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인표(唐寅杓) ▲당인표(唐寅杓)6) (운동계열 : 3.1운동)
<독립유공자 공훈록 >제2권 3.1독립운동편(상) 제2편 3.1독립운동 참여자 명단 142쪽과 <독립운동사 자료집> 제5권 325쪽에 당인표에 대한 이름이 기술되어 있 다. 당인표는 김포(金浦)군 월곶면 사람으로 1919년 3월 28일·29일에 걸쳐 김포군 월곶면 군하리(月串面 郡下里) 일대의 독립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그 진행을 주도 하였다. 조강리(祖江里)의 최우석(崔禹錫)이 조남윤(趙南潤), 민창식, 정인교, 윤종근 등 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그들은 3월 28일 당인표(당인춘)의 집에서 만세시위 계획을 논의하고“명 29일 오전 11시에 전 통진 읍내에 집합하여 조선 독립만세를 외치라”는 취지의 유인물 7통을 작성하여 각 면내에 주민들에게 배 포하였다 이날밤 정인교(鄭仁敎)·민창식(閔昌植) 등 수십 명의 동리 사람과 함께 인근의 함반산(含飯山)에 올라가 횃불을 올리며 독립만세를 외쳤다.7) 1977년에 발행한 <김포군지> 75쪽 (가)3.1운동 당시 의사명단에는 당인표가 의거 (義擧), 기력이 장대하여 외경과 수차 대결후 망명하여 행방이 불명하다고 기술 되어 있다.8)
6) 3. 28-29일 월곶면 만세시위 계획에 참여한 것으로 다른 체포된 동료들의 판결문에 기 록되어 있지만 당인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없다. 7)「판결문」경성지방법원, 대정 8년 7월 12일.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제5집 3.1운동재판기록. 326쪽 8) 이 내용은 <김포군지> 각면 편집위원 조사보고서에 의해 기술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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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6. 당인표의 조카 당윤섭씨에 의해 월곶면 보구곶리 산12-2번지 가족납골묘에 당인표 독립운동가의 영혼을 모 시고 있다. 당시 3.1운동이후 만주로 피신후 행방불명 됐다.
그림 27. 당인표 독립운동가의 영혼을 모시고 있는 가족납 골묘에 새겨진 비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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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창식(閔昌植) ▲민창식(閔昌植)9) 1888.12.28-1948.8.15 김포군 월곶면 조강리 158번지 출신 (운동계열 : 3.1운동) 1919년 3월 28일 경기 김포 월곶면(月串面) 조강리(祖江里)·갈산리(葛山里)에 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경 김포군 양촌면(陽村面) 누산리(樓山里)에 사는 박충서(朴忠緖)가 서울에 유학 중 3·1운동에 참여한 후, 고향으로 내려오 면서 추진되었다. 3월 22일10) 양촌 장날에11) 박충서·박승각(朴勝珏)·박승만(朴 勝萬)·안성환(安聖煥)·전태순(全泰順) 등이 주도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으 며, 같은 날12) 월곶면 고양리(高陽里)에서는 성태영(成泰永)·군하리(郡下里)의 백일환(白日煥) 등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렇듯 김포의 각지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양촌 장날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 가했던 조강리 민창식의 주도로 조강리·갈산리의 만세운동은 추진되었다. 그는 최우석(崔禹錫)·정인교(鄭仁敎)·윤종근(尹鍾根)·윤영규(尹寧圭)·박용우(朴容 雨)13) 등과 뜻을 같이 하기로 결의하고, 3월 28일을14) 거사일로 정하여, 동리 주 민들을 규합하는 등 거사준비를 차질 없이 진행시켰다. 거사 당일인 3월 28일 밤, 민창식 등은 주민 수십 명과 함께 동리(洞里)의 함반 산(含飯山)에 올라. 횃불을 올리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는 이 일로 체포되어, 1919년 6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대통령표 창을 추서하였다. 9) 국가보훈처,『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제14권, 1996~2000년도 포상자, 2000, 294~295쪽. 10) 3월 23일을 잘못 기록하고 있다. 11) 양촌 장날이 아니라 오라리장이다. 12) 같은 날이 아니라 3월 22일이다. 13) 박용우(朴容雨)가 아니라 임용우이다. 14) 28일이 아니라 거사일은 29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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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43쪽.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156쪽.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집, 3.1운동재판기록, 325쪽. [참고자료] ·김진수.「김포항일독립운동사」. 2005. P71, 159, 311-316, 471, 509 ·김진수.「김포3.1만세운동사료집」2008 P152-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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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8. 출처 : 국가보훈처 공훈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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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9. 민창식 독립운동가의 제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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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0. 민창식 독립운동가의 묘소는 월곶면 조강리 저 수진 옆 태산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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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홍기(閔弘基)
▲민홍기(閔弘基) (운동계열 : 군자금모집)
1977년 발행된 김포군지 75쪽 (가) 3.1운동 당시 의사 명단에 의하면 민홍기는 월곶면 고양리 사람으로 3.1운동 당시 항일 투쟁하다가 봉화망명(逢禍亡命) 7년, 귀국 후 사망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15)
15) 이 내용은 김포군지편찬위원회. <김포군지>.1977. 각면 편집위원 조사보고서에 의해 기술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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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각(朴勝珏) ▲박승각(朴勝珏)16) 1897.4.12∼1971.2.4 김포군 양촌면 누산리 619번지. (운동계열 : 3.1운동) 1919년 3월 23일 양촌면 오라니장날17)을 이용하여, 박충서(朴忠緖)·박승만(朴勝 萬)·안성환(安聖煥)·전태순(全泰順)·오인환(吳仁煥)·정억만(鄭億萬) 등과 독 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진행을 주도하였다. 그는 3월 19일 안성환의 집에서 서울에서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박 충서와 박승만·전태순을 함께 만나, 장날인 3월 23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 을 전개하기로 계획하고, 태극기·격문·경고문 등을 작성하여, 오인환과 정억만 에게 동리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그는 3월 23일 박충서 등과 함께 오라리장터에 모인 수백 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시장을 행진하는 등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이해 9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 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주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3.1운동(상), 154쪽.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3.1운동 재판기록, 324∼325쪽 [참고자료] ·김진수.「김포항일독립운동사」. 2005. P62, 105, 161, 238-253, 462, 510-512 ·김진수.「김포3.1만세운동사료집」2008 P25-54
16) 국가보훈처,『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 제2권, 1986, 467쪽. 17) 양촌면 오라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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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1. 출처 : 국가보훈처 공훈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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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2. 박승각 독립운동가의 해방이후의 모습
그림 33. 박승각 독립운동가 신상기록카드 얼굴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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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4. 박승각 독립운동가의 묘소는 김포시 양촌면내에 안장되었으나 충남 예산군 신양면 서초정리 101번지로 이장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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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만(朴勝萬) ▲박승만(朴勝萬)18) 1896.7.9∼1951.8.16 김포군 양촌면 누산리 619번지 출신 (운동계열 : 3.1운동) 1919년 3월 23일 양촌면 양촌면 오라니장날을 이용하여, 박충서(朴忠緖)·박승 각(朴勝珏)·안성환(安聖煥)·전태순(全泰順)·오인환(吳仁煥)·정억만(鄭億萬)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진행을 주도하였다. 그는 3월 19일 안성환의 집에서 서울에서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박 충서·박승각·전태순을 만나, 오라니장 3월 23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 개하기로 계획하고, 태극기·격문·경고문 등을 작성하여, 오인환과 정억만에게 동리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그는 3월 23일 박충서 등과 함께 오라리장터에 모인 수백 명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장터를 행진하는 등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 되었다. 이해 6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 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주 ·경성복심법원 판결문(1919.6.26)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3.1운동(상), 154쪽.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3.1운동재판기록, 324∼325쪽. [참고자료] ·김진수.「김포항일독립운동사」. 2005. P62, 105, 161, 238-253, 463, 513 ·김진수.「김포3.1만세운동사료집」2008 P25-54 18) 국가보훈처,『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 제2권, 1986, 467∼4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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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5. 출처 : 국가보훈처 공훈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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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6. 박승만 독립운동가의 학도병시절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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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7. 박승만 독립운동가의 해방이후의 얼굴사진
그림 40. 박승만 독립운동가의 수여받은 유공자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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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8. 박승만 독립운동가의 국가유공자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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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9. 박승만 독립운동가 제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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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1. 박승만 독립운동가의 대통령표창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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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희(朴容羲) ▲박용희(朴容羲)19) 1894.10.20∼1952.9.24 김포군 월곶면 고양리 25번지 출신 (운동계열 : 3.1운동)
월곶면 보통학교 4학년을 수료하고 제일 측량강습소를 나왔다. 1919년 3월 22일 월곶면 군하리 장터에서 백일환, 성태영, 최우석, 조남윤 등과 만세시위를 이끈 사람이다. 만세시위 후 1919년 10월 중국길림성으로 건너가 한민회를 구성하여 1921년까지 활동하였다. 김한식, 김영선 등 한인들과 농장을 경영하여 독립군 자금을 제공하였으나 일제 에 의해 해체 당하였다. 1933년 7월부터 1945년 10월까지 일인살해 사건으로 소만국경으로 도피생활 하던 중 광복을 맞아 월곶면 고양리 고향으로 돌아와 농업에 종사하며 6.25 전까지 민 족청년단에서 활동하였다. 주
독립유공자 공적조사서(유가족) 「독립운동사자료집」(5) 국가보훈처, 326쪽 「독립유공자공훈록」(2) 157쪽 판결문(1919.6.17) 경성지방법원
19) 1919년 3월 22일 월곶면 군하리장터 만세시위를 이끈 사람이다. 그러나 박용희에 대 한 자료가 없다. 다만 1977년 발행한 「김포군지」75쪽에 월곶면 고양리 출신이며 의 거 후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해방 후 귀국하여 사망하였다는 내용만 기록되어 있다. 위 내용은 유가족이 기록한 독립유공자 공적조사서를 바탕으로 재구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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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3. 만세운동을 전개한 후 만주지역(용정)으로 피신해 측량강습소를 열어 활 동했다. 사진왼쪽 첫 번째가 박용희 독립운동가이다.
그림 44. 1950년 10월 부산에서 딸결혼식 이후 찍은 박용희 지사 얼굴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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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2. 박용희 독립운동가의 제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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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5. 박용희 독립운동가 딸 박징원(82세)의 당시 아버지 활동에 대해 기억을 되 살려 기술한 자필기록이다.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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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희 독립운동가 딸 박징원여사 인터뷰 정도 걸으며 독립운동…추서받지 못한 풍운아 특집 ‘김포 3.1운동 90주년’ 박징언(84)여사 증언이야기
그림 47. ‘김포 월곶면 군하리장터 만세운동 주도’ 독립운동가 박용희 열사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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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22일 월곶면 군하리장터 만세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던 박용희 열사는 당시 성태영, 백일환, 이살눔 등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 한 후 만주로 도주해 그곳에서 독립운동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아직까 지 국가유공자로 추서되지 못하고 있어 유일한 혈육인 딸 박징원여사(84) 의 아픔은 크다. 3.1절 90주년을 맞아 추서되지 못한 박용희 열사의 딸 박징원 여사를 만났다.
어머니는 치마를 못 벗고 주무셨어요 “아버지께서는 당시에 초등학교를 나와 그 시절 인텔리셨어요. 활동력이 강해서 키가 작으면서도 날쎄기로 유명하셨습니다. 좋게 말하면 풍운아셨 고 우리는 죽도록 고생했습니다”라며 아버지 박용희 열사를 기억하는 박 징언 여사의 증언은 매우 차분하면서도 쓰라린 고통으로 점철되었던 역사 를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 엄청난 역사의 소용돌이속에서 살아남은 소 중한 유족들의 경험을 쏟아냈다. “저희 어머니는 치마를 못 벗고 주무셨습니다. 차라리 우리 아버지가 잡 히셨으면 고생 좀 하고 끝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만 월곶초 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용정으로 가족이 떠나야 했습니다. 오빠가 살림을 도맡아 했구요. 그 오빠는 30세에 죽었습니다. 경기고를 나와 집안 살림 다 맡아했던 똑똑하던 오빠였어요. 아버지는 집은 전혀 모르고 오빠가 생 활책임을 지고 어머니와 올케는 삵바느질을 했어요. 같이 중국에 있었지 만 아버지는 안쪽에 있었고, 우리는 용정에 살면서 어머니가 3년 동안 치 마도 못 벗고 사시며 고생했던 겁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책임 없는 가장 이셨어요. 고달픈 생각밖에는 안납니다"
이살눔, 성태용, 백일환 등과 만세운동 조직 "용정에서는 다니던 학교의 안용호 선생이라고 수학선생이 아버지와 연결 되어 있더라구요. 총알 터진 것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는데, 당시에는 비 적이 독립군도 되고, 비적도 되고 그랬어요. 같은 독립군끼리 총을 쏴서 중절모에 맞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그 총알을 기념으로 가지고 다니 더라구요. 아버지는 이살눔과 연결해서 만세운동을 시작했는데 주재소에 가서 일본 사람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라 하니 일본 사람인 소장도 부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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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니다. 성태용, 백일환열사는 잡히시고 아버지는 21살이어서 문수산 뒷 산으로 도망가고, 용강리 외가로 피신해 아는 집과 친척집을 찾아다니다 가 만주로 혼자 몸을 피했던 거였습니다"
만주 길림성, 한국인 농장 차려 독립군자금 조성 "아버지가 심부름으로 성태용 열사를 시켰다고 그러고, 성태용 열사는 만 세 당시가 아니라 그 이후에 붙잡힌 겁니다. 아버지는 용정에 가서 박태 원이라는 가명으로 사셨습니다. 아버지는 ‘간도조’라는 토건회사를 차려 한국인들과 운영했는데 일본사람이 시기하여 ‘대림조’가 있어 아버지의 사업을 방해해서 아버지 밑에 몸이 날쌘 사람이 일본 대림조사장을 쏴 죽 이고 러시아 근처로 멀리 도망했답니다. 길림성 송화에서 일하고 하루에 밀림 1백리를 걸어 삼성농장도 경영하고 목재소를 경영하면서 전라도와 서울에서 온 한국사람들을 모아 농장을 하며 어디로 돈을 보내는 곳이 있 었답니다. 독립군자금 말입니다."
박용희 열사, 60세 나이 뇌졸중으로 사망 "우리는 콩 한 쪽도 못 얻어먹고 용정에 있으면 아버지한테서 연락이 왔 습니다. 저는 만주에서 태어났어요. 1926년에 태어났는데 4살 때 월곶에 왔다가 초등학교 4학년 때 가족들 모두가 다시 만주로 간 거예요. 아버지 가 도망가신지 6~7년 뒤에 어머니가 들어가 5~6학년을 마치고 사범학교 까지 마치고 1946~1947년에 아버지와 함께 나오게 되었어요. 아버지는 용정에서 측량강습소도 하셨고 학감이시기도 했고 1947년에 한국에 들어 와서는 측량을 하고 사셨어요. 측량귀신이라고 했고 드디어 쌀을 들여왔 어요" "나는 월곶초등학교 선생을 했고 밭농사도 지었는데 민족청년단인 이범석 장군이 들어와 동네단장을 하시지 말라 해도 했어요. 47~8년에 그일 하 시고 60세에 돌아가셨어요. 평생 고생만 하셨어요. 풍운아셨고 우리는 고 생만 했고요.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돌아가셨는데 저는 아기를 낳은 지 얼 마 안돼서 못갔어요. 난 무남독녀로 대가 끊어지니 7대조 할머니까지 화 장을 했어요” 이렇게 되어 안타깝게도 박용희 열사는 그 마지막 흔적인 무덤조차 없어지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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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때의 기억은 전쟁나기 전에 서울로 갔습니다. 월곶에 와서는 죽는 줄 알았어요. 동네빨갱이들이 많았어요. 집도 빼앗기고 농사지은 것 다 빼앗기고 아버지는 나 있는 곳, 서울로 도망왔구요. 나는 월곶에 사정을 살피러 갔다가 24살 이후인데 잡혀서 반성문 쓰고 스파이를 하라며 빨갱 이들한테 시달렸어요. 아버지는 과격해서 빨갱이들 욕을 하셨더랬어요. 내가 빨갱이들한테 잡힐 때는 우리집을 삥 둘러싸서 주재소에 가서 두들 겨 팼어요. 당시 정치보위부원은 수준이 높았는데 분주소(주재소)는 초등 학교만 나와 형편이 없었어요. 정치부원이 ‘이 간나도 죽여야 한다’며 ‘남 으라’ 했는데 나 한사람을 빼고는 나머지 7명은 고촌에 가서 죽였어요. 당시에 속이 아파서 고생고생 했는데 어머니가 멀찍이 와서 나를 쳐다보 던 생각이 납니다. 국군이 들어오고 명이 길어 지금 83세까지 살았어요. 김포라면 지긋지긋해요. 하도 고생을 해서요”
제일 먼저 유공자 인정받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박용희 선생은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추서 되지 못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아버지는 정도를 걸으셨기 때문에 될 줄 알았습니다. 제가 막내아들을 데리고 부산가서 문서기록보관소에서 다른 사람 판결문을 찾았고, 아버지 는 거기에 얹혀 있더라구요. 백일환 열사의 아들 백제학씨가 부산에 찾아 왔을 때 문서보관소에 있는 아버지의 독립운동기록 2군데를 찾아 베꼈었 어요. 서류가 되면 박 선생이 제일 먼저 될 것이라고 했는데 안 되었어 요”
2009년 03월 01일 <미래신문 유인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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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충서(朴忠緖) ▲박충서(朴忠緖)20) 1898.8.24∼1934.1.24 김포군 양촌면 누산리 619번지 출신 (운동계열 : 3.1운동) 1919년 3월 23일 양촌면 오라니장날을 이용하여, 박승각(朴勝珏)·박승만(朴勝 萬)·안성환(安聖煥)·전태순(全泰順)·오인환(吳仁煥)·정억만(鄭億萬) 등과 독 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진행을 주도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던 학생으로서,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의 독립선언 식에 참여하고 종로·대한문·남대문·각국 영사관 앞을 순회하며 독립만세 시위 를 벌이고 귀향하였다. 3월 19일 안성환의 집에서 박승각·박승만·전태순과 함께 만나, 오라니장날인 3 월 23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태극기·격문·경고문 등 을 작성하여, 오인환과 정억만에게 주어 동리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그는 3월 23 일 오라리장터에 모인 수백 명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장 터를 행진하는 등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이해 9월 4 일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주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3,1운동(상), 154쪽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5권, 3.1운동재판기록, 324∼325쪽. [참고자료] ·김진수.「김포항일독립운동사」. 2005. P62, 105, 161, 238-253, 464, 513, 517-518 ·김진수.「김포3.1만세운동사료집」2008 P25-54
20) 국가보훈처,『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 제2권, 1986, 472∼4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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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8. 출처 : 국가보훈처 공훈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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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9. 박충서 독립운동가 태어난 생가, 양촌면 누산리 619
그림 50. 1919년 3월 23일 양촌면 오라니장터 오후2시 만세시위 를 주도한 박충서 애국지사의 생가앞에 기념사업회에서 기념비 를 세웠으나 집이 제3자에게 매매되어 기념비석을 3.1공원내로 이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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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1. 박충서 독립운동가의 신상기록카드 얼굴사진
그림 52. 양촌면 마산리 38번지에 안장되어 있었으나 김 포신도시 지역으로 포함돼 2008년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 장했다. 비석은 양촌면 3.1공원으로 이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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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환(白日煥) ▲백일환(白日煥)21) 1883.9.6∼1970.6.9 김포군 월곶면 군하리 207번지 출신 (운동계열 : 3.1운동) 1919년 3월 22일 김포군 월곶면 군하리(月串面 郡下里) 장날을 이용하여 박용희 (朴容羲)·이병린(李炳麟)·성태영(成泰永)·이씨(李氏)(이경덕;이살눔) 등과 함 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그 진행을 주도하였다. 그는 3월 22일 군하리 장터에 나아가 성태영과 함께 시장에 모인 군중들에게 독 립만세를 부를테니 향교로 모이라고 연락하였다. 이때 그는 박용희와 이병린의 도움을 받아 이씨가 수수깡을 사용하여 제작한 태극기를 선두에 세우고, 3백여 명의 시위군중을 인솔하여 월곶면 사무소로 행진하였다. 그곳에서 면서기 조원석(趙元錫)을 만나 독립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여 함께 독립만세를 외친 뒤, 성태영이 연단에 올라가 연설을 하려고 할 때, 군하 경찰 주재소에서 일본인 순사 산전중양(山田重洋)이 출동하여 성태영을 끌어내렸 다. 이때 그는 뛰어 나오며 일경의 따귀를 때려 땅에 넘어뜨렸으며, 그의 총을 빼앗 고 모자를 짓밟았다. 그리고 시위군중을 인솔하여 경찰 주재소로 가서 조선인 순 사보 이성창(李聖昌)을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강요하고 폭행하였다. 다 시 면사무소로 가서 면서기 4명에게 태극기를 주어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는 등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이해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 어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주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3.1운동(상), 154∼155쪽.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3.1운동 재판기록, 327∼331쪽.
21) 국가보훈처,『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 제2권, 1986, 4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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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3. 출처 : 국가보훈처 공훈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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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4. 백일환 독립운동가의 신상기록카드 사진
그림 55. 백일환 독립운동가의 해방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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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6. 백일환 독립운동가의 제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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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7. 백일환 독립운동가의 묘소는 월곶면 군하리 한성레 미콘이 위치한 곳에서 강화방향 오른쪽 산에 안장되어 있다.
그림 58. 백일환 독립운동가의 묘소와 비석, 월곶면 군하리 한성레미콘 직후 오른쪽 산등성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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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태영(成泰永) ▲성태영(成泰永)22)
1876.1.24∼1946.1.8 김포군 월곶면 고양리 104번지 출신 (운동계열 : 3.1운동)
1919년 3월 22일 김포군 월곶면 군하리(月串面 郡下里) 장날을 이용하여 박용희 (朴容羲)·이병린(李炳麟)·백일환(白日煥)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그 진행을 주도하였다. 그는 3월 22일 군하리 장터에 나아가 시장에 모인 군중에게 독립만세를 부를 테 니 향교로 모이라고 연락하였다. 이때 그는 박용희와 이병린의 도움을 받아 이씨가 수수깡을 사용하여 제작한 태 극기를 선두에 세우고, 3백여 명의 시위군중을 인솔하여 월곶면 사무소로 행진하 였다. 그곳에서 면서기 조원석(趙元錫)을 만나 독립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여 함께 독립만세를 외친 뒤, 그가 연단에 올라가 연설을 하려고 할 때, 군하 경찰 주재소에서 일본인 순사 산전중양(山田重洋)이 출동하여 그를 끌어내렸다. 이에 백일환이 뛰어 나오며 일경의 따귀를 때려 땅에 넘어뜨리고 총을 빼앗으며 모자 를 짓밟았다. 그는 계속 시위군중을 인솔하여 경찰 주재소로 가서 조선인 순사보 이성창(李聖 昌)을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강요하고, 다시 면사무소로 가서 면서기 4 명에게 태극기를 주어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는 등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체 포되었다. 그리하여 이해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1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 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주 ·판결문(성태영선생 포상신청서 보존) 22) 국가보훈처, 1986,『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 제2권, 4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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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3.1운동(상), 154·155쪽.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3.1운동 재판기록, 327·328·329·330·331쪽. [참고자료] ·김진수.「김포항일독립운동사」. 2005. P67-70, 167, 266-296, 475-477 ·김진수.「김포3.1만세운동사료집」2008. P81-127, 290-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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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0. 2009년 1월 현재는 성태영 독립운동가의 묘소는 대전 국립현충원에 이장 되어 있다. 이장 하기전 월곶면 고양리67-1에 안장되어 있었다.
그림 59. 출처 : 국가보훈처 공훈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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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1. 성태영 독립운동가의 제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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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2. 성태영 독립운동가의 묘소는 월곶면 고양리에 안장되어 있었으나 현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했다.
그림 63. 성태영 독립운동가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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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환(安聖煥) ▲안성환(安聖煥)23) 1888.05.28∼1943.06.06 김포군 양촌면 누산리 633번지 출신 (운동계열 : 3.1운동)
1919년 3월 23일 양촌면 오라니 장날을 이용하여, 박충서(朴忠緖)·박승만(朴勝 萬)·박승각(朴勝珏)·전태순(全泰順)·오인환(吳仁煥)·정억만(鄭億萬) 등과 함 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진행을 주도하였다. 그는 3월 19일 본인의 집에서 서울에서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박충 서와 박승각·전태순을 만나, 오라니장날인 3월 23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고, 태극기·격문·경고문 등을 작성하여, 오인환과 정억만에 게 동리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그는 3월 23일 박충서 등과 함께 오라니 장터에 모인 수백 명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장터를 행진하는 등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 되었다. 이 해 5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선고 받고 공소하여 6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태 90도를 받았다. 주 ·경성복심법원 판결문(1919.5.2)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3.1운동(상), 154쪽.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3.1운동 재판기록, 324∼325쪽. [참고자료] ·김진수.「김포항일독립운동사」. 2005. P62-63, 170, 238-249, ·김진수.「김포3.1만세운동사료집」2008 P25-51,
23) 국가보훈처,『대한민국독립유공자 공훈록』제2권, 1986, 189쪽. 내용 재구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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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4. 출처 : 국가보훈처 공훈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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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5. 독립운동가 안성환의 제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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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인환(吳仁煥) ▲오인환(吳仁煥)24) 1899∼? 김포군 양촌면 누산리 620번지 출신 (운동계열 : 3.1운동) 1919년 3월 23일 양촌면 오라리 장날을 이용하여, 박충서(朴忠緖)·박승각(朴勝 珏)·안성환(安聖煥)·전태순(全泰順)·정억만(鄭億萬)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 을 계획하고 진행을 주도하였다. 그는 3월 19일 안성환의 집에서 서울에서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박 충서와 박승각·전태순을 만나, 오라리 장날인 3월 23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 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고, 태극기·격문·경고문 등을 작성하여, 정억만과 함께 동리에 배포하였다. 그는 3월 23일 박충서 등과 함께 오라리 장터에 모인 수백 명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장터를 행진하는 등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 되었다. 이 해 5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선고 받고 공소하여 6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태 90도를 받았다. 주 ·경성복심법원판결문(1919.5.2, 6.26)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3.1운동(상), 154쪽. ·독립운동사자료집(국보훈처) 5권, 3.1운동 재판기록, 324∼325쪽. [참고자료] ·김진수.「김포항일독립운동사」. 2005. P62-63, 170, 238-249, ·김진수.「김포3.1만세운동사료집」2008. P25-51,
24) 국가보훈처,『대한민국독립유공자 공훈록』제2권, 1986, 199쪽. 내용 재구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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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규(尹寧圭) ▲윤영규(尹寧圭)25) 1882.4.24∼1926.12.17 김포군 월곶면 개곡리 (운동계열 : 3.1운동) 1919년 3월 29일 김포군 월곶면(月串面)에서 인근 마을인 갈산리(葛山里)·조강 리(祖江里) 등의 주민 수백명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여, 군하리(郡 下里)에 있는 공자묘(孔子廟)와 공립보통학교, 면사무소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이 해 5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주 · 판결문(1919.5.9. 경성지방법원)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집, 3.1운동 재판기록, 315·316쪽. [참고자료] ·김진수.「김포항일독립운동사」. 2005. P71-72, 177, 325-344 ·김진수.「김포3.1만세운동사료집」2008. P176-214
25) 국가보훈처,『대한민국독립유공자 공훈록』제10권, 1993, 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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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6. 출처 : 국가보훈처 공훈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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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7. 윤영규 독립운동가 묘소는 월곶면 개곡리 산62번지 내 안장되어 있다.
그림 69. 윤영규 독립운동가 묘소앞에 세운 기념비석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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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8. 윤영규 독립운동가 제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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