역방향으로 듣고, 이어폰으로 듣고, 헤드폰으로 듣고, 컴퓨터로 듣고, CDP로 듣고, 오디 오로 듣고, 차 안에서 듣고, 누워서 듣고, 걸으며 듣고, 자면서 듣고, 심 지어는 똥을 누면서도 들었어요. 놈들은 바람대로 금세 꼭 같아졌어요. 3번 트랙에서 새것 역시 쯧!하고 멈춰서 버린 것이지요. 나는 뭐에라도 씐 듯, 이후에도 이와 같은 ‘스키 드마크 앨범’을 네 장이나 만났습니다. 총 여섯 장이 비슷한 구간에서 쯧!하고 종말을 맞아버린 것이지요. 2010년에 이르러서는 거의 속아준 다는 심정으로 무려 일곱 번째 녀석을 구입하기에 이르렀어요. 럭키 세븐, 일곱 번째 녀석은 여태 잘 살아있어요.라고 적는다면 얼마 나 좋을까요. 우습게도 이 녀석 역시 종말을 맞이합니다. 이쯤 되니 음 반공장에서 날 농락하나 싶기도 하고, 위인들이 단명하듯 이 명반도 짧 은 생을 자랑하나 싶기도 하더군요. 일곱 번째 녀석은 3번 트랙에서 쯧, 쯧, 소리를 내며 1초에 6-7초가량을 훅 건너뛰는 묘기를 선보입니다. 기 괴한 모습으로 맞은 종말이지요. 나는 해탈한 중마냥 너그러운 석가모 니의 미소를 짓는 방법도 터득했어요. ‘해탈’이라 적고 ‘포기’라 읽으면 딱 좋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오랜만에 운전을 하던 날이었던가요. 카오디오에 생각 없이 그 앨범을 밀어 넣은 모양입니다. 종말을 맞은 일곱 장의 앨 범은 기억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mp3로 대체하여 지내던 어느 날이었 지요.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운전에 몰두했던 그날. 나는 초보자의 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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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핸들에 꼭 붙은 모양을 하고서는 신호등과 양 옆의 차를 주시하며 예의 그 명곡 트랙 3번을 따라 불렀습니다. 음, 그러니까, ‘따라 불렀습 니다’. 스피커에서는 분명히 트랙 3번의 그 곡이 재생되고 있었고, 러닝 타임과 오롯이 발을 맞춘 음률이 들려왔어요.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던가요. 종말을 고한 앨범에게도 시간은 약이 었던 모양이지요. 실제로도 ‘엇’하는 소리를 냈던 걸로 기억해요. 종말 이라는 건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되었던 순간이지요. 언니네이발관 5집 이 7장이나 내 손에서 고장이 나고도 멀쩡히 살아온 걸 보면 말예요. 제 가 하고 싶은 말은 앞으로 몇 주 뒤면 닥칠 ‘2012년 12월 21일의 예정된 종말’, 따위가 아니라 이것입니다. 언니네이발관의 <아름다운 것>이야 말로 진정한 명곡이라고!

2. <어째서 더 환하게 웃었지?>

5분만, 5분만,을 외치다 35분이나 늦어버린 날이었어요. 잠은 달콤했고 나는 단 것을 좋아했지요. 떨어진 당을 채우고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땐 기상 시각이 35분이나 오버된 찰나였어요. 재빨리 일어나 등교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꾹,하고 밟았던 것을 기억해요. 워낙에 이어폰이니 화장품이니 하는 것들을 잘 밟는 사람인지라 이어폰 캡이 떨어져나갔거나 화장품 뚜껑이 박살나는 정도의 타격이 있겠거니 했어 요. 그 정도의 타격은 매우 일상적인 일이고 학점에 그대로 반영될 지각 에 비하면 아주 미미했거든요. 가까스로 지각을 면하고, 의자에 앉아 한숨을 돌리고는 교재와 노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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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할 태블릿을 가방에서 꺼냈어요. 화면을 터치하는 순간 배경으로 설정해 둔 남자친구 얼굴이 영 이상하더라고요. 시뻘건 피부색이 꼭 잔 뜩 달아오른 것 같아 생경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게다가 그가 입 은 옷이 싱싱한 초록으로, 꼭 슈렉의 피부처럼 변해있더군요. 실제의 모 습이었다면 자기, 어디 아파?하고 물으며 피식하고 웃을만한 모양이었 죠. 하지만 이건 실제의 남자친구가 아니었어요. 조금 이상한 말이지만, 그래서 내게 굉장한 문제가 됐죠(자기야 미안). 아뿔싸. 그제서야 내게 닥칠 35분의 타격이 이어폰 캡이나 화장품 뚜껑 등의 사소한 것이 아님 을 알아챘어요. 비몽사몽 뒷걸음질 치다 꾹, 밟았던 그것이 다름 아닌 태블릿이었던 거죠. 나는 아침부터 너무 많은 기력을 소진했어요. 등굣길이 워낙 분주하고 정신이 없던 탓에 더 이상 골 쑤시긴 싫어 가방에 태블릿을 넣어버렸지 요. 고양이 목에서 흔들리는 방울 소리를 못 들은 척, 새침하게 고개를 모로 꼬아 버리는 쥐 꼴입니다. 마음 한 켠에 무거운 짐을 놓은 채 하교했어요. 침대에 누워 마음을 비 우고자 웹툰을 보려했지요. 태블릿을 주섬주섬 꺼내 오늘 자 웹툰을 조 금이나마 웃으며 보았습니다. 태블릿을 머리맡에 놓고 나니 무거운 마 음이 이불 안에 폭하고 잠기더군요. 이불 안에 웅크린 무거운 마음. 그 마음에 자리한 고장 난 태블릿을 생각했어요. 그 동안 해온 필기를 어떡 하지, 깨질 돈을 어떡하지, 당장 내일은 어떡하지. 저 고장 난 녀석을 어 이하지, 고장 난 녀석을, 고장 난, 고장…? 이윽고 온전한 색의 웹툰을 보았던 걸 상기했어요. 발끝에 전기가 통한 듯 벌떡 일어나 태블릿을 주 섬주섬 작동시켜 봤지요. 온전한 피부색과 명명한 회색 옷을 입은 남자 친구가 어제의 모습처럼, 아니 어쩐지 더 환하게 화면 속에서 웃고 있 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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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던가요. 종말을 고할 위기에 있던 태블릿에게 도 시간은 약이었던 모양이지요. 실제로도 ‘엇’하는 소리를 냈던 걸로 기억해요. 종말이라는 건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되었던 순간이지요. 태 블릿이 적외선 카메라 색으로 고장이 나고도 멀쩡히 살아온 걸 보면 말 예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앞으로 몇 주 뒤면 닥칠 ‘2012년 12월 21일 의 예정된 종말’, 따위가 아니라 이것입니다. 나 돈 굳었어! 눈앞으로 닥 친 종말에서 태블릿이 돌아왔다니깐!

3. <2012년 12월 21일>

종말?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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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료 미료는 없었다. 미료의 머리는 어느새 어깨를 훌쩍 넘어 있었다. 미료의 머리칼은 잔상을 남겼고, 미료는 없었다. 비가 내리던 날, 나는 우산을 사러 다녀오겠다며 미료를 자장면집 천막 밑에 세워두었다. 한 개를 사야할 지, 두 개를 사야할 지 고민하던 시간 동안 미료는 하염없이 비를 맞고 있었다. 손님이 아니면 썩 꺼져!하는, 자장면집 사장의 춘장 냄새 섞인 호통을 들으며 주황색 입술을 부루퉁 하게 내밀고 비를 맞고 있었다. 미료는 그런 애였다. 두 개를 사온 우산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자장면집 사장에게 화가 났어도 말없이 나를 기다리던, 한 마디 질문 없이 비를 맞기만 하던 그런 애였다. 화풀이가 무언지, 자장면집 사장의 검은 호통 이 무언지 묻지 않고 비를 맞는 그런 애였다. 그날의 젖은 미료 머리는 귓바퀴를 간신히 넘은 단발,이었다. 우리는 만 나는 동안 단발적으로, 혹은 우발적으로 내리는 비를 자주 맞았고 나는 그럴 때마다 언제나 두 개의 우산을 샀다. 만 이천 원짜리 우산을 건네 받던 미료는 머리가 귀를 완전히 덮었을 무렵엔 삼천 원짜리 비닐우산 을 건네받는, 그런 여자가 되어있었다. 미료는 한 번도 왜?라고 묻지 않 았다. 왜 비가 오지?하지 않았고, 왜 우산이 두 개야?하지도 않았다. 천 원짜리 우산을 건네받는, 긴 단발을 한 어느 날의 미료는 그날도 한 마디 말이 없었다. 왜를 제외하고도 아무런, 그 어떤 말도 없어 우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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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는 멀었고 미료의 자란 머리만큼이나 낯몰랐다. 버튼을 눌러야 십수 개의 살이 간신히 비닐을 널던 천 원짜리 우산. 이 만 원짜리 우산을 써도 아플 것 같던 그날의 작달비는 가까스로 비닐을 널은 미료의 우산살을 불현듯, 벌컥 쪼갰다. 후두두.. 잘려진 미료의 우산살을 보고 사람들은 웃었다. 하나씩 밟히는 우산살 을 보고 나는 어떤 표정을 지었던가. 행인에게 막 밟힌 살 하나가 미료 의 오른팔, 혹은 왼팔 어디 즈음을 찔렀다. 천 원보다 무거운 빗방울 사 이로 미료의 피가 번졌다. 미료는 그때도 왜?하고 묻지 않았다. 왜, 내 우산만 왜, 하고 묻지 않았 다. 미료는 주황빛 입술을, 내미는 대신 꼬옥 물었다. 며칠 만에 들은 것 같던 미료의 목소리는 비 사이에서 설게 안녕ㅡ하고 울렸다. 이만 개, 이천만 개, 이억 개, 수없이 떨어지던 빗방울 사이로 미료의 새빨간 핏 방울이 번졌고, 나는 긴 단발의 미료를 볼 수 없었다. 다시는. 미료,하고 하루에 두 번씩 그녀의 이름을 읊는다. 단발적이고, 우발적 인 비는 그 뒤로 어림잡아 여든 번쯤 흘렀고, 그때마다 나는 두 개의 우 산을 샀다. 신발장을 가득 메운 우산을 치우던 날이었던가, 말간 하늘이 너무 파래 차마 볼 수 없던 날이었던가. 나는 그날도 조용히 미료,하고 불렀다. 양손에 우산을 다섯 개씩 들고, 벌어져 쩌ㅡ억하고 소릴 낼 것 같은 손가락 사이사이 잔뜩 힘을 준 채 미료,하고 불렀다. 그 말은 무너진 천 원의, 그날의 우산처럼 불현듯 조각났고, 나는 흩어 진 미료의 소리를 주우려 여든 번쯤 주억거렸다. 소리를 주워 담아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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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들었을 땐, 글자가 붙어 만든 미료,가 있었다. 어느새 겨드랑이께를 넘긴 머리가 반가워 손을 뻗었을 때 미료,가 말했다. 왜 이래요? 열손가락을 쩌ㅡ억 벌려 안고 있던 열 개의 우산이 각기 다른 소릴 내 며 떨어졌고, 길어진 머리를 한 미료,는 주황의 입술을 달싹이며 멀어 졌다. 한 방울의 비도 오지 않던 낮이었고, 너무 파래 올려다 볼 수 없는 하늘이 어깨에 닿을만큼 내려앉은 날이었고, 미료,하고 네 번을 부른, 먹먹하고 아스라한 날이었다. 종말은 예정된 날보다 너무 빠르게, 여기 에 내려앉았다. 미료는 없었다. 미료의 머리칼은 잔상을 남겼고, 미료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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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지구는 멸망하지 않았네. 박 당선인이 취임하겠구나. 엄마아빠오빠 지구가 멸망해도 사랑해요!

bebezzu@naver.com http://bebezzu.blog.me http://twitter.com/Z_Mete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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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팔트에 관한 짧은 이야기

이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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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팔트에 관한 짧은 이야기 46 나는 우선 유리컵에 담긴 맥주를 마셨다 2 몇 분 전에 K씨가 다가와서 아스팔트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여름 날 내내 달궈진 아스팔트 위로 넘어진 적이 있었다는 그저 그런 내용이었다 발밑에 달라붙어 있던 메모지에 그 이야기를 적었다 3 이번 모임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모양이다 1층 현관을 들어서면 보이는 넓은 거실에 모여 있는 사람들 모두는 몇 명씩 혹은 둘씩 모여 서 이야기를 나눈다 사람들은 떠들지 않는다 웅성거린다 속삭이기도 한다 내가 살고 있는 3층짜리 다세대 주택의 작은 마당에는 주먹만 한 돌 몇 개가 있고 희끗하게 시든 풀 몇 포기가 자라 있다 4 얼마 전부터 어머니는 당근을 잘게 썰어 넣은 계피 향 케이크를 만드신 다 원래 넣어야 할 만큼에서 100g을 줄인 만큼의 설탕을 넣는다 5 한 남자가 킬킬거리며 따라온다 그는 자신을 박이라 소개한다 박은 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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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전에 들어갔던 방에서 본 한 여자의 스타킹에 올 풀린 자국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나는 함께 킬킬거린다 한 때 나의 휴대폰 가운 데 번호는 9898이었다 외우기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외워 준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아주 아주 어렸을 적 눈알을 감싸고 있던 얇은 막이 걷히면서 빛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를 기억하는 이가 있을까 기억에 의존하여 말을 잇 는것 6 거실 중앙에 검정색 3인용 소파 두 개가 마주 보게 놓여있고 그 옆으로 는 키 큰 전등이 하나씩 세워져 있다 전등갓에는 먼지가 쌓여 있다 소 파에는 사람들이 네 명씩 불편하게 앉아있고 한 여자는 팔걸이에 엉덩 이만 걸쳐 어정쩡한 자세로 포도주를 마신다 거실 삼 면의 벽에는 문이 하나씩 있고(한 면의 벽에는 현관문이 있다) 그 너머엔 시내버스 넓이 만한 길쭉한 방이 있다 현관문을 마주하고 있는 벽의 방문 옆으로는 2 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나 있다 계단은 콘크리트로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것 같은데 난간조차 없다 7 방금 나에게 다가왔던 여자는 Y이다 나는 그녀에게 어제 구입한 내후 년의 달력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는 내일 아침 일찍 지하철을 타야 했지 만 Y는 왠지 비밀한 정보를 입수한 요원 같은 표정을 짓고 돌아섰다 현 관문을 포함한 세 개의 문은 모두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현관문을 등지 고 섰을 때의 왼쪽 벽 방문은 그것만 두툼한 철문이다 짙은 노란색 페 인트가 발라져 있다 하지만 녹이 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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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검붉은 동그라미 들이 무수하여 소름이 돋는다 반의반 쯤 열린 녹슨 노란 철문을 열고 방에 들어간다 발밑에 메모지가 달라붙어 있다 8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은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 오른 쪽 구석에서 서로에게 집중하고 있는 남녀에게 다가가 이름을 물 으니 남자는 자신을 돈 키호테 라고 소개하고 여자는 마리아 라고 소개 한다 그들은 동거 중인데 어제 식료품점에서 배달 된 냉동 가재를 어떻 게 요리할 것인가에 대하여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 사람이 자꾸 그 녀석을 통째로 튀겨버리자고 그러잖아요 세상에는 얼마나 많 은 마리아가 존재할까 이름이 같다면 가재를 요리하는 모습도 같을까 많은 갑각류 중 가재 많은 가재 중 그 가재 그 냉동된 가재의 미국 이름은 크라우피쉬 귓가가 웅웅거린다 허벅지 뒤쪽이 가려울 것 같다 9 조금 열린 철문 뒤로 한 남자가 두 손에 맥주잔을 들고 우두커니 서 있 었다 나를 보고 웃길래 엊그제 버린 유리병들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었 다 10 그는 어떻게 하면 담배 한 개비를 정확히 스물두 번에 나누어 피울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알려준다 매우 진지한 모습 사실 보일러가 고장 난 것 은 내 잘못이었다. 외출할 적에 그걸 중지시키면 동파된다는 것을 난 모 르고 있었다 애꿎은 집주인에게 좆같은 보일러를 달아놨다고 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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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르며 화를 냈다 그는 담배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나는 좀 지루해져 서 자꾸만 방의 중앙으로 고개를 돌리게 된다 여자 셋이 흥분된 표정으 로 이야기 하고 있다 딱 스물두 번이라고 스물두 번 같은 말을 반복하 는 남자를 뒤로 하고 세 여자들 사이에 서본다 여자들은 나에게 눈길을 보낸다 한 여자는 터번을 쓰고 물안경을 끼고 있다 이름을 물으니 링링 이라고 답한다 11 어릴 적 부모님과 여행하며 자동차 안에서 먹었던 우유에 탄 초콜릿 맛 시리얼 과자 는 이제 생산이 중단되었다 12 세 여자는 일주일 전 결혼한 카트리나 라는 친구가 카나리아를 키우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라고 한다 카나리아는 말을 할 수 있 던가 거실에서 만났던 박이 녹슨 철문을 밀고 들어오며 또 킬킬거린다 링링의 터번을 보고 킬킬거리는 것을 멈춘다 나는 철문을 지나서 거실 로 나왔다 소파에 자리가 나서 팔걸이 옆에 앉아보았다 와인이 담긴 유 리컵을 든 늙은 손이 얼굴 앞으로 불쑥 등장한다 꿈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컵을 건네준 손을 따라 모습을 보니 후줄근 한 노인이다 나는 지노스예요 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노인은 구부정하 며 갈색 양복을 입었다 그는 계속해서 1950년대의 옥수수 밭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언어적 유희 말고도 즐길 것은 많다 길을 잃는 것은 참으로 매혹적인 일이다 이제 와서는 길을 잃어버릴 일이 거의 없다 아무리 길 을 잃으려고 해도 잃어지지 않는다 눈을 감으면 지금껏 걸어온 길이 보 이지 않는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일 뿐 잃어진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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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나는 처음으로 당했던 여러 사람 앞에서의 창피를 기억하지 못한다 14 지노스씨가 가꾸던 옥수수 밭은 마을에서 유명할 정도로 잘 가꾸어진 밭이었다고 한다 칠팔 년 정도 여름마다 옥수수를 재배해서 겨울까지 먹었어요 그런데 1957년 이상 하게도 한 겨울에 옥수수가 또 열렸지요 기쁘기도 하고 끔찍하기도 해 서 반은 재배하고 반은 버렸어요 그리고 다음 날 밭에 나가보니 옥수수 밭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어요 다만 그 자리에는 알 수 없는 문양 이 새겨져 있었지요 라는 정신 나간 노인의 허황된 이야기 소파에서 일 어나 다른 구석으로 가 몸을 기댔다 매우 덥고 습한 공간이다 사람들의 숨이 섞인 냄새가 난다 내가 이끌어 승리했던 전투는 이제 그 누구의 입에도 오르내리지 않는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너무 오래 전 일이다 기억하는 일은 수고스러운 일이다 15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한 청년은 은색 쟁반을 한 손에 들고 사람들에게 권하며 걸어 다닌다 마침 나에게로 다가와서 권하기에 빵과 물고기를 집었다 청년은 가만히 서서 나를 쳐다본다 그 리고 쟁반에서 물고기를 하나 집어 입에 넣고 천천히 씹는다 씹는 입의 모양 과 씹는 소리 입이 조금씩 벌어질 때마다 물고기와 침이 섞여 끈덕진 물질로 변해가는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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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그에 따라서 처음엔 물고기를 씹던 울컹거리는 소리가 더욱 질척한 무언가를 씹는 입 안 어딘가에 달라붙기도 했다가 조금씩 목구멍으로 넘어가기도 하는 소리 운전을 배우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16 클러치를 밟으며 박자를 맞추어 기어를 변속시키는 것도 힘들지 않았 다 힘들었던 것은 자동차를 몰다가 도착할 장소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 들이는 일이었다 아침에 샤워를 했어요 청년이 말하기에 눈짓과 고갯 짓으로 무슨 말이냐는 물음을 던졌다 청년은 가슴이 큰 편이다 17 청년은 왼쪽으로 돌아서 걸어가 계단을 오른다 『피리 부는 사나이』를 처음 읽었던 건 아마도 일곱 살 때였을 거다 40권의 세계명작그림동화 전집 중 35권에서 39권 사이의 한 권이었음을 기억한다 딱딱하고 매끈 한 표지의 그림동화책 삽화가 잘 그려져 있었다 아이들이 향하고 있는 도시의 모습이 멋져서 그 도시로 나도 함께 가는 게 옳다는 생각을 했 었다 책을 사 모으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몸 어느 부근의 담담한 오르 가즘으로 목이 좀 마른듯하여 맥주가 든 컵을 집어 들었다 그대로 바닥 에 떨어트렸는데도 깨지지 않는 컵 베르디의 <나부코-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들으며 히브리 노예들을 그려보려 했었다 원래는 흰 색이었지 만 회갈색으로 변해버린 옷을 어깨에 걸치고 입을 쩍쩍 벌려 노래할 그 들을 그리려고 했었다 18 강요받지 않는 그림은 오히려 그려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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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반대 편 구석에 쭈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던 두 남자 중 한 남자가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오며 현관문을 힐끗거린다 그의 본 명은 야마구치 이지만 데이빗 이라고 불러주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그 는 벼룩에 대한 영화를 제작하려고 시나리오를 썼다며 한 손에 들고 있 는 열 몇 장의 종이 뭉치를 보여준다 종이에 적혀있는 글자를 도무지 읽을 수가 없다 그날 밤 나는 어두운 산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매우 어 두웠지만 눈은 곧 어둠에 적응했다 비행기들이 머리위로 끝없이 날아 갔다 낮은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그는 그 영화를 결국 완성할 수 없을 거라고 이야기한다 20 벼룩이 주인공인데 벼룩을 섭외하지 못했거든 데이빗 왕은 목욕하던 밧세바를 차지하기 위해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전장의 최전방으로 보 내라고 명령했다 우리야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적에게 돌리려 했지만 책임은 결국 고스란히 본인에게 돌아왔다 그 왕은 많은 사람들을 죽였 다 혹시 주변에 아는 벼룩 없냐고 데이빗이 물어 한 번 알아보겠다고 대답한다 반대 편 구석에 데이빗과 함께 쭈그려 앉아 있던 남자가 우리 에게 다가온다 그는 다리를 좀 저는 것 같다 오른 쪽 팔로 지팡이를 짚고 있다 나는 이 공간 으로 도망쳐 왔다 선약이 있었다 그 사람은 늘 십 분 일찍 밖으로 나와 나를 기다리곤 했다 넌덜머리가 나서 이제는 그만 기다려줄 수 없는지 내가 물었던 날 그 사람은 온화한 표정으로 울었다 그 모습을 보던 나는 참혹한 표정으로 웃어주 었다 지팡이를 짚고 다가온 남자가 포도주가 담긴 컵을 머리 위로 집어 들고는 무어라 소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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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한껏 취한 색깔의 얼굴이다 이런 색깔의 얼굴은 쉽게 찾을 수 있다 나는 두 남자를 지나쳐서 계단 옆의 방문을 열어본다 스무 명 정도 되는 사람 들이 나란히 둘러서있다 모두가 똑같은 안경을 쓰고 있다 그들은 목소 리를 낮추어 이야기한다 문 옆의 계단에 대한 이야기다 난간조차 없는 콘크리트 계단에 대해서는 나흘 밤을 샌다 하여도 할 말이 바닥나지 않 을 것이다 전주에 가서 먹었던 한정식은 꽤 맛있는 편이었다 너무 많은 반찬 앞에서 나는 어떤 좌절감을 느꼈고 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지 경이었다 식사 후에 바라봤던 인공 연못의 모습은 기괴스러웠다 연못 의 물은 움직이며 고여 있었다 인간이 물을 마시는 소리 음식을 씹어 삼키는 순간의 소리 연속적으로 재채기 하고 기침하는 소리 습관적으로 내는 어떤 동일한 소리 입맛 다시는 소리 이런 소리들은 귀를 막고서 죽어버리고 싶게 만든다 똑같 은 안경을 쓴 사람들 중 한 사람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인다 계단을 밟고 올라가봤자 우리는 2층으로 갈 수 없어요 저 계단은 끝이 없기 때문이 죠 계단을 밟고 올라갔던 사람들 중 단 한 사람도 다시 1층으로 내려오 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바깥에서 보기에 이 건물 은 3층까지 지어져 있다 22 그런데 계단의 끝이 없어서 2층에 도달할 수 없다니 1층의 천장에서는 2층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린다 누군가는 거실에서 발을 구르고 누군가는 마루가 뒤틀린 부분을 잘못 밟아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기도 한다 2층에 오르면 3층에서 그러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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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그러면 계단으로 올라간 모든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거죠 또 다 른 누군가가 물었다 사람들이 좀 더 높은 소리로 수군거린다 아마도 계단의 끝이 없다고 말했던 사람이 다시 말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올라 가고 있을 겁니다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 나왔다 조금 흐느끼는 사람 도 있었다 여름에는 에어컨 때문에 고생을 했다 올 여름은 감히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더웠다 에어컨을 아무리 세게 작동시켜도 찬바람은 나 오지 않았다 23 수리 기사를 부른 날도 있고 세척한지 얼마 되지 않은 필터를 꺼내서 더 깨끗이 세척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찬바람은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찬 바람이 나오지 않았던 이유는 실내에 설치된 실외기 침통한 방의 공기가 너무도 무거워서 황급히 거 실로 빠져나왔다 거실의 사람들은 여전히 술을 마시며 어떠한 이야기 를 나누고 있고 끝이 없는 계단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고 있는 듯하다 24 초등학교 4학년부터 6학년 때 까지 모든 수업이 다 끝나고 나면 집에 같이 돌아갈 친구가 없는 날이 있었다 그런 날에는 운동장 한 구석에 가방을 던져 놓고 달리기 연습을 했다 그런 날이 꽤 많았다 운동하는 학생이라는 명분은 홀로 있어도 쓸쓸해 보이지 않기에 알맞은 그것 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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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막의 오름은 공연의 시작이라는 암묵적인 사건을 시각적으로 증명해주 며 단절된 무대와 객석의 사이를 재결합 시킨다 26 그 여자는 무대의 상수에 홀로 서서 벌벌 떨었다 어차피 관객들은 저들 끼리 떠들기에 바빠서 아무도 여자를 주의 깊게 바라보지 않았다 그렇 지만 그 여자는 벌벌 떨었다 무대에서 내려온 그 여자는 만족한 표정으 로 말했다 그래도 울지는 않았으니까요 27 난간 없는 콘크리트 계단 옆으로 가까이 왔다 계단에는 마모된 부분이 있고 금이 간 부분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밟고 오른 듯 옅은 발자국들이 보인다 천장을 넘어서까지 계단이 이어져 있다 2층의 입구는 보이지 않 는 것 같다 천장을 넘어가는 부근부터 점차 빛이 닿지 않는다 조명이 워 낙 어두운 터라 살펴보기가 더 어렵다 계단을 밟는 순간 영영 아래로 내 려오지 못할 거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나를 꼼짝할 수 없게 만든다 거실 에 있는 모든 사람들―소파에 끼어 앉아 웃고 있는 사람들 맥주를 마시 는 사람들 방 문 너머로 보이는 모든 사람들은 나를 인식하지 못한다 28 나는 계단을 오를 수 있다 29 2층을 찾아내서 거기 있는 사람들의 발들을 훑어볼 수 있다 거기서 더 큰 결단을 하여 3층을 찾아낼 수 있다 3층에 머무는 사람들을 둘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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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다시 1층으로 내려와 계단의 끝이 없다고 단언하는 그 사람에게 설 명하자 나는 계단을 올라 2층을 거쳐 3층에 올라갈 수 있었고 3층에 다 다르니 계단은 끝이 났으며 내가 그 끝을 보고 내려왔다고 단호하게 설 명하자 그래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느껴질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이 계단 의 담지자가 되는 것이다 어떤 날은 잠든 벌레처럼 누워서 피부의 겉을 예민하게 작동시켜 본다 30 하지만 나의 피부는 벌레의 껍질만큼 섬세하지 못하다 몸을 감고 있는 담요의 푸석한 감촉을 폴리에스터와 면이 적절히 섞인 섬유 본연의 감 촉으로 바꾸어 느낄 수는 없는 것이다 발가락의 온 근육을 긴장시켜서 뻣뻣한 송곳처럼 쭉 펴 보아도 아무것도 찌를 수 없다 발끝은 언제나 뭉툭할 뿐이다 나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은 컵을 하나 집어 들어 계단이 시작되는 칸 에 가만히 놓아본다 갑자기 누군가 어깨를 살짝 두드린다 고개를 돌려 보니 한 남자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무엇인가에 크 게 동요하고 있는 듯하다 31 그 두 분은 여름에 세상을 떠나셨다 한 분은 작년 여름 또 한 분은 올해 여름 일 년 하고 한 달 차이로 둘 다 떠나셨다 그래서 나는 이제 더 이 상 기차를 타고 가다가 보이는 그 마을의 맨 윗집을 찾아 바라보지 못 한다 그 와중에도 나는 커피를 마셨다 멋대가리라고는 없는 머리핀을 꽂고 벽에 늘어지게 기대어 졸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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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여분의 허리띠를 가지고 있나요 나를 바라보던 남자가 얼굴을 가까이 대며 묻는다 그 누구도 여분의 허리띠를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집 에서 나오기 전 신발장에 수첩을 두고 나온 것 같다 제발 허리띠요 남자 가 또 말한다 여분의 허리띠는 없어요 남자의 허리춤을 보니 흘러내리 려는 바지를 꽉 쥐고 있는 손이 있다 내 바지는 내 허리와 다리에 딱 맞 는 크기라 허리띠를 풀어도 저렇게까지 흘러내리지는 않을 것 같다 내 것이라도 풀어서 줄까요 물으니 남자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 를 끄덕인다 나는 황급히 허리띠를 풀어 남자에게 건넨다 남자는 바지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한 다음 힘겹게 허리띠를 맨다 지난 밤 꾸었던 꿈은 어렴풋한 이미지 로만 남아있을 뿐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1900년 경 학살과 전염병을 피해 해가 뜨는 방향으로 계속 달렸던 북아메리카 출 신의 그 인디언은 항구에 다다라 몰래 배에 올라탔다 33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 34 잠을 잤다 35 배가 고프면 손에 닿는 아무 자루나 찢어서 말 사료나 도정 전의 곡식 같은 것들을 먹었다 그 인디언은 용케도 선원들에게 들키지 않고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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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백일의 항해 끝에 인도의 한 항구에 도착했다 인도 사람들은 그를 죽이려 하지 않았다 그는 돌멩이를 주워 깨끗이 닦고 반들반들하게 갈 아 동그랗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번화가의 시장에 가져다가 팔 았다 그 인디언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그 이후에 그가 어떻게 되 었고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36 내 허리띠를 맨 남자는 어색하게 한 번 웃고 바지를 추켜올린다 남자는 돌아서서 사람들 틈으로 들어갔다 37 자전거를 혼자서 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버지는 주말마다 시 간을 내어 내가 넘어지지 않도록 내 몸과 안장을 잡아주셨다 혼자서 중 심을 잡을 수 있게 되면서부터 자전거 타기만이 아닌 다른 많은 행동들 을 혼자서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그 때부터 나에 대하여 슬퍼하셨던 것 같다 38 아까 계단을 올랐던 그 청년은 어디에 있을까 청년을 다시 만나게 된다 면 어떤 완전히 다른 것에 대하여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청년과 내 가 다시 만나게 되는 것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고 있다가 서로가 위치해 있는 시공간이 순식간에 어그러져 겹쳐지는 치 명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에게 모습을 보이지 말았어야 했 는데 예견되지 않았던 충돌 때문에 보이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기필코 이 계단을 올라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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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소파에 앉아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크게 웃는다 따발총 따발총 이라고 누군가 외치고 자지러지게 웃는다 50대 중반 여성의 음 성이며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크게 웃는다 저들이 왜 웃는지 궁금해져 귀를 기울였지만 말소리들이 섞인다 그들 중 상투를 튼 머리 위에 금색 왕관을 얹은 여자가 벌떡 일어난다 그리곤 구둣발로 소파 위로 올라간 다 오른손에는 모형 칼을 왼손에는 유리컵을 들고 있다 주변의 사람들 모두 그녀를 올려다본다 여자는 두리번거리다가 나를 발견하곤 모형 칼 을 나에게 겨누는 행동을 한다 따발총 따발총이라고 외치고 모형 칼을 휘두른다 이상의 『烏오瞰감圖도』의 <時시 第제三삼號호>는 이렇게 쓰여 있 다 싸움하는사람은즉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고또싸움하는사람은싸움 하지아니하는사람이었기도하니까싸움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고 싶거든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싸움하는것을구경하든지싸움하지아니 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나싸움하지 아니하는사람이싸움하지아니하는것을구경하든지하였으면그만이다 39 아직 읽히지 않은 수많은 글들은 아직 발굴되지 않은 뼈들의 관절처럼 고요하게 몸부림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손톱을 물어뜯다가 그 생각을 했다 글이란 글자라는 표시의 모임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 무엇도 아 니다 글은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는다 작용은 아무데서도 일어나지 않 는다 글자는 피상적이고 글은 글자의 피상적 행위이다 저 여자가 나를 향해 칼을 휘두르는 바람에 1층 거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 이 나에게로 집중되었다 녹슨 노란 철문을 열고 박이 고개를 내민다 그 리고는 또 킬킬거린다 나도 킬킬거리고 싶어졌다 그래서 킬킬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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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계단 옆에 나 있는 방문이 열린다 계단의 끝은 없다고 말했던 사람이 달려 나왔다 전에 쓰고 있던 안경은 벗었는지 맨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모두 말이 없다 웅성거리며 흩날리던 공기가 갑자기 내려앉았다 빨갛 게 염색된 병아리가 죽는 순간을 지켜본 적이 있다 빨간 병아리는 빨간 병아리답지 않게 곧게 비행하는 커다란 독수리처럼 죽었다 하지만 빨간 병아리는 빨간 병아 리답게 죽어서도 가벼웠다 41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는 저 모든 눈들을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은 여기서 없어지는 일 현관문을 박차고 밖 으로 나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계단을 차례대로 밟고 올라가 1 층에서 자취를 감추는 일 그래서 그들이 바라보던 대상을 없애는 일 바 라보는 대상이 없어진다는 것은 저들이 더 이상 바라보는 행위를 지속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리하여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 각자의 주 제를 가지고 킬킬거리거나 이야기를 계속 하며 웅성거릴 수 있다는 것 그렇다 나는 이제 두려움을 떨치고 이 계단을 올라야만 한다 담대하게 최대한 빠른 속도로 하지만 경건한 자세로 때마침 간장이 다 떨어졌다 간장을 한 병 다 먹는 동안 스킨은 세 병을 썼다 42 간장과 스킨의 공통점 간장은 혀에 발리고 스킨은 얼굴과 목에 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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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이 계단의 끝은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어야 한다 긴장 되어 갈비뼈 안쪽이 조금씩 진동한다 44 계단에 놓았던 컵을 다시 집어 들어 거실 어딘가로 던졌다 드디어 나는 준비가 되었다 허벅지 안쪽까지 진동이 느껴진다 계단을 마주하고 서 본다 거실의 사람들을 한 번 더 둘러본다 여전히 저들의 시선은 나에게 고정되어 있다 나는 왼다리를 들어 왼발을 첫 번째 계단에 올렸다 이어 서 오른다리를 들어 오른발을 두 번째 계단에 올렸다 잠시 동작을 멈추 고 숨을 한 번 고른다 모두들 나를 기억하길 바란다 이제 다리를 빠르게 움직여 계단을 뛰어 오른다 순간 45 발을 헛디뎌 난간을 붙잡았다 어디선가 흐른 물이 스며들어 얼었는지 계단이 미끄럽다 다행히 발을 헛디디는 한심한 내 모습을 발견한 사 람은 없다 이 건물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것이 흠이다 3층 까지만 지어 진 구식 건물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것은 아무래도 올바른 짓이라 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어쨌든 나는 다시 계단을 뛰어 오른다 오늘 같은 날엔 늘 무언가를 집에 두고 나오게 되는 것이다 2층에 올라 길이 10미 터 정도의 좁은 복도를 통과해야만 3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을 찾 을 수 있다 뛰어서 복도를 빠르게 통과하고 또 다시 계단을 뛰어올라 3 층에 도착했다 계단을 올라 왼쪽으로 돌면 보이는 네 개의 문 그 중 두 번째 문을 열어야 나의 집이 시작된다 급하게 문을 열고 두고 간 수첩을 찾는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니 삼십 분이나 늦어졌다 목이 너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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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다 어차피 늦어졌으니 목이라도 축이려 바닥에 앉아 신발 끈을 푸 른다 다시 일어나 현관문을 닫고 들어와 식탁에 놓인 물병과 맥주가 담 긴 유리컵을 바라본다 1 나는 우선 유리컵에 담긴 맥주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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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현 1999년은 물론이고 2012년에도 지구는 종말을 겪지 않았으므로 오늘 (2013년 1월 9일)도 살아 있는 아직까지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세속 적 기독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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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의 밤

김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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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혜

kimkahye@hanmail.net blog.naver.com/ga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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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sus 보관법

이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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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sus 보관법 출판사에서 보낸 등기가 막 도착했다. 종이봉투였다. 종이봉투라니! 무엇이 들어 있을까. 저번에는 출판사에서 책을 보냈다. 출판사에서 발 행하는 계간지였다. 그 책은 계간지 정기구독자들이 ‘은갈치 봉투’라 고 부르는 은색 알루미늄 봉투에 들어 있었다. 나는 그 출판사 말고도 세 네 군데의 출판사에서 잡지를 받아보고 있었다. 잡지를 보내는 봉투 는 대개 종이가 아니면 비닐 소재이다. 비닐보다는 종이가 단가가 싸다. 보통 비에 젖거나 하는 위험을 대비해 비닐을 쓰지만 종이를 쓰는 곳도 있다. 종이봉투를 쓰는 출판사라면 얼마나 간당간당하게 잡지를 이어 나가고 있는 걸까. 단지 독자에 대한 배려가 없거나 종이에 애정이 있어 서 일수도 있을 것이다. 종이는 너무나 많은 의미를 품고 있다. 종이는 지나간 시절을 의미하고 향수에 젖은 사람을 떠올리게 하며 글이나 책, 특히 모든 고전을 내포한다. 물론 작가들도 종이의 영역에 들어간다. 어 떤 작가도 종이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다. 종이는 사랑의 은유이기도 하 다. 고전적으로는 향수 뿌린 편지, 현대식으로는 돈다발. 등기가 오기 전에 나는 대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어제 우체부가 등기를 가지고 왔을 때 집은 비어 있었고 우체부는 내일 오전 9시 30 분에 다시 오겠다는 알림 스티커를 편지함에 붙이고 갔다. 대문과 현관 사이의 거리가 멀고 초인종도 없어서 우리 집에 오는 우체부는 내 이름 을 크게 불러야 했다. 가끔 이름을 건성으로 한 번 부르고 마는 우체부 도 있었다. 뒤늦게 내려가 보면 우체부는 이미 떠난 뒤였다. 나는 그런 식으로 헛탕을 치게 될까 조바심이 나서 9시 30분이 되기 십 분 전부터 대문 앞으로 나가 있었던 것이다. 재방문도 놓치면 시내에 있는 큰 우체 국에 가서 직접 등기를 찾아와야 했다. 그렇지만 꼭 그 일이 귀찮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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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을 떤 것은 아니었다. 호기심이 뒤섞인 기대가 있었다. 출판사에서 무엇을 보냈을지 궁금했다. 선물이었으면 했다. 그저 무언가 기다릴 것 이 필요하기도 했다. 기다림은 활력을 준다. 기다릴 것이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기다 리는 것들 중 반 이상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나는 이 주 전까지 함께 생활했던 사람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연 락이 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의 이름은 재운인데 이름으로 부른 적 은 거의 없고 편집장이라는 호칭을 썼다. 편집장은 우리가 함께 보낸 마 지막 날 밤에 나에게 연락하지 않을 거라고 몇 번이나 말했고 나는 새 삼 편집장이 겨우 스물 넷이라는 것을 상기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 런데도 나는 편집장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가 지나면 기다리 는 마음은 더 강렬해지고 연락이 올 가능성은 줄어든다. 그런 식으로 날 이 가고 있었다. 출판사에서 보낸 종이봉투를 들고 현관으로 가는 동안에도 편집장을 생각했다. 내 모든 행동이 기다림에 종속되어 있었다. 현관을 지나 방에 들어가 가위로 봉투 입구를 잘랐다. 봉투에는 세금징수영수증이 들어있 었다. 봉투에 든 것이 선물이 아니라 내 수익 중 일부를 떼어갔다는 증 명서라는 것을 확인하자 등기를 기다리던 어제 저녁부터 오늘 아침까 지의 시간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편집장의 연락을 기다리던 지난 이 주 간도 덩달아 시시해졌다. 영수증이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을 것이라 는 점괘처럼 보였다. 새로운 종이봉투가 도착한 오후까지 나는 기분 나 쁜 점괘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오후에 온 종이봉투는 등기가 아니라 택배였다. 택배는 회사로 왔다. 회의에서 돌아오니 책상에 넓적한 종이봉투가 있었다. 사무실에 남아있 던 인턴이 나 대신 택배를 받았다며 봉투를 눈으로 가리켰다. 나는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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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받았던 봉투가 떠올라 봉투를 열지 않고 미뤄뒀다. 봉투 옆에는 전화 번호가 적힌 쪽지가 있었다. “이게 뭐에요?” 쪽지를 들고 인턴에게 묻 자 인턴이 기다렸다는 듯이 내 자리로 와서 속삭였다. “지난달에 이벤 트에 당첨된 독자한테 전화가 왔는데 다 굳어진 마스카라를 받았대요. 해명을 요구한답니다.” 내가 광고팀 한 구석에 있는 박스에서 꺼냈던 마스카라였다. 마스카라를 발송했던 날이 언제였더라. 삼 주 전쯤일 것이다. 이제 분 명히 생각이 난다. 편집장의 전화를 받은 날이다. 편집장은 자신이 지금 부산에 있는데 한 번 내려오지 않겠냐고 했다. 나는 담담한 척하려 애쓰 면서 다음 주가 마침 휴가인데 휴가를 부산에서 보내는 것도 괜찮겠다 고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편집장이 입을 떼면서 냈던 소리를 비롯한 모 든 말들을 되짚어봤다. 단어 자체의 의미, 흔히 쓰는 말의 숨은 뜻(흔히 쓰는 말일수록 다양한 의미를 품고 있는 법이다. 예를 들어 ‘한 번 오지 않을래?’같은 말. 더군다나 그 말 앞에 ‘내가 있는 곳으로’가 붙는다면 그 문장은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말을 할 때의 어조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분위기, 그밖에 지나간 시간에서 잡아챌 수 있는 모든 것을 물고 늘어지며 통화를 몇 번이나 재구성했다. 그러다가 나는 문득 내가 얼마나 터무니없이 이번 여름휴가에 대한 기대를 부풀리고 있는지 깨닫고 부끄러워졌다. 부끄러움 속에서 내가 지난 겨울 이후로 내심 편집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점점 선명 해졌다. ‘나야’, ‘뭐하고 있었어?’, ‘난 부산에 있어.’, ‘지겨워. 하나도 재 미가 없어.’, ‘부산에 한 번 내려와.’ 그런 말들에 대체 무슨 기대를 하고 있는 건지. ‘부산도 더워.’ 그런 말에는 더욱 더. 부산이 덥다는 말은 부 산이 덥다는 뜻이다. 부산에 오라는 건 빈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낙 심과 체념이 부푼 기대와 교차되고 있을 때 전화 한 통을 더 받았다. 이벤트 당첨자에게서 온 전화였다. 나는 이벤트 담당자를 겸하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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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 년 차 기자가 이벤트 당첨 선물을 직접 포장해서 보낸다는 것을 사람들은 믿을까? 포장과 발송, 그리고 항의전화를 받는 것도 내 임무 였다. 당첨자는 선물이 오지 않는다고 항의했다. 왜 이렇게 늦어지는지, 언제쯤 받을 수 있을지를 굳은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그녀가 받아야 할 선물은 증발되어 있었다. 협찬사에서는 보냈다고 하고 협찬사에서 받은 물건을 우리 쪽에 넘겨줘야 할 광고팀은 물건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사실 이벤트 당첨 선물 따위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세상에서 나와 이 벤트 당첨자 단 둘 뿐이었다. 나는 광고팀 한 구석에 쌓여있는 박스들 중 하나에 고개를 처박고 먼지 쌓인 물건들을 뒤적거렸다. 에코백, 마스 크백, 쿠폰, 티켓, 책자, 티셔츠, 립글로스, 각종 크림, 그렇고 그런 잡동 사니들이었다. 나는 마스카라를 찾아냈다. 내가 보기엔 그 박스 안에서 가장 개성 있는 물건이었다. 항의전화를 받고 마스카라를 찾아내고 마스카라를 포장해서 종이봉 투에 넣고 이벤트 당첨자의 우편번호를 검색해서 종이봉투에 수신자 정보를 쓰고 했던 그 시간이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내가 그 일들을 하 는 동안에 끊임없이 편집장과의 통화를 곱씹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턴 이 남긴 쪽지를 다시 보니 그 전화번호가 삼 주 전에 걸려왔던 전화번 호와 같다는 것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오래 기다려 받은 선물이 겨우 굳어빠진 마스카라라니, 나 같아도 당장 해명을 요구했을 것이다. 나는 마스카라를 받은 그녀가 분노에 차 있을 거라 예상하며 쪽지에 있는 번 호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예상보다 쉽게 끝났다. 그녀는 내 사과에 되려 민망해했다. 빠른 시간 내에 다른 선물을 보내드리겠다는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고 나니 진이 빠졌다. 나는 책상 끝으로 밀어뒀던 넓적 한 종이봉투를 들고 사무실을 나왔다. 종이봉투에는 서점 주소가 인쇄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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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sus겠지. 나는 서점 이름을 보고 짐작했다. 이번에 그 서점에서 주 문한 건 versus 한 권 밖에 없었다. 집에 들어가 봉투를 뜯어보니 역시 versus였고 나는 versus를 철제 서랍장 위에 던져두고 저녁을 먹었다. 습관적으로 반주를 했는데 밥에 술 한 잔을 한 다기 보다는 밥을 안주 로 삼아 술을 마시는 것에 가까웠다. 고작 오 일이었지만 휴가 내내 편 집장과 술을 엄청나게 마셔댔는데 어느새 그게 익숙해졌는지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저녁이면 술 생각이 났다. 편집장과는 종류를 가리지 않고 되는대로 마셨다. 작정한 날에는 마 트에 가서 와인, 데낄라, 보드카, 맥주를 쓸어 담아오기도 하고 돈이 떨 어지면 편의점에서 맥주 큰 것 한 캔을 사서 나눠 마시기도 했다. 마지 막 날에는 편집장이 가진 돈과 내 지갑에 든 돈을 몽땅 털어 술집에서 마셨다. 마지막 날 편집장의 손은 유난히 커보였다. 술집의 노란 조명 때문이 었는지도 모른다. 조명 아래에서 병을 감싸고 있는 편집장의 손가락은 굵었고 나는 그 굵기가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로 어지러워졌다. 나는 손 가락을 열망하다가 편집장의 전부를 원하게 됐고 그런 생각이 드러나 있을 눈빛을 숨기지도 않았다. 내 잔을 채우던 편집장의 손은 이제 없다. 편집장이 내 잔에 술을 따라 줄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게 남은 날들이 까마 득하게 느껴진다. 얼마나 될지 모르는 X의 시간. 편집장과 보낸 오 일이 X의 시간을 통째로 가져가버린 것 같다. X의 시간을 실제로 소유한 것 은 편집장이고 나는 빌린 집에 사는 것처럼 그저 임시로 X의 시간 속에 있는 것이다. 술을 그만 마셔야겠다. 상념에 빠지기는 싫다. 상념이 편집장과 보낸 날들을 추억으로 변질시키고 있다. 추억은 불쾌하다. 편집장은 아름답 게 포장된 냉동육 따위가 아니다. 그는 내게 아직 현재이다. 현재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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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술을 그만 마시고 잠이나 자자. 술병은 비어 있었고 더 마실 술도 없었다. 나른했다. 술을 한 잔 더 마시거나 책을 한 페이지 정도 읽으면 잠이 올 것 같았다. 나는 versus를 떠올리고 책 창 고로 갔다. 책 창고는 책을 아무렇게나 쌓아둔 방으로 서재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지저분해서 창고라고 불렀다. 바닥에 있는 책이 더 많지만 책장도 있다. 다섯 칸짜리 나무 책장 세 개다. 책장 칸은 비효율적으로 커서 보그 사 이즈의 잡지를 넣으면 딱 맞지만 보통 사이즈 책을 꽂으면 한참 남는다. 나는 일인용 소파에 몸을 묻고 versus를 펼쳤다. 버릇대로 목차부터 훑 는데 아는 이름이 보였다. 동명이인 일수도 있지만 내가 아는 그 사람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의 이름이 있는 페이지로 가보니 역시 그였다. versus에는 다양한 분야의 비평이 실려 있었는데 양문기의 비평은 문학에 속해 있었다. 당 연하다. 양문기가 문학이 아니라면 어느 분야에 대해 평할 수 있단 말인 가. 양문기는 작년 가을까지 나와 <주먹>에 속해 있었다. 그도 나처럼 편집장의 꼬임에 넘어가 <주먹>에 들어왔지만 나보다는 현명했다. 나 는 <주먹>을 거쳐 갔던 어느 누구보다 빨리 <주먹>에서 발을 뺐던 양 문기를 신뢰했다. 양문기는 <주먹>의 어느 누구보다 판단력이 있었다. 그가 <주먹>을 나간 후로 한두 번 연락하기는 했지만 관계는 그 이상으 로 이어지지 않았다. 양문기의 이름을 versus에서 보게 되니 반가웠다. 어느 경로로 그렇 게 됐는지는 몰라도 양문기는 평론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아 마 문학 평론가일 것이다. 아니면 대중문학 평론가이거나. versus에 나 와 있는 프로필에는 평론가라고만 돼 있었다. 나중에 그의 글을 제대로 읽어보고 싶어져 versus를 덮었다. 술기운이 퍼졌다.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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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sus를 책장에 꽂고 침대로 들어가자. 그러나 막상 versus를 꽂으 려고 보니 난감했다. 어떻게 꽂아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versus는 너무 컸다. 책장에 꽂으려면 반으로 접는 수밖에 없었다. 접히지도 않을 것 같지만 잡지를 접어서 보관하다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책을, 접는 다니. 이렇게 디자인에 공을 들인 예쁜 잡지를 우겨 뜨려 접힌 자국을 만든다니! 그런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니! 미친 짓이다. 미친 짓 을 넘어 신성모독이다. 접히는 게 종이의 숙명일지는 몰라도 일단 책이 된 종이는 접어서는 안 된다. 책이라는 지위로 승격한 종이를 그렇게 대할 수는 없다. 잡지 가 된 종이에게는 더욱 예의를 갖춰야 한다. 그들은 교수형이 정해진 왕 족이나 다름없다. 주간지라면 일주일, 월간지라면 한 달, 계간지라면 한 계절, 연간지라면 일 년. 그들이 대접받을 수 있는 기간은 너무나 짧다. 그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다음 호에게 자리를 내주고 뒤로 물러나야 한 다. 나는 철제 서랍장에서 온갖 물건에 파묻힌 자를 끄집어내서 versus의 길이를 쟀다. 세로는 40cm, 가로는 26.5cm였다. 도대체 versus를 만 든 사람들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사이즈의 잡지를 발행한 것일까. 이런 사이즈의 잡지가 들어갈 만한 책장을 가진 사람이 있기는 한가? versus 를 만든 사람들은 versus를 어디에 어떻게 보관할까? 나는 versus를 다시 펴서 양문기의 프로필을 확인했다. 역시 메일 주소가 있었다. 나는 나와 있는 주소로 메일을 보냈다. 메일 제목은 <versus 보관법>이었다.

<versus 보관법> 안녕. 나는 작년에 <주먹>에 있던 유진수야. 나를 기억할지 모르겠네. 오늘 versus를 봤는데 네 글이 실려 있어서 반가웠어. 이렇게 메일을 보낸 건 반가워서 이기도 하지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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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야. 넌 이걸 어디에 둬? versus는 책장에 꽂기에는 너무 크잖아. 접기는 좀 그렇고. 종이를 제대로 대접해야 한다는 데 있어서는 우리가 의견이 일치했었 던 것 같은데. versus를 온당하게 보관하는 법을 알고 싶어. 사실 술에 약간 취해 있는데 내일이면 이 메일을 보낸 걸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답 기다릴게. 다음날 아침 나는 일어나자마자 메일함을 열었다. 아직 메일을 확인하 지 않았다면 수신을 취소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벌써 답이 와 있었 다. 새벽 세 시에 가까운 시간에 메일을 보낸 것으로 봐서 양문기는 여 전히 잠을 잘 못 자는 것 같았다.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새벽에 즉각 답을 보낸 걸로 봐서는, 글쎄 그것으로 뭘 알 수 있을까. 양문기가 아직은 나와 비슷한 종류의 인간이라는 것? ‘비슷한 종류’라 니. 어떤 종류 말인가. 놀 줄 모르는 따분한 인간? 구시대적인 인간? ‘불 타는 금요일 밤에 급하게 구한 이성의 몸 대신 종이를 쓰다듬는 변태’ 카테고리에 함께 묶여 있다는 말일까? 내가 기억하기로 양문기는 촌스 럽지도 과거에서 살고 있지도 않았다. 나도 그렇다. 식물이나 곤충 같은 찌질이들과 있을 때보다는 종이와 접촉할 때 오르가즘을 느끼는 편이 지만 과거의 유물에는 별 흥미가 없다. 나는 박물관을 별로 좋아하지 않 는다. 박물관에 대한 기억이라고는 석기시대 전시관에서 돌덩이들에 둘 러싸여 십 초에 한 번씩 하품을 하던 것밖에 없다. 종이가 살아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살아 있지 않다면 전 세계의 서점, 도서관, 서재, 까페에 깔려있는 책들은 모두 종이의 유령이란 말인가? 학부생 시절 한자로 빼곡한 고전 문학 논문을 읽을 때는 종이가 미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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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령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것도 유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생생 하게 내 목을 졸랐다. 그러나 내가 종이를 애호한다고 나를 비난한 사람 은 아무도 없다. 나는 누구에게 변명하고 있는 걸까. 성큼성큼 다가오는 미래에게? 양 문기는 자신은 아직 활자매체가 좋다고 수줍게 말했다. 그에게 활자매 체가 좋다는 말 앞에 ‘아직’을 붙여 말하게 하고 또 그 말을 수줍게 꺼내 게 만드는 ‘그 무엇’에게 나는 변명하려 하는 것일까. 양문기는 수줍음 을 타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종이에 대한 애정을 내비칠 때면 수줍어했 다. 그는 전자책을 쌓아놓고 불 지르고 싶어 하는 과격한 종이 수호자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디지털’에 대항하려 하는가? 전혀 아니 다. 아직은 종이가 편하고 친근할 뿐이다. 실제로는 종이를 만지는 시간 보다 컴퓨터를 쓰는 시간이 더 많기도 하다. 편집장은 과격파에 넣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웹진부터 만드는 것이 어 떻겠냐는 의견을 단박에 내쳤으니. <주먹>2호를 내기 위해 지지부진한 회의를 수없이 반복하던 지난 겨울, 어떤 팀원이 웹진을 만들자는 의견 을 냈다. 다들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편집장은 그 팀원을 쳐다보고 단호 하게 말했다. “그러지는 않을 거야. 넌 하나도 이해 못하고 있어.” 그런 독선적인 태도 때문에 <주먹>을 나간 팀원도 있었다. 편집장은 농담도 잘 하고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는 편이었지만 근본적으로 오만했다. 이런, 또 편집장 생각이다. 나는 양문기의 메일을 확인했다.

<Re: versus 보관법> 잘 지내? <주먹>에 있던 누군가가 versus를 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을 한 적은 있지만 이런 메일을 받게 될 줄은 몰랐어. 기분이 좋네. 어떻 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아직 그때 다니던 잡지사에 있어? 해가 넘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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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그만두게 될 것 같다고 했었잖아. versus 보관법을 알고 싶다고? 오늘 저녁에 versus 출간 기념회가 있 어. 거기 오면 versus를 어떻게 보관해야 할 지 알게 될 수도 있겠지. 시 간 괜찮으면 와. 한 번 보자. 메일 끝에는 행사 시간과 장소가 덧붙여져 있었다. 출간 기념회가 오 분 정도 남았다. 양문기는 갤러리 안에 있을까? 출 간 기념회 장소는 갤러리 팩토리였다. 나는 갤러리 근처 까페에 앉아 있 다. 이제라도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작년에는 독립 출판 물 관련 행사에 드나들기도 했지만 <주먹>에서 나오고 나서는 그런 류 의 행사에 가기도 귀찮아졌다. 양문기를 만나는 것도 성가시게 느껴진 다. 내가 정말 양문기를 보고 싶은 걸까? 양문기를 만나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편집장 얘기가 나오겠지만 편집장과 휴가를 보냈다는 말은 하지 않고 싶다. 양문기는 내가 <주먹>에 들어가면서 편집장을 만나게 된 것이라 알 고 있었지만 사실 이음 책방에서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편집장을 처 음 알게 됐다. 내가 일하는 잡지사는 삼류 패션지를 발행하는 곳으로 작 년의 나는 사실상 상품 카달로그인 잡지를 만드는 일에 염증이 날 대로 나 있었다. 마감이 끝난 주의 주말이면 침대에 뻗어 있다가 영화를 보러 나갔다. 영화에도 진력이 나는 날에는 서점에 가서 닥치는 대로 책을 사 와서 침대에 쌓아두고 읽었다. 그날은 9월 초의 덥고 지루한 토요일 오후였다. 나는 이음 책방의 가 판대에서 <주먹>을 발견했다. 빨간색 바탕에 주먹이 커다랗게 들어간 촌스러운 표지였다. 심지어 제목은 노란색이었다. 나는 그 악취미에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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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하면서도 ‘창간호’라는 문구에 이끌려 <주먹>을 눈 여겨 보고 있었 다. 그때의 나는 새로 나온 독립 잡지라면 주제가 무엇이라도 관심이 있 었다. 내가 그 잡지를 집어 들기 전에 다른 손이 먼저 그 잡지를 가져갔다. 요즘 애들이 그렇듯이 마르고 잘 꾸미고 있었는데 십대 후반처럼도 보 이는 앳된 얼굴이었다. 그 애는 주저 없이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에 잡 지를 넣고 책방 입구로 걸어갔다. 서점 주인은 미처 못 본 것인지 그런 일에 진력이 나서 잡을 의욕도 잃어버린 것인지 카운터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서점 안에는 나 말고도 여자 두 명과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 남자는 덩치가 크지는 않았지만 다부진 체격이었고 어딘지 단단해 보이는 인 상이었다. 몸에 달라붙는 초록색 반팔티를 입고 있었다. 남자와 나의 눈 이 마주쳤다. 남자가 잡지를 가방에 넣고 걸어 나가는 아이의 뒷덜미를 움켜쥔 것은 나와 눈이 마주친 직후였다. 남자가 아이를 서점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고함을 질렀다. 내 동댕이쳐진 아이가 편집장이었다. 나중에 편집장에게 그 남자가 뭐라고 했는지 물어봤는데 편집장도 무슨 말인지 잘 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 아마 ‘도둑놈의 시끼!’ 그런 게 아니었을까?” 편집장은 그렇게 추측했고 나는 그게 맞을 거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편집장은 목까지 벌겋게 달아올라서(내가 나중에 그 일을 가지고 놀 리자 편집장은 남자의 손자국 때문이지 ‘목까지 달아오르지는’ 않았다 고 우겨댔다.) 바닥에서 일어났다. 남자가 편집장의 가방을 빼앗아 바닥 에 대고 털었다. 가방에서 <주먹>몇 권이 우수수 떨어졌다. 남자가 편 집장의 팔을 단단하게 붙잡고 처분을 맡기겠다는 듯이 서점 주인을 쳐 다봤다. 주인은 편집장을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다 가져 갈래요?” 편 집장은 그러겠다고 했다. 주인은 창고에서 주먹 몇 권을 꺼내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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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건넸다. <주먹>창간호는 무료 배포지였다. 편집장은 가판대에 있 던 <주먹>까지 전부 챙겨 서점에서 나갔다. 그날 오후의 사건은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일 뿐이었으니 쉽게 잊을 수 도 있었겠지만 <주먹>의 촌스러운 표지는 편집장의 앳되고 이목구비 뚜렷한 얼굴과 함께 깊숙하게 와 박혔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 아 어느 인터넷 게시판에서 <주먹>표지가 들어간 포스터를 보게 됐을 때 나는 단박에 <주먹>을 훔치던 남자애를 떠올렸다. 게시판에 올라온 글은 <주먹>의 에디터를 구한다는 광고였다. 나는 그 남자애가 <주먹> 과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는 어렴풋한 기대로 <주먹>에 지원 메일을 보 냈다. 오 분 정도 더 게으름을 피워도 괜찮다. 근처 테이블에서 여자와 남자 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여자의 표정이 좀 더 심각하다. 두 사람 모두 까페 스태프다. 남자는 근무시간이 지났는지 앉아서 빈둥거 린다. 손님이 오자 여자가 카운터로 달려간다. 여자는 남자에게 돌아왔 다가 카운터로 달려가기를 반복한다. 손님은 뜸하다. 오 분 그리고 오 분. 오 분 만 더 앉아있기로 하자. 까페 한 쪽에는 철 지난 잡지가 꽂혀 있다. 작년 것도 있다. 나는 가장 오래된 잡지를 가져와 뒤적거렸다. 광고팀이 일을 열심히 하나보네. 삼분의 이가 상품 광고다. 매니큐어 를 과자에 발라놓고 루즈를 셔츠에 뭉개놓은 사진들. 색이 강조된 사진 아래에는 상품 번호가 작은 폰트로 나열되어 있다. 나는 그중에 하나를 기억해둔다. 매력적인 색이다. 이렇게 기억한 번호는 대부분 금방 잊는 다. 메모할 필요는 없다. 사진들을 계속 넘긴다. 사진들은 상투적으로 전위적이고 진절머리 나 는 방식으로 아름답다. 한때는 이런 사진들을 스크랩하기도 했었지. 나 는 그랬던 시절을 떠올리려다 그만둔다. 옛날은 옛날일 뿐이다. 종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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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던 시절도 옛날이고 지금 종이는 퇴물이 되어간다. 아직 뒷방으로 내쳐지지는 않았지만 전성기는 확실히 지났다. 이제는 베개나 냄비받 침으로도 잘 안 쓰일 것이다. 베개나 냄비받침으로 쓰이려면 손닿는 곳 에 널려 있어야 하니까. 베개나 냄비받침으로 쓰이던 종이들은 박물관 에 들어가 있다(옛날 만화책, 옛날 교과서, 절판된 희귀도서, 유명인사 의 편지, 죽은 음악가의 악보, 선데이 서울). 출간 기념회에 쌓여있는 versus는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선데이 서 울과 정반대편에 있는가?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출간 기념회에 깔린 versus는 내년이면 전부 창고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종이들의 운명이란.” 나는 양문기를 만나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양문기는 정해진 암호를 마 침내 건네받은 사람처럼 미소를 짓고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았 다가 놓고 다시 한 번 말했다. 종이들의 운명이란. 내가 갤러리 안으로 들어섰을 때는 이미 행사가 끝나 있었고 사람들 은 음식이 든 접시와 잔을 하나씩 들고 서 있었다. 양문기는 두 세 명과 둘러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 접시를 바닥에 내려 놓았다.

“이번에 versus에 글을 쓴 사람들이야.” 나에게 다가온 양문기가 함께 있던 사람들을 눈짓하며 내게 말했고 나는 나를 쳐다보고 있는 그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들은 나를 향해 고개를 까닥이고 곧바로 자기들이 하고 있던 얘기로 돌아갔다.

“지금 네 표정이 어떤지 알아? 장례식에 온 사람 같아.” “알아. 부조금을 깜빡해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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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관주의자.” “너는 아니고?” 내가 웃으며 되묻자 양문기가 허리를 숙여 바닥에 내려놨던 접시를 집어 들었다. 하나 먹을래? 양문기가 내민 접시에는 예쁜 핑거푸드가 가득했다. 나는 매니큐어를 바른 과자가 떠올라 고개를 저었다.

“잔칫날인데 먹어야지.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런 날 잘 먹어둬야 해.” ‘우리 같은’이라. 양문기가 아직 나를 동류로 생각하고 있었나. 갑자기 이상할 만큼 양문기가 친밀하게 느껴졌다. 나는 내색하지 않고 “어떤

잔치?”하고 물었다. “돌잔치지.” “부조금이 아니라 금팔찌를 깜빡한 거였네. 네가 애 아버지야?” 아버지가 확실한 돌잔치는 없지. 양문기가 그렇게 대답하고 카나페를 입에 넣었다.

“그런데 ‘우리 같은’이라니?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데?” “종이를 뜯어먹고 사는 사람들이지.” 양문기가 입을 우물거리면서 말했다. 난 채식주의자가 아닌데. 양문기 의 접시에 든 닭튀김을 가져가면서 내가 말했다. 갤러리 오른쪽으로는 ㄱ자 형태로 유리 전시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허 리 정도 높이의 전시관 안에는 독립 출판물들이 들어 있었다. 발행된 지 얼마 안 된 신생 잡지들도 있었다. 디자인은 괜찮지만 재질은 소박한 것 들이 많았고 흑백 표지도 있었다. 양문기와 나는 전시관을 따라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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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었다. 벽에도 책들이 걸려 있었다. 벽이 안 보일 정도로 빽빽한 배치 였다. 몇 년 전 이집트 유물 전시에 갔던 때가 떠올랐다. 양피지, 그릇, 단검, 장신구를 봤다. 어지러웠고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아주 먼 곳에서 온 오래된 물건들. 형태가 익숙했고 용도를 익히 알았 지만 그 물건들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왜 생겨났는지, 어떻게 아직까지 남아 있는지, 왜 남아서 세계를 떠돌고 있는지를. 전시관 맨 끝에 있던 것은 미라였다.

“미라들 같아. 바짝 말린 시체들. 이런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지?” 목소리가 크게 나왔다. 앞에 걸어가던 사람들이 뒤를 돌아봤다. 안 좋 은 눈길이었다. “산모들이야. 미라들을 낳은 사람들.” 앞 사람들이 멀어 지자 양문기가 속삭였다. “입조심 해야겠네.” “그래, 조심해. 여기 있는 사람들 반이 산모들이니까.” 우리는 전시관 뒤로 빠져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음식 테이블 끝에 커다란 쓰레기봉투가 있었는데 그 근처 자리 였다.

“신생아들이 많네. 출산 장려 정책 때문인가?” “그 사업 실패한 거 몰라? 지원금 끊긴 지 오래 됐어. 양육비를 감당 못 해서 손 놔버리고들 있잖아.” “알아. 그냥 이해가 안 돼서 그래. 한쪽에서는 고아들이 들끓는데 여기 는 또 신생아들 천지고.” “우리야 손 놔버린 쪽이니까.” “<주먹>을 고아 만들었지.” 나는 씁쓸해져서 그렇게 말했는데 양문기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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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농담을 이어가고 싶은 것 같았다.

“아빠는 원래 없었지.” “엄마도 없어졌고. 하지만 엄마 없다고 못 사나.” 나는 가까이에 있는 양문기의 얼굴에 대고 중얼거렸다.

“지금은 <주먹>도 없어.” “<주먹>이 없으면?” “<주먹>이 없으면 <주먹>이 살 수가 없지.” 양문기가 말했다. 그러나 <주먹>은 아직 현재였다. 벌써 폐간된 지 반 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나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떠밀고 있었다. 농담은 끝났고 나는 접시를 집어 들고 음식 테이블을 돌았다. 양문기가 따라와 서 그의 빈 접시를 채웠다.

“<주먹>에 있던 사람들 아직 만나?” 나는 옆에 선 양문기에게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지만 사실은 내내 맴 돌고 있던 말이었다.

“아니, 전혀. 너는?” “얼마 전에 편집장을 만났어.” 양문기가 손가락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고 나를 빤히 봤다. “그래? 걔는 뭐하고 지내?” “섹스 잡지를 만든대.” “포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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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하고는 달라. 섹스를 주제로 하는 잡지야.” “그게 그거지.” “글쎄, 계획이 많던데.” “걔는 사기꾼 같아.” “사업가가 아니면 사기꾼이 될 애지.” 나는 그 말을 하고나서야 내가 편집장 얘기를 하기 위해 양문기를 만 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양문기에게 어디까지 말할 수 있을까. 마 지막 날 밤에 편집장과 했던 섹스가 별로였다는 정도의 얘기까지는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열정이 식고 갈망이 사그라진 후에 방안이 얼마나 싸늘해졌는지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온도. 싸늘한 공 기 속에서 우리는 아이처럼 성기를 내놓고 앉아있었다. 그리고 다시 나 란히 누웠을 때 얼마나 쓸쓸했던가. 너무나 갑작스럽고 한편으로는 익 숙한 것이어서 나는 놀랐다가 서서히 마음을 놓았다. 그런 감정이 얼마 나 우스운 속도로 지나가버리는지. 나는 그의 옆에 누워서 그를 지나가 고 있었다. 누가 먼저 말을 돌렸는지 모르겠다. 어느새 편집장에 대한 얘기가 끝 나고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내 직장 생활과 양문기가 하고 있는 일, 요즘에 본 영화, 괜찮은 식당, 스포츠 경기, 뜨고 있는 잡지, 출판계의 불황, 파업 사태, 흉흉한 소문. 양문기는 어떤 주제로도 대화를 할 수 있 는 사람이었고 갤러리에서 나갈 때까지 우리의 대화는 끊기지 않았다. 지하철 역 앞에서 우리는 헤어졌다. 다음에 봐. 그래, 또 봐. 이런 인사 에 담긴 배려에 감사해하면서. 갤러리에서 돌아와서 아무렇게나 던져놨던 versus를 매일 들고 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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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가방에 넣어뒀다. 내일 여유가 나는 시간에 읽어야지. 그러나 한 달 이 넘도록 versus를 읽을 여유는 나지 않았다. 커피를 마실 여유나 수 첩에 일정을 정리할 여유, 친구와 술 한 잔할 여유는 가끔 있었다. 내가 회사에서 까페로, 까페에서 술집으로, 술집에서 집으로 옮겨 다니는 동 안 versus는 모서리가 삐죽 나온 채로 가방에 들어 있었다. 나는 무엇 을 미루고 있는 것일까.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 아직은 내가 하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을 거라는 기대가 생길 것이? 아니면 종이의 세계가 몰 락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될 일이? 어느 쪽이 나을까. 어느 쪽이든 절망 적일 것이다. 책을 펼치면 낮고 어두운 하늘이 세상을 덮고 엄청난 폭우 가 쏟아질 것이다. 비가 거리에 널린 종이들을 휩쓸어 갈 것이다. 나는 망상이 부풀도록 내버려 둔 채로 versus를 노려봤다. 슬슬 나가 야 한다. 취재해야할 곳이 있었다. 오늘 온 우편물만 확인하고 바로 나 가자. 많지 않았다. 뜯어보지 않아도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있는 우 편물 세 개와 독자가 보낸 것이 확실한 엽서 다섯 장이 있었다. 우리 잡 지는 잡지에 있는 퍼즐을 오려 엽서에 붙여 보내는 고전적인 이벤트 방 식을 고수하고 있었다. 매달 다섯 명을 뽑는데 응모자가 의외로 많았다. 이번 달에는 오늘 온 다섯 장을 합쳐 마흔 두 장이 왔다. 이벤트 마감일이 며칠 남았다. 퍼즐은 십자말인데 일일이 답을 제대로 썼는지 확인하는 것도 일이었다. 틀리는 사람이 많지도 않았지만. 다들 검색 엔진을 쓰는 듯했다. 나는 엽서를 대강 넘겨봤다. 몇 번 본 이름도 있었다. 이 여자가 또 보냈네. 다 굳은 마스카라를 받았던 여자다. 다시 보낸 선물은 잘 받았을까. 나는 그 여자가 엽서에 붙여놓은 십자말 퍼즐 을 들여다봤다. 정성을 들여 쓴 게 티가 나는 글씨다. 수정테이프 자국 까지 있다. 퍼즐을 직접 푸는 사람인 것이다. 빈 칸으로 남겨둔 것도 있었다. 틀린 것도 여러 개였다. 십자말이란 것 이 그렇다. 하나가 풀리면 그 다음으로 넘어가기 쉬워지지만 하나가 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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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 줄줄이 꼬이는 법이다. 그렇지만 다 채우지도 못한 퍼즐을 보내다 니 어쩌자는 걸까. 정답자 중에서 당첨자를 뽑는다는 걸 알고 있을 텐 데. 게다가 바로 지지난 달에 당첨이 되지 않았나. 나머지 엽서는 나중에 보자. 나는 여자의 것까지 합한 다섯 장의 엽서 를 가방에 챙겨 나왔다. 취재할 장소는 서래마을의 한 빵집이었다. 유기 농 베이커리 아이템이 저번 회의에서 통과됐다. 다만 ‘유기농’은 유행이 지난 단어라고 퇴짜를 맞았다. ‘유기농’을 뭐라고 바꿔야 하나. 골치가 아프지만 기사를 쓰고 나서 생각해도 될 일이다. ‘프리미엄’이나 ‘순수’ 같은 단어도 좋겠다. 영어나 독일어 아니면 불어에서 찾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지난 개편 때 들어온 디자인 팀장은 한글보다 알파벳을 선호한다. 팀장이 바뀌고 타 이틀이 영어로 큼지막하게 박혀서 나가는 경우가 많아졌다. 타이틀은 주로 선명한 색깔을 쓰는데 타이틀뿐만 아니라 잡지의 전체적인 색조 가 강해졌다. 개편 이후로 판매 부수가 조금씩 늘고 있는데 그 공을 디 자인 팀장에게 돌리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장이 꼬인다. 달이 넘어갈수 록 색이 강해지고 있다. 다음 리뷰 회의 때는 한 마디 해야지. 천박해 보 인다는 말까지는 튀어나오지 않아야 할 텐데. 어떤 독자들한테는 화려 해보일 수도 있겠는데요. 그렇게 돌려 말해야 할까. 울화통이 터지지만 어쩔 수 없다. 대충 하자. 어떤 타이틀로 넘기든 내 의도와 같은 느낌으로 나올 수는 없다. 서래마을에는 영자로 된 간판 이 많았다. 간판에서 이 글자 저 글자를 떼어 조합해본다. 오늘따라 그 런 조합 놀이도 순조롭지 않다. 탈락, 탈락. 이거다 싶은 단어가 없다. 괜찮아 보이는 빵집은 꽤 보인다. 그러나 서래마을에서 한 곳 이상은 안 된다. 서래마을은 유행이 지났다. 서울을 관광하는 서울 사람들은 유행 에 민감하다. 이미 떠올랐다가 예전에 가라앉은 구역을 잡지에 실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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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는 나부터 한물갔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한물 간 구역의 평일 오후는 평온하다. 관광객이 빠진 거리는 걷기 좋 다. 이 구역 특유의 부유한 느낌이 오늘은 편안하기만 하다. 깨끗하고 조용한 거리와 세련된 상점들. 상점가 뒤편에 취재할 빵집이 있다. 그런 데 유리창 안으로 보이는 가게 내부가 어둡다. 이런, 문이 닫혔네. 하늘 색 간판을 한 번 더 확인한다. 이 가게가 맞다. 연락을 하지 않고 온 게 실수였다. 취재가 확정된 게 아니라 그냥 들러서 가게를 둘러보고 빵 몇 종류를 먹어보려 했는데. 다른 빵집들을 살펴볼 수도 있지만 그럴 마음이 전혀 나지 않는다. 기 운이 쭉 빠졌다. 나는 걸어 들어왔던 거리를 택시를 타고 되돌아 나간 다. 고속터미널까지 택시를 타고 가서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마음 같아 서는 택시를 타고 집까지 가고 싶지만 휴가에서 돈을 너무 썼다. 고속터 미널에 내려서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동안 마음이 변한다. 터미널에 잠깐 들리자. 시외버스 터미널로 들어가 곧장 매표소 앞으로 간다. 익숙한 도시들의 이름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온다.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시끄러웠던 마음이 잠잠해진다. 언제라도, 어디로든 떠날 수 있 다. 정말 힘들어지면. 아직은 아니다. 좀 더 참을 수 있다. 참을 만하다. 결국 어디로 가는 표도 사지 않고 시외버스들이 오가는 정거장으로 간다. 13번 플랫폼 앞에 대기 의자가 있다. 의자는 비어있다. 나는 의자 에 앉아 플랫폼을 두리번댄다. 13번 플랫폼에는 버스가 들어오지 않았 다. 부산행 버스가 들어오는 자리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도 이 자리로 들어올까? 편집장은 가을에는 서울로 올라올 일이 있을 거라 고 했다. 입추가 언제였더라. 그저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8월이고 서울이나 부산이나 무덥다. 아직은 여름이다. 나는 가방을 뒤져 엽서들을 전부 꺼낸다. 그 여자 것만 빼고 나머지 네 장에 붙은 퍼즐은 모두 틀린 데가 없다. 정답으로 매끈하게 채워져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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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문득 그 여자가 선물을 잘 받았을지 궁금해져서 전화를 걸어보기로 한다. 누군지를 밝히고 인사를 한다. 그리고 묻는다. “선물을 다시 보내

드렸는데 받으셨어요?” “그럼요.” “이번에는 상태가 괜찮던 가요? 보내 기 전에 확인을 하기는 했는데.” “깨져서 오지는 않았어요. 사실 생각보 다 좋은 게 와서 놀랐어요.” 나는 여자에게 아날로그시계를 보냈다. 퍼 즐 당첨자 선물용 상자에서 꺼낸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에 보내신 퍼즐, 빈칸이 있던데.” “그걸 보셨어요?” “제가 담당자이니까요.” “도무지 모르겠어서.” 나는 여자에게 답을 가르쳐주려다 만다. 정답은 다음 호에 실린다. “안

타깝지만 이번에는 당첨이 안 되실 것 같아요.” “그래야죠.” 여자가 물 론이라는 투로 대답한다. 여자는 대체 무엇을 바라고 엽서를 보낸 걸까. 머리가 지끈거린다. 전화를 괜히 했다. “그런데 왜 전화를 하신 거죠?”

“선물을 잘 받으셨나 하고요.” “그게 다예요?” “네.” 나는 어서 전화를 끊고 싶다.

“친절하시네요.” 여자가 웃는다. 순간 여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부엌 의자에 앉아 잡지에 실린 문제를 하나씩 읽고 고개를 기울인다. 검은 칸 을 문지르며 하얀 칸에 글자를 넣는다. 빈칸을 남겨둔 퍼즐 뒷면에 풀 을 바르고 엽서에 붙인다. 나는 풀을 바른 종이봉투 입구를 손으로 눌러 문지르는 감촉을 안다. 엽서에 퍼즐을 붙이는 감촉은 그것과 비슷할 것 이다. 이상하게도 가슴에 온기가 퍼진다. 따뜻하다 못해 저릴 지경이다. 정말 전화를 끊어야겠다. “전화해주셔서 감사해요.” “좋은 저녁 보내세

요.” 우습게도 인사하는 목소리가 가늘게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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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침대가 필요하다. 나는 versus에 여자의 퍼즐을 대고 펜을 꺼낸다. 그리고 퍼즐의 틀린 부분을 고쳐나가기 시작한다. 비워둔 칸이 남았다. 그 칸에 들어갈 정답을 알고 있다. 문제까지 기억한다. 여자도 막상 정 답을 보면 무릎을 칠 것이다. 뜻이 어렵지 누구나 알고 있는 단어다. 나 는 빈칸을 채우지 않기로 한다. 빈칸이 남은 퍼즐을 versus 사이에 끼 운다. 얼떨결에 versus가 펼쳐졌다. 나는 조금 늦게 깨닫는다. versus를 펼 쳤는데 재앙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늘은 맑고 세상은 잠잠하다. 조금씩 어둠이 차오르고 여전히 덥기는 하지만 이정도면 평화롭다고 할 만하 다. 평화롭다. 펼친 김에 versus를 읽는다. 찬찬히 읽어 내려간다. 읽는 행위는 익숙하다. 얼마 안 되는 자신 있는 일 중에 하나다. 읽을수록 속 도가 붙어서 뒤로 갈수록 페이지가 쉽게 넘어간다. 흥미가 없는 부분은 건너뛰기도 하고 재밌는 부분은 곱씹기도 한다. 양문기의 글을 읽다가 소리 내 웃기도 한다. 양문기는 역시 비관주의자다. 양문기의 글을 읽고 나니 페이지가 몇 장 안 남았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13번 플랫폼은 아직 비어있다. 버스가 들어오려면 한참 남았나 보다. 나는 대기 의자에 앉아 있다. 시간이 나를 앞질러 간다. 삶이 나를 두고 지나간다. 삶이 나를 통과한다. 어둠은 먹색이고 나는 찰랑이는 먹빛 속 에 있다.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듯이 플랫폼을 보고 있다가 정 각이 됐을 때 일어섰다. 바람이라도 맞은 듯이 갑작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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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산 좌우명: 매일, 조금씩,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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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을 바라게 된 경위서

손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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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을 바라게 된 경위서 나는 그 동안의 일기에 삶에 미련이 없다고 수없이 적어왔다. 무엇이 이 토록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을까. 어느 순간 서서히 증식해 버린 병적 인 무기력함. 사실 경험이라는 것은 잔인하기 짝이 없다. 나는 그 일이 있은 후에 누구도 믿지 않게 되었다. 나는 또 한 번의 일이 있은 후엔 누구나 싫어져버렸다. 나는 또 한 번의 일이 되풀이된 후에는 방문을 걸어 잠갔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게 있어 경험이란 것은 견딜 수 없이 거추장스 러운 짐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늘 슬프지는 않았다. 내게도 기쁜 날들은 있었고 행복을 떠올릴만한 추억들도 몇 가닥 쥐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내 그러한 기쁨들은 내 높고도 허술한 성벽을 넘지 못하고 자리할 힘도 없다는 듯이. 잠시 머물다 갈 거면 오지도 마라는 듯이. 일기예보에서는 기나긴 장마가 시작 되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동굴 속에서 퇴화하고 식물들은 제 빛을 잃어가는 아주 기나긴 장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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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지구 대기권까지 비가 범람하고 태초의 그것처럼 고요한 가운데 우리는 빙하기 공룡처럼 서글퍼지는가! 아. 아. 성벽 기저로부터 비가 흘러넘친다. 생전에 거추장스러웠던 것들도 동동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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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손민지. 계속해서 자아탐험 중인 20대 여성 입니다. 이것저것 해보다가 지금은 원점으로 돌아와버린, 그래서 지구종말이나 해버렸으면 하고 바랬던 진취적 잉여. 여전히 무엇을 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찰나의 잔상이나 감정에 대한 글 쓰기만은 지속적으로, 습관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골방에서나 끄적이던 글을 처음으로 보내봄으로써, 현실과 이상사이의 괴리감을 조금이나마 좁혀보려는 노력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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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딧 기획, 발행 /

김종소리 이상형 @flucbluc 발행 / 2013. 1. 문의 / abraxaszine.com 디자인 /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의 저작권은 그것을 만든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무단으로 따라하시거나 사용하시면 큰일 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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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락사스 열여섯 번째 정말 종말? 2013.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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