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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말


더 없는 게 돈이 아닌가 싶습니다.

2013. 7. 26 웃통 까고 선풍기 앞에 앉아서 아발 김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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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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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말




돈 채희준 스물다섯살 계원예술대학교 heejoon1989@naver.com

직접 레터링한 글자로 ‘일정한 가치를 가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환 을 매개하는 수단’이라는 돈의 정의를 다르게 해석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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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 채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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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돈 / 채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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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돈 / 채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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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돈 / 채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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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증 이상준 @_ssazu

돈은 다 누가 가지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2.

영수증

영수증 / 이상준

# 17,000원

왜 숫자를 쓰면 천 단위마다 쉼표를 붙이는 걸까? 예전엔 엄청 헷갈 렸었어. 그게 딱히 숫자를 세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야. 그는 돈코츠라멘에 들어있는 차슈를 한 입 베어먹고 우물거 리며 말을 했다. 그녀는 그가 밥을 먹으면서 말하는 걸 좋아했다. 그 는 굉장히 수다스러워서 밥을 먹을 때에도 계속해서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아무리 입 안 가득 음식이 들어있어도 절대 입 밖 으로 튀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게 걱정이 되어서 그가 말 할 때마다 약간 조심하면서 쳐다보긴 했는데, 이젠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그래도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그가 저렇게 말할 때 대꾸를 해줘 야 한다는 점이다. 그녀는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영문 표기 때문일 거야. 영어에선 천 단위로 달라지기 때문 에 쉼표를 찍어서 구분하거든, 그게 우리 나라나 일본이나 중국에서 도 통용되는 거 아닐까 싶은데. 그는 그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거 리며 국물을 떠 먹었다. 살짝 짜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마늘 맛이 강한 것 같기도 하다. 그는 맛에 좀 까다로운 편이다. 하지만 그건 맛 의 차이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할 뿐이지 자신이 맛있다고 생각하 는 기준이 까다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는 며칠 전에 먹었던 다른 가게 의 라멘 맛을 떠올려보았다. 이것보단 조금 더 짜지만 마늘 맛은 훨 씬 덜 했고 조금 담백했던 것 같다. 그는 자극적인 맛을 좋아하지 않 지만, 이것 만큼은 이곳의 국물에서 느껴지는 자극적인 풍미가 마음 에 든다. 여기 맛있지? 그녀는 입에 있는 면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 덕거렸다.


를 저었다. 그녀는 그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추궁했다. 맞잖아, 왜 자 꾸 아니라고 해? 아니니까 아니라고 하지, 넌 왜 내 말을 안 믿는 거 야? 믿게끔 행동을 해야 믿지. 아니, 내가 뭘 어떻게 했다고. 뭘 어떻 게 안했으니까 그러는 거야. 그는 더 이상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의자 깊숙이 몸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보았다. 그녀 도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기본으로 나오는 프레즐 모양의 과자 를 하나 집었다. 커다란 소금이 박혀있는 것이 늘 마음에 들지 않았 다. 그대로 씹으면 분명히 너무 짤 게 분명하다. 그녀는 손으로 과자 에 붙은 소금을 털어냈다. 그리고 조금 깨물어 씹어 먹었다. 오독오 독. 하나를 다 먹고 손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었다. 맥주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뭐가. 왜. 또 왜. 그리고 그녀는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원래 오늘 비가 온다고 했 는데. 이번 주 내내 온다고 했어. 내일은 오려나. 어제 오고 오늘 안왔 으니까 내일은 오지 않을까. 비가 온다고 하니까, 반갑지도 않은 비를 기다리고 있는 꼴이 되었잖아, 마음에 안들어. 그러게 말이야. 그는 과자를 집어 한 입에 넣었다. 오독거리며 과자를 씹다가 다 삼키기 전 에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과자에 있는 소금을 다 삼키기 전에 맥주 를 들이키면 맥주의 맛과 소금의 맛이 섞여서 오묘한 맛이 났다. 그 는 그 맛을 좋아했다. 오물거리며 입 안에 있는 맥주 맛을 느끼다가 단 숨에 삼켰다. 목에 걸리는 탄산 때문에 인상을 찌뿌렸다. 그녀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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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는 웃으며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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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00원


2.

# 26,000원

영수증 / 이상준

그녀는 그의 잔에 소주를 가득 따랐다. 그는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 켰다. 그녀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빈 잔에 소주 를 따랐다. 그는 소주잔을 손에 가만히 쥐고 있었다. 차가운 소주가 잔에 채워지면서 소주잔도 동시에 차가워졌다. 온도의 변화를 느끼 며 가만히 기다렸다. 기다려야 하는 것은 없었다. 기다리고 싶은 것도 없었다.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대상이 있어야만 성립되는 개념 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대상을 아무것도 없이 비워놓고서도 기 다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는 가만히 기다렸다.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목이 조금 뻐근한 것 같았다. 목을 세차게 양 쪽으로 비틀자 뚜두둑 하며 뼛소리가 났다. 그녀는 그런 그를 무표정하게 바 라봤다. 그는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잠 금을 풀자 밝은 화면이 솟아올랐다. 스마트폰 메신저에 들어가니 자 신이 속해있는 여러 그룹에서 수많은 이야기들이 봐주길 기다리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의 대상은 내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한 이야기 들은 나에게 보여지기 위해서 기다림을 감수하고 있다. 나는 보지 않 아도 괜찮다. 하지만 그들의 의미는 내가 보는 것으로 성립되는 것이 다. 그는 다시 전화기의 잠금버튼을 눌렀다. 화면은 다시 액정의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배 안고파? 아니, 괜찮아. 그녀는 젓가락을 들었 다. 그녀는 젓가락질을 굉장히 잘한다. 다른 사람들이 젓가락질을 하 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본적으로 사회에서 가르치는 바람직한 젓가락질의 형태를 그대로 습득하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그녀의 젓 가락질을 논하기엔 부족하다. 그녀가 젓가락질을 할 때면 늘 어딘지 모르게 능숙하다는 생각이 든다. 군더더기가 없이 깔끔한 움직임으 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집어낸다. 놓치거나 떨어뜨리거나 하는 법이


없다. 그건 그녀의 신중한 성격이 반영된 탓도 있으리라. 그는 그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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젓가락질을 보며, 전혀 흐트러지지 않는 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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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를 바라보며 그녀는, 또 이렇게 나를 바라보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을 따라 눈을 마주치면, 그는 시선을 아래 로 떨어뜨렸다. 그녀의 어깨로 가슴으로 테이블로 그녀의 술 잔으로 그녀와 그 사이에 놓인 해물떡볶이로. 그는 소주병을 들어 그녀의 잔 을 채웠다. 그녀는 자신의 술 잔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잔에 담긴 소주를 마시고 다시 잔을 채웠다. 갈까? 그는 고개를 끄덕 였다. 이것만 마시고. 그래, 이건 내가 낼게. 그녀가 먼저 일어났다.

# 45,000원

숙박이세요? 묻는 직원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엘리베 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준특실밖에 없는데. 괜찮아요. 그는 카 드를 꺼내서 직원에게 건넸다. 일회용품은 천원 현금으로 주셔야 해 요. 그는 그녀를 쳐다봤다. 둘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지갑에서 천원 짜리 지폐를 한 장 꺼내서 직원에게 주었다. 직원이 건넨 객실카드에 는 702라고 적혀있었다. 몇 층이야? 그녀가 물었다. 7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녀가 먼저 타고 그가 탔다. 그녀는 7이라고 적힌 버튼 을 눌렀다. 주황색 불이 들어왔다. 엘리베이터가 닫히기 전에 다른 손 님들이 모텔 로비로 들어왔다. 콧수염을 기르고 단정하게 넘긴 머리 를 하고 청바지에 검은색 반팔티를 입은 남자와 하얀 반바지에 파란 색 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린 남자였다. 둘은 카운터로 다가가고 있었 고 엘리베이터 문은 닫혔다. 아까 들어온 손님 봤어? 아니, 왜? 게이 들인 것 같아. 왜? 남자 두 명이었거든. 아, 진짜? 난 못 봤어. 응, 왠지


2.

맞는 것 같아. 그는 고개를 들어 엘리베이터 층수가 바뀌는 것을 바라

영수증 / 이상준

보고 있었다. 그녀는 왠지 발끝만 쳐다보고 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 린다. 여기, 하며 그녀가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킨다. 그녀가 앞서고 그가 따라간다. 702라는 숫자에 붉은 색 불빛이 켜져 있다. 그가 객실 카드를 문고리 위에 갖다 대었다. 전자음을 나고 문고리를 내려 문을 열었다. 그녀가 먼저 들어갔다. 그는 문을 닫고 문을 잠근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니 그녀가 침대 위에 누워있다. 그는 가방을 내려놓고 그 녀 옆으로 가서 누웠다. 그녀가 리모콘을 들어서 텔레비전의 전원을 켰다. 추워서 벌벌 떨 정도로 에어컨을 켜고 싶어. 그는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조명을 전부 껐다. 텔레비전 안에서 연예인들이 뛰어다니 고 있다. 마치 네온사인이 켜져 있는 것처럼 방 안은 번쩍거린다. 그 녀도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그에게 이마를 맞대고 있다가 입을 맞췄 다. 먼저 씻을게. 그녀는 이불 밖으로 재빨리 빠져나갔다.

# 2,700원

담배는 왜 이렇게 독한 걸 피는 거야. 그는 그녀의 말을 듣고 웃었다. 뭘 웃어. 그래도 피지 말라고 하지 않는 게 용해서. 그녀는 기가 차다 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피지 말라고 하면 안필거야? 생각해볼 게. 피지마. 생각해볼게. 그는 손에 있는 말보로의 비닐을 벗겼다. 뚜 껑을 열고 은박 종이도 뜯어냈다. 비닐과 종이를 한 손에 움켜쥐고 한 개피를 꺼냈다. 피고 가자. 그는 길가에 건물 사이로 살짝 들어가 건 물벽에 몸을 기댔다. 메고 있는 크로스백에 손을 넣어서 뒤적이다가 성냥을 꺼냈다. 그는 늘 성냥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녀도 성냥이 타 는 냄새를 좋아했다. 성냥을 좋아한다는 것은 흔한 이야기다. 그는 그


런 흔해 빠진 취향에 대해서 그녀를 타박한 적이 있다. 그 이후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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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는 성냥을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 그리고 담배를 피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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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소리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인해 늘 손해 보는 건 그녀였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첫 모금을 깊이 빨아들이고 천천히 내뱉 었다. 그녀는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입에서 코에서 연기가 피어나왔 다. 이거 피고 피지마. 생각해 본다니까. 어차피 많이 피는 것도 아니 잖아. 갑자기 왜 그래. 갑자기 아니야. 나한텐 갑자기야. 그럼 내가 담 배피지 말라고 말 할 거라고 미리 예고라도 해놓고 말해야 했어? 그 런 얘기가 아니라 아무 말도 안하고 있다가 왜 갑자기 끊으라고 하냐 는 거지. 끊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계속. 싫은 티를 내지도 않았 잖아. 싫은 티를 내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랬지. 근데 지 금은 왜 그러는 거야? 못 참겠으니까. 나를? 아니, 담배를. 담배를 피 는 나를? 아니, 담배를. 그는 오른 손 검지와 엄지 사이에 있는 담배 를 가만히 바라봤다. 반 정도 타 들어가서 파란 연기를 내뿜고 있었 다. 담배를 끊고 싶은 마음은 없다. 끊을 수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늘 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외부의 제약에 의한 금욕은 늘 어떻게든 터지게 되어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녀는 그를 등지고 서있었다. 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는 건물 벽에 담배를 비벼서 불을 껐다. 쓰레기봉지가 모여있는 곳으 로 꽁초를 던졌다. 손을 털고 한숨을 쉬었다. 왜 한숨을 쉬어. 일단 줄 이는 것부터 해볼게. 알았어. 그가 앞장서 걸었다. 그녀는 그를 따라 가서 팔짱을 꼈다.

# 6,500원


2.

왜 하나만 사? 그렇다고 두 개 사면 정없어 보이잖아. 그래도 비가 이

영수증 / 이상준

렇게 오는데 하나만 사면 어떡해. 그냥 같이 쓰면 되지. 이걸로 같이 쓰면 다 젖을 거 아냐. 그녀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그럼 하 나 더 사? 몰라. 그럼 그냥 쓰자. 옷 젖는 거 싫은데. 그는 어쩌지도 못 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오른팔로 그녀를 감싸고 왼 손으로 그녀에게 우산을 씌워주었다. 붙지마. 그녀는 툴툴거리며 말했다. 그 는 모른 척하고 걸었다. 비 오는 게 제일 싫어. 그녀가 말했다.

# 47,500원

그는 조금 힘들다고 생각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마셔버렸다. 그 녀도 이미 취한 것 같다. 하지만 둘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늘 브레이크를 밟은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은 어쩐지 모두 브레이크 패 달에서 발을 떼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차갑게 식은 오뎅탕을 숟 가락으로 뒤적거린다. 여기요, 이것 좀 데워주세요. 종업원은 다가와 식은 오뎅탕 냄비를 들고 주방으로 사라진다. 그는 담배 한 개피를 꺼 내 불을 붙인다. 깊게 한 모금을 빨아들였다. 머리가 지끈 거린다. 소 주가 연기를 타고 머릿 속으로 파고드는 기분이다. 묘한 어지럼증을 느낀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고 담 배를 들고 있다. 그녀는 그의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를 빼앗았다. 그 리고 한 모금 빨았다. 후우- 하며 길게 연기를 내뱉었다. 그리고 한 모금 더 빨았다. 후우우- 하며 전보다 더 길게 연기를 내뱉었다. 그리 고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서 껐다. 맛없어. 맛으로 피는 거 아니야. 그 럼 뭐 때문에 피는 건데? 그런 게 있어. 있긴 뭐가 있어, 아무것도 없 으면서. 그녀는 물잔에 찬 물을 따랐다. 그리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후우- 하고 그가 한숨을 쉬었다.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조금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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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싫은 것도 참 많았다. 싫은 것들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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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좋은 것도 있었다. 하지만 싫어서 좋다고 말을 못했다. 그런 것들 이 쌓이고 쌓였다. 그는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나 화장실 좀. 그녀는 일어나는 그를 바라봤다. 좋아하는 것들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 다가 늘 싫어하는 것들을 발견했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들 때문에 싫 어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집에 가고 싶어졌다. 종업원을 불러 서 아까 보낸 오뎅탕 데우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갑에 서 카드를 꺼내서 계산해달라고 건넸다. 그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소 주병을 보니 두 잔은 대충 될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의 잔과 그의 잔에 술을 따랐다. 이것만 마시고 가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 800원

배고프면 밥을 먹지. 이게 밥이지 뭐. 삼각김밥 하나 먹겠다고 여기 앉아있으면 싫어해. 싫어하라지 뭐. 그녀는 오랜만에 신은 하이힐이 불편해서 정강이를 계속 주물렀다. 넌 안먹어? 나 약속 있어. 그는 삼 각김밥을 한 입 더 베어물었다. 바삭, 하면서 김이 부서졌다. 우물우 물 씹으며 사람들이 걷는 것을 바라봤다. 물도 안마시냐. 그는 그녀를 바라봤다. 고개를 끄덕이지 않아도 긍정은 그녀에게 전달되겠지. 그 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하지말라고 할 수 없었다. 하라는 말과 하지말 라는 말은 한끝차이인데, 그 한끝차이를 건너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시간이 눅눅하면서도 바삭한 삼각김밥의 김과 같았다. 구두를 신고 정장을 입은 그녀가 어색하다. 세수는 했냐. 응, 세수는. 그녀는 한심 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녀는 늘 일부러 그런 표정을 짓는


2.

다. 불쾌하라고, 기분 나쁘라고. 그럼 그는 기분나쁜 티를 내지 않는

영수증 / 이상준

다. 그녀는 그게 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자기 기분이 나빴다. 꼴보기 싫어 진짜. 그는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진짜 마음에 안들 어, 정말. 그는 더 크게 웃었다, 밥알이 다 튀어나올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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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돈, 돈! 장은혜 jjangpa@gmail.com 카톡 Eune306

“여섯 가지 이야기 중 제 얘기는 뭘까요?”



3.

돈, 돈, 돈!

돈, 돈, 돈! / 장은혜

Q

예전에 만났던 이성들 중에 돈하면 떠오르는 사람 있어? 돈 에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가진 이성이라던가.

지인1

음, 글쎄. 난 딱히 없었던 거 같은데? 굳이 말하자면 내 생일

선물 사줄 돈이 없어서 선물 주기를 계속 미루기만 하다가 결국 헤 어져버린 예전 남자친구 정도?

지인2

난 예전 유학하던 시절에 잠깐 동거했던 오빠가 말이야. 공

동생활비가 떨어져서 당장 밥 먹을 돈도 없는데 남은 돈 싹싹 긁어 서 자기 담배부터 사던 게 기억이 나. 내가 굶든 말든 일단은 자기 담배가 제일 우선이었던 거지. 결국엔 내가 친구로부터 빌려온 돈 으로 우린 며칠을 보내야 했었어. 그 돈은 갚은 건? 물론 나였지. 쓸 땐 공용이었어도 갚을 땐 또 그게 아닌가 보더라. 내 친구한테 빌린 돈은 내가 갚아야 된다나 뭐래나.

지인3

옛날에 내 첫사랑 오빠 기억나니? 나한테 선물도 많이 해주

고 군대 가있을 땐 나 혼자 남겨두고 간 게 미안하다며 가끔 용돈


도 보내주고 했던 그 오빠 말이야.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고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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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엔 친구들이 많이 부러워도 하고 그랬었는데 실은 그 오빠,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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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하면 내게 하던 말이 있었어. 자기와 헤어지고 싶으면 우선 내게 쓴 삼천만원을 갚아야 될 거라는 말말이야. 내가 아무리 받은 게 많 았어도 무슨 돈이 삼천만원씩이나 되냐고 물었더니 그 오빠 하는 말이 내게 쓴 통화비, 데이트 비용, 선물 값, 그리고 정신적 피해보 상금과 이자까지 붙인 값이래.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그 뒤로 뒷 말 듣기 싫어서 일년동안 무조건 내가 돈을 썼어. 고가의 선물들도 하고 말이야. 그러다 결국엔 헤어지게 됐는데 내가 일년간 쓴 돈으 로는 영 부족하다 느꼈는지 내가 빌려줬던 노트북도 돌려주지 않 고 그냥 연락을 끊어버리더라. 끝내 못 받았어. 암튼 내가 그 뒤로 는 남자 만날 때 무조건 더치페이 하잖아. 남자 자존심 때문이라는 말, 사랑해서 내게 쓰는 돈은 하나도 아깝지 않다는 말 이제는 절대 로 안 믿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언제 또 빚이 생겨날지 모르는 일 이니 말이야.

지인4

이건 내 친구가 해준 이야긴데, 한 때 내 친구가 도박에 엄청

빠져 있었대. 그리고 그 당시 만나던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날 실수로 도박 사실을 여자친구에게 들켜버린 거야. 그 여자친구는 당연히 남자친구인 내 친구에게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고 내 친구 는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도박을 도저히 끊을 수가 없어 며칠을 괴 로워해야만 했었대. 그러다 하루는 도박에서 크게 돈을 따게 됐는 데 여자친구는 어김없이 또 잔소리를 하기 시작하더래. 참다못한 친구는 도박으로 딴 돈 중 절반을 여자친구에게 건네주었는데 글 쎄 여자친구가 마지못한 듯 그 돈을 받아 챙기더래. 그리고 더 웃긴


3.

건 그 후로는 친구가 크게 돈을 잃지만 않으면 잔소리도 하지 않더

돈, 돈, 돈! / 장은혜

래. 친구는 잔소리를 듣지 않게 된 것에 안심했지만 왠지 여자친구 에 대한 마음이 살짝 식어가는 게 느껴지더래. 바른 사람인 척 잔소 리 해대던 여자친구도 결국 돈 앞에선 마음이 바뀌어버린 것에 실 망해버린 거였던 거지.

지인5

사귀었던 건 아니고 한때 내가 짝사랑했던 누나가 있었어.

사실 그 누난 내 눈에만 예뻐 보였던 건 아니고 누가 봐도 ‘아 정말 예쁘다.’라고 한 번 더 쳐다볼 만큼 예쁜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어. 그러니 당연히 인기도 많았고, 주위에 꼬여드는 남자들도 하나 둘 이 아니었지. 하지만 그런 누나에게도 내게 연락을 먼저 해 올 일이 몇 번 있었어. 그건 바로 술값이 필요할 때였지. 누나가 불러서 나 갈 때면 항상 누나 옆에는 이미 술에 취한 누나 친구들이 함께 하 고 있었어. 누나 부탁으로 내 친구들도 데리고 나갈 때면 누나 친구 들 역시 내 친구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거나 애교를 부리곤 했었 는데 아무 것도 모르는 내 친구들은 그저 내게 고맙다는 말만 해댈 뿐이었어. 하지만 결국 내 친구들과 그 누나 친구들이 잘 되는 법은 한 번도 없었지. 왜냐면 다들 남자친구가 있거나 남자친구가 아닌 돈줄을 찾는 사람들뿐 이었으니까 말이야. 실제로 내 친구들 중 몇 은 내 대신 그 누나들의 술값을 내주러 나간 적도 있었대. 정말 몹 쓸 누나들이었지. 친구들 역시 누나들이 좋아서 나간 거긴 하겠지 만 나뿐만 아니라 내 친구들한테 까지 호구 역할을(내 입으로 호구 라고 말하니 정말 속이 쓰린다...) 시켰다니, 후에 친구에게 그 얘기 를 듣고 나서 얼마나 화가 나던지 정말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었어. 지금생각해보면 누나와 누나 친구들은 당시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고 있거나 아직 대학을 다니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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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항상 돈이 별로 없었던 거 같았어. 그에 비해 나나 내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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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대부분 고등학교 졸업 후 계속 돈을 벌고 있던 상태였으니까, 누 나들이 술을 먹다가 돈이 모자라거나 비싼 술, 안주가 먹고 싶을 때 면 어김없이 내게 연락을 하곤 했었던 거지. 보통 한 달에 한 번 꼴 로 연락이 오곤 했었는데 그 외에 다른 날에는 또 다른 남자들에게 연락해서 술을 얻어먹거나 하는 거 같았어. 암튼 누나에게 연락이 와서 술자리에 나갈 때면 누나와 누나 친구들이 시켜놓았거나 시 키기 시작하는 안주와 술값들을 언제나 내가 계산을 해야만 했었 어. 누나가 날 진심으로 좋아하거나 해서 연락한 게 아니라는 걸 알 면서도 그 자리에 계속 나갈 수밖에 없었던 건, 술자리가 끝난 후 누나를 집에 데려다 주는 동안 단둘이 함께 하는 시간들 때문이었 어. 가끔이긴 했지만 어떨 땐 정말 내게 마음이 있는 거처럼 따뜻한 눈길을 보내줄 때도 있었고, 또 어떨 땐 술자리에서와는 다른 느낌 으로 내게 속마음을 이야기할 때도 있었지. 그러다 우리가 마지막 으로 만났던 날에는 술에 취해 내게 키스를 하기도 했었어. 술에 취 해 그러는 건 줄 알면서도 나는 그 키스를 받고 또 즐길 수밖에 없 더라. 한심하게도 하루하루가 더 해갈수록 나는 더 커져만 가는 기 대를 겨우겨우 억눌러가며 그 누나의 연락만을 기다리게 되었었어. 그 누나만 얻을 수 있다면 이까짓 돈 별로 아깝지도 않다고 생각했 었으니 말이야. 하지만 내가 그 누나를 얻게 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 지 않았어. 시간이 지나 누나 친구들이 하나 둘씩 취직을 하게 되고 누나 역시 나보다 훨씬 돈 많고 능력 좋은 남자친구를 만나게 되면 서 더 이상 내게 연락이 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지. 그 뒤로 내가 먼저 전화를 걸어 보기도 했는데 한 번도 연락을 받아준 적은 없었어.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소식도 아직 누나 친구와 연락


3.

중이던 내 친구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돈, 돈, 돈! / 장은혜

왜 그렇게 바보같았는지 모르겠어. 그 뒤로 지금은 여자친구가 아 닌 여자들에게는 절대로 돈을 쓰지 않아.

지인6

내가 유학시절에 만났던 남자친구가 있어. 고등학교 때 만

나 대학시절 꼬박을 만났으니 내 인생에서 정말 오랜 기간을 함께 한 남자친구이기도 했지. 우린 가난해서 그럴듯한 데이트를 하지 도 못 했었고, 각자 학교 수업과 아르바이트 때문에 많은 일상을 함께 보내지도 못했었지만 오랜 시간 만난 만큼 서로에게 대해 모 르는 것이 없었고 어떨 땐 가족보다 더 가족 같고 또 오랜 친구보 다 더 친한 친구처럼 편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었어. 돈이 없고 밥 이 없을 땐 같이 한국에서 가족들이 보내준 커피 믹스에 건빵을 타 서 비벼먹기도 했고, 한 번은 가장 싼 양배추를 사 생으로 씹어 먹 으며 배를 채우다 둘 다 탈이 나서 병원 신세를 져야한 적이 있기 도 했었어.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겐 추억이었고 또 서로를 더 끈끈하게 해주는 무엇이기도 했었어. 그러다 우리 부모님이 갑자 기 편찮아지면서 내가 아르바이트를 세 개로 늘여야만 했을 땐 집 으로 돌아와 걔 옆에서 편하게 누워 자는 일이 내 유일한 안식이었 고, 무뚝뚝하긴 하지만 내가 힘들고 지쳐 집으로 돌아올 때면 항상 같은 자리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그 아이가 있어서 난 외롭고 힘들 었던 그 시기를 그나마 잘 견뎌낼 수 있기도 했었어. 그 아이는 당 시 편의점 아르바이트와 2주에 한 번 한국어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과외를 하러 가는 곳이 좀 멀어 항상 주말에 1박 2 일로 다녀오곤 했었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곳에 가면 가족들 틈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며 좋아하는 남자친구


를 보며 나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곤 했었지. 그리고 어쨌든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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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바이트 때문에 정신이 없던 터라 남자친구와 그럴듯한 주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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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낼 수도 없었기 때문에 조금 서운하긴 하지만 남자친구만이라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오면 좋지 라고 스스로를 달래곤 했었어. 그 러다 3학년이 되던 해에 남자친구가 군입대를 위해 한국으로 돌아 가게 되면서 남자친구는 하고 있던 아르바이트도 다 그만두게 되 었는데 내게 소개시켜줄 줄 알았던 한국어과외 자리는 끝내 넘겨 주지 않은 채 그냥 그대로 귀국해버렸었어. 이번 역시 서운하긴 했 지만 어차피 지금 아르바이트 하고 있는 가게에서 자리를 잡고 일 을 잘 해오던 참이었기 때문에 과외 일은 그냥 잊기로 해버렸지. 남 자친구가 한국으로 돌아 가버리자 나는 밀려오는 외로움을 견디느 라 사실 다른 생각은 떠올리기도 힘들었었어. 여전히 바쁜 아르바 이트에, 귀가할 때면 어김없이 느껴지는 외로움에 하루하루가 힘 들었었고 그렇게 견디다 보니 어느덧 2년이 훌쩍 지나 졸업이 눈앞 에 다가와 있었어. 취업을 해야만 했지만 편찮으신 부모님 때문에 취업은 미루고 일단 귀국을 해야 했고 그쯤 군에서 나온 남자친구 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게 되었어. 2년을 떨어져 지냈던 데다 또 몇 년을 더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우리는 머지않아 헤어지게 되었고 그 후 몇 개월 뒤 나는 아직 재학 중이던 친구에게 느닷없 이 메일 한 통을 받게 되었었어. 학교에 다니던 당시에는 친했지만 졸업 후 연락을 하지 않았던 친구로부터 온 메일이었기 때문에 반 갑기도 했었고 또 그 이유가 조금 궁금하기도 해서 얼른 메일을 열 어보게 되었지.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그 안에는 정말 말도 안 되는 내용들이 담겨져 있었어. 바로 학교로 돌아간 전 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였지. 친구의 메일에 의하면, 친구는 내 전 남자친구와 친구 사이인 자신의 남자친구로부터 어떤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


3.

는데 학교에 다니던 당시 나와 친했던 친구는 이 말을 전해야할 지

돈, 돈, 돈! / 장은혜

말아야할 지를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메일을 보내게 되었다고 했 어. 내용인즉슨, 자신의 남자친구가 말하길 내 전 남자친구가 사실 은 한국어 과외가 아닌 몸을 파는 일을 하고 있었고 1박 2일로 집 을 떠날 때면 그 여자와 함께 밤을 보내곤 했던 거였다고 했어. 전 남자친구가 과외해주는 여자라며 내게 설명했던 대로 그 여자는 가정이 있는 유부녀였는데 남편이 집을 비우는 날이면 내 전 남자 친구를 불러 이틀을 함께 보내고 그 대가로 돈을 얼마씩 지불을 하 곤 했었고 전 남자친구는 학교에 복학한 후 다시 그 여자와 연락을 주고 받으며 그 관계를 이어오고 있는 중이라고 했어. 내가 자신의 친구와 오랜 연인사이였다는 사실을 몰랐던 친구의 남자친구는 그 사실을 내 친구에게 그대로 전하게 되었고 내 친구는 아무 것도 모 른 채 그저 내 전 남자친구를 정말 좋은 남자친구로만 기억하는 내 가 안타까워 이 메일을 쓰게 되었다고 마지막에 덧붙여 놓았었어. 난 메일을 읽고 난 후 한동안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었어. 일단 너무 놀라웠고 믿기지가 않았지. 시간이 지나자 내 눈에선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고 이 메일을 보내준 내 친구 가 원망스러워 지기 시작했어. 그 사실을 혼자서만 간직하지 않은 전 남자친구가 하염없이 미웠고 그에게 속아온 사실도 분했고 속 아버린 나도 한심해서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았음에도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었어. 돈 때문에 몸을 파는 여자들은 봤어도 돈 때문에 몸을 파는 남자가 실제로 내 주위에 있었다니. 그것도 내가 오랜 시간 믿고 사랑해온 전 남자친구가 그런 사람이었다니 배신 감에 치가 떨려 정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어. 그와 함께 지낸 시 간이 저주스러웠고 그 옆에 누워있을 때면 느껴지던 그 촉감이 더 럽게 느껴졌으며 그렇게 벌어온 돈으로 함께 사먹었던 모든 음식


들이 역겹게만 느껴졌었어. 정말 웃기지 않아? 돈 때문에 많이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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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하긴 했었지만 그리고 나는 실제로 아르바이트를 세, 네 개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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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힘이 들어 쓰러진 적도 있긴 했었지만 그렇게 번 돈 때문에 부끄러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었어. 유학 가면 힘들어서 몸 팔며 돈 번다는 여자들 이야기를 들을 때면 아무리 힘들어도 양심은 팔 지 말아야지, 내 자존심, 내 몸을 함부로 하진 말아야지 라고 다짐 하며 하루하루를 견뎌왔었어. 근데 내가 쓴 돈 중에 남자친구가 몸 을 팔아 벌어온 돈이 있었다니 그런 남자에게 의지를 하며 몇 년간 을 지내왔었다고 생각하니 많은 생각들이 떠올라 도무지 견딜 수 가 없더라. 이건 정말 다양한 방면에서 배신을 당한 기분이었어. 그 메일을 읽고 한참을 분해하며 울고 화를 내다가 결국엔 전 남자친 구에게 전화를 걸어 이 이야기를 전했더니 그 아이 처음엔 조금 당 황한 듯해 보였지만 이내 덤덤한 목소리로 미안하다 말하더라. 그 러곤 하는 말이 자기는 아무리 돈이 없어도 나처럼 미련하게 쓰러 져가며 일을 하지는 못 하겠대. 그리고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그 여 자가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정신없고 이상한 여자는 아니 라며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고 불쌍한 사람이라면서 그래서 자기 는 그 일을 그만 둘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 거야. 그러면서 하는 말 이 지난 시간은 미안하지만 이제는 헤어진 사이니 자기가 사는 방 식에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곤 전화를 먼저 끊어버리더라. 그 일이 있고 난 후 내가 제정신을 차리기까지 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던 거 같아. 그 아이 덕분에 한동안은 그 누구를 믿을 수도 없게 되었고 왠지 모를 회의감에 의욕마저 모두 상실해버리게 되었었지. 지금은 그래도 많이 나아졌어. 지금은 그 냥 운이 나빴었던 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말이야. 하지만 앞으 론 내가 바쁘다는 이유로 사람을 무작정 믿고 보는 일은 하지 않을


3.

거야. 그리고 아무리 가난하다 하더라도 나만큼은 절대 그처럼 살

돈, 돈, 돈! / 장은혜

지 말자고 다짐했어. 돈? 물론 중요하지. 하지만 내게 돈은 결코 나 보다 중요하진 않아. 난 돈 때문에 자신을 내던지는 그를 보며 돈이 라면 무조건 최고라는 사람들 모두를 혐오하게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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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털털이 다섯 명이 모였다. 연말에만 오던 약장수 felala 홍대 판화과 졸업 현재 먹고 살고자 어떤 회사 근무 중 felala.net felala@felala.net







당신 인생의 이야기 mari kim @now wehere uradrugtome@gmail.com

사람 나고 돈 났지 라는데 돈 나고 사람 난 것 같은 건 왜죠



5.

당신 인생의 이야기

당신 인생의 이야기 / mari kim

#1

“이정도 답변이면 충분하죠?” (노트북을 켜고 인터넷 쇼핑 사이트에 접속한다. 책상에 설치된 카메 라가 그녀를 찍고 있다. 뒷모습, 외출한 준비를 마친 친구가 문 앞에 서 구두를 꺼내 신는 소리가 들린다.) “야, 늦지 말고 나와.” (시선은 여전히 노트북에) “알았어.” (문 밖으로 나가는 소리, 문 닫히는 소리) “아, 그게 아직 질문이 조금 남아있기는 한데” 여자 뒤 의자에 앉아있는 기자의 질문(소리만) “올 후반 계획은 어떻게 되요?” (책상 위 놓인 달력을 힐끔 쳐다본다) “아직 확실한 계획은 없어요. 일단 벌어 놓은 돈으로 조금 쉬다가, 저 도 사람인데 쉬어야 일을 하죠. (웃음)” “지금은 뭘 보고 있는 건가요?” “아, 그냥. 올 후반에 이자벨마랑 콜라보 나온다고 해서 그거 잠깐 보 고, 여름에 어디 놀러 가면 좋을지 보고, 기자님 여름에 페스티벌 어 디가 좋을 것 같아요? 도통 고민이야.” “아, 저는 그쪽은 잘 몰라서” “사람이 노는데 박하면 일하기도 힘들지 않아요? 기자님은 일이 그 렇게 좋은가?(웃음)” (수첩 뒤적이는 소리)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제가 놀러갈 처지는 아니고 해서”


“아, 그러시구나. 아 그런데 진짜 고민이네, 기자님 이 옷 어때요? 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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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째 고민 중인데 둘 중에 뭐가 나을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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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터 화면 클로즈업. 스크롤 내리는 소리. 기자 뒷모습이 잡힌다.) “아, 두 번째 옷이 더 잘 어울리실 것 같은데” (머리를 긁적인다.) “어울리기야 둘 다 어울리죠, 아 그냥 둘 다 살까봐.” (결제창을 띄우고 주문한다. 여자, 뒤돌아 앉는다.) “다 끝난 거 맞죠? 인터뷰 기사는 언제 나와요?” “아마 다음 달쯤 나올 겁니다.” “얼굴 나오고 그런 거 없는 거 맞죠?” “그럼요.” “돈은 언제 입금 되요? 얼마라고 했더라?” “아, 그게 아마 기사 나오고 다음 달에 입금 될 거 에요. 십오만원 정 도” “우리 인터뷰 몇 시간 했더라? 테이블 하나 뛰어도 그것보단 훨씬 많 이 버는데” “아...” “무튼 저도 이제 준비하고 나가봐야 되니까.” “아, 네. 네.” (기자 문 쪽으로 걸어간다. 여자의 배웅을 받고 나와 문 앞에서 수첩 을 펼친다. 수첩 클로즈업. 날짜아래 적힌 기사 타이틀. 여대생, 밤거 리로 나가다.)

#2

(상담실로 보이는 빈 방 소파에 남자 앉아있다. 경찰과 의사 가운을


5.

입은 남자 차트를 훑어보며 들어와 맞은편에 앉음)

당신 인생의 이야기 / mari kim

“검사는 잘 끝났구요. 상황을 처음부터 다시 들어보죠.” (남자 손깍지를 끼고 엄지를 계속 움직인다.) (경찰, 쥐고 있던 볼펜으로 테이블을 탁탁 두드린 뒤 남자의 눈을 응 시.) “그러니까 길 가던 행인을 때리고 지갑에서 삼만원을 뺏어 도망갔다 는 게 맞습니까?” “네.” (차트를 살피던 의사 이야기 한다.)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혹시 갑자기 화가 난다거나 감 정을 주체할 수 없는 상황이 종종 일어나십니까?” (남자 손깍지를 풀고 소파에 눕듯이 기대 앉아 고개를 숙인다. 옆에 앉아있는 경찰이 남자를 빤히 바라본다.) “대답을 잘 해 주셔야 정상참작이 가능합니다.” (시선이 경찰에게 향한다.) “어떻게 대답하는 게 잘 대답하는 겁니까?” “의사양반한테 얘기를 들어보니 공격성이나 감정기복의 문제는 아 닌 것으로 보이는데, 본인의 주장이나 주변인의 진술이 도움이 될 수 도 있으니까.” (남자, 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한 두 번이 아니라서 이번에는 어려울 확률이 높아요. 무슨 말이든 하시는 게 도움이 될 겁니다.” (의사가 차트를 재확인 한 후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남자 허공을 응 시, 음, 그러니까, 하면서 말을 뗀다.) “돈이, 필요했습니다.” “돈이 필요하면 벌면 되지 왜 사람을 때려서 뺏었습니까?”


“돈을 벌고자 하는 의욕이 없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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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돈을 어디에 쓰려고 했던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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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다시 차트를 들고 대화 기록을 적는다.) “약을, 사려고 했습니다.” (경찰이 의심어린 눈으로 남자를 바라본다.) “무슨 약을?” “신경안정제나 수면제요.” “불면증이나 정신질환이 있습니까?” “아니요.” “그런데 왜 약을 사려고 한 겁니까?” “죽으려구요.” (의사, 경찰에게 귓속말을 한다. 경찰, 담당서에 문자를 보낸다. 핸드 폰 클로즈업. 단순 폭행 및 절도. 연행하겠음)

문제.

남과 여가 바라보는 돈에 대한 시각을 서술한 뒤 (1) 당신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금액은 얼마인지 서술하시오. (2) 보편적 답안은 피할 것. 예시 : 물가상승률을 고려하여 내게는 15-20억 가량이 필요하다. 집과 차를 사야하며 먹고 사는데 쓸 돈이 있어야 하고 아이가 생기면 키워야 하기 때문


ㄷㅗㄴ -_xv 남학생 wizard-_xv@hanmail.net

돈 위에서 사람은 좀 바뀌 잖아요. 누구는 돈 때문에 비겁해지고, 누구는 돈 때문 에 억울하게 죽지만, 누구 는 운 좋게 돈을 의심하기 시작해요. 또 다들 흐릿하게 나마 알고는 있어요. 돈은 어딘가 이상하다는 사실을요. 보통, 뭘 모르는 지 깨닫는 일이 참 중요하 다지만, 사실 뭘 아는지 깨닫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 각합니다...



6.

ㄷㅗㄴ

ㄷ ㅗ ㄴ / - - xv

그가 뛰어올랐다. 몸을 낮추고, 방향을 정한 뒤, 뒷다리를 충분히 굽 힌 다음, 그렇게 뛰어올랐다. 땅을 박차고, 자신의 몸 수십 배는 될 거 리를 한 번에 뛰어올랐다. 마치 벼룩처럼. 벼룩이 벼룩처럼 뛴다는 것 이 얼마나 당연한 일인가. 그러나 벼룩처럼 살지 못한 벼룩에게, 이보 다 더 영광스러운 말이 어딨겠는가. 그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타자기 위에 수십 마리 벌레들이 득시글 거렸다. 어울리지 않게 많은 역사를 가진 타자기와 그 위에서 얻은 삶 의 더께들이 보였다. 죽기 직전에는 다들 그렇다지만, 그는 모든 기억 을 떠올릴 필요가 없다. 그는 삶이 변하기 시작한 사흘 전부터의 삶 만 떠올릴 뿐이었다.

첫째 날

모든 창문이 닫혀 있는 거실이다. 창틀에는 벌레 주검이 수북하고, 이 중 창 사이에는 주인 없는 거미줄이 먼지만 잔뜩 잡고 있었다. 바닥 에는 먼지가 자국눈처럼 쌓여 있었다. 눈에 띄는 사물 역시 뽀얀 먼 지를 입고 있었다. 집은 하나같이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오랫동안 손 을 타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거실 책상 한가운데 타자기 하나가 놓여있다. 타자기는 다른 곳에서 막 옮겨진 물건인 듯 깨끗하다. 타자기에 꽂힌 종이가 한 칸 한 칸씩 옆으로 움직였다. 활자틀이 먹띠를 때리는 소리가 거실을 꽉 매웠다. 그러다 땡 하는 소리가 나면, 종이는 시작점으로 되돌아갔다.


타자기 위에는 놀랍게도, 수십 마리의 벼룩, 개미, 그리고 바퀴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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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벼룩은 글쇠 하나하나마다 한 마리씩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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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위에서 제자리 뛰기를 했다. 개미는 그 위에 줄지어 서 있었다. 바 퀴는 타자기의 양 끝, 줄바꿈 손잡이, 그리고 눈금자 위에서 나머지를 둘러싸고 있었다.

한참 동안 똑같은 작업이 이어졌다. 벼룩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 했다. 그래도 작업은 멈추지 않았다. 글쇠 사이로 개미들이 뛰어들어 쓰러진 벼룩을 물어다 날랐다. 타자기 밑에는 예비 벼룩들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 맨 앞줄에 있는 벼룩들이 빈자리로 점프했다. 갑자기 눈금자 위에 서 있던 바퀴가 쒸익 소리를 냈다. 가장 덩치가 큰 바퀴였다. 종이를 바라보던 그가 돌아서 벼룩들을 보았다. 벼룩들 이 일제히 동작을 멈추었다.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박자를 놓친 것이 었다. 화면에는 ‘ㄷ너’라는 오타가 있었다. 그가 ‘ㄷ’과 ‘ㄴ’ 위의 벼룩을 무 섭게 노려봤다. ‘ㄷ’ 벼룩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가득했다. ‘ㄴ’ 벼룩 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억지로 버티고 있었다. “너였어, 이 낡은 놈!” 바퀴가 ‘ㄷ’ 벼룩에게 채찍을 휘갈겼다. 채찍은 벼룩의 가슴에 적중 했다. 벼룩은 가슴이 터졌고, 그대로 쓰러졌다. 기다리던 개미들이 일 사불란하게 들어와 벼룩을 실어갔다. 때맞춰 호루라기가 울렸다. 손 잡이 위에 있던 바퀴벌레의 호루라기였다. 눈금자 위의 바퀴가 내려왔다. 타자기 양쪽 끝에서 지휘를 맡은 두 바퀴가 다시 한 번 호루라기를 불었다. 동시에 손잡이 위에서 문장 을 말하던 바퀴도 내려왔다. 10시간에 걸친 원고작업이 끝나는 순간 이었다.


6.

“제군들, 오늘도 아주 고생이 많았다. 몇몇 동료의 부주의로 작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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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뎠지만, 나머지는 훌륭했다. 힘든 일인 줄 알지만, 이 일을 하는 이 유를 잊어선 안 된다. 가족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쓰고 또 써야 한다. 밟고 또 밟아야 한다. 뛰고 또 뛰어야 한다!” 가장 큰 바퀴가 말했다. 그는 종이 앞 눈금자 위에서 오타를 감시하는 사령관바퀴였다. “예!” 벼룩들이 크게 대답했다. 조금 전까지 일한 벼룩들의 몸에서 김이 피 어올랐다. 어느새 개미들은 바퀴벌레들 뒤로 줄 서 있었다. 바퀴벌레 옆에 서 있던 늙은 벼룩 배부장이1) 가 나머지 벼룩 앞으로 나왔다. “부대- 차렷!” 그가 소리를 길게 뺐다. “사령관님께 대하여어- 경례!” “충! 성!” 바퀴가 벼룩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리의 바퀴벌레들이 재빠르게 부엌으로 돌아갔다. 배부장이가 그 뒤를 따라 돌아갔다. 배부장이는 앞잡이 벼룩이었다. 바퀴벌레들 가운데 가장 서열이 높 은 사령관바퀴의 수행을 맡았다. 그는 비대했다. 다른 벼룩보다 몸집 이 1.5배는 더 컸다. 검붉었던 몸은, 눈금자 위에서 햇볕을 너무 쬔 탓 에 희멀겋게 바래있었다. 피둥피둥하고 멀건데다 늙은 그였지만, 재 빠른 바퀴들에 맞추어 살다 보니 보기와는 달리 몸놀림이 민첩했다. 다만 너무 잘 먹은 탓에 배가 불쑥 나와 있었는데, 그래서 벼룩들은 그를 배부장나리라 일컬었다. 개미들이 뒷정리를 시작했다. 벼룩들은 거실 밑 쥐구멍으로 돌아갔 1)

배가 불룩하게 나온 사람.


다. 벼룩 탄은 쉴 새도 없이 거실 창틀에 올랐다. 그곳은 벼룩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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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다. 개미들이 벼룩의 주검을 이곳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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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아마 가슴이 터진 뒤 얼마 못 가 죽었을 것이다, 하고 탄이 생각했다. ‘ㄷ’ 위에 있던 벼룩이 탄의 아버지였다. 탄은 죽은 동료들 을 삼십 분이나 버릊어 헤집은 다음에야 아버지를 찾을 수 있었다. 아직 신경절은 살아있어서 그런지, 아버지의 다리가 규칙적으로 움 직였다. 그가 아버지의 터진 가슴에 두 발을 얹어보았다. 참아보려 힘 쓸 새도 없이 눈물이 터졌다.

“탄”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ㄴ’ 위에 서 있던 언둥이2)었다. 탄이 언둥이를 노려봤다. 그가 조금 더 다가오자, 탄이 소리를 지르며 그를 들이받았다. 둘은 같이 바닥에 쓰러졌다. 탄이 일어나 언둥이의 가슴팍을 밟았다. “미, 미안해” 언둥이가 간신히 말했다. “너무 무서웠어. 정말 미안해.” 몸싸움의 충격 탓에 죽은 몸들이 부서져 내렸다. “나도 알아” 탄이 말했다. 언둥이가 눈물을 흘렸다. “나도 알긴 알아” 그는 언둥이의 가슴팍에서 발을 뗐다. 그리고 다시 거실 쪽으로 발길 을 돌렸다. 일어선 언둥이가 탄에게 소리쳤다. “제때 뛰었는데 글쇠가 안 들어갔어! 그래서, 그래서 다시 뛰려는데 2)

어눌어눌 똑똑치 못한 사람.


6.

너희 아버지가 먼저 뛰었어. 아저씨랑 내가 눈이 마주쳤어. 둘 다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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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황했어. 근데 아저씨가 곧 날 보고 웃으시는 거야. 우리 어릴 때 같이 놀고 있으면, 너 데리러 올 때 짓던 그, 그 웃음 있잖아. 날 보고 그렇게 웃었다고! 멀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고개까지 끄덕이 셨는데...” 멀어지는 탄 뒤로 그의 목소리가 죽은 벼룩의 다리처럼 덜 덜 떨렸다.

쥐구멍에는 쥐들이 돌아와 있었다. 벼룩이 서너 마리씩 순서대로 잠 든 쥐의 몸에 들러붙어 피를 빨았다. 탄이 그쪽으로 가자 롱이 다가 왔다. “아빠 보고 온 거야?” “응” “언둥이 만났지?” “응” 롱은 더 묻지 않았다. 언둥이는 롱의 남자친구였다. 그러나 탄이 그를 두들겨 팼더라도, 롱은 탄을 원망할 수 없었다. 식사를 마친 탄과 롱은 어머니를 찾아갔다. 어머니는 누워있었다. 롱 이 쪼그려 앉아 어머니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어머니의 배에 귀를 갖 다 댔다. “이제 곧 나오죠?” “응. 너희 동생들이란다. 조금 있으면 일도 세 조로 나눠서 할 수 있 을 거야.” 탄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춥구나. 너도 이리 와서 엄마 좀 안아 줘, 어머니가 탄에게 말했다. 탄이 말없이 그녀의 몸에 팔을 둘렀다. 여자는 팔다리가 없었다. 다 병력양성사업 탓이었다. 그녀는 건강한 유전자를 지녔다는 까닭으로 출산에 몸을 바쳐야 했다. 일을 꾸민 건


배부장이였다. 어머니는 아름다웠다. 배부장이는 언제나 그녀를 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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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그러나 남편이 있었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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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벌레들에게, 좋은 몸을 지닌 벼룩이 출산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 했다. 바퀴들은 허락했고, 배부장이는 여자가 도망갈 수 없도록 개미 들을 시켜 여자의 팔다리를 뜯었다. 그는 좋은 씨를 준다는 구실로 여자를 마음껏 가질 수 있었다. 식사를 끝낸 벼룩들이 거실의 모포 사이사이로 들어갔다. 탄도 자리 를 잡고 누웠다. 그는 매일 두세 마리 벼룩들이 죽어나가는 걸 보아왔 다. 그러나 아버지의 어이없는 죽음은 그를 흔들었다. 너무나 다른 세 상이 되어 버렸다. 많은 삶의 끝이 처벌과 죽음으로 바뀐 세상이 되 어 버렸다. 쓰러질 때까지 일해야 했다. 쓰러지면 맞았다. 많이 뛰지 않고 높이 뛰면 맞았다. 실수해도 맞았다. 동시에 죽지 않을 만큼 맞 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 밖의 다른 형태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인과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살아있다면 반드시 일해야 했다. 타자기 위에서 뛰어야 했다. 무슨 말 을 쓰는지조차 모른 채, 그들은 바퀴가 시키는 대로 뛰었다. 인간들 의 문명을 이용해 벌레들의 번영을 이루는 꿈. 벼룩들은 그런 꿈을 꾼 일이 없었다. 어느 날 찾아온 바퀴벌레들이 그 큰일을 위해 벼룩들의 힘을 빌었다. 모두를 살리자고 한 그 일에 많은 벼룩이 죽어나가고, 탄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희생되었다. ‘이제야 이걸 알다니, 멍청한 벌 레 같으니라고!’ 뒤늦은 그의 통감은 곧 꿈에서 바퀴의 채찍으로 바 뀌었다. 채찍은 사정없이 그를 휘갈겼다.

둘째 날


6.

“기상! 기상!” 개미들이 기상을 알렸다. 벼룩들이 일어나서 양탄자 위

ㄷ ㅗ ㄴ / - - xv

로 올라왔다. 퉁퉁한 배부장이가 개미들과 함께 서 있었다. 벼룩들은 하나 둘 모여 네 줄 횡대로 줄을 잡았다. “아픈 병사 있나?”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당연히 아프지 않은 벼룩이 없었다. “그럼 오늘도 열심히 일들 하시고, 에 역시나, 바퀴벌레, 아니, 사령관 님 통제 잘 따라주시오. 이상.” 그는 두 개미와 함께 돌아갔다. 바퀴벌레는 네 마리였다. 한 마리는 눈금자 위에서 문장을 감시했다. 둘은 타자기 양 끝에서 벼룩들을 지휘했다. 나머지 한 명은 줄바꿈 손잡이 위에서 문장을 불렀다. 마치 누에고치가 실을 뽑고 베틀이 천 을 짜듯, 바퀴가 말을 쏟아내면 벼룩들이 움직여 문장을 만들었다. ‘현재 어머니는 의료보험 혜택이 적용되지 않는 병을 가지고 계시고, 아냐 아냐. 병을 앓으시고 라고 해 줘. 저는 직장을 잃고, 가만 보자, 손가락 하나쯤은 없다고 해야겠지? 야, 그런데 쉼표는 누가 넣으래? 잠깐, 넣는 게 더 좋군.’

그 앞의 날들

벌레들이 하는 일은 죽은 사람의 신상으로 기초생활수급을 받는 일 이었다. 일 년 전까지 그들이 있는 집에는 다 죽어가는 늙은 여자와 아들로 보이는 늙은 남자가 살았다. 여자는 침대 위에 꼼짝 않고 누워 지냈다. 방에서는 죽은 사람만이 낼 수 있는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다. 아들은 후각이 마비되었는지 정성스레 어미를 모시면서도 냄새를 없 애지 않았다. 그 탓에 벌레들이 몰려들었다.


남자는 청탁받은 글을 쓰는 프리랜서 기고가인 듯 보였다. 언젠가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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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 바퀴가, 그가 글을 쓸 때 엿본 일이 있는데, 얼마 뒤 그 글이 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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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옆에 놓인 신문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감은 항상 모 자란 듯, 살림은 언제나 모자랐다. 여자와 남자는 언제나 같은 반찬, 밥과 라면, 김치로 끼니를 때웠다. 어느 날 아침, 남자는 여느 때처럼 어머니의 밥상을 차려준 뒤, 타자 기에서 막 찍어낸 원고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섰다. 똑같은 옷 차림이었고 똑같은 날이었다. 남자의 구두 안에서 잠을 자던 꼽등이 가 미처 밀고 들어오는 남자의 발을 피하지 못해 죽은 일을 빼면 말 이다. 그날 뒤로 남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다음 날, 그리고 그 다음 날도 남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벌레들이 싱크대 뒤에서, 그리고 냉장 고 밑에서 거실까지 세력을 넓히는 동안에도 말이다. 며칠 뒤 여자는 살아있는 듯 죽었다. 언제나 죽은 듯 살아 있었으니, 사실 같아 보였다. 벌레들이 냄새를 맡고 몰려들었다. 처음엔 눈, 입 술, 사타구니 같은 무른 부분을 파먹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의 몸 전체가 물러졌고, 벌레들은 몸 전체로 퍼졌다. 벌레들은 번성했다. 평생 다 먹어치울 수 없을 만큼의 먹이었다. 그들 은 파먹은 자리에 바로 알을 슬었다. 개체 수는 금방 몇 곱절로 늘었 다. 몇 달 뒤, 끝이 보이지 않던 여자의 몸이 뼈만 남게 되었을 때, 어 디선가 처음 보는 바퀴벌레 네 마리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가장 덩치 큰 바퀴벌레가 소리치며 말꼬를 텄다. “여러분! 우린 지난 짧은 몇 세대 동안 전무후무한 풍요를 누렸습니 다. 그러나 이제 여자의 몸은 우리 뱃속으로 다 들어갔고, 이 집에는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습니다. 김치는 우리가 못 먹는 음식이고, 쌀은 쌀벌레 아니면 못 먹고요.” 벌레들이 수런거렸다. 바퀴벌레는 목다심을 하고 다시 외쳤다.


6.

“지금 생각 없이 다시 뿔뿔이 흩어진다면 예전의 가난을 다시 맛 볼

ㄷ ㅗ ㄴ / - - xv

수밖에 없습니다. 어떡해야 할까요? 이렇게나 불어난 가족들을, 어떻 게 먹여 살려야 할까요?” 벌레들이 더욱 크게 웅성거렸다. 옆에 있던 깡마른 바퀴벌레가 손을 들었다.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오, 어디 한번 말씀해주시겠소?” “저는 골생원3) 이라 하오. 꽤 오래 살았습니다. 자그마치 삼 년을 살 았죠. 바퀴벌레에게 삼 년이란, 세상을 한 바퀴 돌 수 있을 만큼의 시 간입니다. 물론 제가 그랬다는 건 아니고요. 그러나 저 또한 많은 곳 에 머물렀고 많은 일을 보았지요.” “그렇구려, 그렇다면 지혜가 많겠소. 그래서 어떤 생각이오?” “많이 돌아다닌 덕에 인간에 대해 잘 알고 있지요. 그들의 사회제도 까지 말이요. 한번 말해보겠습니다. 인간들은 태어나고 죽을 때 자신 들의 사회에 신고를 합니다. 오래 산다고 자랑하는 듯 말이에요. 아이 가 태어나자마자, 나 태어났네, 하고 아주 커다란 집에 가서 자기 삼 촌이나 고모로 보이는 사람에게 알리는 거죠. 아마 그 큰집은 종가일 거요. 제가 그걸 봤습니다. 그럼 그 어른들이 그 아이의 손에 무언가 를 묻혀 종이에 찍죠. 그럼 그 아이는 이제 그 가문의 사람이 되는 겁 니다. “그다음 그 아이는 자신이 그 가문의 사람인 줄 까맣게 잊고 살아갑 니다. 말하자면, 제가 본 사람들은 다 같은 가문의 사람들입니다. 같 은 삼촌에게 가서, 자신의 얼굴을 알리고 손바닥들 들이밀어 피붙이 임을 증명하죠. 그러나 자라면서 까먹는 겁니다. 그래서 늘 서로 헐뜯 3)

옹졸하고 고루한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


고 싸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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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죽고 나면 이번에는 다시 그 큰집으로 갑니다. 아무리 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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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도 그 집만은 기억하더군요. 그래서 자신의 손자, 손녀쯤 되는 젊은 이들을 만납니다. 나는 이제 죽었으니, 내 무덤에 들어가거든 위에 흙 좀 덮어주게, 하고 말하죠. 그럼 그 조카들이 집안사람들에게 편지를 돌립니다. 사람들은 늙은이가 지옥으로 내려갈 수 있게 다 같이 땅을 팝니다. 그런 다음 이 늙은 놈들은, 알아서 땅속으로 들어갑니다. 이 것도 제가 봤어요. 그럼 그 자손들이 땅을 덮고 말뚝으로 출구를 막아 버리는 거죠. 지긋지긋한 노인네 다신 올라오지 말라 하고요.” “음, 그렇구려. 역시 인간들은 멍청하오. 그런데 그게 도대체 우리 미 래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오? 어서 본론을 말해주시오.” “그렇죠. 인간들은 언제나 멍청하죠. 그런데 그 가운데에서도 더 모자 라서 자기 밥그릇 하나 챙기지 못하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만약 벌레 였다면야 알아서 죽겠지만, 인간은 다른 인간을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게 인간들의 무서움이죠. 그러니까, 멍청한 놈도 굶어 죽 지 않게끔 얼마만큼의 돈을 보내준다, 이 말입니다.” “돈? 돈이 뭐요?” “돈은 그들이 다른 어떤 물건과 맞바꿀 수 있게 만든 명함 같은 거요. 그들의 큰할아버지뻘 되는 사람의 얼굴이 찍혀있고, 이걸 주면 그 얼 굴을 알아본 다른 후손이 고기며, 빵이며, 뭐 그런 양식들을 내어주는 거죠. 그럼 그 돈을 어떻게 받느냐, 바로 편지를 써 보내는 겁니다. 우 리 집이 지금 이렇게 처지가 딱하다, 그러니 돈 좀 어떻게 안 되겠느 냐, 이렇게 말입니다. 그럼 얼마 안 가 틀림없이 돈이 온다는 겁니다. 이것도 제가 봤습니다. 저는 본 것만 말하니까요.” 돈을 고기나 빵으로 바꿀 수 있다니 그럼 대대손손 넉넉하게 살 수 있다는 말 아닌가, 듣고 있던 벌레들이 흥분했다.


6.

“그런데 지금, 이 여자는 그걸 잊었어요. 정말 멍청했단 말이죠. 죽고

ㄷ ㅗ ㄴ / - - xv

난 다음, 손자 손녀에게 찾아가 이제 죽었다고 말하는 걸 깜빡한 겁 니다! 바로 우리가, 그 점을 노리는 거죠. 우리가 이 여자와 아들의 신 분을 빌려 대신 편지를 쓰고 돈을 받는 겁니다!” 벌레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바퀴벌레들이 박수치자, 그들은 덩달아 소리 지르며 환호했다. “그런 방법이 있다니!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오? 그 편지 쓰는 일을, 우리는 글도 모르고, 그걸 쓸 방법이 없지 않소?” “아닙니다. 제가 글을 압니다. 저는 예전에 인간 밑에서 일한 적이 있 어요. 사실 부끄럽지만, 제가 바로 그 종가에서 일했더란 말입니다! 얼마나 치욕적이었는지, 멍청한 인간에게 단지 덩치가 작다는 이유 로 온갖 박해를 받으며 허드렛일을 했더랬죠. 그러나 그들 너머로 제 가 배운 것이 바로 글입니다. 제가 그들의 언어를 쓸 수 있어요. 그리 고 글을 쓰는 데는 타자를 누를 만큼의 힘이 필요하죠. 우리 가운데 바로 벼룩이 그 일을 훌륭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늘로 솟았다가 뛰 어내릴 때의 그 힘이면, 타자기쯤은 아무 일 아니죠.” 벼룩들이 열광했다. 그들은 소리를 내지르며 자리에서 쿵쿵 뛰었다. “덩치 큰 우리가 감독하고요!” 그 옆에 있던 바퀴벌레가 소란에 묻히지 않게 큰 소리로 말했다. “개미들은 우리를 도와서 작은 일들을 처리해주면 되겠네요!” 한 번도 말한 적 없는 나머지 바퀴벌레가 말했다. 그렇게 일은 시작되었다. 바퀴들은 지금 이런 효율로는 안 된다며 벼 룩들을 재촉했다. 신속한 작업을 위해 부드러운 말투를 버리고 딱딱 한 명령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작업 속도를 높이고, 시간을 늘 렸다. 강도 높은 일에 지친 벼룩들은 실수하기 시작했다. 실수가 잦아 지면서 작업이 느려졌다. 바퀴들은 능률향상을 위해서 작은 처벌제


도를 만들었다. 처벌 수위는 점점 높아졌다. 어느 순간부터 명령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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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이 끝나도 이어졌고, 무거워진 처벌이 두려운 벼룩들은 아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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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하지 못했다.

둘째 날 오후

운이 좋은 하루였다. 작업이 세 시간이나 앞당겨 7시간 만에 끝났다. 손잡이 위의 골생원이 오늘따라 문장을 잘 뽑지 못한 탓이었다. “오해하지 마라 제군들. 오늘은 원래 일찍 마칠 예정이었다. 바로 내 일, 지금 쓰는 편지가 끝나고 새 편지를 쓰기 때문이다. 기쁜 일이지. 내일은 마지막이니만큼 절대 틀려선 안 된다. 만약 실수한다면 처벌 은 더욱 혹독할 것이다. 그러니 오늘 푹 쉬고, 내일 더 잘할 수 있도 록!” 배부장이가 앞으로 나와 조회를 했고, 벼룩들은 쥐구멍으로 돌아갔 다. 탄은 다시 묘지로 올라갔다. 죽은 자의 다리가 여전히 떨리고 있 었다. 지쳐 쓰러져 죽은 자들의 다리가 더 그랬다. 목숨이 다 끊어지 기도 전에 버려진 벼룩들이었다. 그들의 머리 아래 신경절들이 몸에 남은 마지막 양분까지 써서 발버둥치고 있었다. 그들은 세워놓기만 하면 당장에라도 다시 일할 듯 뒷다리를 뻗었다. 살아있는 동안 몸에 지독히 각인된 유일한 동작이었다. 오래전 죽은 몸들은 파삭하게 말 라있었다. 탄이 마른 몸들을 건드리자 아무렇게나 부스러졌다. 부스 러지는 몸들은 관절이 어딘지도 잊은 듯, 계통 없이 내려앉았다. 바닥 으로 떨어진 파편들이 먼지가 되어 피어올랐다. 그때 개미 네 마리가 죽은 벼룩을 끌고 무덤으로 왔다.


6.

“언제 죽은 거야?”

ㄷ ㅗ ㄴ / - - xv

탄이 물었다. “방금” 개미 한 마리가 짧게 대답했다. 뒤에 걸어오는 개미가 뒷다리 하나를 질질 끌고 왔다. 순식간에 탄이 달려들어 개미의 더듬이를 움켜쥐고 땅바닥으로 내팽개쳤다. “아무리 죽었더라도 존중해. 그는 곧 너희를 위해서도 일 한 거라고.” 개미가 일어나며 놓친 뒷다리를 집어 들었다. “이거? 이거 저 벼룩 다리 아냐, 오는 길에 주운 거라고. 젠장.” “누구 다리야?” 개미가 어깨를 으쓱했다. “난들 알아? 주웠다니까.” 탄은 또 한 번 발끈했지만 참았다. 개미들은 시체를 버리고 돌아갔다. 탄은 버려진 뒷다리를 주워 살폈다. 허벅지 끝에 끊어진 근육질이 아 직 끈끈했다. 그가 거실로 돌아갔을 때, 벼룩들이 한데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 들은 탄이 등을 두드려도 본체만체했다. 그러다 한 벼룩이 탄을 알아 보고는 소리쳤다. “탄, 어디 다녀온 거야! 네 동생이 다쳤어!” 탄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탄이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하자, 그가 다른 벼룩들을 밀치며 탄을 안쪽으로 이끌었다. 그곳에는 한쪽 뒷다 리를 잃은 롱이 앉아 있었다. 롱은 흐릿한 눈으로 땅만 바라보고 있 었다. 개미들이 도착해 롱을 살피고 있었다. 그제야 정신이 든 탄이 롱에게 다가갔다. “오빠.......” 탄이 롱의 어깨를 감쌌다.


“걸어가다가 다리가 뜨거워서 주저앉았는데 계속 저린 거야. 그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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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갑자기 쥐난 것처럼 감각이 없었어. 그래도 다시 걸어보려고 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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났는데 다리가 진짜 안 움직이는 거야. 그래서 넘어졌는데 무릎이 꺾 였어.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도 안 아픈 거야....그래서 괜찮은 줄 알고 다시 일어났는데, 다리가.......” 벼룩은 죽을 때가 되면 저절로 다리가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타자 기 위에서 일을 시작한 뒤, 고된 일을 견디지 못한 다리가 젊은 나이 에 떨어지는 일이 생겼다. 다리는 마치 원래 제 몸에 붙어있던 다리 가 아닌 듯, 아무런 고통 없이 떨어졌다. 작은 다리 하나 없는 것이야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벼룩의 생명은 뒷다리에 있었다. 롱이 충격 에 빠진 건 그런 까닭에서였다. 롱은 이제 일을 할 수 없었다. 여태 일 을 할 수 없게 된 벼룩이 편하게 남은 삶을 보낸 적은 단 한 번도 없 었다.

“비켜보시오 좀, 지나갑시다.” 배부장이였다. 몰려있던 벼룩들이 비켜섰다. 앞서 개미들을 파견한 것도 배부장이였으니, 그는 탄보다 먼저 소식을 들은 것이었다. “이런. 어쩌나, 보는 내 마음이 다 아프구먼. 이 봐, 물 좀 줘.” 롱과 탄의 앞으로 다가온 배부장이가 말했다. 그를 엄호하던 개미가 물을 바쳤다. 개미가 빈 물잔을 돌려받으며, 배부장이의 귀에 무어라 속삭였다. 그는 잠시 롱을 바라보며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고개를 느 릿느릿 끄덕였다. “아프지 않니?” 그가 롱의 나머지 한 다리에 손을 댔다. 롱이 움찔했다. “건드리지 마!” 탄이 외쳤다. 마치 새끼를 노리는 포식자에게 반항하듯, 그는 배부장


6.

이 바로 앞까지 몸을 들이밀고 으르렁거렸다.

ㄷ ㅗ ㄴ / - - xv

“하하, 이거 참. 아비를 닮아서 성질이 불같구먼.” 머쓱해진 배부장이가 땀을 닦았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벼룩들 모두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 봤으니 그만 가자. 그나저나, 딸이 엄마를 닮아서 보통이 아냐. 응?” 그가 흥얼거리듯 말했다. 개미들은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음, 너는 더 아프지 않게 조심하고. 그럼, 다들 몸 관리 잘들 하시구 려.” 배부장이는 말을 마치자마자 개미들과 함께 돌아갔다.

그날 밤 탄의 꿈에 배부장이가 나왔다. 어미를 닮아서 예쁘다는 말, 슬쩍 롱의 무릎을 더듬던 손, 심지어 조심하라는 격려까지, 마치 드라 마의 예고편처럼 장면들이 빠르게 바뀌었다. 악몽에 몸부림치다 눈 뜬 그는 곧 다시 잠에 빠져들었고, 이윽고 그가 다시 눈 뜬 곳은 꿈속 이었다. 배부장이가 바퀴에게 롱의 상태를 보고하고, 바퀴들이 짜증 을 냈다. 그러자 그의 입이 불길하게 움직이고, 바퀴들이 그런 자차분 한 일은 알아서 하라는 듯 심드렁하게 손짓을 했다. 배부장이의 낯빛 에서, 동족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기대감이 묻어나왔다. 배부장이의 웃음소리가 변주곡이 되어 꿈속 장면이 바뀌는 내내 탄의 머리를 울 렸다. 그것은 모든 꿈의 특징을 가진 또 다른 현실이었다. 탄은 직감 적으로 깨달았다. 동생의 운명은 어머니와 같은 운명임을. 이제 그가 해야 할 일은 한 가지였다.

셋째 날


개미들이 기상을 외쳤고, 탄은 여느 아침과 똑같이 재깍 일어났다. 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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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한 다리를 잃은 점만 빼면 딱히 다르지 않았다. 배부장이가 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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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하고, 개미들이 생활신조를 선창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단 하나뿐이다. 그 하나를 위해 이제 아침밥을 먹 은 뒤, 아무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타자기로 오른다. 기왕에 오를 테 면 한가운데로 오르자. 어느 쪽의 세상이라도 나는 끝내야 한다. 탄은 그렇게 생각했다. 놀랍게도 그는 정말로 그렇게 행동했다. 그는 그 전에 한 번도 다른 이들과 다른 삶을 살아보려 한 일이 없었다. 그가 신기했던 건, 다른 삶을 살아보려 한 일이 없을 때와 다른 삶을 살기 위해 묵묵히 기다 리는 지금이 겉보기에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틀 전 언둥 이의 변명은 혹시 사실이었을까. 정말 아버지는 죽기로 마음먹었던 것 아닐까. 죽기 싫었던 언둥이,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얼굴에 억 지웃음을 그려 넣은 것이 아니라, 정말 아버지는 그를 보며 웃었던 것 아닐까. 탄은 ‘ㅗ’ 위에서 차분했다. 다른 날보다 몸이 가뿐했다. 일은 순조로 웠다. 예정대로 한 편지를 마무리했고, 신중에 신중을 더한 벼룩들은 실수를 만들지 않았다. 골생원이 뽑는 문장에서 ‘ㅗ’가 적당히 나와 주었다. 다음에 뛴다. 다음, 다음. 탄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각기 다른 자리에서 같은 높이로 뛰고 있는 벼룩들이 보였다. 다들 자신들이 뛸 수 있는 높이에 한참은 모자라는 높이로만 뛰고 있었다. 이렇게 뛰는 이들이 어떻게 하늘을 알 수 있을까. 탄은 문득 슬픔을 느꼈다. 그리 고 땅에 내려앉은 뒤, 하늘로 솟구쳤다. 저 아래에서, 벼룩들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바퀴가 부는 호 루라기 소리도 들렸다. 뒤이어 글쇠의 박자가 엉켜 철컥철컥 서로 부 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탄은 고요함을 느꼈다. 마치 귀만 물에 잠긴


6.

채 배영을 하는 기분이었다. 물속의 소리가 들리긴 하였지만, 그가 느

ㄷ ㅗ ㄴ / - - xv

끼는 고요를 깰 수는 없었다. 정점이었다. 그때 탄이 몸을 돌렸다. 허 공에서 정점을 찍고 떨어지는 탄의 시야에 사령관바퀴와 배부장이가 들어왔다. 둘은 점점 커졌다.

바퀴가 채찍을 휘둘렀다. 채찍은 탄의 몸을 휘감았다. 바퀴가 채찍을 당겼다. 탄이 바퀴와 배부장이 앞에 떨어졌다. 바퀴가 다시 한 번 채 찍으로 탄의 배를 휘갈겼다. 탄의 배가 터졌다. 피가 흘러나왔다. 쓰러진 탄의 눈에 바퀴와 배부장이의 다리가 보였다. 자신의 다리에 비하면 형편없는 다리들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은 어디서부터 시 작되었을까? 동생의 다리가 떨어졌을 때부터? 아버지가 죽었을 때부 터? 바퀴의 욕심에 벼룩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을 때부터? 남자가 떠나고 그 어미가 죽었을 때부터?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탄은 누굴 끝내기 위해 뛰어올랐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만약 누굴 끝 낸다면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걸까. 그는 자신이 원했던 결말이 무엇인 지 알 수 없었다. 배부장이가 다가왔다. “너, 그거 몰랐지. 네 동생, 스스로 뒷다리를 뜯은 거야. 제 입으로 말 이야. 허구한 날 뛰는 일보단 오입질이 낫다고 여긴 거지. 독하지? 거 봐, 내가 말했잖아. 엄마를 닮았다고. 그리고 너도, 그 값싼 영웅주의 는 정말 아비를 닮았구먼. 못 말려.” 배부장이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물러났다. 개미들이 다가왔다. 탄은 손을 뻗어 물러나는 배부장이의 다리를 잡기 위해 버둥거렸으나 헛 수고였다. 조금씩 몸에서 숨이 빠졌다. 그제야 탄은 결론을 내렸다. 자신이 정말 알 수 있는 건 ‘뭔가 일어났다’는 사실 뿐이라는 결론을. 개미들은 탄을 들고 타자기 밖으로 나갔다. 밑에서 기다리던 벼룩이 곧 그의 자리를 채웠다. 골생원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벼룩들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한동안 엉켰던 타자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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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자는 다시 규칙적으로 흘렀다.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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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있다. 때로는 그 책임을 한 개인에 묻고, 때로 는 그런 선택을 하게끔 한 사회에 묻는다. 탄은 자신의 도약을 선택 했을까. 아니면 상황이 만든 것일까. 또는 바퀴들의 욕심이 만들었을 까. 그 밖의 탄이 생각한 모든 까닭이 오답이라면, 도대체 무엇의 책 임일까?

그나저나, 지금쯤 여자는 알을 낳았을까? 탄의 다리는 아직도 떨리 고 있을까?


돈까스 이주연

구들은 “돈까스가 어디 있

기억은 여전히 제 뇌리에

마지막 방학을 살고 있어요. 냐?”하고 맞받아치는 방법

아주 깊숙이 박혀있어요.

‘우리들은 모두 추락할 거’

을 터득했고,

돈이라면 누구의 고개도 돌

라는 노랠 들으며 엘리베이

이후 저는 “돈!” (휙) “까스!

릴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터가 떨어지더라도 타이밍

먹고 싶다” 로 바꾸어 약올

꿈쩍도 않는 친구를 보니

을 잘 맞춰 점프하면 죽지

리곤 했지요.

기분이 아주 이상하더군요.

않는다는 말을 상기하고 있

고등학생이 되고 처음 사귄

글쎄, 뭘까요? 돈이라는 건.

어요. 자주 점프 연습을 해

친구에게 ‘돈-까스’ 장난을

그 날 이후로 돈에 대해 전

요. 살기 위해 튕기는 노력

쳤던 기억이 납니다.

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저

을 하고 있어요.

“돈!”하고 외친 순간 저는

는 <아브락사스>를 통해

@Z_meteor

무언가 잘못됐음을 깨달

실로 몇 년만에 ‘돈-까스’

facebook.com/zuyeonxx

았어요.

장난을 쳐보고 있습니다.

bebez zu.blog.me

친구의 고개가 요지부동으

전혀 알 수 없게 돼버렸기

로 꼿꼿이 서있는 게 아니

때문에 이번 주제가 이렇게

겠어요?

나 어려웠나 봐요.

“돈!”하고 외치면 백이면 백

돈을 모르거나 돈이 싫거나

시도, 소설도 여러 방면으

고개가 휙 돌아갑니다.

돈이 정말 좋거나 돈에 데

로 손을 뻗쳐봤지만 좀처럼

내 외침에 고개가 뱅그르

었거나 돈이 많거나 중 하

마무리 짓지 못해 이번 호

르 돌아가는 사람을 보고

나의 케이스라고 생각을

엔 장난 같은 그림 하나 던

있노라면

하면서 “너 왜 안 속냐~”

져놓게 되네요.

절로 흥이 올라 ‘돈-까스’

고 너스레를 떨었던 기억

돈이란 건 뭘까요? 거꾸로

장난을 자주 치곤 했습니다. 이 납니다.

놓고 보면 언뜻 ‘굳’ 같기

“돈!” (휙) “까스!”

그 이후로 돈-까스 장난을

도 하던데.

너무 자주 쳐댄 장난에 친

하지 않게 되었고, 그 날의



7.

돈까스 / 이주연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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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한 200 원 문모운 27 @andplaydead moun8823@gmail.com

올해 여름은 눈치 없는 친구처럼 일찍 왔다. 덥기도 무지 덥다. 내 이럴 줄 알고 조금씩 모은 생활비로 중고 에어컨을 미리 달았다. 집에 오면 덥지가 않고, 습 기 걱정도 없다. 이 정도면 괜찮을 거야 하면서 한 달 을 쾌적하게 보냈다. 헌데 항상 빛의 속도로 나온다는 느낌(자동이체 확인하자마 자 메일로 다음 요금 고지 서가 날아옴)이 들던 전기 요금 고지서가 이번에는 유독 더디다. 그동안 얼마가 나올지 무서워서 계속 확인 했다. 메일을 기다리고, 한 전에 전화를 몇 번 걸었다. 다음 주에나 고지서가 올 거라는데 너무 무섭다. 올 여름 최고의 공포. 누진세.

그 다음 공포, 내가 200원이라니. 흠흠. 가을에 봅시다.



8.

글쎄 한 200 원

글쎄 한 200 원 / 문모운

그날 저녁, 역 앞에는 제법 귀엽게 생긴 여자애가 나와 있었다. 만나 기로 하기 전 자신의 나이를 스무살하고도 8개월이라고 소개하더니 과연 앳되고 풋풋한 분위기가 감도는 얼굴이었다. 우리는 랜덤채팅 을 통해 만났다. 랜덤채팅1) 을 하다 보면 현실이 비루하다고 느끼거나 따분해 죽을 것 같아 자기연민에 빠져버린 여자들이 간혹 보인다. 이 여자들에게 성적으로 금기를 깨는 것이야말로 진취적인 여성의 기본 소양이라고 끊임없이 격려를 심어주면 그 여자 중 하나가 어느새 내 배 아래서 뜨거운 신음을 흘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이 이 시대를 대표 하는 쿨한 여성이라는 망상을 가지고. 그중에서도 이렇게 어리고 세 상 물정에 밝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연민에 빠진 여자는 그 마음을 거 두기가 몇 배는 더 쉬웠다. 여자애는 두툼한 백팩을 매고 있었다. 마치 가출 소녀처럼 보였다. 아, 설마 미성년자는 아니겠지. 내가 먼저 다가가 아는 척을 하자 그 애는 살며시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자는 손짓이었다. 랜덤채 팅으로 만난 여자 중에서 그렇게 인사를 건넨 여자는 처음이었기에 신선하다고 느꼈다. 나는 여자애의 손을 잡고 위, 아래로 휭휭 많이 흔들어 주었다. 여자애는 까르르 웃으며 좋아라했다. 그 웃음이 정확 히 무엇 때문에 터졌는지 제대로 알았더라면. 하룻밤 잠자리 상대를 구한다고 미리 밝히고 만났던 터라 머뭇거림 없이 역 근처 모텔로 향했다. 여자애는 종종걸음으로 내 뒤를 쫓아왔 다. 내가 손을 잡아 옆으로 이끌자 살짝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1)

무작위 상대와 하는 채팅. ex.가가라이브 랜덤채팅


아, 진짜 미성년자는 아니겠지. 계속 걱정이 되었지만, 신분증 검사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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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돼서 고든 스톱이든 할 수 있겠거니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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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터를 보던 직원이 금요일 밤이라 카드는 안된다고 말했다. 직 원은 내 뒤에 서 있는 여자애를 힐끔 보더니 역시나, 우선 신분증부 터 확인하자고 했다. 여자애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신분증을 찾는 사 이 나는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현금을 확인했다. 만원이나 모자 랐다. 아, 저기…. 직원을 보고 당황스러워하는 내 뒤에서 여자애가 어깨를 톡톡 건드 리더니 만원짜리 몇 장을 건네주었다.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어. 나는 만원짜리 한 장만을 쑥 빼고, 나머지는 여자애 손에 다시 쥐여 주었다. 내가 신분증을 보여주고 계산을 마치자, 여자애도 들고 있던 신분증을 직원에게 보여주었다. 직원은 우리 두 사람을 휙휙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윽고 방 열쇠와 간단한 세면도구, 그리고 콘돔이 들어 있는 비닐 주머니를 내주었다. 바로 할래? 아니면 역시 씻고 하는 게 좋을까?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서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여자애는 가방도 내려놓지 않고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나는 짐 정리를 좀 할 테니까 먼저 씻어요. 약간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지갑과 휴대전화를 가운 주 머니에 넣어 욕실에 들고 가는 것으로 스스로를 안심시키기로 했다. 샤워를 하고 나오자 여자애는 가방을 내려두고 미니 테이블 옆에 있 는 1인용 소파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종이컵 두 잔 이 있었는데 뭔가 액체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색깔로 봐서는 탄산음 료는 아닌 것 같았다. 순간 인터넷에서 읽은 괴담이 머릿속에 휙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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쳤다. 상대가 준 음료수를 마셨더니 정신을 잃었고, 다음날 눈을 뜨니

글쎄 한 200 원 / 문모운

신장 하나를 잃었다는 도시 괴담. 이야기의 앞뒤를 재면 영 터무니없 는 이야기이긴 했지만, 남자라도 인신매매를 당할 수 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하여 그 괴담이 내 이야기가 되지 말란 법도 없었다. 슬 쩍 겁이 난 나는 여자애에게 컵에 든 것이 뭐냐고 따지듯 물었다. 미숫가루요. 어? 좋아해서 좀 가져왔어요. 여자애는 가방에서 작은 지퍼백을 꺼내 들었다. 연한 황토색 가루가 보였다. 앞에 놓인 컵 하나를 들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확실히 고소 한, 내가 아는 미숫가루 향이 났다. 가방에 뭐가 들었나 했더니. 미숫 가루가 있었다. 어떤 의미로 대단한 반전이었다. 원나잇하러 나온 여 자애가 미숫가루를 타 놓고 기다리는 풍경이란. 익숙지 않지만 묘하 게 애틋하기까지 한 풍경에 경계가 풀렸다. 여자애는 뭘 그렇게 이상 하게 쳐다보느냐는 표정을 짓고는 제 앞에 놓인 미숫가루를 홀짝홀 짝 마셨다. 얼음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여자애는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렸다. 여자애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 우리가 미숫가루 마시러 온 건 아니잖아. 그런데 이거 물? 우유. 제대로 먹네. 미숫가루를 좋아하기도 했고, 오랜만이기도 했고, 여자애가 홀짝홀 짝 들이키는 모습에 왠지 군침이 돌아 컵을 집어들어 한 번에 들이켰 다. 달콤하고 고소하니 좋은 맛이었다. 정말 얼음이 있었으면 더 좋았 을 텐데 라는 생각을 했다. 아주 안심하고 만 것이다.


욕실에 들어갔다 나온 여자애는 알몸이 아니었다. 아직 낯설고 부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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럽거나, 침대 위에서 벗기는 재미를 안다거나 둘 중 하나였다. 여자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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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한참 동안 닦고 말렸다. 그사이 나는 팬티 만 입고 침대 위에 누워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TV를 켜놓았는데 도 신경은 온통 여자애 쪽으로 몰려 있었다. 갑자기 하기 싫다고 그러 면 모텔비만 날리는 거잖아. 5분의 1은 여자애 거지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열심히 두들기며 눈치를 살피는데 여 자애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이야기를 했다. 하기 전에 미리 말할 게 있어요. 어… 뭔데? 저 몸에 흉터가 좀 많아서 그러는데 깜깜한 상태에서 했으면 좋겠어 요. 난 또 뭐라고. 괜찮아. 사실은 별로 괜찮지 않았다. 어떤 이는 촉감에 많은 흥분을 얻기도 한다지만, 나는 시각적으로 얻는 흥분을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여자애의 요구를 거절해서 다 된 밥에 재를 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리모컨으로 TV를 끄고 방 불도 껐다. 이제 벗을 거야? 어둠이 눈에 익지 않아 여자애의 얼굴이 어디쯤 있는지 몰라서 허공 을 향해 말했다. 주섬주섬 옷을 벗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여자애 가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여자애의 젖은 머리카락이 배에 닿는 바람에 몸이 조금 움츠러들었다. 그래도 싫지 않은 자극이었다. 그다음에는 여자애의 다리가 내 다리에 닿았고 스르륵 미끄러지는 가 싶더니. 너 이거 다 흉터야? 놀란 목소리로 여자애를 다그쳤다. 나는 똑바로 누운 채 몸이 굳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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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중이었다. 여자애의 다리는 자잘한 세로줄이 올록볼록 여러 개가

글쎄 한 200 원 / 문모운

나서 마치 작은 빨래판들이 달린 느낌이었다. 혹은 일자형 벌레들이 여러 마리 들어있는 느낌이거나. 흉터들은 여자애의 허벅지에서 복 숭아뼈 부근까지 깔린 모양이었다. 아, 미안해요. 이게 다친 것도 있고…. 다친 것도 있고? 리스트 컷2) 을 다리에 많이 해서. 지금은 안 해요. 여자애는 쑥스러운 듯한 말투로 말했다. 내가 너무 무안을 준 건가 싶기도 했는데, 그렇다고 해도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불을 켜서 한 번 볼까? 보면 뭐하게? 마음이 점점 식어갔다. 역시 안되겠죠…. 여자애는 내 옆구리에 붙어 한숨을 쉬었다. 자해야 자기연민에 빠진 소녀들이 피우는 붉은 꽃 정도로 미화시킬 수 있었지만, 이 애의 다 리는 꽃 잔치를 방불케 하는 수준이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잠 시 고민에 빠진 척하며 시간을 끄는데 여자애는 이 속을 아는지 모르 는지 내 옆구리에 대고 계속 소곤거렸다. 그런데요, 이거 모양이 균일해요. 바코드를 가지고 싶어서 하게 됐거 든요. 바코드? 가격 정보 나오는 바코드? 계속 잠자코 있기에는 뭐해서 여자애의 말에 반응을 보였다. 여자애 를 밀어내면 괜히 상처 주는 꼴이 될 것 같아 최대한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여자애의 다리에 난 흉터들에서 해방되고 싶었지 만 이미 그 올록볼록한 흉터들에 내 다리까지 침식당하는 기분이 들 었다. 2)

강박적 증세를 보이며 자신의 몸을 상습적으로 자해하는 행위.


리더기로 찍어본 적은 없는데, 히히. 꽤 정교하게 만들었어요. 켈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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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 피부라서 그런 지 없어지지도 않고, 더 두드러져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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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야기를 왜 하는지 모르겠네. 뭔 자랑이라고. 나도 모르게 차갑게 대꾸했다. 나 역시 켈로이드 3) 피부였기 때문에 공감대가 형성되어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었는데도 왠 지 이죽거리고 말았다. 여자애는 그제야 입을 다물고 조용히 숨소리 만 내었다. 잠시 드리운 침묵이 방 안에 공기라는 공기는 모조리 급속 도로 식혔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갖고 있던 목적이 사라지자 영 흥이 나지 않았다. 밤이 깊어 그런지 나른하고 눈에서 점점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뭐 제대로 한 것도 없는데.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숙박으로 들어왔으니까 자고 가면 그만이지만, 여자애에게 그 흉터 때문에 고추가 도저히 커지지 않을 거 같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다. 시간을 벌려고 우선 흉터들에 흥미를 보이는 척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많이 만들었어? 확인하고 싶어서요. 뭘? 내가 얼마짜리 인간인지. 찍어보지도 않았다며. 너무 싼값이 나오면 어쩔까 무서워서 계속 개수만 늘렸어요. 지금 이게 무슨 홍콩 장기적출 원정 가는 이야기인지…. 무슨 말이에요. 이상해. 아, 이제 슬슬 됐겠다. 잠 오죠? 응? 응…. 그냥 자도 돼요. 난 괜찮아요. 3)

피부를 가볍게 문질러도 붉게 부어 오르는 등 타고난 체질 때문에 상처가 난 후 흉터가 심하 게 생겨서 없어지지 않는 증상. 피부의 결합조직이 병적으로 증식하여 단단한 융기를 만들고, 표피가 얇아져서 광택을 띠며 불그스름하게 보이는 양성종양을 일컫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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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애는 분명 소곤소곤 말하고 있는데 그 목소리가 방 안에 가득 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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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 퍼지는 듯 들렸다. 뭐가 됐다는 거지? 뭐가 괜찮다는 거지? 눈을 깜박이는 것도 힘들어서 그냥 감은 채로 내버려두었다. 그러자 어쩐 지 더 선명하게 여자애가 자랑하는 바코드 모양의 흉터들이 내 피부 를 향해 그 존재감을 힘껏 펼치는 것 같았다. 나는 몸을 빼내고 싶었 다. 하지만 그런 의지를 가지면 가질수록 몸과 생각이 천천히 분리되 는 느낌이었다. 당신은 여자애는 꼼짝도 않고 계속 중얼거렸다. 아까는 몸집에 걸맞은 가냘 픈 목소리였는데, 이제는 온 방을 집어삼키듯 커다란 목소리가 되었 다. 얼마일까나. 나는 정신을 잃었다.

극심한 갈증을 느끼며 눈을 떴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지독한 숙 취에라도 빠진 것처럼 머리가 뎅뎅 울렸다. 목만을 겨우 가누어 주위 를 둘러보았다. 욕실 쪽에도 침대 끝에도 미니 테이블 옆 소파에도 여자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 어제 먹은 미숫가루에 약이 들 어 있었던 모양이다. 잠시 가만히 누워 왜 이렇게 된 걸까 상황을 정 리해보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가 덜 아플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렇게 몇 분 누워 있다가 일단 없어진 것이 있는지 찾아보려 몸을 일으킨 순간 배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껴 져 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돌돌 둘러싸인 이불을 헤치고 배를 살폈 다. 배꼽 옆에 거즈와 면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그 사이로 피가 배어 나와 아랫배에 까맣게 늘어붙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반창고와 거즈 를 드러내자 배꼽 오른쪽에 날카로운 무언가로 세밀하게 그은 자국


이 나 있었다. 자국은 일자형으로 열 몇 개가 줄을 선 모양이었다. 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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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는 보통 여자 손바닥 반만했고, 꽤 정성을 들여 그은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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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팔, 이게 뭐야. 상처는 하나하나 꽤 깊어 보였다. 이것은 작정하고 그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예상치 못한 상처를 보니 지독한 분노가 치솟았다. 벌떡 일어서서 방안을 이리저리 살폈다. 여자애를 찾겠다는 생각으로 한 행동이었지만 의미가 없었다. 하염없이 어쩔 줄 모르고 두리번거리 다 맞은 편 벽에 붙은 커다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배 에는 거즈와 반창고가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듯 위태롭게 덜렁덜 렁 매달려 있었다. 마른 배에 난 상처는 흰 도화지에 그은 빨간 사인 펜처럼 확연했고, 얼굴색은 몹시 창백했다. 거울을 계속 보고 있자니 어디서 바람이 분 것도 아닌데 갑자기 오한이 들었다. 현기증이 나서 그대로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한참동안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앉아 있다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옷을 찾았다. 옷들은 미니 테이블 위에 개어져 있었다. 너무도 반듯한 그 모습이 엄청난 위화감과 동시에 공 포를 자아냈다. 옷 옆에는 지갑과 휴대전화, 그리고 창문 으로 들어오 는 햇볕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또 있었다. 자세히 보니 100원짜리 동 전 두 개였다. 자초지종을 들은 카운터 직원이 놀란 표정을 짓더니 로비에 설치된 CCTV를 보여 주었다. 새벽 4시경, 여자애는 처음 만난 모습 그대로 유유히 모텔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여자애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는 이미 꺼진 상태였다. 신분증 검사할 때 따로 기록해두진 않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었더니 직원은 뜻밖에 이야기를 해 주었다. 네. 특별히 수상해 보이지 않는다면 그런 일은 잘 없죠…. 그런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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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분, 손님보다 나이가 많은 건 알고 계셨어요? 얼굴은 되게 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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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생겼는데. 뭐라구요? 스무 살이라고 들었는데요. 에이, 여덟 살인가 아홉 살인가 그 정도 차이였어요. 뒤에서 자연스럽 게 돈도 챙겨주시고 하길래, 그냥 동안인 누님인가보다 했는데. 그러 고 보니 위조 신분증일지도 모르겠네요. 아, 내가 그걸 왜 생각을 못 했지. 조심스럽게 경찰에 신고해주겠다는 말을 꺼낸 직원을 만류하고 모텔 에서 나왔다. 여자애의 나이를 정확히 모르는 이상 섣불리 움직일 수 가 없었다. 집으로 가는 길, 바지 주머니에 동전 두 개를 만졌다. 잔 것도 아닌 거 같은데, 이게 화대일리는 없고. 설령 화대라면 정말 미 친 듯이 웃고 말 텐데. 100원짜리 동전 두 개가 뭘 의미하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집에 도착하고는 내내 잠을 잤다. 무언가를 알아볼 여력이 없었다. 주말을 귀신에 홀린 것처럼 보내고 평일에는 치료를 받기 위해 동네 병원을 찾았다. 상처를 살펴본 의사는 소독도 말끔히 되었고 거즈도 깨끗하게 붙어 있었던 상태라고 말했다. 어디서 이렇 게 다친 거냐는 말에 잘 대답을 하지 못하자 의사는 의아해했다. 나 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정말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저, 여기 만져보면 장기가 없어진 것도 알 수 있나요? 의사는 내 말에 당황하더니 곧 실소를 터뜨렸다. 사이사이 여자애에게 몇 번인가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가 꺼져있다 는 안내는 얼마 되지 않아 없는 번호라는 안내로 바뀌었다. 그때까지 도 나는 경찰에 신고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정보가 너무 없기도 했 고, 무슨 일을 당했다는 분노보다 성매매의 의혹을 받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100원짜리 동전 두 개 는 어딘가 섞이지 않게 잘 놓아두었다.


여자애가 그어놓은 상처는 조금씩 아물었다. 볼록해질 흉터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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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은 곧 현실이 되었다.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심한 꼴은 아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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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애초 없어도 될 상처인 것은 분명했다. 매일 거울을 보며 흉터 를 들여다봤다. 어쩐지 흉터는 내 살색보다 짙은 색으로 변해갔다. 그 것을 보면서 여자애가 말한 바코드가 이런 건가 생각했다. 시간은 계 속 흘렀지만, 여자애를 찾아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밝혀낼 용기 를 내지 못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어, 결국 아주 나쁜 일을 당했다는 정도로 일을 일단락시키는 게 좋겠다고 스 스로에게 사건의 종결을 고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자애 찾기를 포기하던 날부터 몇 날 며칠 밤, 잠들기 전이면 여자애가 가진 흉터들의 감촉이 내 다리를 휘감았던 그날 일이, 어두운 방 천장 위에 몹시 우울한 색감으로 펼쳐진다. 그 것은 말하자면, 일종의 후유증이었다. 여자애를 처음 만났던 순간부 터 지금까지의 일들이 천장 위에 한 장면, 한 장면 지나간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목이 타고, 가슴 속이 횃불 하나가 홱 들어찬 것처럼 뜨거워진다. 그럴 때마다 이불 속에서 배를 더듬어 내가 가진 흉터를 슬그머니 만져본다. 이것은 나의 즐거움만을 위해서 누군가들을 기 만한 벌일까, 아니면 단순히 내가 잘못 살아서 이렇게 된 걸까 라는 생각을 한다. 방 안을 크게 뒤흔들었던 여자애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 에 울려퍼진다. 당신은 얼마일까나. 나는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그 말이 무섭고, 가위에 눌린 사람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다. 그리고 언 제나 책상 위 작은 서랍장 속에 무심히 자리 잡고 있을 동전 두 개가 밤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Money, Person. 김가혜 kimkahye@hanmail.net blog.naver.com/gahes

돈과 사람을 나란히 놓아 보았습니다. 구겨졌다고 돈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 듯, 잠시 움추렸다고 너무 낙심 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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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ey, Person. / 김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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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 Not Found 수야 시각탐닉꾼. kht6352@naver.com

당신은 무엇이 고픈가요 혹 어떤 것이 부족해서 채우고 싶으세요? 저는 기억이라고 대답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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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 Not Found

404 Not Found / 수야

컴퓨터가 너무 느려서 계속 오류가 났어요. 메일 보내기 버튼만 누르 면 강제종료를 해야 했고 그게 반복되다 보니 편지를 보내면 안되는 ‘타이밍’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미루고 미루다 보니 몇 번의 계절이 바뀌었어요.

당신한테 이 편지를 보낼 수 없다는 걸 잘 알아요. 그래서 더 이야기 를 쏟아낼 수 있어요. 아이러니하죠.

얼마 전, 몸이 참 안 좋았어요. 한 달 동안 응급실에 세 번이나 갔었고 체중은 7kg 이상 줄었어요. 아프기 전까지는 몰랐죠. 건강한 게 참 좋 은 거구나, 하는 거 말이에요. 우린 많은 것들을 잃고 나서야 소중했다는 것도 알고, 깨닫는 것도 있 고, 또 그리워하죠. 특히 내가 그렇게 느껴요.

당신과 같이 걸었던 거리, 단골 가게, 같이 다녔던 여고, 당신에게 배 우던 통기타...뭐 그런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흔한(?) 것들이 이따금 꼴 뵈기 싫어질 때도 있어요.

우리는 천천히 끌렸다가 천천히 멀어졌어요. 보통의 친구라는 관계 는 이런 순서를 밟게 되는 걸까요?

아니에요. 다르겠죠. 다를 것 같아요…. 우린 뭔가 전원을 꺼버린 것 처럼 툭, 하고 멀어졌어요.


사실 그때 좋아한다고 말을 했다면 달라졌을까, 그런 생각도 한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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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무리였을 거에요. 친구로 남으면 오래갈 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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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괜한 고백을 해서 어색하고 멀어지게, 어쩌면 평생 볼 수도 없게 만들고 싶진 않았거든요.

하지만 졸업과 동시에 우린 멀어지게 되었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빙 돌려서라도 말을 해볼걸, 좀 아쉽네요.

잘 지내나요. 거긴 어떤 곳이에요? 나는 그냥 그럭저럭 지내요.

사실 내가 그럭저럭 이란 말은 잘 지내지 못한다는 말밖에 안되더라 구요. 여태껏 내 주위 사람들은 못 알아챘어요.

그러니 당신에게는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요.

보고 싶어요. 딜코.

고백할게요.

핑계이기도 했어요.

돈 때문에, 그리고 주위의 시선 때문에 학교에 가야 한다고 생각해서 당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죠.

하지만 세상엔 돈보다 중요한 게 너무 많아요. 당신은 이미 오래전부 터 알고 있었겠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서야 깨달았죠. 나도 결국


10.

당신처럼 학교를 그만두었어요.

404 Not Found / 수야

약간 낡은 서랍 속에 당신에 대한 기억을 차곡차곡 정리해서 예쁘게 담아두었어요.

생각날 땐 먼지를 호호 불고 털어내서 볼 수 있도록요.

가슴속에 답답한 게 들어앉아서 꺼낼 수가 없어요. 술도 마셔보고 담 배도 피워보고 노래도 불러보고 여행도 다녀봤는데 다 소용이 없었 어요.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요?’하고 물어보고 싶네요. 당 신이라면 알 것 같거든요.

요즘 장마철이라 비가 많이 와요. 참, 제 꿈에선 앞으로 더는 울지 말 아요.

당신은 제가 사랑한 처음이자 마지막 여자가 될 것 같아요. 사랑이란 말이 제일 어울려요. 제가 느꼈던 감정으로는요.

앞으로 평생을 거짓말하며 살아가야 할까 봐 무서워요.

제 마음을 감추고 진심을 감추면서 남들 사이에서 똑같은척하며 살 기 싫어요, 난.

눈을 감으면 아직도 당신의 작은 목소리가, 어색하게 웃던 얼굴이 떠 올라요. 그걸 어떻게 잊겠어요.


정말 안녕, 안녕

안 녕.

p.s. 답장이 늦어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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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목이 마르네요. 물 좀 마시고 와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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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했어요. 거기선 부디 푹 쉬길 그리고 잘 지내길 바래요.


이틀 김종소리 21세기 소년 jongsoriz.tistory.com

일확천금보다는 꾸준한 수입이 좋습니다. 그래서 로또보다는 연금복권.



11.

이틀

이틀 / 김종소리 글, 정지호 그림

누워서 다음날 회사에서 할 일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 민우에게서 전 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자 민우가 울먹이며 말했다. “우식이가 죽었대……” 나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민우가 이어서 말했다. “술 마시고 집에 가는 길에 치였대……” 감정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생각하는데 엉뚱 한 생각이 떠올랐다. ‘술 마시고 가다가 술 취한 사람이 모는 차에 치여 죽었다. 그럼 우식 이를 죽인 범인은 술인가?’ “강남삼성병원으로 와.” 나는 곧 가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잠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장례식장이 강남삼성병원이면 강남이고, 지금 시각이 한 시가 넘었 으니까 택시를 타야겠네. 부조금은 어쩌지?’ 핸드폰으로 통장 잔고를 확인해보았다. 정확히 53,238원이 들어있었 다. 나는 다시 민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너 부조금 얼마 내냐?” “부조금?” “응.”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부조금 얼마 낼 생각이냐고.” “장난치지 말고 빨리 오기나 해.” 이렇게 말하고 민우는 전화를 끊었다.


기보다 ‘먼 친구’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는 매일매일 함께 놀았다. 하지만 그건 벌써 십 년 전의 이야기였다. 그때야 매일 학교를 가야 했고, 더군다나 같은 반이었으 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친하게 지내던 여덟 명 정도의 무리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친 한 친구와 덜 친한 친구들이 있었다. 우식은 덜 친한 친구에 속하는 친구였다.

나는 도로에 나가 택시를 기다렸다. 까만 아스팔트 바닥을 멍하니 바 라보며 생각해보니 강남까지 가는 데 택시비만 이만 원은 족히 나올 것 같았다. ‘통장 잔고는 오만 얼마. 택시 타고가면 잔액은 삼만 얼마.’ 아무리 ‘먼 친구’라지만 그래도 고등학교 동창의 장례식에서 부조금 을 삼만 원만 내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돈보다는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래도……. 정 말, 그래도 그건 아니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네이버 지도 앱을 켰다. 출발, 합정역 2호선. 도 착, 강남삼성병원 장례식장. 그리고 걷는 사람 모양을 눌렀다. 그러자 길은 뜨지 않고 ‘출발지와 도착지 간의 직선 거리가 8km(약 2시간)를 넘으면 도보 길찾기 결과를 제공하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떴다. 출 발지를 여의도로 변경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다시 빌라로 들어갔다. 계단에 묶 어놓은 자전거를 보았다. 까만 자전거에 하얀 먼지가 소복이 쌓여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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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식과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친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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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불을 걷고 일어나 검은색 정장을 꺼내 입었다.


11.

었다.

이틀 / 김종소리 글, 정지호 그림

‘마지막으로 자전거를 탄 게 언제였더라?’ 먼지를 털어내며 생각해보았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자전거를 들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다음날 해야 할 업무들을 떠올렸 다. 딱히 특이사항은 없었고 내가 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누군가가 맡 아서 진행할 터였다. ‘내일 아침에 전화해서 연차 낸다고 해야겠다.’

양화대교를 통해 한강 고수부지로 내려와 자전거도로를 달렸다. 한 산한 한강변을 따라 달리니 기분이 좋았다. 새벽 공기에 섞인 물비린 내를 맡는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친구들과 자주 자전거를 탔다. 아침이면 같은 동네에 살던 민우, 창수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등교했다. 주말이면 함께 어울 리던 여덟이 다 같이 자전거를 타고 한강에 가기고 했다. 오랜만에 한강을 따라 달리니 추억들이 떠올랐다. 여름밤, 열대야를 피해 모기장을 들고 나와 함께 자고, 시험기간이 끝 난 날, 어른들 몰래 숨어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한강에서 술을 마실 때면 늘 우식이 술과 담배를 사왔다. 어렸을 적부터 겉늙 어보였던 녀석은 얼핏 보면 우리들의 삼촌뻘로 보일 정도였다. 녀석 은 거리낌 없이 구멍가게에 들어가 소주와 담배를 사곤 의기양양하 게 우리에게 건네곤 했다. 돈이 없었던 우리는 담배를 안주 삼아 종이 컵에 소주를 따라 마셨다. 그리곤 술 냄새가 가실 때까지 자전거를 탔 다. 술기운이 돌아 핑핑 도는 머리를 부여잡고 자전거를 타다보면 실 실 웃음이 났다. 그때가 고등학교 시절 중 가장 좋은 추억인 것 같다. 시험은 끝났고, 친구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시고, 기분이 업될 정도로 적당히 취해서 자전거를 탈 때. 그렇게 새벽까지 한강변을 달


리다 부모님이 잠들 시각쯤 몰래 집에 들어갔다. 그리곤 치약을 한 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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큼 짜서 이를 닦고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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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대교에 도달해 다리 위로 올라갔다. 지하철을 타고 출근할 때 보 던 한강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길었던가?’ 한참을 달렸는데 고작 중간 정도 온 것 같았다. 나는 잠시 자전거를 멈춰 세우고 한강을 바라보았다. ‘우식이 죽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울먹이던 민우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민우는 실감이 나나?’ 아마 민우도 실감이 나진 않을 것이었다. 직접 민우의 모습을 본 것 도 아닐 테고, 나처럼 전화로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테니까. 나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네이버 지도 앱을 켰다. 출발, 한남대교. 도착, 강남삼성병원. 총 10.56km, 도보로 약 2시간 39분이 걸린다고 나왔다. ‘도보로 2시간 이상은 길찾기를 제공하지 않는다며? 근데 도보로 2 시간 39분이 걸린다는 건 뭐야?’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시계를 보니 출발한 지 한 시간 정도 지나있 었다. 고개를 들어 한숨을 쉬는데 와이셔츠에 뒷목이 쓸렸다. 손으로 쓰다듬으니 땀 때문에 끈적였다. 나는 넥타이를 풀러 가방에 집어넣 었다. ‘이제 뭐하는 짓이야? 우식이 이 새끼가 이틀만 늦게 죽었어도 벌써 장례식장에 도착해서 절도 하고, 향도 피우고, 육개장도 두 그릇은 먹 었겠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틀 후면 월급날이었다. 월급만 들어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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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도 자전거를 타고 강남까지 달리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았을 터였

이틀 / 김종소리 글, 정지호 그림

다. ‘근데 왜 자전거를 탄 거지? 그냥 부조금 삼만 원만 해도 되잖아. 다 음에 더 내도 되는 거고.’ 이런 생각을 하면서 또 웃음이 났다. 나는 다시 자전거에 올라타 페 달을 굴리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로는 민우를 제외한 나머지 친구들과 잘 만나 지 않았다. 대학 생활이 바쁜 탓도 있고, 여자친구가 생긴 탓도 있지 만, 어쨌든 그렇게 되었다. 민우는 집도 가까웠고 대학도 같은 대학으로 가게 되어 그나마 자주 보았다. 그나마라고는 해도 일주일에 한 번? 고등학교와 비교해보면 턱없이 적은 횟수였다. 나머지 친구들은 두 달에 한 번 꼴로 만났던 것 같다. 그럴 때면 다 같이 모여 술을 마셨고, 매번 같은 이야기를 나 눴다. 여자 이야기와 고등학교 이야기였다. 나는 그 이야기들이 지루 했다. 친구들이 어떤 여자를 만나든 그건 지들이 알아서 할 일이었고, 고등학교 때 이야기들은 이미 지난 일들이었다. 그에 비해 대학 친구 들과의 이야기는 즐거웠다. 전국각지에서 올라온 친구들의 이야기는 새로운 이야기들이었다. 동기였던 여자친구는 부산에서 올라온 아이 였다. 여름방학에 헤어졌던가? 이젠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우리 중 처음으로 군대에 간 녀석은 민우였다. 민우는 한 학기만 마 치고 지원 입대했다. 그땐 친구들이 모두 함께 훈련소까지 가서 민우 를 배웅해주었다. 친구들 중 어떤 놈은 울기도 했다. 누가 울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분명한 건 나는 울지 않았다. 그 다음 번 타자부 터는 다들 모이는 일은 없었다. 그저 잘 다녀오라고 전화 한 통 해주 고 말았다. 어쩌면 나 말고 다른 녀석들은 함께 만나서 술을 한 잔 했


에 서서 찻길을 보았다. 새벽 시간대라 차들이 빠르게 달렸다. ‘돈 많은 새끼들. 이중에 분명히 술 먹고 운전하는 새끼도 있을 거야.’ 내게 차가 있었다면 어땠을지 생각해보았다. 분명히 나도 술 마시고 운전을 했을 것 같았다. 적당히 마셨고 단속에 걸릴 것 같지도 않고, 집에는 빨리 가고 싶은데 대리 부르긴 돈이 아깝고… 그럼 아마 그냥 운전을 했을 것이다. ‘그보다 지금 자전거를 타고 있지 않겠지.’ 가랑이가 축축한 게 느껴졌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우식도 차가 있었다면 어쩌면 죽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차 가 있었다면 대리운전을 불렀을 테고, 그랬음 사고가 났더라도 죽진 않았을 것이었다. 재수가 없었으면 죽었을 수도 있지만 그럴 확률은 낮았다. 오히려 죽지 않고 죽였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우식은 죽었다.’ “씨발.” 나는 일부러 소리 내어 욕을 했다. “씨발.” 한 번 더. “씨발!” 소리까지 질렀다.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민우였다. “왜, 씨발.” “왜 안 와?” “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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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역을 지나 로데오거리 쪽으로 자전거를 몰았다. 횡단보도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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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미 오래 전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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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와.”

이틀 / 김종소리 글, 정지호 그림

“빨리 가려고 노력하고 있어.” “그게 뭔 소리야?” “자전거 타고 가고 있어.” “그게 또 뭔…” 나는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우식이 죽든 말든 상관없었다. 마치 회사에 내가 있든 없든 회사는 잘 굴러가는 것처럼, 우식이 있든 없든 내 삶은 잘 굴러갈 터였다. 마지막으로 우식을 본 건 창수의 결혼식 때였다. 벌써 일 년도 더 지 난 일이었다. 그 후 일 년간 우식과는 아무 연락도 주고받지 않았다. 물론 내 삶은 잘만 굴러갔다. 소개팅을 두어 번 했고, 새로 적금을 하 나 더 만들었고, 정장을 두 벌 더 샀다. 가방을 새로 사고 싶었지만 그 건 참기로 했다. 그 외엔 별 문제 없이 잘만 살았다. 정말 가끔 우식을 생각할 때가 있긴 했다. 퇴근길에 술 한 잔 하고 싶 은데 민우 녀석은 여자친구를 만난다고 시간이 안 된다고 하고, 딱히 다른 친구들도 시간이 맞지 않을 때. 그럴 때면 고등학교 친구들을 떠 올렸다. 그 안에 우식이 있었다.

장례식장 앞에 도착해 자전거를 세우고 스트레칭을 했다. 셔츠와 정 장 바지가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떼어졌다. 자켓을 벗어 자전거에 걸 치고 자전거 자물쇠를 잠갔다. 목이 말랐다. 자판기로 가서 포카리스웨트를 한 캔 뽑았다. 담배를 하 나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캔 뚜껑을 따고 포카리스웨트를 한 입 마셨다. 목이 차가웠다.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고 뱉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드문드문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다들 이런저런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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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중 우식의 지인들이 있는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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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장은 슬퍼서 싫어.’ 그런데 나는 별로 슬프지 않았다. ‘근데 뭐 하러 굳이 지금 자전거를 타고 여기까지 온 거지? 내일 와 도 되잖아.’ 사실이었다.

담배를 끄고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서 우식의 이름을 찾 았다. ‘장우식, 장우식, 장우식, 장우식…’ 우식의 이름이 쓰인 쪽으로 가자 향냄새가 짙게 났다. 우식의 사진이 멀찍이 보였다. 우식의 아버지가 그 곁에 서있었다. 나는 넥타이를 매 고 자켓을 입은 뒤 방으로 들어가 아버지에게 인사를 했다. 향을 꽂고 절을 했다. 나오면서 다시 자켓을 벗고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개새끼. 이틀만 늦게 죽었어도 내가 이 고생은 안 하잖아.” 그러다 불현 듯, 돈 뽑아오는 걸 깜빡했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11.

이틀 / 김종소리 글, 정지호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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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카피 승해건 3년차 카피라이터 whatbtw@hanmail.net



12.

B 카피

B 카피 / 승해건

카피는 팔리는 글이다. 돈을 버는 건, 카피의 소명이다. 돈 못 버는 카피는 카피가 아니다. 가장 효율적으로, 매력적으로 홀리고, 속이고, 움직이게 하는 글. 자본주의의 꽃은 광고라고들 하고 광고의 꽃은 카피라고들 한다. 자본주의의 제일 깊은 곳, 그 중심에는 마그마처럼 들끓는 카피들이 있다.

그리고 그 변두리에는 식은 돌처럼 굳어버린 카피들이 있다. 팔리지 않은 카피, 돈 못 버는 카피. 카피로서 생에 실패한 카피들. 그 카피들은 숙명처럼, 유적처럼 누군가의 하드에 고이 잠든다. 자본주의 경쟁에 밀린 카피들을 나는 B카피라 부르기로 했다. 이것은 B카피의 소리 없는 외침이다. 누구보다 팔리고 싶었지만 아무도 사고 싶지 않았던 사생아들의 절규이자 몽타주다.

이것은 나로부터 탄생해 카피의 생을 실패한 B카피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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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가 아니다. 이것은 MACHINE이다. 갖고 싶다는 말보단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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싶다는 말을 하게 될 것이다. 쉽게 가질 수 있는 차였다면 태어나지 않았다. 마르세데즈 GP, 페라리, 르노, BMW Sauber… 최고들이 아 니면 경쟁하지 않는다. INFINITI.

6월, 영원한 순간은 없다. 오직 6월 한 달, 특별한 혜택의 Infiniti M 을 만나게 될 것이다. 6월, Infiniti M37 안에 놀라운 혜택이 있다. 37, 이 숫자에 감사하라. 37개월, 최고에게 어울리는 혜택. 정말 다행이라 고 생각하지 않는가? 인피니티 파이낸셜 서비스 이용 시 37개월 무 이자 할부, 현금 구매 시 TBD% 지원 혜택.

자동차는 많다. 그러나 가지고 싶은 차는 흔치 않다. 언제까지 저울질 이나 하며 바라만 볼 건가? 준비는 끝났다. 남은 것은 질주를 위한 당 신의 선택뿐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달리는 것만을 기다린다. 아무 자 동차나 질주하기엔 도로는 너무 비좁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야 거 리의 눈을 사로잡는다. 짜릿한 순간은 남들이 쉽게 가질 수 없는 것을 차지할 때다. 남들도 가질 수 있는 차를 탈 것인가? 당신만 가질 수 있는 차를 탈 것인가?

당신이 고른 것, 자동차인가? 차의 껍데기인가? 4천 만원이나 쓰면 서 ‘깡통’을 사고 싶은가? ‘자동차’가 아닌 ‘허영’을 사는 것이 당신의 취미인가? ‘A 아니면 B를 타겠다’ 당신의 속보이는 선택, 성공을 과 시하고 싶은가? 당신은 신중하다. 당신은 현명하다. 당신은 고상하 다. 당신은 성공했다. 당신을 존경한다. 당신이 고른 ‘그 차’만 아니면. Gott ist tot (신은 죽었다) – Nietzsche, Ihr auto ist tot(당신들의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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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죽었다) -Infiniti G

B 카피 / 승해건

남들도 가질 수 있다는 건 어디에나 흔해빠졌다는 말. 세단의 럭셔리 와 파워풀한 디자인의 조화 도로를 질주할 수 있는 세단은 오직 G뿐 이다. Infiniti G Sedan Racing Limited Edition 200대 한정 판매. G sedan Racing Limited Edition 구매 고객에게 S. Vettel Signed Cap 을 시승 고객에게 베텔 사인 모자 (5명), 베텔 모자 (20명), 레드불 레 이싱팀 재킷 (10명)을 드립니다.

* 옷을 고를 때 가슴 때문에 망설이는 당신, 당신의 브라에 대해선 얼 마나 알고 있나요? 당신의 가슴은 별로라고 생각하는 당신, 당신의 가슴에 꼭 맞는 브라를 착용하고 계신가요? Bravo, My Bra! 브라를 닮은 날, 11월 8일 브라데이(Bra-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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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운 비밀이 섹시한 볼륨을 완성한다. 섹시한 치명적인 화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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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비밀스러운. ‘삼각’이 완성하는 화려한 유혹. 시크릿존으로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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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다. 그들의 시선이 내 볼륨에 꽂히기 시작했다. 여자들이 궁금해할 Y라인의 비밀. 삼각 시크릿존이 가슴의 볼륨을 신비롭고 섹시하게 올려준다. 비너스 오르화.

“참아야 한다. 숨겨야 한다. 당연한 것이다. 네 탓이다.” 수컷의 권력 이 만든 시선이 여자의 불편함을 강요한다. 당신은 누구를 위한 브라 를 입는가?

75A 80A 85A, 한국여자는 A컵뿐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에는 2 천 4백만 여자의 2천 4백만 사이즈가 있다. 당신은 브라에 가슴을 맞 추는가? 가슴에 브라를 맞추는가? 엄마가 사다 주는 브라만 입었다. 엄마가 정해주는 컵을 입었다. 엄마의 브라는 내 브라의 기준이었다. 엄마의 브라를 벗어라. 당신의 브라를 입어라. 불편하고 민망하고 머 뭇거려지는 브라에 대한 ‘진실’. 여자는 어울리는 것과 어울리지 않 는 것을 안다. 브라에 어울리는 가슴을 만들지 마라. 당신의 가슴에 어울리는 브라는 있다.

* 귀한 식당은 골목에 숨어 있다. 빠른 차가 좋다. 느리게 걷기는 더 좋 다. 네 바퀴보단 두 다리가 어울리는 골목. 걸어서 만날 수 있는 담벼 락. 귀한 식당은 골목에 숨어 있다. 삼청동 골목길 같은 표지판만 세 번째. 카페 하나 찾는데 2시간은 기본. 눈 앞 맛집은 그냥 지나치기 일쑤. 생활에도 막힘은 있다. T맵.


12.

*

B 카피 / 승해건

우리의 지난 4년은 지나치게 달콤했다. 사라진 건 ‘사랑’이 아니라 ‘ 그 사람’이었다. 아무리 Delete해도 Delete할 수 없는 것. 기다림이 길수록 사랑은 늦어진다. 지날수록 변해가는 것, 사랑 그리고 커피. 24시간 안에 로스팅에서 포장까지, 커피맛을 그대 로 담다. 사랑한다면 카페라떼처럼.

* 작은 샘에서 시작한 작은 물줄기는 오랜 시간 거친 산중턱을 굽이굽 이 돌아 수많은 지류들을 만나며 넓어지고 마침내 목마른 땅을 적시 는 거대한 하나의 강물이 된다. 바위는 묵묵히 자리를 지킬 줄 안다. 바위는 파도에 맞서 흔들리지 않는다. 바위는 세월에 쉽게 깎이지 않 는다. 바위는 기꺼이 모든 것의 아래가 된다 .그 바위들이 모여 견고 한 산을 만든다. 바위산을 닮은 기업이 있다. 바위처럼 미련하게 바위 처럼 변함없이. 대림.

* 당신 갈굼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직장에서 갈굼 받고 있지 요. 아들 밥 잘 먹고 다니지? 아들 욕 잘 먹고 다녀요. 부장이 날 보 고 웃는다. 그런데 왜 그 미소만 보면 한 대 치고 싶을까? “김대리, 요 즘 많이 피곤하지? 피곤하면 아주 푹 쉬어. 영원히.” 이 선배… 친절 한데 기분 나빠… 대체 뭘까? 내 자리에 CCTV도 없는데 누가 날 감 시하는 듯한 구린 기분은…. 출근하자마자 퇴근하고 싶다. 차라리 계 급장 떼고 시원하게 한 판 붙을래? 날 죽여 그냥. 속상한 남자들을 위 해 위편한 구트.


그리고 또 B 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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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는 소설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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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는 시이어서는 안 된다. 카피는 카피여야 한다. 오롯이 카피여야 한다.

그래서 내 하드엔 B카피들이 쌓인다. 돈 되지 않는 카피들이 분리수거조차 되지 않은 채.

그러므로 이것은 시도 소설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은유의 기록 추다다 chudada@me.com

은유의 기록 ㅇㅇ에게 남기는 이 곳의 기록. 기록의 내용은 모두 은유적 방법을 사용한다. (기록의 주제들은 다양하게 정해지는데 #03의 주제는 돈도 해당되지만 꼭 돈에만 해당되는 것만은 아니다.) A라고 알려져 왔으나 A가 아닌 것. 완벽의 개념을 뜻하지만 전혀 완벽하지 않은 것. 원래는 보조적 수단으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지만 어느새 무엇이 주된 목적인지 알 수 없는 상태.



13.

은유의 기록 / 추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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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후 그들은 심심했다. 이훈보 exxx2x@gmail.com 010 2581 4799



14.

일요일 오후 그들은 심심했다.

일요일 오후 그들은 심심했다 / 이훈보

등장인물 우광

도둑, 사진 찍는 취미가 있는 명문대 졸업생.

세훈

도둑, 악한 심성은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도둑질을 하는 좀도둑.

소미

유치원생 / 중국집 딸 유치원생

자현

소미엄마 / 중국집 안주인

김사장 소미아빠 / 중국집 주인 병구

중국집 배달부

박순경 경찰 선영

수퍼마켓 여 주인

최사장 수퍼마켓 남 주인 준영

수퍼마켓 아들

명희

떡볶이집 주

#1 골목 ( 낮 ) 동네의 골목길 끝에서 우광이 DSLR카메라를 메고 걸어온다. 이십대 후반 특별할 것 없는 모습으로 깔끔하고 모범적인 외모. 가방은 없다. 골목을 지나던 우광은 골목 중간쯤에서 휘파람을 분다. 그때 담 너머 로 작은 가방이 날아온다. 우광은 가방을 받아들고 자연스럽게 어깨 에 메고 다시 걷는다. 우광의 뒤로 문을 열고 세훈이 걸어 나온다.

#2 다른 골목 (낮) 둘이 걷다, 우광이 갑자기 말을 꺼낸다.


우광

도둑이 대문으로 나오면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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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훈

(두 걸음쯤 더 걷다) 야, 그럼 대문으로 나오지 담 넘어 나오냐?

우광

도둑은 담을 넘어야지.

세훈

멀쩡한 대문을 놔두고 왜 담을 넘어?

우광

도둑이니까. 가방은 던졌잖아. 그렇게 훌쩍 넘어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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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훈

그거야, 니가 전에 하도 그러니까 이번에 그렇게 하자고 한

거지. 사실 그게 그렇지, 번거롭게 던지고 하는 게 더 이상한거지. 그냥 메고 나오면 될 걸

우광

그래도 도둑은, 그렇게 하는 게 맞아.

세훈

도둑한테 맞는 게 어딨냐, 애초에 틀렸는데

우광

아니야. 이건 아닌 것 같아. 다음엔 담 넘는 걸로 하자. 그게

맞는 것 같아.

세훈

야 니가 할 때 담 넘어. 난 무릎아파서 안되. 아, 난 몰라.

우광은 걸음을 멈추고 세훈이 앞서 가자 우광은 조금 더 서 있다 뒤 를 따라 간다.

#3 유치원 (낮) 선생님 앞. 아이들이 집에 가기 위해 가방을 들고 옹기종기 서있다.

선생님

여러분 오늘 선생님이 뭐라고 했죠?

아이들

...

선생님

물건을 주우면?

소미

(손을 들고) 물건을 주우면 경찰서에 갖다줘요!


14.

선생님

잘했어요. 그렇게 하는거예요. 자 조심히 모두 안녕! 월요일

일요일 오후 그들은 심심했다 / 이훈보

에 봐요.

#4 중국집 (낮) 자현은 카운터에 앉아있다 갑자기 화들짝 놀란다.

자현

여보, 소미 데리러 가야지.

김사장

(신문을 넘기며) 병구 보냈어.

자현

아. 그래? 그래도 당신이 자꾸 다니고 그래, 그래도 아빠가

가는 게 낫지.

김사장

(신문을 넘기며) 어 알았어.

#5 도로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병구.

#6 여관 (낮) 우광과 세훈이 앉아있고 앞에 가방이 열려 있다. 지갑과 현금, 패물, 통장, 카드 등이 있다.

우광

(통장, 카드를 나누며) 이번에도 이건 다 버리고 돈이랑 패물


그러게 들어 갈 때만 해도 별 것 없을 줄 알았는데, 이게 왠

걸 장롱을 여니까 히야-너도 봤잖아 담벼락에 유리 박힌 거 그게 다 이유가 있더라니까. (잠시 멈칫)그런데 그걸 넘어오라고?

세훈은 옆에 드러눕고 우광은 현금을 다 세고 고무줄로 묶고 그 중 한 장을 꺼내 천사 그림을 그린다.

세훈

다음은 어디로 갈까? 강남이 안 되니까 차 떼고, 포 떼고 어

렵네, 어려워 응? 어디로가?

우광은 계속 그림을 그린다.

세훈

어디로 가냐니까? 에- 왜 말이 없어? (자리에서 일어난다.)

계속 그림을 그린다.

세훈

또 그림 그리냐?

우광

세훈

그건 왜 자꾸 그리는데?

우광

그냥 좋잖아. 세상이 행복해지는 느낌. 이 돈을 쓰면 천사가

날아다니는 것 같을거야.

세훈

잘한다. 도둑이 무슨 천사타령이야, 그냥 살면 되지.

우광

(일어나며) 신림동으로 가자.

세훈

거긴 사람이 많은데, 보는 사람도 많아서 위험한 거 아냐?

우광

순대도 먹고 좋잖아. 사람이 많으면 돈도 많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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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훈

127

만. 그런데 꽤 많네.


14.

#7 버스 안 ( 낮 )

일요일 오후 그들은 심심했다 / 이훈보

우광과 세훈이 나란히 앉아있다. 버스 안에는 사람들이 많다. 잠을 자 고 있는 세훈과 창밖을 내다보는 우광.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났는지 세 훈을 흔들어 깨운다.

우광

내리자.

세훈

(하품을 하며) 벌써 다 왔어?

우광

여기가 좋을 것 같다. 내리자. (자리에서 일어난다.)

세훈

(뒤 따라 허겁지겁 내린다.)

#8 거리 (낮)

세훈

갑자기 왜? 신림동도 아닌데,

우광

여기가 작업하기에 좋은 것 같아. 카메라를 들고 정류장 사

진을 찍는다.

세훈

(웃으며) 그래?, 니 말이라면 맞지, 이제까지 우리가 누구 덕

에 승승장구 했는데, 명문대학 나온 머리가 어디 가겠냐. 근데 먼저 뭐 좀 먹자, 버스에서 좀 잤더니 배고프다.

우광

숙소 먼저 정하자.

세훈

방? 먹고 잡으면 되지.

우광

자고로 집이 있어야 사람이 안정되는 법.

세훈

(앞으로 나가며) 아 모르겠다. 배고파. 그냥 저기 가서 떡볶

이 하나 먹고 생각할래.


(가게로 들어서며) 안녕하세요. 떡볶이랑, 저기 튀김이랑 그

리고.. 순대도 좀 주세요. 순대는 간이랑 순대만

우광

(뒤따라 들어온다) 안녕하세요.

명희

어서오세요.

#10 포장마차 떡볶이가게 (낮) 다먹어간다.

우광

(지갑을 꺼내며) 얼마예요?

명희

떡볶이랑 순대, 튀김해서..

세훈

(오뎅 국물을 마시다.) 아줌마 이 동네는 큰 집이 어디에 있

어요? 부잣집.

명희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세훈

아 이친구가 사진을 찍거든요. 서울 시내 큰 집들 다니면서

대문 찍고 벽 찍고 하는 전시 준비 중이거든요. 집이 그렇게 안 커 도 보기에 좋으면 되요. 담도 있고 마당도 있고 그런 집도 좋고 허 름하지만 소문난 알부자들이 사는 곳도 좋고 작가들이 찾는 느낌 이란 게 뭐 복잡하고 그렇죠.

명희

어디가 그런곳이 있으려나.. 저기 위쪽으로 가면 큰집들이

있긴 하지만. 그게 볼만 하려나 나는 잘 모르겠네.

우광

(지갑을 연채로 듣고 있다.) ..

명희

(우광을 보고) 6천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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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훈

129

#9 포장마차 떡볶이가게 (낮)


14.

우광

(손에 쥔 천사그림 지폐를 건네다 발견하고 지갑에 넣는다.

일요일 오후 그들은 심심했다 / 이훈보

다른 돈을 골라 낸다.) 잘 먹었습니다..

#11 거리 (저녁)

세훈

아 덥네, 여름인가.

우광

그러게. (거리 사진을 찍는다.)

세훈

뭐해? 정말 사진 찍어?

우광

그럼, 취미잖아.

세훈

그리고?

우광

그리고, 어디 갈지도 생각해보고.

세훈

(웃는다.) 그럼 그렇지. 우리 선생님. (박수친다)

#12 아파트 (아침) 주차장에 차가 가득하고 단지가 조용하다.

#13 소미의 집 (오전) 소미, 김사장, 자현 자고 있다. 소미가 먼저 눈을 떠 거실로 나온다.


#14 여관 (오전)

131

세훈이 tv를 보고 있다. 우광은 샤워를 하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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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훈

이제 뭐 할거야?

우광

뭐하긴, 도서관 가야지.

세훈

(드러누우며) 또? 거길 왜?

우광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야.

#15 아파트 (오전) 소미 tv를 보다가 일어나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먹는다.

#16 도서관 (낮) 세훈은 지루한지 주변을 흘끔거린다. 우광은 책을 보고 있다.

세훈

(속삭이며)야. 야.

우광

..

세훈

(엎드리며) 하아

#17 아파트 (낮) 자현이 밥을 차리고 소미가 식탁에 앉는다.


14.

자현

소미야 가서 아빠 깨워.

일요일 오후 그들은 심심했다 / 이훈보

소미

(방으로 달려가며) 아빠~!

방안에서 소미의 목소리가 들린다.

소미

아빠, 아빠, 일어나래요. 밥, 진지드세요.

잠시 후 김 사장을 끌고 나오는 소미

김사장

(하품하며) 아 괜찮은데. 좀 더 자게 두지.

#18 아파트 (낮) 거실에 앉아서 과일을 먹으며 tv를 보고 있다.

자현

좀 있다가 소화되면 애 데리고 밖으로도 나가고 그래요. 평

일엔 장사한다고 바쁘고 주말에 안 놀아주면 언제 놀아줘요.

김사장

피곤한데..

자현

그런 생각이 애들에게 안좋은 영향을 준다니까. 그렇게 말해

도 또. 소미야 이따가 아빠한테 놀이터 가자고 해.

소미

#19 도서관 (낮)


밥은 먹었고, 얼마나 더 있을거야?

우광

일요일이니까 하루 종일 있어야지. 어차피 다들 집에 있는

데, 뭐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

세훈

그래도. 너무 심심하다. PC방 가자.

우광

아니. 혼자 다녀와.

세훈

그럼 목욕탕 가자 목욕탕 일요일인데 목욕해줘야지 시원하게

우광

아침에 샤워 했잖아.

세훈

그거랑은 또 다르지 탕에 들어가서 몸 지지만 일주일의 피

로가 샥~ 알잖아.

우광

그런데 도서관은 이렇게 싫어하면서 왜 따라오냐?

세훈

이거 섭섭하게 왜이래? 팀은 원래 같이 다니는 거야. 나중에

튈 때나 헤어지는 거지 미리부터 헤어질 필요는 없는 거다. 그때가 오면 너도 참 좋았다 할 거야. 그러지 말고 목욕탕이나 가자.

우광

니가 목욕탕에 다 가자고 하는걸 보니 어지간히 싫나보다.

세훈

아, 열탕에서 쓰러지는 게 낫지, 정말이지 여긴 더 못 있겠다.

우광

그래 나가자, 나가.

#20 아파트 (낮) 김사장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김사장

여보세요.

최사장

김사장, 나야. 어때, 오늘 일요일인데 한판 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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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훈

133

세훈과 우광이 커피를 마시고 있다.


14.

김사장

아, 여보세요. (작게) 예 알겠습니다. (크게) 잘못 거셨습니다.

일요일 오후 그들은 심심했다 / 이훈보

전화를 끊는다.

자현

누구야?

김사장

잘못 걸려온 거야.

자현

복덕방만 가봐 오늘, 오늘은 애랑 놀아줘, 낮에는 난 가게 가

볼 테니까. 이따 소미한테 물어봐서 아니라고 하면 (주먹을 쥐며) 알지?

김사장

(손을 저으며) 아니라니까. 잘못 걸려 온 거야. 소미야 좀 만

더 있다가 나가자

소미

#21 놀이터 (낮) 세훈과 우광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세훈

하아.. 심심하다. 뭐 재미있는 일 없나.

우광

PC방?

세훈

그런거 말고, 게임은 어제도 했고 밤에도 하고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거잖아. 그런거 말고 좀 더 특이한 거. 안해 본 거. 이 특별 한 일요일에 어울리는 특별한 것. 우리에게도 주말이란 황금같은 거니까.

우광이 놀이터 홍보판에 붙은, 경찰 홍보 포스터를 보고 있다.


우광

정말 재미있을 것 같은 게 있는데..

135

세훈

뭔데?

우광

경찰서에 가볼까.

세훈

(깜짝 놀라며) 경찰서? 왜?

우광

그냥 포스터 보니까 생각나서. 재미있겠지. 이름만 들어도

ABRAXASZINE18

짜릿하지?

세훈

아, 넌 아직 모르겠지만 난 절대 반대다. 경찰서 같은 거. 끔

찍해, 절대 반대.

우광

여기 봐 시민의 곁에 있다 잖아. 얼마나 친절한지 가보자.

세훈

가서 뭐라고 해. 가서 곁에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이렇게 말

하려고.

우광

우산을 빌릴까? 우산 빌려준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세훈

(맑은 하늘을 쳐다보며 ) 이 날씨에 우산을 빌려?

우광

그럼 가서 뭘 할까. 어디보자..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세훈

뭐 찾는데.

우광

분실물.

세훈

뭐를 잃어버려야 재미가 있을까.

우광 마땅한 게 없는지 지갑을 연다. 카드를 꺼내다가. 그 옆에 천사 그림이 그려진 천원짜리를 본다.

우광

(천원을 꺼내며) 이게 좋겠다.

세훈

그거?

우광

어. (웃으며) 이거

세훈

누가 돈 잃어버렸다고 경찰서에 가, 지갑도 아니고.

우광

그러니까, 재미있겠지?


14.

세훈

안 받아줄 걸. 지갑 잃어버려도 현금은 없어져도 신경 안 쓰

일요일 오후 그들은 심심했다 / 이훈보

잖아. 어쩔 수 없다고.

우광

돈이 아니면 되지. (천원짜리를 들고 하늘에 비춰본다. 천사

그림이 빛나 보인다. )

우광은 그네 근처에 천원짜리를 접어 던진다.

우광

가자.

#22 경찰서 (낮) 박순경 앞에 우광 앉아있다.

박순경

예?

우광

분실신고 하려고요.

박순경

예, 그런데, 방금 뭘 잃어버리셨다고 하셨죠?

우광

천원이요. (세훈은 뒤에 서 있다 멋쩍은 지 커피를 타 마시려

고 한다.)

박순경

(웃으며)천원...이...요..

우광

(웃으며) 예.

박순경

(버럭) 아니, 이 사람이 지금 실성했나. 일요일에 경찰서에

와서 한다는 소리가 뭘 잃어버려?

우광

천원이요.

박순경

이봐요, 세상에 누가 천원을 잃어버렸다고 경찰서에 와요.

일어나요. 일어나요. 어서!


우광

분실신고 못할 이유가 있나요?

137

박순경

이유같은 게 어디 있어요? 그리고 그걸 누가 찾아줘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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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봐요 저기 당신 친구도 저기서 부끄러워 하잖아요.

세훈 커피를 마시다 박순경의 시선을 피한다.

#23 놀이터 (낮) 소미의 손을 잡고 김사장이 터벅터벅 걸어온다.

김사장

소미야, 아빠 잠깐 어디 갔다와도 되? 소미는 조금 놀다가

들어가고.

소미

안되, 엄마한테 말할꺼야.

김사장

그래.. (기운빠진다.)

소미

그네 탈래.

김사장

그네, 그래, 그네.

#24 놀이터 (낮) 소미 그네에 앉고 김사장 힘없이 그네를 민다. 재미가 없는지 소미는 표정이 좋지 않다. 그네에서 내린다.

김사장

소미, 집에 가려고?

소미

아니 다른거 할래. (주변을 두리번 거린다.)


14.

김사장

그래..

일요일 오후 그들은 심심했다 / 이훈보

소미

어?

천원 짜리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다가가 줍는다. 김사장 그 모습을 보 고 웃는다.

김사장

이야. 우리 소미 돈 주웠구나. 덥지? 아이스크림 사먹으면

되겠다. 아빠랑 수퍼마켓 가자. 수퍼마켓에 들렀다가 집에 데려다 줄께.

소미

경찰서.

김사장

어? 경찰서?

소미

어, 주웠으니 가야지.

김사장

아니야. 이건. 소미 일요일 날 맛있는 거 사먹으라고 하나님

이 주신거야. 소미 이 번주에 착한일 많이 했지 엄마 청소도 도와주 고 아빠도 일찍 깨워주고 그지? 그렇잖아. 그러니까 이건 잘했다고 상주신거야. 가져.

소미

아니, 경찰서에 가야 되요.

김사장

아니라니까. 왜 뭐가 먹고 싶은 데. 돈이 부족해? 그럼 아빠

가 보테 줄께.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얼마?

소미

아빠.

김사장

응?

소미

저 돈 많아요.

김사장

(당황하며) 으응?

소미

지난주에 지지난주에 용돈 받은 것도 하나도 안 썼어요. 그

리고 선생님이 뭐 주우면 경찰서에 갖다 주라고 했어요. 경찰서에 갖다 줄래요.

김사장

소미야 돈은 괜찮아. 아빠 말 믿어 괜찮다니까. 천원은 잘 찾


지도 않아. 아빠도 가끔씩 잃어버리고 그래도 안 찾아. 그러니까 경

139

찰서에 안가도 되.

ABRAXASZINE18

소미

(표정이 안 좋다.)

김사장

괜찮다니까.

소미

아빠, 이거 경찰서에 갖다 주면 부동산 가셔도 되요.

김사장

(뜨끔하며) 괜찮다니까.. 음.. 유치원에서 그렇게 배웠다고?

그래. 그럼 가보자.

#25 경찰서 (낮) 우광은 앉아있고 박순경은 화가 나서 서있다. 세훈은 커피를 다 마셨 는지 쓰레기통을 찾고 있다.

박순경

안 일어나요?

우광

그냥 천원짜리가 아니예요.

박순경

그냥 천원짜리가 아니면, 만원짜리요? 금박이라도 되어있어

요? 그럼 또 모를까.

우광

금박 보다 중요한거죠. 그림이 그려져 있어요.

뒤쪽에 앉아있던 세훈이 슬그머니 일어나 다가온다.

세훈

(슬쩍 명찰을 보며 ) 성함이.. 박순경님..

박순경 씩씩거리고 있다. 우광은 앉아있다.


14.

세훈

박순경님.. 이 친구가 공부밖에 안 해서 세상 물정을 잘 몰라

일요일 오후 그들은 심심했다 / 이훈보

요. 세상에 어느 미친놈이 천원을 잃어버렸다고 경찰서에 신고를 합니까. 또 그걸 누가 찾아주구요. 안그렇습니까? 여러분 (주위를 둘러본다. 사람들이 없다. 머쓱해하며) 그런데 이 친구는 그것도 몰 라요. 보세요. 얼굴이 맹하니, 공부만 하다나온 놈 같잖아요. 10년 을 알고 지내도 속 좁고 머리 안돌아가는 건 여전해요. 그냥 옛날부 터 친구니까 같이 다니는거지 저도 갑갑하죠. 왜 안그렇겠어요.

박순경 자리에 앉는다.

세훈

그런데 이 친구도 왠만하면 안 그럴 텐데 그 돈이 또 보통

돈이 아니거든요. 이 친구 어머니가 약간 치매기가 있으셔서 어린 아이 같이 되셨는데 길 잃어버리면 전화하라고, 버스 잘못타면, 반 대 것 타고 오라고 그럴 때 쓰라고 주신 돈인데, 어머니가 또 거기 다 그림도 그려 주시지 않았겠어요. 자식 놈 잘 되라고 그랬는데, 그만 최근에 돌아가셨어요. 이 꼴을 보세요. 이 놈 효도한번 못했는 데 어머니도 떠나보내고, 그것도 잃어버리니 정신이 없어서 그래 요. 저도 전에 그 돈 아무 돈 인줄 알고 몰래 꺼내서 담배 사러 같 다가 다시 찾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수퍼마켓 갔다가 두부사 고 거스름돈 받은 아주머니 따라서 백 미터도 넘게 뛰어갔어요. 아 무튼 그게 돈이, 돈이 아닙니다. 그런 걸 이야기해야 하는데 이놈이 또 고집이 쌔가지고 가만-히 앉아 찾아내라고만 하고 있으니 보고 있는 저도 속이 타고 박순경님도 기가차고 그런거죠. 그러니까 박 순경님이 이해해 주시고, (다가가서 작게) 그냥 신고 접수만 해주세 요. 그럼 별일 없을거예요. 괜히 얘가 또 배워서 뭐 인터넷에 항의 한다. 뭐한다 하면 저도 부끄럽고 경찰서도 시끄러워지고 좋을 거


없잖아요. 그냥 애가 세상물정 모르고 실성했다. 생각하시고 부탁

141

드립니다.

ABRAXASZINE18

#26 경찰서 앞 (낮) 우광과 세훈이 밖으로 나온다. 우광이 웃고 있다.

우광

재미있었어?

세훈

뭐가 (크게 말하려다 놀라 ) 재미있어?

우광

그래도 재미있었지

세훈

큰일 날 뻔했지, 박순경이 화나서 인적조회라도 했어봐. 괜

히 골치만 아파지지, 이 동네 순경이면 길가다도 만날 텐데, 왜 그 렇게 융통성이 없어.

우광

그래도 재미있었지?

세훈

(한숨쉬며) 됐다. 가자. 배고프다.

#27 분식집 (낮) 밥을 먹다 갑자기 생각난 듯 세훈이 고개를 든다.

세훈

재미있었던 거 같아.

우광

뭐가? 아까 그거?

세훈

우광

이제와서?


14.

세훈

그때는 정말 정신이 없었어. 너야 조회해도 깨- 끗- 하지만

일요일 오후 그들은 심심했다 / 이훈보

난 아니거든. 난 좀 복잡해.

우광

정말?

세훈

어, 좀 뭐 이것저것 그래.

우광

아 그럼 나도 전에, 처음 만났을 때 큰일 날 뻔했네. 이거 알

고 보니, 세훈씨 흉악범.

세훈

그러게 내가 좀 흉악범. 그때 너 처음 만났을 때, 니가 사진

찍지 않았으면 나도 안 당황했을텐데. 너랑 실갱이 하다가 괜히. 뭐 덕분에 좋은 파트너가 생기긴 했지만..

우광의 전화가 울린다.

#28 경찰서 앞 (낮) 소미와 김사장, 우광, 세훈, 박순경이 서있다.

박순경

(어이 없다는 듯.) 허 참..

우광

고맙습니다.

세훈

고맙습니다. 이걸 찾게 되다니요. 정말.

김사장

하하.. 소미가 자꾸 경찰서에 가자고 하더니 하하 참. 이런일이.

세훈

그러게요.

우광 소미 앞에 몸을 숙이며 우광

고맙습니다.


박순경 안으로 들어간다.

143

#29 경찰서 앞 (낮)

ABRAXASZINE18

우광 세훈 앞으로 걸어가다. 우광이 돌아와 소미 앞에 무릎을 접고 앉 는다.

우광

(천원짜리를 꺼내며) 저기, 이거 네가 갖는 게 좋겠다.

소미

왜요?

우광

고마워서 그래, 여기 그림 보이지? 천사 그림.

소미

예.

우광

천사가 너한테 가고 싶데.

소미

예?

우광

아저씨는 이 천원을 못 찾을 줄 알고 포기하고 있었거든, 소

미? (고개를 끄덕인다.) 소미가 갖는 게 좋을 것 같아.

소미

괜찮아요.

우광

아니 소미가 꼭 가졌으면 좋겠다.

전화를 하던 김사장이 돌아온다.

김사장

소미야, 고맙습니다 하고 받아. 원래 어른들은 그럴 때가 있어.

소미

고맙습니다.


14.

#30 거리 (낮)

일요일 오후 그들은 심심했다 / 이훈보

세훈

와. 그걸 찾다니 정말 생각도 못했다.

우광

그러게 나도 생각도 못했는데, 놀랐다 정말.

세훈

아직 세상 살만한 것 같아.

우광

그래. 참 기분 좋다.

#31 아파트 (밤) 거실에 가족이 모여 있다.

소미

(돈을 내밀며) 엄마 이게 그거야.

자현

와. 정말이네. 우리 소미가 착한 일 했구나.

소미

그림도 그려져 있어. 여기에

자현

예쁘다. 내일 친구들한테 보여줘

소미

어, 내일 유치원가서 자랑할꺼야.

자현

그래 어서자.

#32 아파트 (아침) 바쁜 아침 소미가 유치원갈 준비를 하고 나가고 뒤따라 김사장이 서 둘러 나간다.

자현

애 잘 바래다 주고와요. 갔다가 집에 와서 밥 먹고 가요.


어 알았어.

#33 유치원 (오전) 소미와 아이들이 모여 있다.

꼬마1

거짓말 하지마.

소미

정말이야.

꼬마1

근데 왜 돈이 없어 천사 그림 그려진 돈 있다면서?

소미

어 내가 갖고 왔는데, 어디 갔지? 여기 있었는데.

#34 아파트 (오전) 설겆이를 마치고 밥통을 열어본다.

자현

(소파에 앉으며) 이양반이 밥 다 먹고가서 먹을 게 없네, 아.

다시 하기도 귀찮고, 짜장면이나 시켜 먹어야겠다.

#35 아파트 (오전) 병구가 음식을 내려놓고 있다.

ABRAXASZINE18

둘을 전송하는 자현, 천원은 거실 탁자 위에 놓여있다.

145

김사장


14.

병구

사모님,

일요일 오후 그들은 심심했다 / 이훈보

자현

왜?

병구

사모님은 왜 시켜드세요. 중국집 사장님이면 나와서 드시면

될텐데, 그리고 왜 또 돈은 꼬박 꼬박 내시는데요.

자현

가게서 먹는 건 밥 같아서 싫어. 이렇게 먹어야 짜장면 먹는

거 같지.

병구

그래도 사모님 배달 전화 받으면 사실 좀 그래요.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자현

잔소리 말고 돈 받아가, 어서 다른데서 또 배달 들어왔을라.

돈. 여기에.

병구

(받아들고) 사모님, 돈 모자라요.

자현

어?

병구

천원 모자라요.

자현

잠깐 기다려봐 .

자현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탁자위에 놓은 천원을 발견하고 병구에 게 건네준다. 병구는 인사를 하고 나간다.

#36 아파트 입구 (오전) 오토바이 앞에서 전화를 받는 병구

병구

여보세요. 예 사장님 나왔죠. 예?


올때 춘장 좀 사와. 너 돈 들고 나간거 있지? 그러니까, 그걸

로 좀 사와, 주문한게 안 들어왔어.

#38 아파트 입구 (오전)

병구

무슨 중국집에 춘장이 떨어져요. 사장님. 또 까먹고 안 시키

신거죠? 고스톱치다가, (시끄러운지 전화기를 떼며) 예 예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오토바이를 탄다.

#39 수퍼마켓 (오전) 병구 춘장을 10개정도 들고 계산대에 서있다.

선영

또?

병구

(한숨 쉬며) 예, 그냥 계산해주세요. 사모님한텐 비밀이예요.

돈을 건넨다. 천사가 그려진 지폐가 섞여있다.

ABRAXASZINE18

김사장

147

#37 중국집 (오전)


14.

#40 유치원 (낮)

일요일 오후 그들은 심심했다 / 이훈보

아이들이 시끄럽다.

선생님

무슨 일이예요?

아이들

소미가 거짓말해요.

소미

아니예요

아이들

맞잖아. 얘가 천사 돈 받았다고 했는데, 없데요.

소미

아니예요, 정말이예요. 어제 놀이터에서 아저씨들 돈 찾아주

고 받은 것 있어요.

선생님

모두 조용하세요.

#41 도서관 (낮)

세훈

(한숨쉬며) 또, 도서관이라니.. 정말. 파트너를 잘못 정했는지..

우광

달리 할일도 없잖아.

세훈

그래도 도서관은 아니지.

우광

저쪽에 가면 만화도 있고 역사책도 있으니까 한번 봐봐 생

각보다 재미있어.

세훈

아, 체질적으로 안 맞는 것 같아 도서관은, 아까 먹은 밥도

도서관에서 먹어서 그런지 소화도 안 되는 것도 같더니 어느샌가 또 다 꺼져서 배고프고.. 밥을 먹었는데도 영 기운이 없네.

우광

그럼 가서 빵 하나 사먹고 와. 돈 줄까.

세훈

그러지 말고 나가서 짜장면 한 그릇 먹자. 우리 요즘 너무 도

서관 밥만 먹은 것 같아. 매일 고만고만한 것만 먹어서 기운이 나겠냐.


우광

조금만 더 있다.

149

세훈

(책을 덮고 일어나며) 자자 갑시다 가.

ABRAXASZINE18

#42 거리 (낮) 소미가 바닥을 보면서 걷고 있다.

소미

아, 어디있지.

계속해서 바닥을 보고 걷는다.

#43 거리 (낮)

세훈

너 말야, 대체 도서관엔 왜 가는 건데, 거기, 도서관 말야, 거

기가 우리의 직업과 무슨 연관이 있어? 다른 사람들이라면 직업훈 련차 가서 공부하는건가 보다 하겠지만 우리는 또 아니잖아. 설사 관련이 있다고 해도, 뭐 방범시스템의 이해 그런거 보는 것도 아니 잖아. 아무튼 우리가 두서관에 가는건 말야 우리의 직업과는 하등 의 관계가 없는 거라니까. 오히려 우리의 직업이란건 한상 긴장상 태이기 때문엔 평소엔 긴장을 풀어줘야 하는 게 맞다고, 그런데 도 서관에 가면 긴장이 풀리겠어? 이렇게 딱 하고 앉아서 책을 보면 어때? 응? 오히려 긴장이 되겠지? 그지?

우광

잠 잘 잤잖아.


14.

세훈

아니, 아니, (손가락을 천천히 흔들며) 그런 소리가 아니야.

일요일 오후 그들은 심심했다 / 이훈보

내가 도서관에서 잠을 자는 건 쉬는 게 아니야 구부정하게 자서 뭐 가 도움이 되겠어 그건 그냥 그 뭐야. 도망치기 위한거지 쉬는 게 아니지.

우광

일종의 회피기제인가?

세훈

뭐?

우광

아냐?

우광이 앞을 바라보고 그 앞에 소미가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는 모습 이 보인다.

#44 거리 (낮) 소미 곁으로 우광이 걸어간다.

우광

뭐하고 있니?

소미

어? 아저씨. 안녕하세요

세훈

(반갑게) 안녕? 뭐하고 있었어?

소미

오늘 아침에 유치원에 가서 자랑하려고 아저씨가 준 천사돈

가져갔거든요. 근대 애들 보여주려고 하니까 없어서. 그러니까 애 들이 아저씨 돈 찾아준 거 거짓말이라고 천사돈 받은것도 거짓말 이라고 그래서 속상해서 일찍 나왔어요.

우광

그래?

세훈

아니 왜? 애들이 친구를 못 믿고 그래

소미

...


우광

소미야, 아저씨 들이랑 같이 찾아볼까?

151

소미

아뇨. 이제 집에 거의 다왔어요. (돌아보며) 없나 봐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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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아저씨는 어디 가는 길이었어요?

세훈

우리는 배고파서 짜장면 먹으러 가는 길이었지. 그래. 소미

도 같이 갈래? 아저씨가 짜장면 사줄 게

소미

어? 그럼 우리집으로 가면 되겠다.

#45 중국집 (낮) 하품을 하고 있는 자현

소미

다녀왔습니다.

자현

어? 소미야, 너 왜 벌써와? 오늘 수업 일찍 끝났어? 아니면?

어디 아파? 열 있어?

소미

(풀죽은 목소리로) 그냥 일찍 왔어요.

자현

그냥 일찍 오면 안 되지, 엄마가 매일 데리러 가잖아. 요즘

얼마나 위험한데 누가 우리 소미 데려가면 어쩌려고 그래?

소미

괜찮아요.

우광과 세훈 어정쩡하게 서있다.

자현

(발견하고) 아, 어서오세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눈짓으로

병구에게 메뉴판을 갖다 주라 한다.)

자현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무슨 일인데. 소미가 아무 이유 없이

수업을 빼먹고 집에 왔을리는 없고..


14.

소미

오늘 유치원에 가서 어제 천사돈 받은거 이야기 했는데 애

일요일 오후 그들은 심심했다 / 이훈보

들이 안 믿어요. 아침에 유치원가다 돈 잃어버렸나 봐요.

#46 아파트 (#35 회상)

자현 거실에 있던 천원짜리를 집으며 돈에 천사 그림이 그려져 있었 단 사실을 떠올린다.

#47 중국집 (낮) 자현 소미의 가방을 받아들고 계산대 근처로가 급히 계산대에 들어 있는 천원들을 확인해본다. 없다.

자현

(작게) 아.. 없네.

#48 중국집 (낮) 자현 소미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다가가 나란히 앉는다.

자현

그래서 애들이 놀려?

그때, 김사장이 들어온다.


자현

여보 이리와 봐요.

153

김사장

어? 우리 소미 벌써 왔네? 잘 갔다 왔어?

자현

그게 문제가 아라, 오늘 소미가 유치원에서 거짓말장이란

ABRAXASZINE18

소리를 들었데요.

김사장

왜? 누가 ,우리 소미한테 그런 소리를 해?

자현

어제 당신이랑 같이 돈 찾아 준 걸, 유치원에 가서 애들한테

얘기 했는데, 소미가 그 돈을 못 보여주니까 애들이 거짓말 장이라 고 한데요.

김사장

정말? 소미야 그 돈 어쨌는데.

소미

잃어버린 거 같아요.

김사장

그래? 그건 어쩔 수 없고, 우리 소미가 왜 거짓말장이야. 소

미야! 아빠가 가서 이야기 해줄까?

자현

애 아빠가 가서 이야기하면 애가 뭐가 되요.

김사장 분개하다가 짜장면을 먹고 있는 세훈과 우광을 발견한다.

김사장

어? 안녕하세요.

세훈

(어색하게) 아, 예 안녕하세요.

자현

(김사장을 쳐다보며 작게..) 누구셔?

김사장

어제 소미가 돈 찾아드린 분들이야.

자현

(환하게 웃으며) 그래?

자현 슬그머니 테이블에 다가가 앉는다.

자현

이야기를 들으셨을지 모르겠지만..

우광

아까 오다가 소미를 만나서 대충 듣긴 했습니다.


14.

자현

그래서 말인데요. 우리 소미를 위해, 내일 유치원에 가서 이

일요일 오후 그들은 심심했다 / 이훈보

야기를 해 주실 순 없을까요?

세훈

예?

자현

오늘 이 식사는 제가 대접할테니 내일 유치원에 가서 잠깐

이야기만 해주시면 되요. 일일교사 같은 거 있잖아요. 그런거라고 생각하시고.. 제가 유치원에는 미리 이야기를 해 놓을테니까 좀 부 탁좀 드릴께요.

세훈

그건 좀 지나친거 아닐까요? 애들 일인데 그래도.

자현

아뇨, 소미가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고, 두 분도 도움을 받으

셨다니 꼭 좀 부탁 드릴게요. 소미가 거짓말 안한 것도 알게 되고 애들이 배우는 것도 많을거예요. 꼬마들 교육시킨다고 생각하시고, 한번만 부탁드려요.

우광

음..

자현

아.. 혹시, 내일 일하세요?

우광

아닙니다.

자현

그럼 꼭 좀 부탁드릴게요. 그런데..실례가 아니라면 무슨 일

하시는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우광

도둑질요.

자현

예?

세훈

(깜짝 놀라며) 에, 에에, 야. 그걸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자현

예?

세훈

아, 사진작가입니다. 이 친구와 저는, 전 일종의 매니저 같은

거고 이친구가 작가. 평소에 사진은 시간을 훔치는 거다 뭐다 하더 니 갑자기 뜬금없이 도둑질이라고 하네요. 하하.

자현

아.. 하하. 특이하시네요.

세훈

하하. 그렇죠. 그러니까 작가를 할 수 있는거 겠죠.


우광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155

자현

아니예요. 예술 하시는 분들인데.. 그럴 수 있죠. 부탁드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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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소미가 그런 일이 없는데 수업도 안 끝났는데 온거 보면 속이 많이 상했나 봐요. 번거로우시겠지만 꼭 부탁 드릴께요.

세훈

저희가 시간이 좀...

우광

알겠습니다. 하겠습니다.

세훈 음식을 먹다 깜짝 놀란다.

#49 중국집 앞 (낮) 소미, 자현, 김사장 인사하고 세훈과 우광이 떠난다.

자현

안녕히 가세요. (소미를 돌아보며) 잘됐다 소미야. 그지?

소미

...

자현

왜, 우리 소미 왜 그래도 표정이 안 좋아.

소미

돈은 없어졌잖아요.

김사장

아빠가 돈 줄께.

소미

아뇨. 괜찮아요.

자현

여보, 지금 소미가 돈이 갖고 싶은 게 아니잖아요.

김사장

그럼 어떻게 해

자현

그럼 소미야, 아빠랑 찾아볼래?

소미

응.

김사장

(자현을 보며 작게) 그걸 어떻게 찾아?


14.

자현 김사장을 끌고 한쪽 구석으로 간다.

일요일 오후 그들은 심심했다 / 이훈보

자현

그러지말고 애가 기운 없는데, 뭐 벽보 같은 거라도 붙여봐

요. 그 천원짜리 어떻게 생겼는지 당신은 알잖아.

김사장

누가 돈 천원을 찾는데 벽보를 붙여?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자현

소미가 꼭 찾고 싶다 잖아요. 나도 못 찾을 줄은 알지만 그래

도 하는 모습은 보여야. 애가 기운을 차리죠. 겨우 천원 때문에 애 실망 시킬거예요?

김사장

아, 귀찮단 말야.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현

그럼 있다가 저녁 때 놀다 오게 해 줄게요. 오늘 일 내가 다

할게요.

김사장

정말? 오케이.

김사장 소미에게 다가간다.

김사장

소미야! 아빠랑 찾아보자. 한번 더 돌아보고 벽보도 붙이고

그러자 알았지?

소미

(기운나서) 응!

#50 거리 (낮) 우광이 골목을 다니며 사진을 찍고 있다. 집 앞 대문 사진을 찍는다. 사진을 찍다 웃음 짓는다.


#51 대문앞 (회상)

157

세훈이 조심스레 대문을 열고 나오고 그 모습을 가까이서 우광이 우

ABRAXASZINE18

연히 사진 찍는다.

세훈

어? 어? 어?

우광

어?

세훈

지금 사진 찍은 거요?

우광

예. 아 죄송합니다. 문이 예뻐서 찍으려다보니

세훈

아, 예. 그거 지워요 어서.

우광

(세훈을 훑어보고) 어?

세훈

왜요?

우광

당신 도둑이죠?

세훈

(놀라며) 무슨 도둑? 갑자기 사람을 왜 도둑이라고 해요?

우광

아니면 아니지 왜 놀랍니까. 역시 도둑 맞죠?

세훈

(목소리 크지 않게) 아니 이 사람이!

우광

자 봐요. 일단 자기 집을 대낮에 이렇게 조심스럽게 나올리

도 없고, 전혀 안어울리는 작은 가방도 하나 그것도 어정쩡하게 들 고 있고, 지금 큰소리도 못 내고. 다세대 주택이니까 큰소리 내면 안 되겠죠. 다른 집에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세훈

아니라니까! 난 약속이 있어 이만 가보겠소.

우광

같이 가요.

#52 거리 (회상) 세훈이 앞서 걷고 우광이 뒤 따른다. 멀리 경찰서가 보인다.


14.

우광

저기요. 도둑 아니면 신고하고 도둑이면 그냥 보내줄게요.

일요일 오후 그들은 심심했다 / 이훈보

마침 저기 경찰서도 있으니.

세훈

그게 무슨 소리요?

우광

도둑이 아니면 제가 허위사실로 고생 좀 하면 되고, 전 시간

은 많으니까요. 도둑이면 당신이 고생 좀 하는거죠.

세훈

무슨 그런 말이 있습니까?

우광

그러니까, 지금 솔직히 말하시고.. 도둑이면 봐줄테니까. 나

도 데리고 다녀요.

세훈

(멈추어 서서) 이봐요.

우광

세훈

생각해보쇼. 그래 설사 내가 도둑이라고 칩시다. 왜 당신을

데리고 다녀요?

우광

그건 그렇죠.

세훈

그러니까 난 이만 가겠소.

우광

전 그럼 신고하러 가겠습니다.

세훈

아, 정말 이사람 왜이래요!

#53 수퍼마켓 (낮) 선영이 전화를 받고 있다.

자현

아 정말 십년감수 했다니까

선영

왜?

자현

어제 전화로 말했잖아 우리 애가 어떤 사람들 돈 찾아줬다고.

선영


자현

그래서 고맙다고 선물로 천원을 받았는데,

159

선영

어 그랬는데?

자현

내가 아침에 짜장면 시켜 먹는다고 그걸 썼거든.

선영

에? 정말?

자현

ABRAXASZINE18

선영

그래서

준영이 들어온다. 돈을 달라는 시늉을 한다.

자현

그런데 아까 소미가 유치원도 안 끝났는데 일찍 온거야. 그

래서 왜 이렇게 일찍 왔냐고 물어보니까. 아침에 유치원에 가서 어 제 돈 찾아준 일을 이야기 하니까 애들이 돈을 보여 달라고 하더래, 그래서 소미가 보여주려고 했더니 돈이 없는 거야. 그러니까 애들 이 거짓말 장이라고 놀리고, 애들이 놀리니까 소미는 속상해서 일 찍 나오고 오는 길에도 그냥 못 오고 길에다 떨어 뜨린거 아닌지 고 개를 푹 숙이고 온 거야 그런데, 사실은 내가 썼거든 아침에 짜장면 시켜 먹느라,

선영

어쩌다가 그걸 썼어~

자현

나도 소미 말 듣고 생각났어, 아차 싶었지 그래서 얼른 가게

금고에 가보니. 그게 있을리가 없지.. 그런데 마침 어제 돈 찾아준 분들이 가게에 식사하러 온 거야. 그래서 내가 꼭 좀 내일 유치원에 가 서 소미가 거짓말 한 것 아니라고 일일교사로 말 좀 잘 해달라고 했더니 알겠다고 해서 잘 마무리 지었어.

선영

다행이네

선영이 조금 뒤로 비키며 계산대를 열어 준영에게 오천 원짜리 한 장


14.

을 준다.

일요일 오후 그들은 심심했다 / 이훈보

자현

그래도 정말 큰일날뻔 했지. 이거 우리 애한테는 비밀이야.

선영

그래, 정말 다행이네. 요즘 애들 영악해서 잘 믿지도 않는데,

그래도. 잘 해결됐네.

자현

어, 엄마가 큰일 냈지 정말

#54 거리 (낮) 소미와 김사장이 벽보를 붙이고 있다.

소미

아빠 저쪽에도 붙일까.

김사장

아니 저쪽엔 아까 붙였으니까, 이제 그만 붙여도 되겠다. 이

제 돌아가자

소미

..

김사장

(손으로 가리키며) 소미야. 봐봐 저기도, 저기도, 다붙어있잖아.

저쪽에서 우광이 걸어오고 있다.

#55 거리 (낮) 우광 소미에게 인사를 한다.

소미

안녕하세요.


우광

뭐하고 있니?

161

소미

아저씨가 준 천사 찾으려고 (벽보를 가리키며) 이거 붙이고

ABRAXASZINE18

있어요.

우광

그래? 금방 찾을 수 있겠다. 아마 누가 주웠으면 꼭 찾아 줄

거야. 소미도 그랬으니까. 그렇죠 소미 아버님

김사장

(살짝 당황하며) 그럼요. 우리 소미가 얼마나 착한데,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56 포장마차 (밤) 술을 마시는 둘

세훈

크아, (잔을 내려놓으며 ) 야! 그런데, 어쩌려고 유치원에 가겠데.

우광

뭐가. 가서 이야기만 하면 되는 건데, 좋잖아 아이들한테 진

실을 알려주고 좋지 뭐, 덕분에 선생님 노릇도 해보고

세훈

야, 생각해봐 도둑놈들이 무슨 수업이야. 우리가 애들한테

가르칠게 뭐가 있냐?

우광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 우리 한테도 분명히 배울게 있을

거야. 그리고 뭐 가르쳐 주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있었던 일 이 야기 해주고 여러분들도 그렇게 하세요. 하면 되는 거잖아. 쉬워, 오히려 학교 다닐 때 선생님한테 들었던 말보다 더 짧고 효과적으 로 사실만 이야기 해주면 되. 거짓말 할 필요도 없고, 옷만 좀 깔끔 하게 입으면 되지, 그냥 세수 깨끗이 하고 평상복 입고 가면 될 거야.

세훈

아 몰라, 내일 어쩌려고 정말. 그리고 이 동네 온지도 며칠째

인데 언제까지 있을거야? 너무 오래 있어도 안 좋아. 얼굴 팔리면


14.

나중에 오해 사.

일요일 오후 그들은 심심했다 / 이훈보

우광

아까 돌아다니면서 몇 집 봐뒀으니 걱정하지마. 요 앞 앞 수

퍼마켓이 제일 좋은 거 같아. 가게는 그렇게 크지 않은데 손님들이 많고 현금도 많아 보여, 내일 수업 전엔 좀 그러니까 수업 끝나고 가는 길에 들렀다가 다른 데로 가자.

세훈

이야, 우리 우광 선생님 벌써 봐두시다니 감탄스럽습니다.

우광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뭐 그럴것까지 있겠습니까?

#57 유치원 (낮) 아이들이 앉아있고 선생님과 우광 세훈이 서있다.

선생님

여러분, 여러분들이 어제 소미가 거짓말 했다고 했는데, 거

짓말이 아니었어요. 여기 두 선생님이 일요일에 소미가 물건을 찾 아준 분들예요. 모두 인사하세요

우광

안녕하세요.

세훈

안녕하세요.

어린이들 안녕하세요.

#58 유치원 (낮)

세훈

그러니까, 여러분도 돈이나 물건을 주우면 꼭 경찰서에 갖

다 주세요. 아저씨처럼 애타게 찾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과자 같은


박수치는 아이들

선생님

고맙습니다.

세훈

천만에요. 저희가 더 고맙습니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저희

가 언제 아이들한테 수업을 해보겠습니까.

우광

수고하셨습니다.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생각난 듯) 아, 아

이들 사진 좀 찍을 수 있을까요? 단체사진도 괜찮은데,, 저희도 이 런 일이 처음이어서 남겨두고 싶어서요.

선생님

천만에요. 이렇게 바쁜 시간 쪼개서 오셨는데, 저희가 더 감

사드립니다. (아이들을 보며) 얘들아 모여서 사진 찍자.

단체사진을 찍는다.

#59 유치원 입구 (낮) 둘을 선생님이 배웅한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요즘은 부모님들도 이런 거 잘 안하시려고 하

는데. 아이들한테 정말 도움이 됐어요. 소미가 거짓말 한 게 아니라 는 것도 밝혀지고, 아이들도 두 분의 이야기에 많이 배운 것 같아요.

세훈

아니예요 선생님. 저희가 더 고맙죠.

우광

고맙습니다. 정말 아이들한테 많이 배운 것 같습니다.

ABRAXASZINE18

어린이들 네.

163

것 사먹지 말고요. 알았죠?


14.

#60 거리 (낮)

일요일 오후 그들은 심심했다 / 이훈보

세훈

이야, 참 살다 살다 별짓 다해본다지만, 내가 선생님을 해볼

줄은 몰랐다. 아 그거 좋데, 아이들이 눈을 딱 뜨고 나만 보는데 아 정말 착하게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다 하게 되더라니 까. 그나저나 이제 여기도 떠나야 할텐데. 어디로 갈까요. 우광 선생 님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우광

그래야지요. (소미가 붙인 벽보를 보며) 천사님은 어디로 가

셨을까.

세훈

어딘가에 계시겠지.

#61 수퍼마켓 (낮) 선영 꾸벅 꾸벅 졸고 있다. 손님이 들어와 잠에서 깬다.

선영

어서오세요.

손님이 들어가자 생각난 듯 최사장에게 전화를 건다.

선영

(서랍을 열어 들여다보며) 어, 여보 난데, 어제 매상 입금해

야 되는데 언제올거야? 어? 그렇게 늦어? 뭐하는데? 또 고스톱치 고 있는거 아냐? 그러지 말고 한 시간만 빨리 와 가게세랑 다 입금 해야 되니까. 교대시간보다 한 시간 먼저와요? 알았지?

세훈과 우광이 들어온다.


#62 수퍼마켓 (낮)

165

세훈과 우광이 수퍼마켓에 들어선다. 돈을 정리하던 선영이 아래서

ABRAXASZINE18

랍을 살짝 열어둔다.

세훈

아- 덥네, 안녕하세요.

선영

어서오세요.

세훈

날씨 덥죠? 아 무슨 날씨가 벌써부터 이런답니까. 아직 7월

도 안됐는데, 이건 장마 지난 여름 날씨예요. 정말 이민이라도 가던 지 해야지,,

선영

그러게요.

세훈

아이스- 크림이 어느쪽에 있나.

우광

자꾸 아이스크림만 먹지 말고 과일 같은 걸 먹어

세훈

기다려~ 보세요. 일단 하나 먹으면서 고릅시다.

우광

(선영을 쳐다보며) 나이도 많은 녀석이 시끄럽죠?

선영

(웃으며) 아녜요, 애 같은 구석이 있는거겠죠.

#63 수퍼마켓 (낮) 계산대에 우광과 세훈이 서있다.

세훈

(웃으며) 계산해.

(선영이 금고를 연다)

우광

과일도 사야지, 또 자기 먹을것만 사네.

세훈

아차차 과일이- 어디에 있더라.

선영

밖에 있어요.


14.

세훈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며) 이모님, 거기 계시지 말고 과일 좀

일요일 오후 그들은 심심했다 / 이훈보

골라주세요. 사내놈들이 과일 볼 줄 알겠습니까. (손을 잡아끈다.)

세훈과 선영이 밖으로 나가고 우광은 슬그머니 카운터로 들어간다.

#64 수퍼마켓 (낮) 우광은 카운터 옆으로 가 열린 틈으로 안을 보다가. 천사가 그려진 천 원짜리를 발견하고 웃음을 짓고는 밖의 세훈에게 간다.

#65 수퍼마켓 밖 (낮)

우광

가자.

세훈

왜? (과일을 보며) 이거 맛있겠다. 이거 사가자.

우광

이거 주세요.

#66 거리 (낮) 과일봉지를 들고 걷는다.

세훈

(봉지를 들여다보며) 우광아, 얼마나 있더냐, 역시 수퍼마켓

이라 돈은 많지?


우광

그럼, 현금이 그득 하더라.

167

세훈

아, 얼마나 있었는데,

우광

적어도 다섯 뭉치.

세훈

이야.. 우리 여행이나 갔다 올까.

우광

그런데, 안 들고 나왔어.

ABRAXASZINE18

세훈

(멈춰서며) 왜?

우광

그 천원짜리,

세훈

무슨 천원짜리

우광

우리가 장난친 거

세훈

그거? 그게 왜?

우광

그게 거기에 있더라.

세훈

그게 왜 거기에 있어?

우광

그러게, 서랍을 딱 열고 돈을 집어 들려고 하는데 딱, 하고

거기에 천사님이 계시더라. 그래서 그냥 두고 나왔어.

세훈

아..(아쉬워하며) 아.. 정말 .. 참- 그게 왜 거기 있었을까.. 아..

정말, 에이 어쩔 수 없지. 인연이 아닌가보다 이 동네는

우광

그래 다른데로 가자.

세훈

그래 잘했다. 잘했어. 선생님 노릇까지 하고 와서 그걸 들고

갈 순 없지.

둘은 걷는다. 그러다 갑자기 우광이 소미가 붙인 벽보를 보고 말한다.

우광

우리 도둑질 그만할까?


14.

#67 경찰서 (낮)

일요일 오후 그들은 심심했다 / 이훈보

전화벨이 울린다.

박순경

예, 박순경입니다. 예, 사장님. 안녕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68 수퍼마켓 (낮) 박순경, 선영, 명희가 나와있다.

선영

제가 우리 바깥양반을 기다리다가, 하도 안와서 저기서 떡

볶이 집, 명희한테 전화해서 잠깐 봐달라고 했거든요. 그리고 이제 은행에 가려고 돈을 꺼내려고 보니까 돈이 비는 거 예요. 10만원이, 내가 어제 분명히 가게세 낼 거랑 다 해서 딱 맞춰 놨었거든, 딱 보 니까 오늘 돈이 없어진 거 예요.

박순경

혹시 잘못 세셨을 수도 있잖아요.

선영

박순경님, 수퍼마켓 사장이 돈 일이 천원도 아니고 십 만원

을 천원짜리로 치면 100장인데, 이걸 잘못 셀 리 없잖아요. 그리고 천원짜리중에 그림 그려진게 하나 있어서 하나는 그걸 젤 앞에다 묶어뒀거든요. 그런데, 그것도 없는 걸로 봐선 손 탄게 확실해요. 잔 돈이 이렇게 많은데 그걸 풀어 썼을리도 없고, 어느 놈인지 내가 꼭 밝혀서 쳐 넣지는 않더라도 혼은 내야겠다 싶어서 연락드렸어요.

박순경

그래서 어떻게 찾으시려고요?

선영

내 언제 이런 일이 있을까봐 감시카메라를 설치해뒀으니 한

번 보시죠.


명희

언니, 이 작은 가게에 그런 것도 설치해놨어?

169

선영

그럼, 뭐 큰 돈드는 것도 아니고 이런 일 있을까봐 내가 살짝

ABRAXASZINE18

설치해뒀지, 이건 나 밖에 몰라.

박순경

그럼 그걸 보죠.

#69 수퍼마켓 (#63 감시카메라 영상) 선영과 세훈이 밖으로 나가고 우광이 계산대 옆으로가 안을 들려다 본다. 카메라가 등져서 잘 안보인다.

명희

저놈이네, 저놈이야.

선영

저사람들이, 아니 저 놈들이, 아까 아이스크림을 산다 과일

을 산다 두 놈이 들어와서 시끌시끌하게 굴더니 저놈들이었네.

명희

어쩐지 낯이 익은데?

박순경

어디서 보셨습니까?

박순경 자세히 화면을 쳐다보며 놀란다.

박순경

저놈들이 !

선영

아는 사람들이예요?

박순경

아닙니다. 그냥 똘아이들인가 보다 했는데, 도둑놈이었네.

하긴 멀쩡한 정신으로 그런 짓 못하죠. 이노무 자식들

명희

어쩐지 낯이 익네, 가게도 한번 왔던 것 같고.. 그 뭐더라 뭐

한다고 했더라..

박순경

뭐라고 했었는데요?


14.

명희

(생각난듯) 아 맞다. 사진, 사진 찍는다고 했었어요.

일요일 오후 그들은 심심했다 / 이훈보

박순경

사진요?

명희

맞아요 사진, 카메라를 큰 걸 메고 떡볶이 먹으러 와서 이

것 저것 물어보는 거예요. 부자집이 어디냐고 그러면서 전시할 작 품 촬영 다닌다고 하면서 말하는 거 보니까 근처 여관에서 방 잡았 을 것 같던데.

#70 여관 (밤) 짐을 싸고 있다.

세훈

짐이라고 해봐야 몇 개 안되고 얼른가자. 이 동네서 참 이상

한 경험했네.

우광

가자. 그런데..

세훈

그런데..?

우광

그 천원짜리 꼬마애가 찾던 거 말을 해줘야하나.

세훈

야. 그건 정말 어쩔 수 없지. 가서 꼬마야 니 돈 거기에 있더

라 할 수도 없고 어떻게 알았냐고 하면 뭐라고 해? 수퍼마켓에 가서 아. 하고 우연히 금고 안을 들여다 봤더니 거기에 있더라. 이렇게?

우광

(행동을 취하며) 아니면 천사님이 손짓을 해서 열었더니. 이렇게?

세훈

그건 무조건 경찰서 행이지.

우광

별 수 없나.

세훈

별 수 없다. 그냥 가자. 아쉽지만.

문을 두드리는 소리


#71 경찰서 (밤)

171

박순경 앞에 세훈과 우광이 앉아있다.

ABRAXASZINE18

박순경

왜 말들을 안 하실까. 지난번에는 그렇게들 잘하시더니.

세훈

박순경님, 우린 안훔쳤어요.

우광

...

박순경

이 도둑노무 자식들 말이 되는 소릴 해라, 도둑놈들이 계산

대에 들어가 아래서랍을 열고 돈을 안 훔쳤다.

세훈

정말이예요. 그리고 우린 도둑도 아니고.

우광

..

박순경

아 정말, 안되겠네. 일단 오늘 밤 유치장에서 주무시고 내일

비디오 갖다가 보여 드릴테니 내일 이야기 하죠. 일단 오늘은 고생 좀 하셔야 할 겁니다. 우광씨

#72 떡볶이 가게 (밤) 돈을 세고 있다. 이상하게 생각하며 그림이 그려진 천원을 발견하는 명희

#73 떡볶이 가게 (회상) 준영이 떡볶이를 먹고 계산을 한다. 천사 그림이 그려진 천원 짜리를 건네준다.


14.

#74 수퍼마켓 (#68 회상)

일요일 오후 그들은 심심했다 / 이훈보

선영

박순경님, 수퍼마켓 사장이 돈 일이 천원도 아니고 십만원

을 천원짜리로 치면 100장인데, 이걸 잘못 셀 리 없잖아요. 그리고 천원짜리 중에 낙서가 되 있는 게 있어서 하나는 그걸 젤 앞에다 묶어뒀거든요. 그런데, 그것도 없는 걸로 봐선 손 탄 게 확실해요. 잔돈이 이렇게 많은데 그걸 풀어 썼을리도 없고, 어느 놈인지 내가 꼭 밝혀서 쳐 넣지는 않더라도 혼은 내야겠다 싶어서요.

박순경

그래서 어떻게 찾으시려고요?

#75 떡볶이 가게 (밤)

명희

아.. 그때.. 그럼 이게 혹시?

#76 수퍼마켓 (밤) 비디오를 틀 준비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때, 밖에 나갔던 최사장 이 들어온다.

선영

여보, 지금 가게가 이렇게 어수선한데 어딜갔다와요?

최사장

나야 뭐, 그냥 요 앞에..

선영

나 지금 뭐 좀 보고 있으니까 당신... 있다가 이야기해요.

최사장

그래. 나 먼저 들어갈게.


화면에 세훈, 우광이 나가고 아들이 들어오는 게 보인다. 계산대로 다

173

가간다.

ABRAXASZINE18

선영

어? 어?

전화가 울린다. 전화를 받는 선영.

선영

어, 명희야.

명희

(전화기) 언니 그 돈 말야 혹시 천사 그림 같은 거 그려져 있어?

선영

어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아?

cctv 화면에 선영의 아들이 돈을 한 뭉치 꺼내는 모습이 나온다.

명희

그 돈, 준영이가 아까 우리 가게에서.

선영

그래 명희야, 지금 비디오 보다 알았어. 나중에 전화할게. (

전화를 끊으며) 내 이놈의 자식을..

선영 전화번호를 누르며 밖으로 뛰쳐 나간다.

#77 거리 (밤) 명희는 집으로 가다가 소미가 붙여는 벽보를 발견하고 보다 전화를 건다.


14.

#78 아파트 (밤)

일요일 오후 그들은 심심했다 / 이훈보

자현

여보세요. 예, 명희언니.. 아 정말요? 아 잘됐다. 언니가 직접

주세요. 내일 소미 보낼게요.

#79 수퍼마켓 (밤) 준영이 귀를 잡힌 채로 끌려 들어온다.

선영

너, 누가 도둑질을 가리키디, 엄마가 돈을 안줘 어? 왜 가게

돈에 손을 대?

아들

그게 아니라.. 아 아아 이거 좀 놓고

선영

이걸 왜 놔! 너 오늘 실컷 맞아봐라. 이놈의 자식 내가 버릇

을 고쳐놓아야지

아들

그게 아니라 아빠가.. 아.. 아

선영

아빠..가?? ( 안쪽을 쳐다보며 ) 여보!!

#80 경찰서 (밤) 선영 박순경에게 사과한다.

선영

죄송합니다. 괜히 번거롭게 해드려서.

박순경

아닙니다. 해결되었다니 다행이네요.


나와

우광

무슨 일이죠?

박순경

혐의가 없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세훈

아 정말입니까? 이야 그거 잘됐네요. 그거 보세요. 우리 아

니라니까요.

우광 그대로 앉아있다.

우광

..

박순경

안나와?

우광

..

박순경

나오십쇼. 죄송합니다.

우광 자리에서 일어나 나온다.

#81 경찰서 앞 (밤) 선영, 박순경 사과하고 우광과 세훈은 경찰서를 떠난다.

세훈

이야, 거기 털었으면 큰일 날 뻔 했네 그지?

우광

어.

세훈

히야. 정말 경찰서에 이틀 동안이나 갔다가 아무일 없이 나

오더니 닌 정말 복 덩어린가 보다.

ABRAXASZINE18

박순경

175

박순경 유치장으로가 우광과 세훈이 있는 유치장 문을 연다.


14.

#82 거리 (밤)

일요일 오후 그들은 심심했다 / 이훈보

우광

세훈아.

세훈

어?

우광

우리 도둑질 그만할까?

세훈

왜?

우광

그냥. 좋잖아. 기술도 배우고 그러면 이사 다닐 필요도 없고

세훈

음.

세훈

그럴까?

둘은 계속 걸어간다.

<끝>


177

ABRAXASZINE18


크레딧 / 판매처 기획 /편집 / 발행 김종소리 디자인 setsetset 발행일 2013. 8 문의 abraxaszine.com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의 저작권은 그것을 만든 사람들 에게 있습니다. 무단으로 따라하시거나 사용하시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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