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gn.sewolho416.org 세월호 참사 철저한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안전한 나라 건설을 위한 특별법 제정 등 촉구 천만인 서명
민권연대 월간지
본 4호
(2014. 6.)
월간
본; 6월
4
편집자의 글
발행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민권연대)
발행일
2014년 6월 9일 (4호)
블로그
http://mag-mkyd21.tistory.com
문의
mag.mkyd21@gmail.com
17
예술, 그 본질적 가치
차이코프스키
승리의 대포소리, 1812년 서곡
5
시선집중
세월호 그리고 국정조사, 특검, 특별법
21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국내경제
추기경이 개성공단을 방문한 까닭은? 세계경제
유럽의회 선거가 남긴 것
7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31
미래의 거울, 역사
스승을 만나다
이달의 역사
민권연대 원로회의 홍갑표 선생님
두 죽음과 6월 항쟁 그리고 세월호 참사 동아시아 역사칼럼
조선 청소년들이 부조(父祖)를 멸시하도록 만들어라
14 민족의 블루오션 6.15공동선언
컬러이슈
40
세상의 모든 무기
해경장비는 열악하지 않았다
편집자의 글
http://mag-mkyd21.tistory.com/43
이제 본격적인 여름입니다.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한 6월 항쟁이 일어난, 통일의 이정표인 6.15 공동선언 발표 된 6월입니다. 녹음은 이미 푸르러 제자리를 찾았지만 우리는 웃을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떠나간 지 두 달이 되어갑니다. 49재도 지낼 수 없는 실종자들은 아직 도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아무 것도 진행된 것 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유족과 함께 끝까지 촛불을 들어야 합니다. 지방선거가 끝나고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은 이제 본색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더욱 가열 차고 끈질긴 투쟁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왜 아이들을 구조하지 않았는 지 반드시 밝혀내야합니다. 절망이 희망으로 되살아나는 우리 사회를 만들기 위해, 더욱 더 앞장서 싸워나가 겠습니다. 편집자 드림
시선집중
세월호 그리고 국정조사, 특검, 특별법 http://mag-mkyd21.tistory.com/44
월호 참사가 발생한지 한 달 반이 지
세
관계자를 증인으로 불러 조사하기 때문에 각
났지만 갈수록 의혹만 확대될 뿐 진상
종 의혹을 풀 수 있는 반면 다수당이 증인 채
은 전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에 각계에서는
택을 가로막는 등 방해할 수도 있는 단점이 있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그 수단으로 국
다.
정조사, 특검, 특별법 등을 요구하고 있다. 이 와 비슷한 요구는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문제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특검은 효과 가 없다, 국정조사는 시간끌기용이다, 이런 주 장도 하고 있다. 국정조사와 특검이란 무엇인 지, 어떤 장단점이 있는지, 그리고 진상조사 를 위한 가장 좋은 방안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먼
저 국정조사란 국회가 국정 주요 현안 에 대해 진상규명과 조사를 하는 것으
로 정부를 견제하는 국회의 고유 권한이다. 국 정조사 대상 기관은 국가기관, 광역시도, 정부 투자기관 등이다. 국정조사는 여야 합의만 있 으면 언제든 실시할 수 있고 국회의원이 정부
5
이번 세월호 국정조사 합의 과정에도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을 증인으로 채택하는 문제로 여야가 대립하다 비서실을 조사 대상에 넣고 비서실장이 보고를 하도록 하는 식으로 절충 해 가까스로 합의를 이뤘다.
다
음으로 특검은 수사의 공정성을 기대 할 수 없거나 수사가 공정하게 이뤄졌
다고 볼 수 없을 때에 도입하는 제도로 검찰의 고위간부나 검찰 수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고 위공직자가 수사 대상이 됐을 때 실시한다. 특 검은 수사권을 가진 변호사가 소환조사, 압수 수색 등을 통해 수사를 하기 때문에 국정조사
시선집중
에 비해 더 강력한 조사가 가능하다. 하지만 추천받은 변호사를 대통령이 임명하는 방식으로 구성되는 임시조직이기에 수사 경험 이 부족한 문제, 일단 검경 수사가 끝난 사안 을 다시 수사하기 때문에 새로운 증거를 찾기
고 가족대책위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 이 나오고 있다. 국정조사나 특검의 한계를 극 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볼 수 있지만 여당의 반대를 얼마나 제어할 수 있으며, 얼마 나 빨리 채택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도 있다.
어려운 문제, 정부나 법원의 협조가 없으면 수
국정조사, 특검, 국가조사기구 설치는 하나만
사가 어려운 문제 등으로 인해 큰 성과를 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진행할 수도
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이런 단점을 극복하려
있으며 이를 통해 상승효과를 볼 수도 있다.
면 검경 수사 전에 처음부터 특검을 해야 하 며 이를 위해 상설특검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는 주장도 있다.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조사를 하든지 결국 정 부여당의 방해는 불 보듯 뻔하며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나선다. 일각에서
세월호 가족대책위가 초반에 특검 도입을 주
국정조사 무용론, 특검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
장하다 특별법 제정으로 입장을 선회한 것도
도 이런 문제 때문이다.
특검으로는 진상규명이 어렵다는 이유 때문 이다.
하
지만 중요한 것은 국민의 힘을 믿고 이 를 하나로 모으는 것이다. 이번에 국정
그렇다면 특별법은 무엇일까?
조사가 합의되는 과정에서 세월호 가족대책 위가 사흘 동안 국회에서 농성을 하며 정치권
족대책위나 여러 정당·단체들이 요
가
을 압박한 게 큰 힘이 됐다. 또한 많은 국민들
구하는 특별법은 철저한 진상규명을
이 가족대책위를 지지, 성원한 것도 영향을 끼
위한 국가기구 설치, 피해자 지원과 재발방지
쳤다. 결국 진상조사의 수준은 진실 은폐 세력
를 위한 제도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가운
에 비해 국민들이 얼마나 힘을 모으느냐에 달
데 국가기구 설치는 정부와 국회로부터 독립
려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국정조사 합의
적인 국가조사기구를 설치하는 것으로 조사
의 한계를 지적하기에 앞서 이런 점을 고민해
범위도 성역 없이 설정하며 강력한 권한을 주
봐야 한다. 6
스·승·을·만·나·다
우리민족의 역사를 삶에 담다
홍갑표 선생님 http://mag-mkyd21.tistory.com/45
“자주 보는데 여기서 이렇게 보니 또 다르네 허허허. ‘본’ 잘 보구 있어. 아주 정답던데. 정다워” 만나뵙자마자 기자대접을 잔뜩 해주신다. 선생님댁에 도착하니 책상위에 인쇄물이 한가득이다. 인터뷰를 부탁드린 본기자(이하 ‘본’)보다 인터뷰 준비를 더 꼼꼼하게 해놓으셨다. 한장한장 들쳐보니 이야깃거리가 그윽하다. 덕분에(?) 준비한 질문은 내팽겨쳐졌다. 대신, 우리민족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선생님의 삶을 듣는 것으로 인터뷰는 대체되었다. *홍갑표 선생님과의 인터뷰는 4월 21일 진행되었습니다. 7
분단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은 유년생활 ; 세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다 본 기자(이하 본): 6.25 전쟁때는 어린시절이 셨죠? 어린시절 이야기부터 듣고 싶어요. 홍갑표 선생님(이하 홍) : 아버지가 여기 사 셨는데(경기도 양주) 돼지좀 키우다가 망하고, 전염병이 돌아서 여기서 좀 내려가 포목을 하 다가 또 망해서 서울로 가셨다는거지. 그래가 지고 거기 신당동 꼭대기 유락동에서 목수일 을 하시다가 나를 막내로 낳았어. 나 낳을 때
▲ 한국전쟁 당시 세균전
돌아가셨으니까 아버지 얼굴을 몰라. 큰댁에서 마련해줘가지고 다시 양주에서 오막
그 다음에 비행기 폭격을 한번 받아가지고 죽
살이를 살았는데 초등학교 5학년때 전쟁이 나
을뻔 하다가 살고. 그게 두 번째 죽을 고비지.
가지고. 어머니가 1.4 후퇴때 돌아가셨는데 이
요 손가락 짤라진 얘기를 해야겠는데 내가 칠
동네에서 돌아가셨어.
봉단 소년단 지도부장을 했어. 나무하러 가서
“나는 세균전 피해자야.”
수류탄하나를 얻었는데 요만한 뇌관이 있어.
그렇게 허다가 그때에 바로 염병에 걸린거야. 본 : 염병이요? 홍 : 응. 세균전 피해자야. 죽다 살았지. 근데 우리 누님이 살리신거야.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뜨거운 물을 갖다가 맥이니까 땀을 쭉 흘 리믄서 벌떡 일어나게 됐다고.
그걸 짤라가지고 화약맨들어서 깡통 맨들어서 이렇게 던지다가 날라가 버렸어. 그게 세 번째 죽을뻔 헌거지. 그러구 인제 누님이 도와주셔서 장돌뱅이를 했지. 그때 뭐 팔 수 있는 건 비누, 핀이니, 양 초 이런것들 등에 지고 거기 덕정리 장, 동두 천 장. 의정부 장. 이런데 1년동안 다니다가 학 교를 다녀야지 않겠느냐 해서 다시 시험을 쳐 8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서 학교를 다니고, 그래서 서울대를 가게 된거
척단 회장을 하게 된거지.
지. 사범대학 역사교육과였어.
시험보라 그런것도 시험시간 잊어버리고 농
어렸을 때 그거는 지워지지 않아. 내가 가장 가슴아픈게 내가 11살인가 12살인 가에 18살짜리 우리반 애가 있었는데 면 소년 단장을 했는데 국군이 들어오자마자 죽여버렸
촌활동하다가 와보니까 자네 왜 시험 안봤나? 허허허 그럴 정도였지. 본 : 지금으로 치면 농활대장 같은 건가요?
지. 내 마음이 좋을 리가 있나. 내 친구 엄마도
홍 : 그렇지. 그런데, 왜정시대때 일본의 통치
여맹위원장 했다고 죽여버리고. 찔레꽃이 피
를 갖다가 어느 정도 인정하게 하는 목적을 갖
면 그 생각이 나지. 미국놈들 쳐들어와서 강간
고 계몽이라는 이름으로 그런 활동이 있었거
하고 양잿물 먹고 아주 그...
든, 그 전통이 계속해서 남아있었다구. 근본 적인 농민문제가 아니라 그냥 농민이 게을러
인생의 전환점이 된 농촌계몽운동
서 못 사니까 게으른 걸 극복하라든가 문자계 몽 그 따위식 농촌활동이 만연을 하고 있었어.
본 : 네. 그럼 대학에 가셔서는 4.19에 참여하 시고 학생운동을 하시게 된거예요? * 홍갑표 선생님은 대학생으로 직접 4.19에 참여하 셨다.
그래서, 내가 “농촌운동은 개량주의적인 그런 방법은 안되고 농민문제를 구조적으로 접근 하는 변화로 나가야 한다. 농촌의식이 고양되 어야 한다.” 그런 발언을 했지. 그 당시만 해
홍 : 내 운명을 바꾼거는 그전에 농촌계몽운
도 이런 말을 한 사람 없었어. 이게 호응이 크
동을 한거야. 고3때에 돈암동성당에서 세례를
고 좋았지.
받고 그리고 사범대학을 가서는 가톨릭 학생 회장을 하고 또 대한카톨릭학생회 총연합회
54년전 민주화의 거리에 선 청년 홍갑표
부회장을 했어. 그때부터 농촌 계몽대 활동하 자고 헌 놈이 춘천대학교 다니던 앤데 이 놈이
(4.19 사진을 보며)
운명을 바꿔논거야.
본 : 그럼 4.19때도 향토개척단 회장으로 참
그렇게 농촌운동을 하다가 서울대학교 향토개
여하셨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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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홍 : 응, 그때가 거의 비슷한 즈음이야.
맞고 그런거거든. 그러고 4월 19일날 우리가 정 식으로 나간거지. 고대뒷산에 모여가지고 학생
본 : 올해가 4.19 54주년이고 또 촛불을 크게
회장들이 이야기 했지. 그때 나가서 마당에서
열었잖아요. 그래서 제일 궁금한게 4.19때 이
멍석깔고 어르신들 노래도 가르치고.청계천에서
야기인데요.
지금 시의회자리까지 간거야. 거기가 국회의사
홍 : 4.19 원인이야 다 알테고. 맨 처음에 내가 사범대학 피켓을 딱 들고 용두 동을 출발을 했어. 그 당시 학생회장이랑 총무 랑 셋이서 동원해서 나갔지. 그 전날 고대생들이 나와가지고 이정재, 임화 수. 이놈들한테 광장시장 근방에서 체인으로
▼ 4.19 당시 대학생이었던 홍갑표 선생님(오른쪽 끝)
당이었어.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연설을 하더라 구, 거기서 내가 “여기 있어봐야 저 소리밖에 못 듣는다. 경무대로 틀자!” 거기서 광화문 앞까지 갔어. 그니까 따라오드라구. 그런데 광화문에서 물을 뿌리는거야. 바리케이 트도 있고. 그때 외쳤지. “고맨고! 있으맨있으!” 앞으로 나갈 놈은 나가고 있을 놈은 있으라는거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지. 순 엉터리야 허허.
홍 : 향토의식초혼굿이라는 건데 향토의식이
근데, 대학생 양 옆으로 양아치, 구두닦이 이
다시 돌아오게끔 굿을 한다는 뜻이야. ‘사대
런애들 필사적으로 싸워 잘 싸워. 제 5열이라
주의 살풀이’ 그 연극도 했지. 그 춤도 가서
고 그랬지. 걔네들을.
배웠어, 탈춤. 문화운동쪽으로 나갈뻔 했다고.
소외받고 절박한 사람들이니 더 그런것 같어.
허허
한이 맺혀서 그러는거지.
그러고, 파주에서 한 3년 교사를 하다가 70 몇년도부터 1999년까지 경신중학교 평교사
민족의 정기를 품고 - 의식운동으로의 전환 본 : 그럼 4.19 이후에도 쭉 농촌운동을 하셨 어요? 홍 : 인제 졸업을 내가 하고 나니까 사범대면 졸업허면 선생으로 가야하잖아. 근데 앞에서 모범을 보여야 할게 아니야. 그래 가지고 전라 남도 순천 광양으로 들어갔지. 거기서 지금 아 내도 만났고. 그 다음에는 의식고양, 의식운동으로 바꿔가 지고 ‘원귀마당쇠’라는 탈춤을 중심으로 해서 방향을 전환을 했는데 어트게 보면 참 선구자 적인 역할을 했다고 했겠지. 그것이 마당극으
로 있었지. 그러다가 남민전 문제가 터지고 동지들이 다 감옥에 들어가구. 옥인동에 끌려가서 고문당 하고 녹초가 다 되고. 그러다가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이 됐지. 민족 정기구현회 회장도 하고. 지금은 민권연대 활 동하고. (인쇄물 사진 하나를 발견하고) 본 : 이 무예도보통지라는 것은 뭐죠? 홍 : 무예도보통지는 조선조에서 군사교본이 야. 본 : 그럼, 선생님도 무예를 하셨어요?
로 발전을 했으니까.
홍 : 뭐 흉내만 내는거지. 허허.
본 : ‘원귀마당쇠’요?
“자주는 상식이야 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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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전통무예교본인 무예도보통도 국회의원회관 토론회 (가운데)
성이나 최근 세월호 참사까지. 선생님께서는 본 : 민족문제와 역사문제에 대해 특히, 많은 투쟁을 해오셨는데 어린시절의 영향이 크셨 나요?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 궁금해요. 홍 : 난리도 아니지. 그런데, 중요한거는 한국 사회에서 무력으로 민주정권을 세운다는 거
홍 : 어렸을 때부터 외세에 대해서는 아주 싫
웃기는 얘기야. 모든 힘을 정권이 잡고있는데.
어했지. 모든 악은 외세라고 생각을 한거지.
불법으로 어떻게 다 하는데.
외세가 싫은건 자주밖에 더 있겠어? 반외세자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어. 합법적으로 진보진
주지. 누구라도 상식을 가진 사람은 다 외세가
영이 정권을 장악해야 돼. 그게 우선이야 최우
싫지. 외세가 좋은 사람은 거기에 빌붙어서 사
선. 너무 명료하지 그거는.
는 사람들이지 뭐 있나?
자기 힘이 딱 서고 주도권이 잡혔을 때 가능 한거지 휘둘휘둘한 상황에서는 제대로 된 게
시국이야기
아니야. 진보당이 정권 장악할 때까지 끝까지 나가는
본 : 그럼 요즘 얘기를 좀 부탁드려볼께요. 남
거고.
북관계도 그렇고, 얼마전까지 있었던 4.19 농
그리고, 일희일비할 거 없어. 의식이 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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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서고 할려면은 제대로 사물을 봐야 할 거 아
***
니야. 라디오 텔레비전 교과서까지 다 망쳐가
인터뷰를 마치며 선생님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는 과정 아니야. 의식 마비를 시키고 있다니까
진보당으로 출마하는 민권연대 회원들이 아주
애들이. 이거를 풀어주는 작업을 우리나름대
훌륭하다는 말을 재차 강조하셨다.
로도 해야돼.
마지막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후배들에게 해
우리두 또 돈 내가지고 방송국 신문 내가지고
주고 싶은 말씀을 부탁드렸다.
주장을 더 해야지.
“너무나 잘하고 있는데, 내가 오히려 배우는 걸. 좋은 말씀이 어딨어. 할말이 없어. 같이 열 심히 해야지. 허허허“ 선생님은 민족분단의 비극을 온몸으로 체험했
***
던 유년시절부터, 64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언
홍갑표 선생님께서는,
제나 역사와 나란히 걷고 계셨다.
1939년 4월 1일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에 입학하 신 후 가톨릭운동과 농촌운동을 활발히 펼쳐 오셨고, 4.19혁명 당시 대학생으로 직접 참 여하셨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민족정기구현회에서 활동 을 해오셨고 현재 민권연대 원로회원으로 운 동을 이어가고 계십니다.
컬러이슈
민족의 블루오션
6.15 공동선언 http://mag-mkyd21.tistory.com/46
2014년 9월 19일, 인천아시안게임에 북녘선수단이 참가한다. 북한은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부터 2003년, 2005년 속칭 ‘미녀응원단’을 보냈다. “짝짝짝짝짝” 짝짝 이 소리에 맞춰 응원하는 모습에 한국에서는 많은 화제가 되었다. 김향청 재일동포 3세는 기자로 평양을 방문해 한겨레21에 그 후일담을 들려주었다. 그에 따르면 미녀응원단은 보통 지원한 예술계통 학생들을 대상으로 오디션으로 뽑 았다고 한다. 나라에서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뭐라 할까. 화장하기 좋아하고 예쁜 옷 입기 좋아하는” 학생들이 자천한다는 것이다. 과연 올 해도 이들을 볼 수 있을까?
7
컬러이슈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이러한 남북교류가 가
615공동선언의 정신은 분단 60년 동안 다른
능한 배경은 뭘까. 바로 615 공동선언이다.
체제와 다르게 살아온 방식을 이해하고 존중
2000년 6월 13일 TV에 놀라운 장면이 나왔
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서 결혼을
다. 그날 김대중 대통령은 평양의 순안공항에
하고, 다른 사람들이 모여 단체를 구성하는데
내려 마중 나온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를
있어서도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존중은 기본이
했다. 이 역사적인 장면을 시작으로 분단 60
다. 하물며 60년 동안 헤어져 살아 온 당사자
여년을 정리하는 615 시대가 시작 되었다. 그
들이야 말을 해 뭐하겠는가?
날의 감동과 충격은 역사의 물꼬를 텄고, 여전 히 한반도에서 거스를 수 없는 힘으로 작용하 고 있다.
615공동선언은 모두가 잘 사는 통일의 길을 보여주었다. 남한의 기술과 자본, 북한의 지하 자원과 노동력을 접목하면 경쟁력이 있다는
사람들은 노래로 부르고 사진으로만 보던 금
것은 이미 증명되었다. 갈수록 높아지는 남과
강산을 손으로 만지면서 관광을 했다. 군사요
북의 과학기술의 융합은 새로운 시너지 효과
충지인 개성에 개성공단이 생기고 중소기업
를 발휘할 수 있는 성장 동력의 가능성도 보여
은 그곳에 투자를 했다. 통일의 체험을 하게
주고 있다. 높은 수준의 남북경협은 우리민족
된 것이다. 615공동선언의 가장 큰 가치는 만
의 경제성장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 질서를 재
남에 있다. 60년 동안 매일 어느 순간 갑자기
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생각나고 보고 싶었지만 만나지 못했던 이산 의 응어리가 풀어졌다. 적대하던 사람들이 만 나서 이야기하고 겪어보면서 친구가 되었다. 평화의 갈망, 통일의 갈망이 바로 615공동선 언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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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개성공 단의 3단계 공사 중 1단계공사가 완료되지도 못한 사항에서도 2005년 1491만달러 수준의 생산액이 2010년에 이르러서는 3억 2332만 달러에 이르렀다. 예초 계획했던 2000만평 규
컬러이슈
모의 3단계 공사(1단계공사부지 100만평)가
효과가 54억~71억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분
마무리되었다면 생산액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단으로 인해 발생하는 국방예산 등 분단비용
높은 수치가 나왔을 것이다.
도 삭감되어 삶의 질을 향상하는 예산으로 전
북한의 각종 경제개발 특구는 점차 확대되고
환 될 것이다.
있다. 얼마 전 발표된 13개 지방 급 경제개발
물론 쉽지만은 않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소
구는 외국자본 유치를 통한 지방 경제 개발에
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배우면서, ‘무찌르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경제개발구에는 외국기
자 공산당’을 배웠던 시절이 있었다. 이처럼
업 설립이나 합영기업 설립이 가능하며 50년
분단을 악용하는 한국사회 구조는 6.15 공동
협력 기간을 보장받는다고 한다. 경제개발구
선언의 생활력을 계속 가로막고 있다. 요즘도
는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보장되며 각종 특혜
크게 다르지 않다. 박근혜 정부가 이야기했던
보장과 투자재산과 소득보호가 명시되어있다.
“통일대박”은 쪽박이 났고 남북관계는 최악으
우리나라의 적극적인 투자가 이루어진다면 개
로 달려가고 있다.
성공단을 뛰어넘는 남북합작 사업이 가능하다 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미래와 경제의 활로는 통일에 있다. 세계 경제가 긴 침체에 빠지면서 국내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러시아, 중국을 지나
대기업을 비롯한 경제주체들은 새로운 출구를
일본으로 연결하는 철의 실크로드인 철도의
찾고 있다. 또한 우리 사회 민주주의 회복도
연결은 예상되는 물류비 수익이 엄청날 뿐만
분단을 극복해야 가능하다. 한반도가 세계의
아니라, 왕성한 인적, 문화 교류가 활성화 되
중심이 되고 세계 모두가 상생하는 새로운 불
면서 물류교류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될
루오션은 바로 통일이다. 새로운 한반도의 첫
가능성도 있다. 2003년 산업은행 발표에 의하
걸음, 바로 6.15 공동선언에서 시작될 것이다.
면 2003년 기준 향후 10년간 경의선의 경제 16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
승리의 대포소리, 1812년 서곡 http://mag-mkyd21.tistory.com/47 1812년 서곡 듣기 ▶ http://youtu.be/VbxgYlcNxE8
제 3차 세계대전 직후 2040년 영국. 민주주의와 자유를 잃은 지독한 파시즘 경찰국 가인 미래의 영국을 배경으로 그에 대항하는 인간의 힘을 박진감 있게 보여주는 영 화 브이포벤테타. 가면을 쓴 주인공 ‘V’가 마지막 장면에서 국회의사당을 날려버리 는 대포소리 배경음악이 바로 ‘1812년 서곡’이다. 혁명에 나선 V가면의 주인공들 은 독재의 상징 국회의사당에서 팡, 팡, 팡 폭탄이 터질 때 한명씩 가면을 벗고 진정 한 사회의 주인이 된다.
예술, 그 본질적 가치
프랑스와 러시아의 국가
3부는 프랑스의 국가 ‘마르세유(Marseille)의 노래’가 나폴레옹 군대를 상징하듯이 나타
그리스 병사가 페르시아에게 승리한 것을 알
난다. 마지막 4부에서는 프랑스 국가 선율과
리기 위해 뛴 42.195km에서 유래한 마라톤.
러시아 선율이 엉키면서 치열한 싸움을 묘사
마라톤이 페르시아의 후예인 이란에서 열렸던
한다. 격렬한 선율이 얽히면서 어느덧 구 재정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제외되었듯이 1812
러시아의 국가인 ‘신이여 차르를 보호하소
년 서곡은 프랑스에서 연주되지 않는다. 1812
서’가 강렬해진다. 곡은 절정으로 치달으며
년 서곡은 프랑스 황제였던 나폴레옹에 대한
황궁인 크렘린(Kremlin)을 상징하는 종소리와
러시아의 승리를 기념하는 곡이기 때문이다.
16발의 대포 소리로 대미를 장식한다. 나폴레
그만큼 이 곡은 19세기 러시아 사람들의 애국
옹 군을 물리치고 모스크바를 탈환한 러시아
심을 강하게 호소하는 걸작이다.
민중의 기쁨이 들리는 듯하다.
1812년 서곡은 대포소리와 종소리가 나오는
평화로운 시골, 농민의 반격
웅대한 곡이다. 15분에 달하는 이곡은 크게 4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부는 침략을 당한 어
1812년 서곡의 주인공은 러시아 민중과 나
둡고 침울한 분위기 속에 현악기들이 숨죽인
폴레옹이다. 당시 나폴레옹은 유럽에서 시민
채 연주한다. 이 선율은 전쟁의 불길한 그림자
혁명의 전파자이자 전쟁영웅이었다. 루이16
를 묘사하고 있다. 2부는 나폴레옹이 쳐들어
세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권력을 잡
오고 마침내 터진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 4가
은 나폴레옹은 공화정을 배신하고 황제에 등
지 러시아 민요 선율이 러시아의 고통과 슬픔
극한다. 나폴레옹은 유럽정벌의 야욕에 정복
을 연주한다.
전쟁을 계속하고 대륙봉쇄령으로 영국을 고
18
예술, 그 본질적 가치
립시킨다.
통 뒤에 찾아오는 긍지와 자부심의 환희가 담 긴 곡이 바로 1812년 서곡이다. 러시아는 70
러시아는 프랑스의 일방적인 요구에 거부했
년 뒤인 1882년 이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고 65만의 나폴레옹의 대군은 모스크바를 침
위해 전쟁 중에 불탄 모스크바 중앙 대사원이
공한다. 1812년 9월, 모스크바에서 120km 떨
재건한다. 차이코프스키는 이 승리에 바치는
어진 보로디노 전투에서 승리한 나폴레옹은
거대한 서곡을 작곡한다.
모스크바로 진격했다. 모스크바의 겨울은 혹 독했다. 러시아는 모스크바를 불태우고 보급
애국심이 담긴 곡
로를 막아 프랑스군은 식량과 탄환을 차단당 했다.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를 넘어 전 세계적인 작곡가다. 그는 초기 러시아 민족음악보다 서
러시아 민중들은 강철같이 단결하여 러시아군
양 낭만주의 음악을 주되게 다뤘다고 비판받
을 지원했다. 민중들이 자신의 집과 터전을 지
았다. 그렇지만 그는 뛰어난 실력으로 그를 비
키기 위해, 조국을 위해 반격에 나선 것이다.
판하던 이들보다 더욱 더 훌륭하게 러시아 민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그들의 간절한 기도
족성을 풍부하게 잘 담아냈다.
와 지원은 추위를 이겨냈다. 나폴레옹 군이 장 악한 모스크바는 살아있는 러시아 민중들에
차이코프스키는 친구이자 스승이었던 니콜라
게 포위된 바다였다. 6개월간 추위와 굶주림
이 루빈스타인이 권고로 이곡을 6주 만에 작
을 이겨낸 그들은 마침내 승리했다.
곡한다. 초연은 1882년 8월 모스크바 교회의 광장에서 열렸다. 차이코프스키는 당시 대성
죽음 같은 고통을 견딘 러시아 민중들, 그 고
19
당 광장에서 관악기를 추가 편성한 오케스트
예술, 그 본질적 가치
라, 여러 교회의 종들, 포탄이 장전된 16문 대 포를 준비했다. 폭죽과 불꽃을 쏘는 그야말로 웅장하고 거대 한 연주였다. 하지만 의견이 분분해 당시 대포 는 큰 북으로 대체했다고 한다. 후대에 차이 코프스키 탄생 150주년을 기념한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대성당에서 연주할 때 는 실제로 대포와 종이 사용됐다. 1812년 서곡 CD에는 볼륨을 최고로 올렸다 가 스피커가 터질 수 있다는 경고문이 쓰여 있 다. 그런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연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주자들이 대포소리와 종소리 효과를 내기 위
Tchaikovsky,1840-1893)는
해 화재를 일으킬 정도로 에피소드가 많은 곡
시대의 러시아 제국의 작곡가, 지휘자이
이기도 하다.
다. 러시아 민족주의 음악과 낭만주의 경
낭만주의
향의 곡을 작곡했다. 발레음악인 백조의 러시아 민중의 애국심과 저항정신을 잘 보여
호수,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속의 미
주는 1812년 서곡이 보여주듯이 예술의 본질
녀와 비창교향곡, 바이올린협주곡 등으
적 가치는 시대상의 반영이 아닐까.
로 유명하다.
20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추기경이 개성공단을 방문한 까닭은? http://mag-mkyd21.tistory.com/48
21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염수정 추기경과 천주교 서울대교구 소속 신
국민들이 남북관계의 현주소를 짚어볼 수 있
부 7명이 21일 개성공단을 방문했다. 우리나
는 나름의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라 추기경이 북한 땅을 밟는 것은 이번이 처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일시적으로 폐쇄되기
음이다.
도 했던 개성공단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의미 도 있었다. 특히 한국 중소기업들의 입장에서
추기경의 첫 방북! 당연히 이는 호사가들의 입
는 향후 개성공단의 확대발전 가능성을 내다
에 오르내릴 만 한 소재다. 분단 역사상 처음
볼 수 있는 희망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이니까! 게다가 남북관계가 살얼음을 걷고 있 다보니 추기경의 방북에 거는 일종의 기대감
사실 남측 중소기업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도 있는 듯 했다. 또 8월에 예정된 프란체스코
개성공단이 한창 확장일로에 있던 2000년대
교황의 방한 때 혹시 깜짝 방북이 성사되는 것
중반보다 더욱 심각하다. 외국계 거대 금융자
이 아닐까 하는 추측까지 꼬리를 물고 있다.
본과 독점 기업들, 그리고 재벌의 납품단가 후
그만큼 추기경의 개성공단 방문에 거는 우리
려치기, 난데없이 날아드는 특허침해 소송, 인
국민들의 기대감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재와 기술 빼내가기 등 이중 삼중의 고통을 당 하고 있는 것이 중소기업의 실상이다. 당연히
당연히 천주교 측에서는 추기경의 첫 방북이
90% 가량을 차지하는 중소기업에 고용된 우
부담스러울 법 하다. 천주교 쪽은 “남북관계가
리 노동자들의 삶은 나날이 피폐할 수밖에 없
민감한 시기임”을 핑계로 방북 일정을 비공개
다. 노동조합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기업이 많
로 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다보니 기댈 곳도 마땅치 않다. “그나마 직장 에 다닐 수 있는 것이 어디냐”는 반문이 자연
어찌되었든 염수정 추기경의 개성공단 방문은
스레 나오는 것도 우리 사회의 중소기업이 처
22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히 해외 공장을 늘리는 방식을 선호하고 있지 만 오로지 저임금 하나만을 바라보고 해외로
중소기업주들은 그동안 인건비라도 아껴볼 요
나갔던 중소기업들의 해외이전 행렬이 점차
량으로 중국으로,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동남
사라지는 것이다.
아로, 급기야 서남아시아에 있는 방글라데시 까지 공장부지를 찾아 떠돌아야 했다. 이제는
생존 위기, 혹은 한계 상황에 처한 중소기업
그것도 어려워지니까 “더 이상 옮길 곳이 없
에게 있어서 개성공단은 하나의 “오아시스”와
다”, “이제는 아프리카로 가야 되냐”는 이야
도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 2012년 말 기준
기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이들 나라의 저임금
개성공단 노동자의 월 최저임금은 월 63.8달
노동자들이 각성하면서 노동쟁의가 늘어나고,
러로 중국 청도공단의 33%, 베트남 딴뚜언공
경제가 발전하면서 노동집약적 산업의 투자
단의 67%에 불과하다. 토지 가격은 ㎡당 39
는 잘 안받아주는 분위기가 강해지는 탓이다.
달러 수준으로 청도(100~200달러), 딴뚜언 (200~260달러)보다 현저히 낮다. 이정도면
노동자 임금이 낮게 형성되어 있는 나라들의
기업주 입장에서는 어마어마한 특혜다. 의류
사정이 이렇게 달라지다보니 노동집약적 분야
신발 봉제 관련 노동집약 산업에 종사하는 기
에 종사하는 중소기업들의 해외 이전도 급감
업이라면 더 말할 나위 없다.
하는 추세다. 서울경제신문의 분석에 따르면, 실제로 해외에 공장이나 설비를 옮긴 기업의
물론 이 같은 특혜는 개성공단이 민족 내부 거
수 지난 2002년 1,149개사에서 2013년 말 현
래라는 특수한 전제조건을 갖고 있기에 가능
재 125개사로 급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
한 것이다. 무엇보다 “말이 통한다”는 것도 다
전자나 현대자동차 등 재벌들은 지금도 여전
른 해외 공단이 가질 수 없는 개성공단만의 장
23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점이 된다. 이는 기계를 많이 사용하는 분야와
단으로 아예 공장을 옮겨버리면 어떻게 하느
는 달리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생산성 향상과
냐는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우려도 이 같은 고
직결되기 때문이다.
용 파급효과 때문에 상당부분 해소될 가능성 이 높다.
개성공단 입주업체들이 활성화되면 한국 내 여타 중소기업들의 영업에도 긍정적 영향을
최근 개성공단 입주업체들 중 의류산업에 종
미치게 된다. 123개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은
사하는 중소기업들은 일시적인 공단 폐쇄의
현재 한국 내 협력업체가 약 6,000여개에 달
아픔을 딛고 ‘시스브로’라는 공동브랜드를 출
하고 이들 사이의 거래규모만 연평균 48억 달
범시켰다. ‘시스브로’는 시스터와 브라더의
러나 된다. 개성공단 업체들과 남측 기업들 사
합성어로, “한민족인 남과 북은 서로의 형제
이의 연계가 깊다보니 개성공단 입주업체들
이자 자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들은 공
의 생산 활동이 한국 경제 전체 생산에 직간
동 브랜드를 출범시킨 후, 홈쇼핑, 인터넷쇼핑
접적으로 미치는 효과, 생산유발효과는 47억
몰, 대형마트 등 국내 유통시장과 수출시장에
4368만 달러에 달하고, 부가가치는 같은 기간
뛰어든다는 전략이다.
동안 13억 7817만 달러에 이르렀다. 염수정 추기경의 이번 방북이 ‘시스브로’ 브 특히 취업에 대한 파급 효과도 상당한 것으로
랜드 공식 출범과 더불어 개성공단의 새로운
나타났다. 개성공단 입주 기업들의 북측 근로
도약을 약속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
자가 1만 명 늘어날 때 개성공단과 연계를 맺
해 본다.
고 있는 남측 기업의 고용도 5천 명 정도 증 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측 기업이 개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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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유럽의회 선거가 남긴 것 http://mag-mkyd21.tistory.com/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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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유럽에서 의회 선거가 있었다는데... 5월 22~25일 까지 유럽의회 선거가 있었다. 유럽의회는 유럽연합 이사회(Council of the European Union)와 더불어 유럽연합 성원들 의 최고의사결정 기구로 각국의 인구수에 비 례하여 회원국별로 의원수가 배분 된다. 언론 에서는 이번 선거로 반유럽연합(EU)를 내건 극우정당들이 부상했다는 평가들을 일제히 내 놓고 있다. 유럽통합이 좌초하고 있다는 이야 기도 들린다. 유럽연합에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배경
국가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폴란드 ㄹ마니아 네덜란드 벨기에, 그리스, 포르투갈, 헝가리, 체코 스웨덴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덴마크, 핀란드, 슬로바키아 아일랜드, 리투아니아 라르비아 슬로베니아 룩셈부르크, 키프로스, 에스토니ㅏ 몰타 계
의석수 99 72 50 33 25 22 18 17 13 12 8 7 6 5 736
▲ 유럽의회 국가별 의석수 기준 : 2009년 6월 실시 유럽의회 선거 이후
지식이 필요하다. 한편 유로존은 유럽연합의 단일화폐인 유로화
유럽연합은 알겠는데 유로존은 뭐지?
를 국가통화로 도입하여 사용하는 국가나 지 역을 말한다. 1999년 1월 1일 유로화가 공식
신문을 보다보면 유럽연합이라는 말과 함께
도입되면서 탄생했다. 현재 유럽연합 회원 국
유로존(Eurozone)이란 말이 등장한다. 유럽연
중 유로화를 쓰는 나라는 독일, 프랑스 등 18
합은 대다수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유럽 국가
개국 이다. 유럽연합 가입국이면서 유로를 사
들의 연합이다. 유럽 내 단일시장을 형성하는
용하지 않는 나라로는 영국, 덴마크, 스웨덴,
등 경제·사회 발전을 촉진하며, 공동외교안
불가리아, 체코, 리투아니아, 헝가리, 폴란드,
보정책을 수립해 국제무대에서 유럽의 목소리
루마니아, 크로아티아가 있다.
를 높이기 위해 만들어졌다. 2013년에 크로아 티아가 가입하면서 총28개국이 가입해 있다.
이들 국가들은 왜 유로존에 가입하지 않는 것 26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일까? 첫 번째 이유는 가입요건이 되지 않는
어 통화정책을 사용하지 못할 수 있다. 예를
국가들이 있다는 것이다. 유로존 가입조건은
들어 독일은 경제여건이 좋고 프랑스는 경제
재정적자 규모가 국내총생산(GDP)의 3% 미
여건이 좋지 않다고 해보자. 프랑스 입장에서
만일 것, 정부부채 규모가 GDP의 60% 이내
는 경기활성화를 위해 기준금리를 낮추고 시
이거나 개선 중일 것, 물가상승률이 최저 3개
중에 화폐를 많이 공급해야 한다. 하지만 독일
국 평균보다 ±1.5% 이내일 것 등 이다. 경제
의 경우는 경기가 좋은 상황에서 시중에 돈이
가 불안정한 나라들이 이러한 요건을 충족시
더 많이 풀리면 물가가 상승해 좋지 않을 수
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중앙은행은 특정 국 가의 상황에 맞게 정책을 운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영국, 덴마크, 스웨덴 등의 나라들도 위의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이렇게 보면 유로존 가입이 뭔가 상당히 좋지
물론 그렇지 않다. 이들 국가들이 유로존에 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각 국가마다 유리한 점
입하고 있지 않은 이유가 더 중요한 문제인데,
이 있다. 먼저 달러 경제권에 대응하는 유로화
유로존에 가입하면 통화정책의 독자성을 상실
경제권을 형성하면서 세계적인 영향력을 확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로존의 전체적인 금융
할 수 있다. 또한 독일이나 프랑스 등 자본주
정책 방향은 유럽중앙은행(ECB)이 설정한다.
의가 더 발달된 나라들은 유로존에 묶여 있는
유럽중앙은행은 독점적인 화폐 발행권한을 가
국가들의 시장에 더 접근하기가 용이하다. 나
지고 있고, 유로존 전체의 기준금리를 결정한
아가 이들 나라들은 수출에도 유리한 여건이
다. 예를 들어 독일 중앙은행이 독일의 기준금
조성된다(※ 이와 관련해서는 아래 단락을 참
리를 정하고 화폐를 발행하는 것이 아니라 유
조). 반면 경제가 취약한 국가들은 자금을 조
럽중앙은행이 유로존 전체 차원에서 기준금리
달하기 쉬워진다. 예를 들어 그리스가 자국 스
를 설정하고 화폐를 공급한다는 것이다.
스로 돈을 빌릴 때 보다 유럽중앙은행이 뒤에 있다면 돈 빌리기기 더 쉬울 것이다.
따라서 각 국가들은 자국의 경제여건에 맞추 27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경제위기시 취약함을 드러낸 유로존
반면 독일 등 경제규모가 큰 국가들은 유로화 로 인해 많은 이득을 보게 되었다. 독일 마르
하지만 유로존은 경제위기 상황에서 장점보
크화를 쓸 때 보다 독일은 유로화를 쓰면서 가
다는 그 취약성이 드러났다. 각 국의 경제여건
치가 떨어진 화폐를 사용하게 된다. 독일 경제
이 다른 상황에서 환율 등의 조절 메커니즘이
여건만을 반영하는 마르크화에 비해 유로화는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경
그리스, 아일랜드 등 경제규모가 작은 나라들
우 경제위기가 오면 원화가치가 급락해 수출
의 여건도 반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일은
이 호전되거나 - 통화가치가 덜어지면 수출에
유로화를 사용함에 따라 가만히 앉아서 수출
유리하다 - 해외에서의 여행이 늘어나 경기가
에서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회복되는 여건이 형성된다(물론 여기서 서민 경제가 좋아지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정 유럽통합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독일이 그리스 등의 위기 국가들을
하지만 유로화는 상황이 좋지 않은 그리스의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 환율의 경기 조절 메
사정이 반영되는 것과 함께 경기가 괜찮은 독
커니즘이 작동하지 않게 되고, 금융통화정책
일 등의 현황이 반영된다. 그리스의 경제상황
이 유럽중앙은행 중심으로 결정되면서 위기
이 좋지 않다면 그에 맞게 통화가치가 떨어져
국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경제위기에서 벗어
외국인들이 그리스로 관광 가기가 쉬어져서
날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독
그리스는 경기회복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일 등의 국가들이 위기국가들에게 재정적 지
하지만 유로화는 경기가 괜찮은 독일 등의 경
원을 해 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독일은 그
기여건이 함께 반영되므로 그리스 경제여건
리스 등을 지원하려 하지 않았다. 독일 국민들
만큼 유로화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다. 그 결
도 ‘왜 우리가 그리스를 지원해야 하나’라는
과 그리스는 경기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오고
생각이 컸다.
있지 못하다. 지원을 할 경우에도 경제위기 국가들이 허리 28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띠를 졸라 맬 것을 요구했다. 그에 따라 그리 스 등의 위기국은 공공부문의 구조조정, 국유 재산의 매각, 사회보장제도의 축소 등의 긴축 정책을 펴야 했다. 더군다나 지원받은 돈은 각 국의 민중들을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라 국제 투기자본의 빚을 갚는데 쓰여 졌다. 당연히 민 중들은 저항할 수밖에 없었고, 기존 정치체계 와 유럽질서에 대한 회의를 가질 수밖에 없었 다.
유럽의회 선거가 보여주는 것 이러한 상황에서 치러진 유럽의회 선거는 극
석(기존보다 +19), 영국 22석(+22), 스페인 4석
우정당들의 부상과 좌파의 약진으로 막을 내
(+3), 오스트리아 4석, 네덜란드 5석, 그리스 3
렸다. 주도권을 잡고 있던 기독교연합 국민당
석 등 최소 70석 이상의 제3정치세력으로 부상
과 사민당 계열은 후퇴했다. 유럽의회 내 최다
할 전망이다. 극우 성향의 영국독립당은 100년
교섭단체인 중도우파 유럽국민당그룹(EPP)은
넘게 유지돼온 보수-노동 양당체제를 깨고 제1
제1당 지위는 유지했다. 하지만 기존 274석에
당으로 부상했고, 프랑스 국민전선도 25%의 득
서 62석이 준 212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표율을 기록하며 창당 이래 최대 성과를 오렸 다. 독일에서도 극우 신생정당인 ‘독일을 위한
반EU를 내건 극우정당들은 주요 정치세력으
대안’(AfD)이 7%의 득표율로 7석의 의석을 확
로 부상했다. 각국 극우정당들은 프랑스 22
보했다.
29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에 눈이 돌아간 것이다. 극우세력이 약진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긴축에 반대하며 유럽연합에 문제제기를 해온 좌파그 룹도 약진했다. 유럽연합좌파/북유럽녹색좌파 (GUE-NGL)는 5.7%로 2009년에 비해 8석이 늘 어 43석 이상을 거둘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그 리스에선 유럽연합의 긴축정책에 반대하는 급 진좌파연합(시리자)이 집권 신민당과 사회당을 꺾고 전국 단위 선거에서 처음으로 1위를 차지 했다. 시리자는 그리스 내에서 새로운 좌파 정치 세력으로 부상해 왔었다. 이는 단순히 유럽 민중들이 극우적 성향이 커졌 하지만 이러한 현상을 두고 단순히 유럽 민중들 다기 보다는 새로운 대안 세력을 요구하고 있다 이 극우세력화 되어 간다고 평가할 순 없다. 앞 는 것을 보여준다. 위기가 심화될수록 그 요구들 서 살펴봤듯이 이번 유럽의회 선거는 중도보수 은 이후 더욱 커져 갈 것이다. 유럽연합 내의 정 정부의 긴축정책과 현재의 기존 유럽연합 시스 치지형이 어떻게 변화해 갈지 주목해 봐야 한다. 템에 대한 한계에 대해 유럽 시민들이 반발한 성 격이 크다. 대중의 불만을 담아내지 못한 기존 정당 구조에 대한 불신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상 황에서 뚜렷한 대안 세력이 없다보니 극우세력 30
미래의 거울, 역사
두 죽음과 6월 항쟁 그리고 세월호 참사
80년대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서 “직선제 쟁
http://mag-mkyd21.tistory.com/50
쟁> 과정에는 잊을 수 없는 두 죽음이 있다.
취”라는 소중한 성과를 얻어내어 절차적 민주 주의의 기틀을 마련한 투쟁인 87년 <6월 항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회장이었던 박종철 열사. 열사는 전두환 정권에 의해 연행되어 잔 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을 당하다 1987 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 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5월 18일, 광 주항쟁 7주기 추도미사 도중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음을 폭로하였다. 대공경찰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의 주도 아래 모두 5명 이 가담한 고문치사사건을 단 2명만이 고문에 가담한 것으로 꾸미고, 총대를 멘 2명에게는 거액의 돈을 주었다는 사실이 폭로된 것이다. 국민들은 들고 일어났다. 5월 23일 <박종철 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 회>가 결성되었고, 6월 10일에 규탄대회를 갖기로 결정하였다. 6월 10일은 노태우가 민 정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날이기도 했다. 5월 31
▲ 박종철, 이한열 열사
27일에는 전국의 재야지도자 2200여 명이 함
가 전투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
께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이하 국
아 쓰러져 한 달 동안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
민운동본부)를 결성하였고, 명동에 있는 향린
었다. 당시 이한열 열사가 머리에 최루탄을 맞
교회에서 발기인 대회를 열어 <호헌 조치 철
고 연세대 학생 이종창씨에 의해 부축당한 채
회 및 직선제개헌 공동쟁취 선언>을 발표하
피를 흘리는 사진은 전두환 독재정권의 폭압
였다.
적인 무력진압의 잔인성을 여실히 드러낸 사 진이었다.
6월 항쟁과 함께한 이한열 열사. 열사의 마지 막 한 달은 6월 항쟁의 전 과정과 궤를 같이
<6월 항쟁>의 마지막은 이한열 열사의 장
했다. 1987년 6월 9일, 다음날 열릴 예정이
례식으로 치러졌다. 혼수상태에 있었던 이한
었던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
열 열사는 6.29 선언을 쟁취하고 얼마 지나지
민대회>를 앞두고 연세대에서 <6·10대회
않은 7월 5일, 결국 세상을 떠났다. 7월 9일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가 열렸다. 결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이 민주국민장으로 치러
의대회 도중 당시 2학년이었던 이한열 열사
지면서 마무리 되었다. 장례식에는 무려 100 32
마라”고 자식들에게 당부했다. 그러나 대학가 에 데모를 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알고 있었 다. 그런 상황에서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 국 민들에게 준 충격은 상당했다. 군사독재정권 은 수배, 투옥을 감수하는 “운동권”이 아니어 도 수배자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고문을 하 고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 ▲ 이한열 열사
났기 때문이다. 내 아이가, 내 동생이, 내 형· 누나·오빠·언니, 심지어 나도 독재에 의해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하여 신촌에서 시
희생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군사
청, 그리고 종로까지 이한열 열사의 마지막을
독재에 대한 반발과 투쟁이 더욱 거세지게 되
함께했다.
었다.
<6월 항쟁>은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에 맞
이한열 열사의 부상과 죽음이 불러온 충격은
서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기 위해 일어났다. 6
어떠했을까? 고문으로 사람을 죽이고 이를 은
월 항쟁의 도화선이자 기폭제역할을 한 것은
폐하려다가 들통난 정권이 반성을 모르고 “호
두 열사의 죽음이었다. 1960년 4.19 때 김주
헌조치”로 국민의 요구를 묵살하는 것에 대
열 열사의 죽음이 국민들의 공분을 불러온 것
해 정권에 대한 분노가 점치 쌓여 갔다. 그 시
과 마찬가지다.
점에 전국민에게 알려진 사진 한 장. 고문으 로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모자라 최루탄으로
80년 광주의 진실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알려
또 한명의 학생이 생사의 기로에서 혼수상태
지고 대부분의 대학생이 독재반대투쟁에 적
에 빠졌다는 소식은 우리 국민들에게 “더 이
극적이건 소극적이건 참가하고 있던 시절, 대
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투쟁의 의지를 불
부분의 부모님들은 “데모하는 것들이랑 놀지
러일으켰다. 항쟁 기간 대학생뿐만 아니라 이
33
▲ 시청에서 열린 노제
른바 넥타이부대로 불리는 직장인들도 쉼 없
이 세월호 사건에서 되살아났다. 또한 세월호
이 싸웠으며 최루탄을 이용해 피해자가 났음
피해자 가족과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국민을
에도 불구하고 최루탄 사용을 오히려 더 늘리
대하는 정부의 태도를 보면서 이한열 열사의
던 공권력에 분노했다.
죽음을 보며 우리 국민들이 느꼈을 분노의 감 정이 되살아났다. 정부에게 책임을 묻는 피해
2014년 세월호 사건과 300여명의 죽음을 보
자 가족을 어떻게 대했나? 정부는 사복경찰을
면서 6월 항쟁의 도화선과 기폭제가 된 두 죽
붙여 피해자 가족을 사찰하고, 경찰을 동원해
음이 떠오른다.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은 사고
길을 가로막았으며 가족들과 함께 하고자 하
이후 단 한명도 구하지 않았다. 세월호 사건에
는 국민들을 폭력적으로 연행하고 심지어 구
서 우리 국민들이 목격한 것은 아무 잘못 없
속시키고 있다.
는 아이들을 국가가 방치하고 사실상 학살했 다는 것이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보며 우
27년 전 두 죽음에 우리 국민들은 <6월 항쟁
리 국민들이 떠올렸을 감정 “내 아이가, 내 동
>으로 화답했다. 2014년 300여 죽음에 우리
생이, 내 형·누나·오빠·언니, 심지어 나도
는 어떻게 답할 것인가?
국가가 구해주지 않고 희생될 수 있다”는 것
34
미래의 거울, 역사
동아시아 칼럼 조선 청소년들이 부조(父祖)를 멸시하도록 만들어라 http://mag-mkyd21.tistory.com/51
조선 총독이 된 해군대장, 폭사의 위기를 넘기다 제 3대, 제5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斎藤 実,1858~1936)는 사무라이 집안 출신으로, 일찍이 일본 해군병학교에 입학하고, 미국 등 에 유학하며 해군 관료로서 자수성가해온 인 물이었다. 사이토는 대체로 일선의 장교로서 보다는 해군성 등에서 근무하며 관료로서의 활동이 두드러지는 온건파 해군이었다. 그는 다른 일본군인들과 달리 침착한 성격으로 알 려졌으며 러일전쟁 당시 해군차관으로 참전 35
미래의 거울, 역사
본 관리들과 기자들의 환영을 받으며 대기하 던 마차에 오르려던 순간이었다. 굉음과 함께 수류탄 한발이 터졌다. 수류탄은 사이토에게 는 미치지 못했지만, 주변에 있던 일본 경무총 감, 경기도 경시, 육군소장 등이 부상당하고 2 ▲ 서울역 앞 의거터에 세워진 강우규 의사의 동상
명의 일본 기자가 사망했다. 이른바 1차 사이 토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이었다. 수류탄을 던진 사람은 당시 66세의 노인이었
했고, 승전에 공을 인정받아 해군 대장에 올
던 강우규 의사였다. 강우규 의사는 평범한 노
랐다. 그 후에도 사이토는 능력을 인정받아 정
인은 아니었다. 그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계의 정점인 조선총독과 내각총리를 두루 거
북간도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을 시작했으며,
치게 된다.
1915년 경에는 길림성 요하현에 신흥동(新興
사이토는 조선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직후
洞)이라는 한인 마을을 건설하여 해외 독립운
인 1919년 9월, 제 2대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
동을 펼쳤던 인물이었다. 그는 3·1운동이 소
시미치의 뒤를 이어 제 3대 조선총독으로 부
강상태에 빠지고, 세계 열강으로부터 독립 승
임하게 되었다. 1919년 9월 2일은 사이토가
인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본이 무단통치
취임하고 조선으로 처음 부임되는 날이었다.
에서 문화정치로 식민정책을 변경하고자 조선
오후 5시, 신임 총독 사이토가 탄 열차가 서
총독을 교체하는 것을 보고 새로 임명될 조선
울역에 도착했다. 서울역에 도착한 총독이 일
총독을 처단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한편 강우 36
미래의 거울, 역사
규 의사는 사형집행 당시 “단두대 위에 서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조선인의 언론사 설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
립도 허용해 주었다. 그러나 이는 말이 문화
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겠는가(斷頭臺上 猶
통치이지 실제로는 회유정책을 통해 일부 조
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라는 절명시를
선인들을 일본통치기구에 흡수하겠다는 것이
남기고 순국했다.
었다.
문화통치의 허상과 실상
실제로 다수의 조선인들이 하급 관리와 교원 등으로 편입되어 일제의 통치의 말단에 들어
구사일생한 사이토는 본격적으로 ‘문화통치’
가 민족분열에 일조하기도 했다. 이들은 불리
를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식민사관에서는 문
며 민중들을 가혹하게 탄압했으며, ‘앞잡이’
화통치를 ‘다이쇼 데모크라시’시기의 민주주
라 불리며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회사령 철폐
의 분위기가 조선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역시 기만적인 것이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주장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문화
토지조사사업 등으로 조선의 기간 산업이 일
통치는 3·1운동으로 폭발한 조선인들의 저
제에 의해 완전히 장악된 조건에서 조선인들
항을 무마시키기 위한 회유책에 불과했던 것
의 창업이란 일부 친일파들을 제외하곤 불가
으로 민족분열통치라고 부르는 것이 더 합당
능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식민통치 하에서
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민족지를 표방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창간
사이토는 교원의 일본도 착용을 폐지시키고,
은 더욱 웃기는 것이었다.
헌병경찰제 대신 보통경찰제를 도입했다. 회
이 시기 일본은 겉으로는 조선인들에게 선정
사령 철폐로 조선인의 사업규제를 풀어주고,
을 베푸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안 보이는 곳에
37
미래의 거울, 역사
학선 의사는 1926년 순종의 장례식에 조상하 러 오는 사이토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 에 옮겼으나 실패했다. 송학선 의사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감명을 받은 인물로, 순종을 조 문하러 오는 다른 일본인 관리의 차를 사이토 ▲ 송학선 의사
의 차로 오인하여 경성부회 평의원 2명을 칼 로 찔러 살해하고 도망하여 대항하다 체포되 었다. 2차 사이토 암살 미수 사건 이었다.
서 가혹한 탄압을 실시했다. 1923년 관동 대 지진 당시 일본은 민심을 달래기 위해 동경의 우물에 조선인이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를 퍼 뜨려 일본인들로 하여금 조선인 수천 명을 학 살하게 만들었다. 또한 일본은 치안유지법을 제정해 공산주의자 등 사상운동가 뿐만 아니 라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까지도 총독부에 반 대한다는 이유로 가혹하게 탄압했다. 해외에 서 활발하게 진행되던 조선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잔인한 진압은 말할 것도 없었다.
파쇼 쿠데타와 온건파 총리의 죽음 사이토는 조선인으로부터 두 번의 암살시도를 받았지만 운 좋게 살아남았다. 자신을 살해하 려한 조선인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을 정도로 침착한 성격의 그였지만, 자신이 일본 군 후배에게 살해되리라는 것은 아마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 총독에서 사임하고 총리대신이 된 사이토는 급진적인 파시즘으로 치닫는 일본 군부들 통제하기 위한 온건책을 펼쳐나갔다. 당시의 일본 국내 정세는 천황을
이러한 민족분열통치에 저항하여 조선인 송 38
미래의 거울, 역사
중심으로한 ‘황도 파시즘’으로 치닫고 있었
인 성장을 이루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
다. 일본 정부의 관료들은 군부의 강경세력들
의 성장은 아직도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의 주
을 통제하기 위한 인물로 사이토를 낙점했다.
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한편 그의 ‘합리적’
결국 사이토는 ‘황도 파시즘’이 본격적으로
인 통치 스타일은 일본의 입장에서 볼 때 조
광기를 드러낸 ‘2·26사건’에서 잔인하게 살
선의 치안을 상당부분 안정화시켰으며, 군국
해당했다. ‘2·26사건’이란 일본 육군의 황
주의로 치닫던 군부를 비교적 잘 통제했다고
도파 청년장교들이 일본 천황의 직접통치를
볼 수 도 있다.
요구하며 군국주의 파시즘을 노골화한 군부 내 쿠데타였다. 사이토는 사건 당시 살해되었 던 대신들 중 가장 끔찍하게 살해되었다. 황도 파 장교들은 늙은 사이토에게 총을 난사했으 며 확인사살까지 했는데, 그의 시체에서 발견 된 총알은 46발이나 되었다고 한다.
교활한 식민통치자 사이토 마코토
하지만 조선의 입장에서 볼 때 그는 어떤 폭압 적인 총독보다도 더 나쁜 영향을 끼친 인물이 었다. 그가 재임하던 기간의 민족분열책과 회 유책은 숱한 친일파들을 양산했으며, 독립운 동 세력은 크게 분열되었다. 또한 사이토 재임 시기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던 식민사관 연구는 1930~1940년대 징용과 징병을 찬양하는 친 일파들을 양산했으며, 일제 패망후 현재까지
사이토는 1919년부터 1927년까지 1차로,
한국의 역사인식에 큰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
1929년부터 1931년까지 2차로 조선총독에
다. 사이토는 일본인들에게는 온건하고 합리
부임했다. 그의 재임기간은 제 1차 세계대전
적인 총리였을지 몰라도, 조선인들에게는 가
이후의 호황기로 일본과 조선의 경제가 외적
장 교활한 식민통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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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무기
세상의 모든 무기
해경장비는 열악하지 않았다 http://mag-mkyd21.tistory.com/52
세월호 참사가 아직도 생생하다. “한 명도 구
목포해경은 경비정 123정보다 30배는 큰 배
조하지 않았습니다. 한 놈도 가만두지 않겠습
수량 3000톤의 대형구난함이 2대가 있다.
니다.”란 외침이 방방곡곡에서 울려나오고 있
(3003함, 3009함), 이들 3000톤급 경비구난
다. 그런 가운데 세월호 구조를 담당했던 목포
함은 해군의 울산급 호위함보다 큰 배수량이
해경이 집중타를 받고 있다.
며 5000톤급 삼봉호를 제외하면 해양경찰이 보유한 가장 큰 함정이라고 한다. 1994년부터
일각에서는 세월호 사고당시 출동했던 목포
2014년 현재까지 11척이 건조, 배치되어 있
해경의 경비정 123정의 현황을 보고 그 열악
다. 이 함에는 헬기 착륙장과 격납고등이 설치
함에 한숨을 지었을 수 있다. 구조를 기다리
되어 있어 보다 입체적인 작전이 가능하고 무
는 인명이 500명에 육박하는데 배수량 100톤
장은 함정에 따라 20mm 벌컨, 40mm 함포를
에 달랑 14명의 해경이 출동해서 고무보트 1
장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에 선원부터 태우느라 이른바 “골든타임”을 완전히 날려버렸다는 것이다.
특히 2010년 3월에 배치된 3009함은 대한민 국 해경과 해군을 포함하여 최초로 배치된 하
그러나 목포해경은 적어도 장비면에서는 뒤떨
이브리드(CODLAG방식) 추진 함선이다. 이는
어질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이브리드 자동차와 같은 기술이며 해군의 인천급에서도 적용하지 못한 신기술로 12노
41
세상의 모든 무기
트 이하에서는 전기모터를, 고속 운항시에는
트로 시속 52km에 달하는 속도로 항해할 수
디젤엔진을 사용한다고 한다. 이로서 연료의
있다. 당시 해경은 3009함이 사고형장에서
절감과 정숙성을 확보하고 함내 진동이 적어
100km 떨어진 홍도인근에서 중국어선 조업
적은 피로감으로 장기 작전에 유리하다는 장
단속 중이었다고 밝혔다.
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목포해경은 5월 2일 <문화일보> 3009호는 단순 경비정이 아니라 경비구난함
에 따르면, 원래 23척의 경비함정을 보유하
이다. 구난이라 함은 재난을 구제하는 것으로
고 있다고 한다. 이 가운데 3000t급, 1500t급,
각종 해상사고에 대응하는 함선이란 뜻이다.
1000t급 등 다양한 배수량의 함선들을 보유하
그러니 세월호가 침몰하였을 때에는 해안경
고 있다.
비업무를 주로 하는 123경비정이 아니라 경 비와 더불어 구난을 체계적으로 할 수 있는
그러나 당시 목포해경은 100∼300t급 4척 등
3009함이 출동했어야 한다.
함정 9척만 해상에서 경계 운항 중이었으며, 나머지 14척 중 11척은 목포 해경 전용부두에
최신 경비구난함 3009호는 전장 112m에 선
정박해 있었고 3척은 수리 중이었다고 한다.
폭이 14.2m로 헬기착륙장까지 보유하고 있
결국 출동가능한 경비정 20척 가운데 100t짜
다. 엔진마력은 총 4만마력, 최고속도 28노
리 소형경비정 단 1척만 출동한 것이다. 그 좋 42
세상의 모든 무기
은 장비들을 두고 연안경계를 소홀히 한 것이
수호하다가 136명이 공무상 사망하는 등 총
다.
169명이 사망하였다. 최근에는 중국어선을 단 속하다 2명이 사망하였고 100명이 넘는 경찰
한편으로는 해경이 “죽을까봐 무서워서” 선내
관이 다쳤다. 지난해 12월 흉기로 격렬 저항
로 구조하러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하는 중국어선을 나포, 적법한 공무집행으로 선원 11명을 전원 구속한 곳도 바로 목포해
그러나 불과 3년 전인 2011년 12월 26일, 목
경이었다.
포해경은 한겨울 악천후 속에서 전복된 여객 선에서 승객 15명을 극적으로 전원 구조하였
목숨 걸고 바다를 지켜온 목포해경이, 2011
다. 목포해양경찰서 3009함은 이 일로 2011
년에는 12월 겨울바다에서 침몰하는 여객선
년 국제해사기구(IMO) ‘의인(義人)상’을 수상
의 승객 15명을 전원구조 하였던 목포해경이
하기까지 하였다. “죽을까봐 무서워” 배에 들
“죽을까봐 무서워서” 배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어가지 않았다는 목포해경이 3년 전에는 “높
것은 여러모로 납득할 수 없다.
은 파도와 사투 끝에 승객 전원을 구조”하였 다는 것이다. 또한 해경은 창설 이후 61년간 해양 영토를 43
sign.sewolho416.org 세월호 참사 철저한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안전한 나라 건설을 위한 특별법 제정 등 촉구 천만인 서명
민권연대 월간지
본 4호
(2014.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