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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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세월호 1년이 남긴 것

[ 월간

remember

[

0416

본 2015.04

http://mag-mkyd21.tistory.com


0416

고구마 ‘되돌릴수만 있다면’

remember

발행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민권연대)

발행일

2015년 4월 1일 (14호)

블로그

http://mag-mkyd21.tistory.com

문의

mag.mkyd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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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30년은 더 신탁통치를 받아야 한다 l 카이로-얄타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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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을 찾아서

“양심 잃지 말고 살아가자.” 조상현 후원회원

1970년 4월 와우아파트 붕괴사고와 세월호

의혹투성이 통영함 비리 수사

스승을 만나다

‘4월혁명 정신’의 산 증인 ‘사월혁명회’ 정동익 상임의장님

세월호 1년과 경제성장 만능론

세상의 모든 무기

우리가 미래다

‘새바람’의 새로운 바람 김수근 신임대표

세월호 참사 1년,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이달의 역사

예술, 그 본질적 가치

변절과 증오, 전쟁 속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

특별기획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풀어쓰는 경제이슈

미국 금융패권 몰락을 보여준 AII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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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집중

동아시아 역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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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문화예술 공연과 작품

우리나라 미니앨범 ‘난쟁이들의 노래’ 세월호 뮤직비디오 ‘기억할게’ 2탄


편집자의 말

4월입니다. 길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에서,

호 인양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정책

불어오는 따스한 바람 속에서, 길가에 흐드

은 여전히 규제완화와 노동유연화에 맞춰

러진 꽃 들에서, 곳곳에서 봄이 왔음을 확

져 있고, ‘기레기’라는 조롱을 받았던 언론

인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역시 반성은 없어 보입니다.

아직 얼어붙어 있습니다. [본] 4월호 기획특집에서는 ‘세월호 1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

년’을 돌아봤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있은

회의 총체적 부실을 보여줬습니다. 많은 이

지 1년, 무엇이 변했고 변하지 않았는지, 세

들이 세월호 이전과 이후는 달라야 한다고,

월호로 인해 경제가 어려워진다며 진상규

한국 사회가 달라져야 한다고 이야기 했습

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가만히 있으

니다.

라’고 했던 보수진영의 논리는 타당했었 는지, 새롭게 제기되는 의혹들은 없는지 등

1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얼마나 달라진 사

을 살펴봤습니다.

회에서 살고 있나요? 여전히 정부와 여당 은 세월호 참사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은

이제 우리에게 4월은 세월호 이전의 4월과

채 진상을 덮기에만 급급합니다. 어렵사리

같을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세월호 참사

만들어진 진상조사위원회는 아직 제대로

가 우리에게 던져준 과제를 되돌아봅시다.

출범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

세월호 참사가 있은 지 1년, 바뀌어야 할

분들은 아직도 거리에서 농성을 하고 있고,

것이 바뀌지 않았다면 우리가 바꿔냅시다.

실종자 가족들은 정부와 국민들에게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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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집중

0416

http://mag-mkyd21.tistory.com/152

세월호 참사 1년,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시선집중

세월호 참사 당시 많은 이들이 대한민국은 세

라 비난하기도 하였다.

월호 참사 전과 후가 달라야 한다고 얘기했다. 세월호 참사 후 1년이 지났다. 과연 대한민국

또한 국민들이 세월호의 진실을 알기 위해 노

은 무엇이 바뀌었으며, 또 무엇이 바뀌지 않

력하는 것도 가로막고 있다. 참사 당시 해경의

았을까?

수중구조 활동을 비판했던 홍가혜 씨를 구속, 기소하는 등 국민들이 제시하는 각종 의혹들

우선 정부·여당과 보수 기득권층은 하나도 변

을 차단하기 위해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심

하지 않았다.

지어 극우단체와 언론들은 유가족들을 ‘종북’ 으로 매도하고 단식농성장 앞에서 ‘폭식’을

첫째, 이들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실규명을 거부하고 방해했다. 참사 초기 국정조사에서 정부기관들은 자료제출을 거부하며 진실 은 폐에 주력했다. 세월호 특별법을 엉망으로 만 들어 진실규명을 어렵게 했다. 우여곡절 끝에 합의된 진상규명특별조사위에는 자격도 없는 이들을 여당추천 위원에 앉혔다. 새누리당 원 내수석부대표는 진상조사위를 ‘세금 도둑’이

하는 등 인륜을 저버린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둘째, 이들은 세월호 참사에 대해 아직까지도 무책임으로 일관하고 있다. 참사 초반부터 ‘청 와대는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는 식으로 서로 발뺌하기 급급했던 정부는 단 한 명도 세월호 참사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책임을 청해진해운에 떠넘기고 실소유주인 유 병언 회장이 죽었다고 결론내리며 누구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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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집중

임질 필요가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월호 참사는 단순히 정부 차원의 문제가 아니 었다. 사회 전반에 만연한 온갖 근본적 문제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정부·여당은 안전사회

이 집약적으로 드러난 계기가 된 게 바로 세

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으나 바뀐

월호 참사다.

건 거의 없다. 날마다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 는 대한민국은 세월호 참사 전과 다를 바가 없

그동안 많은 국민들이 한국 사회의 여러 모순

다. 무책임한 보도를 남발했던 언론들도 자숙

들에 대해 이야기해왔다. 하지만 그게 어느 정

하고 공정·신중 보도를 해야 함에도 여전히

도 심각한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느끼지

편파·왜곡 보도를 일삼으며 국민을 이간질하

못했다. 세월호 참사는 그런 국민들의 눈을 뜨

고 있다.

게 했다. 이제 국민들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심각한 모순들을 방치하면 언제든 자신과 자

정부·여당과 보수 기득권층은 하나도 변하지

기 자식들이 죽을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않았지만 우리 국민은 세월호 참사 전과 후가

그리고 이런 근본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는 고

완전히 다르다.

민을 하기 시작했다.

첫째, 국민들의 사회인식에 커다란 변화가 생

물론 근본 모순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인식

겼다. 세월호 참사 직후 많은 국민들이 ‘침몰

한 것은 아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하는 대한민국’이란 표현에 공감을 표했다. 세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한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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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집중

아니다. 하지만 진지한 고민을 시작했다는 점

고 세월호 참사에 대한 발언을 아끼지 않았다.

에서 세월호 참사 전과 후의 국민인식은 근본 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국민들의 굳은 의지는 각 종 공격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세월호 참사를

둘째, 국민들이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고 행동

덮으려는 이들은 유가족·실종자 가족을 음해

에 나서기 시작했다. 물론 국민들은 과거에도

하는 온갖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한국 사회에

큰 사건이 발생하면 공감하고 행동해왔다. 하

서 가장 강력한 공격인 ‘종북’ 공세까지 나왔

지만 세월호 참사만큼 많은 국민들의 공감을

지만 국민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얻고, 많은 국민들의 행동을 불러일으키고, 오 랫동안 공감과 행동을 지속시킨 사건은 없었

이처럼 변화한 국민들의 힘으로 세월호의 진

다.

실은 반드시 규명될 것이고, 새로운 사회도 이

세월호 참사는 전국을 추모 리본으로 노랗게

룩할 수 있을 것이다.

도색했으며, 역대 가장 많은 500만 명의 서명 을 이끌어냈다. 1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이들 이 새로운 서명에 기꺼이 나서고 있으며 동네 구석구석 촛불을 밝히고 있다. 사회적 발언을 꺼리던 연예인들도 인기관리에 연연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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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집중

0416 세월호 1년과 경제성장 만능론 http://mag-mkyd21.tistory.com/153

세월호 참사가 있은 지 1년이 다 되었다. 우리사회의 총체적 부실을 드러내 준 세월호 참사 는 우리사회에 많은 과제와 의문을 던져주었다. 그 중 하나는 우리에게 과연 ‘경제성장’이란 것이 어떤 의미였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한강의 기적’, ‘세계 10위권의 경제’ 등 화려한 수사 속에서 경제성장을 해 왔지만 국가는 세월호 탑승객을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했다. 선장과 선원들은 비정규직이었고, ‘수익’을 위 해 ‘안전’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었음을 확인했다. 특히 경제논리를 앞세워 세월호 진상조 사에 대한 요구를 무마하려는 정부와 여당의 모습을 보면서 ‘경제성장’이 과연 우리에게 무 엇인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6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세월호’가 우리 경제 발목 잡았나 당시 정부와 여당은 세월호 유가족들과 시민 사회단체들의 진상규명 요구에 경제위기론을 들고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은 작년 5월 긴급 민생대책회의에서 “사회불안이나 분열을 야 기 시키는 일들은 국민경제에 전혀 도움이 안 될 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우리 경제에 악영향 을 끼치게 됩니다”라고 이야기했다. 황우여 당 시 새누리당 대표는 최고위원회의에서 “세월 호 참사 이후 민간 소비심리가 위축되고 있어 소상공인을 중심으로 어려움이 많다”라며 민 생경제 활성화 대책을 주문했다. 결국 경제논리를 모든 것에 앞세우며 ‘경제가 어려우니 세월호 문제로 혼란스럽게 하지 말 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었다. 그 이후에도 보수언론들은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과 시민사회단체들을 경제를 어렵게 만들고 국론 을 분열시키는 세력이라고 매도했다.

▲ [그림1] 소비자심리지수 중 특정항목별 지수 자료 :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세월호 참사가 경기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라며 정부가 내세운 논리중 대표적인 것 이 사람들의 소비심리가 위축될 것이란 것이 었다. 예를 들어 세월호 참사로 인해 사람들이 여행을 가지 않게 되고, 그로 인해 음식점이나 숙박업 등이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1년여가 흐른 지금 사람들의 소비심리는 어 떻게 움직였을까? 한국은행의 소비자동향지 수 중 정부가 세월호 참사로 영향을 받을 것이 라고 한 부분과 관련된 지수들을 살펴보자.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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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비자동향지수는 쉽게 말해 소비자들에게 현재

세월호 참사 때문이 아니라 이전부터 경기가

의 상황이나 향후 전망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좋지 않았던 결과다. [그림 1]에서도 볼 수 있

를 물어서 지수화한 것이다. 이 지수가 100을

듯이 2013년에는 관련 심리들이 더 좋지 않

초과하면 긍정적으로 응답한 가구가 부정적인

았다.

인식을 가진 가구보다 많다는 것을, 100 미만 인 경우는 그 반대를 의미한다.

사람들의 소비심리 변동 말고 실제 사람들의 지출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도 살펴보자. [그

먼저 외식비 지출의 경우 세월호 참사가 있은

림 2] 는 가계의 소비지출 중 오락문화와 음식

2014년 4월 91이던 것이 5월과 6월 각각 91

숙박에 관련된 지출 추이를 분기별로 나타낸

을 기록하며 세월호 참사에 따른 영향이 없는

것이다. 오락문화 부문 지출의 경우 세월호 참

것으로 나타났다. 오히려 7월과 8월에는 각

사가 있은 2014년 2분기 감소하지만 3분기에

각 1포인트 씩 상승했다. 여행비 지출의 경우

는 이전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모습을 보이고

2014년 4월 94이던 것이 5월 90으로 하락한

있다. 음식숙박 부문 지출은 2014년 2분기 오

다. 하지만 6월 93, 7월 94로 곧바로 이전 수

히려 늘어났고, 3분기에는 관련 지출이 더 큰

준을 회복했다. 오락, 문화 등의 지출과 관련

폭으로 증가했다.

해서는 4월 91, 5월 90, 6월 90, 7월 91, 8월 92로 큰 변동이 없었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 [그림 2] 가계 소비지출 중 오락문화(위)와 음식숙

사람들의 소비심리가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

박(아래) 부분의 실질 지출액 추이(계절조정)

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모든 지수들이

단위 : 십억원 / 자료 :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기준선인 100이하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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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적인 구조적 문제이지 세월호 때문이 아니다. ‘경제성장’만 신성시 하는 정부여당 한편 정부여당의 ‘경제가 어려우니 세월호 문 제로 혼란스럽게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사고방식 속에는 사회의 다양한 가치들 중 경 제논리와 효율성 등을 최우선시 해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나아가 세월호 참사가 일어 난 원인 중 하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성장과 효 율성에 매달려 ‘안전’이나 ‘공공성’과 같은 가치를 무시해 온 결과이기도 하다. 세월호 참사가 있은 지 1년이 지난 지금 이러 한 정부여당의 생각과 행동엔 변화가 있었을 ‘경제가 어려운데 언제까지 세월호 이야기를

까?

할 꺼냐’는 식의 정부여당과 보수진영의 이 야기는 뚜렷한 근거가 없다. 물론 현재 한국

박근혜 정부는 공공성을 훼손하는 규제완화

의 경제상황은 어렵다. 전체적인 소비심리도

에 여전히 적극적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5

얼어붙어 있다. 하지만 이는 한국경제의 근본

년 신년구상을 발표하면서 공공부문의 ‘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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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개혁’을 제일선에 놓았다. 내수활성화 역시 규

대주택 사업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각종 혜택

제개혁을 통해 이룰 수 있다고 한다. 규제를

과 규제를 완화하고 있다.

개혁하면 기업투자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이 는 결국 의료 등 공공성이 높은 영역에서 재벌

박근혜 대통령이 “퉁퉁 불어터진 국수”라며

대기업에게 새로운 사업기회를 주겠다는 것에

가장 아쉬워 한 정책은 부동산 규제를 완화하

다름 아니다. 나아가 박근혜 정부는 정규직에

는 부동산 3법이었다. 박 대통령은 불어터진

대한 보호가 과도하다며 임금이나 해고 조항

국수를 먹고도 부동산 경기가 꿈틀댔다면서

을 조정하려 한다. 파견노동은 55살 이상에 전

더 강력한 정책을 주문하기도 했다. 이러한 부

면 허용하고 계약직 사용기간도 연장하는 등

동산 경기 부양 속에는 서민들의 주거난이나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확대해 나갈 방침이다.

보금자리에 대한 고민은 빠져있다.

특히 박근혜 정부는 ‘줄푸세(세금을 줄이고,

여당 대표의 인식은 우리를 더욱 놀랍게 한

규제는 풀고, 법치를 세운다)의 화신’이라 평

다. 지난 3월25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한

가되는 최경환 의원을 경제부총리 자리에 앉

대학의 특강에서 “힘을 얻기 위해서라면 자

혔다. 인사 청문회 당시 ‘서울 집값이 높지 않

유를 유보해서라도 경제를 빨리 발전시켜야

다’고 한 최 부총리가 펴고 있는 경제정책의

한다. 이게 박정희 대통령의 5·16 혁명이었

핵심은 부동산 규제를 완화하는 것이었다. 부

다”라고 이야기했다. 5·16 쿠데타를 혁명이

자들에게도 1%대의 이자율로 주택매입자금

라 부르며, 경제 발전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

을 빌려주는 ‘손익공유형 모기지’ 등 “빚내서

택이었다는 것이다. 이어 김 대표는 “경제의

집사라”는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고, 기업의 임

비약적인 발전, 한강의 기적으로 전 세계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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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이 ‘대한민국 경제발전은 기적’이라고 부러워

한다는 생각들이 확산되었다. 하지만 박근혜

한다”라며 “이렇게 전 세계인들이 우리나라

정권의 정책은 이러한 국민들의 염원과는 반

를 인정하는데 좌파들은 현대사를 부정적으

대방향으로 가고 있다.

로 가르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오마이뉴스, 2015.03.25).

하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우리경제가 성장하기 힘들기

김무성 대표의 논리는 세월호 참사 때 여당이

때문이다. 불평등은 사람들이 살아가기 힘들

보여준 논리와 맞닿아있다. ‘경제가 어려운데

정도로 심화되어 있고, 세계경제의 현황은 이

진상규명이 뭐가 중요하냐’, ‘경제가 어려운

전과 같이 수출을 통해서 고도성장을 하기 어

데 언제까지 세월호 이야기 할꺼냐’는 식의

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새로운 방도를 찾아야

인식이 그것이다. 경제논리가 최우선이며 여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 번 세월호 참사

러 가지 사회적 가치들은 경제논리의 하위 범

가 우리 경제에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진지하

주일 뿐이다. 그런 사람의 눈으로는 ‘좌파’의

게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문제제기가 이해될 리 없다. 세월호 참사가 있은 지 1년. 박근혜 정부의 모 습을 보면 변한 것이 없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국민들은 돈의 논리가 아닌 ‘인간’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바랬다. 경제논리를 앞세운 무분 별한 비용절감, 구조조정 등에 제동을 걸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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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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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집중

0416 1970년 4월 와우아파트 붕괴사고와 세월호 http://mag-mkyd21.tistory.com/154

오는 4월 16일이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주기가 됩니다. 수백만 명의 국민들이 진상규 명을 위한 서명에 참가하고 유가족들이 수개월 째 광화문에서 농성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진 상조사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하지 못하는 등 진상규명의 첫발조차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지 금의 현실입니다. 4월 16일 세월호 1주기를 맞아 45년 전 4월에 일어났던 한 사고를 살펴봤습니다. 그 때는 어 떠했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떤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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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역사

1970년 5월 22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린 김

1명도 목숨을 잃었고 2명의 주민이 부상을 입

시스터즈의 귀국공연에서 당시 한창 뜨고 있

었습니다.

던 가수 조영남은 <신고산 타령>의 가사를 즉석에서 바꿔 “와우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 얼떨결에 깔린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누나”라 고 불렀습니다. 조영남은 공연 후 분위기가 심 상치 않음을 느끼고 도망쳤으나 기관원에게

당시 서울은 급격한 도시화로 인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산중 턱에 판잣집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있었습 니다.

붙잡혔습니다. 조영남은 치도곤을 당할 뻔 했

이를 좋게 보지 않은 박정희는 판잣집 정리

던 상황에서 한 변호사의 도움으로 자진입대

를 명령했습니다. 이에 박대통령의 심복이었

를 하고 겨우 위기를 넘겼습니다.

던 당시 서울시장 김현옥은 각 구청별로 판잣

가수 조영남을 곤경에 빠뜨렸던 사고, 와우아 파트 붕괴사고는 1970년 4월 8일 새벽 6시 30분에 일어났습니다. 서울시가 마포구 창천 동(지금의 홍익대학교 근처)에 건설했던 지상 5층 15개동 규모의 와우아파트 중 한 동인 15 동이 무너졌던 것입니다. 이 사고로 아파트에 입주해 잠을 자고 있던 주 민 33명이 목숨을 잃었고 38명이 다쳤습니다. 무너진 아파트 잔해가 아파트 아래에 있던 판 잣집을 덮쳐 판잣집에서 잠을 자고 있던 주민

집 등 무허가 건물의 현황을 파악한 뒤 일부는 개량하고 일부는 경기도 광주(지금의 성남시) 에 대단지를 조성해 이주시키고 나머지는 이 른바 시민아파트를 지어 시민들을 이주시킨다 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사고가 일어난 와우아파트는 이런 시민아파 트 중에 하나였습니다. 대부분의 시민아파트 는 산중턱에 지어졌는데 이와 관련하여 김현 옥 서울시장은 청와대에서 잘 보이도록 하기 위해 산중턱에 지었다고 합니다. 13


이달의 역사

시민아파트 사업은 출발부터 문제가 있었습

파트 한 동당 125만원을 떼먹기도 했다고 합

니다. 안전에 대한 고려 없이 졸속적으로 진행

니다.

된 것입니다.

건설업계의 부패가 얼마나 심했던지 와우아파

먼저 건설 기간이 짧았습니다. 와우아파트의

트의 경우 ㈜대룡건설이라는 회사가 하청을

경우 1969년 6월에 착공해 같은 해 12월 준

받아 공사를 맡았는데, 놀랍게도 이 회사는 무

공하여 6개월이라는 단기간에 지어졌습니다.

허가 회사였다고 합니다. 뇌물을 주면 무허가

지금도 4층 높이 10개동 94가구를 짓는데

회사에도 공사를 맡길 만큼 썩어 있었던 겁니

14~15개월 정도 걸린다고 하는데, 6개월 만

다. 이런 상황에서 관리감독이 제대로 이루어

에 지어졌으니 공사가 날림으로 진행되었다고

질 리가 만무했습니다.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예산도 부족했습니다. 아파트 한 동을 짓는데 당시 돈으로 최소 1100~1200만원이 들어가 야 했으나 실제로는 660만원에 짓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와우아파트 사건에는 뿌리 깊은 건설업계의 부정부패도 작용했습니다. 공사를 따내기 위 해 뇌물을 주는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졌고 뇌 물을 준만큼 공사비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공 사는 더욱 부실해졌습니다. 하청과정에서 아 14


이달의 역사

공사도 엉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와우아파트

으로 입주권 가격이 크게 올라 원래 입주하기

는 무려 70°라는 경사진 산중턱에 건물을 지

로 했던 빈민층이 들어오지 못하고 살림살이

었기 때문에 기초가 튼튼해야 했습니다. 그러

가 비교적 많은 계층이 입주했기 때문입니다.

나 시공사는 지질검사도 실시하지 않고 공사 를 진행했습니다. 아파트 무게를 대부분 지탱 해야하는 기둥을 7개만 설치하는가 하면 기둥 에 철근 70개를 넣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철근 을 5개만 썼습니다. 게다가 건물의 안전을 위 해 땅을 깊이 파내려가 암반 위에 기둥을 세워 야 했으나 땅을 2m만 파내려가 암반이 아닌 흙 위에 기둥을 세웠다고 합니다. 또한 아파트 벽에 쓰는 콘크리트에는 공사비 를 아끼기 위해 시멘트를 적게 넣어 콘크리트 라기보다는 자갈과 모래 반죽에 가까웠고 반 죽에 쓰는 물도 불순물이 많이 들어 있는 하수 도 물을 썼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1㎡에 280kg의 하중을 견디 도록 설계가 되었는데, 시민아파트에 걸린 실 제 하중은 1㎡당 900kg 내외로, 설계 하중의 3배를 넘었습니다. 이는 브로커들의 개입 등

더욱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이미 사고 징후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사고가 나기 나흘 전 무너 진 15동 건물의 옆에 있던 14동 건물의 벽에 갑자기 금이 갔습니다. 서울시 당국은 14동 에 살던 주민들을 사고가 난 15동 건물로 옮 겼습니다. 14동의 주민을 15동으로 옮기면서 시 당국은 검증된 이상 없는 건물이라고 장담 했고, 14동 건물을 보수하면서도 15동 건물에 대해서는 손도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와우아파트 참사는 정부기관의 무리한 공사계 획과 낮은 공사비 책정, 시공회사의 부실, 그 리고 부정부패에 따른 관리감독 부실 등 총체 적인 부실이 낳은 인재(人災)였습니다. 안전에 대한 고려, 부정부패, 안전관리 소홀, 부실공사 등의 잣대로 세월호 사건을 바라봅 시다. 15


이달의 역사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는 과정을 살펴보면 안

조합과 한국선급의 고위직으로 들어가는 식

전에 대한 고려가 뒷전이었다는 것이 드러납

으로 카르텔을 구축해 이른바 해피아라고 불

니다. 세월호는 1994년 건조된 후 2012년까

리는 조직이 만들어졌습니다. 해운조합 역대

지 일본에서 운행된 배입니다. 그래서 선박연

이사장 12명 중 10명이, 한국선급 회장 10명

한이 20년이었던 한국에서는 원래 2014년 폐

중 8명이 해양수산 부처 고위관료 출신이었

기되었어야 할 배였습니다.

습니다.

그러나 2008년 이명박 정부 당시 선박연한을

이러다보니 관리, 감독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25년에서 30년까지 연장해달라는 업계의 요

없었습니다. 세월호와 같이 노후선박의 수명

구를 정부가 수용했습니다. 그러자 선박회사

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매년 선박안정공단의

들은 해외에서 20년 사용한 배를 싸게 들여와

검사를 통과해야하고 운행할 때도 안전과 관

약간의 보수를 거친 뒤 국내에서 운행했습니

련한 조치를 철저히 진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 세월호도 그런 배중에 하나였습니다.

단 1개밖에 펴지지 않았던 구명벌 문제, 일상

와우아파트가 박정희 대통령의 전시행정을 위 해 안전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건물을 지어 사 고가 났다면 세월호 사건은 업계의 이익을 위

적인 과적, 29%만 채운 평형수 문제 등의 사 실로 알 수 있듯이 관리, 감독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해 안전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노후선박을 운

세월호의 증축 과정에서도 문제가 있었습니

행하다가 사고가 난 셈입니다.

다. 세월호는 무리한 수직증축으로 무게중심

세월호 사건에서도 뿌리 깊은 부정부패가 있 었습니다. 해수부에서 일하던 공무원이 해운 16

이 위쪽으로 옮겨지면서 복원력이 저하되었 습니다. 배가 기울어졌을 때 옆으로 넘어지지 않도록 하는 힘이 복원력인데, 이 힘이 약해


이달의 역사

져 옆으로 넘어갈 위험이 커졌다는 말입니다. 선박검사를 맡은 한국선급은 1차 검사 때 복 원력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지만 별다른 보 완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2차 검사에서 통과시켜주었습니다. 세월호는 증축 이후 시험운항 때부터 문제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세월호 소유주인 청해진 해운도 알고 있었다고 합니 다. 세월호 증축과 개, 보수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국정원과 한국선급 등의 기관도 다 알 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위험한 징후가 있었음에도 책임 있는 기관들은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규정을 어기고 과적하고 평형수를 빼 버렸습니다. 와우아파트 건설과정에서 기둥에 넣을 철근을 빼고 콘크리트에 하수도 물을 넣 고 시멘트를 빼는 것과 같은 짓을 저지른 겁 니다. 와우아파트 붕괴사고 이후 김현옥 서울시장 이 물러나고 마포구청장 및 관련자들은 구속 되었습니다. 그러나 재판결과 관리 책임자인 마포구청장은 무죄를 받았습니다. 시민아파트 를 무리하게 밀어붙여 최종 책임을 져야 하는


이달의 역사

김현옥 서울시장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다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와우아파트 사고

오히려 1971년 10월 내무부장관으로 기용되

이후 박정희 정부는 시민아파트에 대한 조사

었습니다. 어찌 보면 말단이라고 할 수 있는

를 진행했습니다. 조사결과 완공된 434동 중

마포구의 건축과장과 건축과 기사보, 하청업

349동이 보수가 필요하다는 결과가 나와 대

자에게만 4년 이상의 형이 선고되었을 뿐입

대적인 보수공사 및 철거공사가 이루어졌습

니다.

니다.

세월호 사건도 비슷합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세월호 사고 이후는 어떨까요? 2014년 10월

154명이 구속되는 등 총 399명이 입건되어

열린 국정조사에서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들은 말단이라고 할

는데요, 세월호 사고 직후인 4월17일부터 8월

수 있는 세월호 선장 및 선원, 일선 해수부 공

31일까지 일어난 해양 선박 사고가 총 341건,

무원, 청해진 해운임원 등입니다.

사고 선박 수가 406척으로 2013년 같은 기간

그러나 궁극적으로 책임을 져야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책임지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 렵습니다. 그나마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던 김장수 전 안보실장은 사퇴 9개월

과 비교해 사고 건수로는 99건, 선박 숫자로는 95척이 늘어난 것입니다. 정부가 참사를 겪고 난 이후에도 제대로 안전관리를 하지 않고 있 는 것입니다.

만에 중국 주재 대사에 임명되었습니다. 김현

세월호 사고 이후 벌어진 대형사고가 박근혜

옥이 서울시장에서 물러난 이후 내무부장관이

정부의 태만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9월 30

된 것과 꼭 닮았습니다.

일 홍도 부근에서 일어난 바캉스호 좌초사고

박근혜 정부의 대처가 와우아파트 사건 때 보 18

와 12월 1일 러시아 베링해에서 오룡호 침몰 사건 둘 다 노후선박이었습니다. 심지어 원양


이달의 역사

어선의 90%가 만든 지 21년이 넘은 노후선박

습니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와 같은 일을 다시

이라는 통계도 있습니다. 정부가 세월호 참사

반복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의 참사를 막기

에서 교훈을 얻었다면 이런 부분부터 살펴봤

위해 우리는 반드시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

어야 했지만 현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히고 책임자를 처벌해야 할 것입니다.

심지어 정부는 사고의 주요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규제완화를 앞으로도 계속 해 나가 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세월호 사고 1주일 후, 2014년 4월 22일 국무회의는 세월 호 사건의 한 원인이었던 수직증축을 아파트 에도 할 수 있도록 허가했습니다. 2015년 2월 27일에는 이미 설계수명을 넘은 월성원전 1 호기의 운행을 2022년까지 연장했습니다. 제 2의 제3의 세월호가 곳곳에서 잉태되고 있는

remember

0416

꼴입니다. 1970년 4월,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라는 참사 를 겪었지만 건설업계의 비리는 근절되지 못 했습니다. 그 결과 90년대에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와 성수대교 붕괴사고라는 끔찍한 참사를 겪어야 했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겪었 3


remember

시선집중

0416 의혹투성이 통영함 비리 수사 http://mag-mkyd21.tistory.com/155

20


세상의 모든 무기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년이 되어가고 있

를 선정할 당시 방위사업청 함정사업부장(소

다. 정부는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문제를 시

장)으로 재직하면서 부하 직원들이 시험평가

정하겠다고 말하였지만 의혹은 지금도 계속

서를 조작해 성능이 미달한 H사의 음파탐지

나오고 있다.그 대표적 사례가 군의 방산비리

기가 납품되도록 하는 과정에 관여한 혐의를

문제이다. 세월호 구조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받고 있다. 합수단은 황 전 총장이 납품제안서

이유로 출항을 기피하여 숱한 논란을 낳았던

심사에서부터 평가, 사업자 선정에 이르는 과

통영함과 관련해 남품비리 의혹이 제기된 것

정에서 서류에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다.

도 H사가 납품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납품 과정에서 빚어진 문제 때문에

3월 22일, 황기철 전 해군참모총장이 통영함

결과적으로 국고에 손실을 끼친 혐의도 황 전 총장에게 적용됐다. 황기철 전 총장은 “납품업체 선정 과정은 실무 자들에게 대부분 권한이 위임돼 있어 영향력 을 끼칠 사안이 아니었다”며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합수단은 황 전 총장이 H 사 제품이 납품될 수 있도록 일을 잘 처리하라 는 취지의 지시를 내렸다는 실무자의 진술을 확보했다고 한다. 황기철 총장은 지난달까지

납품비리에 연루된 혐의로 구속 수감되었다.

해군참모총장 직을 수행하였지만 통영함 비리

황기철 전 총장은 2009년도에 통영함 사업자

사건으로 해군참모총장에서 물러나자마자 곧 21


세상의 모든 무기

바로 구속 수감되었다.

있는 크레인, 첨단 음파탐지기인 사이드 스캔 소나 탑재 등 각종 첨단 장비를 갖추고 있어

세월호로 통해 알려진 통영함

세월호 구조 작업에 큰 활약을 할 수 있으리라 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1년 전, 논란이 되었던 통영함을 다시 살펴보자. 세월호 참사 당시 군의 구조문

이에 황기철 해군참모총장은 사고 첫 날, 세월

제 중 가장 큰 의혹으로 지적된 사안은 통영

호 구조작업에 통영함을 투입하라고 두 차례

함 투입 무산이었다. 세월호 참사와 같은 재해

나 지시했다. 해군 본부는 이런 내용으로 해

사건에 투입하기 위한 배인데 출항을 안한다

군작전사령관, 해군제5전단장, 통영함장에게

고 하니 국민여론은 분노로 끓었다. 통영함은

지시했다. 지원 일시는 4월 16일 낮 12시부

그만큼 세월호 참사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

터 별도 협의 시까지로 되어 있었다. 또 해군

계가 되었다.

과 방위사업청, 통영함을 보관 중인 대우조선 해양은 ‘청해진함, 통영함 진도근해 좌초선박

ATS-31 통영함은 재해구조를 목표로 건조된

구조 참가에 관한 합의각서’를 작성하고 공

배수량 3500톤의 한국 최초의 수상 구난함이

동 서명했다. 양해각서의 내용은 대우조선해

다. 2010년 10월 방위사업청과 대우조선해양

양에 있던 통영함을 잠시 해군에 인수한다는

이 건조 계약을 체결, 2012년 9월에 진수하였

것이다.

다. 통영함은 21노트의 빠른 속도, 수중무인탐 사로봇 (ROV) 탑재, 공기호스를 통해 90m 수

그러나 충격적이게도, 당시 해군참모총장의

중에서 잠수부가 장시간 구난 작전을 할 수 있

출항지시는 묵살됐다.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

는 시설, 배수량 570톤의 배도 들어 올릴 수

은 “통영함은 시험평가에서 장치 일부가 성능

22


세상의 모든 무기

문제를 제기하였다. 알려진 바와 달 리 부실납품된 부품으로 정상작동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통 영함을 진수(건조한 배를 처음 물에 띄우는 것)한 지 1년 6개월이나 지 났는데도 취역(본 임무에 투입하는 것)하지 않은 것이 의문으로 제기되 었다. 보통 해군 함정은 진수한 지 1년이 지나면 취역하지만 통영함은

미달로 나왔고 그래서 해군이 (함정을) 인수 하지 않은 상태”였다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 한 예비적 조치로써 유사시에 통영함도 현장 에 투입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한 것” 뿐이라고 밝혔다. 이 말을 해석하자면 ‘유사시’에 통영 함을 투입할 수는 있었지만 ‘유사시’가 아니 라고 판단해 투입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수백 명의 국민이 수장된 세월호 참사가 ‘유 사시’가 아니라고 판단한 이는 과연 누구인가. 상황이 이렇게 되자 통영함이 출항하지 않은 이유가 쟁점이 되었다. 정부는 통영함의 비리

작전요구성능(ROC) 미달을 이유로 2013년 10월부터, 12월, 2014년 3월까지 인 수가 보류된 것이다. 통영함 비리 몸통은 황기철인가? 통영함 비리가 수사된 지 1년, 결과는 자못 충 격적이다. 세월호 사건 당시 통영함을 파견하 라고 두 차례나 지시했던 황기철 해군참모총 장이 사실상 통영함 비리의 몸통으로 지목된 것이다. 1년 전, 세월호 사건 당시 황기철 참모총장은 23


세상의 모든 무기

계속적으로 통영함 투입을 지시하였다. 그가

없다. 세월호 사건 당시 통합진보당 김선동 전

만일 통영함 비리에 연루되어있었다면, 불법

의원은 해군참모총장의 지시를 거부할 권한

납품된 통영함을 투입하라고 지시했겠는가?

을 가진 이는 군령의 지위상 합참의장과 대통

게다가 해군참모총장의 지시는 이후 두 차례

령 두 사람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당시 한

나 묵살되었다. 군에서 동일한 명령이 두 번

국군 최윤희 합참의장은 최초의 해군출신 합

내려지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인데, 더군다나 해

찬의장이었다. 육군중심의 대한민국 군대에서

군참모총장의 명령이 묵살된 것이다.

최 합함의장은 황기철 해군참모총장과 가까 운 사이일 수밖에 없다. 퇴역한 한 해군 중령

황기철 총장이 구속된 과정도 전격적이다. 황

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해참총장이 이런 명령

기철 총장은 통영함 비리과정에서 금품을 받

을 내릴 때는 합참의장과는 상의했을 것인 바

은 것도 아니고 남품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한

내가 아는 합창의장 최윤희 대장이 막았을 리

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납품업체 선정은 실무

는 전혀 없고 그 윗선일텐데 그렇다면 그 윗선

자들에게 대부분 권한이 위임돼 있어 영향력

은 국방장관, 국정원장 등 육사출신 정치군인

을 끼칠 사안이 아니었다고 밝혔다. <한겨레신

들과 대통령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문>은 3월 22일, 익명의 한 제독이 “이유가 있 겠지만, 돈을 받은 것도 아닌데 (직전 참모총

황기철 해군참모총장은 2014년 4월 16일, 세

장을) 구속까지 하다니 너무한 것 아니냐”고

월호 구조과정에서 통영함 출동을 종용하며

반문했다고 보도하였다.

윗선과 마찰을 빚은 것인가? 정말로 황기철 전 총장이 통영함 비리에 연루되어 있다면 황

상황이 이렇게 되니, 황기철 참모총장의 구속

전 총장은 통영함의 상태에 대해 잘 알고 있었

을 두고 지난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24


세상의 모든 무기

전 총장은 통영함의 비리상황을 몰 랐기 때문에 통영함 출동명령을 내 린 것이 아닐까? 그런데 황 전총장 은 지금 구속되어 “비리군장성”이란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이제 누구도 황 전 총장의 양심선언에는 귀를 기 울이지 않게 되었다. 그런 측면에서 통영함의 비리과정이 면밀히 수사되어야 한다. 황기철 총 참모총장이 스스로 통영함을 출동시키려 한

장은 구체적으로 어떤 혐의로 구속

것인가? 게다가 통영함의 비리가 드러나면 자

되었는가? 일부 해군제독의 발언처럼 뇌물을

신이 감옥을 가야하는 상황이다. 상식적으로

받은 것도 아닌데, H사 제품이 납품될 수 있도

스스로 출동명령을 내릴 수가 없는 상황이다.

록 일을 잘 처리하라는 취지의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정작 해군참모총장의 명령에도 불구하

는 것이 구속사유가 되는가? 그리고, 소나장

고 통영함은 출동되지 않았다.

비가 먹통이라고 해서 통영함이 출항하지 못 한 것도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사 당시

그 당시 황기철 해군참모총장이 통영함 출동

통영함은 왜 출항하지 않았는가?

명령만 내리지 않았다면 군의 구조소홀 문제 가 이처럼 비판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측

참사는 1년이 지났지만 밝혀야 할 과제는 여

면에서 하나의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황기철

전히 산적해 있다. 25


동아시아 역사 칼럼

카이로-얄타 회담

[

조선은 30년은 더 신탁통치를 받아야 한다

http://mag-mkyd21.tistory.com/156

26

[


동아시아 역사 칼럼

2차 대전에 참전한 미국, 대일전쟁을 시작하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것을 계기로 동아시아 정책을 수정해야 했습니다.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미국은 조선과의 외교를 완전 히 단절한 1905년 이래로 30여 년간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승인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의 독립에 대한 어떠한 지원도 하지 않고 있었 습니다. 그러나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하와 이의 진주만을 공습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발 발하자 상황은 완전히 변해버렸습니다.

었습니다. 종전 후 일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2차 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1943년 11 월 22일, 미국의 F.루스벨트와 영국의 처칠, 그리고 중국의 장개석은 이른바 카이로 선언 으로 알려진 ‘연합국의 대일 전쟁목표에 대한 포괄적인 성명’을 발표합니다. 세 명의 연합 국 지도자들은 “한국의 노예 상태에 유념하여 적당한 시기에(혹은 적절한 절차에 따라: in due course) 한국을 자유 독립시키기로 결의 한다”고 천명했습니다. “적당한 시기에”라고

일본과의 전쟁을 시작한 미국은 이제 일본의 가장 중요한 식민지 중의 하나였던 한반도 문 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 습니다. 당시 미국은 이미 세계 최고의 생산력 을 자랑하고 있었고, 군비 측면에서도 일본과 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군비측면 에서만 본다면 태평양 전쟁은 사실상 일본 군 부의 자멸적인 행동에 불과했고, 전쟁의 결론 은 진주만 공습 때부터 나있던 것이나 다름없

27


동아시아 역사 칼럼

명시된 이 선언의 초안은 원래 “가능한 한 빠

위임통치 아래 놓이게 될 것이라는 소문은 많

른 시기(at the earlist possible moment)”였지

은 독립운동가들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만 F.루스벨트에 의해 “적합한 시점에(at the proper moment)”로, 다시 처칠에 의해 “적당

미국의 전후 세계질서 재편과 한반도 문제

한 시기에(in due course)”로 수정되었습니다. “in due course”라는 말은 ‘적당한 시기에’ 혹은 ‘적절한 절차에 따라’ 등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루스벨트와 처칠이 수차례나 수정했 다는 것만 보아도 매우 민감한 단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초안에서 ‘가능한 한 빠른 시기’ 라고 명시되어 있던 것을 “in due course”라 는 모호한 표현으로 바꾼 것을 보면 이들이 한 국의 독립문제를 일부러 애매하게 처리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카이로 회담 이후 한국의 보호국화와 관련해서 미국은 계속 모호한 태도를 취합니 다. 사실 미국의 시각에서 볼 때, 카이로 회담 에서 언급한 한국문제에 대한 결정은 한국인 들의 미래와는 무관하게 회담 당사자인 3국 중 어느 한 나라의 단독 행동을 방지하기 위한 안전장치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카이로 회담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은 아직 한 국의 완전한 독립에 대한 어떤 입장도 취하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미국의 이와 같은 태도

“in due course”라는 말은 다양하게 해석될

는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요청을

여지가 많았습니다. <뉴욕 타임즈>는 사설에

지속적으로 무시하고, 미국 내의 한국위원회

서 그 문구는 “자치 능력이 생길 때까지 한

와 같은 한인들의 외교활동을 무시해온 것과

국이 어떤 종류의 보호국-아마도 중국의 보

일맥상통하는 것이었습니다.

호국-아래 놓이게 될 것임을 의미함에 틀림없 다”고 논평했습니다. 한국의 지도자들도 그 문 구로 인해 혼란에 빠졌습니다. 한국이 중국의 28

이런 미국의 모호한 태도는 다른 자료들을 통 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42년 4월 미


동아시아 역사 칼럼

국무성 정치 담당 고문 혼벡은 “한국을 독립

미국은 2차 대전이 종결되면 독일이나 일본뿐

국가로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은 후일 미국을

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역시 과거의 식민지

가장 곤혹스런 상황에 빠뜨리는 하나의 요소

를 유지할 능력을 잃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습

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약속 불가 입장을 밝

니다. 그리고 미국은 이들 국가의 식민지였던

혔습니다. 또한 1943년 3월 헐 미 국무장관은

나라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지배하고자 했습니

이든 영국 외상과의 회담에서 식민지 국가들

다. 이 새로운 통치 방식이 바로 ‘신탁통치’였

에 대한 신탁 통치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고, ‘적절한 절차’란 신생 독립국가들의 민족

식민지 국가들의 자치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

주의를 말살하고 미국의 지배질서를 주입시키

이 그 이유였습니다.

는 것이었으며, ‘적절한 시기’란 이 절차가 완 료되고 미국의 의사에 동의하는 정권이 수립

‘독립’을 가장한 제국주의자들의 잇속 챙기기

되는 때를 말하는 셈이었습니다.

결국 이런 정황들로 보아서, 한국의 독립에 대

얄타에서 만난 루스벨트와 스탈린,

한 미국의 인식은 한반도를 완전한 독립국가

그들의 동상이몽

로 만들기 보다는 ‘적절한 절차에 따라서’ 독 립시키되, 상당기간 열강의 지배를 받는 반쪽

독일과 일본이 항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짜리 독립국으로 만들겠다는 것에 가까웠습니

1945년 2월 미국의 F.루스벨트와 영국의 처

다. 여기서 이들이 말한 ‘독립’이란 제국주의

칠,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은 크림반도의 얄타

국가들의 정치적 탐욕을 호도하려는 선전 문

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이 자리에서 루스벨

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미국

트는 스탈린에게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 문제

의 전후 세계질서 재편 전략에서 보다 구체적

를 제기했습니다. 루스벨트는 한국을 소련·미

으로 현실화 됩니다.

국·중국의 신탁통치 아래 둘 것을 고려중이라 29


동아시아 역사 칼럼

었습니다. 일본과의 전쟁에 대한 스탈린의 입장은 유럽 전선에서 독일과의 전쟁을 마무 리 짓고 한 숨 돌린 이후에 시작해도 손해 볼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소련의 입장에서는 수십 년 전 자신들( 당시 제정 러시아)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렸 던 러일전쟁 전후 배상과정에서 일본에 빼앗 긴 것들을 찾아오는 것은 물론, 더 큰 이권을 얻어내고 싶었을 것입니다. 소련은 연합국에 일본의 홋카이도까지 분할해달라고 요구했 지만, 결국 만주의 철도와 항만에 대한 배타 고 하면서, 필리핀의 경우 국민들이 자치를 준

적인 이권을 보장받는다는 언급에 만족해야

비하는 데 약 50년이 걸렸다고 지적했습니다.

했습니다. 자신들의 모든 요구가 관철되지는

스탈린은 신탁통치기간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

않았던 소련은, 대일 참전을 독일 항복 후 3개

겠다고 답변하면서, 한국에 외국군대가 주둔

월 이내에 하겠다면서 지연술을 펼쳤습니다.

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언급을 남겼습니다. 미국은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직후부 터 소련의 극동정책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습 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동 전선에 많은 역 량을 기울이지 못했던 미국은 소련의 힘을 빌 어 일본과의 전쟁을 하루빨리 마무리 짓고 싶 30

가시화된 승리, 한반도에 무지했던 연합국 지도자들 1945년 5월 히틀러가 자살함으로써 독일이 항복을 선언합니다. 이제 일본의 패배는 정말


동아시아 역사 칼럼

시간문제가 되어버렸습니다. 연합국의 승리가

일의 포츠담에서 회담을 가지고, 향후의 세계

눈앞에 다가오자, 미·영·소 3국은 본격적으로

질서에 대한 논의를 갖습니다. 공식 회담이 진

전후 질서를 재편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합니

행되는 동안 한국문제는 단지 두 번(정치적 차

다.

원과 군사적 차원) 지나가는 투로만 언급되었

한편, 1945년 4월 F.루스벨트가 사망하고 부

습니다.

통령이었던 트루먼이 33대 미국 대통령에 취

트루먼, 애틀리 그리고 후에 합류한 장제스가

임합니다. 그러나 후임자 트루먼 역시 한국에

공포한 포츠담 선언은 “카이로 선언의 조항을

대해 무지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연합국

준수할 것”임을 천명했는데 이는 한국의 독립

지도자들의 극동 문제에 대한 무지와 오판으

에 관해 ‘보호국화’할 것임을 다시 확인하는

로 인해, 한반도의 운명은 점점 안개 속으로

조치였습니다. 또 일본의 즉각적인 항복을 요

빨려 들어갑니다. 이들은 극동에서 자신들의

구하는 한편, 일본의 영토를 본토 4개 섬으로

이익만을 실현하려 했을 뿐, 한반도와 그 민중

제한함으로써, 한국이 일본의 영향력에서 완

들의 상황에 대해서는 완전히 까막눈이었습니

전히 벗어나게 될 것임을 간접적으로만 인정

다. 2차 대전 종전 후, 한반도 문제가 복잡해

했습니다.

진 것은 전적으로 전후 질서 재편에 관한 트루 먼 등 연합국 지도자들의 잘못된 판단 때문이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와

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

에 이르기까지 연합국 지도자들의 의중을 보 다 자세히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의 트루먼, 소련의 스탈린, 영국의 애틀리 (처칠의 후임) 등 3국의 정상들은 7월 26일 독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른 45년 여름에 는, 가미카제(神風) 전술로 잠시나마 미국을 주춤거리게 했던 일본의 마지막 발악도 거의

31


동아시아 역사 칼럼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이

었습니다. 결국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

제 일본 본토와 한반도, 그리고 만주를 점령할

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습니다. 소련은 8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 대통령

월 9일에 서둘러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소련-

이 된 트루먼은 만주 관동군 소탕에 미국 군

만주 국경을 넘어 진격을 시작합니다.

인의 피를 흘리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미군 은 태평양 지역에서 일본군을 물리치고 있었 지만, 아직 만주에는 ‘세계 최강’을 자처하는 관동군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트 루먼은 미군이 본토에 상륙해도 관동군이 계 속 저항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트루먼은 관동군을 무장해제 시키기 위해 소련의 참전 을 계속 종용했습니다. 급할 것이 없는 소련으 로서는 홋카이도를 소련이 점령하게 해달라면 서 지연작전을 펼쳤습니다.

한민족 불행의 씨앗, 트루먼의 분할점령안 트루먼은 8.15 직전에 소련에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해 점령하자는 안을 제시했습니다. 이것은 대일 전쟁에서 ‘세계 최 강’ 관동군을 무참히 깨뜨리며 쾌속 남하하는 소련군의 진격을 한반도에서 멈추게 하기 위 한 제안이었습니다. 트루먼은 소련이 한반도 를 넘어 일본 본토의 홋카이도까지 넘보는 것 을 걱정스러워했지만, 이것은 며칠되지 않아

한편, 이 즈음 미국에서 완성단계에 들어선 원

기우로 밝혀졌습니다. 원자폭탄의 거대한 파

자폭탄은 각국의 이해관계를 뒤흔들기에 충분

괴력에 놀란 일본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고,

했습니다. 일본 본토에 원자폭탄이 투하될 것

일본 천황 히로히토는 곧 무조건 항복을 선언

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스탈린은 서둘러 대일

합니다.

선전포고를 지시했습니다. 원자폭탄의 투하로 일본이 항복을 해버리면 자신들은 전승국의 이권을 하나도 챙기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

32

일본의 패망이 현실로 다가오자,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우국지사들은 해방된 조국 의 청사진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미국과 소련


동아시아 역사 칼럼

이 한반도에 개입하면서부터 완전한 자주 독

은 모습은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과는 무관하

립은 쉽지 않아 보였지만, 그래도 한반도의 허

게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활

리가 잘릴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

동비는 다름 아니라, 조국과 이역만리에서 피

습니다. 이국에서 수십 년을 풍찬노숙하며 나

땀흘려 일해 온 동포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라를 되찾기 위해 싸웠던 사람들의 통일 독립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그런 돈을 가지

조국의 꿈은 미국의 38선 분할점령안에 의해

고 미국인들에게 로비나 하고 다니면서, 요행

물거품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으로 나라를 찾아올 궁리나 하고 있었던 것이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무지했던 데에는...

었습니다. 중국이나 소련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인사들이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

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하여, 조선의 독립

습니다. 그것은 미국이 이처럼 한국에 무지했

에 대한 그 나라 지도층의 지지를 얻어낸 데

던 데에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인사들

반해, 이승만을 비롯한 미국의 독립운동가들

의 무능에도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에

은 멸시에 가까운 대우를 받았습니다. 때문에

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과 같은 인사들은

소련과 중국은 조선의 자치능력을 인정했던

자신들 내부에서의 알력 다툼도 제어하지 못

반면, 미국은 한국의 자치에 대해 아주 회의적

한 채, 무능한 모습을 미국 정부에 그대로 보

인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일본 패망 후 한반도

여주었습니다. 미국에서 활동하던 이승만과 ‘

가 분단된 데에는 물론 외세에 그 일차적인 책

구미위원회’ 등은 수차례나 대한민국 임시정

임이 있지만,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

부를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미국은 이들

들 같이 실력도 없고 헌신적이지도 않으면서

의 요청에 단 한 번도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외세에 빌붙었던 우익 정치가들의 책임도 적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의 이와 같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33


풀어쓰는 경제이슈

미국 금융패권 몰락을 보여준 AIIB

http://mag-mkyd21.tistory.com/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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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쓰는 경제이슈

중국 주도로 만들어지고 있는 아시아인프라투

여를 결정했다.

자은행(AIIB : Asian Infrastructure Investment Bank)으로 세계가 시끄럽다. 중국 주도의 AIIB

AIIB가 대체 뭔가

가 단순히 국제금융기구를 하나 만드는 문제 를 넘어서 IMF(국제통화기금), WB(세계은행),

AIIB는 2013년 10월 시진핑 주석이 창설을

ADB(아시아개발은행) 등 미국 중심의 금융경

제안한 국제금융기구다. 1년 후 아시아 21개

제 질서에 대응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

국 - 중국, 인도, 파키스탄, 몽골, 스리랑카, 우

문이다.

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동남아국가연합 9개 회원국(인도네시아 제외), 방글라데시, 캄보디

거기에다 경제규모가 작은 아시아 몇몇 국가

아, 쿠웨이트, 네팔, 오만 등 - 이 설립을 위한

들만이 아니라 영국이 참여하기로 한데 이어

양해각서(MOU)에 공식 서명했다.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 등도 줄줄이 참여 의 사를 밝혔다. G7이라 불리며 세계질서를 좌지

2014년 11월에는 인도네시아가, 2015년 1월

우지 한다고 이야기되는 일곱 국가 중 네 개국

에는 뉴질랜드, 몰디브, 사우디아라비아, 타지

이 참여를 결정한 것이다. 미국의 핵심 동맹국

키스탄이, 2월에는 요르단이 추가로 서명해

이라 할 수 있는 영국의 AIIB 가입 결정은 미

현재 28개국으로 늘어났다. 최근에는 영국이

국과 사전 논의 없이 이뤄진 것이어서 미국에

G7 국가로는 처음으로 참여를 결정했고, 프

전해진 충격은 더 컸다. 미국의 동맹국인 호주

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 국가들도 참여

역시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

를 선언했다. 미국의 맹방중 하나인 호주를 비 롯해, 중동의 사우디아라비아, 아프리카대륙

‘한미동맹’을 최우선의 외교정책으로 내걸고

의 이집트도 참여한다. 중국 재정부 홈페이지

있는 우리나라는 이곳저곳의 눈치를 보다 참

에 따르면, 신청 마감일인 3월 31일 오후 6시 35


풀어쓰는 경제이슈

기준으로 참가 신청서를 제출한 국가는 46개

등을 건설하는데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 목적

국이다. 이 명단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참가

이다. 초기 자본금 규모는 500억 달러(약 55

의사를 밝힌 대만을 합하면 47개국이다. 6월

조원)이며 이후 1000억 달러를 목표로 하고

에는 협정문에 서명하고 2015년 말 공식 출

있다. 회원국이 사회기반시설 건설을 위한 자

범할 예정이다.

금을 요청하면 자본금 내에서 이를 빌려주고 향후 돌려받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AIIB는 아시아 지역의 국가들, 특히 저개발 국 가들의 사회기반시설 구축을 위한 자금을 지

성장이 많이 되지 못하거나 정치적으로 불안

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쉽게 말해 저개발

정한 국가들이 시장에서 돈을 빌리려면 높은

국가들이 도로나 철도를 깔고, 항만이나 공항

이자(연 7~8% 가량)를 줘야 한다. 소위 말하

▼ 출처 ㅣ 서울경제

36


풀어쓰는 경제이슈

는 신용등급이 낮기 때문이다. 하지만 AIIB와

국제금융기구들은 대게 ‘1달러 1표’의 원리

같은 금융기구는 1% 안팎의 저금리로 장기간

로 운영된다. 즉 돈을 많이 낸 국가가 더 큰

돈을 빌려준다. 또한 중국이나 독일 같은 경제

투표권과 영향력을 갖는다. 미국은 IMF 의결

규모가 큰 국가들이 참여하는 AIIB는 저개발

권 중 가장 많은 17% 이상을 갖고 있으면서

국가들이 국제시장에서 자금을 빌리려 할 때

이 기구의 운영을 좌지우지 해왔다. 더군다나

보다 손쉽게 자금을 모을 수 있다. 즉, 중국, 영

IMF의 주요 결정은 85% 이상의 동의가 필요

국, 독일 등이 참여하는 AIIB가 발행하는 채권

하다. 즉 17%의 의결 지분을 갖고 있는 미국

은 국제시장에서 최우량 등급을 받을 수 있고

은 어떤 결정에 대해서도 거부권을 갖고 있는

저금리로 자금을 조달 할 수 있다.

것이다. 미국이 동의하지 않으면 IMF는 주요 한 결정을 내릴 수 없다.

AIIB와 흔들리는 미국중심 국제금융질서 반면 세계 GDP의 15.4%를 차지하는 경제규 그렇다면 중국이 AIIB를 만들려는 의도는 무

모 세계 2위인 중국의 IMF 의결 지분은 4%정

엇일까?

도에 불과하다. 세계 GDP의 5.4%를 차지하고 있는 인도는 2%대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중

우선, 중국은 AIIB를 통해 미국중심 금융시스

국 등의 신흥국들은 특히 2008년 미국 발 경

템을 견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 동안

제위기 이후 경제규모에 합당한 의결권 확대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금융기구들은 경제규모

를 요구해 왔다. 하지만 미국은 2010년 자신

가 커지고 있는 신흥국들의 이해를 전혀 반영

의 지분 17.67%에서 고작 0.2%~0.3%포인

하지 못해 왔고, 미국 중심 금융자본의 이익을

트만을 포기하는 안을 제시했고, 그마저도 미

대변하는 역할을 해 왔다.

의회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37


풀어쓰는 경제이슈

▲ 출처 : 경향신문

의 가혹한 긴축 프로그램을 겪은 바 있다.

나아가 그동안 IMF는 돈을 빌려주는 조건으로

이와는 대조적으로 미국은 2008년 자국 금융

가혹한 긴축과 금리 인상을 요구해 왔다. 즉,

위기에 대처하면서는 무너져 가는 기업들을

부실하게 보이는 기업들은 죽이고, 허리띠를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

졸라매서 돈을 갚으라는 거였다. 그로인해 기

대신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뿌렸다. 신흥국

업들이 헐값에 외국자본에게 넘어갔고, 일자

들에게 금리인상을 요구했던 것과는 달리 미

리를 잃은 노동자들은 거리로 내몰렸다. 국가

국은 아직도 제로 수준의 초저금리를 유지하

도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으니 복지에 지출되

고 있다. 자신들에게는 관대한 기준을 적용하

는 돈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한국 역시 IMF

고 다른 국가들에게는 가혹한 기준을 들이댄

38


풀어쓰는 경제이슈

것이다. 여타의 국가들이 불만이 쌓인 것은 당

일본

15.67%

미국

15.56%

AIIB와 같이 아시아지역의 자금지원을 위한 기

중국

6.47%

존의 국제기구인 아시아개발은행(ADB)도 마

인도

6.357%

호주

5.81%

는 총 67개 회원국으로 구성돼 있지만 일본

캐나다

5.252%

지분은 2013년말 기준 15.67%며, 미국은

인도네시아

5.173%

15.56%의 지분을 갖고 있다. 미국과 일본이

한국

5.058%

독일

4.344%

기타

30.306%

연해 보인다.

찬가지다. 자본금 규모가 1629억달러인 ADB 는 미국과 일본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ADB

협의해 사업을 결정하는 구조다. 현직을 포함 한 역대 ADB 총재 9명은 모두 일본인이다. ADB지분구조(2013년말 기준) ▶

세계은행(world bank)도 다르지 않다. 세계은

중국은 기존 미국 중심의 국제금융기구들 속

행의 대출에도 항상 까다로운 조건들이 요구

에서는 영향력을 확대할 수 없자, 자신이 주도

된다. 대부분이 미국 대기업들의 개발도상국

할 수 있는 국제금융기구 건설에 나서게 된 것

진출을 돕기 위한 것들이다(프레시안, “중국,

이다. 중국은 AIIB의 의결권 기준으로 국내총

‘대안 세계’ 건설에 나서다” 2015.03.19). 미

생산(GDP)을 제시하고 있다. 즉 경제규모가

국은 15.85%로 최대 지분을 가지고 있다. 세

큰 나라일수록 의결권을 많이 가지게 되는 구

계은행에서 중국의 지분율은 4.42%이다.

조다. 미국이 참여하지 않는 이상 경제규모 2

39


풀어쓰는 경제이슈

위인 중국이 가장 큰 지분율을 가지게 된다.

일대일로 사업은 단순히 경제적 의미만을 가

중국은 AIIB 외에도 러시아, 인도, 브라질 등이

지고 있지 않다. 미국은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

참여하는 BRICs은행 창립도 주도하고 있다.

하기 위해서 중국을 봉쇄하려는 전략을 펴고 있다. 미국은 해군력이 강한 일본을 통해 동중

AIIB와 미국의 대중국 봉쇄망의 무력화

국해를, 필리핀을 통해 말라카 해협을 봉쇄한 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인

다음으로 중국은 AIIB를 통해 일대일로(一帶

도와의 정치군사적 협력도 강화하려 한다. 나

一路 One Belt One Road) 구상을 실현하려

아가 전반적인 동북아시아 국가들을 견제하기

한다. 일대일로는 중국 서쪽에 인접한 중앙아

위해 ‘아시와 회귀전략’을 펴고 있다.

시아와 동남아시아에 대규모 인프라를 건설해 중국에서 유럽까지 이어지는 물류, 통신, 에

이런 의미에서 일대일로 사업은 미국의 봉쇄

너지 망을 구축하는 대형 프로젝트다. 이것이

망을 뚫고 아시아대륙과 유럽대륙을 잇는 사

실현되면 26개 국가, 인구 44억명, 경제 규모

업이라 할 수 있다(따라서 유럽 국가들, 특히

21조달러에 이르는 거대한 경제 공 동체가 탄생한다. 물론 많은 자금이 필요할 텐데 중국은 이 사업에 들 어가는 4조위안(약 710조원)가량을 AIIB를 통해 조달하려 한다. 중국의 입장에서 일대일로 사업에 자금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기존 의 국제금융질서로는 불가능하다. ▲ 출처 ㅣ 뉴스핌 40


풀어쓰는 경제이슈

영국의 가입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이런 사

정도에 불과하다. 반면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

업에 미국이 좌지우지 하는 국제금융기구들이

은 철도나 항만 등 인프라 건설이 핵심이다.

돈을 빌려주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중국 입장에서는 기존 국제금융 기구들에게 의존해서는 대규모 인프라 건설을 하기 어려

게다가 중국은 러시아 극동지방이나 북한과의

운 구도다. 중국은 앞으로 독자적인 금융기구

경제협력을 강화하려 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

건설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이다.

에 적대적인 나라들을 상대로 아시아개발은행 (ADB) 등이 자금을 지원할리는 만무하다. 예

박근혜 대통령은 ‘통일대박’을 이야기하고 있

를 들어 두만강 접경지역을 국제자유무역지대

고, ‘동북아개발은행’을 내세운 바 있다. 경

로 조성하기 위한 두만강 개발계획이 1992년

제적인 측면에서 통일이 ‘대박’이 되려면 아

출범했지만 이 사업은 현재 지지부진하다. 정

시아 대륙이 유럽과 연결되는 것은 상당히 중

부 관계자는 “두만강 개발계획이 진전되지 않

요한 문제다. 나아가 새롭게 재편되는 국제금

은 것은 ADB가 돈을 대주지 않았기 때문”이

융 질서에 우리도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라며 단순히 러시아나 북한이 ADB회원국이

AIIB가 출범하면 아시아 지역에서는 ADB의

아닌 것을 넘어서 ADB와 친소관계(친하지 않

독점구도가 깨지고 미국 중심 국제금융질서

은 것)도 작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조선비즈,

에 파열구가 생긴다. 이 구멍은 점점 커져갈

2015.03.19).

것이다. 미국과 혈맹을 과시하던 많은 국가들 이 미국과 상의도 없이 AIIB에 참여 의사를 밝

덧붙여 아시아개발은행(ADB)은 인프라사업

히고 있는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한미동맹만

보다는 빈곤퇴치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인프라

을 ‘신성시’해서는 향후 세계질서 변화에 주

사업에 대한 재원은 전체의 10% 수준이다. 세

동적으로 대응 할 수 없다.

계은행 역시 인프라 사업에 대한 재원은 10% 41


예술, 그 본질적 가치

변절과 증오, 전쟁 속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

http://mag-mkyd21.tistory.com/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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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그 본질적 가치

봄이다. 따뜻한 겨울을 우리나라에서 보낸 겨

새. 한 때 황새를 자처했다가 뱁새가 된 새 종

울 철새들은 이제 다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런

류도 가지가지다.

데 아직도 못 돌아간 철새들이 우리나라 정치 판을 기웃기웃 거린다. 이쪽 편에 갔다가 저쪽

자신을 버리고 이해관계를 따라 이쪽저쪽 옮

편에 간 새. 시체를 찾아 해매는 까마귀 같은

겨 다녔던 이들의 말로는 별반 다르지 않다.

<1808년 5월 3일의 학살, 1814년, 캔버스에 유화, 266×345㎝,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예술, 그 본질적 가치

예술가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바로 고야

진압된다. 그 뒤 스페인 민중들은 게릴라 전투

다. 그는 스페인의 궁정화가로 살아가다 프랑

를 하며 6년간 스페인 독립전쟁을 시작했다.

스가 쳐들어오면 프랑스로, 영국이 쳐들어오 면 영국으로 날아다니다 인생말로에 거리에

순결한 민중을 상징하는 백색의 사내가 순교

서 객사한다.

를 암시하듯 두 손을 들고 두려움에 떠는 표 정으로 제국의 군인들을 바라보고 있다. 아래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

는 선혈이 낭자하고 피가 웅덩이를 이뤘다. 차

는 가난한 도금공의 아들로 태어나 1789년 궁

곡차곡 쌓여진 시신과 오열하는 여인들, 그들

정화가가 됐다. 스페인 왕과 귀족들은 고야에

은 잔혹했다.

게 그림을 의뢰했고, 그는 당대 최고의 화가로 출세해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그는

잔혹한 군인들의 뒷모습은 얼굴조차 보이지

불행했다. 그는 열병을 앓아 귀머거리가 되었

않게 처리했으며, 차디찬 총구는 가슴을 직접

으며, 잘나가던 스페인의 궁정화가로 떵떵거

겨누고 있다. 폭력과 압제를 사실적으로 묘사

리며 살게 되자 프랑스의 침공을 받는다. 그리

한 이 작품은 전쟁의 참상을 탁월하게 전달하

고 삶의 궤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고 있다.

당시 프랑스 군은 무자비하게 스페인 민중들

그러나 구원 따위는 오지 않는다

을 탄압했다. 고문, 학살, 겁탈, 상상을 초월하 는 만행은 계속 되자 1808년 5월 2일, 스페

프란시스코 고야는 전쟁의 비극을 판화집 <전

인 민중은 나폴레옹 군에게 항거하여 봉기했

쟁의 참화>에 아로 새겼다. 팔과 다리 머리가

다. 그러나 이튿날인 5월 3일 밤, 수백 명의 민

잘려나간 처참한 살육장면을 그린 판화에는 ‘

중이 무차별 총살을 당하고, 반란은 잔혹하게

구원 따위는 오지 않는다’는 절망적인 문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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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그 본질적 가치

적혀있었다. 전쟁의 이면과 본질을 표 현한 작품들, 최초의 반전(反戰)화는 이 렇게 시작되었다. ◀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1819~23 년, 회반죽을 바른 캔버스에 유채, 146x83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고야는 전쟁 중 프랑스군에 잡혀 나폴 레옹의 형인 조세프(호세 1세) 앞에 끌 려갔다. 그러나 고야는 목숨을 부지하 려 침략자인 프랑스 편에 돌아서 호세 1세의 초상을 그렸다. 그는 위엄 있는 초상화에 담긴 충성심을 인정받아 훈장 까지 받았다. 매국은 한번이 쉽지 두 번 은 어렵지 않았다. 스페인 마드리드를 영국의 웰링턴 장군이 침공하자 그는 웰링턴의 초상화도 그렸다. 그는 기회주의자였다. 일제 강점기 친 일파가 친미파로 변신한 것처럼, 고야 는 권력과 돈에 충실했다. 그래도 일말 45


예술, 그 본질적 가치

의 양심이 있었을까. 고야는 프랑스 군대가 물

바로 고야 자신이다. 괴물로 변해버린 자신을

러나고 스페인 왕정이 다시 들어서자 궁정화

증오하며 자신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을 없애

가로 일하다가 외딴 ‘귀머거리의 집’에 홀로

버리고 싶은 욕망을 적나라하게 잘 담고 있다.

들어가 자신을 저주하고 학대하며 기괴한 그

이 그림은 인간의 욕망과 타락, 광기에 대해

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려진 별장 ‘

직관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귀머거리의 집’ 벽의 ‘검은 그림’ 시리즈 14 편은 그가 죽은 지 40년 후 세상에 알려졌다.

검은 그림 시리즈 중에는 이색적인 개 그림도 있다. 모래에 묻히는 개는 사막에 삼켜져 구제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 모래 늪의 개

불능의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개 역 시 고야 자신이다.

검은 그림 시리즈 중 대표작 <자식을 삼 키는 사투르누스>다. 그리스 신화에서 농경의 신인 사투르누스는 자신의 아 들이 자신을 거꾸러뜨리고 새로운 왕 이 될 것이라는 신의 계시를 받고 자기 자식을 차례로 잡아먹는다. 그러나 아 내의 방해로 신탁의 주인공인 막내아 들 제우스를 놓치게 되고 결국 사투르 누스는 제우스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왕 위를 빼앗긴다. 그림에서 괴물로 그려진 사투르누스는 46


예술, 그 본질적 가치

▲ <모래 늪의 개, 1819~23년, 회반죽을 바른 캔버

의 마지막 순간에 마주치는 자신의 모습은 어

스에 유채, 134X80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떨지 궁금해진다. 아마도 스스로를 파멸로 몰 고 간 사투르누스의 모습을 직면하지 않을까.

친일파, 변절자의 나라 고야는 괴로워했다. 과연 우리나라에 있는 속 칭 철새들도 괴로워할지는 의문이다. 민주주 의가 파괴된 그 자리에 들어가려 난리굿을 치 는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 뜻과 의지를 모아 하나로 싸워야 이길 수 있는데 말이다.

한 때 독립을 이야기했던 자들이 친일로 변절 하고, 민중해방을 외쳤던 자들은 뉴라이트로 변절했다. 이들은 사회요직을 독식하며 떵떵 거리고 살고 있다. 과연 그들에게 일말의 양심 이 남아있을까. 자신을 부정하며 스스로를 파괴시킨 영혼은 쉽게 복구되지 않는다. 고야처럼 양심이 있다 면 자신을 돌아보며 괴로워하겠지만, 그럴 기 회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생

구원 따위는 오지 않는다

그렇다. 우리 사회는 변절이 추앙받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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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미래다

새바람주의보 발령 새바람 신임대표 김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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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멈추지 않고 폭주하게 만드는 고농축석탄이 되고 싶습니다 http://mag-mkyd21.tistory.com/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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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미래다

국정원 감시단, 2014년 지방선거에서의 ‘박근혜 퇴진 벽보’, 세월호 농성장 지킴이 등 언제 나 실천의 최선두에서 사람들에게 많은 모범을 보여주었던 서울민권연대 김수근 회원. 그가 3월 서울민권연대 청년모임 ‘새바람’의 신임 대표가 되었다. 새바람 대표가 되자마자 그는 대북전단 살포를 막기 위해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언제나 말이 아닌 실천으로 회원 들에게 많은 울림을 주고 있는 김수근 대표와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김수근 새바람 신임 대표(이하 김) : 솔직히 대표로 선출되고 나서야 실 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의 각 오만으로 이끌어가기에는 내겐 너 무 큰 새바람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 달았습니다. 더군다나 대표자의 경 험이 전혀 없는 저에게는 무모한 도 전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두렵 지는 않습니다. 새바람은 누구도 가 지 못한 길을 걸어왔으며 어떤 장벽 도 뚫고 나갈 잠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새바람이 우리 본 : 이번에 새바람 대표로 선출 되셨습니다. 앞으로의 각오를 들려주세요.

나라를 바꿀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잠재력에 불을 붙일 것입니다. 새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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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미래다

람은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남과 북이 평화통

하겠다”는 것 하나만 꼽아본다면 어떤 것이

일로 나아가는 길을 뚫어내는 폭주기관차가

있을까요?

될 것입니다. 나는 멈추지 않고 폭주하게 만드 는 고농축석탄이 되고 싶습니다. 두고 보십시

김 : 글쎄요. 워낙 이미지가 투쟁하는 모습이

오. 새바람은 승리하는 그 날까지 절대 꺼지지

라, 어떤 사업을 펼치기를 바라실 수도 있겠지

않을 것이며 더 뜨겁게 활활 타오를 것입니다.

만 그것은 제가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은 아니 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꼭 하겠다고 말씀드리

본 : 새바람 대표가 되고 나서 주위에서 어떤

고 싶은 것은 하나입니다. 새바람 전체 회원이

이야기들을 많이 해 주나요?

130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연락이 안 되는 회 원부터 회원으로 가입되었는지 인식조차 못

김 : 다들 힘을 주시려고 좋은 말씀만 많이 해

하고 계신 분들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저

주십니다. 학생운동 안 해본 것이 오히려 새바

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함께 소통하고 이야기

람에 더 활력이 될 것이라고 하시는 분도 계시

할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전체 회원 분들

고, 거리에서 투쟁하는 대표가 필요한 시기라

의 얼굴을 최소한 세 달에 한 번씩은 꼭 보도

고도 하시며 힘을 주시려고 애쓰십니다. 20대

록 하겠습니다. 아직 사람만나는 것이 너무나

회원가입을 위한 대중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치

어렵고 어색한 대표지만 그렇게 하고 싶습니

고 새로운 간부육성을 통해 더욱 패기 넘치는

다. 저에게는 회원 한분 한분이 모두 소중하기

2기 새바람으로의 전환을 총적목표로 밝힌 것

때문입니다.

에 대해 많이 기대된다는 말씀도 해주십니다.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본 : 대학시절부터 사회참여활동(운동)을 하 지는 않았던 것으로 압니다. 이렇게 사회단체

본 : 새바람을 이끌어 가면서 “이것만큼은 꼭 50

활동에 뛰어든 계기가 있다면요? 그리고 지금


우리가 미래다

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은 무엇인가요?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나 라에서는 이런 사람들과 함께 청춘을 바쳐야

김 : 대학생활은 흔히 말하는 폐인생활이었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습니다. 술 먹고, 축구하고, 당구치고, 만화 보

러던 차에 마침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고 어

며 4년을 보냈지요...;;; 그러다가 2008년 졸

떤 말도 필요 없이 무조건 상근을 하기로 결심

업을 앞두고 친형의 권유로 노무사 시험을 준

했습니다. ‘고마운’ 박근혜에게 반드시 퇴진

비하러 서울에 올라왔습니다. 그때가 6월이었

선물을 안겨 줄 것입니다.

는데 광우병촛불이 넘실거리고 있을 때였습니 다. 친형이 학생운동을 하고 있던 때라 촛불집

본 : 국정원 앞에 텐트를 쳤을 때, 손으로 쓴

회를 쉽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7월에

선거 벽보를 붙이고 청계광장 쪽에 선거사무

우연히 듣게 된 강연에서 통일선봉대라는 활

실을 냈을 때,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습니

동을 알고 나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 당시 어떤 마음이었나요?

그래서 학원비로 써야하는 돈을 가지고 통일 선봉대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기억이 아

김 : 국정원감시단은 지금 생각해도 어리둥절

직 저에게는 가장 큰 울림이었던 것 같습니다.

합니다. 그렇게 많은 분들이 호응해 주실 거라

하지만 그때까지는 노무사 시험을 준비하며

고는 생각을 못했기에 함께 했던 김효준 단장

일반 회원으로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 결정

님과 박현탁 동지도 당황해 했었던 기억이 납

적으로 상근활동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은

니다. 주목을 받기 시작한 후에는 기왕 이렇게

2012년 대선 때입니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

된 거 갈 때까지 가보자는 마음으로 오히려 더

는 꼴은 도저히 볼 수 없었기에 대선기간동안

즐겁게 투쟁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서울민권연대에서 자원봉사를 하게 되었습니

도 국정원감시단을 기억해 주시는 분들이 많

다. 그리고 굉장히 열악한 상황에서도 멋있게

아서 쑥스럽기도 합니다만 좋은 추억이 된 것 51


우리가 미래다

같습니다. 작년 지방선거벽보는 벽보 디자 인할 능력과 돈이 없으면 진심 을 담아 손으로 글씨라도 써보 자는 계획이 주요했다고 봅니다. 돈 안 쓰는 선거와 새정치를 갈 망하는 국민들의 마음을 대변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리어카 유세 등을 지원해주신 성과였습니다. 저에 게 지원하느라 다른 후보 분들이 어려움을 많이 겪으셨다는 이야 기를 듣고 죄송한 마음도 들었습 니다. 그래서 다른 후보 분들을 대신해서 제가 언론 사업을 한다 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기존 의 선거운동 형식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분들도 계 셨지만, 국민들의 새정치 열망의 실현을 위해 혁신하려는 전국의 민권연대 회원들이 진정성을 보 여주며 지지를 이끌어내는 과정 52


우리가 미래다

은 너무나 자랑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곳은 어떤 외부의 억압으로부터 당당한 우리 국민들만의 공간이며, 이곳에 대한민국의 민

본 : 그동안 세월호 농성장을 지켜왔던 것으

주주의와 평화통일이 있습니다.

로 압니다. 세월호 참사가 있은 지 만 1년이 다되어 가는데, 그동안 농성장에서 보고, 듣

본 : 얼마 전, ‘청년연대’ 사무실로 들어와 다

고, 느꼈던 것을 이야기 해 주시죠.

른 업무도 함께 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에 대 해 세월호 농성장에 끝까지 남겠다고 했다고

김 : 저는 스탭으로 광화문을 지키긴 했지만

들었습니다. 어떤 마음이었나요?

크게 도움을 드리지는 못했습니다. 재주가 별 로 없어 힘쓰는 일이 저의 주된 업무였습니다.

김 : 욕심입니다. 청년연대 간부로서 더 큰 포

그렇게 생활하며 지금까지 함께해 왔지만 광

부를 가지고 사업해야 함에도 자신만 생각했

화문은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는 힘들 것 같습

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진심입니다. 세월호는

니다. 무엇이라고 정의내리기도 어려운 곳입

누구에게나 같은 마음이겠지만 저에게는 다시

니다. 시민들의 광장이고 가족들이 모이는 집

한 번 선택의 기로에 서게 하였습니다. 운동이

이고 진실을 밝히는 투쟁 현장이며 새로운 나

라는 것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제대로 알

라를 만드는 건설현장이기도 합니다. 광화문

지 못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곳을 지켜야

의 사람들은 가족이 되고, 동지가 되고, 일군

만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상근을 결심하

이 되고, 투사가 됩니다. 남녀노소 각자가 할

면서 빗자루가 되겠다고 했는데 그 말을 지키

수 있는 일을 찾아 최선을 다하며 모든 것을

지 못하더라도 광화문에 빗자루로 남고 싶었

바쳐서 지켜나가는 공간입니다. 서로 알지도

습니다. 새바람 대표가 된 지금 그 마음이 더

못하던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커지고 있습니다. 고스란히 그 마음을 안고 살

겸손하고 변치 않는 사람들이 지켜나가는 이

아가려고 합니다. 53


우리가 미래다

본 : 전국의 회원들이 새바람 신임 대표에 대 해 좀 더 잘 알 수 있도록 자신의 장점과 단점 을 꼽아본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김 : 제 장점은 단순한 뇌구조인 것 같습니다. 선과 악이 분명한 단순한 시대에 거침없이 달 려 나가는 데에는 딱이니까요. 제 단점은 솔직 히 너무 많아서 다 열거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 니다. 그래서 단점은 없는 것으로 하고 앞으로 모두 개선해보겠습니다. 본 : 대표님에게 민권연대는 어떤 곳입니까? 김 : 제가 생각하는 민권연대는 꿈입니다. 꿈 꿔왔던 조직이고 꿈을 포기하지 않는 조직이 고 불가능한 꿈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조직이 고 모두가 꿈꾸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조직이 기 때문입니다. 본 : 끝으로 전국의 민권연대 회원들에게 인 사 부탁드립니다. 김 : 안녕하세요. 서울민권연대 행동하는 서 54


우리가 미래다

울지역 청년모임 새바람 대표 김수근입니다.

시다. 한반도평화가 세계평화입니다. 세계로 뻗

서울에서 곧 거대한 바람이 불 예정입니다. 새

어나갑시다. Fighting~!!

바람주의보 발령입니다. 미리미리 대비하셔서 바람을 태풍으로 맞받아쳐주시면 고맙겠습니 다. 전국의 민권연대가 전 세계를 뒤흔들어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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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을 만나다

‘4월혁명 정신’의 산 증인 ‘사월혁명회’ 정동익 상임의장님을 만나다

http://mag-mkyd21.tistory.com/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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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을 만나다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던 4.19혁명을 빼놓고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없다. 특히 지금과 같이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하며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있고, 국민들이 직접 만든 공식적인 정당을 해산시키는 현실 속에서 4.19혁명은 또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 온다. 4.19혁명의 뜻을 이어오고 있는 사월혁명회의 정동익 상임의장님과의 시간을 가졌다.

본 : 안녕하세요. 먼저 저희 회원들에게 그 동

냐”며 불을 태우는걸 보면서 74년도 10월24

안의 선생님 활동을 간략히 소개부탁 드립니다.

일에 10.24자유언론 실천선언을 하고 외부 기

정동익 상임의장님(이하 정) : 제가 67년부터 75년까지 동아일보 기자를 했습니다. 그 때가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인데 언론탄압이 아주 극심했어요. 지금 국정원 전신인 중앙정보부 직원들이 매일 회사로 드나들면서 일일이 기 사를 이것은 넣어라 빼라 간섭하고. 그 당시 인혁당 가족들이 편집국에 찾아와서 “우리 가족들 살려줘라. 고문당하고 있다는 데 왜 언론에 보도 한줄 안 해주냐” 울부짖 고 하는걸 보면서 기자들이 각성하기 시작했 어요. 대학생들이 광화문 네거리 동아일보 앞 에 와서 신문 화형식을 갖고 “이것도 신문이

관원들 출입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리고 민청 학련 관련자들 고문당한 얘기, 인권에 관한 얘 기, 그동안 실리지 못한 소식들을 우리가 보도 하기 시작하니까 그걸 막기 위해서 광고탄압 을 시작했어요. 이른바 백지광고 사태가 벌어 지자 국민들이 언론자유 살리자며 격려 성금 을 들고 신문사에 달려왔습니다. 유명한 격려 광고인데. 그렇게 버티니까 75년 3월 17일 새 벽 3시에 경찰들이 동아일보사를 뺑 둘러싼 가운데 폭력배들이 몽둥이 들고 쳐 들어와서 우리를 내쫓았어요. 그 이후 40년 동안 거리 의 언론인으로 살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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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을 만나다

113명이 쫓겨나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

민통련)’이에요. 문익환 목사님이 의장을 하시

원회를 결성했는데 약칭이 동아투위인데 제

고 제가 감사로 참여를 했고. 6월 항쟁을 이끈

가 위원장을 했었습니다. 박정희 때 130여명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에 참여해서 공동

이 언론사에서 쫓겨나고 전두환 때 1000여

대표를 했고. 그 뒤에 ‘민통련’이 없어지고 ‘

명이 쫓겨났는데 그 해직언론인들이 만든 단

전민련’, ‘전국연합’, ‘진보연대’로 재야운동

체가 ‘민주언론운동협의회’죠. 언협에서 당시

의 맥이 이어졌는데 이들 민주화운동 조직에

유일한 언론이었던 <말>지를 발행했지요. 초

서 제가 한 번도 떠나 본적이 없습니다.

대의장이 한겨레신문 사장을 하신 송건호 선 생님이고 제가 2대 의장을 맡아 말지 사장을 겸임하였습니다

본 : 한국 민주화운동의 산 증인이신 것 같은 데요. 4.19당시 일화를 소개해주세요.

개인적으로는 도서출판 아침이라고 출판사를

정 : 그런데 4.19 당시 지역마다 4월혁명 양

했어요. 전두환 때는 출판사 하는 것도 굉장히

상이 달랐어요. 제가 전주에서 고등학교 3학

힘들었어요. 걸핏하면 국가보안법으로 잡혀가

년이었는데 전주 쪽에서는 이렇다 할 큰 사건

고. 제일 탄압받은 직종이 출판업입니다. 연인

이 없어 소개할만한 일화가 없네요.

원 100명 이상이 국가보안법으로 잡혀갔어요. 출판인들이 출판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 조직

본 : 그렇다면 어떻게 사월혁명회의 의장까지

한 것이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인데, 거기

하게 되셨나요?

내가 초대회장 맡아가지고 출판탄압에 맞서 서 싸웠습니다. 그 덕에 저도 두차례 감옥 구 경을 했습니다. 6월 항쟁 있기 전에 최초로 재야운동단체가 태동이 되는데 그게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58

정 : 여기 선배들하고 친해가지고 처음 상의 단계부터 참여를 했습니다. 지금 8년째 상임 의장을 맡고 있습니다. 4.19당시의 대학생들만 사월혁명 세대가 아니


스승을 만나다

에요. 처음에는 고등학생들이, 대구 2.28 사건

한국사회를 묘사하고 있는데, “젊은 사람들은

같은 경우 일요일인데 야당 대선 후보 연설을

희망을 잃고 부자는 점점 더 부자가 돼 가고

못 듣게 하려고 학교에 등교시키니깐 거기에

가난한 사람은 점점 더 가난해지고 양심이라

폭발해 가지고 데모가 시작된 게 2.28데모거

는 것을 지키는 사람은 전부 소외되고 배척당

든. 고등학생들이 먼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하고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 뒤에 대학생들이 일어나고.

자들만이 출세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머지않아

사월혁명회가 대학생들만의 조직이 아니고

한국사회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이

4.19 투쟁을 함께한 사람만 하는 곳이 아니에

러한 보고서가 나왔어요. 4.19 전에.

요. 4월혁명 이념과 뜻을 함께 하는 사람이라

마치 지금 나온 보고서 같지 않아요? 연도를

면 누구나 회원이 될 수가 있어요. 우리 회도

써놓지 않으면 지금 얘기입니다. 이처럼 최근

지금 4.19때 대학생이던 분들이 70대 중반을

한국 상황이 4.19 전야하고 너무나 흡사한 상

넘어서니까 빨리 젊어져야 되는 숙제가 있어

황입니다. 4.19 당시 건드리면 터질 듯이 사회

요. 최국장 같은 젊은이들이 우리 회원이 되어

가 곪아 있었고 국민은 불만에 가득 차 있었는

가지고 우리 4.19이념을 계승 발전시키는데

데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익을 담당했으면 좋겠습니다.

4.19 후 제가 61년도에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

본 : 사월혁명 이념에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 이 모여서 만든 단체라고 하셨는데,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사월혁명 이념이란 어떤 겁니까?

학했는데 그 당시 분위기를 보면 지금 현재 운 동 양상하고 똑같은 이념적인 목적으로 학생 들이 움직였어요. 그 당시 대학생들이 한미경제협정반대운동과

정 : 내가 중요한 자료를 찾았는데 4.19가 일

데모규제법 반대 시위를 맹렬히 했어요.

어나기 1년 전 1959년에 발표된 미국 ‘콜론보

자주 민주 통일을 지향하는 4월혁명 정신은

고서’라고 있어요. 보고서에 보면 4.19 전야의

연면히 이어져 유신반대 운동, 광주민주화운 59


스승을 만나다

동, 6월 민주항쟁, 요즘 촛불집회까지 명맥이

또 하나, 언론이 그때는 살아있었어요. 4월 18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날 고려대생 피습사건을 1면 톱으로 다루

4월혁명의 이념은 한마디로 반독재 민주, 반

고, 3면까지 할애를 해가지고 그 처참한 장면

외세 자주, 반분단 통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을 상세히 보도를 했어요. 그런 신문을 보는

입니다.

국민들이 분노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지금은

우리사회는 지금 4.19 당시와 마찬가지로 반

그런 기사가 나올 수 없어요. 3.15 마산 시위

민주, 반민족, 반통일의 길을 걷는 세력이 정

때 최루탄이 얼굴에 박힌 김주열열사 사진을

권을거머쥐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4월혁명

동아일보에서 보도를 했어요. 지금 같으면 상

이 계속돼야 하는 이유입니다. 본 : 말씀해 주신 것처럼 4.19혁명 이전의 사 회적 상황과 지금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 습니다. 그런데 또 지금은 이전과 달리 학생들 이나 시민들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 는 것 같진 않기도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 나요? 정 : 저는 ‘요즘도 비슷한 상황인데 왜 4.19같 은 그런 혁명적인 분위기가 도래하지 않는가’ 생각해봤어요. 4.19 당시는 야당이 살아 있었 어요. 3.15 부정선거가 나니까 그 다음날 야당 인 민주당이 “3.15 부정선거 무효다. 이승만 물러가라” 라고 야당이 먼저 시위를 했어요. 60


스승을 만나다

상도 못할 일이에요. 그렇게 언론이 살아있었

우리나라 경우는 그 보다 더한 상황 아닌가요.

기 때문에 또 야당도 살아있었고. 그렇기 때문

채동욱 검찰총장이 제대로 수사를 하려고 하

에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우리

니까 혼외자식 핑계를 대가지고 내쫓아버리고

가 관심 깊게 지켜봐야 될 대목입니다.

수사팀을 해체하고 수사를 방해했습니다. 이

그런데 지금 야당은 너무 무기력해 국민이 직

사실 자체가 탄핵감이고 대통령이 물러나야

접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국정원의 관

될 사항이거든요.

권부정선거가 있었다는 건 야당도 알고 국민

많은 국민들이 이런 사태에 대해서 둔감하고

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고, 이번에 고법에서

언론이 눈감아주고 운동조직들은 끝까지 물고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불법 대선개입 문제로

늘어질 힘이 없는 것 같고. 그래서 지금 여러

구속시켰는데, 처음부터 야당이 “부정선거다”

가지 어려운 문제가 있어요.

며 선거에 복종하지 않고 문제 제기하고 투쟁 에 나섰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고, 또 그런 사태에 대해서 언론이 깊이 파고들었더라면, 계속 보도해줬더라면 부정선거 문제가 수면에

본 : 지난번 보니깐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구 속되자 이명박 전 대통령을 고소하신 것 같던 데요.

묻히진 않았을 겁니다.

정 : 지난 2월26일인가. 원세훈 국정원장 판

미국의 닉슨대통령이 사임한 워터게이트 사

결났을 때 부정선거 책임자 이명박 구속 수

건. 이건 우리 부정선거 양상하고는 비교도 안

사하라고 검찰에 고소장을 직접 접수시켰어

될 정도로 경미한 사건이에요. 도청도 못한 도

요. 박석운 대표하고 이광철변호사하고. 제대

청미수사건이에요. 우리 같으면 1단짜리 기사

로 된 국가라면 국정원장이 부정선거로 구속

도 안 되는 사건이야. 그런데 대통령이 수사를

이 되었으면 그 책임자인 당시 대통령을 수사

방해했다는 정황이 드러나 가지고 닉슨대통령

해야 맞거든요. 국정원장은 대통령의 유일한

이 2년 반 만에 사임했습니다.

지시를 받는 사람인데 그리고 임명한 사람도 61


스승을 만나다

이명박이고.

니다. 또 우리 세대들은 대부분 보수화됐는데

이해찬 의원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원세

그래도 유일하게 남은 정통 민주 민족 세력이

훈이란 사람은 내가 서울시에서 같이 근무해

우리 사월혁명회 회원들이에요. 각종 시위에

봐서 아는데 그런 일을 저지를 만한 사람이 아

노인세대들로서 거의 유일하게 참여하는 세

니다.”

대들일 거에요. 요즘 세월호 집회, 관권부정선

윗선의 지시 없이 저지를 수도 없는 거고. 더

거 규탄집회 등에 우리 회원들이 노구를 이끌

구나 보훈처 국방부 등에서 총체적으로 부정

고 참여를 하고 있습니다.

선거에 관여했다는 것이 드러났는데, 그런 기

매년 4월혁명 정신을 선양한 개인이나 단체

관장들이 독자적으로 벌일 수가 없는 일이잖

에게 사월혁명상을 시상하고 한 달에 한 번씩

아요.

월례 발표회를 가지고 각종 시국현안에 대해

윗선의 지시가 있었다고 보는게 상식입니다.

서 토론회도 진행해요. 두 달에 한 번씩은 향

이명박을 구속 수사하고 부정선거의 최대 수

린교회에서 외부 강연회도 열고 있고 역사정

혜자인 박근혜 대통령이 책임져야 합니다. 다

의실천연대 민중의 힘 등 연대활동도 활발히

시 4.19가 다가오고 있는데 국민들이 이런 사

하고 있습니다.

실들을 뼈저리게 절감을 하고 다시 각성해서

더구나 박근혜 정부 들어와서 역사왜곡이 심

일어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해요. 박정희와 이승만이 우리의 정통성을 가

본 :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진행이 된 것 같습 니다. 그러고 보니 사월혁명회가 어떠한 단체 인지 여쭤보지 않은 것 같네요.

진 양 호도하고 있는데...48년 8월 15일 분단 된 반쪽짜리 정부를 세운 날을 건국절로 만들 려고 하고 있어요. 친일파 독재의 후예들이 역사적인 정통성이

정 : 우리 4.19세대들이 거의 다 변질 내지 자

있는 것처럼 만들어가지고 영구집권하려고 역

기 생활에 매몰 돼 4월혁명 정신과 멀어졌습

사를 왜곡 하고 있는데 거기에 맞서서 투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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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을 만나다

고 있습니다. 2년 전에 KBS에서 이승만 미화

인간적으로 먼저 신뢰를 받고 “저 사람 사람

방송을 시도할 때 우리 사월혁명회에서 제일

이 됐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인

먼저 문제 제기하고 석 달 동안 천막농성해서

정과 신뢰를 받는 사람이라야 일을 잘 할 수

일정정도 막아낸 일도 있습니다. 우리 회원들

있어요. 말만 앞서고 튀는 발언을 하고 이런

이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현장 어디를 가나 원

사람은 자기만족은 시킬지 모르지만 옆에 주

로로서 지도적인 위치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위 사람을 감복시키거나 운동 편으로 끌어오

본 : 마지막으로 저희 민권연대 회원들에게 한마디 해 주세요 정 : 민권연대 회원들이 열심히 활동하고 있 다는 소식 잘 듣고 있어요. 민권연대는 또 젊 은이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어서 부럽기도 하

는 사람은 될 수가 없어요. 믿을 수 있는 사람 신뢰 받는 사람이 돼야지 그 사람이 하는 언행 이 상대방에게 받아들여지는 거예요. 겸손하 게 낮은 자세로 활동을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본 :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 민권연대 회원들이 사월혁명회에 많이 와 서 활동 했으면 좋겠습니다. 운동하는 사람들 중에는 너무 어렵고 강한 말 들을 쓰고, 일반 국민들과 눈높이를 함께 하지 못하는 그런 튀는 언행을 하는 분들이 보여요. 그래선 안 된다고 봅니다. 가능하면 함께 가야 지. 운동하는 사람일수록 겸손하고 봉사하는 자세로 해야 된다고 봐요. 건방진 사람들 보면 일반인들이 “저 사람 운동권이다” 그러거 든. 그런 소리를 들어서는 안됩니다. 63


함께가는 길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은

자주·통일을 꿈꿔왔던 처음의 마음, 그리고 양심입니다

[

조상현 후원회원 http://mag-mkyd21.tistory.com/161

64

[


함께가는 길

작년 8월, 민권연대 상근 활동가들에게 교통비라도 마련해주자라는 목적으로 후원회를 만 들었습니다. 현재까지 56명, 월 70만원 정도의 후원금이 모이고 있습니다. 민권연대 사업에 동감하고 우리의 활동을 지지하는 가족인 만큼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친 해지는 과정을 만들고자 한 달에 한 분의 후원회원을 만나보려 합니다. 소주한잔 기울이며 사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깨도 걸고 손도 잡게 되지 않겠어요?

사차 들린 후 그날 바로 후원회원으로 가입해주신 조상현님이 적격이다 싶 어 바로 추진하였습니다. 나름 질문지도 만들고 스마트폰 녹음 하는 방법도 테스트해보고 인터뷰 상 황을 연상도 해보면서 준비해갔으나, 역시나 질문지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 았습니다. 녹음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냥 맛있는 술과 좋은 사람이 있으니 형식적인 것은 필요가 없더라고요. 첫 인터뷰 대상은 새오름 김홍식 회원의 지인

새오름 동부지회장 김홍식 회원과 함

조상현 후원회원입니다. 어떤 분과 첫 인터뷰

께 조상현 후원회원 일터가 있는 남양주로 향

를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새오름 총회에 인

했습니다. 남양주라고 해서 구리 근처로 생각

65


함께가는 길

하고 있었는데 가평 인근의 남양주더군요. 도 착 후 한 시간가량 가구제작 작업장을 둘러보 며 어떤 가구를 만드는지, 하루에 몇 시간 정 도 일하는지, 거대 가구업체 ‘이케아’의 한국 진출 후 사업에 영향은 없는지 등에 대해서 이 야기를 나눈 후 술집으로 고고!! 1차는 소주와 삼겹살을 먹으며 사는 이야기를 나눴고 2차는 호프집 밖에 있는 테이블에 앉 아 인터뷰 글에 반드시 들어갈 질문 몇 가지를

파는 일을 하는데요. 이 일을 한지는 3년 정도

하면서 인터뷰를 시작했습니다.

되었습니다. 가정용, 사무용 가구가 아닌 카페, 식당 등에서 필요로 하는 가구를 제작, 판매를

조상현 후원회원의 그간의 인생 경험이 다채

하고 있어요. 소비자들이 요구하는 가구는 다

로워서인지 인터뷰기간 내내 흥미와 재미가

만들어줄 수 있긴 하지만 주로는 탁자와 의자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너무나도

를 만들고 판매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직원 1

좋은 형을 알게 되어서 기분 좋은 하루이기도

명을 두고 있고요. 이 정도 규모면 2명이 하는

했습니다.

것 치고는 적지는 않은 편입니다.

본 : 가구제작 작업장이 101평이라고요? 규

본 : 이 일을 한지 3년 밖에 안 되었다고요?

모가 작지 않은 것 같은데 형님 하시는 일에

그럼 이 일을 하기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는지

대해서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요? 형님 소개부터 해주세요. 조 : 저는 강남대학교 특수교육과 90학번입

조상현(이하 조) : 둘러본 것처럼 가구 만들고 66

니다. 학생운동을 계속하다가 95년 12월에 어


함께가는 길

학연수를 위해 일본에 갔습니다. 일본 생활이

조 : 아니요. 장사를 하는 도중 2003년 뉴질

적성에 맞았는지 98년도에 나고야 시립대학

랜드 어학연수 1년을 다녀온 후 한국에 잠깐

교 경영학과에 입학을 했고 2002년에 졸업을

들어왔다가 사무용기기 제조업체인 ‘로얄소

했습니다.

브린’이라는 업체에 취직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헤드헌터의 연락을 받았는데 일본에서 대

본 : 저도 일본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급관심

학을 나온 관리자를 뽑는다고 해서 ‘테크노

이 생기네요. 일본에 있었을 때 이야기 좀 더

화인’이라는 LCD·LED 터치패널의 투명전극,

해주세요.

태양광 투명전극을 만드는 회사로 이직을 했 습니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 간 것이죠. 전공

조 : 나고야 시립대 다니면서 공부만 한 게 아

을 살려서 경영부문 총괄팀장으로 2010년까

니라 장사도 했습니다. ‘한마당’이라는 식당

지 일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아쉬운

을 열어 2002년 초까지 운영을 했는데요. 주

것은 직장을 다니게 되면서 장사를 접었는데,

로 지지미, 김치찌개, 삼겹살, 비빔밥 등 가정

대리인을 고용하여 계속 운영했으면 좋았을

한식을 판매하였습니다. 장사가 꽤 잘되었는

걸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리고 한국에

데... 인근 일본인들 사이에서 ‘한마루(ハンマ

귀국해서 대전에 있는 투명전극 관련 업체에

ル)’라는 단어가 유행할 정도였습니다. ‘한마

서 일하다가 그만두고 보시다시피 이 일을 하

당에 가자’라는 의미입니다. 저 때문에 음식

고 있습니다.

솜씨가 좋은 어머니가 일본에 오셔서 도움을 많이 주셨습니다.

본 : 전자부품 생산을 하는 회사 경영총괄팀 에서 일하다가 가구업을 한다? 연결이 잘 안

본 : 그럼 2002년 초에 장사를 그만두고 귀국

되네요.

하신 건가요? 67


함께가는 길

조 : 직장을 그만두고 가구업이 전망이 좋다고

본 : 고등학생 시절 또는 대학교 때 활동하면

판단이 되어서 독학으로 2년 동안 공부를 했

서 가장 기억에 남는 투쟁이 있다면요?

습니다. 쉽지는 않았지만 제가 하고 싶은 것이 기도 했고 제 적성에 맞았던 것 같아요. 지금

조 : 몇 년도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

도 즐겁게 일하고 있습니다.

지만 가가호호 방문을 하면서 성남시민들을 직접 만나러 다닌 적이 있습니다. 8.15같은 큰

본 : 아. 그렇군요. 고등학생 시절에 학생운동

행사를 앞두고 시민들을 조직해보자고 해서

을 시작했다고 들었는데요. 그때 이야기 좀 해

시작했던 사업인데 내가 맡았던 동네 주민의

주세요.

집을 직접 찾아가서 행사 홍보 및 참석 여부를 일일이 확인하는 활동이었죠. 그 활동이 가장

조 : 고 1때 담임선생님이 진보적이었는데 저

기억에 남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운동에 대한

희를 ‘흥사단’에 데리고 갔었어요. 그게 처음

확신을 얻었다고 할까요. 처음엔 상상조차 하

으로 운동을 접하게 된 계기였고요. 학교에서

지 못했던 일인데 해보고 성과가 생기는 것을

는 풍물패 동아리를 만들어서 활동을 했었습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을 때 그 희열과 확신.

니다. 물론 학교에서 알게 되면 해체되는 그

그때 성남시민들로 꽉 차있던 행사장의 분위

런 시절이었기 때문에 학교 몰래 운영을 했습

기는 아직도 생생합니다.

니다. 그때 시작한 풍물을 대학시절 내내 했고요. 일본에 있을 때 재일교포 학생들을 가르치기

본 : 민권연대와 인연이 되었던 계기는 언제 였나요?

도 했었습니다. (*본 : 가수 석미경, ‘물안개’ 를 작곡한 분이 조상현 후원회원의 친형이라

조 : 제가 통합진보당 동대문위원회 활동을

고 합니다.)

하고 있었는데 작년 6.4 지방 선거 때 김홍식

68


함께가는 길

형님을 몇 번 만났었죠. 약간의 친분이 생겼

날 후원회원으로 가입하였습니다.

고, 세월호 촛불 참석한 이후 ‘새오름’ 뒤풀이 자리에 함께했었습니다. 그때 맛나호프 2층에

본 : 후원회원으로서 민권연대 행사 및 투쟁

서 노래 부르면서 뒤풀이를 했었는데 학생운

중 이것만큼은 꼭 함께하고 싶다는 것이 있다

동 그 시절의 느낌이 나서 너무 좋았습니다. (

면요? 예를 들면, 민권연대 해오름제, 5.18 광

본 : 그 자리에 저도 있었는데요.. 기억이 나네

주 순례, 민권연대 가족의 날, 지리산 배움의

요. 저는 ‘떨어져선 못살아’라는 노래를 불렀

올레, 후원주점 등 중에서 선택해 본다면요?

었고, 상현 형님은 ‘임진강’이라는 노래를 불 렀습니다. 저 또한 학생회의실에서 밤새 술 마

조 : 다들 마찬가지겠지만 제가 하는 일이 시

시며 노래부르던 그때의 추억이 되살아나는

간을 내기가 참 어려운 일입니다. 평일에는 밤

자리로 기억됩니다.^^) 그 이후 이번 새오름

10시쯤에 일을 마치고, 주문이 있는 경우는 주

총회때 참석하면서 회원들과 인사를 했고 그

말에도 일을 해야 되거든요. 하지만 시간만 가 능하면 뭐든지 함께 하고 싶습 니다. 동지를 얻을 수 있는 투 쟁이라면 민권연대와 함께 하겠 습니다. 본 : 민권연대 몇 몇 지역에서는 이달의 추천도서를 소개하고 서 평을 쓰는 행사를 하고 있는데 요. 형님이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요? 69


함께가는 길

조 : 나광빈이라는 중국 사람이 쓴 ‘붉은바위’

제나 처음의 마음 잃지 않고 살려고 노력하고

라는 책입니다. 1940년대 후반 중경에 있던

있습니다.

장개석 특무기관의 비밀감옥인 중경수용소에 감금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저자들의

본 : 이렇게 긴 시간동안 좋은 말씀 해주셔서

경험을 토대로 엮은 장편소설인데요. 그 시절

감사합니다.

중국에서 혁명을 꿈꾸던 사람들의 강인한 모 습과 삶이 인상 깊었습니다. 본 : 앞으로의 계획을 간단하게라도 말씀해주 시고 민권연대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 기가 있으면 해 주시죠. [인터뷰 후] 조 : 지금 하고 있는 사업을 확장할 계획입니

가구 제작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조상현 후원

다. 현재는 프랜차이즈 업체, 인테리어 업체에

회원과 함께 ‘가구 만들기’ 시간을 가져보는

가구를 파는 소매가 위주였다면, 도매 사업으

건 어떨까요? 동네 주민들 또는 지인들과 주

로의 전환 또는 병행 확장을 해볼까 합니다.

말 시간을 이용하여 가구 만들기를 해볼까 하

올 5~6월까지는 성과가 나오게끔 추진 중에

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추진이 잘

있습니다.

안된다고 하네요. 지원자가 최소 3~5명만 되

음... 인터뷰 질문 중에서 가장 답하기 어려운

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질문인데요. 민권연대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 은 이야기라기보다는 제가 항상 제게 다짐하

조상현 후원회원 가구업체 홈페이지

는 말인데요. ‘양심 잃지 말고 살아가자.’ 언

http://chairstor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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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본’이 추천 하는 문화·예술작 품을 소개합니다

art

http://mag-mkyd21.tistory.com/162

우리나라 미니앨범 난쟁이들의 노래 4월14일 발매 5월2일(토) 앨범 발매 콘서트 PM5시 CY시어터

세월호 뮤직비디오 <기억할게> 2편

remember

0416

시선집중

*4월 공개예정 <기억할게> 1편 보기 ht tps://youtu.be/ tY1VKbcD0uQ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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