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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0 1 6 <시사칼럼> 11월 14일 민중총궐기, 그리고 총선 <이달의 역사> 1996년 노동법 날치기와 노동자 총파업, 그리고 진보정당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세계적 경제위기와 새정치에 대한 열망들

월간 본 2015.12 http://mkyd.org/news_bon


발행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민권연대) 블로그 http://mkyd.org/news_bon

특별기획

민중의 함성 새정치를 부른다!

발행일 2015년 12월 4일 (22호) 문의 http://mkyd.org/news_b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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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기상, 항일의 함성! 중국동북을 가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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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그 본질적 가치

아름다운 창경궁에 취하다

시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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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경제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똑똑한 방법(1)

이달의 역사

1996년 노동법 날치기와 노동자 총파업, 그리고 진보정당

과학을 알면 세상이 보인다

매운맛을 내는 캡사이신, 맛만 매울까

49 11월 14일 민중총궐기, 그리고 총선

중국동북지역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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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미래다

20대 청년, 정치허무주의에 맞서다. 손정빈 회원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세계적 경제위기와 새정치에 대한 열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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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을 찾아서

천수르를 꿈꾼다!! 민권연대 바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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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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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확연히 추워졌습니다. 국민들을 IS와 비교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끔찍한 발언이 우 리를 더욱 춥게 만드는 요즘입니다. 11월 14일, 10만여명이 모인 민중총궐기가 진행되었습니다. 박근혜 정권 하에서 민중들 의 분노가 얼마나 큰 것인지, 서민들의 삶이 얼마나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는지를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은 차벽과 물대포를 앞세우며 스스로를 ‘불통정권’, ‘반민생정권’ 임 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11월 14일 민중총궐기로 표출된 민중의 요구들을 실현하기 위한 활동들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내년 총선이 있는 상황에서 서민들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세력이 절실한 때입니 다. 한편에서는 야권이 힘이 없고 제대로 못한다는 우려 섞인 이야기들도 많이 나오고 있 습니다. 하지만 야권을 바꿔내는 것도,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드는 것도 국민들의 힘이 모 이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민중총궐기에서 정치의 주인은 평범한 국민이라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호에서는 새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민중총궐기를 돌아보며 국민들이 정치의 주인으로 나서야 한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96년 노동법 날치기 통과가 어떻게 진보정당의 출현으로 이어졌는지도 돌아봤습니다. 그리고 세계적 경제위기 속에서 소위 선진국, 자본주의의 핵심 국가라고 하는 나라들에서 어떻게 새정치에 대한 열망이 표출되 고 있는지를 확인해 봤습니다. 박근혜 정권은 여전히 노동개악을, 농업말살 정책을, 역사쿠데타를 추진하려 합니다. 극우 보수세력의 장기 집권을 꿈꾸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치는, 역사는 소수의 위정자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써지는 것이 아닙니다. 유신독재로의 회귀를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이곳저곳 에서 나오고 있는 이때, 대한민국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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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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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4일 민중총궐기, 그리고 총선


시사칼럼

지난 11월 14일에 개최된 민중총궐기는 13만 명(주최측 추산)이 참가한 대 규모 집회였다. 이날의 대회에는 박근혜 정부의 ‘노동개악’에 분노한 노동 자, 대규모 밥쌀용 쌀수입에 절망한 농민들을 중심으로 한국사 교과서 국정 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등 사회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각계각층의 국민들 이 모였다. 이번 민중총궐기는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이후 최대 규 모가 모인 집회로 3여 년간 박근혜정부의 국정운영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얼마나 높은지를 여실히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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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특히 살수차 규정을 위반한 경찰의 최루액 물대포 과잉진압은 전남 보성에서 올라온 농민 백남기 씨(69)를 의식불명 상태로 만들었고 이 때문에 지금까지 도 민중총궐기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뜨겁다. 백남기 씨의 회생을 바라는 국민들의 마음은 SNS, 인터넷 등을 통해 꾸준히 퍼지고 있다. 전체 국민들은 민중총궐기를 얼마나 알까? 한국갤럽의 11월 셋째주 여 론조사에 따르면 민중총궐 기 행사를 듣거나 본 적이 있는 국민이 무려 87%에 가까웠고 특히 20대의 경우 90%에 달했다. 거의 대부 분의 국민들이 민중총궐기 가 개최된 사실에 대해 알 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민중총궐기와 경찰 의 강경진압은 국민 여론도 변화시켰다. 한국갤럽이 민중총궐기 직후 진행 된 11월 셋째주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들은 박근혜 대통령 직무수행에 대 한 부정적 평가 이유로 23%는 <소통미흡/너무 비공개/투명하지 않다>, 12% 는 <국정운영이 원활하지 않다>를 꼽았다. 11월 둘째주 14%, 8%였다는 것 을 염두에 둘 때 민중총궐기로 인해 상당한 변화가 생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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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23%

소통미흡/너무 비공개/투명하지 않다 운영이 원활하지 않다 사람들이 박근혜 정부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 <자료 : 한국갤럽>

15% 7%

12%

10월 5주 11월 1주 11월 2주 11월 3주

이러한 여론의 변화는 박근혜 대통령이 민중총궐기 당시 해외로 출국한 것, 경찰의 강경진압 등이 반영된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특히 ‘소통미흡’ 등 을 지적하는 여론이 높아진 것은 민중총궐기를 통해 국민들이 박근혜 정부 의 독단적, 독선적 속성을 더 크게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2008년 이후 최대 규모였던 이번 집회는 박근혜 대통령의 독단적 국 정운영의 문제점을 공론화하고 생존권, 사회정치 현안들을 사회 화두로 부각 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세계적으로 민중총궐기가 많이 보도되어 외국 순방을 자주 하는 박근 혜 대통령에게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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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영국의 대표적인 방송인 BBC는 경찰이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자들에게 최루액과 물대포를 사용했다고 보도했다. 캐나다 CTV 뉴스도 7년 만에 최대 규모의 시위대들이 정부의 노동정책에 반대하며 서울 도심에 서 가두시위를 벌였다고 주장했다. 태국 일간지 방콕포스트는 7년 만에 가장 큰 규모의 반정부 집회가 서울에서 열렸다며 시위대들이 청와대로 행진하려 고 하자 경찰이 물대포를 난사했다고 상세하게 보도했다. 심지어 민중총궐기 를 취재하던 외신기자들이 경찰의 물대포를 직접 맞는 장면까지 한국 고발 뉴스 카메라에 잡혔다. 10만이 넘게 모인 이번 민중총궐기는 국내, 국외적으로 상당히 파급력이 높 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번 민중총궐기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일까? 앞으로 해야 할 것들은 없을까? 10만이 넘게 모였지만 민중총궐기 11개 요구안은 그 어떤 것 하나 도 실현되지 못한 채 남아있다. 2016년 4월로 다가온 총선을 대비하여 민중총궐기 요구안들을 정치권이 수 용할 수 있도록 더욱 목소리를 높이고, 선거의 주요 쟁점으로 만들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대한민국에서 총선은 ‘심판’의 성격을 띈다. 대선과 총선의 주 기가 엇갈려 대통령 임기 중반기에 총선이 치러져 왔기 때문이다. 이번 총 선 역시 2017년 대선을 앞두고 치러짐으로써 대통령 중간평가의 성격을 띄 고 있다. 8


시사칼럼

11월 14일 민중총궐기 11대 요구안, 민중총궐기 투쟁본부

만약 이번 총선에서 박근혜 정부의 심판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박근혜 정 부는 현재 추진하고 있는 각종 ‘개악’들을 강하게 밀어 붙일 것이다. 뿐만 아 니라 새누리당은 박근혜 정부의 ‘개악’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특히 새누리 당 김무성 대표는 한국사 국정화 문제 등 사회현안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의 2중대를 자처하고 있다. 9


시사칼럼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야권세력조차도 국민들의 요구를 제대로 반영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사 국정화 반대, 임금피크제 등 노동개악 반 대, 밥상용 쌀 전면 수입 반대, 세월호 진상규명 등의 의제들에 대해 그 어떤 정당도 헌신적으로 나서고 있지 않다. 이는 여론조사 결과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지난 2015년 5월 11일 한겨 레에서 진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차기 대선에서 야당으로 정권 교체가 되 어야 한다는 응답이 41%로, ‘지금 여당으로 정권이 지속돼야 한다’는 응답 (33.2%)을 꽤 앞선 바 있다. 그러나 당시 정당지지율에 대한 조사에서 새정 치민주연합 지지율이 12.7%로 새누리당(31.9%)에 비해 크게 뒤졌으며 ‘지 지정당 없음’이 52.3%로 절반을 넘어섰다. 가장 최근인 11월 셋째주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도 박근혜 대통령이 직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는 여론(42%)보다 직무를 잘못 수행하고 있다는 여론(48%) 이 높게 나왔다. 그러나 정당지지율은 새누리당 지지율 39%, 새정치민주연 합 지지율 21%, 정의당 5%, 없음/의견유보가 34%로 박근혜정부에 대한 불 신이 높지만 그것이 실제 여당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즉, 국민들은 박근혜 정부에 대한 불신이 높지만 야당 역시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은 국민들의 요구 실현에 진정성이 없는 정당을 신뢰하지 않는다. 총 10


시사칼럼

선이 140여일밖에 남지 않은 지금 야당이 국민들 편과 국민의 입장에서 끝 까지 나서는 정당으로 변모하거나 국민의 요구 실현에 모든 것을 바칠 수 있 는 새로운 정당이 출범하지 않으면 2016년 총선은 ‘심판’의 성격을 못 띠 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정치권의 변화라는 것이 몇몇 정치인의 생각이 바뀐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민중총궐기의 11개 요구안이 바로 전체 국민 들의 목소리가 되고 전체 국민들이 원하는 의제로 된다면 선거에서 주요 화 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된다면 표를 얻고자 하는 정치세력들은 국민의 요구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 아니 적어도 노력하는 시늉이라도 할 수밖에 없 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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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만약 기존의 정치세력이 국민들의 요구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다면, 국민들 의 열망으로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주 인, 정치의 주인은 정치인 몇몇이 아니라 평범한 국민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정치권의 재편 역시 국민들의 힘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2010년 지방선거 당시 국민들의 절절한 요구가 ‘무상급식’으로 표출되었다. 무상급식은 자연스럽게 지방선거의 주요 의제로 되었고, 무상급식을 주요 공 약을 내세웠던 야권은 승리를 이루었다. 2010년 국민들의 절박한 요구인 ‘ 무상급식’으로 이명박 정부를 ‘심판’했듯이 2016년 박근혜 정부를 ‘심판’ 하는 길은 바로 가장 절박한 국민의 요구를 주요 선거 의제로 만드는 것이다. 정치인들에게 환멸만 느끼는 총선이 아니다. 국민이 정치의 주인으로 되는 총선을 만들기 위해 전체 국민들은 ‘이제라도 정치의 주인으로’ 나서야 한 다. 그리고 정치의 주인이 되는 길은 바로 국민들이 스스로의 요구를 더 강 력히 외쳤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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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5일 2차 민중총궐기

12월 5일 2차 민중총궐기


이달의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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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노동법 날치기와 노동자 총파업, 그리고 진보정당


이달의 역사

1996년 12월 25일 밤, 신한국당(지금의 새누리당) 국회의원들은 비밀작전을 하듯 서울 시내 4개 호텔에 집결했다. 그리고 26일 새벽 5시 50분, 관광버 스 여러 대에 나눠 타고 국회에 잠입했다. 이들은 노동법과 안기부법 등 11 개의 법안을 가지고 있었다. 이윽고 6시, 신한국당 의원 157명 중 154명이 국회의사당 입장을 끝냈고 국 회의장을 대신하여 오세응 당시 국회부의장이 7분 만에 11개의 법안을 통 과시켰다. 당시 신한국당이 통과시켰던 노동법의 주요 내용은 정리해고, 근로자파견제, 파업 중 대체인력 투입, 쟁의 기간 무임금 등을 도입한다는 것이었다. 그야말 로 노동자들에게 대대적인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법안이었다. 김영삼 정부는 이른바 “세계화 전략”을 주장하면서 신자유주의적 노동질서 즉, “노동시장 유연화”를 추진했다. 쉽게 말해 정리해고, 파견근로 등을 도입 하여 인건비를 낮추고 노동자들을 기업에서 쉽게 자를 수 있도록 보장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려 했던 것이다. 물론 이는 미국 등 외국자본의 요구 를 충실히 반영한 결과였다. 김영삼 정부는 1996년 4월 24일, ‘21세기 세계 일류국가로의 도약을 위한 신노사관계 구상’을 발표했다. 김영삼 정부가 내세웠던 것은 ‘참여’, ‘협력’, ‘공동선’ 등이었지만 실제 내용은 정리해고 합법화, 파견근로 등으로, 김영 삼 정부가 신노사관계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노동시장 유연화를 밀어붙이기 15


이달의 역사

위한 꼼수였다. 기계를 멈춰라! 세상을 멈춰라! 12월 26일 노동법이 날치기 통 과되자 노동자들은 즉각 반대 투쟁에 나섰다. 뉴스에서 날치기 통과가 되었다 는 소식이 전해지자 민주노총 지도부는 무기한 총파업을 선언 하고 대중투쟁에 나섰다. 당시 민주노총은 자동차, 금속, 현총련(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맹), 전문노련 등 현 장에 파업 지침을 내렸다. 그리고 전교조의 경우 단식수업, 화물노련은 구간 별 안전운행 등 단위별 상황을 반영한 투쟁 지침을 내렸다. 그 결과 12월 26일 85개 노조, 14만 2천여 명이 총파업에 참가했다. 연일 거 리에는 수만 명의 노동자가 쏟아져 나왔고 교수, 학생, 변호사, 종교인 등의 투쟁 지지도 이어졌다. 1997년 1월 3일 이후에는 언론, 사무직, 전문직, 서비스직 노동자들도 파업 에 합류했고 한국노총 노동자들도 파업에 참가했다. 이렇듯 투쟁은 더욱 거 세졌으며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을 합쳐 약 200만 명의 노동자가 총파업에 참 가했다고 한다. 16


이달의 역사

노동자들이 거리에 나서고 각계각층이 이에 호응하자 노동법 날치기에 반대 하는 여론이 80%에 다다를 정도로 노동법개악반대 투쟁은 대중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러자 노동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던 김대중의 새정치국 민회의도 노동법 날치기 반대투쟁에 함께했다. 심지어는 김종필의 자민련마 저 노동법 날치기에 반대하는 시늉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17


이달의 역사

결국, 김영삼 정부는 1월 21일 ‘노동법 재개정과 구속영장 철회’를 발표했 다. 노동자들과 민중들의 투쟁으로 잘못된 정부 정책을 막아낸 것이다. 물론 한계도 있었다. 문제가 되었던 정리해고법이나 파견근로법 등을 완전 히 폐기하지 못했다. 3월 11일 임시국회에선 여·야간 합의로 날치기한 법안 을 폐지하고 정리해고제 시행시기를 2년 유예시키는 결정을 내렸지만 이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1997년 IMF 경제신탁통치 조치와 맞물리면서 결국 정리해고와 파견제 근로 등이 도입되게 된다. 총파업 투쟁이여, 온 누리에 불타올라라 노동법 날치기가 이루어진 직후 강한 투쟁이 벌어질 수 있었던 원동력은 현 장에서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96년 5월부터 정부와 논의 를 하고 있었지만, 협의만 바라보지 않고 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합원 교육을 강화하고, 총회와 대의원대회 등을 열어 대중적인 결의를 모 아나가고 있었으며 서명작성자 명단 파악, 조합원 개개인에게 편지 보내기, 파업투쟁 기금 모금 등 치밀하게 총파업 투쟁을 준비했다. 이런 준비가 없었 다면 노동법 날치기 이후 총파업 첫날 14만 명의 참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싸움은 노동자들이 업종·지역을 넘어 하나로 단결하면 불가능해 보이는 투쟁도 승리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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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역사

이렇게 큰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금속노조 소속 노동자들이 강고한 파 업을 벌여낸 것도 중요한 요인이었지만 여기에 흔히 화이트칼라라고 불리던 언론, 사무직, 전문직, 서비스직 노동자들도 함께 파업에 나섰기 때문에 가능 한 것이었다. 지난 2012년 민주노총 교육원에서 열린 ‘96∼97 노동법 개정 총파업 투쟁! 현재적 의미와 과제’ 토론회에서 권영길 초대 민주노총 위원장은 “국회에서 날치기지만 공식적으로 법안이 통과되었음에도 무효화 된 것은 전무후무한 일”, “이 투쟁은 국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아서 무효화를 시킨 것으로 민주 노총 지도부는 공식적인 구속영장이 발부되었지만 발부된 구속영장이 그냥 흐지부지된 것도 처음”이라며 이 투쟁의 의의를 짚었다. 더 나아가 당시 투쟁은 1980년 이후 세계 노동운동 역사에서도 의미 있는 투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세계적으로 영국과 미국 에서 시작된 신자유주의 바람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을 때 한국이 신자유 주의 세계화에 맞선 투쟁을 강고하게 벌여냈으며 이는 세계적으로 큰 영향 을 주었다. 당시 유명한 국제 검색사이트인 알타비스타의 검색어 1순위가 ‘ 한국 총파업’이었다고 한다. 단 한 명의 노동자 국회의원이 국회에 있었더라면 96년, 97년 노동법 개악 저지 총파업 투쟁은 노동자들에게 진보정치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19


이달의 역사

노동자들은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반영할 수 있는 국회의원, 정당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당시 노동법 날치기 통과를 주도했던 신한국 당은 물론이고 김종필의 자민련뿐만 아니라 김대중 총재의 새정치국민회의 도 노동법 개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이런 국회 상황은 노동법 개악을 완전히 막아내지 못하는 결과로 나타나고 말았다. 결국, 노동자들이 선택한 것은 노동자들의 정당, 민중들의 정당을 만 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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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역사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이었던 권영길 위원장은 ‘국민승리21’을 만들어 1997 년 12월 대선에 출마했다. 이 정치적 노력은 결국 2000년 1월 31일 ‘민주노 동당’의 창당으로 이어진다. 하나 되어 우리 나선다. 승리의 그 날까지 2015년 오늘,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정부는 정리해고를 넘어 일반해고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법안을 만들려고 한다. 정리해고는 “경영상의 긴박한 이유” 등의 해고 조건이라도 있었지만, 일반해고는 그런 것도 없다. 노동자들의 지위가 더욱 위태로워질 상황이다. 농민, 학생, 빈민 등 모든 계급계층이 살기 어려워져 헬조선(영어로 ‘hell’과 한국을 의미하는 ‘조선’의 합성어)이라는 신조어까지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이 기댈 수 있는 야당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모습은 11월 14일 있었던 민중총궐기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민중총궐기에 원내 야당은 없었다. 민중총궐기가 상당히 오래전부터 준비되고 있었음에도 야당에서 민중총궐기 요구안과 관련해 발표한 입장을 찾아보기 어렵다. 19년 전 노동자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일어났 다. 노동법 개악 날치기에 맞서 총파업을, 총궐기를 이루어냈으며, 노동자가 권리를 찾을 수 있는 정치를 만들어내기 위해 정치세력화를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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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역사

어쩌면 우리는 지금 민중의 진정한 요구를 대변해 줄 정치세력이 없는 참담 한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새 시대를 갈망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주인이 되어 거리 로 나오고 있다. 11월 14일 헬조선을 뒤집기 위해 약 13만 명의 민중들이 모 였다. 그리고 12월 5일에는 2차 총궐기가 예정되어 있다. 민중이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들의 요구를 대변해야 하는 시대, 민중들 스스로 정치의 주인으로 나서 새 정치를 만들어야 하는 시대, 그러기 위해 굳 게 단결해야 하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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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역사

귓가에 노랫말이 맴돈다. “하나 되어 우리 나선다. 승리의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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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노동법 날치기와 노동자 총파업, 그 리고 진보정당 23


경제를생각하는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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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경제위기와 새정치에 대한 열망들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2008년 미국으로부터 시작된 세계적 경제위기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세계경제는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부었음에도 미미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으 며, 미국의 금리인상과 중국의 경기둔화 등으로 또 다른 충격에 직면해 있다. 1980년대부터 이어져온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은 부의 독점과 불균형을 극 대화 시키는 체제였고,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났다. 미국 주도의 세계 정치, 경제시스템은 지금과 같은 위기를 해결할 능력이 없 음을, 여전히 신자유주의 논리에 입각해 긴축을 강요하고 민중들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음을 전 세계는 확인하고 있다. 기존의 정치, 경제 시스템에 대한 한계가 드러나면서 새로운 정치세력에 대 한 세계민중들의 열망 역시 표출되고 있다. 빈부격차와 불공정에 대해 자각 한 전 세계 시민들이 이를 해결하지 못하는 보수 정치권 및 ‘진보’를 자처하 던 정치세력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있다. 올해 41세로 그리스 역사상 최연 소 총리에 오른 치프라스에 대한 그리스 국민들의 열망이 새정치에 대한 열 망을 잘 보여주었다. 5월 스페인 지방선거에서도 좌파 정당연합 포데모스 후 보들이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 시장 자리에 올랐다. 특히 최근에는 자본주의 사회 중심부 국가에서도 ‘좌파’정치인들이 정치의 중앙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들 정치세력의 부상과 그들이 지향하는 정책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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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미국의 자칭 ‘사회주의자’ 샌더스 돌풍 지난 4월 자칭 ‘사회주의자’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73세, 무 소속)이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프라이머리 경선에 출마한다며 유세를 시작했다. 그런데 놀랍 게도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 관의 뉴욕 유세장에 5500명의 청중이 모인데 반해 샌더스의 위스콘신 유세장에 무려 1만 명의 청중이 모인 것이다. 지지율 3%로 출발한 샌더스는 9월 13일 미 CBS 방송의 지지율 여론조사 결 과, ‘대선 풍향계’로 불리는 뉴햄프셔주에서 52%대 30%로, 아이오와주에서 43%대 33%로 오차 범위를 벗어나 힐러리를 눌렀다. 지금도 30%이상의 지 지율을 보이며 클린턴 대세론을 위협하고 있다. 샌더스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우리가 주 40시간을 일하고도 가난하 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급진적인 주장이냐”, “억만장자들이 정 치인과 선거를 돈으로 조종하는 미국은 더 이상 민주주의가 아닌 과두제 독 재국가일 뿐이다!”는 그의 말이 미 국민들에게 먹혀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 는 근본적인 세제 개혁과 최저임금 인상을 통한 소득 재분배, 인종차별 철폐, 국영 건강보험 도입, 대형 금융기관 해체(혹은 국유화), 월스트리트 접수, 무 26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상 대학등록금 등의 주장을 펴고 있다. 자본주의를 맹신하는 미국에서 이전 같았으면 샌더스의 주장은 허황된 소리 로 들렸을 것이다. 샌더스는 미국에서 금기시되는 ‘사회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혀 정치권에서 퇴출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공약과 주장은 현재 미국 국민들이 당면한 현실과 불만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어서 미국 국민 들은 그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다. 단순히 샌더스가 민주당의 대선 후보가 될 수 있을지의 여부를 떠나 샌더스 돌풍은 그만큼 미국 국민들이 기존 질서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불만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의 편중을 극대화시켰던 기존의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가 더 이상 미국국민들의 대안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자 본주의 심장부 미국에서 불고 있는 샌더스 돌풍은 전 세계적 경제 질서의 재 편이 필요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영국의 ‘정통좌파’ 제러미 코빈 노동당 당수 9월 발표된 영국 노동당(보수당과 함께 양당체제를 이루고 있음) 대표 선거 결과 그동안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비주류 좌파 의원 제러미 코빈(66)이 총 42만2664표 가운데 25만1417표를 얻어 59.5%의 압도적인 지지로 승리 했다. 영국 정당 역사상 가장 압도적 승리라고 한다(이전 기록은 1994년 토 니 블레어 전 총리의 57%). 코빈은 화려한 학벌도 없고, 젊지도 않은 노동운 동가 출신 정치인이다. 이전으로 치자면 고리타분한 ‘구식’좌파로 분류되던 27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인물이다. 코빈은 긴축반대, 철도 등의 재공영화 등을 주장하며 노동당 당원들의 폭발 적인 지지를 얻었다. 그는 지금까지의 양적완화(돈풀기)가 은행 등 금융기관 배불리는 데에만 사용되었다고 비판하며 주택, 에너지, 대중교통, 정보통신 등 시민의 삶 개선을 위한 인프라 투자에 쓰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블레어 전 총리에 의해 삭제된 노동당 당헌 4조의 복원을 약속했다. 당헌 4조는 “육체노동자나 정신노동자가 충분한 근로의 대가와 가장 공정한 분배를 보장받으려면 생산·분배·교환 수단의 공동소유라는 바탕 위에서 모 든 산업과 서비스를 대중이 관리하고 통제하는 체제가 확립돼야 한다.”는 조 28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항을 말한다. 즉 철도, 전기, 가스 등 주요 산업의 국유화 조항이다. 나아가 코빈은 미국의 군사주의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높여왔다. 난민 위기 등 지구촌의 온갖 혼란을 초래한 미국의 군사주의 노선을 추종해서는 안 된 다는 것이다. 그는 나토(NATO)가 탈냉전 이후 소련 봉쇄라는 애초의 목적에 서 벗어나 미국 군사주의의 수단으로 전락했다며 나토 탈퇴를 주장하기도 했다. 이라크전쟁에 대해서는 유엔 승인 없는 불법적 전쟁이라고 규정하며 당시 이라크 침공을 승인했던 블레어 총리를 법정에 세워야 한다고도 했다. 2013년 미국 주도의 시리아 공습에도 명확히 반대했다. 코빈 대표는 핵무기 사용에 대해서도 명확한 반대의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 는 미국 등 소위 핵보유 선진국들이 자신들은 핵무기를 가지고 있으면서 다 른 국가들의 핵무기 개발을 금지하는 것과는 달이 영국의 핵무기 보유역시 반대하고 있다. 이러한 코빈의 정치 노선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이른바 ‘제3의 길’을 내세 우며 좌파, 진보세력을 우경화 시켰던 토니 블레어(1997~2007년 집권)의 정치 노선과 대비되는 것으로, 영국 국민들이 그동안 우경화되어 빈부격차가 확대되고 있는 상황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캐나다의 젊은 총리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선에서는 중도좌파 성향의 자유당이 단독 과반의석을 차지하며 압 29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승을 거뒀다. 젊은 패기와 ‘진정한 변화’를 내세운 쥐스탱 트뤼도(44) 자유 당 대표가 차기 총리에 올랐다. 트뤼도가 이끈 자유당은 이번 총선에서 34석 에 불과하던 의석을 184석으로 여섯 배 가까이 늘렸다. 집권 보수당은 166 석에서 99석으로 줄었고, 제1야당이었던 신민주당은 103석에서 44석으로 몰락했다. 캐나다 국민들은 보수화되고 권위적인 이전 총리를 버리고 젊은 정치인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첫 내각을 파격적으로 구성하며 주목을 받았다. 내각 구성원 30명을 여 성 15명, 남성 15명으로 구성했다. 법무장관이 된 조디 윌슨 레이볼드는 원 30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주민 출신이다. 실종되거나 살해된 원주민들에 대한 진상조사 공약을 실천 하겠다는 것이다. 민주제도부를 맡게 된 여성 장관 메리엄 몬세프는 30세로 아프가니스탄 난민 출신이다. 켄트 헤르 국가보훈부 장관 등 2명은 장애인 이며, 그 외에도 성소수자, 테러범으로 오인 받아 고문을 당했던 시크교도도 포함되어 있다. 트뤼도는 부자증세를 이야기하며 국민들의 마음을 얻었다. 트뤼도의 자유당 은 중산층의 소득세율을 현행 22%에서 20.5%로 낮추고, 연소득 20만 달러 이상 부유층에 대해 33%세율을 적용하는 ‘부자 증세’를 공약했다. 법인세 증세도하겠다고 밝혔다. 트뤼도가 주목받는 건 경제정책뿐만이 아니다. 트뤼도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 과의 첫 전화통화에서 “이라크와 시리아에 보낸 전투기를 철수하겠다”고 통 보했다. 또한 그동안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미국의 F-35 구매 계획을 폐 기하겠다고 밝혀왔다. 미국 주도의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협상에 대 해서도 전 정부의 합의내용을 철저히 검토하겠다고 이야기해 왔다. 캐나다는 그동안 영국과 함께 미국의 정책을 추종하는 대표적인 나라였다. 하지만 새로운 젊은 총리는 미국중심의 일방적인 세계질서를 거부하고 있 다. 그의 아버지 피에르 트뤼도는 16년동안 총리를 지낸 인물로, 1973년엔 중국과 국교를 맺고 소련 및 쿠바와의 관계도 개선하는 등 자주외교를 펼치 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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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새정치와 변화에 대한 열망들 물론 서구사회와 우리의 현실은 다르며 정치인 한명에 대한 과도한 환상을 가질 필요는 없다. 위에서 언급한 정치인들이 얼마나, 끝까지 서민들의 요구 를 반영한 정치를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내·외부의 압력이 작용할 것이 고, 이들이 얼마나 강고한 서민을 위한 정치철학을 가지고 있는지도 더욱 검 증이 필요하다. 하지만 철저하게 소외되었던 ‘좌파’ 정치인이 자본주의의 대표 격인 국가들 에서 다시 정치권 중앙으로 등장하고 있는 현상은 그만큼 전 세계 시민들의 변화에 대한 열망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1%의 특권층이 부와 소득의 90% 를 독차지하는 불평등도, 여전히 자본의 이득만을 대변하려는 기존 정치세력 도,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도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다는 분명한 의사를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불만과 열망의 목소리들이 특정 정치인을 지 지하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1980년대 대처는 신자유주의 이외에 “대안은 없다(TINA: There Is No Alternative)”고 주장했다. 실제 많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공 세 앞에서 신자유주의는 싫지만 다른 대안이 없다며 좌절을 하곤 했다. 그러 나 시리자의 집권, 코빈의 승리, 샌더스 돌풍 등은 “대안은 있다”는 것을 보 여준다. 뿐만 아니라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정치세력들이 주장하는 정책들이 허황된, 32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구식의 것이 아니라 전세계 시민들의 열망을 대변하는 것임이 확인되고 있 고, 그러한 정치세력을 만들어 낸 것은 시민들의 새정치에 대한 열망과 단합 된 힘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모바일로 보기 http://goo.gl/DVvxwF

세계적 경제위기와 새정치에 대한 열망들 33


중국동북지역답사기

고구려의 기상, 항일의 함성!

중국동북을 가다(5)

모바일로 보기 http://goo.gl/oxn6A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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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동북지역답사기

넷째 날

인민지원군이 이곳을 건너 한반도에 들어왔 다고 한다.

답사 나흘째인 7월 6일의 여정도 만만치가 않 다. 며칠간의 여정에서는 대개 묵었던 호텔에

아침 식사는 다시 통화시내로 나와서 해결했

서 제공하는 아침을 간단히 먹고 출발하느라

다. 중국식 자장면과 라면을 파는 음식점이었

7시 이후 길을 나섰는데 오늘은 집안에서 통

는데, 역시 입맛에는 잘 맞았던 것 같다. 중국

화로 다시 나가 무송을 거쳐 연길까지 가야 하

식 자장면은 한국식과 달리 넓은 면에 국물이

는 600km의 대여정이었기 때문에 아침은 이

많은 모습이었다. 자장의 맛은 한국과 비슷했

동 중간에 간단히 먹기로 하고 5시 30분에 길

는데, 모습은 된장이나 쌈장과 더 닮아있었다.

을 떠났다. 한국에서는 상당히 이른 시간이었 음에도, 많은 사람이 공원에 나와 운동을 하며 활기차게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 집안시에서 바라본 압록강 대안의 북한 함경북도 만포시 민가

집안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압록강을 보기로 했다. 집안시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북녘의 도시는 자강 도 만포시였다. 새벽안개가 걷히면서 드 러난 만포시는 작은 시골 마을이었지만, 만포와 집안은 예로부터 조선과 중국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일제 때는 이 곳에 철도교와 세관, 군부대 등이 있었 기 때문에 항일부대들의 주요 공격 목표 가 되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에는 중국 35


중국동북지역답사기

식사를 마친 일행은 통화시를 벗어나 백

▼ 통화시의 공업지구

산시로 이동했다. 통화에서 백산으로 이 동하는 중에도 상당한 공업지대가 형성 되어 있었는데, 중국 동북지역의 발전상 을 체감할 수 있었다. 백산시의 명칭은 시 관할구 내에 있는 백두산에서 유래했 다. 백산시 남쪽 장백산 일대는 장백조선 족자치현으로 설정되어 관광지로 개발되 고 있었다. 아쉽게도 이번 답사에서는 백 두산에 오르는 코스가 포함되어있지 않 아 이동하는 도중 먼발치에서 장백산맥 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 일행이 백산에 온 것은 이곳이 연 길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 이기도 하지만, 백산시 무송현을 둘러보 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 무송에서 둘러 볼 곳은 중국의 항일운동가 장울화 열사 능원과 무송제일실험소학교였다. 무송지 역은 1910년대부터 민족주의계열 대종 교인들의 교육운동과 무장투쟁준비활동 이 활발하게 진행되던 곳이었다. 이곳 학 교들에는 일본과 맞서 싸우기 위해 만주 36

▲ 무송현의 장울화 능원


중국동북지역답사기

로 넘어와 항일전쟁을 준비하는 청년이 모여

은 천지를 중심으로 드넓게 펼쳐진 울창한 수

들었다.

림지대와 장군봉을 수반으로 뻗어 나간 우람 한 장백산맥과 떼어놓고 상상할 수 없다. 수

무송에서 연길까지는 300km가 떨어져 있었

백 리 밖에서 바라본 백두산이었지만, 우리처

다. 장백산맥 수림지대 사이로 난 도로를 따라

럼 멀리 이국땅에서 저 산을 바라보며 눈물 훔

한참을 이동하다 백두산 밑 첫 마을이라는 이

쳤을 독립군들을 생각하며 잠시나마 깊은 상

도백하에 닿았다. 이도백하서부터는 연변조선

념에 젖었다.

족자치주였다. 연변에서는 중국어와 함께 조 선어를 이중공용어로 쓰기 때문에 거리의 간

백두산 밑에 펼쳐진 울창한 수림지대는 과연

판에서부터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이도백

엄청난 규모였다. 이곳에 이처럼 드넓은 원시

하에서 장백산맥의 줄기를 넘어가는 도중 저

림지대가 펼쳐질 수 있었던 것은 청나라의 봉

멀리 보이는 백두산을 바라볼 기회를 얻었다.

금정책 때문이었다. 앞서 변외(邊外) 봉금지대

우리는 흔히 백두산이라고 하면 흰 눈이 쌓인

를 이야기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이야기를 잠

천지일대와 상상봉인 장군봉 일대의 풍경을

깐 했는데, 이곳 원시림 지대를 지나면서 들은

상상하기 쉽다. 하지만 진정한 백두산의 모습

바를 조금 더 옮겨보기로 한다.

백산시 일대에서 바라본 백두산과 밀림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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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동북지역답사기

1869년(기사대흉년), 1870년(경오대흉 년) 조선 함경도 지역에 대기근이 발생

▼ 백두산 밀림지대의 임업용 도로

하자 조선인들의 간도 이주가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청나라의 눈을 피해 이곳에 들어온 조선인들은 화전 등을 일구며 원 시림과 황무지로 변해버린 땅을 점차 옥 토로 바꾸어 놓았다. 1881년 청나라가 봉금령을 공식적으로 폐지하고, 1883년 조선이 ‘월강금지령’을 폐지한 데 이어 1885년 청나라가 조선인의 만주 이주 금 지령을 철폐하면서 조선인의 간도 유입 은 더욱 증가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일제로부터의 수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또는 해외 항일운동 기지를 건설

기간은 일제조차 “불령비 횡행시대”라고 부

하기 위해서 많은 조선인이 압록강과 두만강

를 정도로 엄청난 수의 조선 사람이 ‘정치적

을 건넜다.

인 이유로’ 국경을 넘었다. 이주자들은 압록 강 북안인 동변도 지방에는 평안북도 사람들

한인들의 만주지역 이주사(移住史)는 1기:

이, 지금의 연길지역인 동만주 지방에는 함경

1870년대에서 경술국치까지, 2기: 1910년에

북도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한편 압록강

서 3.1운동까지, 3기: 1919년에서 만주사변

하구의 대안인 서간도 지역에는 경술국치 직

까지, 4기: 1931년에서 해방까지로 나누어 볼

후 양반 대지주 출신 지사들의 이주가 잇따랐

수 있다. 특히 을사늑약-경술국치-3.1만세 운

다. 명문거족 출신의 우당 이회영 6형제와 99

동에 이르는 1905년에서 1920년대 초까지의

칸짜리 저택 임청각의 주인 석주 이상룡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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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동북지역답사기

주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주지역의 항일민족운동자들이 안고 있던 이 중의 문제, 즉 한인의 생활을 안정시키면서 일

그러나 만주로 이주한 대부분의 한인은 일제

제와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도

와 중국 군벌의 압박 정책에 의해 점차 경제적

이러한 한인들의 이중적 압박의 상황 때문이

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대부

었다. 이중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민족주의

분의 이주 한인들은 순박한 농민으로 새로운

계열의 입장을 독립전쟁론이라고 한다면, 이

경작지를 구매할 만한 경제력이 없었기 때문

중의 과제를 해결하는 것을 토대로 사회혁명

에 이곳에서도 소작농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

을 성공하게 하는 물질적 기초를 마련하려 했

고, 중국인 지주들의 고리대와 일제 동양척식

던 사회주의 계열의 입장을 조선혁명론이라

주식회사 간도 출장소 등의 자본놀음에 속수

고 할 수 있다. (신주백, <만주지역한인의 민

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다. 만주사변 이후 일제

족운동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

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부터 조선인들의 처지

문, 1995)

는 극단적인 빈곤상태에 놓이게 되었으며 일 제 침략자본의 농노와 다름없는 열악한 생활

넷째 날 답사기가 다른 날에 비해 길어지는 것

환경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은 한국에 돌아와서나마 선조들의 위대한 항 일정신을 제대로 인식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만주지역 한인사회의 이러한 역사적·정치적·

다. 다음 답사지는 이러한 한인들의 눈물겨운

경제적 여건은 이 지역 한인들을 자연스럽게

이주투쟁사와 매우 관계가 깊은 곳이다. 우리

강력한 민족주의 정서로 이끌었다. 이주한인

가 작은 시골 마을 청파호 청호촌에 도착한

들은 대부분 일제의 정치적인 억압과 경제적

것은 해가 뉘엿뉘엿해 질 무렵이었다. 청호촌

인 수탈을 피해 이민해 온 사람들로서 경제

은 백두산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연변조선

적으로 안정을 찾으려는 바람과 반봉건적이

족자치주 화룡시 경내의 작은마을로서, 1920

고 반일적인 정서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만

년대 민족운동에서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대 39


중국동북지역답사기

종교의 총본산이 있던 곳이다. 우리는 마

▼ 대종교 삼종사 묘역의 비석

을 뒷동산에 잠들어 있는 대종교의 위대 한 세 인물, 삼종사를 만나 뵙기 위해 이 곳에 왔다. 청호촌 뒷동산의 삼종사 묘역 에는 아담한 세 개의 봉분이 어깨를 겯고 나란히 백두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종교의 삼종사라 함은 홍암 나철(鴻巖 羅喆) 대종사, 무원 김교헌(茂園 金敎獻) 종사, 백포 서일(白圃 徐一) 종사의 삼위 를 이르는 말이다. 홍암 나철은 그나마 교과서에 자주 오르내리는 이름이지만, 무원과 백포 종사의 경우 그 위대한 업적 에 비해 후대의 평가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나철 대종사는 1863년 전남 보성에서 태 어났다. 29세 때 과거에 급제했지만, 일 제의 침략이 심해지자 곧 관직에서 물러 나 호남지역의 지사들과 함께 유신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에 나섰다. 일본에 건 너가 일본 정객들을 만나며 조선의 독립 을 주장했지만,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과 40

▲ 홍암 나철, 무원 김교헌, 백포 서일의 대종교 삼종사가 묻힌 묘지


중국동북지역답사기

을사늑약을 체결한다는 소식을 듣고 매국노

2대 교주 김교헌은 경기도 광주 출신으로

를 처단하기 위해 단도 두 자루를 품고 귀국했

1868년생이다.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다. 수차례 을사오적 처단을 시도했지만 안타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한 엘리트였다. 지금의

깝게 실패하고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후 나철

조계사 터의 340칸 저택을 비롯해 말죽거리

은 국권수호와 민족주체성 확립을 위해 단군

50여만 평이 모두 김교헌 집안의 재산이었는

교를 중광(重光)하였다. ‘중광’이라 함은 과거

데, 그는 이것을 모두 팔아 독립운동의 자금으

부터 존재했지만, 어둠에 잠겨있던 단군신앙

로 썼다고 한다. 나철을 따라 대종교에 입문한

을 ‘다시 밝혔다’는 뜻이다. 나철은 포교활동

이래 1916년 대종사의 교통을 계승하여 2대

을 왕성하게 벌여 중광한지 얼마 되지 않아 2

교주가 되었다. 그는 교주가 된 후 만주지역의

만 명이 넘는 교도를 대종교에 가입시켰다. 일

역사와 상고사에 깊은 관심을 가져 활발한 저

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고 1910년 국권이

술활동을 벌였으며 교도들의 민족의식을 고취

침탈되자 나철은 단군교를 대종교로 개칭하

하기 위해 노력했다. 1918년에는 대한독립선

고 1대 교주에 추대되었다. 국내에서 활동이

언서(무오독립선언)에 주동적인 역할을 담당

어려워질 것으로 판단한 대종교는 1911년 이

하기도 했다. 그는 백포 서일을 중용했으며 북

곳 청파호로 총본사를 이전하고 청일학교 등

로군정서군을 조직케 해 청산리전투에서 대승

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시행하고 포교활동을

을 거두게 하기도 했다.

통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총본사 이전 후 교도수가 30만에 달했다는 것을 보면, 대종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종교 삼종사 중 마

가 당시 한인들의 민족감정에 성공적으로 부

지막 한명인 백포 서일은 한인무장독립투쟁

응했으며 하나의 거대한 항일조직으로 되었음

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한명이다. 그

을 알 수 있다. 대종교의 중광을 이끈 나철은

는 국권이 피탈 당한 1911년 왕청현으로 망

1916년 구월산에 들어가 조식법(調息法)으로

명하여 민족교육사업과 대종교 교리 저술활

세상을 떠났다.

동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수년간 교리 전 41


중국동북지역답사기

▼ 백포 서일의 초상 파와 포교활동에 전념해 수만 명의 교우 를 얻어낸 뛰어난 조직가이기도 했다. 그 러나 무엇보다도 서일의 미덕은 무장투 쟁에서 드러난다. 그는 의병들을 규합하 여 자유공단과 중광단 등을 조직하여 국 내진입계획을 세우고 무장투쟁에 나서기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한다. 1919년에는 김좌진을 맞이하여 군사조직 대한군정서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체코제 무기로 무장을 갖추었다. 대한군정서 총재 서일 은 김좌진을 총사령 겸 사관연성소 소장 으로 임명하여 독립군을 전투부대로 양 성했고, 마침내 1920년 청산리에서 대승 을 거두게 된다. 청산리에서 대패한 일본 군은 간도참변을 일으켜 한인들을 무차 별 학살했는데, 이때 희생된 대종교도만

토화되는 수난을 겪는다. 그는 수많은 청년병

수만 명에 달할 정도였다고 한다. 서일은 동포

사들의 희생에 대해 지휘관으로서 책임을 지

들의 희생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대한군정서를

고 습격 다음 날 자결을 결행한다.

소만국경지대로 이동시키고 10여 개 무장단 체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다. 그

대종교 활동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대종교 조

러나 ‘자유시참변’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고,

직은 내세의 구원을 비는 종교집단이라기보

재기를 위한 군사훈련을 하던 중 엎친 데 덮친

다는 민족운동을 위해 종교적인 기제를 차용

격으로 토비들의 야습을 받아 진중이 다시 초

한 항일운동단체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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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동북지역답사기

▼ 삼종사 묘역의 안내판 대종교는 일본민족의 단합논리인 천황제 에 맞서 조선 민족의 단결과 단합을 이루 기 위한 종교 논리로서 단군 신앙을 내 세웠고, 그것을 통해 민족운동을 전개했 다. 대종교 인물들은 모두 대단한 지식인 이면서 조선의 명문가 출신들이었다. 대 종교의 교세가 이처럼 확장되자, 곧 일 제의 거센 탄압이 자행되었다. 일본은 ‘ 종교통제안’ 등 악법을 날조하여 대종교 를 불법화하는 한편 만주지역의 군벌들 과 제휴하여 한인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 해나갔다. 어쩔 수 없이 교세는 줄어들었 다. 대종교의 항일업적은 1920년대까지 어떤

지만, 대종교 출신 인사들의 항일정신까

단체도 이루지 못한 독립운동의 무장화와 대

지 움츠러든 것은 아니었다. 대종교 출신 인사

중적 조직화를 이루었다는 데 있다. 대종교 교

들은 임시정부와 항일운동단체에서 최후까지

도들은 상고시대부터 한민족의 강역이었던 만

일제와 맞서 싸웠으며, 3대 교주인 윤세복은

주를 기반으로 해 항일운동을 펼치고 민족정

발해의 상경용천부 일대에 3천석 농장을 경영

기를 바로 세우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았다. 헤

하며 경제활동과 함께 민족교육, 독립군 양성

이그 특사 이상설, 신흥강습소를 세운 이시영,

에 끝까지 힘썼다.

신해혁명에 참가하고 동제사를 세운 신규식,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이동녕 등 독립운동사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고 독립

를 빛낸 내로라하는 인물들은 모두 직접 대종

운동의 전통을 계승하는 국가라고 한다면 대

교와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종교는 마땅히 국가적인 존경을 받아야 하는 43


중국동북지역답사기

▼ 매화개장집에서 먹은 개고기 단체였다. 그러나 대종교의 비극은 해방 이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해방 후 미 군 정과 제휴하여 권력의 중심부에 선 이승 만은 1948년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우리 가 오늘이 있게 된 데 대하여 첫째로는 하 나님의 은혜”가 있었다면서 자신의 기독 교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미 군정 은 이승만을 비롯한 친미 기독교인들을 중용하여 정국을 통제해 나갔고, 자연스 럽게 대종교는 배제되어갔다. 현재 대종 교는 교도 4000명가량의 작은 교단으로 위축된 상황이다. 고 한다. 시내에 들어서자 안내인 해남님의 연 청호촌에서 대종교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듣

길 자랑이 이어졌다. 자기 고향에 대한 자부심

다 보니 어느덧 해는 넘어갔고, 날은 어두컴컴

을 가지고 손님들에게 좋은 것을 대접하려는

해졌다. 우리는 드디어 운전을 해 주시는 해남

것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미덕인 것처럼 보였

선생의 고향이자, 200만 조선족 동포들의 중

다. 해남님의 안내로 우리는 연길에서 가장 유

심지 연길로 향했다. 연길에서의 일정은 내일

명하다는 매화개장집으로 향했다.

부터 본격적인 시작이지만, 오늘 늦더라도 연 길에서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개장국

다른 중국음식에 비하면 조금 비싼 가격이긴

을 한 사발 하는 것! ‘연길에 와서 개고기를

했지만,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개고

안 먹으면 조선사람이 아니다’라는 우스갯소

깃값이 쌌다. 게다가 이 집은 내부 실내장식도

리가 있을 정도로 연길의 개장국은 일품이라

잘 되어있는 유명한 집이라 연길에서 가장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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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동북지역답사기

싼 축에 속하는 곳인데도 우리 돈 1만 원 정도 면 개 수육 한 접시를 먹을 수 있었다. 여기 개 장국은 우리처럼 큰 솥에 삶는 방식이 아니라 육수를 끓여가며 샤브샤브를 해먹는 식이었 다. 특이하게도 개혀, 개발바닥, 꼬리 등의 부 위를 골라 주문할 수도 있었다. 피곤한 일정이 었지만 연길 최고의 보양식을 먹고 나니 여독 이 가시는 것만 같았다.

고구려의 기상, 항일의 함성!

중국동북을 가다 모바일로 보기 http://goo.gl/oxn6A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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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알면 세상이 보인다

매운맛을 내는 캡사이신

맛만 매울까?

모바일로 보기 http://goo.gl/xvJlZ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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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알면 세상이 보인다

사람의 몸은 오랜 진화과정에서 생존에 유리

낸다. 몸을 구성하는 단백질은 감칠맛을 낸다.

한 방향으로 발달하였다. 그 중 혀에는 맛을

미량이지만 건강 유지를 위해 반드시 섭취해

느끼는 미각 기관이 있는데 이를 통해 몸에 필

야하는 나트륨은 짠 맛으로 확인한다. 신 맛은

요한 성분과 해로운 성분을 구분해낸다.

상한 음식을, 쓴 맛은 독성물질을 가려내는데 필요하다.

생존에 필수인 에너지원, 탄수화물은 단 맛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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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알면 세상이 보인다

그렇다면 매운 맛은 뭘까? 매운 맛은 미각 기

로 삼키면 독성이 나타나고 호흡기와 피부에

관으로 느끼지 않고 다른 기관으로 느낀다. 매

자극을 일으킨다고 한다. 또한 눈에 심각한 손

운 맛을 내는 성분은 다양한데 가장 흔히 사용

상을 입힐 위험이 있다고 한다. 기체로 들이

하는 매운 맛 재료인 고추에는 캡사이신이란

마시면 폐결핵을 유발할 수 있으며 호흡 곤

물질이 매운 맛을 낸다. 캡사이신은 고통을 느

란, 후두염, 두통, 메스꺼움, 구토를 유발한다

끼는 통각을 자극하기 때문에 혀 뿐 아니라 온

고 한다.

몸(?)으로 매운 맛을 느낄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현재까지 이 물질을 화학적, 물 캡사이신은 요리에도 쓰이지만 시위진압용 최

리적, 독성학적 측면에서 완전히 연구하지 못

루액에도 사용된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물

했다는 점이다.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할 수 없

대포에도 캡사이신이 들어갔다. 더 정확히는

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안정성이 검증되지

합성 캡사이신의 일종인 노니브아미드를 알코

않은 물질을 무분별하게 국민들에게 사용함으

올에 녹인 파바(PAVA)라는 물질을 사용한다.

로써 미국의 생화학전 연구소를 대신해 생체

정부는 2010년부터 파바를 수입했다.

실험을 하고 있는 꼴이다.

경찰은 파바가 인체에 무해하다고 주장하지만 전문가들은 다른 입장 을 보인다. 미국의 화학물질 제조·유통 회사 인 ‘3E컴퍼니’가 제공하는 자료에 따르면 노니브아미드는 매우 유독 (미국) 혹은 유독(유럽연합)한 물질 48


아름다운 창경궁에 취 하 다 “예술의 본질적 가치라.. 도대체 무슨 말이야. 보통 별 관심도 없는 예술이야기라니. 고리타분해. 게다가 쉽고 재밌지도 않아. 읽기도 어렵네.” 독자들의 마음이 이런가요. 예술작품을 어떤 가치를 중심으로 볼 것인가? 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글은 누군가 읽어야 가치가 생기는 법, 그래서 구성을 바꿔보기로 했습니다. 이제 필자(A)와 가상의 인물(B,C)들 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모바일로 보기 http://goo.gl/JKwWxE


오늘은 창경궁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창경 궁은 세종대왕이 살아있는 상왕인 태종 이 방원을 편안히 모시기 위해 ‘수강궁’이란 이 름으로 지었던 궁궐이다. 그 후 성종 때 대비 들을 모시기 위한 생활공간으로 증건 하고 이름을 창경궁으로 바꿨다. 서울에 살면서 궁을 가본다는 건 특별한 일 이다. 도심 한가운데 이렇게 훌륭한 유적지 를 보유하고 있는 도시는 많지 않기 때문이 다. 몇 년 전부터 문화재청에서 경복궁과 창 경궁 야간개장을 해오고 있다. 낮에 궁의 자 태에 반한 사람들은 영롱한 불빛 아래 빛나 는 궁을 보기 위해 예매를 서두른다. 하지만 보통 몇 분이면 끝나기에 미친 듯이 클릭을 해야 한다. 드디어 어렵게 창경궁을 둘러보 았다. “와 진짜 멋있다. 궁이라 따분할 줄 알았는 데 정말 좋으네요. 문정전(文政殿) 안의 단 청과 해와 달이 그려진 그림이 제일 좋아 요.” 전부터 가고 싶다고 조르던 B는 한껏 들떠있다.


예술, 그 본질적 가치

“영화 ‘사도’ 봤어요? 그 문정전(文政殿) 앞뜰에 사도세자의 뒤주가 있었죠. 그 런 역사적 공간이에요. 단청이 좋다면 질문 하나할까요? 단청은 우리나라에만 있을까요? 다른 나라에도 있을까요?” “음.. 있을 거 같은데요.” “그래요. 중국, 일본, 인도 모두 단청을 해요. 그러나 한국 단청에 비해 수준이 낮아요. 중국에 공자가 출생한 대성전이라는 건물 이 있어요. 그 단청은 표면에 두껍게 흙을 바르고 채색한 정도 에요. 색조도 부실하고 어둡죠. 일본의 단청은 적색, 검정 색, 황금색이 주를 이루고 있어 화려하지는 않아요. 반면에 우리나라 단청은 화려하면서도 가볍지 않고 우아합니다.” “우리나라 단청은 흔히 목조건물에 채색을 하는 걸로 청색, 적색, 황색, 백색, 흑색의 다섯 가지 색을 기본으로 오행사 상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궁궐의 단청은 그 권위를 나타냄 과 동시에 바람이나 습기 같은 기후변화로부터 건축물을 지켜주죠. 동시에 외부를 화려하게 꾸미면서 건축재질의 단점을 보완하기도 해요.” “지붕 아래 화려한 단청과 지붕 위 의 단조로운 어처구니라고 하는 돌 인형(?)이 잘 어울리죠. 어 처구니는 토수 뒤로 5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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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그 본질적 가치

잡상, 용두, 취두 순으로 자리 잡고 있어요. 정

“그럼 저 해와 달 그림은 많이 본 그림인데 왜

말 환상의 조합이라니깐요. 기와지붕은 정말

저런 그림을 왕 용상 뒤에 걸어두었을까요?”

아름다워요. 용마루와 내림마루의 곡선과 약 간 치켜 올라간 추녀마루의 선은 한국적 아

“저건 일월오봉도라고 왕 뒤에만 걸어놓을 수

름다움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선과 선이 이어

있는 그림이죠. 서양의 왕들은 보통 자신의 의

지는 밤하늘 풍경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

자 뒤에 자신의 초상화를 걸어두었죠. 일월오

요.”

봉도에는 음양오행이 모두 담겨 있는데 이는 우주의 조화를 뜻합니다. 또한 조선시대의 가

질문은 일월오봉도로 이어졌다. B는 계속 질

치,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세계의 복잡한 내용

문을 이어갔다.

들을 간결하게 표현한 명작입니다. 조선은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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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그 본질적 가치

양처럼 왕 개인 보다, 통치이념을 더 중시했

있다. 창경궁의 건축물 배치와 구조는 계절마

다는 이야기죠.”

다 자연이 선물하는 경치를 바로 눈앞에서 누 릴 수 있게 해준다. 창경궁의 조형미는 정말

문정전을 지나 조금 걷다보면 넓은 정원 한

탁월하다.

가운데 즈음 함인정(涵仁亭)이라는 정자가 하나 있다. 함인정은 “세상이 임금의 의로 움에 흠뻑 젖는다”는 말이다. 이곳은 임금이 문무과거에 급제한 신하를 접견했던 장소다. 함인정 누각 안쪽으로 네 곳에 현판이 걸려 있는데, 동서남북 각 방향에 따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노래한 글귀가 걸려있다. 도연 명 사시에 나온 시다. 춘수만사택 春水滿四澤

: 눈 녹은 봄물은 못마다 가득하고 하운다기봉 夏雲多奇峰

: 여름의 구름은 기이한 봉우리마다 걸려있네 추월양명휘 秋月揚明輝

: 가을 달은 천지를 밝게 비추니 동령수고성 冬嶺秀孤松

: 겨울 산봉우리 외롭게 선 소나무는 빼어 나구나 계절별로 의미가 다른 자연의 의미를 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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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그 본질적 가치

연못이 있네요. 하긴 요즘 높으신 부자들도 집 C는 아까부터 창경궁 뒤편 춘당지를 가자고

에 수영장 놓는데요. 뭘”

난리다. 야간개장이라 호숫가 불빛이 멋있을 지 몰라 발걸음을 옮겨봤다.

사실 춘당지는 1909년 일제가 창경궁을 파괴 할 때 이 자리에 연못을 파서 보트를 타고 놀

“와 진짜 멋있다. 저기 큰 호수 좀 봐요. 가운

이를 즐기는 유원지로 만들었던 곳이다. 뒤쪽

데 섬도 있네요. 왠지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의 작은 연못이 조선 왕조 때부터 있던 본래

신비한 느낌이에요. 그런데 궁 안에 이렇게 큰

의 춘당지다. 앞쪽 연못은 원래 왕이 몸소 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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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그 본질적 가치

사를 짓던 11개 논이었다. 임금은 친히 쟁기

연출하고 있다. 낮에는 볼 수 없는 야간개장만

를 잡고 소를 몰며 풍년을 기원했다. 지금 생

의 매력이 이런 게 아닐까. 청아한 달빛이 서

각해보면 조선시대 왕이 지금 대통령 보다 훨

쪽 하늘에 고즈넉하게 걸려있는 풍경, 그야말

씬 좋았던 것 같다.

로 한폭의 그림이다.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일본놈들이 우리 문화재를 파괴하고, 조선 왕

“삐~! 삐~! 아 이제 창경궁 야간개장시간 끝

조를 깎아내리려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

났습니다. 지금 안 나가면 다음날 아침 9시까

키고 연못파고, 동물원, 식물원 지어 공원으로

지 여기 갇혀 있어야 해요. 빨리나가세요. 꼭

만들어버렸어요. 나쁜 놈들. 그래서 1980년대

풀 속에 몰래 숨어 있다가 못나가는 사람들 있

복원을 하면서 일제 잔재를 뿌리 뽑기 위해 벚

어요. 여기 창경궁 뒤편에 시체를 담는 관이

꽃나무도 모두 뽑아버렸죠.”

있어요. 여기 조선시대 여인들 사이에서 얼마 나 많은 암투가 있었는지 아세요? 여기 귀신

춘당지와 가까운 곳에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이 얼마나 많은데요!”

마음을 담은 월근문(月覲門)이 있다. 월근문 은 정조가 사도세자의 사당에 참배하러 가기

문화재청 옷을 입은 공무원이 야간개장 시간

위해 별도로 만든 문이다. <승정원일기> 정조

이 끝났다며 관람객들을 서둘러 내보낸다. 우

3년 10월 10일자에는 “이 문을 거쳐서 혹 한

리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창경궁을 나왔

달에 한 번 전배하거나 한 달씩 걸러 전배하여

다. 창경궁은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참 잘 보

어린 아이가 어버이를 그리워하는 것 같은 내

여준다. 이렇듯 우리민족의 고유한 미(美)를

슬픔을 풀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정조의 애

알았을 때, 비로소 미적가치의 기준이 생기는

틋한 마음이 전해져온다.

것이 아닐까.

춘당지를 다 돌아보자 날이 많이 어두워졌다. 연못에 비친 춘당지는 자못 환상적인 광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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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똑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똑 방법 예술, 그 본질적 가치

“종신보험” 꼭 가입해야 할까 실천자산관리연구소 정욱 소장

종신보험은 사망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생명보험사의 대표적인 보장성 보험입니다. 주계 약이 종신사망(몇 세에 사망하든지 가리지 않고 보험금을 지급하는 조건. 반대되는 개념으로 일정기간만 사망 보험금을 지급하는 정기사망이 있음)이라서 주계약 보험료가 상당히 비쌉니다. 40대초 남성인 저를 기준으로 종신사망보험금 1억원에 해당하는 보험료(20년납 기준)가 약 20만원이 넘습니다. 보험사마다 종신사망을 최 소 3~5천만원 이상 넣어야 암, 성인병, 의료실비 같은 의료보장 특약을 넣을 수 있으므로 건강의료보장이 가 능하도록 제대로 설계를 하려면 사망보험료만 최소 6~10만원은 들어간다는 얘기가 됩니다. 사망 보장을 최 소로 넣더라도 여기에 의료보장 특약들의 보험료를 합하면 월납 보험료가 20만원을 넘을 수도 있게 됩니다. 이제 종신보험의 사망보험금을 위해 납입하는 이 수만원 또는 수십만원의 보험료에 대한 평가가 중요하게 됩 니다. 누군가에게는 사망보험금이 의미가 있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전혀 불필요한 것일 수 있습니다. 또, 자녀들이 독립할 때까지만 사망보험금이 필요하지, 종신토록 사망보장을 하는 것이 필요한가도 따져봐야 합 니다. 어린 자녀를 책임지기 위해 “만에 하나의 경우까지 생각해서” 사망보험을 가입하는 것은 아름다운 선택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녀가 성인이 되어 독립할 때까지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라면 종신토록 사망보 험금이 지급되는 것이 아니라 20년 정도만 사망보험금을 지급하는 보험을 들면 될 것입니다. 실제로 일정한 기간을 정해 사망보장하는 보험을 종신보험과 구별하여 정기(定期)보험이라 부르며, 저를 기준으로 20년 동안 만 사망을 보장한다면 1억원의 사망보험금에 대해서 월5만원 정도만 납입하면 됩니다. 같은 금액의 종신보험 보험료가 20만원이니 1/4밖에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가족 사랑의 의미로 사망보험금을 준비하더라도 한참 비싼 종신보험으로 준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간 혹, ‘종신보험은 언제가 됐든 사망보험금을 한 번은 지급하기 때문에 손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설계사들이 있습니다. 이런 주장은 인플레이션에 따른 돈가치의 하락을 전혀 무시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제 가 1억원의 종신보험을 가입하고 평균적인 수명을 누리다가 100세에 죽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약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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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2월입니다. 새해를 맞이하기에 앞서 지난 한 해를 평가하는 것은 삶의 진일보를 위해 매우 중요한 과정 입니다. 한 해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재무적 삶을 돌아보는 것 역시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은 세상을 보는 관점을 일상 가까이로 최대한 줌인(zoom-in)하여 개인 또는 가정의 금융 생활에 도움이 될우리가 몇

미래다

가지 “논쟁적” 주제들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수십 년간 금융회사와 판매자들에 의해 잘못 퍼진 믿음들과 왜곡된 사실들 중에서 금융소비자이면서 다수이 자 약자인 서민들에게 피해가 빈번한 것들을 중심으로 다룰 것이므로 최대한 많은 이들 사이에 화제가 되고 논쟁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몇 차례에 걸쳐서 연재할 이 글의 제목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똑똑 한 방법” 정도로 명명하면 그럴듯하겠다 생각합니다. 고양이를 없애거나 완전히 길들이기 전까지는 놓여진 현실 속에서 최선의 방법을 찾아보자는 의미로 여겨주시면 고맙겠습니다.(동명의 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년이 지나서 지금 약속한 1억원의 사망보험금을 받게 되는데, 평균4%의 물가상승률을 가정한다면 당시 사망 보험금1억원의 가치는 현재가치로 환산했을 때 약 1,000만원 수준밖에 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당장” 그 보험 을 유지하기 위해서 납입해야 하는 보험료는 매월 20만원씩 20년간 총 4,800만원에 이릅니다. 금융을 다루는 사람이 돈의 액면가만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말장난이거나 오히려 그 이하입니다. 자녀가 있는 부모가 이러할 진데 미혼인 사람에게 본인 사망보험료가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종신보험이 가당키 나 하겠습니까? 사망보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암, 성인병, 입원, 수술, 의료실비 따위의 생존 시 건강의료 보 장이 필요하다면 생명보험(종신보험)보다는 손해보험 상품으로 가입하는 것이 대체로 유리합니다. 최근에는 종신보험을 저축 상품인양 판매하는 사례마저 늘고 있으니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지난 10여년 이 상 종신보험 판매로 높은 이익을 봤던 생명보험사와 보험설계사들이 똑똑해진 소비자들에 의해 종신보험 판 매가 부진해지자 종신보험을 판매하는 새로운 “스킬”로서 저축인양 포장하는 방법을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금리로 인해 연금과 같은 저축성보험의 판매 역시 어려워지면서 종신보험을 저축으로 둔갑시키는 “스킬” 은 대기업 생명보험사 영업조직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판매되고 있을 종신보험 청약서에 명시된 “본 상품(종신보험)은 저축이 아니라 보장성보험”이라는 문구를 그들은 어떻게 읽 고 설명하고 있을까요? 종신보험 가입 당시의 가입 목적과 계약의 구체적인 내용을 자세히 살펴서 유지여부를 심각하게 재검토하세 요. 해지하면 납입 금액보다 적은 돈을 돌려받는다고 아쉬워할 것도 아닙니다. 보장성보험인 종신보험은 애초 부터 저축이 아닙니다. 세콤 따위의 보안서비스를 3년간 설치했다가 해지하면서 그동안 도둑이 들지 않았다 고 해서 사용료를 돌려받을 수 없는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오히려 앞으로 더 내야 할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 는 것이 급선무 아닐까요? 길을 잘못 들어섰는데 지금까지 온 것이 아까워서 계속 나아갈 수 없는 노릇입니 다. 잘못 왔다는 걸 깨달은 순간 빨리 뒤돌아 가야 한 걸음이라도 헛걸음을 줄일 수 있습니다. 아직 가입 전이 라면 종신보험은 웬만하면 멀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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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미래다

20대 청년, 정치허무주의에 맞서다 * 손정빈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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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미래다

쌀쌀한 날씨지만 민권연대 회원들은 국정화교과서 반대, 노동개악 반대 등의 내용으로 진 행한 민주주의국민행동 농성에 함께 했습니다. 지역의 회원들도 서울로 올라와 농성에 함 께 해 주셨습니다. 일주일가량을 서울에서 보낸 회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는 20대 청년도 있었습니다. 손정빈 회원이 그 주인공입니다. 그는 이전 탄저균 반대 가요제에서 멋들어진 노래실력을 뽐내기도 해서 인상에 많이 남았던 회원입니다. 짧은 기간일 수 있지만 20대의 열정으로 보낸 서울생활이 어땠는지 한 번 들어봤습니다.

본 : 반갑습니다. 회원들에게 간단한 인사 부 탁드립니다. 손정빈(이하 손) : 안녕하세요. 시민주권행동 청년회 활개 24살 손정빈입니다. 본 : 이번에 민주주의국민행동(민주행동)이 민중총궐기를 준비하며 진행한 농성에 참여하 셨는데요, 어떤 마음으로 참여하게 되었나요? 손 : 나라꼴이 엉망입니다. 이번 민중총궐기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면 좋겠다고 생각 을 평소에 하던 차에 농성제안을 받았습니다. 민중총궐기를 위해서 제가 나서서 뭔가를 해 59


우리가 미래다

보고 싶다는 생각에 참여했습니다. 본 : 농성을 진행하면서 기억나는 게 있다면 요? 손 : 실천을 나갔을 때 입니다. 매정하신 시민 분들도 많았고, 어르신들 중에는 트집을 잡고 방해하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먹고 살기 힘 들고 개인주의가 판을 치도록 만든 이 사회 가 이토록 정치허무주의에 빠지게 하고 언론 이 얼마나 제 역할을 못했으면 어르신들이 이 정도로 부정적이실까 생각했습니다. 본 : 지난번 9월 탄저균 추방의 날 행사에서 도 봤던 것 같습니다. 가요제에 참석하셨는 데, 노래를 상당히 잘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하하) 당시에는 어떤 마음으로 참석하신 건 가요? 손 : 노래 칭찬은 일단 감사합니다. 당시에는 탄저균 불법반입 사건으로 난리였죠. 이 탄저 균은 메르스보다 치사율이 높은 것으로 압니 다. 이런 위험한 물질이 대한민국에 맘대로 60


우리가 미래다

들여왔고, 그에 대해 정치인들이 말 한마디 제

엇을 해야하나... 생각하다가 2013년 선배의

대로 하지 않는 것에 분노했습니다.

권유로 통합진보당에 가입을 했습니다. 그렇 게 활동을 하다가 2014년 지방선거를 연으로

본 : 사회운동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시민주권행동에 가입했습니다.

손 : 저는 어릴 때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습

본 : 앞으로 계획하고 있으신 게 있으면 알려

니다. 2012대선 때 새누리당이 또 다시 집권

주세요.

하고 부정선거 의혹이 터질 때 분노했습니다. 이 나라는 어찌 나아지질 않는가... 그럼 난 무

손 : 서울에 가서 며칠을 실천을 하니 재밌고 보람있었습니다. 서울에서 했던 것처럼 광주 에서도 열심히 대중들을 만나 12월 5일 2차 민중총궐기 성사를 위하여 열심히 활동할 것 입니다. 본 : 끝으로 민권연대 회원들에게 하고 싶으 신 말이 있으면 해 주세요. 손 : 일단 서울에서 같이 실천했던 형님 누님 들, 재밌었고 정이 많이 들었습니다. 보고 싶 습니다. 그리고 우리 회원들 앞으로도 우리 민 족이 하나 되어 함께 사는 세상, 모두가 행복 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끝까지 함께합시다. 투 쟁! 61


천수

! ! 다

꿈꾼

민권연대 바자회 mkyd.org/market_01 12.1부터 12.15까지


후원회원을 찾아서

이번호에는 후원회원 인터뷰 대신 민권연대 후원회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바자회 소식을 싣 습니다. 많은 후원회원 분들이 소중한 물품을 기증해 주셨습니다. 기증한 물품들을 보면서 주위의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가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가 아닌가 합니다.

【민권연대 바자회 소개】 매년 연말이면 후원주점 행사를 통해 다음해 사업비를 마련하고는 했었는데 올 해는 정형화된 형식을 벗어나 새로운 형태의 행사를 기획해보고자 온라인 바자 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민권연대 회원과 후원회원만이 참여하는 바자회가 아니라 연대 단체 분들과 지 인들 그리고 페이스북을 통해서 교류하고 있는 친구들까지 참여할 수 있는 공간 을 마련했습니다. 민권연대 홈페이지에서 판매를 하오니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 드리겠습니다. ▲기증기간 : 11월 달 내내 ▲판매기간 : 12월 1 ~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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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을 찾아서

민권연대 바자회 mkyd.org/market_01

판매완료

어린이용 소파

제습기

대전지역 청년회에서 통일운동을 하고 있으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님이 기증해주신 상품

며, 유아용품 사업을 하고 있는 인경식님께

입니다. 김치냉장고를 구매하면서 받은 사

서 기증해 주신 상품입니다. 직원이 아니면

은품이라고 하는데, 인터넷 최저가 48만원

찾기 힘들만큼의 미세한 흠이 있는 제품이

이 넘는 제품입니다.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긴 하지만 새제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인

가정이라면 꼭 필요한 제품이 아닐까 싶습

터넷 최저가 보다 저렴하게 판매하니 많은

니다.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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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을 찾아서

무농약 고춧가루 농사를 짓는 지인께서 기증해주셨습니다. 농가 현지 판매가가 1근 당 15,000원이 넘 는다고 하네요. 총 9kg(15근)입니다. 김장 을 준비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구매 부탁드 리겠습니다.

냉장고 골프클럽

새바람 김고니 회원이 기증한 물품입니다. 12월 달에 이사를 앞두고 있는데 기존에 사 용하던 제품을 기증해주셨습니다. 중고품이

라디오반민특위 고준일 회원님께서 기증해

긴 한데... 중고나라 장터에서 최소 40만원

주신 물품입니다. 10년 전에 구입한 물품이

에 거래되고 있는 제품입니다. 상태도 좋아

간 하지만 현재 중고로 팔면 최소 50만 원

서 10년은 더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상은 받을 수 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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