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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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본 2015.08

http://mag-mkyd21.tistory.com

70번째 맞는 광복절과 분단 70년 <시사칼럼> 광복 70돌, 오늘의 의미 <이달의 역사> 1945년 8월 11일, 무슨 일이 일어났나?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분단이 한국경제에 남긴 상처


월간

발행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민권연대) 발행일 2015년 8월 1일 (18호) 블로그 http://mag-mkyd21.tistory.com 문의 mag.mkyd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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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글

풀어쓰는 경제이슈 70번째 맞는 광복절과 분단 70년

■광복 70돌, 오늘의 의미

4

■1945년 8월 11일, 무슨 일이 일어났나?

7

■분단이 한국경제에 남긴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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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동북지역답사기

■그리스 위기에서 자본의 민낯을 보다(1)

29

예술, 그 본질적 가치

■광복 70년, 민족적 가치를 찾아 - 풍물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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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미래다

■고구려의 기상, 항일의 함성! 중국동북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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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기지 앞에서 ‘미국, 그놈’을 노래하다 -심규만 광주시민주권행동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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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글>

http://mag-mkyd21.tistory.com/197 헌재의 역습

올해 8월 15일은 광복 70주년을 맞는 뜻 깊은 날입니다. 하지만 우리 민족에게 광복절이란 분단의 비극을 낳은 날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올해는 광복 70년인 것과 함께 분단 7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올해 초, 남과 북은 광복 70년을 맞는 올해를 분단 70년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해로 만들자고 이야기 해 왔습 니다. 올해 초만 해도 남북 정상회담까지 이야기가 오고갔지만, 8월 15일이 코앞에 다가온 현 시점에서 보면 남 북관계는 오히려 더 악화되어 있습니다. 남과 북이 함께 준비했던 6.15민족공동행사는 끝내 남과 북이 한 자리에 모여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이번 <특집기획>에서는 광복 70년과 분단 70년의 의미를 돌아보는 글들을 실었습니다. 광복 70돌이 우리에게 어 떤 의미인지, 진정한 광복을 위해서 어떤 과제들을 고민해야 하는지를 돌아봤습니다. 분단의 상징인 38선이 그어 진 역사적 과정과 분단이 우리경제에 가져단 주었던 폐단들을 생각해 봤습니다. 분단된 지 70년이 되었습니다. 미국, 중국 등 주변 강대국들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대립하고 있는 한반도에서 한 국은 여전히 방향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 하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미국 편에 설지, 아니면 중국 편에 서야 할지 와 같은,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길 당시 사대주의에 물든 관료들의 굴욕적인 생각만을 되풀이 하는 모습입니다. 우 리 국민들의 의사는 아랑곳 하지 않고 우리나라를 생화학전 실험장으로 만들고 있는 미군의 모습은 70년 전 38 선을 마음대로 그었던 미군의 모습과 전혀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분단을 끝내고 진정한 광복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다시 한 번 되돌아 봐야 할 시기입니다. 당장 에는 8.15민족공동행사를 광복70년의 의미에 맞게, 분단70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계기가 되도록 성 대히 치러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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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획

http://mag-mkyd21.tistory.com/198

광복 70돌, 오늘의 의미 올해 8월 15일은 광복 70주년을 맞는 뜻 깊은 날입니다. 8.15는 우리 민족에게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는 일제 강점에서 해방됐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해방과 동시에 분단의 치욕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의 모습을 돌아보면 이 두 가지 의미에서 모두 암울하기 그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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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번째 맞는 광복절과 분단 70년

우선 일제 강점에서 벗어났으나 여전히 우리는

극복은커녕 남북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만 가고

강대국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최근 탄

있습니다. 올해 6.15남북공동선언 발표 15주년

저균 사태에서도 보듯 주한미군이 국제법을 무

을 맞아 남북이 공동행사를 하려 했으나 끝내

시하고 살아있는 탄저균을 국내에 반입해도 조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8.15 기념식 역시 공동행

사는커녕 제대로 항의조차 하지 못하는 모습에

사를 추진 중이나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국내

서도, 동북아 군비 경쟁을 촉발하고 긴장을 높

에서는 여전히 ‘종북’ 논란이 기승을 부리며 통

일 사드 배치 논란에서도, 군국주의를 추진하는

일을 위해 북한을 제대로 알자는 목소리는 지탄

일본과 군사협력을 하려는 모습에서도, 현 정부

과 처벌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에게서 자주독립국가로서의 정부 모습을 찾아 보기 힘듭니다.

광복 70돌을 ‘광복’의 의미에 맞게 맞이하기 위 해서는 우선 우리가 주변 강대국의 압력에서 벗

분단 역시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나야 합니다. 자료 :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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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획

자료 : 경실련

미국은 북한은 물론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일된 강국이 출현하면 자신들의 영향력이 사라질

위해 한국을 자신들의 군사기지로 활용하며 값

까봐 통일을 드러내지 않게 방해하고 있습니다.

비싼 무기를 팔고 있습니다. 일본 역시 동북아 에서 고립된 처지를 벗어나기 위해 한-미-일

일단 남북이 신뢰부터 회복해야 합니다. 지금은

삼각군사동맹을 추진하며 한국을 끌어들이려

남북이 서로에 대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동북아 지역에서 미국,

믿지 않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기존 남북합

일본의 영향력을 대체하기 위해 경제력을 바탕

의들을 존중하고 이행하며 신뢰를 회복하지 않

으로 한국을 포섭하려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

고서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로 한국을 둘러싼 지역정세는 구한말의 상황과 매우 유사합니다.

특히 7.4공동성명의 원칙과 6.15공동선언의 정 신, 10.4선언의 내용들을 이행한다면 남북은 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강대국들에 끌려 다닌다

시 화해협력을 통해 통일, 번영을 꿈꿀 수 있을

면 언제든 제2의 식민지 신세가 될 수 있습니다.

것입니다.

주변 강대국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남북

이것이 70주년을 맞는 광복절이 오늘 우리에게

이 힘을 모아야 합니다. 주변국들도 한반도에 통

주는 과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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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번째 맞는 광복절과 분단 70년

http://mag-mkyd21.tistory.com/199

1945년 8월 11일, 무슨 일이 일어났나?

올해는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마

미국의 한반도 단독 점령 작전 실패

땅히 광복 70주년을 기념하고 기뻐해야 하지 만 마냥 기뻐할 수 없습니다. 광복과 동시에 분

독일의 패망을 앞둔 1945년 2월 얄타회담이

단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소련은 독일 항복 후 ‘2, 3개월 이내에’ 대일전에 참전해야 하며

우리 민족에게 지금도 고통을 주고 있는 분단

그 대가로 연합국은 소련에 1904~05년 러일

은 1945년 8월 11일 38선이 만들어지면서 그

전쟁에서 잃은 영토를 반환하고 또 외몽골의

불행의 싹을 틔웠습니다. 분단의 시작은 38선

독립을 인정한다”는 비밀의정서가 합의되었습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단의 상징인 38선을

니다.

만든 것은 미국입니다. 미국은 왜 38선을 만들 었을까요? 7


특집기획

얄타회담에서 미국이 소련의 참전을 적극적으

그러나 소련을 인정했던 루즈벨트가 죽고 트

로 요구했던 것은 소련군과 일본의 관동군 모

루먼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면서 미국의 생각

두의 전력을 소모시켜 지금의 적(일본)과 미래

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1945년 7

의 적(소련)의 국력을 약화시키려 했기 때문이

월 16일 핵무기까지 개발되었습니다. 만주의

었습니다. 미국은 태평양 전쟁에서 우세를 점

일본 관동군은 미국에게 여전히 골칫거리였지

하고 있었지만 일본의 옥쇄 등으로 인해 빠르

만 신무기인 핵무기의 위력은 미국에게 단독으

게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로 일본을 항복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은 약간의 손해(소련에게 영토 반환)를 감수해

만들었습니다.

서라도 소련을 끌어들이려 한 것입니다.

소련군 대일전 참전 작전도 8


70번째 맞는 광복절과 분단 70년

미국은 핵무기를 일본과 한반도를 독점할 수

국무장관이었던 번스는 1960년 8월 15일 언

있는 유용한 수단으로 판단했습니다. 미국은

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대통령과 나)는 소련

뒤늦게 소련에게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을 요청

의 대일전 참전 전에 전쟁이 끝나기를 원하고

한 것을 후회했지만 되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있었다”라고 시인했으며 “소련을 유럽에서 잘 다루려고” 핵무기를 보유, 과시했다고 증언한

대신 미국은 소련이 참전하기 전 일본의 항복

바 있습니다.

을 받아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이미 미국의 핵무기 개발과 일 미국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대일

본 투하 임박 첩보를 입수하고 군대를 만주에

선언 초안을 영국의 처칠과 중국의 장개석에게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독일 패망 3개월이

만 보여주고 소련을 배제한 상태로 발표할 만

되는 8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9일 0시

큼 소련참전 전에 일본을 항복시키기 위해 고

를 기해 만주 전역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심했습니다. 미국은 소련군이 관동군에 막혀 고전할 것으로 그리고 포츠담 회담 이후 미국은 핵무기 사용

예상했으나 예상과는 달리 일본의 관동군은 소

을 준비하는 한편, 소련의 참전을 지연시키기

련군에게 대패했고 소련군은 급속도로 만주 지

위해 소련에게 “한반도 공격은 규슈상륙작전

역을 장악했습니다.

이후에나 그 가능성을 결정할 문제”라고 연막 작전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는 소련 영지와 만주, 한반도를 오가며 꾸준

미국은 소련의 대일 전쟁 참전 시기를 빨라도

히 정탐 및 군사, 조직 활동을 해왔던 조선인,

8월 15일에나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8월

중국인 무장 독립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

6일 히로시마에 핵폭탄을 투하했습니다. 당시

했습니다. 현지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의 도 9


특집기획

무장해제되는 일본군▶

움을 받은 소련군은 만주 지역에서 일본군을

Plan B의 작동

몰아냈으며 8월 9일, 함경북도 웅기지역에 상 륙했고 8월 13일에는 청진까지 진격했습니다.

원래 일본은 핵공격을 당한 후에도 “옥쇄”를 결의하고 있었습니다. 주력이라고 할 수 있었

반면 미국은 한반도에서 960km나 떨어진 오

던 관동군을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소련의 참

키나와에 있었습니다. 미군은 일본의 남쪽 섬

전 이후 관동군이 추풍낙엽처럼 붕괴된다는 소

인 규슈지역에 11월에나 상륙할 계획을 가지

식을 듣자 항복을 결정했습니다.

고 있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연합국에게 1945년 8월 10일 “천 이제 미국은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장악할지도

황의 국가통치의 대권에 변경을 가하는 요구를

모른다는 걱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소련이 개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이해 하에” 포츠담 선언

입하기 전에 한반도까지 차지하겠다는 미국의

을 수락한다는 제의를 했습니다. 천황제만 건

의도가 결국 처참하게 무너진 것입니다.

드리지 않으면 항복하겠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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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번째 맞는 광복절과 분단 70년

미국은 한반도 전체의 장악을 목표로 하고 있

하는 의사에 의하여 결정할 수 있는 것으로 한

었지만 전체장악에 실패할 경우에 대비하여 여

다“로 답하여 일본의 요구를 사실상 수용했습

러 가지 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미국,

니다.

소련, 중국, 영국 4개국에 의한 신탁통치와 분 할점령안을 기획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이 포츠담회담에서의 “무조건 항복” 방침

일본의 항복요청을 받은 미국은 Plan B를 가동

을 깨고 일본의 조건을 수락한 이유는 소련의

하기 시작합니다. 미국의 번즈 국무장관은 일

남하 때문이었습니다. 무조건 항복을 고집하면

본의 항복요청이 온 다음날인 8월 11일, 답변

전쟁이 길어지게 되고 전쟁이 길어지면 소련이

을 통해 “최종적으로 일본국 정부의 형태는 포

한반도 전체, 나아가 일본 본토까지 진출할 수

츠담선언에 준하여 일본국 국민의 자유로 표명

있다는 우려를 한 것입니다.

일반명령 1호▶ 11


특집기획

미국은 일본의 항복을 급하게 수용하는 동시에

실제로 미국은 1945년 7월 25일을 전후한 시

소련의 남하를 막기 위해 ≪일반명령 1호≫를

점에 미 합동참모본부 산하 합동전쟁기획위원

작성해 소련에게 보냈습니다.

회 작전국장 헐과 전략정책단장 린컨은 번스 미 국무장관의 지시아래 미-소 간 작전분계선

일반명령 1호는 38선 이북 지역은 소련군이,

의 명목으로 38선 근처에 이른바 “헐선”을 획

이남 지역은 미군이 일본군의 항복을 받는다

정하고 포츠담 회담에서 논의했습니다.(이완

는 내용입니다. 이 명령을 근거로 38선이 그어

범. ≪38선 획정의 진실≫)

졌으며 일반명령 1호에 따라 미군과 소련군이 들어오면서 우리 민족의 불행인 분단이 시작된

본스틸과 러스크 대령이 속해 있던 전략정책단

것입니다.

의 단장인 린컨이 분할문제를 계속 담당해 왔 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38선 획정을 실

일반명령 1호에 들어간 38선을 확정한 인물로

무적으로 기안한 인물은 린컨이며, 이를 도운

언급되는 사람은 전략정책단 실무자였던 본스

인사가 본스틸 대령이고, 부임한지 한 달 밖에

틸, 러스크 대령입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

되지 않은 러스크 대령은 본스틸 과장을 보좌

은 러스크와 본스틸 대령이 지도를 통해 8월

한 인물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신빙성이 있습

11일 별다른 준비와 정치적 고려 없이 오로지

니다.

군사적 편의에 따라 38선을 기안했다는 것입 니다.

그리고 실무자급이 아니라 상부의 책임자를 더 추적해 들어가면 “국무장관 번스 → 국무차관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일을 대령 두 명이 결정

보 던 → 전쟁차관보 맥클로이 → 린컨”의 계

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선 상에서 분할 결정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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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번째 맞는 광복절과 분단 70년

▲본스틸과 러스크

을 것입니다.

따라서 미국이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한 반도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은 근거가 없습

38선 획정은 미국의 군사적, 정치적 이익 때문

니다.

미국은 38선을 긋고 한반도에 발을 들여 놓은

미국이 한반도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철저히

이유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내세웠습니다.

군사적, 정치적 목적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본군의 무장해제의 효율성을 따진다

미국은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 한반도

면 이미 한반도 깊숙이 들어와 있던 소련군에

를 장악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

게 맡기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게다가 항복 선

다. 이는 미국이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한반도

언 직전 조선총독부 총리가 여운형 선생에게

에 대한 조사를 진행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요청한 것과 같이 일본 인 중의 상당수는 안전하게 일본에 돌아가기를

미 전략정보국(OSS)은 1945년 2월 28일 ≪한

바라고 있었습니다.

국의 공업중심지에 관한 지도≫, ≪한국의 도 13


특집기획

로와 철도에 관한 지도≫, ≪한국의 식량생산

도, 40도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

에 관한 지도≫를 작성했고 3월 3일에는 ≪한

다. 1,000km밖에 떨어져 있던 미군에게는 군

국의 행정구역에 관한 지도≫ 등을 작성해 두

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실현되지

고 있었습니다.

는 못했지만 대륙진출과 한반도 점령에 대한

또한 미 합동정보연구처는 1945년 4월 ≪한국

미국의 집착을 읽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의 인구집중에 관한 지도≫, ≪한국인의 일본 어 해독능력에 관한 지도≫, ≪일본인이 만 명

1945년 8월 초 미국의 전쟁부 작전국이 만든

이상 거주하고 있는 한국 도시에 관한 지도≫

문서에는 일본본토에 대한 점령이 제 1과제로,

등을 작성하여 한국에 대한 파악을 해 둔 상황

한국 서울에 대한 일본본토와의 동시점령이 제

이었습니다.

2과제로 상정되어 있습니다. 결국 미국이 군사 적인 현실에 맞춰 정치적으로 선택한 것이 38

그러나 소련의 참전 이후 만주와 한반도에 소

선에 따른 분할점령이었던 것입니다.

련군이 들어오자 미국은 현실적으로 자신들의 목표를 수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은 소

분단된 지 70년이 되었습니다. 70년 전 38선을

련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무리해서라도 한반

그었던 미군은 아직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습니

도에 자신의 군대를 주둔시켜야 했습니다.

다. 분단을 끝내고 통일을 이루어 진정한 광복 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분단

8월 11일 트루먼 대통령은 중국 대련과 한반도

의 계기가 된 사건을 돌아보며 곱씹어 보는 시

의 항구가 아직 소련군에게 점령되지 않았다면

간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일본의 항복 이후 신속하게 점령해야한다고 주 장합니다. 그리고 일부 관료들은 분할선을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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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번째 맞는 광복절과 분단 70년

http://mag-mkyd21.tistory.com/200

분단이 한국경제에 남긴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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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획

분단과정은 그 자체로 우리 역사에서 가장 아픈

공장, 기업의 94%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합니

장면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많은

다. 대다수 경제자산을 몰수할 수 있었던 미국

문제점들을 낳은 원인이기도 했습니다. 분단으

은 38선 이남지역의 경제명맥을 틀어쥘 수 있

로 인한 상처는 ‘빨갱이’, ‘종북’이라는 말로 아

었습니다.

직도 우리사회에 이어져오며, 건전한 논의와 사 회발전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문제는 미국이 몰수한 일본인 소유의 경제시설 (적산)을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있습니다. 미국

경제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945년 일제

은 적산을 도리어 친일파들에게 넘겨주며 친미

의 수탈로부터 벗어난 우리나라는 경제적인 측

정권의 기틀을 다지는 데 사용했습니다. 미군

면에서 새로운 출발점에 서게 되었습니다. 일제

정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이 운영하던 사업체

의 수탈체제로 인해 왜곡된 산업구조를 바로잡

에 고용되어 있던 한국인이나, 그 사업체와 유

고, 일제가 놓고 간 자산(적산)을 활용해 우리 민

사한 업종에 종사하고 있던 한국인 기업가 내

족을 위한 경제구조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하지

지 자산가, 그렇지 않으면 영어나 일본어 통역

만 38선이 그어지고 결국 분단이 되면서 우리

에 능숙한 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적산을 넘겨주

경제의 이러한 요구는 좌절되고 맙니다.

었습니다.

적산불하와 정경유착의 시작

일제시대, 일본인이 운영하던 사업체에 고용된 한국인 종업원 중 주요 인물들은 사실상 친일적

1945년 9월 8일, 미국은 한국 주둔과 동시에

성향이 강한 인물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

38선 이남 전역에서 일체의 정치기구를 인정

다. 또한 당시 영어나 일본어를 잘하던 사람들

하지 않았고, 일본인들의 생산시설과 재산을 강

도 국민 대다수를 차지했던 농민들과는 거리가

제 몰수했습니다. 박세길의 『다시쓰는 한국현

먼 특권층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당시 적산을

대사』에 따르면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의 모든

분배받기 위해 어느 정도 자금을 가지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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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번째 맞는 광복절과 분단 70년

던 계층이란 일제강점기에 재산을 모았던 사람

데, 이는 이후 갚아야 할 돈의 가치가 급격히 떨

들이었을 것이고, 일제시대 그들의 행보는 대충

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실질적으로는 공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짜와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적산을 불하받는다는 것은 일종의 ‘로또’

결국 한국의 초기 기업들은 공정한 경쟁보다는

에 당첨되는 것과 같았습니다. 시중에서 평가되

미국과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던 가격의 10분의 1수준으로 공장 설비를 인수

인위적으로 선정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15년간 나눠서 갚으

들이 이승만정부와 미국 쪽에 줄을 대기 위해

면 되는 조건이었습니다. 1947년 기준으로 15

얼마나 많은 비리를 저질렀을지 상상해 볼 수

년 후인 1961년이 되면 물가가 300배가 뛰는

있을 것입니다.

기업명

창업자

불하기업명 조선화재보험 조선생명보험 삼월(三越)백화점

현재 기업명 삼성화재 삼성생명 신세계백화점

삼성그룹

이병철

현대그룹

정주영

조선이연금속 인천공장

인천제철

SK그룹

최종건

선경직물

SK글로벌

하이트맥주

박경규

대일본맥주

하이트맥주

한화그룹

김종희

조선유지(油脂) 인천공장

한화

두산그룹

박두병

소화기린맥주

1998년 매각

LG그룹

구인회

조선제련

LG니꼬동제련

효성그룹

조홍제

조선타이어, 대전피혁

롯데 영플라자

▲ 주요기업들의 적산불하내역 / 자료 : 이한구,『한국재벌사』에서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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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획

니다. 여기에 전쟁까지 겹쳐서 그나마 남아있 균형적인 발전 기회의 상실

던 산업시설들이 남북을 가리지 않고 대부분 파 괴되었고, 자체적으로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남북이 갈라지면서 한국경제 구조는 절름발이

기반이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가 되었습니다. 한국 경제는 분단 때문에 에너 지, 광물자원 등 산업에 필요한 기본적인 요소

미국으로부터 들어온 원조는 농민들이 농사를

들을 모조리 해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

포기하게 만드는 등 자체적인 산업발전의 기회

되었습니다.

를 포기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게다가 미국이 ‘도와주는’ 만큼 한국정부는 미국 말을 잘 들을

1948년 조선은행 경제연보에 따르면, 1948년

수밖에 없었죠. 미국은 자국에서 남아도는 잉여

당시(미국, 소련에 의해 38선이 그어진 이후) 전

생산물을 처분하면서도 한국경제의 명맥을 틀

력의 92%를 북한지역에서 생산하고 있었다고

어지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합니다. 대표적인 발전소가 압록강 수풍댐과 같 은 대규모 수력발전소였습니다. 석탄 같은 에너

특히 미국에게 한반도이남 지역은 당시 사회주

지 자원도 99% 가까이가 북한지역에서 생산되

의 국가들(소련, 중국, 북한 등)과 최전선을 이루

고 있었습니다. 산업에 반드시 필요한 철광석은

는 지역이었습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한국이

99.9%, 그리고 철광석을 최초 가공한 선철은

자본주의를 채택해서 이렇게 급속히 발전하고

100%가 북한지역에서 생산되었습니다. 한마디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로 남쪽에서는 자체 산업 생산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죠.

따라서 미국은 단기간의 빠른 경제성장을 과시

자연스레 외국의 원조가 필요했고, 38선 이남

하기 위해 노동자, 중소기업 등에 돌아갈 몫을

에 진주한 미국의 원조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

최대한 줄이고 자본을 소수 재벌대기업에게 집

18


70번째 맞는 광복절과 분단 70년

중시키는 외형적 성장 정책을 취했습니다. 더군

니다.

다나 다양한 기업들을 관리하는 것 보다 자신들 의 원조 등으로 성장해온 소수 대기업들을 관리

그 외에도 분단으로 인해 여전히 막대한 국방비

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균형적

를 지출하고 있는 문제, 미국의 요구에 따라 자

으로 국가경제를 발전시키기 보다는 해외 수출

유무역협정(FTA)를 맺고 무기를 구입해야 하는

시장에 의존한 불균형 발전 정책을 취했던 것

문제 등도 분단이 만들어낸 한국경제의 문제들

이죠. 국내 노동자들의 소득을 올려 내수시장

입니다.

을 형성하고, 각 산업간 유기적인 관계를 만들 어 균형적인 성장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시간

남북이 분단된 지 7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 걸리는 일이므로 미국은 크게 신경 쓰지 않

70년 된 분단의 상처를 극복한다는 것은 우리

았습니다.

경제의 구조를 개선하고, 바로잡는 것과도 맞닿

재벌이 육성되고 수출의존적인 경제구조가 만

아 있습니다. ■

들어진 것도 분단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습 한미원조 조약문서 교환▶ 자료 : 국가기록원

19


중국동북지역답사기

http://mag-mkyd21.tistory.com/201

고구려의 기상, 항일의 함성! 중국동북을 가다.

(2015.07.03 ~ 2015.07.09)

20


중국동북지역답사기

이 원고는 2015년 7월 3일부터 9일까지 6박 7

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기 형식으로 구성되

일간 진행된 중국동북지역답사의 후기입니다.

었습니다. 답사지에서의 역사적 체험 외에, 이

이번 답사는 우리 역사의 새로운 희망을 찾아가

국에서 느낀 소회와 그곳의 생활문화에 대한

는 ‘새희망 역사연구모임’의 첫 번째 답사로써,

자유로운 감상을 최대한 솔직하게 썼습니다.

지도교수는 임찬경 박사였으며 노정을 함께한

따라서 이 글은 어떤 형식도 문체도 갖추지 못

도반은 임 박사와 조선족 안내인 ‘해남’ 선생을

한 잡문에 불과하지만, 답사대가 그곳에서 발

포함한 7인이었습니다.

견의 노력을 기울여 찾아낸 좋은 감상을 얼마 간 전달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이 글은 답사 직후 한국에 돌아와 쓰여 졌으

<답사일정표> 7월 3일 12:00 인천공항 출발 - 13:00 중국 대련공항 도착(현지시각 12:00, 이하 현지시각) - 14:00 여순감옥 도착(44km) - 15:00 여순감옥 출발 - 15:30 여순박물관 도착(5km) - 16:20 여순 박물관 출발 - 16:30 목양성유지 도착(14km) - 17:10 목양성유지 출발 - 18:00 단동 근교 식사(도원춘반장) - 27:30 단동 신안동호텔 도착(550km) 7월 4일 7:30 기상 - 8:00 신안동 호텔 출발 - 8:30 압록강 단교 도착(5km) - 9:30 압록강 단교 출 발 - 10:30 구련성유지 도착(???km) - 11:30 호산장성 도착 (???km) - 13:00 호산장성 출 발 - 13:20 단동 근교 고루자 식사(신원식당) - 13:50 고루자 출발 - 16:11 환인만족자치현 도착(175km) - 16:30 숙소 도착(Holiday 호텔) - 15:30 환인현 시장 식사(추가반점)

21


중국동북지역답사기

7월 5일 7:30 출발 - 9:00 오녀산성 - 12:15 환인·통화 간 고속도로 진입(차 문 고장 등으로 점심 생 략) - 16:10 집안 장군총 도착(200km) - 16:30 광개토대왕비 및 호태왕릉 도착 - 18:00 국내 성유지 - 18:30 환두산성 - 19:30 집안시 취원빈관 - 20:00 저녁식사(박가 개장랭면성) 7월 6일 5:30 집안시 취원빈관 출발 - 5:50 집안·만포 압록강 대안 출발(집안-통화-백산-무송-연 길) - 6:30 통화시내 식사(라면) - 12:30 무송현 장울화묘역 - 13:20 무송현 제일실험소학 13:50 식사(무송현식당) - 14:25 무송 출발 - 17:15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안도현 이도백 하진 내도산촌 - 19:21 청파호(청호촌) 도착(300km) - 21:00 연길시 도착, 매화개장집 식사 22:00 연길시 덕명빈관 7월 7일 6:00 기상 - 6:10 연길아침시장, 연길공원 - 7:00 식사 - 8:00 발해중경현덕부(서고성터) 9:00 15만원탈취사건기념비 - 9:30 3.13반일의사릉 - 10:00 간도총영사관터(현 용정인민정 부) - 11:00 대성중학교 - 12:00 식사(창성랭면) - 12:30 연길 출발 - 14:00 도문·남양 두만 강 대안 도착 - 14:30 고구려 고성터 - 15:30 신화서점, 서시장 - 18:00 저녁식사 7월 8일 7:40 덕명빈관 출발 - 9:00 봉오골반일전적지 출발 - 9:30 마반산촌 사관양성소터 근처, 덕원 리, 십리평 사관양성소 - 12:00 왕청시내 식사(시골소탕집) - 15:00 발해 상경용천부 유지 도착 - 16:00 상경용천부 출발 - 18:00 해림시 한중우의공원 도착 7월 9일 8:00 백야김좌진기념관 관람 - 9:00 해림시 양자영열사능원 기념관 - 11:30 목단강시 팔녀투 강 기념관 도착 - 12:30 식사(목단강시) - 13:30 출국수속 - 15:20 출국 - 17:30 한국도착(한 국시각 18:30)

22


중국동북지역답사기

첫째 날

9시부터 입국수속이 시작되었다. 동행들과 만 나 해외여행에 필요한 입국수속과 휴대폰 로

참으로 오래간만의 해외여행이었다. 아니, 실

밍 등을 마치고 비행기 탑승구로 이동했다. 탑

은 첫 번째 해외 답사라고 해야 옳은 표현일

승 전에 면세점에 들러 부탁받은 몇몇 물건들

것이다. 그렇다. 나는 번거롭고 어수선한 일상

을 샀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답사객이랍시

을 잠시 제쳐 두고 바다를 에둘러 중국으로 간

고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리는

다. 며칠 휴양지에 바람이나 쐬러가는 여행이

중국남방항공 인천-대련 12시 비행기편을 타

라면 모를까 6박 7일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고 황해를 건너 대련에 내렸다.

2500km라는 대 장정을 앞에 둔 여행자로서 나는 너무도 어리숙한 초보 답사객에 불과했

우리는 한국시각 12시에 출발했지만, 북경 시

다.

계를 사용하는 중국과 동경 시계를 사용하는 한국의 시차로 인해 1시간의 간격이 있는 바,

일상의 번잡함을 핑계로 짐 가방도 전날 밤에

중국시각 12시에 대련에 발을 딛게 되었다. 공

서야 마련했고, 답사팀에서 준비한 사전자료

항에는 우리 일행을 안내해 줄 현지가이드 겸

도 겨우 반나마 읽었을 따름이었다. ‘아는 만

운전사 ‘해남’선생이 나와 있었다. 구릿빛 피

큼 보인다’는 답사의 기본적인 명제도 지키지

부에 단단한 몸매를 지닌 해남선생은 이름 대

못한 불량한 동행이었던 것이다. 초보 답사객

신 그저 ‘해남님’이라고 부르면 된다면서 우리

의 미숙함은 고스란히 지도교수와 다른 동행

일행을 차로 안내했다.

들에게 부담이 되었을 터이다. 아무튼 부끄러 운 마음 때문인지 출발하는 순간까지 나는 답

우리가 6박 7일 동안 타고 이동할 차는 한국

사지의 정보가 담긴 휴대폰을 놓지 못했다.

의 스타렉스에다 상표만 바꿔 붙인 ‘봉고’ 차 종이었다. 아직 자동차 산업이 보편적으로 발 23


중국동북지역답사기

중화인민공화국의 행정구역 성급행정구(省級行政區) 직할시(直轄市) 성(省) 자치구(自治區) 특별행정구(特別行政區) 지급행정구(地級行政區) 지급시(地級市) 지구(地區) 자치주(自治州) 맹(盟) 현급행정구(縣級行政區) 시할구(市轄區) 현급시(縣級市) 현(縣) 자치현(自治縣) 기(旗) 자치기(自治旗) 특구(特區) 임구(林區) 향급행정구(鄕級行政區) 진(鎭) 향(郷) 소목(蘇木) 민족향(民族鄕) 민족소목(民族蘇木) 현할구(縣轄區) 가도(街道) 촌급자치조직 촌(村) 사구(社區) 촌급이하 촌민소조(村民小組) 기타 성회(省會) 수부(首府) 부성급시(副省級市) 부성급자치주(副省級自治州) 부지급시(副地級市) 계획단열시(計劃單列市) 24

전하지 못한 중국의 사정에 비하면 꽤 편안한 내부시설 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곧 빡빡한 일정표대로 여순 으로 이동했다. 중국을 여행하려면 중국의 지명과 행정구역에 대한 기 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행정구역 은 크게 성급(省級)-지급(地級)-현급(縣級)-향급(鄕級) 행정구와 촌급(村級) 이하 자치조직으로 나뉜다. 성급 행정구는 어지간한 국가단위와 맞먹는 크기이며, 성의 중심지인 부성급시(副省級市)는 500만 이상의 인구를 거느린 대도시다. 예를 들어보면 두번째 답사지인 여순 박물관은 중화인민공화국 요녕성 대련시 여순(시할)구 해방가도에 위치하고 있다. 대련시는 요녕성의 성도 심양에 이은 두 번째 부성급시 로써 500만의 인구를 거느린 대도시다. 중국의 대표적 인 항구도시이며, 급성장하고 있는 동북지역의 물류 중 심지다. 지나가는 길마다 석유화학과 전자산업 공장들 이 눈에 띄었는데 과연 세계의 공장으로서의 중국을 실 감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대련은 1897년 이래 러시아와 일본의 조차


중국동북지역답사기

대련시 행정구▶

지로서 제국주의 세력의 식민지 수탈 거점으

조금은 낙후한 느낌이었다. 공항에서 40여km

로 발전해왔다. 이 지역은 일제 만주침략의 상

를 달려 여순에 도착했다. 여순은 20세기 초

징과도 같은 남만주 철도가 시작되는 곳이기

한·중·일·러가 서로 뒤엉켜 있는 잔인하

도 하다. 여순은 대련시의 한 개 구로서, 요동

고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반도 최남단에 자리한 도시다. 러시아와 일본 의 대륙침략 전초기지로 선택된 이래, 여순은

1894년 갑오 동학혁명으로 인해 촉발된 청일

철저히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의도에 맞게 설계

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일본에게 요동반도

되었다. 여순지역에 있는 공적 시설은 인민의

와 대만을 할양해주어야 했다. 국력의 저열함

복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제국주의적

을 드러낸 청나라는 곧 침략해 들어오는 열강

침략과 착취를 위한 공간이었다.

의 각축장으로 되었다. 중국에서 일본의 영향 력이 확대되는 것을 못마땅해 하던 러시아, 프

아무튼 첫 답사지인 여순감옥으로 가는 길에

랑스, 독일은 1898년 ‘삼국간섭’을 통해 요동

본 오늘날의 여순구는 대련의 중심지에 비해

반도를 일본으로부터 빼앗아 러시아의 조차지 25


중국동북지역답사기

로 만들어 버린다. 여순감옥은 요동반도를 조

의 짜르 체제는 곧 붕괴되기에 이른다. 일제의

차한 러시아가 1902년 짓기 시작한 것으로,

손에 떨어진 여순은 본격적인 대륙침략을 위

1904년 러일전쟁 때에는 러시아군 야전병원

한 전초기지로 건설되었다. 요동과 만주에 대

과 기병병영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한 독점적인 지배권을 넘겨받은 일제는 이곳 에 관동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관동주 재판소,

세계의 예상을 뒤엎고 러시아를 꺾은 일본은

여순감옥 등의 침략기구, 억압기구들을 만들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통해 조선에 대한 우월

면서 중국 동북지역으로 지배영역을 확장해

권을 인정받고, 요동반도 및 만주철도에 대

나간다.

한 특권을 넘겨받았다. 러일전쟁의 패전과 1 차 러시아혁명의 내우외환에 직면한 러시아

여순감옥▶ 26

일제의 재판소와 감옥은 겉으로는 문명과 법


중국동북지역답사기

치를 내세웠지만, 실상은 침략에 저항하는 반

치되어 있다가 1971년 7월 진열관으로 개관

제국주의 세력을 가두고 탄압하는 침략기구였

되었다. 중국에서는 여순감옥과 같은 일제 침

다. 여순감옥은 요동지방 최대의 감옥으로, 일

략 유물을 비롯해 국공내전 유산, 반봉건 투

제 식민통치기관의 변화에 따라 관동도독부

쟁 유적 등을 사회주의 체제의 정당성과 우월

감옥서(1907년), 관동청감옥(1920년), 관동청

성을 홍보하기 위한 ‘애국주의교양기지’로 단

형무소(1926년), 관동형무소(1934년), 여순형

장하고 있다. 여순감옥 역시 주요 국가유물로

무소(1939년)등의 이름으로 불렸으며 오늘날

상당한 인력과 돈을 투자해 재단장된 모습이

중국에서는 여순일아감옥(旅順日俄監獄)이라

었다.

통칭되고 있다. 부지는 2만 7500만 평방미터 이며, 253개의 감방과 4개의 지하감방을 가진

여순감옥은 중국의 애국지사와 한국의 독립

대형 사동과 15개의 부설공장을 가진 규모이

운동가를 비롯해 러시아·일본·이집트·터

며 동시에 2000여명의 수감이 가능한 규모다.

키·독일 등의 반파시스트 투사들이 옥고를

건축양식이나 구조 등이 서울의 서대문형무소

치른 곳이다. 한국인으로서는 단재 신채호, 우

와 매우 유사하다.

당 이회영 선생 등이 이곳에서 수감되어 옥사 하였다. 또한 우리에게 여순감옥은 안중근 의

여순감옥은 중국이 해방된 후 1971년까지 방

사의 순국지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27


중국동북지역답사기

안중근 의사는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것으로부터 시

도 매우 비중있게 다뤄지고 있었다. 여순감옥

작되었다”고 했으며, 근현대 중국의 아버지 손

곳곳에는 안중근 의사와 관련된 전시공간이

중산과 대사상가 양계초 그리고 장개석까지도

마련되어 있었다. 안중근의 의거는 중국인들

그의 공을 기리는 글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하얼빈에서 울린 안중근의 총성은 서구 열강과 일제의 침략으

여순감옥에는 이곳에서 순국한 중국인 항일열

로 반식민지가 된 조국을 보며 망연자실해 있

사들을 기리는 공간 외에 국제지사들을 기리

는 중국인들을 반일투쟁에로 이끌었다.

는 공간을 따로 마련해 두었다. 말이 ‘국제지 사’였지 전시실의 거의 대부분은 한국인 투사

안중근에 대한 중국인들의 흠모의 정은 여순

들을 위해 할애되고 있었다. 안중근, 신채호,

감옥 곳곳에서 드러났다. 그가 수감되었던 특

이회영 선생을 기억하는 공간이 상당히 넓게

별사동과 순국지(사형지)가 잘 보존되어 있었

자리잡고 있었는데, 반공일변도의 보훈교육에

으며, 그를 위한 특별 전시실까지 마련되어 있

익숙한 한국사람으로서 중국과 사회주의 진영

었다. 일찍이 중국의 주은래 총리는 “중일갑오

의 ‘애국주의교양’ 내용이 생소하면서도 의미

전쟁 후, 중조인민의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심장하게 다가왔다. ■

반대하는 투쟁은 본세기초 안중근이 하얼빈에 28


풀어쓰는 경제이슈

http://mag-mkyd21.tistory.com/202

그리스 위기에서

자본의 민낯을 보다(1) 정욱 실천자산관리연구소 소장

Scene #1 작전명 “아이올로스”

껍데기로 포장해서 부채가 아닌 자산으로 회

(※ 아이올로스는 그리스 신화 속 바람의 신을

계처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 거래로 골드만

말합니다. 골드만삭스가 파생상품으로 그리스

삭스는 3억 유로 이상의 수수료를 챙기고 그

의 재정을 불투명하게 만든 사건을 세인들은

리스에 대한 투자적격도를 높여서 민간 투자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자들이 그리스 채권 매입에 나서게 합니다.

2001년 골드만삭스는 그리스 정부와 모의하 여 미래의 국가 재정수입을 파생상품화하여

Scene #2 Idea Dinner

파는 방식으로 28억 유로의 현금을 조달합니

2011년 2월 소로스펀드매니지먼트, SAC캐피

다. 이 자금은 사실 상 대출이지만 파생상품의

털어드바이저스를 비롯한 유수의 대형 헤지펀 29


풀어쓰는 경제이슈

드 대표들이 뉴욕에서 은밀한 아이디어 만찬

자자들은 높은 수익을 얻습니다.

(idea dinner)을 갖고 유로화 폭락 및 그리스 국가 부도에 베팅하기로 결의합니다.

헐리웃의 영화 시나리오가 아닙니다. 위의 사 건들은 모두 사실입니다. 2011년 2월의 회동

Scene #3 Secret Report

은 ‘월스트리트저널’에 의해 보도되었고, 그 6

6개월 뒤 골드만삭스의 한 수석전략가는 그

개월 뒤의 비밀보고서는 영국 ‘인디펜던트’지

들의 헤지펀드 고객들에게 비밀 보고서를 보

가 폭로한 사실입니다. 마지막 장면은 오늘 우

내 유럽 주변국 금융기관들에 대한 상세한 정

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이구요.

보와 함께 유럽의 위기로부터 수익을 창출하 는 방안을 제시합니다. 예컨대 유로화에 대한

그리스 위기라 불리는 현 사태는 한 국가의 복

6개월 만기 풋옵션(유로화 가치가 떨어지면

지나 부패 따위의 정책이나, 문화와 같은 독

수익 발생)과 유럽의 기업채권 인덱스에 대한

립적 특성에서 기인한 국지적 문제가 아닙니

CDS(신용부도스왑; 위기가 커질수록 수익이

다. 자본주의가 앓고 있는 모순의 적나라한 과

상승) 구매 등의 방안을 제기했습니다.

정이면서 나아가 자본주의 역사 그 다음 장을 예측케 하는 중요한 메세지를 담고 있습니다.

Scene #4 The Crisis

두 편의 글(다음호까지 연재가 이어질 예정입

그로부터 정확히 5년 뒤인 2015년 6월, 세계

니다)을 통해 그리스 위기의 과정과 본질을 살

는 소위 <그리스 위기>로 인해 큰 몸살을 앓게

펴, 시사하는 바를 찾고자 합니다.

됩니다. 유로화 및 유럽의 금융자산의 가치가 폭락하며 유럽의 “위기”에 베팅한 자본과 투 30

1. 경과


풀어쓰는 경제이슈

● 1981년 EU(유럽연합) 창립 회원국인 그

끝에 2009년 10월 세상에 밝혀짐)

리스는 덴마크, 아일랜드, 영국에 이어 10번째

●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유럽으로 번

로 EU에 가입

지며 자산시장의 버블이 붕괴되어 실물경제

● 1995년 EU는 단일 통화인 유로 출범에

는 치명적 타격을 입게 되었고 그리스 정부

합의

는 극심한 세수부족에 시달리며 재정은 갈수

● 2002년 1월 1일부터 유로화는 공식 통화

록 악화

로서 현재 EU 19개국에서 사용

● 2009년 국제 투자자들은 그리스의 부정

● 2002년 그리스는 12번째 유로존 가입국

확한 통계, 부채상환 능력에 대한 문제제기를

으로서 드라크마화 대신 유로화를 사용하기

하게 되고 신용평가사 ‘피치’와 ‘무디스’의 국

시작

가 신용등급 하향조정을 계기로 투자심리가

● 2004년 총선으로 우파인 신민당(ND)이

급속히 냉각

정권을 잡음. 이전 정권인 중도성향의 사회당

● 2010년 결국 그리스는 ‘트로이카’라 칭해

(사회운동당; PASOK) 정부가 유로존 가입 조

지는 ECB(유럽중앙은행), EU(유럽연합), IMF(

건인 ‘GDP대비 3% 이하의 재정적자’ 조건 충

국제통화기금)로부터 세수 확대 및 긴축정책

족을 위해 실제 재정적자 비율 8.3%를 1.5%

을 조건으로 1100억 유로의 구제금융을 받게

로 조작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짐. 그러

됨. 이에 따른 공무원 구조조정, 연금 축소 등

나 올림픽 종주국으로서 2004아테네올림픽

신자유주의 정책의 시행은 실업률 증가를 낳

을 앞둔 상황에서 국내외 여론 악화를 우려해

고 이는 오히려 다시 세금수입 축소를 가져오

재정적자 조작 문제를 덮어두고 넘어감(이 사

는 악순환을 낳음

기극은 결국 신민당과 사회당의 진흙탕 싸움

● 트로이카의 신자유주의적 구제금융 프로 31


풀어쓰는 경제이슈

그램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으나 2012년 트

이카와 더 이상의 희생을 거부하는 그리스와

로이카는 다시 한 번 긴축을 조건으로 구제

의 협상은 쉽게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고, 6월

금융을 제공. 이로서 그리스가 트로이카에게

말 IMF 채무 15억 유로를 갚지 못해 그리스는

갚아야 할 빚은 GDP의 135%인 2460억 유

사실상 디폴트 상태를 맞게 됩니다.

로까지 증가했고, 실업률은 30%(청년 실업률 50%)로 치솟는 등 상황은 더욱 악화될 뿐이

이 때만해도 긴축, 민영화, 자본개방 등으로

었음

대표되는 ‘워싱턴컨센서스’에 충실하던 IMF의 압박으로 협상이 난항을 겪자 치프라스는 국

2. 협상, 유럽 통합의 위기를 표출하다

민투표 카드를 내밀었고, 국민들은 61%가 채 권단의 협상안에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더 이

오랜 긴축으로 고통받던 그리스 국민들은

상의 긴축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사를 분명

2015년 1월 “긴축반대”를 내세운 좌파연합

히 한 것이죠. 여지껏 구제금융을 받은 나라들

시리자의 치프라스를 총리로 선출합니다. 고

은 모두 강도 높은 긴축 요구를 수용해 왔으나

집스레 신자유주의 정책을 관철하려는 트로

그리스가 국민투표로써 이를 반대한 것은 전

32


풀어쓰는 경제이슈

례가 없는 전환적 사건이었습니다.

압박 전술의 성공을 확언하긴 이릅니다.

국민투표라는 그리스의 강수에 독일은 “그리

3. 무엇이 문제인가?

스의 한시적 유로존 탈퇴”라는 초강수로 대 응하며 결국 그리스에 대한 “복수”(영국 가디

위기는 어떻게 자랐나

언誌)이자 “징벌적”(세바차카스 시리자 의원) 인 합의안을 강제하였습니다. 일단 시리자에

2009년 10월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 재

대한 메르켈의 승리로 평가할 수 있겠으나, 그

무장관 회의에서 파파콘스탄티누 그리스 재

리스 국민들의 반발이 더욱 확산된다면 자존

무장관은 그리스 재정적자가 당초 발표된

심 강한 그리스 국민들은 정치적 위기를 맞은

6%(GDP대비)가 아니라 12.5%나 된다고 폭

시리자를 극복하는 더욱 강력한 저항세력을

탄선언을 합니다. 폭탄선언 직후, 골드만삭스

대안으로 내세우게 될 수도 있습니다.

는 회장까지 나서서 그리스 정부에게 의료보 험 부채를 미래로 이월해 숨겨주는 파생상품

시리자의 채무 협상 패배와 별개로, 긴축안을

을 제안했습니다. 이 제안은 이미 과거 그리스

거부한 그리스 국민투표는 유럽연합의 균열과

정부들이 부채를 숨기기 위해 써먹던 수법이

위기를 효과적으로 표출시켰습니다. 메르켈의

었으며, 더불어 이 제안은 훗날 그리스가 그동

협상 승리로 남유럽의 국민들과 좌파정치세력

안 어떻게 부채를 숨겨가며 3000억유로라는

들은 당장 압박을 느낄 수는 있겠으나 긴축의

엄청난 빚더미에 올라앉게 됐는지를 드러내는

악순환으로 고통이 깊어갈수록 유럽연합과 유

단서가 됩니다.

로존이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은 설자리가 좁아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직 메르켈식

골드만삭스를 통해 파생상품 기법으로 재정 33


풀어쓰는 경제이슈

적자를 축소해 유로존의 재정기준을 통과했

그렇다면 그리스는 왜 골드만삭스라는 마녀가

던 그리스 정부는 미래의 공항 수입뿐 아니라

내미는 독사과를 먹게 되었을까요?

복권 등 미래의 수입을 담보로 부실을 감추고 손쉽게 돈을 조달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1999년만해도 그리스의 무역적자와 재정적

그리스만의 ‘테크닉’이 아니었습니다. 유로존

자는 국내총생산의 5% 미만으로서 충분히 통

가입 전후로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 남유럽 국

제 가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의 유로존

가들은 월가의 골드만삭스와 제이피모건체이

가입이 기정사실화된 1999년 이후 적자와 부

스가 개발한 이런 파생상품 기법을 채용해 유

채는 급격히 불어납니다. 90년대 중반부터 그

로존 가입기준을 충족시켰습니다. 이탈리아는

리스의 유로존 가입을 예상한 독일 등 선진국

제이피모건의 도움으로 1996년에 예산 기준

의 금융자본은 이자율이 높고 유로존 가입으

치 기준을 겨우 맞춰 유로존 가입의 토대를 마

로 가격 상승이 기대되는 그리스를 상대로 집

련하기도 했습니다.

중적인 베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선진 국에 비해 이자율이 5~6배나 높은 그리스 국

골드만삭스는 유럽연합의 설계부터 출범, 유

채 투자에 집중했습니다.

로화의 도입 등 전 과정에 개입해 왔습니다. EU 주요 국가들의 역대 총리, 재무장관에 골

밀려드는 유동성의 힘으로 한때 그리스는 성

드만삭스 출신들이 포진해있는 것은 우연한

장률 4% 내외의 고성장을 구가하는 듯 보였

일이 아닙니다. 트로이카의 하나로서 그리스

으나 넘쳐나는 유동성으로 인해 물가가 오르

의 중요한 협상 상대방이었던 유럽중앙은행

며 수출과 관광산업의 경쟁력이 급격히 떨어

(ECB)의 총재를 맡고 있는 마리오 드라기는

졌고, 그리스 정부는 재정적자 문제를 앓기 시

골드만삭스의 유럽 부회장이었습니다.

작했습니다. 그리스 정부는 자금 조달을 원활

34


풀어쓰는 경제이슈

히 하기 위해 유로존 가입을 서두르게 되었습

환 고리는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유럽으

니다. 자국의 실제 경제 체력보다 높은 가치의

로 전이되면서 결국 폭탄의 본 모습을 보이게

유로화를 사용하게 되면 낮은 비용으로 자금

되었습니다. 금융위기로 자금줄이 마르자 견

차입이 유리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딜 수 없게 된 그리스 정부가 2009년 10월 재

그리스로서는 자국 통화의 평가절상 효과를

정적자의 실체를 공개하자, 그리스 위기는 불

가져온 유로화로 인해 대외 경쟁력은 더욱 떨

붙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졌고 적자와 부채 누적은 심각해졌으며 다 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손쉬운 자금 조달 방법

복지와 부패가 원인인가?

을 선택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깊어지게 되었 습니다. 골드만삭스 등 월가의 금융자본은 이

그럼 복지와 부패는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을

기회를 놓치지 않았죠.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까요?

능력을 얻은 것처럼 그리스는 적자와 부채에 허덕이면서도 이들과의 거래가 주는 쉽고 싼

우리나라 보수층에서 흔히 위기의 원인으로

자금 조달에 중독되어 갔습니다.

거론하는 그리스의 복지비용은 국내총생산 (GDP)의 20%를 조금 넘는 수준입니다. 유로

유로화로 인해 깊어가던 그리스 부채의 악순

존 국가들의 중간 수준정도 입니다. 오히려 경 35


풀어쓰는 경제이슈

제 수준이 높은 독일과 북유럽의 복지비용은

아니라면 역시 작금의 그리스 위기를 설명하

상상 이상으로 높습니다. 또한 그리스 복지비

기에 그 영향력은 과장된 면이 있습니다. 게다

용의 상당부분은 연금 지출인데 연금은 비용

가 부자증세를 통해 세수를 늘리겠다는 치프

이 될 수도 있지만, 국민들의 구매력을 뒷받침

라스 총리에게 트로이카는 부가세 증세(13%

하는 경제의 동력이기도 합니다. 복지로 그리

--> 23%)를 요구하여 갈등을 키웠습니다. 사

스가 망했다는 명제는 유난히 빠른 속도로 복

회 지도층의 부정부패가 문제라면서 트로이카

지와 사회안전망이 무너져 가고 있는 대한민

는 오히려 물가상승과 실물경기 둔화를 낳는

국의 현실을 가리기 위한 포장은 아닐까요?

부가세 증세를 건드린 것입니다. ‘부정부패 원 인론’ 역시 유로화와 금융자본의 책임을 돌리

2010년 기준으로 그리스의 탈세액은 200억

려는 구실은 아닐까요?

유로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스 부 유층이 세금을 피해 스위스 은행에 쌓아둔 돈

오히려 과도한 국방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

은 약 800억 유로로 평가됩니다. 그리스의 자

니다. 그리스는 GDP의 2%를 넘는 국방비를

영업 비중은 유럽연합 평균 15%의 두 배가 넘

지출하고 있으며 이는 나토 회원국 중 미국 다

는 31.9%인데 이 역시 정부의 조세 징수를 어

음으로 높습니다. 역사적으로 그리스는 유럽

렵게 하는 요인입니다. 분명 그리스가 해결해

의 기독교 세력이 이슬람의 진출을 막는 교두

야 하는 큰 숙제입니다.

보로서, 현대에 이르러서는 러시아의 남하정 책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지로서 중요한 지정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로존 이슈가

학적 의미를 갖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는

대두되기 전까지 그리스는 재정 문제가 크지

국력에 비해서 국방비 지출이 많으며 이는 그

않았습니다. 그리스 부유층의 부정부패가 뉴

리스 재정에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미국과

밀레니엄을 맞이하며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독일은 그리스에 무기를 팔아 최대의 이익을

36


풀어쓰는 경제이슈

누리는 수출국이기도 합니다. 6월까지 매파의

의 총부채 규모는 3,173억 유로이며, GDP 대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던 IMF가 그리스 국민

비 부채 비율은 177%에 이릅니다. 그리스 부

투표로 국민들의 분노와 그렉시트 가능성마저

채 3,173억 유로 중 IMF가 270억 유로, EU가

확인하자, 그리스 부채 탕감을 강하게 주장하

1,948억 유로, ECB가 260억 유로를 보유하고

고 나선 모습에서 단순히 경제논리 이상의 규

있으며, 전체 그리스 채무 중 트로이카에 진

정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채무가 78%에 달합니다. 2015년 6월의 IMF 보고서에 따르면 그리스가 신규자금을 수혈

불균형의 고착화

받더라도 가장 낙관적으로 전망했을 때 그리 스의 부채비율이 2020년에 150%, 2022년에

강도 높은 긴축을 감수했던 지난 5년, 그리

140%까지 밖에 안 내려갈 것이라고 합니다.

스의 국내총생산(GDP, 2014년 기준 1994

반면 독일은 수출 증가에 힘입어 경상흑자 규

억 달러)은 1/4 토막 났고, 실업률은 25%를

모가 2011년부터 EU 권고기준인 6%를 넘어

넘어 섰습니다. 2014년 말 현재 그리스 정부

섰습니다. 올해는 사상 최고 수준인 GDP대비 37


풀어쓰는 경제이슈

7.9~8.5%에 이를 것이란 관측도 나오고 있

차를 확대하고 금융 불균형 현상을 심화시키

습니다. 이는 남유럽 과다채무국의 흑자 규모

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에도 이를 완화하

(평균 1.6~1.7%)와 비교해 5배에 이르는 높

려는 독일 정부의 정책적 노력이 부족하다는

은 수준입니다. 독일의 기록적인 경상수지 흑

것이 적자국의 중론”이라 덧붙이고 있습니다.

자는 제조업의 생산 능력 및 품질 경쟁력에도 기인하겠으나 오히려 독일의 경제상황에 비해

그러나 독일은 불균형 문제를 독일의 경제적

저평가된 환율이 흑자의 주된 배경입니다. 이

희생 보다는 그리스 등 적자국가의 구조개혁

것이 2010년 유럽 부채위기가 터져 유럽 경

과 경쟁력 제고를 통해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

제가 어려워져서 유로가 약세를 보이던 시기

하다는 시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으려 합

에도 독일만 나홀로 호황을 누린 이유입니다.

니다. 이번 그리스 채무 협상 과정에서 강경

우리나라에 벤츠, BMW 등 독일차 비중이 급

노선으로 일관하여 그리스를 굴복시킨 메르켈

격히 올라가는 것, 도요타를 제치고 폭스바겐

총리의 태도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

이 세계1위가 된 것 역시 유로의 작동과 연관 이 깊습니다. 환율로 인한 불균형 문제는 유로화 출범 이후 줄곧 지적되어 오는 부분입니다. 한국은행 프 랑크푸르트 사무소의 ‘2015년 하반기 유로지 역 경제전망 및 주요 이슈 점검’을 주제로 낸 보고서(2015.7. 18)는 위와 같은 사실을 지적 하며 “독일의 흑자 누적이 회원국 간 성장 격

38


예술 그 본질적 가치

광복 70년, 민족적 가치를 찾아

풍물놀이

http://mag-mkyd21.tistory.com/203

39


예술 그 본질적 가치

민족. 민족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어떤 단상

아봅시다.

들을 떠올리게 할까요? 고리타분, 보수 혹은 극우, 갓 쓴 할아버지가 생각이 날지도 모릅

한국적 예술, 풍물

니다. 참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올해는 특히 8.15 광복을 맞은 지 70년이 되는 해 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초등학교 때 풍물을 배웁니다.

70년의 무게는 가볍지 않습니다. 그 무게만큼

“덩기덕 쿵덕” 이 정도 단어는 누구나 들어봤

우리는 민족에 대해 고민해보아야 하지 않을

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

까요.

는 한국적 예술은 풍물이 유일무이 합니다. 이 처럼 누구나 쉽게 두드릴 수 있는 풍물에 한국

예술도 다르지는 않습니다. 예술적 저변이 확

적 문화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녹아있습니다.

대되어있는 요즘. 우리가 접하는 예술은 대부 분 서양에서 들어온 회화와 음악이 주를 이룹

풍물은 움직임과 동작이 있는 공동체 문화이

니다. 한국적 가치와 미, 그 고유한 아름다움

며 종합예술입니다. 풍물은 우리 민족이 선호

을 예술로 느끼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했던 놀이방식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달리는 관광버스에서 트로트 뽕짝 춤판이 벌

조금은 생소할지 모르지만 우리 주변에 여전

어지거나, 시골 동네 마을잔치를 하면 흔히 볼

히 생동하게 살아 숨 쉬는 민족적 가치를 찾

수 있는 광경을 상상해봅시다.

아보고자 합니다. 단순한 형질이나 피부색 문 제가 아니라 문화로 이어지는 민족에 대한 고

퍼질러 앉아 먹고 마시고, 흥에 겨워 노래가

민입니다. 당신의 마음속에 아직 살아 숨 쉬고

시작되면 춤판이 벌어집니다. 이 때 따라오는

있을 우리 민족 문화의 찬란한 아름다움을 찾

게 바로 장단입니다. “얼쑤!” 잔치에서 젓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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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그 본질적 가치

으로 식탁을 두들기든, 풍물패가 굿판을 치든

여럿이 같이 모여 잘 살 수 있어야 나도 잘 살

지, 노래방에 가서 탬버린이라도 두들겨야 직

수 있다는 당위성이 있던 시대에 마을굿은 하

성이 풀립니다.

나의 의례이며, 종합예술이며, 신명나는 놀이 였습니다. 씨 뿌리고 물대고 모내기하고 추수

풍물은 마을굿을 기원으로 합니다. 마을굿은

하는 시기별 공동체적 소망을 나타내고 실천

옛날에 걸게 먹을거리를 한판 준비하고, 온 마

하기 위한 합의였습니다. 함께 슬픔을 이기고

을이 하나가 되어 얼싸덜싸 노는 장이었습니

기쁨을 나누는 놀이이자 예술로서 공연의 의

다. 이런 마을굿에 풍물의 진수가 담겨있습니

미를 굿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 풍물판은 모두가 주인이 될 수 있는 장입 니다. 꽹과리, 장구, 북, 소고 등 악기를 배우

풍물의 음악적 특징

지 않아도 흥이 나면 누구나 끼어들 수 있습니 다. 별로 어렵지도 않습니다. 몇 번 들으면 따

풍물을 음악으로만 규정하기에는 너무 협소합

라 칠 수 있는 장단입니다. 여기에 우리민족이

니다. 하지만 그 음악적 특징은 국악의 특징을

추구했던 예술이 있습니다. 공동체가 살아 숨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국악과 서양음악의 차

쉬는, 예술적 가치 말입니다.

이점을 하나만 꼽자면 화음 체계와 단음체계 41


예술 그 본질적 가치

입니다. 서양은 여러 음을 한꺼번에 사용하는 조화와 균형미를 중요시 한다면, 우리 음악은 전통적으로 한 음을 다양하게 변형하고 그 속 에서 ‘장단’을 중요시 합니다. 물론 국악에도 다양한 선율이 존재하지만 말입니다. 음악의 4대 요소인 리듬, 가락, 화성, 음색 중 인류가 태어나 음악이 만들어지는 초기의 기 원이 리듬입니다. 서양의 리듬과 대비되는 개

뒤의 “쿵 기덕 쿵 덕”은 풀어지는 기운입니다.

념이 바로 한국의 ‘장단’입니다. 리듬과 장단 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서양의 박자는 마디

이처럼 우리 장단은 내고, 달고, 맺고, 푸는 기

로 구분되는 반복적이고 수학적인 요소이며,

운의 흐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처럼 사

전체음악을 형성하는 기본요소입니다. 그러나

람의 들숨과 날숨의 호흡 구조와 음양의 조화

국악에서 장단은 마음을 근원에 두고 저절로

와 같은 자연의 이치를 다양한 리듬으로 만들

밖으로 나오는 울림으로 봅니다. 따라서 장단

어낸 것이 바로 장단입니다.

은 그것 자체만으로 자기 완결성을 가집니다. 이런 원리로 만들어진 장단은 음악으로 국한 예를 들어 굿거리장단은 “덩 기덕 쿵 더러러러

되지 않습니다. 솟아나는 사람의 다양한 감정

쿵 기덕 쿵 덕”입니다. 굿거리는 한 장단 안에

이 표출되어 목소리로 나오면 판소리나 창, 추

양의 성질을 가진 앞의 두 박자와 음의 성질

임새가 되고, 몸짓으로 풀어내면 춤이고, 악기

을 가진 뒤의 두 박자로 나뉘어 집니다. 앞의

로 나오면 음악입니다. 이러한 한국적 예술행

“덩 기덕 쿵 더러러러”는 감아 가는 기운이며,

위의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이 바로 장단입니다.

42


예술 그 본질적 가치

한국음악의 꽃, 장구 풍물에 담긴 원리, 우리 음악의 가장 기본이 담긴 악기를 꼽으라면 단연 ‘장구’입니다. 장 구는 풍물과 같은 민속음악부터 궁중음악, 종 교음악 등 모든 곳에 다 쓰이는 악기입니다. 설장구처럼 춤도 있으며 민요, 노동요 등 장구 하나만 있으면 못할 게 없을 정도입니다. 장구에는 자체에 궁편과 채편으로 나뉘어 음

인 “덩”은 소리의 성질을 담아 “합(合)”이라고

양의 원리가 그대로 들어가 있습니다. 최상급

표현하기도 합니다.

장구는 개가죽으로 만드는데 이때도 암수의 가죽을 엄격하게 구분해서 만듭니다. 치는 도

이처럼 한국 음악의 가치는 하나 음으로 표현

구 역시 채편을 치는 채는 강하고 높은 소리,

되는 자연스러움, 그 속에 담긴 장단, 장단 사

궁편을 치는 궁채는 부드럽고 낮은 소리를 내

이의 여유가 느껴질 때 비로소 알 수 있습니

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말처럼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너무 무지합니

이렇듯 여자소리와 남자소리가 하나로 만나

다. 우리 문화를 제대로 볼 줄 아는 것, 그 가

일체가 되면서 나오는 소리인 “덩”은 생명의

치와 즐거움을 자연스럽게 느끼는 일을 이제

근원과 같은 소리인 것입니다. 의성어적 표현

라도 즐겨보면 어떨까요. ■ 43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회·원·을·만·나·다

미군기지 앞에서 ‘미국, 그놈’ 을 노래하다 심규만 광주시민주권행동 회원 http://mag-mkyd21.tistory.com/204

7월 16일부터 25일까지 10일간 서울의 용산미군기지 3 번 게이트 앞에서 청년들이 ‘탄저균 국민조사단’이란 이 름으로 노숙농성에 들어갔다. 비가 오는 궂은 날씨 속에 서도 그 곳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지킨 청년들이 있었다. 심규만 광주시민주권행동 회원도 그 중 한 명이다. 탄저 균을 불법 반입하고도 우리 국민들을 무시하는 미국의 뻔뻔한 모습에 분노하고 있는 그는 조사단 안에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노래 등 다양한 활동으로 단원들 에게 활력을 주고 있었다. 그는 올해 초 대북전단 살포를 규탄하며 미국 백악관 앞 까지 날아가 농성을 진행하기도 했다. 한반도 평화와 국 민의 이익을 위해 자신이 필요한 곳이라면 마다하지 않 고 나서는 심규만 회원을 만나보았다.

44


우리가 미래다

본 : 안녕하세요. 먼저 회원들에게 간단한 소

본 : 감시단 활동을 간략히 한 번 소개해 주

개 부탁드립니다.

세요.

심규만 회원(이하 심) : 안녕하세요. 저는 광

심 : 감시단이 아니라 조사단입니다~하하. 9

주 시민주권행동에서 조직국장으로 활동 중인

박 10일의 노숙농성을 진행했는데, 영화 ‘지

33살 심규만이라고 합니다.

구를 지켜라’를 컨셉으로 잡고 한반도에 반입 된 탄저균의 위험성을 쉽고 재밌게 국민들과

본 : 이번에 “탄저균 국민조사단”으로 활동하

공감하기 위한 다양한 퍼포먼스를 진행했습

셨는데요. 어떤 계기로 참여하시게 되었나요?

니다. 저희가 상상력을 동원해 실험영상도 만 들어 보고, 탄저균 조사 활동도 가상으로 진

심 : 탄저균 불법반입이라는 심각한 상황이

행해 봤습니다. 뮤직비디오도 찍었구요. 이런

언론에 전혀 노출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심각

활동들을 sns를 통해 알렸고요. 그 외 오후 8

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국민의 목숨이 걸

시 용산미군기지 앞에서 촛불문화제를 진행

린 중차대한 일인데도 정부의 대응이 불법반

했고, 용산기지 주변 행진을 통한 시민만남,

입을 주도한 미국의 변호인 역할만 할 뿐 어

게이트 앞 1인 시위 등의 활동도 진행했습니

떤 것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모습에 경악했습

다.(※ 탄저균실험실 산소마스크의 ‘미국, 그

니다. 이 모든 상황을 국민들과 함께 공유하고

놈’ https://youtu.be/Vy_3nY6Jej8)

세균실험이라는 무시무시한 일이 한반도에서 다시는 자행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국민의 힘

본 : 활동을 하시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이

이 절실하다 생각해서 국민조사단에 참여하게

있다면요? 그리고 활동을 하시면서 느낀 점이

되었습니다.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45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심 : 활동을 하면서 인상 깊었던 건 기본 농성

람에게도 전파되고 심각한 내용이지만 즐겁게

에 대한 인식(자리 잡고 앉아서 오는 시민 만

활동할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준 거 같아서 그

나는 방식)을 바꿔버린 활동이 아니었나 싶습

게 참 좋았던 거 같아요.

니다. 언론 사업을 잘 진행하고 실제 국민들과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농성방식이 기억에 많이

본 : 미군기지 게이트 앞에서 농성을 하셨는

남습니다. 노숙할 때 코 속으로 밀려왔던 매연

데, 직접 경험한 미군기지란 어떤 곳인 것 같

도 기억에 남네요. 하하. 활동을 하면서 느낀

으세요?

점은 일단 재미있었다는 겁니다. 실제 활동하 는 사람들이 재미가 있으니 그 기운이 다른 사

46

심 : 분명 대한민국 서울 용산에 존재하는 곳


우리가 미래다

임에도 주소지가 미국으로 돼있는 곳, 우리 땅 이지만 우리 땅이 아닌 곳, 이런 아이러니한 곳이 미군기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 고 탄저균 실험으로 대표되는 세균실험이나 군사훈련을 대한민국에 전혀 알리지 않고 진 행하는 미군의 행태가 참 뻔뻔하다 생각했습 니다. 자국의 경우는 국민들의 반발이 우려돼 사막 한 가운데에 실험실을 설치해놓고선 정 작 대한민국은 도심 한 가운데에서 그런 위험 천만한 실험을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하던지……. 그리고 우리나 라에서 세균실험을 진행한 이유가 ‘우호적이 라 반발이 적다는 것’이라는 소식을 접했을 때 는 정말 화도 많이 나더라구요. 주권국가를 이 런 식으로 대해도 되는건가? 미국이라는 나라 가 깡패국가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정도 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다시 들면서 미국에 대 한 악감정이 더 커지는 계기가 됐던 거 같습 니다. 본 : 이후 탄저균 문제와 관련한 계획이 있나

요? 탄저균 문제와 관련해 하고 싶은 말이 있 으시면 해 주세요. 심 : 제가 활동하는 곳이 광주라서 지역으로 내려가 시민들과 함께 이 사실을 더 많이 공유 할 수 있는 활동을 진행할 계획입니다. 주 1회 마당사업으로 시민을 만나고 선전물을 만들어 사태의 심각성을 공유하는 활동을 진행할 예 정에 있습니다. 미국의 이 오만방자한 행태와

47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국민의 안전 따위는 전혀 생각지 않는 대한민

이 변화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

국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

다. 국민들의 힘을 바탕으로 싸워나간다면 사

그들이 알 필요가 있다 생각합니다. 그것을 모

회 전반에 많은 변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으는 활동을 진행할 예정이구요.

생각됩니다. 승리는 분명 우리 앞에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승리를 향해 열심히 투

본 : 끝으로 전국의 회원들에게 한마디 해 주

쟁하고 나아갑시다. 하하. 저도 지역에서 승리

세요.

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 다. ■

심 : 날이 점점 더워집니다. 건강에 유의하시 구요. 국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는 이 시점 에 우리의 활동이 어찌되느냐에 따라 많은 것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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