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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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월간

2014 민권연대

07


월간

본; 7월

4

편집자의 글

발행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민권연대)

발행일

2014년 7월 27일 (5호)

블로그

http://mag-mkyd21.tistory.com

문의

mag.mkyd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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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국내경제

쌀, 운명의 갈림길에 서다

5

시선집중

35

인생의 터닝포인트

참극으로 끝난 문창극, 좀비총리 정홍원

항일정신이 살아 숨 쉬는 연해주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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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미래의 거울, 역사

스승을 만나다

이달의 역사

민권연대 원로회의 윤한탁 선생님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동아시아 역사칼럼

조선의 히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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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이슈

전운이 고조되는 이라크와 진퇴양난의 미국

24 미켈란젤로 메리시

악마적 천재 카라바조

예술, 그 본질적 가치

52

세상의 모든 무기

북한의 전술유도탄 발사훈련

55 발표 수기

6.4 지방선거 민권연대 회원 수기


편집자의 글

http://mag-mkyd21.tistory.com/61

한 해의 반환점을 돈 7월입니다. 태양이 뜨겁게 대지를 달굽니다. 녹음은 생명력 을 발산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여름의 한 복판을 달려가고 있습니다. 푸름 가득한 나뭇잎 뒤태와 눈부시게 너울거리는 볏 잎이 아름다운 계절이지만 눈부신 푸름을 쉽게 느낄 수가 없는 7월입니다. 푸르른 강토에서 우리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게 해야겠지요. 7월이 상당히 지났습니다. 매월 초에 발간하겠다던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 독자여러분께 송구스러운 마음입니다. 독자와의 약속을 더 소중히 생각하는 본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편집자 드림


참극으로 끝난 문창극, 좀비총리 정홍원 http://mag-mkyd21.tistory.com/54

4월 27일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지고 정홍원

원래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대통령

총리가 사표를 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의 명령에 따라 행정 각부를 통괄하는 역할을

지명한 두 명의 총리가 모두 중도 낙마하면서

맡는 행정부 2인자다. 그러나 현실에서 총리

6월 26일 사표가 반려됐다. 네티즌들은 사퇴

는 대통령의 그늘에 가려 아무런 권한도 행사

했다가 다시 총리가 됐다며 ‘좀비총리’라는

하지 못하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여러 총리

신조어를 만들었고, 결국 세월호 참사는 아무

들이 책임총리, 실세총리를 내세웠지만 대통

도 책임지지 않았다며 박근혜 정부의 무책임

령과 총리 사이에 의견 대립이 생기면 언제나

성을 강하게 비판했다.

결과는 대통령의 승리로 끝났다. 정홍원 총리 역시 사표를 낼 때까지 국민들이 총리 이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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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집중

몰랐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존재감이

가였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까지 하며 버티던

없는 총리였다.

문 후보는 결국 14일 만에 물러나고 말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정 총리 사퇴 후 처음 지명한

그렇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왜 문 후보를 선택

후보는 안대희 전 대법관이었다. 차떼기 수사

했을까? 정말 친일왕국을 건설하려던 것이었

를 이끌어 국민검사로 이름을 날린 안대희 후

을까? 이와 관련해 미국에서 인준을 기다리고

보였기에 초반에만 해도 무난하게 총리가 될

있는 신임 주한미대사 지명자 마크 리퍼트를

것으로 다들 예상했다. 그런데 전관예우 사실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오바마 정부의 외

이 알려지면서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 사실

교안보분야 브레인으로 오바마 정부의 아시아

예전 같으면 전관예우 때문에 총리 후보가 낙

재균형 전략 입안자이며 한미일 삼각군사동

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맹 주창자다.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오바마 대

국민의 분노가 매우 컸고, 또 한국 사회의 온

통령이 요구해 재가동된 한미일 3국 안보토의

갖 부정 비리에 대한 증오심이 높았기 때문에

(DTT)의 미국 대표로도 참석한 리퍼트는 한미

용서받지 못한 것이다. 한 마디로 국민의 눈높

일 군사정보보호 양해각서, 한미일 MD 체계

이가 올라갔다고 볼 수 있다.

구축 등에 관심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안 후보의 뒤를 이어 등장한 문창극은

아버지가 이룩한 한일 수교의 뒤를 이어 박근

한 술 더 떴다.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 같은 친

혜 대통령은 친일성향의 문창극을 총리로 내

일 발언 행적이 드러나면서 국민들에게 큰 충

세워 한일군사동맹을 추진하려 한 것일까? 만

격을 준 것이다. ‘다카키 마사오’의 딸 박근혜

약 그렇다면 총리 한 명 낙마했다고 해서 상황

대통령 밑에 친일 총리가 들어서면 나라를 통

이 끝났다고 안심하긴 아직 이르다. 아직도 임

째로 일본에 갖다 바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기가 3년이나 남지 않았는가.

터져나왔다. 알고 보니 할아버지가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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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한탁 선생님께서는, 1938년 경남산청에서 태어나셨다. 40여년 가까이 교육현장 에서 교육운동을 펼치며 후대들에게 민족과 통일문제에 대 해 가르쳐 오셨으며 현재 민권연대 명예의장으로 활동하시며 여전히 조국사랑, 후대사랑으로 투쟁의 길에 서계신다.

스·승·을·만·나·다

‘세 번의 눈물’ 참스승

윤한탁 선생님 http://mag-mkyd21.tistory.com/57

선생님과의 인터뷰는 이례적으로 민권연대 사무실에서 진행하게 되었다. 예정시간보다 일찍 도착하셨다. 다음 날 있을 전교조 탄압 대응 기자회견 준비 차 겸사겸사 일 찍 오셨다며 인사를 건네시더니 어느새 분주하게 투쟁 준비를 하셨다. 일흔 여섯 고령에도 집회며 기자회견이며 일인시위며 빠짐없이 참석하시고 늘 투쟁의 앞장에 서 계신 윤한탁 선생님. 바쁜 일정 속에 흔쾌히 짬을 내주셔서 성사하게 된 인터뷰. 그렇게 시작한 인터뷰 도중 선생님은 세 번이나 눈물을 흘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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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수호 원로교사 시국선언 윤한탁 선생님 (6번째)

전교조 창립멤버

주의를 위해서, 전교조를 말살하는 것은 민주

“전교조 말살은 민주주의 말살”

교육을 말살하는 것이고 민주교육이 없으면은 민주주의에 지대한 그런 악영향을 미친다. 그

본 기자(이하 본): 내일 기자회견을 하신다던

래서 우리 원로 교육자들은 어떤 일이 있더라

데 어떤 내용인지 소개좀 해주세요.

도 전교조를 지켜내야 된다. 이런 취지인거지.

윤한탁 선생님(이하 윤) : 전교조 탄압이라는 것이 전교조를 완전히 죽이려는 그런 정부의

본 : 전교조 창립멤버신거죠?

계획 하에서 지금의 국면에 들어간 것 같아서.

윤 : 창립멤버지. 최루탄 맞으면서 쓰러지고,

전교조를 그렇게 탄압하는 것은 학교 교육을

그 속에서 투쟁을 했지.

전교조에게 받게 되면은 (정권에 위협이 된다

전교조는 내가 창립당시에 역할을 했고 그 25

고 생각하니까) 자기들 정권 유지를 위해서 그

년의 역사는 우리 교육운동 뿐만 아니라 민주

런거다.

주의 운동의 큰 역할을 했다고 자부할 수가 있

여기에 우리가 떨쳐 일어나야 하는 것은 민주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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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평생을 교단에 서서 민족과 통일을 가르치다. 본 : 교사 생활하신지 몇 년 정도 되셨나요?

당시 이야기들이 듣고 싶어요. 윤 : 나는 우리의 민족. 자주통일 이거를 우리 교육에서 선생이 학생에게 가르쳐야 한다. 내 가 교사생활을 하면서 항상 그 마음에서 떠나

윤 : 산청에 있는 명륜중학교에서 국어선생으

본 적이 없어.

로 출발을 해서 한 37~8년 정도 교사생활 했

그런 관련되는 교과 내용이 나오면은 반드시

지.

우리는 자주적으로 우리민족끼리 통일해야 한 다 그런 말을 많이 했고. 그러다가 70년쯤엔

본 : 오랜 기간 교육운동을 해오셨는데요.

간디학교에서의 원로교사 특강 “반공교육에 대한 참회” 윤한탁 선생님 (세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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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영등포 여중에 있을때 방첩대에 끌려갔어.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그때 지하 감방에 갇혀가지고. “왜 애들에게

본 : 학생들하고 지내셨던 이야기도 궁금한

민족이란 말을 자꾸 했느냐. 왜 통일을 이야기

데요.

했느냐.” 물어보고. 그걸 가지고 뭘 조작을 할 려고. 그때 수 없이 얻어맞고 고문도 받고 밤 에 잠도 재우지도 않고. 나는, “양심적으로 애

들에게 이야기 했고 그 외에 어떤 문제는 없 다.” 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했지. 그러더니 보 내주더라고. 내주면서 하는 소리가 “여기 붙

들려 가서 이렇게 당했다 이런 것을 일체 남한 테 이야기 하지마라” 그러더라고. 학교에 오니 까 교장이 윤선생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어떻 게 된거냐고 그래. 그래도 그 때 교장이 그 사 람들한테 좋은 얘기를 했어. 윤선생이 참 양심 적이고 인격을 갖고 있고 학생들에게도 상당 히 존경을 받는 선생이다. 이런 얘기를 간곡하 게 했어. 교장이 그 당시 나를 갖다가 험담을 하고 나쁜 말을 하고 그랬으면 내가 고생을 했 을 텐데. 뒤에 내가 그걸 알았어. 상당히 고마 운 사람이야.

“분필가루만 날리는 건 애들을 망치는거 야 같이 호흡하고 토론해야지”

윤 : 나는 지금도 제자들이 연말에 송년회 때 이럴 때 불러. 나는 학생들하고 같이 놀았어. 수업이 끝나면 같이 축구하고 농구하고 애들 하고 같이 편 나눠서 나도 거 한 멤버가 되가 지고. 그랬기 때문에 애들이 상당히 좋아했어. 내 동생같이 여겼고 내 자식처럼 여겼고 이렇 게 했기 때문에 선생의 권위의식은 일체 없었 어. 분필가루만 날리고 애들에게 그런 주입식으로 하는 교육이 애들 망치는 거고. 교사는 학생들과 같이 호흡하고 같이 이야기 하고 서로 토론하고 이런 과정에서 특히 중등 학교 애들 인격형성(에 도움이 되는) 이런 것 이 참 좋은 그런 교육이 된다.

첫 번째 눈물, 제자에 대한 사랑. ; 헌병마저 감동시킨 사연 윤 : 어떤 때는 애가 안 오면은 그 집에 찾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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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가지고 왜 안왔느냐. 근데 어떤데 가면 굉장히

려서. 그 당시 한강 다리에 군인이 지켜 서

가난해. 영등포 있을 때 그 당시 공장지댄데

서 검문을 했어. 그래서 내가 솔직하게 얘기

저 관악산 기슭에. 그 당시 버스가 지금처럼

했지. 내가 담임인데 애가 어려운 애라 부모하

없었어. 어쩌다 하나 지나갈까말까. 그거 타고

고 학생하고 이야기하다가(늦었다고). 그 눈물

가서 밑에서 중턱까지 가파른 데 올라가서 애

겨운 얘기 주고 받고. 이런 이야기 하니깐 헌

를 만나고. 쪼그마한 방에 아홉 식구가 살더라

병이 그 내 말에 감동을 해가지고 자기 차에

고. 토굴 같은데. (이때부터 선생님은 눈물을

실어서 데려다 주더라고. 사람이라는 거는 정

흘리기 시작하셨다.) 그래서 부모들하고 이야

말 진심으로 사람을 이해하면은 그것이 돌아

기도 많이하고.

온다는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어. 맹숭맹숭하

또 어떤데는 가면은 엄마하고 자기 아버지가

게 뭐 인간관계가 그렇게 되면은 그런걸 못 느

이혼을 해가지고 그래서 가출을 하고....

끼지만은.

선생은 학생들과 인격적인 관계가 되지 않으 면 안된다. 항상 선생님의 눈동자를 바라보면 은 참 어떤 말도 숨길 수 없고 속일 수 없고 그 렇게 서로 그런 관계가 되야지. 아침에 조회

두 번째 눈물, 민족의 아픔을 겪고 교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시다.

할 때 애들 눈동자를 쳐다보면은 그 맑은 눈동 자(로 다 보이는거야.) 그게 서로 소통이 되야

본 : 혹시 교사라는 직업을 선택하시고 교육

해. 지금 선생들이 그게 안되는거야. 그게 안

운동을 펼치시게 된 계기가 특별히 있으셨는

되니까 학교 교육이... 사제 지간의 관계가 없

지요?

어져 버렸어. 우리는 참 그런 눈물겨운 정다운 생활을 많이 했어.

윤 : 내가 시골에서 초등학교 다녔어. 경상남 도 합천 저 지리산 가까운 덴데. 그때가 해방

그러고 또 한번은. 그 당시 통행금지가 있어.

그 정국이야. 내가 그때 아버지가, 아버지 생

밤 늦게 애 집에 갔다 오는데 통행금지에 걸

일날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내가 태어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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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어. 아버지 생일, 아버지 세상 떠난 날이 내 돌

에(확실한 얘기야). 지금도 가만히 혼자 누워

날이야. 아버지는 보지도 못했고. 그렇게 인제

서 생각하면은 지금도 눈물이 나. (한참 침묵

어머니 눈물 속에서 살았지. 그 당시 서북청년

이 흐른 뒤 눈물을 닦으시며) 가만 있자 뭘 물

단. 이놈들이 미군 앞잡이가 되가지고 굉장히

어봤었지?

사람들을 두들겨 패고 밤에 집에 불지르고 빨 갱이로 몰아가지고 수 없이 죽이고. 또 우리

본 : 선생님께서 교사라는 직업을 선택하시게

경찰하고 같이 어울려 다녀서 이런 큰 몽둥이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는지 물어봤었어요.

를 끌고 다니면서 사람들 개 잡듯이 패고. 그 당시 경찰서에 끌고 가서 두들겨 패고 그런 것 을 내가 그 처참한 광경을 많이 봤어. 빨갱이 로 몰리면은 죽든지 맞아서 병신이 되든지 그 랬어.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밤중에 그 집 에 불지르고 태워버리고. 그런 걸 어릴 때 그 런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한때는 경찰서 앞에 만 지나가도 무서웠어 상당히 커서도 경찰서 앞에만 가면은... 뺑 돌아가고 그랬어.

윤 : 아 맞아. 그때 내를 가르친 초등학교 선생 이 참 훌륭한 분이였는데. 완전히 자식처럼 얼 굴도 씻겨주고 손발도 씻겨주고 콧물까지 다 닦아주는 그런 선생이... 지금 없어. 그 훌륭한 선생이... 총살 당했어. 빨갱이로 몰려서. 젊은 나이에... 그 당시는 사범대학을 졸업하지 않고 주로 대 학에 있다가 해방정국에 학교 선생으로 많이 내려왔어. 그 당시 노동자 조직 청년조직 이

참 처참했어. 그래서 지금도 나는 그때 생각

런 것이 비밀리에 그런 조직이 많았어. 서울

하면 눈물이... 잘 울어(두 번째 눈물을 보이셨

같은 데는 독서그룹도 있었고 역사에 나오는

다.) 우리민족이 그리 처참히, 해방정국에 정

것들 말고 나오지 않은 독서그룹이라든가 그

말 엄청난 그... 부녀자들 걸어가서 농락 당하

런게 많았어. 그런 사람들이 해방정국에 내려

고 말이야 이놈들. 해방정국의 그 개같은 놈들

와서 선생을 많이 했는데 다 죽었어. 그 사람

친일파 그 놈들이 순경되고. 지방의 그 유지가

들. 아휴,

되고. 내가 어릴 때 내 눈으로 본 것이기 때문

이런 거는 더 밝혀내야 되고 현대사도 다시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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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정보공개 청구 기자회견 (왼쪽)

야 돼.

요. 선생님은 어떻게 바라보시는지요, 그리고

책으로 읽지 못하는 그런 것들이 내 나이에는

우리가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좋은 말씀 부탁

많이 갖고 있지.

드려요.

(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선생님께서 왜 교육 운동에 평생을 헌신하셨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세 번째 눈물, 우리의 현실이 세월호에 그대로 담겨있 다. 근본은 반민주적 권력에 대한 투쟁 본 : 최근 가장 큰 사안은 세월호 참사일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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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 (이야기 시작부터 눈물을 글썽이셨다.)아 직 진상을 모르자나. 많은 의혹을 제기하고 있 는데, 실제 내 생각에 이거는 살인이다. 충분 히 구할 수 있었는데 구하지 않은 거는 어떤 그 음모들 어떤 그 원인이든 그런 거에 의해서 일어난거다. 진상은 뭐든 정확한 걸 아직까지 는 이야기를 할 수 없고. 근데 거기 우리의 현 실이 세월호 참사에 그 한 국면이 우리 현실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그게 바로 우리 현실이 다. 그래서 세월호 국면의 투쟁은 우리 현실에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부정선거 감시 1인시위 중인 윤한탁 선생님

대한 민주주의 뭐 통일문제 모든 문제가 집약

투쟁이다. 이것이 지금 이 현실에 목표야.

되어 있는 투쟁요소가 있다 보고 있어. 근데 이걸 갖다가 세월호를 그저 철저하게 규 명하지 않고 밝히지 않고 이렇게 넘어 간다는 것은 이거는 그 음모에 이용당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런데 힘을 주는 거다. 철저하

지방선거? 국민이 승리한 거지. 본 : 얼마전에는 지방선거가 있었는데요. 이 번 지방선거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게 세월호 촛불을 들어야 되고 그 진상을 밝

윤 : 지방선거는 실제 세월호의 그런 국면에

히는 투쟁에 나서야 되고. 그런데서 현 정국을

서 우리 국민들의 정권을 바꾸고 싶은 그런 간

파헤쳐야 된다고.

절한 계기로 만들어야 된다는 마음이었지만은

세월호의 투쟁은 바로 생명, 안전 이런 것보다

그것이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서 터져 나오지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정권. 이 정권에 대한 투

못했어. 그게 인제 언론이라든지 여러 가지도

쟁. 권력을 잡고 있는 반민주적... 서민들을 탄

있고 부정선거 그런 것도 있고.

압하는 그런 권력에 대한 투쟁. 바로 세월호의

또 민주당이라는 권력이 해방 이후 야당이지 14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전쟁훈련 중단 기자회견 (두번째)

만은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고 이번 세월호의 국면에서 민주당이 좀 강력한 개혁이라던가

한국전쟁 64년. 다시 되풀이해서는 안돼.

진보까진 못 가더라도 그런 면을 내걸고 나섰 다면은 상당하 국민들의 큰 동력을 발동시킬

본 : 마침 오늘이 6월 25일입니다. 올해로 64

거라고 생각했는데 민주당은 아예 그런 거 안

년이 되었는데요. 통일을 위해 어떤 노력들을

했고.

해야 할까요?

실제 권력을 뒤집어 엎어야 되는 건데 그런 단 계에는 이르지 못했고. 그래도 그 모든 것을 우리가 인정을 하더라 도 이번 선거는 국민이 승리한 선거라는 거지. 지방선거를 좁게 보지 말고 큰 세월호 국면과 박근혜 퇴진 투쟁과 지방선거 국면을 크게 바 라보고 그것이 서로 엇갈린 것이 아니라 서로 얽혀 있는 그런 투쟁이고. 그렇게 본다면 국민 이 승리한 선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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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 6.25를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된다. 한국 전쟁은 세계 전쟁사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처참한 수많은 피해. 이런 좁은 땅에서 그런 전쟁이 일어났다는 거는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되고. 전쟁으로 500만 이상이 희생이 됐고 수 많은 이산 가족이 됐고 참 처참한... 그런 전쟁 인데. 지금 북미관계, 남북관계. 대북전쟁연습. 이거 우리가 전쟁으로 이어진다면은... 우리가 한국전쟁을 항상 염두에 두고 전쟁반대에 나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6.15 민족공동행사 기원집회 (아랫줄 첫번째)

서야 한다. 그때보다 지금은 핵전쟁이고 민족

그 당시 유럽에는 한국의 처절한 학살을 기

이 멸망한다라는 그런 이야기도 있고. 오늘이

록에도 나오고 유엔에 항의하고 그랬는데. 정

6.25면은 실제 그런 행사를 했어야 돼. 6.25

작 우리나라 정권은 한번도 그런... 그러니 어

전쟁에 의한 그런 과거의 전쟁을 갖다가 다시

떤 정권인가. 반민족. 수많은 사람을 죽였잖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 이런 행사도 있어야 돼.

전쟁으로도 죽었지만은 또 보도연맹이라든가

우리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어야지 철저하게.

죄없는 사람 끌고 가서 수십만을 죽였잖아. 한

미국이 전쟁을 하지 못할 거다 그러는데 미국

국전쟁은 우리가 철저하게 인식해서 투쟁해야

은 전면전 이런거는 안하더라도 어떤 방법을

된다. 이것이 민중의 생명, 국민의 생명을 내

써서라도 항상 전쟁연습을 하고 계속 하는 걸

던지는 그런 이 정권 이 사대매국정권 몰아내

로 계획도 되있고 그렇게 진행을 하고 있으니

야되는 걸로 되어야지.

까 참 걱정스럽고. 그것을 어떻게 우리가 막아 내야 할 것인가. 우리 투쟁으로 그런걸 일어나 지 않게 막아야 되는데. 전쟁반대 투쟁해야지. 그리고 유럽 같은 데서는 피카소 같은 화가도 한국의 6.25때 학살. 그런거 그림에 나오잖아.

항상 겸손하라! 서로 사랑하라! 형식적인 사람이 되지 말라! 본 : 마지막 질문인데요. 후배이자 제자인 민 16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권연대 회원들에게 해주고 싶으신 이야기 부

속에 심장으로 동지애가 발휘되어야지. 같이

탁드립니다.

일하는 일꾼이기 때문에 동지다 그런 단계를

윤 : 나는 민권연대가 우리 사회운동단체에 서는 참 가장 열심히 투쟁을 잘하고 있다라는 것. 내 이야기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 렇게 평가를 하고 있어. 참 자랑스럽고. 근데, 그럴수록 우리가 겸손해야 해. 진실로 용기있 는 자는 겸손한거야. 떠벌리고 이런 사람이 용 기 있는 사람이 아니거든. 항상 자기를 낮추고 사양하고 봉사하고. 그런 우리 일꾼. 또 언제나 우리 민족을 위한다. 바로 이 시대 에 우리가 가야 할 투쟁을 해야 한다 그런 생

넘어서야 해. 심장에 서로 힘을 합친 손을 잡 은 뜨거운 그런 마음을 갖고 있어야지. 동지는 그 사람이 부족하더라도 그 사람의 어느 정도 가 모자라고 서툴고 좀 실수를 하더라도 동지 라면은 그거 다 받아서 그 더 힘을 쏟아주고 믿어주고 그렇게 할 때 서로 사랑하게 되고 거 기에 뜨거운 그런 동지애로서 뭉치고 어떤 고 난과 시련이 있더라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거 기서 나온다.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서로 바칠 수 있는 그런 고결한 그런 관계가 된다.

각. 어떤 객기를 부리면 이거는 투쟁가가 아니

그리고 너무 격식을 부리거나 뭐 형식적인거

야. 금방 쓰러져버려. 묵묵하게 해야지.

이거 너무 찾으면 안돼. 정말 진실한 걸 찾아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 동지들은 서로... 정말 진심으로 동지애가 발휘되야 한다.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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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돼. 진실하고 성실한 사람은 형식적인걸 싫 어해. 형식은 가식이야.


*** 인터뷰 후기

인터뷰를 마치고 선생님과 순대국에 막걸리 한잔을 마시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인터뷰 도중에 세 번이나 눈물을 글썽이시더니 뒤풀이 자리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해맑게 웃으시고 “요즘도 등산 같은 거 하면 젊은 놈들이 나를 못 따라오더라고” 라며 건강에 유념할 것을 신신당부하셨다. 이 날 마주한 세 번의 눈물. 그것은 평생을 조국과 민족에 삶을 바쳐오셨던 선생님의 간절한 바람들이 고여 흐 른 것이리라. 그리고 지금도 제자들과 후대를 사랑하는 그 마음이 넘쳐 흐르신 것이 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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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이슈

전운이 고조되는 이라크와 진퇴양난의 미국 http://mag-mkyd21.tistory.com/53

수니파 무장단체인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ISIL)가 6월 10일 이라크의 제2도시 모 술을 점령하고 수도 바그다드 인근까지 진출하면서 이라크에서 본격적인 전쟁의 기 운이 고조되고 있다. 나아가 ISIL은 시리아·요르단과 맞닿은 이라크 서부 국경지역 전체를 장악하면서 이라크 사태의 불길이 중동지역 전체로 옮겨갈 수 있어 위기감은 확산되고 있다. ISIL을 비롯한 반군 세력들은 시리아 등의 동조세력으로부터 무기나 장비 공급 등의 도움을 쉽게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지 11년 3개월, 미군이 철수한 지 2년 6개월이 지난 지금,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번 이라크 사태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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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이슈

이라크 전쟁위기가 종교 갈등 때문? 일각에서는 현재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수니파와 시아파라고 하는 두 종파간 의 갈등, 즉 종교 갈등인 것처럼 설명하고 있 다 . 수니파 무장 세력이 현재의 알 말리키 시 1

아파 정부에 불만을 품고 극단적인 테러 행위 등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ISIL은 이라크 와 시리아 등에 걸친 지역에 ‘수니파 통합국 가’를 건설한다는 목표로 갖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태의 본질이 아니다. 문제의 핵 심은 왜 ISIL 같은 세력들이 생겨났는가 하는 1 중동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따라다니는 것 이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종교적 갈등이다. 수니 파와 시아파 두 종파는 이슬람교 창시자 마호메트 (무하마드) 사후 이슬람 공동체의 수장인 칼리프 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마호메트는 후 손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는데, 그래서 칼리 프라고 불리는 이슬람 공동체의 통치자가 그 뒤를 이었다. 수니파는 마호메트가 후계자를 지정한 것 이 아니라며 초기 4명의 칼리프를 모두 정통으로 인정한 반면 시아파는 마호메트가 후계자를 지정 했다고 믿고 그 정통성이 마호메트의 자손만 가지 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시아파는 무하마드의 사위 인 4대 칼리프 알리만을 정통으로 보고 있다. 서기 661년 4대 칼리프인 알리가 암살을 당하면서 수 니파와 시아파의 분열이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무 려 1400년 정도 이 양 종파 간의 적대관계가 지속 되어 오고 있다. 현재 수니파의 종주국은 사우디아 라비아이며. 시아파의 종주국은 이란이다.

것이다. 그 중심에는 미국이 있다. 9·11 테러가 발생하자 부시 정권은 후세인 정권의 알카에다 연관과 대량살상무기 개발 위협을 빌미로 이라크 침공을 한다. 당시 명확 한 증거도 없이 자행된 미국의 침공을 두고 전 세계는 중동 패권과 석유를 위한 부도덕한 전 쟁이었다고 미국을 비난했었다. 미국은 후세 인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이라크 국민들 에게 민주주의를 되찾아 주어야 한다고 강변 하기도 했다. 하지만 후세인을 축출한 이후 미국의 가장 핵 심적인 목표는 이라크 국가재건이 아니라 친 미정권의 수립이었다. 그러니 미국의 입장에 서 이라크 민중들의 삶이나 민주주의 질서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초토화된 의식주 공급체계는 회복되지 않았고, 물과 전기를 위 해 이라크 민중들은 매일 생존투쟁을 벌여야 했다. 이라크 국민들의 자존심이었던 국립 도 서관은 미군의 폭격으로 불타버리고, 인류문 화의 보고인 박물관은 방치된 채 폭도들에게 습격당했다. 상황이 이러니 ISIL이 극단적인 행위를 하더라도 그것이 이라크 국민들의 친 미정부를 지지하도록 만들지는 않는 것이다. 20


컬러이슈

갈등을 부추겨 시아파 소수정당을 모두 규합 미국은 친미정권을 유지하고 지원하는 것이

하고 미국의 지원으로 자신의 총리 연임을 밀

더욱 중요했고, 이를 위해 오히려 이라크에서

어붙였고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수니파

종파 간 갈등을 적극 부추겼다. 제국주의의 ‘

에 대해서는 탄압하고 철저히 배제하는 정책

분할하여 통치하라’는 오래된 명제가 떠오르

을 폈다.

는 대목이다.

수니파로서는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었고, 수

2003년 미국의 침공 전까지 이라크는 아랍에

니파 가운데 가장 근본주의적인 이슬람 교리

서 가장 세속적인 즉, 종교에 연연하지 않는

를 따르는 ‘이라크 이슬람 국가’는 이때 탄생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일례로 2004년

했다. 이 세력이 주변 세력들을 규합해 오늘날

미군이 수니파 거주 지역인 팔루자에서 학살

ISIL로 성장한 것이다. 결국 미국의 이라크 침

을 자행할 때, 수도 바그다드의 시아파들이 맞

공으로 모든 권력에서 밀려난 소외된 주민들

서 싸우는 등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 수니

의 반발과 이라크 민중들의 미국과 현 정권에

파와 시아파는 서로 단결해서 싸우기도 했다.

대한 저항의식이 이번 사태를 불러온 원인이

위기를 느낀 미국은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

라 할 수 있다.

을 적극 조장하기 시작했고, 저항 세력을 분열 시키려고 시아파 중에서도 종파적 이익을 추 구하는 이들과 거래하며 이라크 정부를 수립

이라크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미국

했다. 이후 수니파를 배제하는 정책을 폈다. 2010년 이라크 총선에서는 예상을 뒤엎고 시 아·수니파 연합정당인 ‘이라키야’가 현 알말 리키의 ‘법치연합’을 누르고 승리를 하며 이 라크가 종파 정치에서 탈피할 수 있다는 희망 을 던져주기도 했다. 하지만 알말리키는 종파 21

그렇다면 현재의 이라크 사태는 우리에게 무 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미국의 중동정책이 실 패했음을 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미국은 반 미적 성향의 이란을 억압·견제하고, 극단적인 이슬람주의 세력을 말살한다는 목표를 가지


컬러이슈

고 중동에 개입해 왔다. 하지만 수십 년이 지

해진다. 따라서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를 살펴

난 현재 이슬람주의 세력들은 전혀 말살되지

보면 미국의 처지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않았고, 이란 역시 힘을 과시하고 있다. 오히 려 미국은 현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 황에 놓여있다.

이란은 현 이라크 정부와 마찬가지로 시아파 를 대표하는 국가다. 그런 측면에서 현재의 이 라크 정부를 지원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하산

2011년 말 미국은 이라크 상황이 안정되지 않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6월 14일 “이라크 정부

았지만 철군을 한다. 이라크 전쟁에 이미 1조

가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면, 어떤 지원도

달러 넘게 쏟아 부었고, 미군 5000명 이상이

제공할 수 있다”며 “미국이 이라크나 다른 곳

숨진 상황에서 빨리 손을 털고 나오고 싶었던

에서 테러 집단들과 대결을 시작한다면, (미국

것이다. 국내 비난여론도 컸고, 이라크에서 오

과의 협력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고 밝히

바마 정부의 외교정책 실패라는 평가를 피해

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은 그동안 반미적 성향

야 했다. 그런데 만일 현재 미국이 지상군을

을 가지고 핵개발을 해오던 이란을 고립시키

투입해 전쟁에 개입할 경우 또 다시 깊은 수렁

려는 정책을 펴왔다. 이라크에서의 친미정부

에 빠질 수 있다. 사태는 해결이 안 되고 이라

방어를 위해 이란의 힘을 빌린다며 적대세력

크의 무장 세력들의 저항은 지속되고, 그에 따

과 손을 잡는 꼴이 된다. 이란의 입지만 키워

라 미국의 재정지출과 미군 사망자 수가 늘어

줄 뿐이다.

난다면 미국은 이라크에 발목을 잡히게된다.

만일 미국과 이란이 협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미국은 중동에서 패권을 유지하려 하며,

면 그에 반발하는 국가들도 생겨날 것이다. 중

현재의 이라크 친미정부가 ISIL 같은 단체에

동에서의 대표적 친미국가인 이스라엘은 핵

전복되는 것을 막으려 할 것이다. 독자적인 지

보유를 추진 중인 이란을 고립 압살해야 한다

상군 투입은 부담스럽고, 친미정권은 유지해

는 것이 기본 입장이었다. 유발 슈타이니츠 이

야 하는 상황에서 주변국들과의 관계가 중요

스라엘 전략부 장관은 6월 16일 “우리는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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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이슈

과 이란의 이라크 정부 지지 탓에 이란 핵 문

람 수니파 지도자는 “이번 봉기는 (시아파 말

제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누그러지는 상황이

리키가 자행한) 불의에 대한 수니파의 투쟁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밝힌바 있다.

지 단순히 ISIL에 한정된 사안이 아니다”라며

또 다른 친미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수니파 를 대표하는 국가로 시아파의 맹주로 평가되 는 이란과는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해 왔다. 사 우디 입장에서는 이라크의 현 시아파 정부를 지지할 이유는 크지 않다. 시아파 정부를 공 격하고 있는 ISIL세력도 수니파 세력이다. 사 우디아라비아는 현재 이라크에 미국 등 외세

“미국은 상황을 오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란 등의 시아파 세력은 이라크 내정에 미국이 간섭하지 말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라크 내에 또 다른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쿠르드족 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독립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의 중재안(?) 조차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 고 있는 것이다.

가 개입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이번 이라크 사태는 세계 패권질서의 변화를

있다.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은 곤혹스러운 처지일 수밖에 없다. 이라 크 친미정부를 유지하는데 이란의 도움을 받 을 수 있겠지만 이는 미국의 중동정책의 파탄 을 의미한다. 이란의 입지가 커질 수밖에 없 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통적인 친미국가들은 현재의 이라크 정부를 지원해야 할 별다른 이 유가 없다. 곤혹스러운 처지에 몰린 미국은 종파를 초월 한 새 정부 구성을 주장하며 어느 정도 사태를 무마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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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미국의 최첨단 무기들을 자랑했던 1990 년 걸프전쟁,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밀어 붙였던 2003년 이라크 침공 때와는 다른 미 국의 입지를 확인 할 수 있다. 따라서 이후 이 라크를 둘러싼 사태 전개 과정에 주목해 본다 면 국제질서 변화의 단초를 확인할 수 있을 것 이다.


악마적 재 천

카라바조 http://mag-mkyd21.tistory.com/59

미켈란젤로 메리시 1571년 9월 29일 ~ 1610년 7월 18일) 이탈리아 밀라노출신의 화가로 태어난 마을의 이름인 카라바조(Caravaggio)로 잘 알려져 있다.


예술, 그 본질적 가치

미친 세상에는 가끔 광인이 필요하다. 미치지

이 나의 스승이며 내 영감의 원천이다” 사회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더러운 세상. 틀에 박혀

의 가장 비참한 단면, 흔히 더럽다고 여기는

정해진 기준 밖에 없는 사회. 세상은 그렇게

그 속에서 카라바조는 그 추악한 본질을 찾아

꽉 짜여있다. 세상을 바꿀 결심을 먹든지, 순

낸 셈이다.

응해서 살든지. 이도저도 아니면 미치는 수밖 에 없다. 어쩌면 다들 약간 미쳐있는지도 모

그는 서른아홉에 요절했다. 카라바조는 불같

른다.

은 성격, 폭력적이고 자유분방한 생활로 문제 를 일으켰다. 생애동안 15번 수사를 받았고 7

유럽의 중세시대는 어땠을까. 신이 지배하는

번 넘게 투옥됐다. 카라바조는 1606년 테니

사회는 죄 없는 젊은 여자를 마녀로 몰아 불태

스장에서 판돈문제로 결투를 신청해 상대방

워 죽였다. 절대자인 왕과 귀족이 신성을 통해

을 칼로 찔러 죽인 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도

지배하는 경직된 중세 사회의 이단아. 성스러

주한다. 나중에 그가 왜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

운 종교화와 아름다운 신화작품에 창녀와 부

른다.

랑자, 집시를 집어넣은 파격의 주인공. 악마적 천재라고 불리던 카라바조를 소개한다.

로마에 온지 8년 만인 21살에 1600년 로마 추기경으로부터 작품 의뢰를 받는 ‘악마적 천

그는 관습을 경멸했고 전통을 무시했다. 그는

재’ 카라바조. 과연 그가 악마였을까. 아니면

부랑자, 집시, 창녀들을 모델삼아 성화를 그리

그를 악마로 만들어야했던 이들이 악마였을

는 파격을 보여줬다. 그리고 이렇게 역설했다.

까.

“집시와 거지들 그리고 창녀들 오로지 그들만 25


토마스의 의심

1602~1603년, 캔버스에 유채, 107 X 146 cm, 도이칠란트 포츠담 신궁전

​카라바조가 1601~1602년에 제작한 대표작 <토마스의 의심>이다. 예수의 옆구리에 손가락을 집 어넣는 토마스와 자연스럽게 머리를 구부리는 예수가 보인다. ‘신도 아픔을 느낀다’는 사실적 묘 사가 얼마나 파격적인 발상인가. 예수의 부활을 못 봤던 토마스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

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며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이게 무슨 경우인가? 검지 한마디가 들어간 걸 보니 상처 깊이와 길이가 장난 아니 다.​결국 예수는 “​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며 부활을 증명해냈다. 예수의 부활에 관한 이 성화는 많은 화가들에게 그려졌다. 이들은 성스러운 분위기를 표현하지 바 빴지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그리지 못했다. 성서 내용을 미화시킨 성화에 익숙한 보수적인 화가들 과 주문한 교회는 카라바조 작품을 저주했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가장 사실적으로 당시 현실을 묘 사하면서 신 중심 사회에 정면으로 도전한 셈이다. 26


1593년, 캔버스에 유채, 67 x 53 cm,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1594~1596년, 캔버스에 유채, 85 x 98 cm,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술 때문에 병든 바쿠스 그림을 그리는 기교가 뛰어났던 카라바조는 그림들을 스스로 익히면서 빛과 색채를 이해했다. 이 가운데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술 마시는 바쿠스> <병든 바쿠스>가 있다. 술의 신인 바쿠스가 인간 처럼 병에 걸리고 술주정을 한다는 발상이 이 그림에 들어있다. 술에 절어서 지내는 바쿠스는 인 간처럼 병에 걸리고, 손톱 밑에 때가 꼈을 것이라는 카라바조의 상상이다. 당시 기득권 미술가 들은 카라바조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고 미리 밑그림을 그리지 않는다고 비 난했다. 카라바조는 캔버스에 스케치 없이 바로 그림을 그렸다. 그는 형식을 파괴했고 사실주의를 추구했다. 그의 묘사가 지나치게 사실적이기 때문에 신 중심의 관념적인 사회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27


<동정녀 마리아의 죽음> 1606, 캔버스에 유채, 369 x 245 cm, 루브르 박물관

논쟁의 중심에 선 카라바조 카라바조의 작품은 늘 논쟁을 가져왔다. 종교적인 후원자에게는 불경스러워 자다가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작품 <동정녀 마리아의 죽음>(1601~1606)은 의뢰를 한 교회로부터 거부당했다. 그림 속 성모마리아 모델이 물에 빠져 죽은 창녀였기 때문이다. 헝클어진 머리와 물에 퉁퉁 부은 몸으 로 묘사한 성모마리아 그림은 엄청난 논쟁을 일으켰다. 마리아의 불룩한 배, 그리고 다리를 노출 시키며 마리아는 인간 그 자체로 그려졌다. 보르게세 추기경이 교황에 오르자 카라바조는 로마의 모든 화가 중 처음으로 그의 초상화를 그렸 다. 새 교황은 카라바조에게 끊임없이 경고했다. “그림에 신성함이 없어. 자네에게는 신성한 영혼

이 깃들어 있지 않아. 자네에게도 신성한 기운을 달라고 하게 그러면 예술의 극치에 도달할 수 있 을 걸세” 이처럼 카라바조는 당대 최고의 화가였기만 최고의 논쟁에 중심에 선 화가였다. 28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1609년~1610년, 캔버스에 유채, 125 x 101 cm,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소장

카라바조의 마지막 그림 카라바조의 마지막 작품인 <골리 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이 다. 미술사학자들은 목을 들고 있 는 슬픈 얼굴의 다윗이 카라바조 의 젊은 시절 모습을 그린 것이며, 추한 표정을 한 골리앗의 머리는 늙은 카라바조 자신의 자화상이라 고 해석한다. 어떤 사학자는 다윗이 들고 있는 칼의 의미로 이 작품을 해석한다. 칼에 새겨져 있는 라틴어는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성경 < 시편>에 단 주석의 일부라고 한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고 예수가 사탄을 물리쳤듯 겸손함으

로 교만함을 무찔러야한다.” 한 생을 반항아로 살아온 카라바죠는 마지막 그림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그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과 같은 중세시대를 살아왔다. 그의 삶은 불가능할 것 같은 도전, 도전이라기보다 반항에 가까웠다. 다윗은 불가능해 보이는 골리앗을 돌팔매로 무찔렀다.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은 이처럼 끊임없이 작품을 통해 인간 그 자체를 그려온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작품인 듯하다. 세속적이며 사실적인 그림으로 빛의 마술사라 불리며 바로크 미술에 한 획을 그은 카라바조. 그를 악마로 만들었던 것은 인간보다 신을 중시했던 당시 사회 풍토이지 않을까. 29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운명의 갈림길에 서다 http://mag-mkyd21.tistory.com/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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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자몽, 망고, 망고스틴, 용과, 람부탄, 파파야,

그런데, “최후의 보루” 쌀이 기로에 섰다.

두리안. 수입산 과일의 이름이다. 생소한가?

93~94년, WTO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타결

체리, 레몬, 오렌지 같은 외국산 과일의 이름

이후 수입이 시작된 지 20년만이다.

은 차라리 ‘국산’스러운 편이다. 이름표는 ‘국산’이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 온 수산물도 많다. 고등어는 영국, 임연수어와 가자미는 미국에서 들어온다. 갈치는 심지어 세네갈 산이다. 제주도 은갈치는 들어봤어도, 세네갈 갈치라니. 대만에서 건너온 꽁치, 러시 아에서 내려온 명태, 대구 등은 그나마 가까운 축에 속한다. 벨기에 돼지고기, 칠레 닭고기는 또 어떤가. 내년 1월이 되면 브라질에서도 닭 이 들어온다. 호주나 미국산 쇠고기는 아무것 도 아니다.

무너져 내린 “최후의 보루” 쌀은 우리 민족의 주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쌀을 온 국민이 풍족하게 소비하게 된 기간 은 1975년 통일벼 보급 이후 40년도 채 되지 않는다. 조선시대만 해도 쌀은 양반의 전유물 이었고, 직접적인 쌀 생산 담당자인 농민들의 밥그릇을 채운 것은 보리와 각종 잡곡이 대세 였다. 일제 강점기, 농민들이 생산한 쌀은 또 다시 강탈당해 바다 건너 일본으로 실려 나갔 고, 농민들은 해방 이후 30년이 지나도록 보

사실 쌀을 제외하고는 요즘 우리 국민들의 식

릿고개에 시달려야 했다. 이처럼 쌀은 우리 민

탁 위에서 국내산 농수산물을 찾기란 쉬운 일

족의 주식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농민에게는 “

이 아니다. 외국산 농수산물이 본격적으로 우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이것이 직접적인 생

리 식탁을 점령한다는 소리가 들려온 지 20년

산 담당자인 농민들이 쌀에 대한 애착이 강할

이 지난 오늘날의 현실이다.

수밖에 없는 이유며, 쌀이 상징적인 농산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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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된 이유다. 쌀에 대한 농민들의 애착과 쌀이 가진 상징성 은 비단 우리 민족에게만 해당되는 특별한 이 야기는 아니다. 비슷한 이유로, 쌀은 세계적 으로, 특히 동아시아 지역에서 신자유주의 개 방 압력에 맞선 “최후의 보루”와 같이 기능해 왔다. 미국 등 쌀을 수출하고자 하는 나라들 은 한국을 상대로 시장 개방 압력을 가했지만, 이들은 농민을 필두로 한 국민들의 강력한 반 발에 직면해야 했다.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과 전국농민회총연맹을 주축으로 1993년 12월 부터 본격화된 쌀수입개방 반대투쟁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 등 쌀 수출국이 한국 쌀 시장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한국과 일본, 필리핀 등에게 쌀 시장을 전면 개방하는 대신 이른바 ‘의무수입량’을 정해 일정한 양 의 쌀을 무조건 수입할 것을 각국 정부에 종용 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쌀 시장 개방 첫

해인 1995년에 국내 쌀 소비량의 1%를 수입 하는 것을 시작으로, 2004년에는 국내 쌀 소 비량의 4%, 20만5000t, 2013년 기준 국내 소 비량의 9%인 40만9000t을 수입했다.

쌀 수입 관세 높이면 된다는 정부, 누가 믿나 미국 중심의 WTO 체제에서 쌀 의무수입 물 량이 계속 늘어나자, 한국정부는 아예 쌀 시 장 전면 개방을 이야기하고 나섰다. 시장을 전 면 개방하는 대신 가격이 80㎏ 기준 5만2000 원에 불과한 수입쌀에 “관세”를 300~500% 가량 높게 매기는 방식으로 대응하겠다는 것 이다. 만약, 정부가 주장하는 대로 수입쌀에 대한 관 세율을 300%로 적용할 경우 국내 도입가격은 80㎏당 21만원, 400%는 26만원, 500%는 31 만원이 된다. 80kg당 17만원 수순인 국산 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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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과 비교해 상당히 비싸지는 것이다. 당연히 “ 관세”를 높게 매기면 국내 쌀 농가를 보호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하게 된다. 그러나 농민 들 중 대부분은 한국 정부의 이러한 주장을 믿 지 않는다. 농산물 개방 확대로 일관된 한국 정부의 농업정책 ‘이력’ 때문이다.

바로 쌀 전면 개방을 앞둔 농민의 심정이다. 1999년부터 쌀에 대한 의무수입을 그만두고 전면 개방 후 300% 이상 고율 관세를 매겨 온 일본도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협상 과 정에서 미국으로부터 관세철폐 압력에 시달려 온 지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에게 TPP협

실제 한국 정부는 WTO체제 출범 이후 양자간

상 참여를 구걸하다시피 하고 있는 한국 정부

FTA를 지속적으로 확대해가면서 농업을 제조

가 과연 얼마나 미국의 관세철폐 압력에 버틸

업 수출 확대를 위한 희생양으로 삼아왔을 뿐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다. 20년간 정부에 당하기만 해온 농민들이 정부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들을 수 없는 것은

제2의 쌀 투쟁이 필요할 때

당연하다. 게다가 2014년을 끝으로 “의무수 입량” 할당이냐, “전면개방 및 관세 설정”이

국산 쌀의 운명이 풍전등화다. 박근혜 정부는

냐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정부는 WTO

이르면 7월 첫 주 쌀시장 개방 최종안을 발표

및 미국 등과 어떠한 협상도 벌이지 않고 있

할 예정이다. 당연히 농민들의 투쟁도 예고되

다. 농민들이 보기에 박근혜 정부가 과연 쌀을

어 있다. 김영삼 정권의 ‘세계화’ 추진과 더

지킬 의지라도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

불어 강제 수입되기 시작한 지 20년, 이제 제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율관세를 누가 정

2의 범국민적 쌀 수입개방 반대 투쟁이 필요

해주냐고! 당신이 보장해줄 수 있어?” 이것이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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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한 톨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내 손바닥에 올려놓고 무게를 잰다 바람과 천둥과 비와 햇살과 외로운 별빛도 그 안에 스몄네 농부의 새벽도 그 안에 숨었네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들었네 버려진 쌀 한 톨 우주의 무게를 쌀 한 톨의 무게를 재어본다 세상의 노래가 그 안에 울리네 쌀 한톨의 무게는 생명의 무게 쌀 한톨의 무게는 평화의 무게 쌀 한톨의 무게는 농부의 무게 쌀 한톨의 무게는 세월의 무게 쌀 한톨의 무게는 우주의 무게


인생의 터닝포인트

항일정신이 살아 숨 쉬는 연해주 ① http://mag-mkyd21.tistory.com/60 철없던 대학시절. 딱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던 참에 문 화교류를 신청한다는 공문을 봤다. 우선 신청했다. 되 면 좋고 안 되면 말고. 별로 할 줄 아는 것도 없이 풍물 패였다는 이력 하나로 덜컥 선발됐다. 그렇게 갔다 왔 던 곳.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출발역인 블라디보스토 크(‘동방을 지배하라’의 의미), 항일 투사들이 혼이 숨 쉬는 연해주 바로 그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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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6일. 무엇을 하고 올 것인가?

대학 3학년, 합숙과 농활을 포기하고 가기로 한 러시아. 가서 내가 얼 마나 많은 것들을 얻어올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하루하루 평가하고 혼 자 조용히 생각하면서 내 운동을 돌아보는 시간. 그리고 새로운 것 에 도전하는 역동적인 3주를 만들어 볼 생각이다. 내가 무엇을 소홀 히 했었는지 나의 앞으로 나가야할 방향은 무엇인지. 학생운동을 하 는 사람으로서 나의 역량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고 싶다. 정신적으 로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건강해야지 풍물도 치고 운동도 하지. 앞으로 날마다의 나름의 계획들을 세워야겠다. 호남대학교 기숙사 국제관 310호, 여기 진짜 호텔 같이 좋다. 오른쪽 2층 침대에 있다. 여수대에서 온 사람들과 인사했는데 잘 모르겠다. 아직 뚜렷한 목표 가 안 잡힌다. 다들 그냥 조금 준비해서 관광하고 가려는 생각처럼 보인다. 내가 운동을 하는 이유. 뭘까?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 민중을 생각하는 마음, 가끔씩 괴리될 때가 있다. 명예. 이것도 없다면 거짓 말이다. 책임감. 복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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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터닝포인트

7월 17일~18일. 사전 준비와 풍물 연습

밥 먹고 나서 한숨 자려고 눕기 전에, 오전 연습. 아! 너무 어렵다. 오 금(풍물을 칠 때 무릎을 굽히면서 리듬감을 주는 행위)을 주기위해 무릎을 써야지. 풍물 연습이 생각만큼 잘되지 않는다. 잘 하지도 못하 는 설장구를 해야 하나. 사물놀이는 별달거리 앞까지 연습이 끝났다. 오늘은 장구가 치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합숙에 간 후배 녀석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풍물을 왜 치는가? 공연하기 위해, 보여주기 위해? 잘못된 것인가? 그것도 이유가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내가 배운 이유 풍물의 민중성, 대중성, 운동을 위한 하나의 도구, 물론 이것도 이유이다. 앞 의 것, 뒤의 것, 어느 것이 더 큰가? 지금은 전자. 형편없는 실력에 과도한 욕심이 분명한데 걱정이다. 18일 잠에서 깨보니 미아가 되어있었다. 피곤한 몸으로 잠들었는데 깨어보니 1시. 아무도 없었다. 그 황당함이란. 같이 가는 형에게 짜 증을 내버렸다. 항상 피곤한 순간에도 웃음과 여유를 잃지 않는 모 습이 필요하겠다. 다행히 오늘 아침 설장구 연습은 좀 맘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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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터닝포인트

7월 19일. 출발 그리고 황당한 사건

버스 안이다. 드디어 출발인데 비가 온다. 나름대로 설렌다. 사람, 사 람이 중요하다. 선배 말이 맞는 것 같다. 내가 가서 뭘 보는 것 보다, 사람과 부대끼며 얻는 것이 많을 것이라고. 그래도 대충 윤곽은 보인 다. 그것은 바로 “사람을 통해서 가슴으로 느끼고 사람을 남기고 운 동에 대한 확신을 얻어가는 것” 지금 정세가 궁금하다. 휴게소나 공항을 가면 신문부터 사야겠다. 버 스 안은 참 좋은 곳이다. 나에게 사색의 시간을 준다. 논밭의 벼 포 기 하나하나, 집들 하나하나 모두 소중한 것들이다. 민중은 위대하 다. 그러나 안개 속에 휩싸여있는 거대한 산처럼 아직 잘 알 수가 없 다. 저 안개 속의 산이 언제 쯤 다가올까. 내가 안개를 걷어낼 수 있 을까? 산이 다가올까? 그냥 좀 더 잘 보이게 만드는 것이 다인가? 다 가오면 좋을까? 산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나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도 이 끈을 놓치지 않을 수 있을까? 비행기를 탔다. 기내가 마구 떨려서 불안하다. 러시아 땅을 밟을 때 는 어떤 느낌일까? 연해주. 독립투사들의 혼이 느껴질까? 아무튼 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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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터닝포인트

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기내식으로 불고기가 나왔다. 하지만 검정콩 은 먹자마자 뱉어버렸다. 젤리 비슷한 것도 도저히 못 먹겠다. 음식이 걱정이다. 비행기가 착륙하고 한숨 돌렸다. 비행기가 안 좋아서 조마조마 했다. 그 전에 온 교수님과 러시아 학생들이 마중 나왔다. ‘나타샤’ 라는 친 구는 한국말을 꽤 잘했다. ‘꼴랴(니콜라이의 약칭)’라는 친구는 영어 로 대화했는데 가끔씩 막혔지만, 그래도 의사소통은 됐다. 다른 두 여 자들은 한국말을 별로 못하고 소극적인 성격이었다. 작은 버스를 꾸역꾸역 한 시간 타고 극동대학 경제대학 기숙사에 도착 했다. 생각보다 기숙사는 아주 좋았다. 냉장고, TV, 오븐 다 있었다. 거 의 러시아에서 호텔 급이란다. 짐 정리를 하던 중 지갑을 읽어버린 것 을 발견했다. 다행이 여권과 비자는 있었지만 그 외에는 한 푼도 없었 다. 그저 웃음만 나왔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이를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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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터닝포인트

7월 20일~21일. 러시아의 첫 인상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첫 외출이다. 시장에 갔는데 러시아 사람들의 시 선이 곱지 않았다. 뭐라 그럴까. 경계심. 아무튼 별로 느낌이 좋지는 못 했다. 오늘 술을 먹고 이야기 해볼까? 아무튼 기분은 괜찮다. 비만 안 왔으면 좋겠는데 날마다 비다. 시장에 가는 길에 처음으로 햇볕을 봤다. 시장은 걸어서 한 20분 거리 인데 어제 필름이 끊길 정도 먹은 보드카와 맥주 기운이 남아 날 힘들 게 했다. 내 목표를 지켜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시차가 2시간 빠르니 시간이 엄청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것저것 생각할 여유가 별 로 없다. 내일 부터는 빨리 일어나야겠다. 러시아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크다. 여자들은 거의 슈퍼모델 수준의 몸 매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젊은 여자들은 전부 딱 붙는 옷만 입는다. 키도 큰데 다 힐을 신고 있다. 아직 2일 째라 민족색 같은 것은 잘 모 르겠다.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 해보고 싶어도 무슨 말이 통해야지. 걱정할 것 같아 전화카드를 샀으니 전화라도 한 통화씩 해야겠다. 그 나마 같이 있는 ‘콜랴’와는 영어로 말해야해 무슨 어학연수 온 느낌이 다. 한국 가서 영어공부 좀 해야겠다. 이제 화요일부터 공연히 들어가 기 때문에 열심히 해야겠다. 내일은 ‘콜랴’에게 집에 가도 되냐고 물어봐야겠다. 꼭 가고 싶다. 친한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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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터닝포인트

7월 22일 안중근 의사의 손가락

러시아 음식은 도저히 못 먹겠다. 학교 구내식당과 패스트푸드점에 갔 는데 거의 대부분 고기와 햄들이다. 밥도 한 가지 있기는 한데 똑같이 느끼한 볶음밥이다. 정말 널리고 널린 게 닭고기이다. 식사 후 ‘콜랴’ 에게 정성이 담긴 카드를 주면서 집에 가도 되냐고 물어봤다. OK. 기 쁘다. 극동 대학교 총장을 잠깐 만나고 앞으로 우리가 한글과 풍물을 가르 쳐야 될 러시아 학생들을 만나보았다. 여기를 1학년이 만으로 17이라 서 우리보다 1살이 빠르다. 1학년들은 영어, 한국어 다 못해서 어떻게 가르칠지 막막했다. 그 중에서 ‘욜가’라는 학생이 있는데 다른 애들보 다 더 동양적으로 생겼다. 그 후에 버스타고 시내로 갔다. 1차 세계대전 때 러시아 독립군을 이 끈 장수의 동상과 잠수함, 군함, 시베리아 횡단 철도 종착역, 나름대로 볼만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항일 독립투사들이 세워 놓은 비인 데 거기에 있는 자주와 독립이라는 말을 보고 다시 한 번 피가 끓어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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랐다. 우리의 선조들이 이 먼 이국땅까지 와서 피로 얻어낸 자주와 독립 을 절대 빼앗길 수 없다.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러시아 할머니가 러시아어로 설명을 해주면 ‘콜 랴’가 나에게 영어로 말해주었다. 나는 옆의 친구들에게 다시 번역해 말 해주느라고 진땀을 뺐다. 누군가 ‘콜랴’와 나를 형제라고 하자 우리는 웃었다. 영사관을 가려다 허탕치고 한국 교육원이라는 곳에 도착해 정 부, 교육청 산하 사람을 만났다. 정부 직원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역사적 의미를 설명해 주었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의거를 치르기 전에 손가락을 잘라 독립을 맹세한 곳이 바로 이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안중근 의사 설명을 하면서 빨치산이야기를 했다. 그는 빨치산을 맹렬히 비난 했다. 과연 그가 그들 에 대해서 얼마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할까. 태백산맥은 봤을까? 그들의 사상을 논하기 전에 ‘그런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 인데’ 라는 생각이 머리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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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거울, 역사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http://mag-mkyd21.tistory.com/56

흥남부두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 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던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1.4 이후 나홀로 왔다 이 노래는 가수 현인의 노래 <굳세어라 금 순아>의 일부이다. 맥아더의 철수 명령 이 후 유엔군 측이 38선을 돌파했다가 패퇴하는 과정에서 대대적인 후퇴가 이루어졌던 흥남 부두의 상황을 묘사한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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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정 조인 장면

1950년 인천상륙작전 이후 유엔군 사령관 맥

다. 1951년 6월 합의대로 제안이 시작되었고

아더는 승리를 확신하며 <추수감사절(11월

7월 10일 개성에서 처음으로 협상을 위한 회

23일) 공세>와 <크리스마스 공세>를 추진

담이 시작되었다.

했다. 그러나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은 청천강 과 장진호 등에서 엄청난 손실을 입었으며 맥 아더는 철수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정전협상 과정에서는 크게 두 가지 의제가 논 의되었다. 첫 번째는 군사분계선 문제였고, 다 른 하나는 포로교환 문제였다. 군사분계선 문

크리스마스 공세 실패에 이은 1951년 1.4 후

제는 미국이 해군력과 공군력의 우세를 이유

퇴, 정신없는 후퇴 후 다시 3.15 서울 탈환.

로 당시 군사대치선보다 더 북쪽으로 올라가

1951년 초중반부터 전선은 지금의 휴전선 부

야한다고 주장했고 북한은 38선의 복구를 주

근에서 큰 변화 없이 고착되고 지루한 소모전

장했다. 미국은 자신의 요구를 실현시키기 위

이 반복되었다. 유엔군을 사실상 움직였던 미

해 협상을 중단시키고 9월 10월에 걸쳐 동부

국은 확실한 승리가 보이지 않자 정전협상을

전선-특히 1211고지-에서 적극적인 공세를

시작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미국은 소련

펼쳤다.

측과 물밑 접촉 끝에 유엔사무총장과 소련, 유 엔군이 각각 정전협상을 제안하기로 합의했

그러나 유엔군은 130회에 걸친 공격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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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1 고지전투

1211고지를 점령하는데 실패하는 등 우위를

주장했다. 군사분계선 논의에서 한발 물러나

차지하지 못했다. 공세가 실패하자 미국은 결

야 했던 미국은 포로교환 문제에서마저 물러

국 1952년 1월 현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난 상태로 정전협정이 체결되는 것이 전쟁에

하고, 각각 2km씩 철수하여 비무장지대를 설

서의 패배로 인식될 수 있고, 전원 송환을 하

치하며, 30일 이내에 정전협정이 조인되지 않

면 공산권을 독재사회로 묘사해 온 심리전에

을 경우 접촉선에서 발생된 변화에 따라 군사

도 문제가 된다는 이유로 제네바협정의 원칙

분계선을 수정한다는 내용에 합의할 수밖에

을 깼다.

없었다.

1952년 11월 선거를 통해 새로 등장한 아이

군사분계선이 합의되자 포로교환문제가 대두

젠하워 정부는 전임 정부와 같은 선택을 했다.

되었다. 두 번째 문제인 포로교환문제는 제네

또다시 협상을 중단하고 북한에 대한 대대적

바에서 합의한 전원송환 원칙이 있었기 때문

인 공격을 진행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공

에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었던 부

격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북한의

분이었으나 예상과는 달리 무려 1년 반을 끌

강력한 반격을 받기까지 했다. 결국 포로송환

었다. 북한은 정전회담에서 제네바협정에 따

문제는 유엔군이 포로들에 대한 자유송환 입

라 전원송환을 주장했고 미국은 자유송환을

장을 철회하고 중립국송환위원회에 포로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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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거울, 역사

를 맡기자는 북한군 제안을 받아들이는 대신

정 제4조 60항에서는 한급 높은 정치협상을

포로면담 기간을 6개월에서 90일로 단축하는

소집하여 외국 군대 철수 및 한국 문제의 평화

것으로 정리되었다.

적 해결 등의 문제를 협의하기로 하였으나 미

이런 과정을 거쳐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북한군은 정전협정에 조인했고 748일에 걸친 회담은 마무리되었다.

국은 1954년 제네바에서 열린 협의에서 일방 적으로 퇴장하면서 정전협정을 위반했다. 이 후에도 정전협정 제 13항 ㄹ목 “한반도 경외

로부터 증원하는 작전비행기, 장갑차량, 무기

협상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은 자

및 탄약을 들여오는 것을 정지한다”는 부분도

신이 유리할 때(추수감사절 공세와 크리스마

1957년 6월 일방적으로 파기하며 전술핵무기

스 공세)에는 협상을 하지 않다가 자신의 의도

를 한반도에 반입했다.

가 실현되지 않았을 때(미국의 공세가 실패했 을 때) 협상을 시도했고 불리한 위치에 빠지자 결국 합의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한국전쟁 뿐 아니라 전쟁 이후 북미 대화 과정 에서도 반복해서 나타난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관련하여 한국에서는 북 한이 먼저 쳐들어왔다고 주장하고 북한에서 는 미국과 한국이 먼저 쳐들어왔다고 주장하 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정전협정 당시 유 엔군 사령관이었던 클라크 사령관은 정전협

이렇게 어렵게 합의된 정전협정에 대해 한국

정 체결 후 “나는 미국에서 맨 처음으로 승리

과 미국은 부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승만 정

하지 못한 정전협정에다 조인한 사령관이다”

부는 정전협정 체결을 시종일관 반대하였으

고 평가한 반면 북한은 정전협정을 체결한 7

며, 정전협정 체결 직전에는 회담을 방해하기

월 27일을 <전승절>이라 부르며 기념하고

위해 반공포로를 석방시켜 회담에 난관을 조

있다는 것이다.

성하기도 했다. 미국도 정전협정을 사실상 파기했다. 정전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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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거울, 역사

동아시아 칼럼 조선의 히틀러 http://mag-mkyd21.tistory.com/55

조선총독에 부임한 미나미 지로(왼쪽)

“현재 우리나라(일본)는 동양평화 옹호의 대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국민총동원 하에 시국 에 대처하고 있는 때인데, 대일본국민인 자 는 그 신앙하는 종교의 여하를 불문하고 일 제히 천황 폐하를 존숭하여 받들고 선조의 신 기(神祇)를 숭경하고 국가에 충성을 다해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바로서, 신교(信 敎)의 자유는 대일본국민 범위에서만 용인되 는 것이므로 황국신민이라는 근본정신에 어 긋나는 종교는 일본 국내에서는 절대 그 존립 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1938년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의 연설 47


미래의 거울, 역사

하얼빈 거사 30년 후인 1939년 10월 16일,

미나미 지로는 1874년 일본 제국 규슈의 오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은 박문사(일본이 이토

이타 현에서 출생했다. 어린 시절 숙부와 도쿄

히로부미를 기념하기 위해 남산 장충단에 지

로 상경한 미나미 지로는 우수한 학업성적 덕

은 절)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히로쿠

분에 고등과로 진급했다고도 한다. 한편, 중학

니에게 사죄한다. 일본 신문들은 “테러리스트

교 시절에는 품행 불량을 이유로 1개월 정학

안중근의 아들이 아비 대신 용서를 구했다!”라

처분을 받자 여기에 반발해 즉시 학교를 그만

고 전했다. 호부견자(虎父犬子 : 호랑이 아비

두고 육군유년학교에 들어갔다가 1892년 육

에 개 같은 자식)의 대명사가 된 안준생은 조

사 6기로 입학한다. 러일전쟁에 참가한 후 군

선총독의 양아들이 되었는데, 그의 양아버지

인으로 승승장구했던 미나미 지로는 지나주둔

가 바로 제 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 次

군 사령관, 조선군 사령관, 관동군 사령관 등

郎, 1874~ 1955)이다.

을 거쳐 1936년 조선의 총독으로 부임했다.

제 7대 조선총독으로서 1936년부터 1942년

신사참배와 침략전쟁 참여를 강조하는 그의

까지 식민지 조선을 통치한 미나미 지로는 내

연설에서 잘 드러나듯, 미나미 지로는 조선인

선일체와 황국신민서사를 제창하며, 그것도

들을 일제에 순응하는 ‘충량(忠良)한 신민(臣

모자라 지원병 제도를 통해 무고한 조선 청년

民)’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폭력적 수단을 동

들을 전쟁터로 내몬 장본인이다. 그가 총독에

원했다. 미나미 지로가 부임한지 채 한 달이

재임하는 동안 벌인 악랄한 식민지 정책으로

되지 않아 일어났던 동아일보의 ‘손기정 일장

인해, 그는 ‘조선의 히틀러’로 불리게 되었다

기 삭제사건’을 계기로 동아일보는 물론 총독

고 한다.

부 기관지 매일신보를 제외한 조선어 신문의 48


미래의 거울, 역사

일본 신사에 참배하는 조선인 학생들

발행이 금지되었으며, 수십 명의 언론인들이 고문을 당했다. 역대 조선 총독 가운데 가장 완고하고 과격한 통치스타일의 미나미 지로는 강경한 내선일 체론자 였는데, 총독 부임 이듬해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본격적으로 황국신민화 정책을 펼 쳐 나갔다. 미나미 지로는 국민총력운동과 국 민정신총동원 운동을 전개해 한국민들을 기만 적인 황민의식으로 물들여 전쟁에 자발적으 로 참여하도록 유도했다. 조선총독부의 이러 한 정책에 적극 동조한 이들은 다름 아닌 일제 에 전향한 지식인들이었다. 황국신민화 정책으로 조선에는 각 면 단위까 지 신사가 설치되었으며, 모든 조선인들에 대 한 전면적인 신사참배 정책이 시행되었다. 또

이 금지되고, 한국사 교육이 중단되었다. 이는 조선을 중일전쟁의 병참기지로 만드는 한편, 식민지 조선인을 완전히 일본인으로 만들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

한 그는 조선교육령을 개정해 모든 행사에 앞

일제는 더 나아가 제도적으로도 한국인의 모

서 황국신민서사의 제창을 강요했다. 완전한

습을 근본적으로 바꾸고자 했다. 1939년 시행

민족의식의 말살을 위해 학교에서도 학생들

된 ‘조선민사령:창씨개명’을 통해 성과 이름

의 신사참배가 강요되었으며, 한국어의 사용

을 일본식으로 만들어 등록하도록 강요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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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거울, 역사

대한 권리는 일본인들이 독점하고, 책임은 조 선인이 떠맡는 이중구조가 소위 ‘내선일체’의 본질이었다. 조선청년들은 ‘일본제국신민’이라는 이유로 전쟁터에 끌려가 총알받이 신세가 되었다. 미 나미 지로는 조선인 지원병 제도는 물론이고, 국민징용법에 따라 많은 한국인을 강제징용해 전쟁터로 내몰았다. 일제에 부역하던 식민지 지식인들은 조선청년들이 일본제국의 ‘황군’ 이 되어 영광스럽게 죽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 라고 외쳐댔다. 이다. 만일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조선인은 사람 대접을 받기 힘들어졌다.

미나미는 조선총독으로 재직한 약 6년간 조 선인의 일본인화 정책말고도, 선만일여(鮮滿

그러나 드디어 ‘신민’이 된 조선인들에게 돌

一如)란 표어 아래 만주의 관동군과 경제·문

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선인은 완전한

화·치안 등 모든 부문에 걸쳐 긴밀한 협조관

일본인이 될 수 없었다. 내선일체의 논리상에

계를 구축하기도 했다. 미나미는 1942년 조선

도 조선민족은 일본의 시조인 ‘아마데라스’

총독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추밀원 고문, 귀족

의 서자였기 때문에 적자의 후손인 일본인에

원 의원, 대일본정치회 총재를 역임했으며, 제

비해 2등 국민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제국에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한 뒤 연합군에 50


미래의 거울, 역사

의 유력한 멤버로서 나를 인식할 것이라는 점 은 추측하고도 남음이 있다. 과연 그렇다면 나 는 이와 같은 사실과 소신에서 일본 국민으로 서는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그러나 법 정 출두 하루 전 그가 남긴 소회와 달리 48년 11월에 끝난 전범재판은 철저하게 아시아인 의 시각이 배제된 ‘승자의 재판’이었기에 조 선과 만주 침략에 대한 그의 죄를 묻지 않았 도쿄전범재판소에 선 미나미 지로

다. A급 전범으로 종신형까지 선고받은 그는 54

의해 체포되었다.

년 1월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는 이듬해 사 망했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한 군국주

46년 5월 미나미 지로는 A급 전범 용의자로

의자인 채로 일본제국의 영웅으로 삶을 마감

극동국제군사법정에 섰다. “연합국에서 나를

했다. 오늘날 일본 정치인들은 다시금 군국주

범죄자로 보는 것은 세 가지 점일 것이다. 만

의의 광기에 취해 A급 전범들에 대한 참배를

주국을 탈취한 지도적 인물, 조선에 대한 탄압

계속하고 있다. 집단적 자위권을 멋대로 해석

정치의 실행자, 대일본정치회의 총재로서 전

해 ‘전쟁 할 수 있는 국가’가 된 일본의 정치

쟁 수행 협력자. 이상 직접·간접으로 일본의

가들에게 미나미 지로는 여전히 제국 군인의

정치적 책임자로서 지도적 입장에 있는 군벌

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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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무기

북한의 전술유도탄 발사훈련 http://mag-mkyd21.tistory.com/58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6월 27일, 새로 개발

6월 27일을 기점으로, 북한은 다양한 미사일

한 전술유도탄의 시험발사에 성공했다고 보도

을 수 차례에 걸쳐 시험발사하며 군사훈련에

하였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직접

박차를 가하였다. 북한은 6월 29일에 동해상

참관하였다는 이번 시험발사에서 북한은 김정

으로 스커드 미사일(사거리 500km)을 2발 발

은 제1위원장이 직접 신형 초정밀 전술유도탄

사하였으며 7월 1일에는 김정은 국방위원회

의 기술적 제원을 파악하고, 직접 시험발사 명

제1위원장이 동해 전방 화도방어대를 현지지

령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도하였다. 7월 2일에도 단거리 발사체 2발을

비슷한 시점인 6월 26일, 우리 군 당국도 북한 이 동해상으로 3발의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했 다고 밝힌 바 있다. 남북의 매체가 동시에 전

발사한 북한은 7월 5일에는 김정은 제1위원 장이 육, 해, 공군 섬 상륙훈련을 직접 현지지 도하였다. (통일뉴스 2014.06.27)

하는 것을 보면 북한의 단거리 미사일 발사는 확연해진다.

(통일뉴스 2014.06.27)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최 첨단 수준에서 새로 개발한 초정밀화된 전 술 유도탄 실험발사를 지도했다. [사진-노 동신문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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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무기

군 당국은 6월 27일에 북한이 발사하였다는

본부가 있는 충남 계룡대까지 정밀 타격이 가

미사일을 300mm 방사포로 분석하였다. 군의

능하다는 얘기다. GPS 시스템을 적용하면 미

한 관계자는 “북한이 어제 발사한 발사체의 궤

사일의 오차범위가 크게 줄어들어 “정밀타격”

적 등을 분석한 결과 300㎜ 방사포로 판단된

이 가능해진다. 군 소식통은 “북한이 KN-09

다”며 “사거리 연장을 위한 성능개량 시험인

의 표적 오차범위를 수십 m로 줄였을 수도 있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군 관계자는 “북한

다”며 “이는 북한의 장사정포 위협이 ‘물량공

이 KN-09의 정밀타격 능력 검증을 끝낸 것으

세’에서 ‘정밀타격’으로 진화한 것을 의미한

로 보인다”고 말했다. 북한군의 기존 240mm

다”고 말했다.

방사포 최대 사거리는 50∼65km이며 유도장 치가 없어 명중률이 매우 낮다는 것이다.

300mm 방사포는 12발의 로켓을 탑재해 동 시에 발사하는 방식이므로 순식간에 12발의

이와 달리 당국이 KN-09로 분류한 북한의 단

유도미사일을 발사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낳

거리미사일에는 러시아제 위성위치확인시스

는다.

템(GPS)인 ‘글로나스’가 장착된 것으로 알려 졌다. 사거리도 최대 180∼190km로 기존 방 사포의 3배 이상이다. 개성 인근에 배치하면 경기 오산과 평택 미군기지는 물론이고 각 군

자료 : 자주국방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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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300mm 방사포가 추진체를 달고 비행할 경우 일반적인 탄도의 포물선과는 전혀 다른 비행궤적을 그리게 된다. <자주국방네트워크 >는 이를 두고 다음 그림과 같이 설명하였다.


세상의 모든 무기

일반적으로 요격미사일은 포물선 궤적을 갖는

최고점에서 급격히 방향을 꺾어 낙하하게 되

탄두의 최종단계의 궤적을 계산해 마지막 단

면 요격미사일이 이를 요격하기가 매우 어려

계에서 명중시키는 방식으로 요격한다. 이에

워진다.

공격측은 이지스함이나 미사일요격부대의 요 격을 피하기 위해 저고도의 순항미사일 형태 로 발사할 수 있다. 그것이 위 붉은색 점선의 KN-01 형태이다. 그러나 순항미사일은 결정 적으로 속도가 음속(340m/s)보다 느려 지형 이 평탄한 지역이나 해상에서는 요격될 가능 성이 높아진다. 따라서 포물선 궤적과 달리 자체 추진장치를

게다가 방사포의 특성상 동시에 십수발의 발 사체를 한꺼번에 발사하게 되는데 이를 모두 요격한다는 것은 확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북한은 300mm 방사포 이외에도 스커드급의 단거리 미사일, 노동미사일 등 다양한 미사일 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들 미사일을 동시다발 적으로 발사할 경우 이를 모두 방어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가지고 궤적을 위 검은 실선처럼 변경시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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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민권연대 새바람 황태웅

원하는 것을 찾고, 지금 그것을 하면 됩니다

일단 제가 어떤 사람인지 짧게 말씀드려야겠

아하게 됐죠. 혼자 드럼독학을 해서 클럽에 대

네요. 저는 굉장히 소심한 아이였어요. 초등학

자보를 붙였어요. 밴드를 구합니다. 그래서 사

교 다닐 때 가끔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는데

람을 만났고 공연을 하러 다녔습니다. 가난했

누가 쳐다볼까봐 창피해서 버스 벨도 못 누르

지만 행복했죠.

던 굉장히 수줍고 소심한 아이였죠. 대신 책을 좋아하고 상상을 많이 하던 감성적인 아이이

시간이 좀 흘러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긴 했습니다.

인쇄회사에 다녔습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 고 잘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해

중학생 때 아스팔트사나이란 드라마가 있었

보니 할 만했고 스킬이 쌓여서 잘 할 수 있게

어요. 거기서 사막을 자동차로 가르는 주인공

된 일을 천직이라 생각하며 살았어요. 그렇게

들이 나왔어요. 굉장히 멋있었죠. 저도 그런걸

10년 이상 직장을 다녔죠. 뭐 중간에 자영업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럼 무얼 해야 하지? 그

해봤구요. 어른들이 동업하지 말라는 얘기, 해

래. 자동차를 하자. 그럼 실업계학교를 가자.

보니까 알겠더라구요. 친구사이 망가지는 거

그래서 자동차과를 갔어요.

한순간입니다. 자영업은 그렇게 접었구요. 어 느 날, 친구가 재밌는 팟캐스트가 있다고 해서

근데 가서 실망했죠. 맨날 엔진분해조립만 하

들어봤어요. 근데 지들끼리 낄낄 웃어대고 시

는 거야. 난 티비에서 본 것처럼 풍동테스트,

바, 졸라, 조또 막 그러는거죠. 나꼼수였어요.

클레이 자동차모형 만들기 이런 걸 하고 싶었 는데 현실은 썩은 기름을 매일 만지는 거였죠.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좀 더 적극적으

그러다가 또 음악을 만났어요. 헤비메탈을 좋

로 참여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2011년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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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지방선거 민권연대 회원 수기

월에 인터넷으로 진보당에 회원가입을 했어

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정말 커다란 변

요. 네 전 회원가입을 한 거지 입당을 한 게 아

화가 시작됐어요. 대중을 공감하게 되었고 또

닙니다. 암튼, 지역 활동을 하다가 진보2012

선거에 출마하게 되었습니다.

에서 새바람을 만났어요. 너무 좋더라구요. 같 은 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제게

사실 저는 선거 나갈 생각이 없었거든요. 왜?

마치 해방구 같은 거였죠. 뭐 여러분이 한총련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하루는 회사에

을 만났던 것 같은 그런 느낌이지 않았을까 싶

서 야근을 하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어요. 제가 지금껏 살면서 35살인데 인생을 살

지금 내가 행동하지 않으면 변화하지 않으면

면서 항상 가지고 있었던 질문들, 해답을 찾으

5년, 10년 후에 어떤 모습일까?’ 근데 별

려고 굉장히 노력했어요. 사회적으로는 이런

반 차이가 없어 보여요. 전 빚도 많습니다. 혹

저런 일을 많이 해보고 깨져도 보고 또 밑바닥

시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이번 6.4지방선거에

도 알게 됐죠. 아.. 그건 연애를 하면 알게 됩

서 전국에서 가장 재산이 없는 가난한 후보로

니다. 스스로의 밑바닥의 끝을 보게 되죠. (연

제가 기사로 나왔습니다. 이색적인 직업을 가

애관은 설명하려면 시간이 기니까 나중에 기

진 후보로는 외모로 승부하시는 라반특 강현

회가 되면) 어쨌든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새바

분 후보님이 같이 기사화됐구요. 역시 투쟁을

람 활동을 통해서 찾게 되었고 한국사회의 본

하려면 돈이 많으면 안돼, 가난해야해, 그래야

질과 한국사회의 정의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투사가 되지.

온전히 제 욕구에 의해서 투쟁과 학습을 병행 하게 되었고 사회와 동떨어진 ‘나’라는 개인

직장을 그만두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하자라는

을 보는 것이 아닌 사회, 대중, 나를 일치화하

결심을 하기까지 세 가지의 고민을 했어요. 56


6.4 지방선거 민권연대 회원 수기

첫째, 그냥 일을 하면 매월 200만원 이상 월급

10년 후를 위해 행복을 유보했죠. 근데 20대

을 받죠. 이걸 5년을 묶어봐요. 그리고 그 매

에도 그랬어요. 그때에도 돈을 좀 벌고 음악을

달 나오는 안정적일 것 같은 돈과 직장을 그만

해야지 했죠. 그런데 그렇게 안 된거죠. 사람

두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했을 때 행복을 비

들은 흔히 이렇게 말해요. 지금은 내가 그 일

교해! 아니야 돈이 별로 커보이지 않아 그래서

을 하고 싶어도 지금은 그 일을 하지 않고 뭔

나가리....!

가 열심히 모으거나 준비하거나 미뤄두거나 해서 나중에 행복해지자. 행복이라는 게 마치

둘째, 지금은 용기가 없어. 약 5년 후에 안정

적금을 들 수 있고 나중에 인출해서 쓸 수 있

이 되면 그때 하는 것은 어떨까? 40살의 행복

는 것처럼 생각해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

은 40살에 느끼는 것일 뿐이죠. 지금 한 살이

니다. 그때의 행복은 그 순간 영원히 사라지는

라도 젊을 때 느끼는 행복이 아닙니다. 사라진

거에요. 그 나이로 돌아가서 그때의 행복을 다

거죠. 그래서 나가리....!

시 찾을 방법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당장 행복해져야 하는 거죠.

셋째, 아직 젊잖아. 난 30대 중반밖에 안됐어. 거기다 동안이야 인생 졸라 짧자나.

그래서 고민을 선거기간 내내 했습니다. 좀 오

그래서 선택했습니다. ‘지금 바로 행복해져야

래 걸렸어요. 하지만 고민이 끝난 후엔 그냥

겠다’‘하고 싶은 것 가슴 떨리는 것을 하자!’‘

했습니다. 지금 하고 싶은걸 하자 언제? 당장!

지금 행복해져야지. 그걸 왜 미뤄!’ 여지껏 그

가슴 떨리는 말 ‘통일’, ‘조국통일’, ‘통일운

러고 살았는데.. 지금은 좀 힘들지만 5년 후,

동에 뛰어들자!’ 그래서 615청년학생본부에 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청학에서 상근을 한다

57


6.4 지방선거 민권연대 회원 수기

는 것이 굉장히 부담이었어요. 해본일이 아니

담을 가질 수밖에 없는 그런 자리입니다. 하지

었고 월급도 적을테죠. 그런데 막상 결심을 하

만 영광이죠. 그런 자리를 맡겨주셔서..

고 나니까 제가 부담을 가지고 있었던 부분들 이 굉장히 작아지더라구요. ‘일단 하고 문제

정리하면 그런 겁니다. 요약하면 자기가 언제

는 그때 가서 풀어보자’고 마음을 먹었습니

행복한지 욕망이 뭔지 내가 어떻게 생겨먹었

다. ‘아르바이트라도 하지 뭐’ 이렇게 문제는

는지 내가 하고 싶은걸 찾아야합니다. 누구의

작아집니다.

눈치도 보지 말고 욕망의 주체가 돼서 그리고 그 일을 그냥 해요. 그런다고 성공한다는 보장

막상 출근은 했는데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

은 없어요. 실패도 하고 작은 성공도 있겠죠.

합니다. 대충 얘기는 들었는데 전혀 상관없는

근데 그 일은 언제 하느냐면 당장 시작해야하

사람이라며? 뭐 이런거죠. 그쵸 이해합니다.

는 겁니다. 당장, 행복이란 게 저축하거나 적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니까 자기들은 얼마나

금을 들거나 해서 나중에 꺼내 쓸 수 있는 게

이상하겠어. 학생운동 출신도 아니지 운동경

아닙니다. 왜 지금 행복해지려 하지 않고 그걸

험도 없지 근데 상근한다니까 ㅋㅋ

유보해두나요. 그러면 그게 잘 사는 거죠. 잘 사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인거죠. 훌륭한 사람

그냥 회사와 다른 것은, 저는 민권연대 사람이

이 잘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원하는 것을 찾

라는 겁니다. 조직에서 나라는 사람을 믿어주

고, 지금 그것을 하면 됩니다. 인생 졸라 짧으

었고 임무를 주었습니다. 제가 만약 기본적인

니까요

것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민권연대와 우

이만 마치겠습니다.

리 동지들에게 누를 끼치는 것이기 때문에 부 58


서울민권연대 새오름 권말선

진정 조국을 사랑하는 길을 제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제가 서울민권연대 새오름을 처음 만난 때는

미제의 본질을 알게 되면서 그동안 제가 답답

2012년 12월 새오름이 ‘응답하라, 4050’이

해했던 우리 사회 문제는 모두 분단에서 비롯

라는 제목으로 연말 행사를 할 때였습니다. 한

되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성 대표님이 감옥에 계실 때 저를 초대해 주셨

리고 조국통일을 이루지 못하면 아무 것도 해

던 터라 꼭 가봐야지 했던 자리였습니다.

결되지 못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소박하지만 열정적인 공연이었고, 아무 사전 정보가 없던 저로서는 그 분들이 정말 아마추 어 배우들인 줄로만 알고 재밌게 관람했었습 니다. 그리고 약 4개월 후 2013년 3월, 서울민권연 대 새오름에 가입하기 전까지 저는 조직생활 이라고는 전혀 해 본 적이 없는 평범한 민간인 (?)이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되자 민족의 자주를 위해, 민주를 위해 피 흘리신 분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그 피 값으로 살게 된 내 인생을 어떻 게 똑바로 의미있게 살 것인가 고민하게 되었 습니다. 나이 사십 넘도록 내 코앞만 바라보며 살아온 제가 드디어 삶의 방향을, 나침반을 새로 설정 하게 되는 때였습니다.

다만 인터넷 여기저기를 다니며 우리 사회의

그 당시 제가 찾은 해답, 남은 내 인생을 바칠

부조리가 왜 해결되지 않는지에 대해 알고 싶

그 무엇은 바로 ‘민족’이었습니다.

어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러다 까페 활동을 통

민족을 위해, 민족의 하나 됨을 위해 살아야겠

해 북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새로이 알게 되었

다는 생각을 하자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는가?

고, 순수함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북녘 형제들

라는 물음이 또 생겼습니다.

에게 큰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59

그저 조국통일을 바라는 마음이면 되는가, 같


6.4 지방선거 민권연대 회원 수기

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리면 되는가, 나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민권연대에 들어오

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이 또 꼬리

니 운동에 청춘을 바치고 있는 분들이 드글드

를 물었습니다.

글 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즈음 저는 시간적 여유가 있어 옥중에 계시 는 자주민보와 관계된 몇 몇 분들께 인터넷 기 사를 보내드렸는데 그 중 한 분이 한성 기자님 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그 분이 새오름 대표인 줄도 몰랐고, 그저 북미대결전을 분석하는 기 자라고만 알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 분들이 얼마나 인간적이고 겸손하 고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지 알게 되니 정말 그 사람들 앞에서 고개가 절로 숙여졌습니다. 이때껏 사회생활을 통해 만났던 사람들 중에 착한 사람도 물론 많았지만 말과 생활태도, 마 음가짐 무엇 하나 빠질 것 없이 아름다운 사람 들을 만나긴 쉽지 않았습니다. 한성 대표님이

한성 기자님이 옥중에서 편지로 ‘션한 호프’

늘 얘기하던 ‘맑은 사람들’이란 표현을 이해

타령을 하시더니 출소 후 호프를 사 주겠다며

할 수 있게 되었고, 소수영 언니가 들려준 눈

용인에 오셨는데 그 때서야 저는 그 분의 살

빛이 맑고 한없이 순수한 북의 동포들 모습을

아온 인생 이야기를 제대로 들었고, 세상에 노

이 사람들에게서 발견한 느낌이었습니다.

동, 통일 운동에 젊은 시절을 다 바쳐 살아온 사람이 있구나, 실제로 저런 사람이 내 앞에 있다니, 라는 생각에 존경심과 충격을 받았습 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그 정도로 사회문제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무지하게 사십년을 살 아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 일은 또 얼마나 뜨겁게 열 심히 하는지요. 운동 경험이 없는 저로써는 어리벙벙할 때도 있고, 민중가요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사 용하는 용어도 생소할 때도 있지만 하나씩 배 워가는 공부가 재밌고 뿌듯합니다. 60


6.4 지방선거 민권연대 회원 수기

선배들에게 배우면서 실천하고 투쟁하는 지 물론 절대 쉽지 않은 공부입니다.

금의 제 삶이 행복합니다. 기어이 닭치고 조

나서는 걸 못하는 저에게 선거 출마라니요?

국통일 안아올 그 날을 생각하며 기쁘게 살아

상가에 방문해서 통합진보당을 지켜달라고 얘

갑니다.

기하는 것도 어렵고, 마이크 쥐고 대중 앞에

이 길로 이끌어 준 한성 대표님, 그리고 우리

서는 것도 어렵고, 주말을 고스란히 거리에서

동지들이 더 없이 고맙습니다. 역시 사람을 잘

보내는 것, 아이들이 집에 있는 엄마를 자주

만나야 하나봅니다. ^^

못 보는 것도 미안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더 이상 인터넷만 뒤지며 언제, 어

또 가을엔 경치 좋은 고성에 가서 사랑의 언

떻게, 누가 이 모든 부조리를 해결할 답을 찾

약을 하자는 약속도 벌써 작년에 날아갔고, 선

을 수 있을까 하며 한숨 쉬지 않고 투쟁으로

거가 끝나면 바로 1박 2일 여행 데려가겠다는

승리를 쟁취하는 일꾼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공약도 뻥이 되었고, 손잡고 데이트 한 게 언

있습니다.

제였더라? 하는 불만도 있었지만 어느새 또

또 무언가를 ‘더’ 책임지라니 슬쩍 두렵기도

거리에 있는 저를 발견하곤 뿌듯해졌습니다.

하지만 뭐, 걱정 없습니다.

민권연대, 새오름을 알 지 못했다면 저는 지금 쯤 어느 곳에서 내가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

혼자가 아니라 새오름이 있고 우리 민권연대 식구들이 있으니까요.

걸까 하는 의문을 떨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

진정 조국을 사랑하는 길은 민중에게 있고 민

을지 모를 일입니다.

중에게 배워야 한다는 것을, 운동의 걸음마를

제 나이 마흔다섯이지만 20대, 30대의 운동

이제 막 띈 지금, 제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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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지방선거 민권연대 회원 수기

가극단 미래 유정숙

점점 더 뜨거워지는 민권연대 회원들의 열기가 참 고맙고 좋습니다 가극단 미래 단원 유정숙입니다. 미래 활동을

하고 있을 때 선거운동 기간 내내 세월호 진상

한 지는 8년차입니다. 예술가로서 운동가로서

규명 서명을 받은 후보들이 명함을 찍고 여전

괄목할만한 성과보다 앞으로 성장해야할 몫이

히 세월호 진상규명 투쟁을 선봉에서 벌여나

많은, 부족함 많은 활동가입니다.

가는 모습을 봤습니다. 득표의 차이도 바로 거

늘 조직의 요구나 상황에 결심은 쉽게 하는 편 이었습니다. 이번에 통합진보당의 후보로 결 심하는 과정에서도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

기서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그제야 정신이 좀 차려진 것 같습니다. 그래, 동네에서 나도 이 것만은 꼭 해보자라는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는 만큼 해보자는 취지였기에 큰 어려움은 없

그 때 당시 방학1,2동에서 받은 서명의 수가

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래 전 단원이 후

700명 정도였습니다. 전체 서명수는 100만명

보로 결심하게 되었구요. 그렇지만 끝까지 최

정도 였구요. 천만 서명을 실질적으로 달성하

선을 다하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려면 우리 동네에서 1만명을 책임져야겠구나

예비후보와 선거운동 초반, 주민들을 만나며 지역에서 파악한 핸드폰 연락처만 414명. 그 러나 연락을 드렸던 건 카톡 약간수와 선거 전 날 문자 드린 것이 전부였습니다. 주로 혼자 활동하다보니 그랬을 수도 있지만 세월호 사 고가 터지고 더 정신을 차렸어야했는데 정신 을 놓아버린 면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선거를 마치고 선거 후속활동을 고민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체계를 타고 서명을 받 을 수 있을까? 인사도 드릴 겸 동장님, 복지관 관장님 등을 찾아가 물어봤습니다. 그 쪽으로 가능성이 없더군요. 계산을 해봤습니다. 1시 간 길거리 서명에 100명의 서명을 받을 수 있 다면 앞으로 90시간의 서명운동을 벌여야 되 는 거구나. 그래서 매주 월요일 저녁 1시간 공 식적으로 잡아놓은 서명 외에도 길거리 서명 을 많이 받으러 다녀야겠구나라는 결론을 내 62


6.4 지방선거 민권연대 회원 수기

렸습니다. 그런데 막상 받아보니 우리 동네에서 1시간에

학1,2동에서 받은 총서명수는 약 2180명입니 다.

100명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든 생각이

서명용지 분양받으신 분들의 얘기를 조금 들

서명을 받는 사람이 많으면 되겠구나. 상가나

려드리겠습니다. 서명하러 다니다 다리를 다

그 동안 만났던 지인분들께 부탁을 드리자고

치신 분, 다친 다리를 이끌고 친정엄마한테 서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서명을 받으면서도 부

명 받으러 갔다가 서명용지를 잃어버렸는데

탁을 드리고 따로 찾아도 가서 부탁을 드려봤

그걸 주운 동네 주민이 전화를 걸어오셔서 돌

는데 해보니 가장 좋은 건 길거리에서 서명을

려받게 된 서명, 어린이집 차량 기사님께서 이

받으면서 자발적으로 관심을 보여주시는 분들

거 해서 되겠어 하시더니, 한 명이라도 더 받

에게 서명을 부탁드리는 거였습니다. 그걸 알

겠다고 건널목을 사이에 두고 이리 갔다 저리

게 되니 더 길거리 서명 횟수를 늘려야겠다는

갔다 하는 모습을 보시더니 자신도 도와주시

생각을 하게 됐구요.

겠다고 하시며 주말에 시간 내 아는 분의 헬

그래서 계획 후 첫 주에는 3회를 나갔는데 그 다음 주에는 거의 매일 총 7회 서명을 받았습 니다. 그 다음 주에는 또 3회 밖에 못 하긴 했 지만 앞으로 주 3회의 서명운동을 벌여야겠 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서명용지 나눔한 숫자는 총 40명 84장입니다. 회수한 서명수는 201명이구요. 그래서 지금까지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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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클럽에 가서 서명 받아주시고, 70대 어르신 이 서명 부탁하기도 전에 와서 서명 해주시길 래 서명용지 부탁드렸더니 흔쾌히 받아 가셔 서는 비슷한 연배 분들이 많이 동참하지 않아 속상해하시면서 다 반대만 하는 건 아니다 나 같은 늙은이도 있다 힘내라 전화까지 따로 주 시고. 또 어떤 분은 서명 다 받으셨는데 시간 이 안 맞아서 노원에서 서명받는 분들에게 전


시민주권행동 이수진

미래를 사랑하라

달하고는 새 서명용지 받아오셔서 또 서명 받

전남대에서 2011년 여름까지 활동하고 잠시

았다고 주시겠다고 연락오고. 중학생, 고등학

쉬었다 2012년 6월 대선을 앞두고 시민주권

생들도 친구한테 받고 있는 중이고. 참, 저희

행동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

큰언니도 소식을 페이스북으로 접하면서 서명

피 2012년엔 대선이 있었죠, 저는 당연히 이

용지를 보내달라고 해서 보내줬습니다. 이번

길거라 생각했었는데요. 이 중요한 시기에 내

주에 만날 건데 서명 많이 받아서 온다네요.

가 동지들 그 고생에 무임승차하는건 운동가

이렇게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서명 운동을 지켜보면서 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서명은 세상을 바꾸는 서명운동이라고. 제 일 앞장에 서계시는 가족분들에게 어떻게라도 힘이 되어야한다는 마음들, 이번엔 정말 가만 히 있으면 안 된다는 마음들, 이 마음들을 마 을에서 구체적으로 모아 풀어나가는 것, 그것 이 이번 선거 후보로서의 몫이고 과제라고 생 각합니다. 그러나 제 실력이 미진하여 벌써 그 분들을 챙기는데 허덕허덕하고 있습니다. 계 속 노력해서 풀어갈 방법을 생각하겠습니다. 점점 더 뜨거워지는 민권연대 회원들의 열기 가 참 고맙고 좋습니다.

로서 참... 찌질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대선을 6 개월 앞두고 광주에서 가장 뽀대나는 조직인 시민주권행동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성격이 그리 좋지못합니다. 끈기가 없고 성격이 급하고 자존심이 심하게 강합니다. 이런 성격이 올해 상반기 선거투쟁이나 세월 호 투쟁에서 좋은 모습으로 많이 바뀌고 있습 니다. 조직과 동지들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광주 우리 동네 촛불 중 매곡동 용봉동 촛불주체입니다. 저희 시민주권행동이 세월호 투쟁에 다 바쳐 살고 있는데요. 주체란 이유로 모범으로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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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지방선거 민권연대 회원 수기

뽑힌 거 같구요. 지금부터 시민주권행동이 어

밝히기 시작했습니다.

떻게 살아왔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지역거점에 천막을 치고 아침 부터 저녁까지 시민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지난 6.4 지방선거 기간 중이었던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했습니다. 304명의 귀한 목숨

정달성 후보님의 배우자가 임신 중이고 또 직

들을 앗아간 이 참사에 광주 진보진영들의 움

장인이라 처음엔 단순히 배우자 수행자격으로

직임은 없었습니다. 심지어 작년 국정원 대선

캠프에 결합했습니다. 초반 후보 배우자 수행

조작부터 꾸준히 진행해 왔던 토요촛불을 세

은 몸이 힘든만큼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월호의 아픔을 함께해야한다는 이상한 이유

그러다 4월16일 이후 캠프에서 배우자 수행

로 멈춰야한다고 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습

과 촛불주체를 함께 맡게 되었습니다.

니다. 요즘 촛불을 준비하면서 고민이 한 가지 있습 그래서 시민주권행동은 선거기간이었지만 동

니다. 어린아이들이 정말 많이 옵니다. 심지어

네촛불을 시작했습니다. 뭐 다들 예상하시겠

형아들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며 직접 또래

지만 다른 후보들은 노란리본이 전부인양 리

친구들과 어른들에게 서명을 받으러 다니는

본만 차고 돌아다녔습니다.

초등학생들도 있습니다. 팔뚝에 그림이 가득

시민주권행동의 공동대표이신 정달성대표님

한 공고생들도 있습니다.

을 중심으로 대표님 지역구 동네에서부터 촛

매주 잊지 않고 촛불에 오시는 분들이 앉아있

불을 밝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심규만, 마

다만 가는 것이 아닌 주체로 어떻게 내세울 수

정환 후보의 지역구인 두암동에서도 촛불을

있을까 고민이 됩니다. 영상. 공연. 발언. 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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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지방선거 민권연대 회원 수기

종이배에 마음적어 접기.... 혹시나 좋은 의견

함부로 하지마라. 물건에게 함부로 하다보면

있으시면 오늘밤 술자리나 페이스북에 남겨주

습관이 되어 사람에게도 함부로 하게 된다.

시면 더 열심히 준비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정부가, 그리고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너무나 함부로 해서 앞으로 그 가르쳤던 아이

세영이 엄마아빠가 만든 영상 많이들 보셨을

들을 만나면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거 같은데요. 아이들이 아무것도 안 보이는 캄 캄한 배안에서 얼마나 춥고 무서웠을까.... 저

죽어버린 아이들... 죽임당한 사람들. 그리고

는 여기까지밖에 생각을 못했었습니다. 그런

그들과 함께 사라져버린 미래.

데 영상에서 세영이 엄마가 그런 말씀을 하십

끈기가 없던 나를 100여일이 넘게 촛불을 들

니다. “세영아 친구들이 니 옆에서 죽어갈 때

게 만든 아이들의 꿈. 광주진보진영이 멈춰도

얼마나 무서웠니?”

시민주권행동이 다 해버리겠다는 자존심.

끈기없는 제가 100여일 가까이 세월호 촛불

향후에도 열심히 동네촛불 지키도록 하겠습

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았

니다.

습니다. ‘미래를 사랑하라!’입니다.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때가 있었습니 다.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화가 나면 화를 못 이겨 책을 찢거나 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 이들에게 그렇게 가르쳤었습니다. 물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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