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1

Page 1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민권연대)

월간

2015

1


특집기획 월간

발행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민권연대) 발행일 2015년 1월 1일 (11호) 블로그 http://mag-mkyd21.tistory.com 문의 mag.mkyd21@gmail.com

3

■편집자의 말

신은미 황선 토크콘서트 그 뒷 이야기 특집기획 헌재의 역습

■인권, 테러, 그리고 정당해산

4

■조봉암의 진보당 사건 : 역사는 되풀이된다

8

■빼앗긴 민주주의, 봄은 오는가

14

■문제 아줌마들의 뒷이야기

32

미국, 어디까지 봐봤니?

■북미간에 벌어지는 사이버전 논쟁

38

■미 해군사관학교에 전시된 조선 수군의 깃발 : 1871년 신미양요

42

2015년, 먹고 살 길이 없다

2

■2015년 예고된 세금 폭탄

19

■먹고살기 힘들어 숨 막힌다

26

민권소식

50 ■스승을 만나다 : <정면돌파> 부산민권연대 김인규 대표님


헌재의 역습

을미년(2015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2015년, 민권연대가 5주년을 맞습니다. 그 동안 성원해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 씀을 드립니다. 민권연대 월간지 [본]은 2015년 새로운 기획으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갈 계획입 니다. 기획 특집으로 더욱 특색있는 기사로 앞페이지를 꾸며봤습니다. 각 분야별 다양한 읽을꺼리 역시 준비했습니다. 앞으로 민권연대 소식도 더 잘 전달해 드 리겠습니다. 1월호의 주체는 “헌재의 역습”입니다. 헌법정신을 수호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헌 법재판소가 헌법을 유린하고 독재권력의 거수기가 되었습니다. 통합진보당 해산 의 정치적 배경과 역사, 그 소회에 대해 짚어보았습니다. 다가오는 민주주의의 봄을 위해 어두운 독재의 겨울을 헤쳐나갑시다. 언제나 국 민이 승리했습니다. 편집자 드림.

3


특집기획

http://mag-mkyd21.tistory.com/117

인권, 테러, 그리고 정당해산

4


헌재의 역습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 해를 준비해야 될 시기

열린 수석 비서관 회의에서 박 대통령은 “최근

에 세상이 떠들썩하다. 한쪽에선 방북인사들의

소위 종북 콘서트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우

토크콘서트를 ‘종북콘서트’라 주장하며 폭탄테

려스러운 수준”이라면서 특히 유엔의 북한인

러를 하지 않나, 다른 한쪽에선 통합진보당이

권결의안 통과 등 국제사회의 움직임을 언급하

위헌정당이라며 해산시키고 전체 당원을 반국

며 “당사자인 대한민국에서 그 정반대 이야기

가단체 구성원이라며 고발하는 일이 벌어지고

가 나오는 것은 극히 편향되고 왜곡된 것”이라

있다. 상황만 보면 마치 나치당 치하의 독일이

고 지적했다.

나, 유신독재 긴급조치 시절을 보는 듯하다.

그런데 정작 익산 폭탄테러에 대해서는 아무런

박근혜 대통령은 두 가지 사안에 대해 직접 언

언급을 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자국에서 일어

급하며 관심을 보였다. 12월 15일 청와대에서

난 폭탄테러에 대해서 침묵하고 오히려 피해자

5


특집기획

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식의 언급을 한 것은 내

그런데 왜 하필이면 선고를 12월 19일에 했을

심 테러에 동조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나 다

까? 정당해산 청구 379일 만에, 최종변론이 있

르지 않다.

은 지 24일 만에 17만 쪽에 달하는 각종 기록

박 대통령 발언에서 주목할 부분은 유엔 북한

을 검토해 역사에 남을 판결을 내린다는 건 상

인권결의안 부분이다. 그간 수많은 통일콘서트

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물론 정윤회 문건

가 있었지만 왜 이번에만 유독 광기어린 반응

사건으로 뒤숭숭한 정국을 덮으려는 의도로 급

을 보이는지 대통령이 직접 해명해준 셈이다.

하게 판결을 했을 것이다.

폭탄테러 여파가 채 식기도 전에 이번에는 정

그런데 날짜를 12월 19일, 대선 2년에 맞췄다

당해산 폭탄이 터졌다. 이승만 정권의 진보당

는 것은 어떤 다른 의도도 보인다. 2년 전 대

해산 이래 최초의 정당해산으로 한국은 물론

선에서 ‘다카키 마사오’ 발언으로 박 대통령을

해외에도 큰 이슈가 되었다.

궁지에 몰았던 이정희 진보당 대표에 대한 보

진보당 해산은 충분히 예상된 수순이었다. 정

복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대선

부가 청구한 정당해산 청구가 기각된다면 박근

당시 득표율 51.6%로 박정희 쿠데타를 연상시

혜 정부 대 진보당의 싸움이 진보당의 승리로

킨 것처럼?

인식되면서 박근혜 정부의 몰락을 불러왔을 것

박근혜 대통령은 12월 20일 진보당 해산 결정

이다. 올해 있었던 대선부정 사건, 내란음모 조

에 대해 “자유민주주의를 확고하게 지켜낸 역

작사건, 쌍용차 사건, ‘이마트는 대형마트가 아

사적 결정”이라고 평가했다. 정당 하나를 이렇

니다’ 사건에서 보듯 대한민국 사법부는 이미

게 쉽게 제거하는 게 자유민주주의라면 지금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지 오래다. 정당해산 청

까지 국민들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잘못 배

구를 기각할 가능성은 처음부터 0이었다.

운 것이다.

6


헌재의 역습

법무부는 집시법에 따라 진보당의 노선을 따

에 국민이 겁을 먹으면 테러범의 의도에 말려

르는 집회는 모두 불법이며, 진보당 해산을 반

들게 된다. 그런데 극단적 방법을 통해 상대에

대하는 집회도 불법이라고 발표했다. 진보당이

게 공포를 심어주려는 테러범의 심리는 무엇일

민주주의를 표방했으니 이제 이 땅에서 민주

까? 그 역시 공포다. 자신이 겁에 질렸기에 상

주의를 요구하는 집회는 모두 불법이 되었다.

대를 겁주려는 것이다. 지금 박근혜 정부와 권

집회를 할 때마다 경찰과 법원은 집회 내용과

력층은 위기를 느끼고 있다. 그 위기가 어디서

진보당 강령 가운데 일치하는 단어를 찾아내

찾아온 것일까? 이번 두 사건의 공통점을 살펴

탄압할 것이다. 지금껏 유신독재가 부활했다고

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

했는데 아직까지는 맛보기였을 뿐이다. 종북몰이와 테러, 정당해산이 횡행하는 연말은 2015년 한 해가 결코 녹록치 않을 것임을 예고 해준다. 하지만 이겨내야 한다. 테러(terror)의 원 뜻은 ‘공포’다. 테러의 목적은 상대를 공포에 떨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 상황 7


특집기획

http://mag-mkyd21.tistory.com/123

조봉암의 진보당 사건 역사는 되풀이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소극(笑劇)으로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이 한 재판의 재심 결과를 내놓았다. 바로 죽산 조봉암 선생에 대 한 판결이다. 52년 전 죽산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사형선고가 정치탄압을 위한 “사법살 인”이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8


헌재의 역습

1958년 1월 12일과 15일 이승만 정권의 검찰

육군특무부대가 남파간첩사건인 이른바 양명

은 진보당 간부들이 박정호 등 14명의 간첩단

산(양이섭) 사건을 발표하며 양명산과 조봉암

과 접선한 혐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진보당의

이 연계가 있다고 발표했다. 이어 2월 25일, 이

평화통일 주장이 북한의 주장과 같아 그들과

승만 정권의 공보실장 오재경은 진보당의 평화

내통한 혐의가 짙다는 이유로 조봉암 위원장

통일론 및 북한 간첩과의 접선을 이유로 “진보

등 당의 간부들을 모두 검거하고 중앙당을 수

당이 당원을 국회에 진출시켜 대한민국을 파괴

색하고 당원명부 등 각종 서류를 압수하는 등

하려 기도했다”며 재판도 열리기 전에 진보당

진보당에 대한 전면적인 수사에 돌입한다. 이

의 등록을 취소했다. 진보당은 이에 반발해 서

결과 진보당은 해산되고 당수인 조봉암 선생

울고등법원에 진보당 등록취소의 행정처분취

은 결국 사형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을 가리켜

소신청을 내기도 하였으나, 대법원의 최종 판

진보당 사건이라고 한다.

결에서 기각되었다.

검찰은 2월 16일 진보당의 당수 조봉암 선생

이승만 정권이 조봉암 선생과 진보당에게 이

을 간첩죄, 국가보안법 위반 및 무기불법소지

런 탄압을 한 것은 1956년 있었던 정부통령 선

죄 혐의로 기소했다. 검찰은 진보당의 조봉암

거의 영향이 컸다. 1956년 5월 15일 3대 정·

이 남파간첩 및 재외 북한 관련 단체와 접선한

부통령 선거 당시 자유당에서는 이승만-이기

사실이 있으며,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대한

붕, 민주당에서는 신익희-장면, 진보당 추진위

민국의 존립을 부인하는 것이며 진보당의 정

에서는 조봉암-박기출이 출마하였는데, 민주

강정책이 북한의 조선로동당의 정책과 상통하

당의 신익희 후보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여 대

는 내용으로 대한민국의 헌법을 위반한 불법

통령으로는 이승만의 낙승이 예상되었다. 그

단체라 명시했다. 기소 직후인 2월 20일에는

런데 선거 결과 이승만은 대통령에 당선되기

9


특집기획

는 하였으나, 조봉암과 신익희 추모표 합계가

는 1999년한 진술에서 “당시 경무대로부터 조

약 45%가 나오는 등 이승만을 반대하는 세력

봉암을 잡아넣지 않으면 이승만 대통령의 재

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관권부

당선이 불가능하니 어떤 수를 쓰더라도 잡아

정선거를 실시하였음에도 부통령으로는 민주

넣으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당의 장면이 자유당의 이기붕을 누르고 당선 되는 등 자유당은 사실상 선거에서 패배하였

그러나 이승만 정권의 진보당 탄압은 마음대

다. 이 투표 결과를 두고 항간에는 조봉암 선

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958년 7월 2일 열린

생이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말까

1심 재판에서 조봉암에게 징역 5년, 나머지 사

지 나돌았다. 경제위기를 불러오고 부정부패

람들에게는 무죄가 내려진 것이다. 조봉암 선

를 일삼던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에 대한 민심

생을 비롯한 진보당 세력을 제거하려고 했던

이반이 확인된 것이다.

이승만과 자유당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렇게 되자 조봉암 선생은 이승만의 가장 강

판결이었다.

력한 정적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러던 중 조 봉암 선생이 주도하여 진보당이 1956년 11월

이 판결에 대해 이정재를 비롯한 자유당의 어

창당되게 되자 이승만 정권은 더욱 큰 불안함

용 정치깡패들은 법원청사에 난입하여 조봉암

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승만과 자유당 세

을 간첩혐의로 처벌, 처형하라고 행패를 부렸

력은 1960년 있을 정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

다. 이승만 정권도 이 판결에 대해 불만을 가

선생이 아예 나서지 못하게 하도록 제거하기

졌으며 결국 이 사건을 담당했던 유병진 판사

로 한 것이다.

는 판사 재임용에서 탈락되었다. 당시 이승만은 1심 판결을 듣고 매우 분노했

당시 서울시 경찰국 조사위원이던 한승격 씨 10

다고 한다. 당시 국무회의 사무국장을 지냈던


헌재의 역습

신두영의 비망록에 따르면 이승만은 “법관들

사유인 간첩, 국가보안법 위반, 무기불법소지

만 무제한 자유가 허용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등을 인정하여 사형을 선고했고 조봉암 선생

없다. 이러한 판사들은 처리하는 방법이 없는

은 7월 31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최종판

지 모르겠다”, “조봉암 사건 1심 판결은 말도

결문에서 대법원은 조봉암 선생에 대한 기소

안된다. 그 판사를 처단하려 했으나 여러 가지

의 배경이 된 진보당의 강령이나 정강정책 및

점을 생각해 중지했다. 같은 법을 가지고 여러

평화통일론이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밝혔지

사람들이 판이한 판결을 내리면 국민들이 이

만 진보당은 이미 해산되고 명을 다한 뒤였다.

해가 안갈 것이고 나부터도 물어보고 싶은 생

진보당이 어이없게 해산된 지 56년, 조봉암 선

각이 있다. 헌법을 고쳐서라도 이런 일이 없도

생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55년, 재심을

록 시정해야 한다”며 3권분립을 무시하고 진

통해 무죄가 확정된 지 3년이 지난 2014년 12

보당 사건에 깊숙하게 관여했다.

월 19일 통합진보당이 국가에 의해 강제로 해

정치깡패들의 난동과 이승만의 직접개입으로

산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진보당 사건의 2심은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치 러지게 된다. 9월 4일부터 10월 25일까지 열

제2의 진보당 사건도 첫 진보당 사건과 비슷

린 2심에서는 간첩 양명산이 자신의 진술을

했다. 이승만 정권이 극도의 위기에 몰리자 자

번복해 자신과 조봉암의 간첩혐의는 조봉암을

신의 눈 밖에 난 정치세력과 정적을 제거하기

제거하기 위한 육군특무부대의 협박과 회유에

위해 1차 진보당 사건을 일으킨 것처럼 박근혜

의한 허위자백이었다고 진술하였으나, 재판부

정부도 총체적 관권부정선거에 따른 민심이반

는 이를 무시하고 번복진술에 대한 증거조사

을 막기 위해 강연회를 빌미로 이석기 의원

도 채택하지 않았다. 결국 1959년 2월 7일의

을 비롯한 통합진보당 간부들을 내란음모 혐

최종판결에서 대법원은 조봉암에 대한 기소

의로 구속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는 이를 근 11


특집기획

거로 통합진보당의 강령이 북한과 유사하다고

향을 받는 인물이 8명인 상황에서 어찌 보면

주장하면서 통합진보당에 대한 해산청구 심판

당연한 결과였다. 헌법재판관들은 통합진보당

을 헌법재판소에 제기했다.

의 강령과 활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폭력 혁명”과 “북한과의 연계”를 1,000년 전 궁예

이석기 의원에 대한 재판 결과 내란음모는 2

가 사용한 <관심법>을 이용하여 있다고 주장

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정당해산심판 청구 재

했다. 또한 확정판결이 나지도 않은 내란음모

판에서도 정부는 통합진보당과 북한의 연계성

사건에 대해 진보당의 숨은 목적이 드러난 사

을 증명하지 못했다. 통합진보당의 강령에 어

건이라며 규정하며 “무죄추정의 원칙”까지 져

떤 문제가 있는지 확정하지도 못했다.

버렸다.

정당해산의 증거가 없었지만 헌법재판관들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한 이번 헌법재판소의 판

진보당을 해산하고 말았다. 박근혜 정부가 마

단에 대해 박근혜는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낸

음먹고 통합진보당을 해산하려고 나선 마당에

역사적 결정이었다”고 칭찬했다. 결국 이번 통

대법관 9명 중 대통령과 여당의 직간접적인 영

합진보당의 해산은 56년 전 이승만이 그랬던

12


헌재의 역습

것처럼 박근혜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 아래 진

한번은 소극으로 끝난다”고 했다. 이번 2차 진

행된 한편의 막장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보당 해산을 한편의 소극으로 마무리하기 위 해 필요한 것은 민중의 각성과 진보적인 실천

1958년 조봉암 선생의 진보당 해산으로 진보

일 것이다. 역사는 민중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

정치의 명맥이 단절되었다. 이후 민주노동당

이기 때문이다.

이 창당될 때까지 무려 42년 동안 진보정당 다운 진보정당이 나오지 못했던 비극적인 사

마치 독재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반복되고 있

태였던 것이다. 그러나 2차 진보당 해산은 1차

는 역사, 모두가 힘을 모아 한편의 소극으로 마

진보당 해산과는 다른 결과를 낳을 것이다. 무

무리하자.▒

죄를 받아낼 때까지 52년이라는 세월이 걸리 지 않을 것이며 진보정당의 명맥이 단절되지 도 않을 것이다. 칼 맑스는 “역사는 반복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13


특집기획

http://mag-mkyd21.tistory.com/124

빼앗긴 민주주의, 봄은 오는가

시인 이상화 1901년 대구 출생 / 1919년 3.1운동모의 / 1922년 ‘백조’로 등단 / 1923년 ‘나의 침실로’ 발표 / 1925년 ‘카프’ 발기인 참여 / 1933년 교남학교교사 재직 / 1943년 자택에서 사망

14


헌재의 역습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1901-1943)

나는 온몸에 했살을 받고

제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입술 다문 하늘아 들아

그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마음에는 내 혼자 온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어라 말을 해다오

내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흙을 발목이 시도록 밝아도 보고

바람은 내귀를 속삭이며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한자국도 섰지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너머에 아씨같이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영혼아

시비 - 빼앗긴 글에도 봄은 오는가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구름뒤에서 반갑다 웃네.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고맙게 자란 보리밭아

나는 온몸에 풋내을 띠고

간밤 자정이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어우러진 사이로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혼자라도 가뿐하게 가자.

아마도 봄 신령이 잡혔나 보다.

마른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겼네.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15


특집기획

암울했던 그 때 그 시절

점 더 강해지는 거 같고 독립의 기미는 보이 지 않으니 왜 우울하지 않을까. 우리는 그래도

1938년 가을 어느 널 저녁, 빙허 현진건(운수

태어나서 나라를 빼앗겼으니 독립에 대한 열

좋은날, 술 권하는 사회로 유명한 소설가. 독

망이라도 있지. 경술국치 이후에 태어난 사람

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 시인 이상화의 집으

들에게 우리와 같은 민족혼이라는 게 과연 존

로 놀러왔다. 빙허의 술 실력을 잘 아는 상화

재할까?”

는 술상을 한상 차렸다. 둘은 눈빛을 교환하며 막걸리를 한 사발 쭉 들이켰다.

“그냥 놔두면 당연히 없지. 그러니까 교육이 필요한 거지. 우리가 죽기 전에 독립을 이루

상화가 말을 꺼냈다.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

지 못한다면 우리자식들에게 우리 민족정신

본이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우리나라의 독립

을 전수해야하는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거 아

은 어떻게 되는 걸까? 요즘 괜히 우울하고 암

닐까?” “민족혼만 살아있다면 언젠가 반드시

울한 생각이 들어, 일본이 조선인 지원병을 모

나라를 되찾을 수 있을꺼야”

집하고 있고 일부 가난하고 몰지각한 우리나 라 사람들이 지원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걸 보

상화와 빙허는 술잔을 높이 들고 힘차게 건배

고만 있자니 가슴이 답답하고 반대하고 나서

했다. 상화가 “빼앗긴 들에도”라고 선창하자

자니 힘이 달리고..”

빙허가 “반드시 봄이 온다”라고 소리를 질렀 다. 막걸리 한 사발을 단숨에 들이켠 때문인

“상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다 자네 생각과

지 두 사람의 눈엔 눈물이 맺혔다.(출처 소설

같을 걸세. 나도 마찬가지야. 경술년에 국치

가 오철환)

를 당했으니 벌써 이십팔 년이야. 일본은 점

16


헌재의 역습

시인은 죽어서 말 한다

의 비판자이며 생활의 선구자이기에 시대와 호흡을 같이하는 방향을 제시하여야한다”고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시인 이상화가 처음 찾

믿었다.

은 도피처는 허무한 환상이었다. 그는 시 <나 의 침실로>에서 오지 않는 애인 ‘마돈나’를 기

이상화는 일제말기 대부분 문인들이 변절하는

다리는 마음을 관능적으로 표현하며 식민지

와중에도 끝까지 민족적인 신념을 갖고 일제

현실을 부정했다.

에 저항했다. 그는 “어려운 삶속에서 호흡을 같이하고자 현실 속에 시를 찾는 것이 시인의

이런 이상화에게 현실을 직면시켜준 계기는

할일”이라는 투철한 문학관으로 비통한 조국

일본 유학시절이었다. 그는 프랑스 유학을 위

의 현실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해 도일했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광란 의 살육장을 목격했다. 몸으로 체득된 제국주

당시 시대상은 이렇듯 캄캄했다. 도무지 광복

의의 본성은 그를 귀국 길로 이끌었다. 이윽고

을 올 것 같지 않았고 일제는 강대해보였다.

이상화는 귀국 후 일제치하의 참혹한 현실인

당하고 또 당하니 얼마나 억울했겠나. 허나 승

식을 담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1926.

승장구 할 것 같던 일제의 침략전쟁은 마지막

개벽>을 발표했다.

발악이자 패망의 서곡이었다. 그렇게 조선은 광복을 맞았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민족혼을 깨 우기 위한 이상화의 외침이다. 그는 이 시를

시인 이상화는 그토록 그리던 ‘봄’을 보지 못

통해 생존을 위해 굴종으로 살아가던 지식인

하고 광복을 2년 앞둔 43세의 나이로 운명을

에게 분노를 쏟아냈다. 그는 “시인이란 사상

마감했다. 가장 어두운 시절, 그는 그렇게 봄 17


특집기획

을 꿈꾸었다. 그리고 말했다. “시인은 죽어서

먼저 봄을 기다려 보았던 시인 이상화는 알고

말 한다”

있을 것이다. 추운 겨울은 봄이 가까워졌다는

봄은 온다 깜깜하다. 박근혜 정부 아래 살아가는 우리 주 변이 말이다. 주위를 둘러봐도 빛을 찾아보기 힘들다. 희망이라는 작은 빛을 찾아 고개를 돌 리려 해도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유독 추운 겨울이다. 추운 겨울을 견디다 못해 너도나도 움츠린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를 검열 하고, 누가 볼세라 비판대열에 나선다. 이 겨 울은 언제까지 추울까.

18

의미라는 것을.. 1959년 07월 31일 진보당 당수였던 죽산 조 봉암 선생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7개월 후 1960년 4월 19일 4.19 혁명이 일어났다. 이 처럼 파괴된 민주주의는 정체를 절대 용납하 지 않는다. 거센 파도와 같은 물결이 이제 다 가온다. 그 물결이 대지를 휩쓸 때 새로운 새 싹은 봄을 맞아 활짝 피어날 것이다. 빼앗긴 들에 봄이 오듯이...▒


2015년 예고된 세금폭탄

http://mag-mkyd21.tistory.com/120

2015년 예고된 세금 폭탄 증세 없이 복지 하겠다며 대통령선거 당시 야당 후보들과 국민들에게 큰 소리 쳤던 박근혜 대통령이 180도 입장을 바꿔 대규모 서민증세 폭탄을 예고하고 있다. 이미 정부가 예고한 대로 새해부터 담뱃값이 4500원으로 2000원이나 인상된다. 여기에 연말정산 방식이 대폭 달라지면서 세금을 도로 뱉어내야 하는 사례가 생길 가능성이 높아 졌다. 또 누구나 내야하는 주민세와 영업용 자동차에 부과하는 자동차세를 대폭 인상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특히 담뱃값이나 주민세, 자동차세 등은 사실 서민이 내는 세금이다. 부자들이야 담뱃값이 2000원이든 10000원이든 사서 피면 그만이고, 5000원 내던 주민세가 10000원, 20000 원 된다고 큰일나지도 않는다. 하지만 가뜩이나 살림살이가 팍팍해진 서민과 중산층에게 는 경우가 다르다. 자동차세를 내야하는 영세 자영업자들에게도 세금 인상은 그 자체로 분 노스러울 수밖에 없다. 2015년 터질 세금폭탄의 내용을 되짚어보고 그 영향을 살펴보자. 19


2015년 먹고 살 길이 없다

폭탄 1. 담뱃값 4500원 정부는 이번 담뱃값 2000원 인상을 통해 44 먼저 대표적인 서민 증세가 바로 담뱃값 2000

억갑인 담배소비량이 29억갑으로 34% 줄어

원 인상이다. 담뱃값을 인상하려는 정부의 명

들 것이라면서 세금 수입은 약 2조 8000억원

분은 단순하다. 담배가격이 오르면 소비가 줄

늘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이는 현실과는 동

고 국민 건강이 개선되는 금연대책이라는 것

떨어진, 말 그대로 추정에 불과하다. 현실에서

이다. 하지만 정부의 속내는 다른 데 있다. 갈

는 흡연자들이 4500원짜리 담배를 끊는 대신

수록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세금 수입이 예상

4000원짜리 커피 한 잔을 덜 마실 가능성이

대로 들어오지 않자 내놓은 증세 대책인 것이

훨씬 높다. 커피는 안마시면 그만이지만 담배

다. 이는 실제로 4500원 정도의 담뱃값이 세

를 끊는 고통은 매우 크다. 홍헌호 시민경제사

수 확대를 할 수 있는 최적점이라는 내부 연구

회연구소 소장에 따르면, 실제 통계를 살펴보

보고서가 폭로되면서 사실로 확인된 바 있다.

더라도 미국, 유럽 등의 경우 담배세를 인상했

20


2015년 예고된 세금폭탄

지만 흡연율은 그다지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

대작들이야, 소주, 담배 없어도 스트레스 풀

다. 지난 2010년 일본정부가 담뱃세를 1500

기회가 많으니 하루종일 뼈 빠지게 일하고 난

원 인상했지만 흡연율이 오히려 1% 포인트

후 서민들이 즐기는 소주와 담배 맛을 알 리

높아진 결과도 있다. 과연 이런 사례들을 정부

없다.” 이 말은 노무현 정부 시절 담뱃값 500

관료들이 몰랐을까?

원 인상안을 놓고 당시 한나라당 부대변인이 었던 이정현 새누리당 최고위원이 내뱉었던

홍헌호 소장은 미국암학회 등의 추정에 비춰

말이다. 그가 지금 2015년 담뱃값 인상을 놓

우리나라 담뱃값을 4500원으로 인상했는데

고 어떤 변명을 내놓을지 궁금할 뿐이다.

담배소비가 15% 줄었다면 약 5조 6000억원 의 세금이 더 걷히게 된다고 평가했다. 그 말

폭탄 2. 연말정산으로 인한 세금폭탄

은 곧 박근혜 정권이 서민 호주머니에서 5조 6000억원을 더 꺼내 가겠다는 말이다. 일례

박근혜 정권이 중산층 이하 서민에게 던친 세

로 현재 담배를 하루 1갑 피우는 사람은 1년

금 폭탄 두 번째는 바로 연말정산이다. 박근혜

에 약 57만원의 담뱃세를 낸다. 그러나 담뱃

정권은 지난 2013년 세법을 개정하여 연말정

값이 2000원 오르면 1년에 130만원을 담뱃

산 방식을 대폭 손질했다. 명분은 바로 부자에

세로 내야 한다. 연간 130만원의 부담은 무려

게 더 많은 세금을 내게 한다는, 조세 형평성

연봉 5000만원의 소득세에 해당하는 금액이

을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다. 말 그대로 세금 폭탄인 셈이다. “걸핏하면 골프장으로 달려가는 이 정권 고관

하지만 증세의 화살은 부자가 아니라 연봉 21


2015년 먹고 살 길이 없다

3450만원~5500만원에 해당되는, 경제협력 개발기구(OECD) 기준 ‘중산층’ 노동자로 향 하고 있다. 신용카드 사용액에 대한 소득공제 를 줄이고, 자녀에 대한 추가공제도 대폭 줄였 기 때문이다. 일반 노동자들이 가장 손쉽게 혜택을 볼 수 있 는 신용카드 사용액에 대한 소득공제는 노무 현 정부 당시 30%에 달했으나 이후 점점 축 소되어 10%로 줄어들었다. 이 때문에 소득세 를 원천징수당하고 신용카드를 주로 이용하

다. 김주연 KDB대우증권 세무사는 이에 대해

는 대다수 국민들이 모조리 증세 폭탄을 맞게

“자녀가 많은 가정은 세금폭탄을 실감하게 될

되었다.

것”이라 평했다. 박근혜 정부는 이런 방식으로 지난 2년간 3조

6세 이하 자녀에 대해 양육비로 1인당 100만

원 가량의 세금 수입이 늘어날 것으로 주장해

원, 출생·입양시에는 1인당 200만원을 소득

왔다. 물론 그들의 주장은 부자 증세를 통한

공제 해주던 것은 세액 공제로 축소되고, 자녀

수입 확보였지만, 현실에서는 정 반대로 중산

가 2명이면 100만원, 3명이면 300만원이 소

층 이하 서민들이 3조원의 세금 폭탄을 떠안

득공제되는 등 다자녀추가공제는 아예 사라졌

았을 뿐이다.

22


2015년 예고된 세금폭탄

더 나가 주로 부자들이 대상인 배당소득에 대 한 세금을 깎아줬다. 게다가 앞으로 대기업들 이 배당을 확대해서 세제 감면혜택을 받게 되 면,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나 현대차그룹의 정 몽구 회장 등은 최소 백억 원 대의 배당세를 줄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내년에 이건희 회장이 2000억 원의 배당을 받는다고 가정하 면 기존에는 약 680억 원의 배당세를 내야 하 지만 새로운 세제에 따르면 500억 원만 내도 된다. 이건희 회장에게 180억 원 정도의 세금 혜택이 돌아간다는 말이다.

부자 세금은 대폭 인하 부동산 경기부양책도 집부자들에게만 혜택을 반면 박근혜 정부는 서민들에게 세금 부담을

주고 있다. 정부가 9억 원을 초과하는 아파트

늘리는 대신 부자들의 세금은 대폭 할인했다.

까지 취득세를 4%에서 3%로, 1% 포인트 인 하키로 한 결과 강남 한복판의 시가 12~13억

박근혜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이명박 정부의

원 짜리 아파트를 취득하는 사람의 경우는 천

부자 감세 기조를 이어왔다. 이명박 정부 때

만 원이 넘는 세금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됐다.

3% 포인트 낮춰버린 법인세율은 그대로 두고,

심지어 국회 기획재정위의 류성걸 의원 등 새

23


2015년 먹고 살 길이 없다

누리당 의원 10명은 조부모가 손주들에게 교

박정희 유신정권은 1977년 1월부로 영업세,

육비 명목으로 증여를 하는 경우 1억 원까지

통행세, 입장세, 유흥음식세 등 10여 개가 넘

는 증여세를 한 푼도 내지 않아도 되는 ‘조세

는 간접세를 폐지 또는 통합한 부가가치세를

특례제한법’을 최근 발의하기도 했다.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박정희 정권이 부가가 치세 도입을 통해 노린 것도 세수 확보였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대다수 우리 국민들

조세일보에 의하면 당시 박정희 정권은 이를

중에서 9억원이 넘는 아파트를 살 수 있는 사

통해 총 2100억 원, 소비자물가 인상률을 감

람이 얼마나 되며, 할머니가 손주를 위해 1억

안한 현재 가치로 약 8배 이상에 달하는 1조

을 내놓을 수 있는 집안도 얼마나 될까. 이 모

7600억 원의 세금 수입을 노렸다고 한다.

든 조치는 결국 가진 자들만을 위한 ‘부자 감 세’조치일 뿐이다.

서슬퍼런 유신독재 시절이었지만, 당시 부가 가치세 시행으로 인한 저항은 대단했다. 시행

부가가치세와 유신의 종언

초기인 1977년 10월 서울 남대문, 동대문, 평 화시장 등 상인들이 문을 닫는 사태가 벌어지

박근혜 정부의 “부자감세 서민증세”가 도를

는 등 납세자들의 저항이 거세게 일었던 것이

넘어가는 가운데, 1977년 발생한 부가가치세

다.

파동이 주목된다. 부가가치세 파동은 박정희 유신정권이 1977년 전격적으로 도입한 부가

정치적인 여파도 상당했다. 1978년 10월 야

가치세에 대한 국민적인 저항을 말한다.

당인 신민당은 부가가치세법안 폐지법률안까

24


2015년 예고된 세금폭탄

지 제출하며 정부를 압박하였으며, 연이은 12

니라 부가가치세에 대한 저항, 즉 ‘조세저항’

월의 10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선거운동의

의 표출이었던 것이다.

자유가 매우 제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화당 을 득표율에서 1.7% 앞서며 승리했다. 이 때

2015년 담뱃값 인상에 이어, 주민세, 자동차

문에 부가세제 도입의 주축이었던 김정렴 대

세 등 서민 증세가 이어진다면 박정희 유신독

통령 비서실장, 남덕우 경제부총리, 김용환 재

재를 무너뜨리는 데 일조한 부가가치세 파동

무부 장관은 요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이 다시 재현될 지도 모를 일이다.▒

부가가치세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1979년 10 월 부마항쟁 당시까지 지속되었다. 유신독재 박정희의 퇴진을 요구했던 시위대는 경찰서, 도청, 방송국 등 주요 공공건물에 불을 지르며 정권에 항거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시위대가 방화(放火)한 공공건물 중 세무서도 끼어 있었 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이만섭 전 국회의 장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부마항쟁을 회고하면 서 “부가가치세 철폐하라”라는 구호가 외쳐졌 다고 기술한 바 있다. 시위대가 세무서에 불을 놓은 것은 단순히 정부시설이었기 때문이 아

25


2015년 먹고 살 길이 없다

http://mag-mkyd21.tistory.com/119

먹고살기 힘들어 숨 막힌다

26


먹고살기 힘들어 숨막힌다

“먹고살기 힘들어 숨 막힌다” 경제위기가 장기화 되면서 점차 꿈을 잃어가 흑인에 대한 미국경찰의 잔혹한 폭력에 항의

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한편에서

하는 시위가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는 가

는 경기회복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지만 정

운데 시위 현장에서는 경찰에 의해 목이 졸

작 자신에게는 그 혜택이 전혀 돌아오지 않는

려 죽어가던 피해자가 수차례 내뱉은 비명소

것에 대한 서민들의 좌절감의 표현이기도 하

리인 “숨 막혀(I can‘t breathe)!”가 구호로 외

다.

쳐지고 있다. 이 목소리에는 경찰의 폭력에 항 의하는 차원을 넘어 먹고살기 힘들다는 분노

피케티 열풍과 오바마·아베의 임금인상

가 담겨있다. 2014년 미국 경제는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는

2014년 세계경제를 돌아보면 양극화와 소득

평가가 많았다. 하지만 정작 미국인들은 여전

불평등은 여전히 세계경제의 핵심적 화두 중

히 팍팍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2014년 12월

하나였다. 신자유주의체제 속에서 양극화와

<뉴욕타임즈>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소득불평등이 문제가 아니었던 적이 있었겠냐

64%만이 ‘지금은 가난해도 열심히 일하면 부

만 경제위기가 장기화되고, 경제위기를 벗어

자가 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American

났다는 말들이 일반 서민들의 삶과는 전혀 동

Dream)을 믿는다고 답했다. 지난 20년간 계속

떨어진 다른 세상의 이야기가 되면서 불평등

된 조사 중 가장 낮은 수치다. 경제충격이 극

은 더욱 심각한 문제로 부상했다.

심했던 2009년 초에도 미국인의 72%는 부자 가 될 수 있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었다.

그러면서 우리에겐 생소하고 의아스러운 몇 27


2015년 먹고 살 길이 없다

가지 장면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오바마 미 대

한편 2014년 경제학 서적 중 세계적으로 가장

통령은 2014년 내내 최저임금 인상을 주장하

주목받은 책은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

며 공화당과 대립해 왔다. 언제나 기업의 편에

(Thomas Piketty)의 <21세기 자본>이었다. 주

서 최저임금을 억눌러오던 정부의 모습에 익

류 경제학계에서도 찬사를 보냈다. 피케티는

숙한 우리 눈에는 다소 생소한 장면이었다. 막

이 책에서 돈이 돈을 버는 속도가 경제성장률

연한 ‘변화(change)’라는 모토로 집권해 개혁

보다 항상 높아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세습

적인 이미지를 보여줘야 하는 오바마 대통령

자본주의 시대가 도래 했다고 평가했다, 그 대

은 그렇다 치더라도 극우적 성향의 아베 일본

안으로 최대 80%에 이르는 누진소득세, 글로

총리 까지 임금인상을 이야기해 왔다. 심지어

벌 자본세 등을 통해 불평등을 완화해야 한다

기업들에게 정치적 압력을 행사에 임금인상을

고 이야기 했다. 쉽게 말해 불평등이 너무 심

강요하기 까지 했다. 임금을 올려 내수를 확대

하니 부자들에게 세금을 많이 매기자는 것이

해야 한다는 취지다.

다. 그동안 성장에 초점이 맞춰져 있던 경제계

28


먹고살기 힘들어 숨막힌다

▲‘선진국’에서의 실질임금과 노동생산성 증가 경향 출처: ILO ‘2014/15 세계 임금 보고서’ / 재인용 : 참세상

에서 이런 주장이 인기를 끄는 것 역시 다소

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불평등과 성

의아스런 일이다.

장’이라는 연구 보고서를 통해 빈부격차가 30 년래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평가했다. 보고서

진보진영 입장에서 보면 진보진영이 지금껏

는 현재 소득상위 10%가 하위 10%보다 9.5

무수하게 이야기해왔던 내용들이 세삼 지금

배를 더 번다며 이는 1980년대 기록한 7배

에 와서 주목받는 이유가 무엇인지 따져볼 필

보다 높아진 수준”이라고 말했다. 국제노동기

요가 있다.

구(ILO)는 글로벌 임금보고서에 따르면 2013 년 소위 ‘선진국’의 평균 실질 임금 상승률이

우선 불평등이 그만큼 심각해 졌다는 것을 의

0.2%에 불과했다. 2012년엔 0.1% 상승하는

미한다. 지금과 같이 불평등이 심하고 저소득

데 그쳤다. 1980년대 이후 임금은 생산성보다

층이 벼랑 끝으로 내몰려서는 현 체제와 시스

더디게 증가해왔다. 노동자가 받는 성장의 과

템을 유지하기 어려운 지경에 와 있다는 것이

실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29


2015년 먹고 살 길이 없다

다음으로 현재 자본주의 시스템이 현 위기를

지금까지 보수진영에서는 분배를 하면 성장

돌파할 수 있는 뾰족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

에 걸림돌이 된다는 이야기를 해 왔다. 대표

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본의 목적은 최대한 큰

적인 것이 최저임금을 올리면 기업들이 파산

이윤을 얻는 것이다. 임금인상이나 소득불평

하거나 힘들어 질 것이란 논리다. 하지만 분

등을 개선하는 문제는 자본의 이윤 중 일부를

배와 성장의 문제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

노동자들(혹은 서민들)에게 나눠 줘야 한다는

는 것이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의 입장에서는 최선책이

1985~2005년 악화된 소득 불평등으로 인해

아니다. 소위 석유파동이라고 알려진 1970년

이후 1990~2010년 국내총생산(GDP) 성장

대의 세계공황에 대처하기 위해 자본은 신자

률이 최대 10%포인트 떨어졌다고 평가했다.

유주의 시스템을 도입해 복지시스템을 해체하

분배문제의 개선이 경제에 기여할 수 있다는

고 노동의 유연성을 확대했다. 새로운 상품시

것은 이론적으로도 근거가 있는 이야기다.

장을 만들어 이윤을 더 많이 생기도록 하는 것 이 자본의 고유한 위기대처 방식이었다.

첫째, 부자의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재분배하 면 소비가 늘어나 제품이 잘 팔리고 그에 따라

불평등의 경제학

생산이 증대할 수 있다. 한계소비성향이란 것 이 있는데, 새로 늘어난 소득 중 얼마를 소비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불평등을 개선해야 한다

하느냐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한계소비성향

는 목소리가 이 곳 저 곳에서 나오고 있는 것

이 0.6이라는 것은 소득이 1원 늘면 0.6원을

이다. 그렇다면 불평등의 개선은 경제에 어떤

소비한다는 것이다. 이 한계소비성향은 저소

영향을 주게 될까?

득층일수록 크다. 저소득층일수록 돈을 써야

30


먹고살기 힘들어 숨막힌다

▲소득분위별 한계소비성향 / 자료 : 국회 예산정책처 ‘2009년 세제개편안 분석’ ※ 1분위란 소득 하위 10%를 10분위란 소득 상위 10%를 의미

할 곳이 많다. 반면 부자들은 이미 풍족한 생

셋째, 분배가 균등해질수록 범죄나 사회적 혼

활을 누리고 있을 가능성이 커 새로 벌어들인

란, 정치적 불안 등이 적어진다. 이런 범죄 등

돈을 저축하는 경향이 크다. 부자의 돈을 가난

의 감소는 사회전체적인 이득을 가져다주는

한 사람들에게 이전하면 사회전체적인 소비

부분이다. 기업의 입장에서도 사회적으로 안

가 늘어난다.

정이 되어야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

둘째, 주류경제학에서 중시하는 ‘효용’의 관점

살펴보았듯 분배문제의 개선은 경제에 긍정적

에서도 분배개선은 필요하다. 목이 마른 상태

인 작용을 한다. 성장과 분배를 대립하는 것처

에서 물을 1잔 먹을 때 사람들이 느끼는 효용

럼 인식하는 시각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 물

은 2잔째 물을 마실 때의 효용보다 크다. 물을

론 분배문제의 개선이 현 시스템에서 장기적

계속해서 먹는다면 그 효용은 계속 감소한다.

으로 지속가능한지, 현재 위기의 근본적 해법

돈도 마찬가지다. 부자에게 1만원은 종잇조각

이 될지에 대해서는 다른 측면에서의 검토가

에 불과하지만 노숙인에게 1만원은 하루의 생

필요하다. 자본이 근본적으로 이윤을 확보하

존이 달려있는 문제다. 부자의 1만원을 노숙

기가 어려워지는 상황이라면 인금인상 등 자

인에게 이전하면, 즉 분배가 균등해 질수록 사

본의 양보를 통해 성장 동력을 만든다는 것에

회전체적인 효용은 커지게 된다.

는 한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

31


신은미 황선 토크콘서트

http://mag-mkyd21.tistory.com/107

문제아줌마들의 뒷이야기 최근 토크콘서트 행사로 '종북마녀사냥'에 사제폭탄테러까지 당한 신은미, 황선, 두 주인공 을 만나 뒷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32


문제아줌마들의 뒷이야기

해외동포 북한 여행 문화의 개척자

쇼 같은 것을 통해서 풀어 낸 예가 많이 있어 요. 저 같은 경우도 방북 경험이 있기에 함께

문경환(이하 문) : 먼저 토크콘서트 행사 관련

하는 게 어떻겠나, 이런 제안을 받은 거죠.

해서 질문을 드리지요. 어떤 취지로 이번 콘서 트에 출연하게 됐나요?

신은미(이하 신) : 예전 같으면 남쪽에 계신 많은 분들이 북한에 가서 현실을 보고 오셨는

황선(이하 황) : 지난 여름 인천아시안게임에

데 지금같이 남북관계가 경색된 상황에서는

북한 선수단과 응원단이 참가하기로 결정을

그렇지 않잖아요? 그럴 때는 해외동포로서,

내린 바가 있고, 그래서 남북관계가 급진전될

해외동포가 남북을 오가기 수월하니까 그런

수 있겠다 이렇게 판단을 했습니다. 그 분위기

취지에서 북한에 가서는 남한의 동포들 소식

를 반영해서 최근에 북한에 다녀오신 분을 통

을 전하고 남한에 와서는 북한의 동포들 소식

해서 북한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보면 서로에

을 전하는 나름 어떤 사명감, 슬픈 특권이라고

대한 동질감을 더 확인하고 통일에 대한 열망

도 할 수 있는데, 그런 것을 느끼고 있었어요.

을 더 북돋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판단에서

그러다보니 방북 후에 글도 쓰게 됐고.

기획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북한에 가기 전에는 통일에 대한 관심도

그리고 최근에 5.24조치를 통해서 남북관계,

없었는데 갔다 와서 북한에 대한 연재를 하다

민간교류도 끊겼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해외

보니까 남쪽에서 많은 분들이 의외로 통일에

동포들이 남과 북 여행을 비교적 자유롭게 다

대한 열망이 대단하시더라고요. 제 글에 들어

니면서 다녀오신 경험담을 최근에 책이라든지

오시는 분들이 첫 회부터 몇 십만 씩 들어오

언론이라든지 아니면 방송, 아니면 이런 토크

시는걸 보고 알았습니다.

33


신은미 황선 토크콘서트

그래서 이분들에게 내가 최근에 보고 느낀 북

엔 북한인권결의안에 맞춰서 콘서트를 진행했

녘동포들의 소식을 언제든지 전해야겠다 그런

다는 의심을 해서요. 사실 미국 뉴욕 시각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올해 4월에도 6.15남측위

11월 18일에 결의안을 통과시킬지 누가 알았

원회에서 초청을 해서 미국에 계신 오인동 박

겠습니까. 따지려면 유엔에게 왜 하필 토크콘

사님하고 전국 20개 도시를 돌았습니다. 그러

서트 하는 날에 맞춰 결의안을 통과시켰냐고

던 찰나에 이번에 주최 측에서 저에게 아시안

따져야 할 것 같은데요. (웃음)

게임에 맞춰서 통일콘서트를 했으면 좋겠다는

그런데 해외동포들이 북한에 자주 방문합니

제의를 받았었어요.

까?

그런데 제가 아시안게임 때는 올 수가 없는 상황이었고, 가족 모임이 있어서 11월 말경에

신 : 해외동포들은 남한국적을 제외하고 모든

한국에 갈 계획이라고 했더니 주최 측에서 제

나라 사람들이 북한을 갈 수 있거든요.

가 가는 시간에 맞춰서 배려를 해주신 겁니다.

그러니까 제일 많이 간 분들은 이산가족인데

그렇게 되서 11월 19일 토크콘서트를 하게

몇십 년 전부터 가고 계셨고요. 그리고 남북관

됐습니다. 북한에 다녀온 얘기를 듣고 싶어 하

계가 좋았을 때 해외동포들도 자연스럽게 북

는 분들이 있다면 미국이건 남한이건 전하는

한에 가서 사업도 하고 민간교류 차원, 친선

것이 나름 해외동포로서의 사명감이라서 기꺼

목적으로 가는 경우가 많이 있었더라고요.

이 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온 거죠.

그런데 관광을 목적으로 남한출신의 재미동포 가 관광회사를 통해서 간 것은 우리가 처음이

문 : 시기 문제가 민감한 게 종편에서 워낙 유 34

라고 합니다. 북한에서 우리 안내원들이 깜짝


문제아줌마들의 뒷이야기

놀라면서 북한 관광가자 해서 온 적은 없었다

한두 번 한 콘서트도 아닌데 왜

는 거죠. 그래서인지 참 반갑게 맞아줬어요. 문 : 혹시 이번 콘서트에 출연을 결정할 때 걱 문 : 요즘은 해외동포들이 여행으로 많이 가

정을 한다거나 어려움이 있거나 했었나요?

는 편인가요? 신 : 저는 전혀 걱정을 하지 않았어요. 왜냐하 신 : 사실 예전에도 갔다 오신 분들이 있는데

면 제가 2011년 10월 방북하고 여러 차례 오

저처럼 방북기를 쓰지 않아서 안 알려졌을 수

마이뉴스를 통해서 글도 쓰고, 재미동포 신문

도 있겠죠. 그런데 일단 제가 방북기 연재도

에도 기고하고, 강연도 하고, 한국에 올 때마

하고 책도 내고 하니까 해외동포 사회에서도

다 초청받아서 강연도 하고, TV방송에도 출연

“어머, 북한도 갈 수 있는 곳이구나”하고 관

하고 했습니다. 다들 기쁜 마음으로 했고 정말

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게다가 재미동포가 만

분위기가 너무 좋은 거예요.

든 북한 여행 사이트, 여행에이전트도 생겨서

또 우수문학도서라는 상도 주고, 통일언론상

여기를 통해 가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라는 상도 주고. 또 박근혜 대통령이 신년에 35


신은미 황선 토크콘서트

는 통일은 대박이다 하고 위원회도 만들면서

그때 한 얘기와 지금 콘서트에서 한 얘기가

통일의 분위기를 띄웠죠. 저는 이게 문제가 되

똑같습니다. 그때 신은미나 지금 신은미나 본

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습니다.

질이 바뀌지 않은 신은미입니다. 왜 같은 얘기

예전에 통일부에서 저를 데려다가 다큐멘터리

를 황선 씨와 했더니 ‘종북콘서트’다, 이렇게

를 찍었습니다. 그때 통일부에서 “아, 선생님

몰고 가는지 저는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에요.

의 이야기는 통일을 위해서 정말 필요한 이야

이해가 잘 안됩니다. 종편이란 채널이 정부 위

기다”라며 좋아했고 몇 시간에 걸쳐 다큐멘터

에 군림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리를 찍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통일부에서 “선생님이 그런 분인지

황 : 저도 콘서트 제안 받고 아무런 망설일 이

몰랐습니다”라고 연락하더니 다큐멘터리를

유가 없었습니다. 왜냐면 방북을 주제로 한 토

통일부 홈페이지에서 삭제했습니다.

크콘서트가 처음이 아니에요. 일본에 계시는

36


문제아줌마들의 뒷이야기

여류 작가님이신 유미리 선생님이랑 똑같은

어떤 심정이세요?

자리(조계사)에서 똑같은 토크콘서트를 했습 니다. 유미리 작가님 같은 경우에도 책을 내셨

황 : 워낙 종편의 설립 목적이 그렇잖아요. 이

구요, 방송이도 소개가 됐고. 정말 인기 있는

게 북한 방송이냐 이런 이야기를 들을 정도

작가시죠. 하버드대 오인동 박사님 같은 경우

북한 관련한 보도, 특히 적대감과 이질감 이런

에도 작년에 서울에 오셨을 때 저랑 토크콘서

것들을 부각시키는 방향에서의 보도에 집중하

트를 했거든요.

고 있거든요. 전부터 여러 차례 당하면서도 원 래 그런 방송이거니 이런 생각을 했는데 이번

신 : 참, 올 4월에 제가 전국순회 토크콘서트

에 해외동포까지 종북으로 몰고 가는 걸 보면

할 때도 황선 대표님께서 같은 장소에서 사회

서 한국사회의 현 수준이랄까요, 이런 것들을

를 봐주셨어요.

적나라하게 마주하는 것 같아 굉장히 씁쓸합 니다. 슬프고.

황 : 조계사에서 콘서트를 많이 했어요. 그래

마침 이 대담을 하고 있는 오늘이 12월 1일

서 조계사가 종북 장소로 몰리나요? (웃음)

국가보안법 제정일이죠. 한시적 특별법으로 제정된 국가보안법이 48년부터 오늘 2014

신 : 모든 것이 분위기가 좋았고 아무런 문제

년 12월 1일까지 형법과 헌법 위에서 존재하

가 없었는데 왜 이번에 유독 이러는지 정말

고 있고 우리 언론을 장악하고 지배하고 있는

이해가 안갑니다.

이런 현실을 보는 게 굉장히 가슴이 아픕니 다.▒

문 : 지금 종편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계신데 37


미국, 어디까지 봐봤니?

쟁 논

는 지 어 벌 에 간 미

전 버 이 사

ry.

sto 1.ti

2 kyd m g-

/ma

:/ http

38

26

/1 com


북미간에 벌어지는 사이버전 논쟁

북한과 미국간 온라인 대결에 대해 떠들썩합

른 악성 사이버 활동 사이에 상당히 많은 겹침

니다. 소니픽쳐스가 제작한 영화 “인터뷰”가

이 있다는 사실을 관찰했”으며, “소니영화사

북한지도자에 대한 음해를 그린 영화이지요.

공격에 사용된 도구들은 작년 3월 남한 은행

북한이 이 영화 개봉에 대해 비판을 하고나

들과 언론매체들에 대한 사이버 공격과 유사

서 까마귀날자 배떨어진 격일까요? 소니픽쳐

성이 있는데, 당시 공격은 북한에 의해 이뤄졌

스가 컴퓨터 해킹을 당했다는 보도가 이어지

다”고 했습니다.

고, 급기야 오바마 대통령은 컴퓨터 해킹의 진 원지로 북한을 지목합니다.

북한은 12월 21일, 국방위원회 정책국 성명을 통해 “이번 사이버전이 마치 우리의 소행인 듯

오바마 대통령은 12월 19일(현지시각) “FBI(

이 터무니없는 모략나발을 불어대고 있다”며

연방수사국)이 소니 해킹에ㅁ 북한이 관여했

“모든 근거라는 것이 분명치 못한 과학기술적

다고 확인했다”며 “장소와 시기, 방법을 선택

자료와 꾸며낸 요설에 바탕을 두었다는 것”,

해 비례적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누구한테 얻어맞고 하늘에 대고 주먹질하는

<통일뉴스>에 따르면, 이에 앞서 FBI는 성명을

격”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자신들과 무관하다

통해 “이번 공격에 쓰인 데이터 삭제 맬웨어를

는 입장을 재차 강조한 것입니다.

분석한 결과, 북한측 행위자들이 이전에 개발 한 것으로 FBI가 알고 있는 다른 맬웨어에 대

동시에 북한은 “사이버전 공간을 포함한 모

한 연관이 드러났다”며 특정 코드 라인, 암호

든 전쟁공간에서 미국과 대결할 만단의 준비

화 알고리즘, 데이터 삭제 방법, 침해를 당한

를 다 갖춘 우리 군대와 인민”이라며 “우리의

네트워크 등의 유사성을 예로 들었습니다. 또

초강경대응전은 오바마가 선포한 비례성대응

“이번 공격에 쓰인 인프라스트럭처와, 미국 정

을 초월하여 백악관과 펜타곤, 테러의 본거지

부가 북한에 직접적으로 연관시킨 바 있는 다

인 미국본토 전체를 겨냥하여 과감히 벌어지 39


미국, 어디까지 봐봤니?

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이 북한 인터넷 다운을 미국의 소행으로 ‘추 정’합니다.

이제 온라인 상의 대결이 시작된 듯합니다. <통일뉴스>는 <미국의소리>(VOA)가 12월 23

과연 북미간 사이버전은 시작된 것일까요?

일, 미국 인터넷 분석업체인 ‘딘 연구소’(Dyn Research) 발표를 인용해 “북한의 인터넷이

사이버전에 대해 알아봅시다. 사이버전이란

완전히 다운됐으며, 이는 외부의 공격에 의한

인터넷공간을 이용해 적대세력에게 물질경제

것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다른 인터

적 피해를 입히는 모든 행위를 통칭합니다. 대

넷 업체인 ‘클라우드플레어’도 북한의 여러 인

표적으로 컴퓨터 해킹이나 디도스 테러로 해

터넷 연결이 완전히 끊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당 홈페이지를 마비시키거나 접속차단시키는

밝혔습니다.

방법이 있습니다.

12월 19일에 오바마 대통령이 비례성의 대응

지금까지 미국이 주력한 북한에 대한 저강도

을 천명하고, 12월 21일에 북한이 이를 전면

전쟁은 인권문제 제기, 삐라살포, 유언비어 유

배격하며 “비례성을 뛰어넘는 초강경대응”을

포 등의 심리전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번

경고한 이후 12월 23일, 북한 인터넷이 다운

북한 인터넷 서버가 다운된 것이 미국의 소행

되었습니다.

이라면 미국은 심리전에서 나아가 실제 물질 경제적 피해를 입힌 사이버공격을 감행한 것

물론 소니픽쳐스의 해킹, 이후 북한 인터넷의

이므로 교전의 수위가 더 올라가게 됩니다.

해킹이 각각 북한과 미국의 소행이라 단정하 기엔 무리입니다. FBI조차도 북한의 소행으로

사이버전은 민간의 온라인 서버를 대상으로

‘추정’하는 상황이지요. 마찬가지로 많은 이들

벌어진다는 점에서 전자전과 다릅니다. 전자

40


북미간에 벌어지는 사이버전 논쟁

전(electronic warfare, EW)은 상대방의 전자

고 북한의 온라인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인트

기 무기나 장비를 통제, 또는 무력화시키는 공

라넷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터넷 사이버 공

격이나 방해로 군사무기에 대한 전자기파 공

격이 큰 효과를 발휘하기 어려운 구조입니다.

격을 뜻합니다. 결국 사이버전은 전자전보다

반면 미국은 인터넷에 대해 무한정한 수준으

넓은 의미이지만 종래의 저강도전쟁보다 분명

로 열려있습니다.

수위가 올라간 상황입니다. 그런데 미국이 자기가 손해가 막심할 수밖에 사이버전은 종래의 심리전보다 공격수위가 높

없는 사이버전에 나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는 점에서, 북한의 대응도 종래의 심리전대

사이버 상에서 북한에게 공격당했다는 것을

응보다 수위가 높아질 것이라 추정할 수 있습

명분으로 실제 군사적 분쟁을 일으키려는 것

니다. 지금까지 북한은 탈북단체의 전단살포

은 아닌지 심히 우려됩니다.

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지속하다가 지난 10 월 10일에는 군사분계선을 넘은 전단을 조준

손자병법 시계편에 “이익으로 유인하고 혼란

해 실제 사격까지 하였습니다.

할 때 취득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이버 전은 인터넷이 개방되지 않은 북한에게 막대

북한은 오바마 대통령의 비례성 대응 방침에

한 이익이 예상되지요. 공격하면 휘청거릴 미

대해 “초강경대응”을 선언하였습니다. 경우에

국 사이트가 도처에 있지 않겠습니까? 해킹

따라 “전단격파사격”을 뛰어넘는 대응이 우려

논란 자체가 미국의 대북강경정책 명분쌓기가

됩니다.

아닐런지요? ▒

그런 점에서 이번 북미간 사이버 공격에 대한 배후는 철저히 밝혀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 41


미국, 어디까지 봐봤니?

http://mag-mkyd21.tistory.com/122

[연재] 동아시아 역사 ②

미 해군사관학교에 전시된 조선 수군의 깃발 :: 1871년 신미양요

19세기 말은 조선에게 시련의 시기였습니다. 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지 두 달도 되지 않아

신미양요 직전 조선에 파견된 두 척의 미국 군함

프랑스 군대의 침략(병인양요)을 받았고, 거듭 출몰하는 이양선으로 민심은 점점 흉흉해져가

미국은 병인양요에 참가했던 프랑스 군대로부

고 있었습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충격이

터 제네럴 셔먼호 소식을 듣고, 1866년 말 진

채 가시기도 전에 일어난 병인양요는 서양의

상조사를 위해 군함 와츄세트호를 파견합니

신식군대가 조선에 상륙해 영토를 점령할 수

다. 이번에는 민간 선박이 아니라 아시아 함

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프랑스뿐만

대 소속의 정규 군함이 조선에 들어오게 된

아니라 미국도 셔먼호 사건의 진상 조사를 구

것입니다. 와츄세트호는 후에 조미수호통상조

실로 삼아 호시탐탐 조선을 침략할 기회를 엿

약을 맺을 때 미국의 대표로 활약하는 슈펠트

보고 있었습니다.

가 이끄는 군함으로, 혹시 있을지 모를 셔먼

42


동아시아 역사칼럼

▲신미양요 당시 모노카시호 선상의 미군

호 사건의 생존자를 구하겠다는 명목으로 조

구출’활동을 벌입니다. 조선 측은 지속적으로

선에 내항합니다. 그는 조선 조정의 허가 없이

셔먼호 사건의 진상에 대해 설명하려고 했으

무단으로 황해도 인근과 거문도 일대를 탐문

나, 미국 측은 끝내 대동강 진입을 시도하다

하고는 별다를 성과 없이 본국으로 돌아갑니

총격을 받고 물러납니다.

다. 겨울이라 강변이 얼어붙을까 우려했기 때

이와 같은 사건들은 본격적으로 벌어질 한미

문입니다.

간 분쟁의 예고편이었던 셈입니다. 미국은 와

와츄세트호가 내항한 지 1년이 조금 지난

츄세트호와 셰난도어호를 보내고도 제네럴 셔

1868년 초, 미국 군함 셰난도어호가 다시 내

먼호 생존자에 대한 어떤 정보도 얻지 못하고,

항했습니다. 셰난도어호는 셔먼호 선원들이

오히려 개항에 대한 조선 정부의 완고한 입장

평양에 억류되어 있다는 잘못된 소식을 듣고,

만을 확인했습니다. 이 즈음 미국은 영국이나

근 40일 간이나 조선 근해에 체류하며 선원 ‘

독일에 앞서 어떻게든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

43


미국, 어디까지 봐봤니?

고 싶어 몸이 달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차례

1871년 음력 1월, 로우 공사는 중국을 통해

확인한 바와 같이 완고하기 그지없는 조선 정

조선 국왕 앞으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제네럴

부와 협상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무력시위가

셔먼호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묻고, 20여 년 전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미국 선원 억류사건을 계기로 일본과 조약을 맺었듯이 조선과도 그와 같은 조약을 체결하

가공(可恐)스러운 조선 원정 계획

겠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조선과 화목하기를 원하며, 만약 미

신미양요는 조선과 미국 군함 와츄세트호 사

국 측의 제의를 거절한다면 무력 사용도 불사

이에 총격이 오간 지 3년 만에 일어난 사건

할 것임을 암시했습니다. 그러면서 2, 3개월

입니다. 미국은 조선에 대한 무력시위 원정작

안에 자신들이 입경할 것임을 예고했습니다.

전과 더불어 협상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매

조선 정부는 미국의 이와 같은 협박성 제의

뉴얼까지 만들어 놓고 조선 원정에 나섭니다.

에 대해 정면으로 반론을 펼칩니다. 조선 정부

1870년 미국의 신임 국무장관 피쉬는 조선 원

는 셔먼호 사건 직전에 조난된 미국 선박 서프

정계획과 관련하여 해군성의 협조를 구하면서

라이즈호의 선원들을 잘 대접해 보낸 사례를

“이 원정은 현지 당국에 인상을 주기에 충분

들며, 조선은 본래 조난된 외국 선박을 도와주

할 만큼 가공(可恐)스럽기를 바란다”고 했습

는 전통이 있는데 셔먼호가 격침된 데에는 다

니다. 피쉬는 또, 중국 베이징 주재 공사에게

까닭이 있는 것이라고 반박합니다. 또 미국 측

조선 정부와 협상할 때 1854년 미일화친조약

의 화친 제의가 단순히 양국의 우호를 증진시

및 1858년의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참고할 것

키려는 목적이 아니라 분명 통상을 하자는 요

과 사전에 중국 정부의 협조를 구할 것을 지

구가 숨어 있는 것이라고 보고, 그런 의도라면

시했습니다.

따로 논의할 필요가 없으니 오지 말라고 못 박

44


동아시아 역사칼럼

았습니다.

전형이었습니다.

사실 미국에게 있어서 조선 측의 답변은 중요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로우 공사의 서신은 어 차피 무력시위를 염두에 두고 사전에 명분을

조선의 방어선, 강화도에서 벌어진 참담 한 전투

쌓기 위한 용도에 불과했으니까요. 서신에서 예고했듯이, 미국은 그해 4월 함포로 완전 무

함대의 규모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조

장한 모노카시호 등 5척의 함선에 1000여 명

선 정부는 4월 14일 강화도의 방어를 위해 어

의 전투병을 태우고 서해상에 나타납니다. 서

재연을 진중무군으로 임명하고 중앙 군영의

해에 이양선이 나타난 것을 알게 된 조선 정부

병력을 대거 증파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강

는 문정관을 보내 미국 측의 의도를 알아보고

화해협의 입구인 손돌목에서 전투가 벌어지게

자 했습니다. 미국은 배에 오른 조선 관원들에

됩니다. 강화해협은 한강과 맞닿아있는 수역

게 침략할 의향이 없음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으로 수도를 지키는 전략적인 요충지였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미국의 해상 방문은 불법

그곳을 미국 모노카시호가 멋대로 탐측하자

적인 행위였습니다.

조선 수군이 일제히 사격을 가한 것입니다. 그

미국은 조선 정부가 통상 거부 정책을 펼친다

러나 대포의 사거리 차이로 인해 미국 군함은

는 것을 뻔히 알고서도, 공공연하게 한강을 거

경미한 피해를 입은 반면, 손돌목 인근 덕포진

슬러 올라가려는 자신들의 계획을 밝혔고 수

의 조선 포군이 한명 전사하게 됩니다.

로 탐측에 협조하라고 통보했으며 거부할 경

조선은 이 첫 교전에서 미국 군함이 놀라 달아

우 무력을 사용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이런

났다면서 나름대로 선전했다고 자평했습니다.

태도는 19세기 제국주의 열강들이 약소국들

한편 미국측은 손돌목에서 물러난 이후 보복

을 개항시키기 위한 ‘포함외교(砲艦外交)’의

공격을 감행하지 않으면 패퇴한 것으로 간주 45


미국, 어디까지 봐봤니?

◀미군에 점령당한 초지진

될 것을 우려했습니다. 그러나 병인양요 이래

험이 풍부한 베테랑이었습니다. 로저스가 이

보강된 강화도의 방어태세 역시 만만치는 않

끄는 미 해병대는 서해의 조수차를 피하기 위

았습니다. 미군 함대를 이끌던 로저스 제독은

해 24시간 안에 작전을 끝내고 본대로 돌아올

강화도 방비가 강화된 상태에서 작전준비 없

계획이었습니다.

이 진을 점령하거나 상륙작전을 펼치기는 힘 들다고 판단, 10여 일 간 대기한 후 공격받은

그러나 베테랑이라 자처하던 미군이 예상하지

진지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못한 변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강화도의 갯벌

이 10여 일간 조선과 미국은 몇 차례 더 편지

입니다. 미군 포병대는 서해의 끈적한 갯벌에

를 주고받았으나, 서로의 입장을 좁힐 수는 없

빠진 대포를 빼내기 위해 진땀을 흘려야 했습

었습니다. 급기야 미국은 4월 23일 초지진을

니다. 서해의 갯벌은 수백년 전에도 몽골의 침

기습 점령합니다. 조선 측은 서로 편지를 주고

입으로부터 강화도를 지켜주었던 강화도의 보

받던 중에 일어난 일이라 제대로 방비 태세를

이지 않는 성벽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

갖추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로저스 제독은 대

도 갯벌이 미군의 발목을 잡아 시간을 벌어주

멕시코 전쟁, 남북전쟁 등에 참전했던 실전경

었음에도 불구하고 화기의 열세로 조선은 결

46


동아시아 역사칼럼

국 초지진을 하루 만에 내주게 됩니다. 다음날 조선 정부가 병력을 증파하고 있는 동안 미군 은 다시 초지진 북쪽의 덕진진을 기습하여 손 쉽게 점령합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보루이자 조선군의 본부격 인 광성보만 남은 상태였습니다. 미군 측 자료 에 따르면 해병대가 광성보 안으로 돌격 준비 를 할 때, 조선군의 비장한 군가가 울려퍼졌다 고 합니다. 현저한 화력차에도 불구하고 조선

▲처참하게 파괴된 광성보

군들은 투혼을 불사르고 있었습니다. 광성보 뒤편 산비탈에 올려진 미군의 포들이 불을 뿜 었고, 해상에서의 함포사격이 광성보를 뒤덮

물면서 방화와 파괴·약탈을 일삼았습니다.

었습니다. 집중포화가 끝나고 미 해병대와 보

그리고 다음날인 25일 광성보의 미군들은 철

병들이 광성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수하여 정박지로 돌아갑니다. 상륙작전의 목

집중포화에도 살아남은 조선의 병사들은 화승

적이 점령에 있었던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총과 화살로 끝까지 저항을 멈추지 않았습니

정박하고 있던 함선들이 격류와 조수차로 인

다. 총탄과 화살이 떨어지면 돌을 던지고, 돌

해 손상을 입어 깊은 바다로 나아가야했기 때

을 던질 힘도 없으면 흙이라도 미군의 얼굴에

문입니다. 이후로도 미국은 조선과 서신을 주

집어 던졌습니다. 광성보를 지키고 있던 조선

고받으며 지속적으로 통상을 요구했지만, 별

군의 방어사령관 어재연 장군도 미군의 저격

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채 한 달가량 더 머무

에 쓰러지고 맙니다.

르다 본국으로 철수하게 됩니다.

광성진을 점령한 미군들은 그곳에 하루 더 머

광성보 전투는 결과만 놓고 보면 매우 참담한 47


미국, 어디까지 봐봤니?

했다’ 그러나 이처럼 큰 희생을 치렀음에도 불구하 고, 조선 조정은 미국의 거듭된 개항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미국은 또 다시 무력으로 위협 했지만, 조선은 “교전하러 온다면 우리는 전 투로써 맞이할 뿐”이라며 단호하게 대응했습 ▲미군에 빼앗긴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

니다. 원정의 책임자였던 로우 공사는 조선의 단호한 태도에 절망감을 토로했습니다. 조선 에 더 이상 머물러 봐야 소용이 없으며, 조선

전투였습니다. 조선군은 사령관 어재연 장군 의 전사를 비롯해 250명 이상이 전사했으며, 450문의 대포, 수백정의 화승총, 깃발 50개 를 빼앗겼습니다. 특히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 (帥字旗:장수가 있음을 알리는 깃발)는 미 해 군의 영광스러운 전리품으로 미국해군사관학 교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반면 미군은 3명 전 사, 13명 부상이라는 상대적으로 경미한 피해 를 입었습니다. ‘물리전에서 이기고 정신전에서 패배 48

정부는 애초부터 협상을 일절 거부하기로 결 정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 는 이같은 무력시위를 다른 나라에 행사했더 라면 어떤 나라의 정부에게도 심각한 영향을 끼쳤을 터인데, 조선정부에게는 거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고 실토했습니다. 초지진과 덕 진진·광성진에 대한 공격작전은 중국을 개 항시킨 톈진 작전보다 더 의의가 있는 작전이 었음에도, 외세에 대한 조선의 도전적 태도는 전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로우의 이같은 좌절감에서 엿볼 수 있듯이,


동아시아 역사칼럼

조선은 어찌되었든 미국의 침공을 막아낸 것

가 서리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입니다. 특히 전력의 완연한 열세에도 불구하

우리는 조선의 척화정책을 ‘앞뒤 안통하고 꽉

고 조선 수비군이 보여준 강인한 의지와 정신

막힌 보수주의’라고 치부하고 있지만, 이것은

력은 상대방인 미군조차 놀랄 지경이었습니

한편으로 통상을 하자며 대포와 군함을 끌고

다. 패배가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도 조선 수비

남의 나라 영해에 불법으로 침입한 제국주의

군은 대열을 유지하고 있었고, 탈영이나 도망

자들의 논리에 휩쓸리기 쉬운 태도입니다. 제

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포격으로 초토화된 광

국주의자들은 ‘평화’ 교역을 위해 영해를 탐측

성보에서 이들이 보여준 저항정신은 대체 어

하겠다고 하다가, 며칠 뒤에는 도성으로 가겠

디서 나온 것일까요. 포로가 된 조선군 중에는

다, 그 뒤에는 국왕을 만나겠다, 그 다음에는

자살을 시도하는 이도 있었고, 미군의 총검에

총을 들이밀며 불평등 조약을 맺었습니다. 제

목을 가져다 대며 죽이라고 대드는 이도 많았

국주의자들의 평화란 이처럼 위장된 평화입니

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들을 보고 미군은 ‘물

다. 조선의 수비병들은 이런 위장된 평화논리

리전에서 이기고 정신전에서 패배했다’는 평

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점에서 목숨으로서

가를 내렸다고 합니다.

진정한 평화를 지켰던 것 아닐까요.▒

지금도 강화도 광성보에는 신미양요 당시 미 국 해병대에 맞서 용맹하게 싸운 어재연 장군

참고문헌

과 수백 명의 이름 없는 전사들의 묘지가 남

김명호, 『초기 한미관계의 재조명 - 셔먼호 사건에

아있습니다. 이들은 풍부한 전투경험을 자랑

서 신미양요까지-』, 역사비평사, 2005 김원모, 『근대한미관계사』, 철학과현실사,1992

하며 승승장구하던 최정예의 미 해병대를 이

미국 국무부 공보국 역사정책 연구과, 한철호 역, 『

틀 만에 퇴각시킨 이름없는 영웅들이었습니

미국의 대한정책 1834~1950』, 한림대학교 아시아

다. 광성보뿐만 아니라 강화도의 5진 7보 53

문화연구소, 1998

돈대마다 외세에 저항하다 흘린 민초들의 피 49


민권소식

스·승·을·만·나·다

정·면·돌·파 부산민권연대

김인규 대표님

※ 인터뷰는 2014년 12월 5일 부산에서 진행하였습니다.

http://mag-mkyd21.tistory.com/118 1999년 굴욕적인 한일어업협정 소식에 어민총련 결성. 정면돌파! 2000년 온 국민 중 유일하게 독도에서 새천년 해맞이. 정면돌파!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북녘선수단 환영 해상환영식 정면돌파! 그리고 현재 부산민권연대 대표를 역임하시며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왠만한 젊은 청년들보다 왕성하게 활동을 이어가며 정국을 정·면·돌·파 하고 계신 김인규 대표님. 인터뷰는 그 어느때보다 뚝심있고 패기넘치는 사연들과 다짐으로 가득찼다.

50


스승을 만나다

‘그냥 있을 수 없어서’ 걷게 된 운동의 길 본 기자(이하 본) : 대표님께서는 운동을 시작 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김인규(이하 김) : 20대 초반에는 유신체제 시 절이었으니까 그때 구호는 딱 하나였거든. “ 언론자유 유신철폐”. 그 구호만 가지고 지금으로서 보면 뭐 저런 운동도 있나 싶은 참. 운동장 도는 게 전부였 으니까. 스크럼을 이래 짜가지고 운동장 도는 완전 바보들의 행진 영화장면 비슷하게. 그게 운동의 첫 경험이지. 유신시절에는 운동을 해야겠다는 마음이라기 보다 동아일보에 광고탄압이 있었거든. 기업

로 이렇게 계속 냈거든. 그럴 때 뭐 학생들이 그냥 있을 수는 없었고, 그때는 인제 학교 정문 앞에 탱크 두 대는 뭐 고정적으로 박아놨을 때니까. 그때는 완전 웅 변으로 학우들을 순간적으로 설득해서 데리 고 나가는 그런 시절이었으니까. 그러다가 뭐 쭉 텀이 있다가 지금 인제 제대로 된 운동다운 운동하는 거는 아마 2000년 즈음일텐데. 범민 련 부산연합 서상권 의장님에게 감화를 굉장 히 많이 받았지. 또, 실천연대 간부들의 그 겸 손성과 헌신성. 인간적인 품성에 혹 반했고. (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공동대표를 역임하신 바 있다.)

들에게 압력을 여가지고 광고를 몬 싣게 했거

본 : 네 알겠습니다. 음 현재 5.24 조치 이후

든. 그럼 언론사가 돈이 없어 신문을 출간 못

에 남북관계가 완전히 단절이 된 상황인데요.

할 거 아니냐. 그때는 동아일보가 민족정론지

대표님께서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때 누구

로서 굴지의 신문이었으니까. 그때 동아일보

도 할 수 없었던 해상 환영식을 하셨다는데 그

가 그 유신정권에 굴하지 않고 광고란을 백지

와 관련한 얘기가 듣고 싶습니다.

51


민권소식

어선 100척 동원한 <만경봉호 해상환영 식> “나는 무조건 나간다!”

그런 부제를 달았다고. 막 그날부터 단 하루도 안 빠지고 방송3사에 내가 다 나가지거든. 그 때로서는 그게 쇼킹한 뉴스였다고.

김 : 야 이거 이야기 다 할라면은 한달 말로 해 도 다 몬할텐데. 하하.

근데 뭣도 모르고 붕 뜨는 순간에 어이구야.

그니까 2002년도에 아시안게임을 부산서 하

부산에 당시 어민 조직들이 다대포, 자갈치. 광

는데 ‘북한 선수단들이 만경봉호를 타고 참석

안리 3개가 제일 큰 거점들인데 그 어민들을

한다’. 그런 보도가 들리는거라.

대동하그로 준비하고 했었는데. 어느 날 어민

그래가 딱 떠오르는게, 아시안게임을 부산에서

들이 못하겠다고 나자빠지는거라 이렇게. “아

하고, 부산은 바다가 있고, 만경봉호 배를 타고

이고 우리 몬하겠습니다.”

오고, 나는 선박을 보유하고 있으니까. 이건 그 림이 벌써 딱 떠오르는거지. “그래 바로 이거

바다에 나가면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다!” 이 분단 이후에 민족과 민족이 이래 통으

코걸이 걸면 안 걸리는 법이 없거든. 벌금도 하

로 이렇게 만나는 이런 상황에 우리가 할거는

루 걸리면 2~300만원인데 가믄 하루 수입 다

바로 이거 아니냐 해서 떠올랐던게 만경봉호

날라가는 거거든. 해경들이 그런 압력을 가하

해상환영식! 뭐 자연스럽게 떠올랐지.

는거라 “(환영식 하면) 너그 조업하러 몬나간 다.” 뭐 이런식이니까.

이렇게 해서 인제 어떤 뭐 난관이 있을거라고

내가 즈그 할아버지라 해도 당장 밥그릇이 날

는(생각도 못했지). 아시안게임을 보름쯤 남겨

라가는 판인데 나갈라 해질라나. 그때 당시에

두고 포스터도 맨들고 <만경봉호 해상환영식>

국정원인가 안기분가 모르겠는데 부산에다가

타이틀에 <아시아는 부산으로 부산은 세계로>

임시로 사무실을 채렸거든. 거기 인제 국내 담

52


스승을 만나다

당이 국정원 2차장이라 그러대. 그 2차장이 상

던지 하는 경우를 봤느냐.” 그래 하니까, 어선

주하면서 모든 콘트롤 타워를 다 하고 있었대.

이 백척이나 나가는 거는 저그로서도 감당하

지나서야 알았는데. 야 이거는 정말 헤쳐나갈

기 힘드니까 백척 말고 그냥 의장 한사람 혼자

방법이 없대 이제.

배 한척 갖고 나가면 어떻겠느냐. 이런 이야기 를 하드라고. 근데 이것만 하드래도 길은 보이

우리 어민들이 요구를 하는 게 이 사람들은 그

더라고 길은. 그래 인제 한 아시안게임 개막 한

렇게 높은 사람도 필요 없거든. 부산 해경들이

2~3일 정도 남았을 땐데 밤 12시 쯤 되가지

자기들한테는 제일 겁나는 거니까. 부산 해경

고 해경 서장이 좀 보면 어떻겠느냐. 거기 인제

서장이 만경봉호 환영식 해라 하믄 하겠습니

‘다대, 자갈치, 민락 어민회장’ 다 데리고 가려

다. 이런 말이 나오드라고. 근데 나는 그나마

니까 해경서장이 차를 보냈더라고.

이거라도 그나마 한가닥 희망이다 싶어가지고 이제 해경하고 본격적으로 싸우기 시작했거든.

해경 서장이 앉아가 하는 말이 “자기 좀 살려

아침에 사무실 문 열면은 해경 그 담당자들이

달라. 자기는 내년이면 정년퇴직이다.” 그래서

서너명이 먼저 와서 죽치고 있거든 항상. 그럼

내가 “서장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것도 아

나는 끝까지 하겠다고 워낙 버티고 나가니까 (

니고 우리 시위 나가는 것도 아니고 질서정연

경찰이) 해경 서장하고 만나보면 어떻겠냐(고

하게 나간다는데. 부산 시청앞에 보면은 북한

그래). “아이 내가 만날 필요는 없고 느그가 우

국기가 걸려있지 않느냐. 뜻 깊게 환영하자면

리를 막지 않는다면 나는 그때는 내가 만나겠

서 실질적으로 몸으로 환영하는 이런걸 왜 막

다. 나는 무조건 나간다. 지금까지 느그 해봐서

느냐. 오히려 관이 앞장서서 선전해줘야 될 거

알지만은 내가 단 한번이라도 느그 어떤 협박

아니냐. 근데 이 사람이 인제 그래 “그럼 두 척

이 있어도 한번 투쟁 계획 잡아가 철회를 한다

만 나가자.”

53


민권소식

본 : 한척에서 두척, 한발 더 물러섰네요.

협상을 한다는 거를 다 봤거든.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나가겠다 하드라고.

김 : 어민회장들은 내가 서장하고 면담하는

그래 인제 당일날 새벽 동트기 전에 우리 배가

거를 봤지, 서장은 내보고 자기 살려달라 그러

짝 출항해 나가니까 그 장관이거든. 대형 단일

고. 자기들이 보니까 힘의 우위가 확연히 드러

기 100개를 그걸 달고 나가니까 진짜 장관이

나거든. 서장이 나가라는 소리는 한번도 한적

지 이게.

은 없었지만은 내가 서장보다 훨씬 우위에서 ▼소형 어선에 달 단일기를 어민들이 펼쳐보이고 있는 모습

54


스승을 만나다

▲2002년 해상환영식 당시 모습

내 생애 핑 눈물이 들게 했던 한마디 “감동을 넘어서 충격이었다.” 우리 고생이고 그런거는 그 한마디에 다 날라간기라 김 : 내가 지금은 말을 이렇게 했는데 그 탄 압 과정이 너무 힘들었고 주위에 동지들이 있 는 것도 아니고 혼자서 해내야 되는 일이 됐 으니까. 한 며칠 동안 집에도 안 가고 막 이런 식이었는데 환영식 마치고 오후에 일을 보려

는데 뒤에서 막 피가 쏟아지더라고. 와 긴장 이 확 풀리니까. 정말로 참 힘든 그런 과정이 었지 그게. 그래 마치고 아시안게임 시작하고 일주일쯤 되서 인제 북녘 선수단장이 만경봉호에서 우 리 부산시민들이 자기 환영해준데 대해 고맙 다는 리셉션을 베푼다 이거지. 근데 부산시 관 계자들 중심으로 하고 나는 안 부르대. 내 뿐 이 아니고 진짜로 마 응원단 조직해가 응원한 55


민권소식

그런 단체들도 못가고.

“부산에 오면서 정말 감사하다. 이렇게 환영해 주셔서 정말 감사한데 가장 감동적인거는 꿈

근데 인제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내 생애

에도 생각지도 못했던 어민들이 자기들을 해

가장 이래 코끝이 찡하게 핑 눈물이 돌게 했던

상환영식을 해주는 거 그건 감동을 넘어서 충

감동적인 한마디가 있거든.

격이었다.”

뭐냐면은 그 환영리셉션에 참가했다가 나왔

지금까지 우리 고생이고 그런거는 그 말한마

던 목사님 한분이 있는데 와서 하는 이야기

디에 다 날라간기라. 그 말 한마디에.

가 그래.

우리가 그 말에 정작 내가 얼마나 이 계획에도

북녘 선수단장이 환영사를 하는데 이런 말을

없었던 해상환송식까지도 허허허 마치고 갈

하드라 이거지.

때 환송식도 하자. 그니까 환송식은 또 수월했 지 관의 탄압이나 이런거는 없었으니까.

해상환송식 모습 56


스승을 만나다

그래 갈 때 쭉 따라가는데 그 만경봉호는 속도

수역 하는거를 선포하게 되거든. 근데 이게 국

가 빠르고 우리는 제 아무리 빨리 속도를 해도

제관계 힘의 논린데 미국 러시아 호주나 이런

10노트 이상은 몬 나가는 거니까. 거리는 멀어

나라를 보면 특징이 망망대해를 끼고 있는 나

지는데 우리 어선들은 최고속도 내니까 배 안

라들이거든.

에 굉장히 시끄럽거든. 그때 만경봉호 해상에

그런데 국제법에 영해 12해리까지인데 인마

그 응원단이 전부 선상에 올라와가지고 전부

들이 봤을 때 손해거든. 그래가 인마들은 12

연주를 하는기라. 그니까 바다에서 한쪽은 떠

해리만 치기에는 자기가 너무 손해니까 200

나가면서 연주를 하고 우리는 손을 흔들고 이

해리까지 경제적 어업행위는 즈그가 독점적

런 장관이 펼쳐진거지. 그렇게 점점점점 멀어

으로 하겠다. 이걸 막 선포하기 시작하는기라.

졌던 그런 장면이 정말 기억에 남지.

이 나쁜 놈들이지.

한일어업협정에 분개! 두 달 만에 결성 해 낸 어민총련

그리고 나서 1999년도에 우리나라가 일본하 고 어업협정에 덜컥 서명을 하게 되는데 문제 는 뭐냐면은 우리하고 일본은 200해리 치면

본 : 네, 정말 감동이네요. 그런데, 어민총련

은 영토를 넘어가 버리거든. 그래가 중간에 설

활동을 어떻게 시작하셨는지, 당시 또 다른 기

정을 하는데 독도가 한일어업협정상에 한일중

억에 남는 일은 없으셨는지 궁금한데요.

간수역에 딱 들어갔다고. 한일공동관리수역.

김 : 이게 계기가 1999년에 한일어업협정이 체결되거든. 당시 인제 세계 각국은 200해리 배타적 경제

원래로 치면 우리는 독도로부터 해서 200해 리, 일본은 독도하고 제일 가까운 오끼 제도라

57


민권소식

어민총련 활동 당시

고 있는데 거기서 200해리 해서 서로 겹치는 지점 해서 중간! 이랬으면 아무런 말썽이 없 었는데 그래 우리 나라가 배짱이 없었던거지. 일본은 그전부터 독도는 즈그땅 하고 노리는 게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걸 당시 정부나 해양 수산부 관리들 어용학자들이 뭐라해싸냐면은, 괜찮다 우리가 현재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는 이상 아무 문제 없다 이렇게 막 호도하는 애들 이 있었다고. 근데 불안한 실효적 지배잖아 이 게. 뭐 우리가 어장을 얼마나 덕보냐 작게 보 냐 그거는 또 다른 문제고. 이거는 민족정서상 있을 수 없는 짓을 한거지.

다. 해서 시작한게 어민총련 조직화에 나섰지.

그렇게 해서 인제 막 이래 분개하고 있는 차에

부산, 통영 해서 여수, 목포 뭐 변산반도 태안

내가 학교 다닐 때 데모한 그런 경험이 있어

반도 이런식으로 쭉 전국 어민회를 조직해 나

서 아는 한 형님분이 지금 어업협정이 이런문

가는데 두달이 채 안걸렸거든.

제가 있는데 니가 좀 와서 도와줘야되겠다 그

맨땅에 헤딩하는게 옆에 아무도 없이 내 혼자

래. 그래가 가서 사회도 보고 이런 적이 있어.

몇일 어민 누구누구 만나갖고 야 이래이래 필

그러다가 급조해가지고로 흩어져가지고 이래

요하다 해서 막 조직하고. 아무도 보좌고 뭐

가지곤 안되고 어민들이 조직화가 되야되겠

고 없이.

58


스승을 만나다

오천만 국민 중 유일하게 새천년 첫 해 맞이를 독도에서

가가 있어야 된다. 한일어업협정이 발효되어 버렸으니까. 참 기도 안차지 이게. 12월 31일 그 밤에 외교통상부에 전화하니까

김 : 그리고 이게 참 꼭 이야기 할 게 1999년

다 퇴근하고 아무도 전화 받는 사람이 없드라

12월 31일에서 2000년으로 해가 바뀔 때 그

고. 그래서 못갈 내가!

때 당시 살았던 사람이면 다 기억할게 밀레니

해뜨기 직전에 시간을 맞춰 쭉 가니까 하얀 경

엄 해돋이 이랬다고. 막 관광이고 여행사고 할

비정이 계속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서 따라오

것 없이 전국 유명한데는 해맞이가 몰리는데

드라고. 자세히 망원경으로 보니까 욱일승천

나는 혼자 부산에서 작은 어선을 타고 해맞이

기 선명한 일본해상보안청 배. 즈그는 즈그꺼

하러 독도를 갔잖아.

라 이기지 공동관리수역이라 이기지. 글마들

부산서 출발해가지고 그때 아마 배 안에 이런

이 우리를 감시를 하드라고.

저런 다 합해서 다섯명쯤 탔을 텐데 기관장이

독도 내릴라 하니까 독도 경비대 애들이 못 내

필요하고 선장하고 내하고 KBS 방송국 요즘

리게 막 막드라고 접안을 못하게끔. 그런데도

말하는 VJ 한명하고 이렇게 타고 갔지.

그 얼어붙은 부두에 뛰어내려가 30미터 미끌

그때 참 기도 안 찬게 당시에 울릉도에서 독도

려가 잘못하면 크게 다칠뻔도 했지. 그래 거

갈라면 ‘입어 허가’ 를 받아야 되거든. 지금도

내려가지고 성명서 낭독하고 애국가 부르고

받아야 하지만은.

이래가 독도경비대 애들이 달랑달랑 들어갖고

울릉도 도착해가 기름 넣고 해양경찰에다가

배에다 다 태웠지 우리를.

독도를 간다하니까 못가게 하드라고. 독도를

그 밀레니엄 해돋이를 민간인 중에서는 우리

갈려면은 해양수산부가 아니고 외교통상부 허

나라 가장 동편인 독도에서 내가 했지. 오천만

59


민권소식

국민중에 유일하게.

통으로 마녀를 만들었고 거기에 또 하다하다 안되니까 재미동포까지 마녀를 만들어 나가는

상대가 강하게 나오면은 나는 더 강하게 정면돌파.

데 여기서 우리가 밀리면은 우리가 전부가 다 또 다른 마녀가 다 되게 마련이거든 우리는. 그래서 우리는 정면돌파를 해 나가야 된다는

본 : 네 그럼 이제 최근 이슈에 대해서 질문 드

거고. 그게 우리 경험에서 나타났듯이 가장 유

릴께요. 통합진보당 해산문제, 신은미 황선 토

력하고 유리한 돌파구지. 뭐 논란이 붙을거를

크콘서트에 대한 탄압 등등 공안몰이, 종북몰

이렇게 저렇게 하다가 보면 마치 아주 그럴듯

이가 계속 거세게 일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 어

한 논리를 전개하면서 하려다 보면은 개량주

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의 수정주의 이런 함정에 스스로 빠져들게 되 거든.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도 항상

김 : 누구나 똑같은 생각이겠지만은 탄압이나

원칙적으로 돌파해 나가는 그게 제일 최선이

역풍에 뚫고 나가는 방법은 항상 원칙 정도라.

고 민권연대가 가장 자랑스러운게 바로 이런

뭐냐면은 상대가 강하게 나오면은 나는 더 강

선명함. 운동의 원칙을 지키는 선명함 이게 참

하게 정면돌파!

제일 자랑스럽지.

아 이게 정말로 박근혜 정권은 5년 내내 필요

본 : 네 올 한해가 거의 마무리 되어가는데요.

한게 마녀가 필요하거든. 제일 첨에 이정희란

다가오는 새해를 보면서 2014년 올해 가장 기

마녀를 만들고 다음에 이석기란 마녀를 만들

억이 남는 일은 뭐가 있으신가요?

어 내고 하다하다 안되니까 통합진보당이라는

60


스승을 만나다

“통합진보당 후보란 게 왜 그렇게 자랑스럽던지” 김 : 2014년에는 뭐 이땅에 오천만 누구나 기 억하면은 세월혼데 이거는 다니까 차치하고. 지방선거 후보로 출마했던거. 이게 참 기억에 남거든. 나는 지방선거 후보 이거 사실 생각 지도 안하고 있었고. 이 나이에 지방선거 후 보 나가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 민 권연대 간부들의 그 진정어린 그 감동을 해가 지고 나갔는데. 우리 간부 한 사람이 이런 말 을 했거든. “우리 돈 한푼 못 벌더라도 투쟁이 라면 어디건 차비 아껴하지 않는 우리. 우리는 그들보다 백배나 낫습니다.” 나도 뭔가 역할 을 해야되겠고 중심을 잡아야겠다 해서 결심 을 했지. 근데 후보가 딱 되가 선거운동을 하 니까 통합진보당 후보란게 왜 그렇게 자랑스 럽던지. 사람들 만나서 이야기 할 때도 좀 나 이든 사람이 통합진보당 후보입니다 이렇게 큰 소리로 이야기 할 수 있다는게 얼마나 좋은 지 모르겠대. 61


민권소식

광복 70년, 분단 70년. 지축을 뒤흔드는 2015년을 그리며

인 문제는 어떤 어려움 난관 하나하나 거 뭐 점검해 나가야 될 문제지만은. 예를 들어서 만 약에 3월 1일부터 시작한다면 3월 1일부터 8

본 : 마지막 질문입니다. 월간지 본의 새해 첫

월 15일까지 5개월동안 매일 하는 경우도 있

인터뷰인데요.

을 거고 주말에 하는 경우도 있을 거고. 부산

전국에 있는 회원들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은

에서 마산까지 또 진주까지 이런식으로 쭉 릴

말씀 부탁드립니다.

레이를 받아서 몇달동안 계속 투쟁하는 이런 형태로 할 수도 있을 것 같고. 세월호 노란리

김 : 전국에 우리 회원들이 내보다 월등히 각

본 하듯이 광복 70년 분단 70년 하는 단일기

성되어 있는데 한마디 한다는 건 그렇고 제안

형태의 휘장이나 이런거를 단다던지 해서.

을 하자면은. 2015년이 광복 70년 분단 70년

광복 70년, 분단 70년이 가져오는 의미가 뭐

이지. 근데 그러면 광복 67년 68년 이런거 하

고 그러면 2015년을 사는 오늘 어떤 자세로

고는 분명히 다른 의미가 있으니까 우리의 각

분단을 바라봐야 되고 어떻게 나가야된다 이

오나 2015년에 우리의 행태도 분명히 달라

런 거를 시민들에게 알려내고 이런게 있어야

야 한다고 봐지거든. 우리 여름 되면 한 보름

되지 않을까 싶은데 이건 몰라 아이디어고.

간 통일대행진단을 하잖아. 그렇게 하지 말고

분명히 좀 지축을 뒤흔드는 그런 어마어마한

2015년 초부터 시작해서 2015년 8월 15일까

형태로 나타내야 될 거 같은 생각이 좀 들어.

지 아예 몇 개월 걸리는 대장정의 통일대행진

내가 늘 이야기 하지만 형식이 내용을 결정짓

단. 전국적으로.

거든. 70년이 갖는 이 내용을 잘 담을라면은

이걸 해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거든. 실무적

그 형식부터 어마어마해야되거든.

62


스승을 만나다

알맹이가 없는 어마어마한 형식은 있을 수 없 으니까. 형식을 어마어마하게 잡다 보면은 훌 륭한 알맹이를 담아낼 수 있을 거 같애. 거기 에 인제 처음 민권연대가 선도적인 역할을 해 내야지. 항상 민권연대는 앞장서 투쟁을 해왔 으니까. 그게 민권연대의 자랑이기도 하고. ▒ 인터뷰를 마치고 난 뒤 불과 2주만에 통합진보당은 해 산되었고 통일토크콘서트는 사제폭탄테러에 이은 공 안탄압과 종편언론의 공격을 연일 받고 있습니다. 2015년을 앞두고 격동적인 시국을 맞이하고 있는 지 금, ‘정면돌파’ 가 돌파구라는 대표님의 힘있는 말씀 이 새해 우리가 새겨가야 할 중요한 교훈이 아닐까 싶 습니다. 지축을 뒤흔드는 2015년을 향해. 김인규 대표님은 1953년 2월 22일 태어나셨습니다. 어민총련의장,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공동대표 등을

2011년 민권연대 통일대행진단 단장으로 활동하던 모습

역임하셨고 현재 부산민권연대 대표로 활동하고 계십 니다.

63


Turn static files into dynamic content formats.

Create a flipbook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