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

Page 1

2014 민권연대

11

월간

본;

http://mag-mkyd21.tistory.com


월간

본; 11월

4

시선집중

발행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민권연대)

발행일

2014년 11월 14일 (9호)

블로그

http://mag-mkyd21.tistory.com

문의

mag.mkyd21@gmail.com

32

컬러로 보는 이슈

외교 미아로 전락한 박근혜 정부, 전략은 있나?

검은공포 에볼라, 만만한게 군바리야

6

36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이달의 역사

회원을 만나다

세월호 가족과 늘 함께하는 사람. 김희옥 회원

16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국내경제 공무원 연금 개악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

우발적이었지만 결코 우발적이라고 할 수 없 었던 사건,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 이달의 역사

[연재] 동아시아 분쟁의 어제와 오늘 ③ 중일전쟁과 일본의 패망

47

세계경제

미국의 ‘돈 살포’ 중단과 혼돈의 세계경제

27

미래의 거울, 역사

예술, 그 본질적 가치

클림트, 에로틱이냐 페미니즘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인생의 터닝포인트

아름다운 예술과 역사의 도시, 오스트리아 빈

54 본험 리처드 함

세상의 모든 무기


http://mag-mkyd21.tistory.com/84

어머니의 따뜻한 품이 그리워지는 계절입니다. 겨울로 달려가는 11월은 차디찬 걸음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특별법이 통과되었습니다. 한계가 분명한 특별법이지만 세월호 유가족과 국민이 만들어낸 큰 성과입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가만히 지켜본다고 저절로 진상규명이 되지 않습니다. 이전보 다 더욱 치열하게 싸워야 진실을 밝혀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4.16 세월호 약 속 지킴이가 됩시다. 끝까지 함께 갑시다. 11월부터는 새로운 편집부로 거듭났습니다. 그 동안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본을 제작해주셨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12월부터 매월 초 독자여러분을 찾아뵙는 본 이 되겠습니다. 편집자 드림.


시선집중

http://mag-mkyd21.tistory.com/103

외교미아로 전락한 박근혜 정부,

전략은 있나? 박근혜 정부의 무능 외교에 대한 질타가 이어 지고 있다. 탈북자단체들의 대북전단 살포로 모처럼 마련된 남북대화 분위기가 깨지는 동 안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간 제임 스 클래퍼 국가정보국(DNI) 국장이 북한에 구 속 수감 중인 미국인 두 명을 사면받는데 성 공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일본 눈치를 보며 독 도 시설물 건설을 포기해 국민의 비판을 받는 가운데 중국과 일본이 전격 정상회담을 하면 서 한국이 동북아시아의 호구로 전락할 위기 에 처했다.

4


시선집중

미국은 이번 클래퍼 국장 방북 과정에서 북핵

북관계를 전혀 진척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점

문제와 북미관계 정상화 등의 논의는 없었다

이다. 물론 박근혜 정부도 이희호 여사의 방북

고 못 박았다. 그러나 클래퍼 국장이 거의 하

을 승인하는 등 남북대화를 완전히 포기한 것

루를 북한에 머물며 고위 관리들에게서 현안

은 아니라고 항변할 수 있겠다. 하지만 대북전

들에 대한 북한의 입장을 청취했으며 북미 대

단살포 문제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스

화의 조건에 대한 오바마 행정부의 입장을 전

스로 남북 고위급 접촉의 기회를 날려버린 것

달했다고 밝히면서 진지한 논의가 있었음을

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드러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대북전단살포를 주도하는 물론 이번 일로 북미관계가 급진전할 것이라

탈북자 단체들이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고 쉽게 단정짓기는 어렵다. 만약 북미관계 진

점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미국이 남북접촉을

전에 대해 오바마 행정부가 적극적 입장을 가

가로막으면서 자신들만 몰래 북미접촉을 추진

지고 있었다면 북한이 중간선거 전에 두 명의

하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전시작전지휘권

미국인을 석방했을 것이다. 그러나 매일 오바

환수를 미루고 미사일방어(MD) 체계의 일환

마 대통령과 독대한다는 클래퍼 국장이 직접

인 종말단계고고도미사일, 일명 사드 배치를

북한에 들어간 이상 북한은 미국에 중대 제안

추진한 대가가 이런 것이었단 말인가.

을 했을 것이며 미국 역시 이에 대해 심각히 검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북미 사이에

박근혜 정부가 입만 열면 자랑하는 외교적 성

큰 틀의 관계 변화가 예상되는 부분이다.

과가 한미공조, 한중외교인데 이번에 미국에 게도, 중국에게도 뒤통수를 맞았으니 이건 또

미국 뿐 아니라 러시아, 일본도 북한과 긴밀한

어떻게 해명할지 의문이다. 국제사회에서 국

대화를 진행하고 있으며 가시적인 성과도 나

익을 챙기지 않고 주변국에게 빌붙는 외교는

오고 있다.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제라도 깨닫 기 기대하는 게 정말 무리일까?▒

문제는 이런 분위기와 달리 박근혜 정부는 남 5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회·원·을·만·나·다

세월호 가족’과 늘 함께 하는 사람

김희옥 회원 http://mag-mkyd21.tistory.com/105

인터뷰 전날 약속시간 확인차 전화를 걸었다. “실은 국회(농성장)를 들어가볼까 했는데... 원래 월요일마다 들어가는데 오늘 못들어갔거든... 아 니야 그래도 먼저 약속한거니까 내일 보기로 해” 다음날 저녁,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 상황실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희옥 회원을 만났다. 간단 히 맥주한잔하며 인터뷰하기로 하고 이동 중에 계속해서 로비(?)를 걸어온다. “왜 나를 골랐어. 다른 사람 많은데. 나는 말을 잘 못하니까 잘 좀 꾸며서 써줘. 미사여구 좀 많이 넣어주고” 로비(?)는 인터뷰 내내 계속되었지만 결국 그 로비를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세월호 투쟁에 묵 묵하게 함께해온 그 사연들에 별다른 미사여구를 붙이고 말고 할 게 없어서다.

6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사람이 필요하고 내 힘이 필요하다면 한번 가보자” - 가족대책위 진상규명분과 활동 본 기자(이하 본) :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 이전에 가족대책위부터 시작하셨죠?

본 : 안산까지 출퇴근하셨던 거예요? 이 : 응, 집에서 나와서 거기 들어가면 2시간 반 정도 걸렸어. 집에 오면 11시 정도 됐지. 어 쩌다 늦어져서 10시에 막차타고 오면 1시에 집에 도착하기도 하고. 본 : 제안받고 나서 고민되진 않으셨어요? 시

김희옥(이하 김) : 응. 원래는 지방선거 끝나고

간문제도 있고 그 시기 가족대책위에 결합한

쉬려고 했는데.(웃음) 선거운동 시작한지 얼마

다 하면 좀 막연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안됐는데 세월호 사건이 터졌고, 새바람이 창 동 성당쪽 동네촛불을 책임지기로 했어. 그때 나는 마침 직장 그만두고 쉬고 있었고 책임질 사람이 마땅히 없어서 창동촛불을 책임졌었는 데 혼자 할 때가 많았어. 그 즈음 가족대책위 에 사람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나왔어. 처음엔 두려움도 좀 있었는데 필요하다고 하니까. ‘한 번 해볼까?’ 하다가 안산에 내려가게 됐지. 가 족대책위 진상규명분과라는 곳에서 시작을 했 는데 6월 10일부턴쯤 안산으로 출퇴근을 시 작했지.

김 : 실은 속은게 좀 있고(웃음) 숙소가 있다 고 했거든. 처음에 나 되게 웃겼어. 2~3일에 한 번 집에 들어갈 생각하고 짐을 다 싸가지고 갔어. 근데 가보니까 잘데도 없고 그럴 상황이 아닌거야. 그냥 출퇴근하게 됐지. 처음엔 가면 서 책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잘 안되더 라고. 출퇴근 시간 끼는 것도 있고 피곤하니까 쓰러져 자고 뭐. 그리고 처음에는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지 않 고 단순하게 갔었어. 상근간부 활동을 해본 경 험이 없어서(잘 모르기도 했고). 또 그때는 세 월호 문제가 제일 정점에 와있던 시점이었는 7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데 솔직히 오랫동안 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

본 : 국회 농성에는 어떻게 결합하시게 된거

았었어. 그냥, ‘사람이 필요하고 내 힘이 필요

예요?

하다면 한번 가보자.’ 그런 마음이었지. 본 : 안산에서 가족분들이랑 같이 계셨잖아요. 그때는 어떠셨어요?

김 : 세월호 100일이 지나고 국회로 본격적으 로 간 게 7월 말 정도였던 것 같애. 가족 농성 에 사람들이 필요하고 뭐 그렇게 되다보니까 자연스럽게 농성장에 결합하게 됐지.

김 : 사실 안산에서는 가족분들을 별로 못봤 어. 가족대책위에서 일할 사람이 부족했던거

본 : 국회 계실 때는 주로 어떻게 활동하셨어

고 실무를 도왔던거지. 팽목항을 다녀오면 그

요?

내용을 정리하고 유튜브상 자료가 있으면 찾 고. 어민들 인터뷰 같은 것들을 많이 찾으려고 했지. 증언자료니까. 당시 상황이 급박하게 돌 아갔어. 거기 들어가자마자 국정조사가 시작

김 : 농성장 지키고 거기서 자기도 하고. 매일 은 아니었구, 이틀에 한번꼴? 본 : 광화문 농성장 지킴이와 비슷한 건가요?

됐어. 자료 취합하고 변호사들 서포트하는 일 을 했고. 가족분들과 마주치는 일은 별로 없었

이 : 거긴 가족분들 빼곤 나밖에 없었어. 모든

고 지나가면 인사드리는 정도였지. 실제로는

중심이 광화문에 모여있었기 때문에.

국회(농성장)에 와서 부모님들과 이런 저런 얘 기 하게 됐고.

본 : 국회 농성중에 특히 기억나시는 일이 있 나요?

가족들 곁에서 함께 보낸 시간 - 국회 농성활동 8

김 : 참 슬픈 대화가 한가지 있었어. 그게 아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직도 머리를 떠나지 않는데... 국회 농성장이란

자랑도 많이 하셔. “우리 애는 참 노래를 잘했

곳이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지. 답답하고. 그

어.”, “우리 애는 미술 참 잘했는데.”, “우리 애

런데 이런 저런 얘기하다가 자식 얘기가 나온

는 사회적으로 깨였었어.”

거야. 어떤 부모님은 자식의 핸드폰 번호를 죽 이지 못하고 그대로 사용한다고. 그러니까 다

본 : 어머님들하곤 어떻게 지내셨어요?

른 부모님이 “나도 그러는데.” 그러는거야. 나 는 애들한테 하루에 한번씩 문자 보낸다고. 제

김 : 내가 할 수 있는 건 잘 들어드리고. 그 다

일 슬픈 건 그거였어. “내가 아무리 문자를 쳐

음엔 밥도 같이 먹고. 그래도 어머님들이 국회

도 답장이 안오네...” 이런 얘기를 하시는거야.

자주 오니까 이뻐는 해줬지. 근데, 미움 받은

자식에 대한 정이라는게 그 마음이 참. 자식

적도 있어. 내가 가면 꼭 일을 해야 되서(웃음)

9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본 : 일을요?

겠지, 대통령이 앞을 지나가면 고개 한번 돌 리거나 어떻게 하겠지. 전달할 수 있겠지’ 하

김 : 나는 어머님들하고 뭔가를 하고 싶었거

고 생각했는데 새벽 6시부터 병력이 배치되

든. 바람개비도 만들고 목걸이도 만들고 배도

기 시작해. 처음에는 전경. 그 다음에는 경호

만들고. 그니까 내가 가면 자꾸 일을 하자고

원. 그렇게 딱 갈라 놓기 시작하더니 9시 넘어

하는거지. 한번은 어머님이 “왜 우리 반만 오

서 버스 3대가 딱 들어와. 어? 차벽을 치네 국

면 일 갖고 온다?” 이런 거지.(웃음)

회에? 그 앞의 (농성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 어서 그런건지. 말로는 국회에서 암살을 방지

본 : 에이, 미움이 아니네요. 근데 국회 계시다

하기 위해서 차벽을 치는거래. 말도 안되는거

보면 화가 나는 상황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지. 여의도에 높은 건물이 그렇게 많고 국회는 높은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데 차벽으로 어떻

김 : 가장 많이 화가 났을 때는 엊그저께 박

게 막어. 그렇게 벽을 치고 아예 눈도 안 마주

근혜 대통령이 지나갈 때. 국회 시정연설한다

치니까. 어머님들이 처음에는 막 우시더라고.

고 지나가는데 가족들한테 눈길 한 번 주지

너무 서러운거야. 그 다음부터 분노하시기 시

도 않고. 앞만 보고 미소짓고 가는거야. 사람

작하고. 울음바다였지. 어떤 분은 실신하기 일

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가족들은 어떻게

보 직전이고.

든 진실만을 제발 밝히게 해달라는 건데. 자기 입으로 진상규명 하겠다고 말했잖아. 새누리 당 국회의원들도 그 앞은 지나가지 않아. 밑

힘든 시간을 딛고, 대책회의 상황실에서 이어간 세월호 투쟁

으로 지나가지. 그나마 자기들도 민망하니까. 어머님들이 밤을 새시면서 ‘내일은 어떻게 되

본 : 국회 농성 하실 때 가장 힘드셨던 건 그 런 상황들을 마주하는 거였겠죠?

10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김 : 실은 개인적으로 두 번의 장례식 거치면 서 심적으로 힘들었지. 본 : 두 번의 장례식이요? 김 : 내 동생하고 할머니하고. 힘들고 좀 한달 정도 붕 떠있었나? 8월에 거의 2주 사이에 일 어났거든. 그때 국회농성을 좀 빠져있다가 동 생 장례식 치르고 나서 국회로 복귀했었는데 복귀하자마자 일주일 후에 할머니가 돌아가셔 서. 추석 연휴까지도 좀 붕 떠있다가 상황실로 들어오게 됐지.

다고 하셨잖아요. 김 : 응, 일주일에 두 번씩은 가려고 해. 국회 에는 사람이 없고, 내가 그동안 지켰으니까. 일주일에 두 번씩은 가서 어머님들 어떻게 계 시는지 보고 같이 있다가 오고. 그렇게 하는 거지.

4.16 약속지킴이가 되자 본 : 지금은 약속지킴이 사업을 하고 계신다 고 했잖아요. 약속지킴이가 어떤 사업인거죠?

실은 개인적으로 두 번의 장례식 거치면서 심

이 : 약속지킴이는, 세월호를 잊지 않겠다는

적으로 힘들었지.

약속이고 끝까지 함께 행동하겠다는 약속이 거든. 세월호 싸움이 이제는 특별법 제정을 넘

본 : 아, 그러셨군요.

어서 진상규명 과정으로 갈텐데. 특별법 제 정 후 진상이 밝혀질지 안 밝혀질지 모르는 상

김 : 지금은 약속지킴이 사업을 중심에 두고

황인거고 실제로 많은 방해도 있을텐데. 같이

하고 있는데. 처음 하는 일이다 보니까 쉽지는

갈 사람들이 필요한거지. 그걸 하나의 행동으

않고. 일을 배워가면서 하고 있어.

로 나타내 보자. 함께 하자. 그게 416 약속지

본 : 어제 통화할 때 월요일에 국회에 들어간

킴이라는 형태로 (나온거지). 내가 하는 일은 주로 명단 취합이나 지역에 물품 배정 등이야. 11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앞으로는 약속지킴이와 소통하는 역할도 맡

모이고 같이 행동해주고. 더 나가면 약속 지킴

아서 하고.

이를 넘어서 제안자가 되주는 거고. 우리 지역

본 : 좀 더 자세히 설명을 들을 수 있을까요?

에 약속 지킴이가 있으면 내가 모집을 해. 그

김 : 세월호 같은 경우는 좀 특별하거든. 자발 적인 행동들이 되게 많은 거야. 리본을 집단적 으로 만들어서 보내주는 사람들. 가족들 식사 를 책임지시거나 지원을 하거나. 이런 광범위 하게 퍼진 대중들이 하나로 같이 힘있게 해보 자. 그래서, 작게는 잊혀져 가고 있는 세월호 노란 리본을 달고 주위에 함께 나눠주자. 그리 고 소식지들이 나오는데 언론에 나오지 않잖 아. 그런 세월호 소식들을 SNS나 지인들에게 알려내는거.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유가족 간 담회 등을 같이 만들어보고 참석해보고. 가깝 게는 이런거고. 진실찾는 행동도 해보고. 우리 사회 안전하지 않은 것들 한 번 찾아도 보고. 잘못한 사람들이 누군지 따지기도 해보고. 향

러면 이 사람을 데리고 플랑도 달고 가족들 간 담회도 해보고. 약속지킴이들의 사랑방, 토론 도 해보고. 촛불에 참여했던 많은 시민들이 나는 뭘해야 하지? 뭘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고 있어. 이런 사람들을 활동할 수 있게 하는거. 가장 작은 것부터. 자기 주변에서부터 생각해보자 는 거지. 친지, 회사 동료, 커뮤니티, 동호회도 있을거고. 지금 함께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 지 못하면 세월호 투쟁이 깨져버리잖아.

생존학생들과 함께 걸었던 길 “이게 바로 치유다 싶었어 애들이 힘이 넘치는거야. 그때가 가장 기억에 남아.”

후에는 더 발전되겠지. 진상규명 싸움이 더 어

본 : 안산에서부터 지금까지 세월호 투쟁을

려운 상황이 나타나면 이 약속지킴이들이 행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 하나를 꼽는다

동을 같이 해줘야 한다. 갑자기 뭐 어떤 일이

면요?

벌어졌을 때 약속지킴이들이 나서서 광장에 12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김 :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생존자 학생들이

하니까 애들이 이제 웃기 시작한거야. 장난치

랑 걸었을 때야. 반 애들이 투표를 하고 얘기

고 웃고. 어머님들이 그 모습을 보고 너무 좋

를 나누고 결정을 했어. ‘어머니 아버지 위해

아하시는 거야. 잘한 일인거 같다. 이게 바로

서 힘을 줘야겠다. 우리도 뭔가 하고싶다.’ 처

치유다. 상담받고 이런게 치유가 아니다 내가

음에 서먹서먹 했는데 조금씩 걸으면서 부모

뭔가를 친구를 위해서 할 수 있는게 있구나 이

님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어. 애들이 평소에도

런 생각을 하면서 걷는 것 자체가 아이들에겐

집에 오면 얘기를 안한대. 잘 웃지도 않는다는

치유라고 하더라고. 그러면서 애들이 정말 그

거야. 근데 출발하고 사람들이 응원을 나오고

소년 소녀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는거. 웃는 것

13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도 겁이 났었던 친구들이... 근데 나도 그것 때

세월호 참사라는 사건이 나를 불렀고 뭔가 해

문에 기분이 너무 좋았고 뭔가 내가 이 일을

주기를 요구했고. 그렇게 여기까지 왔어. 이

잘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 마지막에

싸움이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끝까지

난 힘들어 죽겠는데 애들이 그러는거야. “서울

갈때까지 노력하겠다.” 이런 마음이야. 어머님

까지 더 안가요?” 애들이 힘이 넘치는거야. 그

들의 마음... 또 다른 마음이잖아. 어떻게 죽은

때가 가장 많이 기억에 남아.

건지 밝혀지지 않았고. 너무 억울한 거잖아. 놓지를 못하는거지. 이 진실만은 풀어드려야

“이제부터 진짜 싸움! 더 힘든 일들이 기 다리겠지만 최대한 노력하려고.”

되는데. 이게 되도록 최대한 노력하려고. 어 머님들이 편안해지는 그날이 왔으면 좋겠고. 더 힘든 일들이 기다리겠지만 최대한 같이. 장

본 : 조만간 특별법이 통과될 가능성이 높아

담을 못하니까 최대한이란 말이 자꾸 나오네.

보이는데요 앞으로의 다짐같은게 있으신가 요?(인터뷰 당시는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 기 이전이었다.)

“니가 지쳐있지 않니?” “자기가 할 수 있는 곳에서 뭔가를 하려 고 노력했으면 좋겠어”

이 : 앞으로 싸움이 더 치열할거야.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앞으로가 진짜 싸

본 : 끝으로 우리 회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움이지. 솔직히 난 장담을 못하겠어. 개인적으

있으세요?

로 큰 사건도 많았고 힘든 일도 많았기 때문 에. 내가 ‘아 이게 나의 삶의 이정표야’ 라고 말

김 : 우리는 다음만 너무 생각을 하지 않나. 다

하기는 아직은 나는 좀 부족한 것 같아.

음 투쟁도 있는데 하면서 너무나 자신한테 잣

14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대를 부드럽게 대는 거 같애. 느슨하다고 해야

닌가 난 되묻고 싶어. “니가 지쳐있지 않니?”

되나? 뭐 오늘 하루는 빠져도 되겠지. 또는, 다

라고.

아니까 오겠지...

가족들은 다시 한 번 100미터 달리기 하듯이

난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자기부터. 뭘 하

마라톤을 뛴다고 얘기하는데...그렇게는 못하

더라도 치열하다고 해야할지... 자기가 느끼는

더라도 우리는 마라톤을 뛰려고 하고는 있는

것. 관성이 아닌 마음으로 운동했으면 하는거

건지. 너무 계산적인 건 아닌지.

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곳에서 뭔가를 하려고 노력

요즘 사람이 되게 적더라고. 광우병 촛불이랄

했으면 좋겠어.

지 그 때는 새벽까지 안들어가고 그렇게 했는

매주 집회를 나와라 집중을 하라 이게 아니더

데 그때보다 더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솔직히.

라도 자기가 할 수 있는 걸 찾고. 주위에 있는

그때 60~70일 동안 거의 집에도 안 들어가고

어머니 아버지 형제들에게 약속지킴이 함께

새벽에 들어가면서 투쟁했었는데.

할 수 있는 것 만들려고 하고. 주변에 나오지

지금 가족들이 지쳐있고 같이 하려는 대중들

않는 동지, 회원들 같이 나오게 하고. 그것부

이 지쳐있는게 아니라 우리가 지쳐있는게 아

터 시작이 아닐까. ▒

15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공무원연금 개악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http://mag-mkyd21.tistory.com/96

박근혜 정부가 ‘43% 더 내고 34% 덜 받는’ 방향으로 공무원 연금을 손질하겠다는 소식 이 들린 후, 여의도 광장에는 무려 12만 명의 공무원이 운집해 정부를 성토했다. 공무원들은 정부의 연금 손보기에 대해 한 마디로 “정부의 완벽한 배신”이라 평가하고 있다. 박봉에 야근수당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며 묵묵히 일 해왔는데, 이제는 연금마저 줄이려 한다는 것이다. 정말일까. 우리는 공무원들의 ‘집단적 반발’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16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공 무원

기도 한다. 2013년 3월 자살한 울산 중구의 한 사회복지 공무원은 임용된 지 두 달 만에 스스 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37세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 공무원은 ‘철밥통’이미

로 늦은 나이에 공무원에 임용되었던 그는 전

지가 강하다. 1997년 IMF외환위기 이후 비정

체 26,000여 명의 주민 중 노인과 장애인, 아

규직이 만연하고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사

동, 그리고 1,600여 명에 달하는 기초생활수급

라진 상황에서, 공무원은 어렵사리 ‘임용 고시’

대상자를 단 두 명이 도맡아야 하는 업무환경

를 통과한 후 ‘큰 사고’만 일으키지 않으면 ‘

에서 일했다.

정년’이 보장되는 특혜를 누린다. 게다가 공무

그가 근무했던 중구청의 한 직원은 “두 명이 한

원이라는 신분이 가져다주는 대출금리 혜택과

동의 사회복지업무를 도맡아 하려면 업무가 가

‘마이너스 통장’ 등 금융혜택도 일반 국민들이

중된다”며 “특히 공무원이 된 지 두 달밖에 안

보기에는 분명한 혜택이다. 게다가 일부 부패

된 그로서는 무척 힘이 들었을 것”이라고 말했

한 공무원들은 각종 접대와 로비까지 받으며

다. 또 다른 공무원은 “그가 다소 늦은 나이인

‘비공식적인 이익’을 누리기도 한다. 사정이 이

37세에 9급 공무원이 됐으나 외부에서 듣던 공

렇다보니 국민들이 공무원들을 고운 시선으로

무원의 임금과 달리 적어 갈등을 느낀 것으로

볼 수만은 없는 것이다.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공무원이 누리는 혜택만 부각시켜 보

사회복지 공무원 외에 일반 공무원들의 업무

게 되면 실제 묵묵히 일하는 대다수 공무원이

중 사망 소식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2014년

처한 암울한 현실은 보지 못하게 된다. 일례로

8월에는 장성군의 40대 후반의 한 중견간부공

일선에서 대국민 봉사를 천직으로 삼아 일하

무원이 과로를 이기지 못하고 토요일 근무 중

는 사회복지 공무원은 과로와 스트레스로 어렵

에 사망하는 사례가 있었으며, 부산시청 건설

게 들어선 공무원의 길을 버리고 자살에 이르

본부 교량건설1팀에 근무하는 시설6급 안 모 17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씨는 현장에서 밤샘 근무한 뒤 퇴근하다 뇌출

업무가 워낙 많은데다 오후 6시 이후에는 밀린

혈로 쓰러져 의식불명에 빠지기도 했다.

서류 작업을 해야 해서 ‘칼퇴근’은 불가능한 얘

이외에도 2011년 구제역 파동당시 방역작업을

기예요. 저는 야근수당을 많이 받는 편인데, 실

하던 7급 공무원 곽 모씨가 과로로 숨진 사례,

제 일하는 시간은 더 길어요”라고 말했다.

역시 2011년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준

역시 같은 보도에 의하면, 2010년 중앙부처 7

비하던 동사무소 공무원이 과로로 숨진 사례,

급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행정주사보 강아무개

중견간부인 행정안전부 감사관실 조사담당관

(38)씨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다. 강씨의 농

권 모 과장이 다른 직원과 업무 협의 중에 갑자

협 통장에 들어온 9월치 급여는 196만5,000

기 사망한 사례 등 보도된 공무원의 과로사 소

원, 200만 원이 채 못된다. 7급 5호봉의 기본

식만도 상당하다.

급 185만3,400원에 모두 17시간의 초과근무 수당(15만1,810원)과 급식비(13만원), 직급보

박봉에, 장시간 노동까지

조비(14만원)를 더한 뒤 여기서 공무원연금 월 납입액으로 18만1,240원, 건강보험료로 8만

일부 고위공무원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급여 수

3,910원 등을 뺀 결과다. 전체 임금 노동자 중

준도 말이 아니다. 특히 전체 공무원의 81%를

에서 200만 원 미만인 사람이 49.7%를 차지

차지하는 9급~6급 공무원들의 급여수준은 상

하고 있으니, 9급~7급 공무원도 여기에 속하

당히 낮은 편이다. 한겨레 보도에 의하면 수도

는 셈이다.

권의 한 구청에서 일하는 9급 공무원 남아무개

9급 공무원의 야근 수당은 시급 7,247원으로

(37)씨가 지난달 손에 쥔 월급은 180만2,560

올해 최저임금 5,210원과 별로 다르지 않다.

원이었다. 9월은 그나마 무려 53시간을 초과

그런데 공무원 시간외수당 규정은 ‘1일 4시간

근무한 덕에 38만4,090원의 시간외수당을 받

상한제’와 ‘1일 1시간 공제’ 조항을 두고 있다.

은 경우다. 남씨는 “구민을 직접 상대하는 대민

만약에 하루에 야근을 6시간 해도 4시간 밖에

18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인정받지 못하며, 7시까지 일한 것은 아예 인정

공무원은 정년이 보장된 만큼 일반노동자에 비

도 받지 못한다. 당연히 실제론 더 일하고도 수

해 재직기간이 길 수밖에 없고, 퇴직금도 따로

당을 못 받는 경우가 많다.

없어 연금수령액에 퇴직금이 일정부분 반영되

물론 야근수당을 아예 꿈도 꾸기 힘든 많은 노

어 있다. 따라서 공무원이 퇴직 후 받는 연금수

동자들에 비해서는 그나마 낫다고는 하지만 이

령액이 많아 보이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

는 모든 노동자들이 야근수당을 정상적인 수준

운 현상이다.

으로 지급받을 수 있도록 해결할 문제지 공무 원들을 탓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공무원이 국민연금보다 더 많은 수준으

해당 지자체나 기관의 임금 예산이 부족한 경

로 연금을 받는다는 것도 옛말이다. 2010년 한

우는 직원들이 12월 한 달 동안 연차를 모두 사

차례 공무원 연금법이 개정됨에 따라, 2010년

용하기 위해 돌아가며 휴가를 내는 일도 비일

이후 임용된 공무원이 퇴직해서 받게 되는 연

비재하다. 당연히 휴가로 생기는 업무 공백은

금은 퇴직 전 월급의 20%~40%까지 떨어져

동료나 본인이 어떤 방식으로든 메꾸어 넣어

국민연금 수준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마디로

야 한다.

공무원들의 입장에서는 일반 국민보다 더 많은 비율의 월급을 미리 연금으로 내면서 실제 받

국민연금보다 더 내고 덜 받게 돼

는 돈은 국민연금만큼 낮은 수준, 심하게 말해 ‘용돈’수준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공무원들의 연금이 국민연금 수령액보다 많은

그런데 정부는 공무원 임금이 호봉제로 운영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도 자세히 살펴보면

어 근속연수와 직급에 따라 상당한 차등을 보

왜곡된 사실이다.

이는 현실은 외면한 채 극소수 공무원의 고액

공무원의 월급에서 공제되는 연금의 비율은

연금 수령 사례를 가지고 대다수 공무원까지

7%로 일반노동자 4.5%에 비해 높다. 여기에

싸잡아 매도하고 있는 것이다. 19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국민이 공무원과 연대해야 할 이유

시 34% 삭감되면 ‘용돈’수준으로 전락한다. 이 경우 대다수 하위직 공무원들의 공공 연금제

정작 공무원 연금이 부실해진 직접적인 원인

도는 사실상 무력화되며 이들은 민간보험사에

은, 정부가 일선 공무원들이 낸 기금을 아무 근

서 운영하는 연금상품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

거도 없이 마구잡이로 사용해버렸기 때문이다.

게 된다.

정부가 부당하게 사용한 기금은 누적 26조 원

이번 박근혜 정부의 공무원 연금 개악안을 주

이 넘는다. 대표적으로, IMF 당시 김대중 정부

도적으로 설계한 곳은 바로 한국연금학회다.

는 10만이 넘는 대규모 공무원 구조조정을 하

그런데 이 학회의 회원단체에는 국민연금공단,

면서 이들에 대한 퇴직급여로 공무원연금 5조

근로복지공단, 공무원 연금공단 등 국가 공공

원을 사용했다. 별도의 정부예산으로 운영해야

기관만이 아니라 생명보험사들이 포함돼 있다.

할 연금공단의 관리운영비도 기금에서 무단으

협회도 아닌 학술단체에 영리기업들이 들어와

로 사용하고 있다.

있는 것은 매우 예외적인 사례다. 한국연금학

게다가 공무원들은 사실 정년이 될 때까지 자신

회가 정부와 보험사들 간에 형성된 강력한 유

들의 기본적 인권을 상당히 제약받는다. 2002

착관계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결국

년 출범한 공무원노조는 전교조와 마찬가지로

박근혜 정부가 들고 나온 공무원연금 개혁안은

불법화되어 ‘합법화 투쟁’에 나서야 했으며, 그

철도 민영화, 의료 민영화에 이은 연금 민영화

과정에서 수많은 공무원들이 해고되기도 했다.

방안이라 볼 수밖에 없다.

지금도 공무원들은 정치활동의 자유에 제약을

박근혜 정부의 공무원연금에 대한 민영화 시도

받으며 노동3권도 제한된다. 이 때문에 업무상

는 국민연금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하위

발생하는 불이익에 대해 대응할 수 없는 경우

직 공무원이 주축이 되어 전개되는 지금의 공

가 허다하다.

무원연금 개악 저지투쟁에 국민들이 적극 연대

무엇보다 공무원연금이 현재 수준에서 또 다

해야 할 이유다. ▒

20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미국의 ‘돈살포’가 중단된 세계경제 http://mag-mkyd21.tistory.com/104

미국의 ‘돈 살포’ 중단과 혼돈의 세계경제 미국의 막대한 ‘돈 살포(양적완화)’가 대단원 의 막을 내렸다. 10월 29일(현지시간) 미국의 중앙은행 격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3차 양적완화(QE) 조치를 종료했다. 이로써 2008년부터 6년여 동안 4조 달러(약 4,200 조 원)의 천문학적인 돈은 쏟아 부은 양적완 화 실험이 마무리 되고 세계경제는 새로운 시 험대에 서게 되었다. 그 동안 미국은 막대한 ‘돈 살포’를 통해 경 기하강을 떠받쳐 왔다. 사람이 목숨을 잃을 것 같으니 급하게 몰핀(마약성진통제)을 대량 투여해 온 것이다. 이러한 ‘돈 살포’가 끝난다

자료 : 한겨레

는 것은 세계경제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21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다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사람의 목숨이 위

라 진통을 일시적으로 못 느끼게 하는 것인

태로워도 마약을 무한정 투입할 순 없다. 몰

것처럼 현재 미국경제의 회복세가 진정한 경

핀을 투여 받은 사람이 제 발로 걸어 다닐 수

제회복인지는 의문이다. 실업률이 떨어진 것

있을지 없을지는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이제

은 맞지만 취업 자체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급

부터 세계경제에 나타나는 현상들을 잘 관찰

증했고,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정체되어 있

할 필요가 있다.

는 등 고용의 질은 여전히 좋지 않다. 주가가 올랐다고 하지만 이것은 실제 경제현황을 반

양적완화 효과 있었나

영하고 있다기보다는 막대한 돈을 푼 결과 돈 이 주식시장으로 몰려든 결과다. 즉 풀린 돈

미국이 ‘돈 풀기’를 끝내는 것은 미국경제가

이 실물경제 보다는 증시 등 자산시장으로 몰

어느 정도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는 판단에서

려 거품을 초래한 것이다.

다. 겉으로 보면 미국은 ‘몰핀’의 효과를 본 것 처럼 보인다. 2009년 10월 9.6%까지 치솟았

미국 정부가 신경 쓰고 있는 지표 중 하나인

던 미국 실업률은 5.9%로 하락한 상태며, 국

인플레이션(물가상승률) 회복은 여전히 미진

내총생산(GDP) 성장률도 2분기(4~6월)에 전

하다. 9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7%를 기록

년 동기대비 4.6%를 기록했다. 미국의 대표

하며 연준의 목표치인 2%에는 못 미쳤다. 경

적인 주가지수인 스탠더드앤푸어스(S&P)500

제에 활력이 돈다는 것은 소비자들이 상품을

지수도 금융 위기가 오기 전에 비해 101%나

많이 소비한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어느 정도

뛰어 2000선을 넘어섰다.

의 물가상승이 나타나게 된다. 물가가 너무 오 르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경제에 활력이 떨

하지만 몰핀 투여가 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

22

어져 있다는 것을 말한다.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한편 양적완화 조치가 소득불평등을 키웠다

양극화가 심해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득

는 논란도 거세다. 막대하게 풀린 돈이 주식시

이 부족한 결과 빚에 의존하게 되면서 결국 부

장 등으로 흘러들어가며 주식, 부동산 등의 자

채를 감당하지 못한 것이 2008년과 같은 위

산 가격을 올렸다. 문제는 자산 가격이 올라갈

기가 일어난 하나의 원인이었다. 이렇게 본다

수록 불평등이 더욱 심해진다는 것이다. 고액

면 양적완화로 인해 위기를 잉태한 요인이 더

의 연봉을 받는 사람이 있는 반면 연봉이 최

욱 악화된 것이다.

저임금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임금 간에도 격차는 존재한다. 하지만 보통 임금 소득 불평등보다 자산소유 의 편중이 더욱 심하다. 소위 부자들은 임금 을 통해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부동산, 주식 등을 통해 더 많은 부를 획득하는 것이다. 따 라서 양적완화로 인해 부동산, 주식 등 자산 가격이 오르면 사회적인 불평등은 더욱 확대 된다. 미국 연준 조사에 따르면 2010~2013 년 미국 상위 10%의 가계 평균 세전소득은 10% 늘어난 반면 하위 40%는 오히려 감소했 다. 특히 미 전체 소득 가운데 상위 3%가 차 지하는 비중은 같은 기간 27.7%에서 30.5%

자료 : 서울경제

로 크게 증가했다.

23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돈 잔치’의 후폭풍

팔았다는 것이다.

몰핀은 마약인 만큼 부작용도 클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러한 거품은 실제적인 경기 현황을

당장의 ‘돈 살포’에 대한 효과를 떠나서 더욱

반영한 것이 아니란 것이다. 결국 거품은 꺼질

중요한 것은 양적완화 조치 종료 이후 어떤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경제에 충격을 준다.

후과가 나타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돈 줄을 죄기 시작하면 거 품 붕괴의 가능성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것이 자산거품(버블) 문제다. 실제 시중에 풀린 막대한 규모의 돈들은 기업의 공

신흥국들에게 있어서는 급격한 자본이동에

장을 돌리고, 일자리를 늘리는데 사용된 것이

따른 충격이 올 수 있다. 미국이 그 동안 돈을

아니라 주식시장 등 자산시장으로 몰려들며

시중에 살포한 결과 달러가치는 크게 떨어졌

거품을 초래했다.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

었다. 하지만 더 이상 시중에 돈을 풀지 않겠

라 그나마 사정이 나은 신흥국들에 투기자본

다고 하니 달러가치가 급등하고 있다. 향후에

들이 몰려들면서 신흥국 증시나 부동산 등에

도 달러가치가 오를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도 거품을 유발했다.

투기자본들이 신흥국 등에서 돈을 빼서 달러 자산으로 몰려들고 있다. 국제금융연합회(IIF)

무분별하게 풀린 돈들은 투기등급의 고위험

에 따르면 10월 한 달 동안 신흥국 주식시장

자산에 몰려들기도 했다. 2013년 월가 투자

에서 90억 달러(약 9조4,670억원)가 빠져나

은행들이 정크(투자위험) 등급의 채권을 이용

갔다고 한다.

한 자산유동화증권(ABS-파생금융상품의 일 종) 판매금액은 3,590억달러(약 377조원)를

양적완화 종료 다음 단계인 미국의 정책금리

기록했다. 쉽게 말해 고위험 상품을 엄청나게

인상이 내년 중 본격화하면 신흥국을 중심으

24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달러가치를 지수화한 그래프. 하반기 들어 미국의 양적완화 종료가 다가오면서 달러가치가 급등하고 있다. [자료 : stockcharts.com]

로 외국인 자금 대거 유출 등 충격이 예상

한국과 같이 가계부채 문제가 심각한 경우 큰

된다. 찰스 콜린스 국제금융연합회(IIF) 수석

충격이 올 수 있다. 미국이 금리를 인상하기

이코노미스트는 미 연준이 기준금리를 0.5%

시작하면 나머지 국가들도 금리를 올릴 수밖

포인트 올리면 해당 분기에만 신흥국에서

에 없다. 예를 들어 ‘우리은행’과 이름을 들어

1,000억달러의 자금이 빠져나갈 것으로 예상

보지 못한 A은행이 똑같은 예금금리(이자)를

하기도 했다.

준다고 하면 사람들은 어디에 돈을 맡길까? 25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당연히 ‘우리은행’에 돈을 넣을 것이다. A은행

리게 된다. 그런데 연준의 창고에 쌓인 채권(

이 사람들의 예금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더 많

부실채권을 많이 구매했다)을 언젠가는 처리

은 이자를 줘야 한다. 마찬가지로 한국을 포함

를 해야 한다. 연준도 부실화된 채권을 무한정

한 여타의 국가들이 자본을 유치하려면(혹은

안고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연준의 창고에 쌓

자본유출을 막으려면) 미국보다 금리가 어느

인 질이 좋지 않은 채권들이 시중에 다시 나오

정도 높아야 한다. 아직은 미국이 세계경제에

게 되면 시장 충격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서 비중이 가장 크고 달러가 기축통화이기 때 문에 안전하다고 평가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의 ‘돈 살포’로 인해 예상되는 후폭풍에

금리를 올리게 되면 돈을 빌린 사람들 입장

관해 몇 가지 살펴보았다. 하지만 더 큰 문제

에서는 이자가 오르는 것이 된다. 가계부채가

는 미국의 천문학적인 ‘돈 살포’가 지금껏 있

많은 사람일수록 이자부담이 커지는 것이다.

어보지 못한 정책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향 후 그 후과가 어느 정도일지 아무도 예상하기

양적완화 조치로 연준이 보유하게 된 채권 등

힘들다. 예상하지 못한 큰 충격이 올 수도 있

의 자산을 어떻게 처리할지도 문제다. 양적완

다.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각 국가들 간의 갈

화라는 것은 미 연준이 시중 채권 등의 자산

등과 마찰도 커질 것이다. 세계경제는 또 다른

을 구매하는 것이다. 그러면 연준 창고로 시중

혼돈의 시기로 빠져들고 있다. ▒

의 채권이 들어가고 연준 밖으로는 현금이 풀 26


인생의 터닝포인트

아름다운 예술과 역사의 도시, 빈 http://mag-mkyd21.tistory.com/100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버스 맨 뒤에서 앞자리에 앉아 빈으로 향했다. 창밖으로 체코의 풍경이 지나간다. 도시 외곽에는 현대적인 건물이 가끔 보였지만 아직 사회주의 체감이 많이 묻어난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좌절되고 사람들의 생활은 노골적으로 자본주의화 되었다. 사회주의의 실패 는 사회 제도를 바꾸더라도 사람을 바꾸지 못하면 실패한다는 교훈을 준다. 그 사람들이 다시 사 회의 불평등을 느끼고 현실을 개선하며 더 나은 사회제도를 건설하는 것은 언제일까?

27


인생의 터닝포인트

호화로운 쉔브른 궁전 이런 고민을 안고 테레지아 여왕시대에 완성된 쉔브른 궁전으로 향했다. 쉔부른은 아름다운 샘이란 뜻으로 함부르크 왕조가 베르사유 궁을 능가하는 호사로운 궁을 지을 계획을 시작 된 궁전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막내 ‘마리 앙뜨와네뜨’가 15세까지 지내던 곳이다. 오스트리아는 1438년부터 1806년까지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를 독점한 유럽의 패권국이었 다. 오스트리아의 왕은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까지 겸하고 있었다. 궁전에는 남편 대신 왕 위 쟁탈전에서 승리하고 전 유럽을 지해했던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초상이 보인다. 벨벳 드레스를 입고 한 것 우아하게 초상화에 그려져 있다. 시민 혁명이 일어나기 바로 전 호화로움과 사치는 극치를 달렸다. 곳곳에 황실의 문양이 새 겨져 있고 왕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그를 위해 얼마나 많은 귀족들이 농민을 착취하였겠는가. 얼빠진 위정자들은 옷과 왕관이 자신의 기풍과 권위를 상징한다고 믿는다. 지금, 차와 명품 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대변하고 있는 한국사회처럼.

28


인생의 터닝포인트

영세중립국 오스트리아 1867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방대한 영토를 획득하고 사라예보에서의 황태자 피살사 건을 계기로 1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터키와 함께 패망한 제국은 해체되고, 오스트리아는 1918년 7분의 1의 작은 공화국으로 축소됐다. 오스트리아는 1938 년 히틀러에 의해 독일에 합병된다. 다시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한 성원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패전국의 일원으로 1945년 미, 소, 프, 영에 분할 점령되었다. 1955년 10년 만에 오스트리아는 영세중립국의 형태로 통일을 이룬다. 그 공은 분할점령 3개 월 전에 임시 정부를 구성한 사회주의자 칼 레너에 있다. 임시정부 에는 이념을 떠나 모든 세력이 동참했다. 카를 레너의 임시정부는 오스트리아 전역을 하나로 묶어두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단결된 힘이 오스트리아 통일의 기초가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중립을 강조함으로써 독립 후에 서방진영 동맹에 가 담하지 않겠다고 소련을 안심시켰다. 오스트리아는 다시 독일과 손을 잡을 것에 신경을 쓰고 있던 서방진영도 안심시켰다. 결국 오 스트리아는 영세중립국의 지위를 획득했다. 2차 대전의 결과로 분단된 나라는 독일, 오스트리아, 한국이다. 침략을 한 독일, 오스트리아는 통일이 되었지만, 침략을 당한 한국만 아직까지 분단되어 있다. 이 무슨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29


인생의 터닝포인트

아름답고 슬픈 성 슈테판 성당 씁쓸한 마음을 안고 성 슈테판 성당으로 향했다. 이스라엘에서 돌에 맞아 죽은 기독교의 첫 순교자 인 성 슈테판 성인을 기리는 성당이다. 대성당 주 위를 돌며 모자이크로 된 화려한 성당의 지붕을 보 았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자 입구 근처의 예배당에 서 교인들이 차분히 미사를 보고 있다. 아직 성당 으로 사용하나 보다. 성당 북쪽 탑 쪽으로 들어서니 ‘치통의 그리스도 상’이 있다. 오른손으로 왼손을 만지며, 두 눈을 감 고 고통스러운 듯 입을 벌리고 있다. 산자의 아픔 의 치통인지, 악인을 벌주기 위한 치통인지 심연의 고통의 끝은 알 수가 없다. 앙상히 마른 몸에 오른쪽 상처까지 벌어져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예수의 짐은 무겁기만 해 보인다. 이제 그 짐을 내려놓고 좀 편안해지길 빈다. 인간은 스 스로 운명을 개척할 테니까 말이다. 성당 남쪽 탑에는 터키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맞서 싸워 이긴 기념으로 새겨진 3명의 조각이 있다. 당시 사람들은 성당이 파괴되지 않고 침략으로 부터 지켜낸 것은 마리아가 빈을 사랑 해서라고 생각하며 감사를 드렸다. 그러나 슈테판 성당은 터키 오스만 제국과 나폴레옹의 침략은 막아 냈지만 2차 세계대전 때 30


인생의 터닝포인트

대 화재로 소실되어 절반이상이 무너졌다. 평화는 힘이 있어야 지킬 수 있지 누구에게 빌어서 오 지 않는다. 이 성당에서도 볼 수 있는 인류의 교훈이자 현 시대의 반영이다. 중세 고딕 양식의 절정인 이 성당은 아름다우면서 슬프다. 우연히 주교단에서 노래를 하는 남자 성가대를 마주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가 성당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착각이 들었다. 수세 기 동안의 역사는 그들의 종교적 신앙으로 남아 존재하고 있다. 이 모든 유물이 말이다. 오늘 빈과도 안녕이다. 여행도 이제 종착점에 다다랐다. 짧고도 긴 여행이다. 시간은 짧았지만 사회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고찰을 던져 주는 긴 여행이었다.▒ 31


컬러로 보는 이슈

에볼라 파병(?),만만한 게 군바리야 http://mag-mkyd21.tistory.com/97

32


컬러로 보는 이슈

누구를 위한 의료진 파견?

의심 환자를 돌보다 발생한 일이다. 17개월 남 자 아이는 38.3도의 고열이었다. 피나 분비물

미국은 10월 15일(현지시간) 공식 외교채널을

은 물론 기침을 통한 감염까지 가능한 에볼라

통해 한국정부에 에볼라 사태에 관한 추가 지

의 공포는 무시무시했다.

원을 요청했다. 케리 국무장관이 딱 찍어놓고 일본과 한국에 전화해서 요청한 듯하다. 한국

지난 9월 21일 아프리카 가나에서 귀국한 부

정부는 자금지원에 이어 의료진 파견도 하겠

산 사람이 에볼라 의심 증상을 보였다. 그는

다고 발 벗고 나섰다.

119를 통해 부산대병원으로 향했다. 부산대 병원은 질병관리본부 국가지정병원으로 가라

박근혜 대통령은 바로 다음날 16일 갑자기

며 환자를 거부했다. 울산대병원에 전화를 해

“에볼라에 대응하기 위해 보건인력을 파견”한

도 마찬가지였다. 막상 알고 보니 울산대병원

다고 선언했다. 군의관들 사이에선 볼 멘 소리

은 국가지정병원이었다. 어디가 국가지정병원

가 터져 나왔다. 공공병원도 마찬가지다. 이제

인지 아무도 몰랐다. 실제 질병관리본부는 전

군의관과 간호장교는 목숨을 걸어야하나. 자

국 17개 국가지정병원을 비밀에 부치고 있다.

원으로 바뀌어 경쟁률이 4:1이라고 하는데 진 짜 가고 싶어 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장비를 보면 더욱 가관이다. 에볼라 바이러스 는 가장 높은 생물안전 4등급(Bio-safety level

더 큰 문제는 그 중 한 명이라도 에볼라 바이

4, BL4) 실험실에서만 다뤄야 한다. 아직 국내

러스에 감염되었을 경우다. 얼마 전 국립의료

엔 BL4 실험실이 없다. 격리 병상을 운영할만

원 간호사 4명이 사표를 냈다. 지난 10월 8일

한 병원도 거의 드물다. 공기 감염을 막을 수

시에라리온 프리타운에서 입국한 에볼라 감염

있는 C등급 보호구는 이제 보급중이다. 33


컬러로 보는 이슈

의사 대신 군대를 보내는 미국 에볼라의 유령이 지금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공포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빌빌대던 에 볼라 백신 시장은 이제 1조원의 로또다. 미국 정부는 에볼라 치료제 개발사와 10억 달러(약 1조) 규모의 계약을 맺을 예정이다. 10년 전 캐나다와 미국 연구진은 에볼라 바이 러스 백신 동물실험에 성공했다. 당시 만든 백 신은 ‘VSV-EBOV’. 인체임상실험 2년을 거친 후 2010년 시판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딱 거 기까지. 개발은 중단되었다. 아프리카 사람들 은 백신을 살 돈이 없기 때문에. 미국이나 빌 게이츠 같은 부자들은 많은 돈을 WHO(세계보건기구)에 지원한다고 홍보한다. 그러나 그 기부는 다국적 제약회사로 돌아가 고, 거대 제약회사는 돈이 되는 치료약 개발 에만 몰두하고 있다. 이제 ‘글락소스미스클라 인’(GSK) ‘존슨앤존슨’ 등 미국 제약사들은 에 볼라 백신을 위해 미친 듯이 달려들고 있다. 34

오바마 정부는 에볼라에 대한 첫 대응으로 서 아프리카에 의사가 아닌 군대를 파견했다. 전 쟁터처럼 황폐해진 현지 마을에 야전병원을 설치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미국은 아프리카 사령부 소속 미군 550명을 라이베이라로 파 견했다. 앞으로 총 4,000명을 파병할 예정이 다. 과연 이들이 목숨을 걸고 에볼라 치료에 나설까. 오바마 정부는 아프리카 국가의 ‘신속대응군’ 창설을 지원하기 위해 매년 1억1,000만(약 1 천1백억) 달러를 지원할 계획이다. 매년 아프 리카 학생 500명에게 미국 유학기회를 제공 하는 ‘워싱턴 펠로십’을 제안하기도 했다. 특 히 최근에는 20여년 만에 군사협력단을 파견 하기로 했다. 에볼라 지원 역시 사실상 아프리 카에 대한 정치·군사적 지배를 강화하기 위 한 행보인 셈이다.

그들이 준 재앙, 에볼라 시에라리온은 1961년까지 영국의 식민지였


컬러로 보는 이슈

다. 독립 이후 내전이 발생했고, 정부군과 반 군은 유일한 자원인 다이아몬드를 차지하기 위해 싸웠다. 서방 자본들은 그 사이에서 빨대 를 꼽고 무기와 자원을 빨아먹었다.

결국 배고파 헤매던 주민들은 깊은 숲속의 과 일박쥐를 잡아먹다가 에볼라 바이러스에 감

라이베리아는 1822년 미국의 해방 노예들이

염되었다.

이주해 건국한 나라다. 미국 노예들은 라이베 리아 땅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내쫓고 나라

아무런 준비도 없이 에볼라 인력을 파견한다

를 건설했다. 그들로부터 온 분쟁의 씨앗은 쿠

는 박근혜 대통령. 오바마 대통령처럼 에볼라

데타와 내전으로 이어졌다.

바이러스 완치 환자와 포옹이라도 해야 되는 것 아닌가. 아니면 1억이 넘는 헬스기구와 특

오랜 내전과 분쟁의 원인을 부족 간의 갈등이

급 연예인 트레이너로 건강해지신 대통령께

라고만 할 수 있을까. 덕분에 최빈국이 된 서

서 솔선수범해서 서아프리카로 가보는 건 어

아프리카는 의료시설은 물론 먹을 것도 없다.

떠신지.▒ 35


미래의 거울, 역사

이 달의 역사 우발적이었지만 결코 우발적이라고 할 수 없었던 사건,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 http://mag-mkyd21.tistory.com/99

광주학생운동기념탑 비문 단기 사천 이백 육십 삼년 십일월 삼일, 이 날은 광주 학생들이 일제의 탄압에 항쟁하여 일어선 민족 정기의 날. 굴욕으로 사느니 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의지로 너도나도 뛰쳐 나서자, 이에 호응하여 전국에서 일어난 학생이 무릇 오만 사천 여명.... 혹은 쇠사슬에 묶이어 철창아래 갇히었으며 또 혹은 피를 뿜고 쓰러졌으되 그 날 그들이 높이 들었던 정의의 횃불은 그대로 역사 위에 길이길이 타오르나니 어허 여기 흐르듯 고인 그들의 피와 눈물은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마르지 않을 것이며, 또한 여기에 서린 채 깃든 그들의 넋과 뜻은 겨레의 갈 길을 밝히어 비추리로다. - 광주 학생운동 기념탑 비문(광주 제일 고등학교 교정) 36


미래의 거울, 역사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들

광주학생독립운동을 크게 3단계로 구분해보

의 항일운동을 기념하는 날이다. 흔히 <학생

면 1단계는 10월 30일 나주 통학생 충돌부터

의 날>로 알려져 있는데 2006년, 법적으로

광주 전체로 번져갔던 기간이고 2단계는 광주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지정되었다.

의 시위가 목포를 비롯한 전남과 전국으로 번 져갔던 기간, 3단계는 1930년 1월부터 3월까

광주학생독립운동이 갑작스럽게 일어난 것은

지로 구분할 수 있다. 1월 15일부터는 독립만

아니다. 학생들은 1920년대 내내 ‘교육개선’,

세운동으로 전개되었고 특히 3월 1일을 전후

‘식민지교육 철폐’의 요구를 들고 동맹휴학을

하여 3·1운동 11주년운동을 겸해서 전개되

벌이는 등 활동을 지속하고 있었다. 광주학생

었다. 또한 후반으로 가면서 중등학교를 넘어

독립운동은 교육문제에 머물렀던 식민지 학생

보통학교 학생의 참여가 많았다는 것도 특징

운동이 ‘조선독립만세’와 같은 정치운동으로

이라고 할 수 있다.

발전한 사건이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우발적이지만 결코 우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1월 시작되어

발적이라고 할 수 없는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이듬해인 1930년 3월까지 지속되었다. 전국

1929년 10월 30일 오후에 광주를 떠난 통학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194개교의 학교와

열차가 나주역에 도착했을 때 광주중학 3학년

5만4,000여 명의 학생이 참여하였으며, 그 중

인 후쿠다 슈조 등의 일본인 학생이 광주여고

580여 명이 퇴학처분과 함께 최고 5년의 체

보 3학년인 박기옥 등을 희롱했고 이것을 목

형(體刑)을, 2,330여 명이 무기정학 처분을 받

격한 박기옥의 사촌 동생 광주보고 박준채 등

았다. 해외까지 합치면 더욱 큰 규모로 벌어졌

이 후쿠다 등 일본인 학생 패거리와 싸움을 벌

다고 할 수 있다.

였다.

37


미래의 거울, 역사

사실 나주에서 광주까지 기차통학생 사이에는

되었다.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의 충돌이 가끔 일 어났다. 광주 중학교 교사 요시다는 1930년

12월에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2월 2일 저

진술에서 1928년 11월, 1929년 4월, 5월, 6

녁부터 3일 아침까지 서울 각 학교에 격문이

월에 조선인학생과 일본인 학생 사이의 충돌

뿌려졌다. 그 종류만 해도 10여 종이나 되는

이 벌어졌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이전에도 조

데, 대체로 ‘광주 학생들에 대한 호응과 지원’,

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들의 다툼은 있었지

‘식민지 노예교육의 철폐’,‘언론·집회·출

만 5만여 명의 학생이 참가하는 시위로 바뀐

판·결사의 자유’, ‘치안유지법 철폐’, ‘군사경

것은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대처했기 때문이

찰정치·총독정치 반대’ 등의 내용을 공통적

다. 이 사건이 우발적이면서도 우발적이지 않

으로 담고 있었다. 또한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간회 중앙에서도 비판 연설회 또는 민중대 회 등을 기획하고 추진하기도 했다. 개성, 동

11월 3일 광주역 앞에서 조선인 학생과 일본

래(부산), 원산, 춘천, 평양, 함흥 등 전국 각지

인 학생의 대규모 충돌이 벌어졌다. 충돌 이후

에서는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동조하는 동맹휴

조선 학생들은 연합가두시위를 진행했다. 일

업이 벌어졌다. 동맹휴업이 여의치 않은 곳에

제는 휴교령을 내리고 학생들을 색출하여 기

서는 백지동맹(시험거부투쟁)을 실시했다.

소하는 등 탄압했으나 광주의 조선 학생들은 치밀한 계획 하에 오히려 11월 12일 더욱 큰

항쟁 초기에는 검거학생을 구출하라는 것이

규모의 시위를 벌여냈다. 이 과정에서 독서회

주요구호였으나 19일 목포 시위를 계기로 ‘조

의 지도자들과 신간회 등이 시위의 확산을 위

선독립만세’, ‘무산계급혁명 만세’ 등의 구호

해 노력했으며 이러한 노력의 결과 시위는 11

가 등장했다. 학생들 간의 우발적인 다툼이 민

월 19일 목포를 시작으로 전국으로 번져가게

족적, 계급적 문제로 확대된 것이다.

38


미래의 거울, 역사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독서회의 활약을 빼놓고

학생독립운동은 광주지역의 조선인 학생과 일

설명할 수 없다. 11월 3일 일본인 학생들과의

본인 학생의 다툼에 따른 약간의 소동의 의미

편싸움 이후 가두시위를 결정한 것이 독서회

밖에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였고, 11월 12일 대규모 시위를 계획·실행한 것도 독서회였다. 광주에서 시작한 시위를 전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당시 침체되어 있던 조선

국으로 확산하기 위해 목포, 서울 등지에 사람

독립운동에 새롭게 경각심을 깨워주고 머뭇거

을 파견해 시위 확대를 논의한 것도 독서회였

리던 기성운동을 각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다. 심지어 독서회의 장석천은 신간회 중앙본

사실 1919년 3.1운동과 1926년 6.10만세운

부의 김병로, 허헌 등과 만나 학생시위를 확대

동 이후 조선의 독립운동은 겉으로는 주춤거

하는 것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리는 것처럼 보였다. 일제는 문화통치를 통해 교묘하게 독립운동을 개량화하기 위한 책동을

독서회의 전신은 성진회(醒進會)였다. 1926년

벌였으며. 이 시기 민족주의 운동은 점차 쇠퇴

11월 광주의 한 하숙집에서 13명의 학생들 이 모여 성진회를 결성했다. ‘조선의 독립’, ‘사 회과학의 연구’, 그리고 ‘식민지교육체계의 반 대’ 등을 주장하며 앞으로 이를 실천하도록 노 력할 것과 동지들을 규합해 나가면서 자신들 의 뜻을 퍼트리자는 것이었다. 성진회는 이후 독서회로 바꾸고 주력이었던 광주고등보통학 교와 광주농업학교 외에 여러 학교들과도 함 께 하게 된다. 또한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소녀 회도 조직했다. 이들 조직이 없었더라면 광주

▲성진회 결성 39


미래의 거울, 역사

하고 있었고 새롭게 등장한 사회주의 운동은

1954년 6월 10일, 전국의 학생들이 성금을 모

분열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극복

아 건립한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에 새겨져

하기 위해 1927년 좌우합작운동을 벌여 신간

있는 문구다. 85년 전 식민지 조선의 학생들은

회가 만들어졌으나 특별한 활동을 벌이지는

암울한 조국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새로운

못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을 통해 지역의 학

길을 모색하고 적극적으로 조직하고 실천해왔

생, 청년단체, 신간회 등이 나서 투쟁을 만들

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모습은 아닐까?▒

어 가는 등 활력을 불어넣었다. 또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새로운 운동에 대 한 요구를 보여주는 항쟁이라고 할 수 있다. 1929년은 광주학생독립운동뿐만 아니라 원 산총파업, 용천소작쟁의 등 노동자, 농민의 투 쟁도 벌어졌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식민지 조선에서 이전에 있었던 명망가 중심의 운동 이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 양심적인 지식인을 비롯한 청년학생 등 기층 민중들이 직접 투쟁 의 주체로 나서는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투쟁 이었다.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

40


미래의 거울, 역사

[연재] 동아시아 분쟁의 어제와 오늘 ③

중일전쟁과 일본의 패망 http://mag-mkyd21.tistory.com/101

만주사변을 통해 만주국 전체를 주무르게 된

출신 등 일본 정계의 많은 인물들은 대외 온

일본 육군, 그 중에서도 특히 관동군의 기세는

건책으로 군사비 부담을 줄여보려는 시도를

하늘을 찌를 듯했다. 고작 1만 명 정도의 사단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칼자루는 이미 커질대

병력에 불과했던 오지의 철도 경비대가 일본

로 커진 관동군에게 있었다. 관동군에게는 자

‘제국 군대’의 핵심 세력이 된 것이다. 만주사

신들의 밥그릇인 군비를 줄이려는 정치인들

변에 성공한 군부는 점점 어려워지는 일본 경

이 눈엣가시였을테고, 결국 사단이 일어난다.

제에도 불구하고, 만주에서의 병력 증강에 국 력을 쏟아 붓게 함으로써 국가 재정에 큰 부담

1936년 2월 26일 새벽, 육군의 소위 ‘황도파’

을 주고 있었다.

청년장교들이 ‘쇼와유신 단행’과 ‘존황토간’을 외치며 도쿄 한복판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

일본의 군비는 만주사변이 일어난 1931년부

킨다. 1천여 명의 청년 군인들은 군비 확장에

터 급격하게 증가해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

반대하는 내무대신들을 ‘간신’으로 몰아 살해

년 경에는 군비가 전체 국가재정의 50%를 차

하거나 포위하게 된다. 쿠데타는 결국 진압되

지하게 된다. 당연하게도 군사비의 급격한 증

었지만, 이 사건 이후 일본의 군대와 정계는

가는 일본 재정에 엄청난 부담이 되었고, 해군

완전히 군국주의 파쇼화의 길로 치닫게 된다. 41


미래의 거울, 역사

▼일본군의 89식 전차가 남경의 중화문을 돌파하고 있다.

1937년 경이 되었을 때, 일본군은 이미 만주

전면적인 대륙 침략에 나선다. 이른바 ‘루거

국의 국경 너머에 ‘기동방공자치정부’라는 괴

우차오(노구교) 사건’이다. 이것은 앞서 만주

뢰정권을 수립해 북평(지금의 베이징) 인근까

국을 수립할 때 벌인 ‘류타오후(유조호) 사건’

지 군대를 전진 배치시켜 놓았고, 전선 이곳저

과 더불어 관동군이 벌인 대표적인 조작사건

곳에서 도발을 감행하는 등 전쟁의 분위기를

이었다. 이날 밤 북평 근교의 루거우차오에 주

무르익혀 가고 있었다. 언제, 어느 곳에서 전

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야간 훈련 도중 총성과

쟁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함께 병사 한명이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결국 일본군은 1937년 7월 7일 밤 노구교 근

일본군 현장 지휘부는 중국군이 납치해갔다

처에서 일어난 한 병사의 실종사건을 계기로

며 독단적인 판단을 내려 상부에 보고하게 되

42


미래의 거울, 역사

고, 상부는 즉각 전면적인 공격작전을 지시하

2차 국공합작을 통해 중국공산당 홍군은 국민

게 된다. 그러나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당의 국민혁명군 제8로군(제18집단군)이 되

납치되었다는 병사는 설사로 인해 20분 간 잠

었다. 중국공산당원이 국민당원이 되어 국민

시 대열을 이탈했을 뿐이었고 즉시 복귀했다

당의 지도를 받던 1차 국공합작과 달리 2차

고 한다. 상부에서는 이 사실을 알게 되었지

국공합작은 공산당의 독자성이 훨씬 강화되

만 이미 전쟁이 벌어졌으니 어쩔 수 없다며 확전 지시를 철회하지 않았다. 웃기는 일이지 만, 한 명의 병사가 ‘똥 싸느라 늦는’ 바람에 2 천만 명이 사망한 대 전쟁이 벌어지게 된 것 이다. 이 사건을 통해 당시 일본군부가 계기와 상관없이 얼마나 전쟁을 하고 싶었는지 잘 알 수 있다. 일본군은 루거우차오 사건 채 한 달이 되지 않 아 북평과 천진을 점령했다. 북평과 천진이 함 락되자, 중화민국과 일본 사이의 전쟁은 단순 한 국지적 충돌이 아니라 전면적인 전쟁으로 돌입하게 된다. 전쟁은 친일과 반일을 오가며 애매한 태도를 유지했던 장개석의 국민당 정 부를 완전한 ‘대일항전’에 들게 했으며, 서안 사건을 계기로 중국공산당과 적극적으로 제휴 하여 2차 국공합작을 이루게 만든다.

북평(현재의 베이징)에 진주한 일본군 43


미래의 거울, 역사

었다. 홍군은 국민혁명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만 해도 그저 패장의 헛된 희망사항에 불과한

완전히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했으며 독립적

것이었다.

인 해방구를 유지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그 세 력을 점차 확대해나갈 수 있었다.

사실 일본군이 중국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 일한 방법은, 국가의 총력을 동원해 속전속결

국민당군은 대일항쟁에서 지구전과 지연전술,

로 승리하고 원하는 목표를 얻어내는 것이었

유격전을 원칙으로 정하고 구체적으로는 전국

다. 그러나 일본은 총력전을 위한 본국의 합의

을 전구단위로 재편성하고 방어체계를 구축하

도 없었고, 전쟁승리의 목표도 뚜렷하지 못했

며 병참선을 확보하는 전략을 취한다. 일명 ‘공

다. 그렇게 된 데에는 관동군 지휘부의 ‘폭주’

간으로 시간을 버는 작전’이었다. 물론 당시

에 가까운 전선확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의 국민당군은 아직 초보적인 군대 수준을 벗

중일전쟁 수행을 승인하면서 내각과 육군부는

어나고 있지 못했고, 장비나 보급도 일본군에

북평과 천진, 그리고 상해까지만 점령하는 것

비해 열세였다. 그러나 중국에는 거의 무한대

으로 합의했지만 관동군은 이런 지시를 전부

에 가까운 인구가 있고, 일본군이 채 통제하지

묵살한 채 마음대로 전선을 확대시켜 나갔다.

못하는 광활한 대지가 있었다. 일본군을 중국 이라는 거대한 늪에 빠뜨려 천천히 숨통을 조

사실 당시 일본의 국력으로는 중국 전역을 점

여가는 전략이었다. 이런 전략은 결과적으로

령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일본

맞아떨어졌지만, 장제스가 개전 초기 “일본이

은 중국과의 전면전 발발 후 미국과 소련 등

중국 전체를 먹으려고 달려들 것이며, 중국뿐

열강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었으며, 전쟁이 확

만 아니라 태평양 전체의 패권을 노릴 것이다.

대되고 자원이 부족해지자 구미 열강의 대표

그렇게 되었을 때 열강과 충돌을 피할 수 없

적인 세력권이던 동남아에까지 진출했다. 전

을 것이고 결국 승리할 것이다”라고 말할 때

쟁물자 대부분을 미국을 통해 해결하던 일본

44


미래의 거울, 역사

▲노구교 사건 당시 장신점의 평한철교 근방에서 공격을 준비중인 일본군

은 역설적이게도 미국의 세력권이던 동남아를

관동군은 “중국따위는 2개월, 길어도 1년이면

침략함으로써 전략물자 공급로를 잃게 된다.

끝난다”며 자신들이 세계 최강임을 내세우며

이처럼 전체적인 전황이 어려워졌음에도 불구

단기전으로 중국 전역을 먹으려고 했지만 결

하고, 전선의 관동군 지휘관들은 눈앞의 승리

과는 참담했다. 무한대의 예비역 병력을 가진

에 도취되어 타협책을 찾고 전열을 정비하기

중국과 달리, 일본은 관동군 정예 수만 명을

보다 무제한적인 폭주로 일관했다.

빼면 예비병력의 동원조차 불가능한 병참 수 45


미래의 거울, 역사

준이었다. 게다가 천황주의의 광기에 빠진 일

는 맹목적인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

본군은 중국 내에서 학살과 약탈, 강간을 일삼

지 않는 광기와 망령이.▒

으며 중국인들의 반일감정을 더욱 자극했다. 결국 1940년대 들어서자 일본의 패배는 기정

* 저자의 사정으로 칼럼 <동아시아 분쟁의 어제와

사실이 되어버렸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늪에

오늘>은 3회를 마지막으로 휴재에 들어갑니다. 앞으

발을 잘못들인 일본이 백기를 든 것은 중일전

로 이 칼럼면에는 현재 출간을 목표로 집필되고 있

쟁 발발 8년 뒤의 일이다.

는 <대한미국사 - 한미관계의 어제와 오늘>이 대신 연재될 예정입니다.

중일전쟁은 일본군 100만 명, 중국군 180만 명 그리고 중국 내 민간인 2천만 명 이상이 사 망한 인류사적인 비극이었지만, 그 엄청난 피 해자에 비해 진상이 잘 드러나지 않은 잊혀 진 전쟁 중의 하나다. 이처럼 거대한 피바람을 일으킨 거대한 사건은 물론 구조적으로 이해 되어야 한다. 사건이 일어난 정치·군사·경 제·사회적인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일차적 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일전쟁 과 관동군의 비행을 경계해야 하는 까닭은 이 들의 군국주의 광기와 파쇼적 망령이 현대에 되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과 점령이라

46


예술, 그 본질적 가치

“모든 예술은 에로틱이다” 매독에 걸린 미친 천 재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7. 14

에로틱이냐 페미니즘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일-1918.2.6, 오스트리아) 그의 그림은 야하다. 그런데 한편에선 클림트의 에로티시즘을 페미 니즘으로 해석한다. 성 상품화의 수단인 에로티 시즘과 여성 해방의 페미니즘은 정 반대 아닌가. 퇴폐적인 요부에 대한 찬미인지, 생명과 창조의 여신에 대한 찬사인지. 두 해석이 공존하는 모순 은 현 사회상의 반영이 아닐까.

http://mag-mkyd21.tistory.com/98 47


예술, 그 본질적 가치

클림트 그림은 여성인권단체 페멘(Femen)의

모든 것이 상품화 되고 인간의 말초적 감각을

‘토플리스(topless, 반라)’ 시위를 떠올리게 한

끊임없이 자극하는 사회, 거기에 딱 부합하는

다. 페멘은 국가와 종교의 부조리부터 남성 우

작품 세계다. 몽환적 세기말의 요소가 물신 풍

월주의 사상을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겨난다. 이 작가가 왜 현 시대 높이 평가 받는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남성을 살해했다는 혐

지 이해가 된다. 작품을 볼수록 왠지 빠져드는

의로 여성에게 교수형을 집행한 이란 정부를

느낌은 자본주의 썩은 물에 내 영혼이 푹 잠겨

비난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을 바라보는 시

있다는 반증인가.

각도 클림트를 바라보는 시각처럼 복잡하다.

48


예술, 그 본질적 가치

클림트, <Gold fish> 1901~02, 캔버스에 유채, 150x46cm, 졸로투른 시립미술관

클림트의 <Gold fish>는 깊은 바다에서 알몸으로 부유 하는 세 여인을 그린 그림이다. 살짝 등을 돌린 두 여인 은 관능적이며, 쪼그려 앉아서 빨간 머리를 휘날리며 뒤 를 돌아보는 여인은 매우 도발적인 미소를 띠고 있다. <Gold fish>는 클림트의 예술을 비난하는 당시 권력자들 을 조롱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다. 당시 클림트는 오스트리아 교육부의 요청으로 빈 대학에 설치할 ‘학부회화’를 그리는 중이었다. 교육부는 <Philosophy 철학>, <Medicine 의학>, <Law 법학> 이 세 학 부를 어둠을 극복한 빛나는 이성의 상징으로 표현해달 라고 의뢰했다. 하지만 관능적인 누드와 무질서한 클림 트의 그림이 중도에 공개되자 빈 대학 교수들은 작품 철 회를 요구했다. 그러자 클림트는 ‘나의 비방자들에게’라 는 제목으로 이 그림을 그려 공개하려다 가까스로 참았 다고 한다.

49


예술, 그 본질적 가치

클림트 <Medicine> 1899~1907.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벽화, 1945년에 파괴

자정에 들리는 목소리 난 내 꿈에 잠들어 있다. 가장 깊은 꿈에 깊이 빠져든다. 깊은 심연에로 들어가고 싶다. 이 작품이 클림트가 빈 대학 벽화로 그 린 작품인 <Medicine>이다. 왼쪽에 심연 에 빠져있는 나체의 여인이 그려져 있다. 오른편에는 주술사인 여인과 그 위로 무 수한 인간군상이 탑을 이루고 있다. 썩어 가는 얼굴과 저주받은 해골, 아이와 어머 니, 여인, 남성의 등이 주술사의 주술에 빠져 하늘로 올라가는 듯하다. 클림트가 <Medicine>이라고 지은 이 작품은 사회 로 부터 배척받은 클림트가 저주하며 각 종 몽환의 세계를 한데 모아놓은 작품이 다. 이 작품은 배척 받다가 2차 세계대전 때 소실된다.

50


예술, 그 본질적 가치

클림트, <Judith Ⅰ>, 1901년, 캔버스에 유채, 153x133cm, 빈 오스트리아 미술관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는 구약성경 유딧기에

목 테두리의 장식과 옷, 벨트를 하고 있다.

등장하는 인물로 많은 화가들의 작품소재가

여인의 몽환적 얼굴과 선홍빛 유두는 죽음을

되었다. 유디트는 베툴리아에 살았던 아름답

맞이한 시신의 머리를 감싸는 쾌락의 향연자

고 정숙한 과부였는데, 아시리

를 묘사한 듯하다. 곧추 뻗은

아 군대가 침략하자 아름답게

어깨를 묘사한 옷과 그 위의

치장을 하고 거짓으로 투항한

황금빛 배경, 그 아래의 청록

후, 만취한 적장 홀로페르네스

색 어두운 배경이 작품을 양

의 목을 벤다. 클림트가 그린

분하고 있다.

유디트는 황홀한 표정으로 목 을 들고 웃고 있는 모습으로

클림트는 인간의 심연적 이

유명하다.

기적 욕망을 그려냈다. 자본 주의 사회, 계급사회가 수세

유디트와 그 머리가 잘린 홀로

기 이어지면서, 아니 동물이

페레네스가 선명히 금박으로

인간으로 진화하면서 남아

새겨져있다. 클림트가 그린 유

있는 이기심에 대한 원한이

디트는 배경부터 강렬한 비늘

그녀의 눈동자에 새겨져 있

과 나무 문양으로 금박으로 묘

다. 유디트의 눈빛이 탐욕의

사 하고 있다. 여인은 황금빛

영혼을 빨아들인다.

51


예술, 그 본질적 가치

클림트, <Kiss> 1907-8, 캔버스에 유채, 금박, 180x180cm 오스트리아 빈 벨베데르궁전

클림트의 대표작인 이 작품은 진정한 사랑을

남자의 검은 머리와 진한 피부는 강인함을 나

갈구하는 남녀를 표현하고 있다. 평면 묘사

타내고 여인의 갈색머리와 회색 빛 얼굴에서

와 금박 기법이 상당히 화려하다, 전체적인

죽음이 느껴진다. 남자의 옷 뒤에 거대한 금박

배경은 황금색 눈이 내리는 듯하다. 낭떠러

배경. 금박 원의 반복, 심연의 모습을 그리고

지에 핀 꽃 밭, 화폭 위에 여인은 무릎을 꿇으

있다. 금색 잎줄기들이 뻗어있다. 클림트가 그

며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매달려있다.

린 환각의 세계가 예술적으로 높이 평가 받고

여인의 발에는 금빛으로 된 개나리 같은 장식

있다. 화려함 속에 감춰진 내면의 고독과 원초

이 걸려있다. 그녀의 옷은 화려한 금박에 붉

적 욕망이 현대인들을 이 그림으로 끌어들이

은, 갈색, 파랑, 초록색 일본풍 모양으로 화려

고 있다. 사람이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가기 힘

하게 그려져 있다.

든 자본주의 사회. 돈과 욕망의 노예가 되기를 강요받는 우리들에게 클림트의 작품은 공감

남자는 목을 감싸며 여자의 볼에 입을 맞춘

대를 형성한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을 빨아들

다. 남자의 옷은 이집트 문양에 금과 은의 검

이고 있는 구스타프 클림트. 그는 시대의 본질

은 네모가 장식되어있다. 남자의 거친 손마디,

을 꿰뚫은 천재일지 모른다.▒

52


예술, 그 본질적 가치

53


세상의 모든 무기

세월호와 본험 리처드 함 http://mag-mkyd21.tistory.com/102

54


세상의 모든 무기

세월호 침몰 당시 우리 국민들은 구조대가 단

핵심전력인 원정타격대 76에 속해 있다고 한

한 명의 승객도 구조하지 않았다며 참사의 책

다.

임을 정부에 묻고 있다. 그러나 당시 사고현장 에는 대한민국의 선박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상륙강습함(LHD : Landing Helicopter and

미 해군 상륙강습함인 본험 리처드함도 함께

Dock)은 헬리콥터와 도크가 있다는 뜻으로

도착해 있었다.

공기부양정 3대 이상과 헬리콥터를 탑재할 수 있을 때 LHD로 명명된다. 상륙강습함의 크기

1. 본험 리처드 함이란?

는 대체로 항공모함에 비교되곤 하는데, 항공 모함은 전투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갑판은 있

USS 본험 리처드(LHD-6)는 미국 해군의 와

지만 헬기의 이착륙장이나 상륙정이 들어왔다

스프급 강습상륙함 중 3번째 함선이다. 이 함

나가는 도크는 없다. 반면 강습상륙함은 상부

선의 이름은 프랑스어로 ‘좋은 사람 리차드’

갑판에 헬기의 이착륙장을 가지고 있으며 상

를 의미한다.

륙정이 출입하는 도크가 있어 상륙작전을 전 개할 수 있다.

이 함선은 1997년 3월 14일 진수되었으며, 1998년 5월 12일에 미국 해군으로 이송되었

본험 리처드함의 배수량은 40,500톤에 달하

고 1998년 8월 15일에 배치되었다. 본험 리

며 전장이 257m, 선폭이 32m에 달해 세월호

처드함은 모항을 켈리포니아 주 샌디에이고에

보다 대략 6배 안팎의 크기로 볼 수 있다. 본

두고 있었으나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 중시

험 리처드함은 최대속력이 37km/h에 불과하

전략” 이후인 2012년 4월 13일에 모항을 태

다고 한다. 세월호 침몰 당시 서해 인근에서 달

평양사령부 소속 일본 사세보 시로 옮겼다. 같

려왔다고 하는데 그 속력이 낮으므로 상대적

은 상륙강습함인 USS 에식스와 함께 제7함대

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55


세상의 모든 무기

본험 리처드함과 같은 와스프급 상륙강습함은

은 처음에 “한반도 서해상”에 있었다고 했다

갑판이 직사각형의 형태로 되어 있으며, 수직

가 세월호 참사와 한미연합훈련 관련설이 나

이착륙기를 탑재할 수 있고 상륙용 호버크래

오자 20일 “약 155km 떨어진 공해상에 있

프트 (LCAC : Landing Craft Air Cushion)나

었다”고 밝혔다. 4월 16일자 라디오코리아도

상륙용 주정장비(LCU : Landing Craft Utility)

“사고 지점 북서쪽 155km 해상”에 있었다고

같은 상륙정을 3대 탑재할 수 있다. 한 척의

보도했다. 사고 지점에서 북서쪽 155km 해상

LCU에 해병대가 400명까지 탑승하니 상륙정

이면 공해상이 맞다. 본험 리처드호는 3월 27

3척이면 1,200명의 해병대가 동시에 상륙할

일부터 2014 한미연합 쌍용훈련에 참가했다.

수 있는 규모이다. 또한 LHD에는 600개의 병

제주 남쪽 해상에서 시작해 포항에서 대규모

상이 있는 치료실이 있다.

상륙훈련을 진행하는 게 쌍용훈련의 주요 골 자다. 이 훈련은 4월 7일 끝났다. 특별한 일정

2. 본험 리처드함, 무엇을 하고 있었나?

이 없다면 사세보항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 러나 세월호 침몰 당시 본험 리처드호는 서해

본험 리처드호는 세월호 참사 직후 현장에 출

에 있었다.

동한 함정 가운데 가장 큰 함정으로 헬기도 많 이 보유했고 의료시설까지 있어 구조에 큰 도

그런데 4월 16일 성조(Stars and Stripes)지

움이 될 것으로 주목을 받았다. (해경 123정

는 알로 아브라함슨(Arlo Abrahamson) 주한

과 대비되는 매우 큰 규모) 그러나 결과적으

미해군 대변인의 말을 인용해 본험 리처드호

로 본험 리처드호는 구조에 아무런 도움도 주

가 사고 당시 100~115해리(약 200km 안팎)

지 못했다.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보도했다. 북서쪽으로

사고 당시 본험 리처드호가 정확히 어디에 있

200km면 대략 군산 앞바다까지의 거리다. 군

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

산 앞바다는 세월호의 경로 가운데 유일하게

56


세상의 모든 무기

공해상을 지나는 경로다. 세월호가 군산 앞바

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다른 여러 언론들도

다 공해상을 지났을 새벽 2~5시 사이에 본험

“훈련”을 하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리처드호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 지만 두 배가 서로 만나거나 근접했을 가능성

3. 본험 리처드함은 구조에 참여하였나?

도 배제할 수는 없다. 본험 리처드함은 사고수역에 재빨라 도달하였 김민석 대변인은 16일 “정기 경계 임무를 수

지만 세월호 구조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국방

행”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같은 날 성조지도

부 김민석 대변인은 4월 18일, “사고 현장에

“일상적인 순찰을 하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는 공군의 C-130 수송기를 비롯한 다수의 구

4월 25일자 <아주경제>도 “통상적인 순찰 활

조헬기가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로

동을 벌이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일본을 모항

서는 미군 헬기의 역할이 많지 않아 일단 복귀

으로 하며 상륙작전에 투입되는 대형 상륙강

하도록 하고 추가로 임무를 주겠다고 지시를

습함이 왜 서해에서 순찰을 하는지 의문이다.

했다”고 밝혔다. 16일자 성조지는 “익명을 요

본험 리처드호에는 대잠헬기 시호크가 있기에

구한 한국 해군 관리는 미군의 추가 지원을 요

잠수함 수색 작업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청하기 전에 사태 추이를 지켜보는 중이라고 말했다”는 보도를 했다. 아브라함슨 대변인은

한편 단순 순찰 활동이 아니었다는 보도도 있

“한국과 논의를 했고 요청이 오면 지원하기 위

다. 성조지는 4월 17일자 보도에서 “일상 작

해 대기 중이다”고 밝혔다.

전을 수행 중이었다”고 했다. 물론 순찰 활동

본험 리처드호는 사고 다음날인 17일 오전에

을 작전이라고 표현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4

도 시호크 헬기 두 대를 투입해 수색에 나섰

월 16일 <라디오코리아>는 “자체 훈련을 하

다고 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슨 대변인은 한국

57


세상의 모든 무기

의 요청에 따라 사고 지점에서 약 5~15해리

지휘부의 결정에 따라 본험 리처드호가 탐색

(9~28km) 떨어진 구역을 수색했다고 하면서

구조 임무에서 벗어나게 됐다”고 밝혔다.

왜 그 구역 수색을 요청했는지 모른다고 밝혔 다.

본험 리처드 함은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대체 무엇을 했던 것일까?▒

미 대사관에서 운영하는 페이스북에서는 사고 당일 7함대 소속 본험 리처드호의 움직임을 공개했다고 한다. 당시 미국은 헬기도 동원해 서 세월호에서 15해리 떨어진 곳(대략 30km 근방)에서 모종의 작업도 했다. 또한 미국은 독도함에 두 명의 잠수사를 파견해서 해군과 해경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독도함은 실 제로는 아무런 구조 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한 다. 결국 본험 리처드호는 아무런 성과도 남기지 못하고 세월호 참사 지점에서 약 20~25해리 (37~46km) 떨어진 곳에만 머물다가 4월 22 일, 진도 해역을 떠났다. 미 해군 7함대 공보실 은 4월 23일자 보도자료를 통해 “한국이 보유 한 선박과 항공기 등 현재 자원을 활용하면 수 색 및 구조 작업을 하는데 충분하다는 한국군 58


Turn static files into dynamic content formats.

Create a flipbook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