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34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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派出所에서 暴行者의 건118) 1933년 7월 6일 <박규환>
그림 346. ▲1
118) 국사편찬위원회, <국내외항일운동문서> 思想에 關한 情報(6), 문서제목 : 派出所에 서 暴行者의 건, 문서번호 : 京東警高秘 제2165호, 발송자 : 京城 東大門警察署長, 발송 일 : 1933년 07월 06일, 수신자 : 京城地方法院 檢事正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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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4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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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城公立農業學校 生徒의 傷害事件에 관한 件 5119) 1936년 6월 1일 <신봉균 강영정>
119) 국사편찬위원회, <국내외항일문서> 문서철명 : 警察情報綴(昭和 11년) 경찰정보철(소화 11 년) 문서제목 : 京城公立農業學校 生徒의 傷害事件에 관한 件 5, 문서번호 : 京東警司 제4999호, 발송자 : 京城 東大門警察署長, 발송일 : 1936년 06월 01일, 수신자 : 京城地方法院 檢事正 등, 수 신일 : 1936년 06월 02일 ▲신봉균은 하성면 양택리, 강영정은 양촌면 양곡리 716번지 출
신이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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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4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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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5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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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5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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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5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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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城公立農業學校 生徒의 傷害事件 및 不穩計劃事 件에 관한 건120) 1936년 06월 05일 <신봉균>
그림 353. ▲1-16
120) 국사편찬위원회, <국내외항일문서> 문서철명 : 警察情報 寫(副本)(昭和 11년), 문서 번호 : 京東警高秘 제2289호의 4, 발송자 : 京城 東大門警察署長, 발송일 : 1936년 06월 05일, 수신자 : 京畿道 警察部長 등, 수신일 : 1936년 06월 / 총17장중 2장만 게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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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5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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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갑의 노림학교 만세운동121) 제5절 강원도지방의 학생독립운동 1. 철원(鐵原) 농업학교, 보통학교 <중략> 2. 원주(原州) 노림학교(魯林學校), 안양의숙(安養義塾) 원주군 부론면 노림리에 노림학교(魯林學校)가 있었다. 3·1운동 당시 이 학교에는 홍남표·어수갑(魚秀甲)·한진충(韓鎭忠) 등의 항일 사상가들이 교 원으로 있었다. 홍남표와 어수갑은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져와서 노림학교 졸업생 40 여명에게 나누어 주었다. 홍·어 양 선생은 선언서를 나누어준 이후 곧 서 울로 올라갔다. 3월 27일에 부론면에 원주 군수 오유영(吳惟泳)이 소위 민심 수습을 위하여 소위 순시를 나왔다. 군수는 면소재지인 흥호리(與湖 里)에서 강연을 했다. 노림학교 졸업생들은 그 즉석에서 항거를 시도 했 으나 면서기 유필준의 제지로 밀려나왔다. 그 때 노림리로 온 노림학교 졸업생은 한범우(韓範愚)·한돈우(韓敦愚)·한태우(韓泰愚)·한민우(韓民愚)·정 현기(鄭鉉基)·김성수(金聖洙)·김일수(金一壽) 등 7명이였다. 이들은 즉석에 서 ‘대한독립만세’의 깃발을 만들어 군수가 돌아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었 다. 당나귀를 탄 군수가 나타나자 노림 학교 졸업생들은 군수를 보고 “철 원 군수도 만세를 불렀으니 원주 군수도 만세를 부르라”고 요구하고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편 뒤 다시 만세를 불렀다. 이 일로 한범우와 정현기가 체포되었다.38) 그리고 건등면(建登面) 반계리(磻溪里)에서도 곽한선(郭漢璇), 마을 구장 이던 이도순(李道淳)·채홍묵(蔡鴻
)이 주동이 되고 홍승복(洪承復)이 선
생으로 있던 안양의숙(安養義塾)의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군중 동원에 관 여하여 4월 8일 1백여명이 모여 구은평(九銀坪)에서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그들은 뒷산에 올라가 다시 만세를 불렀다.39)
121) 국가보훈처 공훈사료관, <독립운동사 제9권 : 학생독립운동사 > [발행자 : 독립유공 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발행일 : 1977/12/26, 편저자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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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타지방의 각 학교 당시 영월 보통학교는 향교에 있었다. 이 학교 2학년 장준영(張俊永)의 집에서 엄정훈(嚴廷勳)을 _______________ 38) 앞의 ≪3·1운동사≫ (상) pp. 582~584. 39) 앞의 ≪3·1운동사≫ (상) p. 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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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갑의 노림학교 만세운동122) 1 노림(魯林)학교의 운동 노림 학교는 실제 노림의숙(魯林義塾)으로서, 부론면 노림리에 있는 노림 국민학교의 전신이다. 노림리는 청주 한씨(韓氏)의 문중마을로 실학파 한 백겸(韓百謙)의 후손이 _______________ 1) 김정명, ≪조선독립운동≫ I, p.378, 457) 참조. 2) 증언자(1970. 12. 3 68) 박희조(朴熙朝 ; 68세), 흥업면 흥업리(당시 보통학교 3학년 생도). 3) ≪조선소요사건상황≫ p.336 참조. - 582 살고 있다. 일제시대 초기에는 부론면 사무소가 여기에 있었으나 3·1운동 당시에는 흥원창(興元倉) 혹은 서울 나들이가 있던 흥호리(興湖里)에 있었 으며 그 후 법천리(法泉里)로 옮겼다. 문막과 흥호리를 동서로 10리 정도에 두고 그 중간에 있는 노림리라는 마을에서 일제 초기에 학교를 세운 것이 노림 의숙이었다. 문막리에 보통 학교가 건립됐는데도 노림의숙을 세운 것은 다른 경우와 같이 물론 일제 교육에 항거한 이유이다. 때문에 여기에서 채용한 교사는 항일사상가였 다. 3·1운동 당시에 홍남표(洪南杓)·어수갑(魚秀甲)·한진충(韓鎭忠)이 교편 을 잡고 있었는데, 홍·어 2교사는 양평과 김포 사람으로 평소에도 사상 교육을 많이 실시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날 때 2선생은 미리 고종 인산 (因山)에 참례한다고 서울에 올라가더니 돌아올 때 독립선언서를 가져 와 서 졸업생 40여 명에게 분배했다. 노림학교는 1915년에 설립한 학교로 그 해 3월 22일 제1회 졸업식을 가 졌고, 이 날 졸업생은 40여 명이었는데 홍 선생과 어 선생을 졸업생에게 122) 국가보훈처 공훈사료관, <독립운동사 제2권 : 삼일운동사(상)> [발행자 : 독립유공자 사업기금운용위원회발행일 : 1971/12/27, 편저자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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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준 뒤에 곧 서울로 올라갔다고 한다.4) 그런데 3월 27일 부론면에 원주 군수 오유영(吳惟泳)이 소위 민심 수습 차 출장을 나왔다. 그리하여 면소재지 홍호리에서 시국강연을 했다. 이것 을 듣던 졸업생 몇 명이 즉석에서 항거하려다가 부론면 면서기 유필준(兪 弼濬)에게 쫓겨났고, 그 길로 노림리에 온 졸업생을 한범우(韓範愚)의 주 동으로 한돈우(韓敦愚), 한태우(韓泰愚), 한민우(韓民愚)·정현기(鄭鉉基)·김 성수(金聖洙)·김일수(金一壽) 등 7명이 모여 ‘대한독립만세’의 깃발을 만들 어 들고 나가 군수가 돌아오는 길목에서 기다렸다. 당나귀를 탄 군수가 의기 높게 돌아올 때 졸업생들은 만세를 부르고 있었는데 군수가 도착하 자 그들은, “철원(鐵原) 군수도 만세를 불렀으니 원주 군수도 만세를 부르라.” 고 요구하였고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놓고 논쟁을 벌이며 또 만세를 불렀 다.5) _______________ 4) 증언자 (1970. 12. 5) 한민우(韓民愚 ; 69세), 노림리에 거주하며 노림의숙의 1회 졸업생이고, 만세운동에 참가한 사람임. 5)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년 4월 24일 함범우의 것(판결문 철, 제6 책 p.236) 참조. - 583 그런 후 얼마 안 되어 문막 헌병파견소 유촌상길(有村常吉) 상등병과 채 진묵(蔡陳
)보조원이 달려와 한 범우는 체포되었고 그 외의 졸업생은 피
신했으나 정현기는 홍호리에 숨어 있었는데, 보조원이 상복(喪服)을 입고 온 것을 모르고 나왔다가 체포되었다. 여기에서 일제 관헌이 우리의 만세 운동자를 체포하기 위하여 얼마나 비상한 방법까지 썼던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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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려수필]123) 1921년-1929년 共産黨(二) 丙寅三月 共産黨(二) 朴憲永·林元根·金丹冶 / 高麗共産靑年會 / 第一次大檢擧 / 第二共産黨 / 一○一人共産團事件 朴憲永居5山, 林元根·金丹冶(本名泰淵), 居花開, 初三人往露都莫斯科受共 産大學, 及歸至上海, 見高麗共黨員呂運亨·李東輝, 又組高麗共産靑年會, 癸 亥春露國第三國際共産黨, 見高共相軋轢命解散, 呂運亨使憲永等歸京城, 組 朝鮮共産靑年會, 憲永等潛入至國境遂被逮, 囚新義州一年, 先是自己未三一 人後, 世界之社會主義, 遂波及極東, 故京城始有各社會團體, 所謂新生活社, 是新思想硏究會, 而後改爲火曜會者也, 土曜會者是無産者同盟也, 日本 東京 又有留學生組北風會, 此以北星·黑濤兩會爲前身者也, 蓋運動其獨立, 宣傳其 主義, 皆一致而黨派各相爭, 不可統一, 至是憲永等至京, 組新興靑年會, 與火 曜會幹部金在鳳·洪增植·曺奉岩·兪鎭熙·朱鍾建·李準泰,
北風會幹部金若水,
宋奉瑀等, 組四團體合同委員會, 以爲欲統一, 適有京城有副業共進會, 乘此 機又欲組朝鮮共黨, 初上海 金立曾以國際共黨,往치타見韓馨權, 詐欺其露金 四十萬元, 由是國際的信望因墜地, 雖不能組朝共然, 朝鮮之有共黨,由此三人 12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료 총서> ⊳기려수필[騎驢隨筆] : 송상도(宋相燾)가 대한제국 말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민족운동 가들의 사적을 수집, 편찬한 책. ⊳구분 : 활자본, ⊳저자 : 송상도(宋相燾), ⊳시대 : 1955년, ⊳본문 : 원래 5권 5책의 정고본(整稿本)과 한 묶음의 기록지로 남아 있던 필 사본으로, 그의 후손들이 보관해오던 것을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활자본으로 간 행하였다. 저자는 괴나리봇짐을 걸머지고, 걸어서 독립투사의 유가족 또는 친지를 일일 이 방문하여 사적을 기록하였다. 거기에 사건 당시의 신문과 그 밖의 자료를 수집하여 편찬하였다. 권두에는 권상익(權相翊)의 서문과 저자의 범례가 있으며, 권말에는 저자 의 발문이 있다. 본문은 1866년 병인양요 당시 강화에서 순절한 이시원(李是遠)의 사적 으로부터 시작하였다. 내용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한말 의병장의 사적과 일제강점 기에 일본의 요인 및 친일파들을 저격했던 안중근 ·강우규 ·이봉창 ·윤봉길 등의 사적 등이 있다. 이 밖에 1926년의 고려혁명당 사건, 6 ·10만세사건, 29년의 광주학생운동 등에 관련된 사적들까지 수록되어 있다. <출처: 두산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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而始, 世之所謂三人黨是也, 乙丑 一九二五年 全國記者大會開京城, 是以各 新聞支局主義者多至京, 憲永因
合同志, 三月 <355>
六日與曺奉岩·金丹冶·金在鳳, 以爲新義州, 連絡海外甚有便, 置國境聯絡部, 使朝鮮報新義州支局長獨孤佺爲連絡,
四月十五日與火曙竝其他幾個團體代
表, 開朝鮮民衆運動者大會, 欲暗結其朝鮮共黨, 又以禁不果, 十七日金在鳳· 金科全·兪鎭熙·金」·金若水·趙東祜·金尙珠·曺奉岩·朱鍾建·宋奉瑀·尹德炳·獨 孤佺·陳秉基·崔元澤·洪德裕·鄭雲海·鄭宇鎭會黃金町 中國人e理店雅敍園, 皆 奮然曰使朝鮮脫日本之羈絆, 又欲實現共産之制, 當秘密結一社, 使趙東祐·曺 奉岩·金」爲銓衡委員,
金在鳳·金科全·兪鎭熙·鄭雲海·朱鍾建·趙東祜·金」爲
中央執行委員, 尹德炳·宋德滿·曺奉岩, 爲檢事委員, 組朝鮮共黨, 翌日金在鳳 等, 開第一回委員會, 設秘書·組織·政治·經濟·人事·調査·宣傳·8農七部, 各擔 其責, 其共黨組織之時, 以爲朴憲永·金丹冶·林元植·洪增植等皆不參, 是日權 五卨·朱世竹 憲永‘人 ·洪增植·曺奉岩·金丹冶·林元根·林亨寬·金尙珠·申哲洙· 張順明·陳秉基·曺利煥·朴吉陽·鄭敬昌·安相勳·金東明, (一名東光)會薰井洞朴 憲永方曰, 欲實施其共黨, 當否認其私有, 欲宣傳其主義, 當敎養其鬪士, 以一 種敎養機關, 組高麗共産靑年會, 使洪增植·朴憲永·曺奉岩·爲銓衡委員, 權五 卨·洪增植·申哲洙·朴憲永·曺奉岩·金」·金丹冶爲中央執行委員,
林亨寬·曺利
煥·金東明爲檢事委員, 使權五卨制定其職制竝會則, 與朝共乃同根而異枝也, 五月十六日金在鳳·金科全等以基本機關別職業身分, 自京城以至國中海外, 設 細胞團九個所, 其中皆置學生·8農·言論機關·思想·女姓·五 <356> 部, 京城以洪德裕·全政琯·閔昌植·全海·吳羲善爲委員, 慶南以金明奎·朴台弘 爲委員, 全南以辛命俊·金基浩·申東浩爲委員, 金明奎·辛命俊等開全慶兩道委 員會, 設敎養·秘書·責任三部, 光州·順天·密陽各置郡細胞, 使崔安燮·金有聲· 曺俊基7屬光州, 鄭晉武·金完根·辛命俊7屬密陽, 李榮珉·李昌淑·朴炳斗7屬 順天, 廉昌烈·朴來源·朴榮珉7屬京城, 細胞又海外有日本·滿洲·上海·沿海州 等四郡, 日本以金正奎爲責任秘書, 滿洲以曺奉岩·宋奉瑀·朴應七爲責任秘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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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海以趙東祜·金丹冶·崔澤爲責任秘書, 沿海以全」爲責任秘書, 制黨則論議 不相合, 竟不果, 使趙東祜送莫斯科, 欲得其國共承認, 東祜至上海不赴, 是時 高靑幹部權五卨又開委員會, 置秘書·組織·調査·敎養·連絡·國際六部, 各掌其 任, 會員以三十歲以下爲定, 使曺奉岩送莫斯科, 與國共連絡, 及奉岩歸, 露國 送資斧一千八百五十元, 請遊學生來入共産大學, 六月將朝高兩共之承認申請, 及 三字欠 等書, 使獨孤佺送上海 呂運亨, 傅致國共, 運亨使金在鳳·獨孤佺· 更與趙東祜連絡, 八月五日馬山共黨來合朝共, 仍爲馬山細胞, 九日權五卨·林 元根·朴憲永選會員安相勳·金命時 女史, 金應基·鄭敬昌·崔春澤·高明子 女史, 曺m岩·朴知成·鄭炳旭·鄭雲·李永祚·金衡寬·張曙山·權五稷·金七星·張道明·姜 翰等十七人, 送莫斯科遊學共大, 又組織其道郡聯盟, 以崔安燮·@相烈·鄭淳 悌爲全南執行委員, 乃所以道幹部也, 光州·光陽·順天, 又各置聯盟, 是乃所以 郡聯盟細胞也, 以崔安燮·金載中·鄭洪模·崔一峯7屬光州細胞, 以鄭淳悌·許永 <357> 壽7屬順天細胞, 以鄭順和屬光陽, 益進展其黨勢, 先是新灣靑年會設新義州, 卽京城火曜系統也, 獨孤佺亦爲委員, 十月二十二日, 獨孤佺與同志諸人, 往 會員某婚宴時, 辯護士朴有楨·巡査.木支義·醫生宋啓夏, 亦來會共飮酒于京 城食堂, 及酒
相有言爭, 因一場擊鬪, 朴有楨遂告訴, 警官捉獨孤佺·林亨寬·
金景瑞·金得麟·趙東根等十數人取調, 有人曰是夜全得麟脫赤色吐手, 奮擊地 曰, 汝等能此可勝乎, 因大言, 警官曰此言甚不尋常, 搜金景瑞家, 得朴憲水之 送上海 呂運亨報告一章及秘密書類, 皆暗號故晝夜硏究, 至數十日而始得解, 乃大驚與鍾路署,
共逮朴憲永·林元根·朴吉陽·曺利煥·洪增植·張順明·申哲洙,
此皆高共也, 金若水 一名科全, 朱鍾建·徐延禧·宋奉瑀·尹德炳·兪鎭熙·陳秉 基·金尙珠皆朝共也, 此乃第一次大檢擧也, 金丹治·曺奉岩·趙東祜皆脫走上海, 金恒俊走至平北, 爲道廳産業課雇員, 暗與金丹冶相連絡, 以道廳爲連絡所, 金在鳳潛避各地, 知終不可免, 丙寅 一九二六年 三月五日, 與晉州新聞支局 長姜達永·李準泰·李鳳洙·洪南杓·金哲洙·更組第二共産黨,
責任秘書姜達永,
內務部李準泰, 組織部金哲洙·全德, 宣傳部李鳳洙·洪南杓·技術部權五卨, 檢 事委員洪眞裕·金石駿·具然欽, 革命後援金哲洙·朴珉榮, 與滿洲·上海·日本·沿 海等部相連絡, 權五卨居安東郡
山面佳日里, 雖與人同一其共黨然, 其實乃
愛國志士也, 是以初見大韓不祀, 與民族主義者共謀獨立, 後知其不能, 使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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鮮依赤化, 欲脫其日本
絆, 與主義者歸新灣靑年會, 命爲赤化, 又與메ㅣ데
ㅣ劃某種運動竟不遂, 組 <358> 高靑以俟其機, 見十五日·熙帝崩, 又有宋學先事, 滿城空氣悽慘, 乃忿奮曰 來因山時, 各社會必不無事, 五卨亦運動作檄文, 題之以大韓獨立萬歲, 其大 意蓋朝鮮人敎育當以朝鮮人本位爲之, 小作e當不納日人地主, 在獄之 (三字 欠) 當釋放也, 五卨與朴來源·閔昌植·李用宰·楊在植, 印刷其大韓獨立萬歲二 萬枚, 朝鮮人本位·竝不納日人地主各六千枚, 大韓獨立運動者團結八千枚, 至 是呂運亨·金丹冶自上海所送檄文四千枚, 又至平北道廳, 金恒俊受之, 復送于 安東縣運送店, 使店員姜延天, 藏貨物車送之京城, 時恒俊以博覽會出張京城, 使同志將檄文送洪一憲, 五卨別名 五卨將前後檄文, 欲使朴來源至大田, 以鐵 路線送三南散布, 使閔昌植至沙里院又元山, 以鐵道便送兩西竝咸北散布, 使 李用宰·楊在植, 因開闢社新女性·新民等雜誌及商店廣告, 以郵便送總督”·裁 判所·道廳又其他各官署,
其餘使學生竝洋襪職工,
因山時散布其m
所過之
路, 藏天道敎本部以待之, 五月第二共黨後繼幹部開委員會, 使姜達永·李準 泰·權五卨·李鳳洙作黨則及豫算案, 五卨·鳳洙考露共黨則竝英國無産者靑年會 則, 作朝鮮共黨之規, 又作三十萬三千八百元豫算案及說明·請求兩種書, 經金 」之手然後, 送國共請資金, 姜達永·李準泰募黨員, 六月四日鍾路署往大阪, 捉中國紙幣僞造犯三人, 授其家宅得檄文一枚, 及取調知檄文來自宣川鑛業者 安基成, 遂捉安取調, 安與權五卨同里人也, 於是知其有密諜, 捉權五卨·朴來 源, 押收其檄文三萬四千枚, 京城驛檄文四千枚, 此金丹冶所送 初五卨以印刷 借款五千元, 將檄文二枚, <359> 與鑛主安基成, 今之事覺, 基成將一枚檄, 及又與紙幣僞造犯者爲導火線也, 由是檢擧之暴風又起, 姜達永, 亦知其不免, 大恐乃變裝以빠나나行商遂潛避, 七月十七日, 達永過明治町因見逮, 第二次共黨又發覺, 是時朝高兩共之所屬 團體略三十, 黨之全體, 有以若露西亞, 國共國中之各大都會, 皆有其黨也, 二 十四日, 鍾路署 大森部長率刑事數隊, 搜北部捉權五卨, 以至全國, 捉黨員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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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餘名, 初新義州署, 捉朴憲永等十數人, 取調半載, 至是押送京城, 與權五卨 等乃合同審理, 皆釋放, 但新灣會及京城主義者百一人付豫審, 此乃朝鮮未曾 有之一大秘密結社也, 丁卯 一九二七年 陽九月十三日, 始開公判, 日本社會 皆聞之曰, 此在朝鮮弱少民族, 實初有之大公判, 農民組合送古屋雄, 自由法 曺團, 送布施辰治, 及中村高一兩人以辨護, 朝鮮8動總同盟之在日本者, 送 鄭南局·李東宰, 新幹會東京支會送姜小泉·權大衡, 大衆新聞社送崔益翰爲傍 聽, 檢事局狹窄, 往三號大法廷以爲公判, 慮其萬一, 裁判廷設木柵, 構內構外 皆嚴重警戒, 郵便局書信往復, 停車場行人升降莫不監視, 在東京 大阪之間者 勿論, 是日, 韓日之人一禁不入京, 全城之各官公署及銀行會社皆有警備, 及 開廷金景瑞·趙東根·金世淵·金瑛禧·白基浩五人皆釋放, 朱鍾建病保釋, 九十五 人但出廷, 各被告見其親戚同志, 坐車皆搖手巾, 競爲目5, 其景色甚悲壯, 中 野檢事續控訴事實曰, 此有治安放害, 禁傍聽不公聞, 辯護士金泰榮曰, 朴憲 永等二十人豫審初, 掛新義州法院而乃移送京城, 以裁判法第八條觀之, 此總 督命新義州法院長至京審理者, 而今京 <360> 判事審理是誰人所命也, 如此不法, 豫審不可成立, 極抗爭, 辯護士諸人亦皆 曰, 丙寅春押朴憲永·林元根, 乘暗夜護送, 此不可以당면護送, 亦非其知者乎, 許憲又曰新義州雖幾許年監禁, 京法院無此權, 憲永等至京乃一年半, 豫審此 非所以甚不法者乎, 金炳魯主張 (?) 요지하야육박하자, 裁判長乃掩置審理, 金泰榮·古屋·李仁·李升雨等復激論, 中野曰總督有以使新義州法院, 已傳達我 監督之命則, 今日論辯不足爲問題, 李仁·金炳魯, 奮起又駁論不已, 檢事遂閉 庭, 棄却公訴, 由是公判遂杳然, 被告九十餘人, 皆有辯護而, 白光欽獨謝絶, 辯講士李昌輝曰法廷法壇, 是何等森嚴, 而判事背後, 有所謂特別傍聽, 雜坐 無忌, 是何格5, 此亦爲之禁傍聽乎, 金炳魯·古屋·李升雨·金泰榮·武智弘方等, 提出其四條願書, 一曰警戒緩和, 一曰病者保釋, 一曰公判公開, 一曰特別傍 聽禁止, 時楊在植·申哲洙·金東“·白光欽·林亨寬·曺利煥, 皆病不出廷, 乃分 離審理, 李昌輝曰白光欽審理調書無適用之法, 以緊急提議, 當書其適用法, 而今不書此, 不可審理, 而今與他被告, 欲分離審理, 何不法之至此也, 十五日 二回公判, 朴憲永曰今我被告諸人, 皆無産階級之前衛分子, 今此裁判, 多數 警官, 警戒甚酷, 此不
其壓迫我諸人, 便是壓迫我無産大衆全體, 且傍聽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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爲公開, 但許其特別, 今日吾絶不開口, 裁判長曰今日公判, 多有公安妨害, 傍 聽不得不禁, 辯護士皆曰如此公判, 可謂威壓的, 不可辨護總退庭, 又提出其 四條願, 一曰今日法庭, 看守限十五, 警官一禁, 一曰鐵網撤廢, 一曰傍聽但以 限判檢事兩人, 一曰許新聞 <361> 記者竝家族入庭, 金泰榮曰頃者請公訴棄却, 法之當然, 而朴憲永等不欲復往 新義州故, 乃分離審理, 遂續行公判, 時洪原之各社會, 送激勵文曰今日公判, 持國際的意義, 可謂朝鮮初有之歷史的大公判, 願積極辯護, 吾人多謝, 雖無 內外, 而於古屋·古村·布施三日人益多, 十七日參回公判, 警戒雖解禁, 法庭構 內, 尙依然嚴重, 金炳魯·金泰榮·姜世馨苦請公開, 而矢本不聽, 律士皆退庭不 入, 由是裁判長及辯護之間, 軋轢益甚, 時被告皆着韓衣, 而獨十餘人尙靑服, 女史鄭鍾鳴, 裁韓衣各一襲差入, 初朱鍾健病保釋, 往平壤及釋王寺爲治療, 十二日夜乃至京逸走, 日本關西之朝鮮8動總同盟聯合會, 大阪之朝鮮8動組 合幹部辛載鎔·鄭東波·鄭東鳴等爲此公判, 欲起其一大示威, 因事覺東鳴等九 十五人皆被逮, 二十日四回公判, 屬秘密雖不能知之, 然公判不過五分, 突然 法廷, 墨版 是日警官之活動益甚, 法院內外, 警網益嚴焉, 初朴憲永·常着强度 眼鏡暫不去眼, 及退庭憲永爲看守巡査包圍而出, 眼不着鏡, 面甚虛白, 廉昌 烈負人而出, 便若死人, 問官及律士, 一齊退庭, 皆面有悽愴, 未知今日法庭, 有何事變, 憲永·昌烈及出, 皆入看守室, 急監醫診療, 於是昌烈乃蘇, 憲永亦 鎭定, 有頃矢本復召兩人公判, 律士又退庭,法庭因動撓, ‘人朱世竹欲面會, 矢本不聽, 十九日有一女史裁衣二襲, 沒名差入, 各團體之在日本者, 又送文 激勵其辯護諸人, 二十二日五回公判, 大原刑務所長, 召律士金讚永曰, 去曉 朴憲永突然有異狀,
請今日使諸被告無以此起鬧,
許憲·金炳魯·古屋·朱世竹,
請面會憲永, 當局皆許可, 而朱 <362> 獨不許, 許憲自監而來曰, 其內容吾不可言之, 而憲永之今不出廷, 非精神異 狀又非外傷, 而如何間 五字削 朱世竹求一鏡差入, 而當局又不納, 由是波瀾 重疊, 其勢益凜然, 裁判長不得已朴憲永獨分離審理, 是日問官不公判, 與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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士但出入頻繁, 私服警官各帶殺氣, 警戒益嚴, 物情因
然, 時我人之京都新
支, 及8動總同盟, 擧秘密裁判遂抗議于總督”, 又朝鮮之各社會及律士與被 告, 皆抗議曰今日公判, 有國際的意義請公開, 問官又不聽, 傍聽自初乃嚴禁, 而警部補金冕圭入庭記審理, 律士見之, 遂起問題, 中野召金冕圭取調, 冕圭 曰受三輸指揮, 又召三輸取調, 而冕圭又依然入庭, 金炳魯·許憲·李仁·李承雨· 古屋·權承烈曰, 此侵害法權, 皆退庭, 公判遂閉, 日本之朝鮮8動總同盟代表 鄭南局, 東京新支代表姜小泉, 京都新支郭鍾烈, 擧公開禁止, 乃抗議于警務 當局, 湖西記者團, 芙江8動同盟, 燕岐靑年會, 送孟義燮見古屋等, 以致其 謝, 翌日六回, 律士又復總退, 是日朱世竹欲私食差入, 所主人曰今朝往刑務 所, 當局曰朴憲永自前日突爾斷食, 點心不必持來, 世竹憂之, 許可請面會, 當 局亦不聽, 二十七日七回, 律士開秘密會議, 使金炳魯·古屋質問其金冕奎傍聽, 矢本曰此不可倉卒言之, 遂不言, 由是律士二十八人皆辭任, 請東京之自由法 曹團, 使質問其總督, 法團以布施辰治以質問, 因喚起其日本全國之輿論, 二 十九日矢本中止其八回公判, 往豫審庭密室, 呼個人審理, 律師曰此個人審理, 必欲威脅爲之, 又
起, 使古屋·李承雨見長尾檢事正, 長尾曰金警部置之, 以
他警爲傍聽如何, 古屋不 <363> 聽, 於是長尾禁警官, 使被告皆自由陳述, 於是諸律士復出庭辯護, 是時金天 海·李靑m·朱洛天等六百餘人會橫濱, 電報京城法院, 以抗議作決議文, 送總 督及法院, 又作激勵文, 送諸律士法曹團, 以松谷與二爲特派辯護, 十月初四 日九回, 新泰仁靑年會, 東京8動農民黨, 皆送文激勵其諸律士, 湖西記者團 送特派員, 慰律士諸人, 高0新支又送激勵文, 十日十一回, 布施提出五個條, 一曰朴憲永心神喪失以至廢人, 當不日保釋, 一曰病中被告亦皆保釋, 一曰記 者入庭, 一曰每日開庭, 一曰使重要被告各筆記爲供, 十二日十二回, 憲永又 不釋, 是日光州靑盟·金堤8組·迎日·宜寧兩新支, 皆送文激勵, 此下一幅墨版 翌日白光欽保釋病欲入院, 突然發狂, 擧劍刺人曰, 汝們皆以警漢走狗, 害我 同志, 或高聲※朝鮮獨立及無産者萬歲, 甕津·宣川兩靑會, 激勵文又至, 初鍾 路署高等係主任三輪和三·吉野藤藏·大森秀雄·金冕圭等, 拷問甚慘酷, 權五卨· 姜達永·全政琯·洪德裕·李準泰不勝其憤, 使布施·古屋·金炳魯·李仁等擧不法拷 問遂告訴, 某法官曰, 警官知法似無是然, 若有之, 此法律及人道上, 皆一大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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惡, 不可無罰, 長尾又曰吾敎勿用淫刑, 而今用之, 因證據爲左右, 新義州新灣 靑會, 任實新支送激勵文, 十八日十五回, 乃審理其權五卨六十萬歲, 金泰榮 見裁判長請公開, 矢本不聽, 古屋曰四警官其取調, 當如共黨, 其裏面皆發露, 日本8動黨, 欲調査其司法權侵害, 不法拷問, 及法官之如使處理三個條, 送 法學士加藤寬一, 加藤至京曰, 吾之此來, 不但調査其警官橫暴, 全以總督政 治之强壓政策을摘發씨키는 <364> 것으로, 帶使命而來, 二十日十六回公判, 又秘密是時加藤乃入庭, 而三輪·吉 野·大森等又警戒如前,
宣川天道敎靑年部·全州8聯·裏里靑年會·木浦新支·大
阪之朝鮮8組西成支部·全臺灣打倒帝國主義同盟等各團體, 皆送激勵文, 三輪 等四警官告訴已四五日, 而檢事元橋但取調權五卨, 不取調四警官, 律士又欲 告訴, 法曹團又蹶起曰, 四警不但無視其辯護, 乃蹂 權, 又蹂
其人權, 不但蹂
其人
其憲法, 其罪不可容貸, 豫審判事五井, 加拷問諸被告, 皆如出一
口, 諸律士曰雖檢事庭, 不可用如此不法, 而且在豫審, 五井乃敢行, 若五井豫 審, 其間島共黨, 更加何等不法也, 李仁·許憲·古屋, 見高·覆·法三院長乃抗議, 二十一日馬山新支·8聯, 及靑會送激勵文, 十七回公判亦秘密, 再翌四日, 元 橋始取調四警, 李東宰·姜小泉·郭鍾烈等, 訪總督及總督”法務局長松寺·警務 局長利見·檢事正長尾, 提出其抗議文, 是日大邱靑盟·晉州靑會, 皆送文激勵, 加藤·古屋·金炳魯·金泰榮, 見四警告訴因無聞, 往西監, 見權五卨·姜達永·洪 德裕·全政琯, 採
問之實及證人, 方準備其第二告訴, 蓋此警官告訴, 其注目
不但朝鮮, 其餘波又及日本, 辯護士協會, 遂奮起, 電報京城某辯護士曰, 今我 協會網羅其全國律士三千餘人,
將欲細査其事實,
二十二日東京之我人靑盟,
送抗議文于總督”警務局, 求共黨之無罪判決, 日本8農·8動兩黨, 擧拷問抗 議于田中 首相·朝鮮 總督, 又使各支部喚起其日本全國輿論, 七日日本之朝鮮 8總· 大阪之朝鮮8組, 向田中·齋藤及京城法院, 請共黨無罪, 又請裁判公開, 翌日總督” 政務總監 <365> 湯淺倉乎, 方在東京, 朝鮮8總代表金漢卿, 東京新支代表趙憲泳, 大衆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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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朴洛鍾, 與布施見湯淺乃嚴重質問, 三十日大阪 朝鮮8組河泉支部開委員 會, 向首相·總督及法院又抗議, 初四警告訴已半月, 而尙寂然, 諸律士乃正式 申請曰, 拷問時證據, 有鍾路署取調室·宿直室·留置場·凡椅子·水道端·署內竹 刀·腰掛·角棒·빠게쓰·藥罐·捕繩, 又京畿道警察部宿直室·留置場·凡椅子, 當取 次檢證, 且取調時, 證人·告訴人·警官·律士·檢事, 當五角相對, 以爲審理, 更 請總督”及世“院醫師, 當診察其被告則可以知之, 因請保釋, 矢本不聽, 於 是保釋問題遂再燃, 十一月一日, 東京新支, 我人8總, 遊學生學友會, 科學硏 究會, 女子靑會, 女子興學會, 大衆新聞社等九個團體, 相聯合向總督及政務 總監·田中內閣·矢本·長尾·元橋乃抗議曰, 拷問警官, 當嚴重處罰, 當局之處理, 又不可不監視, 於是元
, 召證人姜亨順, 金英禧兩女史, 姜李準泰之‘人, 全
女姓同友會員, 十一日元橋以證人審理往西監而歸, 召吉野·冕圭·三輪·大森取 調, 朴憲永·李在益·申哲洙·曺利煥·白光欽·皆病不審理, 時憲永失眞, 常欲自 殺, 又請保釋, 安邊靑會, 送激勵文于古屋, 初四警告訴, 其注目不但其朝鮮已 也, 以至日本·臺灣·及海外, 亦皆注目, 其爲事之重大, 果何如, 而元橋以證據 不充分不起訴, 律士又以證人, 擧豫審判事, 五井書記, 佐佐木博士, 河上肇, 學務局長李軫鎬, 妓生崔錦蘭·朴玉花等四十九人, 卽抗告覆審, 十七日, 二十 八回, 矢本曰證人若確實不必審理, 遂却下, 諸律士又更申請, 又却下, 於是律 士遂申請其裁判長忌 <366> 避, 總退庭, 矢本不得已乃提出其忌避書于民事部根本道成判事審理, 自丁卯 陰十月二十九日至十二月十日不得見新聞云 十二月二十一日, 李在益病, 欲 請保釋, 朴吉陽, 亦病, 分離前後公判, 自開庭以來, 多至四十八回, 其間有司 法權侵害, 拷問警官告訴, 裁判長忌避, 三個問題因大起波瀾, 自丙寅被逮至 丁卯陽九月十三日, 滿三年, 公判始自一回, 以至結審, 其月數乃五個朔, 百一 人之中, 五人病分離, 九十六人, 其審理乃二十八回, 求刑論告二日, 律士辨論 十八日, 有法庭以來, 乃未有之一大公判也, 律士金炳魯·金泰榮·許憲·布施·古 屋·加藤·李仁·韓國鍾·李承雨·鄭求瑛·金用茂·李昌輝·姜世馨·韓相億等二十人, 皆無e辨護, 至忘寢食, 被告犯罪, 無時日無場所者太半, 是以事實多矛盾, 審 理多障
, 朴吉陽卒于獄, 朝鮮靑盟與三十餘團體, 欲社會葬禁不果, 初趙東
祜見金在鳳·金若水等皆被逮, 遂逸居上海, 與金丹冶爲臨時上海部執行委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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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卯陰十二月晦日, 爲日1警所逮, 戊辰正月八日, 護送朝鮮, 及判決脇·中島 兩陪席判事論告曰, 金在鳳·姜達永六年, 權五卨五年, 李準泰·金若水·洪
植·
兪鎭熙·金尙珠·陳秉基·鄭雲海·趙東祜四年, 全政琯·林元根三年六個月, 獨孤· 林亨寬·申哲洙·洪德裕·朴來源·閔昌植·李鳳洙·柳淵和三年, 珉榮·李智鐸·金璟載·宋琫禹·@相烈·張順明二年六個月,
尹德炳·廉昌烈·朴 李炳立·金明奎·魚秀
甲·金正奎·都容浩·辛命俟·崔安燮二年, 鄭淳涕·李榮珉·朴台弘·蔡奎恒·朴一秉· 金恒俊·具昌會·金有聲·裵致文·黃守m·金直成·鄭晉武一年六個月,
李昌洙·朴
炳斗·金淇鎬·李相薰·高允相·李 <367> 忠模·姜均煥·金寅義·裵成m·李承燁·南海m·愼杓晟·趙東爀·曺俊基· 金完根·趙 鏞周·權五尙·李敏行·金東“·吳琪燮·姜宗錄·尹允三·金容」·李鳳壽·崔一峯·鄭 順和·許永壽·鄭泰重·金載中·鄭洪模·李延壽一年, 白明天十個月, 李用宰·楊在 植八個月猶豫二年, 各隨多少, 皆通算其未決日數, 共黨付公判以後, 其事實 記錄八千九百十二頁, 公判調書四千八百七十四頁, 爲傍聽來者, 不特其親戚 已也, 有同志自海外不遠其水陸萬里, 來集京城者便作人海, 西大門及鍾路署 巡査及騎馬隊數十, 自法庭內外以至鍾路, 皆密密圍之, 監視其行人往來, 市 內各署總出動, 自鍾路至西大門刑務所略數十里之間, 又連亘監視, 亦近來未 有之一大警戒也。 新聞新觀曰今日是共産黨公判耶, 警察官大演習耶, 騎馬巡査·佩劍巡査·變裝 巡査, 與裁判所·刑務所·司!長官, 及鍾路署 長森, 街頭에서, 相버틔는光景 은可謂巡査吾世上, 又曰今日裁判所, 可謂築刑事墻宿舍城, 初而築鐵網, 次 而築守衛, 次而築巡査, 次而築看守, 是以警戒城壁疊疊不已, 使人空然生劫, 又曰透得a幾重關然後, 乃入法庭則, 又有庭丁·巡査·看守相警戒, 此可謂庭 丁似警戒其巡査, 巡査似警戒其看守, 看守似警戒其被告格, 又有一可笑者, 傍聽客一動身, 巡査乃目動, 傍聽客一回頭, 巡査乃
肩, 若無罪寧有是耶, 以
此觀之, 天下其多罪者, 巡査第一, 或曰, 子之所編忠烈錄, 而此共黨何以書之 也, 曰彼主義者雖是共黨, 其實皆排日, 而謀獨立者故, 吾書之, 諒之否耶。 <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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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02-18 <동아일보>124)
그림 355 ▲1
12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 신문자료 >, 신문명 : 동아일보, 기사제목 : 一夫一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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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02-25 동아일보125)
그림 356 ▲1 制의 歷史(月曜欄), 발행년월일 : 1924-02-18, 면수 : 04, 단수 : 01 표제어 : 어수갑(魚 秀甲) ‣편집지면 제한으로 실제내용 중 일부만 게재함. 125)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 신문자료>, 신문명 : 동아일보, 기사제목 : 一夫一婦制 의 歷史(續)魚秀甲, 발행년월일 : 1924-02-25, 발행구분 : 무, 면수 : 04, 단수 : 01, 표 제어 : 결혼(結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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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126) 제66호127) 一. 緖頭 朝鮮에 잇서 社會運動의 歷史는 아즉 日淺나다 할지나 그 짜른 歷史에 比 3하야 오날의 發展된 그 量과 質에 至하야는 可히써 吃驚할 바이 잇다. 日韓倂合 以後에 넘우도 朝鮮人의 存在를 XXXXXXX 實施한 結果는 XX 運動을 이르키엿고 急轉直下的으로 破滅에 傾하고잇는 朝鮮人의 生活上 變態는 必然的으로 社會運動을 이르키엿다. 己未運動은 民族을 範圍로하 고 自民族의 衰頹된 勢力을 復舊식키고 그의 繁昌을 圖하며 아울너 發展 을 計한 것이 엿으나 最近 3, 4年來로 非常한 勢力을 가지고 各地에 雨後 竹筍가티 蜂起하고 잇는 無産階級의 運動은 그와는 思想을 달니하야 사람 에게는 資本階級과 無産階級의 兩大階級이 잇고 그 階級間에는 利害가 相 容되지 못함으로 一方은 XX하는 處地에 잇고 다른 一方은 XX를 當하고 잇게 되엿으니 決코 그 사히에 圓滿이 有할 理는 萬無한 것이다. 그럼으 로 社會運動이한 國境과 民族을 超越하야 階級的으로의 生産力 及 生産機 關를 左右하자는 그것이다. 同一한 場所에 同一한 時間에 두 가지의 物 가 相容되지 못함은 科學이 그를 證明하고 잇는 것이니 人間의 生活에도 두 가지의 크게 相衝되는 形式 下에서 安定이 업고 和樂이 업슬 것은 그 가 맛당하다 할 것이다. 이제 朝鮮의 社會運動이 언제 始作되야 엇더한 經路를 가지고 오날의 進 展을 보게 되엿는가는 여기에서 말하지 안으련다. 그는 달니 具 的의 紹
126) 천도교에서 펴낸 월간잡지. 1920년 6월 25일 창간되어 1926년 8월 1일 통권 72호를 끝으로 강제 폐간되었다. 사장 최종정, 발행인 이두성, 편집인은 이돈화였다. '개벽'이란 명칭은 천도교의 '후천개벽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판 160쪽 안팎의 국한문혼용체로 씌어졌으며, 집필자로는 주로 당시 계급주의 경향문학을 내세운 신경향파 작가들이 참여했다. 창간사에서 "인민의 소리 는 이 개벽에 말미암아 더욱 커지고 넓어지고, 철저하야지리라"고 하고, 정신의 개벽과 사회의 개조를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창간호가 발행되자마자 압수당한 것을 시작으로, 1926년 일제에 의 해 폐간될 때까지 발매금지 34회, 정간 1회, 벌금 1회의 탄압을 받았다. 폐간 8년 후인 1934년 11월 차상찬이 속간하여 제4호까지 펴냈으나, 1935년 3월 1일 폐간되었다. 그뒤 1946년 1월 김기 전이 속간하여 통권 73호부터 1949년 3월 25일 통권 81호까지 모두 제9호를 펴냈다. 따라서 차 상찬이 펴낸 제4호를 더하면 통권 85호인 셈이다. 실렸던 주요작품으로는 시에 황석우의〈발 상 한 순례의 소녀〉(4호), 김형원의〈무산자의 절규〉(13호), 이기영의〈가난한 사람들〉(49호), 조 명희의〈봄 잔디 위에서〉(46호), 이상화의〈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70호) 등과 소설에 현 진건의〈빈처〉(7호)·〈운수 좋은 날〉(48호), 염상섭의〈표본실의 청개구리〉(14~16호), 김기진의 〈붉은 쥐〉(53호) 등이 있다.
12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잡지자료>, 잡지명 : 개벽 제66호, 발행년월일 : 1926년 03월 01일, 기사제목 : 社會運動團 의 現況, -團 ·綱領·事業·人物- 필자 : TY生, 기 사형태 :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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介가 잇다고 信함으로 굿태나 再述할 必要가 업다하며 이제 와서는<44> 朝鮮의 社會運動 그를 思想運動 8農運動 靑年運動 衡平運動 女性運動 學 生運動 等으로 區分할 수 잇으나 運動이 起하든 初期에는 그 間에 界線이 明確히 立치 못하야 思想運動이 靑年運動도 되고 또는 8農運動도 되엿든 것이다. 그는 朝鮮의 社會運動만이 특별히 그러한 것은 아니고 어늬 나라 이나 어늬 時代임을 勿論하고 運動의 初期에는 第一線에 立한 그네들의 思想的 立脚地가 薄弱하고 사람의 數가 極히 少數에 不過함으로 運動의 部門이 整理되지 못할 것은 當然한 일이다. 그럼으로 朝鮮에 잇서서도 最 近에 至하야는 運動이 漸次로 成熟됨을 따라 運動의 部門도 整理되는 中 에 잇다. 더욱이 勢農運動을 다시 區分하야 8 運動과 農民運動에로 分野케 된 것 은 朝鮮의 運動이 組織的으로 進化되고 잇음을 證明하는 것이며 그럿케 運動이 成熟되고 잇다함은 第一期에서 第二期에로 推移됨을 가라침이며 第一期에서 第二期에로 推移되고 잇다함은 成熟이 絶頂에 近하여 감을 意 味한 것이 된다. 그가 가장 現著하게 된 것은 昨年에 開催하려다가 當局 의 禁止로 實現을 보지 못한 全朝鮮民衆運動者大會 그것을 分水嶺으로하 고 그 左便과 右便과의 間隔은 實로 天壤의 差가 잇다고 할 것이다. 말하 면 그 前은 朝鮮의 社會運動이 氣分的에 流하야 一定한 計劃과 打算은 업 시 그저 社會運動이 아니면 우리에게는 달니 사라나갈 道理가 업다는 漠 然한 意味에서 動한 것이엿으나 그 以後부터는 우리가 到達할 地點도 選 定하게 되엿슬 뿐 아니라 거긔에 到達하기까지에는 야와 갓튼 途程을 踏 하지 안을 수 업다하야 그 過程의 經路를 차자 進行하고 잇다. 우리는 조선의 社會運動團 中에 그 重要한 것을 至極히 簡單이나마 그 大槪를 紹介하려함에 當하야 爲先 朝鮮의 社會運動의 그 現況을 察知할 必要가 잇음으로 槪括的이나마 그 大 을 緖述하엿으며 이제는 順序를 따 라 思想運動團 의 그 重要한 것과 靑年이건 8農이건 그 聯合團 를 紹 介하고 다시 그 個 團 中에는 어늬 便으로 보든지 가장 重要하다고 世 上이 認定하며 또한 事實에 잇서 活動하는 範圍라 던지 色彩가 鮮明한 點 으로보아 可히써 빼이지 못할 團 를 紹介하기로 한다. 二. 思想運動團 1. 無産者同盟<45> 朝鮮 最初의 社會主義團 로써 그 活動과 功8도 不少하다고 본다. 아즉 도 一般에게 階級意識이 甚히 薄弱함은 勿論이고 民族主義的思想이 濃厚 하야 全鮮의 靑年男女가 一齊히 民族主義를 高嘲하고 잇는 때에 金翰, 元 友觀, 陳秉基, 申伯雨, 尹德炳, 李準泰, 李英, 白光欽, 朴一秉等의 發起로 1922년 1月에 色彩를 鮮明히 하고 無産者同盟이 創立되엿다. 그 綱1은 當局의 禁止로 世間에 發表되지는 못하엿으나 그 大意는 一. 無産階級의 生存權基礎確立 二. ’人解放運動을 積極的으로 應援하고 따라서 階級的 乃至 經濟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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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完全한 解放을 期케할 일 三. 無産者의 교양에 充實히 努力하야 階級意識을 作成케 할 일. 無産者同盟이 世上에 나온 後 그가 하여 노은 것은 무엇이며 얼마나한 活 躍이 有하엿든가. 無産者同盟이 世上에 나오자 그의 첫 일로는 金允植氏 社會葬反對이니 當時 東亞日報의 幹部들이 그 主腦가 되여가지고 金允植 씨의 社會葬을 發起하야 世에 宣하엿든바 金允植이가 무삼 社會的의 功8 者이기에 社會葬을 할 것이냐 하야 反對演說會를 開催하며 猛烈히 鬪爭한 結果는 金允植의 社會葬은 中止되는 수 밧게 업섯으며 그 밧게 東亞日報 의 非賣同盟을 全鮮的으로 惹起케 하고자 또는 機關紙 等의 計劃이 有하 엿으나 크다란 것은 보지 못하엿다. 그리다가 金相玉事件이 突然히 發生 된 後에는 그의 主要幹部들이 鐵窓生活을 하계되니 自然히 그 活動의 範 圍도 縮少되지 안을 수 업고 當局으로부터 無産者同盟에 限하야는 그 如 何한 性質의 會合이건 絶對로 不許할 뿐 아니라 執行委員의 會合까지 禁 止하고 보니 結局은 無産者同盟이란 看板만은 支持해 가나 社會的으로는 아모 힘업는 것이 되고 마럿다. 이제에 이르기까지 그 看板만은 붓잡아 오고 形態만은 維持해오나 同會의 幹部들도 甚히 悶忙한 中에 잇다하며 그 過去야말로 朝鮮에 잇서서는 크게 자랑거리가 업지 안은 中 特히 그가 中*가 되여 一方은 靑年運動을 이르키며 다른 一方으로는 8 團 를 이 르키고 또는 操縱키 爲하야 靑年의 責任者는 李英君이 되고 8 의 責任 者는 尹德炳군이 當하야 實로 그 秩序잇고 規模잇는 動作에는 可히써 模 範할 바이 만엇다. 現在의 執行委員은 無産者同盟이 아무런 集會도 못하게되고 다만 그 看板 만 維持하고 잇는 形勢일 뿐 아니라 四團 의 合同委員會까지 成立되엿잇 음으로 別로히 누구누구라고 執行委員이 明定되여잇지 안코 <46>朴一秉, 元友觀, 陳秉基 等이 그 任에 當하고 잇다. 2. 火曜會 新思想硏究會가 變 되야 1924年 11月에 火曜會가 誕生하엿는바 쳐음 新思想硏究會가 1923年 6月에 洪命熹, 具然欽, 尹德柄 外 社會主義에 有 意한 人士가 多數히 會集하야 硏究團 로써 出生하여섯든바 當時의 情勢 가 不得已하야 硏究機關으로 그를 組織하여섯으나 그 本來의 뜻이야말로 決코 硏究에 止할 것이 아니라 一步를 進하야 運動團 가 됨에 이섯든 것 이다. 그럼으로 24年 11月에 와서는 斷然히 新思想硏究會를 解 하기로 決意하고 運動團 인 火曜會를 組織하기로 한 것이다. 그 創立當時는 會 員이란것도 不過 幾十名이엇지만 현재에 와서는 그 會員이 100여명이 되 며 世上에 나온 時間으로는 비록 日淺하다할지나 그 前身이 新思想硏究會 이고 다시 그 新思想硏究會는 無産者同盟이 集會의 禁止를 當하고 一擧手 一投足까지에도 不自由가 甚하게 되고 强壓이 日高하야감으로 臨時의 政 策과 方便으로 된 것이 여섯음으로 火曜會로써의 歷史는 그리 長하지 못 하다할 지라도 그 精神的의 系統에 至하야는 벌서 오래 前의 일이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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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만큼 朝鮮思想運動의 功獻이 多大하다할 것이고 地方으로나 對外關係 로 보거나 그 基礎가 確固되여이섯음도 避치 못할 事實이 된다. 火曜會는 綱1이라고 特別히 잇지 안다. 綱1을 世間에 發表한 일도 업스 되 오날에 와서 火曜會가 그 엇더한 團 이냐는 누구를 莫論하고 다 알고 잇다고 할 것이다. 不徹底한 綱1을 發表하는 것 보다 또는 엇더한 綱1 을 發表한달지라도 그대로 實現하지 못할 것은 實地가 證明하는 바 明若 觀火의 事實이니 차라리 制定치 안엇드라도 그가 할 일만은 다하고 잇지 안은가. 事業으로는 全朝鮮民衆運動者大會를 發起하엿든 것이 그 가장 큰 事業이 라할지니 朝鮮에 잇서서는 社會運動史上에 一大記錄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에 對한 詳細한 內容은 여기에 演述할 必要가 업스니 略하거니와 그 外 에 四團 의 合同을 發起한 것 等 實로 그 功8가 크다하갓다. 現在의 執行委員은 洪南杓, 洪德裕, 洪性熹, 金演鎭, 金 載, 吳羲善, 裵成m, 魚秀甲, 具然欽, 朴一秉, 李昇馥<47> 3. 北風會 1924年 11月에 創立되엿는바 現在의 會員數는 百餘名에 達한다하며 原 來는 日本東京에 北星會란 思想團 가 잇고 京城에는 그의 聯絡機關으로 建設社를 두엇든바 그 建設社를 改 하야 北風會로 하고 日本東京에 잇는 北星會는 그 후 수개월을 지속하엿섯스나 인물이 北星會 사람이자 北風會 의 사람임으로 北星會는 解 케 된 것이다. 이것이 北風會가 世上에 나오 기까지의 大강한 經路가 될 것이고 그가 標榜하는 綱1은 一. 社會運動이 本質的으로 無産大衆自 의 運動인 以上 우리는 어뎨까지 든지 現實에 立脚한 大衆의 實際的要求에 應하야 終局의 理想을 向하야 驀進하기를 期함. 一. 우리는 大衆運動의 部門이 되는 8農, 靑年, 女子, 衡平運動의 知的 敎養과 階級的訓練과 아울너 모든 現狀打破運動을 支持하는 同時에 經濟 問題에 置重하고 科學思想을 普及케하며 都市와 農村의 協同을 期함. 一. 우리는 아직가지 界線이 不分明한 狀態에 在한 運動을 整頓하야 그 類別을 確定하고 組織을 綿密히 아야써 從來의 消極的 否認의 態度를 許 치 안코 一層秩序的으로 正進하기를 期함. 一. 우리는 階級關係를 無視한 單純한 民族運動을 否認한다. 그러나 朝鮮 現下에 잇서서 民族運動도 또한 避치 못할 現實에서 發生한 것인 以上 우 리는 特히 兩大運動 卽 社會運動과 民族運動의 倂行에 對한 時間的 協同 을 期함. 사업으로는 朝鮮의 思想運動을 爲하야 活動하고 잇는 中이니 特히 여긔에 서 結算的으로 述할 必要는 업고 民衆運動者大會를 應援하야 그의 實現을 圖하여 섯스며 現在의 執行委員으로는 李奎宋, 裵德秀, 孫永極, 金平山, 李浩泰, 馬鳴, 徐廷禧, 宋奉*, 金若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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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朝鮮8
黨
1923年 7月 16日에 全一, 李忠模, 李極光 等 諸氏의 發起로 創立되엿는 바 現在의 會員數가 80餘名이라고 한다. 그리 만치 못한 會員을 가지고 잇스면서도 여러 가지의 魔碍와 싸와가며 無産階級8 者에게 知的의 向 上을 圖하고자 8 學院을 經營하엿고 더욱이 同黨의 全一君은 昨年 水災 時에 그 救濟에 努力하다가 生命까지도 犧牲에 供한 事가 잇다. 綱1으로 別로히 世間에 發布한 것이 업고 또한 會自 內에서도 아모 制定된 것이 업는 모양이나 그 亦 火曜會와 마찬가지의 意味에서 制定치 안엇다고 한 다. 그런데 8 黨으로써는 不祥事가 잇스니 그는 是非는 엇지 되엿든지 間에 <48> 分裂이 잇고 血戰까지 잇섯다는 것이다. 이제 그를 좀더 昭祥 히 記하면 朝鮮8 黨이 火曜會 北風會 無産者同盟等과 合同을 致하려함 에 그를 反對하는 一部分 小數分子가 朝鮮8 黨이라는 看板을 別히 懸하 고 四團 合同을 反對함에서 그와 갓튼 不祥事까지 보게 된 것이엿다. 現在의 執行委員은 7人인바 李忠模, 金演羲, 李極光, 金泰亨, 沈相浣, 金智浩, 金哲亭 5. 前進會 1925年 秋 卽 昨年 秋에서 울 靑年會便에서 組織한 것이라고 한다. 世上 에 出生하야 아즉 日淺함으로 이럿타 할 만한 큰 事業을 計劃하지도 못하 엿고 또한 實現도 別로히 업섯다할지나 만흔 抱負와 囑望을 負하고 잇는 것만은 事實이 될 것이다. 따라서 아즉은 會員의 數도 그리 만치 못할 것 이지만은 더욱더욱 健全한 主義와 精神으로 前進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야 一般의 期待와 囑望에 負함이 잇기를 願하야 마지 안는다. 現在의 執行委員으로는 金思國, 朴衡秉, 鄭栢, 李英, 李廷允外 7, 8人 6. 朝鮮女性同友會 朝鮮의 女性團 가 오날에 와서는 그 數가 적다고 못할지나 大槪는 宗敎 的의 그늘 밋헤서 靑年團 로서 組織된 것은 各地에 잇다할지나 女性의 思想運動團 로서는 朝鮮女性同友會가 그 矯失라고 할 것이다. 그 創立은 1924年 5月인바 當時의 發起人으로써는 丁七星, 許貞淑, 吳壽德, 金衡愛, 鄭鍾嗚 等이며 그 綱1은 ㄱ. 本會는 社會進化法則에 依한 新社會의 建設과 女性解放運動에 立할 일군의 訓練과 敎養을 期함. ㄴ. 本會는 朝鮮女性解放運動에 參加할 女性의 團結을 期함. 創立當時에는 不過 18名이든 것이 現在에는 會員이 70餘名이나 된다고 하며 그를 職業別로 보면 학생이 가장 만코 의사, 간호부, 교원, 기자, 직 공 등 各 方面으로 散在하야잇스며 그동안 한 事業으로써는 每週 一次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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硏究班이라하야 ’人問題를 가지고 會員들이 모이여 硏究와 討議가 잇고 一年에 一次式職工’人慰安音樂會도 하며 國際’人記念日에는 盛大한 記 念式을 擧行한다고 한다. 朝鮮의 女性團 로써 가장 色彩가 鮮明하고 그 가 濃厚하다할 수 잇으며 그 中에도 從來의 道德과 因習에 抑壓되야 아모 런 理智와<49> 判斷力업시 거저 服從하는 것으로만 美德으로 아든 朝鮮 의 女性이 이제는 完然히 反旗를 擧하고 階級的으로의 意識을 갓고 참된 解放과 人間性의 發揮에 努力하고 잇는 것이다. 거긔에 朝鮮女性同友會의 存在의 義意가 잇다고 한다. 現在의 執行委員은 7人인 바 그 氏名은 許貞淑, 朱世竹, 沈恩淑, 鄭鍾嗚, 宋惠淑, 朴元熙, 姜아그니야 以上에 述한바가 現今 京城에 잇는 그 重要 한 思想團 인 中 火曜會, 北風會, 朝鮮8 黨, 無産者同盟等의 四團 는 朝鮮現下의 情勢로 보아 各別分立하야 잇는 것 보다 統合하는 것이 더욱 緊急한 것임을 늣기고 昨年 4月 民衆運動者大會 直後에 四團 의 合同總 會를 開하고 完全한 合同을 致하려하엿스나 警察當局의 禁止로 不得已 그 의 實現을 보지 못하고 四團 合同委員會란 名稱으로 前記 四團 가 京城 齋洞 84番地에 看板을 모아 걸고 對外行動은 一切을 個 로는 못하게되 고 四團 合同委員會에서하기로 하엿스며 財政에 闢한것도 收入만은 個 個 로써 取扱할 수 일슬 지나 支出에 至하야는 四團 合同會委員會에서 決定하기로 하엿다. 그리고 보면 當局의 禁止로 因하야 團 가 看板마은 保障하고 잇스나 行動에 드러서는 個 의 資格과 權利는 全部抹殺되고 마 럿다고 보아도 無妨할 것이라고 한다. 四團 合同會가 正式으로 實現되기 는 1925年 6月이니 그때부터 只今까지 實로 적은 일이나 큰일나를 不許 하고 純全히 合同된 精神으로 進展된 것이엿다. 긔에서 世間이 四團 合同會에 對하야 만흔 期待와 囑望을 가지고 臨하는 것도 또한 當然하지 안은가. 三. 聯合團 1. 朝鮮8農總同盟 1924年 4月 20日에 南鮮8農同盟, 朝鮮8農大會, 朝鮮8 聯盟 等이 統 合되며서 朝鮮8農總同盟이 創立되엿는바 現在의 加入團 가 192個이고 會員數가 12만 5천餘名이나 된다고 한다. 朝鮮8農總同盟이 組織되면서 卽時로 集會禁止가 되얏슴으로 지금것 아모 集會가 업섯스니 따라서 何等 의 이룬 바도 업다고 한다. 그 間에 幾次3의 大會를 開催하려고 하엿스 나 되지 못하엿다 하며 그의 解禁運動도 이섯든 모양이나 그저 아모 效果 는 업고 壓迫과 抑壓에 呻吟하고 잇다고 한다. 그 綱1은 發表를 禁止하 엿스며 最近에 와서는 朝鮮의 社會運動이 漸次로 成熟함을 따라 8 과 農民의 分立이 必要하다 하야 <50> 第6回 執行委員會에서 그를 決定하 엿다고 한다. 그 內部의 事務分掌을 보면 7部로 分하엿는바 今換 朝鮮8 總同盟과 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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鮮農民總同盟으로 分立케 되는 날에는 自然히 그 事務分掌에도 多少變動 이 有할지나 아즉 그 分立을 決議하엿스 뿐이고 그가 具 化하지는 안엇 스니 그대로를 揭하면 總務, 經理, 編輯, 8 , 小作, 敎養, 調査의 7部이 며 各部에는 責任者가 잇서 그 任에 當하고 잇다. 執行委員은 全部 50名이고 그 中에서 常務委員을 選定하엿는바 그는 9人 이니 그 氏名은 權五卨, 徐廷禧, 尹德柄, 馬鳴, 陳秉基, 李準泰, 李忠模, 朴來源, 金有聲 2. 朝鮮靑年總同盟 朝鮮에 靑年運動이 始作된 것은 己未年 以後의 일이다. 따라서 처음에는 民族主義를 표방하고 各地에서 殆히 업는 곳이 업스리 만큼 組織되여 잇 섯스며 그 聯合機關으로 朝鮮靑年聯合會란 것이 잇섯다. 그가 朝鮮靑年에 게 階級意識이 들게되며 從來에 잇든 朝鮮靑年聯合會는 解 케 된 것이고 그 다음에 出生한 것이 方向이 밧구어 無産靑年運動의 中軸가 될 만한 朝 鮮靑年總同盟이 나온 것이다. 卽 1924年 4月 3日에 京城에서 그 創立大 會가 開催되엿스니 當時의 加盟團 가 220個團 이고 出席代表가 176人 이엿다. 以來 儼然히 朝鮮無産靑年運動의 中央機關이 되야잇으며 그 綱1 은 다음과 갓다. 一. 大衆本位인 新社會의 建設을 期圓함. 一. 朝鮮民衆解放運動의 先驅가 되기를 期함. 內部組織은 執行委員을 置하야 事務를 執行케한 바 다시 執行委員은 常務 를 選하야 그 任에 當케 한다고 한다. 庶務部, 敎育部, 調査部, 社會部等 의 4部가 잇고 亦是 當局으로부터 一切의 集會는 禁止를 當하고 잇는 中 임으로 이러타할 만한 事業을 致하지 못하엿스나 여러 가지의 생각과 具 的으로의 計劃만은 언제나 세워두고 잇다고 한다. 特히 朝鮮의 事情을 詳細히 알어 그리한 後에 朝鮮의 無産靑年運動 외 進 路도 定하고 方略도 計한다하야 經濟事情을 檢討하기에 非常한 努力을 하 며 統計的으로 發表할 날이 머지 안타고한다. 現在 朝鮮靑年總同盟을 運 轉하여 나아가는 常務執行은 7人이 有하니 李英, 金炳一, 愼杓晨, 李廷允, 鄭柏, 姜濟模, 朴興坤<51> 3. 漢陽靑年聯盟 京城 及 高陽附近에 在한 會員 15人 以上을 有한 無産靑年團 로서 組織 된 것인바 現在에 그 加盟團 가 21個이며 그의 創立은 1925年 8月 4日 이다. 阿峴靑年會, 印刷職工靑年同盟, 京城女子靑年同盟, 協友靑年會 等이 發起團 가 되야 가지고 여러 가지의 難關과 싸와가며 期於히 實現식킨 것이라 하며 그 內容의 組織은 庶務部, 敎養部, 調査部, 組織部, 學生部, 少年部의 6部를 置하엿고 大會에 參席할 代議員은 每團 에서 2人으로 하되 會員이 100名을 超過할 時에는 每 50名에 1人式 增加할 수 잇게 되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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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靑年聯盟은 朝鮮靑年會運動의 今後의 進展할 方向과 그 組織方法에 對하야 已定의 方略이 잇스니 그는 爲先 鄕村에 잇서서는 各 面에 一個의 靑年團 를 聯合하야 君聯盟을 致하고 그 郡聯盟이 모이여 道聯盟을 이루 고 다시 道聯盟이 뭉치여 朝鮮靑年總同盟을 이루도록 組織的이요 科學的 의 計劃이 成되여 잇다고 한다. 언제나 그러한 精神으로 朝鮮의 靑年運 動이 進展되도록 努力할 터임으로 京畿道靑年聯盟을 發起하기에 이른 것 도 그와 갓튼 方略으로 된 것이라고 한다. 1925年 8月에 組織되엿스니 아즉 日淺함으로 그럿타 할만한 治續도 업스 나 特히 昨年에 開催되엿든 全朝鮮主日學校大會를 期하야 反基督敎運動을 한 것과 칼, 로사의 紀念카-드 發行과가튼 것은 그 가장 現著한 것이라고 하겟다. 現下 朝鮮에서는 무엇보다는 敎養에 注力치 안을 수 업스니 그것 을 깨다른 漢陽靑年聯盟에서는 加盟團 21個를 全部 包容하야 敎養할 수 잇도록 區域을 따라 四分해가지고 資本主義經濟의 矛盾이잇다는 것과 唯物的歷史觀과 갓흔 것을 每週 一次式의 硏究討議를 하고 잇다. 露語硏 究도 本會館에서 매일 開講하야 會員으로 하야금 露語硏究의 便宜를 圖하 고 잇스며 特히 朝鮮에 對한 經濟的의 事情을 알기 爲하야 爲先京城부터 統計的으로 그 生活의 內面을 調査에 着手하엿다고한다. 現在의 執行委員은 15名이요 檢査委員 3人이 有하야 同聯盟의 事務를 執 行하고 잇다. 執行委員 <52> 金孝宗, 朴純*, 姜一, 李玟漢, 權肅範, 鄭雄, 李順宗, 姜均煥, 金益洙, 林昌 鉉, 高允相, 趙成進, 金九榮, 趙m俊, 宋蒙m 檢査委員 閔昌植, 趙元淑, 李 殷植 4. 京城8
聯盟
1925年 7月 4日에 任京8 運動者懇親會에서 京城8 聯盟의 創立을 보 게 된 것인데 現今 加盟團 의 會員數가 3천餘名에 達한다하며 集會는 一切 禁止中에 잇는바 그는 創立紀念式에서 開會辭을 한 것이 不法이라하 야 集會는 禁止라고 한다. 엇더한 會合이건 사람이 모듸이게 되면 그 모 듬의 意義가 잇슬 것이니 그를 簡單이나마 說明한다는 것이 當然한 일이 될지며 거긔까지는 못이른다더라도 우리는 무슨 會合이건 그에는 開會辭 가 잇슴이 맛당하지 안은가. 그런뎨 京城8 聯盟</pers>은 開會辭를 말 하엿다는 것이 口實이 되여 가지고 以來 半年이 넘도록 一回도 集會는 許 諾지 안는다고 한다. 따라서 <pers>京城8 聯盟</pers>은 이룬바도 업 고 設或 무엇을 計劃한 달지라도 그는 計劃에 止하엿울 뿐이고 實現은 보 지 못하게 된다. 事務所는 堅志洞에 <com>朝鮮8農總同盟과 가티 잇스며 現在의 執行委員은 李容鐸, 金哲亨, 李殷植, 閔昌植, 金泰植, 高允植, 元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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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 尹致成, 徐炳喆, 朴來源 5. 京城靑年聯合會 그는 京城附近에 잇는 靑年會를 聯合하야 組織된 것인바 1925年 8月에 創立된 것이엿다. 漢陽靑年聯盟과는 對馳되는 團 로써 京城 及 그 附近 地帶를 範圍로한 靑年聯合機關이 두 개나 잇게 된 것은 그 是非는 如何하 고 運動으로 보아 不祥事이라 하겟다. 따라서 筆者가 이제 붓을 들고 그 를 紹介하려할 때에도 엇전지 거북한 點이 만타. 그만큼 스스로 괴롬을 늣기게 된다. 엇지 그가 나뿐이랴. 同會는 堅志洞에 事務所를 두고 朝鮮無産靑年運動을 爲하야 努力하고 잇 다. 아즉 世에 出하야 日淺함으로 무엇 그럿타할 만한 治績은 업다할지나 無産者로써 직히여야 할 紀念日에는 紀念式을 擧行하고 그 밧게 朝鮮無産 運動에 도움이 잇고저 非常히 奮鬪하고잇다. 四. 個
團
1. 新興靑年同盟<53> 朝鮮에 잇서 靑年團 가장 그 色彩가 鮮明하다 할지니 다른 無産靑年運 動團 가 만으나 그저 現下의 資本主義의 社會와 相容되지 못한다는 그에 止함이 만코 設或 어느 點까지의 明確한 무엇을 標榜한다 더라도 어떠한 主義를 捕捉해 가지고 처음으로 지금까지 나오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런 데 新興靑年同盟은 XX主義團 로써 自我가 그리 是認할 뿐 아니라 世上 이 다 그리 알고 잇다. 그 創立은 1924年 2月인바 無産靑年會가 改 되 야 土曜會가 되고 다시 土曜會가 變하야 現今의 新興靑年同盟이 된 것이 다 그 綱1으로는 一. 本同盟은 社會進化의 法則에 依하야 新社會를 建設할 役軍訓練과 養 成을 期함. 一. 本同盟은 無産階級靑年의 團結을 期함. 一. 削除當하다. 그 外에 다시 敎育綱1을 發表코저 責任委員을 選하야 作成中에 잇다하며 그가 이루어 노은 事業으로는 新興靑年이라는 機關紙를 發行한 것과 時時 로 地方으로 巡回講演을 하엿스며 敎養에 注力하고 잇스니 每週 二次式의 硏究班이 잇고 1月의 1回式의 生新聞과 壁新聞을 刊行한다. 計劃은 잇섯 스나 實現을 보지 못한 것은 일일히 擧할 必要가 업슬지나 그 重要한 者 는 極東靑年大會를 開催하려는 것과 日本에서 主義者를 請하야 講演會를 計劃하는 等 實로 여러가지로 생각은 만엇든 듯하나 當局의 禁止로 하나 도 實現못된 것이 遺憾이라 하겟다. 反宗敎運動과 가튼 것도 新興靑年同 盟에서는 벌서 오래前에 決議된 것이엿스나 오즉 高壓에 눌니여 實行치 못하고 잇섯스며 露語硏究班가튼것도 新興이 벌서부터 經營해온 것을 漢 陽靑年聯盟이 組織되자 그에로 引渡하야 經營케 되엿다고 한다. 現在의 執行委員과 檢査委員은 合하야 17人바 그 氏名은 如左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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執行委員 朴純秉, 魚具善, 廉昌烈, 金興」, 金九榮, 崔義駿, 金瑛禧, 金昌 俊, 朴慶鎬, 姜一, 金泰龜, 李明源, 趙夢悅, 崔奎善, 林元根 檢査委員 權泰 東, 柳芝鉉, 柳淵和 2 .京城靑年會 1924年 12月 11日에 創立되엿는바 現在의 會員數는 約 300名이라 하며 無産靑年運動團 로써 過去 及 現在에 잇서 活躍이 크다 하갓다. 同會의 特色은 年2制限을 25歲로 한 것이며 最近에 와서는<54> 靑年의 聲이라 는 月刊雜誌를 刊行코저 計劃하는 中이라고 한다. 敎養에 注力하고 잇슴 은 勿論이고 露語硏究도 現在에 實行하고 잇다. 구태나 여기에서 長皇히 介紹치 안터라도 다음에 揭하는 同會의 綱1을 보면 그가 엇더한 團 인 것을 窺知할 수 잇슬지니 一. 我等은 我等의 戰術에 必要한 社會科學의 準備와 밋 8 立法에 關한 基礎知識과 아울너 自然科學을 包含한 社會衛生의 敎養에 置重함. 一. 我等은 我等의 歷史的 任務遂行上에 必要한 友愛連帶의 觀念과 訓練 自覺犧性的 精神과 其他 階級倫理의 涵養에 努力함. 一. 我等은 科學思想의 普及上에 絶對의 障壁이 되는 封建的 家族制度와 밋 宗敎寺刹의 本質과 그 發達의 由來를 硏究闡明함. 一. 我等은 我等의 全 가 無産階級戰術上에 一大 新勢力이 되는 同時에 모든 改革運動의 氣勢와 情熱을 振作함. 一. 我等은 特히 無産靑年의 經濟的利益을 擁護하며 靑年8 의 搾取에 反抗하고 經濟的 同權을 主張하는바에 無産靑年 育과 아울너 無産階級的 美의 觀念의 養成에 留意함. 執行委員은 合21名인바 金平山, 金有善, 申周極, 姜아기냐, 鄭爀, 鄭雄, 金平柱, 吳大根 外 13人 3. 京城女子靑年同盟 社會主義的의 色彩가 濃厚한 女子靑年團 로써 다른 一般女子靑年團 와 는 그 性質을 달리하야 階級意識을 갓고 그에 依하야 참된 女子의 解放을 獲得코저 하며 經濟的으로의 獨立이란것도 現今의 資本主義의 社會에서는 도저히 實現의 可能性이 可無라하야 階級的으로 鬪爭을 急先의 目標로 한 다. 1924年 1月 21日에 創立되엿는바 그 當時의 發起人으로는 許貞淑, 金祚伊, 朱世竹, 金弼順, 鄭峯, 裴赫秀, 朴貞德等이 엇섯고 現今의 會員은 90名인 바 職業別로 보면 學生이 最多라고 한다. 京城女子靑年同盟에는 特히 斷髮한 이가 만흐니 그 만큼 在來의 道德 因習等과 反逆한 것을 알 수가 잇지 안은가. 이제 그 綱1을 一觀하면 ㄱ. 靑年女子의 大衆的敎養과 組織的 訓練을 期함. ㄴ. 靑年女子의 團結의 힘과 互相扶助의 組織으로써 女性의 解放을 期하 며 當面의 利益을 爲하야 奮鬪함. 그리고 그 綱1을 遂行하기 爲하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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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一般靑年女性에게 解放的 意識을 覺醒케 할 敎養機關을 置함. ㄴ. 出版. 講演, 講習, 硏究會等을 隨함時開催. ㄷ. 其他必要事業 을 行한다 하며 그 組織의 內部는 庶務部, 敎養部, 調査部, 學生部等을, 置하엿다고 한다. 昨年과 가튼 前3가 <55> 업는 大水災時에는 會員一同 이 出動하야 그 救濟에 努力하엿고 每週一次式硏究班이 잇스며 國際’人 데이에는 盛大한 紀念式을 擧行한다고 한다. 現今의 執行委員은 7人이니 그 氏名은 다음과 갓다. 金瑛禧, 趙元淑, 沈恩淑, 李貞熙, 鄭烽, 鄭仁淑, 白信愛 4. 서울靑年會 서울靑年會라면 世上이 널니 알고 잇는 바이다. 따라서 그에 대하야는 長 皇히 紹介치 안을 지라도 足하다고 본다. 朝鮮靑年聯合會에부터 그의 重 要한 活動團 로 世間에 定評이 잇든바이고 그 後 靑年總同盟이 組織되는 때에도 만흔 努力이 잇섯다. 그의 主要目的으로하는바는 社會進化法則에 依하야 新社會의 建設을 期圖하는 것과 그의 事業으로는 月刊雜誌도 計하 야보앗고 智的의 向上을 圖키 爲하야는 때때로 硏究班도 開하고 講演會나 討論會도 主催하는바이며 物産 勵運動에 對하야 가장 猛烈한 攻勢를 取 함도 同會이엿든 것이다. 執行委員으로는 李廷允 辛哲鎬 外 諸氏가 잇서 努力하고 잇다고 한다. (끗)<56> <4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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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08월 10일 魚秀甲 句留狀128) 句 留 狀
京城府禮智洞一二八番地 魚1甲 右治安維持法違反被疑事件ニ付西大門 刑務所ニ句留ス。 大正十五年八月十日 京城鍾路警察署ニ於テ 京城地方法院檢事局 朝鮮總督府檢事 中野俊助 印
執行シタル 京城鍾路警察署 場所 執行シタル 大正十五年八月十日午後零時 日時 ○分 執行不能ノ (京鍾警局第八二四○號印) 事由
右之通取扱候也。 大正十五年八月十日 京城鍾路警察署 司法警察官吏道巡査 桑原正平 印
128) 국사편찬위원회, <국내외 항일운동 문서> 문서철명 : 李鳳洙(治安維持法違反), 興南7 ㆍ5第1事件 : 治安維持法違反被疑事件, 하위문서철명 : 檢事訊問調書, 문서제목 : 魚秀 甲 句留狀, 작성일 : 1926년 08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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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08월 10일 被疑者 魚秀甲 訊問調書129) 被疑者訊問調書 被疑者魚秀甲 右之者ニ對スル治安維持法違反事件ニ付大正十五年八月十日京城 鍾路警察署ニ於テ 朝鮮總督府檢事中野俊助 朝鮮總督府裁判所書記植山健藏 列席ノ上檢事ハ被疑者ニ對シ訊問ヲ爲スコト左ノ如シ。 問 : 氏名、年齡、身分、職業、住居及本籍地ハ如何。 答 : 氏名ハ魚秀甲 年齡ハ三十二年 身分ハ職業ハ時代日報記者 住居ハ京城府禮智洞二十八番地 本籍ハ京畿道金浦郡霞城面石灘里六一一。 : 爵位、勳章、記章ヲ有シ年金、恩給ヲ受ケ又ハ公務員ノ職ニ在ル者ニ非サリ ヤ。 答 : 無シ。 問
問 : 是 刑罰ニ處セラレタルコトナキヤ。 答 : 大正十一年京城地方法院ニ於テ勅令違反罪ニヨリ懲役一年ニ處セラシタル事ア リマス。 玆ニ於テ檢事ハ被疑事件ヲ告ケ此ノ事件ニ付陳述スヘキコトアリヤ否ヲ問ヒタルニ 被疑者ハ有リシ旨答ヘタリ。 問 : 被疑者ニ對スル治安維持法違反事件ニ付今回警察官ノ取調ニ際シ申立タル事ハ 事實ノ通リ相違ナキヤ。 129) 국사편찬위원회, <국내외 항일운동 문서> 문서철명 : 李鳳洙(治安維持法違反), 興南7 ㆍ5第1事件 : 治安維持法違反被疑事件, 하위문서철명 : 檢事訊問調書, 문서제목 : 被疑 者 魚秀甲 訊問調書, 저필자 / 신문자 / 朝鮮總督府檢事 中野俊助, 작성일 : 1926년 08 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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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 : 相違アリマセヌ。 本訊問ハ立會書記タル朝鮮總督府裁判所通譯生ノ通譯ニ依リ之ヲ行ヒ右調書ヲ同通 譯生ヲシテ供述者ニ讀ミ聞カサシメタルニ相違ナキ旨申立自署拇印シタリ。 大正十五年八月十日於京城 鍾路警察署 供述者魚秀甲 印 京城地方法院檢事局 朝鮮總督府檢事中野俊助 印 朝鮮總督府裁判所書記植山健藏 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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魚1甲 本籍照會書130) 本籍照會書
本籍京畿道金浦郡霞城面石灘里六一○
魚秀甲當三十年 右之者ニ對シ左記事項取調記入ノ上本書京城地方法院檢事局ヘ直接御回送相 成度及照會候也。 追テ本籍氏名等ニ多少ノ相違アルモ之ニ該當スヘシト認ムル者アラハ本文ニ 準シ取調ヘ若本籍ヲ變更シ又ハ寄留シタルモノニ係ルトキハ本籍地ヘ轉送シ 本籍不明ナルトキハ其ノ旨備考欄ニ記入シ御回送相成度候 大正十五年八月九日
京城鍾路警察署長 司法警察官道警視 森六治 印
霞城面事務所御中 住 居 本 籍
京畿道金浦郡霞城 面石灘里六一一
官吏公吏議 員等 爵位勳章記 章及年金 兵籍 恩給扶助科 退隱科
氏 名 生年月日 身分、職業
魚1甲 異名 魚成龍 明治二十九年五月十三日 朝鮮日報社記者
資産槪況
萬圓
特 徵
戶主祖父魚浩善 戶主及父母兄弟姉妹等ノ 父魚濬 母沈永娥 姑母魚 氏名 癸順 妻沈變
130) 국사편찬위원회, <국내외 항일운동 문서> 문서철명 : 李鳳洙(治安維持法違反)興南7 ㆍ5第1事件 : 治安維持法違反被疑事件, 하위문서철명 : 檢事訊問調書, 문서제목 : 魚秀 甲 本籍照會書, 발송자 : 金浦郡霞城面長 金鳳濟, 수신자 : 京城地方法院檢事局, 작성일 : 1926년 08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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裁判ノ日及廳名
前科
大正十四年十一月 三十日 同上 備考
罪名
大正十一年二月二 十一日 大正八年訓令第七號違反 京城地方法院檢事 局 名譽毁損
弟再龍 弟嫂金思麗 弟乙龍 妹明姬 妹淑姬 長男大慶 侄武慶 侄舜慶 弟嫂朴春緖 三女玉慶 侄 百慶 刑名、刑期、金額 懲役一年
罰金三十圓
備考 資産槪況ハ家父ナル魚濬ノ所有ヲ調査記入ス。 右及回答候也。 大正十五年八月十三日
金浦郡霞城面長 金鳳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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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準泰訊問調書(第二回)131) 被疑者訊問調書(第二回) 被疑者李準泰 右之者ニ對スル治安維持法違反事件ニ付キ大正十五年八月十四日西大門刑務 所ニ於 朝鮮總督”檢事中野俊助 朝鮮總督”裁判所書記植山健藏 列席ノ上檢事ハ前回ニ引續キ被疑者ニ對シ訊問ヲ爲スコト左ノ如シ。 問 : 李準泰カ。 答 : 左樣テアリマス。 問 : 被疑者ハ思想團體ニ關係アリヤ。 答 : 正友會員テアリマス。 問 : 何時ヨリ正友會員トナリタルヤ。 答 : 昨年春頃正友會ハ出來タノテアリマスカ最初カラ其會員ニナツテ居リ マス。元來正友會ハ火曜會外三個ノ思想團體ヲ纏メテ出來タモノテ私ハ正友 會ノ出來ル
ハ火曜會員テアリマシタ。火曜會ハ其前身ハ新思想硏究會テア
リマシタカ私ハ其新思想硏究會當時カラ其會員テアリマス。 問 : 被疑者ハ朝鮮共産黨員カ。 答 : 左樣同黨員ニシテ中央幹部テアリマス。 131) 국사편찬위원회, <국내외 항일운동 문서> 문서철명 : 李鳳洙(治安維持法違反), 興南7 ㆍ5第1事件 : 治安維持法違反被疑事件, 하위문서철명 : 檢事訊問調書, 문서제목 : 李準 泰訊問調書(第二回), 저필자/신문자/朝鮮總督府檢事 中野俊助, 작성일 : 1926년 08월 14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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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 : 朝鮮共産黨ハ何時何人カ組織シタモノナルヤ。 答 : 昨年四月頃組織サレタモノタトノ事テアリマスカ最初何人カ組織シタ ノカ‘レハ存シマセヌ。 問 : 被疑者カ其黨員ニナツタノハ何時カ。 答 : 私ハ昨年五月頃金」ノ紹介ニ因リ入黨シタノテアリマス。 問 : 入黨ノ際ニ同黨ノ目的主義等ヲ聞キタルヤ。 答 : 秘密ニ屬スル事テスカラ別ニ話ヲ聞キマセヌカ共産黨ト云ヘハ事新シ ク其目的ヲ聞ク
モ無ク私有財産制度ヲ否認シテ共産制度トナス事ヲ目的ト
シテ活動スル團體タト思ツテ入黨致シマシタ。 問 : 然ルニ同黨ハ昨年十二月頃金德炳外多數同志ノ檢擧ニ遭ヒ一頓挫ヲ來 シ一時休止ノ狀態ニ陷リタル由ナルカ如何。 答 : 左樣相違アリマセヌ。 問 : 其處テ被疑者ハ昨年十二月頃”內敦義洞 金美山宅ニ於テ姜達永、金在 鳳等ト會見シ新ニ朝鮮共産黨組織ヲ爲サン事ヲ協議シタル事アル由如何。 答 : 姜達永、金在鳳兩人ト左樣ナ協議ヲ爲シタル事ハアリマセヌカ其頃多 分御訊ネノ金美山宅タロウト思ヒマスカ金在鳳ニ會ヒマシタ際同人カラ新義 州事件ノ爲メ自分ノ永ク京城ニ滯在スル譯ニハ行カヌト思フカ朝鮮共産黨ノ 將來ハ君ニ面倒ヲ見テ貰フヨリ外仕方カアルマイト思フト申シマスカラ私ハ 只「ウン」ト返事シマシタカ私ノ考ヘテハ勿論自分ノ力ノ及フ限リ同黨ノ爲 メニ努力スル考テアツタノテアリマス然ルニ其後幾何ナラスシテ金在鳳モ逮 捕セラル
ニ至リ其事ニ關シテハ‘レ以上具體的ノ話ヲシタ事ハナイノテア
リマス。 問 : 金在鳳ト其話ヲスル際他ニ其場ニ同席セシ者ナカリシヤ。 答 : アリマセヌ。 問 : 被疑者ハ金在鳳ヨリ朝鮮共産黨ノ將來ノ面倒ヲ見テ吳レト云ハレ‘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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ヲ承諾シタ譯カ。 答 : 前陳ノ如ク只「ウン」ト返事シタ丈テアリマスカ素ヨリ私ハ其黨ノ爲 メニ何處
モ
ク考テ左樣ニ答ヘタノテアリマスカラ金在鳳モ私カ承諾シタ
モノト思ツタ事ト存シマス私ハ承諾ノ積リテ左樣ニ答ヘタノテアリマス。 問 : 其後本年二月頃姜達永、李鳳洙、洪南杓、金
洙及被疑者ハ慶雲洞 具
然欽宅ニ會合シ新ニ朝鮮共産黨ナルモノヲ組織シタル由如何。 答 : 左樣相違アリマセヌ。 問 : 其際秘書部、組織部、宣傳部等ノ役割ヲ定メ 責任秘書ニ 姜達永 秘書委員ニ 李準泰 組織部ニ 金
洙
洪南杓 宣傳部ニ 李鳳洙 カ割當テラレ 京城”幹部ニハ 洪悳裕 吳義善 閔昌植 全德 全海 ヲ指定シタル由如何。 答 : 左樣相違アリマセヌ尤モ京城”幹部ニ吳義善ノ加ハリ居ル事ハ記臆ニ アリマセヌ。 問 : 尙京城”幹部ノ下ニハ三四名ヲ一團トスル一ヨリ九 ノ組織ヲ爲シタル事モ相違ナキ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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ノ「ヤチエカ」
答 : 相違アリマセヌ。 問 : 仁川”ニモ「ヤチエカ」ヲ配置シタルヤ。 答 : ‘レハ記憶ニアリマセヌ。 問 : 尙右ノ他慶尙南北道、咸鏡南道、全羅南道、忠淸南道等ニモ‘レ‘レ 「ヤチエカ」ノ配置ヲ爲シタル由ナルカ左樣相違ナキヤ。 答 : 慶尙南道及全羅南道ニハ右「ヤチエカ」ノ取定メヲ爲シタルモ其他ニ ハ未タ其取定メヲ致シテ居リマセヌ。 問 : 忠淸南道ノ「ヤチエカ」トシテ愼杓晟ヲ慶尙北道「ヤチエカ」トシテ 李相熏ヲ各指定シタルニアラスヤ。 答 : 左樣ナ取定メハシテ居ラヌ
テアリマス尤モ李相熏丈ハ共産黨員テハ
アリマスカ慶北ノ「ヤチエカ」ニ指定サレテ居リマセヌ愼杓晟ハ黨員テモナ イカト思ヒマス。 問 : 尙海外ト連絡ヲ取ル爲メ滿洲ニ曺奉岩、上海 金丹冶、趙東祐、金」、 東京
金正奎、浦
李東輝、金東明等ヲ各連絡機關トシテ任命シタル由如
何。 答 : 浦
ノ分ハ其者等ヲ指定シヨウト云フ話カ有ツタノミテス其他ハ相違
アリマセヌ。 問 : 朝鮮共産黨ハ國際共産黨ノ承認ヲ得タノカ。 答 : 國際共産黨ノ承認ヲ得ル手
ニナリ居ル旨聞知シテ居リマスカ旣ニ承
認ヲ受ケタトノ事ハ聞キマセヌ。 問 : 朝鮮共産黨ハ旣ニ國際共産黨ノ承認ヲ受ケ其旨中央幹部會議ノ際權五 卨ヨリ報告シタ事實モアル由ナルカ如何。 答 : 其事ハ存シマセヌ。 問 : 姜達永ノ申述ニ因ルモ旣ニ國際共産黨ノ承認ヲ得タト云フ事故秘書委 員タル被疑者カ其事實ヲ知ラヌ
ナキ樣思ハ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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カ如何。
答 : 全ク存シマセヌ。 問 : 國際共産黨ノ承認ヲ得タ結果同黨ヨリ宣傳費トシテ旣ニ三千六百餘圓 ノ金
受取リタル由ナルカ如何。
答 : 其レハ存シマセヌ。 問 : 朝鮮共産黨ノ費用ハ如何ニシテ支辨シ居タノカ。 答 : 私ノ扱ツタ分ハ權五卨カラ李鳳洙カ新義州カラ持歸ツタ二百二十圓中 二百八圓ヲ受取リ黨ノ費用ニ充用シタル外ハ存シマセヌ。 問 : 李鳳洙カラ渡サレタ二百八圓ノ金ハ如何ナ金カ。 答 : 李鳳洙ハ金丹冶カラ受取ツタモノタト申シテ居リマシタ。 問 : 金丹冶ハ誰カラ受取ツタモノカ。 答 : ‘レハ共産黨上海部カラ受取ツタモノタト申シ居タ由テ有リマスカ果 シテ‘レカ國際共産黨カラ出タ金カドウカ存シマセヌ。 問 : 幹部等役員ハ任命ノ形式如何。 答 : 本來「ヤチエカ」代表會議ニ於テ決定スヘキモノテアリマスカ未タ黨 ノ設立後間モ無ク組織不完全ナル爲メ中央幹部ニハ黨ノ組織部ヲ充テ其他ハ 中央幹部ニ於テ適宜任命スル事ニ致シテ居リマシタ。 問 : 是レカ被疑者等ノ組織シタ朝鮮共産黨ノ黨則カ。 證第二○號ヲ示ス。 答 : 左樣テアリマス。 問 : 黨則ハ露西亞ノ共産黨ノ黨則ニ基キ作成シタモノナリヤ。 答 : ‘レハ好ク知リマセヌ。 問 : 朝鮮共産黨ノ目的如何。 答 : 先刻申述ヘタ通リ現今ノ不合理ナル私有財産制度ヲ廢シ共産制度ノ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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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ヲ謀ルノカ其目的テアリマス。 問 : 黨則ニハ朝鮮共産黨ノ目的ハ綱1ノ貫徹ニアリトノ意味ノ記載ヲ爲シ アルカ黨ノ綱1ヲ定メタルヤ。 答 : 未タ定メテ居リマセヌ。 問 : 何故綱1ヲ定メ居ラヌノカ。 答 : 左樣メモノハ作成セストモ共産黨ノ綱1ト云ヘハ共産主義ノ實行ニ在 ル事ハ判リ切ツタ事テアリマスカラ慌テテ作ル必要ハナイノテアリマス。 問 : 役員ノ職務權限如何。 答 : 秘書部員ハ庶務、組織部員ハ黨ノ機關設置調査等ニ關スル事項、宣傳 部員ハ共産主義ノ宣傳出版等ノ事務ヲ掌ル事ニナツテ居リマス。 問 : 京城”部ニ於テハ秘書部宣傳部組織部等ヲ設ケ居タノカ。 答 : 左樣テアリマス。 問
:
京城”部テハ‘レ等ノ各部ノ外其下ニ三四名ヲ一團トスル「ヤチエ
カ」一カラ九
出來テ居タ事モ前述シタ通リ相違ナキヤ。
答 : 相違アリマセヌ。 問 : 「ヤチエカ」ノ代表會議ヲ共産黨大會ト稱シ‘レカ黨ノ最高機關テ黨 務ニ關スル諸種ノ事項ヲ議決シ幹部等ノ任命ヲモスル事ニ成リ居タ由如何。 答 : 黨ノ組織カ完全ニナレハ左樣ニスル事ニナルノテアリマス。 問 : 此日誌及會錄ヲ知レルヤ。 證第二號及證第三號ノ譯文ヲ示ス。
答 : 存シマセ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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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 : 倂シ今示シタ會錄及日誌ニ記載シタル如ク被疑者等ニ於テp
會議ヲ
爲シタル事實ハ相違ナキヤ。 答 : ‘レハ相違アリマセヌ。 問 : 姜達永ノ申立ニ因レハ會錄及日誌ハ初メ同人カ暗號ニテ記載シタモノ ナル由如何。 答 : 左樣ナ事ハ知リマセヌ。 問 : 此會錄七回ノ處ニ此通リ京城ノ細胞團體ノ氏名カ記載シアルカコレハ 此通リ取定メタニ相違ナキヤ。 證第五三號會錄當該部分ヲ示ス。 答 : 京城”ニハ一カラ五
ノ細胞團體ヲ取定メタ樣ニハ聞キマシタカ御示
ノ會錄記載ノ氏名ノ者等カ細胞團體トシテ指定セラレタカドウカ存シマセ ヌ。 問
:
今示シタ會錄記載ノ京城”ノ細胞團體員等ハ全部朝鮮共産黨員ナル
ヤ。 答 : 其中黨員ナル事ヲ知ツタ人モアリマスカ黨員ナルヤ否ヤ私ノ知ラヌ者 モアリマス。 問 : 入黨ノ手續ハ如何。 答 : 入黨希望者カアレハ中央幹部會ニ於テ其入黨ノ許否ヲ決スル事ニ致シ テ居リマシタ。 問 : 曺俊基、趙鏞周、薛炳浩、蔡奎恒、李浩、金演羲等ハ朝鮮共産黨員ナ ルヤ。 答 : 其中蔡奎恒ハ私カラ姜達永ニ紹介シテ入黨セシメタモノテアリマスカ 其他ノ者ハ黨員ナルヤ否ヤ知リマセヌ。 問 : 蔡奎恒ノ外ニモ被疑者カ紹介シテ入黨シタ者アリ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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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 : 都容浩、李相熏、申東浩等カアリマス尤モ申東浩ハ私ノ紹介テアツタ ト云フ確カナ記憶ハアリマセヌカ若シ同人カ私ノ紹介テ入黨シタノテナカツ タラ金基洙カ私ノ紹介テ入黨シタノテアツタト思ヒマス其外金正奎モ私カ紹 介入黨サセタノテアリマス。 問
:
姜達永、全政琯、金明奎、朴台弘、金正奎、朴一秉、金昌俊、魚秀
甲、李相熏、朴純秉、金東“、李忠摸、李在益、金世淵、金昌會、李殷植、 柳淵和、高允相、李奎宋、姜均煥、李浩、金演羲、裴成m、金瑾禧、李承 燁、朴泰善、朱世竹、白基浩、金有聲、南海m、裴致文、愼杓晟、趙東鶴、 李敏行、趙鏞周、薛炳浩、都容浩、李鳳洙、蔡奎恒、曺俊基、權五卨等ハ何 レモ朝鮮共産黨員ニ相違ナキヤ。 答 : 其中姜達永、全政琯 金明奎、金正奎、朴一秉、李相熏、蔡奎恒、都容 浩、李鳳洙等ハ黨員ナル事ヲ承知シテ居リマスカ其他ハ黨員ナルヤ否ヤ存シ マセヌ。 問 : 被疑者カ朝鮮共産黨ニ入黨シタ後黨トシテハ如何ナル仕事ヲ爲シタル ヤ。 答 : 昨年入黨シタ後間モ無ク田舍ニ歸リ同年十一日頃
ハ其
田舍ニ居タ
ノテ其間黨トシテ何ヲシタカ存シマセヌ今度新ニ朝鮮共産黨ヲ組織シタ後ハ 幹部ノ取定メヤ豫算ノ編成ヲ爲シタノカ主ナ仕事テアリマス。 問 : 上海ノ金」ヨリ本年六月十日ノ國葬當日ヲ期シ共産主義ノ宣傳ヲ爲ス 樣申越シタル結果朝鮮共産黨中央幹部會ヲ開キ其事ニ付協議ヲ爲シタル事ア リヤ。 答 : アリマス。 問 : 其協議ノ模樣等如何。 答 : 六月初旬頃ノ事テアリマシタ。會合ノ場所ヘ覺ヘマセヌカ金」カラ御 訊ネノ樣ナ手紙カ來タト云フノテ李鳳洙、權五卨、金
洙、全德及私カ會合
シ國葬ヲ期シ共産主義宣傳ヲ爲スノ可否ニ付相談致シマシタカ權五卨ヲ除ク 外全部國葬ノ際主義宣傳等ヲ爲スハ不可ナリトテ反對シ獨リ。權五卨ノミ是 非遣ル事ニスルトカシマスノテ他ノ一同ハ‘レ程君カ遣ル考ナラ君一人テ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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ルカ好イ黨トシテハ遣ル事ハ出來ヌト云フ事テ別レマシタ。 問 : 否ラスシテ五人カ協議ノ結果權五卨ヲ朝鮮共産黨ノ代表トシテ出ス事 ニシタノテハナイカ。 答 : 左樣テハアリマセヌ。 問 : 朝鮮共産黨ト高麗靑年共産黨トノ關係如何。 答 : ‘レハ私ニハ判リマセヌ。 問 : 朝鮮共産黨ノ黨則ニモ其關係カ記載シアルニアラスヤ。 答
:
黨則ニハ左樣ニナリ居ルモ果シテ其通リノ關係ナルヤ否ヤ知リマセ
ヌ。 問 : 中央秘書部ノ委員ナル被疑者カ左樣ナ事ヲ知ラヌ
無シト思ハル
カ
如何。 答 : 全ク私ハ其事ハ存シマセヌ。 問 : 被疑者ハ何時頃カラ共産主義者トナリタルヤ。 答 : 一昨年無産者同盟會ノ幹事ヲ爲シ居リ無産者中共産主義ニ共鳴ヲ持ツ 樣ニナツタノテアリマス。 ソシテ昨年五月金」ノ紹介ニ因リ。朝鮮共産黨ニ入黨スルニ及ヒ愈 義ノ爲メ
共産主
ク事トナリ今日ニ至ツタ次第テアリマス。
右調書ハ之ヲ供述者ニ讀聞カサシメタルニ相違ナキ旨申立テ自署拇印シタ リ。 大正十五年八月十四日於西大門刑務所 供述者李準泰 印 京城地方法院檢事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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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總督”檢事中野俊助 印 朝鮮總督”裁判所書記植山健藏 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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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08월 16일被疑者 朴珉英 訊問調書(第二回)132) 被疑者訊問調書 被疑者朴珉英 右之者ニ對スル治安維持法違反被疑事件ニ付大正十五年八月十六日西大門刑務所ニ 於 朝鮮總督府檢事中野俊助 朝鮮總督府裁判所書記植山健藏 列席ノ上檢事ハ被疑者ニ對シ訊問ヲ爲スコト左ノ如シ。
問 : 氏名、年齡、身分、職業、住居及本籍地ハ如何。 答 : 氏名ハ朴珉英 年齡ハ二十三年 身分ハー 職業ハ無職 住居ハ目下西大門刑務所在監 本籍ハ支那間島延吉縣小營子村。 : 爵位、勳章、記章ヲ有シ年金、恩給ヲ受ケ又ハ公務員ノ職ニ在ル者ニ非サル ヤ。 答 : 無シ。 問
問 : 是 刑罰ニ處セラレタルコトナキヤ。 答 : 無シ。 玆ニ於テ檢事ハ被疑事件ヲ告ケ此ノ事件ニ付陳述スヘキコトアリヤ否ヲ問ヒタルニ 被疑者ハ有リシ旨答ヘタリ。 132) 국사편찬위원회, <국내외 항일운동 문서> 문서철명 : 李鳳洙(治安維持法違反), 興南7 ㆍ5第1事件 : 治安維持法違反被疑事件, 하위문서철명 : 檢事訊問調書, 문서제목 : 被疑 者 朴珉英 訊問調書(第二回), 저필자 / 신문자 / 朝鮮總督府檢事 中野俊助, 작성일 : 1926년 08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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