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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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본 2015.07

http://mag-mkyd21.tistory.com

미군의 실험장이 된 대한민국 주한미군이 ‘탄저균 택배’를 받은 이유 미군의 탄저균 반입 왜 불법인가 1952년 7월 한반도를 찾은 7명의 과학자들이 본 것 생물무기, 왜 위험한가 1


발행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민권연대) 발행일 2015년 7월 1일 (17호) 블로그 http://mag-mkyd21.tistory.com 문의 mag.mkyd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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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한미군에게 얼마나 퍼주고 있을까

미군의 실험장이 된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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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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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풀어쓰는 경제이슈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그리고 외국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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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칼럼

1/5000 오퍼레이션 크로마이트 (Operation Chromite)

84

스승을 만나다

“사람은 죽어서 정신을 남긴다” 권오창 우리사회연구소 이사장

1952년 7월 한반도를 찾은 7명의 과학자들이 본 것 세상의 모든 무기

예술, 그 본질적 가치

‘이웃집 토토로’가 미군기지에 살 수 있을까

·주한미군이 ‘탄저균 택배’를 받은 이유 ·탄저균 국내 반입·실험의 위법성 이달의 역사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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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미래다

“용산에서 안전하게 살고 싶어요” 최명희 회원

생물무기, 왜 위험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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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을 찾아서

“쫄지 마! 대한민국!” 장우식 후원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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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글

http://mag-mkyd21.tistory.com/185

메르스로 전 사회가 혼란에 빠져있는 동안

이 어떤 근거로 불법적인 것이 되는지도 짚

다른 한편에서는 더 끔찍한 소식이 전해졌

어봤습니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세균전을

습니다. 미국 국방부가 유타 주의 군 연구

준비하거나 진행 했다는 과거 의혹들이 있

소에서 살아있는 탄저균 표본을 주한미군

었는지도 돌아봤습니다.

기지로 배송했다는 사실을 발표한 것입니 다. ‘죽음의 수소폭탄’이라 불리는 탄저균

탄저균 불법반입 사건은 우리 국민들로서

은 100㎏의 투하로 300만명의 목숨을 앗

는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입니

아갈 수 있는 대량살상 무기입니다.

다. 세균무기 실험은 방어용이든 공격용이 든 있어서는 안 될 일이며, 더욱이 우리 국

미국은 이번 한번뿐인 실수라고 이야기 합

민들이 전혀 알고 있지 못했다는 점은 절대

니다. 하지만 미국은 ‘주피터 프로그램’ 등

로 용납할 수 없습니다. 우리 국가의 주권

을 통해 2013년부터 주기적으로 맹독성 물

을 유린하는 일입니다.

질의 반입과 실험을 반복해 왔고, 탄저균보 다 10만배나 독성이 강하다는 ‘보툴리눔’

이번에 바로잡지 못하면 문제는 더욱 커질

을 한국에 불법 반입해 실험해 왔다는 의

것입니다. 미군은 주한미군 기지 내에서는

혹도 사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미국의 생

그 어떤 행위도 허용된다는 확신을 갖게 될

화학무기 실험장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것입니다. 미군의 행위라면 한국은 국민의 생명에 대한 어떠한 보호의무도 이행할 수

이번 <특집기획>에서는 미국의 탄저균 실

없는 처지가 될 지도 모릅니다.

험과 관련한 글들을 실었습니다. 탄저균 택 배를 둘러싼 의혹들을 정리해 보고, 미군이

박근혜 정부에게 기대할 게 있을까요? 국

‘탄저균 택배’로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를

민들이 나서야 할 때입니다.

생각해 봤습니다. 미군의 탄저균 국내 반입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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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이 탄저균 택배를 받은 이유

미군이 민간 택배회사를 통해 주한미군에 살아있 탄 저균을 보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미군은 생화학전 에 대비한 방어용 실험이었다고 변명하고 있지만 이 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입니 다. 사건의 진상을 분명히 하기 위해 6개의 질문을 던 져봅니다. 4


시사칼럼

1 when 언제부터 탄저균이 들어왔는가 주한미군은 이번에 처음으로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생물무기 연구 인 주피터(주한미군합동통합위협인식) 프로그램은 2013년 6월부터 진행되 어 왔습니다. 더 나아가 주피터 프로그램은 2007년 부시 미 대통령의 국토 안보대통령지시(HSPD-21), 2009년 오바마 미 대통령의 정책지시(PPD-2. 생물학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국가전략의 실행) 등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언론보도를 종합해보면 오산미군기지에 탄저균 실험시설을 갖춘 때는 1998 년이며 해외 미군기지 가운데 최초였다고 합니다. 또한 미국 ABC 방송은 2014년 3월 이후 살아있는 탄저균 표본이 주한미군에 제공됐다고 보도하였 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우리도 모르게 오래 전부터 은밀한 세균전 실험이 진 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5


시사칼럼

2 where 어디에서 생물학전 대비 실험을 진행했는가 한국에서 세균전 실험을 한 목적은 뻔합니다. 당연히 한국의 환경과 한국인에 맞춰 세균전을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주한미군의 세균전 실험실은 서울 용산미군기지와 경기도 오산미군기지, 평 택 캠프 험프리, 군산미군기지, 충청지역으로 추정되는 미 육군공중보건국 산하 환경실험실 등 여러 곳에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미 국은 한국에서 세균전 실험을 했을까요? 주피터 프로그램의 설계자인 피터 이마뉴엘 박사는 왜 한국에서 실험했느 냐는 질문에 대해 “주한미군 지도부에게 그런 능력이 요구되고 있고, 한국 은 지정학적으로 미국의 자산이 집중된 우방 국가”이기 때문이라고 답했습 니다. 또 그는 원한다면 한국 내 주한미군 기지 어디에서나 실험이 가능하다 고 밝혔습니다. 6


시사칼럼

한국에서 세균전 실험을 한 목적은 뻔합니다. 당연히 한국의 환경과 한국인 에 맞춰 세균전을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최근 미 공영방송 NPR의 보도에 따 르면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미군 6만 명을 대상 으로 비밀리에 화학가스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어떤 민족에게 어느 정도 영 향을 주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한국에서 세균전을 한다면 당연히 한국인에게 탄저균과 같은 생물무기가 얼마나 효과를 발휘하는지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7


시사칼럼

3 who 누가 세균을 들여와 실험을 했는가 당연히 탄저균을 들여온 것은 주한미군입니다.

당연히 탄저균을 들여온 것은 주한미군입니다. 그러나 한국군은 이를 전혀 모르고 있었을까요? 이마뉴엘 박사는 여러 가지 생화학 방어 시스템을 한국 군 수뇌부에게 사용해보도록 한 뒤 직접 고르게 했다고 밝혔습니다. 한국 국 방부 관계자도 미군이 탄저균 훈련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했습 니다. 사실 이번에 들어온 탄저균은 새로운 유전자 분석장비 시연을 위한 샘플이 었으며 이 시연 행사에는 한국 국방부와 보건복지부도 초청 대상이었습니다. 8


시사칼럼

4 what 어떤 세균들이 얼마나 들어왔는가 이번에 들어온 탄저균은 1밀리리터의 소량이지만 일주일만 배 양하면 천 배인 1리터로 증식시킬 수 있습니다.

피터 이마뉴엘 박사는 주피터 프로그램의 1단계 실험 대상이 탄저균과 보툴 리눔 A형 독소라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페스트균, 바실리스균에 대해서도 실 험했다고 밝혔습니다. 나아가 “아무도 이 정도의 규모로 생체관측을 시도한 적이 없었다”면서 “이것은 정말 큰 조직적인 시도였다”고 밝혀 엄청난 규모 의 세균전 실험이 진행되었음을 암시하기도 했습니다. 이번에 들어온 탄저균은 1밀리리터의 소량이지만 일주일만 배양하면 천 배 인 1리터로 증식시킬 수 있습니다. 세균전을 위한 공장이 따로 필요 없으며 실험실이 곧 공장인 셈입니다. 9


시사칼럼

5 why 왜 세균전 실험을 하였는가 미국은 적국의 세균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방어용 실험이었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2010년 오바마 미 대통령은 실행명령(EO-13546)에서 “생물학적 작 용제와 독소를 활용하기 위한 강력하고 생산적인 과학적 모험은 국가안보의 핵심이다”고 한 바 있습니다. ‘방어’가 목적이 아니라 ‘활용’이 목적이라고 명기한 것입니다. 세균무기를 개발하면서 공격용이라고 이야기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모구 방 어용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때문에 수파리 인도네시아 보건장관은 미국의 세 균무기 개발에 대해 “공격용인지 방어용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 주장했습니다. 또 한 가지 무시 못 할 부분은 세균전에 대비한 백신 개발과 관련된 의료산 업입니다. 미군이 한국 국방부와 보건복지부를 초청해 탄저균 유전자 분석 시연을 한 후 무엇을 요구하겠습니까. 북한의 세균전에 대비해 전 국민을 대 10


시사칼럼

“생물학적 작용제와 독소를 활용하기 위한 강력하고 생산 적인 과학적 모험은 국가안보의 핵심이다” 또 한 가지 무시 못 할 부분은 세균전에 대비한 백신 개 발과 관련된 의료산업입니다.

상으로 한 탄저균 백신을 비축해야 한다고 요구할 것입니다. 탄저균 백신은 한 번 맞으면 끝나는 게 아니며 18개월에 6번 백신을 맞고 그 후 매년 추가 백신을 맞아야 합니다. 미국의 탄저균 백신 개발 업체 입장에서 한국은 매우 흥미로운 시장인 것이죠. 11


시사칼럼

결론은 무엇인가 이마뉴엘 박사는 주피터 프로그램 결과가 미 육군 시험평가센터와 시험작전 사령부의 합동 군사력 평가를 최종 통과하면 주한미군에 넘겨져 임무를 수 행하게 된다고 합니다. 원래 계획은 6월 초에 한국에서 대규모 실전 실험을 하려는 것이었으나 탄저균 사건이 발생하면서 중단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 니다. 특이한 점은 주피터 프로그램과 비슷한 시기에 미군 제23화학대대가 의정부 캠프 스탠리에 배치돼 작전을 수행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화생방전을 전 문으로 하는 이 부대는 2004년 미국 본토에 복귀했다가 2013년 4월 4일 재 배치됩니다. 애초 이 지역의 미군시설은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2016년 한국 에 반환될 예정이었다가 갑자기 취소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2010년대 들어 미국이 한국에서 세균전에 대비해야겠다고 판 단한 후 주피터 프로그램을 통해 대규모 세균전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화생 12


시사칼럼

원래 계획은 6월 초에 한국 에서 대규모 실전 실험을 하 려는 것이었으나 탄저균 사 건이 발생하면서 중단된 것 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방전 전문 부대를 한국에 배치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세균전이 발발하면 핵전쟁에 버금가는 대재앙이 발생할 것입니 다. 그런데 우리 국민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상태에서 주한미군은 세균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방어용이든 공격용이든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며 더욱이 국민에게 비밀로 하고 있었다는 점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습니다. 메르스만으로도 나라 전체가 혼란의 도가니에 빠지는데 만약 탄저균이나, 더 무서운 보툴리눔같은 게 퍼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번 일을 계기로 주한미군의 세균전 프로그램에 대해 끝까지 진상을 파헤쳐야 할 것입니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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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탄저균 반입 왜 불법인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미군문제연구위원회

탄저균 국내 반입·실험의 위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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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들어가며 2015년 5월 28일, 미국 국방부는 유타 주의 군 연구소에서 부주의로 살아있 는 탄저균 표본을 주한미군기지로 배송했다는 사실을 발표하였습니다. 주한 미군 측은 이 탄저균 표본을 사용하여 오산기지의 ‘주한미군 합동위협인식 연구소(ITRP)’에서 배양 실험을 진행했고, 이 과정에서 실험요원 22명이 노 출되었으며, 현재까지 감염증상을 나타내는 사람은 없다고 밝혔으나, 2015 년 5월 29일 미국 <폭스뉴스>는 “이 탄저균 샘플에 22명이 노출 됐을 가능 성이 있어 치료 중”이라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 특히 이 과정을 통해서 주 한미군이 이른바 ‘연합 주한미군 포털 및 통합위협인식’(Joint USFK Portal and Integrated Threat Recognition(JUPITR))’이라는 이름의 프로젝트(한국 명 : 주피터)에 따라 적어도 2013년부터 6월부터 탄저균을 이용한 ‘훈련’을 해왔다는 사실도 확인되었습니다. 탄저균은 감염병 예방법에 의한 ‘고위험병원체’로서 질병관리본부 및 보건 복지부의 철저한 관리 하에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생물무기인 ‘생물작용제’ 로서 훈련 등에 사용되어 ‘무기화’ 하는 것을 전면 금지하고 있고, 혹여 질 병예방 등의 목적으로 보유하더라도 산업통상자원부에 의해 철저히 관리되 고 있고 관리되어야 하는 물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생명·안 전을 위하여 규정된 법률 규정을 전혀 준수하지 않고 법을 위반하여 우리 국 민들의 생명·안전을 심각한 위협에 빠뜨렸습니다. 15


시사칼럼

화학무기ㆍ생물무기의 금지와 특정화학물질ㆍ생물작용제 등의 제조ㆍ수출입 규제 등에 관한 법률 위반 생물무기는 인간 또는 동식물을 사망시키거나 피해를 가하기 위해 고의적으 로 병원성 물질을 사용하는 것으로, 화학무기 및 핵무기와 함께 대량살상무 기로 분류됩니다. 1972년 4월 10일, 런던, 모스크바, 워싱턴에서는 세균무 기(생물무기) 및 독소무기의 개발, 생산 및 비축의 금지와 그 폐기에 관한 협 약(BWC, 이하 ‘생물무기금지협약’이라고만 합니다)을 체결하고 이를 전면 적으로 금지하여 왔습니다. 특히 미국은 자국의 생물무기 프로그램이 1969 년 11월 닉슨 대통령이 모든 형태의 생물전을 포기한다고 선언하고 모든 생 물작용제 생산 관련 시설의 폐쇄와 비축 생물무기의 폐기를 명령함으로써 종료되었다고 주장하여 왔습니다. 위 협약은 “협약의 각 당사국은 어떠한 경 우에도 아래와 같은 물체(탄저균 등)를 개발, 생산, 비축 또는 기타 방법으로 획득하거나 보유하지 아니한다”라고 규정하고 있고, 한국정부는 2002년 10 월 8일자로 위 협약의 원천이 된 제네바 의정서상의 생물무기 사용에 관련 유보 철회를 발표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기존의 「화학무기금지법」을 전면 개정하여 2006년 4월 28일 「생화학무기법」을 공포하여 생물무기금지협 약 이행을 완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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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탄저균은 그 자체로 ‘생물무기’이므로 누구든지 탄저균을 질병치료 이외의 목적으로 제조, 보유하여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저균 배양실 험 및 ‘훈련’을 했다고 밝히고 있어, 이는 질병의 예방과 치료목적과 관계없 는 생물무기를 제조하고 보유한 것으로서 우리 법이 전면적으로 금지하고 있 는 행위입니다. 또한 ‘훈련’을 위한 생물무기의 제조의 목적으로 ‘생물작용 제’를 제조·보유하였으므로 역시 생화학무기법을 위반한 것입니다. 또한 탄저균은 생화학무기법상의 “자연적으로 존재하거나 유전자를 변형하 여 만들어져 인간의 동식물에 사망, 고사, 질병, 일시적 무능화나 영구적 상 해를 일으키는 미생물”인 “생물작용제”로서 이를 제조하기 위해서는 미리 ‘ 제조 목적과 제조량’ 등을 산업통상자원부장관에게 신고하여야 하고, 국내 로 수입하면서 산업통상자원부장관에게 허가를 받아야 하며, 생물작용제 등 을 보유하는 자는 보유량과 보유 경위 등을 산업통상자원부장관에게 신고하 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군은 탄저균을 반입하여 실험하면서 그 어느 것도 신고하거나 허가받은 것이 없으므로 위법이며, 관련자는 처벌되어야 마 땅할 것입니다. 17


시사칼럼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감염병 예방법 제2조 제19호는 ‘고위험병원체’와 관련하여 “‘고위험병원 체’란 생물테러의 목적으로 이용되거나 사고 등에 의하여 외부에 유출될 경 우 국민 건강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감염병병원체로서 보건복지 부령으로 정하는 것을 말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감염병 예방법 시행규칙에 따른 고위험병원체의 종류 중 “세균 및 진균”에 ‘탄저균’이 포함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탄저균’은 감염병 예방법 상의 ‘고위험병원체’이고, 질병관리본부 역시 ‘탄저균’이 국가 안전관리 대상 고위험병원체에 해당한 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탄저균은 국민건강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고위험병원체에 해당하 기 때문에 감염병 예방법 제22조 제1항은 “감염병의 진단 및 학술 연구 등을 목적으로 고위험병원체를 국내로 반입하려는 자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요 건을 갖추어 보건복지부장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이를 위반하여 고위험병원체의 반입 허가를 받지 아니하고 반입한 자는 5년 이하 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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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화학무기ㆍ생물무기의 금지와 특정화학물질ㆍ생물작용제 등의 제조ㆍ수출입 규제 등에 관한 법률」위반 질병의 예방과 치료목적과 관계없는 생물무기를 제조하고 보유 훈련’을 위한 생물무기의 제조의 목적으로 ‘생물작용제’를 제조·보유 미군은 탄저균을 반입하여 실험하면서 신고하거나 허가받지 않음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위반 2013년부터 탄저균을 오산 주한미군기지 내에 반입하여 배양 실험 을 하면서 보건복지부 장관의 허가를 받은 바가 없음

그러나 미군은 적어도 2013년부터 탄저균을 오산 주한미군기지 내에 반입 하여 배양 실험을 하면서 보건복지부 장관의 허가를 받은 바가 없어 감염병 예방법 또한 위반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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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주한미군기지 내에서 발생한 법 위반 사례

주한미군기지 내에서 발생한 법 위반 사항과 관련하여 헌법재판소는 “주한 미군주둔군지위협정(Status of Forces Agreement, SOFA)(이하 ‘SOFA’) 제 4조가 합중국 군대가 공여받은 시설과 구역에 관한 보안조치나 그 반환에 관 하여 규율하고 있을 뿐이고 환경에 관한 사항은 전혀 규율하고 있지 않다. 그 리고 이 사건 협정 전체를 살펴보더라도 합중국 군대가 공여받은 시설 및 구 역을 사용함에 있어서 자연환경이나 인간건강의 보호를 위하여 이행하여야 할 사항에 관하여는 전혀 규율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 규정들은 합중국군 대에게 그 공여받은 바의 시설과 구역을 오염시킬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거 나, 환경오염을 방치한 상태로 시설과 구역을 반환할 수 있도록 규정하는 것 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 규정들이 미군속의 독극물방류를 근거지우거나 정 당화하는 내용은 더더욱 아니다”라고 판시한 바 있습니다. 또한 용산 미8군 영안실에서 유독물질인 시체방부처리용 포름알데히드 용액을 한강에 방류 한 미군속에게 법원은 우리 환경법인 수질환경보전법을 적용하여 유죄를 선 20


시사칼럼

고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에서 문제가 된 오산공군기지에 제2활주 로를 건설하면서 환경영향평가를 실시하지 않은 것과 관련한 행정소송에서 “SOFA에 대한민국의 환경관련 법령이나 기준을 최대한 존중한다는 원칙을 확인하고 있고, 이에 따르면 주한미군에게 공여된 시설 및 구역에 대하여도 본 협정 및 부속합의서와 배치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대한민국 환경 관련 법령을 적용할 수 있다”고 판시한 바도 있습니다. 즉 주한미군기지내에서 발생한 사안이라고 하더라도 법률위반 사항이 있을 경우 관계자를 처벌하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으며, 오히려 이 사건과 관련하 여서는 국민의 생명, 안전과 국가의 주권과 직결되는 문제인 만큼 철저히 진 상을 규명하고 그 책임자를 처벌하여야 국민의 안전과 주권이 보장될 수 있 다고 할 것입니다. 21


시사칼럼

마치며

이번 탄저균 사건은 우리 국민들로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만일 오늘의 이 사건을 아무런 수사나 처벌 없이 그냥 넘어가게 된다면 우리 는 또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전전긍긍하게 될 뿐만 아니라, 국가는 국민의 생명에 대한 어떠한 보호의무도 이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입니다. 반면 미군은 한국에 있는 자신들의 기지 내에서는 그 어떤 행위도 허용된다 는 또 한 번의 확신을 갖게 될 것입니다. 탄저균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부언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더욱 위험한 것은 만일 미국에서 이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면 국민의 생명, 안전과 직결되 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까지 아무 것도 몰랐을 것이라는 사실 입니다. 한국정부는 지금이라도 국민들에게 미군으로부터 사전에 통보를 받은 바가 22


시사칼럼

있는지, 처리과정에 대해 충분히 납득할만한 설명과 검증을 실시하였는지를 밝혀야 하며, 미국으로부터 충분한 사전, 사후 통지를 받지 못했다면, 지금부 터라도 하나의 의혹도 없도록 철저하게 진상을 공개하고 조사할 것을 요청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국민의 생명, 안전과 관련된 사항에 대해서 우리 정부에게 사전 통보하 도록 SOFA에 명시하여 주한미군 기지 내에 무엇이 반입되고, 무엇이 반출 되는지 반드시 알아야 하며, 이는 우리 국민들의 당연한 권리이자 주권의 문 제입니다. 23


http://mag-mkyd21.tistory.com/188

1952년 7월 한반도를 찾은 7명의 과학자들이 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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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역사

1952년 7월, 세계 유수의 과학자 7명이 북한 지역을 방문합니다. 이들은 한국전 쟁에서 자행되고 있다는 세 균전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북한에 온 국제과학자협회 공식조사단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 년 겨울부터 북한지역에서 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 다. 미군 비행기가 지나간 다음 하얗게 쌓인 눈 위에

▲ 니덤보고서

때 아닌 파리나 거미 등 벌 레들이 떼 지어 나타난 것

레라, 페스트 등 여러 병원균에 감염되어 있었

입니다. 그리고 북한 지역에 나지 않는 바닷조

다는 것입니다. 중국도 화북과 동북지방이 세

개가 짚에 싸인 채 산 중턱에서 발견되는가 하

균전의 피해를 입었다고 발표했습니다.

면 벼룩 수만 마리가 떼 지어 모여 있는 것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이 발견

세균전이 논란이 되었으나 조사단을 꾸리는

된 지역 주변에 장티푸스나 콜레라, 페스트 등

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와중 1952년

의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비정부기구이면서 75개

1952년 2월, 북한은 미군이 세균전을 벌이고

국의 회원국을 가지고 있는 “세계평화회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조사결과 곤충들이 콜

가 열렸습니다. 이 회의에서 세균전에 대해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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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역사

사하기로 하고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합

조사단은 주민들의 말을 들었고 수집된 증거

니다.

를 검토했습니다. 그리고 포로로 잡힌 미군 병 사들의 증언도 들었습니다. 이들이 2달 정도

이렇게 만들어진 조사단이 영국 왕실협회 소

의 조사 후 내놓은 보고서가 얼마 전 원본이

속 과학자인 니덤을 단장으로 한 국제과학자

공개된 일명 『니덤 보고서』(한국과 중국에

협회 공식조사단이었습니다. 이들은 1952년

서의 세균전에 관한 국제과학위원회의 사실조

7월 중순부터 2달 동안 중국과 북한에서 조사

사 보고서) 입니다.

활동을 벌였습니다.

6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보고서의 내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미 공군이 한국전쟁 당시

▼ 니덤보고서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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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역사

북한과 중국을 상대로 세균전을 치른 것으로

대의 실험결과를 빼돌렸습니다. 731부대는 중

추정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국인과 조선인 독립운동가, 연합군 포로 등 1 만여 명의 사람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자행

보고서에는 참고자료로 전쟁 당시 중국과 북

했던 최악의 인류범죄 집단, 세균전 부대였습

한 일대에 뿌려진 벼룩 사진, 해당 지역의 주

니다.

민 사진, 세균을 뿌리다 잡힌 미군 포로의 수 기 진술서, 미군의 세균 배포 경로 비행지도

미국은 비밀리에 머레이 샌더스라는 특사를

등 세균전을 뒷받침할 증거가 200장 가까이

파견해 세균전의 정보를 전쟁범죄의 증거로

수록되었습니다. 그리고 피해 지역 현장검증

사용하지 않겠다는 밀약을 합니다.

사진과 세균이 투하된 지역의 비행사진, 미군 이 떨어뜨린 세균폭탄 사진, 이시이가 2차 세

일본 가나가와 대학의 스나이시 게이치 교수

계 대전 당시 만든 세균폭탄 사진도 들어 있

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한 2건의 기

었습니다.

밀 해제 문서에 따르면 미국은 731부대원들 에게 생체실험 자료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전

미국은 니덤보고서의 내용을 부인했습니다.

범 재판의 기소를 면제해줬으며, 총 15만~20

그리고 자신들은 세균전을 펼치지 않았다고

만 엔의 돈을 부대원들에게 준 것으로 드러났

주장했습니다.

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세균전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

일본인들은 35건 이상의 보고서를 미국에 제

는 정황 증거는 많습니다.

출했는데 여기엔 8백 차례 이상 실시된 인체 실험 관련 슬라이드 사진 8,000개가 딸려 있

미국은 일본의 731부대장인 이시이 시로를

었으며, 인체 실험에 대한 350쪽에서 800쪽

비롯한 관련자를 사면해주는 조건으로 731부

이상 되는 기록과 비저병, 페스트, 탄저병 등 27


이달의 역사

에 관한 3건의 검시 보고서도 포함돼 있었다 고 합니다. 자료를 얻은 미국은 이시이와의 밀약을 지켰 습니다.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이시이 시로와 731부대 관련자를 기소하지 않은 것입니다. 추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시이는 일본 정 부로부터 엄청난 퇴직연금을 받기도 했으며 1960년 2월 콜레라균 연구를 주제로 한 박사 학위 논문에 지도교수로 이시이의 이름이 등 재되는 등 전혀 심판을 받지 않은 것으로 드 러났습니다. 후지메 유키 교수의 ≪6·25 전쟁서 생체실험 한 일 731부대≫에 따르면 수천 명 규모의 일 본인이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그 중에는 731 부대출신의 군인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시 이도 두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는 설이 있기도 합니다. 미국은 자신들이 일본의 전쟁범죄를 용인하 고 세균전 자료를 입수했다는 사실을 은폐하 28

▲ 일본 731부대장 이시이시로 기 위해 731부대의 생체실험 사실도 적극적 으로 부인했습니다. 심지어 미국인이 생체실 험에 희생되었음에도 말입니다. 그러나 미국의 비밀문서, 만주 포로수용소 출 신 아버지를 둔 그렉 로드리게스의 연구, 언론 인 존 파월의 취재로 드러난 맥아더와 정보 보


이달의 역사

좌관인 찰스 윌라비 장군과 법률고문이었던

심지어 뉴욕의 지하철에도 세균이 뿌려졌다고

알바 카핀터가 주고 받은 비망록 등으로 미국

합니다. 미국은 세균전 실험을 위해 자국민에

의 추악한 뒷거래가 폭로 되었습니다. 미국이

게 세균을 뿌렸던 것입니다.

731부대의 세균전 정보를 빼돌린 것이 사실 로 드러난 셈입니다.

광주 무등산에서도 세균이 뿌려진 적이 있다 는 주장도 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으

미국은 일본의 자료를 입수했다는 사실을 숨

로 활동했던 정운용 씨는 1951년 초가을께 빨

기면서 동시에 세균전을 수행할 수 있는 준비

치산 토벌 명목으로 무등산 중봉 자락인 규봉

도 해나갔습니다.

암(영평리) 일대에 세균물질이 뿌려졌다고 증 언했습니다. 증언에 따르면 당시 쌍엽기로 추

미국은 빼돌린 세균전 정보를 자신들의 세균

정되는 작은 비행기에서 분말액을 뿌린 후 계

전 연구에 이용했습니다. 그리고 자국민을 대

곡물에 세수하거나 마신 사람들이 재귀열병에

상으로 세균실험까지 진행 했습니다.

걸려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1977년 미 의회 청문회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

그리고 1949년 미국은 화학전, 생물학전, 방

면 1950년 미 육군은 해군 함정을 이용해 샌

사능전에 관한 국방부 특별위원회를 조직했습

프란시스코 해안을 따라 패혈증을 일으킬 수

니다. 육군 화학부대 사령관이었던 크리시는

있는 세라티아균을 항구 근처에 살포했다고

이 특별위원회에서 세균무기의 효율성을 강조

합니다. 적군이 세균전을 했다는 것을 가정해

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고 합니다.

서 한 실험이었다고 하는데 이 실험으로 11명 의 미국 시민이 균에 감염되었고 사망하는 사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5일 후인 1950년 6월

람도 나왔다고 합니다.

30일에는 세균전과 관련한 스티븐슨 보고서 가 발표되었습니다. 스티븐슨 보고서에서는 29


이달의 역사

보복으로서의 세균전이 아니라 공격적인 세

국이 한국전쟁에서 세균전을 했다는 것은 사

균전을 펼쳐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실제 세균전 실행을 암시하는 명령서

그렇다면 미군은 왜 세균전을 했을까요?

도 발견되었습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2010년 3월 17일 아랍권의 <알자지라> 방송

뒤집는데 성공한 미군은 38선 이남 지역의 수

은 미국의 세균전 의혹을 담은 ≪Dirty little

복을 넘어 북한 지역까지 점령하기 위해 38선

secret≫이란 47분짜리 다큐멘타리를 통해

을 넘어 올라갔습니다.

1951년 9월 21일자 미국 문서에서 “미 합참 이 작전상황 중 (세균전에 사용되는) 특정 병

미군은 압록강 근처까지 진격하며 1950년 크

원체의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판별하기 위해

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을 끝내겠다고 호언장

대규모 현장 실험을 개시할 것을 명령했다”

담했습니다. 그러나 중국 인민의용군의 참전

는 내용이 담긴 문서가 발견되었다고 폭로했

과 후퇴를 했던 북한군의 대대적인 반격, 그

습니다.

리고 혹독한 북한지역의 추위 등으로 참패를 하고 맙니다. 미국은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속

1951년 당시 미국이 치르고 있었던 전쟁은 한

도보다 더 빠르게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전쟁이 유일했습니다. 따라서 세균의 실전

1951년 봄부터 한국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

효과를 알아보기 위한 대규모 현장실험은 한

습니다.

국전쟁에서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북한지역의 점령에 실패한 미국은 핵무기 사 미국은 여전히 자신들의 세균전 실행에 대해

용과 북중 국경지대 방사능 코발트 핵폐기물

부정하고 있지만 여러 상황을 종합해볼 때 미

투하까지 검토했습니다. 이 계획은 국제사회

30


이달의 역사

의 반발을 받아 철회되었습니다. 트루먼은 핵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미국이 검토한 것이 세균

사용을 하지 않겠다고 결정하고 핵사용을 제

전입니다.

안한 맥아더를 해임했습니다. 1951년, 미국의 장성들은 세균전이 저렴한 비 맥아더는 해임되었지만 매카시즘 분위기에 휩

용으로 강력한 효과를 내는 효율적이고 강력

쓸린 미국은 강경한 수단을 이용해 중국을 굴

한 수단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시키고 북한을 점령하겠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위기였습니다. 맥아더의 후임인 리지웨이는

이에 미국 정부는 화학전, 세균전과 같은 특수

북한 지역에 대대 적인 폭격을 실시 하면서 북한 지역

▼ 세균탄

을 초토화시키는 “교살작전”을 실 시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미 국의 폭격에 대비 한 갱도전을 벌이 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폭격 에 큰 타격을 받 지 않았습니다.

31


이달의 역사

전을 총괄하는 심리작전위원회를 만들었습니

단순한 의혹뿐만이 아니라 미국은 자체 실험

다. 미국은 “이륙작전(Operation Take-Off)”이

을 통해 전단살포용 폭탄을 개량하여 세균탄

라는 계획을 세우고 1951년 말부터 특수한 작

을 제작했습니다. 자체 실험결과 400~500m

전을 시행했습니다.

에서 투하할 때 가장 효과가 좋았고 지속기간 이 40일 정도 된다는 사실까지 연구했다고 합

미군은 야간에 몰래 세균폭탄을 떨어뜨리거나

니다.

폭격을 끝내고 마지막에 세균폭탄을 떨어뜨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북한은 주간에 폭격을 받

미군포로의 증언에 따르면 통합참모본부에 의

고 나면 야간에 주민들을 동원하여 피해복구

해 소규모 실험으로 시작되었던 세균전을 점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들에게 전염병

차 그 규모를 확대해 한반도 전체에서 착수하

을 감염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도록 했으며 이들 지역은 최소한 10일 간격으 로 재 오염시킬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국은 마지막에 떨어뜨린 폭탄이 세균폭탄이

북한의 영토상공에서 안전을 강화하기 위해서

아니냐는 지적에 해당 폭탄은 전단살포용 폭

세균폭탄의 투하 후까지 네이팜탄을 기내에

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1951년 미 육

남겨두었습니다. 그것은 비행기가 추락할 경

군 화학부대장은 의회 진술에서 “세균을 운반

우에 거의 확실하게 증거를 인멸하기 위한 것

하는 가장 간편한 수단은 전단용 폭탄이다”라

이었다고 합니다.

고 실토했습니다. 전단용 폭탄은 땅에 떨어지 기 직전 폭파하여 공중에서 터져 내용물을 살

1952년 7월, 7명의 과학자들이 북한 지역에

포하는 폭탄인데, 세균탄에도 같은 조건이 필

서 본 것은 세균전이라는 반인류범죄가 벌어

요했기 때문에 전단 살포용 폭탄을 세균탄으

진 현장이었습니다. 그들이 남긴 범죄에 대한

로 사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입니다.

보고서는 60여 년을 표류하다가 이제야 다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32


이달의 역사

보고서가 만들어질 당시 니덤보고서는 냉전

그런 의미에서 니덤보고서에 마지막 구절은

이라는 상황 때문에 진영논리에 의해 부정되

아직도 우리에게 많은 고민을 던져줍니다.

었습니다. 그러나 냉전이 약화된 지금은 다릅 니다. 진영논리가 아니라 진실과 증거에 의해 미국의 세균전 사실이 정확하게 밝혀져야 하 는 것입니다.

미국은 1969년에 화학 및 생물학무기 포기를 선언하고 1972년에 와서야 생물학무기 금지

세계만방 인민들의 공통된 비난을 무릅쓰

협약을 비준했습니다. 그러나 최근까지도 미

고 이러한 반인륜적인 죄악을 저질렀다는

국이 생물학무기, 세균무기를 개발하는 것 아

사실은 우리 과학자들은 결코 믿고 싶지 않

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지만 본 조사단은 논리적인 절차를 하나하 나 밟으면서 아래의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이번 탄저균 배달사고 사건으로 주피터 프로

수 없었다. 북한과 중국의 인민들은 실제로

젝트의 존재가 알려졌습니다. 미국은 한국의

세균이라는 무기의 표적이 되었다. 이들 세

평택, 용산, 군산 등에 생화학 실험실을 두고

균무기는 각종의 다양한 방법이, 그 중에는

여러 가지 실험을 실시하거나 준비 중이었습

2차대전시 일본이 개발하고 사용하였던 방

니다.

식도 포함하여, 동원되어 미합중국 군대에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세균전 실험장이었던 한반도, 63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미국에 의

의해 사용되었다.

한 세균전 위협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33


http://mag-mkyd21.tistory.com/189

생물무기, 왜 위험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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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무기

대부분의 총포류와 달리 생물무기는 은밀하게, 그러나 타격이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된다는 특징이 있다. 포탄과 미사일은 폭발이 일어나고 나면 곧 정상화되 어 사람들의 활동이 가능하지만 생물무기가 투하되면 커다란 화염과 폭발은 없 어도 그 지역 일대가 지속적으로 오염된다. 방사능 물질이 유출되면 그 지역이 폐쇄되듯이, 생물무기에 노출되면 노출 직후의 층격은 크지 않더라도, 그 지역 은 일정기간 동안 폐쇄되고 만다. 단순비교하면 재래식 폭탄은 순간적 파괴력이 크지만 파괴가 지속되지 않는다. 생물무기와 화학무기는 순간적 파괴력은 크다고 보기 힘들어도 파괴가 지속적 으로 나타난다. 순간적 파괴력도 치명적이며 그 파괴력이 장시간 지속되는 무 기는 바로 핵무기이다. 그래서 생물무기는 무기의 전략적 가치에서 핵무기에 비할 바가 안 된다. 생 물무기를 흔히 “가난한 나라의 핵무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비교적 싼 가격으 로 무기화를 할 수 있으면서도 타격의 지속성이 핵무기처럼 지속되기 때문이 다. 그러나 생물무기는 초기 타격 시 파괴력에서 핵무기에 당할 수 없기 때문 에, 핵을 보유한 핵보유국들이 생물무기에 기대어 국가를 방어하는 모습은 생 각하기 어렵다.

생물무기, 무엇이 다른가 생물무기는 세균의 형태로 투하될 경우 투하된 이후 세균이 계속적으로 증식 하므로,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전투에서 중요한 것은 적의 전투능력을 제거 35


세상의 모든 무기

하는 것인데 이 전투능력은 적의 전투의지와 전투수단, 즉 무장력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이 종결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적이 전쟁의지를 상실하거나(이 경우 적은 항복한다), 적이 전쟁수단을 상실하는 경우이다(이 경우 적은 방어선 이 뚫리게 된다). 생물무기는 총포류에 직접적인 피해를 미칠 수는 없지만, 예상치 못한 지역으 로 확산되어 광범위한 피해를 유포시킬 수 있으므로 전투력 감소와 더불어 적 의 전투의지도 꺾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전쟁을 앞두고 많 은 국가들이 너나없이 생물무기 개발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생물무기는 제대로 통제되지 않으면 적 전투역량 뿐 아니라 일반 민간 인, 경우에 따라서는 아군 측 통치구역의 민간인들과 아군전투원들에게도 피해 가 확산될 수 있다. 특정지역을 오염시킨 채 광범위한 불특정 다수에게 전파되 는 생물무기는 그래서 잔악하고, 더러우며, 치명적이라고 평가받는다. 생물무기는 불특정 다수의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므로, 자기 나라 인근지역에서 는 좀처럼 생물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지난 일본군의 731부대는 일본 본토 에서 멀리 떨어진 만주 헤이룽장성의 하얼빈 남부에 주둔하였다. 일본이 대동 아공영권을 부르짖었지만, 너무나 명백하게 일본은 만주에서 중국인과 조선인 을 대상으로 생물무기 실험을 하였고, 일본 본토에서 생물무기를 사용하지 않 았다. 우크라이나에서 내전이 일어났어도 푸틴의 러시아 정부가 우크라이나 독립진 36


세상의 모든 무기

영(친러진영)에 생물무기를 제공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우크라이나에 생물무 기를 사용한다면 우크라이나 인과 러시아 인들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나빠 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여러모로 미국에게 유리할 뿐 러시아에 유리한 면이 없다.

생물무기의 조건 그렇다면 어떤 생물들이 무기화될 수 있겠는가? 무기는 전투목적을 달성케 하 는 수단이다. 생물무기는 적 전투력을 효과적으로 줄일 수 있어야하기 때문에 치명적 살상력이 반드시 갖춰져야 한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감기 바이러 스나 식중독균 등은 생물무기로 사용되기 어렵다. 그리하여 생물무기는 한번 감 염되면 사망률이 높은 탄저균, 천연두 등이 활용된다. 최근 서아프리카 일대에 37


세상의 모든 무기

창궐해 커다란 고통 을 주는 에볼라 바 이러스를 두고 미국 의 세균무기라는 루 머가 끊임없이 나오 는 것도 에볼라 바 이러스의 살상력이 크기 때문이다. 생물무기는

그것

이 무기로 탄두 내 에 저장이 가능해야 하며 탄두의 발사과 정에서 세균이 죽지 않아야한다. 목표지 점에 도달하였을 때 적 전투력을 조금이 라도 더 감소시키기 위해서는 세균이 널리 퍼져야 한다. 탄저균이 생물무기로 활용되는 이유는 바로 탄저균이 보관기간이 길기 때문이 다. 게다가 탄저균은 주변 환경이 부실해질 경우 죽지 않고 아포(포자)를 만든 다. 일반적으로 공포의 ‘백색가루’라고 불린 것은 탄저균의 아포를 말한다. 이 38


세상의 모든 무기

아포는 생존률이 대단히 높아서 공기 중에서는 24시간, 흙 속에서는 100년까 지도 버틸 수 있다고 한다. 가열, 일광, 소독제에도 강한 내성을 보여 오염된 것 을 소각하지 않으면 탄저균이 죽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생물무기는 그 안의 세균들이 살아있어야 하므로 끊임없이 양분을 공급해주어야 하고 노폐물을 처리해주어야 한다(어항의 물고기를 기르듯이, 세 균도 길러야 한다). 그런데 탄저균은 포자를 만들어 존재하므로 그럴 필요가 없 다. 무기화하기 훨씬 쉬운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바이러스가 생물무기로 주 목된다. 바이러스는 숙주 내에서는 증식하지만 외부환경에서는 생명활동을 중 단하고 죽지 않기 때문이다. 천연두 바이러스 등이 생물무기로 사용될 가능성 이 높다. 이러한 생물무기는 사용단계에 접어들게 되면 파괴의 정도를 예측하고 조절 할 수 있어야 한다. 핵무기의 경우, 광역지역을 초토화시키는 전략 핵탄두보 다 임의의 국소지역에 사용할 수 있는 전술핵탄두가 전쟁에서 더욱 유용하듯 이, 생물무기도 실전에서 사용되려면 그 파괴력이 특히 제한적이고 통제 가능 해야 한다. 탄저균으로 생물무기 탄두를 만들 때, 탄저균을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어떤 형 태의 탄두를 만들어야 어느 정도 면적으로 탄저균이 퍼져나가는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자칫 탄저균을 살포하였는데 그 탄저균이 예상치 못한 범위로 확 장되어 아군점령지역까지 번지면 정말 큰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계절이 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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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무기

렷한 한반도에서는 계절별 생물무기의 효과가 구체적 자료로 확보되어야 한다.

진화하는 생물무기 생물무기는 또한 물리적 파괴를 동반할 필요가 없으므로 은밀히 유포시킬 수 있다. 탄저균은 1995년 일본에서 실제 살포됐고, 2001년 미국에서 공포의 백색가루 라는 이름으로 탄저균 포자가 우편으로 배달되어 22명이 감염되고 5명이 사망 한 생화학 테러가 일어난 것도, 탄저균이 이동해서 인체에 침투해 살상력을 갖 추는데 어떠한 물리적 힘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생물무기가 전쟁 시 무기뿐만 아니라 비전쟁시의 테러용으로 사용될 가능 성이 높은 것이다. 만일 대북전단에 생물무기를 묻혀 북한으로 보낸다면 어떻 게 될까? 북한 전역에 치명적 감염병이 창궐할 수 있고, 북한은 항의하겠지만 미국은 당연히 부인할 것이고 이런 과정이 지속되면 미국은 북한체제가 흔들 린다고 판단할 수 있다. 또한 생물무기는 최근 첨단과학의 유전자 조합기술과 접목하며 진화하고 있다. 인간이 세균의 유전자를 자유롭게 조합해나가면서 생물무기의 활동기간과 활 동영역에 대한 조절력이 크게 증가된 것이다. 생물무기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 창궐하며 아군지역에까지 피해를 미치지 않게 40


세상의 모든 무기

하려면, 일정기간이 지나면 세균들이 자연사할 수 있게 만들어져야 한다. 바이 오기술이 생물무기를 정밀하게 진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잘 다듬어지고 준비 된 생물무기는 언제나 치명적이다. 그런 면에서 미군부대의 주피터 프로그램을 주목해야 한다. 미국은 정말 주피터 프로그램만 운영하고 있는 것인가 전면적으로 조사해보아 야 한다. 미국이 그 동안 축적한 유전공학적 기술을 동원한다면 방어용 생물무 기 시험 뿐 아니라 공격용 생물무기를 시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인구 밀도가 높은 한반도에서 강도 높은 생물무기를 사용하려면 유전공학적 기술이 당연히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탄저균 사건을 계기로 주피터 프로그램을 뛰어넘어 주한미군 기지 내에 서 벌어지는 미군의 생물무기 연구에 대한 전면적 조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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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우리는 주한미군에게 얼마나 퍼주고 있을까 http://mag-mkyd21.tistory.com/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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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우리는 한반도를 세균무기 실험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주한미군에게 이른바 주 둔비용이라는 명목으로 해마다 수조 원 이상으로 추산되는 돈을 쥐어주고 있 습니다. 어찌 보면 주한미군은 우리 국민들이 주는 돈으로 세균무기 실험을 하 고 있는 셈입니다. 주한미군이 주둔비용을 명분으로 방위비분담금을 받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그 나마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방위비분담금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 다. 한국 정부 예산안에 명시된 각종 지원금만 해도 그 금액이 방위비분담금보 다 더 많습니다. 이를 자세히 살펴봅시다.

1조에 다다른 방위비분담금 주한미군의 주둔비용은 본래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에 의해 미국이 전적으 로 부담하도록 되어있었습니다. 이 협정은 한국이 미군의 주둔에 따라 “모든 시 설, 구역 및 통행권을 제공”하는 대신 미국은 “대한민국 내 미군 유지에 따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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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모든 경비”를 부담하기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한국은 주한미군에 주 둔비를 직접 지원하는 대신 토지와 시설의 무상 공여, 각종 세금과 공공요금에 대한 감면 혜택, 인력 등을 지원해왔습니다. 하지만 주한미군 주둔 비용은 1988년부터 한국에 전가되기 시작합니다. 미국 은 냉전이 절정에 달하던 1980년대 레이건 정부의 무제한적인 군비증강노선 으로 심각한 재정적자에 직면하여 위기를 맞습니다. 이 때문에 미국은 한국에 주한미군 주둔비용 중 일부를 지원해 줄 것을 요구했고, 한국은 1989년 4,500 만 달러, 1990년 7,000만 달러를 지원했습니다. 하지만 1991년, 미국은 이에 그치지 않고 아예 방위비분담금 특별협정을 요 구해 SOFA규정을 무력화하면서 한국으로부터 매년 주둔비용을 받아내고 있 습니다. 방위비분담금은 주한미군 내 한국인 고용인 인건비, 군사건설비, 군수 지원비 등 3개 항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금액은 1991년 1073억원으로 시 작해 2014년 9200 억원으로 무려 9배 가까이

폭증합니

다. 같은 시기 한국 의 국방비가 1991 년

7조4,524억원

에서 2014년 35조 7,057억원으로

5

배 정도 오른 것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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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비교해 본다면 방위비분담금은 상당히 가파르게 증가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 다. 소비자물가가 1991년부터 2014년까지 약 2.23배 오른 것과 비교해도 심 각한 수준입니다.

분담금만큼 더 받아가는 직간접지원비 그런데 주한미군은 방위비분담금만 받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정부는 방위 비분담금 외에 KATUSA(카츄샤) 지원, 주한미군이 사용하는 사유지의 임대료 나 보상·매입비, 기지주변 정비나 민원해소, 한국군 훈련장 사용 지원 등과 같 은 직접지원비, 그리고 무상으로 공여되는 토지(임대료 평가), 관세와 지방세, 내국세 등 각종 세금 감면(면제)과 상수도, 전기료, 전화·통신요금 등 공공요금 감면, 고속도로와 광역시 유료도로 통행료, 항만시설·공항시설 사용료, 공항이 용료 등의 면제, 여객·화물운임 할인, 철도 수송지원 등과 같은 간접지원비를 주한미군에게 퍼주고 있습니다. 국방부는 해마다 방위비분담금을 제외한 주한미군 직·간접지원 비용을 조사하 는데, 그 규모가 방위비분담금만큼 큽니다. 일례로 2010년의 경우, 미군은 자 신의 공무집행 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의 피해에 대한 배상과 한국군 훈련장 사 용 등으로 488억4천만원, KATUSA·경찰지원 명목으로 114억원, 토지 임대료 등 부동산 지원으로 54억4천만원 등 656억8천만원에 달하는 금액을 직접지 원 받았습니다. 여기에 더해 미군이 무상으로 점유하고 있는 토지에 대한 평가액이 5648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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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에 달하며, 미군은 관세·지방세 등 각종 세금 감면으로 1683억원, 고속도·광 역시 유료도로·공항시설 등의 사용료 면제로 49억원 등 모두 8188억원의 간접 지원도 받고 있습니다. 2010년의 방위비 분담금이 7904억원이었으니, 이보다 더 많은 돈이 주한미군에게 갖은 명목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남았다 지금까지 살펴본 지원금에는 엄청난 규모의 미군기지 이전 비용이나 미군범죄 에 따른 한국 정부의 배상금, 미군기지의 환경오염 정화비용 등은 아예 반영조 차 되지 않았습니다. 2010년 한국 정부 예산에 미군기지이전 비용으로 6,967 억원, 환영오염정화에 812억원을 사용한다고 하였으니, 여기까지 더하면 1년 에 주한미군에게 2조5428억원에 달하는 돈이 지원됩니다. 자, 그렇다면 주한미군은 우리에게 뜯어간 지원금을 모두 사용했을까요? 그렇 지 않습니다. 매년 방위비 분담금을 쓰고 남은 돈, 즉 미집행액은 갈수록 늘어나 왔습니다. 국방부 자료를 보면 2002년 11억 원에 불과했던 미집행액이 2012 년에는 7611억 원으로 760배나 증가했습니다. 주한미군은 한국 정부가 준 지원금을 신한은행 서울 이태원 지점에서 개설한 계좌를 통해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일반 시중은행인 만큼, 주한 미군이 쓰고 남은 돈에는 당연히 은행이자가 붙습니다. 주한미군이 이런 식으로 벌어들인 이자 수익은 얼마나 될까요? 물론 이를 정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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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히 계산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주한미군이 그동안 쓰고 남은 방 위비 잔액이 얼마이고, 남은 돈을 어떤 금융 상품에 투자했는지 전혀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참고할 자료는 있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 진성준 의 원실은 방위비 분담금 미집행 잔액에다 해당 연도의 1년 만기 양도성예금증서 (CD) 금리를 곱해 최근 5년간 연 평균 200억 원씩 모두 1천억 원의 이자가 발 생한 것으로 추정한 바 있습니다.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주한미군이 방위 비 분담금을 시중은행을 통해 관리하면서 막대한 이자소득을 올린 사실 만큼은 분명합니다. 이자소득이 발생하면 이에 대해 과세를 해야 하는 국세청도 방위 비 분담금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습니다. 과연 이것으로 덧셈은 끝난 것일까요? 필자로서도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주한 미군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우리에게서 받아가는 걸까요? 47


예술, 그 본질적 가치

이웃집 토토로가 미군기지에 살수있을까 http://mag-mkyd21.tistory.com/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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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그 본질적 가치

<이웃집 토토로>를 만든 ‘미야자키 하야오’가 반미를 한다고? 거짓말이 아닙니다. 지난 2015년 5월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 오’ 감독이 오키나와 후텐마 미군기지의 헤노코 기지를 막기 위한 헤노코 기금 의 공동대표로 취임할 뜻을 밝혔습니다. 미야자키 감독은 2014년 오키나와 현 지사 선거 당시에 “오키나와의 비무장 지역화야말로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습니다. 현재 아베 정권은 오키나와 본섬 남쪽의 후텐마 비행장을 북쪽의 헤노코 연안 으로 이전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미야자키 감독은 2015년 2월 일본의 역사문제 해결을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일본의 역사에 대해 “자신들은 제국주의를 흉내 냈다”며 “주변국의 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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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그 본질적 가치

은 없어지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아베 총리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으며 일본이 평화헌법을 수호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강정마을 해군기지 문제나 미 육군 생화학무기연구소의 살아있 는 탄저균 오산미군기지 반입 사건에 1000만 감독인 세계적인 거장이 전면에 나선 셈입니다.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 (Nausica of the Valley of the Winds , 1984) 미야자키 감독의 철학이 제일 잘 반영된 작품 중의 하나가 ‘바람의 계곡 나우 시카’입니다. 반전, 평화, 생태의 주제가 하나로 어우러진 아름다운 작품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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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그 본질적 가치

할 수 있습니다. 작품의 배경은 제3차 세계대전을 떠올리게 하는 ‘불의 7일간’ 전쟁이 끝난 후입니다. 지구는 곰팡이 숲 ‘부해’가 뒤덮인 죽음의 행성으로 변 해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주인공 ‘나우시카’는 깨끗한 바람의 계곡에 살며 자연과 소통할 수 있는 특별 한 소녀입니다. 하지만 세계대전 당시 쓰였던 병기 거신병을 소환시키려는 제 국주의 국가 ‘토르메키 아’ 비행기가 바람의 계 곡에 불시착하면서 비극 은 시작됩니다. ‘나우시 카’는

‘토르메키아’와

맞서 싸우며 부해가 땅 속에서 지구를 정화하고 있다는 진실을 알려나갑 니다.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 에 나오는 ‘거신병’은 인류 최종의 무기, 인류 최초로 일본에서 사용된 핵무기 일지 모릅니다. 여기서 ‘나우시카’는 자 연과 하나 되는 성녀로 51


예술, 그 본질적 가치

표현됩니다. ‘나우시카’의 희생은 전쟁과 탐욕으로 지구를 파괴시키는 인간을 징벌하는 괴물 ‘오무’에 맞서 전 인류를 구원합니다. 약간 관념적인 결말이기 는 하지만 전달하는 메시지는 뚜렷합니다.

천공의 성 라퓨타 (Laputa : Castle in the Sky , 1986) 인간의 탐욕, 군대의 비인간성, 평화에 대한 갈망은 ‘천공의 성 라퓨타’에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주인공인 고아 소년 파즈는 빛이 나는 비행석을 목에 건 소녀 시타를 만납니다. 파즈는 시타와 함께 아버지가 동경했던 하늘에 떠있는 섬 라 퓨타를 찾아 나섰고, 우여곡절 끝에 라퓨타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뒤 따라온 군대 는 파괴와 약탈을 하고 과거 라퓨타 왕가의 일 족인 ‘무스카’는 라퓨타 의 힘을 부활시켜 세계 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결국 라퓨타로 인해 무 차별적인 살상이 자행되 자 시타가 할머니로부터 배운 파멸의 주문을 외 워 라퓨타를 파괴시킨다 는 줄거리 입니다. 52


예술, 그 본질적 가치

이처럼 미야자키 감독은 초기 장편 애니메이션 창작에서 부터 자신의 세계관을 비교적 뚜렷하게 표현한 작품들을 제작해 왔습니다. 그는 이후에 1988년 <이웃집 토토로>가 대성공하면서 세계적인 대가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원령공주> <하울의 움직이는 성> <벼랑위의 포뇨> <센과 치히 로의 행방불명> 등 그의 아름답고 서정적이며 동심을 자극하는 작품들은 국내 에도 상당히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하늘을 사랑한 미야자키 하야오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바로 비행기입니다. 그 만큼 그는 인간이 하늘을 나는 꿈을 꾸었으며 비행기를 동경했습니다. 경비행기, 비 행선, 소형 비행체까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비행체를 그는 만화를 통해 그려 냈습니다. 그 비행기에 대한 사랑이 하나로 모아진 작품이 바로 일본 제국주의 옹호 논란 에 휩싸였던 <바람이 분다 The Wind Rises 2013> 였습니다. <바람이 분다>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의 대표적인 전투기인 제로센을 제작한 비행기 설계가 의 호리코시 지로의 일대기입니다. 그 작품 설정에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거센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죠. 물론 이 작품에는 일제의 침략전쟁에 대한 원망과 비판이 곳곳에 담겨있습니 다. 그 장면은 주인공인 지로가 휴가지에서 좌파 독일 지식인을 만나는 곳에서 53


예술, 그 본질적 가치

제일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하지만 <바람이 분다>의 인물들은 “전쟁무기를 파는 것이 아니라 좋은 비행기를 만드는 것이다.”라며 스스로를 자위합니다. 그 러나 이런 말을 피해 당사자가 이해하기는 어렵죠. 과연 미야자키 하야오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떨어뜨린 비행기를 개 발한 과학자에게 경의를 표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는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아무리 그래도 하늘을 나는 꿈에 대한 동경보다 인간의 삶이 더 소중하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선 이 작품이 군국주의를 미화했다는 비판을 비껴가기는 힘듭니다. 하늘을, 하늘을 나는 인간의 꿈을 너무 사랑한 미야자키 감독은 그 사 랑이 너무 큰 나머지 군국주의 미화를 간과해 버린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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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그 본질적 가치

물질문명과 자연파괴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 그 는 말합니다. “일본이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 잊고 있어요. 일본은 역사적 감각을 잊어서는 절 대로 안 됩니다. 그런 나라는 망해요. (위안부 문제는) 이미 오래 전에 일본이 제 대로 청산했어야 하는 부채입니다. 한반도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그가 바라는 생태 지향적이고 평화로운 세상은 여전히 멀기만 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마음속에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큰 방향에서 세상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이 그가 지금 행하고 있는 후텐마 기지 실천 속에서 더욱 증명될 것입니다. 그도 분명 알고 있을 것입니다. 미군기지에는 이웃집 토토로와 같은 동심이 피 어날 자리가 없다는 것을. 그래서 행동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55


풀어쓰는 경제이슈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그리고 외국자본 http://mag-mkyd21.tistory.com/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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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쓰는 경제이슈

5월 26일, 삼성은 제일모직(옛 삼성에버랜드)과 삼성물산을 (통합)삼성물산이 라는 이름으로 합병 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삼성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제일모 직이 삼성물산을 흡수 합병하는 형태입니다. 제일모직하면 의류산업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리고 지금의 제일모직은 삼성에 버랜드가 이름을 바꾼 것입니다. 즉 이전 제일모직이 의류산업을 에버랜드로 넘기고 에버랜드가 다시 제일모직으로 이름을 바꾼 겁니다. 에버랜드하면 가장 먼저 놀이동산이 떠오릅니다. 한편 삼성물산의 대표적인 사업은 건설업입니다. 현대건설, 대우건설 등 대표적인 재벌들이 건설회사를 소유하고 있었듯, 삼성 물산은 삼성의 건설회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업상 별 관계가 없을 것 같은 두 회사가 합병을 한다니, ‘왜’라는 의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영국 의 경제전문지 <파이낸셜타임스>는 “이런 구조조정이 어떻게 가치를 창출한다 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사태는 더욱 복잡해 졌습니다. 미국계 헤지펀드인 엘리엇 매니지 먼트(이하 엘리엇)가 개입을 하면서 이번 합병결정이 부당하다고 주장한 것입 니다. 삼성물산의 지분을 확보한 엘리엇이 두 회사의 합병이 삼성물산 주주들 에게 불리한 것이라며 삼성을 공격하고 나섰고, 각종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삼 성물산의 소액주주들은 엘리엇 편을 들기도 합니다. 이번 사태는 재벌중심의 한국경제 구조와 소수의 지분으로 거대 재벌을 장악하 고 있어 외국자본의 먹잇감이 될 수 있는 재벌기업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사건 의 전말을 간단히 살펴보고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문제들을 정리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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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쓰는 경제이슈

재벌가문 지배력 강화를 위한 인수합병

이재용 부사장은 삼성물산 지분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합병이 되면 이재용 부사장 이 23.23%의 지분을 가진 제일모직이 삼성물

삼성그룹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을 합병하려

산을 흡수하는 형태가 되어 이재용 부사장은

는 것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의 경영권 승

삼성물산에 대한 영향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계 작업을 위한 조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합병이 되면 삼성그룹의 지주회사(기존 제일

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별다른 시

모직, 통합 후 통합 삼성물산)에 대한 이재용

각차가 없어 보입니다.

부사장의 지분이 23.23%에서 16.5%로 전환 되지만 이재용 부사장이 지주회사의 최대주주 인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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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쓰는 경제이슈

한편, 삼성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업은 단

는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제일모직과

연 삼성전자입니다. 삼성일가의 골칫거리는

삼성물산이 합병이 되면 삼성물산의 삼성전자

시가 총액이 190조원이 넘는 거대 기업을 재

에 대한 지분과 영향력은 통합 삼성물산의 것

벌총수 개인이 장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겁니

이 됩니다. 앞서 이야기 한 대로 통합 삼성물

다. 지분을 1% 만 늘리려 해 도, 2조원 가 까이가 필요합 니다. 삼성전자 에 대한 이건희 회장의 지분율 은 3.38%, 이 재용 부사장의 지분율은 겨우

▲ 삼성물산 제일모직 합병 후 순환출자 구조 / 자료 : 프레시안

0.57%에 불과 합니다.

산의 최대주주는 이재용 부사장입니다. 삼성 물산에 대해 지분을 가지고 있지 않던 이재

삼성물산은 삼성전자 주식을 4.1% 갖고 있습

용 부사장이 합병을 통해 삼성물산의 삼성전

니다. 또한 삼성물산은 삼성생명 지분 19.3%

자에 대해 지분을 자신의 영향력 안에 두게 되

를 갖고 있고, 삼성생명은 다시 삼성전자 지

는 것입니다.

분 7.2%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삼성생명은 금융회사이기에 비금융회사인 삼성전자 지분

결국 ‘이재용→통합 삼성물산→삼성생명·삼

을 5% 넘게 가질 수 없어 특혜를 받고 있다

성전자→계열사’로 이어지는 지배구조가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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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쓰는 경제이슈

화되게 됩니다.

합니다. 또한 삼성물산이 보유한 부동산과 주 식만 해도 29조5058억 원어치로 제일모직의

먹잇감을 찾아 나선 벌처펀드

3배나 된다는 것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삼성공화국’이라고 까지 불리기도 하는 한

즉, 이재용 부사장이 최대주주로 있는 삼성의

국사회에서 삼성이 합병을 발표했으니 주위

지주회사격인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너무 싸

에 따가운 시선이 있더라도 제일모직과 삼성

게 인수하려 한다는 겁니다. 엘리엇의 주장대

물산이 합병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었습

로라면 삼성물산의 주식을 가지고 있는 주주

니다. 하지만 여기에 외국자본이 제동을 걸고

들은 피해를 보는 게 됩니다.

나섰습니다. 6월 4일 엘리엇은 삼성물산 지분 7.12%(1112만5927주)를 주당 6만3500원(총

물론 1대0.35의 합병비율은 국내법상으로 문

매입금액은 약 7065억 원)에 매수했다고 발

제는 없습니다. 이 때문에 엘리엇은 자산가치

표했습니다.

등을 반영하지 않고 현 시기 주식가격을 기준 으로 합병 비율을 정해 놓은 국내법까지 문제

엘리엇은 제일모직의 삼성물산 합병 계획은

삼고 있습니다. 한국정부를 상대로 투자자 국

삼성물산의 가치를 과소평가했고 그 조건이

가소송 (ISD)을 제기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

공정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제일모

습니다.

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비율은 1대 0.35입니 다. 즉, 제일모직 주식 1주 가치가 삼성물산 주

그렇다면 정말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소액주주

식 3주와 맞먹는다는 의미입니다. 합병 비율

들을 위해 이런 활동을 펼치고 있는 걸까요?

계산은 최근 주가를 기준으로 합니다. 엘리엇 은 제일모직 주가가 치솟고, 삼성물산 주가는

여기서 엘리엇이라는 미국계 헤지펀드가 어

하락하는 시점을 의도적으로 선택했다고 주장

떤 일을 해 왔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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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쓰는 경제이슈

▼ 자료 : 이투데이

1977년 미국 월스트리트 출신의 폴 싱어가 설

아르헨티나는 2001년 1000억 달러 규모의

립한, 전체 운용 자산이 260억 달러(약 29조

디폴트를 선언했었습니다. 이후 아르헨티나

원)에 달하는 엘리엇은 ‘벌처(vulture)펀드’의

정부는 채권자들과 채무의 75%까지 탕감하

대명사로 불립니다. 벌처펀드는 약해 보이는

는 협상안을 이끌어냅니다. 하지만 아르헨티

먹이를 무자비하게 공격하고, 썩은 시체까지

나 국채를 보유하고 있던 엘리엇은 이 합의에

파먹는 ‘독수리(vulture)’와 흡사한 행동양식

응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엇은 소송을 통해 원

을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금과 이자 전액을 받아내는 판결을 끌어냈고, 16억 달러(1조7600억여원)를 챙기게 되었습

엘리엇은 최근 아르헨티나 정부를 디폴트(부

니다. 엘리엇이 아르헨티나 채권을 사들이는

채 상환 포기) 위기로 몰아넣기도 했습니다.

데 들인 돈 4800만 달러(약 540억원)의 약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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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쓰는 경제이슈

배에 가까운 금액입니다. 소송에서 진 아르

다는 겁니다.

헨티나는 다른 채권자들에게도 전액을 갚아 야 하는 처지가 되면서 또다시 국가 부도 사 태를 맞았습니다. 엘리엇은 아르헨티나 정부

우리는 삼성편인가 외국자본 편인가

에 돈을 갚으라고 촉구하는 과정에서 아르헨 티나 대통령 전용기와 해군 함정까지 압류하

삼성과 엘리엇의 싸움을 보면서 우리들이 생

려 했습니다.

각해야 할 것은 어떤 걸까요? 이번 엘리엇과 삼성의 싸움은 누구 한 쪽의 편을 들 문제가

엘리엇은 국제기구 등이 아프리카 등지로 보

아닙니다. 노동탄압과 중소기업의 희생 위에

내는 원조마저 채무를 갚는 데 먼저 사용하라

서 성장해온 재벌이든, 먹잇감을 찾으면 온갖

고 압력을 넣기도 합니다. 엘리엇의 폴 싱어

수단을 동원해 이윤을 획득해 나가는 외국계

회장은 미국 공화당의 대표적 돈줄이기도 합

벌처펀드든 서민경제를 파탄내고 있기는 마찬

니다. 폴 싱어 회장이 2014년 공화당에 기부

가지기 때문입니다.

한 돈은 1210만 달러(약 133억 원)로, 월스트 리트 기부자 중 최고 액수라고 입니다(프레시

우선 재벌들은 경영승계를 위해 무리한 인수

안, 2015.6.11).

합병을 하려고 합니다. 국민경제에 대한 고민 보다는 자신들의 경영승계가 우선입니다. 삼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저평가 되었다

성 정도 규모의 회사면 단순히 개인만의 기업

며, 삼성물산 가치평가를 5배 올리라고 하고

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 경제의

있습니다. 이는 자신들이 약 7000억원 주고

미래를 좌우하는 결정이 오로지 재벌가문의

사들인 주식을 3조5000억원에 되팔겠다는 의

상속 논리에 따라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런 식

도입니다. 삼성과의 갈등을 일으켜 2조8000

의 경영이 팽배하면 우리경제는 힘들어 질 수

억원을 한국 시장에서 빼가겠다는 속셈이 있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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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쓰는 경제이슈

재벌총수 사익을 위한 결정은 이번 문제가 불

유착관계가 형상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사

거진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엘리엇의

태는 외국의 거대 자본의 공격에서 한국 기업

공격을 받고 있던 삼성은 6월 10일 삼성물산

이 자유로울 수 없다는 현실을 다시 한 번 상

이사회를 열고 자사주 전량(5.76%)을 KCC에

기시켜 주었습니다.

매각하기로 했습니다. 삼성은 삼성물산 주주 총회에서 엘리엇의 공세를 물리치고 우호지분

<CEO스코어>에 따르면 외국인 투자가 지분

을 모아서 합병을 결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

이 대주주 우호 지분보다 많아 이번의 삼성

사주는 의결권이 없습니다. 주주총회에서 자

물산과 같이 공격 위험에 처한 대기업 상장사

사주에 대한 의결권을 행사하려면, 자신의 편

가 13곳에 달한다고 합니다. 또 대주주 우호

을 들어줄 세력을 찾아 자사주를 매각해야 합

지분이 50% 미만이고 외국인 지분과 격차가

니다. 그런데 삼성물산이 KCC에 매각하기로

크지 않아 외국계 자본의 공격 가능성이 상존

한 자사주는, 삼성물산의 재산입니다. 이런 삼

한 회사도 12곳이나 된다고 합니다(연합뉴스.

성물산의 재산을 총수의 사익에 동원하는 것

2016.6.17). 외국자본의 놀이터를 어떻게 벗

은 문제가 있습니다.

어나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 경제의 주요한 과 제입니다.

다음으로 재벌총수들이 소수의 지분으로 그 룹 전체를 지배하는 취약한 구조는 언제든 외

이와 같은 두 가지 문제의식을 함께 해결하지

국자본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못하면, 이번 사태가 삼성의 승리로 끝나든,

봐야 합니다. IMF외환위기 이후 한국 대기업

외국자본의 승리로 끝나든 서민경제는 좋아지

중심으로 지분을 취득한 외국계 자본은 배당

지 못할 것입니다.

금과 시세차익을 제대로 챙겨갈 수 있으면, 특 별히 재벌총수 중심의 경영권을 공격하지는 않았습니다. 일종의 재벌총수와 외국자본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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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칼럼

1/5000 오퍼레이션 크로마이트 (Operation Chromite)

인천상륙작전 http://mag-mkyd21.tistory.com/193

ⓒ 윤태호 ㅣ 인천상륙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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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칼럼

한미관계에서 왜 한국전쟁을 주목해야 하는가? 이번에는 한국전쟁 시기 형성된 한미관계의 신화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 작정입 니다. 한국전쟁기 한미관계 이야기는 다른 시대에 비해서 조금 더 자세히 다뤄 보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사로잡혀 있는 ‘혈맹의 신화’가 바 로 이 때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의의 수호자 미국이 악마와 같은 공산 군으로부터 한국을 지켜주었다는 한국전쟁의 신화는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 작전에서 그 정점에 달합니다. 한국인들의 뇌리에 깊게 박힌 친미의식은 맥아 더 장군과 미군의 군사적 신화에 그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기존의 인식과 정반대로 미국의 군사적 실패에 초점을 맞추어 봄으로써, 미국에 대한 ‘혈맹의 신화’에 도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아는 한국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 북한 인민군이 일제히 38선을 넘어 남 침을 감행했다. 대부분의 남측 병력은 전면전을 예상하지 못했고, 많은 병 력이 휴가를 나가 있었기 때문에 38선은 삽시간에 무너졌다. 당황한 이승 만 대통령은 27일 새벽 국회의원은 물론 국무위원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대 전으로 도피했고, 다음날 서울은 인민군에게 점령당했다. 인민군은 파죽지 세로 진격해 내려와 7월 20일에 대전을 점령했고, 7월 말에는 진주에 들어 왔다. 그리고 8월 15일 무렵에 마산·왜관·포항 일대의 낙동강 전선을 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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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려고 했다. 그러나 6월 28일부터 신속하게 참전한 미군은 제해권과 제공권을 장악하고 인민군을 공격했다. 드디어 9월 15일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는 인천상륙작 전을 펼쳤고, 9월 28일 서울을 수복했다.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은 이 작 전의 성공을 계기로 반격을 시작해 10월 1일 38선을 다시 돌파했고, 10월 20일에는 평양을 점령했다. 11월경에는 압록강과 두만강 근처까지 진출했 다. 하지만 중국군의 지원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어 유엔군과 국군은 흥남 에서 피맺힌 철수를 하게 된다. 1951년 1월경에는 다시 평택과 제천 부근 까지 공산군이 밀고 내려왔다. 그렇지만 미군의 공세로 3월에는 다시 38도 선 부근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5월 이후에는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서 전선 이 교착되어 1953년 정전에 이르게 되었다.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과 인천상륙작전 위의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한국전쟁의 전말입니다. 한국전쟁은 3 년간의 장기전이었지만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쟁은 대개 1951년 초반에 이 르는 1년 미만의 기간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미디어나 교과서에서는 ‘한국전 쟁=인천상륙작전’의 도식만을 강조하며 그 이외의 크고 작은 전투들은 모두 안중에 두지 않고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천에서의 승리 이외에 한국 전쟁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것은 비단 한국에 서의 일만은 아닌 듯합니다. 미국에서도 한국전쟁을 이른바 ‘잊혀진 전쟁(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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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otten War)’이라고 하면서 이 전쟁을 기억하려는 별다른 노력이 보이지 않 는다고 합니다. ◀ 미국 워싱턴D.C에 있 는 한국전 참전 용사 기 념비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합니 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한 국전쟁을

공산주의로부

터 자유민주주의를 지켜 낸 매우 자랑스러운 전쟁 으로 여기고 있고, 전쟁을 겪으면서도 국가를 유지한 이승만을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이자 ‘국부(國父)’로 추앙하고 있는데 미국에서는 ‘잊혀진 전쟁’이 되어 가고 있다니요? 뭔가 꺼림칙하지 않나요? 북진통일 말고는 아무런 정치적·경제적 성취도 이루지 못하고 있었던 이승만 에게 한국전쟁은 기사회생의 계기가 되었을지 몰라도, 미국에게 있어서 한국전 쟁은 결코 승리한 전쟁이라고 말 할 수 없었습니다. 역전의 계기가 되었던 인천상륙작전 역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전쟁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작전’은 아니었습니다. 한국전쟁이 왜 ‘잊혀진 전쟁’이 되었 는지, 한국전쟁 발발에서부터 인천상륙작전 전후의 사정을 살펴보면서 진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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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는 무엇을 말하고 있나 지금도 인천 자유공원에 가면 응봉산 자락에서 인천항과 서해 바다를 바라 보는 맥아더의 동상을 볼 수 있습니 다. 그의 아이콘이나 다름없는 옥수 수나무 파이프를 물고 썬글라스를 낀 맥아더는 5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탑돌 위에 서서 공원을 찾은 시민들 을 내려다보며 60년 전의 이 말을 되 풀이하는 듯합니다. “우린 계획대로 9월 15일 인천에 상륙하네. 그렇지 않으면 자네들은 새로운 사령관을 맞 이하게 될 걸세.” 주위의 반대를 물리치고 인천상륙작 전을 펼쳤던 맥아더는 상륙 이후 승 리에 도취된 나머지 오판에 오판을 거듭했고, 이듬해 4월 트루먼 대통령 ◀ 서해를 바라보는 맥아더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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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부터 파면을 당하게 됩니다. 한국전쟁의 최대승리라고 칭송받는 인천상륙 작전의 입안자인 맥아더가 불명예 제대를하게 된 것입니다.

작전 성공률 1/5000 오퍼레이션 크로마이트 인천상륙작전의 암호명은 ‘오퍼레이션 크로마이트(Operation Chromite)’였습 니다.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는 개전 초기부터 적 후방과 전선을 일거에 단절시 킬 수 있는 상륙작전을 실시하려고 고심했습니다. 유엔군 사령부의 참모들은 상륙조건이 좋은 군산을 추천했지만, 맥아더는 끊임없이 인천을 고집했습니다. 하지만 인천은 상륙작전을 실시하기에 매우 어려운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 어서 참모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가 9m로 매우 커 썰물 시에 수백 미터나 되는 갯벌을 통과해야 하고, 그 갯벌로 인해 상륙선 이 다음 밀물 때까지 좌초되어 있어야 하며, 또한 차량이나 중화기의 이동이 불 가능하다는 악조건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부 참모들은 상륙작전의 성공률이 1/5000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한편, 한국의 해안 지형에 대한 정보가 전무했던 미국은 상륙작전 성공을 위해 계획부터 시행까지 일본군 을 끌어들여 정보를 취했다고 합니다.

맥아더의 초대형 상륙작전 참모들은 결국 맥아더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고, 상륙작전은 9월 15일 전격 단 행되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기념관 자료에 따르면 맥아더가 지휘하는 유엔군 은 상륙부대로 새로이 창설된 미 10군단(군단장 알몬드 소장) 75,000명을 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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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상륙작전의 작전개념도

해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10군단은 예하에 미 해병대 1사단(사단장 스미스 소 장)과 미 7사단(사단장 바 소장), 국군해병연대(사령관 신현준 대령), 국군 17연 대(연대장 백인엽 대령)를 둔 한미 혼성부대였습니다. 2차 대전의 대표적 상륙 작전인 노르망디상륙작전에 87,000명이 투입되었다는 사실과 비교해 보면 엄 청난 규모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의 작전임무는 인천항 확보와 해안교두 보 점령, 가능한 한 신속한 김포비행장 확보, 한강 도하 및 서울 탈환, 미 8군단 과 연결작전이 이루어지기까지 서울 근교의 진지를 점령하는 것 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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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뿐만 아니라 화력면에서도 인천상륙작전은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이미 9월 4일부터 인천 지역에 대한 공습이 시작되었으며, 군산·영덕·삼척 등지에서는 인천으로부터 북한군의 눈을 돌리기 위한 기만작전으로 함포사격이 실시되었 습니다. 9월 13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인천포격에는 4척의 항공모함과 6척 의 구축함, 5척의 순양함 등 261척의 함대가 동원되었습니다. 유엔군의 포격은 첫 상륙지점이었던 녹색해안(Green Beach), 즉 월미도에 집중되었습니다. 작 전은 15일 새벽 월미도에 첫 상륙주정이 도착하고, 오후 5시 쯤 적색해안(Red Beach; 인천 동구)과 청색해안(Blue Beach; 인천 남구)에 미 해병 5연대와 1 연대가 상륙함으로써 일단락되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한 작전이었을까? 인천에서의 상륙작전을 위대한 승리로 기억하고 싶은 쪽에서는, 최악의 상륙조 건에도 불구하고 유엔군과 국군이 용맹을 떨쳐 최선의 승리를 거머쥔 쾌거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은 이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맥아더의 결 단에 따른 과감한 상륙이었다고 보기에는 조금 미심쩍은 부분이 있습니다. 제 공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유엔군은 이미 대부분의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에 배치 되어 후방에는 매우 적은 병력만이 남아있음을 알고 있었으며, 미 해군 첩보대 는 작전 수행 며칠 전에 월미도에 잠입해 인천 일대의 북한군 동향을 수집해 본 진에 보고를 하기도 했습니다. 상륙작전의 기본은 기습입니다. 상륙작전은 방어가 미비한 적 후방을 기습적으 로 점령, 제2전선을 구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전략적인 기동작전의 하나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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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상륙작전으로 제2전선이 구축되면 적 병력은 분산되게 마련이고, 아군은 전·후방에서 양면공세를 펼칠 수 있게 되어 전황을 일거에 역전시킬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상륙작전은 아무 은폐물도 없는 해안가에 병사들을 그대로 노출 시키면서 수행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시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때문에 상 륙작전은 적의 증원병력이 도착하기 전에 속전속결로 승부를 봐야 하는 기동 작전입니다. ◀ 인천상륙작전 직후 의 미국 해병대원들 앞서 확인했듯이 노르 망디상륙작전은 1944 년 6월 6일 하루 만에 87,000명의 대병력이 일제히 상륙하는 기습 작전이었습니다. 대규 모 상륙작전의 위험성 이 크다고 판단되면 후방에 공수부대를 낙하시켜 상륙지 후방을 점령하는 방법 도 고려됩니다. 1943년 7월 9일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아상륙작전은 상륙지 점 후방에 공수부대를 투입한 뒤에 성공한 연합군의 대표적인 상륙작전이었습 니다. 한편 1945년 오키나와 동쪽의 일본군 항공기지였던 이오지마 섬에 대한 미군의 점령작전은 대대적인 함포사격을 동반한 상륙으로 수행되었습니다. 이 것은 이오지마가 태평양 한가운데 위치한 섬으로써, 증원군을 기대할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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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이었기 때문에 채택된 전술이었습니다.

맥아더는 왜 이틀 동안이나 시간을 허비했나 인천상륙작전 역시 수백 미터의 갯벌을 통과하는 동안 상륙하는 병사들을 무 방비로 노출시킬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기습적으로 신속하게 병력을 투입시켜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맥아더는 기습상륙을 포 기하고 함포사격에 나서는 등 상륙하기까지 이틀 동안이나 시간을 허비합니다. 맥아더는 월미도를 마치 2차 대전의 이오지마처럼 생각했던 것일까요? 맥아더 가 인천상륙작전의 주공전선으로 선택한 월미도는 변변한 요새조차도 없이 북 한군 240명이 지키는 작은 해안가 섬에 불과했습니다. 이오지마는 증원 병력 을 기대할 수 없는 태평양 한복판의 섬이었지만, 월미도는 언제 증원 병력이 올 지 모르는 해안가였습니다. 유엔군이 인천을 폭격하는 동안 북한군은 서울을 방비하기 위한 병력을 증파했 으며, 이로 인해 유엔군의 서울 점령은 상당히 늦어졌습니다. 북한군 증원병력 의 저항으로 인해 유엔군의 서울 점령은 9월 28일에야 가능했습니다. 인천에서 서울까지 32km의 적 후방을 돌파하는 데 13일이나 걸렸다는 사실은 전략적으 로 매우 중대한 차질이 빚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울에서의 치열한 공방 전으로 인해 유엔군이 한반도의 허리를 장악하는 데 시간이 지체되었고, 상당 수의 북한군 주력이 북쪽으로 퇴각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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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로 기억된 상륙 직후의 지체 전쟁사가들은 인천상륙작전 직후의 지체를 맥아더의 결정적인 실수라고 보고 있습니다. 북한군을 포위·섬멸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림으로써 이후의 전황 을 다시 불리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인천상륙작전은 단순히 인천지역에 대 한 성공적인 점령이나, 일시적인 전황의 역전만으로 평가될 수는 없습니다. 왜 냐하면 맥아더가 입안한 작전 목표는 일부지역에서의 전술적인 승리가 아니라 전쟁을 완전히 끝내기 위한 전략적인 승리였기 때문입니다. 맥아더는 인천에 상륙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전략적인 목표였던 북한군의 완전 포위에는 실패 한 것입니다. 결국 인천상륙작전 직후의 지체는 북한의 잔여병력이 중국군과 합세하여 다시 반격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습니다. 맥아더는 왜 압도적인 병력 과 화력을 가지고서도 주저하게 된 것일까요? 무엇이 맥아더를 불안하고 만들 었던 것일까요?

잊혀진 미군들의 패배 맥아더의 불안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제껏 우리가 배워본 적이 없었던 한국 전쟁 초기 미군들의 실패에 대해서 되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전쟁 발발 3 일 후, 서울이 점령당할 때까지만 해도 맥아더는 서울함락이 국군의 실패일 뿐, 미군이 참전하면 전황은 쉽게 역전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맥아더는 미군 4개 사단이면 북한군의 침공을 충분히 막아낼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했습니다. 그러 나 세계최강을 자랑하던 2차 대전 승전국 사령관의 자신감이 만용에 불과했다 는 것은 개전 후 열흘도 되지 않아 여실히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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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첫 패배는 7월 5일의 오산전투였습니다. 미군은 오산에서 방어선을 치 고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스미스(Charles B. Smith) 중령이 지휘하는 24보병 사단을 오산에 파견합니다. 이 부대는 2차 대전에서 위용을 떨친 특수임무부 대였습니다. 그러나 스미스 부대는 반나절도 못 버티고 후퇴하게 됩니다.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북한군은 정규군 5만에 의용군 5만 정도로 유엔군의 절 반 규모였는데,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미 육군 4개 사단에다 한국군까지 동원 하고도 공격을 막지 못했다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입니다. 미군의 두 번째 중대한 패배는 교통의 요지 대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였습니다. 당시의 전황은 급박했습니다. 병참의 요충지 대전을 빼앗긴다면, 호남을 비롯한 한반도 대부분이 북한군에게 장악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속전속결로 전 쟁을 끝내려고 했던 북한군은 어떻게든 빨리 대전을 수중에 넣으려고 했습니다. 대전의 군사적 중요성 을 알고 있던 미군 역 시 윌리엄 딘 소장이 직접 지휘하는 기갑사 단을 파견하고, 대규 모 병력을 동원해 금 강을 최후 방어선으로

◀ 대전에서 철수하는 국군과 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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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대전 사수 작전을 펼쳤습니다. 대전전투는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세계전쟁 사에 남을 만한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결과는 미군의 대패였습니다. 한반도 지 형이 익숙하지 않았던 미군은 산을 타고 후방을 장악한 북한군에게 완전히 포위 되었고, 사단장 딘 소장이 북한군의 포로로 잡혔던 것입니다. 사단장이 포로로 잡힌 것은 히틀러의 독일군과의 교전에서도 흔치 않은 일이었을 정도로, 대전전 투는 전쟁사에 남을 미군의 치욕적인 패배였습니다. 1950년 8월 무렵, 미군은 결국 동남부의 낙동강 전선을 제외하고 한반도 전역을 북한에 내주게 됩니다.

중국군의 참전과 북·중연합군의 반격 다시 인천상륙작전 이후로 돌아와 봅시다. 인천상륙작전 후의 상황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요? 북한군이 빠르게 북·중 국경지대로 퇴각하자, 9월 29일, 맥 아더는 한국군과 유엔군의 38선 돌파를 승인합니다. 이틀 뒤, 한국군과 유엔군 이 38선을 돌파하는데, 한국군은 이날을 기념해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지정 하기도 했습니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자 중국은 전격적으로 참전을 결정했습니다. 중국은 북한 이 없으면 대만과 한반도 양쪽에서 포위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컸습니다. 게다 가 승산도 있어보였습니다. 유엔군은 빠른 진격으로 인해 보급선과 멀어진 상 태였고, 10월 이후 갑작스레 추워진 날씨로 인해 기갑부대의 각종 장비가 멈춰 서 부대들이 분산된 채 산골짜기 곳곳에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주로 열대지방 에서 작전을 펼치던 태평양사령부의 미군들에게 산악지대의 매서운 추위 역시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반면 한반도보다 훨씬 추운 만주지역에서 일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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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싸웠던 북한군과 중국군은 산악지형에도 익숙했을 뿐만 아니라, 추위에도 단련되어 있었습니다. 다급한 후퇴로 북한군은 많은 역량을 소실했지만, 그래도 주력부대의 일부를 보 존했습니다. 38선을 넘은 북한군 후퇴병력은 북·중 국경지대에서 중국군과 연 합하는 데 성공합니다. 중국이 참전을 결정하게 된 데에는, 살아남은 북한군의 존재가 커다란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물론 중국은 북한과 순망치한(脣亡齒寒) 의 관계이기 때문에 유엔군의 북진을 두고 볼 수 없는 처지였지만, 북한군이 완 전히 궤멸되었다면 과연 미국과의 전쟁을 쉽게 결단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맥 아더의 실수가 북한과 중국의 연합을 가능케 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맥아더의 성급한 진격과 북한·중국의 유격전술 북한군과 중국군은 ‘인해전술’이 아니라 일본군을 상대하던 ‘유격전술’로 유 엔군을 공격했습니다. 북· 중연합군은 야간에 산을 타 고 몰래 이동해 고립된 유 엔군을 포위해 공격하는 게 릴라전을 펼쳤습니다. 고립 ◀ ‘인해전술’로 알려진 중국군의 진격모습. 그러 나 중국군의 주요 전법은 유격전술이었다.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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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채로 기동력까지 상실한 유엔군과 한국군은 이 과정에서 상당수가 포로로 잡히기도 했습니다. 맥아더는 결국 후퇴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북한지 역의 유엔군은 흥남부두에서 대규모 철수작전(흥남철수)을 펼치게 되고, 1951 년 1월 4일에는 북·중연합군에게 다시 서울을 내주기도(1.4후퇴) 했습니다. 후 퇴 당시 유엔군 합동참모본부는 플랜B로 한반도의 포기와 대한민국 망명 임시 정부의 수립까지도 고려해야 했습니다.

38선 돌파는 맥아더의 최대 패착 한국전쟁에서 맥아더는 중대한 두 가지 실수를 하게 됩니다. 첫 번째 실수는 유 엔군과 한국군의 38선 돌파를 승인한 것입니다. 애초에 유엔군의 참전 목적은 북한군을 38선 이북으로 돌려놓는 것이었지만, 서울 수복에 도취된 맥아더는 이를 무시하고 전격적인 북진 작전을 허가했습니다. 방어진지를 구축하며 북진 해야 한다는 주변의 지시를 무시하며 쾌속 북진을 하던 유엔군은 결국 중국군 의 개입과 북중연합군의 반격으로 뼈저린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 가 맥아더는 중국군의 대규모 참전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 실수는 ‘원산상륙작전’입니다. 맥아더는 서울을 점령한 8군단과 10군 단을 다시 둘로 쪼개서 8군단은 38선을 육로로 돌파해 개성-사리원-평양으로 진격케 하고, 10군단은 다시 배를 타고 원산에 상륙해 함경도로 올라간다고 결 정했습니다. 그러나 10군단이 인천에서 다시 반도를 반 바퀴 넘게 돌아 원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20일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게다가 미국의 상륙 첩보를 들은 공산군 측에서 원산 앞바다에 기뢰를 엄청나게 깔아놓았기 때문에, 유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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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은 기뢰 제거에 또 다시 수일을 허비했습니다. 기뢰 제거 과정에서 세 척의 함 정이 침몰했으며, 유엔군은 결국 10월 25일이 되어서야 상륙할 수 있었습니다. 주력부대였던 미 10군단은 맥아더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전황이 역전되어가 는 중요한 순간에 거의 한 달을 바다 위에서 허비한 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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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의 메아리가 된 맥아더의 호언장담 미국이 극동의 조그만 나라에서 연전연패를 당하다니!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개전 초반이었던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군은 오 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세계 최강군이 아니라, 열세에 처해 조바심을 내던 외인 부대였습니다. 전쟁 초반의 패배로 인한 미군의 심리적 위축이 인천과 월미도 에 대한 3일간의 포격으로 드러난 것이 아닐까요? 포격으로 인한 상륙의 지연 은 북한군이 서울로 방어부대를 증파할 시간을 벌어주었고, 그로 인해 유엔군 의 서울점령은 13일 후에야 이루어 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유엔군이 한반도의 허리를 끊어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지 못했 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즉, 인천상륙작전의 전략적인 목표였던 북한군 포위· 섬멸작전이 일차적으로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이 실패는 결국 1950년 겨울의 두 번째 실패로 이어졌습니다. 미군 장병들을 크리스마스 전에 집으로 돌려보 내겠다는 맥아더의 약속은 허공의 메아리가 되었으며, 불세출의 전쟁영웅은 불 명예스러운 전역식을 치르게 됩니다. *한미관계사 연재는 이번호를 마지막으로 마칩니다. 한미관계와 관련된 더 많 은 이야기는 615출판사에서 나온 <한미관계의 23가지 그림자>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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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한미관계의 23가지 그림자 우리는 미국에게 무엇인가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이준영 지음

‘미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답변을 하는 데 충분한 도우미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본다. 미국에 대한 일방적인 기대감이나 지나친 적대의식을 넘어서 보다 객관적으로 미국을 보는 시 각을 견지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 믿는다. 독자 여러분들께 반드시 일독을 권한다. 이장희 (한국외대 명예교수/평화통일시민연대 상임공동대표) 미국 대외정책의 기조를 바탕으로 19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 전개되어온 두 나라 사이의 ‘혈 맹 관계’가 실제로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쉽고 재미있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젊은이들이 많이 읽고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와 통일에 관해 깊이 고민해보게 되길 기대한다. 이재봉 (원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81


스승을 만나다

사람은 죽어서 정신을 남긴다 권오창 우리사회연구소 이사장 http://mag-mkyd21.tistory.com/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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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을 만나다

최근 미국의 탄저균 반입 문제로 많은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다. 미군 부대 인근에 살고 있 는 사람들의 분노와 걱정은 더 할 것으로 보인다. 1950년대부터 용산에서 살아오시면서 주한미군 기지와 한 공간에서 한생을 보내신 권오창 우리사회연구소 이사장님과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용산은 조선시대부터 외국군대가 주둔했 던 치욕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지역이라고 설명하시는 선생님. 용산에 집약되어 있는 우 리의 아픈 과거와 미국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본 : 우선 선생님께서 꿈을 키워 오셨던 소년

러웠던 때에 소년시절을 보냈습니다. 빨치산

시절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활동으로 인명피해가 많았습니다. 저의 마을 로부터 10리가량 되는 석봉(石鳳)이라는 곳

권오창 우리사회연구소 이사장(이하 권) : 길

에는 한마을이 몽땅 아군에 의해서 학살되기

가에서 자라는 한 포기 로방초(路傍草)도 그

도 했습니다. 한 마을에서 60여명이 사살되었

존재 이유가 있거늘 어떻게 사람으로 태어나

지요. 빨치산(빨갱이)에게 협조했다는 이유였

서 꿈이 없겠습니까마는, 제가 태어나서 자란

습니다. 그 때 신성모 국방장관이 현지에 직접

곳은 소백산 자락 문경군 산북면 서중리라는

내려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현상 남부군

곳입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소

에 의해서 문경경찰서가 침탈당해 경찰서장이

년시절을 농촌에서 보냈습니다. 초등학교 3학

죽고 경찰들이 많이 포로 신세가 되었습니다.

년 때, 12살에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중

그러한 광경을 저는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그

학교 2학년 때 6.25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리고 빨치산에 참여했던 8명의 농민들이 경찰

해방정국에서 문경은 빨치산이 많이 활동하

에 의해 대낮에 들판에서 총살되는 광경을 중

던 곳입니다. 게릴라전으로 인해 정국이 어지

학교 3학년 때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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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을 만나다

이러한 어릴 때의 기억이 제가 살아오는데 많

현실들이 머리에 깊이 박혀서 도저히 지울 수

은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좌와 우, 자본주

가 없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그러

의와 사회주의, 미군정 4년의 통치 속에서 나

한 기억들이 학문적 차원에서 연구과제가 되

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사색과

고, 그 과정에서 사상으로 깊이 인식되게 되

방황을 하면서 꿈을 키워 왔습니다.

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대학 4학년 때(34세)

1945년 미군이 이 땅에 들어와 군정통치를 하

1965년 한일회담 반대투쟁에 앞장서다가 경

는 4년 동안 우리 농민들은 그 생활이 달라진

찰서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그때부

것은 하나도 없었고, 오히려 전쟁의 소용돌이

터 출세의 꿈을 접고 사회운동권에 몸담게 된

에서 굶주림과 학살 말고는 돌아올 것이 없다

것입니다. 그 당시 수업이 제대로 될 리가 없

는 것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전

고, 학교는 휴교하고, 가두데모로 시간을 다

쟁을 피해 이웃마을로 피란을 가는 도중에 사

보내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때 주로 도서관에

람의 시체가 수십 명이나 논바닥에 줄줄이 늘

서 사회과학서적을 읽었습니다. 도서관에 있

어져 누워있었습니다. 지금 알고 보니 그때 보

는 사회과학서적은 거의 다 읽다시피 했습니

도연맹사건으로 농촌청년들이 억울하게 생목

다. 제국주의가 무엇이며, 왜 우리에게 외세가

숨을 잃은 것이었습니다.

관여해서 내정간섭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고민했습니다. 민족의 분단은 제국주의에 의

본 : 한국 현대사의 가장 가슴 아픈 시기에 소

해서 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미

년시절을 보내셨던 것 같습니다. 이후 통일운

국은 우리민족의 통일을 결코 바라지 않겠구

동과 민주화 운동을 하루도 쉬지 않고 해오셨

나 하는 것도 깊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는데요, 평생 통일운동, 민주화운동에 몸담게

자본주의는 산업자본주의 단계와 제국주의 단

되신 계기가 있으신가요?

계, 크게 두 단계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자 본주의 본질은 이윤추구에 있습니다. 10%의

권 : 나는 꿈 많은 시절에 경험한 살벌한 사회

84

이윤이 남으면 도덕을 어기고, 50%의 이윤이


스승을 만나다

남으면 법을 어기고, 100%의 이윤이 남으면

산과 수출을 끊임없이 추구합니다. 특히 미국

사람을 죽이고, 200%의 이윤이 남으면 전쟁

은 제2차 대전에서 무기산업으로 부자가 되었

도 불사하는 것이며, 제국주의 단계로 넘어가

습니다.

면 이윤을 얻기 위해 침략과 전쟁이라는 수

우리나라에는 1866년 셔먼호 사건을 저질렀

단을 겸비하게 됩니다. 자본주의가 토지자본

으며, 그것으로 부족하여 1875년 일본의 운양

에서 상업자본으로, 상업자본에서 산업자본으

호사건을 비호하여 1876년 병자수호조약(강

로, 그리고 산업자본과 은행자본이 결탁하여 금융자본으로, 나아가 금 융자본이 해외로 자본을 수출하게 되면 그 자본을 보호하기 위해서 해 외 침략을 위한 전쟁정책을 구사하 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국 내 산업자본주의 단계를 벗어나서 해외침략에 의한 군산복합체 제국 주의 단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제국 주의 단계의 특징은 전쟁에 의해서 초과이윤을 착취하게 되는 것입니 다. 후진 국가를 자본투하지로, 상 품판매지로, 그리고 원료원천지로 만들고, 식민지 획득과 통치, 수탈 을 위해 끊임없는 전쟁정책을 구사 합니다. 이를 위해서 제국주의자들 은 군산복합체 산업으로서 무기생

85


스승을 만나다

화도조약)을 맺게 하는데 일본의 후원자가 되

조시켰습니다. 그 결과 우리 민족은 많은 피해

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1905년 7월 테프

를 입었습니다. 자신의 패권을 위해 한반도를

트-가쓰라 협약으로 일본은 조선을 집어먹는

이용하려는 미국의 영향에서부터 자유롭지 못

대신에 미국은 필리핀을 집어 먹기로 하면서,

하면 우리는 하루도 마음 놓고 편안히 살수가

바로 그해 1905년 11월에 일본은 을사늑약으

없습니다.

로 우리 조선을 하루아침에 집어먹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미국은 일본에게 조선영토에

본 : 운동에 몸담게 되신 계기와 미국과 일본

서의 기독교 선교를 할 수 있도록 양해를 얻

의 제국주의적 속성에 대해 이야기 해 주셨는

어서, 선교 활동으로 조선 사람들의 머릿속에

데요, 당시에 미국에 대한 본질을 알고 많은

독립정신이 아닌 기독교 정신을 주입하였습

생각을 하게 되신 것 같습니다. 최근 문제에

니다. 선교사가 배를 타고 인천바다에 도착하

대해 이야기를 좀 해 보면 좋겠습니다. 최근

면 그가 가진 가방 속에는 세 가지 상품이 들

미군의 탄저균 반입 문제를 보시면서 느끼신

어있었습니다. 하나는 성경책인데 그것은 오

것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늘날 우리나라를 기독교 천국으로 만들었고, 또 하나는 시계인데 이것은 우리나라를 미제

권 : 탄저균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일

상품 판매지로 전락시켰고, 마지막 또 하나는

제시대 때 일본이 만주에서 싸우시던 우리민

호신용 권총인데 이것은 오늘날 핵무기로 발

족의 독립군을 잡아다가 생체실험을 하여 40

전함으로써 한반도를 전쟁의 먹구름으로 뒤덮

명이나 희생시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를

었습니다.

수행한 부대가 731부대인데, 제2차 대전이 끝

일본이 제2차 대전에서 패하자 미국은 곧바로

나자 미국은 일본과 샌프란시스코조약을 맺

이 땅에 들어와 동북아 패권을 위한 발판을 마

어 독도를 일본에게 넘겨주고 그 대가로 731

련하였습니다. 그 이후 미국은 분단을 이용해

부대를 인수하여 탄저균을 위시한 여러 가지

냉전체제를 더욱 강화하고, 한반도 긴장을 고

병원균을 생체 실험하여 6.25전쟁에서 우리

86


스승을 만나다

민족을 살상케 하였으며, 그 후 오산, 용산, 군

같은 정책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산 미군기지 내에서 계속 생체실험을 해오다

탄저균이야 말로 우리민족이 유사시에 그 어

가 맥팔랜드가 용산기지에서 독극물사건을 일

떤 참화를 입을지도 모르는 무서운 저강도 전

으켜 그 본색이 탄로 났으며, 이번에 또 들통

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

이 났습니다. 미국은 이 탄저균을 전쟁무기로

도 당장 탄저균실험실만은 이 땅에서 추방하

사용하려고 한국주둔 미군기지 내에서 끊임없

는 운동을 펼쳐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

이 연구실험하고 있습니다. 오산에서는 이 실

리 생명은 우리가 지켜야지 누가 지켜주겠습

험과정에서 22명이나 되는 병사와 민간인이

니까. 100킬로그램 3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갈

탄저균에 노출되었습니다. 용산기지에서도 연

수 있다고 합니다. 이에 우리 정부는 말 한마

합사령부 산하에 제3번게이트 안에 실험실이

디 못하고 묵묵부답을 하고 있으니 한심하기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지없습니다.

제국주의는 고강도 전략과 저강도 전략을 겸 비해 나가면서 전쟁정책을 펼치고 있습니다.

본 : 용산에서 오랜 기간 살아 오셨다고 들었

일례로 1980년대 레이건 정부는 고르바쵸프

습니다. 용산주민으로서 직접 느끼시는 미군

로 하여금 개방개혁정책을 펴도록 유도해 소

기지는 어떤 곳인가요?

련을 붕괴시켰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 서 동구권 사회주의가 붕괴되자 이 여세를 몰

권 : 용산은 한마디로 말해서 한미방위조약과

아서 미국은 90년대부터 북한을 붕괴시키려

소파(SOFA)규정에 의해서 우리의 주권이 미

고 해 왔습니다. 북한에 대해서 5027-98작전

치지 못하는 곳입니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상

등으로 고강도전략을 쓰는 한편, 소련 붕괴방

대륙의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병난을 겪어 왔는

식인 강온양면의 전략을 지금 구사하려고 탄

데, 그 때마다 외국군이 침략을 해 피해를 입

저균 세균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었습니다. 특히 병자호란(1637년)때는 인조께

북한인권사무소를 한국에 설치한 것도 이와

서 남한산성에 피신했다가 돌아와 청태종의

87


스승을 만나다

요구에 의하여 지금의 서울 송파구 송파에서

용지로 수용하였습니다. 일본은 용산점령 2년

항복을 하고 청태종이 송파나루에 승전기념으

만에「한국주차 일본군사령부(韓國駐箚 日

로 삼전도비(三田渡碑)를 세웠습니다. 이때부

本軍司令部)」를 정식으로 발족시키고 1941

터 이태원에는 청나라군대가 와서 훈련을 하

년 6월 1일 조선군 사령부로 개칭하였습니다.

였습니다. 또한 1906년 4월부터 일본군이 용

그리고 2차 대전 후 맥아더 일반명령 1호에

산구 이태원에서 한강변에 이르는 일대를 군

의하여 용산이 자연적으로 미군에 의해 접수 되었습니다. 1946년 9월 13일 용산 일대 일본군 부지를 접수하고, 이 일 대 땅을 모두 군용부지로 수용하였습 니다. 1971년 3월 27일 철수할 때까 지 한국의 전방지역을 지키고 있던 보병 제7사단이 용산에 있었습니다. 1949년 6월 29일 일본으로 미군이 철수했다가 1953년 8월 휴전이 되 고나서 20일만에 다시 미군이 용산 을 차지했습니다. 전쟁이 시작 된지 한 달도 안 되어 이승만이 미군 쪽에 작전권을 송두 리째 내주었고 그 후 4년 만에 이승 만이 참석한 가운데 1957년 7월 1 일 다시 주한미군사령부가 설치되었 습니다. 1978년 11월에는 한미연합 군사령부가 용산기지 내에 설치되었

88


스승을 만나다

습니다. 그때 ‘주한미합동군사고문단’도

고 있고 용산에 한미연합사령부가 그냥 남아

같이 용산기지 메인포스트에 설치되었습니다.

서 탄저균까지 실험하면서 세균전을 준비하고

1975년에는 주한 유엔군이 해체되었습니다.

있는 현실입니다. 미국의 주도하에 한미일 정

1977년 카터 미 대통령의 독자적인 주한미군

보공유, 미일간의 신안보협력지침, 일본의 집

철수가 시작되자 박정희의 요청에 의하여 한

단적 자위권, 그리고 한미일 삼각동맹이 추진

국은 미국의 핵우산에 들어간다는 약속이 카

과정에 있는 것을 보면 한반도의 정세가 전쟁

터와 박정희 사이에 맺어졌습니다. 그 후 유엔

접경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가지

사령관을 한미연합사령관이 겸하게 되고 용

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산기지 내에는 ‘주한핵계획작전부(plans and

용산은 용산 주민이 지킨다는 각오로 주민들

operation nuclear division south korea)’가

이 용산살리기 운동에 나서고 있습니다. 탄저

설치되었습니다. 1988년 9월 현재로 4만3천

균사고가 나면 그것은 누구보다도 용산주민이

명 가량의 미군이 남한에 주둔했으며, 그 가운

피해를 보기 때문입니다.

데 지상군이 2만9천명, 공군이 1만2천명, 해 군과 해병이 1천명 정도 되었습니다. 6개 지역

본 : 앞서 탄저균 문제와 한국에 유엔인권사

에서 모두 120개의 미군기지 5천만평의 땅을

무소를 설치하는 문제가 미국의 저강도 정책

차지하고 있으면서 임대료를 한 푼도 내지 않

이라는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고 이야기 해 주

고, 오히려 주한미군 주둔비를 1년에 1조5천

셨던 것 같습니다. 인권사무소를 유엔에서 한

억원 이상을 거두어 가고 있습니다. 그 비축된

국에 설치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어떤 결과를

돈으로 이자놀이 까지 하고 주둔비에 쓰지 않

가지고 올 것 같으세요?

고 다른 분야로 자기들 마음대로 전용하는 불 법까지 감행하고 있습니다.

권 :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형식상 지금 평택으로 주한미군이 옮겨가고

세 가지 분야에서 패권주의를 행사하는 조건

있습니다만 전방 2사단 킬체인이 더욱 강화되

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89


스승을 만나다

첫째, 유엔을 장악하고 정치무대에서 유엔의

이렇게 볼 때 미국이 주도해 인권사무소를 개

이름으로 자기들의 국익을 위해 유엔안보리

설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너희들이나 잘

와 유엔총회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브

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인권사무소는 미국

레튼우즈체제입니다. 제2차 대전에서 무기장

에 차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

사를 해서(무기대여법) 달러를 무한정 벌어서

다. 지금 인권이 가장 심각한 곳은 바로 미국

세계경제를 검어지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입니다. 세계에서 빈부격차가 가장 심각한 나

핵으로 제3세계를 위협하고 ICBM 대륙간 탄

라가 미국이고 노숙자가 가장 많은 나라도 미

도탄에 의해서 군사적 우위권을 독점해서 패

국입니다. 인종갈등이 심하여 흑인 때려잡는

권주의를 세계에 행사함으로써 여러 나라들을

것을 개잡듯하고 총기사고로 1년에 수만명이

침략하여 침략전쟁을 통해 막대한 자원을 강

죽어가고 있습니다.

탈해 갔습니다.

이제 미국이 인권사무소를 설치하고 남과

미국은 전쟁으로 일어서고 전쟁으로 유지되는

북을 대결로 몰고가서 앞으로 무슨 일을 저

나라입니다. 건국과정에서 서부개척이란 이름

지를지 모릅니다. 그 배후에는 미 CIA와

으로 50만명이나 되는 본토민을 학살하였고,

NED(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가

중남미나라들을 전쟁으로 집어먹고 전후 200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앞으로 탈북자를

여 차례를 통해 수많은 민간인의 목숨을 앗아

활용하여, 대북 삐라살포로는 부족하니까 막

갔습니다. 아프리카 원주민을 사냥해다가 자

대한 자금지원으로 새로운 대북대결행동을 구

기나라에 싣고 와서 노예로 삼아 인간착취를

사 할 수도 있습니다. 이들이 앞으로 인권사무

감행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해방 후 미군

소가 아니라 반인권사무소를 통해 우리민족의

이 들어와서 10월항쟁에서, 2.7구국투쟁에서,

통일을 가로막고 대결을 부추겨서 전쟁정책으

4.3항쟁에서, 지리산에서, 한라산에서 군정 4

로 나아가려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큽니다.

년동안 100만, 6.25전쟁에서 300만명 등 무 수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90

본 : 탄저균 문제에 있어 당면해서 진보진영


스승을 만나다

은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오산기지에 반입된 실험탄저균은 BWC(생물 무기금지조약)가 금지하고 있는 대표적인 세

권 : 오늘 우리에게 다가온 이 인권사무소와

균무기입니다. 이에 따라 이 조약의 가입국인

탄저균문제는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미국이 제3국으로 탄저균을 몰래 이전한 것은

둘입니다. 다시 말해 동전의 양면관계입니다.

이 조약을 위반했다는 지적을 받을 수밖에 없

인권사무소 문제는 정치사상적 문제이고, 탄

습니다. 이에 대해 국회에서 질문을 받은 한민

저균 문제는 전쟁무기 문제입니다. 푸러시아

구 국방장관은 미국 눈치만 보고 있는 형편입

의 장군출신 전쟁전략가 클라우제비츠는 “전

니다. 주권국가로서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쟁은 또 다른 하나의 정치방식”이라고 말했습

이제 우리국민 자신이 죽지 않기 위해서도 국

니다. 정치와 전쟁 역시 바늘과 실의 관계입니

민이 나서야 합니다.

다. 하나의 미국이 저지른 두 개의 문제일 뿐

731부대 책임자 ‘이시이’는 미국으로부터 사

입니다.

면을 받고나서 미군의 보호아래 비밀작전에

문제는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이 문제를 정부

협력했는데, 한국전쟁 기간에 세균전에도 깊

가 모른체하고 있는 것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

숙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국과

습니다. 한국전쟁 65주년을 맞아 국내 처음 공

북한은 미국이 6.25전쟁 중에 세균전을 감행

개된 ‘니덤보고서’는 오산 미군기지 세균

하면서 ‘이시이’를 전선에 불러들였다고 주장

실험실 탄저균 노출사고와 맞물리면서 한반도

해 왔습니다. ‘이시이’는 1952년 초에 두 차

를 둘러싼 세균오염에 대한 우려를 더욱 증폭

례, 1953년 3월에 한 차례 방한해 극비리에

시키고 있습니다. 주한미군기지내 다양한 세

미군의 세균전을 도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

균실험실 운영과 오산기지 탄저균 노출사고,

다. 미군의 731부대 세균연구 승계와 6.25전

그리고 한국전쟁시기 미국이 벌인 비밀세균

쟁 당시 미군의 세균전은 공공연한 비밀이지

전 논란의 중심에는 미 국방부산하 ‘더그웨이

만, 한국정부는 과거의 세균전 문제는 물론 주

생화학실험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한미군기지 내 비밀세균실험에 관해서도 미국

91


스승을 만나다

에 아무런 요구를 못하고 있습니다.

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해군과 공군은 미군이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 맞는다는 말이 있습

주로 담당하고 우리 국민은 지상전을 주로 맡

니다. 이 무능한 박근혜 정권 밑에 있다가 우

게 됩니다. 세균전이 전개되면 죽어가는 것은

리 국민들이 다 죽을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우

지상전을 맡은 우리 국군입니다. 이 문제는 어

리 국민이 미군부대 내 탄저균 실험실을 밝혀

느 한 정권의 문제도, 어느 당파의 문제도 아

내고 탄저균을 추방하는데 다함께 힘을 모아

닙니다. 우리 민족의 사활에 관한 문제로서 궁

나가야 하겠습니다. 전시작전권이 없는 현실

극적으로는 주한미군이 이 땅에서 필요한가하

92


스승을 만나다

는 문제로 까지 이어가야 할 것입니다.

권 : 청년(靑年)은 푸른시대입니다. 대지가 푸 르고 바다가 푸르고 하늘이 푸릅니다. 푸름은

본 : 살아오시면서 미군문제와 관련해 느끼신

만물의 에너지원입니다. 푸른 잎에서 아름다

것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운 꽃이 피고, 그 꽃에서 맛있는 과일이 맺어 져 우리에게 에너지를 공급합니다. 에너지는

권 : 나는 50년대부터 용산에서 살아왔습니

자연의 원동력이지만 사회의 원동력은 사람

다. 용산의 한 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주한미군

입니다. 청년입니다. 여러분은 역사의 에너지

은 우리민족에게 많은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입니다. 여러분 청년들이 있기에 역사와 사회

민족분단이 여기로부터 출발하고 효순이 미선

는 발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역사의 기

이, 윤금이 양의 억울한 죽음이 여기로부터 출

관차요 사회발전의 원동력입니다.

발했습니다. 끝 모를 전쟁연습, 연평해전, 천안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고 자기 운명

함사건도 여기로부터 나왔습니다. 국민의 생

을 이끌어 나가는 힘도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

활을 짓누르는 국방비와 미군범죄, 무기구입

다. 부지런히 학습하고 투쟁 속에서 단련되는

비 지출로 민중의 삶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

선구자가 됩시다.

다. 지방재정이 말이 아닌데, 아이들의 급식비

사람은 죽어서 정신을 남기고 범은 죽어서 가

까지 모자라 점심을 굶기는 형극이 벌어지고

죽을 남긴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내가 80평생

있습니다. 이 땅의 가난과 전쟁과 범죄가 여기

살아온 인생의 결론입니다. 오늘 우리의 역사

로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외국의 힘을 빌리

는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민중이 힘을 합쳐

기보다는 7천만 민족이 힘을 합쳐 우리민족끼

싸우지 않으면 그 누구도 대신할 사람이 없습

리 통일해서 살판나는 세상을 만들어 갑시다.

니다. 이 땅의 자주통일과 민주화를 향해 이 땅의 청년들이 앞장서 싸워나갑시다.

본 : 끝으로 민권연대 회원들에게 한마디 해 주세요.

93


우리가 미래다

용산에서 아이들과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http://mag-mkyd21.tistory.com/196

미군의 탄저균 택배에 분노하는 용산주민

최명희 회원

94


우리가 미래다

최근 용산미군기지 앞에서는 매일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다. 미군이 불법적으로 탄저균을 반 입해 생화학무기 실험을 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들을 무시하고, 대한민국 을 생화학무기 실험장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미군의 만행에 전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그렇다면 미군의 실험실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용산에 직접 살고 있는 사람들의 심정은 어 떨까? 용산에서 4년째 살고 있다는 최명희 회원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두 아이의 엄마인 최명희 회원은 아이들이 살아갈 땅에서 반인도적 실험을 하고 있는 미군의 만행에 분노하 고 있었다.

본 : 안녕하세요. 먼저 전국의 회원들에게 자

곳인 것 같나요?

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최 : 직장이 분당에 있어서 대중교통을 이용 최명희(이하 최) :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 용산

하기 쉬운 지역을 신혼집으로 고르다 보니 용

효창동에 살고 있는 예찬이, 예준이 엄마 최명

산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역시나 저도 결

희라고 합니다. 전라도 광주에서 시집와 용산

혼하기 전엔 용산하면 미군기지, 철거민사태

에서 자리 잡고 산지 4년차입니다. 서울지역

등등을 떠올렸지요.

청년회 새바람 용산지회 회원이기도 하구요.

살아보니 용산이 어떤 곳이냐구요? 흠..그냥 생각나는대로 말씀드리면 먼저 교통이 편리

본 : 말씀해 주신 것처럼, 용산에 살고 있으시

한 곳이에요. 실제로 서울 토박이인 저희 남

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대부분 용산하면 미군

편이 말하길 서울 어느 곳을 가더라도 가까운,

기지가 떠오르거나, 용산 철거민 사태가 떠오

딱 서울 교통의 요지라고 하더라구요. 그러니

르지 않을까 싶은데요, 살아보니 용산은 어떤

까 서울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리고 95


우리가 미래다

빈부격차가 심한 곳입니다. 잘사는 사람들은

참, 그리고 괴물같은 곳이에요. 무슨 말이냐

무지하게 잘 살고 어려운 사람들은 정말 허름

구요? 도시 한복판에 군사기지가 있잖아요.

한, 서울에 이런 곳이 있나 싶은 생각이 드는

그것도 우리는 전혀 알 수 없는, 관심을 가져

곳에 사시는 그런 동네지요. 집값이 정말 비싸

서도 안 되는, 알려지지 않은, 무슨 일이 벌어

더라구요. 저희도 보금자리 마련하기가 참 힘

지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무슨 영화 속 이야

들었어요.

기 같지 않으세요? 본 : 미군기지가 있다는 것을 피부로 직접 느 낄 때가 있나요? 최 : 당연하죠. 가는 곳마다 미군기지 게이트, 그 곳을 지키는 경찰관, 철조망, 경고문, 군복 을 입은 미군들, 수많은 외국인들을 쉽게 볼 수 있으니까요. 실제로 미군기지가 용산지역 의 3분의 1정도를 차지한다고 해요. 처음 용산 에 자리 잡았을 때에는 이태원에 가까운 동네 였어요. 그러니 더더욱 실감이 났죠. 여기 효 창동도 마찬가지에요. 동네에서 가까운 거리 에 22개의 게이트가 있으니까요. 본 : 이번 탄저균 문제를 보시면서 어떤 생각 이 드셨나요? 용산에도 미군의 생화학무기 연 구소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어떤 심

96


우리가 미래다

정이셨습니까?

지……. ‘우리 생명은 우리가 지켜야 겠다’ 싶은 생각에 용산지역에서 활동하는 분들과

최 :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두 아들을 키우

탄저균에 대해 공부를 했어요. 얼마나 위험천

는 엄마에요. 정말 깜짝 놀랐죠. 도심 한복판

만한 사건인지 알면 알수록 미군에 대한 분노

에 무시무시한 생화학무기 실험실이 있다는

를 참을 수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두 아들을

데, 더구나 아무도 모르게 그런 반인도적인 실

업고, 손잡고 1인시위도 하고 촛불집회도 나

험이 자행되고 있었다는데 대해 정말 너무나

가고 했던 거지요.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땅이

화가 났죠. 탄저균이 정말 무시무시한 생화학

잖아요. 미군이 우리 땅을 벤젠같은 오염물질

무기더라구요. 비활성화 시킨다고 해도 잘 죽

로 뒤덮은 것도 모자라 생화학무기 실험까지..!

지도 않고 감염 되었을 때는 치사율이 95%에

저는 이 용산 땅에서 내 아이들과 안전하고 행

이른다고 하니 이건

포 그 자체지 요. 그런 사실 이

알려지고

나서 우리 정 부의 반응, 대 처를 좀 보세 요. 제대로 된 진상규명은커 녕, 도무지 뭘 알아내려는 의 지라도

있는

97


우리가 미래다

복하게 살고 싶어요.

들 아실꺼에요. 얼마 전에도 나이어린 미군이 한남동의 숙박시설주인인 두 어르신, 70대 노

본 : 비단 탄저균 문제만이 아니라 용산에 주

부부를 폭행한 사건이 있었죠. 그리고 술에 취

한미군 기지가 있으면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한 미군이 사람을 때려 숨지게 했는데도 징역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회원들에게 소개

4년이라는 가벼운 처벌을 받았더라구요. 정말

를 좀 해 주세요.

어이가 없는 일이죠. 사실 용산 미군기지는 2016년에 반환되어 서

최 : 그간 주한미군의 수많았던 범죄들을 다

울 제1의 가족·생태공원으로 조성될 계획이 었어요. 그런데 기지 주변의 환경을 조사해보 니 다량의 오염물질이 검출되어서 미군기지 내, 그리고 기지 주변의 환경오염을 조사하고 정화하는 작업을 철저히 해야 한다는 목소리 들이 높았죠. 그렇게 오염된 곳이 공원으로 조 성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곳을 뛰어놀 우리 아이들이 어떤 피해를 입게 될지. 그런데 이 번에 탄저균까지. 더구나 탄저균을 비롯한 생 화학무기 실험실이 있는 121후송병원 부지는 반환지역이 아니라고 하더라구요. 그렇다면 이후에도 쭉 그 무시무시하고 위험천만한 실 험을 계속하겠다는 이야기죠. 정말 화가 치밀 어요. 당장에 그 실험실을 폐쇄하고 진상조사 에 들어가야 해요. 그리고 계획대로 주한미군 기지는 철저하게 환경오염조사해서 깨끗한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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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미래다

태로 반환되어야 하구요. 몇 십 년 우리 강산

들 것입니다. 벌써 촛불을 시작한지 1주일이

을 마음대로 차지하고 있던 것도 모자라 온갖

흘렀어요. “혼자 하더라도 한다!” 입니다.

더러운 물질로 오염시키고 우리의 생명을 위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려요. 이건 비단 용산

협하는 세균무기 실험까지!

지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수도 서울 시민들 의 생명에 관한 문제이며 이 한반도의 평화에

본 : 최근 용산미군기지 문제와 관련해 주민

관한 문제입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용산으

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이야기 하

로 오세요. 함께 촛불을 듭시다.

고 있던데요,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으 신가요? 회원들에게 요청하거나 당부하고 싶

본 : 끝으로 전국의 민권연대 회원들에게 한

은 게 있다면요?

마디 해 주시죠.

최 :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희는 이번 탄저

최 : 더운 여름입니다. 투쟁의 열기가 불타오

균 실험실이 완전 폐쇄되고 이 위험천만한 사

르기도 하지만 더위로 우리들의 기운이 딸리

건이 낱낱이 밝혀질 때까지 매일 녹사평역 1

기도 하지요. 하하. 다들 몸보신하시고 지역에

번 출구, 미군기지 3번 게이트 앞에서 촛불을

서 열심히 투쟁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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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을 찾아서

쫄지 마! 대한민국! http://mag-mkyd21.tistory.com/195

장우식 후원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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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을 찾아서

3월에 조상현 후원회원, 4월에는 김정민 후원회원을 인터뷰를 했습니다. 인터뷰 이후, 조 상현 후원회원은 시간 있을 때마다 촛불집회 및 행사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새오름 회원들 과는 더욱 친해졌고, 새바람 회원들과도 친분이 생겼습니다. 새바람 회원 몇몇은 조상현 후 원회원 가구 작업장까지 가서 일손을 돕기도 했답니다. 김정민 후원회원은 이제 후원회원이 아니죠. 6월 초에 새바람에 가입하면서 민권연대 회원 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투쟁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고, 뒤풀이 자리에 도 빠짐없이 출석하여 회원들과 엄청 빠르게 친해지고 있습니다. 후원회원 인터뷰 사업의 성과지 않나 생각을 하는데,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하 하. 세 번째 후원회원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을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도 재밌지 않을 까 싶습니다.

이번엔 누구와 인터뷰 할까 생각하다가 장우

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식 후원회원을 그 대상으로 선정했습니다. 워

몇몇 지인들한테 물어봐도 다들 자세히는 모

낙 유명인이라 다들 알고 있을 거라 생각됩니

른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인터뷰 전에 호구

다. 통합진보당 홍보부장이었고, SNS공간에

조사부터 해야겠구나 생각하면서 술자리로 걸

서는「장C TV」PD이자 기자로 널리 알려져

음을 옮겼습니다. 유명하지만 모르는 것이 더

있죠, 투쟁의 현장에는 어김없이 장우식 후원

많은 이 사람을 파헤쳐볼까요?

회원이 카메라를 들고 영상을 찍고 있는 모습 이 보인답니다.

본 : 장우식 후원회원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

이렇게 유명한 인물인데, 아~~ 막상 인터뷰

무 많습니다. 사전 조사를 하려고 했지만 알아

를 하려고 하니 그것 말고는 장우식 후원회원

낸 것이라고는 ‘노사모’ 활동을 시작으로 운

101


후원회원을 찾아서

동을 접했다는 것 정도입니다. 자기소개와 처

닌가 싶네요.

음 운동을 시작한 계기부터 말씀해주시죠. 본 : 노사모 활동을 했다고도 들었는데요. 장우식(이하 장) : 저는 대구 사람이고요. 나이 는 서른여덟입니다. 구순이 넘으신 할머니와,

장 : 다들 알다시피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어머니, 남동생이 대구에 살고 있고, 저는 서

바람이 불었죠. 물론 저도 인간 노무현에 빠졌

울 생활한지 12년 정도 된 것 같네요.

던 사람 중의 한명이었습니다. 그래서 ‘노사

음...2002년이었죠.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한

모’에 가입해서 활동을 했습니다. 학교를 졸

지 얼마 후에 ‘오노사건’(동계올림픽 쇼트트

업하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고 싶어

랙 종목에서 미국 국가대표였던 오노 선수가

서 간단한 짐만 달랑 꾸려서 서울로 상경 했

헐리우드 액션으로 한국선수의 금메달을 강

습니다. 중앙 ‘노사모’ 상근 활동을 했는데요.

탈해간 사건-편집자)이 일어났죠. 너무 분해

온라인 팀장을 맡았는데 2004년 말까지 활동

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온

을 했습니다. 2004년, 탄핵과 총선을 거치며

라인에 미국제품 불매운동 카페를 만들어서

노사모 상근자로 일한 시간들은 지금 생각해

활동을 했습니다. 카페에서 적극적으로 활동

도 많은 것을 겪고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

하는 고등학생들과 함께 오프라인에서 불매

니다. 음...그 때 무작정 서울로 상경 한 이유는

운동을 열정적으로 했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노무현 정권이 성공할 수 있도록, 거름의 역

그 활동을 하면서 그때까지는 일면식도 없었

할이라도 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고 할까요.

던 대학교 총학생회 성원들과도 교류를 시작 하고 친해졌지요. 그분들은 민주노동당, 통합

본 : 아~그렇군요. 아주 적극적으로 ‘노사모’

진보당 등에서 활동을 해왔고, 지금도 대구에

활동을 하셨군요. 그런데 통합진보당 홍보부

명절 쇠러 내려가면 뭉쳐서 술 한 잔씩 합니

장을 하셨잖아요, 통합진보당 활동을 하게 된

다. 아마 그때가 제 사회운동(?)의 첫발이 아

계기는 어떤 건가요?

102


후원회원을 찾아서

장 : ‘노사모’ 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열린우

잘렸죠. ‘마이클럽’ 깃발을 들고 있던 저를 <

리당 당원이기도 했었죠. 2006년에 열린우리

문화일보>가 기사화했는데, 학교에서 기사를

당이 정당개혁 트레이드 마크로 고수해온 기

보고 권고사직을 요구했죠. 그 뒤로도 촛불집

간당원제가 폐지되는 일이 있었죠. 기간당원

회를 계속 참여하면서 친해진 선배가 있었는

제라고 하면 진성당원제라고 이해하면 됩니

데 그분이 민주노동당에서 일을 같이 한번 해

다. 민주당과 통합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몇몇

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고 제가 동의를 했습

의원들의 요구가 관철된 것인데, 새로운 정치

니다. 당시 면접에서 오병윤 사무총장님에게

에 대한 당원들의 목소리를 묵살하고 짓밟은

“거리에서 힘 있는 진보정당을 원하는 사람

것이죠. 당원들이 분노해서 항의하러 당사 앞

들과 민중에게 다가서고 싶어하는 진보정당

에서 시위를 했는데 당 지도부가 경찰을 불러

을 행복하게 만나게 해주고 싶다.”라고 말씀

서 시설보호요청을 했습니다. 당원들 앞에 당

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민주노동당 홍보부장

지도부가 경찰을 들이댄 거죠. 진보정당에서

생활을 시작했죠.

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죠. 이 사건을 경험하 면서 열린우리당은 몇몇 유명 정치인에 의해

본 :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살다보니까 진보정

서 좌지우지되는 명망가 정당이라는 인식을

당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 가입을 한건가요?

갖게 되었고, 진보정당에 대한 동경과 희망, 로망 같은 것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장 : 그런 것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보다는

열린우리당에 대한 애정을 점점 거두기 시작

진보운동 하는 사람들에게 부채의식이 있었

하다가 대선 끝나고는 완전히 마음을 잡고 탈

죠. 내가 좋아하는 노무현 정부가 한미 FTA

당을 했죠.

를 밀어붙여 졸속으로 체결하고, 여전히 진보 운동(특히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을 요구

그 이후 성서초등학교에서 학교 비정규직 노

하는 운동)하는 사람들은 탄압 받고 구속되는

동자 생활을 하다가 광우병 집회 참석했다고

것을 보면서 내가 작게나마 그 빚을 갚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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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을 만나다

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

장 :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본 영상이 <신림동

런 이유로 2008년도에 민주노동당에 가입했

청년의 김무성 면전 핵직구 “도대체 지난 2년

고, 홍보미디어실 부장을 맡아서 활동을 했습

동안 뭐했습니까!”> 영상인데 조회 수가 16

니다. 통합진보당 창당 이후로도 계속 홍보실

만 명이 넘었습니다( http://youtu.be/D5bf-

에서 일을 했습니다.

SoG7JzI). 그리고 지금까지 블로그 방문자 수 가 30만 명이 넘었습니다. 활동을 시작한지 7

본 : 열린우리당에서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

개월밖에 안되었는데 그 정도면 나름 큰 성과

을 거쳐오면서 진보운동을 하게 되었군요. 멋

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해서 살아

지십니다. 하하. 그럼「장C TV」이야기를 좀

있는 언론이란 무엇인지를 보여줘야지요. 하

해볼까요. 요즘 1인 미디어 활동을 하는 분들

하.

이 온라인상에서 많이 보입니다. 대표적으로 < 미디어몽구>, <아이엠피터>, <길바닥> 이런 분

본 : 그렇군요. 그럼「장C TV」활동을 하면

들이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데요, 당 해

서 가장 인상 깊었던 투쟁은 무엇이었나요?

산이후「장C TV」활동을 시작한 건가요? 장 : 민권연대 후원회원이라서가 아니가 제 장 : 맞습니다. 당 해산직후 이정희 대표가

가 가장 인상 깊었던 투쟁은 민권연대의 광화

4.19 묘역을 참배하였습니다. 그때 영상을 찍

문 광장 풍선투쟁(?)입니다. 반북단체의 대북

은 것을 블로그에 올리면서 첫 시작을 한 것

삐라 살포는 표현의 자유라면서 용인하는 정

입니다.

부 당국에 보란 듯이, 광화문 광장에서 박근혜 정부를 비판하는 풍선을 띄우는 투쟁을 했었

본 : 개인적으로「장C TV」가 영향력이 커졌

죠. 그리고 방미투쟁단이 미국까지 날아가 백

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데요. 영상이나 글 조회

악관 앞에서 풍선을 띄우는 모습도 굉장했습

수가 얼마나 되나요?

니다. 어떠한 사안이 발생했을 때 바로 대응

104


후원회원을 찾아서

한 점, 정부가 하지 못하게 한다고 위축되는

은 투쟁이 있다면요?

것이 아니라 탄압 당하면 쫄지 말고 한방 먹여 줘야 된다는 정신! 그런 것을 민권연대는 가지

장 : 현재는 탄저균 투쟁이 아닌가 싶습니다.

고 있는 것 같습니다. 취재하면서 감동받았던

메르스 때문에 묻힌 감이 있는데요, 지속적으

투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로 여론화 시켜야 될 사안입니다. 민권연대가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요, 저도 1인 미디어 기

본 : 와우! 너무 칭찬해주시는데요. 립서비스

자로서 적극적으로 홍보하겠습니다. 일단 저

가 아닌가요??? 하하.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

도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은 용산 주한미군기

대에 계속 앉아 있는 한 장PD님이 가야할 곳

지 3번 게이트 앞에서 매일 벌어지는 촛불문

이 많을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꼭 취재하고 싶

화제를 생방송이든 편집영상이든 자주 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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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을 찾아서

서 소식을 전해보고 싶습니다. 민권연대 회원

는 자기고백 같습니다. 사실 우리가 적어도 내

들도 촛불문화제 많이 참여해 주세요. 용산 동

란조작 이후로 여론적으로도 그렇지만 ‘저항

지들이 서울의 다른 지역 동지들을 많이 기다

의 표현’ 자체가 많이 쪼그라든 것 같아요. 운

리더라구요.

동가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쫄아있을 때 우리가 쫄지 않고 저항하는 것이

본 : 앞으로 계획을 말씀해주시겠어요.

바로 운동가의 기본 덕목입니다. 자신이 쫄았 을 때 안 쫀 척 하고 “투쟁! 투쟁! 나가자!” 하

장 : 새로운 진보정당이 건설될 때까지는「장

는 태도로는 위축된 운동 성원들의 공감을 이

C TV」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통합진보당은

끌어낼 수 없습니다. “나도 동지들과 같이 쫄

해산됐지만 여전히 통합진보당 홍보부장의 역

고 위축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정한다. 그

할을 계속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러니 지금부터 안 쫄고 투쟁할 수 있는 방법

것이「장C TV」를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을 같이 찾아보자” 라는 태도로 도움을 청해

재정 안정화를 위해서 조만간 후원계좌를 개

야 진정으로 뭉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설하려고 합니다. 민권연대 회원들의 많은 관

죠. 저는 박영재 동지 3주기 추모식에서 동지

심과 지지, 그리고 무엇보다 입금을 부탁드리

들이 그동안 쫄고 위축되었던 자신의 모습에

겠습니다. 하하.

대한 고백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쫄지 않았던 박영재 동지에 대한 이야기가 동지들 입에서

본 : 마지막으로 민권연대 회원들에게 해주고

나오는 순간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자기

싶은 말이 있다면요.

고백에서 나오는 뭉침이 기본이 되어야 공안 탄압에 구성원 하나하나가 쫄지 않고 당당하

장 : 통합진보당이 해산된 지금, 우리가 다시

게 대처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운동가들이

진보정치를 시작하기 위하여 가장 먼저 해야

위축되고 쫄고 숨어드는 만큼 이 사회는 후퇴

할 것은 “사실 내가 그동안 좀 쫄았었다.” 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혜로운 대처’ ‘현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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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을 찾아서

처사’ 뭐 예를 들면 이런 언어로 ‘쫄고있는 자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었던 장우식 후원회원.

신’을 포장하지는 맙시다. 쫄아있는 자신을 동

물론 짧은 시간에 그 사람을 얼마나 깊이 있게

지들에게 솔직하게 고백합시다. 우리는 모든

알 수 있겠냐만은 내가 느낀 그대로를 표현하

민중이 쫄고 있을 때 모든 불이익을 각오하고

자면...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열의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하는 운동가이고, 시절이

와 열정적인 넘치는 사람, 낙천적인 사람. 이

엄혹해지면 엄혹해질수록, 정권이 악독해지면

렇게 좋은 사람과 친해지고 싶지 않으신가요?

악독해질수록 ‘쫄지 않는 것 그 자체’ 가 가장 위대한 투쟁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니

***

면 탄압을 뚫고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세 력들이 없습니다. 다들 ‘헌법에 갇힌 진보’가 되고 말았습니다. 옛날 말로 ‘전향서’를 쓰면 서 쫄아버렸지요. 이젠 정말 옛 통합진보당 동 지들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쫄지 맙시다.

♣ 장우식 후원회원의 추천도서

***

• 책 제목 : 「제종철 평전」 • 추천 이유 : 운동가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

이번 인터뷰도 역시나 즐겁고 의미 있는 시간

는가에서부터, 우리가 지금 어떤 정신으로 어

이었습니다. 한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 참으로

떤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무슨 투쟁을 해야

재미있기도 하면서 의미 있는 일 같습니다. 인

하는가를 시사해주고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

터뷰를 하고 나면 그 사람에 대해서 더 많이

니다.

이해할 수 있게 돼서 참 좋습니다. 후원회원 인터뷰가 이런 맛이 있다니까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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