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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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도 오지않을텐가 [ 11월 14일 민중총궐기 ]

<시사칼럼1> 내가, 우리가 민중총궐기에 참가해야 하는 이유 <시사칼럼2> 한국사교과서 국정화와 우리의 삶 <이달의 역사> 2002년 11월 13일, 한국전쟁 이후 단일조직 최대 집회가 펼쳐지다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대한민국은 어떻게 “헬조선”이 됐나?

월간

본 2015.11

http://mkyd.org/news_b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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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민권연대) 블로그 http://mkyd.org/news_bon

특별기획

발행일 2015년 11월 12일 (21호) 문의 http://mkyd.org/news_b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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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민중들의 함성이 울려 퍼진다

중국동북지역답사기

고구려의 기상, 항일의 함성! 중국동북을 가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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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알면 세상이 보인다

과학적 노동관리의 탄생과 한계 시사칼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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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우리가 민중총궐기에 참가해야 하는 이유 시사칼럼2

광복 70주년, 민족적 가치를 찾아 살풀이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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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교과서 국정화와 우리의 삶 이달의 역사

대한민국은 어떻게 “헬조선”이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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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무기

북한이 열병식을 개최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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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미래다

길 위에서 투쟁을 배우고 노래하다. 김영경 회원

2011년 10월 13일, 전에 없던 환대의 이면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예술, 그 본질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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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을 찾아서

작지만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나라를 원한다! 이양훈 후원회원


편집자의 글

이제 제법 날씨가 쌀쌀합니다. 날씨가 추워질수록 세월호 농성장의 유가족들, 광고탑 위 의 노동자들 등 거리에서 사회의 부조리에 온 몸으로 저항하는 분들의 겨울나기가 걱정 입니다. 하지만 비단 세월호 농성장, 광고탑 위 노동자들뿐만이 아닙니다. 좁은 취업문에 허덕이 고 있는 대학생과 청년들, 전세값·집값 폭등에 살 곳을 찾아 헤매는 신혼부부들, TPP협 상 등 농업 말살 정책으로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는 농민들, 낮은 임금과 비정규직화를 강 요당하는 노동자들, 가게를 차려도 1년을 버티기가 힘든 자영업자들, 빈곤한 생활 속에서 자살을 선택하는 노인들. 이미 전 국민의 체감 날씨는 겨울입니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권은 ‘경제민주화’, ‘복지공약’은 내팽개치더니 한 발 더 나아가 ‘노 동개악’을 강행하고 있습니다. 재벌들에게는 규제완화다 하며 퍼주기를 하면서도 서민들 에게는 낮은 임금과 고용불안, 주거불안을 강요합니다. 그것도 모자라 박근혜 정권은 역 사마저 자신의 입맛에 맞게 뜯어 고치려 하고 있습니다. 여러 시민사회단체들은 오는 11월 14일, 민중총궐기를 준비해 오고 있습니다. 이대로는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기가 너무 힘겹기 때문입니다. ‘헬 조선’이란 단어가 단순히 인터넷 상을 떠도는 그냥 웃어넘길 신조어가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번호는 11월 14일 민중총궐기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 보았습니다. 왜 민중총궐기를 하 는 것이며, 민중총궐기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살펴보았고, 민중총궐기와 교과서 국 정화 문제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단일조직으로는 최 대 집회였다고 하는 2002년 11월 농민대회를 통해 현재의 우리들이 어떤 자세와 마음으 로 민중총궐기를 준비해야 하는지 돌아봤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삶이 왜 이렇게 힘들어 졌는지 경제적인 측면에서 그 궤적을 살펴봤습니다. 사회는 한 사람의 권력자가 좌지우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한 사람의 권력자가 자 기 입맛대로 써내려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회의 주인은 국민임을, 역사의 주체는 국민 임을 박근혜 정권에게 똑똑히 보여줘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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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내가, 우리가 민중총궐기에 참가해야하는 이유 http://goo.gl/cxK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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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지금 전국 곳곳에서는 박근혜 정부의 노동정책에 대해 국민들의 의견을 묻 는 사상 첫 국민투표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국민투표는 여러 시민사회단체들이 11월 14일 민중총궐기를 준비하면서 진행하는 것으로, 최근 정부가 강행하고 있는 ‘박근혜식 노동정책’이 청년 일자리를 만드는 ‘개혁’인지, 평생 비정규직 시대로 가는 ‘재앙’인지를 국민 들에게 묻는 것입니다.

▼ 뉴스타파 사진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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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 갈수록 고령화되고 있는 농촌에서 우리 쌀을 지키는 것이 바로 농촌을 지키는 문제라

고 인식하고 서천농민회는 농민들에게 이번 민중총궐기에 꼭 함께 하자고 호소하고 있다.

한편 충남 서천 마산면 등을 비롯한 농촌 곳곳에서는 11월 14일 민중총궐기 와 농민대회를 앞두고 서명운동, 마을 간담회 등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간담회에서 농민들은 갈수록 하락하고 있는 쌀값에 대한 문제의식을 함께 공 유하고, 우리 쌀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밥쌀용 쌀 수입을 ‘민중총궐기’를 통 해 막아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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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총궐기? 지난 9월 22일 한국노총을 비롯해 전국농민회총연맹, 전국빈민연대 등 58개 부문별 단체들은 민중총궐기투쟁본부를 발족시켰습니다. 소속단체들은 일자리·노동, 농업, 민생빈곤, 청년학생, 민주주의, 인권, 자 주평화, 세월호, 생태환경, 사회공공성, 재벌책임 강화 등 11대 분야에 걸쳐 ‘세상을 바꾸는 11대 요구’를 제시하고 오는 11월 14일 서울에서 민중총궐 기대회를 개최하겠다고 선포했습니다. 왜 민중총궐기일까?

대한민국의 세계적 위상 가계부채 1100조, 비정규직 1000만명, 저임금 노동자 500만명 OECD 34개 회원국 중 해고가 쉬운 나라 30위 세계에서 장시간노동 2위, 노인빈곤율 2위, 자살율 1위 지난 8월 박근혜 대통령은 청년실업문제를 해결하겠다면서 올해 내에 모든 공공기관의 임금피크제(정년연장 또는 정년 후 재고용하면서 일정 나이, 근 속기간을 기준으로 임금을 감액하는 제도) 도입을 강하게 추진하겠다는 의사 를 국민들에게 피력한 바 있습니다. 정부는 공공기관에 패널티를 주면서까지 임금피크제를 강력하게 밀어붙이 고 있지만, 많은 국민들은 이 정책이 청년실업 해소 효과는 미비하면서 퇴직 7


시사칼럼

▲ 자료 : 민중총궐기투쟁본부

을 압박하는 형태로 진행되어 고용의 질을 하락시킬 것이라는 인신을 가지 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은 쉬운 해고,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조건 완 화 등의 내용이 담긴 5대 노동법안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박근혜식 노동개악’은 노동계와 국민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노동현 안을 논의하는 노(한국노총)·사(한국경영자총협회 등)·정(산업통상자원부 등) 위원회 현장에서 금속노조 위원장이 분신을 시도하는 사태까지 일어나 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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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만약 ‘노동개악’을 막지 못한다면 이미 비정규직이 1천만에 가까운 시대에 정규직조차도 ‘쉬운해고’로 몰리고 충분한 ‘정년’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 이 되어 모든 정규직의 사실상의 ‘비정규직화’가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농민들의 삶은 더욱더 열악합니다.

대한민국 농민들의 평균연간소득 1030만원. 농가평균부채 2080만원. 한국의 곡물자급률이 OECD 34개 회원국 중 32번째에 해당되는 24.0%에 불과함에도 작년 FTA로 인해 수입된 농수산물은 20조 8066억원에 달했습 니다. 앞으로 추진될 한중FTA, TPP는 또 얼마나 많은 농업분야를 내주고 또 농민 들의 삶을 피폐하게 할지 우려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 농민들은 지금 민중총궐기를 선포하고, 민중총 궐기를 잘 만들기 위해 국민투표, 간담회, 선전전 등을 진행하고 있는 것입 니다. 이외에도 민중총궐기에는 학생, 빈민, 장애인의 요구인 대학구조조정 중단, 노점단속 중단, 장애등급제 폐지 등도 담겨져 있습니다. 9


시사칼럼

▲ 자료 : 민중총궐기투쟁본부

민중총궐기의 또 다른 의제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 10월 12일 박근혜 정부는 한국사 교과서 국정 전환을 발표했습니다. 정부와 새누리당은 현재의 교과서들을 비판하고 ‘바른 교과서’, ‘균형교과서’ 라 는 용어들을 사용하면서 새로운 국정교과서를 발간하겠다고 선포를 한 것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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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기존의 역사교과서를 바꾸려고 하는 세력들은 식민지근대화론에 입각해 친 일·독재를 미화한다는 비난을 받은 바 있는 ‘교학사 교과서’를 만들어 내 기도 했습니다. 이 교과서는 정부의 지지 하에 2013년 검인정을 통과했지만 사실상 채택률이 0%대에 그친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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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민중총궐기에서 역사교육을 후퇴시키려는 박근혜정부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들도 담길 것입니다. 그 외에도 민중총궐기에는 참사 600일이 다가오고 있지만 아직까지 해결되 지 않은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 박근혜 정부의 남북대결 및 흡수통일정책 비판 등의 요구들도 담길 예정입니다. 민중총궐기에 나도 참가해야 할까? 그렇다면 ‘민중총궐기’는 나와는 동떨어진, 그냥 진보단체들이 한 번 모여서 시위를 하는 그런 행사일까요? 앞에 제시되었듯이 민중총궐기의 요구안들은 일반 서민들의 요구를 반영하 고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 ‘내’가 꼭 민중총궐기에 함께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은 중학생들까지 나서서 한국사교과서 국정화를 반 대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독단적으로 한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비단 이번뿐만이 아니라 국정원 대선개입 문제, 세월호 진상규명 문제, 노동개악 문제 등 박근혜 정권은 다른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 다. 불통정권이라는 말이 여당 내에서도 나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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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단적인 국정운영을 막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숱한 국민들의 피와 땀 으로 만들어진 민주주의 제도가 크게 후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을 막을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있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로 압도적으로 많은 국민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것입니다. 민중총궐기에 1만이 모이느냐 10만이 모이느냐 100만이 모이느냐에 따라 서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은 국민들의 저항의지를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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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귀를 막고 있는 정치인들이라 하더라도 국민들의 반발이 높고, 또 외 신들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면 함부로 국민들의 목소리를 무시하지 못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의 독주를 막을 수 있는 길은 ‘단결’에 있 습니다. 지금 소위 ‘진보’, ‘개혁’적 성향을 가진 여러 사회, 시민 세력들은 하나의 단결된 움직임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각자가 자신의 요구 를 가지고 각각 박근혜 정부에 대응을 하고 있는 형태입니다. 나아가 박근혜 정권은 청년실업 문제가 노령층 때문인 것처럼, 비정규직 문 제가 고임금의 정규직 때문인 것처럼 사실을 호도하며 사회갈등과 분열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서로간의 갈등으로 인해 지쳐갈 수 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국민들이 단결해서 공동의 목소리를 함께 내지 못한다면 현재의 박근혜 정부 에 맞서 제대로 대응하기가 힘듭니다. 그렇기에 공동의 요구를 가지고 함께 싸우면서 단결의 기운을 높여야 합니다. 이번 민중총궐기를 계기로 공동의 요구를 함께 내걸고 단결의 분위기를 더욱 높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민중총궐기를 통해 국민들이 정치의 주인으로 나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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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총궐기의 ‘세상을 바꾸는 11개의 요구’들은 한국에서 살아가는 국민들 이라면 누구나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것들입니다. 이런 요구들을 정치권이 실현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직접 나서서 정부에게 요구하는 자리가 민중총궐기입니다. 특히 당면하여 내년 4월에는 총선이 있습니다. 총선에서 어떤 정치적 의제들 이 화두가 되고 어떤 공약들이 ‘약속’되는가는 국민들이 어떤 목소리를 내느 냐에 따라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런 국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없다면 국민들 스 스로가 만들 수도 있습니다. 현재 박근혜 정부가 ‘노동개악’을 ‘개혁’으로, ‘한국사교과서 국정화’를 ‘올 바른 교과서’로 뒤바꿔서 공세적인 여론홍보사업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민중총궐기를 통해, 한 국가의 역사는 대통령 한 사람, 권력자 몇몇이 쓰는 것 이 아니라 국민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임을 당당히 선언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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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교과서 국정화와 우리의 삶

http://goo.gl/1iFfT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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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권하에서 살아가고 있는 서민들의 삶은 참으로 고단합니다. ‘노동 개혁’을 한다며 노동자들에게 더 쉬운 해고와 더 낮은 임금을 강요하고 있 고, TPP협상이다, 쌀시장 전면개방이다 하면서 이미 벼랑 끝으로 내몰린 농 민들을 낭떠러지로 떨어뜨리려 합니다. 전세값은 치솟는데 오히려 빚을 더 내면 된다고 이야기 해 왔던 것이 박근혜 정권이었습니다. 청년들에게 이 사 회가 ‘헬조선’ 으로 보인지 오래입니다. 이런 박근혜 정권이 이제는 역사마저 자신들의 마음대로 바꾸려 합니다. 박 근혜 정권이 역사교과서를 국정화 하려는 것은 전 국민이 나서서 반드시 막 아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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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여러 시민사회단체들은 11월 14일 ‘민중총궐기’를 준비하고 있었습 니다. 노동개혁, TPP 등으로 민중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는 박근혜 정권 에 맞서 민중들의 목소리를 높여야 할 필요가 컸기 때문입니다. 민중총궐기 를 준비해 온 여러 시민사회 단체들이 청년, 노동자, 농민들의 요구에 더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일 예정입니다. 한국사교 과서 국정화 문제가 단순히 역사의 해석 문제를 넘어서 우리의 경제, 사회생 활과도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사교과서를 국정화 하려는 집단들이 왜곡하고 싶은 역사가 어떤 것인지 를 살펴보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가 우리의 삶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 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 몇 가지만 들어봅시다. 박근혜 정권이 만들려는 한국사 교과서는 제2의 세월호 참사를 부른다 우선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주장을 펴는 세력들은 자신들의 친일행각을 희석 시키려 합니다. 그러면서 들고 나오는 것이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입니다. 친 일파들이 일제에 복무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그런 선택이 우리 사 회의 근대화에, 즉 경제발전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 아니냐는 주장입니다. 많 은 국민들이 박근혜 정권이 만들려는 한국사 교과서가 친일교과서가 될 것 이라고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교과서를 보고배운 우리 아이들은 어떤 사고를 가지게 될까요? 아이들 은 일제시대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을 고민하게 될 것이고, 나라를 팔아먹어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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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경제발전에 기여했다면 그 행동이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 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결국에는 다른 사회적 가치는 외면한 채 경제논리를 앞세워 사회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끔찍한 일입니다. 우리는 얼마 전 경제논리만을 앞세우는 사회 가 어떤 처참한 일을 낳을 수 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바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그것입니다. 이윤추구를 위해 각종 규제를 완화하고 무시했던 것이 세월호 참사를 낳은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돈의 논리 앞에서 ‘안전’ 등 다른 사회적 가치가 들어설 자리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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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경제논리의 틀 속에 갇힌 아이들이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할 시기가 된 다면 정글 자본주의는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고, 무한경쟁에 치이고, 1등만 이 살아남는 세상 속에서 좌절감을 맛보는 사람들은 더욱 늘어날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일반 사람들이 버텨내기 힘든 사회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박근혜 정권이 만들려는 한국사 교과서는 ‘헬조선’을 재생산한다 다음으로 박근혜 정권이 한국사교과서 국정화를 하려는 것은 박정희 정권을 미화하기 위해서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다는 말들을 지금까지 해 오기도 했습니다. 박정의 정권을 미화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독재를 옹호하고, 경제발전의 업적을 추켜세우겠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친일’ 사례와 마찬가지로 독재를 하더라도 경제만 발전시키면 된다는 사고를 기반으로 합니다. 사람들을 폭력 을 써서 억압하고 탄압하더라도, 민주주의를 짓밟아도 경제를 발전시켰으면 그만이라는(물론 박정희 정권이 잘해서 경제를 발전시켰다는 주장도 근거가 빈약합니다) 사고를 주입하려 하는 것입니다. 이런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들 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더군다나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이란 것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소수 재벌 을 육성하고, 특혜를 줘가며 경제성장을 추구해 왔던 것이 박정희 정권이었 습니다. 그 속에서 노동자, 농민들은 고혈을 빨려야 했습니다. 나아가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의 결과가 지금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재벌대기업들 20


시사칼럼

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고, 중소기업은 설자리를 잃었습니다. 노 동자, 농민들의 삶은 전혀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박근혜 정권이 이러한 박정의 정권의 모습을 미화하면서 하고 싶은 것이 무 엇일지는 뻔합니다. 사람들에게 기업이 잘 되어야 국민들도 잘 살 수 있다며 다시 한 번 고통을 감내하라고 강요할 것입니다. 박근혜 정권이 ‘경제민주 화’, ‘복지’ 등은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치고 다시 재벌중심의 수출성장 정책 으로 돌아선 것에서 박근혜 정권의 의도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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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한국경제는 세계경제의 침체 속에 저성장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재벌대기 업들은 기존과 같은 방법으로는 이전처럼 성장하기가 힘들어졌습니다. 그 어 려움을 보수정권은 국민들에게 전가하려 합니다. 경제가 어렵다며 별말 말고 시키는 대로 일만 하라 합니다. 하지만 재벌 대기업 몇몇이 잘 나간다고 서민 경제가 좋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2008년 세계경제 위기를 통해 우리는 이미 확인한 바 있습니다. 결국 1%를 위한 경제정책은 지속될 것이며 99%의 서 민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 질 것입니다. 나아가 이런 경제정책으로는 앞으로 한국경제를 이끌어 갈수도 없습니다. 2008년 이후 세계경제는 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오고 있지 못합니다. 그동안 세계경제를 지탱해 왔던 중국의 성장률마저 주춤하면서 앞으로 더 큰 위기 가 올 가능성도 큽니다. 이러한 때 소수 재벌 중심의 수출주도 성장을 하려 한다면 한국경제의 전망은 암울하기만 합니다. 헬조선은 나아지기는커녕 지 옥의 구렁텅이에 더 많은 사람들이 떨어질 것입니다. 박근혜 정권이 자행하고 있는 역사쿠데타는 단순히 역사 해석을 자신의 입 맛대로 몇 군데 바꾸려고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의 머릿속을 바 꾸려고 하는 것이고, 결국 우리의 경제, 사회생활과도 직결된 문제입니다. 우 리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도 반드시 박근혜 정권의 역사쿠데타를 막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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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역사

2002년 11월 13일 한국전쟁 이후 단일조직 최대 집회가 펼쳐지다 http://goo.gl/CECS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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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역사

16대 대선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2002년 11월 13일, 한국의 언론은 여의도 를 주목했습니다. 국회에 주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농민운동, 아니 한국 전 쟁 이후 최대 규모로 열린 30만 농민대투쟁에 주목한 것입니다. 농민과 노동자, 학생, 시민 등 참가 인원 13만 명, 전국 각지에서 대절해 타 고 온 버스만도 3,000대에 가까웠습니다. 그렇지만 농민들의 분노는 3,000대의 버스로도 다 감당되지 않았습니다. 광 주에서는 500명이 넘는 농민들이 차가 부족해 올라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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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역사

국 전세버스를 타지 못한 농민들은 대중교통까지 이용해 가면서 여의도 한 강 고수부지에 모였습니다. 대선 직전에 이루어진 대회인 만큼 대선후보들도 행사장을 찾았습니다. 당시 한나라당 후보였던 이회창 후보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 국민통합21의 정몽준 후보가 참석해 농업을 지 키겠다고 앞 다투어 연설했습니다. 이 때 노무현 후보가 날아온 계란에 맞은 유명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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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역사

절박함이 농민을 움직이다 10만 명이 넘는 농민들이 여의도를 찾은 것은 농업의 상황이 너무나 절박했 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농민들은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농 사를 지었습니다. 식량주권은 나몰라라하는 한국 정부는 농민들의 생존권을 제대로 보장해주 지 않았습니다. 운이 나빠 많이 생산되는 작물을 심으면 제 값을 받지 못해 그 해 농사는 포기한 셈 쳐버리고, 우연히 가격이 괜찮은 작물을 심으면 가 격이 올라간다고 외국에서 농산물을 수입해 역시 제값을 받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나마 정부에서 수매를 통해 가격을 보장해 주었던 쌀마저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조금씩이나마 오르고 있던 쌀 수매가가 2001년 10% 가까 이 하락한 것입니다. 마지막 남은 보루마저 위협받고 있었던 셈입니다. 특히 2003년 한-칠레 FTA와 2004년 WTO 재협상을 앞두고 농민들은 더 큰 우려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칠레 FTA는 한국 과수 농가에 적잖은 피 해를 예고하고 있었으며 WTO 재협상은 쌀개방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에 위 태로운 한국 농업에 치명타를 안길 수 있다는 우려를 던져주었습니다. 이런 절박함이 농민들을 움직였습니다. 농업이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농민 들의 목소리를 전달하지 않는다면 농업은 무너질 것이라는 위기감이 10만이 넘는 농민들을 움직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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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역사

다른 시야, 굳은 의지 30만 농민대투쟁을 제안한 것은 여주군 농민회였습니다. 여주군 농민회는 비교적 부농들이 있는 곳입니다. 그렇지만 다가올 한-칠레 FTA와 WTO 재 협상을 그냥 두고 보면 미래가 없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조직력을 총동원해 농민의 힘을 보여주고 정치력을 가질 수 있는 행사를 치러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전체 농민의 10%를 모아보 자는 제안을 했고 이것이 ‘30만 농민대투쟁’이라는 사업으로 된 것입니다. 그때까지 전국농민대회의 규모는 약 2만 명 정도, 30만 명을 모으기 위해서 는 전혀 다른 시야와 준비자세로 대회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2002년 1월 17일 첫 제안이 이루어지고 3월 12일 전국의장단 회장단 연수, 3월 19일 전국 간부 활동가 토론회를 거치면서 30만 대투쟁의 내용이 다듬 어지고, 4월 24일 9기 1차 임시중앙위원회에서 최종 계획이 결정이 되었습 니다. 30만 농민대항쟁의 가장 주요한 수단은 마을 간담회와 이장단 조직화였다 고 합니다. 이전처럼 몇 명의 농민회 회원을 만나는 것으로는 30만 대투쟁 을 만들 수 없었습니다. 마을 전체를 움직여야 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겁니다. 각 시·군 농민회는 면이장단협의회와 군협의회에 적극 결합하여 이장단 설 득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워낙 절박한 상황이었기 때 27


이달의 역사

문에 10월 31일 WTO 쌀수입개방반대,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저지 전국이 장단 기자회견 및 11월 13일 30만 농민대항쟁 투쟁선포식에 100명의 이장 들이 참석하고 6,800명의 이장선언을 이루어 내는 큰 성과를 만들었습니다. 여름부터는 마을 간담회도 많이 진행했다고 합니다. 농민회의 면지회간부들 이 일반 농민을 직접 만나고, ‘30만 농민대투쟁’을 해설하는 사업을 진행 하면서 성과를 냈습니다. 지역별로 강사단을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전 마을 순회교육을 성사했습니다. 이장이 움직이고 농민을 직접 만나자 마을 전체가 움직였습니다. 30만 대투 쟁을 제안했던 여주군의 경우 11월 13일 4,000명의 농민이 대회에 참가했 다고 합니다. 2002년 여주군의 농가 인구가 약 3만 3천명 정도였다고 하니 여주군에 있는 농민 중 10% 이상이 대회에 참가한 것입니다. 이 땅의 주인으로, 정치의 주인으로 이 투쟁이 처음부터 성사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없었습니다. 2002 년 1월 17일 첫 제안에서도 반신반의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고 합니다. 그 러나 이대로는 물러설 수 없다는 결기와 목숨 걸고 한판 큰 싸움을 벌여보자 는 결의, 그리고 대중에 대한 신뢰가 결국 30만 대투쟁을 성공적으로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박훈식 전농 20주년기념사업회 편찬위원회 사무국장은 2011년 한국농정신 28


이달의 역사

문에 기고한 글에서 30만 대투쟁의 결과 직접 농민을 만나가면서 명맥만 유 지하던 농민회 분회, 지회가 다시 살아나고 농민회 조직도 단단해졌다고 밝 혔습니다. 그리고 이 때 얻은 자신감으로 FTA투쟁, WTO투쟁, DDA(도하개발 아젠다)투쟁도 해나갔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농민대투쟁을 주도했던 전국농민회총연맹이 민주노동당을 지지하여 정치세력화 하는 것까지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 하여 2004년과 2008년, 농민 국회의원도 탄생할 수 있었고 지역에서 농민 군의원, 시의원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30만 대투쟁의 결과 항상 피해를 받고 수세적이었던 농민들이 이 땅의 주인 으로 정치의 주인으로 나서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2015년 현재, 민중들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한 국정부는 민중들의 삶을 보듬어주기는커녕 역사마저 과거로 돌리며 친일, 친 미, 독재미화, 반북 이데올로기 공세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임에도 제대로 된 야당은 보이지 않고 민중들은 대안을 찾지 못하 고 있는 절박한 상황입니다. 미래를 개척했던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민중들이었습니다. 2002년 농민들이 30만 대투쟁을 통해 이 땅의 주인으로, 정치의 주인으로 나서려고 했던 것처 럼 2015년 11월 우리들도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29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대한민국은 어떻게 헬조선이 됐나? 정욱 실천자산관리연구소 소장

http://goo.gl/fX32z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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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요즘 “흙수저”, “N포세대”라는 신조어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흙수저”는 부 잣집 태생을 “금수저”라고 부르는 데에서 나온 말입니다. 출생성분(?)에 따 라서 물고 태어나는 수저의 재질이 바뀐다는 얘기인데, 금-은-동 아래에 철 이나 알루미늄도 아니고 흙으로 만든 수저가 놓입니다. 허술하기 짝이 없고 사실상 쓸모가 없는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으니 인생살이 출발부터가 고단합 니다. “N포세대”라는 말은 “3포세대”라는 신조어에서 출발합니다. 청년세대는 연 애와 결혼, 출산 세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는 풍자에서 생긴 신조어가 “3포세 대”인데, 이명박 정부 시기인 2011년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 후 박근혜 정 부 들어서며 내 집 마련과 취업 포기가 더해져 “5포세대”가 되더니, 꿈과 인 간관계 포기가 더해져 “7포세대”, 최근에는 건강과 외모까지 포기해야 한다 해서 “9포세대”로 발전해 왔습니다. 결국 포기해야 하는 것에 수를 매길 수 가 없이 인생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로 부정수(不定數) ‘N’을 붙인 “N포세대”에 이르렀습니다. 전에 없던 이런 암울한 유행어들의 끝판왕이 바로 “헬조선”입니다. 지옥을 뜻하는 헬(hell)과 조선(朝鮮)을 합성함으로써 ‘지옥 같은 대한민국, 그것도 조선시대로까지 퇴행한 사회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인터넷에서 청년층의 불안과 절망, 분노를 담아 쓰이기 시작하였으나, 세대를 가리지 않 고 광범위한 공감을 얻어 최근에는 언론에서도 심심치 않게 사용되는 표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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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어느 시대나 사회상을 반영한 신조어가 나타나곤 하였으나, 과거엔 주로 가 치중립적인 세대의 특징을 표현(X세대, N세대)하거나 취업난, 조기퇴출 등 특정 사회현상을 풍자한(이태백, 사오정) 신조어가 공감을 얻곤 했습니다. 그 런데 최근의 신조어들은 과거의 것들에 비해서 훨씬 포괄적이고 극단적인 절 망과 분노를 담고 있어서, 현재의 대한민국을 사는 국민들의 고통이 어디에 까지 이르고 있는 지 짐작하게 합니다. 얼마 전 천만 영화 “국제시장”이 추억했던 “개발경제” 모델은 한 때 대한민 국을 전도양양한 신흥국의 “교과서”인양 칭송받게 만든 적도 있었습니다. 그 런데 OECD에 가입한 지 채 20년도 되지 않은 2015년의 대한민국은 어쩌 다 국민들 스스로 “지옥”이라 부르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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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의 개발경제가 낳은 부작용이 그 딸인 박근혜의 집권기에 이르러 비로소 곪 아터져 나오는 것’이라는 일각의 주장이 그저 감정적인 선동에 불과할까요? 수출지상주의, 농민-노동자의 희생을 낳다 “한강의 기적”은 과연 기적이었을까요? 기적이라면 누구를 위한 기적이었 을까요? “한강의 기적”의 본질을 살펴보면 “헬조선”의 근원을 이해할 수 있 을지 모릅니다. 1945년 해방 이후 민족의 염원이었던 자주적 독립국가 수립은 좌절을 겪고 분단체제를 맞이하게 됩니다. 분단 이후 휴전선 이남에서는 농지개혁 대신 미국의 원조경제 하에서 농업의 파괴와 함께 “대한민국호”가 항해를 시작합 니다. 1961년 군사쿠데타를 통해 박정희가 집권한 후 “대한민국호”는 본격적으로 미국에 의존적인 수출경제로 급속하게 이행하며 내수 기반의 건강한 자립경 제와는 먼 길을 가기 시작합니다. “개발경제체제”라고도 불리는 박정희의 경 제모델은 본질적으로 농업의 희생 위에 세워졌습니다. 추곡수매제도와 이중 곡가제가 대표적인 수단이었습니다. 본디 이중곡가제는 정부가 쌀을 높은 가 격에 수매해서 도시의 소비자들에게 싸게 공급하는 정책인데, 정부가 추곡수 매제도를 통해 여전히 낮은 정부고시가격으로 쌀을 수매하면서 농업은 수지 가 안맞는 산업이 되었습니다. 결국 농민들은 도시로 대량 이주를 하여 광범 위한 산업예비군을 형성하는 한편, 낮은 쌀 가격은 도시노동자들의 저임금 33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구조를 지탱하는 토대를 구축하게 됩니다. 미국의 원조(본질은 한국경제의 하청구조화)와 농업 파괴를 통한 저임금의 산업예비군 형성, 독재권력의 정경유착 구조화 속에서 극소수 수출 대기업( 재벌)의 기형적 성장의 대로(大路)가 열린 반면 노동자, 농민의 궁핍화와 이 에 따른 내수기반 파괴로 국가 경제는 약체화, 기형화로 급속히 접어들게 되 었습니다. 이러한 약탈적 개발경제체제는 국민 저항을 최소화하고 그 기틀을 빠르게 다지기 위해 적극적인 이데올로기 선전을 총동원하였습니다. 전 사회적 ‘반 공주의화’와 ‘새마을운동’, ‘근대화’ 따위의 발전주의적인 캠페인은 외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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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적(북한)을 설정하여 내부의 통제력을 높임과 동시에, 수출[경제]을 위해 농 업[개인]은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 사회의 이성을 마비시켰습니 다. 이러한 정책적 기조는 그 디테일은 다소 다를지언정 역대 정부의 일관된 경제정책과 국정 운영원리로서 뿌리 깊게 자리잡았습니다. 한편 “대한민국호”의 주 동력이라 할 수 있는 “수출지상주의(발전주의)”는 각종 “시스템”을 구축하여 사회적 기회와 부(富)의 분배에 있어서 불평등을 심화하는 동시에 이러한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작동 하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고환율 정책입니다. 박정희의 개발경제체제로 인해 미국 주 도 세계자본주의의 하청 기지로 전락한 “대한민국호”는 절대가치가 되어버 린 “수출”을 위해 고환율(낮은 원화 가치) 정책을 지속합니다. 원화가치 절하 로 인해 수출제품은 해외시장에서 가격경쟁력을 갖는 반면, 노동자, 농민들 의 실질소득은 떨어져 궁핍은 지속되고 내수시장의 활력은 더욱 낮아지게 됩 니다. 결국 수출중심체제와 환율 조작을 통해 대다수 노동자, 농민들의 주머 니에서 재벌들의 주머니로 부(富)가 이동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주력 수출산업인 중공업 진흥을 위해 산업용 에너지(전기, 석유 등) 가격을 가정용에 비해 현저하게 낮추게 되는데, 산업용 에너지로 인한 정부의 재정 손실을 세금으로 충당하게 되니 서민들의 세금이 재벌의 주머니로 흘러 들 어가는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기업에 대한 보조금, 면세 등 재벌들 이 향유하는 유무형의 각종 혜택은 부익부 빈익빈의 또다른 원동력이 됩니 35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다. 서민들의 희생을 통해서 재벌과 권력자들의 부(富)를 늘리는 시스템은 지 금 이순간에도 이 사회 곳곳에서 작동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탐욕의 경계는 없다 미국의 지원과 역대 정권의 비호 속에 자본력을 확충한 재벌은 문어발식 확 장으로 몸집을 불렸습니다. 그러나 재벌, 수출, 국가정책으로 상징되는 개발 경제의 외형적 성장기는 중대한 변화를 맞게 됩니다. 그동안 대승적으로 뒤 쳐진 나라의 보호무역을 인정하던 미국이 80년대 후반 WTO체제를 설립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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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며 체급을 인정하지 않는 “자유로운” 자유무역을 강요하기 시작하게 된 것 입니다. 또한 중국의 급성장으로 처음엔 생산기지를 빼앗기더니 이젠 스마 트폰, 자동차 같은 완제품 분야마저 턱밑까지 도전받는 지경이 된 것입니다. 경쟁 환경이 치열해지면서 재벌들은 본연의 역할인 “외화벌이”가 한계에 다 다르자 ‘서비스’산업으로 눈을 돌이고 있습니다. 절대선(善)이었던 수출을 위해 국민들이 뼈를 깎아 만들어준 총구를 돌려, 되려 내수시장을 겨눈 겁니 다. 노동자, 농민이 고환율의 구조화된 약탈을 견디며 수출로 키워온 삼성전 자의 승계자 이재용은 차세대 먹거리로 “의료서비스”를 내세웠습니다. 그동 안 노동자, 농민들이 희생하며 키워줬더니 환경의 변화를 맞아 스스로 혁신 하며 세계시장에서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기는커녕 손쉬운 국민들의 주머니 에 손을 대겠다는 셈입니다. 때맞춰 정부는 의료민영화를 추진하며 의료까지 돈벌이 영역으로 만드려는 삼성을 거들고 있습니다. 급기야 재벌은 도시 서 민들의 마지막 기회인 골목상권까지 점령하여 소상인들마저 자신들의 “을” 로, “피고용인”으로 전락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WTO체제와 함께 강성해진 신자유주의는 90년대 들어 “대한민국호”에게 자 본시장 개방을 강제하였습니다. 상장사 지분의 50%가 외국인 손에 들어가 자, 재벌들은 새로운 경영환경을 맞게 됩니다. 지분율이 낮은 재벌 오너家는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외국인 대주주와 신사협정을 맺고 이들의 이익을 경 영의 최고 목표로 삼게 된 것이지요. 주주의 이익을 제1 가치로 여기는 “주 주자본주의”의 한국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원래 산업활동의 활성화를 위해 만들어진 주식시장이 산업활동보다 상위에 놓이게 되는 상황을 주주자본주 37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의로 설명하곤 합니다. 주주자본주의는 매년 기업 실적에 의한 배당 또는 주가 상승으로 주주의 이 익을 추구합니다. 그러다 보니 기업의 장기 성장 전략은 사라지고 당기 이 익 극대화가 최고의 전략이자 목표가 됩니다. 전 세계적인 경기침체와 저성 장 하에서 당기 이익 극대화를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이 비용절감이고 비용 절감의 주된 수단이 구조조정입니다. 정부와 재벌이 말하는 “고용 유연화” 란 쉬운 해고와 비정규직 화가 핵심이며 기업 이익을 위한 구조조정을 더욱 쉽게 하겠다는 의도입니다. 항로 를 이탈한 “대한민국호”의 위태로운 노동자들이 그나 마 쟁취한 단결권, 저항권 마저 빼앗아 자본의 재생산 위기를 극복하려는 술책일 뿐 청년일자리와는 아무 연 관이 없습니다. 신자유주의는

“대한민국

호”를 금융자본주의 단계 로 발전시켜 왔습니다. 금 융의 실물경제에 대한 영향 38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력 확대 및 실물경제의 성장 없는 금융시장의 성장이 금융자본주의의 양상입 니다. 금융자본주의 하에서는 별 자산도 갖지 못하고 실물경제의 참여를 통 한 소득이 전부인 노동자, 서민들은 지속적으로 자산가치의 하락에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서민들은 금융시스템이 효용을 줄 것이라는 맹신 속 에서 금융시스템의 탐욕을 채우는 원천으로 전락하여 주머니는 더욱 가벼워 집니다. 금융자본주의는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인간이 기계의 에너지원 으로서 생명력을 빨리면서도 기계에 의해 주입된 가상현실의 꿈속에서 갇혀 있듯이, 노동의 소외, 인간의 소외가 극대화되는 단계라 말할 수 있습니다. 저항은 인간의 본능이다 “헬조선”은 이 사회의 일시적이거나 부분적인 난맥상이 아닙니다. 분단이 낳 은 기형적 경제체제의 당연한 귀결입니다. 한국형 자본주의의 재생산 한계를 상징합니다. 민중들이 감내할 수 있는 고통이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음을 시 사합니다. 그러하니,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아물 상처가 아닙니다. 빼앗기면 분노하고 억압하면 저항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민심의 동요가 도처에서 감지됩니다. 다만, 헬조선, 흙수저, N포세대는 대안을 담고 있지 못합니다. 분노와 절망을 넘어서는 희망을 찾아야 합니다. 구조의 문제 이니 현상이 아닌 본질로, 근원으로 향해야 합니다. 노동, 금융 등 제도 전반에 퍼지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확산을 막아야 합니다. 대외 종속적인 수출중심 경제체질을 내수시장 활성화와 자립도를 높이는 방 39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향으로 개선해야 합니다. 농업을 살려 서민경제의 토대를 만들고 식량주권을 세워야 합니다. 나아가 헬조선의 출발점인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민족통일경 제의 잠재력으로 위기에 처한 우리경제의 돌파구를 만들어야 합니다. 2015년 11월14일 민중총궐기가 저항과 대안의 새 국면을 열기를 열망합니

https://www.facebook.com/raiseup1114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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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동북지역답사기

고구려의 기상, 항일의 함성!

중국동북을 가다(4)

http://goo.gl/91ylw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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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동북지역답사기

▼ 멀리서 바라본 오녀산의 전경

셋째 날

은 일반인이 보기에도 천혜의 요새임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오늘의 일정도 그리 녹록지만은

첫째 날 쌓인 여독을 완전히 푼 일행은 셋째

않았기 때문에 일행은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

날 일정을 힘차게 시작했다. 오늘의 첫 답사지

을 수 없었다.

는 고구려 초기 중심지 졸본성의 쌍둥이 산성 인 오녀산성이었다. 난공불락으로 유명한 고

오녀산성은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

구려의 산성인지라 그 험준함이 짐작되어 약

산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삼국사기>

간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멀리서 본 오녀산성

에서 각각 고구려의 건국 시기가 다르게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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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동북지역답사기

▼ 중국 측이 만들어 놓은 고구려 시조비 에 고구려 역사를 기념하는 시설물을 세워두 며 고구려사를 자신들의 동북지역 지방정권 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시도를 게을리하지 않 고 있다. 오녀산성에 오르기 위해서는 의무적 으로 고구려사 박물관을 거쳐 가야 했는데, 곁 눈질로 둘러보기에도 중국의 이와 같은 야심 이 느껴지고도 남음이 있었다. 오녀산성은 고구려의 전쟁전략에 따라 전시에 농성 전술을 펼치기 위해 만들어진 군사시설 이다. 오녀산 산 중턱까지는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했는데 멀리 내다보이는 오녀산의 경치가 장관이었다. 오녀산성의 본격적인 입구는 고 구려의 옛 물자수송로인 십팔반, 즉 열여덟 굽 잇길이 시작되는 지점으로부터 시작된다. 지 금은 999개의 계단이 설치되어 있는데, 과거 되고 있어 고구려 초기수도에 대한 논쟁은 여 전히 진행 중이지만, 초기수도이든 아니든 간 에 이곳 환인지역이 고구려의 매우 중요한 전 략적 공간이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중국 은 현재 이곳을 AAAA급 국가급 유적지로 설 정하는 한편, 고구려 박물관을 설치하고 곳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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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운송로는 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굽은 도로 로 길을 내었다고 한다. 고구려인들은 전시에 이런 운송로를 따라 평지에 있는 물자들을 산 성으로 수송했다. 이곳 오녀산성은 668년 고구려가 정치적으로 해체되기 전까지 한 번도 함락되지 않은 천혜


중국동북지역답사기

▼ 오녀산성 입장권 산성에 올라 환인현 일대를 둘러보니 이 지역이 고대국 가의 도읍지로서 상당한 경 제력을 갖춘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의 환인 지역은

혼강(渾江)유역의

넓은 평야를 끼고 있는 기름 진 땅으로, 고구려 건국 이 의 요새였다. 고구려인들은 깎아지른 듯한 이

전부터 오랜 세월 동안 인

곳의 자연지형을 이용해 난공불락의 철옹성을

류가 정착해 살아온 곳이다. 이곳 일대에는 1

구축했던 것이다. 999개의 계단을 오르면 산

만기 이상의 적석묘(積石墓;돌무지무덤)이 발

성의 서문이 나오는데 성안 쪽으로 들어가면

견되고 있어 서기전 3000년 전에 융성한 홍산

수십 기의 군사시설 터가 남아 있다. 이 건축

문화와의 연관성도 검토되고 있다고 한다. 적

물들에서는 특징적인 난방양식이 발견되는데

석묘 문화 역시 중원의 토굴식 매장 문화와 구

온돌유적이 바로 그것이다. 각 건물터에는 주

분되는 것으로 이 일대에 중국 본토의 문명과

춧돌과 온돌이 아직도 잘 보존되어 있었는데,

구분되는 또 다른 문명이 있었다는 것이 점차

온돌은 중원의 한족 문화와 구분되는 북방민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 또한 환인 일대는 여

족 문화권의 대표적인 유물이다. 중원에서는

진족 문화의 발상지로도 알려져 있다. 명나라

수·당 시대까지 온돌 문화가 발견되고 있지

영락제 연간, 이곳에 건주(建州)가 설치된 이

않은 데 반해, 현재의 중국 동북지역에서는 그

래 이곳에 사는 족속들은 건주여진이라 불렸

보다 훨씬 이른 시기의 유적에서 온돌이 발견

는데 지금 중국학계는 이와 같은 사실을 다음

되고 있다. 최초의 온돌 유적은 북옥저 유적에

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대청은 건주에서 발

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원하였고, 건주는 환인에서 흥했다. 옹촌은 건 45


중국동북지역답사기

▼ 오녀산성에서 바라본 환인현 전경

주여진이 확장 발전하고 강대해진 발상지이

이처럼 오녀산성은 전투민족 고구려인들의 군

다.” 환인현이 만족자치현으로 지정된 것은 바

사문화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유적이다.

로 이 때문이다.

문득 한 가지 궁금증이 들었다. 고구려의 전투 양상에 대한 것이었다. 흔히 고구려의 기병대

이 지역의 방어 요새인 오녀산성은 서쪽을 향

를 떠올리면 개마무사라고 하여 큰 말에 긴 창

해 깎아지른 절벽 위에 건설되어 있었다. 초기

을 휘두르는 거인의 형상을 떠올리기가 쉬울

고구려는 경제적 부와 함께 군사적인 이점까

것이다. 그런데 적을 산성으로 유인해 산지전

지 갖추고 있는 이곳을 도읍으로 택하는데 거

을 주로 펼쳤던 고구려에서 그와 같은 기병이

리낌이 없었을 것이다.

필요했을까? 개마무사는 고구려가 본격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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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동북지역답사기

로 영토를 확장해나가던 시기에나 등장한 첨

으로 만들었다. 이런 곳에서는 군사 하나가 수

단 철기병력이었을 것이고, 대개의 초기 고구

백 명의 적을 대적할 수 있을 듯했다. 오녀산

려 기병들은 과하마(果下馬)를 타고 다녔으리

의 산성은 단순히 정상 부근의 성곽으로만 이

라 추측된다고 한다.

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정상의 산성을 2중, 3 중의 외성이 에워싸고 있었다. 하산길에는 정

과하마는 과일나무 밑을 지나다닐 정도로 키

상 부근에서는 잘 볼 수 없었던 고구려의 축성

가 작은 말인데, 작으면서도 힘이 센 품종으로

술을 가까이서 살펴볼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개량시킨 고구려의 말이다. 과하마들은 작지 만 힘이 세서 산지를 오르는 데 적합했고, 험

오녀산성 답사를 마치고 내려오니, 어느덧 정

준한 산성 위를 누빌 수 있는 산지 기동력을

오를 넘긴 시각이었다. 일행은 다시 발걸음을

갖춘 말이었다고 한다. 중원의 큰 말들은 이런

재촉해 다음 답사지인 집안시(集安市)로 향했

산지를 오르지 못하는 데 반해 과하마들은 뛰

다. 환인-통화-집안 간 고속도로를 거쳐 가는

어난 기동력으로 숲 속을 누볐다. 고구려의 장

191km의 여정이었는데, 집안 시내의 고구려

수들은 과하마를 타고 성벽 위를 뛰어다니며

유적지를 보기 위해서는 적어도 4시까지는 입

전투를 통솔했고, 기습적인 기마작전을 운용

구에 도착해야 했다. 그런데 또 한 번 차가 말

했을 것이다.

썽이었다. 겨우 수리한 줄 알았던 뒤편 출입 문이 또 빠져버린 것이다. 게다가 이날은 일

고구려 군사문화의 정수는 무엇보다도 산성

요일. 망연자실했지만 궁즉통이라 했던가. 바

그 자체에 있다. 고구려의 산성은 성벽 위마다

로 옆에 있는 수리점 기사를 만나 우여곡절 끝

기마병이 다닐 수 있을 정도의 도로를 구축해

에 수리를 마쳤다. 그럼에도 시간이 상당히 지

두었으며, 성내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점장대

체되어 점심식사는 군것질로 때울 수밖에 없

(點將臺)를 건설해 전투 전반을 지휘했다. 산

었다.

성의 출입구는 방어에 유리한 바위틈을 석문 47


중국동북지역답사기

▼ 장수왕릉으로 추정되는 장군총

부지런히 달린 우리 일행이 집안의 장군총 앞

위용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유적이

에 도착한 시간은 4시 10분이었다. 장군총은

다. 사진에서 보이듯 각 면에 3개씩 놓여 사

우리 교과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대표적인

방을 누르고 있는 호묘석(護墳石)은 수십 톤

고구려의 적석묘이다. 오늘날 한국과 중국의

에 달하는 거대한 바위이고 기단에 놓인 대

학계에서는 이곳을 장수왕릉이라 추정하고 있

형석축 역시 대단한 크기이다. 각 층의 벽돌

다. 장수왕릉은 그 규모의 거대함만으로도 대

은 호분석의 무게에 의해 형태를 유지하는 동

단한 건축물이지만, 정밀한 설계기술과 석조

시에, 고구려 적석묘 특유의 홈파임 기법으로

기술로써 후세인들로 하여금 당시 고구려의

맞물리게 놓여 있어 1600년 동안이나 중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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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동북지역답사기

▼ 광개토대왕비문 잘 분산시키며 무덤의 형태를 온전히 유지하 고 있었다. 적석묘는 고구려 특유의 고분 형태인데, 이런 적석묘는 고구려 초기 중심지인 환인과 집안, 그리고 압록강 일대에 다수 분포하고 있다. 무 덤의 형태도 처음에는 돌무지 형태였다가 점 차 계단식 무덤으로 발전해 가는 모습을 보인 다. 집안에 분포한 적석묘는 수천 기에 달하는 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일대에는 이만큼 거대한 돌이 나는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강 건너에 있는 채석장에서 거대한 돌을 다듬어, 겨울에 언 강을 건너 이곳에까지 가져오게 한 고구려 집권층의 권력의지와 고구려 백성의 억척스러움이 느껴졌다. 장군총과 호태왕릉, 그리고 환도산성 밑의 산성 하 무덤군은 고구 려 전성기 때의 무덤들로 비교적 완성된 모습 의 적석묘 형태를 띠고 있다. 광개토왕릉과 비석은 장군총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중국에서는 광개토왕비를 호태 왕비라고 부르고 있었다. 광개토왕의 묘호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 49


중국동북지역답사기

平安好太王)’인 점을 고려하면 둘 다 틀린 명

진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

칭은 아니지만, 수많은 정복전쟁으로 고구려

年來渡□破百殘□□□羅以爲臣’이라는 구

의 강역을 넓힌 광개토왕의 ‘정복자’ 이미지

절 중 망실된 네 글자가 무엇인가에 따라 글

에 대한 한중 양국의 미묘한 신경전이 여기에

의 전체 맥락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일

서도 벌어지고 있는 듯했다. 광개토왕의 명칭

본 측은 ‘신묘년에 (왜가)건너와 백제를 무너

은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이 처음 줄인 이래

뜨리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하여 한

로 일반화된 것이다. 광개토왕비는 무게 37

반도 남쪽에 일본이 지배하는 임나일본부가

톤, 높이 6.3m에 이르는 거대한 방형 석주로

200여 년간 존속했다는 내용의 ‘임나일본부

된 비석으로, 1880년경 처음 발견되었다. 이

설’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의 국제정

후 광개토왕비는 수난을 겪게 되는데, 일본인

세와 부합하지 않는 내용으로, 일본의 이런 태

서예가와 금석학자들이 더 정교한 탁본을 만

도는 제국주의 사관에 기초한 것일 따름이었

들기 위해 휘발유를 들이부어 불을 질러 비석

다. 일본의 이러한 태도 때문에 오히려 일본이

표면의 이끼를 제거하거나, 석회를 발라 탁본

내용을 조작했다는 비문변조설이 상당한 설득

을 뜨는 과정에서 비면의 일부가 훼손되었다.

력을 가질 정도다. 성균관대 김영하 교수는 비

이때 훼손된 것으로 보이는 몇 글자 때문에 한

문에서 드러난 당시의 국제정세를 토대로 고

일 간에 어처구니없는 역사전쟁이 벌어지는

구려의 정복 활동의 실상과 그에 부합하는 글

것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분통이 터질 따름이

자(王, 任羅加)를 ‘보입(補入)’하여 다음과 같

다. 광개토대왕비의 주요 기사에 대한 비문변

은 해석을 내 놓았다.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

조설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은 사실 이처럼

터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

일본인 자신들이 자초한 것이다.

년에 내습하니 왕이 백제를 파하고 임나가라 를 신민으로 만들었다.”

광개토왕비와 관련한 한일 간의 논쟁은 이른 바 ‘신묘년 기사’에서 촉발된다. 비문에 새겨 50

이외에도 광개토왕비에는 고구려의 건국 신


중국동북지역답사기

▼ 광개토대왕비가 들어있는 비각 (아래)광개토대왕릉 십여 년 전까지는 사진촬영도 가 능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비석이 보존된 누각 실내에 중국 공안이 근무하고 있어 엄격하게 촬영을 금지하고 있었다. 일행은 광개토 왕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광 개토왕릉을 관람하러 이동했다. 광대토왕릉은 멀리서 보면 하나 의 야산처럼 보일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다. 가로 30m, 세 로 30m의 규모였으며, 기단부에 는 각 면에 7개씩 호묘석이 놓여 있었다. 장수왕릉에 면당 3개의 호묘석이 놓여있음을 상기해보 면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광 개토왕릉비와 왕릉은 아들 장수 왕 대에 건설되었으니, 고구려 최 전성기의 위세가 실로 대단했음 을 느낄 수 있었다. 광개토왕릉은 화, 광개토왕의 생애, 고구려의 정복전쟁, 묘

오랜 시간 야산처럼 방치되어 있

지기에 관한 규정 등이 적혀있는데 모두가 매

었고, 1970년대까지 묘 주변에 민가들이 있었

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띠고 있는 것들이다.

다고 한다. 왕릉의 잘 다듬어진 돌들이 유실된 51


중국동북지역답사기

▼ 국내성 성터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지금 광개토왕릉은 상당히 무너 진 상태이며, 무덤 주위의 호묘석 들도 많이 사라졌다. 또한, 이미 오래전에 도굴되어 아무런 부장 품도 찾아볼 수 없다. 그나마 위 안 삼을 만한 것은 왕과 왕비의 관이 놓여있던 석실까지 계단이 놓여 있어 왕릉 위로 올라가 볼 수 있었다는 것 정도였다. 왕릉에 올라 옛 국내성(현재의 집안시)과 압록강 건너의 북한 만포시를 바

국 초기부터 말기까지 고구려의 주요 거점도

라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시였다.

약 400여 년간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은

국내성은 서기 22년부터 427년까지 고구려의

광개토왕릉과 멀지 않은 집안 시내에 자리 잡

도읍지였다가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평양 천

고 있었다. 국내성 성벽은 현재 상당히 유실되

도 이래로 고구려 제2의 도시가 되었다. 장수

어 있었지만, 1920년대 까지만 해도 거의 완

왕은 한반도 남부 지역을 평정하고, 기존의 귀

벽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중화민국 시

족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수도를 평양으로 옮

기 민가들이 주변에 들어서면서 급속하게 파

겼지만, 국내성은 여전히 요동지역을 관장하

괴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남아있는 성벽 터를

는 중심 도시로 계속 자리매김했다. 고구려 말

통해 그 흔적만 일부 찾아볼 수 있었다. 국내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이 동생 남건, 남생과

성은 총연장 2.6km에 달하는 평지성으로 건

대치할 때 이곳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킨 것

52


중국동북지역답사기

▼ 환도산성 입구 을 보면 고구려가 정치적으로 해체되기 전까 지 국내성은 그 위용을 잃지 않았던 것으로 보 인다. 국내성은 광개토왕릉, 장수왕릉, 오녀산 성 등과 함께 고구려 시기의 대표 유적이며 현 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국내성의 쌍둥이 산성은 환도산성(丸都山城) 이다. 환도산성은 고구려가 국내성으로 도읍 을 옮기면서 함께 쌓은 성이다. 통칭 환도산성 으로 불리지만, <삼국사기> 등 옛 문헌 등에는 위나암성(尉那巖城), 위나야성(尉那也城)이라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환도산성은 고구려 초 기 이래 가장 중요한 군사적인 역할을 했던 곳 이다. 환도산성의 총연장은 7km에 육박하며, 수차례 외침을 받아 여러 번 증·개축되었다. 다른 고구려 산성과 마찬가지로 험준한 지형 과 자연암반 등 지형지물을 이용한 견고한 축 성술의 흔적이 남아있다. 환도산성은 상당히 넓은 성내 면적을 가진 산성으로, 성안에 왕 궁터, 무덤, 식수용 저수지 등이 널리 분포하 고 있다. 성 안팎에서 적석묘 수십 기가 발견 되기도 했다.

국내성과 환도산성은 수많은 외침을 받았던 성으로도 유명하다. 서기 3세기에는 요서 지 역의 공손도, 위나라 관구검이 침략했으며, 4 세기에는 전연의 모용황이 침입했다. 환도산 성은 외침 등으로 정세가 불안한 시기 실질적 인 수도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실제로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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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동북지역답사기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졌다고 한다. 산성 앞에

신해갔다.

는 압록강의 지류인 통구하가 흐르고 있어 자 연적인 해자(垓字)를 두르고 있는 형세다. 산

국내성과 환도산성은 고구려 귀족세력의 전

성의 주요시설물로는 궁전터, 군사주둔지, 민

통적 근거지였다. 이들은 평양 천도 이후에도

가터 등이 남아 있다. 군사시설 중 가장 중요

실질적인 고구려 군사력의 대부분을 장악하

한 역할을 한 것은 ‘요망대’ 터다. 요망대는

고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고구려 말

오녀산성의 점장대와 마찬가지로 산성 전체의

기로 가면서 고구려의 왕권이 약화되자, 이들

전투상황을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군사 사령

귀족의 권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연개소문과

부 역할을 했던 공간이다.

같은 대대로·대막리지는 왕이 임명하는 것 이 아니라, 귀족회의에서 결정되었다. 대막리

고구려의 무기체계는 원거리 무기를 중심으

지는 대개 국내성을 거점으로 한 귀족들이 차

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근접 기마전을 중심으

지하는 자리였는데, 이들은 고구려의 실질적

로 하는 중원 세력의 전투방식과는 상극이었

인 군사력을 장악하고 왕보다 강한 권한을 행

다. 고구려 무사들은 모두 필수적으로 활을 다

사했다. 고구려의 정치적인 수도는 평양이었

뤄야만 했다. 고구려에서 활쏘기 실력은 군사

지만 요동의 국내성에 있는 군사력이 고구려

적인 권력을 획득하는 척도였다. 고구려의 활

정치에 보다 실질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은 다양한 크기와 용도를 가진 강력한 병기였 다. 고구려 군사들은 중원 병력이 성에 근접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배우는 역사에서는 고구

전투를 벌일 기회를 잘 주지 않았다. 환도산성

려가 서기 668년 당나라의 공격으로 ‘멸망’

은 위나라의 관구검에 의해 한 차례 점령당한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당대의 군사 강국이었

적이 있었는데, 이때는 성 밖에서 전투를 벌이

던 고구려가 외부의 군사적 침략으로 멸망했

려고 하다 후퇴하는 과정에 적이 몰려든 것이

다고 보기는 힘들다. 고구려 말기, 당나라의

다. 동천왕은 결국 관구검을 피해 북옥저로 피

외침이 계속되는 가운데 정치적인 실권자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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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동북지역답사기

▼ 환도산성

던 연개소문이 죽자 그 아들들 사이에서 권

하고, 귀족층이 서로 분열하는 등 내분 때문에

력다툼이 일어난다. 연개소문의 큰아들이었던

‘정치적으로 해체’된 것이지 외부의 침략으로

연남생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막리지에 올

‘멸망’했다 보기 힘든 측면이 있다.

랐으나 동생 남건, 남산과의 권력쟁투에 밀려 나 당나라에 투항해 버리고 만 것이다. 투항한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건국하자마자 엄청난

남생은 당나라 군대의 선봉이 되어 고구려로

속도로 국가체계를 갖추어 나갔는데, 이는 발

들어왔고, 이런 혼란을 틈타 각 지역의 귀족들

해가 역량을 보존하고 있었던 고구려의 잔존

은 뿔뿔이 주변국에 의탁하고 만다. 이런 면에

세력을 성공적으로 포섭했기 때문이었다. 발

서 보면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분열

해는 옛 국내성 일대를 서경압록부 또는 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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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동북지역답사기

라고 부르면서, 국내성을 중심으로 요동지역

압록강을 건너며 남긴 책에서 이 땅이 남의

을 다스려 나갔다. 발해가 해체된 923년 이후,

나라 땅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천명했으며,

이 지역에 국가의 형태를 띤 정치 집단이 등

다른 독립운동가들 역시 역사저술을 통해 이

장하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힘을 갖춘 세력이

지역과 우리 민족의 관계를 규명하고자 했다.

이곳을 기반으로 힘을 길러갔다. 그들이 바로 타칭 ‘여진’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여진

집안은 그리 큰 도시가 아니었기 때문에 환도

은 꾸준히 한반도 지역의 정권과 교류해 왔으

산성에서 숙소인 취원빈관까지 오는 데는 얼

나, 고려 중기 이후 고려의 친원, 친명 정책으

마 걸리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숙소 근처의 ‘

로 배척당하게 된다. 그러다가 고려 말 이성계

개장랭면성’에서 중국식 식사를 하고 들어와

가 집권하게 되면서 여진과의 관계가 다시 호

하루의 고된 여정을 마무리 했다. 집안은 고구

전되는 듯했다. 이성계는 한반도 동북지역 출

려 유적지가 많은 곳이라 한국인 관광객을 대

신 인물로 두만강 일대의 여진족과 아주 긴밀

상으로 한 상점이 많았는데, 상당한 한국 식품

한 관계를 맺으며 성장한 인물이었다. 때문에,

들이 진열되어 있어 또한 눈길을 끌었다.

조선 태조에서 세종대에 이르기까지 여진족이 사는 이 지역은 결코 외방으로 생각되지 않았 다. 세종은 가장 총애하는 김종서에게 ‘공험진 과 선춘령을 조사하라’며 이 지역에 대한 지대 한 관심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 중후 기 들어 명에 대한 사대체제가 확립되면서 여 진족은 점차 이민족, 오랑캐로 취급되어갔다. 독립운동가들의 역사의식에서도 이 지역은 결 코 남의 나라 땅이 아니었다. 석주 이상룡은 56


과학을 알면 세상이 보인다

과학적 노동관리의 탄생과 한계

http://goo.gl/ngqiL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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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알면 세상이 보인다

어느 사회에서나 생산성을 높이는 문제는 경

영문화를 만든 인물이 있으니 바로 미국의 테

제 발전의 중요한 화두입니다. 같은 사람이 같

일러(Taylor)입니다.

은 시간 일을 해도 더 많은 생산물을 만들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꾸준히 연구

당시는 노동자의 권리를 법으로 보장하던 시

를 해왔습니다. 이 가운데 19세기 말 과학적

대가 아니었기에 노동자들은 매우 가혹한 환

인 노동관리로 생산성을 크게 높여 새로운 경

경에서 일하고 있었고, 경영자들은 노예 다루

▼ 이런 식으로 효율적인 망치질 동작을 연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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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알면 세상이 보인다

듯 노동자들을 쥐어짜서 생산량을 늘리려고

자본주의 각국에 널리 유행하였습니다.

했습니다. 기계공학을 전공한 테일러 역시 ‘

테일러의 과학적 노동관리는 모든 노동자에게

미드베일’ 철강회사에서 근무하면서 노동자

동일한 동작을 요구해 노동자 개인의 경험과

들의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강압적인 방법을

지식, 능력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

테일러주의의 핵심은 노동을 노동자에게 맡

과 격렬한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기지 않고 관리자가 통제한다는 것이며, 그 결 과 노동자는 기계의 일부에 불과한 존재가 되

테일러는 경영자들이 노동자의 노동량에 대한

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노동자들은 테일러주

아무런 과학적 분석이 없다는 점이 문제라고

의에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파악하고 이후 이 분야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 였습니다. 당시는 작업 규정 같은 게 따로 없

시간이 흐르면서 테일러주의를 대체하는 과학

었고 노동자들이 개인의 경험에 따라 자기식

적 노동관리 기법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

대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 작업방식이 발전하지 못했던 시기에는 과 학적인 작업방식을 제시해 생산성을 높일 수

그는 1899년 선철을 삽으로 운반하던 슈미트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더 이상의 효과가

라는 네덜란드인에게 삽의 크기, 삽을 넣는 위

나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치, 한 삽의 무게, 걷는 거리, 삽을 흔드는 각 도, 손수레의 최적적재량, 휴식시간 등 모든 작

1920년대 미국의 호손은 다양한 실험을 통해

업 내용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엄밀하게 규정

테일러의 방식이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지

한 후 일을 시켰습니다. 그 결과 하루 12.5톤

않는다는 점을 입증했습니다. 호손은 노동자

의 선철을 운반하던 슈미트는 47톤을 운반할

의 감정, 동기부여, 집단성 등이 생산성에 중

수 있었고 테일러는 경영자들에게 명성을 얻

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게 됩니다. 그리하여 20세기 초 테일러주의는

후 여러 연구가들에 의해 목표설정, 직무구조 59


과학을 알면 세상이 보인다

▼ 테일러주의를 풍자한 만화

등도 생산성 향상의 중요 요인임이 밝혀졌습

을 남길 것이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노동

니다.

자는 대상, 수단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노동을 직접 담당하는 노동자가 노동관리에서 주인의

그러나 이러한 연구들에도 근본적인 한계는

입장에 서지 않는 이상 결국 과학적인 노동관

있었습니다. 아무리 과학적인 연구를 한다고

리란 과학적인 ‘착취’ 방법이라는 오명을

해도 결국 생산성 향상의 목적에 ‘노동자’

벗기 어려울 것입니다.

는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연구는 경영자 들이 어떻게 생산성을 향상시켜 더 많은 이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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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그 본질적 가치

광복 70주년, 민족적 가치를 찾아

살풀이춤

http://goo.gl/eDkBP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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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그 본질적 가치

“한국 전통춤의 멋은 기와지붕이나 한복의 선

전통춤의 대가 우봉(宇峰) 이매방 선생 말처럼

처럼 곡선의 아름다움이지. 직선의 움직임이

출렁이는 곡선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

기본인 서양춤이나 신무용은 명랑하고, 활발

움입니다. 그 곡선이 가장 아름답게 표현된 우

하고, 밝고, 박력은 있지만 한국 전통춤에서

리 춤이 살풀이 춤입니다.

볼 수 있는 뭔가 찌르르하고, 요염하고, 이상 야릇한 기운이 없어.”

살을 풀어내는 살풀이춤은 슬픔을 승화시키고 망자의 한을 풀어주는 고상한 인간 감정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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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그 본질적 가치

름다운 춤사위로 표현한 예술작품입니다. 그

옛날 우리 조상들은 나쁜 기운을 풀기 위해 굿

야말로 우리 민족의 한의 정서가 그대로 담긴

판을 벌였습니다. 그곳에서 무당이 살을 푸는

아름다운 춤인 것이죠.

춤을 춘 것에서 살풀이춤은 유래합니다. 조선 중기 이후 서민문화가 활발히 발전하면 서 살풀이춤은 무당이나 광대의 춤으로 발전 합니다. 조선시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광대나 기녀들에 의해 더 많이 전파되었습니다. 이후 일제 강점기 당시 굿이 금지되자 무당들은 몰 래 집단을 이루어 춤을 다듬으며 예술적인 형 태로 발전시켜나갔습니다. 이후 살풀이춤은 수건춤의 양식을 춤꾼 한성 준이 1903년 살풀이라고 쓴 데서부터 살풀이 춤이라고 불려졌다고 합니다.

https://youtu.be/ubRo6V4aUc8 하이얀 치마저고리를 입은 단아한 여인이 들 어섭니다. 고운 쪽머리에 멋스러운 비녀를 꽂 고 하얀 명주 수건을 들고 있습니다. 눈가에 깊은 주름은 여인이 겪은 모진 세월과 풍파를 말해줍니다. 버선코가 들릴 때 작은 발 63


예술, 그 본질적 가치

이 춤을 추며, 사뿐히 땅을 딛습니다. 슬픔을

평생을 같이 해온 풍류 악단의 원숙함이 소리

머금은 부드러운 미소가 사방에 퍼지고 풍류

에 묻어납니다. 부드럽게 넘기는 장단은 자진

가 울려퍼지며 살풀이춤은 시작됩니다.

몰이로 넘어가 자연스러운 속도변화와 춤의 구성변화를 이끌어갑니다.

덩 기덕 쿵 더러러러... 늦은 굿거리가 울려퍼 지고 자진 굿거리로 이어집니다. 이 여인과 한

정갈하고 격조있는 손동작, 구름 위를 걷는 듯 한 가벼운 발놀림, 아름다운 곡선미를 자아내 는 어깨선이 한데 어울어 집니다. 살풀이 춤사 위에 묵혔던 원한도 내려가고 쌓였던 액귀도 멀리 물러가는 듯합니다. 여인이 수건으로 고를 맵니다. 한 고름 두 고 름 인생사가 얽혀가듯 고름을 매어갑니다. 얽 힌 고름을 풀며 몸 안에 살을 풀어냅니다. 춤 판에서 몸에 고를 매듯이 수건으로 원을 그리 듯이 빙빙 돕니다. 몸 전체로 살을 푸는 이 동 작은 온 몸으로 고통을 승화시키는 모습입니 다. 이처럼 살풀이춤에는 우리 민족이 지닌 곡선 의 아름다움이 아주 잘 나타납니다. 몸짓으로 표현할 수 있는 절제된 곡선미의 극치가 살풀 이춤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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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무기

북한이 열병식을 개최하는 이유

http://goo.gl/jxvc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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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무기

지난 10월 10일, 북한은 조선노동당 창건 70

러나 북한의 열병식은 북한의 전략무기인 핵

년을 맞아 대규모 열병식을 개최하였습니다.

과 미사일 능력을 가늠해볼 수 있는 주요한 통

중국공산당의 류윈산 상무위원이 자리를 함께

로로서 한미정보당국이 상당히 중시하는 정치

해 북-중간의 혈맹관계를 다시 확인했던 이번

행사입니다.

열병식에서는 계량화된 것으로 보이는 북한 의 차량이동형 대륙간탄도미사일과 300mm

그러나 <동아일보>를 비롯한 보수진영은 북한

방사포 등 새로운 무기들도 공개되었습니다.

의 대규모 열병식에 행사자금이 많이 소요된 다며 비난의 화살을 퍼붓고 있습니다. <동아일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북한의 열병식을 두고

보>는 북한이 열병식에 1조6200억원을 썼으

인민군 3만명과 최대 군중 100만명이 참가한

며 중국도 지난 9월 열병식 당시 3조8700억

다며 세계가 비웃는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

원을 썼다고 비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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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무기

이 대목에서 여러 국가들이 열병식을 개최하

있습니다. 외국정상의 사열이나 주요 기념일

는 이유를 한 번 알아봅시다.

의 대규모 열병식이나 본질에 있어서는 차이 가 없습니다.

1. 왜 열병식인가? 세계 어느 나라이건 열병식을 개최하는 측에 어떤 나라이건 국방에 대해선 스스로 책임지

서는 대규모 열병식을 통해 그 나라의 국민들

려 합니다. 물론 대한민국처럼 연합방위라는

에게는 소속감을 주어 생업에 안심하고 전념

미명 아래 군대의 전시작전통제권을 미국에게

할 수 있도록 하고 동시에 주변국가에게는 그

맡겨놓는 무책임한 형태도 배제할 수 없지만,

나라의 군사력을 과시해 향후 대외 외교에서

어떤 나라이건 간에 국방과 외교는 그 나라의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자 합니다.

자주적 권리이고 대외정치에서 그 나라의 핵 심적인 정책으로 기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정부도 국군의 날을 비롯한 주요 계기에 열병식을 진행하였습니다. 다만 우리 정부는 ‘

세계의 모든 나라는 그런 이유로 자기 나라의

열병식’이란 단어가 북한에서 사용되는 어휘

군사력을 안팎에 과시하고자 열병식을 개최합

이기에 ‘군사퍼레이드’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

니다. 열병식은 지휘관이 정렬된 군대의 앞을

하였습니다. 국군의 날에 광화문 광장에서 군

지나가면서 검열하는 의식입니다.

사 퍼레이드를 벌이던 목적도 마찬가지로 국 민들에게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소속감을 심어

열병식은 소규모로 개최될 때에는 사열식으로

주고, 주변국들에게 한국의 군사력을 과시하

불리기도 합니다. 대체로 외국 정상이 방문하

기 위한 목적입니다. 북한이 열병식을 하면 맹

였을 때, 정상외교의 관례에 따라 외국정상은

비난하면서 국군의 날에는 국군 열병식에 찬

방문한 나라의 군대를 사열합니다. 다만 이 경

사를 보내는 보수언론의 행위는 그래서 설득

우는 군의장대가 사열하는 것이 관례화되어

력이 떨어집니다. 67


세상의 모든 무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전세계 군사비의

종용하는 미국이 스스로 대규모 열병식을 개

50% 이상을 담당하기도 하였으며 세계적 군

최하면 군비경쟁을 부추긴다는 지적을 면하기

사대국인 미국은 대규모 열병식을 개최하지

어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는 미군의 군편제가 징 병이 아니라 직업군인들의 조합이라 군인들을

하지만 미국은 군산복합체에 의해 나라경제가

열병식에 동원하는데 추가적인 비용문제가 발

지탱되므로 군사적 요소를 전혀 홍보하지 않

생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겉으로는

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하여 미국은 주요 기념

주변국에게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지 말 것을

일에 대규모 열병식은 개최하지 않지만 주요

68


세상의 모든 무기

계기마다 ‘에어쇼’등으로 그들의 무기를 홍보

내외의 주목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북한의

하고 중요 군사훈련을 공개해 기자단들로 하

핵과 미사일 능력이 국제적 주목을 받으면서

여금 미국의 군사력이 막강하다는 기사를 전

최근 북한의 열병식은 예외 없이 서방언론의

세계에 내보내도록 합니다.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북한의 열병식 어떻게 변해왔나?

서유석은 그의 논문에서 “김일성 시기의 열병 식은 주로 광복절을 기념하는 행사를 통해 국

그렇다면 북한은 열병식을 어떻게 진행해왔나

가주권 수복을 경축하는 의미를 다지면서 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국방대학교 안보문

부의 통합을 도모했다. 김정일 시기에는 통치

제연구소의 서유석은 “북한 열병식 개최의 역

의 한 방식으로 활용하면서 양과 질적인 측면

사와 성격변화”라는 논문에서 “현재 세계적으

에서 증가한 모습을 보였다.”고 평가했습니다.

로 대규모 열병식은 과거 공산주의국가였거나

다만 서유석은 현 시기의 북한에 대해서는 열

현재 공산주의국가들인 러시아, 중국, 북한에

병식이 2회에 그쳐 정형을 파악하기 무리가

서 발견된다. 이들 국가는 주요 국경일이나 주

따른다며 다만 지도자의 직접적 연설이 추가

요 국가기념일을 기해 대규모의 열병식 퍼레

되었다는 점이나 각종 공개행사가 증가했다는

이드를 통해 군사력을 전세계에 과시하고 있

점 등을 지적하였습니다.

다.”고 했습니다. 서유석이 그의 논문에서 밝힌 것처럼 북한도 서유석은 북한의 열병식에 대해 “북한의 열병

자기체제의 필요에 의해서 열병식을 개최해

식 개최 빈도수는 특히 많은데 그것은 1990

왔습니다. 북한과 중국, 러시아를 비롯한 지난

년대 들어서면서 급속히 증가했다. 또한 북한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열병식을 개최하는 것

은 2012년 4월 15일 김일성 100회 생일을 기

은 미국패권이 전면화 된 시기에 자신들의 군

념하는 역대 최대규모의 열병식을 개최하면서

사적 능력을 과시하려는 의도로 평가됩니다. 69


세상의 모든 무기

특히나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에 맞서 핵과 장

적 군사행사가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거리 미사일을 비롯한 대량살상무기를 갖추기 시작한 북한은 2013년 3월에 “경제건설과 핵

그런 측면에서 북한은 앞으로도 ‘열병식’이란

무력 건설 병진노선”을 공개하였기 때문에 앞

그들의 국가행사를 대외정치적 카드로 더욱

으로 진행할 열병식들이 모두 북한의 핵능력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에

과 장거리 미사일 능력을 파악하기 위한 국제

대처하고자 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70


우리가 미래다

길 위에서 투쟁을 배우고 노래하다

김영경 회원 http://goo.gl/gQFu96

71


우리가 미래다

올해 초 민권연대는 주요사업으로 ‘100거점 운동’을 제시했습니다. 회원들이 자신의 지 역에서 거점을 마련하고 활동하면서 지역주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사업을 해보자는 것이 었습니다. 물론 준비부족 등 이런저런 이유로 힘든 점이 있었지만, 모범적인 회원 분들도 이 곳저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서울민권연대 김영경 회원도 그런 회원 중 한 명입니다. 특 히 김영경 회원은 출근 시간 때 꾸준히 1인시위를 한 결과 안면식이 전혀 없었던 지역 직장 인들과 모임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번에 100회차 1인시위를 진행한 김영경 회원과 이 야기를 나눠 봤습니다.

본 : 안녕하세요. 많은 회원들이 페이스북 등

김 : 경남에서 활동하다가 2013년 10월말에

을 통해 알고 있으실 것 같긴 한데요, 전국의

올라왔으니, 서울 생활 2년이 지나가고 있네

회원들에게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요. 언제 2년이 지났는지도 모르게 시간이 흘 렀습니다. 올라오자마자 겨울을 겪었는데, 서

김영경 회원(이하 김) : 반갑습니다. 저는 서

울의 겨울은 온도차가 달라 놀래기도 했고, 지

울민권연대 새오름 회원인 김영경이라고 합니

하철 타고 출근하면서 지옥철도 경험해보고

다. 하는 일은 북한소식 전문 통신사인 ‘NK투

있습니다. 40살을 앞둔 나이에 올라와서 그런

데이’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고, ‘길위의 시’

지 제대로 해 보자는 생각으로 주말도 없이 일

라는 동인에서 활동 하고 있습니다.

하곤 합니다. 가끔 생각 없이 정리한 살림살이 들이 눈앞에 어른거리기도 합니다.

본 : 경남에서 사시다가 서울로 올라오신 걸 로 알고 있습니다. 서울 생활이 2년 정도 지나

본 : 얼마 전 서울 합정역 인근에서 1인시위를

신 것 같은데, 서울 생활은 좀 어떤가요?

100회째 진행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형식으로 진행하셨고, 어떤 마음으로 시

72


우리가 미래다

작하게 되셨나요?

아이들을 살려내라.” 라는 구호를 외치면서요. 저도 그때 그 영상을 보고 [정부는 살인마]라

김 : 서울 생활을 시작한 다음해인 2014년 4

는 시도 썼고, 유가족들의 청와대 앞 농성에도

월 16일은 잊을 수 없는 날이었죠. 한국사회에

함께 참여하고, 세월호 특별법 서명 등을 받으

이처럼 공분을 산 사건이 있었는가 할 정도였

며 2014년 내내 세월호 문제를 안고 살았습

지 않습니까? 사건 발생 한지 나흘만에 유가

니다. 4.16 1주기 집회에서는 ‘길위의 시’ 동

족들이 팽목항에서 진도대교까지 밤새 걸으며

인들과 세월호 관련 시를 현수막에 찍어 전시

행진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정부는 살인마,

도 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세월호 참사전과 후가 달라져야 한다고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 록 사람들은 지쳐가고, 살인마 정부는 지쳐가 는 사람들을 먹이마냥 노리다, 유가족과 국민 들의 뒷통수를 치고 있었습니다. 분통이 터져 하루, 이틀은 사람들에게 잊지 말자는 생각에 피켓을 들었고, 새오름 최옥수 서부지회장님 제안으로 출근 선전전을 계속 진행했습니다. 물론 민권연대에서 조직적으로 진행하는 100 거점의 일환으로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침 7시 30분에서 8시 30분까지 출장이나 조찬모임 등을 제외하고는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30일까지는 피켓시위만 하다 가 그 뒤에는 접이식 테이블, 서명용지, 앰프 등을 들고 나가서 서명도 받고, 서명을 독려하 는 방송도 하면서 보냈고, 50일 넘어서는 ‘합 73


우리가 미래다

김 : 처음 피켓 시위의 계기는 분노였다면, 시 간이 지나면서 의아함이었고, 좀 더 긴 시간이 지났을 때는 확인이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세월호 참사전과 후가 달라져야 한다 고 했는데 여전히 박근혜 정권은 진실을 가리 기에 급급했고 우리가 지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분노했습니다. 그러다 시 간이 지나면서 직장인들이 너무 모르거나 잘 못된 사실을 알고 있는 것에 의아했고, 세월호 문제에 관심 많은 사람들끼리 세월호 투쟁을 하고 있는 것 아닐까하는 또 다른 의아함이 들 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30일을 넘기면서 말 을 거는 직장인들도 생기고, 음료수며 빵이며 김밥이며 수도 없이 응원하는 사람들의 손길 이 이어졌습니다. 침묵하는 다수가 여전히 세 월호를 기억하고 있음을 확인하였고, 그 침묵 하는 다수는 묵묵히 활동하는 사람들의 진정 정역 사람들’이라는 모임을 추진하기도 했습

성을 보고 마음을 연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

니다.

지요. 100일 동안 한곳에서 진행하다 보니, 얼굴이

본 : 100회를 진행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들도

익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하루에 2,000여명이

많으셨을 것 같은데요, 회원들에게 소개해주

순식간에 지나다니는 곳이다 보니 잠깐 딴청

고 싶으신 경험담이 있다면요?

피우면 사람을 놓치기도 하더군요.

74


우리가 미래다

처음에는 호의로 음료수를 건네시는 분들이나

을 위해 직장인들이 버스를 기다리는 곳이라

이야기를 걸어주시는 분들을 그냥 지나쳐 보

이를 적극 활용했던 것이지요.

내다가, 불현 듯 그런 분들에게 인사라도 하자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한분, 한분 인

본 : 단순히 1인 시위만 하신 것이 아니라 1인

사하는 분들도 늘었고, 매일 인증샷을 사람을

시위를 하면서 주변 직장인들과 세월호를 기

바꿔가며 찍어 달라고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

억하는 모임 등도 진행해 보려고 하신 걸로 알

기도 하였습니다. 바쁜 출근길이었지만 환승

고 있습니다. 어떻게 되셨나요?

75


우리가 미래다

김 : 한분, 한분 인연이 맺어지는데, 그게 너

이신가요?

무 아깝기도 했고,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기간 수많은 서명을 받았고, 서명으로 뜻을 함께 하

김 : 사무실 이전을 하면서 정리해야 될 일, 미

신 분들을 모아내지 못하고 사장하는 것 같아

뤘던 일들이 많아서 당분간 출근 1인 시위는

서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또 하나는 민권연대

잠시 쉴까 합니다. 그리 길지는 않을 것 같고,

‘100거점 운동’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실제

여러 명이 함께 해보자는 의견을 제출한 상태

활동 거점을 만들자고 했으나, 합정역 2번출

라 추이를 지켜보면서 진행할까 합니다. 한명

구에서 진행하는 출근 선전전은 거점으로 어

이 거점 하나에서 꾸준히 해 나가는 것도 의

떤 결과를 남겨야 될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

미 있는 일이지만, 조직을 추스르는 것과 동시

더군요. 한분, 한분 연서를 받아 카톡방도 운

에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동시다발적으로 하는

영하고, 3번의 모임을 통해서 직장인들이 가

것이 더 위력적이지 않을까 합니다. 조직과 함

진 애환과 사회 변화에 대한 열망을 확인하였

께 하는 개인이라야 자부심도 열정도 배가 될

습니다. 하지만, 안정적인 모임으로 발전하기

테니깐요.

위해서는 더 세밀한 준비와 이후 전망에 대한 계획이 있어야 했습니다. 제가 일하는 사무실

본 : 지역거점 활동을 꾸준히 진행해 오신 건

이 갑자기 이전되면서 모임이 자리 잡기도 전

데요, 회원들에게 관련해서 이야기 해 주고 싶

에 지속되기 어려운 여건에 놓였지만, 실제로

으신 게 있다면요?

가능성도 보았습니다. 지금은 개인적으로 연 락하는 분과 새오름 서부지부 거점인 홍대역

김 : 30일 내지,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30번 정

실천에 오겠다는 의사를 피력하신 분도 계시

도 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봤으면 좋겠

는 정도입니다.

네요. 세상의 변화가 나로부터 일어나는 신비 한 체험이 일어나리라 확신합니다. 여럿이 힘

본 : 앞으로도 1인 시위를 계속 진행할 계획 76

을모아 함께하는 것이라면 말 할 것도 없지요.


우리가 미래다

김 : NK투데이는 정확하고 객관적인 북 소식 을 전하는 통신사(뉴스를 보급하는 언론사)로 서 2014년 5월 1일 언론사로 등록하였고, 그 해 10월 3일 협동조합으로 등록하였습니다. 법인등록상 정확한 명칭은 언론협동조합엔케 이투데이입니다. 북에 대한 정확한 소식 전달 이 남북의 통일과 동북아 평화를 유지하는 힘 이라 믿으며 활동하고 있고, SNS를 기반으로 블로그와 홈페이지 누적 유입자 수, 백만명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기간 활동을 통해 왜곡 된 북 소식을 바로잡으려 노력했고, 방북인사 들의 망을 구축해 보고 싶은 욕심도 있습니다. 통일시대를 선도하는 언론사로, 북의 전문 통 신사로 거듭 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민권연 열흘정도부터는 쑥쓰러움도 사라지더라구요.

대 회원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

낯선 사람과의 대면, 일찍 일어나야 되는 부담,

립니다.

이런 것 하나하나가 긍정적인 습관이 된다면 나에게도 이로운 것이 될 것이고, 세상의 변화

본 : 끝으로 회원들에게 하고 싶으신 이야기

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가 있으시면 해 주세요. 그리고 시도 쓰신 다 고 했는데, 대표적인 시 한편 소개해 주시죠.

본 : NK투데이에서도 활동하고 있으신 걸로

(하하)

알고 있습니다. NK투데이에 대한 간단한 소개 와 향후계획이 있으시면 알려주세요.

김 : 회원들에게 하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우 77


우리가 미래다

리가 가져야 할 승리의 바탕에 대한 이야기를

다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소소한 투쟁은 말할

해보고 싶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 촛불시위

것도 없지요.

같은 폭발적인 대중운동이 일어나고 있지 않

서로 의견을 내고 비판도 하면서 할 수 있는

습니까? 저는 그것이 사회단체활동가들의 헌

선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요구되어 진다

신적 노력도 있었지만, 전대협, 한총련 세대의

고 보고 저도 그렇게 생활하고자 합니다. 대안

자발적 참여를 눈여겨봐야 한다고 봅니다. 학

은 내 스스로가 나서야 하는 주인의식에서 시

생운동이 왕성하게 진행되었던 2000년 초반

작되는 것 아닐까 합니다.

까지 학생운동의 핵심적인 자리에 있진 않았

보수세력이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마저 정략

지만 더 낳은 세상을 위해 함께 활동했던 수많

적으로 내몰고, 노동개악과 한국사 교과서 국

은 대중들이 사회 각개에 진출하여 생활하고

정화를 시도하는 무리수를 두면서 정국이 끓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세대들이 보수정치

고 있습니다. 국민을 노예화하고 우리 아이들

세력에 의해 피폐화되고 있는 조국의 현실을

역시 노예화하려는데 더 이상 말해 뭐하겠습

보고 너나없이 나서고 있다고 봅니다.

니까? 어려움이 있더라도 우리 어깨 토닥이

그런 정치적 지향을 담을 그릇을 준비하는 것

며 함께 아픔을 나누고 더 힘차게 나아가보

또한 쉼 없이 달려온 우리 동지들의 몫이고,

자 말하고 싶네요. 끝으로 시 한편 소개해 드

밝혀야 할 길이 아닐까 합니다.

립니다.

2000년 매향리투쟁과 한국전 양민학살 진상 규명 투쟁, 2002년 미선이 효순이 투쟁, 2004 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투쟁, 2006년 평 택 미군기지 반대투쟁, 2008년 쇠고기 수입 반대 투쟁, 현재 대선부정 투쟁과 세월호 참 사 진상규명에 이르기까지 새시대를 맞이하려 는 민중들의 열망은 한국현대사 어느 시기보 78


우리가 미래다

둥지 (2012년 12월 24일) 천막을 뚫고 전달되는 올 겨울 최저온도. 이불을 덮어쓰지 않으면 숨 쉴 때마다 폐가 얼 듯한 올 겨울 최저온도. 자본의 더러운 칼날 아래보다, 숨쉬기는 좋다는 송전탑 위. 찬바람에 얼고 흔들리는 송전탑은 올 겨울 최고 뜨거운 둥지다. 어미새가 새끼들 까려고 만든 둥지처럼, 정규직으로 태어나려고 오늘 현대차 비정규직이 둥지를 틀었다. 어미새가 새끼를 기르려고 만든 둥지처럼 노동자, 사람으로 대접받으려고 오늘 쌍용차 노동자들이 둥지를 틀었다. 법보다 위에 굴림하는 자본의 굴레를 벗고 묵묵히 일한 것이 죄가 되는 노동자라 더 서럽던 올 겨울 최저온도.

언론을 동원해 타결되었다던 한진중공업이 노동자의 죽음으로 다시 투쟁의 둥지를 틀고 자본의 속박에 너나없이 잘 산다던 현대중공업이 노동자의 죽음으로 다시 차별의 둥지를 확인하고 같이 살기 위해 땡땡하게 얼어붙은 송전탑을 끌어 안고 둥지가 되어 버린 동지여. 그대들은 사람들의 심장속에 같이 살기 위한 둥지가 되었소 올 겨울 최저 온도속에 가장 후끈한 사람 냄새나는 그대들은 노동자의 둥지. 세상을 내리치는 번개같이 세상을 향해 “함께 살자”고 외치는 노동자의 심장에 서민의 심장에 자본가의 심장에 권력의 심장에 전류를 뿜어내는 송전탑 둥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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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을 찾아서

작지만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나라를 원한다!

이양훈 후원회원 http://goo.gl/6BVzs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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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을 찾아서

작년 8월 민권연대 후원회를 발족한 이후 72명의 후원회원이 생겼습니다. 1년 안에 100명 을 채우겠다는 개인적인 바람이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나름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아 는 분들에게 민권연대 월간 소식지 ‘본’을 소개하고 「후원회원을 찾아서」 꼭지를 보여 주는 것도 후원회원을 늘리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다시 한 번 많은 관심과 애 정을 부탁드립니다.

[후원회원을 찾아서] 6월 인터뷰 이후 3개월 만에 인터뷰를 했습니다. 후원회원 명단을 펴 들고 누구와 인터뷰를 할까 며칠을 고민했는데, 마땅한 답이 나오지 않더군요. 지금까지는 개인적으로 이미 알고 있거나 최소한 한두 번 얼굴을 본 적이 있는 후원회원들과의 인터뷰 라서 큰 부담이 없었는데 이번부터는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 고민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습 니다. 그러던 중 페이스북을 보다가 도봉에 사는 ‘이양훈’이라는 분이 출판기념회를 한다는 글을 확인하고 우리 후원회원임을 알게 되었는데, 바로 그 순간! 다음 인터뷰 대상자로 확 정지었습니다. 먼저 이양훈 후원회원님의 수필집 「어찌 바다와 계곡만을 피서지라 하랴!」를 검색해 보았 습니다. ‘평범한 영업사원의 결코 평범하지 않은 역사와 사회, 그리고 가슴 따뜻한 가족 이 야기’라는 책 소개글이 나오더군요. 목차를 보니 역사적인 안목이 없이는 쓰기 어려운 주제 들이 담긴 책 같았습니다. 책을 구입해 읽기 시작했습니다. 독자가 글을 읽는데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쉽게 쓰인 책 이더군요. 물론 내용도 알차고 재미있었습니다. 그럼 수필가 이양훈 후원회원님은 어떤 분 인지 한번 확인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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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을 찾아서

본 : 책을 보니 아이들 교육에 관련된 글 몇

군요. 하하하하. 책 속에 아내에 대한 사랑이

꼭지가 있더라고요. 아이들 초등학교 담임선

절절하더라고요.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나요?

생님에 대한 존경의 글과 자전거 국토 순례에 대한 글도 있고요. 본인과 식구들에 대한 소개

이 : 집사람이 저 보다 두 살 더 많지만 대학

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동기입니다. 저는 1년 일찍 학교를 갔고 집 사람은 재수를 했기 때문이지요. 2학년이었던

이양훈 후원회원(이하 이) : 책을 읽었으면 파 악이 되었을 텐데, 아이들이 일반 학교와는 조 금 다른 곳을 다니고 있습니다. 첫째, 둘째 모 두 중학교는 전남 영광에서, 고등학교는 인천 강화에서 다녔는데 대안교육을 지향하는 곳 입니다. 한 학년이 20여 명이니 전교생이라 봐 야 60여 명밖에 되지 않는 소규모 이지요. 그 래서 그런지 애정이 많이 갔고, 학부모 회장도 하면서 대안 교육에 대한 이해도 좀 높아졌다 고 할 수 있겠네요. 아! 첫째 아이는 재작년에 졸업을 해서 재수를 거쳐 올해는 서울에 있는 H대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본 : 아~ 그래서 입시위주의 보통의 학교와는 다르게 국토 순례도 하고 그랬군요. 아이들을 멀리 지방으로 유학 보낸 아쉬움, 서운함은 있 었겠지만 내외간의 사랑은 식을 새가 없었겠 82


후원회원을 찾아서

87년에 학원 자주화 투쟁이 있었는데 그때 만

으니 집안일은 자기 몫이라는 거죠. 저야 고마

났습니다. 아내는 저보다 훨씬 더 열심히 활동

울 따름이죠.

을 하는 학생이었지요. 저는 뭐~ 그 당시 대 학생이라면 누구나 하는 정도의 활동을 하는

본 : 전생에 나라를 열 번은 구하신 것 같습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니다. 이제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요. 통합 진보당 당원 번호가 1만 번대 라고 들었는데

본 : 아~ 그렇군요. 투쟁이 연을 맺어준 것이

요. 1만 번 대면 초창기 당원이시네요. 통합진

군요. 아주 이상적인 연애라고 할 수 있겠네

보당 당원이 되신 계기와 활동에 대해서 말씀

요. 금슬이 너무 좋으신 것 같은데 사모님에

해 주시죠.

대해서 조금만 더 이야기해주세요. 제가 듣기 로는 후원회원님이 전생에 나라를 구하셨다는

이 : 졸업하자마자 취업한 회사를 1년 만에 그

소문이 있더라고요.

만두고 한 일이 자동차 영업입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 일을 계속하고 있으니 꽤 오래되

이 : 나라를 구했죠. 이렇게 얘기하면 어느 나

었죠. 98년도인가 노조활동을 시작했는데 교

라를 구했냐고 되묻는 집요한 사람도 있습디

육선전부에서 일 했습니다. 그 즈음에 민주노

다. 하하하. 미모는 물론이거니와 저의 모든

동당이 창당 되었는데 당시에는 노동조합이

것을 이해해주는 사람이라고나 할까요. 다른

나 학생회에서 조직적으로 당 가입을 했었지

분들한테 욕먹을 수 있는 이야기지만 예를 들

요. 그 분들이 대개 3천 번 안쪽의 당원들이었

어 보자면, 제가 집에서 빨래를 개는 것도 못

을 겁니다. 저는 그런 경우는 아니고 조금 후

하게 하고, 밤늦은 시간에 칼국수가 먹고 싶

에 개인적으로 당에 가입했습니다만 그래도

다고 혼잣말을 하면 어느새 칼국수가 제 앞

상당히 빠른 편이었지요.

에 차려져 있습니다. 하하하. 제가 밖에서 열

과정은 그렇고요... 당의 가입, 확대, 발전에 대

심히 일하며 가계 운용을 위한 돈을 벌어 왔

한 개인적인 생각도 있었습니다. 운동은 지속 83


후원회원을 찾아서

적으로 한 단계 한 단계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

서지라 하랴!」를 내게 된 계기라고 할까요?

합니다. 개인적인 인생의 과정을 보더라도 학

아니 글을 꾸준히 쓰는 이유라고 할까요? 책

생운동을 거쳐 노동현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

에 대한 이야기와 글 쓰는 일에 대한 이야기

다면 노동운동으로 끝이 아니라 정치운동으

를 해 주세요.

로 발전시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종국 적으로는 정치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기 때

이 : 계기는 책에 다 나와 있는데...그동안 써

문이겠죠.

왔던 글들이 그냥 저냥 없어지는 것이 아쉽고 안타까워서 좀 모아 놓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

본 : 이제 인터뷰가 거의 마무리가 되어갑니

에 그냥 확 저지른 것이지요. 글을 꾸준히 쓰

다. 책 이야기를 좀 해보면서 마무리를 지을

는 이유는, 말로 하는 것 보다 글로 쓰는 것이

까 합니다. 수필집 「어찌 바다와 계곡만을 피

더 편해서라고 하면 맞을거에요. 꼭 책을 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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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을 찾아서

보세요. 하하

란 등의 북방민족들과 고구려와의 관계가 궁 금합니다. 이 문제를 잘 풀어 보면 오늘날 중

본 : 아~~ 그렇군요. 그리고 책을 보니 많

국의 동북공정과도 연결이 될 것 같기도 하고

은 부분이 역사적인 내용이더라고요. 역사에

요.

박학다식한 것 같습니다.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다면요. 또 앞으로 공부해보고 싶

본 : 그렇군요. 동북아시아 역사에 대한 책이

은 역사가 있다면 어느 시기, 어느 나라의 역

나오면 또 한 번 인터뷰하면 좋겠네요. 음... 앞

사인가요?

으로 계획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이 : 계기라고 할 것 까지는 없고요. 그냥 옛날

이 : 특별한 계획 같은 건 없습니다. 지금처럼

이야기가 좋았습니다. 머리에 쏙쏙 들어 왔거

살다가 가는 게 인생이지요. 하하하

든요. 그만큼 제게는 역사가 너무 재밌었던 것 이겠죠. 특히, 고려사를 주목해 볼 만 합니다.

본 : 마지막으로 민권연대 회원들에게 해주고

영토도 작고 국력도 그리 세지 못했지만 당시

싶은 말이 있다면요.

의 G2라 할 수 있는 남송과 거란(요)이 무시 하지 못했던 동북아의 소강국이었거든요. 작

이 : 모든 민권연대 회원들 고생 많으십니다.

지만 누구도 무시 못 하는 나라! 저는 역사를

민권연대의 투쟁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건

배우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해요. 교훈!

강 챙기면서 활동해 주십시오.

미래의 상을 역사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 니다. 현재의 우리나라도 고려 같은 나라가 되

이양훈 후원회원의 인터뷰는 짧은 시간 이었

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만 여러 가지를 느낄 수 있는 자리였습니

앞으로 공부해보고 싶은 역사라면... 중국 역사

다. 첫째는 이양훈 후원회원님의 아내 사랑

에 관심이 많습니다. 주로 여진이나 말갈, 거

이 얼마나 지극한지를 알 수 있는 자리였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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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을 찾아서

니다. 이십년을 넘게 결혼 생활을 해도 이렇

고자 애쓰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불

게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구나 하는 것을 느

가능 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꼈습니다. 이양훈 후원회원님은 여러 가지 자 격증을 갖고 계시더군요. 전기, 부동산, 주택

이렇게 멋진 분이 민권연대의 후원회원이니

관리. 하물며 취미를 위해 아마추어 무선기

즐겁지 않으신가요? 저 개인적으로는 좋은

사 자격증까지. 시간이 날 때 마다 이렇게 공

형님 한 분이 생긴 것 같아 너무나 좋았습니

부를 하고 자격증을 따는 이유가 퇴직 이후

다. 후원회원인터뷰의 맛을 다시 한 번 느낄

에도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라고 하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회원 여러분들도 이

니 아내에 대한 사랑이 깊은 분임을 새삼 느

양훈 후원회원님을 한번 만나보고 싶지 않으

꼈습니다.

신가요?

둘째는 운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정입

♣ 이양훈 후원회원의 추천도서

니다. 이양훈 후원회원님이 후원하고 있는 곳

• 책 제목 : 「태백산맥」

이 몽당연필, 이상호 기자, 작은책, 탈핵(원

• 추천 이유 :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요.

불교), 참교육 학부모회, 민권연대 등 16개라

읽어 보시면 압니다. 하하

고 하더라고요. 많은 돈을 한두 번 기부하는 사람보다 적은 돈이지만 꾸준히 후원하는 것

p.s : 녹음한 내용을 그대로 옮긴 글이 아니

이 더 어려운 것 아닐까요. 좋은 사회를 만들

라 인터뷰를 한 저의 메모와 기억에 근거해 서 쓴 글입니다. 인터뷰 대상자의 정확한 구 두 표현이 아님을 이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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