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민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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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본;
월간
본; 10월
2
시선집중
발행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민권연대)
발행일
2014년 11월 11일 (8호)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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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mag.mkyd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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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무기
“적을 삐라로 묻어라”
논란이 뜨거운 THAAD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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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아시안게임에서 통일을 만나다
미래의 거울, 역사
동아시아 역사칼럼
[연재] 동아시아 분쟁의 어제와 오늘 ② ‘원조괴뢰정권’ 만주국 이달의 역사
통일의 실천 강령 10.4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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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국내경제 가속도 붙은 북한의 대외경제협력, 동북아시대 열리나 세계경제
스코틀랜드 독립투표가 말해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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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터닝포인트
중세시대로 시간여행, 프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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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그 본질적 가치
분단을 노래한 월북시인 박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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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문턱을 넘어선 10월입니다.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청명한 하늘은 높습 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그런 가을날입니다. 바람이 찹니다. 여기저기 콜록거리는 기침소리가 들립니다. 건강에 유의해야할 계 절입니다. 단단히 옷을 여미고 다니시길 바랍니다. 남북관계가 전환될 기미가 보입니다. 2차 고위급접촉이 10월말, 11월 초에 있다 지요. 11월 1일은 세월호 200일이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11월 4일은 미국 중간 선거날이기도 합니다. 가을 들판이 결실을 맺는 것 처럼 무엇인가 결실이 맺어지길 기대해보는 10월 입 니다. 편집자 드림.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란다. 각각의 얼굴만큼 다양한 각양각색의 마음을 순간에도 수만가지의 생각이 떠오르는데 그 바람같은 마음이 머물게 한다 는건 정말 어려운 거란다.” -어린왕자 11월호부터 새로운 편집부로 거듭납니다. 많은 관심과 사랑을 당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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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집중
적을
삐라로
묻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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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페이스(Pace) 미국 육군부 장
안게임 북한 선수단과 응원단 파견 관련 남북
관은 “적을 삐라에 파묻어 버릴 것”을 명령했
실무협상을 하던 8월에만 수십 차례의 대북전
다. 당시 삐라는 ‘들리지 않는 총성’, ‘종이
단살포가 있었다고 한다.
폭탄’, ‘심리전의 보병’으로 인식되었다. 이
대북전단살포에 대해 한국 정부는 표현의 자
에 따라 미 극동사령부 심리전과(PWB)는 전
유, 집회·시위의 자유가 있기에 민간인들의 대
쟁 발발 직후인 6월 28일 1200만 장에 달하
북전단살포를 막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즉,
는 삐라를 뿌렸으며 1953년 정전협정을 체결
정부가 직접 전단살포를 하지 않는다면 문제
할 때까지 25억 장 이상의 삐라를 살포했다.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주로 B-29 폭격기로 살포한 삐라는 한반도를
하지만 정부의 주장에 반론도 만만찮다. 일단
20번 덮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전쟁
대북전단살포가 북한을 자극해 남북관계를 파
개시 3일 만에 1200만 장을 인쇄, 배포한 미
괴하기 때문에 당연히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
군의 발 빠른 움직임이 놀라울 따름이다.
는 논리가 가능하다. 대북전단을 살포하려면
삐라 살포는 오늘날에도 계속된다. 인천아시
막대한 돈이 필요한데 한국에 정착하기도 힘
안게임이 한창이던 지난 9월 21일 경기도 파
든 탈북자들이 어디서 돈을 구하겠는가. 정부
주시 오두산통일전망대 인근에서 탈북자 단체
가 지원만 조절해도 충분히 막을 수 있다.
인 자유북한운동연합이 20만 장의 대북전단
또한 “집단적인 폭행, 협박, 손괴(損壞), 방화
을 살포했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인천아시
등으로 공공의 안녕 질서에 직접적인 위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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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집중
끼칠 것이 명백한 집회 또는 시위”를 금지하
방치를 넘어 군대를 동원해 보장하고 있다는
는 집시법 제5조 또는 “신고장소가 「군사기
의혹도 있다. 지난 3월 24일 백령도에서 포사
지 및 군사시설 보호법」 제2조제2호에 따른
격훈련을 하는 와중에 민간단체가 대북전단을
군사시설의 주변 지역으로서 집회 또는 시위
살포해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북한은 한국군
로 시설이나 군 작전의 수행에 심각한 피해가
이 대북전단을 살포했다고 주장했으나 국방부
발생할 우려가 있는 경우” 집회 및 시위를 금
대변인은 이를 부인하며 민간단체 소행이라고
지하는 집시법 제8조 3항 3호를 적용할 수도
밝혔다. 문제는 포사격훈련을 하는 중에 민간
있다. 또 “위해를 입을 우려가 있는 사람을 필
단체가 대북전단을 살포하는 게 통상적으로
요한 한도에서 억류”할 수 있는 경찰관 직무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상식적으로 볼 때 민
집행법 제5조 1항 2호를 적용할 수도 있다.
간단체의 대북전단살포를 군에서 포사격훈련
또 대북전단의 경우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 제
으로 엄호해 준 모양새에 가깝다.
5조에 따른 금지광고물로 볼 수 있으며 동법
북한은 박근혜 정부의 2차 고위급접촉 제안에
시행령 제4조, 제5조에 따라 애드벌룬과 전단
대해 대북전단살포부터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은 시장에게 허가를 받아야 하기에 관할 시에
정부가 앞에서는 대화를 이야기하면서 뒤에서
서 충분히 금지할 수 있다.
는 민간단체의 대북전단살포를 용인하는 모습
이처럼 충분히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음에도
에서는 진정성도 찾을 수 없고 남북관계 발전
정부는 대북전단살포를 방치하고 있다. 아니,
의지도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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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아시안게임에서
통일을 만나다 http://mag-mkyd21.tistory.com/87 글. 서울민권연대 새바람 신선하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아시안게임 기간 동안 인천에 와서 세 번의 경
름이 늘었고 배는 조금 나왔지만 통일에 대한
기를 봤습니다.
마음은 오히려 깊어졌습니다. 더욱 절실해졌 습니다. 통일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종북이라
9월 20일 북 vs 홍콩 여자축구 16강
는 굴레가 씌워진 채 탄압의 정점에 서 있지
5:0으로 북측 승리!
만 통일만이 답임을, 통일만이 분단조국의 모
10월 1일 북 vs 일본 여자축구 결승
든 모순을 깨고 민족, 민중이 행복해지는 길임
3:1로 북이 금메달, 남은 동메달!
을 믿기에 모진 풍파도 뚫고 굳건히 자리하고
10월 2일 남북 남자축구 결승 연장전 끝에
있는 우리입니다.
1:0으로 남이 금메달, 북은 은메달! 그런 우리의 진심을 북녘 동포들에게 조금이 경기를 보는 내내 긴장감으로 심장이 쪼글어
라도 더 전해주고자 더 큰 목소리로, 마음을
드는것만 같았어요. 우리 선수가 넘어져있으
담아 소리치고 또 소리쳤습니다. 그 마음이 전
면 당장 그라운드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도 느
해져서일까요? 경기가 끝나자 북측선수들이
꼈습니다. 한 목소리로 “우리는 하나다”, “통
우리를 향해 힘차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해
~일 조국”을 외치며 응원했습니다. 아빠들은
주었습니다. 응원석 가까이까지 와서는 우리
연신 제 아이를 들어 올리며 이쪽을 봐달라고
와 함께 “조국통일”을 연호하며 주체할 수 없
소리쳤습니다. 무슨 마음이었을까요?
는 눈물과 감동을 나눴습니다. 기쁨, 감격, 서 러움이 교차되어 너나할 것 없이 뜨거운 눈물
가장 값진 삶을 살겠노라며 통일을 위해 20대
을 쏟아냈습니다.
를 바쳐 투쟁했던 이들이, 이제는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어 아이들을 데리고 온 것입니다. 주
또한 세계가 주목하는 이 대회에서 각본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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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드라마를 남북의 어린 선수들이 만들어냈습니
며, 우리도 손도 잡고 얼싸안을 수 있다면 얼
다. “같이 찍자 남과 북”이라는 우리의 외침을
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선수단 버스가 지
들었는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가서 함
나가는 찰나가 우리에게 허락된 짧은 시간, 그
께 사진을 찍은 남북 여자선수들! 분단의 장벽
마저도 경찰들이 막아서더군요.
이 순식간에 허물어졌습니다. 그 순간이 바로 통일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아시안게임의
하지만 더 긴 세월도 통일을 바라는 마음하나
최고 명장면을 눈앞에서 보고 있자니 그 감동
로 버텨온 우리입니다. 경찰벽이 몸은 막을지
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몰라도 마음 가는 것마저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일당백 정신으로 있는 힘껏 단일기를 흔들며
너무나도 기다렸던 만남. 분단을 영구히 하고
눈물 섞인 쉰 목소리로 또 한 번 “조국통일”을
자 하는 세력들이 두려워하는 것도 바로 이 만
외쳤습니다. 차창 너머로 북한선수들도 뜨거
남이었을 겁니다. 만남이 곧 통일이 니까요. 고마움과 감격의 눈물이 바 라보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또 한 번 적셨습니다. 경기가 끝나도 쉬이 떠날 수없는 마 음. 선수들 가는 모습이라도 보려고 막차시간도 넘겨 자리를 지켰습니 다. 이라크 선수들이 자국응원단과 포옹을 하고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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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운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주체할 수 없
느꼈습니다. 분단의 시간은 우리 민족이 함께
는 벅찬 감동과 긴 여운을 가슴에 담고 서울로
한 유구한 역사에 비할 수가 없습니다.
돌아왔습니다... 우리민족끼리 통일의 길을 열어준 6.15 공동 서로 만나지 못하고 떨어져 지낸 세월동안 책
선언. 그 약속을 재차 확인하고 더욱 구체적인
으로, 숫자로 통일을 이야기할 때 잊고 있었던
이행 방도를 담은 10.4 선언.
것이 있습니다.
한민족의 평화와 번영의 미래를 밝혀준 이 약
“만나니 좋다는 것”
속들과 함께 통일시대는 이미 시작되었습니
한번의 만남으로 장벽이 무너지고, 가슴 저 밑
다. 통일운동을 통해 조국과 민족애를 배우고
에서부터 뭉클하게 뜨거움이 샘솟았습니다.
성장한 우리 청년들이 이제는 통일시대의 주
이 마음이 통일의 첫 걸음이라고 다시 한 번
역으로 우뚝 섭시다. 어려운 조건에서도 최 고의 기량을 선보여준 북측 선수들 고맙습니 다. 자랑스럽습니다. 가까운 미래에 꼭, 다 시 만납시다! 통일조국에서 다시 만 납시다! 월간 본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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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가속도 붙은 북한의 대외경제협력, 동북아시대 열리나 http://mag-mkyd21.tistory.com/88
북한의 대외 경제협력 흐름이 가파르다. 북한
한과 미국, 일본의 외교적 접근이 가시적인 성
은 전통적인 우방인 중국 외에도 러시아와의
과로 나타나게 된다면, 이는 단기적으로 일부
경협을 물류에서 에너지, 과학기술, 농업, 임업
대북 경제제재의 해제,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분야 등으로 꾸준히 확대 강화하여 새로운 전
대규모 투자협력으로 나아갈 가능성도 있는
략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의미 있는 대북접촉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일본도 ‘납치문제 해결’을 명분으로
북한이 동북아를 무대로 벌이는 경제협력의
북일 직접대화에 나서고, 미국마저 8월 16일,
현황은 어떤지, 그리고 가속도 붙은 북한의 대
군용기를 이용해 평양을 극비리에 방문했다는
외경제협력이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
소식까지 전해졌다.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북
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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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전략적 협력관계로 격상된 북러 협력
북러간 채무 탕감 소식은 양국의 협력관계를 전략적으로 확대해 나가겠다는 매우 상징적
최근 북한의 대외 경제협력에서 가장 두드러
인 조치다. 게다가 양국은 루블화를 결제통화
지게 나타나는 특징은 바로 러시아와의 협력
로 사용함으로써 기존 달러중심 체제에 구애
확대다. 북한과 러시아는 5월 11일, 구소련과
받지 않고 협력을 확대하겠다는 의지를 대외
의 채무탕감 협상에 최종 합의하고, 6월부터
적으로 천명한 셈이다.
북한과 러시아 양국가간 무역거래를 루블화로 하기로 결정하며 경제협력을 한층 높은 수준
협력 확대를 위한 북러 양국의 전략적 조치는
에서 전개하고 있다.
석탄광산, 철도·도로, 희소금속 채굴, 발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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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확충 등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의 합작 프로젝
장을 만나 “북한이 연해주에 1백만 달러를 투
트 추진으로 현실화되고 있다. 특히 북한과 두
자할 것”이라 밝혔다고 한다.
만강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연 해주 지방정부는 북한 당국과 농업, 어업, 건
새롭게 떠오른 몽골과의 협력사업
설업, 정보통신과 전통의약, 선박 건조와 수리 분야에 이르기까지 협력분야를 확대했다. 이
최근 북한과 몽골과의 협력관계도 급격히 발
와 관련한 7월 21일 <자유아시아방송> 보
전하고 있다. 몽골 차히야 엘벡도르지 대통령
도에 의하면, 림청일 나훗카 주재 북한 총영사
은 2013년 10월 28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
는 러시아 연해주의회 빅토르 고르차코프 의
1위원장 집권 이후 북한을 방문한 데 이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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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방면적인 경제교류에 합의했다.
을 통해 알려졌다. 몽골은 전통적인 목축 국
북한과 몽골은 2013년 7월 정보기술(IT) 분
가며 농업 GDP의 80%가 축산업임을 볼 때,
야의 교류와 협력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으며,
몽골이 북한의 역점사업인 세포등판 축산단
2014년 4월에는 ‘북한·몽골 친선공동회사’
지 개발 사업에 협력하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
설립에 관한 양해문에 조인했다. 또 5월에는
도 있다.
몽골의 정유회사 <에이치비오일(HBOil JSC) >이 평양에 사무소를 차리고 북한 라선 등지
북한과 몽골의 협력 강화는 한반도 북쪽에 위
에서 내륙 유전과 가스전 탐사 사업을 시작했
치한 북한의 지리정치학적, 지리경제학적 가
다는 소식이 7월 1일자 <자유아시아방송>
치가 실제 경제협력 확대 요인이 되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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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분명하게 실증하고 있다. 내륙에 위치한 몽골
전 세계 GDP성장률은 3.4% 정도로 전망되고
이 중국과 러시아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균형
있다. 하지만 아시아개발은행(ADB)은 2014년
을 유지하면서도 해양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제외한 중국, 한국, 대만, 홍콩 등 동
한반도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기 때
북아 주요국의 경제성장률을 전년보다 높은
문이다. 이에 대해 <연합뉴스>는 몽골이 해양
6.7%로 전망했다. 이는 아시아개발은행이 전
접근의 길을 찾고 자국 에너지 및 지하자원 개
망한 미국, 영국, 일본, 독일 등 주요국의 성장
발을 위한 협력 상대로 북한을 점찍은 것으로
률 1.9%에 비해 세 배 이상 높은 수치다.
보인다고 보도한 바 있다. 게다가 중국, 일본, 러시아 등 한반도 주변 주
바야흐로 현실화되는 동북아 시대
요국의 명목총생산은 전 세계 4분의 1 가량을 차지하고 있고 무역량 또한 비슷한 수준을 점
사실 2014년 한반도 북쪽을 둘러싸고 확대 강
유하고 있어, 이미 거대한 경제권을 형성하고
화되는 경제협력은 날로 높아가는 동북아지
있는 형편이다.
역 경제의 위상을 감안한다면 늦은 감이 있다. 세계 경제 성장의 중심축으로 부상한 동북아 동북아 지역은 전 세계가 여전히 2008년 미국
시아 지역의 중심 무대는 바로 한반도다. 한반
발 경제위기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
도는 가까운 시일 내에 대륙과 해양의 교량으
는 가운데, 유일하게 고도성장을 구가하는 지
로써 동북아 물류의 중심거점으로, 나아가 포
역이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2014년
괄적 경제협력의 중심지로 기능하게 될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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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동북아 시대의 주역은 바로 우리 민족 가속도가 붙은 북한의 대외협력에 한 차원 높 은 날개를 달아줄 것은 바로 남북경제협력이 다. 경제협력을 꾸준히 안정적으로 확대강화 하기 위해서라도 동북아지역의 정치군사적 안정은 필수적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민족의 통일 없 는 동북아 협력은 그 한계가 뚜렷할 수밖에 없 다. 결국 21세기 동북아 시대의 주역은 우리 민족이며, 그 무대는 한반도인 것이다.
다.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의 라선특구와 청진 지역의 항구 이용권을 확보하거나 라진-하산, 신의주-단둥 철도 확충 사업을 가속화하고 있 는 것, 그리고 몽골의 대북 협력 확대가 바로
머지않아 열리게 될 통일의 그날은 바로 우리 민족이 동북아 시대의 주역으로, 세계 평화와 번영의 주역이 될 날이다. 민족의 미래, 인류 의 미래를 여는 주인공은 바로 당신이다.
그 실례다. 월간 본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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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스코틀랜드 독립투표가 말해주는것 http://mag-mkyd21.tistory.com/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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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적어도 30대 이상이라면 멜 깁슨과 소피 마르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축구경기를 하면 스코
소가 주연으로 나왔던 1995년도 영화 ‘브레
틀랜드 사람들은 프랑스 팀을 응원한다는 말
이브 하트’를 기억할 것이다. 마지막에 ‘프리
이 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영국이라
덤(freedom)’을 외치며 처형당하는 멜 깁슨의
는 국가에 묶여 있지만 다른 민족이다. 스코틀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이 영화는, 13세기 스코
랜드인들은 켈트족인데, 켈트족은 프랑스 남
틀랜드 독립영웅 윌리엄 월리스(멜 깁슨)가 잉
부의 유목민이었다. 이 유목민 중 일부가 수
글랜드 왕에 맞서 독립전쟁을 행했던 실화를
천 년 전 브리튼 섬으로 이주했다. 그러다가
바탕으로 했다.
1,500여 년 전쯤 앵글로 색슨족이 들어와서 추운 북쪽 지방으로 켈트족을 몰아낸 것이 스
윌리엄 월리스의 스코틀랜드 독립의 염원은
코틀랜드가 생겨난 역사다.
21세기에 실현될 수 있을까? 9월 18일(현지 시간) 스코틀랜드 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하나의 섬에서 함
가 실시되었다. 개표 결과는 찬성 44.58%, 반
께 살아왔지만 그리 좋은 사이는 아니었다. 스
대 55.42%로 잉글랜드로부터의 독립 추진 안
코틀랜드가 왕위계승 전에 휩싸이자 1296년
은 부결됐다. 윌리엄 월리스의 꿈은 좌절된 것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는 군대를 이끌고
인가? 하지만 이번 스코틀랜드 독립 투표는
스코틀랜드를 점령한다. 이 때 스코틀랜드 독
단순히 부결되었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다.
립영웅 윌리엄 월리스는 1297년 9월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 농민이 주축이 된 5000명의
스코틀랜드 독립투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군사로 2만5000명의 잉글랜드 정예군을 격파
은 무엇일까?
한다. 하지만 월리스는 ‘폴커크전투’에서 패 배하여 스코틀랜드 독립을 쟁취하진 못했다.
스코틀랜드 독립투쟁의 역사
그러나 월리스의 죽음은 스코틀랜드 독립운 15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동의 불쏘시개가 됐다. 스 코틀랜드 독립군은 1314 년 베녹번 성에서 7500여 명으로 잉글랜드의 4만여 대병력을 물리친 결과 독 립을 쟁취하게 된다. 이런 두 나라가 한 나라로 통합되게 된 것은 왕실 혈통과 관련이 있다. 1603년, 독신으로 살았던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는 사망 하면서 스코틀랜드 국왕인 제임스 6세를 왕 위 계승자로 지목한다. 제임스 6세는 잉글랜 드 국왕이자 엘리자베스 1세의 아버지인 헨리 8세의 누나인 메리 스튜어트 스코틀랜드 여 왕의 아들로, 스코틀랜드 왕실 혈통뿐 아니라 잉글랜드 왕실 혈통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다.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로 건너가 잉글랜 드와 스코틀랜드 두 국가의 왕위를 겸하는 최 초의 왕이 되었고, 화폐를 통일하는 등두 국가 의 통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약 100년 후 인 1707년 두 국가는 합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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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두 민족 간의 갈등이 사라진 것은 아 니었다. 특히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가 재임한 1970년대부터 두 국가 간의 관계는 금이 가 기 시작했다. 대처 총리의 강력한 민영화 정책 추진으로 스코틀랜드 경제의 기반인 조선·철 강업 등이 곤경에 처하면 경제가 안 좋아졌다. 런던 금융가의 이익만 챙기는 영국 정부에 대 한 불만이 고조되었다.
경제위기와 독립 그리고 국민국가 스코틀랜드에서 독립의 요구가 나오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왜 유독 지금시기 독립에 대한 요구들 이 크게 분출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민족 적, 역사적 배경과 더불어 현재의 경제위기와 관련이 크다.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이번 선거에서 독립 찬성의 주된 이유 중 하
럽연합 회원국 자격 상실, ▲독립 스코틀랜드
나는 영국 정부의 긴축정책이었다. 2010년 집
의 주 소득원이 될 북해유전의 사용 불가방도
권한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 내각은 2008
마련 등의 위협을 하고, 스코틀랜드 주요 기업
년부터 시작된 세계경제위기 극복을 명분으
들의 이탈 움직임을 보였는데도 독립 찬성이
로 스코틀랜드에도 긴축을 강하게 요구했다.
44.58% 나온 것은 독립에 대한 요구가 크다
영국의 무상의료시스템인 ‘국가의료서비스
는 것을 보여주었다.
(NHS)’를 보수당 정권이 민영화하려고 하는 것 역시 독립 찬성 진영에서는 주요한 문제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존 서구 근현대
다.
국민국가라는 틀에 균열이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애초 지방 분권적인 형태로 존재하
스코틀랜드 32개 주 중 유일하게 찬성표가 많
였던 서구의 여러 민족들이 하나의 국가를 구
았던 4개 주는 던디(찬성 57%), 웨스트 던바턴셔(54%), 글래스고(53%)와 노스 래너크셔(51%)로, 스코틀랜드에서 저 소득층과 실업률이 가장 많은 지역이 다. 긴축정책에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곳 들이기도 하다. 이번 경제위기에 대한 피해가 클수록 독립에 대한 요구가 높 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영국정부가 스코틀랜드 독립을 막기 위해 ▲파운드화 공유 불가, ▲유 17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성하고 살게 된 것은 그것이 이득이 되기 때문
이 서구식 국민국가 전체의 이득을 보장 해 줄
이었다(※ 물론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과정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천편일률적이진 않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 가체제를 형성하면서 안보상의 혹은 경제상의
세계 곳곳의 분리 독립 움직임과 세계질서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특히 산업혁명 이후에 자본의 대외진출(식민지 수탈 등)을 위한 수단
스코틀랜드뿐만 아니라 많은 지역에서 분리
으로 강력한 국가가 요구되었다.
독립 요구가 커지고 있다. 영국 웨일즈도 분 리 독립을 희망하고 있고, 스페인 카탈루냐주,
하지만 세계적 경제위기가 지속되자 국민국가
벨기에 플랑드르, 이탈리아 북부 남티롤, 캐나
전체의 경제적 이득은 줄어들 수밖에 없게 되
다 퀘벡주 등도 분리 독립에 대란 이야기가 나
었다. 미국으로부터 시작된 경제위기로 인해
오고 있는 곳들이다. 세계경제가 단기간에 침
긴축을 강요받고, 임금과 연금이 삭감되는 등
체국면에서 벗어나기 힘든 상황에서 분리 독
이득을 떠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처지가 되
립에 대한 요구들은 더욱 커져갈 것이다. 그
었다. 나아가 국민국가 안에서도 피해를 더 많
에 따른 기존 국가내의 갈등도 더 커져갈 수
이 보는 지역과 덜 보는 지역이, 소외받는 지
있다.
역과 민족들이 생겨나고 있고 그에 따른 불만 들과 피해의식이 높아지고 있다.
분리 독립 요구들은 세계의 정치, 경제 질서 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요인이 된다. 만약 스
이전 시기 경제적 요구 등으로 강력한 중앙집
코틀랜드가 분리 독립하게 됐다면 어떻게 되
권적인 국민국가가 요구되었지만 이제는 그
었을까? 영국의 정치, 군사적 지위는 크게 악
국민국가가 경제적 요구를 실현할 수 없는 처
화되었을 것이다. 스코틀랜드는 그동안 영국
지가 된 것이다. 즉,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
해군의 발진기지 구실을 해왔다. 스코틀랜드
18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에는 영국 핵잠수함 기지를 포함해 영국의 모
또 다른 경제위기 가능성)에 놓여 있는 만큼
든 핵무기들이 배치되어 있다. 나아가 이것은
분리 독립 움직임과 그에 따른 세계질서 변화
영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영국의 약화는 나토
를 더욱 주시해야 할 시기다.
(NATO)의 약화를 의미하며 이것은 미국에게 있어 대외 패권정책의 한 축이 크게 상실되는
반대로 스코틀랜드를 포함한 분리 독립 움직
것을 뜻한다.
임은 새로운 국가적 통합을 위해서는 경제적 대안과 국가를 구성하는 각 세력들 간의 소통
비단 스코틀랜드뿐만 아니라 각 지역에서 분
과 민주주의가 더욱 절실함을 보여준다. 통일
리 독립 움직임이 본격화 된다면 세계의 정치,
을 준비하는 우리민족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군사적 지형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요인이 될 것
크다.
이다. 세계경제가 장기간의 저성장 국면(혹은
월간 본 10월
19
중세시대로 시간여행, 프라하 http://mag-mkyd21.tistory.com/90
드디어 본격적인 프라하 여행이다. 시차적응이 안되 4시에 눈이 떠졌다. 일찍 일어나 산책에 나 섰다. 밖은 매섭게 춥다. 처음나가서 본 프라하 길이고 새벽인지라 조금 두렵다. 발걸음을 옮겨 바츨라프 광장으로 갔다. 체코 역사문화의 중심지라는 이곳에서 사회주의가 무너지는 이른바 프 라하의 봄(벨벳 혁명)이 찾아왔다. 하지만 지금 거리에는 술취한 젊은이들과 맥도날드와 삼성이 보인다.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 동상처럼 가운데 바츨라프의 동상이 우뚝 서있다. 20
인생의 터닝포인트
‘오 나의 여신님’ 알퐁스 무하
여성성을 아름답게 묘사한 고대부터의 예술 작품은 어머니에 대한 포근한 향수와 성적 욕
골목을 해메이다가 알퐁스 무하 박물관을 발
망, 미적 감각이 맞물려 현재 자본주의 사회
견했다. 알퐁스 무하는 아르누보시대에 파리
에도 예술작품이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
에서 활동했던 화가다. 아르누보(Art- Nou-
는 듯하다.
veau)란 1900년대, 세기의 전환기에 서구에 서 유행했던 예술양식으로, 순수예술과 각종
또 눈길을 끄는 작품은 어두운 눈밭에 홀로 앉
실용적인 디자인, 상업적인 분야까지 포괄했
아있는 러시아 여인을 그린 대형화폭이다. 절
던 화려한 장식 양식이다. 알퐁스 무하는 아르
망적 분위기가 감도는 전체적인 작품 이미지
누보의 대표 화가이다.
속에 세심하게 묘사된 좌절한 여인의 얼굴을 통해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어디서 많이 본듯한 느낌은 과거 이 작가의 영
지금까지 작품과는 완전히 상반된 작품이다.
향을 굉장히 많이 받은 듯한 일본 만화책에서 본 것이다. 중고교 시절 봤던 ‘오 나의 여신 님’이라는 만화에서 본 양식이 바로 아르누 보 양식이었다. 정말 굉장히 화려하고 섬세한 화폭은 만화나 포스터 같은 평면 예술에서 보 여지는 한계에 도전하는 듯 했다. 카네이션, 백합, 장미, 수선화를 여인으로 의 인화 해 그려놓은 작품과 4가지 예술 시, 춤, 미술, 음악을 모티브로한 작품이 눈길을 끈다. 21
인생의 터닝포인트
여세를 이어서 알퐁스 무하가 디자인한 체코
을 보고난 후 던지는 질문이다.
인들을 위한 무대인 시민회관을 찾았다. 시민 회관의 화려한 양식과 가운데 모자이크에서
밖으로 나와 트램을 탔다. 체코의 트램은 차
아까 박물관에서 보았던 무하를 다시 볼 수 있
와 도로에서 공존한다. 어찌보면 참으로 불편
었다. 밖에서 사진을 몇장 찍고 안으로 들어가
한 교통수단이지만 거리를 한가롭게 바라보
서 내부를 간단히 보았다. 이 화려함 속에 사
기 원하는 관광객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탈거
람들은 무엇을 찾고 있었을까?? 무하의 작품
리이다. 강을 건너자 까를교와 프라하성의 풍
인생의 터닝포인트
경이 나타난다. 다리건너 바로 내려 등산열차
은 무엇일까?
를 향해 걸어갔다. 한참 높은 언덕에 있는 전 망대 근처로 데려다주는 케이블카 같은 역할
당시 인류가 꿈꾸었던 이상이 건축양식에 녹
을 한다. 등산열차에 오르니 프라하 시내가 한
아있다. 하늘로 오르고 싶었던 고딕, 아름다움
눈에 들어온다.
과 화려함의 극치인 아르누보, 어디서 발로 된 것이든 잘 보존되었으면 좋겠다. 빨간 지붕의
빨간 지붕의 향연, 프라하
연속, 기하학과 미학, 그 속에 인간의 이상이 만난 중세시대의 도시, 프라하이다.
열차에 내려 탑에 올랐다. 과거 송전소로 쓰였 지만 지금은 전망대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언
전망대에서 내려와 네루도바 거리에 들어섰
젠가 영화에 보았던 장면이 펼쳐진다. 중세시
다. 건물마다의 독특한 자기 표시가 있는 거리
대의 건물들이 그대로 펼쳐진 풍경, 빨간 지붕
에서 백조, 두개의 태양, 황금 열쇠 등을 사진
의 구시가지 집들이 그림처럼 그려져 있다. 빼
에 담으며 언덕을 내려왔다. 바로크 양식의 건
어난 풍경이다. 냉정과 열정사이에 나오는 피
물들이 쭉 줄지어 있는 거리를 내려오다보면
렌체의 빨간 지붕 도시가 이런 느낌인가? 아
정말 과거에 와있는 듯 하다. 지금은 커피숍,
름다운 프라하의 정경이다.
음식점, 기념품 가게, 대사관으로 쓰이고 있지 만 안내서에 나온 집마다의 심벌을 찾는 것은
고딕 양식의 성당,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이 보
즐거운 일이었다.
인다. 함부르크가와 그 당시 영주들의 공간들 은 잘 보존되어 있다. 영세 자작농이나 농노들
천정화의 미학, 성 미쿨라세 교회
의 집은 전혀 남아있지 않겠지. 저 시대의 인 류문명이 수세기를 흘러 현재에 전해주는 것
성 미쿨라세 교회에 들어갔다. 들어가보니 근 23
인생의 터닝포인트
사한 천정미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각 벽마
볼 때 ‘인간의 종교적 신념과 상상력은 어느
다 그려져있는 예수의 일대기와 장식, 크게 조
정도인가’ 라는 생각에 빠져든다. 그 많은 신
각되었있는 천사와 사도들. 천장을 프레스코
화와 천사, 악마들을 어떻게 다 창조하였을
화인 성미쿨라세의 축제, 삼위일체 신의 축하
까?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 들으면 펄펄 뛸
를 보며 평생을 바쳐 이 그림을 그렸겠구나 하
소리지만 인간의 상상력은 정말 대단하다. 수
는 생각이 들었다.
천년동안 인간이 본 환상의 조합이라고 해야 하나.
황금으로 새겨진 천사들과 악마의 모습들을
인생의 터닝포인트
이런 성인들을 기리는 교회를 보며 ‘신념을 지키는 인간은 언제나 높게 평가받는구나’ 라
중세의 거울, 성비투스 대성당
는 생각이 든다. 물론 신념도 신념 나름이지 만.. 그들이 신념이 현재 인간에게 전해주는
조심조심 둘러보며 프라하성 정문을 지나 안
가치는 무엇일까? 예수의 신화속에 더 큰 깨
쪽 문을 지나자 성비투스 대성당이 그 위용을
달음을 받아야 할 텐데.. 아무튼 천정화의 미
드러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사람을 압도한
학. 아름답다. 그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다. 인간의 왜곡된 욕망, 신의 입장에서 보면
인생의 터닝포인트
바벨론 같은, 하늘에 닿고 싶은 욕망이 드러
무덤의 위쪽은 성당 천장아래 금빛지붕 그 네
난 건축 양식의 건물이다. 뾰족한 삼각 지붕의
귀퉁이에서 내려오는 붉은 천을 은빛 천사들
끝 장식은 접근하기 어려운 경외감을 상징하
이 감싸고 있다. 지붕아래 얀 네포무츠키는 십
는 듯 하다. 정면 중앙의 거대한 원 모양 안의
자가 위의 예수를 두 손에 들고 측은하게 바라
문양은 이상향과 완벽을 찾는 것 같고, 굽어보
보며 당당히 사각 궤위에 서있다. 이 궤를 어
는 사탄과 성인들의 부조는 인간에게 회개를
린 천사들이 조각된 가운데 기둥과 두명의 은
바라고 있다. 지극히 신 중심의 건물에 인간의
빛 천사가 지탱하고 있다.
욕망이 깃든 이곳의 모습, 중세 시대의 마녀가 된 느낌이다.
이 사람의 생애는 어땠는지 매우 궁금하다. 예 수보다 더 좋은 관을 가지며 영원히 인류에게
들어가는 거대한 문이 묵직한 느낌을 주며 열
기억될 조각으로 남을 이가 무슨 업적을 남겼
린다. 사도들을 형상한 스테인드글라스, 거대
을까? 오래되서인지 그 수 많은 보석과 금이
한 금빛 성인 조각, 양을 칼로 찔러 제물로 삼
빛이 나진 않는다. 영욕의 세월동안 보석은 빛
는 그림이 보인다. 각 벽면의 공간마다 양쪽으
을 바란다. 영원히 빛나는 가치는 인류에 남기
로 순교자 혹은 대주교인지, 왕인지 모를 옛
는 정신적 재부 뿐.
성인들의 묘와 제단이 있다. 벽마다 장식된 스
전체 성당이 그 시대를 함축시켜놓은 듯한 정
테인드글라스가 각 성인들의 삶을 말하고 있
신적 자산의 압출물이다. 각종 보석과 고난에
다.
찬 성인들이 세겨져 있는데 사실 아름답기 보 다 눈살을 찌뿌린다. 성인들의 표정이 저 황금
방사선의 제단을 돌아 성당 오른편으로 가자
집을 위해 수탈당한 고난에 찬 민중의 표정과
‘얀 네포무츠키’의 묘가 나온다. 은 2톤이 쓰
겹쳤기 때문이다.
인 이 묘는 화려함과 경건함을 둘다 갖추었다. 26
인생의 터닝포인트
꼴레뇨, 체코전통요리 코젤 스피리쉬 맥주
행은 종착역에 도달했다. 월간 본 10월
다시 22번 트램을 타고 체코 전통요리인 꼴레 뇨를 맛보러 도심으로 향했다. 주인아주머니 가 추천해준 전통있는 가게가 마침 나와 동행 이 가는 날부터 공사중이다. 국립미술관을 포 기하고 숙소 1층에 있는 Fama라는 레스토랑 에 들어갔다. Fama가 전통이 있는 곳은 아니 지만 맛도 괜찮고 무엇보다 숙소에서 움직이 기 싫었기 때문에 그냥 골랐다. 우리는 지하에 자리앉아 오늘의 메뉴인 꼴레 뇨와 코젤 흑맥주를 시켰다. 코젤 흑맥주의 부 드러운 목넘김이란 잊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 서 먹는 흑맥주의 텁텁함은 없고 그 깊은 맛과 부드러움이 체코 맥주의 명성을 말해준다. 기 다림 끝에 꼬챙이 끼워나온 큰 족발 한덩이가 덩그러니 나왔다. 이걸 잘라서 머스타드와 절 인 양파에 먹는 것이다. 겉은 바삭하고 고소했 고 속은 그냥 돼지고기 삶은 맛이었다. 부드러 운 맥주 한 모금과 함께 프라하에서의 시간여 27
세상의 모든 무기
논란이 뜨거운 THAAD 배치 http://mag-mkyd21.tistory.com/91
THAAD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방어라고 한다. 이는 탄도미사일 방어 시스템 을 개발하는 미국의 프로젝트인데 적국의 대
<연합뉴스>에 따르면 9월 30일, 로버트 워크
륙간 탄도 미사일(ICBM)을 대략 150km 상공
미국 국방부 부장관은 미국외교협회(CFR) 주
의 고고도에서 요격하는 미사일이다.
최 간담회에서 미국이 고(高)고도미사일방어 체계(THAAD·사드)용 요격미사일 포대의 한
지구대기의 90%가 상공 10km내외의 대류권
국 배치 방안을 조심스럽게 고려하고 있다고
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본다면 상공 150km
밝혔다고 보도하였다. 워크 부장관은 “1개 포
는 대기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열권으로 분류
대가 북한의 도발에 대응하기 위해 괌에 배치
된다. 사실상의 우주공간인 셈이다. 우주정거
돼 있다”며 “세계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사
장이 고도 350km 내외에 존재한다는 점을 본
드 포대를 한국에 배치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
다면 THAAD는 사실상 우주공간에서 미사일
다”고 설명했다는 것이다.
을 요격하는 개념이다.
사드(THAAD : Terminal High Altitude Area
그렇기 때문에 THAAD는 적어도 150km 상
Defense)는 우리말로 최종단계 고고도 지역
공에 도달하는 미사일, 즉 중거리 전술미사일
28
세상의 모든 무기
과 대륙간탄도미사일에 대비한 요격미사일로
서울에서 휴전선까지 거리가 40km에 불과한
분류된다.
데 북한군이 상공 150km까지 올라갔다 내려 오는 미사일로 우리 군을 공격한다는 것은 앞
문제는 THAAD를 한국에 배치하는 이유가 과
뒤가 맞지 않는다. 고고도의 요격은 아래 그림
연 한국을 방어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미
처럼, 누가 보더라도 북한이 미 본토를 향해
국을 방어하기 위한 것인가 하는 논란이다.
발사하는 탄도미사일을 요격하기 위한 개념으 로 볼 수 있다.
29
세상의 모든 무기
이는 THAAD가 곧 유사시 한국방어 보다 미국
적으로 고성능의 레이더인 X-band 레이더를
본토방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수반하게 된다.
또한 THAAD 미사일은 요격미사일의 탄두가
이는 THAAD가 하나의 독립된 군사무기가 아
적 탄두를 직접 맞히는 파괴 충돌 기술(hit-
니라 하나의 종합적인 무기체계의 일부임을
to-kill-technology)을 이용한다. 요격미사일
의미한다. 다시말해 THAAD의 한국 배치가 한
의 원조격인 패트리어트 미사일은 근접신관
반도 전반이 미국의 미사일 방어체제에 편입
을 사용하여 적탄두가 인근에 오면 패트리어
되는 것일 수 있다는 말이다. 중국과 러시아
트 미사일이 스스로 폭발해서 그 파편이 튀어
가 사드는 결국 미국 MD체계의 일부분이라
적탄두에 손상을 가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근
고 주장하며 한국 내 사드 배치에 부정적 입
접신관은 적탄두에 피해를 가할 수는 있지만 완전히 파괴하기 어려워 일정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방식이다. THAAD는 파괴충돌기술을 적용하므로 적탄 두를 직접 맞춰 산산조각내버린다. 그런 점에 서 THAAD는 요격미사일의 발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파괴충돌기술은 근처에서 자폭하는 방 식의 요격보다 훨씬 정밀한 적탄두의 포착과 제어방식을 요구한다. 그래서 THAAD는 필수 30
세상의 모든 무기
장을 고수하고 있는데 바로 이런 부분의 지적
에서는 올해 초 한국에서 사드 포대가 들어설 부
한 것이다.
지 조사까지 마쳤다는 말도 나왔다고 한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그동안 미국은 사드의
워크 부장관은 한국에 배치될 가능성이 있는 사
한국 배치를 희망해 온 것으로 알려졌고, 일부
드가 “본질적으로 지역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 한 것”이라며 “중국이나 러시아와 계속해서 그 들의 우려를 덜기 위해 협의하고 있다” 고 설명했다. 이는 누가 뭐래도 미국의 THAAD가 북한 탄도미사일의 미 본토 공격을 요격하기 위한 것이란 설명이다. 북한의 탄도미사일이 미 본토를 요격할 능력이 있는가? 미군은 지금까지 앞으로 그럴 가능성은 있겠지만, 현 단계에서 북한은 아직 본 토공격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 아니었는 가? 미국의 말과 행동이 다르다.
월간 본 10월
31
미래의 거울, 역사
[연재] 동아시아 분쟁의 어제와 오늘 ②
‘원조괴뢰정권’ 만주국 http://mag-mkyd21.tistory.com/94
21세기의 동아시아는 20세기보다 훨씬 복잡해졌고, 제국주의 세계 질서와 냉전적 대립 구도는 근본적으로 변 화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국제정치는 힘과 이해관계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고 있으며, 이것은 20세기 와 21세기의 동아시아에서도 예외없이 통용되고 있다.
32
미래의 거울, 역사
괴뢰(傀儡)라는 말은 한자 뜻 그대로 풀어서 말하면 ‘허수아비’란 뜻이다. 우리에게는 냉 전시대 남북이 서로를 비방하는데 쓰였던 험 악한 낱말 중의 하나로 익숙한 글자다. 1971 년 7.4공동성명으로 남북이 직접 접촉하기 전 까지, 남과 북은 서로를 ‘괴뢰’라고 불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 정권을 가리켜 소련과 중공의 꼭두각시 정부라는 의미에서, 조선민 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남한 정권을 가리켜 미 제국주의의 허수바이 정권이라는 의미에서
▲ 만주국의 국기, 다섯 가지 색은 다섯 민족의 화합을 의미한다.
이 말을 썼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던 냉전시대의 차가운 말이다.
만주국(滿洲國,Manchu State)은 일본이 9.18 사변 이후 만주 지역에 세운 괴뢰 국가였다.
그런데 괴뢰국가라는 단어는 외교적 마타도어
중국에서는 만주국이 일본 제국의 괴뢰정부였
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역사상에
다는 것을 더 잘 드러내기 위해 아예 ‘위만주
는 많은 괴뢰국가들이 존재했다. 고대의 신라
국(僞滿洲國)’, 약칭 위만(僞滿)이라는 명칭
는 삼국을 통일한 후 고구려 유민들을 달래기
을 사용하기도 한다. 만주국은 형식상 국가원
위해 ‘보덕국’이라는 괴뢰국을 만들어 주었
수로 집정(후에 황제), 행정기관으로 국무원,
고, 근대의 괴뢰정권은 제국주의 치하의 식민
사법기관으로 법원, 입법기관으로 입법원 등
지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국가형태의 하나
을 두었다. 그러나 국무원 내에 설치된 총무
였다. 제국주의 시대 전형적인 괴뢰국가의 대
청이 만주국 행정 전반을 장악하고 있었다. 당
표주자가 바로 만주국이다.
연히 총무청 관리는 일본인이었고, 총무청 외 33
미래의 거울, 역사
의 다른 기구는 제대로 개설조차 되지 않았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만주는 이상을 실현하 는 공간이었다. 물론 명목상이었지만, 만주국
만주국의 영토는 130만 평방미터로 한반도보
은 국가적 표어로 ‘오족협화 왕도락토(五族協
다 6배 넓은 땅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인구
和 王道樂土)’이념을 내세웠으며, 천연자원이
밀도는 낮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1930년대에
풍부한 기회의 땅이라는 이미지를 갖기 위해
4000만 명의 인구를 포괄하고 있었다. 만주국
노력했다. 실제로 9.18사변을 일으켰던 관동
의 인구구성은 95%가 한족이었으며, 조선인,
군 장교들은 아시아 여러 민족이 힘을 합쳐 만
일본인, 만주족, 몽골족이 나머지를 차지했다.
주의 땅과 자원을 개발해 ‘세계를 정복’하는
일본인은 만주국 인구의 1.9%에 불과했으나
전초기지로 삼아야 한다는 황당한 의식에 사
고위 관료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만주국의
로잡혀 있었다.
광대한 영토와 자원들은 일본 대자본들의 좋 은 먹잇감이었으며, 만주국의 경제는 곧 남만
일제의 핍박을 못 이겼거나, 일확천금과 출세
주철도주식회사를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 자본
를 노렸던 많은 조선인들이 반도를 떠나 대륙
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실제로 일본의 선전만 믿고 만주로 건너간 조선인들의 처지는 조선 에서의 궁핍한 생활에서 조금도 나아지지 않 았다. 반면 일본인들은 만주국의 계획적 지원 아래 대규모로 이주해 왔으며, 개간된 농지까 지 지원받았다. 그 결과 만주국의 인구는 수립 10년 만에 1천 만 명이나 증가하게 된다. 만주국의 수립은 동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에
34
미래의 거울, 역사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일본의 갑작스런 만주
게만 주어졌다.
점령에 놀란 국제연맹은 ‘리튼 조사단’을 파 견해 9.18사변의 전모를 파악하려 했지만, 일 본은 조사단이 도착하기도 전에 만주국 수립 을 선포했다. 만주국은 지금의 장춘시를 새로 운 수도 신경(新京)이라 칭했으며,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이자, 만주국 집정 푸이를 황제로 옹립했다. 만주국이 ‘괴뢰국’으로 불리는 결정적인 이 유는 만주국의 정치·경제·군사·행정의 주권 이 일본과 일본인들에 귀속되어 있었기 때문 이었다. 만주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
▲ 만주국 핵심 2키 3스케의 핵심인물, 도조 히데키와 기시 노부스케
던 자들은 후에 2차 대전 주요 전범이 된 ‘2 키 3스케’들이었다. 2키 3스케란 도조 히데
만주국의 등장은 중국인은 물론 조선인 항일
키(관동군 헌병대 사령관), 호시노 나오키(만
독립운동세력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만주
주국 국무원 총무장관), 기시 노부스케(만주국
국이 수립되기 전부터 일본은 만주지역의 군
총무청 차장), 아이카와 요시스케(만주중공업
벌과 제휴하여 조·중 항일세력들을 탄압하고
개발주식회사 사장), 마쓰오카 요스케(남만주
있었는데, 관동군이 본격적으로 만주에 주둔
철도 총재)의 뒷 글자를 모아 만든 말이다. 만
하면서 만주의 항일세력들은 큰 고초를 겪게
주국의 주권은 이와 같은 일본 관료집단과 유
되었다. 관동군은 원래 요동반도에 설치된 일
일하게 허용된 정치단체인 협화회 구성원들에
본 조차지와 남만주철도를 지키기 위한 군대 35
미래의 거울, 역사
였지만, 일본 천황의 직할부대였기 때문에 최
워졌다.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과
정예의 병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만주국 수
연합해 무장투쟁을 벌였다. 이들은 자체적인
립 이후 더욱 거대해져갔다. 항일세력들은 이
당·정·군의 조직체계를 갖추고 역할을 분담함
제 더 이상 구식병기에 사기도 형편없던 군벌
으로써, 다양한 전략과 전술로 관동군에 맞섰
군대가 아니라 떠오르는 일본 제국의 주력부
다. 또한 광범위한 대중의 지원과 참여를 이끌
대를 상대해야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어 냄으로써 이 후 항일무장투쟁의 주요 세력 으로 성장해 나간다.
민족주의 독립운동세력에게 만주국의 수립은 1900년대 이후 거의 30여 년간 구축해 온 독
만주국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던 관동군은 만
립전쟁 근거지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주의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목의 ‘치안숙정공
양세봉 등 몇몇 무장부대들은 한·중연합유격
작’을 펼치며 조선과 중국의 항일세력들을 철
부대로 전환하며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성과를
저하게 탄압했다. 중국에서는 만주국이 채택
내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민족주의계열
한 정책을 총괄해서 삼광(三光)정책이라 표현
무장단체는 고군분투하며 항전했으나 관동군
한다. 군사적 측면에서는 살광(殺光 : 다 죽인
에 쫓겨 세력을 잃고 중국 관내로 들어가는 신
다), 창광(搶光 : 다 빼앗는다), 소광(燒光 : 다
세가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김구의 임시
태운다)이고, 경제적 측면에서는 수광(搜光 :
정부는 한인애국단 등을 결성해 특무공작(테
다 찾는다), 괄광(刮光 : 다 짠다), 창광(搶光 :
러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개
다 빼앗는다)란 뜻이다.
척하고자 분투했다. 만주국은 비록 13년 밖에 유지되지 못한 괴뢰 한편, 만주에서 민족주의계열 독립운동의 공
국가였지만, 동북아시아 각국에 지울 수 없는
백은 젊은 사회주의자들의 무장투쟁으로 채
흔적을 남겼다. 잔인무도한 학살과 생체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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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거울, 역사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 등 관동군의 전쟁범
만주국의 전문 관료 양성소인 대동학원 출신
죄뿐만 아니라, 만주국 출신의 군인·정치가·
이다. 이 외에도 대표적인 ‘만주인맥’으로 꼽
경제인 등은 2차 대전 종전 후에도 살아남아
히는 육군대장 출신 백선엽은 한국군의 전설
한국과 일본에서 각계의 실권자가 되어 ‘오족
적인 인물로 추앙받고 있지만, 그의 젊은 시절
협화·왕도락토’를 외치고 다녔다.
은 만주지역 조선인 항일운동을 탄압한 악질 적인 친일조선인군사조직인 간도특설대 활동 으로 얼룩져 있다. 또 만주국 형법은 한국 전쟁 직후에 제정된 대 한민국 형법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만주국은 명 목상으로는 ‘오족협화’를 외치며, 국민통합을 외쳤지만 실제로는 ‘치안숙정’을 강조하며 법 을 정권 유지의 도구로 전락시켰다. 국가보안 법 등 우리 법 체계가 자유와 인권을 보호해주 는 정의의 규범이 아니라, 권력자들을 위한 한
▲ 만주국 군인·관료 출신의 대한민국 대통령 최규하와 박정희
낱 칼자루로 된 것은 이런 식민통치의 유산을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지낸 박정희와 최규하 역시 만주국 출신의 군인, 관료였다. 박정희는 신경의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육군사 관학교까지 마친 청년 장교였으며, 최규하는
월간 본 10월
37
미래의 거울, 역사
이 달의 역사
통일의 실천 강령 10.4 선언 http://mag-mkyd21.tistory.com/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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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거울, 역사
2007년 10월 2일 분단된 이후 처음으로 노무
2005년 6월 민족통일대축전에 정동영 당시
현 대통령이 육로를 이용해 군사분계선을 넘
통일부장관이 참가, 방북하면서 남북 관계가
어 북한을 방문했다. 2박 3일간 머물면서 246
풀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김정일 국방
분간의 회담을 거쳐 두 정상은 <남북관계 발
위원장은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한 정동영 장
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이하 10.4 선언)
관과 전격적으로 면담하였으며 6자회담과 남
을 합의해 냈다. 10.4 선언은 정치, 화해, 평화,
북협력, 정상회담 같은 의제들을 논의하였다.
경제협력, 사회문화, 인도적 분야 등 40여 개
같은 해 8월 15일 김기남 조선노동당 비서가
의 다양하고 구체적인 의제를 포괄하는 통일
서울을 방문하며 남북정상회담까지 눈앞에 다
실천 강령이었다.
가온 듯 했다. 남북관계 발전에 힘입어 6자회 담에서는 9.19공동성명이 발표되는 등 한반
사실 노무현 정부 기간 동안 남북관계는 순탄
도 비핵화의 원칙이 합의되기도 했다.
치 않았다. 미국의 부시정부의 강력한 반북정 책에 따른 압박으로 노무현 정부의 입지가 좁
그러나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이 또 발목을 잡
아졌다. 남북관계 발전이 북미대결 양상에 의
았다. 9.19 공동성명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인
해 막히는 모습이었다.
9월 20일 미국은 BDA문제를 들고 나오며 북
거기에다가 노무현 정부가 집권한 직후 이루 어진 대북송금특검과 한국정부가 태국에 있 는 탈북자들을 대량으로 한국에 입국시키는 일 등이 벌어지면서 남북관계가 냉각기를 겪 었다.
미래의 거울, 역사
한의 금융거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잘 풀릴 것 같던 남 북관계도 다시 경색국면으로 들어갔다. 2006년 7월과 10월에 있었던 북한의 미사일 발사 실험과 핵실험 이후 미국의 태도가 극적으로 변화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2006년 11월 18일 베트 남 하노이에서 한국전쟁 종전선언에 대해 언급했다. 2007 년 2월 13일에는 BDA문제 해결을 위한 2.13합의가 이루 어졌다. 다시 남북 대화의 기회가 찾아온 셈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2차 남북정상회담은 2007년에야 성사 될 수 있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한 실무책임자 는 김만복 국정원장이다. 김만복 국정원장은 조선노동당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을 파트너로 삼아 정상회담 가능성을 타진한 끝에 2007년 7월 북의 요청을 받고 평양을 방문했 다. 북미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처음에 잡은 회담일은 8월 27일이었으나 북한에 일어난 대홍수로 인해 북에 많은 인명피해가 나고 도로가 유실되는 등 여건이 좋 지 않아 10월 2일로 방북 일정을 미루었다. 10월 2일 분단 이후 최초로 한국의 대통령이 육로로 군사 분계선을 넘어 방북했고 이 장면이 전 세계에 타전되었다. 40
미래의 거울, 역사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영접하고 환영행사
10.4 선언은 남북관계를 한 차원 높게 발전
를 열었다.
시키기 위해 군사적 신뢰구축과 평화를 제도 화하는 틀을 마련하는 선언이었다. 3항에서는
10월 3일 오전과 오후 두 차례, 246분이라는
군사적 충돌 우려가 큰 서해지역을 평화수역
긴 시간 동안 진행된 정상회담 끝에 10.4 선언
으로 만들기로 했으며 3자 또는 4자 종전선언
이 나올 수 있었다. 얼마 전 공개된 남북정상
추진, 9.19 공동성명과 2.13합의 이행을 위해
회담 대화록을 보면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노력하기로 했다.
국방위원장의 대화를 볼 수 있는데, 상당히 논 쟁적으로 회담이 진행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
10.4 선언은 민족경제의 발전을 위해 경제협
려움을 딛고 두 정상은 민족사에 길이 남을 합
력사업을 공리공영과 유무상통의 원칙에서 적
의를 이끌어 내었다.
극 활성화하고 지속적으로 확대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합의를 이루기도 했다. 서해평화협
10.4 선언은 6.15선언을 계승하면서 구체적
력특별지대, 개성공단 2단계 개발, 남포 조선
인 통일의 경로를 밝혀가는 선언이다. 1항과
협력단지, 신의주-개성 철도와 평양-개성 고
2항에서는 통일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
속도록 공동이용 등 굵직굵직한 사업이 논의
가며 민족의 존엄과 이익을 중시하고 모든 것
되었다.
을 이에 지향시켜 나가기로 했으며 남북관계 를 통일 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하여
또한 역사, 언어, 교육, 과학기술, 문화예술, 체
각기 법률적·제도적 장치들을 정비해 나가
육 등 사회문화 분야의 교류협력과 인도주의
기로 했다. 그리고 양측 의회 등 각 분야의 대
협력사업을 통해 민족의 대단결을 도모했으며
화와 접촉을 적극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해외동포들의 권리와 이익을 위한 협력을 강 화하기로 했다. 41
미래의 거울, 역사
통일 실천 강령인 10.4 선언이 만들어지는 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2005년 교착 상태에 있
정을 보면 크게 2가지의 의미를 찾을 수 있
던 6자회담을 재개시킨 원동력 중에 하나는
다.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밀접하게 연동되
6.15민족통일대축전 대회였다. 민간급으로 진
어 있다는 사실이다. 노무현 정부 시기 미국
행되던 민족통일대축전에 정동영 장관이 함께
의 부시정부의 대북적대정책으로 한국은 많
하면서 변화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민간급 교
은 압박을 받았고 이에 따라 남북관계는 어려
류가 남북관계에 돌파구를 열어준 셈이다. 남
움을 겪었다.
북관계가 열리자 6자회담이 탄력을 받았으며 지금도 6자회담의 가장 큰 성과라고 평가되는
2007년 정상회담은 북미관계가 호전되고 있
9.19공동성명이 나올 수 있었다.
던 시점에야 추진될 수 있었다. 2007년 9월 말 베이징에서 열린 2단계 6차 6자회담의 결
10.4 선언 7주년을 맞이하는 2014년 10월 4
과 2007년 말까지 북한은 핵시설 불능화와 핵
일 북한의 실세로 알려진 황병서 총정치국장
프로그램을 신고하고 대신 미국 측은 북한 테
과 최룡해 국가체육지도위원회 위원장, 김양
러지원국 명단 삭제와 적성국무역법 제재 해
건 대남 비서가 전격적으로 방남했다. 명분은
제, 그리고 5자의 중유 100만 톤에 해당한 경
아시안게임에 참석한 북한 선수들을 격려하
제적 보상을 완료한다는 내용의 10.3 합의가
고 폐막식에 참석하는 것이지만 청와대 관계
나왔다. 10.3 합의와 10.4 선언이 거의 같은
자와 오찬을 갖고 회담을 하는 등 심상치 않은
시기에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움직임도 있다.
또 다른 하나의 사실은 민간교류의 활성화가
지난 2005년 그랬듯이 민간급 교류를 시작으
남북관게 발전의 디딤돌이 되고 남북관계의
로 남북관계를 개선할 수 있고 남북관계 개선
발전이 북미관계를 호전시키는데 역할을 할
으로 동북아 평화와 통일을 앞당길 수 있다.
42
미래의 거울, 역사
최룡해 위원장이 청와대 관계자들과 가진 환
“인민들의 사심 없는 응원 등을 텔레비전을 통
담자리에서 한 이 한마디가 많은 것을 시사하
해 봤다. 구호도 부르고 통일기도 다 흔들면서
는 듯하다.
응원하는 것을 보고 체육이 조국통일을 위한 데 에서 앞섰구나 하는 자부심을 갖게 됐다” 월간 본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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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그 본질적 가치
분단을 노래한 월북시인 박세영 http://mag-mkyd21.tistory.com/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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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그 본질적 가치
망향(望鄕)의 노래, 임진강
의 글에 고종환이 곡을 붙였다. 월북시인 박 세영(朴世永, 1902년 7월 7일 ~ 1989년 2
2014 인천아시안게임이 끝났다. 남북전이 많
월 28일)은 경기도 고양 출신의 시인이다. 대
았던 탓에 ‘분단’이 사뭇 가슴을 저린다. 분
표작은 <산제비> <임진강> <밀림의 역사> <애
단과 이산가족의 아픔을 담은 <임진강>이란
국가>가 있다.
노래가 생각난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임 진강〉은 1950년대에 유행가다. 이 노래는 1960년대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 조선인들의 애창곡이 되었다. 2004년 재일 조선인 감독 의 영화 <박치기>의 엔딩곡으로도 쓰일 만큼.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내리고 물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 고향 남녘 땅 가고파도 못 가니 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
남쪽에 두고 온 가족들과 친지들을 그리워하 는 1절 가사가 참으로 구슬프다. 헌데 2절 가
강 건너 갈밭에선 갈새만 슬피 울고
사를 잘 보면 이승만 정권 당시 궁핍한 남쪽의
메마른 들판에선 풀뿌리를 캐건만
경제를 북쪽의 협동농장과 대조시키고 있다.
협동벌 이삭마다 물결우에 춤추니
당시 이 노래가 유행하자 정부는 이 노래를 못
임진강 흐름을 가르지는 못하리라
부르게 하였다. <임진강>을 다시 부를 수 있게 된 것은 1990년대가 되어서다. 재일교포 가수
이 ‘망향(望鄕)’의 노래는 월북 시인 박세영
가 서울에서 이 노래를 부른후 양희은 등의 리 45
예술, 그 본질적 가치
메이크하여 불렀다.
요청했다. 덕택에 민요부터 윤도현이 부른 아 리랑까지 다 삭제됐다. 아리랑이 금지곡이었
이승만 정권 당시 금지곡은 남북경제상황이
던 시절이 언젠가. 일제강점기 금지곡 1호 아
역전된 40여년 후에 해금되었다. 그렇다면 박
리랑. 일제시대인지 군사독재시절인지. 참으
근혜 정부에서 금지곡은 뭘까? 궁금하면 노
로 웃픈일이다.
래방 기기에서 <아리랑>을 선곡해보라. <아리 랑>을 선곡하면 국방부 요청으로 삭제된 곡이
<산제비> 박세영 作, 1936년 11월 ‘낭만’에
라 나온다.
실림
국방부는 북한가수가 부른 곡이라며 삭제를
남국에서 왔나, 북국에서 왔나, 산상(山上)에도 상상봉(上上峰), 더 오를 수 없는 곳에 깃들인 제비. 너희야말로 자유의 화신 같구나, 너희 몸을 붙들 자(者) 누구냐, 너희 몸에 알은 체할 자 누구냐, 너희야말로 하늘이 네 것이요, 대지가 네 것 같구나. 녹두만한 눈알로 천하를 내려다보고, 주먹만한 네 몸으로 화살같이 하늘을 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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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그 본질적 가치
마술사의 채찍같이 가로 세로 휘도는 산꼭대 기 제비야
멧돼지가 붉은 흙을 파헤칠 때
너희는 장하구나.
너희는 별에 날아볼 생각을 할 것이요, 갈범이 배를 채우려 약한 짐승을 노리며 어슬
하루 아침 하루 낮을 허덕이고 올라와
렁거릴 때,
천하를 내려다보고 느끼는 나를 웃어 다오,
너희는 인간의 서글픈 소식을 전하는,
나는 차라리 너희들같이 나래라도 펴 보고 싶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알려주는
구나,
천리조(千里鳥)일 것이다.
한숨에 내닫고 한숨에 솟치어 더 날을 수 없이 신비한 너희같이 돼보고 싶
산제비야 날아라,
구나.
화살같이 날아라, 구름을 휘정거리고 안개를 헤쳐라.
창(槍)들을 꽂은 듯 희디흰 바위에 아침 붉은 햇발이 비칠 때
땅이 거북등같이 갈라졌다.
너희는 그 꼭대기에 앉아 깃을 가다듬을 것이
날아라 너희들은 날아라,
요,
그리하여 가난한 농민을 위하여
산의 정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를 때,
구름을 모아는 못 올까,
너희는 맘껏 마시고, 마음껏 휘정거리며 씻을
날아라 빙빙 가로 세로 솟치고 내닫고,
것이요,
구름을 꼬리에 달고 오라.
원시림에서 흘러나오는 세상의 비밀을 모조리 들을 것이다.
산제비야 날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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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그 본질적 가치
화살같이 날아라,
나는 때의 파산자(破産者)다.
구름을 헤치고 안개를 헤쳐라.
나는 다만 때를 좀먹는 자다.
대표작 <산제비>다. 그의 시는 참 쉽다. 농민에
“박세영은 정상급 문인으로 활약하다가 국내
대한 사랑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멧돼지와 갈
에서의 ‘글’의 투쟁에 한계를 느끼고 망명, 간
범으로 표현한 일제 식민지에 대한 비판도, 산
도 또는 만주 등지에서 독립투쟁의 대열에 섰
제비처럼 나래를 펼수 없는 안타까운 지식인
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문학이 실제로
의 고뇌도 보인다.
당대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다양하게 실험했다.”- 한
그는 1937년 시집 <산제비>를 펴낸 이후 해방
만수 (동국대 교수)
까지 절필했다. 이런 그가 절필을 하였다니 그 절망감은 어느정도 였을까. 당시 일본은 태평
위험한 인물, 박세영
양전쟁을 일으켰고 국내 정세는 더욱 엄혹해 졌다. 한글신문잡지는 폐간되고 검열은 강화
박세영은 마흔 살이 다되어 안정된 직장과 문
되었다. 결국 그는 사회주의자가 시를 무기로
단에서 보장된 지위를 버리고 망명한다. 그리
삼는다는 것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된다.
고 해방이 된 뒤 자신의 이상을 찾아 1946년 월북한다. 그는 곧바로 김일성 주석의 지시에
지나간 내 삶이란,
따라 북한의 `애국가` 창작 작업에 참여했다.
종이 쪽 한장이면 다 쓰겠거널,
북한 애국가 악보와 가사는 이적(利敵)표현물
몇 짐의 원고(原稿)를 쓰려는 내 마음,
이다. 우리에게 보면 그는 꽤 위험한(?) 인물
오늘은 내일(來日), 내일(來日)은 모레, 빗진자
인 셈이다.
와 같이 48
예술, 그 본질적 가치
북한 문학전문지 `조선문학` 2002년 5월호는
엄혹한 현실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이 담긴 진보
그를 `우리나라 국가인 애국가와 더불어 영생
적인 시인인 박세영. 그의 시를 문학작품 그 자
하는 시인`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사후에 영화
체로 오롯히 감상할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민족과 운명` 시리즈 중 `카프작가편`(제34-38
월간 본 10월
부)에서 그의 생애는 재조명되었다. `조선문학 `은 박세영에 대해 `낙천적이면서도 언제나 긍 정적인 사고를 가진, 그러면서도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잃지않은 열정적 시인`이었다 고 회고했다. 박세영은 <내가 걸어온 문학의 길>에서 자신 의 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적으나마 내가 배운 지식, 내가 본 조국강산, 내가 느낀 불합리한 사회, 이 모든 것이 호소 의 의미를 띄면서 글에 담기었다. 즉 산에 올 라도 산은 조선 소년의 기개를 안으라 속삭이 는 듯, 들에 가도 가난한 농사꾼을 잊지 말라 외쳐주는 듯, 흘러가는 강물도 세월은 무정하 게 흘러가나 소년아 조국을 잊지 말라 전하고 가는 듯 이런 감정을 작문에 담기에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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