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월간
발행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민권연대) 발행일 2015년 6월 1일 (16호) 블로그 http://mag-mkyd21.tistory.com 문의 mag.mkyd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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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동아시아 칼럼/한미관계사 6.15공동선언 15돌
■6.15공동선언, 15년이 지난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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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난 돌파, 남북경제협력이 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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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공동선언은 어떻게 탄생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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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정 사령관 하지와 인물로 본 미 군정기
예술, 그 본질적 가치
■가난한 사람들의 꿈을 그린 디에고 리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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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무기 스승을 만나다
■북한, 탄도미사일 잠수함 보유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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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쓰는 경제이슈
■국민연금에 대한 공포감 조성하는 무책임한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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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민주화운동이 필요해” 민주주의국민행동 김종철 대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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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미래다
■20대 민지애 회원의 눈에 비친 민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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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의 역습
<편집자의 글> 분단 70년, 광복 70년인 올해, 여느 때보다 우리 민족의 통일에 큰 진전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큽니다. 통일 의 이정표라고 하는 6.15공동선언이 발표 된지도 15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습니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 들어와서 남북 간 교류는 꽉 막혀있고, 6.15공동선언은 제 대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정부는 남북교류를 가로막고 있는 5.24조치를 그대로 유지해 오고 있고, 시기마다 남 북관계 개선의 발목을 잡아온 대북전단 살포를 막을 의지가 없어 보입니다. 통일준비위원회 내에서 흡수통일 이 야기가 나와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습니다. 한편 박근혜 정부는 민간에서 추진하려는 통일행사에까지 개입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전 민족적 통일행 사를 단순한 이벤트성, 전시성 행사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전시성 행사로 현재의 정권 위기를 모면하 고, 정통성을 과시하고 싶은가 봅니다. 이번 호 <특집기획>에서는 6.15공동선언 15돌과 관련된 글들을 실었습니다. 6.15공동선언이 발표되고 15년이 흐 른 지금, 6.15공동선언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정치, 경제적인 측면에서 되짚어 봤습니다. 6.15공동선언이 나오게 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교훈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6.15공동선언은 단순히 정치권이 협상을 잘 해서 나온 산물이 아니었습니다. 민간 통일운동 세력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있었기에 6.15공동선언도 나올 수 있었습니다. 6.15공동선언의 의의를 다시 한 번 되새기고, 역사적 교훈 을 찾아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남, 북, 해외가 하나 된 마음으로 통일을 한층 앞당길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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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공동선언 전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숭고한 뜻에 따라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 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평양에서 역사적인 상봉을 하였으 며 정상회담을 가졌다. 남북 정상들은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열린 이번 상봉과 회담이 서로 이해를 증진시키고 남북관계를 발 전시키며 평화통일을 실현하는데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하고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2.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 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3.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장기수 문제를 해결하 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4.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 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5. 남과 북은 이상과 같은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빠른 시일 안에 당국사이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도록 정중히 초청하였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특집기획
6.15공동선언 15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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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공동선언, 15년이 지난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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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획
6.15공동선언 발표 15주년을 맞아 남·북·해
었겠는가.
외 민간단체들이 준비하던 기념행사가 8.15공 동행사 장소 문제로 불명확해졌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자주’를 합의한 그 날 에, 그것도 2008년 이후 첫 남북공동행사가 열
물론 8.15행사가 문제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리는 날, 북측 대표단을 만나 남북관계 발전을
6.15행사 합의가 나오자마자 서해에서 해군함
진지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날에 미국을 가겠
정의 영해침범 시비가 일고, 북한의 인민무력
다고 하였다. 이는 노골적으로 6.15공동선언을
부장 처형설이 돌더니 급기야 박근혜 대통령이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6월 15일에 미국을 가겠다고 발표하였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6.15민족공동행사를 달갑지
15년 전, 남과 북의 정상이 6.15공동선언에 합
않게 생각하는 세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의하면서 통일의 이정표를 세웠다. 그러나 이 명박, 박근혜 정부 8년 동안 6.15공동선언은
6.15공동선언의 1항을 다시 읽어보자.
이행되지 못하였고 그 정신은 온데간데없이 사 라져버렸다.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 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
미국의 영향력이 급격히 축소되고, 중국과 러
해 나가기로 하였다.”
시아의 영향력이 갈수록 확대되는 한복판에 있 는 한반도.
남북 정상이 역사상 처음으로 만나 합의한 선 언의 첫 항이다. 남북이 외부 간섭에 끌려 다니
미국은 중국, 러시아를 견제하고 자신의 영향
지 않고 자기 판단과 힘으로 통일을 하겠다고
력을 유지하기 위해 한국에 사드(THAAD)를 배
하였다. 얼마나 중요하면 이 내용을 첫 항에 넣
치하려 하고 있다. 일본은 집단적 자위권을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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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공동선언 15돌
포하고 군국주의를 부활시키고 있다. 중국은
데 이를 군비경쟁으로 대응해서는 답이 나오지
아시아에서 달러 패권을 밀어내기 위해 아시아
않는다. 오로지 일관성 있는 대화를 통해 남북
인프라투자은행(AIIB)을 창립했고, 러시아는 군
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 또한 민간교류를 가
사력을 끊임없이 확대하고 있다.
로막고 한국 기업인들을 옥죄는 5.24조치를 해 제해야 한다. 남북대화를 방해하는 미국의 간
이러한 주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우리 민족
섭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이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는 길은 6.15공동선 언을 이행해 통일을 실현하는 데에 있다.
물론 이런 것들을 박근혜 정부에게 기대하기는 어렵다. 정부가 하지 않으면 국민이 나서야 한
6.15공동선언 이행을 위해서는 박근혜 정부의
다. 6.15공동선언 15주년을 뜻 깊게 보낼 수 있
대북정책을 근본적으로 수정해야 한다. 북한을
는 길이 여기 있다.▒
적대시하면서 남북관계를 발전시킬 수는 없다. 최근 북한이 속속 새로운 전략무기를 선보이는 7
특집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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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난 돌파, 남북경제협력이 최선
잘못된 처방 고집하는 박근혜
을 이루는 경제로 바꾸겠다던 박대통령은 온데 간데없이 사라졌다.
박근혜 정부가 경제난의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박 대통령이 2012년 대선 당시 한국경제
구조적인 문제에는 구조적인 처방, 전향적인
를 구조적으로 혁신하겠다며 내놓은 ‘창조경
처방이 필요하다. 하지만 박대통령의 처방은
제’와 ‘경제민주화’는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
정 반대다. 미국이 주도하는 TPP, 한중FTA 등
다. 남북경제협력 역시 마찬가지다. 박 대통령
각종 무역협정을 지속적으로 확대하는 한편,
의 경직된 대북접근으로 단 한 발자국도 전진
환율을 올려 수출기업의 가격경쟁력 확보에 주
하지 못하고 있다. 산업 구조 혁신으로 수출에
력하고 있다. ‘세일즈 외교’를 명분으로 국내 현
목매달고 있는 한국경제를 내수와 수출이 균형
안을 외면한 채 ‘보여주기 식 해외 순방’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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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공동선언 15돌
자료 : 연합뉴스
기가 일쑤다. 한마디로 구시대적인 ‘수출 지상
수출 장려하면 국민 삶은 도리어 망가져
주의’를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구 조 개혁은커녕 오히려 수명을 다한 한국경제의
수출에 편향된 정책은 일부 수출재벌의 숨통을
대외의존 구조가 더 강화된다. 이를 자세히 살
틔워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국민 대부분의 삶
펴보자.
을 더 피폐하게 만든다. 9
특집기획
재인용 : 헤럴드경제
수출 물량만 늘리기 위해 몰두하는 정부는 인
는 물건 값이 오르니 결과적으로 소득이 줄어
위적으로 환율을 높이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든 것이나 마찬가지다. 여기에 정부가 가격 경
박근혜 정부도 마찬가지다. 환율이 높아지면
쟁을 핑계로 노동자들의 임금 상승을 계속 방
수출하는 상품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싸지므로
해하기 때문에, 수출 이익 중에서 기업의 몫은
가격 경쟁력이 생기는 동시에 달러를 원화로
상대적으로 늘어나는 반면 노동자들의 몫은 줄
환전할 때 더 많은 원화를 받을 수 있기 때문
어든다.
이다. 이는 수출기업 입장에서는 두 손 들고 환 영할 일이다.
이처럼 수출 장려 정책이 재벌은 살찌우는 대
반면 환율이 높아지면 수입 물가가 오르므로
신 국민들의 삶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국민들
일반 국민들의 실질적인 소득은 줄어드는 효
의 소비에 의존하는 영세 자영업자들, 서비스
과를 가져 온다. 월급은 그대로인데 살 수 있
업 종사자들의 사정은 더 악화된다. 한국 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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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공동선언 15돌
업자들의 현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수출 부진이 단기적 현 상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는 사
이 와중에 수출길이 막혀버린다면 어떻게 될
실이다. 국책연구원인 산업연구원은 5월 19일
까. 상상하기 싫은 ‘실업대란’, ‘폐업대란’이 다
‘수출 둔화, 구조적 현상인가’ 보고서를 통해
가오리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수출재
“2011~2014년 연평균 수출증가율(통관 기
벌이 위기 대응을 위해 노동자들부터 해고할
준)이 1%로 1970년 통계집계 이후 가장 낮았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 대량 해고는 시차를
다”며 “상당 부분 구조적 현상에 의한 것으로
두고 대규모 자영업자 폐업으로 이어진다. 이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미 우리는 IMF 외환위기를 통해 이를 경험한 적이 있다.
보통 국책연구기관들은 경제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해왔음을 볼 때, 이 같은 경고는 허투루 볼
“구조적인 수출 불황”, 악순환에 빠진
일이 아니다. 실제로 재벌이 시장 개척에 유
한국경제
리하다는 이유로 해외 직접투자를 선호하는데 다, 주력 수출 대상국 중 하나인 중국 기업들의
그런데 문제는 이 같은 우려가 점차 현실이 되
기술력이 한국의 턱밑까지 쫓아왔기 때문이다.
고 있다는 데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1월
여기에 세계 경제 부진으로 무역량까지 줄어들
부터 시작된 수출 감소세가 넉 달 새 빠르게 악
자 한국 수출이 타격을 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화되고 있다. 특히 한국의 수출 주력제품인 가
운명이 되었다.
전이나 자동차도 수출이 감소했다. 수출을 늘 리겠다며 노동자들의 임금을 억제해 온 탓에
박근혜 정부는 올해 수출이 눈에 띄게 줄어들
내수가 얼어붙은 한국 경제에, 이제 유일하게
기 시작하자, 4월경 단기수출 대책을 발표한 데
남은 성장 동력인 수출마저 꺾이고 있는 것이
이어 6월에 종합 대책을 내놓을 예정이라 한다.
다.
그런데 정부가 당황한 나머지 수출 장려 정책 11
특집기획
을 내놓으면 내놓을수록, 나라 경제 자체가 회
게 전가하고 있다. 경제위기로 기업들의 이윤
복될 수 없는 불황의 악순환 고리에 빠져들게
이 낮아지자, 정규직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대
된다. 한국처럼 재벌이 빵집도 차리고 자전거
신 비정규직 노동자를 채워 넣어 노동 비용을
점포에 고물상까지 차리는 비정상적인 나라에
절감하자는 것이 재벌과 박대통령의 처방이다.
서는 재벌이 성장할수록 나머지 중소기업과 노 동자들, 영세자영업자들의 설 자리는 더욱 없
바로 지금 남북경제협력을 해야 하는 이유
어지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 이와 더불어 노동시장을 “개혁”하
한국 경제에 서서히 다가오는 파국의 순간을
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앞으로 본격화 될 수출
피할 수 있는 시간은 우리에게 그리 많이 남아
위기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재벌의 요
있지 않다. 지금이라도 전향적인 대책, 근본적
구를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다. 이를 위해 박대
인 대책을 실행해 옮겨야할 때다.
통령은 마치 지금 위기의 원인을 노동자 탓으
그러자면 남북경제협력을 통해 통일경제를 실
로 돌리며, 경제위기의 고통을 일반 국민들에
현하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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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공동선언 15돌
남북경제협력은 몇 가지 이유에서 다른 나라
고 보도했다. 그 외 철광석과 마그네사이트 등
와의 일반적인 경제협력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현대 산업의 필수적 광물자원 역시 세계적 규 모의 노천 광산 지대에 분포되어 있다. 땅을 파
먼저, 남북경제협력은 한국 경제의 대외의존도
고 들어가지 않고 굴삭기로 퍼 담아 제련하면
를 획기적으로 줄여줄 수 있는 대안이다. 이미
되는 자원이 무진장 있는 것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한국이 대부분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지하자원과 에너지 자원이 북한
머나먼 중남미나 아프리카 대륙에 매장된 불확
에 무진장 매장되어 투자의 손길을 기다리고
실한 자원에 투자하는 대신, 이미 가치가 확인
있다. 남북협력을 통한 북한지하자원 활용은
되고 지리적으로 가까운 북한의 지하자원에 투
한국경제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는 불안정한
자하는 것은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몇
원자재 수입 구조를 개선할 수 있고, 북한 역시
배는 가치 있는 투자가 될 것이다.
채취산업 활성화를 계기로 경제 전반에 큰 활 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다음으로, 남북경제협력은 중소기업과 노동자 를 살릴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한다. 615
470억 배럴 내지 710억 배럴에 달한다는 북한
남북공동선언이 낳은 옥동자로 표현되는 개성
의 석유 매장량은 중동 산유국 리비아의 372억
공단이 이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배럴을 훌쩍 뛰어넘는 막대한 양이다. 21세기
개성공단은 군사분계선 이남의 경제에 미치는
산업 필수품인 “희토류” 매장량도 어마어마하
파급력이 높아 중소기업의 활성화에 기여하는
다. 외교전문지 ‘더디플로매트’는 2014년 1월
바가 크다는 점이 확인되기도 했다. 2012년 민
22일 영국계 사모펀드 SRE미네랄스의 발표를
주통합당 심재권 의원실 조사 결과에 의하면,
인용, 세계 희토류 매장량의 2배에 이르는 2억
당시 123개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은 남측 협력
1600만톤이 북한에 묻혀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업체가 약 6,000여개에 달하고 이들 사이의 거 13
특집기획
래규모만 연평균 48억 달러나 되었다. 취업에
개성공단과 같이 남북 정부가 주도하는 개발을
대한 파급 효과도 상당했는데, 개성공단 입주
통해 중소기업을 정책적으로 육성한다면, 남북
기업들의 북측 근로자가 1만 명 늘어날 때 개
을 아우르는 내수경제가 확대되는 동시에 높은
성공단과 연계를 맺고 있는 남측 기업의 일자
고용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
리도 5천 명 정도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4년 현재 5만 여명의 북측 근로자가 근무
가장 확실한 출구, 남북경제협력
하고 있으니, 남측 기업의 일자리도 25,000개 정도 늘어났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4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남북경제
6.15공동선언 15돌
협력이 민족 내부에서 벌어지는 협력이라는 것 이다.
물론 FTA를 체결하면 경우에 따라 상대방 국 가에게 이른바 “최혜국 대우”라는 지위를 얻어
남북기본합의서에 따르면, 남북은 분단을 극복
유리한 조건에서 무역거래를 할 수 있다. 하지
하고 통일을 지향해 나가는 특수한 관계다. 따
만 “최혜국 대우”가 “민족내부거래” 조건에 비
라서 남북경제협력은 다른 나라와의 FTA 등 무
할 바는 못 된다. 게다가 한미FTA 등의 사례에
역협정을 통한 대외경제협력과는 달리 서로에
서 보듯 한국은 일부 제조업 수출을 늘리기 위
게 특혜를 베풀 수 있다. 이미 개성공단이나 금
해 농업이나 지적재산권 분야 등 자신의 경제
강산관광 사업에서 경험했던 바와 같이, 북한
적 이권을 강화하려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은 동포인 한국 기업들을 상대로 독점적 사업
야 했다. 기존 무역질서 속에서는 이처럼 ‘주
권한과 저렴한 노동력 등 각종 혜택을 제공해
고받기식’ 협상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원치
왔다. 남북 사이의 교역 역시 국가 간 거래가 아
않는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니라 “민족내부거래”로 인식되어, 상품이나 서 비스의 수출입에서 발생하는 관세도 전혀 없
비록 남북경협이 정치군사적인 이유로 우여곡
다. 이러한 민족 협력의 특성 때문에 개성공단
절을 겪고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이는 박근
에 투자한 중소기업들은 남북관계가 우여곡절
혜 정부가 6.15 공동선언을 확고하게 이행해
을 겪고 신규 투자가 가로막히는 등 온갖 악조
나간다면 얼마든지 해소될 수 있는 문제다. 결
건 속에서도 사업장을 유지, 운영하기 위해 노
국 남북경제협력은 한국 경제에 돌파구를 열어
력하고 있다. “어느 나라 어느 누구도 동포보다
줄 최선의 선택지다. 박근혜 정부가 대북정책
소중할 수 없다”는 진리가 경제영역에서도 그대
을 전향적으로 전환해 6.15공동선언 이행에 나
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설 수 있도록 우리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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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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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공동선언은 어떻게 탄생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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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공동선언 15돌
오는 6월 15일은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의 정상
이다.
이 만나 6.15 공동선언을 발표한지 15년이 되 는 날이다. 15년 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
1990년대 말, 북한은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
방위원장이 서로 손을 맞잡던 순간 전국 곳곳
리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사회주의권 붕괴로
에서 환호성을 지르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인한 경제난과 극심한 자연재해로 인한 에너지 난과 식량난이 그것이다. 한국 정부와 미국 정
전 민족에게 감동을 안겨주었던 6.15 공동선언
부는 북한이 곧 붕괴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북
은 통일의 이정표라고 할 수 있다. 6.15공동선
한은 빠르면 3일 안에 또는 3개월 안에, 늦어도
언은 “우리민족끼리”라는 통일의 원칙을 밝혔
3년 안에 무너질 것이라는 333이론이 당시 유
고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연합제 안의 공통성을
행했다.
인정하는 통일의 방식을 합의했다. 사실 한국과 미국은 북한에게 지원을 해야 할 그리고 6.15 공동선언은 대화와 협력, 평화의
입장이었다. 1994년 10월, 북한과 미국은 제네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6.15 공동선언 이
바합의란 것을 체결한다. 북한이 핵개발을 중단
후 정부 간에는 수많은 장관급회담과 군사부문
하고 핵시설을 동결하는 대신 미국이 북한에 경
회담 등이 열렸고 민간에서도 수많은 교류사업
수로를 지어주고 경수로가 지어지기 전까지 중
이 펼쳐졌다.
유를 연간 20만 톤씩 공급하겠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중요한 우리 민족의 통일강령 6.15 공
그러나 북한이 곧 무너질 것이라고 판단했던 미
동선언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많은 난
국은 북한과의 약속을 잘 지키지 않았다. 제네
관을 극복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결과물
바합의 서명 후 6개월 안에 체결되어야 할 경수 17
특집기획
북한의 광명성 1호 발사
로 제공계약은 1년이 넘은 뒤인 1995년 12월
3년 안에 북한이 무너질 것으로 예상했던 미국
이 돼서야 확정되었고, 미 의회의 예산승인 역
은 북한이 무너지지 않자 정책변화를 꾀하게 된
시 공화당의 반대로 지연되었다. 오히려 한국과
다. 북한이 무너지지 않을 상황에 대비할 필요
미국은 북한을 고립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 국가적 위기가 온지 3년이 된
그리고 미국의 정책변화를 강력하게 추진하게
1997년에도 북한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리고
만든 사건이 벌어진다. 북한이 1998년 8월 31
불안하다던 체제도 건재하다는 것이 드러나기
일 인공위성 광명성 1호를 발사한 것이다(미국
시작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97년 조선노
등 국제사회는 성공이 아니라 실패했다고 평
동당 총비서 자리에 올라 당과 국가, 군대를 안
가). 8월 초부터 평양 서북방 금창리에 핵시설
정적으로 이끌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을 건설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긴장이 고조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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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공동선언 15돌
고 있던 와중에 벌어진 일이다.
이런 상황이 반전된 것은 1999년 5월 금창리 지하시설이 텅 빈 동굴로 확인되면서 부터였다.
인공위성 발사는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이 직접 금창리 동굴에 가본 결과 그 곳은
북한의 경우 누구 하나 도와주는 국가가 없었기
텅 빈 곳이었고, 미국이 의심했던 것과 같은 핵
때문에 인공위성 제작과 우주발사체 제작은 순
시설은 없었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전히 북한 자체 기술만 사용해야 했다. 북한이 자체 기술로 (성공여부를 떠나) 인공위성을 날
금창리 문제의 타결과 함께 ‘페리보고서’의 발
려 보낸 것은 북한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있다는
표도 북미관계 긴장 완화에 영향을 끼쳤다. 대
의미였으며, 북한이 붕괴될 것이라는 미국의 전
북조정관이었던 페리는 평양을 비롯한 동북아
망이 틀릴 수 있다는 결정적인 신호였다. 특히
를 방문하고,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인정하고
군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북한이 대륙간탄도
북한과의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
미사일(ICBM)의 개발 가능성을 알리는 신호탄
를 1999년 10월 발표했다. 북한은 붕괴하지 않
이기도 했다.
으니 붕괴를 전제로 한 미국의 정책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금창리 문제와 인공위성 발사로 북미 간의 긴박 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미국은 5027-98이라는
이후 북한과 미국은 제네바합의의 지속적인 이
전쟁계획을 공개했으며 북한을 군사적으로 압
행과 미사일발사 실험 유예 등을 매개로 북미관
박했다. 북한 역시 1998년 12월 조선인민군 대
계정상화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게 된다. 그리고
변인 담화를 통해 “인민 군대의 타격에는 한계가
2000년 말 ‘북미공동코뮤니케’를 발표하며 북
없다”고 강경하게 맞섰다.
미관계정상화를 합의하는 수준까지 논의가 이 19
특집기획
루어졌다. 나아가 클린턴 대통령의 평양방문까
김대중 정부는 강경일변도였던 김영삼 정부의
지 논의가 되었다.
대북정책을 비판하며 대북화해협력정책, 이른 바 “햇볕정책”을 제시했다. 김대중 정부는 북한
결국 북한이 붕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한
을 향해 흡수통일을 시도하지 않고 화해와 협력
미국이 북한과의 대화를 추진하게 되었고 이 결
을 추진한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전달했다.
과 한반도에 대화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었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는 민간급 교류사업을 확대 한국에서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것도 6.15 공동
해 나갔다. 1998년 6월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
선언이 만들어지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김대중
장이 소떼를 몰고 방북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
정부가 수립되면서 남북 모두 남북관계의 개선
켰고, 그해 11월에는 금강산관광사업이 시작되
과 대화를 추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었다. 1999년 8월에는 남북노동자축구대회가 평양에서 열렸다.
김영삼 정부는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의 변고 로 인해 남북정상회담이 무산되자 북한에 대한
이런 성과를 바탕에 두고 김대중 대통령은
강경정책을 펼치며 북한 붕괴에 매달렸다. 그로
2000년 3월,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강연에서
인해 남북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으며 남북대
북한에게 대북 경제협력 및 지원, 평화정착, 이
화는 단절되었다. 실제로 전두환 정부, 노태우
산가족 문제해결 및 당국 간 대화 등을 제안했
정부 때도 간헐적으로 이루어졌던 남북대화는
다. 남북정상회담의 필요성을 북한 측에 전달하
1994년 이후 김영삼 대통령의 임기가 끝날 때
려고 한 것이다.
까지 재개되지 못했다.
20
6.15공동선언 15돌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소떼 방북
이런 지속적인 평화통일 행보는 김대중 대통령
의 유훈임을 강조해 나갔다.
이 가진 통일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일찍이 ‘3단계 통일
이렇게 남북 지도부가 남북대화에 적극적이다
론’이라는 통일방안을 세우고 통일을 적극적으
보니 정상회담이 성사될 수 있는 분위기와 여건
로 주장해 왔다. 만약 김대중 정부가 아니라 다
이 만들어진 것이다.
른 정부였다면 어땠을까? 황금 같은 기회를 놓 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끊임없이 펼 쳐진 민간의 통일투쟁이다.
북한도 고난의 행군이 거의 마무리되던 90년 대 후반 조국통일문제를 중요한 문제로 제기했
1989년 문익환 목사와 대학생 임수경의 방북은
다. 1997년 북한의 신년 공동사설에서는 <조국
전 국민에게 “통일”이라는 화두를 던져 주었다.
통일 3대헌장>(조국통일 3대원칙, 전민족대단
이를 계기로 민간통일운동 진영은 통일의 주체
결 10대 강령,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는 남과 북 해외동포라는 3자연대 정신을 세우
을 발표, 조국통일의 원칙을 제시했다. 그리고
고, 90년대 내내 남북해외가 함께하는 범민족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조국통일이 김일성 주석
대회 성사를 위해 노력했다. 21
특집기획
노태우-김영삼으로 내려오는 보수정권은 이런
해 노력하던 민간통일운동 진영은 1999년 8월
통일행사를 불허했다. 특히 1996년 연세대에서
15일 서울대에서 수만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통
열린 범민족대회에서는 전무후무한 탄압을 자
일행사를 치러내는 등 끊임없이 3자연대의 원
행하여 5848명의 연행자가 발생하고 462명이
칙을 지키고 통일행사를 추진했다.
나 구속시키는 무자비한 폭압을 저질렀다. 이런 민간에서의 통일투쟁이 없었다면 6.15 공 그러나 민간통일운동은 이러한 탄압을 뚫고 나
동선언 전문에 나오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
갔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범민족대회 성사를 위
원하는 온 겨레의 숭고한 뜻에 따라”라는 문구는
22
6.15공동선언 15돌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6.15 공동선언을 지켜 나가자라는 의미에서 “지켜요! 민족의 약속!”이라는 노래를
살펴보았듯이 6.15공동선언은 북한이 90년대
소개해드릴까 한다. 2003년에 나온 노래지만
중반부터 시작되었던 고난의 행군을 극복하면
여전히 의미있는 노래라 생각된다.
서 그 싹이 자라났다. 북한이 무너지지 않을 것 이라고 판단한 미국은 북한과의 관계개선 및 대 화를 시도했다. 이와 비슷한 시기 한국에서는
지켜요! 민족의 약속!
김대중 정부가 등장해 북한과의 대화를 적극적
(글 : 강문주, 곡 : 송명순, 노래 : 가극단 미래)
으로 추진했다. 이 두 가지가 맞물려 남과 북이 정상회담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 것이다.
반백년 갈라져 살아온 세월을
여기에 광폭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남북해외
누가 대신할까요 그 누가 책임질까요?
가 힘을 합쳐 통일을 해야한다는 원칙을 굳건히
*우리 민족끼리 약속한 6.15 공동선언
지킨 민중들의 투쟁이 결합되며 6.15 공동선언
남의 말이 아닌 우리 민족을 믿어야죠
이라는 통일의 이정표가 만들어졌다.
우리가 지켜요 흔들리지 말고 공동선언 민족의 약속 지켜나가요
6.15 공동선언 발표 15년이 지난 지금, 동북아
**우리가 지켜요 포기하지 말고
시아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리 앞에는
우리끼리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요
제2의 6.15 시대를 열어나가야 한다는 과제가 있다. 6.15 공동선언의 발표에는 민중들의 치열 한 통일투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교훈 을 찾아야 할 것이다.
23
세상의 모든 무기
http://mag-mkyd21.tistory.com/179
북한, 탄도미사일 잠수함 보유했나
24
세상의 모든 무기
북한이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SLBM) 시험
랑스는 트리옹팡급 잠수함을 운용하고 있다.
에 성공하자, SLBM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그
이들 배수량은 16000톤, 12000톤 가량이다.
런데 SLBM은 잠수함에서 발사하느니만큼 잠 수함이 있어야 한다. 이는 마치도 2012년 4
배수량이 18000톤이 넘는 거대한 잠수함은
월 15일, 북한이 차량이동식 대륙간탄도미사
당연히 원자로로 운항되어야 한다. 디젤기관
일(ICBM)을 공개하였을 때 ICBM을 싣고 다닐
으로 작동한다면 거대한 잠수함의 연료소비
차량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가 너무 많아서 얼마 항해하지도 못하고 연료 를 다시 공급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원자로
보수진영은 SLBM은 당연히 탄도미사일을 내
가 들어 있다면 연료는 30년을 주기로 재장전
장할 수 있는 잠수함이 있어야 하는데, 북한의
하면 된다. 원자로에서 만들어낸 전기로 끊임
형편에서 그런 잠수함을 보유하기가 쉽지 않
없이 산소를 공급할 수 있고 바닷물을 담수화
을 것이라고 단정 짓는다.
해서 용수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전략 원자 력 잠수함은 승무원들의 식량만 있으면 사실
ICBM을 싣고 5대양 6대주를 누비는 잠수함
상 무기한 운항을 할 수 있다.
들을 전략원잠(SSBN : Submersible Ship Ballistic missile Nuclear powered)이라고 한
다만 원자력잠수함의 경우는 원자로를 정지시
다. 이를테면 미국, 러시아나 영국, 프랑스는
킬 수가 없다. 원자로를 가동중단 시킨다면 후
모두 전략원잠(SSBN)을 운용한다. 배수량이
쿠시마 원자로처럼 되어버릴 것이다. 원자로 내
18000톤이 넘는 미국 오하이오급 원자력 잠
의 핵분열을 계속 감속시켜야 하므로 원자로를
수함은 미국의 SLBM인 트라이던트-2를 24
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원자력 잠수함은 소
발이나 적재할 수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그
음 면에서 디젤잠수함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리
나라의 핵탄두를 오직 SLBM의 형태로만 보
하다. 디젤잠수함은 엔진자체를 모두 끄고 완전
유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영국은 벵가드급, 프
히 잠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자력잠 25
세상의 모든 무기
수함은 연안바다에서 활동하지 않고 대양의 깊
물론 북한에 배수량이 18000톤에 달하는 초대
은 바다를 운항한다. 어차피 ICBM 발사용인데
형 원자력 잠수함은 알려져 있지 않다. (세월
연안을 다가가서 들킬 바에 깊은 바다 속에 돌
호의 배수량이 7000톤이니 오하이오급 잠수함
아다니는 것이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물론
은 세월호의 2.5배에 달합니다.) 알려진 북한 잠
이를 모든 잠수함 기종에 대입할 수는 없다. 최
수함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로미오급인데 이는
근에는 소음을 방지하는 여러 기술이 개발되었
1800톤 가량의 배수량을 갖추고 있다. 북한은
기 때문이다. 신형잠수함일수록 소음을 줄이는
약 20여척의 로미오급 잠수함을 운용하고 있다
기술이 많이 향상되어 있어 원자력잠수함과 디
고 알려져 있다.
젤잠수함을 일률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신형 잠수함일수록 잠수함의 잠항과 은폐가 더욱 능
그런데 로미오급 잠수함은 외형상 보면 수중
하다고 할 수 있다.
기동에 유리한 눈물방울(tear drop)형이 아니
26
세상의 모든 무기
다. 수중기동을 위주로 하기보다는 수상활동
나 ‘38노스’의 분석에 따르면 잠수함의 전망탑
과 수중활동을 병행하는 형태로 볼 수 있다.
에 발사관을 설치하는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
그러나 최근 ‘38노스’에 따르면 북한이 신형
다. 잠수함의 전망탑은 수직높이가 가장 높은
잠수함에 탄도미사일 발사용 수직발사관의 장
부분이다. 따라서 전망탑에 발사관을 설치하면
착을 시도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1-2기의 ICBM을 탑재할 가능성이 있다.
북한 군사문제 전문가 조지프 버뮤데스는 웹사
북한이 잠수함 탑재 탄도미사일 발사시험에 성
이트 ‘38노스’에 기고한 글에서 2014년 12월
공했다면, 로미오급 잠수함보다는 이 신형 잠수
18일, 촬영된 상업사진에 의하면 함경남도 신
함에 발사관을 내장해 시험했다고 볼 수 있을
포 조선소의 신형 잠수함 전망탑 윗부분에 길
것이다. 제도권에서 이 신형 잠수함이 함경남도
이가 약 4.25m, 폭 이 약 2.25m인 직사각형 구
신포에서 발견되었다고 해서 신포급 잠수함이
멍이 난 모습이 포착되었다고 했다. 그는 2014
라고 부른다.
년 7월에 촬영된 사진에서 잠수함의 같은 부분 이 푸른색 덮개로 덮여 있었다며 잠수함 전망탑
인공위성 사진을 통해 살펴 본 신포급 잠수함은
의 구멍 크기를 고려할 때 “1∼2개의 미사일 수
수중활동에 능한 신형으로 제작되었다. 수중활
직발사관을 장착할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고
동에 능하다는 것은 수상항행보다 수중항행속
주장했다.
도가 더 빠르고 그만큼 잠수능력도 더욱 탁월해 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 신형잠수함은 길이가 65.5m가량이며 배수 량이 1천∼1천500톤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대
디젤잠수함의 경우 최대 50여일까지 항행이 가
체로 이렇게 크지 않은 잠수함에는 탄도미사일
능하다고 한다. 이 경우 신포급 잠수함은 일본
발사관을 탑재할 수 없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
열도를 돌아나와 서태평양 일대에서 미 본토로 27
세상의 모든 무기
자료: 세계일보
ICBM을 발사할 능력을 배제할 수 없다.
앞으로 미국은 북한 잠수함을 포착하기 위해 동-서해 일대에 잠수함 탐지장치를 대폭 늘릴
이는 심각한 문제점을 갖고 있다. 미국은 그동
것으로 판단된다. 디젤잠수함을 잡아내는 것이
안 일본열도를 축으로 한국과 알래스카 일대에
가능한지가 의문인데, 문제는 그 금액이 고스란
미사일 방어기지를 포진시켰다. 그런데 북한의
히 국민들의 피땀 어린 세금이란 점이다.
SLBM이 일본열도를 돌아 나와 미 본토를 조준 하게 되면 미국의 MD는 그대로 무용지물이 되
미국은 앞으로 우리에게 또 어떤 항목의 어떤
고 만다. 이는 곧 미국이 독점하던 핵선제타격
무기를 주문할까?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을 쫓아
권을 북한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다가 한국재정이 휘청거리게 생겼다.▒
28
풀어쓰는 경제이슈
http://mag-mkyd21.tistory.com/183
국민연금에 대한
공포감 조성하는
무책임한 정부
5월 29일 공무원연금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개정안의 핵심은 공무원이 보 험료를 좀 더 내고 덜 받는 형태로 공무원연금을 개정하면서, 국민연금 등의 공적연금을 강화하자는 것이 핵심이다(※ 이 글에서는 국민연금과 관련한 문제만 다룬다. 공무원연 금과 관련한 개정안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다음 링크를 참조. http://me2.do/xQI67azA).
29
풀어쓰는 경제이슈
공무원연금과 공적연금에 대한 논의가 함께
소득대체율 50%란?
이루어진 이유는 정부 측에서 공무원연금이 국민연금 등과의 형평성을 봤을 때 과하다는
국민연금은 노후소득보장을 위한 공적연금이
주장을 했고, 이에 대해 공무원노조 등에서는
다. 퇴직하거나 나이가 들어 소득이 없을 것을
공무원 연금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사
대비해 일정한 소득으로 노후를 보장하는 제
회의 공적연금을 강화해 상향평준화를 해야
도다.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공무원 연금에 대한 논란은 국민연금으로 번져갔다.
당장 자신의 소득에서 국민연금 보험료를 정
그 중 핵심은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을 현행
부가 징수해 가니 일반 국민들 입장에서는 국
40%에서 50%로 올리는 것이다.
민연금에 대한 불신인 큰 것이 사실이다. 하지 만 국민연금은 현재 상황에서 어떤 노후대책
여야는 이번 개정안을 합의하면서 ‘공적연금
수단 보다 유리한 제도인 것만은 맞는 말이다.
강화와 노후빈곤 해소를 위한 특위’를 구성해 소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국민
득대체율 50% 등에 대한 적정성·타당성을
연금의 수익률(= 총 연금수령액/ 총 보험료 납
검증하고, 제반사항을 논의해 실현방안을 마
입액)은 소득과 보험료 납인 기한에 따라 차이
련하기로 했다. 결국 아직 공적연금을 강화하
가 있지만 최대 14.1배에서 최소 3.6배로 나
기 위한 방안이 구체적으로 마련되지 않은 것
타났다. 속된 말로 ‘무조건 남는 장사’다.
이다. 따라서 이후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50%
국민연금은 공적보험이라 가난한 사람일수록
에 대한 논란은 이후에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
낸 보험료보다 더 많이 받도록 설계되어 있다.
다. 30
풀어쓰는 경제이슈
현재 은행에 예금을 하면 수익률이 거의 0%
그렇다면 논란이 되고 있는 ‘소득대체율(현행
에 가깝다. 사 보험사들이 운영하는 개인연금
40%)’은 무엇인가? ‘소득대체율’은 가입기간
은 사람들로부터 돈을 모아 금융상품 등에 투
40년을 기준으로, 일을 할 당시 월평균 소득
자를 해 그 투자수익률에 따라 보험금을 지급
에 비해 얼마의 연금을 수령하는 가를 나타내
한다. 안정적이지 않을뿐더러 수익을 잘 내도
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득대체율이 40%인 상
실질이자율이 1%를 넘기 어렵다. 중간에 해지
황에서 월 소득이 200만원인 노동자 A씨가
를 하면 원금도 돌려받지 못한다.
40년간 국민연금에 가입했다면, 노후에 월 80 만원(200만원×40%)을 받는 것이다. 소득대
국민연금은 물가상승률을 반영해 보험금이 오
체율이 50%로 올라간다면 A씨는 월 100만원
르게 되어있다. 예를 들어 현재의 100만원과
(200만원×50%)을 받게 된다.
1년 후의 100만원은 가치가 다를 것이다. 물 가가 올라 돈의 가치가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위
다. 물가가 1년에 3% 올랐다고 하면 현재 100
금액이 40년을 가입했을 때 받을 수 있는 최
만원은 1년 후의 103만원과 가치가 같아진다.
대치라는 것이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면 40
그러면 100만원 보험금을 받기로 한 사람은 1
년간 국민연금을 가입하고 있는 사람들을 찾
년 후 103만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매년 물가
기란 쉽지 않다. 비정규직이 급격히 늘어나 있
가 오른다고 생각해 보면 그 액수는 크게 불어
고,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 연령대가 빨라지는
난다. 이런 연금보험을 이윤을 추구하는 사보
상황에서 더욱 그러하다. 우리나라 국민연금
험사 입장에서는 내놓기 어렵다.
가입자의 평균 가입기간은 25년이 되지 않는 다. 따라서 실질소득대체율은 20%대 정도밖 31
풀어쓰는 경제이슈
◀자료 : 연합뉴스
에 되지 않는다. 위의 A씨가 국민연금에 25년
부 장관은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50%로 올
간 가입했다면 노후에 50만원(40년:80만원
리려면, 현재 9%인 보험료율을 두 배 수준으
=25년:50만원)을 받게 된다. 노인들이 월50
로 올려야 한다고 밝혔다. 김성우 청와대 홍
만원으로 살수 있냐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보수석은 5월 10일,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소득대체율이 50%로 올라간다면 A씨는 월62
50%로 올리면 2016년 한 해만 34조5000억
만5000원(40년:100만원=25년:62만5000
원의 추가 부담을 국민이 져야 한다고 주장했
원)을 받게 된다.
다. 2014년 보험료 수입이 32조원임을 감안 하면 2016년에 당장 보험료를 2배 인상해야
보험료가 2배로 오른다고?
한다는 것이다.
국민연금의 보험료는 본인 소득의 9%다. 정
보험료를 두 배로 올린다니? 국민들로서는 당
부는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이 50%로 되려면
연히 ‘세금폭탄’을 맞는 것처럼 들린다.
보험료를 18.85%까지, 즉 2배로 올려야 한 다고 이야기 한다. 5월 2일 문형표 보건복지 32
정부가 보험료를 두 배로 올려야 한다는 주장
풀어쓰는 경제이슈
자료 : 연합뉴스
하는 근거는 뭘까? 우리나라는 국민연금법에
고 그 돈을 받아가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 때
의해 2003년부터 5년 주기로 국민연금 재정
문이다. 가입자와 수급자가 비슷해지는 2057
추계 작업을 진행한다. 2013년에 3차 추계작
년을 지나면 국민연금 수급자가 많아져서 기
업이 진행되었다. 이 자료에 따르면 2083년에
금은 소진되어 간다. 현행 9% 보험료율, 소득
17년치의 적립금(국민연금 기금)을 쌓아놓고,
대체율 40%에서는 이 기금이 2060년에 소진
기금고갈 시점을 2100년 이후로 무한 연기하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는 데 필요한 보험료율이 18.85%로 나온다. 여기서 문제는 국민연금 기금을 얼마를 쌓아
그렇다면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 보험료를 올
야 하는가이다.
려서 2083년에 17년치 적립금을 쌓아두어야 하는 것인가? 참고로 17년치 적립금이라고
사람들이 국민연금 보험료를 납부하니 이 돈
하는 것은 보험료를 걷지 않고 17년 동안 연
들이 적립금(국민연금 기금)으로 쌓일 것이다.
금을 지급할 수 있는 돈이 적립되어 있다는 것
처음에는 국민연금 기금은 큰 규모로 쌓인다.
이다. 17년치 적립금이 있다고 17년 뒤에 기
국민연금에 가입해 돈을 내는 사람만 존재하
금이 고갈되는 것도 아니다. 그동안에 보험료 33
풀어쓰는 경제이슈
가 계속 들어오기 때문이다.
금과 같이 세계 경제가 침체의 늪에서 허덕이 고 있고, 실질 이자율이 0%에 가까운 상황에
2015년 2월 기존 그동안 모인 국민연금 기금
서 수익을 위해 투자하려해도 투자할 수 있는
규모는 482조원에 달한다. 우리나라 경제규
곳이 없다.
모(GDP)의 30%가 넘는 수치로 그 비율은 부 동의 세계 1위다.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손
게다가 규모가 클수록 자산을 처분하기도 어
꼽히는 국민연금 기금을 운용하는 일본조차 5
려워진다. 노인들에게 돈을 주려면 주식, 채권
년 치 적립금만 쌓고 있다. 독일은 7~10일 치
등의 자산을 현금으로 바꿔야 한다. 대규모로
적립금만 갖고 연금을 운영한다. 정부 추계에
채권이나 주식을 파는 순간 그 가격은 폭락해
따르면, 기금이 가장 많이 쌓이는 해를 2083
경제에 충격을 주게 될 것이다.
년으로 잡을 경우 기금규모는 GDP의 1.4배나 된다. 이렇게 큰 규모의 기금을 쌓는 건 비정
기금이 0원이 되면 연금을 못 받나?
상적이다. 결국 기금을 이렇게 쌓지 않는다면 소득대체율을 50%로 올리더라도 보험료가 한
그렇더라도 기금이 0원이 되면 문제가 되는
번에 두 배로 오르진 않는다.
것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들 수 있다. 하지만 기금이 고갈된다고 국민연금을 지급받지 못하
기금을 많이 쌓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국
는 일은 없다. 우선 정부가 지급 약속한 것이
민연금 기금은 현금으로 금고에 쌓여 있는 게
므로 어떤 형태로든 지급이 된다.
아니다. 대부분은 주식, 채권, 부동산 등에 투 자 되어 있다. 현금을 보유하는 것보다 조금이
나아가 애시 당초 국민연금은 어느 순간이 오
라도 수익을 올리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
면 기금이 고갈되게 설계가 되어있다. 국민연
34
풀어쓰는 경제이슈
금은 ‘덜 내고 더 받는’ 제도로 되어 있어 언젠
보험료를 조금씩 인상해 적절히 조정을 하면
가는 기금 규모가 줄어든다. 처음에는 스스로
기금이 고갈되는 데 100년은 걸릴 것이라고
낸 돈으로 기금을 쌓고 이후 노령층이 되면 이
한다. 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기금에서 연금을 지급(이를 적립식이라 한다)
“지금부터 100년 전, 우리나라는 어땠나요?
받다가, 어떤 시점에 기금이 고갈되면 그 해
1915년에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였어요. 백
의 젊은 세대가 낸 보험료로 노인을 부양하
성들이 전부 농사짓던 시절이에요. 1915년에
는(이를 부과식이라 한다) 방식으로 이행되도
100년 뒤인 2015년의 대한민국 국민 연금 제
록 설계되었다. 대부분의 나라들도 이렇게 하
도에 대해서 설계한다고 상상해 보세요. 코미
고 있다.
디죠.”(프레시안, 2015.05.15).
물론 지금 당장 기금을 0원으로 만들어도 된
따라서 당장 기금이 고갈되어 국민연금 제도
다는 것은 아니다. 기금이 고갈돼 그 해 젊은
가 무너질 것 같은 공포감을 조성할 것이 아
세대가 낸 돈만을 가지고 그 해 노인을 부양하
니라 이후 사회적 논의를 잘 진척시켜 나가면
려면 젊은 세대들이 지급해야 하는 비용이 급
되는 것이다.
격히 늘어나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지금과 같 이 거대한 기금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
기금을 많이 쌓으면 유리한 세력은?
한 기금규모를 설정하고 보험료를 조금씩 인 상해 후세대들의 부담을 경감시켜 주는 것이
더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국민연금 기금
필요하다.
을 많이 쌓을수록 이득을 보는 집단들이 있
공무원 연금 개혁 실무기구 공동위원장으로
다는 것이다. 외국자본과 재벌대기업들이 그
참여했던 김연명 중앙대학교 교수에 따르면
들이다. 35
풀어쓰는 경제이슈
자료 : 참여연대
외국자본 입장에서는 국민연금 기금이 있어
해 주가를 올려주면 외국자본은 손해 없이 빠
안심하고 한국 주식에 투자해서 이득을 챙겨
질 수 있다.
나갈 수 있다. 국민연금 기금 480조 원 중 국 내 주식에 80조 원 이상이 들어가 있다. 주가
재벌대기업도 마찬가지다. 국민연금 기금의
가 떨어지려고 하면 거대한 국민연금이 주가
주식투자 액 중 85%는 재벌 대기업 주식에
를 떠받쳐 준다. 그 결과 한국 주식시장에서
들어가 있다. 게다가 국민연금공단은 한 번 산
외국자본이 돈을 잃을 확률은 상당히 적다. 국
주식을 웬만해서는 다시 팔지 않는다. 공적연
민연금 기금이 있어 외국자본은 손쉽게 손을
금이다 보니 주식을 많이 매수하더라도 경영
털고 빠질 수도 있다. 외국자본이 주식에서 발
권에 개입하는 등 의결권을 행사하지도 않는
을 빼려 하면 주가는 떨어지게 되어 외국자본
다.
도 손해를 보게 된다. 그런데 거대한 국민연금
정부 역시 국민연금 기금이 크면 혜택을 볼 수
기금이 외국자본이 빠지는 만큼 주식을 매수
있다. 국민연금 기금이 정부가 발행하는 채권
36
풀어쓰는 경제이슈
을 대규모로 사주기 때문에 정부가 빚을 내기
여기에 힘을 집중해야 할 정부가 ‘세금폭탄’ 운
용이해 진다. 정부가 무리하게 추진하는 사업
운하며 국민연금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며 공
을 뒤에서 지원해 주기도 한다. 국정감사에서
적연금을 약화시키려는 것은 직무유기다. 정
밝혀진 바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4대강 사업이
부는 재정난만 들먹일 것이 아니라 노인들을
시작된 2009년부터 이 사업에 참여한 16개
위한 현실적인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
건설사 채권을 매입하기 시작, 2014년 3월까 지 모두 1조9천300억원을 투자했다고 한다. 4대강 사업을 뒷받침 한 것이다. 정부가 기금을 많이 쌓으려 욕심을 내면 낼 수록 국민들의 보험료는 올라갈 수밖에 없다. 우리사회 노인들의 심각한 처지는 더 이상 언 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현재 65세 이상 노 인 중 절반이 빈곤층이며 이 비율은 경제협력 개발기구(OECD) 국가 중 부동의 1위다. 노인 자살률도 1위다. 공적연금에 대한 강화가 절 실하다. 이번에 논란이 된 국민연금의 소득대 체율 상향조정 뿐만 아니라 국민연금에 가입 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대책과 가입 유무에 관계없이 일정 금액을 지급하는 기초 연금도 강화되어야 한다. 37
동아시아 역사칼럼
“여운형, 쪽바리(Jap)로부터 돈을 얼마나 받아먹었지?”
:: 군정 사령관 하지와 인물로 본 미 군정기 http://mag-mkyd21.tistory.com/180
극우적인 미군들이 본 ‘미개한 나라’ 조 선
혹한 지배자로서의 미 군정을 제대로 인식하
미 군정기는 복잡한 인물들과 사건들로 얽혀
미 군정기의 인물들을 살펴보기에 앞서, 미국
있어 한국 근·현대사 중에서도 이해하기가
정부가 해방된 조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
매우 힘든 시기중 하나다. 이런 경우에는 그
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1945년 9월 8
시대를 살았던 상징적인 인물들의 삶을 따라
일 한국에 첫 발을 내딛은 하지 사령관과 7만
가며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2천명의 미 제24군단은 조선에 대해 완전히
다. 특히 최근 들어 뉴라이트 교과서를 중심으
무지한 군인들이었고, 이들의 사고와 행동은
로 미 군정기가 마치 미국이 한국의 민주주의
거의 전적으로 미국 정부의 정책에 의해 결정
를 ‘후견’해 준 시기처럼 그려지고 있는데, 군
되었기 때문이다.
정을 펼친 당사자들의 행적을 살펴보면서 냉 38
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동아시아 역사칼럼
조선에 대한 미국의 시각은 매우 간단명료했
인천항에서 있었던 미군 환영식장 발포사건에
다. 조선에 진주한 미 제24군단이 ‘점령군’임
대한 그의 태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미군 환
을 선포한 순간부터 조선은 미국에게 열등한
영 인파가 대거 몰려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미개국가에 불과했다. 사실 2차 대전 전후 처
겁을 먹은 일본군은 군중을 향해 총을 쏘았다.
리의 원칙대로라면 미국은 ‘우호적인 해방국’이
이 총격으로 2명의 조선인이 사망했다. 문제는
되어야 했다. 그러나 미군이 ‘점령군’의 이름을
이후 하지의 태도다. 그는 발포한 일본군을 치
달고 들어 온데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은 조선
하하며 발포가 정당한 행위였다고 확인해주었
을 일본제국의 일부로서 ‘적대적인 패전국’으로
다. 이 사건은 미 군정이 조선을 어떻게 바라
인식했다. 적대적인 패전국으로 규정되는 것
보고 있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사건이었
과 우호적인 해방국으로 규정되는 것에는 매
고, 미 군정기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인물 중
우 큰 차이가 있다.
하나인 하지는 한국 민중들에게 미운털이 단 단히 박히게 된다.
미 제24군단이 인천항에 도착하자, 조선인 대 표단은 상륙선에 승선해 조선 각지에 인민위
외골수 군인, 존 리드 하지
원회가 설치되어 행정권을 행사하고 있음을 하지에게 알렸다. 그러나 조선을 점령하라는
1945년 9월 8일부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명령을 받고 있었던 하지는 여운형의 주도로
수립 전까지 미 군정 사령관을 맡았던 존 리드
건설되고 있었던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하
하지(John Reed Hodge)는 태평양 전쟁에서
찮게 여겼으며, 종내에는 무시해 버렸다.
승승장구한 전형적인 야전 사령관이었다. 그 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공을 올리며 5년 만
하지가 조선인들을 얼마나 귀찮게 여겼는지는
에 대령에서 중장까지 진급한 외골수 군인으 39
동아시아 역사칼럼
▼1945년부터 1948년까지 미 군정 사령관직을 수행한 존 리드 하지 미 육군 중장
로 알려진 인물이다. 명목상 38선 이남에 주둔 한 미군의 최고 책임자는 맥아더였지만, 태평 양 사령관이었던 맥아더는 일본의 군정에 몰 두했기 때문에 한반도는 사실상 하지의 24군 단이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지는 성공한 야전사령관이었을지는 몰라도, 정무적인 판단 능력이 훨씬 중요한 군 정의 책임자로서는 매우 미흡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하지는 주로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 지역에서의 작전을 담당했기 때문에, 인천에 상륙하기 전까지는 한반도의 상황에 대해 전 혀 아는바가 없었다. 사실 미 육군 내에 하지
력을 행사하는 자리에 선택된 사상 초유의 인물”
말고도 동아시아 정세에 밝은 인물들이 없는
이었다.
것은 아니었다. 원래 주중 미대사 출신으로 중 국에 오랫동안 상주했던 조지프 스틸웰이 미 군정 사령관으로 거론되었다. 지장(智將)으로
하지, “여운형, 쪽바리로부터 돈을 얼마 나 받아먹었지?”
평가받던 그는 동아시아 정세를 잘 알고 있었 으나, 한국에 오지 못했다. 그레고리 헨더슨의
게다가 하지는 한국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정
말을 빌리면 “하지는 단지 수송시간이 없다는 이
책지침도 받지 못한 채 한반도에 들어왔다. 한
유로 약 2천만 명의 인구를 가진 나라의 정치권
반도에 발을 내딛었을 때, 그는 단지 일본을
40
동아시아 역사칼럼
대상으로 한 언급이 주를 이룬 맥아더의 ‘일반 명령 1호’에 의해 한반도에서 군정을 실시하라
조선인들은 괴뢰극을 멈춰라! 군정장관 아놀드
는 지침밖에 받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가 처음 으로 한국에 대한 미국 정부의 정책문서를 하
하지와 함께 해방 직후 한반도 정국을 소용돌
달 받은 것은 10월이 다 되어서였다.(김관후,
이로 몰고 간 또 한명의 인물이 있다. 45년 ‘아
2014-04-28)
놀드 미 군정청 제1대 군정장관 아치발드 아놀드 소장 군정장관 성명’을 통해 여운형의 인공을
한반도 정세에 어두웠던 하지는 알려진 대로
불법 조직으로 규정, 와해시킨 미 육군 소장 아
친미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던 잔존 일본인 관
치발드 아놀드(Archibald V. Arnold) 소장이 바
료들과 친일성향의 한국인 관리들을 중용했
로 그 장본인이다. 아놀드는 하지 군단장 휘하
다. 그 중에서도 악질적인 친일 경찰들을 재
의 사단장으로 한반도 중부지역을 점령한 7사
등용해 한국인들의 울화통을 터지게 한 것은
단의 사단장이었다. 아놀드 역시 그의 상관과
그가 얼마나 조선에 무지했는지를 잘 보여준
마찬가지로 단지 중부지방 점령을 담당한 지
다. 또한 정치감각이라곤 없는 극우적인 군인
휘관이어서 군정장관에 임명되었을 뿐, 조선
기질의 그는 미 국무부의 지시보다도 더 경직
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는 군인이었다.
된 자세로 한국의 정치세력을 바라보았다. 심 지어 그는 당시 조선의 실권자라고 볼 수 있
해방 직후 38선 이남의 명실상부한 행정기구
었던 여운형에게 “쪽바리(Jap)로부터 돈을 얼마
는 9월 6일 창건을 선포한 여운형 주도의 조선
나 받아먹었지?”라는 웃지 못 할 농담을 건넸
인민공화국이었다. 미 군정의 민사행정관이었
다고도 한다.
던 프레스콧 대령은 “인공의 대표가 지방행정기 41
동아시아 역사칼럼
구인 인민위원회를 장악하고 효과적으로 작동시 키고 있기 때문에 인공 지도자들은 관직을 유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고백했으며, 미 국무성에 서 파견된 하지의 정치고문관 베닝호프는 “인 공이 38선 이남의 어느 정치단체보다 효율적으 로 조직되어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하지는 이러한 견해들을 무시하고 강력한 군정을 실 시했는데, 인공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의 신호 탄으로 된 것이 바로 군정장관 아놀드의 ‘성명’ 이었다. 1945년 10월 10일 발표된 ‘아놀드 성 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미 군정청 제1대 군정장관 아치발드 아놀드 소장
*아놀드 성명 (1945.10.10)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에는 오직 한 정부가 있을 뿐이다. 이 정부는 맥아더 원수의 포고와 하지 중장의 정령과 아놀드 소장의 행정령에 의하여 정당히 수립된 것이다. 아놀드 군정장관과 군정 관들이 엄선하고 감독하는 조선인으로 조직된 정부로서 행정 각 방면에 있어서 절대의 지배력과 권위를 가지었다. 자천자임한 관리라든가 경찰이든가 국민 전체를 대표하였노라는 대소의 회합 이라든가 자칭 조선인민공화국이든가 자칭 조선공화국 내각은 권위와 세력과 실재가 전연 없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고관대직을 참칭하는 자들이 흥행적 가치조차 의심할 만한 괴뢰극을 하는 배우라면 그 동안 즉시 그 극을 폐막하여야 마땅할 것이다. 42
동아시아 역사칼럼
아놀드, ‘여운형은 꼭두각시이자 사기꾼’
그러나 군대를 동원해 일제의 공식 행정기구 를 장악한 하지와 아놀드는 인민공화국을 불
아놀드는 여운형을 ‘흥행가치조차 없는 꼭두
법 단체로 규정하고 인공 측의 주장을 묵살
각시놀음을 벌이면서 정부 고관을 참칭하는
해버렸다. 백악관에서도 한국에서 임시정부를
비열한 사기꾼’이라고 매도하고, 인공을 ‘늙
수립하려는 어떤 단체도 인정할 수 없으며, 군
은이들의 유치한 짓’이라고 폄하했다. 아놀드
정에 필요하거나 점령에 협조하는 정치단체만
는 한민당 등 친일세력들을 동원해 여운형의
을 승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곧 미 군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공화국에 대한 야비한
정을 지지하는 친미세력과 정치단체만을 존속
비방선전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시키고 지원하라는 것이었다.
인공 측에서는 거세게 반발하며 즉각 반대 성
미 군정청의 브레인, 아서 러치
명을 발표했다. 반대 성명에서는 인민공화국 이 이미 수천 개의 인민위원회를 조직해 전국
아놀드가 3개월이라는 짧은 임기를 마치고 제
적인 행정기구를 설치하고 있는 실질적인 정
7사단장으로 귀임하자, 신임 군정장관 아서 러
부라는 사실과, 조선의 완전 독립과 통일정부
치(Archer L. Lerch)가 1945년 12월 18일 한
수립을 위해 노력하는 인공의 활동이 국제법
국에 첫 발을 내딛었다. 러치는 대학에서 문학
적인 정당성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했다. 또한
과 법학을 전공했으며 변호사 자격까지 있었
미 군정의 인공 부인은 해방군이었던 미군이
던 행정형 군인이었다. 러치는 부임한 이래 2
탄압군으로 변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며, 이는
년간 38선 이남지역을 통치하며 미 군정의 기
과거 일본점령자가 ‘피부색’만 바뀐 것과 다름
틀을 마련한 인물이었으며, 해방 직후 미국의
없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대한반도 전략을 실행에 옮긴 백악관의 대리 43
동아시아 역사칼럼
인이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간파 하고 있던 미국은 러치와 같은 정치군인을 통 해 한반도에 미 본토의 영향력을 직접 행사했 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러치는 대한반도 정책 의 유능한 실행자였을지 몰라도, 조선인들에 게는 미 군정기 사회 혼란의 최종책임자였다. 당시 사회경제적 혼란의 주체는 38선 이남에 서의 유일한 행정부를 자처한 미 군정이라 할
▲미 군정청 제2대 군정장관 아서 러치 소장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구조적 문제의 책임 은 궁극적으로 군정장관 러치에게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없었다. 게다가 모리배들의 매점매석으로 쌀 값마저 폭등하자 민중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특히 러치는 당시 한국인들이 가장 염원했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급해진 미 군정은 식
친일파 처단과 토지개혁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량위기를 막기 위해 일제 때도 하지 않았던
결정적으로 좌절시킨 장본인이었다. 또, 과도
하곡수집령을 내렸다. 하지만 보릿고개에 곡
한 인플레 정책을 실시해 노동자들의 삶을 완
식을 거두어 가겠다고 하니, 이번에는 농민이
전히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물가는 천정부지
들고 일어났다. 미군정의 이런 총체적 난맥상
로 치솟는데, 노동자들의 임금은 거의 오르지
이 겹쳐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이 일어
않아 사람들은 빈곤과 기아에 시달릴 수밖에
난 것이다.
44
동아시아 역사칼럼
민중들에 대한 폭력적인 진압은 군정청 의 작품
을 실현해야 하는데, 대중적인 지반을 가지고 있는 좌익세력은 걸림돌 같은 존재였다. 그러다 가 한반도 남쪽에서 좌우의 정치적 주도권이 완
민중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는 이 때, 러치
전히 역전되는 계기가 찾아온다. 바로 ‘반탁’운
의 대답은 무엇이었을까? 오늘날 정치인들과
동이 거세게 일어난 것이다.
크게 다를 바 없이, 좌경용공세력의 선동이라고 몰아붙이며 폭력적으로 억누르는 것이었다. 러
지면 상 우익진영의 반탁운동과 좌익진영의 ‘모
치는 먼저 조선공산당이 위조지폐를 발행해 활
스크바 3상회의 결정 전면 지지’운동이 어떻게 벌
동자금을 마련한다면서 이들을 불법화했다. 또,
어졌는지를 다 설명하기는 힘들다. 다만 반탁운
9월 총파업이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 의한 것
동의 결과로 한반도 남쪽에서 모든 정치적인 주
이라면서 모든 파업자들을 구속하겠다고 공언
도권은 친미와 극우반공을 표방했던 이승만이
했다. 미 군정은 악명 높은 우익 청년단을 동원
독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 군정은 이승만을
해 파업 지도부를 습격하는 등 폭력적으로 민중
적극 이용했다. 하지와 러치는 이승만을 지도자
들을 탄압했다.
로 삼아 미 군정이 주도하는 미래 한국 정부의 모델을 만들어가려고 했다. 그리고 이승만은 결
한편, 하지 사령관이나 러치 군정장관이나 한국
국 반공적인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기
의 상황을 매우 어렵게 보고 있었다. 이들이 이
에 이른다. 물론 이 과정에서 김구와 김규식 등
처럼 물리적 수단까지 동원해가며 한국의 좌익
의 우익세력은 분단만은 막기 위해 38선을 넘
세력을 탄압했던 것은 어찌보면 그만큼 한반도
어 북측의 지도자들과 협상을 벌이기도 했지만
남쪽 좌익세력이 강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
역부족이었다.
국으로선 어떻게 해서든 한국에서 자국의 이익 45
동아시아 역사칼럼
▲‘신탁통치절대반대’를 주장하는 반탁운동 진영과 ‘삼상결정절대지지’를 내걸고 모스크바 삼상회의를 지지하는 세력의 시위 장면.
청산되지 못한 미 군정의 유산
있었고, 내부의 불안을 이북에 대한 도발로 무 마하려 하고 있었다.
미국의 궁극적인 목표는 한반도 남쪽에 자신들 의 이익을 실현할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지만,
한반도의 분단체제는 미 군정기를 거치며 처음
그 과정에서 반탁운동으로 정국주도권을 쥔 이
으로 등장했고, 좌우대립의 연장선상인 한국전
승만과 마찰도 꽤 많이 빚었다. 이승만이 미 군
쟁을 거치며 공고화되었다. 한반도의 분단과 남
정의 생각보다 더 강경하게 반공주의와 단독정
북의 단독정부 수립은 미국으로서 그다지 손해
부 수립에 열을 올렸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저
볼 것이 없는 일이었다. 무리해서 미 군정을 연
돌적인 반탁운동과 반공단독정부 수립으로 인
장시키는 것보다, 공고한 분단체제를 수립해 한
해 한반도 남북의 좌우대립은 점차 극심해져 갔
반도 남쪽의 단독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다. 한편 해방 직후의 혼란과 단독정부 수립은
도 그리 나쁜 선택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
38선 이남의 민중들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상황
떤 방식으로든 극동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승만의 단독정부는 이념
유지하는 것만이 미국과 미 군정의 목표였다.▒
적으로 비타협적인 멸공북진통일을 주장하고 46
예술 그 본질적 가치
가난한 사람들의 꿈을 그린
디에고 리베라 http://mag-mkyd21.tistory.com/182
▲꽃파는 사람
47
예술 그 본질적 가치
“내게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민과 희망을 아주
오브레곤 정권은 토지 분배와 공교육을 확대
강렬하게 느끼게 해주는 출신 배경이 있습니
실시했으며, 멕시코 인디오 전통 문화 부흥에
다. 나는 그들을 도와주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힘쓴다. 동시에 멕시코 인들의 전통과 삶에 뿌
그들을 위해 투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
리를 둔 예술을 통한 정치 선전을 추구했다.
스스로 자립할 수 있게 해주고 더 나은 세상
자유를 되찾은 멕시코인들은 자신들의 억눌렸
을 보게 해줘야 한다는 게 나의 희망입니다.”(
던 삶을 표출하고 자유를 갈망했다. 디에고 리
디에고 리베라)
베라의 벽화에는 이러한 갈망이 잘 담겨있다.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년 ~ 1957
디에고 리베라의 대표작 <꽃 파는 사람>이다.
년)는 멕시코 혁명기에 벽화운동을 주도한 화
카라가 풍성하게 한 바구니 담긴 아름다운 그
가다. 디에고는 멕시코 사람들의 독재 정권에
림이다. 이 그림이 더 아름다운 이유는 그 무
대한 저항을 소재로 혁명을 표현했다. 1910년
거운 꽃바구니를 힘겹게 짊어져야 하는 ‘삶의
일어난 멕시코 혁명은 30년 디아스(Diaz) 독
무게’와 그 꽃바구니를 들리는 ‘보이지 않는 손’
재에 반발해 일어났다. 수많은 희생 속에 결
이 탁월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
국 혁명은 승리하고 1920년 오브레곤(Alvaro
운 꽃을 사서 보는 사람과 파는 사람의 마음은
Obregon) 정권이 들어섰다. 농민이 주도하여
다르기 마련이다.
시작된 멕시코 혁명은 러시아 혁명을 예고하 는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48
언뜻 보기에 아름다워 보이는 이 그림의 비밀
예술 그 본질적 가치
은 뒤에서 무거운 카라 꽃바구니를 짊어지게
리베라의 벽화실
시키는 사람의 보이지 않는 손과 발, 그리고 머리에 있다. 멕시코 여인은 무릎을 꿇고 무거
미국 디트로이트 시 미술관 안에 가면 리베라
운 카라 꽃바구니를 들 준비를 하고 있다. 아
의 벽화실(Rivera‘s Court) 이라는 거대한 프
름다운 꽃도 파는 사람에게는, 가난한 서민에
레스코 벽화가 그려져 있는 방이 있다. 디에고
게는 고된 노동이라는 디에고 리베라의 연민
리베라는 포드 자동차 회사를 4명의 사진사를
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데리고 3개월 동안 출퇴근 하며 벽화 프로젝 트를 준비했다. 그는 휴식도 없는 강행군을 하
디에고 리베라는 벽화가 정치적 목적을 가지
며 이 벽화를 1932년 7월부터 1933년 3월까
고 사람들에 대한 선전 도구로 활용되어야 한
지 11개월 만에 마침내 완성했다.
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멕시코의
남쪽 벽 왼쪽 하단에 하얀 중절모를 쓰고 고
민중 예술이야말로 전 세계에서 가장 건전한
약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은 포드 공장 생산
영혼의 표현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윽고 그는
부장 미드 브릭커(Measd Bricker)를 그린 것
방안에 틀어박힌 예술을 거부하고 공공의 이
이다. 평소에 저런 표정을 하며 노동자들을 감
익을 위한 건조물 예술을 옹호한다는 선언문
시하고 착취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표현한 것
을 발표한다. 그는 선언문에서 기성의 유럽의
이다.
것을 모방하는 예술이 멕시코 사람들의 눈을 오염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디에고 리베라는 북쪽 벽 왼쪽 위 8기통 엔진 49
예술 그 본질적 가치
<북쪽벽>
<남쪽벽>
블락을 조립하는 생산라인 위에는 동그란 모
으로 쓰이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널리 알리고
자를 쓰고 시무룩한 표정을 한 자신의 모습을
싶어 했다. 저임금으로 고통 받으며 일그러진
그려넣기도 했다. 그는 포드 공장을 견학하며
표정으로 똑같은 동작으로 일해야 하는 그들
거대한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 하나의 부속품
의 삶이 디에고의 작품에서 그대로 느껴진다.
50
예술 그 본질적 가치
<남쪽벽 왼쪽 하단 미드 브릭커>
부자들의 밤, 빈자들의 밤
<북쪽벽 왼쪽 위 디에고>
사는, 도덕성이라곤 없는 자들이 밤에는 술과 담배, 마약을 즐기며 환락에 빠져있는 모습을
멕시코 공립학교(교육부 청사)에는 디에고 리
풍자하고 있다. 그들 뒤에는 무장을 한 농민들
베라의 작품이 1,2,3 층에 잘 남아있다. 그 중
이 혁명을 암시하는 듯 매서운 눈으로 쳐다보
특히 2층 ‘축제의 장’에서 디에고 리베라는 부
고 있다.
자와 가난한 자의 밤을 비교하며 자신의 의도 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빈자들의 밤>에는 고된 노동을 하지만 제대 로 끼니도 먹지 못해 고통 받는 가난한 사람의
<부자들의 밤>은 외세와 권력에 빌붙어 먹고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일하느라 저녁 늦게까지
51
예술 그 본질적 가치
<부자 빈자의 밤>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다 잠 든 모자를
혁명과 예술
통해 현실을 폭로하고 있다. 그들 뒤에는 이런 서민들을 매서운 눈초리로 감시하며 세금을
1900년대 초반 멕시코에서 살아간 디에고 리
뜯어낼 궁리를 하는 권력자들이 그려져 있다.
베라는 자연스럽게 예술을 정치사회적으로 승
52
예술 그 본질적 가치
화시킨다. 그는 1907년 유럽으로 건너가 피카
그를 평생 사랑했던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인
소 등과 교류하며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갖
프리다 칼로(Frida Kahlo)는 혁명과 예술의 관
게 되었고, 이탈리아를 돌아보며 프레스코화
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에 많은 영감을 받았다. 이 경험이 멕시코 벽 화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혁명이 예술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예술이 혁명을 필요로 한다고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스텍(Aztecan) 문명의 영향을 많이 받은 멕
아닙니다. 혁명은 혁명예술을 필요로 합니다.
시코 벽화는 다양하고 화려한 색채를 사용하
혁명가의 예술은 낭만주의자의 예술과는 다릅
며, 둥그렇고 간결하게 사물을 표현한다. 이러
니다. 그것은 자극제나 흥분제가 아닙니다. 사
한 멕시코 전통의 민족문화는 디에고 리베라
람을 취하게 만드는 술도 아닙니다. 신경계통
를 통해 부활하였고, 그의 작품은 멕시코 민족
에 영양을 공급하는 양식입니다. 투쟁을 위한
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여기에 사회주
양식입니다. 그것은 밀과 같은 양식인 것입니
의적 성격이 결합되면서 디에고 리베라는 외
다(르 클레지오, 2001: 170).”▒
세와 독재정권에 의한 멕시코 인들이 겪었던 실제 사건을 벽화에 담았다. 53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스·승·을·만·나·다
제2의민주화운동을 위해 다시 투지를 불태우시는
민주주의국민행동 김종철 대표님 http://mag-mkyd21.tistory.com/184
6월 항쟁이 있은 지 28년이 지났다. 우리사회의 절차적 민주주의를 만들어 낸 6월항쟁의 의미 가 새롭게 다가오는 요즘이다. 국정원의 불법 선거개입, 정당해산, 노조의 불법화 등에서 보여 지 듯 민주주의의 근간이 무너지고 있다. 그래서 민주화운동의 주역이셨던 분들이 제2의 민주화운동을 위해 다시 전면에 나서시고 있다. 70년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활동을 하시고, 80년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대 변인을 역임하신 김종철 민주주의국민행동 대표님도 그 중 한분이시다. 제2의 민주화운동이 필 요하다는 김종철 대표님. 한국사회 민주화운동의 주역이셨던 선생님께 민주화운동을 하며 살아 오셨던 삶과 현재 우리사회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54
스승을 만나다
본 : 안녕하세요 선생님. 먼저 간단한 소개 부
고 ‘동아방송’에만 중앙정보부가 고문하고 그
탁드립니다.
런게 계속 나가니까 박정희가 인제 위기의식 을 느끼고,. ‘동아일보’, ‘동아방송’에 대해서 광
김종철 대표님(이하 김) : 1967년에 동아일보
고탄압을 했지. 12월 한 이십 몇 일부터 백지
사 입사해서 군대 2년 갔다 오고, 70년에 복
가 나가다가 격려광고가 채워지고. 그때 민중
직해서 사회부 기자로 일하고, 74년에 인제 긴
운동이 일어났는데, 박정희가 2월초에 난데없
급조치 1호가 발표됐지. 민청학련 사건 발표
이 국민투표를 해가지고 신임을 묻는다 했어.
되기 한 달 전, 1974년 3월7일 동아일보에서
2월 15일에 민청학련 그런 정치범들 풀어준
노동조합을 만들었지. 기자들이. 우리나라 언
뒤에 3월 17일 동아일보사 사주한테 압력을
론사상에 처음이라고 그러는데, 일제 강점기
가해서 기자, PD, 아나운서 160여명을 폭력
에는 뭐 인쇄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든
배를 동원해서 쫓아냈는데 바로 그날 동아자
적이 있고. 거기(노동조합)에 나도 참여했다가
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동아투위를 결성했죠.
당장 그 날 밤에 17명이 해직됐나 그랬어. 그
지난 3월에 40년 됐으니까. 허허. 그 뒤에 겪
게 인제 한 달 만에 복직됐고. 이거 내가 쓴 책
어온 일은 여러 가지가 있고.
에 다 있는데 <폭력의 자유>라고 ‘시사인’에서 낸, 책을 구해보면 거기에 자세히 나올 거야.
본 : 지금까지는 70년대까지 살아오셨던 이
그리고 이제 긴급조치 밑에서는 언론이 아무
야기를 해주셨는데요. 80년대 민주통일민중
것도 못했으니까, 그때는 민청학련, 인혁당 조
운동연합(민통련) 대변인을 역임하시는 등 왕
작 된 거 그런 거. 그리고 그해 10월 24일날
성한 활동을 해오셨다고 들었습니다. 6월 항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했어. 그래도 뭐 제대로
쟁이 있은 지 28년이 지났는데요. 직접 목격
보도 못했고. 그게 발전해가지고 ‘동아일보’하
한 6월 항쟁은 어땠는지, 소개해 주시고 싶으
55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신 일화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제 호헌반대 투쟁을 했는데, 86년 5월 3일에 인천에서 대대적인 집회가 있었죠. 우리는 인
김 : 민통련은 1985년 3월 28일에 창립됐고,
천 5.3 항쟁이라고 불러요. 그런데 의장인 문
문익환 목사님이 의장이시고. 전국에 23개 단
익환 목사님도 바로 구속되시고. 난 대변인인
체가 참여했으니까 아마 그 대한민국 역사상
데 수배돼 가지고 1년 동안 말하자면 피신생
제일 큰 연합운동체라고 볼 수 있죠. 난 대변
활을 하는데, 그러면서도 민통련 기관지도 만
인 맡았고. 그때 당시 난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들고. 그러면서 6월항쟁도 준비했죠. 같이 수
라고, 84년 4월에 생긴. 이 단체 대표로 있었
배당하는 사람들, 민통련 후배들하고 준비했
는데, 이 단체가 인제 민통련 가입해서 내가 (
는데 6월5일날 민중가요 운동하던 이름이 이
민통련)대변인이 됐고. 민통련이 열심히 인제
청학인데, <벗이여 해방이 온다> 라는 노래 많
전두환 정권하고 싸움을 했는데, 전두환이 장
이 알려져 있죠. 그 노래 작사·작곡한 이청학
기집권하려고, 말하자면 7년 임기를 좀 연장
이가 비밀결혼을 한다 그래가지고, 집에서 반
하려고 했어. 그 당시 신민당하고 민통련이 인
대한다고. 대단한 장애인인데 서울공대 원자
56
스승을 만나다
력 공학과 다녔지. 근데 나에게 주례를 서달
운동, 그 뒤에 독립운동. 민족독립과 해방, 일
라고 해서, 6월5일날 우리 가족을 만나가지고
제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주화 운동. 그게 이제
논산을 가려고 했는데, 내가 명일동에 살았는
1960년에 사월혁명으로 이어졌죠. 독재자 이
데 뭐 그 집사람 사무실이 여의도인데 형사가
승만을 물러나게 했는데, 장면정부가 워낙 좀
뭐 여럿방향으로 왔지. 그때 롯데 소공동 10
기반이 약하고 보수적이니까 혼란을 핑계로
층 커피숍에서 만났는데 앉자마자 덩치가 큰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뭐 헌법도 다 뒤
형사가 (왔어). 내 담당형사지. 그날 잡혔지. (6
집어 업고 18년 동안 독재를 했는데, 그 우
월 항쟁) 닷 새 전에 잡혔으니 답답하기도 하
리나라의 암흑시대죠. 박정희가 죽으면 민주
고. 장안동에 있는 시경 대공분실로 갔다가.
화가 될 줄 알았더니 뭐 신군부 전두환 노태
다행히 고문은 안당하고. 박종철 사건이 있으
우 군사깡패들이 등장 한거지 다시. 실질적으
니. 석달 옥살이 했어. 6월항쟁 현장은 못 봤
로 유신체제가 유지되었고, 전두환은 광주에
고. 서대문에서, 그때는 법원이 서소문에 있었
서 수백명을 학살하고 다시 권력을 잡았는데,
는데, 조사받으러 가는 길에 인파가 모이고 그
6월항쟁, 또는 민중항쟁이죠, 그게 무려 1987
런 건 창밖으로만 보는 거야. 준비는 같이 했
년까지 계속 되다가 전두환이 또 장기집권 하
는데 현장에는 없었지.
려니까 민통련이나 신민당, 개신교 세력, 천주 교 이런 쪽이 다 힘을 합해서 (6월 항쟁을) 일
본 : 현재 한국사회 현실을 보면 6월항쟁의 의
으켰는데, 1980년 5월 항쟁은 광주 전남만 고
미가 더 각별한 것 같습니다. 요즘 세대들이 6
립되어서 싸웠는데, 6월 항쟁은 학생, 시민, 넥
월항쟁을 통해 배워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타이 부대라는 봉급생활자들, 모든 계층, 전국
김 : 6월 항쟁은 인제 길게 보면 1919년 3.1
의 노동자 농민, 4월 혁명 때보다 참가 범위 57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가 적지 않은 그런 의미가 있고. 물론 그 때 6
의 모든 장치를 다 파괴해 버렸고, 세월호 참
월 항쟁 결과로 민주정권이 세워졌으면 좋았
사 같은 것도 인명을 경시하는 게 유신체제하
었는데, 노태우가 6.29 선언이란 것을 해서 직
고 똑같은데, 이제 우리가 6월10일에 민주주
선제 하고, 야당이나 재야세력이 승리라고 생
의국민행동이라는 국민운동체를 만들죠. 함세
각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전두환의 후계자인 노
웅 신부님이 상임대표시고, 하여간 제2의 민
태우가 다시 정권을 물려받게 되었기 때문에,
주화 운동을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민주주
또 5년이나 지속됐고, 그 땐 항쟁으로서 승리
의는 완전히 무너졌고, 통일문제도 뭐 이제는
한 면도 있지만 결과는 군사독재의 연장이었
전혀...통일대박이니 헛소리나 하고 앉아 있으
으니까...그것에 대해서 교훈을 삼아야 되고.
니까 통일운동도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그런
당시 재야운동세력이나 야당이 반성을 좀 해
의미에서 6월 항쟁 때와 같은 각오로 해야 한
야겠고.
다고 생각이 들어요.
본 : 한편에서는 87년 6월 체제가 한계에 왔
본 : 조금 전에 이야기 해주셨는데요. 민주주
다고, 87년 체제를 뛰어 넘어야 한다고 이야
의국민행동 공동대표로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기 합니다. 현재 우리사회 민주주의를 위해 더
하고 계신데요, 민주주의국민행동에 대한 간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김 : 지금은 박근혜 정권이 다시 자기 아버
김 : 지난 3월 24일날 발기인 대회를 했고, 이
지를 물려받아서, 실제로 신유신체제처럼 되
제 다시 제2의 민주화 운동을 하자는 단체들,
어 버렸고. 모든 면에서 뭐 언론탄압, 민주주
개인들이 회원이 되어 가지고, 6월 10일에 창
58
스승을 만나다
립대회를 갖는데, 지난 사월혁명 때부터 민주 화운동을 하던 어른들, 박정희 정권 밑에서의 민청학련 세대, 6월항쟁 세대, 심지어는 20대 까지도 참여해서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내년 총선에서 야권이 승리하고, 2017년 대선 에 이겨서 다시 민주정권을 세우는 그런 걸 목 표로 하는 단체에요. 본 : 민주주의국민행동이 창립을 하는데요, 민 주주의국민행동을 강화하기 위해 어떤 일이 필요할까요?
본 : 저희 단체는 30대부터 40대 초반 정도가 주축이 되어 있습니다. 아직 젊다면 젊은 청년 들이 많은데요, 끝으로 저희 회원들에게 한 말
김 : 온라인 운동본부 같은걸 만들면 초기에
씀 부탁드립니다.
좀 많이 참여해가지고, 만명, 십만명, 백만명 이렇게 되어야...야당이 좀 비틀거리잖아...그 런 SNS나 온라인에 많이 참여해서, 여길 좀 강화하고, 회원으로 참여해서 월회비도 좀 내 고, 그렇게 해야 이게(민주주의국민행동) 커지 겠지.
김 : 회원모두가 민주행동에 가입하면 아주 엄청난 힘이 되겠네. 지난번에 시청 앞에서 기 네스북 등재를 위한 4160명이 촛불을 드는 행 사 때 무려 9000명이 참여했는데, 그런 식으 로 좀 대중들이 많이 참여하면 (좋겠어). 민권
59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연대 회원들이 30대가 많다면, 여기 오면 절 대 환영이겠네. 많이 좀 오시고, 제2의 민주화 운동에 참여해주시면 좋겠네. 허허. 본 : 좋은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60
우리가 미래다
회·원·을·만·나·다
20대 민지애 회원의 눈에 비친
민권연대 http://mag-mkyd21.tistory.com/181
20대의 눈으로 본 민권연대는 어떤 모습일까? 5.18 광 주행사 때 ‘장년모임’을 진행하면서 40대가 넘은 회원들 사이에 공통으로 가지는 끈끈한 정서 같은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정서가 있기에 시대의 아픔에 함 께 공감하며, 나이가 들어서도 힘을 합쳐 민권연대 활동 을 더욱 열심히 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 문득 민권연대 20대 회원들이 생각이 났다. 앞 으로 민권연대의 주축이 되어야 할 그들은 민권연대에 대해, 현 사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연륜 과 경험이 많은 세대들과 새로운 세대가 조화를 이룰 때 민권연대는 더욱 발전해 나갈 것이다. 민권연대 회원으로 가입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민지애 회 원과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더욱 패기 있는 민권연대 의 모습을 기대해 본다. 61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본 : 안녕하세요. 먼저 전국의 회원들에게 자
민 : 저 역시 어린 건 아니지만...이전에 선배
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님들을 보다보면 어려운 점이 있지요. (하하) 나이차이도 나고...아직 친숙하지 않다보니 그
민지애(이하 민) : 자기 소래라니, 부끄럽네요
런 것 같아요.
(하하). 덕성여대 07학번 28살 민지애입니다. 동아리에서 패명을 썼는데, 패명은 날우라고
본 : 민권연대 사업 중 좀 개선되었으면 하는
합니다. 반갑습니다.
게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아님 해 봤으면 하는 사업이라 던지요?
본 : 20대 회원이라고 들었는데요, 20대가 보 는 민권연대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합니다. 그
민 : 이번 (새바람) 대표님 이야기 중 20대를
리고 스스로에게 민권연대란 어떤 단체인가
위한 사업에서 대학생 때 매년 가던 농활이 참
요?
끌리더라구요~. 당시엔 힘들었어도 참 추억 에 많이 남았어요. 그리고 FTA로 인해 계속적
민 : 민권연대라 하면 저에겐 아직은 조금 어
인 개방으로 힘든 우리 형님들 생각도 나더라
려운 단체인 것 같아요. (하하) 아직 덜 익숙해
구요. (하하)
서...제가 좀 늦게 시작한감도 있지만 민권연대 는 역시 (진보적인 사안에) 앞장서는 단체라고
본 : 요즘 세대들이 사회문제를 대하는 인식
인식하고 있어요.
에 대해 피부로 느끼는 게 있나요? 예를 들어 세월호 문제를 대할 때 요즘 세대들에서 나타
본 : 민권연대가 제일 ‘늙어’ 보일 때는 언제인 가요? (하하) 62
나는 특징 같은 게 있다면 알려주세요.
우리가 미래다
민 : 제가 사교육 시장에서 일하면서 느낀점
민 : 6.15공동선언이 발표되는 것을 직접 봤
이에요, 역시나 공부를 하려면 빚을 내야 한다
다면 정말 감회가 새로울 것 같네요. 저 같은
는 점, 또한 돈이 있어야 대한민국에서 살아남
경우는 직접보진 못했지만, 그 동안의 활동들
는다는 점이 피부로 느껴져요. 그래서 좀 더
을 통해서 6.15공동선언이 무엇인지 간접적으
교육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재능기부를 하고
로나마 알게 된 것 같습니다. 대학 다닐 때 율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동패를 했기 때문에 3-4년 동안 6.15행사에 참여하여 뭔가 몸짓으로 실천했던 기억이 나
본 : 올해는 6.15공동선언 15돌이 되는 해 입
네요. 쉽지 않겠지만 새바람에서도 기회가 된
니다. 2000년 남북 두 정상이 만나는 것을 TV
다면 다시 한 번 재현해도 좋을 것 같아요.(하
로라도 직접 목격한 세대들은 6.15 선언이 남
하) 요즘 젊은이들이 6.15공동선언을 아는지,
다를 것 같은데요, 요즘 젊은 사람들이 느끼는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6.15공동선언은 어떨지 궁금합니다. 63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본 : 경험해 본 6.15행사가 있다면 가장 인상
을 살면서 많이 후회하고 반성하는 하루하루
적이었던 것은 어떤 건가요?
입니다. 제가 있는 위치에서 좀 더 발전하는 삶을 살도록 더 열심히 노력 하겠습니다. (너
민 : 2010년이었나...광운대에서 했던 통일무 도회가 인상적이었어요. 막걸리 한잔과 비오 는 것에 상관하지 않고 밤새 무대에서 율동메 들리를 췄던 기억이나요. (하하) 본 : 앞으로 민권연대 활동에 대한 포부나 계 획이 있다면요? 민 : 마음만큼 쉽게 실천을 못하고 있어서 죄 송한 마음뿐입니다. (흑흑) 그래도 시간되는 만큼 잠을 줄여서라도 함께하려고 노력 하겠 습니다. 본 : 끝으로 전국의 민권연대 회원들에게 한 마디 해 주시죠. 민 : 박근혜 정권 들어 80년대로 되돌려진 삶
64
무 부끄러워요. 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