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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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특집기획

발행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민권연대) 발행일 2015년 3월 1일 (13호) 블로그 http://mag-mkyd21.tistory.com 문의 mag.mkyd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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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특집기획 박근혜 정권 2년과 나의 삶

■원세훈 유죄, 박근혜의 입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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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3년차, 재정위기의 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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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그 본질적 가치

■북한미술전. 지구 반 바퀴를 돌아온 금기의 보물들

세상의 모든 무기

이달의 역사

■3.15부정선거와 2012부정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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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연재

■조선과 필리핀을 맞바꾸고 미국 대통령이 된 남자 : 가쓰라태프트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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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에 맞지 않는 실전형 전투사격 42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우리가 미래다 : 김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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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일꾼’신임사무총장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연말정산이 뭔데 이 난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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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을 만나다 : 임재복 선생님 “나는 노동자란 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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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의 역습

2015년 3월 봄의 시작, 3월입니다. 마지막 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시린 겨울이 가 고 저항의 봄이 다가오려나 봅니다. 국민의 분노는 하늘을 찌릅니다. 더러운 세상, 이제 담배 한 대 피울 여유조차 없습니다. 몇 푼 안 되는 서민들 주머니 털어가려는 연말정산 세금폭탄에 기가 찹니다. 정말 나라꼴이 말이 아닙니다. [본] 3월호 기획특집에서는 박근혜 정부 2년을 되돌아봤습니다. 박근혜 정권 2 년과 나의 삶, 복지위기, 연말정산 등을 심층적으로 분석했습니다. 이제 [본]이 발간된 지 1년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더욱 충실한 내용으로 독자 여 러분을 찾아가겠습니다. 편집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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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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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훈 유죄, 박근혜의 입장은? 2월 9일 서울고등법원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공직선거법, 국정원법 위반 혐의를 모두 인 정,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했다. 원세훈의 대선 개입을 확인한 것이다. 재판부는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들이 트위터 계정 716개를 사용했고 트윗한 갯수도 27만4800회 에 달한다고 판단하면서 국정원 대선 개입 행위가 “원 전 원장의 지시 하에 조직적, 능동적, 체계 적으로 이뤄졌다”고 결론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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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권 2년과 나의 삶

국정원 대선개입이 밝혀졌으므로 박근혜 정부

정이 확실히 드러난 지금 박근혜 대통령은 어

의 정통성도 의심받게 되었다. 원세훈이 아무

떤 방식으로든 책임을 져야 한다. 아직까지 고

이유도 없이 대선에 개입하지는 않았을 것이

법 판결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지만, 또

며, 최소한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명박에게는

할 말도 없겠지만 명백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대선개입 사실을 보고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 선 전 이명박-박근혜 회동에서 어떤 거래가 이

박근혜 정부 초반부터 많은 국민들이 거리에

루어졌는지 다시 한 번 의심하게 된다.

나와 대선부정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외 쳤다. 관련 시국회의도 구성됐다. 그러다 지난

국정원을 비롯해 국가기관이 모두 동원돼 박근

해 국정원 간첩조작사건이 폭로되고 세월호 사

혜 대통령 당선을 위해 움직였으니 명백히 선

건이 터지면서 대선부정 이슈는 사라지고 말

거법 위반이며 당선 무효에 해당한다. 게다가

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직전인 2012년 12월 14 일 오전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국정원 댓글 사

이제 원세훈 판결을 계기로 다시 대선부정 진

건이 허위로 밝혀지면 문재인 후보가 책임지라

상규명의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대선부정 문

고 못을 박았다. 이번 판결을 통해 국정원 댓글

제가 왜 중요하냐면 이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

사건이 없었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당시 주장은

하지 않으면 앞으로 어떤 선거를 해도 민의가

허위사실 유포임이 드러났다. 이 역시 당선 무

반영된다는 보장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

효 사유가 된다.

주의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엄중한 사건이기 때

물론 선거법 공소시효가 지났기 때문에 법적으

문에 이 문제를 반드시 풀어야 한다. ▒

로 해결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대선부 5


특집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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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3년차 재정위기의 진실 6


박근혜 정권 2년과 나의 삶

아이들 점심밥은 못 주겠다면서 “달”타 령?

슬쩍 빼놓고, 정부입장에서 하고 싶으면 “달” 이라도 가야겠다는 속내를 국민들에게 드러내 고 말았다. 이러한 시각을 연장시켜본다면, 최

지난 연말, 아주 ‘웃픈’ 실화가 있었다. 박근

근 논란이 되고 있는 복지재정 위기라는 것도

혜정부가 2015년 예산안에 무상 급식 예산을

세금을 국민의 입장에서 “꼭 써야할 곳”부터

넣지 않아 논란이 일던 와중, 국회에 느닷없

쓴다면 얼마든지 해결할 길이 있다는 것을 알

이 400억짜리 ‘쪽지 예산’이 들이닥친 것이

려준다.

다. ‘쪽지 예산’은 예산심의 과정에서 국회의 원이 자신의 지역구의 민원성 사업이나 개발

사실 정부의 방만한 재정운영이 문제시된 것

사업 등의 예산을 예산결산위원회 소속 의원

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정부는 도움이 필

에게 쪽지에 적어 청탁하는 것을 말한다. 정부

요 없는 삼성전자 등 재벌에 정부예산을 수천

가 들이민 400억짜리 ‘쪽지예산’은 황당하게

억 원씩 지원하는가 하면, 이런저런 핑계로 토

도 “달 탐사” 예산이었다. 돈 없다고 아이들

목예산을 늘이고, 선거개입 등 온갖 불법을 저

점심도 못주겠다는 정부가 “달”타령이라니.

지르는 국정원 등 권력기관의 이른바 “특수활 동비”를 수천억원씩 예산으로 배정하고 있다.

이 “달 탐사” 쪽지 예산 사건은 다행히 해프닝

수십조 원의 예산으로 들여오는 미국산 무기

으로 끝났지만 국민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

구입비용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런 관행은 박

다. 박근혜 정부는 이 사건을 통해 대통령 공

근혜정부가 들어선 이래 여전히 개선되지 않

약인데도 하기 싫은 사업인 무상급식 예산은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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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획

재벌에 연구개발 예산 몰아줘

예산 중 고작 3조2983억 원, 약 17.5%만 지원 받았을 뿐이다. 민생을 살리려면 전체 노동자

방만하게 사용되는 예산 중 대표적인 사례는

의 대다수가 고용된 중소기업을 살려야 하고,

바로 재벌에게 주어지는 어마어마한 보조금이

박근혜정부가 주장하는 ‘창조경제’를 위해서

다. 대표적인 대상이 바로 삼성재벌이다. 민주

도 많은 중소기업들이 다양하고 혁신적인 상

당 홍영표 의원이 2014년 국정감사에서 밝힌

품과 서비스를 개발해야 할 터인데, 박근혜정

바에 따르면, 최근 10년 간 삼성재벌이 정부

부는 여전히 이러한 대기업중심 지원 관행에

로부터 지원받은 연구개발 예산은 1조3339억

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 1년에 약 1334억원에 달했다. 1년 내 벌어 들인 돈 중 쓰지 않고 남겨둔 돈이 무려 160

토목공사 예산, 역대 최대로

조원(2014년 반기보고서 기준)이 넘는 삼성그 룹이 무슨 이유로 정부 예산을 지원받아야 하

또 다른 방만 예산은 바로 토목공사 예산이다.

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삼성 다음으로는

박근혜정부는 본래 이명박정부의 4대강사업

현대차그룹이 연평균 650억원, 한화는 547억

실패 여파로, 출범 첫해인 2013년부터 2017

원, 엘지 482억원 순으로 정부 예산을 받아갔

년까지 토목공사 예산을 연평균 5.7%씩 줄여

다. 게다가 이들은 연구개발 투자액의 3~4%

나가기로 공약했다. 하지만 박근혜정부는 이

를 법인세 감면 혜택까지 받아 이중으로 이익

러한 대국민약속을 저버리고 경기부양과 안전

을 보고 있다.

사회 건설을 핑계로 토목공사 예산을 역대 최 대 규모로 만들어버렸다. 박근혜정부가 확정

이처럼 거대재벌이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을

한 2015년 예산 중 토목공사 예산은 28조 8천

받아가는 사이, 전체 기업의 99.9%를 차지하

억원으로, 4대강사업이 시작되던 2009년 당

는 중소기업은 전체 19조원 규모의 연구개발

시 25조 4천억원을 훌쩍 뛰어넘었다. 게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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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권 2년과 나의 삶

박근혜정부는 4대강사업으로 막대한 부채를

롯하여 국방부 사이버사령부, 기무사령부, 정

진 한국수자원공사에 이자비용 3200억 원을

보본부, 검찰과 경찰의 공안담당부서 등의 예

세금으로 지원하기도 한다.

산에 포함되어 있다. 특히 8000억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진 국정원 예산은 전액이 ‘특수활

박근혜정부는 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사회를

동비’로 분류되어 대표적인 ‘묻지마’ 예산으

바라는 국민의 요구에 편승해, 타당성이 의심

로 불린다.

받는 제방이나 ‘댐 건설’, ‘예비수로 확충’ 등 치수관련 토목공사를 안전사업 명목으로 대폭

국회의 심의에서 벗어난 ‘특수활동비’는 그동

확대했다. 이 사업들은 단군 이래 최대의 예산

안 수차례 문제제기 되어 왔다. 대표적인 사례

낭비사업으로 평가되고 있는 4대강 사업에 대

가 바로 지난 2011년 김준규 검찰총장의 ‘용

한 냉정한 평가가 선행된 후에 진행돼야 하지

돈 뿌리기’사건이다. 당시 김준규 검찰총장은

만 안전이라는 핑계로 되살아나 또 다시 재벌

검사장급 이상 간부들에게 특수활동비로 분류

건설업체만 배를 불리게 되었다.

된 예산을 사용해 1억원 가량을 각각 지급해 사회적 물의를 빚은 바 있다. 특수활동비가 사

묻지마 ‘특수활동비’도 늘려

실상 검찰총장의 쌈짓돈, 비자금으로 전락한 셈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바로 ‘특수활동비’에 있다. ‘특수활동비’는 예산회계에 대한 특례법에 근

최근 또 다시 ‘특수활동비’가 사회문제화 된

거하여 국회의 심의 없이 해당 기관이 마음대

것은 바로 국정원의 대선 선거개입이 결정적

로 사용할 수 있는 돈이다. 이 ‘특수활동비’는

인 계기가 되었다. 국정원이 정보활동을 빙자

대체로 국정원과 같은 정보기관의 예산편성에

하여 선거에 개입하고 국민여론을 조작했던

사용되어 왔으며, 국정원 외에도 청와대를 비

것이다. 그 뿐인가. 국방부 사이버사령부 등도 9


특집기획

선거에 개입했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진 바 있

없을 정도로 허덕이고 있다. 우리는 실질적이

으며, 검찰과 경찰의 공안담당부서들은 진보

고 실용적인 무기체계를 개발해야 했는데, 무

개혁적인 인사와 단체들을 일상적으로 사찰하

슨 겉멋이 들었는지 첨단 무기도 아닌 최첨단

고 탄압하는 것이 주요 업무나 마찬가지다. 이

무기를 선호한다. 우리의 경제력으로 감당하

러한 정부부처의 예산이 ‘특수활동비’라는 명

기 어려운데도 마구잡이로 해 놓고 뒷감당도

분으로 국민의 감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못한다”고 힐난했다.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정부는 이러한 각 부처 의 ‘특수활동비’ 총액을 2014년보다 153억원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우리 군은 당장 2015

더 늘려 무려 8,820억 원으로 확정했다.

년부터 F35 전투기, 글로벌호크 정찰기, 패트 리엇 미사일 등 총 10조원 이상의 무기를 미국

미국무기 구매에 혈세 펑펑

으로부터 수입한다. 이 중 미국 록히트 마틴사 가 생산하는 F35만 해도 모두 7조 3,418억원

과도한 무기구매도 방만한 예산 운용의 주된

이 투입될 예정이다. 그러나 F-35 기종은 미

사례다. 스톡홀름국제평화문제연구소(SIPRI)

국에서 엔진 결함 등 성능에 대한 의문이 끊임

에 따르면, 한국은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많

없이 제기되고 있는데다 단 1대분의 예비엔진

이 무기를 수입하는 국가다. 또한 지난 5년간

만 도입해 유지 운용을 위해서는 추가 지출이

한국이 수입한 무기의 80% 가량은 미국산으

불가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로, 오스트레일리아에 이어 두 번째로 미국에 서 무기를 많이 수입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김

더 심각한 문제는 이와 같은 막대한 국민 혈

용삼 전 월간조선 편집장은 우리 군이 “많은

세를 투입하는 무기도입 사업이 심각한 부정

비용을 투입하면서도 북한 하나 어떻게 할 수

부패로 얼룩져있다는 사실이다. 2014년 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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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권 2년과 나의 삶

만 해도 무기 도입 과정에서의 각종 부정, 방

그대로 둔 채 국민들을 상대로 “과잉복지로 나

산 비리, 국산 무기의 불량, 전력화 지연, 부품

태해진다”는 말이나 하고 있다. 대신 박근혜정

돌려 막기, 과잉·중복 무기 구매가 연이어 적

부는 부족해진 곳간을 채우기 위해 온갖 꼼수

발되었고, 전 해군참모총장과 공군참모차장까

를 동원하여 서민증세에 나서고 있다. 대표적

지 비리로 구속됐다. 세월호 참사 당시 통영함

인 사례가 바로 담뱃값 인상이다. 박근혜정부

이 구조작업에 출동조차 하지 못했던 사건도

는 겉으로는 국민 건강 증진을 위해 담배가격

납품비리로 얼룩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지

을 인상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세금 수입이

기도 했다.

가장 많이 늘어나는 가격을 모의실험을 통해 제시함으로써 담뱃값 인상의 실제 목적이 세

이와 같은 무기 도입비용은 정부가 남북관계

금 수입 확보에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심지어

개선에 적극 나서는 한편, 방위사업 전반에 대

박근혜정부는 주민세, 자동차세 등 온갖 서민

한 비리만 척결해도 상당부분 절감할 수 있다.

세금을 인상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박근혜정부가 남북화해와 평화를 바라 는 국민들의 요구와는 상관없이 자기입맛대로

뿐만 아니라 박근혜정부는 교통 과태료 및 범

북한과 대결로 일관하고 미국의 무기구매 압

칙금을 2012년에 비해 1600억원이나 증가한

력에 굴복하면서 국민들의 혈세가 펑펑 낭비

7165억원이나 걷었고, 음주소란, 인근소란, 무

되고 있는 것이다.

임승차 등에 대한 경범죄 범칙금을 50억 2천 800만원이나 부과해, 2012년에 비해 5배나

박근혜정부 서민증세 백태

더 걷었다. 이에 대해 새정치민주연합 박남춘 의원은 “경찰이 자의적 법 집행으로 논란이 되

박근혜정부는 이처럼 방만한 재정운용 관행을

는 경범죄 단속에 ‘올인’하는 것은 서민 주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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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획

출처 : 세종뉴스

니를 털어 부족한 세수를 채우기 위한 꼼수라

재벌대기업에 대한 법인세 인상, 집부자, 주식

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부자들에 대한 재산세 부과, 각종 혜택 축소 등을 통해 부자증세를 실현하는 동시에 특수

부자증세+지출혁신으로 재정난 해소해 야 결국 최근 박근혜정부가 조장하고 있는 이른 바 “복지재원 논란”은 저들이 쓰고 싶은 예산 은 한 푼도 줄이지 않은 채 서민들의 주머니 를 채워주는 복지예산만 줄여 재정난을 적당 히 타개해 보려는 꼼수에 불과하다. 박근혜정 부가 재정위기를 진정으로 해소하기 위해서는 12

활동비나 무기도입비용같은 잘못된 예산 지출 관행을 과감히 혁신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


이달의 역사

http://mag-mkyd21.tistory.com/128

3.15 부정선거와 2012년 부정선거 2015년 2월 9일 서울고등법원. 판사가 판결문을 읽어내려가자 피고석에 있던 원세훈 전 국 정원장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2012년 대통령선거 국정원 댓글사건으로 “정치개입은 유죄, 선거개입은 무죄”라는 놀라 운 판결을 받았던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국정원 직원은 항소심에서 “선거개입도 유죄”라 는 1심과는 다른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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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역사

아직 대법원의 판결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대

했다. 또한 공무원에게 “법은 나중이니 우선 당

법원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는 두고 봐야 되겠

선시켜야 한다. 콩밥을 먹어도 내가 먹고, 징역

지만, 서울고등법원에서 있었던 판결은 “2012

을 가도 내가 간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기자들

년 대선은 부정선거였다는 것”이 사실상 판가

에게 “공무원도 근무시간 이외에는 선거운동을

름 난 판결이라고 볼 수 있다.

할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이 설사 위법이라 하더 라도 자신은 처벌하지 않겠다”고 발언하며 관

우리가 알고 있는 부정선거는 많이 있지만, 무

권선거를 독려했다.

엇보다 많이 언급되는 것은 1960년 3월 15일 자행된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다.

또한 전국 경찰인사를 단행하여 일선 경찰서장 을 연고지 중심으로 재배치하였고, 읍면동단위

이승만 정권은 3.15 부정선거에서 정부 부처를

로 공무원 친목회를 조직하는 등의 활동을 지시

총동원한 관권선거를 보여주었다.

하였다. 최인규 장관과 이강학 치안국장은 국무 회의가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각 지

선거가 시작되기 1년 전인 1959년 3월, 국방,

방 도경찰국 사찰과장 및 경찰서장, 군수, 시장,

내무, 재무, 법무, 농림, 체신부 장관으로 구성된

구청장을 지역별로 10명 내지 20명씩 내무부로

6인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이 6인위원회에서 부

불러 부정선거 준비를 독려했다고 한다.

정선거가 기획, 준비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은 아예 부정선거 지침까지 만들어 두었다. 3월 3일, 동아일보가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

당시 내무부장관 최인규는 본인의 취임사에서

계획을 입수 보도한 것에 따르면 4할 사전투

부터 “이(승만) 대통령이 없으면 이 나라는 망

표, 3인조 또는 9인조 공개투표, 완장부대 활

하게 되어 있으므로 이 대통령을 위하는 일은

용과 야당참관인들을 축출함으로써 투표소 부

거룩한 일”이라며 공무원의 선거 개입을 독려

근 분위기를 자유당일색으로 만들어 유권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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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역사

▲부정선거감행방법_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게 심리적인 압박을 주라는 내용 등이 포함되

3.15 부정선거의 결과 1956년 선거에서 낙선

어 있었다.

했던 자유당의 이기붕 부통령 후보가 79.2%의 기록적 득표로 부통령직을 강탈했다. 부정선거

선거 당일에는 미리 준비한 위조 투표지를 무

세력들은 개표 중간 이기붕의 표가 100%에 육

더기로 집어넣고 투표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

박하는 결과가 나올 것으로 예상되자, 경비전화

는 가 하면, 한 명 당 투표 용지를 20장까지 가

로 이승만은 80%로, 이기붕은 70~75% 선으

져갔다. 또한 자유당 당원들이 기표소까지 들어

로 조정하라고 지시하기까지 하였다.

가 자유당을 뽑는 지 아니면 야당을 뽑는지 감 시하는가 하면 야당 선거 관리인을 투표소에서

한마디로 3.15 부정선거는 내무부, 경찰, 관변

쫓아내는 행위까지 저질렀다. 이러한 부정행위

단체 등 국가기관이 총동원된 총체적 관권부정

에는 자유당 소속 정치깡패들이 동원되었고 그

선거였다.

밖에도 내무부 소속의 공무원들까지 조직적으 로 개입하였다.

그럼 2012년 선거의 부정 양상도 한번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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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역사

2012년 부정선거는 국정원이 주도했다. 원세훈

서, “2000년대 종북세력이 제도권과 정부 내부

항소심 재판부 판결문에 따르면 심리전단 직원

에 침투하여 친북 사회주의 활동을 민주화, 평

들은 총 716개의 트위터 계정을 이용해 원세훈

화애호 운동으로 미화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

전 원장의 지시사항이 반영된 이슈와 논지를 지

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체계에 의해 매일 전달받았다. 이들은 2012 년 8월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가 대선후보

국방부도 부정선거에 가세한 흔적이 있다. 국

로 확정되자 선거관련 트윗을 집중해서 날렸으

방부의 사이버 사령부는 국정원 직원과 유사하

며 약 13만 건에 달하는 선거 관련 트윗을 날린

게 광범위한 인터넷 댓글 및 트위터, 게시판 작

것으로 되어 있다. 원세훈 국정원장이 3.15 부

업으로 선거에 개입했다. 2013년 10월 18일자

정선거의 최인규 내무부장관처럼 지시사항을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국군 사이버사령부 요원

하달하며 부정선거를 독려한 셈이다.

13명이 2012년 대선 때 정치 관련 글을 인터넷 과 트위터 등에 올리거나 퍼 나른 것으로 확인

국정원이 댓글 달고 트윗만 한 것은 아니다. 국

됐다고 한다. 국정감사에서 당시 민주당은 국방

정원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영상 또는 비슷한

부의 사이버사령부에서 지난 대선 때 박근혜 후

영상이 국방부, 보훈처, 통일부 등에서 상영되

보 선대위와 직접 연루돼 SNS(소셜네트워크서

었는데, 이 영상도 문제가 있었다. 한겨레의 보

비스) 활동을 통해 조직적으로 선거에 개입한

도에 따르면 국정원이 준 것으로 추정되는 영상

의혹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국정원과 밀접

은 이전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남북관계 개선

하게 공조한 의혹도 받고 있다.

노력을 <종북>으로 낙인찍고 있으며 70년대

이외에도 국방부 사이버사 요원들이 2010년

반유신독재 투쟁 당시 민주화 세력을 “사회주

11월부터 2013년 중순까지 해외 교민이 자주

의 건설 목표를 숨긴 종북세력”으로 묘사하면

이용하는 주요 14개국 38개 사이트에 수천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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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역사

의 정치글을 올렸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국가보훈처도 부정선거 논의에서 자유롭지 않 다. 강기정 의원실에 따르면 보훈처가 자체 제 작한 <한반도의 빛과 어둠>이라는 제목의 표 준 강의교재에서는 사실상 야당의 정책을 비난 하고 보수세력이 재집권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해석할 수 있는 내용이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 다고 한다. 심지어 관변단체까지 선거에 동원되었다는 정 황이 있다. 2013년 10월 30일자 경향신문 보도

체 등 국가기관이 총동원된 관권부정선거라고

에 따르면 재향군인회가 지난 대선에서 사회관

할 수 있다. 원세훈이 유죄를 받은 지금, 우리는

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된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선거대책위원회 조직원 모집 공고를 퍼나르고

이명박은 이 사건에 얼마나 연루되어 있을까?

야당 후보 비방글을 수차례 올린 것으로 확인됐

혜택을 받은 박근혜 대통령은 얼마나 알고 있었

다. 또한 재향군인회 청년국 일부 실무진이 박

을까? 또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근혜 후보 선대위에서 활동한 사실도 밝혀졌다. 역사는 3.15 부정선거를 주도한 자유당의 몰락 종합해보면 2012년 12월 19일 있었던 18대 대

과 이승만의 하야라는 심판을 내렸다. 12.19 부

선 역시 국정원, 국방부, 보훈처, 통일부, 관변단

정선거에는 어떤 심판을 내리게 될까? ▒

17


동아시아 연재

http://mag-mkyd21.tistory.com/146

3. 조선과 필리핀을 맞바꾸고 미국 대통령이 된 남자

:: 가쓰라-태프트 밀약 1864년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은 이래로 조

직접 정치를 한다는 선언이 있었습니다. 하지

선은 척화정책을 추진하며, 외국과의 통상수교

만 실상은 고종의 친정이 아니라, 명성황후 등

를 엄하게 금지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척화정

민씨 세력이 집권하게 된 것이었지요. 민씨 정

책은 서세동점의 시기에 밖으로부터 침략해오

권은 문호 개방을 주장하며 일본에게 개항을

는 외세를 일시적으로 막는 데에는 성공한 것

허락했으며, 청나라와 미국에 온갖 이권을 넘

처럼 보였지만, 조선의 부패하고 낡은 질서를

겨주었습니다. 조선의 척화정책은 1876년 일

개혁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내적인 모순을

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으면서 완전히 깨져버

해결하지 못한 대원군은 결국 실각하게 되고,

렸습니다. 주일 미국 공사 빙햄은 강화도 조약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큰 피해를 입으면서

체결 과정에서 자신들이 일본을 개항할 때 썼

까지 지켰던 이 원칙은 깨져버렸습니다.

던 페리 제독의 수법을 친절하게 전해주었습니 다. 이렇게 굴욕적인 첫 불평등 조약이 체결되

1873년 대원군이 정권에서 물러나고, 고종이 18

자 두 번째, 세 번째 조약은 일사천리로 맺어졌


동아시아 연재

▼조미수호통상조규

습니다.

으로부터 외교적으로 불법부당한 처우를 받을 경우 다른 한쪽이 이를 도와준다’는 조항이었

조선은 구미 열강으로서는 첫 번째로 미국과

습니다. 조선은 이 조항을 믿고, 미국에게 절대

통상 수교 조약을 맺게 됩니다. 1882년 맺어진

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당시 노골적

이 조약의 정식 명칭 ‘조미수호통상조규’로, 이

으로 조선을 침략하려고 했던 일본이나 러시아

조약의 제 1조는 ‘거중조정’ 조항이었습니다.

에 비하면, 고종에게 미국은 신사적이고 도덕

거중조정이란 ‘조약국 중 어느 한쪽이 제3국

적인 나라로 비쳐지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19


동아시아 연재

조선은 이 조항을 유사시에 미국이 원조와 중

니다.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

재를 해주는, 일종의 동맹관계를 약속하는 것

의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해주게 됩니다.

으로 파악했습니다.

이 밀약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거중조정’ 조항이 그저 한낱 외교적 수

본격적으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가고 있을

“미국이 미서전쟁(미국-스페인 전쟁)으로 영유한 필리핀을 통치하고, 일본은 필리핀 을 침략할 의도를 갖지 않으며, 극동의 평 화유지를 위해 미국·영국·일본은 동맹 관계를 확보해야 하고, 미국은 러일전쟁의

때, 미국은 조선의 도움 요청을 철저하게 무시

원인이 된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

합니다. 수교 초기 미국은 조선을 서구적 의미

드는 것’을 승인한다.”

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조선이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의 독립국으로 간주했지만, 일본이 조선에 대 한 영향력을 키워가자 태도를 바꿉니다. 미국

미국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조선에 대

은 복잡한 조선의 정치에 개입하기보다는 일본

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해주게 된 배경을 이

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는 쪽을 선택

해하려면, 우선 당시 미국 정치상황을 조금 들

했습니다. 미국은 조선에서 여러 가지 이권을

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20세기로 접어들면

강탈하는 한편, 1905년에는 일본에게 러·일

서 미국은 필리핀군도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합

전쟁 자금을 지원해주면서 노골적으로 일본을

니다. 미국도 동아시아에 대한 영토적인 이해

도와줍니다.

관계를 갖게 된 것이지요. 이 시기 미국은 조 선에서 여러 이권을 챙기고 있었지만, 조선의

그 결정판이 바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었습 20

정치 상황에 대해서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


동아시아 연재

이 원칙이었습니다. 실제로 1899년부터 고종

하는 쪽으로 완전히 돌아서게 됩니다. 러일전

은 미국공사 알렌을 통해 미국이 ‘열강들로부

쟁이 일본의 승리로 기울어 가면서 미국은 한

터 조선의 영토 보존을 보증하는 협정’을 이끌

국에서 깨끗이 손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어 내 줄 것을 부탁하지만 번번히 무시당하고

1905년 1월 미국 대통령 T.루스벨트는 헤이

맙니다.

국무장관에게 “우리는 도저히 일본에 반대하 여 한국인들을 위해 개입할 수가 없다. 한국인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은 러시아의 조

들은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주먹 한방도 날

선 개입에 반대하고, 일본의 조선 지배를 찬성

릴 수 없었다”는 내용의 문서를 보냅니다. 그

21


동아시아 연재

리고 며칠 뒤에 또 외교문서에서 “일본은 (스

철회하는 대신, 미국에 관한 한 조선에서 완전

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자립할 수 없는 모습

히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본

을 보여왔던) 한국을 보호국으로 삼아야 한다”

은 이어 8월에 영국과 2차 영일동맹을 맺어 인

고 언급합니다.

도에 대한 영국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한편, 조 선에서의 우위를 인정받았습니다. 9월에는 러

이러한 사실은 미국의 대 조선 정책이 1905년

일전쟁의 승전조약인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맺

7월 27일 도쿄에서 열린 가쓰라-태프트 회담

어 조선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완전히 제거했

이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습니다.

있습니다. 이 회담의 당사자였던 가쓰라 다로 (桂太郎)는 일본의 총리대신이었고, 윌리엄 태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과의 조약으로 일본은 조

프트(William Howard Taft)는 미국의 육군장관

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히 인정받았습니다.

겸 T.루스벨트 대통령의 개인특사 자격이었습

그런데 다른 열강들과 달리 미국의 ‘배신’은 조

니다. ‘밀약’이 체결된 것은 둘 사이의 공식적

선으로서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물

인 회담 이틀 후인 7월 29일이었습니다.

론 ‘밀약’이 맺어질 당시에 조선 정부는 미국의 ‘배신’을 알지도 못했지만 말입니다. 미국은 개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체결 이틀 후인 31일

화기 조선 조정이 가장 믿고 있었던 나라였습

T.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추인되었습니다. 이

니다. 당시 조선의 개화파들은 청나라 외교관

밀약의 내용이 공개된 것은 1924년 존스 홉킨

황준헌이 지은 <조선책략>에서 나온대로 미국

스대학의 데넷 교수에 의해서였습니다. 이 밀

을 ‘유럽의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세

약을 통해 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침략 계획을

운 나라였으며,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지 않

22


동아시아 연재

으려는 대국’이라 믿었습니다. 게다가 1882년

주장하면서 조미수호통상조규 내 거중조정 조

의 조미수호통상조규의 1항 ‘거중조정’은 개화

항에 의거하여 미국 측에 도움을 줄 것을 호소

파와 고종을 더욱 미국에 의존하도록 만들었습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이 문제에 전혀 관여

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그런 미국이 조선

하지 않습니다. 당시 미 국무장관 루트는 한·

에 날린 완벽한 뒤통수였습니다.

일 간에 체결된 조약들에 아무런 하자가 없다 고 선언합니다. 미국은 일본이 조선을 완전히

밀약이 맺어진지 3개월 후인 1905년 11월 17

병합하는 1910년에 이르기까지 조선에서의 불

일, 일본은 ‘을사늑약’을 통해 조선을 보호국

개입 원칙을 고수합니다.

으로 전락시켰습니다. 미국·영국·러시아와 의 협정은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화시키기 위한

1910년 일본이 한국의 국권을 강탈(병합)했을

치밀한 사전정비작업이었던 셈이었습니다. 을

때에도 미국은 아무런 반대의견을 제시하지 않

사늑약이 맺어지고, 주미 일본공사 다카히라는

았습니다. 일본이 한일병합을 선언하면서 동시

이 조약의 내용을 미국에 통보합니다. 통보 다

에 통상에 적용된 현존 관세규정을 향후 10년

음날인 24일, 미국은 서울 주재 미국 공사 모간

동안 유지할 것임을 밝혔기 때문에 미국의 대

에게 공사관을 폐쇄시키고 한국에서 철수하라

조선 무역은 즉각적으로는 영향을 받지 않았습

는 전훈을 보냅니다. 미국공사관은 나흘 뒤 폐

니다. 또한 일본은 조선 내에서 지속되어온 미

쇄되고, 마찬가지로 워싱턴의 대한제국 공사관

국의 선교활동과 한반도 내 미국인의 재산권을

도 1905년 12월 16일 폐쇄됩니다.

보장해주었습니다.

고종은 일본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했다고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은 윌리엄 태프트는 23


동아시아 연재

변호사 출신의 관료로서 예일대를 나온 엘리트

대해 완전히 손을 떼는 결정을 내린 것이었습

였습니다. 관료로 정계에 진출한 그는 1900년,

니다.

스페인과의 전쟁 승리의 결과로 얻은 필리핀의 초대 총독으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4년간의

어쨌든 태프트는 ‘밀약’을 성사시키는 등 T.루

필리핀 총독직을 마치고 미국에 돌아온 태프트

스벨트를 대신해 아시아에서의 외교를 전담

는 본국으로 돌아와 1904년 시어도어 루스벨

하는 참모로 활약합니다. 그의 이런 성과들은

트 대통령의 육군장관에 임명되면서 그의 보

T.루스벨트에게 인정을 받게 되었고, 결국 루

좌역을 맡았습니다. 태프트는 1905년 육군장

스벨트의 후임으로 제27대 미국 대통령에까지

관 겸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일본에 방문해 일

당선되는 영광을 누립니다. 태프트는 공화당

본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와 맺은 ‘밀약’의 주인

출신의 T.루스벨트의 후임으로서 당시 세계 제

공이 됩니다.

1의 공업국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미국을 이끌 어 갑니다. 하지만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이 횡

밀약 당시는 미국이 러일전쟁의 강화협상을 주

행하던 세계정세 속에서 태프트의 평화주의 외

도하던 때였는데, T.루스벨트는 조선을 별 가

교는 실패를 거듭합니다. 태프트의 미국은 이

치가 없는 후진국이라 보고 일본의 조선 지배

른바 ‘달러외교’를 통해 경제력을 바탕으로 무

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고 태프트에게 협상

력을 수반하지 않는 팽창을 지향했는데, 이런

의 전권을 맡겼습니다. 태프트는 미국 대통령

정책으로는 식민지 확장에 혈안이 된 다른 열

의 전권을 위임받은 외교 사절이었고, 그의 결

강들과 경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은 미국 정부의 결정과 다름없었습니다. 태

결국 태프트는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프트는 공식적인 외교방침으로서 조선 문제에

실패하게 됩니다. 전임자였던 T.루스벨트가 태

24


동아시아 연재

프트의 재선에 반대하며 추종자들을 이끌고 진

은 완전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던

보당을 차려 공화당을 분열시켜 버렸기 때문입

것입니다. ▒

니다. 제28대 미국 대통령 선거는 결국 어부지 리로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이 승리하게 됩니 다. 후임 대통령 윌슨은 이른바 ‘민족 자결주 의’로 조선을 비롯한 식민지 민중들에게 큰 영 향을 미치기도 한 인물이 됩니다.

참고문헌 미국 국무부 공보국 역사정책 연구과, 한철호 역, 『미국의 대한정책 1834~1950』,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98

태프트는 미국의 동아시아 외교를 이끌며 대 통령에까지 오른 인물이지만, 미국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시어도어 루 스벨트와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우드로 윌슨을 전·후임자로 두는 바람에 그다지 존재감 있는 대통령으로 기억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 려 거구의 몸 때문에 ‘가장 뚱뚱한 미국 대통 령’으로 기억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또, 그는 퇴 임 후에 미국 연방대법원장에도 임명되어 역사 상 최초로 행정부와 사법부의 수반을 함께 역 임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외교가나 정치인보다는 법조인 엘리트가 더 어울리는 육 군성 장관 출신의 ‘뚱뚱한 대통령’에 의해 조선 25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http://mag-mkyd21.tistory.com/144

연말정산이 뭔데 이 난리야? 연말정산으로 사회가 시끄럽다. 증세 없이 복지를 한다더니 결국 월급쟁이 유리지갑을 털 어가는 것 아니냐며 정부에 대한 원성도 치솟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부에 대한 원성을 구체적으로 체감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학생 등 월급쟁이가 아닌 사람들은 연말정산 이 뭔지, 왜 이렇게 난리들인지 체감하기가 어렵다.

26


풀어쓰는 경제이슈

연말정산이 대체 뭐야

기 때문이다. 소득이 얼만지 정확해 져야 그에 따른 세금도 정해진다. 1년 안에 연봉(혹은 월

정부는 경제주체들이 벌어들인 돈에 대해 일

급)이 바뀔 수도 있고, 회사의 사정에 따라 성

정 비율로 세금을 거두고, 그 돈을 필요한 곳

과급이나 보너스 액수도 달라진다.

에 쓴다. 물론 어떤 정부냐에 따라 4대강 사업 에 돈을 쓸 수도 있고, 복지에 돈을 쓸 수도 있

보통 회사는 ‘원천징수’라고 하여 월급을 줄

겠지만. 어쨌든 기업이라면 법인세를 낼 테고,

때 세금을 미리 떼고 준다. 월급쟁이들은 매달

노동자라면 근로소득세를 내게 된다.

회사가 알아서 세금을 대신 내주는 것이다. 이 렇게 하는 이유는 개별적으로 세금을 계산해

연말정산이란 근로소득이 있는 사람이 한 해

직접 내는 불편을 없애고, 조세 저항 없이 세

동안 벌어들인 수입 중 얼마를 세금으로 내야

금을 좀 더 쉽게 거두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하는 지 다시 한 번 정리하여 세금을 환급해

이런 식으로 매월 세금을 거둬갈 때는 대략적

주거나 추가로 징수하는 행위를 말한다. 자기

인 표준을 정해서 세금을 거둬간다. 1년의 연

가 번 돈은 자신이 정확히 알 수 있는데, 특히

소득이 확정이 되었을 때 내가 최종적으로 내

월급쟁이라면 자신의 통장에 근로소득이 정확

야 하는 세금과 1년 동안 달 달이 낸 세금이

히 찍혀 있는데 연말에 복잡하게 정산을 하는

다를 수가 있다. 그래서 이를 조정하는 작업인

이유가 뭘까 의아해 할 수 있다.

연말정산이 필요한 것이다.

연말에 정산이 필요한 이유는 첫째, 연말이 되

둘째, 우리나라 근로소득세는 번 돈에서 국가

어야지 자신이 벌어들인 돈을 정확히 알 수 있

가 인정하는 필요한 곳에 쓰고 남은 돈에 대해 27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과세를 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보자. A라는

지출도 있겠지만 병원비처럼 갑작스럽게 써

사람은 연봉이 4000만원이다. 원래라면 A는

야하는 돈이 생길 수도 있다. 집주인이 월세를

4000만원에 대한 세금을 내야한다. 그런데 가

올려달라고 할 수도 있다. 연말이 되어야 내가

족 중 아픈 사람이 있어 A는 1년에 500만원을

‘국가가 인정하는 필요한 곳’에 얼마나 돈을

병원비로 지출해야 한다고 해 보자. 이 의료비

썼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 따라서 내가 ‘원천

지출에 대해서는 정부가 A의 소득으로 인정하

징수’를 통해 매달 낸 세금과 실제 내가 내야

지 않는다. 소득으로 인정하지 않으니 내야하

할 세금이 달라지는 것이고, 연말정산을 통해

는 세금도 줄어들게 된다.

정확히 내야 할 세금을 다시 계산하는 것이다.

즉 ‘국가가 인정하는 필요한 곳’에 쓰여 지는

소득공제와 세액공제

돈에는 의료비, 교육비, 월세, 보장성 보험료 등이 있다. 살아가면서 필수적으로 지출해야

이번 연말정산이 사회적 혼란을 주고 있는 것

하는 부분에 대해선 과세대상에서 제외를 해

은 연말정산의 계산 방식이 바뀌었기 때문이

준다는 것이다. ‘6살 이하 자녀 1명당 100만

다. 그 핵심은 ‘소득공제’가 ‘세액공제’로 바

원의 소득공제’ 등과 같이 본인, 배우자, 부양

뀐 것이다.

가족 등에 따른 인적공제도 소득공제에 포함 된다.

먼저 기존의 연말정산 기준이 되었던 방식인 소득공제는 자신이 벌어들인 소득 중에서 일

그런데 월급을 받을 때에는 그 사람이 월급을

정 금액을 공제하는 방식이다. 앞의 A씨 예

어디에 얼마를 쓸지 알 수가 없다. 고정적인

로 돌아가 보자. A씨 연봉은 4000만원이지만

28


풀어쓰는 경제이슈

500만원을 병원비로 지출했다. 소득공제 방

이 없다면 A씨가 내야할 세금은 ‘1200만원

식에서는 500만원을 소득에서 제외시킨다. A

×6%+2800만원(4000만원에서 1200만원을

씨는 3500만원에 대한 세금을 내면 된다. 즉

제한 금액)×15%’가 된다(※ 4000만원 전체

A씨가 병원비를 지출하지 않아도 되는 연봉

가 15%의 세율로 계산되는 것이 아니라 과세

3500만원을 받는 B씨와 사정이 같다고 보고

표준 구간별 다른 세율이 적용된다).

그에 따른 세금만 거둔다는 것이다.

병원비 500만원을 소득공제 받았다면 A씨가 내게 될 세금은 ‘1200만원×6%+2300만원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아래표는 과세표

×15%’가 된다. ‘국가가 인정하는 필요한 곳’

준에 따른 세율이 얼마인지를 나타낸 것이다.

에 돈을 많이 썼다면 과세표준이 1200만원 이

과세표준이란 연봉에서 소득공제 받을 수 있

하로 아예 떨어질 수도 있다.

는 금액을 뺀 것을 말한다. A씨의 경우 연봉 반면 세액공제는 소득공제와 달리 이미 확정

이 4000만원 이었다. 이 경우 소득공제할 것

과세표준구간

세율

구체적 세율의 적용

1200만원 이하

6%

6%

1200만~4600만

15%

72만원+1200만원 초과금액의 15%

4600만~8800만

24%

582만원+4600만원 초과금액의 24%

8800만~1억5천만

35%

1590만원+8800만원 초과금액의 35%

1억5천만 초과

38%

3760만원+1.5억 초과금액의 38%

29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된 세금 자체에 대해 감액을 해 주는 방식이

예를 들어 1년에 1000만원을 버는 사람 C와

다. A씨의 경우 연봉 4000만원에 대한 세금

1억5천만원을 넘게 버는 사람 D가 있다고 해

을 계산한 후, 그 다음 의료비 지출 500만원

보자. 이들은 각각 병원비로 100만원씩을 써

에 대한 일정비율의 세금(예를 들어 500만원

서 소득공제를 100만원 받게 되었다. C는 버

×15%)을 감면받는다. 즉, 세율이 곱해지기

는 돈이 1200만원 이하 이므로 C의 100만원

전 소득에서 일부 금액을 빼주는 소득공제와

에 대해서는 과세표준 구간 상 6%의 세율이

는 달리 세액공제는 세금이 계산된 뒤 여기에

적용된다. 따라서 C는 원래 100만원에 대해

서 일정 비율만큼 세금을 깎아주는 것이다.

6만원(100만원×6%)의 세금을 내야 하는데

소득공제

:

(근로소득-소득공제) × 세율

세액공제

:

(근로소득×세율) - 세액공제

이를 감면 받게 된다. D는 1억5천만원을 넘 게 버는 고소득자이므로 D의 100만원에 대해 서는 과세표준구간 상 최고세율인 38%의 세 율이 적용된다. 따라서 D는 38만원(100만원

소득공제는 세액공제에 비해 고소득층에 유

×38%)의 세금감면을 받는다.

리하다. 우리나라 소득세는 소득이 클수록 세

반면 세액공제를 적용하면, 고소득층과 저소

율이 더 올라가는 누진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득층 모두 똑같은 비율로 세금을 돌려받기 때

그에 따라 고소득자는 저소득자에 비해 세율

문에 상대적으로 저소득층에게 유리하다. 특

이 높아 같은 금액의 소득을 공제받더라도 돌

히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소득공제

려받는 세액이 더 많다.

를 많이 하는 나라다. 우리나라는 총소득에서 60%이상 소득공제를 받는 반면 경제협력개발 기구(OECD) 평균은 두 자녀를 둔 맞벌이 가

30


풀어쓰는 경제이슈

정의 경우는 35.5%, 두 자녀를 둔 외벌이 가

첫째, 정부의 장담과는 달리 5500만원 이하

구는 27%, 자녀가 없는 독신가구 18.7%이다.

에서도 세부담이 늘어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정부는 연망정산 방식을 변경하면서 “

사람들이 열받은 이유

총급여 5500만원 이하 약 1300만 명은 세 부 담이 줄어들고, 5500만원 이상 7천만원 이하

소득공제에서 세액공제로의 전환이 저소득층

약 100만 명은 세금이 2만~3만원 증가한다.

에 비해 고소득층이 불리한 제도라고 한다면

총급여 7천만원을 초과하는 약 160만 명은 세

사람들이 정부에 대해 이렇게 분노하는 이유

부담이 134만원 증가한다”고 주장했다.

는 무엇인가?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례들이 생겨나고 있다.

31


경제를 생각하는 시간

정부가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바꾸면서 일부

와 어떤 계층이 더 불리한 가를 떠나 세금을

항목을 조정한 탓에, 가구별로 의료비·교육

더 많이 내야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는 것이

비 등 지출액과 자녀수에 따라 5500만원 이

다.

하 소득자라도 세금이 2013년보다 늘어날 수 있다. 특히 부양가족 공제 혜택 등을 적용받지

둘째, 법인세는 안올리면서 담뱃세는 인상하

않는 미혼 직장인의 부담은 더욱 가중될 것이

는 등 전반적인 세금정책에 대한 대중들의 불

란 전망이다.

만이 누적되어 있다. 우리나라 전체 세금 구조 를 봤을 때 더 큰 문제는 근로소득세 내의 고

게다가 박근혜 정부는 세법 개정이 쟁점이 되

소득층과 저소득층의 문제보다 법인세나 자

었던 2013년 8월부터 ‘증세는 없다’는 말로

산소득에 대한 과세 문제 등에서 불평등이 더

일관하며 국민을 속여 왔다. 하지만 소득정도

욱 심각하다.

32


풀어쓰는 경제이슈

이명박 정부 당시 2008년 법인세 최고세율

금을 내지 않는 면세점 이하였다. 대략 연소득

이 25%에서 22%로 3%포인트 내렸고, 박근

3000만원 이하의 노동자들 역시도 기본 공제

혜 정부들어서도 법인세를 원상복구하려 하

등의 적용을 받으면 원천징수로 낸 세금을 연

지 않고 있다. 그 결과 법인세는 감소하고 있

말정산에서 거의 다 되돌려 받을 수 있었다.

는 반면 소득세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나아가

따라서 연말정산이 저소득자에게 유리하다는

자산소득에 대한 과세나 종교인 과세 등에도

정부의 설명을 서민들은 체감할 수 없다.▒

소극적이다. 대기업에 대한 법인세, 자산소득 과세 등에 대 해선 특혜를 유지하면서 담뱃세 등 서민층에 게 부담이 되는 방식만을 추진하고 있는 정부 의 모습을 보며 국민들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 하다. 연말정산의 방법을 고소득층에게 불리 하게 조정했다고 얘기해 봐야 공감을 얻기 어 렵다. 셋째, 저소득층 노동자들에게는 실질적 혜택 이 돌아가지 않는다. 연소득 2000만원 이하의 저소득 노동자들은 예전에도 소득이 낮아 세

33


예술 그 본질적 가치

http://mag-mkyd21.tistory.com/145

북한미술전. 지구 반 바퀴를 돌아온 금기의 보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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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그 본질적 가치

경직된 표정으로 로봇처럼 행진하는 군인들

북한미술전에는 주로 북한 개성지역에서 수집

의 열병식. 총과 무기, 거대한 나팔수와 힘줄

한 풍경화, 인물화, 산수화 등 북한 화가 70명

이 불끈불끈 튀어나온 팔뚝이 그려진 선전화

의 작품 15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임렬, 공

를 들고 퍼레이드를 하는 모습. 북한미술 하면

천권, 최하택, 탁효연, 신철웅, 김일수 등 국제

떠오르는 이미지다.

전시회에서 다양한 수상경력이 있는 북한 최 고 작가의 작품이다.

사실이다. 북한은 선전(Propaganda)의 나라

‘대동강에 핀 꽃이 곱디 고와라’는 시구가 북

다. 아마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포스터를 접

한사회주의 체체를 미화했다며 ‘종북’으로 몰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체제의 특성상 ‘선전’

리는 이 시대에 북한 미술작품을 두고 뭐라고

이 발달한 북한미술은 풍경화에도 구호가 그

표현해야할지. ‘적당히 곱네’ ‘빨간 것은 불순

려져 있지 않을까. 궁금증을 풀어보려고 네덜

하구만’ ‘이 그림 속에 공산주의 사상이 담겨

란드 미술재단 스프링타임 아트(Springtime

있을 꺼야’ 이렇게 색안경을 껴야하나 싶다.

Art)가 개최한 ‘유럽에서 들려주는 북한 미술

자기검열의 시대에 표현의 자유는 어디에 갔

전, 숨겨진 보물들이 드러나다’를 찾았다.

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35


예술 그 본질적 가치

◀터치는 봄

▼벚꽂만개

36


예술 그 본질적 가치

북한미술의 속살

이라고 한다. 몰골기법은 다른 회화기법들과 는 달리 실수를 고칠 수 있는 여유가 없다. 그

그런데 이럴 수가. 북한미술의 첫인상은 생각

만큼 섬세하고 세밀한 작업인 셈이다.

보다 따뜻했다. 딱딱한 껍질을 깨고 벌리면 보

탁효연은 젊은 작가로 북한 유화의 대표주자

드라운 속살이 드러나듯이 의외였다.

다. 1990년 평양미술대학 유화과를 졸업해 만

<터치는 봄. 2007.7 정화>은 살구꽃을 소재

수대창작사의 서양화가로, 국가미술전람회에

로 봄의 절정을 표현했다. 화려함의 극치로 봄

서 10회 입상하는 등 명성을 쌓아가고 있는

이 그대로 그림에 번지는 느낌이 잘 살아있다.

차세대 북한 대표 미술가다.

<벚꽃만개. 2006.5 김안수>는 활짝 핀 벚꽃을 빨려 들어갈 것처럼 압도적으로 묘사했다. 눈

그가 1998년 그린 평양지하철 그림은 거친 유

을 감으면 볼에 벚꽃이 흩날리는 듯하다. 머리

화질감 붓 터치로 흐릿해 보이지만 생동감 있

가 어지러울 정도다.

는 살아있는 그림이다. 화려한 조명과 아치형

북한 미술은 사실적인 묘사와 화려한 색체가

의 천장으로 북한 문명의 상징인 지하철의 이

특징이다. 생소한 몰골기법은 단 한 번의 붓질

미지를 함축적으로 묘사했다.

로 대상의 성격과 형태, 질감을 나타내는 기법

37


예술 그 본질적 가치 평양지하철▶

2007년에 그린 평양의 거리도 비슷한 느낌이 다. 비가 그친 후에 번진 화려한 야경을 감각 적으로 표현했다. 흔들리는 차량의 헤드라이 트, 거리를 비추는 가로등. 노을 지는 저녁풍 경이 아름답다. 한적하면서 도시화된 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평양의 거리▶

38


예술 그 본질적 가치

긁어내기(스크레치) 기법으로 가을날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정주철 화가의 그림 역시 매우 독특하다. 낙엽 밟는 바스락 소리가 날 것 같은 그런 그림이다. 겨울날 백양나무에 쌓 인 눈과 강렬한 석양이 눈부시다. 스크레치 기 법으로 더욱 실감나게 사실성을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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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그 본질적 가치

그들이 추구하는 미술

해 낸 독자적 위상을 가지는 것으로 모든 북한 미술의 중핵이 되고 있다. 사상성과 현실, 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김찬동 미술회관팀장의

통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세 개의 요소를 완벽

<북한 문화예술의 흐름>에 보면 북한의 미술

하게 이룩한 미술장르를 조선화에서 찾고 있

에 대한 이해를 조금 더 높일 수 있다.

는 것이다.

오늘의 북한 미술은 사상성과 예술성을 결합

이런 해설을 찾아보다보니 좀 더 북한미술에

하고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창작방법에 기초

대한 이해가 높아진다. 북한 미술이라는 느낌

하여 사회주의적 내용을 철저히 민족적 형식

이 조금 더 살아있는 그림은 해맑게 웃고 있

에 담아 발전시킨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는 탄부와 목가적 느낌이 물신 풍기는 염소 치

1990년대 이후에도 생활의 사실성에 민족 정

는 여성 그림이다. 모두 2000년대 후반에 그

서의 복합이라는 양면을 충족시키는데 주력하

린 그림이다. 경제적 여유는 없더라도 노동을

고 있다.(중략)

중요하게 여기는 그들의 모습이 그림에 반영 된 듯하다.

북한 조선화는 동양화의 맥을 이은 것이지만 채색과 서양화적 기법을 혼합한 독특한 모습

정치색이 철저히 배제된 북한미술. 정치색은

을 보여주고 있는데, 민족적 형식의 전형을 획

없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 우리 강토를 그

득한 사회주의적 성격을 가장 탁월하게 구현

린 북한미술가들의 아름다운 그림을 보다 보

40


예술 그 본질적 가치

면 자연스럽게 삼천리 금수강산의 절반인 북 한의 풍경을 언제쯤 직접 볼 수 있을까라는 생 각이 떠오른다. 감추어진 세계를 조금 더 들여다보고 싶지만 분단이라는 현실에 다시 눈을 뜬다. 예술은 시 공간을 초월한다. 휴전선을 넘어 지금 우리나 라에 와있는 북한의 미술작품이 특별하게 보 인다. 아마 예술이 가진 힘 때문일 것이다.▒

41


세상의 모든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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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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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무기

<JTBC>는 2월 21일, 육군 병사의 전투체력 훈

도 없이 개별작전만 수행할 가능성은 사실상

련이 강화된다고 보도하였습니다. 군장을 메

없습니다. 무려 70년 전인 제2차 세계대전에

고 10km를 두 시간 안에 주파하는 급속행군이

서도 보병은 공군과 포병의 지원을 받으며 작

도입되고, 사격 훈련도 실전형 전투사격으로

전을 수행했습니다. 그러한 전술체계는 70년

바뀐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기초체

간 꾸준히 강화되어왔습니다. 체력강화보다

력 강화와 사격능력 강화가 핵심인 것입니다.

공동작전이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육군의 강군 프로젝트의 일환이라고 하 는데요, 군장을 멘 상태로 10km를 2시간 10

물론 군장을 멘 상태로 5km를 1시간에 들어

분 내 주파하는 급속행군과 5km를 40분 안에

오는 것보다야 40분 안에 들어오는 것이 더 좋

들어와야 하는 뜀 걸음, 즉 구보가 추가되었다

을 것입니다. 그러나 체력훈련보다 또한 시급

고 합니다. 사격훈련도 종래의 100m와 200m,

한 것은 포탄이 작렬하고 총알이 빗발치는 전

250m 등 정해진 구간에서 고정 표적을 향해

장에서 각 장병들이 바지에 똥오줌을 싸지 않

사격을 연습하던 방식에서 탈피해 언제 어디

으면서 앞으로 돌격할 수 있는 실전경험일 것

서 적이 나올지 모르는 실전형 전투사격으로

입니다. 보병은 전시에 전투지역을 돌아다녀

바뀐다고 합니다.

야 합니다. 전시의 정황은 매우 변화무쌍합니 다. 평상시 군장을 메고 5km를 40분이 아니라

하지만 육군의 이러한 개선방안이 오늘날의

30분 안에 들어오는 장병들이라고 하더라도

전쟁에서 과연 얼마나 성과를 발휘할 지는 미

죽음의 공포 앞에서 “어머니”를 부르며 웅크

지수입니다. 보병은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비

린 채 울고 있으면 그 체력훈련은 아무 의미없

중을 차지합니다만 현대전은 각 병종의 협력

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포탄이 터질 경우 폭음

체계 구축이 독자 행동보다 더욱 중요합니다.

이 얼마나 큰지, 땅은 얼마나 흔들리는지 체험

보병이 공군이나 포병지원도 없고 기계화부대

을 하고 내 옆으로 총알이 지나갈 때 어떤 소 43


세상의 모든 무기

리가 나는지 경험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포

밤새워 경계근무를 서다보면 졸린 눈을 비비

탄이 작렬하는 아비규환에서 지휘관의 명령을

고 전투에 돌입할 상황도 있습니다. 평상시에

귀로 알아듣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경

는 총을 잘 쏘는 장병들이라면, 한참 졸린 상

험해보아야 하며 지휘관은 그런 아비규환 속

황에서도 사격을 잘 할 수 있을까요? 비가 와

에서 장병들을 어떻게 지휘해야하는지도 경험

서 온 몸이 질척거리거나 하루종일 아무것도

해보아야 합니다.

먹지 못한 상황에서도 전투는 시작될 수 있습 니다. 이런 돌발상황을 가정하지 않고 줄줄이

사격훈련도 마찬가지입니다. 60만 국군이 모

자리에 들어앉아 과녁을 조준하는 것이 어떻

두 저격수가 아닌 이상, 이들이 실제 전투상황

게 “실전형 전투사격”입니까?

에서 편안한 신체상황에서 사격을 할 가능성 은 매우 희박합니다. 500m를 전력으로 구보한

전장에서는 내가 총을 한방 잘못 쏘면 나에게

후 숨이 헐떡거릴 때 과녁조준은 어떻게 해야

수십발의 총알이 몰려들 수 있습니다. 내가 쏜

하는지, 야간에 목표물이 보이지 않을 때 사격

총은 반드시 적군을 맞춰야 하며 언제나 사격

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각종 돌발변수에 대처

전에는 사격 후 은폐물을 확보하고 사격해야

하는 방법을 훈련하는 것이 급선무 아닐까요?

할 것입니다. 또한 전장에서는 적군이 한 번에

지난 냉전시기, 우리는 틈만 나면 6.25 동란

한 명씩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 편도 나 혼자

때 북한군이 주로 밤에 기습을 했다고 교육받

가 아니라 내 옆에는 전우가 있습니다. 전투에

아왔습니다. 그런데 왜 사격훈련은 벌건 대낮

서는 수십명, 수백명의 적군이 한꺼번에 나타

에 하는 것인가요? 사격훈련도 야간훈련의 비

날텐데 어떤 대상을 먼저 쏘는 것이 유리한지

중을 높여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나마 100m

병사들의 역할에 따른 구분능력이 있어야 합

와 200m 구간을 정해두고 사격하는 상황에서

니다. 설마 군의 “실전형 전투사격”을 집중 연

사거리가 수시로 변한다고 하니 약간은 나아

마했다는 우리 장병 100명이 실제 전투에 들

진 느낌입니다.

어가서는 최전방에 노출된 북한군 1명에게 사 격을 집중하다가 나머지 99명의 북한군을 살

44


세상의 모든 무기

려주는 우를 범하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수부대냐”라고 핀잔을 줄 수 있겠습니다. 하지 만 그것은 평시의 상황입니다. 일단 전쟁이 나

“실전형 전투사격”이 실제 실전형이 되려면

면 60만 장병들 모두 살기 위해서라도 공수부

여러 장병들이 사격계선에 동시에 서서 동시

대보다도 더 혹독한 훈련도 자처할 것입니다.

에 나타나는 여러 개의 사격목표를 동시에 사 격해야 합니다. 물론 이 경우 사격점수의 판정

문제는 그런 전쟁을 과연 꼭 해야만 하느냐는

은 분대단위로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것입니다. 전쟁은 컴퓨터게임이 아닙니다. 적

실제로 전투가 그렇게 수행되는 상황이라면

군을 죽이면 그만큼 아군도 죽습니다. 북한군

사격훈련도 그렇게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보잘 것 없다고요? 세계최강이라고 자부하 던 미군도 이라크에서 4400명이 죽었습니다.

전쟁터는 그야말로 난장판이며 구역질나는 쓰

6.25 동란 때에도 유엔군이 무기가 약해서 1.4

레기통입니다. 적군과 대치한 전선에서 썩어

후퇴를 한 것이 아닙니다. 한반도 전쟁 승리를

가는 전우의 시체를 누가 치울 수 있나요. 사방

자신하는 분들 그 누구도 자기가 최전선의 맨

에서 전우들 시체썩는 냄새가 진동할텐데 거

앞장에 서겠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전쟁결과

기서 밥인들 제대로 먹겠습니까? 돌격하는 와

와 관계없이 맨 앞에 섰다가는 자신이 죽을 수

중에 적의 사격을 피해 썩어가는 시체더미 속

있기 때문입니다.

에 웅크려야 할 상황도 있습니다. 이런 돌발상 황에 대한 훈련이 전무한 상황에서 무슨 “실전

화해협력이란 쉬운 길을 놔두고 군사적 긴장

형 전투사격”이라고 하니 어안이 벙벙합니다.

이라는 어려운 길을 왜 그리도 고집하는지 도

사격훈련이 끝나고 장병들이 전쟁을 무슨 북

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미국과 유럽의 청년

한군 사냥대회 쯤으로 여길 듯합니다.

들은 군대에 징집되지 않습니다. 60년째 군대 에 끌려가는 우리 청년들이 대체 무슨 죄입니

이 정도 이야기하면 독자들은 “보병이 무슨 특

까? ▒

45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회·원·을·만·나·다

참 일꾼’ 신임사무총장

김성일

http://mag-mkyd21.tistory.com/136 김성일 신임 사무총장(이하 사무총장)은 최근 사무실 자리를 옮겼다. 누군가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자리.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과 가장 먼저 눈이 마주치는 자리. 우리 회원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그는, 그 첫 실 천으로 사무실 현관과 가장 가까운 거리로 자리를 옮겼다. 지난 민권연대 5년의 역사 속에서 사무국장으로서 온갖 궂은 일을 맡아 왔고 이제는 새로운 직책에서 민권연대의 힘찬 도약을 꿈꾸는 일꾼. 새해 설을 앞두고 김성일 사무총장과 인터뷰를 가졌다.

46


우리가 미래다

본 기자(이하 본) : 지난 2월 8일 전국대표자

사업 때마다 얘기가 나올 정도로 이렇게 키워

회의에서 인준을 받으셨고 5년만에 새로운 사

온 거는 사실이니까.

무총장이 되셨는데요. 사무총장이 된 이후에

물론 사무총장이 하는 역할이 뭐 사람들이 다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들으신 얘기가 뭔지 궁금

뒷받침해줘서 그런 거지만 그만한 리더쉽을

해요.

가지고 사업을 추진하는데서는 전 총장님이 역할을 많이 한거니까. 그리고 뭐 민권연대에

김성일(이하 김) : 음... 고생이 많겠다 그런거

대한 기대들이 원체 많으니까. 축하한다는 말

지 뭐.

과 더불어서 고생 많이 하겠다는 말을 제일 많

본 : 아. 그렇군요. 김 : ... 본 : ......;; 그 외에 별 다른 말은 없었나요? 김 : 전 사무총장님이 원체 잘했기 때문에. 한 것도 많고. 아무리 그래도 전 총장님만큼 실력 이랑 사업 뭐 이런거 봤을 때는 많이 미천한 게 사실이고. 그리고 5년동안 민권연대가 막 말로 듣보잡에서 이제는 진보진영에서 무슨

이 하지. 본 : 사무총장이 되고서 제일 부담된다거나 한 게 있다면요? 김 : 제일 부담되는 거는 뭐 사람들 기대만큼 못할까 하는거. 잘해야 되는데. 민권연대 사업 이라는 게 그냥 단순한 게 아니고 진보진영에 이제 요구되는 거. 그런 역할. 종합적으로 봤 을 때는 민권연대가 잘 하고 못하고가 중요한 현황이다보니까.

47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본 : 해야할 일도 많아졌잖아요. 주변의 요구 도 많아지고. 김 : 그렇지. 단순히 일이 많아졌다기보다는 요구가 많아졌지.

“잘해야 되고 잘해야만 하는 자리” “달라진 게 있다면 각오가 달라졌다 해 야할까?” 본 : 사실 어떤 질문을 할까 고민하다가 페이 스북 상에서 질문 공모를 했는데 아쉽게도 실 패했어요. 그래도 주변에서 좀 의견을 모아봤 는데요. 사무총장이 되고 몇 가지가 눈에 띄 게 달라졌다. 아침 출근시간이 예전보다 월등 히 빨라졌다, 너그러워지셨다. 간부들의 생활 에 세세한 관심이 많아지셨다. 이런 얘기들이 있는데요. 김 : 제보가 상당히 주관적인 거 같은데 ^^; 48

본 : 사실 지위와 직책이 달라지면 활동상에 서도 달라지는 부분이 많이 있을 수 밖에 없잖 아요. 사무국장 역할을 하다가 사무총장이 되 신 후에 스스로 달라졌다라고 느껴지는 부분 이 있다면요? 김 : 아직까지 달라진 건 잘 모르겠고. 음... 각 오가 달라졌다 해야되나? 아 이게, 어쨌든 뭐 사람들한텐 그냥 농담으로 이제 민권연대에 나의 시대가 열렸다 농담삼 아 이야기 하는데 사실 그만큼 부담도 엄청 큰 거고. 잘해야 되고 잘해야만 되는 자리고. 잘 못해도 최선을 다해야 되는 자리고. 그런데서 는 여태까지보다 달라야 된다 그런 생각이 많 이 들고. 좀 많이 바뀌어야 된다 그런. 운동을 열심히 해야 된다는거는 늘 하는 생각 이긴 한데,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래야 되 나? ^^;


우리가 미래다

예전에 비해서는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열심히

높게 기억되는 것은 어떤게 있을까요?

요구에 맞게 변화를 해야 되는 시기라서.

김 : 그때 광주 적십자수련원에서 행사를 했

그런데서는. 혁신해야 될 지점이 한 두가지가

는데, 전국규모의 큰 행사였지.

아니다 보니까. 그런 대중사업을 처음 준비하다 보니까. 당시

민권연대 5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우리가 정국의 중요한 투쟁에서 크게 도움이 될 때”

새로운 총장 체제에서 그런 규모의 행사를 처 음 하니까 사람들이 기대? 걱정? 이런게 많았 었거든. 그러면서 해오름제 딱 하면서 시작했 던 게 기억에 남고.

본 : 사무국장을 5년동안 하셨어요. 김 : 2010년도 9월 말에 출소하고 10월 중순 경부터 시작했지. 본 : 민권연대 5년을 돌아보면서 가장 자긍심

또 2011년도가 개인적으로는 처음 하는 사람 이 제일 많았어서. 나한테는 모든 사업이 다 처음이었으니까. 그래서 기억에 많이 남지. 대 학생들이랑 지리산 무전여행 갔었던 거. 배움 의 올레도 그렇고. 49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그리고 민권연대가 대외적으로 알려진 게 사

“미안하고 고마운 아내, 있어주는 것만

실상 국정원 문제 터지고 난 다음에. 그때 민

으로도 가장 큰 선물인 딸들”

권연대 위상이 많이 높아지기도 했으니까. 사 실 이건 조심스럽게 표현하는 거지만, 우리 잘

본 : 네, 다음 질문은요 비공개로 요청이 들어

났다 이런 얘기는 아니니까. 국정원 문제 터지

온 질문입니다. 음...사무총장이 된 이후 세 여

고 나서 우리가 국정원 감시단이나 그 다음에

자, 아내와 두 딸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은?

민주찾기대행진이나 이런것들을 하면서 그때 당시에 여러 가지 퍼포먼스라든지 이런 걸 짜 가지고 준비하고. 그때 우리가 이제 정국의 중 요한 투쟁에서 크게 도움이 되고 있구나. 우 리 자화자찬이 아니라 우리에게 뭐 이런걸 해 주면 좋겠다 하는 외부의 요청이 많았으니까.

50

김 : 누가 그런 질문을 보낸거지? 이런 질문 도 하는건가?^^; 음... 뭐 항상 미안하고 고맙고. 근데 나도 인 제 인간이다 보니까 성질을 못 참고 혹은 뭐 내가 실수를 많이 해서. 내가 고쳐야 될, 개선


우리가 미래다

▲기자회견에 딸과 함께 참석한 모습

해야 될 부분이 많이 있는데 그런 거 미안하

고맙고 미안하고 하지. 사람 사는 게 뭐 마음

고. 아예 돈도 안 벌고 있는 남편이랑 살아주

이 마음처럼 움직여지진 않으니까.

는 것만 해도 감사하고. 어쨌든 과제는 나한테 많은 거니까. 아내랑 그냥그냥 사는 게 아니라

“나 하나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회원들

우리 집사람도 내가 도와주거나 이런 것들을

이 함께 하는 거니까” “사무총장은 일을 하는 사람, 너무도 훌 륭한 우리 회원들이 마음을 모을 수 있 도록 내가 매개체가 되어야겠다”

찾고 더 해줘야지. 많이 도와줘야 되는데 그런 게 많이 없고. 딸들한테는 뭐 고맙지. 있어주는 것만 해도 감 사하고. 내가 뭘 하지 않아도 나한테 그냥 애 들은 그냥 선물이니까.

본 : 네 알겠습니다.

내가 뭘 한다 그래서 이렇게 큰 선물을 받을

전국의 회원들에게 그리고 자신 스스로에게

수 있겠나. 그렇게 생각하면 이제 집사람이 또

다지는 앞으로의 각오를 밝힌다면요? 51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김 : 사무총장이라는 이런 역할을 맡기에는

면서 진짜 우리 회원들 같은 이런 훌륭하고 좋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고. 그렇지만은 피하거

은 회원들...이 있었기에 민권연대가 굴러가는

나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더 배우면서 크

거고. 그런데서 많이 부족한 사람이 사무총장

는 과정이라고 생각을 하고.

이 됐는데 많이 도와줬으면 좋겠고. 사실 우리

그런데서 뭐 내 지위는 어쨌든 민권연대 회원

회원들이 만든거지. 사무국장 사무총장은 일

들이 버텨준다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열심히

을 하는 사람들인거고. 회원들이 해야 될 일이

해보려고.

점점 더 너무 많아지고 있는 그런 시대로 가고

능력이야 부족하지만은 나 하나가 일을 하는

있는데 우리 회원들이 잘 할 수 있도록.

게 아니라 중앙과 지역 일꾼들이 도와주고 회 원들이 함께 하는 거니까.

김성일 사무총장은 인터뷰를 시작하기 직전까

그런데서 가장 초점을 맞추거나 하려는 거는

지 끊임없이 누군가와 100개거점 운동에 대

내가 뭔가 능력을 발휘해서 잘한다기 보다는

한 주제로 전화통화를 나누고 있었다. 사실 깜

우리 일꾼들 회원들이 마음을 모을 수 있도록

짝 놀라기도 했다. 사무총장의 특징이라고 해

그런 방향으로 내가 매개체가 되어야겠다. 그

야할까?

런 생각을 많이 하고 있고. 그런데서 나도 인

올 한해 아름찬 계획들을 펼쳐놓고 뚜벅뚜벅

제 일을 많이 해야지.

걸어갈 김성일 사무총장. 이미 그 걸음을 힘있

본 : 끝으로 전국의 민권연대 회원들에게 하 고 싶은 말 한마디 부탁드려요. 김 : 뭐 어쨌든 민권연대 사무국장 5년 있으 52

게 내딛고 있었다. ▒


스승을 만나다

스·승·을·만·나·다

나는 노동자란 말이여”

임재복 선생님 (시민주권행동 상임고문)

http://mag-mkyd21.tistory.com/137 올해로 일흔 아홉 연세. 어느덧 팔순을 바라보지만 우렁우렁한 목소리와 기개만큼은 여느 청년 들도 당해내지 못할 듯 싶다. 새해 설 명절 다음 날인 2월 19일 광주 두암동의 선생님 자택에서 새해인사 겸 진행한 인터뷰. “내 이야기나 말해갖고 무신 도움이 될랑가 모르겄네.” 라며 의외로(?) 쑥쓰러워 하시던 임재복 선생님. 정작 인터뷰를 마쳤을 땐 2시간여에 걸쳐 우렁찬 명연설을 듣고 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53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본 기자(이하 본) : 사실 상임고문님이라는 말

러고 청년학생들하고 같이 하면서는 내가 뭘

보다 의장님이라고 부르는 게 더 익숙해요.

앞세우는 것은 없었어. 모든 것은 우리 학생들 하자는데로 (했지). “느그들이 앞장섰는데 느

임재복 선생님(이하 임) : 뭐 의장직을 하도 많

그들 하는데로 따라간다.” 사실 내가 그 후에

이 맡었으니까. 광주전남지역에서 의장이라고

의장이고 고문이고 한 것도 나를 데려다가 즈

생긴 의장은 다 (지냈으니까). 그런데 2000년

그들이 그냥 시켜브렀어요. 나는 내가 느그들

대 이후로는 내가 세대교체론을 많이 이야기

한 대로 따라간다 그렇게 해갖고 상징적인 인

했지. 정의롭고 용기있고 또렷한 의지를 가진

물로 했던 거이지.

우리 청년 동지들이 맨 앞장에 서야 된다. 그

▶2006년 임재복 선생님의 고희연 모습(전남대학교) 54


스승을 만나다

본 : 청년학생들을 많이 아끼셨었잖아요. 9년

시에 우리 증조부님께서 총을 들고 의병에 가

전에 전남대학교에서 선생님 고희연을 했던

담해서 투쟁을 벌리다가 1909년 7월 8일날

때도 생각이 나요.

일본군과의 전투중 전사를 하신 사건이 있었 죠. 그렇게 되니까 가정은 어렵게 되었고 그러

임 : 응 그랬지. 내가 인제 일흔아홉이니까.

다가 8.15 맞게 되았는데 그때 둘째 작은 아 버님께서 빨치산 운동을 하셨어요. 어린 시절

본 : 평생을 운동에 바치시고 오랜 시간 한 길

에 경찰들한테 얼마나 곤욕을 치루고 했던 것

을 걸어오셨는데요.

을 지금도 생각하면 몸서리치죠. 농사를 지어

선생님께서는 운동을 어떻게 시작하시게 되셨

놓으면 전부 압류해다가 창고에 넣어놓고 간

는지 그 계기가 궁금해요.

간히 먹을 놈만 내주고. 경찰들은 수시로 집을 침입해가지고 잠자는 부모님들을 총대로 두

독립의병의 후손 힘겨웠던 유년시절과 독학으로 쌓은 지식

드려 패고. 그 괜찮허게 살던 재산도 미군정 시기에 우

임 : 나는 노동운동부터 시작했죠 처음에.(본

리 아버지 형제간들이 4형제가 몰살이 되았

격적으로 인터뷰가 시작되자 선생님께서는 높

죠. 이런 것을 보면서 자라온 과정에서 사람

임말을 쓰셨다.)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를 해야

이 없고 재산같은 것도 없고 먹고 살기가 아

쓰겄는데. 나는 저 우리나라 땅끝 해남이 고향

주 힘들었죠.

이예요. 그런데 1900년대 초 나라를 뺏기게 되니까 당

그러니 배우지를 못하고 내 학력은 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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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5학년이 전부예요. 이웃집에 있는 서당 한번

10년 가차이 있다 보니까 지금 같으믄 집을

도 못 가보고 검은 양복에다 모자쓰고 학교 다

두 채를 살만한 큰 돈이 생겨서 그 돈 가지고

니는 것을 보면 부럽고. 그러던 차에 56~7

사업을 하다가 2년도 못 되아서 쫄딱 망했죠.

년 연 이태 동안에 모든 한문 같은 것은 아무

그래 살려다 보니까는 사우디 기능공 파견시

튼 어따 갖다 내둬도 뭐 뒤지지 않을만한 그

험에 합격되어가지고 울산조선소에서 대기근

런 실력을 나 혼자 양성했고 영어나 일본어 까

무를 했죠. 거기가 현대건설 소속이었어요. 그

지도 조금씩은 탐독하면서 그래도 어느 정도

때가 1977년이었죠.

앞을 가릴만한 것을 독학으로 익혀냈죠. 농사 짓는 중에도 모든 고등학교 과정이라든지 전

근데 근무를 하다보니까 조선소는 인자 생겼

부 터득해가지고 어느 정도 이 사회에 적응할

고 노동조합도 없고 일주일 야간근무 일주일

수 있을 정도로 좀 학술을 연마했죠. 그러다가

주간근무를 하는데 간부급들은 노동자들을 수

군대를 갖다 온 후 광주교육대학에 취직이 되

도 없이 억압하고 소위 착취를 해요. 그리고

았어요.

파견 기능공을 모집이라 한다 해도 실은 전부 가 돈을 받아먹고 대개가 그때 돈으로 한30만

울산조선소에서 시작한 노동운동 - 현대건설전기본부 작업중단사건 “참말 보다보다 못해가지고 시작을 했 죠”

원을 받고 그렇게 합격을 시키고 그랬단 말이 지요. 그런데 노동자들이 하도 폭행을 당하니 까 포기를 한 사람들도 있었죠. 그걸 참말 보 다보다 못해가지고 아무 조직도 없는 상태에 서 내 혼자 힘으로 ‘현대건설울산조선소작업

거그서 좋은 자리에서 월급도 많이 받고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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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단사건’ 이라고 하는 사건을 일으켰죠.


스승을 만나다

시작이 어찌되었느냐믄 인천에서 온 사람이

방침 시책에도 크게 어긋나는 사건으로서 이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갈란다” 그래요.

런 사람들은 이 사회를 위해서도 각 개인의 정

“왜 그래야” 하니까

당한 권리를 위해서도 반드시 몰아내야 된다

“사우디 가기도 전에 맞아죽게 생겼은께 돌아

는 취지의 문안을 작성을 해가지고 세 사람이

갈란다.” 근데 돌아갈라 생각하니까 본전생각

같이 해서 몰래 받는데까지 서명을 받는 조치

이 나드라여.

를 했던 것이죠. 그런데 서명을 받던 13시간

“얼마주고 들어왔냐” 그러니까

만에 탄로가 나가지고 사실은 머 내가 작업중

“30만원 주고 들어왔다” 그래.

단시킨것처럼 되았으나 내가 이 사건을 일으

“그럼 그 과장들 몰아내면 되제” 이러니까 굉

킬려고 하니 회사가 (먼저) 작업중단을 시켰

장히 야유를 보내면서 비웃드라 이거여.

던 거이죠.

그래 그 사람들이 일언반구도 곧이 듣지 않는 판국에 양면지를 사오라고(했죠). 그래 양면지

그런께 온 건설업계 모두가 전국방방곡곡에

에 이런 잘못된 문제들을 인자 밝힌 거이지요.

현대건설 울산조선소 전기본부에 작업중단사 건이 일어났다 해가지고 온 세상이 다 알게 됐

회사라 하는 것은 첫째로 융화단결이 되야되

던 것이고 그 뒷날 8시에 징계위원회가 열리

는데 우리 회사는 중견간부 몇 사람에 의해서

게 됐던 것이죠.

융화단결이라는 것은 꿈에도 찾아볼 수 가 없 고 자기 부하직원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시 도 때도 없이 착취를 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 은 인권개념으로도 어긋나는 것이고 회사의

징계위원들에게 불호령을 내리다. “우리 동료를 위해서, 우리 회사를 위해 서 이 사회를 위해서 헌 것이다!” 57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징계위가 열렸는데 삼엄하니 기냥 징계위원장

숙소로 돌아왔죠. 그 다음날 그 과장들이 찾아

이다 뭐다 나열되아갖고 있는 큰 사무실인데

오드라 이것이여. 과장들은 그때만 해도 얼마

뚜벅뚜벅 정문에서 다섯발자국 들어가니까는

나 기세가 당당했던지 조선소 저 멀리 있어도

앉으라고 그래. 내가 팔을 내저으면서,

과장들을 알아보게 되아요. 하얀 바가지 모자 에 군인장성처럼 하얀 지팡이를 휘두르고 다

“절대 못 앉는다. 누가 누구를 징계하느냐. 과

녔으니까. 그 사람들이 와서 무릎을 끓고 빌

장들이 비행한 사실을 너희가 아냐 모르냐. 그

었어요. 회사가 보내서 그랬던 거이죠. 그래서

것뿐이 아니라 폭행사건, 금품수수, 근무태만,

그것이 내 노동운동의 시초가 되았지요.

기타 스물아홉건의 확인진술서까지 받아놨다. 나는 절대로 그대로 당하지 않는다. 내가 하 는 행동은 우리 동료를 위해서 헌것이고 우 리 회사를 위해서 헌 것이고 이 사회를 위해

광주 시내버스 하루 18시간 근무. 참혹 했던 현장. “이대로는 안되겠다!” 넉달만에 모든 노동법령을 독파하다.

서 헌것이다. 스물아홉통 고소장은 현대건설 사장, 조선소소장, 중앙정보부, 청와대민정반,

본 : 그 뒤로는 탄압 같은 것은 없었나요?

KBS, MBC, 신문사로 보낼 것이다. 어쩔 것이 냐 이 사람들 처벌 할것이냐 말 것이냐 먼저

임 : 그해 말에 그러니까 77년 11월달에 사우

말해라!”

디 두바이로 파견특명이 되았는데 김재규가 정보부장일 때 나는 (파견이) 안된다는 그런

이렇게 내가 호령을 하니까 내일 아침 8시까

통지가 온 것이죠. 아이들은 인자 어리고 빚

지 시간을 달라 그래서 그렇게 하도록 하고 내

은 많고 도저히 살길이 막막했죠. 광주로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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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을 만나다

아와서 시내버스 회사를 들어갔죠. 근디 거 가 서 보니까 거기는 거기대로 또 엉망이예요. 이 대로는 안된다 해갖고 일하는 도중에 공부를 시작을 했는데 한 4개월을 해가지고 모든 노

탄압에 굴하지 않는 의기 “나는 노동자 란 말이여” - 현 사회에서의 운동이란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남을 위한 운동.

동법령, 시행령, 시행규칙을 외울 정도로 공부 가 되더라고요. 근무상태가 어찌나 열악했던

그러니까 회사에서는 아조 말도 못한 탄압이

지 처음에는 하루에 아마 한 18시간 가차이

들어온 것이죠. 협박으로 밤중 한 2시나 그럴

근무를 했어요. 새벽 4시 출근시간에 밤 12시

때 가족을 몰살시킨다고 회사를 떠나라고(전

퇴근시간인데 이틀을 그렇게 꼬박 근무하고

화가 와요). 어두울때는 담 모퉁이나 들어갈

하루 쉬고 그런 판국에 공부를 했던 것이지요.

때는 멀리 돌아가고. 몸을 아주 달리기 좋게

앉어서 한 것이 아니라 읽었던 것을 (버스)운

최대한 몸을 간단하게. 허리띠도 동여매고. 그

행을 하면서도 생각하고 변소에 가면서도 생

라고 그때 당시에 합기도 1단 되았는데 5단하

각하고. 허니까 그게 공부가 되더라고요. 그러

고 대결을 해서 내가 이기니까 합기도 8단이

고 나서 영업부장, 총무부장, 때에 따라서 사

라고 얘기를 들었는데 몸이 하도 날렵하기 때

장을 만나가지고 이러저러한 문제는 안된다.

문에 “어느 놈도 이 세상에 나를 당할 수 없

근로기준법 5조에는 균등처우라 차별을 금지

다” 이런 신체적인 자신감이 있기도 했었죠.

하라고 되아있는데 왜 이렇게 같은 종업원인 데 차별을 하고 이렇게 하냐. 개선해라. 하다

그리고 또 한달 월급이 18만원인데 트집을 잡

안되믄 내가 재판을 해가지고 개선을 하고 그

아가지고 일을 안 시키기 때문에 10만원도 못

런 노동운동을 했죠.

받아요. 살아갈 수가 없죠. 앞뒤차 배차에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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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사 첩자들을 배치해가지고 일거수 일투족을

구사대를 동원시켜가지고 시도 때도 없이 테

회사에 보고하게 되고 큰 회사기 때문에 회사

러를 한 거이죠. 체중이 90킬로 이상 된 놈들.

앞에 술집이 여러개가 있는데 그 술집에까지

나보다 열댓살 적게 묵은 놈들이 시도때도 없

도 첩자들을 파견시켜서 내가 혹시 지나가다

이 와서 기습을 한 거이죠. 그래도 한방을 맞

뭔 말 한가를 회사에 보고하고. 쉬는 날이면

으믄 내가 일어서서 그 사람들을 하나도 없이

하루도 빼지 않고 회사로 불러들이고. 탄압하

다 때려눕혔죠. 한 때는 하루에 세 번 테러도

느라고. 말하자믄 고문보다 더했죠.

당했어요. 해도 해도 안 되니까 이제는 날마다 차를 바

현 사회에서의 운동이란 자기 자신을 희생하

꾸고 날마다 노선을 바꾸고 하는 고통을 준거

는 남을 위한 운동이고 사회개혁을 위한 것임

요. 나한테만 젤로 똥차 헌차로. 그렇지만 그

을 깨닫게 된 것이죠.

런 억압에 굴복하지 않고 나는 절대로(회사를)

나는 배운 사람도 아니여, 돈 가진 자본가도

안 나간다. 굶어죽어도 여기서 죽는다. 그런

아니여, 그날 막벌어먹고 사는 그야말로 나는

의지로 버텼죠.

노동자란 말이여. 그래 사람으로서 그런 일을 보면서 나보다 더 약한 사람들을 놔둔다는 것

“우리 좀 살려주쇼 조합장 출마하쇼”

은 이것은 의롭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

어용노조와의 싸움

죠. 이 삐뚤어진 사회를 바로잡기 위한 것은 무료봉사라는 대원칙으로 했죠.

그러다보니까 내가 술도 못 먹고 담배도 못 피니 대인관계 사교성이 떨어지는데 그런대

그런데 회사의 압박이 너무 커요. 비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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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나를 진실로 아는 사람들이 나를 믿어줘요.


스승을 만나다

지나가다가 나한테 인사만 해도 가차없이 회

는 내 의지와 선거공약을 공표해야 되는데 그

사에 불려가요. 시내버스 기사들은 시내버스

럴만한 시간이 없었죠. 그래서 안되겠다 생각

를 무료로 타는데 내가 회사 곁에 있었기 때

을 하고는 현 조합장을 왜 몰아내야 하는가 하

문에 어디 시내버스 타고 오다가다가 타게 되

는 제하의 어용행각을 담은 녹음테이프를 한

면은 그 기사가 여지없이 불려가요. 무섭게 했

500개 만들고 뿌렸죠. 그렇게 되니까 “(공안

죠. 이런 판국인데 우리 동료들이 나를 몰래

당국에서) 그 연설문 내용은 도저히 임재복이

만나갖고 인삼주야 더덕주야 불고기 몰래 해

머리로는 죽었다 깨나도 생각을 못하는 것이

놓고 “아이고 우리좀 살려주쇼 조합장 출마하

다. 임재복이 배후에는 분명히 어떤 특정한 인

쇼” 하니까는 나는 우리 동료들 교육을 먼저

물의 사주 받아서 한 거이다” 해가지고 대공

시작했죠. 처음에는 노동조합법, 근로기준법,

과 안기부 할 거 없이 총동원되고 나를 감옥

산업재해보상법, 노사협의회법, 노동쟁의조종

에 집어넣을 궁리를 하고 회사에서는 구속 품

법 뭐 기타 모든 문제에 있어서 한 다섯달 동

신의뢰서까지 올렸으나 뚜렷한 증거가 없으니

안을 교육시켰죠. 그렇게 하고 나서 이제는 조

구속을 못시켰던 것이죠. 이러한 상태에서 선

합장에 출마했죠.

거는 (당선이 되고) 끝났는데 그 뒷일이 조용 할 리가 만무했죠. 선거 막 끝나고 4일만에 나

당시에 회사에 어용노조가 있었어요.

를 강제 해고를 시켰죠.

선거가 돌아왔는데 회사에서는 어용조합을 동 원해서 어용선거관리위원회를 조직을 하고 미 리서 계획된대로 이틀만에 선거를 치러블라 고 하는 그런 계획을 세운 것이죠. 그러면 나

광주시내버스 총동맹파업! 노동자들의 한을 풀다. “당신 남편이야말로 삐뚤어진 사회를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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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로잡고 억울한 노동자들을 구제하기 위 해서 진실로 참다운 일을 했습니다”

그 뒤로 재판이 진행되었는데 회사에서 돈을 준다는 거예요. 그 때 당시 2000만원이믄 집 을 살 수가 있었는데 몇 억이든 준다고 하드

그런데 해고를 당하고 보니까 좀 앞이 캄캄

라고. 왜 그랬냐면 내가 3년동안 조합장을 하

해요. 그 전에 내가 노동자들 구제할 때 광

게 되면 적어도 45억원은 더 나간다 이런 계

주 천주교정의평화구현회를 찾아가서 자문을

산이 나온것이여. 지그들은 나를 4~5억을 줘

받은 바도 있었는데 어쩔 수 없이 염치 불구

도 이익되는 장사가 된 거이죠. 최종적으로 다

하고 광주대교구청 정의평화구현회를 찾아가

섯 번을 만나서 내가 돈은 필요없다 그러고 재

게 되었죠. 그러니까 거기 사회교육부장이 대

판을 했죠.

주교한테 바로 그 자리에서 전화연락을 하니

광주천주교 대교구뿐 아니라 중앙천주교까지

까 나보고 기다리라 그래요. 기다리고 있으니

해가지고 변호사를 무료로 선정해준거예요.

까 큰 노트에다 기록을 해왔는데 대교구청 명

광주에서는 인권위원회 있었던 변호사가 또

으로 특별히 끝까지 도와달라는 특명이 떨어

무료변론을 해주었고. 이후에 이 사람들을 내

졌다고 기록을 보여주더라고. 그 다음날 부인

가 노동자였을 때 있었던 그런 공약을 수행해

까지 오라 그래서 당신 남편이야말로 이 삐뚤

야쓰겄다 하고는 광주시내버스 총동맹파업을

어진 사회를 바로잡고 억울한 노동자들을 구

이끌어서 성공적으로 이끌었어요. 3년동안 월

제하기 위해서 진실로 참다운 일을 했기 때문

급 한푼도 안올려준 것을 완전한 직장으로 만

에 끝까지 도와준다고 염려말라는 그런 말을

들고 한꺼번에 약 20프로를 올려서 우리 노동

하드라고.

자들의 한을 풀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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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을 만나다

“뭔 광주에 이런 놈이 있었어?”

노동문제상담소 말고 노동문제연구원이라고

노동운동에서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으 로

하는 거창한 조직이 있었어요. 전남지역에 있 는 모든 단체들 총괄하는 조직이었죠. 거기에 창립에서 해산때까지 총회장을 맡으고 그러면

본 : 노동운동으로 시작을 하셨는데요. 이후,

서 이 지역에서 운동을 했지요. 그리고 현재는

광주전남지역 여러 단체에서 의장을 맡으셨

시민주권행동 상임고문으로 있고요.

잖아요. 임 : 그래 그렇게 되면서 인자 뭔 광주에 이런

나는 대원칙주의자. “내가 임재복이다 맛 좀 봐라!”

놈이 있었어 하면서 모두 많은 사람들이 다른 눈으로 보면서 민주쟁취광주공동위원회 의장

본 : 어린 시절부터 많은 탄압들을 이겨내오

이 되고 하면서 본격적으로 민주화운동 군사

셨는데요 그렇게 운동을 이어오실 수 있었던

독재타도운동에 가담하면서 6월항쟁에 역할

힘은 무엇이었나요?

을 했고 또 조국통일운동에 함께하게 됐죠. 그 후로 최루탄부상자회회장 국민운동본부산하

임 : 나는 항상 그래요. 누구는 나를 강경파

에 있는 노동문제상담소장. 민주주의민족통일

라 허지만은 나는 대원칙주의라고 규정해요.

전국연합전남지역의장. 또 범민련광주전남지

그 어렵던 시절을 그 의지로 살아왔던 것은 우

역상임의장, 실천연대광주전남지역상임의장,

리 조상의 피를 깨끗하게 이어 받았고 둘째로

평화재향군인회광주전남지역상임의장, 연방

는 그 모진 탄압과 테러 속에서 내를 사수할

제통일추진위원회광주전남상임의장. 기타 또

수 있었던 것은 나를 뒷받침해주는 건강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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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었기 때문에 내가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죠. 그

“너 이놈의 새끼. 누가 시키드냐. 경찰국장이

런께 공안기관에 잡혀가도 공안형사들이 나한

시키드냐 경찰 서장이 시키드냐. 나는 정의양

테는 맥을 못쳐. 일체 묵비권 행사를 한거여.

심세력 국민운동본부 전남지역 의장님이시다. 그런디 일개 형사가 폭행을 휘둘러? 응? 이것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쩌렁쩌렁 울리는 목

은 정당방위여. 맞을 짓거리 한놈은 맞어야되

소리로) “고문 헐라믄 해라. 묵비권 행사는 헌

어야. 긴 세월동안 우리 학생들이나 민주인사

법에 보장된 국민의 권리고 자유다. 죽기를

들한테 얼마나 이런 악행을 저질르냐 내가 임

(각오)한다면 니깟거 무서울 거 뭣있냐. 이왕

재복이다 바로 맛좀 봐라.”

에 징역 왔으니까 나도 내 맘대로 할란다. 몇 달 더 살믄 되제.”

그랬단 말이요. 그런 것들이 나를 오늘 날 있 게 했던 근본이죠. 그란디 너무 내 자랑만 한

이런 식으로 하니 깝깝하제. 반말해? 그럼 나

것 같으네.

도 반말이여. 욕해? 그라믄 나도 욕해. 형사생 활 10년 20년에 그런 일은 처음 당해. 벌떡 일

동지들이 내가 삐뚤어지지 않는 디딤돌

어나. 그러고 탁 와. 그러믄 나도 비틀어 일어 서. 주먹을 탁 받으면서 한 방 처버리면은 무

아무튼 이 세상이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여

방비 상태라 넉다운 되브러. 허리에 딱 손 올

가니까 운동하는 우리 동지들 보면은 짠허기

리고 소리 일부러 빽빽 질르지. 쩌렁쩌렁 하

도 해요. 나는 없이 살았기 때문에 친한 동지

도록.

들을 봐도 뭐 따뜻한 차 한잔 사주지 못하고 애경사가 있어도 뜻은 있으나 표현하지 못해

64


스승을 만나다

요. 그러고 살아왔는데도 이렇게 찾아주고 이

게 하나로 힘을 합쳐서 진실한 거대한 통일운

러면 또 반성이 되고. 지난 1월 1일날 윤기진

동으로 재탄생할 수 있는 길은 없는것인가 하

동지 내외가 나한테 겨울 내의를 한 벌 선물

는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해봐요.

한거여. 값으로 따질수가 없는것이여 그것은. 내가 또 학생동지들로부터 받은 옷 선물이 많

본 : 네. 마지막 질문인데요. 올해가 분단 70

이 있어요. 양털로 짠 것들 몇 개가 있고. 지금

년 광복 70년이 되는 해인데요. 올 한해 후배

도 안 입고 있는 게 있어요. 하도 아까워서. 그

제자들에게 해주고 싶으신 이야기 부탁드릴

동안에 신세진 곳도 많죠. 광주의 몇 개병원은

께요.

우리 가족들한테 병원비를 안 받았어요. 그러 고 어떤 사람들은 우리 아이들 학비를 대주기

임 : 긴 세월동안 살아오면서 집권세력이 그

도 하고. 이런 것들은 정말로 두고두고 마음에

런 북한을 무력으로 치는 전쟁연습이나 하고

남으면서 내가 어떤 일이 있어도 변심하지 않

이런 판국에 분단 70년이 아니라 뭣이라 해

고 삐뚤어지지 않고 그런 길을 가야한다는 디

도 100년이라 해도 이런 상태로 가다가는 요

딤돌이 되는거죠.

원한 것이죠. 변해야죠. 애국이 어디가 있어요 그 사람들한테. 그것이 우리한테도 큰 책임이

그리고 또 우리 학생들 엊그저께 세배해주고

있어요. 비정규직 노동자만 뭉쳐도 세상을 바

만났는데 많은 선물들을 가져왔어요. 그 똑똑

꿔요. 그 가족까지 합치면 천 몇백만이 될텐데

한 놈들이 그 내 앞에서 세배를 할 때 마음속

뭉치질 못하지요. 그래서 그러한 대안들을 찾

으로 눈물이 막 나요. 언제나 진정한 조국통일

어낼 수 있는 그런 대책들이 논의가 되야되고

이 올 것인가 하고. 통일운동하는 세력들이 크

진실로 조국과 민족을 위한 사람들이 하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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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뭉칠 수 있는 그런 대안들. 아무튼 우리가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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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로래도 좋은 길을 모색할 수 있는 길이 열리

임재복 선생님은 1937년 해남에서 태어나셨다.

기를 바랍니다.

현대건설 울산조선소에서 첫 노동운동을 시작하 셨고 이후 광주 시내버스 노동조합을 이끌고 광 주시내버스총동맹파업을 만들어내셨다. 이후, 민 주화와 통일을 위한 운동을 펼쳐오셨고 현재는 시

투사라는 단어가 쉴 새 없이 떠올랐던 2시간 여의 인터뷰. 그 치열했던 투쟁사를 지면에 미쳐 다 옮기지 못할 것 같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실제로 온전히 다 싣지 못했다. ㅜㅜ) 학생들이 찾아와 세배를 해주더란 말을 하며 눈시울을 붉히시던 선생님. 조국통일을 빨리 안겨주지 못해 가슴 아팠다 던 일흔아홉의 투사 임재복 선생님. 의기롭게 걸어오신 선생님의 운동의 길을 후 배 제자들이 더욱 당당하게 이어가야 할 것 같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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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권행동상임고문직을 맡고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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