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Korea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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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4호 8월 19일~20일 값 1000원

August 19~20, 2012. no.284. sunday.joongang.co.kr

ISSUE

세계적 음악축제

바이로이트의 두 남자

CONTENTS editor’s letter

06

THIS WEEK PEOPLE 2013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 김승덕

이상한 기후

ISSUE

08

독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빛낸 연광철 & 사무엘 윤

COLLECTOR

날씨가 수상합니다. 한동안 가뭄이더니 엄 청난 폭염으로, 다시 물폭탄으로 이어집니 다. 노동운동을 넘어 생명사상에 천착하

14

고 있는 박노해 시인이 걱정을 담아 ‘이상

나의 애장품<7> 조영제-탁지숙 부부의 코끼리 공예품

FOCUS

한 기후’라는 시를 썼습니다. 카나리아 같 은 시인의 경구가 추상같습니다.

16

“기상이변이다/ 이상기후라고/ 말하지 말

젠틀맨이 말하는 ‘젠틀맨의 조건’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로엔그린’ 중 한 장면.

PORTR AIT ESSAY

20

나의 애장품- 코끼리 공예품

이해인 수녀의 아픔

라// 지금 이것이/ 정상기후다/ 그렇지 않 은가// 기후가 절로 이상한가/ 삶의 내용 이 이상하고/ 생활 방식이 문제 있으면/ 자

COLUMN

연도 기후도 살아남기 위해/ 정상 반응하

21

고 이상해지는 법// 나는 정상으로 살고 있

컬처#: 브랜드의 가치

HOUSE

는가/ 이토록 지구의 한계를 뛰어넘어/ 먹

22

고 입고 쓰고 욕망하는 것이/ 정상인가 이

최명철의 집을 생각하다<8> 파주 도시농부 타운하우스

상인가// 아 이제 지구시대는/ 이상기후가 정상기후다!”

REVIEW & PREVIEW

24

그래도 입추가 지나니 더위도 확실히 한풀

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

꺾였습니다. 자연은 무자비하지만 속임수

BOOK

는 쓰지 않습니다.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옵

26

니다. 힘든 여름을 보낸 만큼 가을이 주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SOUL-SEARCHING

결실을 하나라도 감사히 여기도록 하겠습

28

니다.

박정태의 고전 속 불멸의 문장<18> 『호밀밭의 파수꾼』과 J.D. 샐린저

S매거진도 가을을 앞두고 지난주부터 지면을 좀 바꿨습니다. 4년4개월간 정이

GALLERY

29

넘치는 글과 따뜻한 사진으로 ‘지리산에

‘오언 존스와 알람브라 -영국 V&A 소장전’

CONTE

사는 즐거움’을 저희에게 알려준 사진작 가 이창수님, 3년 7개월간 품격 있는 정보 30

만화가 어떤 것인지 보여준 ‘문화 캐리커

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PHOTO ESSAY

처 VS’의 김재훈님께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고마움을 표합니다. 아울러 새로 코

31

너를 선보이는 모든 분께도 기대와 설렘을

조용철 기자의 마음 풍경

전합니다. 파주 ‘도시농부’ 타운하우스

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의 한 장면

정형모 문화에디터 hyung@joongang.co.kr

S MAGAZINE

표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중 ‘파르지팔’에 출연한 베이스 연광철(뒷줄 날개 단 이). 사진 © Bayreuther Festspiele / Enrico Nawrath

문화에디터 정형모 취재 홍주희 유주현 사진 조용철 최정동 편집 우현아 교열 한규희 디자인 전유진 최귀연 통신원 이지윤(런던) 최선희(파리) 김성희(밀라노) 광고 김진영 구명서 엄태규 마케팅 박유선 박유림 기사제보 02-751-9000, 080-023-5002 광고문의 02-751-5555 / Fax 02-751-5806

1부 1000원 /월 5000원 정기구독문의고객센터 1588-3600, 080-023-5001

04 SUNDAY MAGAZINE

THIS WEEK PEOPLE

2013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 김승덕씨

세계 최대 미술행사 ‘미술 국가대표’ 감독 전문가 협업 꾀할 터

“세계 최대 미술행사로 꼽히는 베니스 비엔날레는 작가 위주 로 꾸며지는 다른 비엔날레와 달리 국가관 위주로 운영되지 요. 나라별 경쟁이 불가피한 이유입니다. 어떤 작가를 선정 해 어떤 식으로 전시장을 꾸며 야 할지 ‘전략’이 필요한 대목 이지요.”

2013년 열리는 제 55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한국관 커미셔너(commissioner)로 13일 선정된 김승덕 (58·사진)씨의 일성이다. 커미셔너는 행사 기획과 운영을 총괄하는 최고 책임자다. 이를테면 미술계 국가 대표 감독인 셈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위원장 권영빈)는 적임자를 찾기 위해 몇 개월간 국내외 미술 관계자 리스트를 꼼꼼하게 훑었다. “한국 미술을 해외에 효과적으로 소개할 수 있는지 여부와 국제적인 전시 기획 능력을 고려했다”는 게 위원회의 설명이다.

1973년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뉴욕대에서 프랑스 문화사 석사, 헌터대에서 미술 사 석사 학위를 받았고 파리 1대학에서 미술사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삼성문화재단 자문 큐레이 터, 퐁피두센터 어소시에이트 객원 큐레이터 등을 지냈다. 프랑스 릴 ‘플라워 파워’전(2003), 오스트리아 빈 ‘일라스틱 터부’전(2007) 등 다양한 국제 전시에서 한국 작가를 적극 소개해 왔다. 현재 프랑스 르 콩소 르시움 국제 전시 기획 디렉터로서 카타르 도하 도시개발 프로젝트 디렉터를 맡고 있다. 국적은 미국. 그는 95년 국가관으로는 가장 늦게 건립된 한국관에 대해 “반듯하지 않은 구조, 협소한 공간, 유리벽 등 시설 면에서 작가의 역량을 다 보여주기 힘든, 어려운 공간”이라며 “아직 구체화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강점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에서 문제를 풀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가 생각하는 방향은 다원예술. 즉 회화나 조각 등 정통 미술뿐 아니라 영상과 사운드 분야까지 확장 하겠다는 것이다. “영화에는 주제가가 있는데 전시에는 왜 없을까요. 저는 제 전시에서 음악적 요소를 중요하게 여겨 왔습 니다. 영상도 마찬가지죠. 지금 외국에서는 우리나라에 대한 인상이 자동차 수출국에서 영화 제작국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박찬욱·봉준호·홍상수 감독에 대한 이야기가 대화의 시작이 됐어요. 이런 점을 잘 살려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를 위해 ‘협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 명의 작가 대신 각 분야의 전문가가 힘을 합쳐 한국관을 꾸미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제 욕심만 부려서는 안 되고 관객의 시각에서 철저하게 연구해야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다”며 “대학 졸업자부터 원로 작가까지 가능성을 모두 열어놓고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참가 작가는 11월 중 최종 선정된다. 내년 6월 1일부터 11월 말까지 열리는 베니스 비엔날레의 전체 총감독은 2009년 광주비엔날레 예술 총 감독을 역임했던 이탈리아 출신의 유명 큐레이터 마시밀리아노 지오니다.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연합뉴스 06 SUNDAY MAGAZINE

ISSUE

독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빛낸 연광철& 사무엘 윤

바그너 음악 성지에서 바그네리안들에게 인정받다 <바그너 애호가>

08 SUNDAY MAGAZINE

ISSUE

런던 올림픽에서 한국 국가대표팀의 선전과 승전보가 올여름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면 바그너의 성지 독일 바이로이트에서 펼쳐지고 있는 세계적인 음악 축제(7월25일~8월28일)에서는 한국의 저음 성악가들이 무대를 달구며 성악 한국의 이름을 드높이고 있다.

1996년부터 바이로이트에서 활약한 세계적인 베이스 연광철(47)은 ‘파르지팔’과 ‘로엔그린’에서 주역으로 출연하며 청중들의 압도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또 올해 개막작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서 나치 문신 문제로 급거 하차한 러시아 바리톤 예브게니 니키친 대신 일약 주인공으로 발탁돼 통보받은 지 나흘 만에 개막 무대에 선 바리톤 사무엘 윤(41·윤태현) 역시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바이로이트의 두 음악 영웅을 전화와 e-메일, 카카오톡, 페이스 북을 모두 동원해 인터뷰했다. 글 장일범 음악평론가·KBS 클래식FM ‘장일범의 가정음악’ 진행 , 사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조직위원회

‘로엔그린’에서 사무엘 윤(가운데)이 열창하는 모습.

‘파르지팔’에 출연한 연광철. 사진 Jö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 등장한 사무엘 윤.

SUNDAY MAGAZINE 09

ISSUE

1996년부터 터줏대감, 연광철

이번 ‘파르지팔’ 공연은 프로덕션의 마지막 상연

베이스 연광철(서울대 성악과 교수)은 바이로이트 페

해였고, 연광철의 구르네만츠는 언제나처럼 바그네리

스티벌의 터줏대감이다. 1996년부터 2000년까지 ‘뉘

안(바그너 애호가)들의 격찬을 받았다. 극 전체를 이

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에서 야경꾼, 2002년부터

끌어 가는 해설자이자 사회자 역인 구르네만츠는 사

2004년까지 ‘탄호이저’에서 헤르만 영주, 2003·2004

실상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

년 ‘파르지팔’에서 티투렐, 2005·2006·2012년 ‘트리

한 배역이다.

스탄과 이졸데’에서 마르케왕, 2006년부터 2010년

-연광철의 구르네만츠 공연을 본 청중들이 발을 구르며 박수

까지 ‘라인의 황금’에서 파졸트, ‘발퀴레’에서 훈딩,

갈채를 보냈다는 현지 반응을 접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파르지팔’에서 구르네만츠

“지난 슐링엔지프의 ‘파르지팔’과 현저한 해석의 차

역을 맡았다. 동양인 성악가로서 전무후무한 놀라운

이가 있기 때문이겠죠. 난해하고 각자가 알아서 받아

기록이다.

들이게 해석한 슐링엔지프보다는 하고자 하는 이야 기가 정확한 헤르하임의 연출 스타일이 훨씬 더 많은 공감을 얻은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연출 덕분으로 공을 돌리시는군요. 바그너 를 좋아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까.

“바그너는 단지 어떤 이야기에 음악을 붙인 것이 아니고 자신이 모든 이야기를 이끌어갔죠. 그렇기 때문에 작곡가와 대 본가의 작업이 없었습니다. 그를 극작가 10 SUNDAY MAGAZINE

ISSUE

로 보는 것만으로도 다른 시각이 열립니다. 독일어와

-바이로이트 가수로서 어떤 자부심이 있습니까.

음악의 아름다운 조화, 그리고 깊이 있는 가사도 매력

“자부심이라기보다는 현장에 있다는 느낌이죠. 리

적입니다. 또 오케스트라가 단지 성악 반주에서 머무

하르트 바그너와 그의 음악을 연주하는 세계적인 지

르는 대다수 오페라에 비해 바그너는 때로 성악이 오

휘자들과 유능한 동료들, 그 속에서 함께 호흡한다는

케스트라의 악기로 생각될 만큼 오케스트라에서 많

느낌이 좋습니다.”

은 이야기를 합니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다른 페스티벌이나 공연보다 더 긴 3개월 동안 연습한다고 들었습니다.

“3개월 정도 연습하는 경우는 새로운 반지 시리즈

“아시다시피 바그너는 직접 설계를 해서 이 극장을

참가합니다.”

-2012~13 시즌의 주요 공연 일정은.

“다음 시즌에는 뉴욕 메트에서 베를리오즈의 ‘트로 이인’을 하고, 2013년은 드레스덴에서 ‘로엔그린’으로 시작합니다. 뮌헨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 몬테 카

지었습니다. 그 독특한 음향이 가수들을 떠나지 못하

를로에서 바그너 갈라, 뮌헨에서 베르디 탄생 기념 ‘레

게 하죠. 돈을 위해 다른 페스티벌로 옮기는 사람도 많

퀴엠’, 빈에서 ‘파르지팔’, 베르디 ‘돈 카를로’ 등을 부

은데, 바이로이트에서 오래 연주하는 사람들은 마치

르고 런던의 프롬스에서 ‘트리스탄’, 다시 뮌헨에서

휴가처럼 연습과 무대와 공연을 즐기게 됩니다.”

Jörg Schulze.

내는 작업은 많이 다릅니다.” “내년에는 리하르트 바그너 탄생 기념 연주회에만

은데도 성악가들이 바이로이트 무대를 좋아하는 이유는.

바이로이트 극장 전경. © Bayreuther Festspiele /

은 음악을 대하는 모습은 비슷하지만 음악을 이끌어

부분의 작품은 6월 중순부터 시작하죠. 연습기간은

-옛날 방식을 고수하며 개런티도 다른 극장에 비해 많지 않

사무엘 윤의 모습.

“다니엘 바렌보임과 크리스티안 틸레만입니다. 그들

-내년에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참가하십니까.

이 무척 엄격하게 진행됩니다.”

연광철(오른쪽).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서

-바이로이트에서 영감을 준 지휘자가 있다면.

(니벨룽겐의 반지)가 올라갈 경우에만 그렇습니다. 대 약 4주인데 여러 작품이 동시에 올라가기 때문에 일정

‘파르지팔’에서 열창하는

‘파르지팔’이 계획돼 있습니다. 하반기에는 한국에서 SUNDAY MAGAZINE 11

ISSUE

‘파르지팔’도 공연합니다. 최근에 차이콥스키의 ‘예브 게니 오네긴’의 그레민으로 데뷔를 했습니다. 아마도 다음 작품은 러시아 작품들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족들, 그리고 저를 응원해 준 모든 분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유령선장 ‘네덜란드인(이하 홀렌더)’은 어떤 인물이며 어떻 게 소화했습니까.

커버에서 주역으로, 사무엘 윤

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 주는 여자를 만나야 하는

리어를 시작했다. ‘파르지팔’에서 두 번째 성주 기사

데, 7년에 한 번씩만 육지로 올라올 수 있습니다. 매번

역으로 출발한 그는 이후 ‘탄호이저’에서 음유시인이

실패했기에 인간에 대한 믿음이 없죠. 그래서 그가 세

자 기사인 라인마르츠 폰 페터 역을 맡았다. 2010년부

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부정적이고 냉소적입니다. 젠

터 ‘로엔그린’에서 헤어루퍼 역을 맡으면서 지난 3년

타라는 사랑하는 이를 얻게 됐지만 오해로 인해 결국

동안 같은 역을 바이로이트에서 해왔다. 그리고 올해

다시 좌절과 고통을 느끼며 바닷속으로 사라지죠. 이

개막작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서 커버(주인공이 아

복합적인 캐릭터는 고난도의 성악적 테크닉뿐 아니라

플 경우 출연하게 되는 언더스타디)였던 그는 자신을

무대 위에서 자신의 모든 걸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서

찾아온 행운을 놓치지 않았다.

이 역을 제대로 소화해 낼 수 있었던 가수는 세상에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서 한국인으로, 또 아시아인으로 서 첫 타이틀롤 주역을 맡은 소감은.

“18년간의 유럽 생활 중 가장 뜻깊은 시간이었습니 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극복해 낼 수 있는 힘을 하나 님이 주셨고, 담대하게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동안 저를 위해 기도해 준 제 아내와 가 12 SUNDAY MAGAZINE

“홀렌더가 자신의 저주를 풀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

바리톤 사무엘 윤은 2004년부터 바이로이트에서 커

몇 명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연출가인 얀 필립 글로거는 어떤 것을 요구했습니까.

“고뇌하고 방황하며 희망을 잃은 현대인의 모습을 저를 통해 무대에서 투영하려고 했습니다.”

-바이로이트 무대의 매력은 무엇입니까.

ISSUE

“이곳의 공연을 보기 위해 (지금까지는) 정식으로 표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에서 ‘라인의 황금’, 베를린

를 신청하면 무려 9년이나 걸린답니다. 그만큼 바그너

도이체 오퍼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 쾰른 오페라에

에 대한 애정이 대단한 거죠. 이곳에서 주역으로 공연

서 ‘파르지팔’, 베를린 필하모니홀에서 ‘방황하는 네

을 한 성악가들은 세계 어느 극장을 가도 존경의 표시

덜란드인’ 타이틀롤을 부르게 됩니다. 여름에는 다시

를 받게 되고, 그만큼 성악가 커리어에 크나큰 도움이

바이로이트에 출연하고, 가을에는 시칠리아 팔레르

됩니다.”

모에서 지크프리트 공연을 합니다. 내년 저의 공연의

-바이로이트에서 노래하는 성악가로서 어떤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까.

“바그너 오페라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은 후천적인 노

‘탄호이저’의 한 장면.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한 장면. ‘파르지팔’의 한 장면. 이상 사진 © Bayreuther Festspiele / Enrico Nawrath

80% 이상이 바그너 작품이네요.”

-지금까지 안 했던 역 가운데 가장 부르고 싶은 역이 있다면.

“‘토스카’의 스카르피아 역입니다. 여러 극장으로부

력도 중요하지만 선천적으로 재능을 받아야 합니다. 터 계속 제안을 받았었는데 다른 일정 때문에 겹쳐서 그렇기 때문에 자부심뿐 아니라 하늘로부터 받은 선 물이 헛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의무가 있는 거죠.”

-바그너 음악극의 매력은.

번번이 하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꼭 오겠죠.”

-요즘 이렇게 한국 가수들이 각광받는 이유는.

“갖고 있는 소리의 매력도 물론 있지만 더 중요한 건

“광대한 스케일입니다.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편성

한국 성악가들이 독일인보다 더 열심히 발음 연습을

에서 나오는 엄청난 사운드와 무대에서 자유롭게 표

하고, 언어의 뉘앙스를 찾기 위해 무단히 노력했기 때

현될 수 있는 연출적인 가능성 때문이죠. 무대에서 노

문이라 생각됩니다. 그런 노력을 바탕으로 한 무대에

래하면서도 몇 번이나 소름이 돋았는지 모를 정도로

서의 집중력과 다양한 음악적 표현들이 그들의 귀와

극한 감정을 안겨줍니다.”

마음을 열어준 것이겠죠. 언젠가는 온전히 한국인의

-내년은 바그너 탄생 200주년이라 전 세계적으로도 바그너 공연이 많이 열릴 텐데요.

힘으로 제작되고 연주되는 바그너 오페라들이 한국 무대에 자주 올려지길 바랍니다.”

SUNDAY MAGAZINE 13

COLLECTOR

14 SUNDAY MAGAZINE

COLLECTOR

나의 애장품 <7> 조영제-탁지숙 부부의 코끼리 공예품

남편과 꼭~닮은 코끼리들 사연 있는 놈만 추려도 마리 “1979년인가, 미대 수업시간에 교수들 특징을 찾아서 캐리커처로 그려보라는 과제를 냈었대요. 그런데 이 양반에 대한 그림은 대부분 탱크 아니면 코끼리였다 죠. 체구가 크고 선해 보이는 표정이 정말 코끼리를 닮 지 않았어요? 호호.” 서울대 미대 학장을 지낸 조영제(77) 명예교수의 별 명이 코끼리가 된 이유다. 섬유예술가로 활동 중인 부 인 탁지숙(70)씨는 그 뒤로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여 기저기서 사고 또 가족·친지·제자들로부터 선물받은 코끼리가 1000마리가 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사 오면서 정리를 하다 보니 지금은 300 개 정도밖에 없어요. 그래도 남아 있는 것은 다 사연 이 있는 것들이죠. 혹 잊어버릴까 봐 견출지에 연도와 사연을 메모해서 다 붙여놓고 가끔씩 읽어보곤 해요. 그럼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지요.” 한때는 커튼이며 이불보, 베갯잇까지 모두 코끼리 무늬였단다. 지금도 벽에는 코끼리 문양의 꽃병이 달 려 있다. 작은 장식장 속에 들어 있던 코끼리들을 꺼 내놓으니 탁자는 순식간에 밀림이 됐다. 상아로 만든 것을 비롯해 흰 모래, 유리, 칠보, 브론즈, 가죽, 나무 등 재질도 다양하다. “이 푸른색과 흰색 유리 코끼리는 85년 처음으로 저 희 부부가 프랑스에 갔다가 니스에서 구입한 것이에 요. 요 흰 코끼리는 미국 LA의 갤러리숍에서 구입한 건데 표정이 참 재미있지 않나요? 나무 배속에 작은 코끼리가 또 들어 있는 것은 대만에서 산 건데 형태가 참 신기하죠.” 하지만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건 지난해 희수를 맞은 조 교수를 위해 외손자가 직접 만들어준 코끼리 그림책이다. 책을 꺼내 펼쳐 드는 탁씨의 표정엔 어느 새 대견하다는 미소가 흘러 넘친다. “커다란 몸, 튼튼한 다리, 큰 코와 귀, 조그만 눈/ 바 로 나의 외할아버지/ 그런데 이렇게 커다란 코끼리는 풀만 먹는대요/ 마음은 여리고 따뜻한 할아버지와 참 똑같죠/ 그리고 이렇게 커다란 코끼리는 커다란 발자국을 남겨요/ 할아버지가 분야에 남기신 발자국 은 더 크지 않을까요/ 저도 할아버지처럼 큰 발자국 을 남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나의 소중한 코끼리 / 할아버지 생신 축하드립니다.”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최정동 기자 SUNDAY MAGAZINE15

FOCUS

월간 ‘젠틀맨 코리아’ 창간 공동기획  4인4색 ‘젠틀맨의 조건’

나누고 배려하라 마음이 넉넉해야 진짜 신사 세상의 절반이 남자지만 신사는 드물다. 언제부턴가 원칙을 곧이곧대로 지키지 않는 것이 ‘요령 있는 것’으로 통하고, 관용·배려·예의는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되고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젠틀함’에 대한 갈증은 더해만 간다. 진정한 젠틀맨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견고한 철학이 있고, 사회적으로 쌓아올린 업적이 있으며, 자신만의 스타일로 자기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멋진 남자의 삶을 보여주기 위해 창간된 월간 젠틀맨 코리아가 우리 사회의 ‘젠틀맨’을 찾아 나섰다.

BMW 코리아 김효준 대표, 패션디자이너이자 앤디앤뎁 대표 김석원, 부천 필하모닉 지휘자 임헌정, KAIST 사회공헌디자인연구소 배상민 교수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그들의 육성을 통해 우리는 이 시대 ‘젠틀맨’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 보려 한다. 그럴 때도 됐다. 글 신윤영·이기원 월간 ‘젠틀맨 코리아’ 피처 에디터 niemand@joongang.co.kr, 사진 조세현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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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SUNDAY MAGAZINE 17

FOCUS

내가 가진 것을 사회와 나눠라 BMW 코리아 김효준 대표

사업이든 사교든 룰을 지켜라 앤디앤뎁 김석원 디자이너

앤디앤뎁(ANDY&DEBB)의 대표인 김석원 디자이너는 “내가 참 철이 안 드는 것 같다”며 운을 뗐다. “새로운 것에 금방 빠져 서 미친 듯이 하는 데서 기쁨을 느낀다”면서. 요즘 그 대상은 서핑이다. 한 달 전부터 시작했단다. 토요일마 다 강원도 양양으로 달려가는데 운전에만 3시간이 걸리는 ‘원 정’이다. 그래도 “기계의 도움 없이 자연과 호흡하는 스포츠의 매력”에 푹 빠져 운전하는 시간이 아까운 줄 모른다. 여전히 도전에서 기쁨을 느끼는 ‘젊음’이지만, 그도 역시 40 대. 점차 나이 드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나이다. 그런 그가 최근 나이듦을 새삼 떠올리게 된 건 올림픽을 보면서였다. “호케쓰 히로시라는 일본인 승마 선수가 생각납니다. 일흔이 넘은 최고령 참가자인데 말도 나이가 많았죠. 말과 함께 늙어가 “저는 넉넉하게 자라지 못했습니다. 막연한 미래에 대한 꿈을 꾼다는 건 그 때의 내 상황과 어울리지 않았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맞닥뜨린 현실에 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또 다른 기회가 왔을 때 받아들일 수 있는 준 비를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는 게 좋다고 말하는데, 멋있더라고요. 그렇게 늙어가고 싶다 는 생각도 들고.” 그 승마 선수가 자신의 말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드러냈듯, 김 석원은 옷도 어떤 사람의 삶을 보여줄 수 있다고 믿는다.

BMW 코리아 김효준(55) 대표는 거대한 성공을 추구하기보다 매일의

“남성의 경우 20대엔 절대로 패션이 완성될 수 없습니다. 잘

성공을 생각하라고 말한다. “사건은 늘 생길 수밖에 없고, 그걸 관리하고

입는 옷이란 건 어울리는 옷이거든요. 그러려면 자신을 객관적

수용하는 과정을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가끔 우리 임원들이 중요한 사

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40~60대

안을 두고 의견 대립을 하면 너무 즐겁습니다. 그걸 조정하기 위해 제가 존

에 입는 옷이야말로 그 사람의 인생을 보여줄 수 있죠.”

재하는 거니까요. 얼마나 좋아요. 문제를 해결하면서 내 자신의 가치와 경 험이 한층 더 심화되는데.” 성공한 남자로 꼽히는 그에게 젠틀맨의 덕목을 물었다. 그는 “젠틀맨이 라는 단어를 들으면 배려·절제·봉사·진정성 같은 단어들이 연상된다” 며 “말하자면 본인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사회와 함께 나눌 수 있 는 사람이 젠틀맨”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생각은 그의 기업경영 방침과도 연결된다. BMW 코 리아는 얼마 전 미래재단이라는 비영리 법인을 설립했다. 나눔 과 상생을 기치로 내걸었다. 수익 창출이 지상과제인 기업이 비영리 법인을 설립한 이유는 뭘까.

승마 선수가 오랜 시간 끝에 최고의 파트너십을 완성한 것처 럼, 김석원 역시 오랜 시간 여러 스타일을 섭렵한 끝에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았다. 유행에 흔들리지 않 고 나에게 잘 어울리는 옷을 입는 것, 마음 에 들면 해어질 때까지 입는 것이야말 로 가장 멋진 스타일이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가 생각하는 젠틀맨 은 “룰을 지키는 사람”이다. 반칙이 너무 많은 시대, 사업이건 사교건 룰을 잘 지키는 사람이 점점 좋아진다고 그는 말한다.

“좋은 제품을 만들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건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

그는 요즘 남성들이 패션에 관심을 갖고 나름의

만 그게 다일까요. 기업의 가장 큰 숙제는 지속 가능한 성장입니다. 그렇다

스타일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를 매우 고무

면 우리 세대만이 아닌 우리 이후의 세대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도 함께

적으로 본다. “한국인은 순발력이 있기 때문에 이

고민해야겠죠. 미래재단의 설립은 그런 고민의 결과입니다.”

른 시간 내에 멋진 중년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을 것

그는 몇 년 전 한 인터뷰에서 “앞으로 사회의 가장 큰 이슈는 명예가 될 것이다. 브랜드가 곧 자존심이다”라고 말했었다. 이 말을 그는 이렇게 풀어 들려주었다. “건실했던 기업이 갑자기 쓰러지는 모습을 보면서 뭐가 부족했을까 생각 했습니다. 그것은 존경심이었어요. 대중의 존경을 받을 수 없는 기업의 활 동은 제한될 수밖에 없죠. 기업 활동에 영적인 가치를 구현하지 못하면 성 장은 제한된다는 걸 역사에서 배웠어요. 존경받지 못하는 기업은 비전이 없습니다.”

18 SUNDAY MAGAZINE

같다”는 기대도 한다. “가끔 실패도 하겠지만 그런 과정을 겪어야 자기만 의 스타일이 만들어집니다. 자신에게 투자하는 남자 들은 그만큼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남자일 가능 성이 크거든요.”

FOCUS ※ 자세한 내용은 20일 창간되는 월간 젠틀맨 코리아 9월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용 갖춰라 부천필하모닉 임헌정 지휘자

어려운 처지에 빠진 이를 도와라 KAIST 사회 공헌 디자인연구소 배상민 교수

5년 전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에겐 휴대전화가 없었다. 부 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임헌정(59)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생활이 심플합니다. 연습장과 집, 강의를 나가는 학교가 전부 거든요. 휴대전화를 들고 다닐 이유가 없죠.” 부천 필하모닉의 지휘봉을 잡은 지 23년, “바람 부는 대로, 본분을 열심히 하다 보니 지금의 모습이 됐다”는 그는 욕심이 들어간 소리를 경계한다. 수십 년 지휘를 하다 보니 이젠 소리 만 들어도 사람을 볼 수 있는데, ‘나를 좀 봐 줘, 내 소리를 들어 봐’라고 말하는 것처럼 욕심이 들어간 소리가 있다는 것. 대신 그는 늘 단원들에게 “마음으로 연주하라”고 말한다. 마 음이 담겨 있을 때 비로소 사람들이 감동한다는 건 지극히 당 연한 진리. 기술적으로 소리를 잘 내는 사람은 많지만, 마음을 담아 연주하는 사람은 많지 않더라는 아쉬움에 늘 채근하게 된다는 것이다. 욕심도 발전의 밑천이 될 것 같고, 마음으로 연주하라는 건 어째 도덕교과서 같은데…. 대신 그가 꺼낸 키워드는 동경이었

KAIST 산업디자인학과 배상민(40) 교수는 동양인 최초이자 최연소 파

다. 무언가 먼 것에 대한 동경 말이다.

슨스 교수로, 뉴욕에서 잘나가던 디자이너였다. 그랬던 그가 돌연 귀국했

“바그너가 이런 말을 했어요. 세상의 모든 것

다. “아름다운 쓰레기만 계속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 다 사라져도 남는 건 동경일 거라고. 무언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물건을 만들고 그걸 사게 하는 일, 그리고 6

가를 동경하고 결국 그 동경의 대상에 다다

개월 후에 그보다 더 좋은 걸 만들어서 예전 걸 버리고 다시 사게 만드는

르는 것, 특히 음악을 하는 사람들에게 굉장

일이 내 직업이었습니다. 그걸 잘할수록 사람들은 훌륭한 디자이너라고

히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21세기에 휴대전화도 없이, 바람 부는 대로 살 뿐이라는 그에게 예술 좀 한다는 예술가가 넘쳐나는 시

칭찬하지만, 실은 그게 아니죠.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야기’를 물려줄 수 있는 디자인이 진정 좋은 디자인입니다. KAIST에서라면 내가 꿈꾸던 디 자인을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KAIST에서 그가 처음 만든 랩 이름은 ‘ID+IM’. ‘나는 디자인한다, 고

대는 어쩌면 벅찰지도 모르

로 존재한다(I Design, therefore I Am)’의 약자다. 여기서 D라는 글자

겠다.

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Dream, Design, Donation이다. 열정적으로

그래서 그는 자신의 중심 을 지킬 뿐이다. “누가 알아

꿈꾸고, 그것을 디자인하고, 결과물을 사회와 나눈다는 것이다. “디자인의 본질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만든 것을 사람들과 나눈

주지 않아도, 명예가 없어

다는 점에서는 요리와도 닮았죠. 단순히 자본주의의 쳇바퀴 속에서 사람

도, 어느 한구석에서 사람

들의 지갑을 열고 기업의 배를 불리는 첨병이 아니라 사회를 바꾸고 사람

의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다

들의 생각을 바꾸고 더 나은 삶을 만드는 일이라 믿습니다.”

면 족하다”고 말한다. 그가 생

그가 만든 이 ‘사회공헌디자인연구소’에서는 지금 ‘시드 프로젝트’가

각하는 신사는 그래서 “한쪽으

한창이다. 아프리카 주민들과 함께 그들이 살 집을 그들 보기에 아름답게

로 너무 치우치지 않은, 중용을

디자인하는 프로젝트다. 우리가 느끼는 각지고 모던한 디자인이 아닌, 아

가진 남자”다.

프리카의 자연과 문화와 미감까지 살리는 집을 짓는 일이다. 이런 그에게 신사란 ‘레이디 퍼스트’를 외치고 슈트를 잘 입는 남자가 아 니다. 바로 ‘긍휼의 마음’을 가진 남자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를 안타깝 게 여기고 돕는 남자. “다산 정약용 선생이 한국 최초의 디자이너이 자 신사라고 생각합니다. 『목민심서』를 보면 백성을 긍휼히 여 기는 그의 마음이 느껴지거든요.”

SUNDAY MAGAZINE 19

PORTRAIT ESSAY

권혁재 기자의 不-완벽 초상화

이해인 수녀의 아픔 “처음 병을 알고선 하루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어요. 솔직히 두렵기도 했어요. 이왕 온 암, 그냥 아프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차라리 내 아픔이 고통에 빠진 이들에게 위로와 정화가 되길 기도했어요. 내 아픔을 통해 아픈 사람과 벗이 될 수 있다면 그것도 참 고마운 일이잖아요. 고통이 진주일 수 있다는 것을 아파 보니 알겠네요.”

20 SUNDAY MAGAZINE

COLUMN

컬처# : 브랜드의 가치

내가 가진 것들이 나를 설명하는 시대 우린 뭘 갖고 있나

내가 만약 결혼이나 중매 회사 사장이라면

최근 발간되고 있는 브

남녀 회원들에게 반드시 ‘자신이 아끼는 브

랜드 ‘매거진 B(제이오에이

랜드 리스트’를 적으라고 할 것이다. 브랜드

치)’ 같은 잡지는 단순히 물

는 그 사람에 대한 많은 정보를 줄 수 있다. 수

질적 ‘가치’를 지닌 비즈니스

십 개의 브랜드를 두 사람이 늘어놓은 뒤 교

와 소비의 대상으로서의 브랜

집합이 많을수록 그와 나는 비슷한 패션과

드가 아니라 고유한 아우라를 지

입맛과 취미와 소비 수준을 가지고 있을 확

닌 문화 콘텐트로서 브랜드를 다

률이 높다. 그건 키와 몸무게, 직업과 연봉 같

룬다. ‘브랜드 다큐멘터리 매거진’을 표방하

세계 최고의 브랜드 가치로 젊은이들의 소

은 스펙이 말해줄 수 있는 것을 뛰어넘는다. 는 이 잡지에서는 기존 럭셔리 매거진들과는

비 성향을 자극하는 애플의 아이 시리즈 같

나이키를 신는가 뉴발란스를 신는가, 혹은 셔

다르게 한 권에 하나의 브랜드만 골라 통째로

은 대성공작을 보면서 이처럼 한 시대의 정신

츠 포켓에 중후한 몽블랑이 꽂혀 있는가 아

그 브랜드의 역사와 문화, 애용하는 사람들의

과 고유한 문화를 가지고 있어 ‘그것을 가지

니면 발랄한 라미 만년필의 U자형 클립이 꽂

인터뷰까지 다룬다. 브랜드가 그 속에 담고 있

는 것이 나에 대해 말해 줄 수 있는’ 우리 브

혀 있는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삼각형

는 ‘사람’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것이다.

랜드는 과연 어떤 게 있을까 의문이 든다. 남

이라는 미니벨로 스트라이다를 타는가 완벽

한 브랜드 안에 담겨 있는 철학과 과학, 그

들보다 빠른 기술과 기능만을 강조하며 이성

하게 접히고 주행성까지 갖춘 브롬톤을 타는

브랜드의 제품을 손으로 잡고 쓸 때의 느낌, 에 호소하던 1980년대부터 제품의 디자인과

가, 돌체 앤 가바나의 오버사이즈 선글라스

브랜드의 역사와 문화를 만든 사람의 손길과

그 속에 담는 콘텐트를 자극하는 감성과 문

를 끼는가 아니면 레이밴 에이비에이터를 무

스토리도 흥미롭지만, 더 재미있는 것은 한

화라는 가치를 앞세웠던 애플처럼, 성공한 브

심하게 걸쳤는가.

사람의 가방 안에 어떤 브랜드들이 담겨 있는

랜드는 시대가 미처 충족시키지 못한, 그러나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는 것은 당신의 감

지 알아본 코너들이다. 그 브랜드 제품을 쓰

대중들이 지향해야 하는 한 차원 높은 가치

수성, 문화적 취향, 심지어 당신의 생활철학

는 사람들이 다른 일상 소품들은 어떤 브랜

를 추구해야 한다.

과 그것을 살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을 가졌는

드들로 채워 나가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

성공을 위해선 개인이나 정치인, 중소기업,

가에 대한 미묘한 차이를 담고 있다. 그가 가

낸 것이다. 같은 브랜드는 알 수 없는 사람에

대기업 혹은 국가 이미지 할 것 없이 브랜드

진 각각의 브랜드는 서로 어우러지며 그 사람

대한 공감과 동질감을 자극하며 같은 레벨

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가는 때다. 그

만의 고유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나일론

의 커뮤니티로 나를 편입시킨다. 그러니 브랜

렇다면 싸이의 노래 속에서마저 실체 없는

을 소재로 한 프라다를 즐겨 입는 사람은 화

드는 남들과 다르고 싶은 ‘나’를 보여주기도

허세의 대상으로 조롱받고 있는 ‘강남’의 문

려한 샤넬을 즐겨 입는 사람보다 더 실용적인

하지만 남들과 같아지고 싶은 나를 보여주는

화는 무엇인가? 섹시하고 절도 있는 춤의 걸

삶과 미니멀리즘의 감수성을 중시하고 있다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레이밴 선글라스

그룹 혹은 보이그룹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는

는 점을 말 없이 웅변한다. 결국 이 시대에 브

를 얼굴에 걸치면 그 사람은 ‘이유 없는 반항’ ‘한류’는 또 어떤가? 그저 한두 개의 유행상품

랜드는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그

의 제임스 딘, ‘더티 해리’의 클린트 이스트우 이 아니라 문화 ‘브랜드’로 성장하기 위해선

무엇에 가장 가깝다. 드라마 ‘섹스 앤 더 시

드, 케네디와 오바마 대통령, ‘다크 나이트’의

우리 문화상품에 어떤 가치를 담을 것인가를

티’의 캐리가 “그이는 딱 살아 있는 DKNY야” 브루스 웨인이 만들어낸 수십 년 이미지의

고민해 봐야 한다. 그래야 꾸준히 그걸 가지

라고 말할 때 이보다 더 한 사람의 느낌에 대

역사의 전당에 일원으로 참여하게 되는 자긍

고 싶어하는 사람이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한 적절한 표현이 있을까.

심을 느끼게 되는 식이다.

글 이윤정 대중문화평론가 filmpool@gmail.com SUNDAY MAGAZINE 21

HOUSE

최명철의 집을 생각하다 <8> 파주 ‘도시농부’ 타운하우스

아파트족의 로망 텃밭·정원 딸린 알록달록 층층집

아이들은 마당 있는 집에서 사는 게 좋다. 흙

가 이루어진 2009년에 기획해 2010년 분양

이 있는 풀과 꽃, 나무 그리고 벌레나 새 등 자

이 완료됐다. 도시농부라는 컨셉트로 높은

연과 같이 지내는 동안 많은 것이 아이에게

관심 속에 분양에 성공했고 입주 후 만족도

유익하다. 살아가면서 소중해지는 감수성이

가 높아 본격적인 마을 만들기가 시작됐다.

무럭무럭 자란다. 아이들은 골목 있는 동네에서 노는 게 신

운정신도시 아파트 분양가와 비슷

난다. 만나서 부딪치고 깔깔대고 싸우고 돌

총 5개 단지 250가구로 이루어진 이 마을은

아서서 뛰놀고 남들과 더불어 사는 과정에서

울타리가 없다. 일반적인 개발사업 단지나 신

부쩍 크는 자신을 알게 된다. 타인을 배려하

도시 아파트 단지 같은 경계가 없다. 기존에

며 공감하는 능력을 자연스레 터득하게 된다. 사용되던 마을길을 이용해 골목길이 이어진 아이들은 자기만의 공간을 갖는 게 바람직

다. 따라서 영역 구분이나 단지의 대문이 필

하다. 혼자 놀고 공부하고 혼자서 울음을 삼

요없다. 마을에 들어서면 2, 3층의 올망졸망

킬 수 있는 다락이나 계단 밑, 장롱 속 등 조그

한 집들이 다양한 채색으로 녹색 정원과 어

마한 공간 속에서는 견뎌내야 할 삶의 큰 공

울려 아름다운 풍경으로 다가온다.

간들을 깨닫게 한다. 크면서 꼭 필요한 생각 하는 힘을 키울 수 있다. 경기도 파주 운정신도시에 인접한 ‘도시

불황과 주택경기 침체 우려 속에서도 인 근 운정신도시의 새 아파트 분양가와 비슷한 가격으로 2011년 분양을 성공시켰다. 땅콩집

농부’ 타운하우스 마을은 아이를 가진 30, 처럼 새로운 흐름에 맞춰 수요자 눈높이에서 40대 부부들에게 맞춤형 주거지다. 운정역

세세한 부분까지 준비해 나간 기획력이 돋보

뒤편으로 도보 10분 거리에 있는 이곳은 계

인다. 건축을 전공한 최용덕 대표의 디자인

획된 개발구역이 아니다. 띄엄띄엄 집들이 있던 마을에 신도시 개발과 때맞춰 기반

우선 2, 3단지의 새로운 수직형 주택 구조

시설을 공유할 수 있는 이점 때문에 사업이

는 차별화된 상품으로 가장 인기가 높다. 아

가능해졌다. 처음 1단지 20가구는 운정 신도시 입주 22 SUNDAY MAGAZINE

능력도 한몫한 것 같다.

파트 생활의 단조로움에 대한 대안으로 내 건 ‘평범한 수평보다 개성 있는 수직이 좋다’

HOUSE

단지 내 골목 도시농부 2, 3단지 도시농부 3단지 내부 입주민 전용 레스토랑, 아무거나(A’muguna) 내부. 아무거나 주문해도 다 맛있다는 뜻이다. 스킵 플로어(skip floor)라는 반층형 구조 형식은 좀처럼 우 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구조다. 계단을 중심으로 반층씩 엇갈려 배치된 공간구조는 3층의 건축 형태를 7개의 실내공간과 1층 마당, 옥상 발코니 등 총 9개의 독립적인 공간을 제공한다.

는 슬로건은 실험적이다. 스킵 플로어(skip

규약과 함께 시스템화시킬 예정이다.

를 만들어내는 경제적 커뮤니티까지 새로운

floor)라는 반층형 스타일은 우리나라에서

셋째는 올해부터 문을 연 브런치 바 ‘아무

실험을 준비 중이다. 전통적인 농업 경제에

좀처럼 보기 드문 구조다. 계단을 중심으로

거나(A’muguna)’다. 하루 세 끼 식사를 제

서의 마을 공동체가 도시형 생산자, 즉 ‘도시

반 층씩 엇갈려 배치된 공간구조는 3층의

공하기 위한 식당으로 출발했는데 지금은

농부’의 컨셉트로 진화하는 일종의 주거문

건축 형태 안에 7개의 실내공간과 1층 마당,

주민들의 열렬한 호응 속에 주민센터 기능까

화운동으로도 볼 수 있다.

옥상 발코니 등 총 9개의 독립적인 공간을

지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맞벌이

제공한다. 그 덕분에 재택 근무자나 자기 취

부부에게 절실한 이른 아침 저렴한 아침식

주민 위한 브런치바 ‘아무거나’

미생활이 주된 주민들 입장에서는 독자적

사, 출근 및 등교 뒷바라지를 마친 전업주부

우리나라에서 도시에 사는 사람은 전체 인

인 공간을 활용하는 것에 대한 만족도가 매

들의 브런치 수다방, 돌잔치 집들이 같은 손

구의 90%가 넘었다. 또 아파트 가구수가 전

우 높다. 둘째로는 DO 시스템이다. ‘당신의 수고 로움을 위로한다’. 도시 생활과 아파트 생활 의 편리함에 익숙해진 수요층들을 위해 단

님 행사에 지쳐가던 부부들을 위한 우아한

체 가구수의 절반을 훨씬 넘어섰다. 프랑스

연회 장소 등 다양한 활용은 변두리 전원생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는 그칠 줄 모로는

활에서 누리기 힘든 새로운 해결책이 된다.

아파트 열풍을 보고 한국을 ‘아파트 공화국’

또 2층 북카페에서는 다양한 교육프로그

이라 지칭했다.

독주택이나 전원주택의 단점을 해결하기 위

램들이 재능기부 형태로 진행 중이다. 특히

무엇이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했을까. 최

한 서비스 프로그램이다. Do it, 즉시 실행한

입주민 중 원어민들이 앞장서고 있는 언어교

근의 부동산 경기 침체와 속락하고 있는 아

다는 뜻으로 여덟 가지 프로그램이 있다. ①

육은 참여도가 높아져 점점 활성화되고 있다.

파트 가격 속에서도 용적률과 층수로만 계

폐쇄회로TV(CCTV)를 이용한 24시간 보안

넷째로는 도시농부 프로그램이다. 무료

산되는 주택공급 제도들은 대체 뭘 위한 것

서비스 ② 출퇴근 및 등·하교를 돕는 셔틀버

로 제공되는 가구당 5~6평씩의 텃밭에서는

일까. 우리의 도시생활과 주거환경의 미래는

스 운행 ③ 청소 등 클린 서비스 ④ 세탁수거

전원생활의 즐거움과 유기농 식재료까지 수

어떤 것일까. 저 파주 변두리에서 일고 있는

서비스 ⑤ 유아방 서비스 ⑥ 돌보미 서비스

확해 먹는 기쁨을 준다.

조그마한 나비의 날갯짓이 향후 어떠한 의

⑦ 택배 서비스 ⑧ 녹색 정원 서비스 등이다.

여기에 입주민 자치모임에서 주도하는

아직은 입주가 완료되지 않아 시행사인 ‘도

새로운 커뮤니티 플랜들도 시작됐다. 이

시농부’가 관리사무소 기능을 대신하고 있

른바 창업지원센터 드림 팩토리(Dream

다. 앞으로 250가구가 전부 입주해 비즈니스

Factory)다. ‘따뜻한 삶터’에서 한발 더 나

모델을 만들게 되면 주민 자치모임에서 관리

아가 자체 생산과 창업을 서로 도와 일자리

미나 가치를 창출하게 될지 지켜볼 일이다. 사진 도시농부 타운하우스, ⓒ Choi Soonyoung 최명철씨는 집과 도시를 연구하는 ‘단우 어반랩(Urban Lab)’을 운영 중이며,‘주거환경특론’을 가르치고 있다. 발산지구 MP, 은평 뉴타운 등 도시설계 작업을 했다.

SUNDAY MAGAZINE 23

REVIEW & PREVIEW

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 10~12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별 헤는 밤’ 그건 차라리 피맺힌 절규

옥중 생체실험 윤동주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자행한 생체실험에 희생됐을 것으로 추 정된다. 윤동주는 사촌 송몽규와 함께 체포돼 1945년 2월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사망했다. 의혹은 시신을 인수한 숙부 윤영춘에게 송몽규가 남긴 증언에서 비롯

8월 10~12일 사흘간 예술의전당 오페라극

어를 지킨 시인의 무게를 가늠했다. 물론 우

장은 오랜만에 만석이었다. 근대 가무극 ‘윤

려는 있었다. 총칼 대신 펜을 든 유약한 지식

동주, 달을 쏘다’에 몰린 관객들이었다. 우리

인 캐릭터에 대극장 무대를 사로잡을 카리스

고유의 콘텐트를 개척해 온 서울예술단이 라

마를 부여할 수 있을까? 별다른 사건 없이 허

이선스 뮤지컬에 밀려 시장에서 배제된 ‘근

탈하게 마감된 짧은 인생에 드라마가 있을

대 가무극의 부활’을 표방한 첫 시도였다.

까? 윤동주의 정적인 서정시가 대극장 무대

‘근대 가무극’이란 1930~70년대 춤과 노래

위에서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 온갖 편견은

를 기본으로 이야기를 엮어낸 종합 무대예술. 막이 열리자 간단히 사라졌다. ‘전통 양식에 현대적 재창조를 가미한 한국적

무엇보다 음악이 무게중심을 단단히 잡은

공연 양식을 지속적으로 개발해 후대와 소통

덕분이다. 호소력 짙은 멜로디는 관객을 러닝

하겠다’는 주최측의 설명이 개막 전에는 잘

타임 내내 온전히 몰입시켰다. 향수를 자아

와닿지 않았다. 실험적인 도전일까, 과거로의

내는 다소 예스러운 선율과 정박자 리듬의 노

회귀일까? 그 결과물이 사뭇 궁금했다.

래들은 보다 많은 대중의 가슴을 두드렸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를

실물 크기 기차와 전차가 오가는 리얼리즘에

소재로 택한 이 작품은 두 차례 전석 매진을

달과 별이 부서지고 쏟아지는 심벌리즘이 어

포함해 평균 객석 점유율 94%를 기록하며

우러진 무대미학도 시선을 고정시켰다.

기립박수 속에 막을 내렸다. 군가, 창가풍의

윤동주 역을 맡은 배우 박영수의 기름기

일부 넘버와 안무가 시대상을 반영했을 뿐

쏙 뺀 청아한 테너는 시인의 순결한 아우라

중독성 있는 감동적인 음악과 화려한 군무

로 대극장을 채웠다. 엄혹한 시대에 ‘시를 쓴

를 바탕으로 사랑과 우정의 드라마가 펼쳐지

다는 것’에 대한 갈등과 고뇌라는 큰 줄기를

는 전형적인 상업뮤지컬의 문법에 윤동주의

중심으로 네 친구의 우정과 가상의 여인과의

주옥 같은 시들이 시 자체로 어우러지는 세

영적인 교류를 엮어 못다 핀 청춘과 이루지

련된 창작 뮤지컬 한 편이었다.

못한 사랑의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전쟁이

차별적인 것은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었다. 라는 시대의 역동성은 무대에 활기를 더했고, 옥중 생체실험은 비극을 고조시켰다.

됐다. 피골이 상접한 송몽규는 “저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렇

뮤지컬 ‘영웅’의 한아름 작가와 오상준 작곡

게 됐다. 윤동주도 이 주사 때문에…”라고 했고, 20일 뒤 사망했다. 윤영춘은 “50

가가 같은 시대를 다시 조명했지만, 총칼을

여 명의 조선 청년이 주사를 맞기 위해 줄을 서 있는 모습을 봤다”고 증언했다.

들고 앞장선 영웅이 아니라 뒤에서 민족의 언 “진짜 듣고 싶다, 네 시!”라고 외치는 친구들의

24 SUNDAY MAGAZINE

백미는 엔딩이었다. 옥중에서 죽어가며

REVIEW & PREVIEW

2012서울국제발레페스티벌, 8월 23일~9월 1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문의 02-538-0505

국내외 발레인의 큰 잔치

국내외 발레인 및 발레 애호가들이 모두 모이는 축제가 열린다. 유니버설발레단, 인스브 루크발레단, 파리오페라발레단 등 국내외 유명 발레단체 소속으로 활동 중인 무용수들 이 개막공연(23일)을 펼치고, 젊은 발레 스타들은 영스타클래식(24일)에서 실력을 뽐낸 다. 특히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무용수들이 세대와 장르를 아우르는 작 품을 선보이는 Ballet 2050 Project(8월 30일~9월 1일)에서는 두 편의 신작이 준비돼 있다. ‘Circulation for Human Movements’는 현대무용 안무가 정연수가 20~30대 발 레리나·발레리노들과 함께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 내는 무대다. ‘Transparent Moment’ 는 독일에서 활동 중인 안무가 허용순과 40~50대 무용계 인사들이 무용수로 호흡을 맞 춘다. 임혜경(전 유니버설발레단 주역), 김주원(전 국립발레단 주역), 조주현(한국예술종 합학교 교수) 등이 출연한다.

환상에 ‘별 헤는 밤’을 절규하듯 토해내는

글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한국발레협회

윤동주. 아름다운 서정시로만 기억되던 ‘별 헤는 밤’이 저토록 피맺힌 절규로 들려올 때 충격받지 않을 한국인이 얼마나 될까. ‘시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묻는 합창 가

내셔널 지오그래픽展 아름다운 날들의 기록, 8월 11일~10월 11일, 예술의전당, 문의 02-6263-2612

지구의 아름다운 모습들

운데 아름다운 우리말이 거저 지켜진 것이 아님을, 어쩌면 저 아름다운 시와 노래를 영 영 듣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대주제를 새삼 깨달은 순간엔 없던 애국심까지 꿈틀거렸다.

8·15를 전후한 시점에 어설픈 영웅주의가 아 니라 한 개인의 내적인 고뇌를 택해 역사의 아픔을 더 가깝게 끌어당긴 세련된 민족주의 의 표현이었다. 디테일에서는 의문도 남았다. 친일 문인과 친일파를 구분하는 듯한 대사는 어리둥절했 고, 일본보다 내부의 적이 문제라고 말하는

2010년 30만 명이 넘는 관객이 찾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전시가 다시 찾아왔다. “지구는

대목 등은 윤동주에 대한 시각을 불필요하

인간의 소유물이 아닌 모든 생명과 공존해야 하는 존재”라는 메시지로, 쉽게 접할 수 없

게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오케스트라의 라이

었던 자연의 모습을 사진으로 공개한다. ‘활기찬 새들, 곤충들’ ‘생명력 넘치는 길짐승들’

브 없이 녹음 반주로 대체한 것도 아쉬웠다. 내년 하반기 앙코르될 예정이라니, 역사인 식에 대한 민감한 부분들을 다듬는다면 인

‘열정 가득한 수중생물들’ ‘마음을 흔들어 놓는 풍경들’ ‘자연의 일부였던 사람들’로 테 마를 잡은 5개의 전시관에선 자연과 환경, 생명의 경이를 담은 사진 작품을 볼 수 있다. 특 별관에선 내셔널 지오그래픽 대표 작가들이 등장하는 촬영 현장의 사진이 전시된다.

간 윤동주가 더 또렷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

“지구는 우리가 아는 한 유일하게 ‘생물권’을 가진 행성이다. 지표와 대양, 대기권으로 이

다. 이 정도의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콘

루어진 이 얇은 생명의 막이 우리에게 유일한 삶의 터전이다. 생명체의 생존에 필요한 환

텐트 개발이 지속된다면 서울예술단의 근대

경을 유지시킬 수 있는 곳은 우주에서 지구뿐이다.” 2010년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O 윌

가무극 프로젝트는 우리 공연계에 분명 고무

슨 교수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썼던 글의 무게를 되새겨 볼 수 있는 전시다.

적인 행보가 될 것 같다.

글 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 ⓒ Ian Nichols/National Geographic

글 유주현 객원기자, 사진 서울예술단 SUNDAY MAGAZINE 25

BOOK

E. L. 제임스의『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양지로 나온 로맨틱 포르노 엄마용 ‘야설’?

전 세계를 강타한 ‘그레이’ 열풍이 국내에도

니즘 시대의 바이블”(워싱턴포스트)이라는

을 과시하는 ‘성적 정복담’보다는 성적 결합

상륙했다.『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출

평이 나온 배경이다. ‘바이블’이란 표현은 과

을 통한 교감에 방점을 찍었다. 남성의 쾌락

간 3개월 만에 미국·영국·이탈리아·독일 등

하지만, 시대적 징후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못지않게 여성이 리드하는 성적 쾌감도 강조

에서 3000만 부(1000만 부는 전자책)가 넘

말하자면 이 현상은 성적 욕망의 주체라기

한다. 포르노물의 오랜 공식인 지배와 굴종,

게 팔린 책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를 꺾고

보다는 소비 대상이 돼 왔던 여성들이 남성들

가학과 피학 구도에도 ‘사전계약서’를 통해

최단기간 최다 판매 기록을 세웠다. 아마존

이 ‘야동’을 보는 것처럼 포르노그래피를 적

쌍방이 ‘합의’하는 과정을 집어넣었다.

에서 전자책 사상 최초로 100만 부도 돌파했

극적으로 소비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일

사실 이 소설의 치명적 문제는 “그래서 과

다. “로맨스 소설 시장은 물론 출판의 근본을

종의 ‘사건’이다. 여성 그것도 엄마들이, 음지

연 3000만 부가 팔려나갈 만큼 재미있고 수준

뒤흔들었다”(데일리 메일)는 평도 나왔다.

아닌 양지에서 노골적 성애물을 읽고 그것을

있는 에로티즘을 담고 있는가”다. 성적 묘사의

수퍼 베스트셀러 위치에 앉혔으니 말이다.

수위는 꽤나 높지만 그를 공감하게 만드는 인

국내에서도 출간 즉시 전자책 판매 1~3위

저자: E. L. 제임스 역자: 박은서 출판사: 시공사 가격: 각권 1만2000원 26 SUNDAY MAGAZINE

를 휩쓸었다(인터파크). 국내에는 총 6권 중 1

사실 그간 여성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여성

물의 입체적 구축이나 극적 전개의 긴장감이

부에 해당하는 1, 2권이 나왔다. 입소문·호기

용 성애물은 인터넷 등 달라진 매체환경을 기

떨어져 솔직히 1권을 끝까지 읽어내기가 힘들

심 효과가 일단 먹힌 셈이다. 인터파크에 따르

반으로 은밀하게 성장해 왔다. 미소년을 성적

정도였다. 단순하고 유치한 인물과 사건 전개

면 “구매자의 82%가 여성으로 중·장년 독자

대상화하는 꽃미남 판타지, 팬들이 아이돌들

때문에 헛웃음이 터질 때도 많았다. 섹스를 통

가 많은 서구와 달리 20, 30대 반응도 뜨겁다” 을 주인공으로 쓰는 각종 ‘팬픽’ ‘야설(야한

해 인간 본성을 통찰하는 문학적 깊이를 찾기

고 한다.

힘든 것은 물론이고, 인물과 극적 구성 면에서

소설)’이라고 불리는 인터넷 소설 등이 강한

이 책은 하이틴 로맨스의 성인·에로 버전

수위와 함께 일종의 하위문화로 존재해 왔다.

인 할리퀸 로맨스에서도 한참을 더 나아가,

‘그레이’의 작가 E. L. 제임스(사진) 역시 올해

섹스 백과사전쯤 되는 로맨틱 포르노다. 섹스

나이 49세의 중년 여성으로, 성적 코드가 강

어쨌든 ‘그레이’의 인기 돌풍은 남성 중심

는 물론 변변한 연애 경험도 없는 평범한 21

한 ‘꽃미남 뱀파이어물’인 『트와일라잇』의

성문화의 오랜 전통 속에서 달라진 성 권력의

도 함량 미달이니, 여성 성애물의 ‘커밍아웃’ 이상의 의미는 찾기 힘들다고나 할까?

세 여대생이 27세 초절정 꽃미남 억만장자의

인터넷판(팬픽) 작가 출신이고, 이번 소설도

현주소를 보여준다. ‘야동’을 보는 남편들이

‘간택’을 받아 각종 기구가 범람하는 SM(사

인터넷에서 쓰기 시작했다는 점을 눈여겨볼

야 쉽게 상상이 가지만, ‘야설’을 읽는 아내란

도마조히즘) 등 수위 높은 변태적 성애를 체

필요가 있다. ‘그레이’가 전자책부터 출간돼

쉽게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금

험한다는 내용이다. 비현실적 로맨틱·섹스

전자책 판매 최고 기록을 세운 것처럼, 여성

말하지만 돈 주고 사서 읽기에는 아깝다. 이

판타지를 극한으로 밀어붙였다. ‘엄마들의

들이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성애물을 구

런 얄팍한 성애물에 열광하는 유럽 중년 여

포르노’라는 수식어 그대로 여성을 주 대상

입할 수 있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도 주효했다.

성들의 내면도 뭔가 공허해 보이고 말이다.

으로 하는 여성용 성애물이다. “출판을 넘어

성적 순진녀와 섹스 머신의 결합이지만, 여

문화·사회 전반에 붐을 일으킨 포스트 페미

러 여성을 잇따라 ‘정복’함으로서 성적 능력

글 양성희 기자 shyang@joongang.co.kr 사진 시공사

GUIDE

금주의 문화행사 책

영화

행사

클래식

내 안의 낯선 나 저자: 티머시 윌슨 역자: 정명진 출판사: 부글북스 가격: 1만5000원

최근 심리학계에서는 ‘자기지식(self-

링컨: 뱀파이어 헌터

갤러리 두의 토크갤러리

장한나의 앱솔루트 클래식 Ⅳ-콘서트2

감독: 티무르 베크맘베토프

기간: 9월 3일~12월 6일

일시: 8월 25일 오후 5시

knowledge)’에 관한 연구가 폭발적으로

배우: 벤저민 워커 등

장소: 서울 청담동 갤러리 두

장소: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

늘고 있다. 사람들에겐 저마다 막강한 무

등급: 청소년관람불가

문의: 02-3444-3208

문의: 1544-8117

의식이 있다. 생존에 결정적으로 필요한

어린 시절 괴한의 습격에 어머니를 잃은

갤러리 두가 문화강좌를 연다. 한국예술

첼리스트에서 지휘자로 변신한 장한나

것이 바로 이 무의식이며, 무의식은 눈에

링컨(벤저민 워커)은 복수에 나서지만 오

종합학교 영상원 김홍준 교수의 영화 강

(사진)가 첼로 스승인 미샤 마이스키와 협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매우 효율적으로 작

히려 생명을 위협받는다. 헨리(도미닉 쿠

의, 미술평론가 유경희씨의 미술사 강의,

연한다. 장씨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 콘

동하고 있지만 대부분 우리의 접근을 거

퍼)를 만나 목숨을 구한 링컨은 뱀파이어

미술 해설 마스터 윤운중씨의 음악과 미

서트에 마이스키가 첼로 협연자로 출연하

부한다. 어떻게 하면 이 무의식에 숨겨진

의 존재를 알게 되고, 혹독한 훈련 끝에 뱀

술 크로스오버 강의를 엮었다. 1박 2일의

는 것. 리하르트 스트라우스의 ‘돈키호테’

성격적 특성과 감정들을 발견해 낼 수 있

파이어 헌터로 거듭난다. 그리고 뱀파이

국내 워크숍과 9박10일의 해외 워크숍 프

등을 함께 연주할 계획이다. 젊은 음악도

을까? 그 대답을 더듬어 본 책이다.

어 조직의 음모와 맞선다.

로그램이 포함된다.

100여 명도 함께한다.

레드라이트

다산의 숨결로 펼치는 ‘한마음 대잔치’

배틀(오페라 아리아 vs 뮤지컬 넘버)

흥망성쇠의 기로에 놓인 한국은 어떤 길

감독: 로드리고 코르테스

기간: 8월 24일~9월 4일

일시: 8월 22일 오후 8시

을 찾아야 할까? 이 책은 우리가 도약하기

배우: 로버트 드니로, 킬리언 머피 등

장소: 서울 남산국악당 등

장소: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위한 다음 발전 단계를 독일 모델로 제안

등급: 15세 관람가

문의: 02-545-1692

문의: 031-717-8575

한다. 지금 우리의 문제들을 사회시스템

세상의 모든 심령술은 사기극에 불과하다

올해는 근대사상의 토대를 마련한 다산

유엔젤보이스(사진)는 성악 전공 단원, 현

으로 해결한 나라라는 점에서 독일에 주

고 믿는 천재 물리학자 톰 버클리(킬리언

정약용 선생의 탄생 250주년이 되는 해.

직 뮤지컬 배우 등으로 이뤄진 젊은 남성

목한다. 정파와 이념을 떠나 국민과 국익

머피)와 냉철한 심리학자 마거릿 매티슨

그의 발자취를 기리는 행사의 일환으로,

클래식 그룹. ‘지금 이순간’(뮤지컬 ‘지킬

을 우선하는 정치, 입시지옥·등록금·사교

(시고니 위버). 이들은 은퇴 후 30년 만에

유교음악을 집대성한 음악가의 면모를

앤 하이드’), ‘투우사의 노래’(오페라 ‘카

육·학교폭력이 없는 교육, 단단한 중소기

무대로 돌아온 세기의 심령술사 사이먼

살펴볼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다. 24일엔

르멘’) 등 한 번쯤 들어봤을 유명 오페라

업을 기반으로 한 산업경쟁력 등에서 독

실버(로버트 드니로)의 비밀을 파헤치려

‘다산 음악회’가, 25일엔 ‘다산다인상 시

아리아, 잘 알려진 뮤지컬 넘버들을 재연

일의 강건한 국가경영 모델을 제시한다.

고 한다.

넥스트 코리아 저자: 김택환 출판사: 메디치 미디어 가격: 1만8000원

상 및 시연회’ 등이 공연된다.

한다.

THIS WEEK CHART 베스트셀러

자료=교보문고

순위 책명

영화 예매

자료=맥스무비

작가·출판사 순위 영화명

안철수의 생각

안철수·김영사

도둑들

김윤석·김혜수·이정재·전지현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혜민스님·쌤앤파커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토탈리콜

이병률·달

공연 예매

자료=인터파크

주연 순위 공연명 차태현·오지호·민효린

콜린 파렐·케이트 베킨세일

EBS 모여라딩동댕 번개맨의 비밀

안재욱·엄기준·이성민

리시차 로열 앨버트홀 콘서트

Decca

벤다 바이올린 소나타

Glossa

그리그, 브람스 현악사중주

Myrios

새미의 어드벤쳐2

뮤지컬 라카지

스마트한 생각들

김난도·쌤앤파커스 더글러스 케네디·밝은세상 롤프 도벨리·걷는나무

-

정성화·남경주·김다현

스텝업4:레볼루션 라이언구즈만·캐서린맥코믹

애니 뮤지컬 로보카 폴리

라흐마니노프,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DG

연극 옥탑방 고양이

박성훈·장지우·윤정빈

라티노-밀로쉬(기타)

DG

뮤지컬 맨오브라만차

황정민·서범석·홍광호

피셔-디스카우의 예술

DG

연극 쥐덫

윤국로·한덕호·서지유

꿈꾸듯이-가이야르(첼로)

크리스천 베일

아이스 에이지4:대륙 이동설

존 레귀자모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 스튜어트 다이아몬드·8.0

나는 왕이로소이다

빌리와 용감한 녀석들 박성광·정태호·신보라

주지훈·백윤식·변희봉

-

Supraphon

다크 나이트 라이즈

콰이어트

수전 케인·알에이치코리아

Harmonia Mundi

뮤지컬 잭더리퍼

골프도 독학이 된다 빅 픽처

슈만 피아노 사중주 쇼팽: 야상곡-이반 모라베츠

뮤지컬 위키드 오리지널 내한공연

아프니까 청춘이다

-

음반사

인순이·최정원·윤공주

알투비:리턴투베이스 정지훈·유준상·신세경 아이유·이기광

자료=풍월당

뮤지컬 시카고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 칼 팔레머·토네이도

김헌·양문

클래식 음반

출연 순위 음반명

뮤지컬 형제는 용감했다 김도현·김재범·성두섭

미디어 신나라

보케리니 첼로 소나타-나실로 Pan Classics

SUNDAY MAGAZINE 27

SOULSEARCHING

박정태의 고전 속 불멸의 문장과 작가 <18>『호밀밭의 파수꾼』과 J. D. 샐린저

벗기고 싶다, 가식과 허위의 가면

How do you know what you’re going to do till you do it? 실제로 해보기 전에 무엇을 하게 될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은 유명 로펌의 잘나가는 변호사다. 강남

그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광고에는 ‘1888

다. 자연의 역사는 유리 안에서 오염되지 않

의 남부럽지 않은 아파트에 살고 있고, 시골

년 이래로 우리는 건전한 사고방식을 가진 훌

은 채 언제 찾아오더라도 변하지 않은 원래의

에 별장도 한 채 있다. 부인은 상류층 여성답

륭한 젊은이들을 양성해 내고 있습니다’라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순수의

게 우아하고 고상하다. 실은 오늘도 부부가

는 문구가 있는데, 이건 정말 웃기지도 않는

보존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함께 저녁 파티에 다녀왔다. 큰아들은 시나

다고 말한다. “이곳은 다른 학교들과 별반 차

홀든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어주는 순진무

리오를 쓰고 있고, 둘째 아들은 명문 사립학

이도 없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건전한 사고

구한 피비도 시간이 흐르면 어른이 될 것이

교에 다니고 있다. 막내딸은 눈에 넣어도 아

방식을 가진 훌륭한 젊은이들이라고는 없다. 고, 순수를 잃을 것이다. 회전목마를 타는 피

프지 않을 만큼 예쁘다. 당신의 가정은 이처

어쩌면 한두 명쯤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도

비를 바라보며 홀든이 눈물을 흘리는 것도

럼 행복과 평안이 넘쳐흐른다.

이 학교에 들어오기 전부터 훌륭한 학생이었

이 때문이다. 회전목마는 언제나 똑같지만

을 것이다.”

세상은 그렇지가 않다. 순수했던 아이가 어

그런데 다시 한번 들여다보자. 사실 오늘은 휴일인데 당신 보스가 호출해 어쩔 수 없이

변호사가 되는 건 어떠냐는 피비의 물음에

느새 속물 어른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파티에 참석한 것이고, 내일 새벽 비행기를

는 이렇게 답한다. “죄 없는 사람들의 생명을

홀든은 서부로 가는 대신 요양원에 입원

타고 출장을 떠나야 한다. 부인은 우울증이

구해준다거나 하는 일만 할 수 있다면 좋겠지

한다. 그리고 다시 학교로 가면 공부를 열심

심해 극도로 예민하다. 큰아들은 돈과 여자

만 변호사가 되면 그럴 수만은 없거든. 일단

히 할 것인지 묻는 정신과 의사의 질문에 “실

에 빠져 작가의 꿈은 이미 접은 상태다. 둘째

은 돈을 벌어야 하고 몰려다니면서 골프를 치

제로 해보기 전에 무엇을 하게 될지 어떻게

는 엊그제 또 한번 퇴학당해 밤거리를 배회

거나 브리지를 해야 해. 좋은 차를 사거나 마

알 수 있단 말인가?”라고 반문한다.

하고 있지만 당신은 전혀 모르고 있다. 막내

티니를 마시면서 명사인 척하는 그런 짓들을

내가 보기에『호밀밭의 파수꾼』은 헤르

딸은 오늘 작은오빠가 멀리 떠나겠다고 하자

해야 하는 거야. 그러다 보면 정말 사람의 목

만 헤세의『데미안』같은 성장소설이 아니

숨을 구해주고 싶어서 그런 일을 한 건지, 아

다. 홀든은 아름다운 청춘의 아이가 아니라

언뜻 보면 평화롭고 행복한 가정 같지만

니면 굉장한 변호사가 되겠다고 그 일을 하

외로운 반항아이자 사색가다. J. D. 샐린저가

실은 이렇게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는 건지 모르게 되는 거야. 말하자면 재판이

1951년에 발표한 이 소설은 ‘진정제를 맞은

다.『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끝나고 법정에서 나올 때 신문기자니 뭐니

시대(Tranquilized Fifties)’ 속에서 허위

자신도 따라가겠다며 부모 몰래 짐을 쌌다.

Rye)』에 나오는 콘필드 변호사 가족이 딱 이

하는 사람들한테 잔뜩 둘러싸여 환호를 받

와 가식의 가면을 쓰고 진실을 외면한 채 살

런 모습인데, 배경은 1950년대 미국 뉴욕, 큰

는 삼류영화의 주인공처럼 되는 거지.”

아가는 모든 미국인을 고발한 작품이다.

J. D. 샐린저 (Jerome David Salinger, 1919~2010)

뉴욕에서 태어나 컬럼비 아대에서 창작수업을 받 았으며, 1965년 이후 은 둔 생활을 했다. 영화 ‘파 인딩 포레스터’의 모델로 도 알려졌다.

그러면서 홀든은 자신의 꿈을 이야기한다.

1950년대 미국 경제는 눈부시게 발전했

비다. 소설은 열여섯 살 난 주인공 홀든이 영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

고, 핵폭탄은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거대한

어를 제외한 모든 과목에서 낙제한 뒤 크리

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

부와 풍요 속에서 매카시 열풍이 아무리 거

스마스 휴가 직전 학교에서 네 번째로 퇴학당

들만 수천 명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세게 불어도 침묵하기만 하면 안전했다. 이

하고 사흘간 뉴욕에서 지낸 이야기다.

나밖에 없는 거야.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

시기는 그래서 ‘순응의 시대(The Age of

홀든은 자신의 가족관계나 성장 과정 같

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Conformity)’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내면

박정태씨는 고려대 경제

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야기들은 하고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 주는 거야. 말하자

에서는 무언가가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샐린

학과를 나와 서울경제신

싶지 않다”고 시작한다. 그러면서 가짜가 판

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는 거지.”

저는 홀든의 입을 빌려 그것을 말하고 싶었

문, 한국일보 기자를 지냈

아들은 D. B, 둘째 아들은 홀든, 막내딸은 피

치는 이 세상의 허위와 가식을 한 꺼풀씩 벗 겨낸다.

28 SUNDAY MAGAZINE

홀든은 자연사박물관을 좋아하는데, “그 곳에서는 모든 것이 그대로 보존되기 때문”이

던 것이다. 우리 모두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될 수는 없느냐고.

다. 출판사 굿모닝북스 대 표이며 북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

GALLERY

이슬람 문화 천년의 진수 현대 디자이너의 태두로 꼽히는 오언 존스(1808~74)가 영국 빅토리아 시 대인 1856년 펴낸『세계 문양의 역 사』는 여전히 디자인 분야의 고전으 로 꼽힌다. 존스는 알람브라 궁전에 장시간 머물며 이슬람 천년 문화의 가 치를 깨달았다. 이번 전시는 세계 최 대 장식미술 박물관인 런던 빅토리아 & 앨버트 뮤지엄 소장품을 통해 존 스가 여행하면서 느낀 중동 문화의 진수를 펼쳐보이는 자리다.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받아 당시로선 획기적인 인테리어로 치장한 1851년 의 만국박람회와 이슬람 예술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세계를 발전시킨 유 럽 작가들의 작품 100여 점을 만나볼 수 있다.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고양문화재단

‘오언 존스와 알람브라영국 빅토리아 & 앨버트 박물관 소장품전’ 8월 14일~12월 2일 경기도 고양아람누리 아람미술관, 문의 031-960-0112

㎝ ㎝

SUNDAY MAGAZINE 29

CONTE

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장우와 호 라지긴 했으나 둘은 여전히 붙어다녔다. 정말

나, 그리고 몇몇 친구가 장우와 어울렸다. 장

꼭 붙어다니진 않았겠지만 그런 인상이었다. 우는 취했고 중간에 몇 번이나 호를 찾았다.

“장우가 서울에 입성했단다.” 친구 윤열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의 첫 문 장이다. 우리는 서둘러 날짜를 맞추고 점령

장우에게 호는 집 같은 친구다. 결국 윤열이

우가 있었던 것만 같다. 그러고 보면 둘은 대

와 내가 취한 장우를 택시에 태워 호의 자취

학도 같은 대학을 다녔다. 단과대는 서로 달

방에 데려다 주기로 했다. 호가 일러준 곳에

랐지만.

서 내리자 택시비를 들고 호가 기다리고 있었

약속시간이 한 시간 넘도록 오지 않던 장

다. 마치 검도 선수가 인사하듯이 정중하게

우는 우리가 막걸리 두 주전자를 비울 때쯤

기사분에게 인사를 한 후에 호는 땅바닥에

나타났다. 호의 얼굴이 환해졌다. 나는 호와

주저앉은 장우를 업었다. 그렇게 장우를 업는

장우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둘의 사귐 역

호의 행동이 어찌나 자연스럽고 멋진지, 호에

시 ‘관포지교’나 ‘백아절현’ 같은 아름다운

게 업힌 장우는 어찌나 온순한지 나는 호의

우정이 아닐까 생각했다.

자취방이 있는 옥탑방까지 오르는 내내 흐뭇 하게 바라보았다.

군 맞을 채비를 했다. 윤열과 호, 그리고 나는

둘은 서로 달랐다. 성품도, 외모도, 말과 행

강남역 11번 출구 앞에서 먼저 만나 가까운

동도, 술버릇도 거의 정반대였다. 활달하고

오늘도 장우는 취했다. 안주도 잘 먹지 않

막걸리집으로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서로의

거침없고 변화무쌍한 쪽이 장우라면 반듯하

고 막걸리만 마셨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온

안부를 묻지도 않고 장우의 근황에 대해 이

고 모범적이고 변함없는 쪽이 호였다. 장우는

장우는 휘청휘청 걷는다. 호가 장우에게 물

야기했다. 장우는 부산에서 보험회사에 다녔

앉자마자 좌중을 사로잡았다. 장우는 말을

었다. “장우야, 업어줄까?” “미쳤나?” 장우는

다. 노조 일을 했고 밀양의 지점으로 발령받

재미있고 맛깔나게 하는 재주를 가졌다. 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얼른 호의 넓은 등에 업

아 가족과 함께 그곳으로 이사해서 지냈다. 는 이야기도 장우가 하면 새로워지고 지루한

힌다. 장우가 말했다. “호야, 네가 날 업었다고

내용도 장우가 꺼내면 흥미진진해진다. 술집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내가 널 백허그하고 있는 거다. 알기는 그리 알아라.”

그러다 이번에 서울 본사로 온 것이라 한다.

들숨날숨

어느 자리에서나 장우 옆엔 호가, 호 옆엔 장

우리는 막걸리와 해물파전을 주문했다. 장

에서 장우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어느새 다른

우는 갑자기 전무님 면담이 생겨 좀 늦는다

자리의 사람들까지 대화를 멈추고 귀 기울

고 했다. 우리는 모두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여 이야기를 들을 정도다.

반이었다. 장우는 우리 중에서도 호와 더 친

장우는 이야기를 하고 우리는 듣는다. 20

했다. 그냥 친했다고 말하기엔 부족하다. 막

년도 더 전에 그때도 한 번 장우가 서울에 온

역했다. 이른바 ‘절친’이었다. 사는 동네도 같

적이 있었다. 그날 호는 회사 마치고 저녁에

았다.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문과, 이과로 갈

검도 도장에서 운동하느라 빠지고 윤열이와

장우의 엉터리 주장에 호가 “그래, 그래” 하면서 웃는다. 사람이 살아야 비로소 집이 다. 장우는 호라는 집에 사는 사람이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 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아내를 탐하다』 『슈 슈』를 썼다.

“당신의 삶을 헝클어뜨려 보아라, 그래도 괜찮다” ▶“다른 사람들과 호흡을 맞춰 일정하게 노

▶“배우자와 함께 말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

▶“지금 새롭게 행동하는 사람은 인생의 중

를 젓지 않으면 큰 혼란이 일어난다. 다른 사

만으로도 우울증 환자는 어느 정도 도움을

요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시간과 힘, 그 두

람과 보조를 맞추지 않을 경우 아무리 열심

받을 수 있다. 누군가와 단지 함께 있기만 해

가지를 다 갖고 있는 것이다. 풍요로운 성인기

히 노를 저어도 헛된 노력이 되며, 배가 앞으

도 뇌의 스트레스 반응에 제동이 걸릴 수 있

에 가까이 가려면 조금은 ‘당신의 삶을 헝클

로 나아가는 데 심각한 지장을 초래하고 만

기 때문이다. 포옹을 하거나 손을 잡거나 소

어뜨리려는 모험과 노력’, 그리고 ‘기꺼이 그

다. 효과적인 전투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모든

파에 나란히 앉는 등의 다정한 신체 접촉은

모습을 받아들이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

선원이 한 호흡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뇌에 강한 스트레스 억제 신호를 보냄으로써

다. 당신의 삶을 헝클어뜨려 보아라. 그래도

노를 저어 배를 움직일 때 가장 중요한 측정

큰 효과를 발휘한다. 대화를 부정적이지 않은

괜찮다. 무슨 엄청난 사고가 펑! 하고 터지지

지표다.”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걱정 말고 해 보라.”

-데이비드 코드 머리의 책『승자의 편견』중에서 30 SUNDAY MAGAZINE

스티븐 일라디의 책『나는 원래 행복하다』중에서

-제프 존슨·파울라 포먼의 책『나이방랑』중에서

PHOTO ESSAY

조용철 기자의 마음 풍경

초원의 비 초원에 비가 내린다. 둥근 게르 안에 갇혔다. 다듬잇돌 침대 위에 눕는다. 빗방울 소리로 매를 맞는다. 세차게 내 몸을 방망이질한다. 가족과 이웃의 마음에 상처를 준 죄, 교만하고 잘난 척하며 산 죄, 나누며 더불어 사는 척한 죄. 초원이 내 영혼을 깨운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둥근 게르 위에 비가 내린다.

-몽골 테를지에서

조용철 기자의 포토에세이 ‘마음 풍경’은 세상의 모든 생명과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 경이로운 삶의 의지에서 내일의 꿈을 찾고 싶습니다.

SUNDAY MAGAZINE 31